최근 수정 시각 : 2024-04-10 17:33:57

존 탈보트

파일:존 탈보트.jpg [1]
성명 존 탈보트
John Talbot
생몰년도 1387년경 ~ 1453년 7월 17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슈롭셔 블랙미어 성
사망지 가스코뉴 카스티용
아버지 리처드 탈보트
어머니 안카레타 스트레인지
형제 길버트, 리처드
아내 모드 네빌, 마가렛 뷰챔프
자녀 존, 토머스, 캐서린, 크리스토퍼, 조앤, 앤, , 험프리, 엘레노어, 엘리자베스, 헨리( 사생아)
직위 탈보트 남작, 슈루즈버리 백작, 워터퍼드 백작, 아일랜드 보안관 및 청지기, 프랑스 무관장
1. 개요2. 생애
2.1. 아일랜드 보안관2.2. 파테 전투까지의 백년전쟁 경력2.3. 잉글랜드의 아킬레스2.4. 카스티용 전투
3. 사후4.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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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 말기 쇠락해가는 유럽 대륙 내 잉글랜드 영토를 보전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 싸운 인물로, '프랑스인의 공포', '잉글랜드의 아킬레스'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러나 백년전쟁의 마지막 전투로 간주되는 카스티용 전투에서 전사했다.

2. 생애

2.1. 아일랜드 보안관

1387년경 잉글랜드 왕국 슈롭셔 블랙미어 성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제4대 탈보트 남작 리처드 탈보트이고, 어머니는 블랙미어의 제 7대 스트레인지 여남작 안카레타 스트레인지였다. 형으로 길버트가 있었고, 동생으로 더블린 대주교를 역임한 리처드가 있었다. 아버지는 그가 9살이었을 때 사망했고, 어머니는 1401년 퍼니발 남작인 토머스 네빌과 재혼했다. 당시 남성 상속인이 없었던 토머스 네빌은 자기 딸 모드를 존과 결혼시켰고, 1409년 토머스 네빌이 사망한 뒤 퍼니발 남작 칭호를 물려받고 의회에 입성했다.

성년이 되자마자 군사 경력을 시작한 그는 형과 함께 왕위 계승자인 몬머스의 헨리 왕자의 휘하에 들어가 웨일스에서 반란을 일으킨 오와인 글린두르에 맞서 싸웠다. 1409년 형 길버트와 함께 오와인 글린두르로부터 할레치 성을 공략했다. 1413년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한 헨리 5세로부터 아일랜드 보안관에 선임했다. 그러나 그는 웩스포드 카운티의 상속권에 대해 4대 오몬드 백작 제임스 버틀러 및 루틴의 3대 그레이 남작 레지널드 그레이와 분쟁을 벌였으며, 잉글랜드의 지배에 항거하는 아일랜드 주민들을 강압적으로 탄압한 일로 비난받았다.

오몬드 백작과의 분쟁은 존 탈보트와 그의 형제이자 더블린 대주교 리처드 탈보트 측과 오몬드 가문 및 정치적 동맹 관계를 이어가고 있던 버클리 가문 사이의 장기적인 불화로 확대되었다. 이 대립은 1440년대까지 이어졌고, 아일랜드의 거의 모든 고위 관리들이 둘 중 한 편에 섰다. 결국 추밀원은 아일랜드 내에서의 잉글랜드의 지배를 약화시킨 책임을 양자에게 묻고 서로의 입장차를 줄이라고 간청했다. 이후 존 탈보트의 아들이자 상속인인 존이 제임스 버틀러의 딸인 엘리자베스 버틀러와 결혼함으로서, 양자간의 대립은 마침내 해소되었다.

그가 아일랜드 보안관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 형 길버트는 프랑스에서 군인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그러던 1418년 10월 19일, 길버트는 루앙 공방전에 참가했다가 전사했다. 길버트의 외동딸인 안카레타가 탈보트 여남작으로서 직위와 영지를 물려받았지만 1421년 12월 13일에 병사했고, 탈보트 가문의 영지는 제7대 탈보트 남작이 된 그에게 상속되었다. 1420년경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헨리 5세의 신부인 발루아의 카트린의 잉글랜드 왕비 대관식을 축하하는 축제를 조직했으며, 1421년 프랑스로 가서 노르망디 전선에서 여러 소규모 전투에 참전했고, 1424년 8월 17일 베르뇌유 전투에 참전해 용맹을 떨친 뒤 가터 기사단의 기사로 발탁되었다. 1425년 아일랜드에 잠시 돌아와 보안관으로 일하다가 프랑스로 돌아갔다.

2.2. 파테 전투까지의 백년전쟁 경력

1427년 5월, 탈보트는 분견대를 이끌고 라발을 공략해 잉글랜드의 메인 정복을 완수했다. 1428년 5월 25일, 라 이르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르망을 기습했다. 주민들의 호응으로 도시 성문이 열렸지만 성채의 잉글랜드 주둔군은 알랑송에 머무르고 있는 탈보트에게 전령을 보낼 수 있었다. 5월 28일 새벽, 강행군 끝에 르망에 도착한 탈보트는 민가에서 잠을 청하고 있던 프랑스군을 야습했다. 라 이르와 부하들은 갑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채 도시 밖으로 도주했다.

1428년 12월 1일, 탈보트는 오를레앙 공방전을 수행하는 아군을 돕기 위해 오를레앙으로 이동했다. 그 후 1429년 1월에 오를레앙의 서쪽 요새 주변에 울타리와 도랑으로 연결된 일련의 요새를 세우고 오를레앙을 옥죄었다. 그러나 잉글랜드군과 함께 있던 부르고뉴군이 중간에 철수해버린 뒤 포위망이 느슨해져 프랑스 구원군이 오를레앙에 입성하는 걸 막지 못했다. 1429년 5월 4일, 장 드 뒤누아 잔 다르크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1,500명의 장병을 이끌고 잉글랜드군이 쌓은 생루 요새를 공격했다. 탈보트는 적의 공세를 약화시키기 위해 파리 성문을 공격했지만 수비대에게 저지되었다. 그 사이에 생 루 요새는 함락되어 140명의 잉글랜드 병사가 전사하고 40명이 생포되었다.

5월 7일, 프랑스군은 잔 다르크의 독려에 힘입어 잉글랜드군의 핵심 요새인 투렐 요새를 공략했다. 투렐 요새가 함락되면서 오를레앙을 공략할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자, 서퍽 공작과 존 탈보트는 5월 8일에 잔여 병력을 집결시키고 오를레앙 요새 앞에 집결했다. 그 모습을 본 프랑스군도 전투를 준비했고, 일부 사령관들은 아예 성밖으로 나가서 저들을 쓸어버리자고 외쳤다. 하지만 잔은 이 날이 일요일이기 때문에 전투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 출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잉글랜드군은 적이 출격하지 않자 파리로 철수했고, 프랑스군은 추격하지 않았다. 적이 물러나는 것을 본 주민들은 텅 빈 잉글랜드 요새들을 약탈하고 파괴했으며, 성벽 인근에서 추수감사절 미사가 거행되었다.

잉글랜드 사령관인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은 오를레앙에서 철수하면서 오를레앙 주변의 요새들에 군대를 배치시켜 프랑스군의 예상되는 공세를 저지하면서 잉글랜드 겸 프랑스 국왕 헨리 6세의 섭정인 베드퍼드 공작 존의 지원을 기다리기로 했다. 서퍽 백작 본인은 7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오를레앙에서 9마일 떨어진 루아르 강 남쪽 기슭의 쟈흐고(Jargeau)로 이동했고, 존 탈보트와 토머스 스케일스 역시 비슷한 숫자의 병력을 이끌고 각각 멍(Meung), 보장시(Beaugency)에 자리를 잡았다. 이 세 도시는 루아르 강을 가로지르는 요새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중요했다.

이후 장 2세 달랑송을 총사령관으로 내세우고 잔 다르크의 독려하에 출진한 프랑스군이 루아르 원정에서 맹렬한 기세로 몰아붙였다. 멍 요새를 지키고 있던 탈보트는 요새 수비를 철저히 해 적이 공략할 엄두를 못 내게 했다. 이에 장 2세 달랑송은 이곳을 바로 공격하는 대신 보장시를 먼저 치기로 했다. 일부 병력을 멍 다리에 남겨둬서 적을 견제하게 한 뒤, 프랑스군 주력은 보장시로 행진했다. 탈보트는 적이 보장시로 진군하는 것을 보고 잔빌로 달려가서 존 파스톨프를 만나 앞으로의 계획을 논의했다. 파스톨프는 프랑스군의 군세가 강력하니 일단 멍과 보장시에 남아있는 수비대를 철수해서 북쪽에 재집결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탈보트는 방어를 강화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는데 전투 한 번 제대로 벌이지 않고 도주할 수 는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탈보트의 강권에 밀린 파스톨프는 루아르 강으로 진군해 압박을 받는 수비대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6월 16일, 프랑스군은 보장시의 요새화된 다리를 공격했다. 당시 보장시를 지키고 있던 기사 리처드 구스틴(Richard Guestin)과 매튜 고프(Matthew Gough)는 성채에 주력군을 배치하고 다리 쪽 요새에 소규모 맨앳암즈와 장궁병을 배치했다. 프랑스군은 다리 쪽 요새에 맹공을 가한 끝에 공략에 성공했고, 포대가 남쪽 제방에 설치된 뒤 보장시 마을과 성채를 포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프랑스 사령관들은 성채가 강력한 방비를 갖춘 것을 보고 직접적인 공격을 꺼리고 포격을 가함으로써 적이 알아서 항복하기를 희망했다. 6월 17일, 멍 요새에 도착한 파스톨프는 프랑스군이 다리를 장악하고 있고 다리 북쪽 끝에 강력한 요새를 설치한 것을 확인했다. 그는 이곳을 공격했다간 큰 손실을 볼 것을 우려해 탈보트 및 스케일스를 불러들인 후 보장시로 이동하기로 했다.

잉글랜드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프랑스군은 보장시에서 2마일 떨어진 언덕에 전투 대형을 형성하고 이들을 기다렸다. 그러면서 보장시 수비대가 출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리슈몽의 보병과 공성포를 남겨뒀다. 적군이 미리 유리한 지점에 전투 대형을 편성했으며 숫자도 자기들보다 많은 것을 확인한 파스톨프는 멍으로 돌아갔다. 6월 18일 아침, 잉글랜드군은 멍 다리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내려 시도했으나 격퇴되었다. 이에 멍 요새를 지킬 희망이 없다고 여긴 파스톨프는 탈보트를 강력히 설득한 끝에 멍 요새를 포기하는 데 동의하게 했다. 한편, 보장시 수비대는 구원군이 올 기미가 없자 프랑스군에 항복 의사를 전했다. 프랑스 측은 그들이 10일 동안 프랑스군과 교전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무기와 짐을 가지고 노르망디로 돌아가는 것을 허용했다.

파스톨프와 탈보트는 보장시가 이렇게 빨리 항복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잔빌을 향해 철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장 느리게 움직이는 수송 마차와 포병대를 보호햐기 위해 선두에 세웠기 때문에, 5,000 가량의 잉글랜드군의 행군 속도는 매우 느렸다. 파스톨프는 선두에서 수송 부대, 포병 부대, 숙영지 경비병, 소규모 기마병들과 함께 했고, 탈보트, 스케일스는 노르망디와 프랑스 점령지에서 모집한 프랑스 민병대와 함께 중군에 있었다. 후위대에는 잉글랜드 맨앳암즈 및 장궁병들이 배치되었다.

이 사실을 첩보를 통해 접한 장 2세를 비롯한 프랑스 장군들은 섣불리 추격했다가 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 아쟁쿠르 전투, 베르뇌유 전투 같은 참혹한 패배를 겪을 것을 우려해 추격하기를 주저했다. 이때 잔 다르크가 그들을 독려했다.
"저들이 그대로 돌아가게 내버려둔다면 랭스로 행차하실 샤를 왕자님의 대관식을 지연시키거나 방해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들과 싸우러 갑시다! 그들이 구름에 걸려 있더라도 우리가 잡을 겁니다. 하느님이 그들을 벌하려고 우리를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은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것을 쓸 때입니다!"

프랑스 수뇌부는 그녀의 뜻에 따르기로 하고, 북쪽으로 후퇴하는 잉글랜드군을 추격했다. 라 이르가 이끄는 1,500명의 기마병이 선두에서 질주하는 동안, 장 2세, 잔, 리슈몽 등이 이끄는 프랑스 본대가 뒤따라갔다. 한편, 맹렬한 여름 더위에 시달리며 느릿느릿 행진하던 잉글랜드군은 6월 18일에 파테 마을에서 남동쪽으로 2마일 떨어진 블루아-파리 도로와 오를레앙-샤르트르 도로의 교차점에 이르렀다. 이때 정찰병들이 적 기병대가 근처에 이르렀다는 첩보를 전했다. 파스톨프는 탈보트, 스케일스와 함께 전쟁 회의를 열어 어찌 대응할 지 논의한 끝에 적군의 추격을 따돌릴 가망이 없으니 전투 대형을 편성한 뒤 적을 격퇴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에게는 불행하게도 그들이 전투 대형을 갖춘 곳의 지형은 작은 숲 몇 곳이 산개할 뿐 드넓은 들판이 펼쳐지는 등 매우 평탄해서 방어상의 이점을 거의 가져다주지 못했다. 파스톨프는 대포와 짐을 블루아-파리 도로 서쪽의 조그마한 언덕인 라가렌에 올려놓게 하고, 탈보트에게 500명의 장궁병들을 데리고 울타리가 앞에 쳐져 있는 숲에 배치하라고 지시했다. 이들은 프랑스 기병대에게 기습 사격을 가해 상당한 손실을 입힌 뒤 즉시 물러나서 본대에 합류할 예정이었다.

탈보트의 궁수들은 오후 1시 30분까지 두 그룹으로 나뉘어 교차로 바로 남쪽의 블루아-파리 도로 맞은편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장궁병들이 기병들의 돌격을 저지할 말뚝을 충분히 박지 못했다. 장궁병들이 숲속에 자리를 잡은 직후, 프랑스 기병대가 탈보트의 장궁병들에게서 반 마일 떨어진 생페라비에 도착했다. 이때 큰 사슴 한 마리가 기병들의 접근에 놀라 숲에서 뛰쳐나와 장궁병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궁수들은 갑작스러운 사슴의 돌진에 당황해 비명을 지르며 자리를 피했다. 프랑스 기병들은 그 비명을 듣고 적이 숨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들은 즉시 라 이르에게 잉글랜드군을 발견했고 적이 전투 대형을 결성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라 이르는 적이 충분한 대비를 하지 못한 것을 확인하고 즉시 돌격하라고 명령했다.

오후 2시, 프랑스 기병들은 말의 옆구리를 걷어차며 적 궁수병들을 향해 돌진했다. 그들은 엉성하게나마 전방에 서 있는 말뚝을 회피해 장궁병의 측면을 강타했고, 뒤이어 장궁병들을 에워싸서 섬멸했다. 얼마 안남은 장궁병들이 가까스로 그들을 피해 본대로 도주했다. 장궁병들이 형편없이 깨져서 달아나는 모습을 본 병사들은 패닉에 빠졌다. 특히 잉글랜드군이 최근에 노르망디와 프랑스 점령지에서 징집한 민병대가 도주하기 시작했다. 파스톨프가 병사들을 진정시키려고 애쓰고 있을 때, 라 이르의 프랑스 기병대가 적 본대를 향해 돌진해 적 대열을 돌파하고 적병들을 마구 베었다. 한 시간 남짓 지속된 전투 끝에, 잉글랜드군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고 도주했고, 프랑스 기병들은 그런 적을 추격해 무참히 학살했다.

한편 탈보트는 울타리 뒤에서 체포되어 파테 마을에 있는 집으로 이송되었고, 토머스 스케일스 역시 생포되었다. 존 파스톨프는 가까스로 전장을 빠져나와 파리로 쓸쓸히 돌아갔다.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섭정인 베드퍼드 공작 존은 파테 전투 소식을 듣고 진노해 파스톨프의 기사 작위의 상징인 가터 훈장을 제거했다. 이후 4년간 옥고를 치르던 그는 1433년 프랑스군 사령관이었다가 잉글랜드군에 체포된 장 포통 드 생트라유와 교환하는 대가로 석방되어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그는 파스톨프가 제 역할을 제대로 못해서 파테에서 심각한 패배를 당했다며 파스톨프를 오랫동안 적대시했다.

2.3. 잉글랜드의 아킬레스

1433년 7월 프랑스로 돌아와서 서머셋 백작 존 보퍼트 휘하에 배속된 그는 여러 전투에서 용맹을 떨쳤고, 그 공을 인정받아 1434년 클레르몽 백작에 선임되었다. 1434년 5월 말, 탈보트는 분견대를 이끌고 크레이를 포위했다. 그해 7월 말에 프랑스 무관장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콩피에뉴에 입성하자, 탈보트는 적군이 크레이를 구하러 올 것임을 직감하고 크레이 포위를 풀고 보베를 공격하는 척하다가 파리로 퇴각했다. 리슈몽은 곧장 북쪽으로 진격해 솜강의 요충지인 앙을 손쉽게 점령했다. 이후 탈보트는 잉글랜드군을 재편성하고 장병들이 공성전을 능숙하게 수행하도록 훈련했으며, 공성 장비를 충실히 갖추고자 노력했다.

1436년 2월 2일, 기사 토머스 키리엘과 토머스 스케일스를 부관으로 삼아 소규모 분견대를 이끌고 루앙 인근에서 라 이르와 장 포통 드 생트라유가 이끄는 프랑스군을 기습 공격해 패주시켰다. 그 해 말엔 프랑스군에게 몇 달 전에 빼앗긴 노르망디 동부의 페이 드 콕스 일대를 회복하기 위해 공세를 벌여 여러 성채와 마을을 공략했다. 1437년 2월 13일 새벽, 탈보트는 극비리에 퐁투아즈 마을로 진군한 뒤 기습 공략한 후, 그곳을 거점으로 삼고 샤를 7세의 손아귀에 넘어간 파리를 위협했다. 하지만 탕카르빌과 페캉 등 꼬 지방의 주요 거점들을 공략하려는 그의 시도는 대부분 실패했다. 이후 르 크로투아에서 솜 강을 도하한 뒤 인근에 집결했던 부르고뉴군을 기습 공격해 패주시켰다.

1439년 12월 22~23일 밤, 탈보트는 퐁투아즈를 되찾기 위해 군대를 모으고 있던 아르튀르 드 리슈몽의 진영을 기습해 6,000 가량의 프랑스군을 패주시켰다. 1440년 5월, 탈보트는 서머셋 백작 존 보퍼트와 함께 프랑스군의 손아귀에 있던 노르망디의 항구 도시 아르플뢰르를 포위했다. 존 보퍼트가 함대를 이끌고 해상에서 봉쇄하는 동안, 그는 1,000명 가량의 병력으로 이중 도랑을 파서 목채를 빼곡히 세운 뒤, 프랑스 구원군의 공세를 격파해 파리로 내쫓았다. 결국 아르플뢰르 수비대는 식량난에 시달린 끝에 7월 7일에 항복했다.

1441년 5월 초, 프랑스군 5,000명이 아르튀르 드 리슈몽의 지휘하에 일드프랑스 전역에서 잉글랜드군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한 공세를 개시했다. 5월 8일 크레일 성채를 포위한 프랑스군은 장 뷔로의 중포 부대의 활약에 힘입어 2주 만에 성벽을 뚫었다. 크레일 사령관 윌리엄 페이토가 5월 24일 수비대를 이끌고 출격했으나 속절없이 패배하고 다음날 노르망디로의 안전한 이동을 보장받는 대가로 항복했다. 이제 프랑스군은 일드프랑스의 유일한 잉글랜드 거점이 된 퐁투아즈로 시선을 돌렸다. 이곳은 파리를 관통하는 센강의 경로를 통제했기 때문에, 파리의 물자 수송을 보장하려면 반드시 공략해야 했다.

6월 6일, 프랑스군이 퐁투아즈를 포위했다. 샤를은 모뷔송 수도원에 본부를 세웠고, 도팽 루이는 생마르랭 수도원에 자리잡았다. 장 뷔로의 포병대는 언덕에 자리를 잡은 뒤 퐁투아즈 성채를 포격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프랑스에 주둔한 잉글랜드군의 근거지인 루앙에서 퐁투아즈로의 보급품 수송을 저지하기 위해 센강에 루비에 요새를 세웠다. 그러나 존 드 클린턴이 지휘하는 퐁투아즈 수비대와 시민들이 요새를 철저히 경비하고 무너지려는 성벽을 재빨리 수리하는 터라 쉽사리 뚫리지 않았다.

6월 중순, 탈보트가 이끄는 구원군이 인근에 도착했다. 그들은 야밤을 틈타 루비에 요새 수비대의 감시를 뿌리치고 퐁투아즈에 보급품과 대포를 전달했다. 이후 탈보트는 6월 16일부터 9월 5일까지 다섯 차례 프랑스군의 포위망을 돌파해 퐁투아즈 시의 상류 수문을 통해 군대와 식량을 전달했다. 그의 군대가 워낙 신속하게 이동하고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했기에, 프랑스군은 이들을 제때에 저지하지 못했다. 이에 샤를 7세는 리슈몽에게 탈보트의 군대를 섣불리 공격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7월, 요크 공작 리처드 드 플랜태저넷이 이끄는 맨앳암즈 900명과 장궁병 2,700명이 아르플뢰르에 이르렀다. 그는 첩자들을 통해 적진을 살펴본 뒤, 도팽 루이가 맡고 있는 전방의 적 진영을 공격하기보다는 우아즈 강을 도하해 샤를 7세의 진영을 공격하는 게 현명하다고 판단하고, 즉시 작전을 개시했다. 샤를 7세는 적의 접근에 놀랐지만 즉시 요격하자는 부하들의 진언을 거부하고 푸아시로 물러났다. 탈보트가 철수하는 샤를 7세의 군대를 뒤쫓아가며 여러 차례 전투를 신청했지만, 샤를 7세는 끝까지 무시했다.

이후 요크 공작은 우아즈 강을 여러 번 건너서 파리에서 포위군의 공급을 방해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프랑스군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신들을 무찌르러 출격하도록 유도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일절 대응하지 않았고, 그러는 사이에 보급품이 부족해지자 8월 중순에 노르망디로 철수했다. 요크 공작이 물러나자, 샤를 7세는 재차 군대를 이끌고 퐁투아즈를 포위한 뒤 포격전을 재개했다. 탈보트는 프랑스군을 도발하고자 주변 농지를 약탈하고 주민들을 학살했으나, 프랑스군은 식량을 수급하기 위해 흩어진 적병들을 습격할 뿐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고 오로지 퐁투아즈만 공격했다.

9월 15일, 피카르디 하급 귀족이었던 로베르 드 플로크스가 이끄는 소규모 프랑스군이 노르망디와 일드프랑스의 국경도시인 에브뢰를 급습해 함락시켰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군의 시선이 분산되었고, 퐁투아즈에 대한 지원은 갈수록 약해졌다. 9월 16일, 프랑스군 분견대가 성벽을 뚫고 진격해 요새화된 성당을 점령하고 잉글랜드 수비병 30명 중 24명을 사살했다. 9월 19일, 프랑스군이 총공격을 가했다. 퐁투아즈 성채는 수많은 중포의 공격으로 인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그럼에도 수비대가 사력을 다해 저항했기에, 포위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샤를 7세는 최전선에 서서 부하들을 끊임없이 격려했고, 장병들은 그런 왕의 모습에 용기를 얻어 이를 악물고 돌격했다.

결국 성벽이 돌파되었고, 프랑스군이 성안으로 난입하여 적병 400~500명을 사살하고 수비대 사령관 존 드 클린턴을 포함한 수백 명을 사로잡았다. 탈보트는 일이 글렀다는 것을 깨닫고 일드프랑스에 잔존한 잉글랜드 병사들을 수습한 뒤 루앙으로 철수했다. 샤를 7세는 항복이 아닌 무력으로 점령된 퐁투아즈 시의 모든 재산을 압수했고, 몸값을 지불한 존 드 클린턴과 장교 대부분을 석방했지만, 돈을 지불하지 못한 이들을 강에 빠뜨려 익사시켰다. 이리하여 일드프랑스 전역에서 잉글랜드 세력이 일소되었다.

1442년 2월, 탈보트는 노르망디 총독을 맡은 요크 공작을 위한 지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그해 3월, 헨리 6세의 승인을 얻어낸 뒤 선박을 징발했으며, 본인이 런던 항구와 샌드위치 항에서 선박 조립을 담당했다. 그해 5월 20일, 헨리 6세는 탈보트가 그동안 세운 공적에 보잡하고자 슈루즈베리 백작에 선임했다. 닷새 후 지원군과 함께 프랑스로 돌아온 탈보트는 6월에 아르플뢰르에 4,000 병력을 집결했다. 이후 6월에 노르망디 남동부로 공세를 시작했다. 그는 지난해 프랑스군에게 항복한 에브뢰를 기습 공략하려 했지만, 장 드 뒤누아가 이끄는 프랑스군에게 저지되자 일단 물러났다. 그 후 상황을 살펴보던 그는 1435년 프랑스 기사 샤를 데스마레가 이끄는 프랑스군에 넘어간 노르망디의 주요 항구 도시인 디에프 탈환에 힘을 기울이기로 마음먹었다.

1442년 11월 2일, 탈보트는 디에프를 포위했다.( 디에프 공방전) 이후 디에프의 지형을 살펴보다가 디에프의 교외 지역인 폴레트 언덕에 목조 요새를 건설하기로 했다. 이곳은 동쪽에서 디에프 시를 내려다볼 수 있고 썰물 때 디에프와 연결되기 때문에, 디에프 수비대와 시민들을 압박하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탈보트는 플레트 언덕에 포대를 설치한 뒤 도시를 향해 포격을 가했다. 특히 도시의 민간 건물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게 해, 시민들이 공포에 굴복해 수비대를 압박하여 항복하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한달이 지나도록 포격을 퍼부었는데도 수비대장 샤를 데스마레와 수비대는 굴복하지 않았고, 장 드 뒤누아가 이끄는 프랑스군 300명이 구원 요청을 받고 달려와서 11월 29일 디에프에 입성했다. 탈보트는 탄약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잉글랜드로 돌아가서 추가 병력과 탄약을 구하기로 하고, 윌리엄 페이토에게 자신이 없는 동안 잉글랜드군을 이끌게 했다. 그러나 권력 분쟁에 집착하는 권력자들은 탈보트의 간절한 설득을 귀담아듣지 않았고, 지원군은 끝내 파견되지 않았다.

잉글랜드군은 이런 상황에서도 도시를 계속 포격했고, 썰물 때마다 디에프로 쳐들어가서 적 수비대와 교전했으나 격퇴되었다. 하지만 프랑스 수비대 역시 적의 포위를 뚫지 못했기에, 공방전은 8월까지 이어졌다. 1442년 7월 24일, 도팽 루이가 이끄는 프랑스 구원군 1,600명이 퐁트누아에서 출발해 디에프로 진군했다. 8월 10일 디에프 근교에 도착한 루이는 윌리엄 페이토에게 사절을 보내 항복하면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제안했지만, 페이토는 "죽음을 각오하고 끝까지 방어하겠다"라고 답했다. 루이는 500~600명의 군인을 적 성채 앞 숙영지로 보내 봉쇄하게 했고, 성벽에 내걸 다리와 바퀴가 달린 공성탑 5~6개를 건설했다.

8월 14일 오전 8시, 프랑스군은 나팔 소리에 맞춰 잉글랜드 요새를 공격했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은 압도적인 숫자로 몰아붙이는 적을 상대로 분전했고, 프랑스군 100명이 전사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프랑스군 장병들은 이를 악물고 공세를 이어갔고, 도시 수비대와 시민들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가서 성채를 향해 석궁 화살을 퍼부었다. 결국 성채는 함락되었고, 300명이 전사하고 페이토를 비롯한 나머지는 체포되었다. 루이는 잉글랜드 포로 중 "프랑스어를 하는" 자들을 프랑스인인데 잉글랜드를 위해 싸운 반역자로 간주하고 교수형에 처했다. 잉글랜드군이 세웠던 요새는 루이의 명령으로 철거되었고, 대포는 디에프 무기고로 옮겨졌다. 페이토는 사로잡힌 뒤 3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1445년 3,000에쿠스의 몸값을 지불하고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프랑스 전선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는 유일한 잉글랜드군 장성이었던 탈보트의 디에프 공략 실패는 잉글랜드인들에게 깊은 충격을 안겼다. 여기에 프랑스군이 가스코뉴 전역을 단행해 상당수 영토를 상실하자, 잉글랜드 당국은 더 이상의 전쟁은 무의미하다고 여기고 샤를 7세에게 평화 협약을 맺을 것을 호소했다. 샤를 7세 역시 거듭된 전쟁으로 많은 손실을 입은 군대를 재편성할 시간을 벌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이를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1444년 5월 28일, 양국은 샤를 7세의 조카인 앙주의 마르그리트와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의 결혼, 노르망디 바로 남쪽에 있는 프랑스 북부의 메인 일대를 프랑스에 넘기는 내용의 투르 협약을 체결했다.

1445년, 탈보트는 헨리 6세에 의해 프랑스 무관장에 선임되었다. 이후 1446~1447년에 아일랜드 보안관을 재차 역임했고, 워터퍼드 백작과 아일랜드 고위 청지기에 선임되었다. 1449년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프랑스군에게 포위된 베르뇌유를 구원하기 위해 1,500명의 장병을 이끌고 남하해 7월 31일 베르뇌유 북쪽 10km에 있는 브레퇴유에 도착했다. 이에 장 드 뒤누아가 25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브레퇴유로 향했다. 탈보트는 북쪽으로 후퇴했고, 아르쿠르 남쪽에서 양측 군대가 대치했다. 하지만 탈보트는 야음을 틈타 다시 퇴각했다. 마침 외 백작과 생폴 백작이 지휘하는 또 다른 프랑스군이 루앙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탈보트는 루앙으로 귀환한 뒤 외 백작과 생폴 백작의 기습 공격을 물리쳤다.

1449년 10월 9일, 프랑스군 1만 명이 루앙을 포위했다. 탈보트는 루앙을 지키던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의 휘하에서 이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루앙 주민들이 루앙 시내에서 봉기를 일으켜 성문을 열고 프랑스군을 들여보내는 바람에 루앙이 함락되었고, 에드먼드와 탈보트는 성채에서 농성했다. 10월 23일, 에드먼드 보퍼트는 장 드 뒤누아와 협상한 끝에 꼬드벡, 탕카르빌, 옹플뢰르, 아르크, 몽티비예 등 센강 하구의 요충지를 대부분 양도하고, 주둔군의 몸값으로 5만 살뤼(8300파운드)를 1년 안에 지불하며, 그 동안 탈보트와 헨리 레드퍼드 등 저명한 지휘관 8명을 인질로 보낸다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후 파리로 끌려간 탈보트는 다시는 프랑스 국왕을 상대로 갑옷을 입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샤를 7세는 1년 후 탈보트를 돌려보냈다. 1450년 잭 케이드의 반란을 진압했으며, 1451년 켄트에서 일어난 반란 역시 에드먼드 보퍼트와 함께 잔혹하게 진압한 뒤 수백 명을 교수형에 처했다.

2.4. 카스티용 전투

1451년 6월 30일, 클레르몽 백작 장 2세, 장 드 뒤누아, 그리고 팡티에브르 백작이자 리모주 자작인 자크 1세 드 샤반이 가스코뉴를 맹렬히 공격한 끝에 가스코뉴의 중심지인 보르도를 공략하고 가스코뉴 전역을 평정했다. 그러나 잉글랜드와 수백 년간 우호 관계를 맺었던 보르도를 비롯한 가스코뉴 주민들은 프랑스 국왕의 지배를 호락호락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잉글랜드에 은밀히 사절을 보내 구원을 호소했고, 오랫동안 왕실에 막대한 세금을 안겨줬던 가스코뉴를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던 잉글랜드 정부는 군대를 파견하기로 결의했다.

1452년 10월 17일, 30여 년간 프랑스군과 전쟁을 치른 65세의 노장 탈보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 3,000명이 가스코뉴에 상륙했고, 10월 23일 보르도 시민들이 봉기해 수비대를 몰아내고 탈보트를 환영했다.[2] 당시 타보트는 샤를 7세와 맺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갑옷을 입지 않은 채로 군대를 이끌었다고 한다. 이후 탈보트는 가스코뉴 총독으로 선임되었고, 가론 강을 따라 진격해 11월 4일까지 뤼용, 생마케르, 렁공을 탈환했고, 12월에 저베이스 클린턴이 지휘하는 잉글랜드군 분견대 400여 명이 도르도뉴 강을 따라 진격해 리부른, 생테밀리용, 카스티용을 탈환했다. 1453년 4월 말, 탈보트의 넷째 아들인 리슬 자작 존 탈보트가 지휘하는 지원군 2,400명이 보르도에 도착했다. 탈보트는 지역 주민들에게 특별세를 부과해 군자금을 마련했고, 가스코뉴 민병대를 징발하여 엄격한 훈련을 실시해 다가올 일전을 준비했다.

한편, 탈보트가 가스코뉴를 빼앗았다는 소식을 접한 프랑스 국왕 샤를 7세는 그를 무찌르기 위해 군대를 대대적으로 일으켰다. 샤를은 군대의 전반적인 지휘권을 브르타뉴 공작 피에르 2세에게 맡겼고, 포병대 지휘권을 장 뷔로에게, 기병대 지휘권을 팡티에브르 백작 자크 1세 드 샤반에게 맡겼다. 1453년 봄 공세를 시작한 프랑스군 15,000명은 보르도로 천천히 진군하면서 잉글랜드군이나 가스코뉴군이 점령한 요새를 하나둘씩 공략했다. 탈보트는 이에 맞서 도르도뉴 강의 지류인 이슬 강에 있는 프홍삭 요새를 빠르게 공략했지만, 곧 보르도로 철수했다. 그 해 초여름, 프랑스군은 가스코뉴의 메독에 진을 치고 보르도를 공략할 기회를 노렸다.

6월 21일, 탈보트는 프랑스 사령관들에게 마르티냐에서 한 판 붙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멀리 행군하느라 전투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탈보트가 회전을 통해 전세를 역전시키려는 속셈이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응하지 않았다. 탈보트는 일단 보르도로 돌아간 뒤 적이 자신보다 2배 이상 많은 상황에서 승리를 거두려면 3개 방향에서 밀려오는 적을 보르도로 최대한 끌어들인 뒤 각개 격파하는 것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적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1453년 7월 초, 프랑스 중앙군이 보르도에서 동쪽으로 30마일 떨어진 작은 성벽 도시인 카스티용을 포위했다. 카스티용 주민들은 즉각 보르도에 사절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탈보트는 적이 보르도로 좀더 접근할 때까지 기다리려 했지만, 보르도 시민들이 조속히 카스티용을 구원하라는 압력을 행사했다. 그는 보르도와 카스티용 시민들에게 자신의 전략을 설명했지만, 그들은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았고 보르도 당국 조차 그가 프랑스인을 두려워한다고 비난했다. 결국 탈보트는 그들의 뜻에 따라 카스티용을 구원하기로 했다.

7월 16일 새벽, 잉글랜드군 5,300명과 가스코뉴 민병대 3,000명이 카스티용으로 출발했다. 탈보트는 500명의 맨앳암즈와 800명의 기마 궁수로 구성된 선봉대와 함께 했고, 대포 수 문을 가진 포병과 수송 부대가 후미에서 따라갔다. 도르도뉴 북쪽 베아을 따라 전진하여 해질녘에 리부른에 도착하여 잠시 휴식을 취한 후, 탈보트의 선봉대는 카스티용으로 향하는 숲이 우거진 길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했다. 7월 17일 새벽, 잉글랜드군 선봉대가 카스티용에 도착했다. 탈보트가 지나간 숲 속에는 수백 명 가량의 프랑스 궁수대가 배치된 생 로랑 수도원이 있었지만, 어둠을 틈타 이동한 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탈보트는 이들의 존재를 나중에 확인한 뒤 수도원을 급습하여 아직 자고 있던 프랑스 궁수병들을 단숨에 제압했다. 살아남은 궁수들은 1마일 떨어진 아군 기지로 도주했다.

전초전에서 손쉬운 승리를 거둔 탈보트는 후속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는 부하들이 프랑스인들이 수도원에 쌓아둔 음식을 먹게 했으며, 와인 한 통을 나눠 마시게 했다. 그러는 한편, 프랑스군 위치를 정찰하기 위해 토머스 에버링엄 휘하의 정찰대를 파견했다. 에버링엄은 그날 아침에 돌아와서 적군이 카스티용 동쪽에 설치된 강력한 요새 뒤에 숨어있다고 보고했다. 얼마 후, 한 전령이 탈보트에게 달려와서 많은 마을 주민들이 동쪽에서 큰 먼지구름을 목격했다고 보고했다. 이것은 포대 안의 수행원들이 수도원에서 도망친 궁수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말을 다른 장소로 옮기면서 생긴 것이었지만, 잉글랜드 장교들은 적이 철수하려 한다고 여겼다.

탈보트는 부하들이 식사를 마치기 전에 공격할 지, 아니면 나머지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릴 지 고심했다. 에버링엄은 본대를 기다리자고 진언했지만, 탈보트는 즉시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부하들에게 즉시 출격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면서 사제에게 프랑스군을 완전히 물리친 후에 예배를 드릴 테니 미사를 미루라고 말했다. 탈보트가 이끄는 선봉대는 리두아르 여울목을 통과하여 포대와 도르도뉴 강 사이의 탁 트인 평야로 나아갔다. 이후 말에서 내린 뒤 도보로 이동했지만, 탈보트 본인은 병력 배치를 통제하기 위해 말을 계속 탔다. 일찍이 프랑스군에게 사로잡혔다가 풀려났을 때, 탈보트는 다시는 프랑스 왕에 맞서기 위해 갑옷을 입거나 무기를 들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이 맹세를 지키기 위해 갑옷을 입지 않았고 칼도 차고 다니지 않았다.

얼마 후 프랑스군이 철수하지 않고 제 자리에 있으면서 자신들의 접근을 기다리는 모습을 확인한 탈보트는 깊은 충격에 빠졌다. 에버링엄은 이제라도 본군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진언했지만, 탈보트는 그 사이에 적이 공격하면 곤란해진다고 여기고, 준비가 덜 되었을 적군을 즉시 공격하여 요새를 무너뜨리거나 프랑스군이 퇴각하도록 유도하기로 했다. 그는 병력을 두 개 부대로 나눈 뒤 맨앳암즈들에게 선두에서 진격하게 하고 장궁병들에겐 뒤에서 적진을 향해 화살을 퍼부으라고 지시했다. 그의 군대는 지시에 따라 방벽을 향해 전진하며 "탈보트와 성 조지를 위하여!"라고 외쳤다. 그들은 넓은 도랑을 뛰어넘고 가파른 흙벽을 기어올랐다.

프랑스군은 적이 접근해오자 일제 포격을 가해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은 꿋꿋이 전진했고, 기어이 포대를 보호하는 방벽에 도착한 뒤 다시 한 번 소리를 지으며 기어올라 적병과 교전했다. 에버링엄은 소수의 병사들과 함께 방벽으로 먼저 올라간 뒤 요새 입구에 가장 가까운 성벽에 깃발을 꽂았지만, 적병이 쏜 핸드 캐논을 맞고 즉사했다. 얼마 후 전장에 도착한 탈보트의 본대는 선두 부대가 이미 전투 중인 것을 보고 즉시 요새로 달려들었다. 프랑스 보병대는 그런 그들을 향해 다시 포격을 퍼부어 많은 인명 피해를 입혔다. 일부 연대기에 따르면, 포탄 한 발에 잉글랜드인 5~6명이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탈보트는 멀리서 행군한 병사들이 도착하는 즉시 전장에 계속 투입했다. 그러나 절반에 달하는 4,000명은 전투가 끝날 때까지 합류하지 못했고, 최후방에서 따라오던 그의 포병 역시 도착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리두아르 강 건너편 숲에 주둔하고 있던 브르타뉴 기병 1,000명이 출격해 잉글랜드군의 우측면을 공격했다. 오랜 행군 후 쉬지 못하고 곧바로 힘겨운 전투를 치르느라 지칠대로 지쳤던 잉글랜드군은 적 기병대의 갑작스러운 습격에 꼼짝 없이 무너졌다. 탈보트는 아직 투입되지 않았던 병사들을 끌어모아 기병대를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고 도르도뉴 강을 향해 달아났다.

숙영지 안에 있던 프랑스군은 브르타뉴 기병대가 적을 무너뜨린 것을 확인하자마자 출격해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모조리 사살했다. 탈보트는 이 참혹한 상황을 어떻게든 수습하기 위해 애썼다. 리두아르 강을 건너 서쪽으로 철수하기에는 적이 아군을 남쪽의 도르도뉴 강으로 몰아붙이고 있기 때문에 힘들었다. 이에 도르도뉴 강의 건널목을 필사적으로 찾았고, 탈보트의 아들인 리슬 자작은 건널목을 보호할 후방 경비대를 조직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프랑스 포병대는 적을 향해 인정사정 없이 포격을 가했다.

파일:탈보트의 죽음.jpg
샤를 드 라리비에르(Charles de Lariviere) 작, <탈보트의 죽음>, 1839년.

이때, 포탄 하나가 탈보트가 타고 있던 말을 강타했다. 이로 인해 낙마한 탈보트는 말 아래에 쓰러져서 옴짝달싹 못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부하들이 그를 어렵사리 끌어내어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려 했을 때, 미셸 페루냉(Michel Perunin)이라는 이름의 프랑스 궁수가 탈보트를 발견하고 그 쪽으로 달려갔다. 탈보트의 부하들이 그를 저지하려 했으나 모조리 제압되었고, 페루냉은 말에서 내린 뒤 전투 도끼로 탈보트의 목을 베었다. 동시대의 프랑스 연대기 작가 마티외 데스쿠르시(Mathieu d'Escourcy)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것이 오랜 세월 프랑스의 가장 무시무시한 가시 중 하나였으며, 프랑스인들이 최악의 공포이자 위협으로 여겼던 이 유명하고 명망 높은 인물의 최후였다.

전투는 탈보트가 전사한 후에도 이어졌다. 상당수의 잉글랜드-가스코뉴 병사들이 강에 뛰어들어 건너려다가 익사했다. 탈보트의 아들 리슬 자작은 건널목을 찾아 헤매다가 마침내 찾아냈지만, 곧 프랑스 창기병들의 공격을 받고 전사했다. 소수의 잉글랜드군이 간신히 도하한 뒤 아직까지 행군 중이던 아군에게 달려가 패전 소식을 전했고, 탈보트의 잔여 병력은 즉시 방향을 돌려 보르도로 철수했다. 프랑스군은 그들을 생에밀롱까지 추격했다가 재집결을 위해 멈췄다. 카스티용 시민들은 전투가 끝난 뒤 프랑스군에 항복해 약탈을 모면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보르도 시로 진군해 포위했고, 3,000명의 잉글랜드인과 가스코뉴인 수비대는 3개월을 버티다가 결국 10월 19일에 항복했다. 이리하여 백년전쟁이 종결되었다.

3. 사후

탈보트의 시신은 심하게 손상되었지만 치아를 통해 신원이 확인되었고, 프랑스 장군들은 오래도록 자신들을 괴롭혔지만 나라와 국왕을 위해 오래도록 헌신한 것은 분명했던 이 인물을 슈롭서에 있는 그의 가족에게 보내 매장하도록 했으며, 그가 죽은 자리에 돌 예배당을 세웠다. 이 건물은 300여 년 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파괴될 때까지 존속했다. 그 후 전장 북쪽 교차로에 "1453년 7월 17일 가스코뉴가 잉글랜드의 멍에에서 해방되었다"라는 내용이 새겨진 기념비가 세워졌다. 탈보트의 심장은 슈롭셔의 휘트처치에 있는 세인트 알크먼드 교회에 안장되었다.

가스코뉴 주민들은 백년전쟁을 치른 끝에 프랑스의 영토가 된 후에도 잉글랜드 국왕의 보호를 받으면서 자유롭게 살았던 과거를 오랫동안 그리워했고, 탈보트는 기옌 지방 전승에서 "Lo bon rey Talabot(선한 왕 탈보트)"로 회자되었다. 누벨아키텐의 도르도뉴 지역에 속한 라모뜨-몽뜨하벨 주민들은 19세기까지 매년 7월 17일 밤에 횃불을 든 채 노트르담 드 콜레 예배당까지 행진하면서, 이날 사망한 탈보트를 기리는 행사를 열었다고 전해진다. 1870년대, 프랑스 고고학 협회는 폐허가 된 노트르담 드 콜례 예배당의 잔해를 치우고 탈보트를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웠다. 1888년, 지롱드 애국 연합은 이에 반격하기 위해 카스티용 전투의 승리를 이끈 장 뷔로를 기리는 기념비를 건립했다.

4. 가족

  • 모드 네빌(? ~ 1422): 퍼니발 남작 토머스 네빌의 딸.
    • 존 탈보트(1413 ~ 1460): 제2대 슈루즈버리 백작. 장미 전쟁에서 랭커스터 왕조 편에 서서 재무장관과 체셔의 대법원장을 역임했다. 1460년 7월 10일 노샘프턴 전투에서 승리한 요크군이 왕의 천막 인근에 숨어있던 그를 끌어내 참살했다.
    • 토머스 탈보트(1416): 요절.
    • 캐서린 탈보트(1418 ~ 1500): 기사이자 슈롭셔 보안관인 니콜라스 에이튼의 부인.
    • 크리스토퍼 탈보트(1419 ~ 1443): 기사.
    • 조앤 탈보트(1422 ~ ?): 초대 버클리 남작 제임스 버클리의 부인.
    • 앤 탈보트: 샐퍼드의 기사 존 보트르의 부인.
  • 마가렛 뷰챔프(1404 ~ 1467): 제13대 워릭 백작 리처드 뷰챔프의 딸.
    • 존 탈보트(1426 ~ 1453): 초대 리슬 자작. 1453년 아버지와 함께 카스티용 전투를 치르다 전사했다.
    • 루이스 탈보트(1429 ~ 1458): 기사.
    • 험프리 탈보트(1434 ~ 1492년 이전): 칼레 원수.
    • 엘레노어 탈보트(1436 ~ 1468): 기사 토머스 버틀러의 부인.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4세의 정부.
    • 엘리자베스 탈보트(1442년 12월 또는 1443년 1월 ~ 1506년 11월 6일 또는 1507년 5월 10일): 제4대 노퍽 공작 존 모브레이의 부인.
  • 사생아
    • 헨리 탈보트: 1443년 8월 14일 도팽 루이에게 사로잡혔다고 전해진다.


[1] 헨리 6세 앙주의 마르그리트 부부에게 책을 바치는 존 탈보트 [2] 전승에 따르면, 가스코뉴 주민들은 자신들을 해방시킨 그를 영웅으로 추겨세우며 "탈보트 왕"이라고 연호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