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3 21:25:54

첸쉐썬

<colbgcolor=#992126><colcolor=#fff> 중화인민공화국의 공학자
첸쉐썬
錢學森 | Qián Xuésēn
파일:첸쉐썬 사진.jpg
본명 첸쉐썬 (錢學森, Qián Xuésēn)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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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11년 12월 11일
청나라[1] 상하이 공공 조계[2]
(現 중화인민공화국 상하이시)
사망 2009년 10월 31일[3] (향년 97세)
베이징시 하이뎬구 인민해방군 종합병원
배우자 장잉 (蔣英)[4]
자녀 장남 첸융강 (钱永刚)[5]
장녀 첸용전 (钱永真)[6]
학력 베이징제2실험초등학교 ( 전학)
베이징사범대학제1부속초등학교 ( 졸업)[7]
베이징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 졸업)[8]
상하이교통대학[9] ( 철도공학 / 학사)[10][11]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 항공공학 / 석사)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 항공공학 수학[12] / 박사)[13]
경력 NASA 제트추진연구소 공동설립자
前 미국 육군항공사령부 과학고문단 고문단장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교수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교수
중국과학원 역학연구소 설립자[14]
중화인민공화국 국방부 제5연구소[15] 주석
중국과학기술대학[16] 공동설립자
중국공산당 회원
중국공산당 제 9차 전국대표대회 위원
정치
훈장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유명한 동문상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국가공로 과학자 명예칭호
중화인민공화국 영웅모범장장
중국 항공우주 산업 최고 영예상

1. 개요2. 생애
2.1. 젊은 시절2.2. 1950년 ~ 1955년2.3. 중국 귀국2.4. 중국의 로켓과 핵무기 개발2.5. 대약진운동의 대실패2.6. 은퇴
3. 평가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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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t was the stupidest thing this country ever did. He was no more a Communist than I was, and we forced him to go."
"미국 역사상 가장 어처구니없는 짓거리다. 그(천쉐썬)는 나만큼이나 공산주의자가 아닌 사람이었는데 우리는 그를 몰아내 버렸다."
- 댄 A. 킴볼 미국 해군부 차관. #
중국의 항공우주공학자.

미국에서 로켓 엔진 기술을 연구한 후 중국으로 돌아와 중국의 중국의 핵개발에 기여하고, 둥펑, 실크웜 등의 미사일 개발에 기여하였으며, 창정 1호를 직접 설계하고 중국의 1세대 우주 프로그램을 이끄는 등 중국의 우주 공학을 이끌었던 인물이었다.

냉전시기 미국에서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인 매카시즘의 유행으로, 미국에서 대학 교수로 근무하던 도중 공산주의자로 몰려 교도소에 수감되었으나 풀려났고 이후 중국으로 송환되어 중국의 항공우주공학 개발에 힘썼다.

하지만 미국에서 중국으로 돌아간 뒤 대약진 운동 실패에 한몫했을 뿐 아니라, 권력 지향적인 모습을 보여[17] "학자가 아니라 정치인"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제트추진연구소의 공동 창립자 중 한명이다.

2. 생애

2.1. 젊은 시절

1911년 12월 11일, 청나라[18] 상하이 공공 조계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5대10국의 하나인 오월국의 시조인 태조(太祖) 전류의 후손으로, 항저우의 명문가였다. 이 항주전씨 집안은 중국 로켓 개발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는데, 첸쉐썬 말고도, 첸싼창(1913-1990) 박사, 첸웨이창 (1913-2010) 박사도 비슷한 해외에서 유학을 갔다가 박사를 받고 중국에 돌아와 로켓개발에 종사했고, 각각 로켓 개발의 중요한 역을 담당, 첸쉐썬과 함께 양탄일성의 삼전(三钱)이라고 중국에서 일컬어지고 있다.

첸쉐썬은 유년기는 항저우에서 보냈고, 항저우에 아직도 자택이 남아 있서서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후 중화민국 북양정부의 교육부 관리가 된 아버지를 따라 베이징으로 이주했다.

어릴 적부터 수재로서 두각을 드러내며 2년을 월반했고, 대학입학시험에서 전국 3등을 했다. 1929년 명문 상하이교통대학에 입학하여 철도공학을 수학하고 수석으로 졸업했다. 현재 중국의 명문대 하면 수도 베이징에 있는 베이징대와 칭화대지만,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는 난징이었고, 당연히 난징 근방의 대학의 위상은 현재보다 훨 높았다. 지금도 상하이교통대학은 명문대지만, 당시에는 훨씬 위상이 높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난징대의 전신인 당시 국립 중앙대학이나 난징 인근의 상하이교통대학은 현재 베이징대와 칭화대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서방각국은 의화단 운동 후 청나라로부터 엄청난 배상금을 뜯어갔는데, 미국은 사실 피해자들에게 배상해주고도 배상금이 남았다. 그 돈을 중국 정부에 돌려주기보다는 중국을 위해 사용한다는 명분으로 중국 유학생들의 미국 유학을 돕는 장학재단을 설립하였다. 이를 경자장학회 (영문으로는 Boxers Rebellion Indemnity Foundation)[19]라고 하는데 첸쉐썬은 이 장학재단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칭화대학에서 잠시 연수를 받고, 그 당시 떠오르던 항공공학을 전공하기 위하여 미국에 유학했다. 참고로 1930년대에 이 장학금을 통해 미국으로 유학을 한 중국 이공계 수재들은 이후 중일전쟁, 국공내전 탓에 귀국하기 못하고 미국에서 커리어를 이어가다가 첸쉐썬처럼 상당수는 매카시즘 시대에 귀국하게 되며, 중국 이공계 인재의 1세대가 된다.

이후 MIT에 입학해 항공우주공학 석사학위를 취득했으나, 교수와 충돌을 빚었고, 박사과정은 Caltech으로 진학했다.[20] 중국에서 이론 중심의 교육을 받아온 탓에 실험을 중시하는 MIT와 자신의 성향이 잘 안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이론-수학을 중시하던 Caltech을 선택했다고 한다.[21]

Caltech에서의 지도교수는 당시 미국에서 항공역학의 권위자로 명성을 날리던 헝가리 출신의 유대인 테오도르 폰 카르만(Theodore von Kármán)이었다[22]. 카르만은 대중적으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당시 태동하던 항공공학에 수학적 방법론을 도입한 학자로서, 존 폰 노이만, 유진 위그너, 에드워드 텔러, 레오 실라르드와 마찬가지로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저명한 헝가리-유대계 공학자들 중 한명이었다.

카르만은 첸쉐썬을 무척 총애했다. 첸쉐썬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중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어 중국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첸쉐썬의 지도 교수가 된 이듬해에는 열흘이나 시베리아 대륙횡단 열차를 타고 중국을 직접 방문하기까지 했다. 헝가리 유대인 태생으로 독일에서 근 30년간 연구하다가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왔던 그는 평생 독신이었고 가족이 없는 중년 독신 교수들이 종종 그러하듯 대학원 제자들에게 매우 큰 관심과 집착을 보였다. 물론 카르만의 이러한 큰 애정과 집착은 첸쉐썬에게 엄청난 행운으로 작용했다.

첸쉐썬은 복잡한 계산을 남들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하는 것으로 유명했으며, Caltech에서 복잡한 계산들을 떠맡으며 Caltech의 귀중한 자산이 되었다.

로켓 동아리에 참가해서 실험용 로켓을 제작했는데 이 동아리는 Caltech이 그 중요성을 인정하면서 제트추진연구소(Jet Propulsion Laboratory)라는 정식 연구소로 편입되었고, 훗날 NASA소속으로 되어 있는 제트추진연구소(Jet Propulsion Laboratory)의 전신이 된다.

Caltech에서 3년만에 수학 항공공학 박사학위를 딴 뒤 Jet Propulsion Lab의 초창기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나치 독일의 V2 로켓 미사일이 런던을 공습하는 것을 본 미 국방부는 1944년 12월 육군항공사령부 과학고문단을 창설했고, 첸쉐썬의 지도 교수였던 카르만이 고문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카르만의 추천으로 첸쉐썬은 과학고문단 단원이 되어 중령 대우의 미사일 연구 주임으로 근무했다.

종전이 목전에 다가오자 독일의 과학자를 포섭하라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고, 이에 독일 로켓 기지 조사 및 전문가 심문을 위해 카르만은 첸쉐썬 등을 데리고 독일로 떠났다. 현지에서 V2 생산 공장 등 독일의 우주항공 시설 및 현황을 조사하고 아울러 우주항공공학자들을 심문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이중에는 베르너 폰 브라운과 그의 동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종전 후 미국은 독일에서 가져온 열차 300량 분량의 V2 로켓 부품을 육해공 및 민간 항공기업 등 10여개의 연구소에 뿌리며 이를 재조립 연구하도록 했는데, 이때 카르만은 자기가 관리하고 제자들이 일하던 Caltech 제트추진연구소에도 V2 로켓 부품을 보내 분석할 수 있도록 힘을 썼다. 덕분에 천쉐썬과 그의 동료들은 V2를 Caltech으로 가져와 면밀하게 연구하면서 독일의 로켓 기술을 습득하게 되었다.

그는 우주비행체에 대한 개념을 제시한 사람 중 하나였는데, 이 연구는 X-20 다이너-소어 프로그램을 거쳐 우주왕복선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1947년 9월 상하이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미국으로 돌아와 카르만의 추천으로 MIT 교수로 채용되어 테뉴어(정교수)를 받았다. 하지만 MIT 대학 당국과 충돌을 빚은 후 1949년 다시 Caltech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2.2. 1950년 ~ 1955년

첸쉐썬은 1947년 미국 영주권자가 되었고 1949년 미국 시민권을 신청했으며, 그때까지 중화민국 국적자로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중화민국은 미국의 동맹국이며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국의 일원이었기에, 첸쉐썬은 외국인임에도 아무런 제한 없이 미국의 기밀 연구인 로켓 연구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하고 1949년말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게 되면서 상황이 꼬이기 시작했다.

1950년 5월 첸쉐썬은 중국에 있는 연로한 아버지가 손자를 보고 싶어한다며 Caltech 총장 두드리지에게 무기한 휴가를 요청했다. 첸쉐썬이 중국으로 귀국하려고 Caltech에 무기한 휴가를 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미국 학계에 퍼졌고, 그가 미국의 항공우주 과학기술을 중국으로 빼돌리려 할 것이라는 의혹이 일었다. 때마침 한국 전쟁이 터지면서 미국인들은 공산주의에 대해 크게 경계하게 되었고, 정계에서는 매카시즘이 일게 되었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갔다. 미 정보 당국이 Caltech의 마르크스 레닌주의 조직을 발견했는데, 이 조직의 우두머리인 S 웨인바움이라는 화학자가 첸쉐썬의 추천으로 Caltech 연구소에 들어온 사람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웨인바움은 심문 과정에서 첸쉐썬과 함께 엥겔스의 저작물을 읽고 그에 대해 토론했다고 진술했다. 이에 대해 첸쉐썬은 그 모임은 사교모임에 불과했고, 자신은 공산당에 가입한 적이 없다고 항변했으나, 설상가상으로 미 정보 당국이 입수한 미국 공산당(American Communist Party) 명부에서 첸쉐썬의 이름이 발견되었다. 게다가 1950년 10월 가을 중화인민공화국이 북한을 돕기 위해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미국과 중국은 전쟁 중인 적국이 되었다.

결국 미 당국은 첸쉐썬을 그가 관여되어 있던 군사 기밀 연구에서 제외시켰다. 이 사실을 접한 후 췐쉐썬은 중국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그 직후 두드리지 Caltech 총장의 주선으로 킴벨 해군 참모차장과 면담하게 되었는데, 킴벨은 매우 공손한 태도로 첸쉐썬에게 귀국을 만류했다고 한다. 하지만 첸쉐썬은 자신의 국가기밀취급 인가를 회복시켜주지 않으면 예약되어 있는 중국행 비행기에 탑승하겠다고 말하고 돌아갔다. LA 공항에 간 첸쒜선은 결국 구금되었다. 감옥으로 간 것은 아니었고 쾌적한 저택이었다고는 하나, 첸쉐썬은 자신이 이런 대우를 받는 것에 대해 무척 분개했다고 한다.

이 소식이 퍼지자 중국 정부는 물론이고 중국 과학원, 중국 과학자 동맹 등의 단체들이 잇달아 항의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의 동료 과학자들도 구명 운동에 나섰다. 천쉐썬은 구금된지 14일 후 풀려났지만, 계속 FBI의 감시를 받으며 지내야 했다. 도청, 서신 검열 등도 이루어졌다.[23] LA와 그 근교까지로 이동이 제한되었고, 출국도 금지되었다.

첸쉐썬을 어떻게 대우할지에 대해서 미국 정부 내에서 여러 의견이 엇갈리며 우왕좌왕했다. 첸쉐썬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며, 중공에 협력하지 않는다는 사실만 확실히 한다면 그에 대한 모든 제재를 풀자는 의견도 많았고 실제로 미 당국은 첸쉐썬을 회유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는 중국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여 미 당국자들을 난감하게 했다.

특히 미 해군부 차관 킴볼은 직접 첸쉐썬을 만나서 "당신 공산당 아니잖아요. 시민권 줄테니까 그냥 미국에 말뚝 박으세요, 네?" 했지만 첸쉐썬은 "난 중국인이요. 내가 만든 무기로 우리나라 사람을 죽일 수는 없소."하며 거절했다.

첸쉐썬은 공산주의자도 아니었고[24], 미 당국도 대체로 그가 사상적으로 공산주의에 동조하지는 않는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국에 대한 그의 강한 애정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고, 그가 미국의 안보에 직결되는 기술에 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 큰 문제였다. 때문에 그는 감시의 대상이 되어 출국 금지 및 이동 제한을 받은 상태로 미국에서 5년 동안 지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첸쉐썬은 비록 미국의 군사 기밀에는 더이상 접근이 허가되지 않았지만 Caltech 교수직을 정상적으로 수행하며 군사 기밀을 제외한 분야에서 자신의 연구 활동을 계속했고[25], 1954년 미국의 유명한 대학 교재 출판사인 맥그로힐(McGraw Hill)에서 공학 사이버네틱스(Engineering Cybernetics)라는 대학 전공 교재를 출간하기도 했다.

2.3. 중국 귀국

한국 전쟁이 휴전된 뒤 1954년 4월 제네바에서 열린 19개국 대표자 회의에서 중국은 기자간담회를 자청, 미국 내에 있는 유학생 등 중국인들을 미국이 강제로 억류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들의 중국 송환을 요구했다.

지도 교수였던 카르만은 사과 상자 밑에 첸쉐썬 아버지의 절친인 천수퉁(陳叔統)이 마오쩌둥과 함께 찍은 사진이 실린 중국 잡지 사진을 깔개로 넣어 보냈다. 이 사진을 통해 첸쉐썬은 아버지 친구가 지금 중공에서 높으신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 첸쉐썬은 천수퉁에게 직접 중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편지를 썼다.

결국 지리한 협상 끝에 1955년 8월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은 첸쉐썬을 포함한 중국 과학자들을 미군 포로와 교환하는 합의안을 승인했다. 당시 첸쉐썬과 함께 돌아온 중국인 석박사급 과학자들은 200여 명 정도였다. 미국에서는 과학자들을 적국에 보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비판이 있었지만[26] 미군 포로 한 명의 생명이 훨씬 중요했던 미국 수뇌부는 첸쉐썬을 포함한 과학자들과 포로를 교환하는데 합의했다. 게다가 미국측은 이들 중국인 학자들의 역량을 과소평가하는 실책을 저지르기도 했는데, "첸박사 및 다른 과학자들은 몇년간 최신 연구에 참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가진 지식은 시대에 뒤진 것이고, 돌아가봤자 별 도움이 안될 것이다"라고 평가한 보고서가 많았다.

출국 금지가 해제되자 첸쉐썬은 즉시 Caltech에 종신교수직 사직서를 냈다. 9월 그는 가족과 함께 여객선 SS 프레지던트 클리블랜드호를 타고 LA에서 홍콩으로 출발했다. 첸쉐썬은 출발 전 만난 미국 기자에게 "나는 돌아올 계획이 없습니다. 나는 중국 인민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고 존엄을 지킬 수 있는 국가를 건설하는데 최선을 다해 협조할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떠났다고 한다.[27]

첸쉐썬과 함께 중국으로 돌아간 약 200명의 과학자들은 중국 과학기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밑바탕이 되었고, 수십년 후 미국에 뼈아픈 부메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다만 10여년 후 발생한 문화대혁명 때 이들 중 상당수가 반동분자로 몰려 고초를 겪었고 일부는 홍위병의 박해로 사망하거나 자살하기도 했다. 첸쉐썬 박사는 교묘한 처신으로 피해갔지만.

2.4. 중국의 로켓과 핵무기 개발

소련 스푸트니크를 부러워하던 마오쩌둥 주석이 '우리도 인공위성 쏠 수 있냐'고 하자, 15년에 걸친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투자를 요구했다. 대충 부연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처음 5년은 공교육을 정비하여 기초학문을 가르친다그 다음 5년간 응용학문을 가르친다그 다음 기계 설계와 제작에 들어가서 5년 내로 발사. 단, 돈이고 인민이고 있는 대로 다 퍼부어 주셔야겠고, 이 15년 동안 성과가 있냐고 중간에 물어보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성공할 수 있다.

그는 마오쩌둥의 승낙을 받고 같이 귀국한 과학자들과 함께 프로젝트 착수에 들어갔다. 위에 언급된 미래 과학기술 인력의 양성에도 힘을 썼고, 중소결별 이후 소련의 기술자들이 중국에 기술을 전수해 주다가 그냥 가버리고 남겨진 R-2 로켓을 손 봐서 탄도미사일 둥펑을 제작한다. 또한 핵개발 총괄책임자까지 맡았다. 비록 핵물리학에는 문외한인 그였지만, 국가 단위의 과학기술 발전 프로젝트를 미국에서 체험했던 그의 경험으로 중국은 성공적으로 원자폭탄 개발을 완료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소폭탄도 만들어냈다.

1970년 중국은 마침내 창정 로켓으로 동방홍 인공위성의 발사에 성공했다. 이는 소련, 미국, 프랑스, 일본에 이은 다섯번째 스페이스 클럽 가입이었다. 이렇게 인공위성까지 발사하자 그는 비로소 대외에 존재가 공개되었다. 중국에서는 양탄일성 (兩彈一星)을 쏘아올렸다며 그의 업적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칭송[28]했으며 수많은 젊은 인재들이 그를 따르겠다며 이공계에 투신하여 중국의 발전을 이끌었다.
파일:external/www.2250s.com/XXXI_5.jpg
1982년. 오른쪽이 첸쉐썬 박사. 이렇게 군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 상당히 많다.
첸쉐썬 박사는 공식적으로는 인민해방군 소속 공학자로서 계급이 폐지된 인민해방군에서 부사령원(부사령관)급 대우를 받았으며, 이는 중장 계급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중국정부의 과학자에 대한 파격적인 대우를 알 수 있다.

주로 우주발사체와 탄도 미사일만 개발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핵잠수함과 각종 미사일 개발에도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C-601 실크웜 미사일이 바로 첸쉐썬 박사가 소련제 스틱스 미사일을 레이저 유도로 개량한 대함 미사일이다.

2.5. 대약진운동의 대실패

파일:external/chinadigitaltimes.net/sh20060909a1.Fig019.Low.jpg
마오쩌둥이 열어준 귀국 환영만찬
하지만 대약진 운동에서 자신의 수학적인 계산만으로 생물학, 농학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이 농업 개혁을 추진했다가 엄청난 수의 인민을 굶겨죽이는 흑역사도 있었다. 그러니까 식물은 햇빛+물+비료로 성장하는데 햇빛과 물은 충분하니 비료만 많이 대주면 수확량이 엄청나게 증가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위해서는 모를 빽빽하게 심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바로 '심경밀식' 파종법이다.

문제는 마오쩌둥이 이를 듣고, "MIT-Caltech 교수가 한 말인데 당연히 옳겠지"라고 주장하며 전국적으로 시행했다가 파멸적인 결과를 냈었던 것이다. 시범사업이라도 좀 해보고 하던지.. 이는 당시 마오쩌둥의 비서실장을 하던 리루이(李銳)가 확인해준 것으로서 리루이는 자기 회고록에서 "마오 주석은 한 유명과학자(첸쉐썬을 지칭)의 말을 듣고 이런 엉터리 농법을 전국적으로 추진하도록 지시했다"고 밝혔다. 물론 대약진의 파멸적 원인은 이뿐만은 아니고, 제사해운동이나 토법고로도 한몫했다. 중국 인민들의 불운은 이 세개가 한꺼번에 터졌다는 것이다. 제한적 지역의 시범 사업 없이 졸속 추진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목.

2.6. 은퇴

기계공업부 부부장, 중국 과학협회 부주석, 중국 역학학회 명예회장,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부주석 등을 지낸 후 1991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서방권과의 접촉을 일체 거절하면서도 이따금씩 학계에 오지랖한 목소리를 내며 살았다. 사생활이 알려지는 것을 매우 꺼렸고 언론에 등장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리하여 중국의 다른 대과학자들과는 달리 그의 공식적인 전기는 그의 사후에야 나올 수 있었다.[29] 소탈한 측면도 있는데 자신에게 오는 팬레터에 직접 친필로 답장을 써주기도 했다고 한다.

말년에는 건강이 악화되어 병상에 머물게 되지만, 양리웨이가 탑승한 선저우 5호의 발사를 바라보며 일생의 꿈이 실현됨에 감격했고, 2008년에는 중국 우주개발 역사상 최초의 EVA를 지켜봤다. 그가 병상에 누운 동안에는 수많은 과학계 후배와 제자들은 물론 후진타오 주석과 원자바오 총리 등 공산당의 높으신 분들도 찾아왔고, 그가 2009년 10월 31일 9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날 온 대륙이 울었다. 모교 상하이교통대학에는 추모 물결이 이어졌으며, 공산당에서도 중앙위원회장으로 성대한 장례를 치러줬다. 그의 유해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공신들이 묻힌 바바오산 혁명공묘에 안장되었다.

3. 평가

좋게 보자면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연구와 중국 과학기술 발전의 기틀을 다졌던 뛰어난 공학자지만, 독재 정권에서 살아남기 위해 쏟아낸 짓들을 보면 나쁜 평가도 전혀 틀리지 않았다. 물론 대약진 운동은 일단은 중국인을 위한 시도였다는 점에서 보면 의도는 좋았다. 허나 미국식 교육 받았다는 사람이 공산당의 인권탄압과 독재에도 침묵하고 동조했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다.

현대 중국사의 파란만장한 기간을 큰 어려움 없이 무사하게 지냈으니, 학문적 능력뿐만 아니라 처세술도 발군.[30] 반우파운동, 문화대혁명 등 중국 현대사의 그 험악한 세월에서 미국에서 20년간 머물렀기 때문에 반동분자로 몰릴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으나[31], 단 한번도 수용소나 감옥에 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권력의 양지에서만 머무르는 경이적인(?) 모습을 보였다.[32] 유일하게 위기에 처했을 때가 역시나 그 당시 실세던 4인방을 지지하다가 탄압받던 덩샤오핑이 집권하자 미사일 조직의 실세에서 밀려났던 일이었다. 하지만 몇년 지난 후엔 덩샤오핑이 지지한 천안문 6.4 항쟁 진압을 적극 지지하면서 알랑방구를 끼더니, 90년대 들어 상하이교통대학 후배 장쩌민이 집권하자 다시 위상을 되찾았다.

이 때문에 민주화 운동가들은 그를 "과학자라기보다는 정치인"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정작 그를 미국에서 내쫓아 중국에 도움을 주게 한 것은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이었다.

4. 기타

  • 원래 재능도 있었지만 공부를 엄청나게 열심히 했다고 한다. 칼텍 재학 시절에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유일하게 연구실에 나와 공부하는 학생이었다고 한다.
  • 귀국한 후 베이징에서 호화주택 및 자동자를 배정받고, 마오쩌둥-저우언라이와 똑같은 등급의 특1급 배급을 받았다. 처음에는 말쑥한 양복에 넥타이를 메고 다니는 등 미국식 옷차림을 하고 다녔으나, 반우파투쟁 이후에는 인민복 차림을 하고 다녔다.
  • MIT, 칼텍 교수 시절에 학점이 매우 짜서 F폭격기였다고 한다. 평균 20-30점대가 보통이었다고 한다.
  • 외모는 상당히 온화하게 보이지만 외모와 달리 실제 그의 관리 스타일은 독재자형이었다고 한다.
  • 본인이 유명해지는 것을 매우 꺼렸는지, 본인의 영향력으로 막아서 생전에는 거의 위인전이 나오지 못했다. 언론 접촉도 거의 없었고, 현재 그에 대한 정보는 그가 사망한 후 대부분 나온 것이다.
  • 2008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중국계 미국인 과학자 로저 첸 박사는 그의 5촌 조카로, 중국 이름은 첸융젠(錢永健, 전영건)이다. 로저 첸은 첸쉐썬 박사가 매카시즘으로 코렁탕을 먹던 시절인 1952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뉴저지주에서 고등학교를 나오는 등 그냥 미국인으로 자랐고 미국에서 학문 활동에 매진하며 노벨상까지 탔다. 현재는 UC 샌디에이고에서 교수로 재직 중. 이외에도 첸쉐썬 박사의 일가에는 이름을 날린 과학자들이 여럿 있다.
  • 전통 혹은 유사의학인 기공의학의 연구를 (과학적 방법론에 근거한다는 선에서) 지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파룬궁에 철퇴를 가하는 장쩌민의 결정을 지지했다. 역시 권력자 지향
  • 중국 귀국 후에도 영양제를 꼼꼼히 챙겨먹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으나 거의 100살까지 장수했다.
  • 그가 학창 시절 공산주의에 얼마나 관심이 있었는지는 현재로서는 오리무중이다. 현재 중국의 공식 전기에서는 중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을 때부터 공산주의자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미국에서 열린 재판 기록을 보면 본인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계속 부인했다.
  • 개인적인 인격은 나쁜 편이 아닌데 자신의 이름에는 돈錢이 들어가지만 돈 욕심은 없다는 말을 남겼다. 실제로 중국에 돌아와 일반 연구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더 나은 집으로 이사가자고 아내가 보채면 "지금도 충분히 일반 인민들보다 나은 생활을 하고 있다!"라고 대답했다고. 베이징 소재 호화주택을 배정받고도 1960년대부터 70년대 사이를 내내 수도의 안락한 호화 주택보다 내몽골의 척박한 사막에 머무르며 마오 주석의 명령을 수행해 중국의 미사일 개발을 지휘하고 있는 사람을 그 게거품 물고 반동 잡자며 돌아다니는 홍위병들도 깔 거리를 찾지 못했던 듯하다.
  • 미중 국교 정상화 이후 미국 항공우주학회에서 과학기술 교류를 위해 그를 미국으로 초청했지만 일단 니들한테 사과부터 받아야겠다며 매몰차게 거절했다. Caltech 시절 동료들이 얼굴이나 보자고 일부러 만들어서 초청한 자리조차 싸늘하게 씹었을 정도로[33] 그는 미국에 대한 원한을 평생 간직했다. 하여간 미국은 인종주의적 혐성에 기밀 관리가 심각함을 뼈저리게 느끼는 상황에서도 괜히 내쫓았다가 온갖 손해만 다 봤다.[34]
  • 한국에서 무함마드 깐수 간첩사건으로 유명한 정수일하고 생애가 안티테제이다. 정수일은 원래 사회주의 국가에서 인문학을 전공하였고, 첸쉐썬 박사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공학을 전공하였다. 첸쉐썬 박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는데 매카시즘 피해로 인한 사회주의 국가로 전향하고 미국은 뛰어난 우주 물리 공학자를 중국에 헌납했고, 정수일은 북한의 명령으로 한국에 간첩으로 잠입하다가 들켜서 감옥살이를 하면서 한국으로 전향하여 북한이 아랍 문화와 인문학의 권위자를 헌납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 중국에서는 2012년 전기 영화도 나왔다. 대약진운동 때 과오는 살짝 나온다. 꽤 고퀄리티. # 중국의 초기 미사일의 소품을 잘 나타냈다.


[1] 신해혁명으로 선통제가 퇴위한 시기는 생후 1년 뒤인 1912년이었다. [2] 상하이 조계는 1842년에 맺어진 난징 조약에 의해 개항하기로 한 상하이에서 만들어진 조계지로 1845년 11월부터 1943년 8월까지 약 100년간 상하이의 일부 지역에서 지속된 외국인 통치 특별구다. 처음에는 영국, 미국, 프랑스가 각각 조계지를 만들었고, 나중에 여러 열강의 조계를 정리한 ‘공공 조계’와 프랑스의 ‘프랑스 조계’로 개편되었다. 이 두 개의 조계를 상하이 조계라고 한다. [3] 오전 8시 6분에 사망했다. [4] 1919년에 태어나 독일에서 베를린 음악대학을 졸업한 성악가로, 스위스 루첸 국제음악연례회의에서 동아시아인 최초로 1위를 차지했었다. 이후 상하이로 돌아와 라이시움 극장에서 활동했으며 베이징 국립중앙음악원에서 오페라학과 교수로 활동하다가 2012년에 향년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5] 중국 인민해방군 육군에 입대해 기술자로 일했으며, 국방과기대학에서 컴퓨터공학 학사 학위,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에서 컴퓨터공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상하이교통대학의 겸임 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6] 국방과학기술위원회 요양소에서 근무했으며, 현재는 소아과 의사로 근무하고 있다. [7] 중학교 과정을 월반해 바로 고등학교로 입학했다. [8] 2년을 월반했고, 대학입학시험에서 전국 3등을 했다. [9] 현재 중국의 명문대 하면 수도 베이징에 있는 베이징대와 칭화대지만,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는 난징이었고, 당연히 난징 근방의 대학의 위상은 현재보다 훨 높았다. 지금도 상하이교통대학은 명문대지만, 당시에는 훨씬 위상이 높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난징대의 전신인 당시 국립 중앙대학이나 난징 인근의 상하이교통대학은 현재 베이징대와 칭화대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10] 전교 수석으로 졸업했다. [11] 의화단 운동 후 배상금을 받은 미국은 그 돈으로 중국 학생들을 미국에서 교육시키는 장학재단인 경자장학회를 설립하였는데, 첸쉐썬은 이 장학금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칭화대학에서 1년간 항공기 설계에 대한 연수를 받고, 그 당시 떠오르던 항공공학을 전공하기 위하여 미국에 유학했다. [12] 복수전공 [13] 대학원 박사과정을 3년만에 조기졸업했다. [14] 이후 1970년에 중국 최초로 인공위성 동방홍 1호를 발사 성공해 세계에서 5번째로 스페이스 클럽에 들어가게 되었다. [15] 중국 최초의 미사일 및 로켓 연구기관이다. [16] 첸쉐썬이 속해있던 중국과학원의 직속 종합대학이다. [17] 후술된 천안문 6.4 항쟁 진압 지지 등. 다만 첸쉐썬 이 사람 입장에서는 미국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공산주의자로 몰려서 고초를 겪었으니 권력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데서 나온 모습이라고 할 수도 있다. 대약진 운동에 관해서는 변명할 여지가 없겠지만, 굳이 권력 지향적이라는 비판에 대해 그의 입장에서 변호하자면 그렇다는 것. [18] 신해혁명으로 선통제가 퇴위한 것이 1912년이었다. [19] 이 우스꽝스러운 Boxer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의화단 운동이 영어로는 Boxer's rebellion이기 때문이다. 의화단원들이 무술을 하는 모습이 서구 열강의 눈에는 권투 선수처럼 보였다고. 이 장학재단은 청나라가 미국에 의화단 운동때 지불한 배상금을 바탕으로 미국 측이 만든 것이다. [20] 오늘날 Caltech의 최고 명문 이미지는 이 시절에 유수의 석학들을 모셔오면서 성립되었다. [21] 다른 자료에서는 MIT에서는 그가 중국인이라 기밀 연구 참여를 제한했으나, Caltech에서는 지도 교수인 카르만이 그가 기밀 연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기에 Caltech을 선택했다고도 한다. [22] 유체역학과 열전달 분야에서 유명한 Prandtl의 제자이며, 경계층 이론으로 유명한 Blasius와 동기이다. 셋다 독일의 괴팅겐 대학교 출신이다. [23] 집안에 있는 피아노, 책상 서랍, 책꽂이 등 곳곳에 도청기를 설치해서 감시를 했다고 한다. [24] 무엇보다 장인 장바이리(蔣百里:1882-1938)는 국민혁명군 육군 중장으로 (사후 대장을 추증받음),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육군대학 교장을 할 정도라서, 항변할 근거도 충분했다! [25] 다만 주된 연구 분야였던 로켓에 관한 연구는 기밀 접근 금지로 사실상 차단되었다. [26] 맨 위 항목에 나온 댄 킴볼 같은 경우는 "첸쉐썬 한 명이 움직이는 건 미군 해병대 사단 5개가 움직이는 것과 같다. 적화된 중국에 보낼 바에는 쏴 죽여 버려야 한다."라는 후덜덜한 평가를 했다. [27] 《 인민일보해외판 》 2010년 1월 6일 제 07 판 [28] 세르게이 코롤료프가 죽기 전까지 존재 자체가 1급 기밀로서 꽁꽁 숨겨졌던 것과는 대조되는 부분이다. [29] 그의 전기는 그의 살아있을 때는 중국에서는 나오지 못했고, 미국에서 처음으로 나왔는데, 그것이 바로 난징대학살을 이슈화한 아이리스 창의 "Thread of Silkwom"이다. 다만 이 전기는 미국측의 시각이 반영되어 매우 첸쉐썬에 대해 비판적이다. [30] 물론 뒤집어서 말하자면 그가 줏대없는 기회주의자라는 이야기도 된다. 하지만 어쨌든 그 시절에 전혀 핍박을 안 당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긴 하다. 아마 미국에서 매카시즘 관련된 고초를 겪으면서 여러가지로 배운 게 많았던 듯하다. 그 외 과학자라는 포지션상 중공에서도 건드리기 애매한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31] 첸쉐썬 박사와 비슷하게 해외 유학 배경을 갖은 많은 과학자들은 국가적 과업을 수행했음에도 감방에 끌려가거나 홍위병의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첸쉐썬 박사와 더불어 3첸으로 불리는 과학자로 첸웨이창(錢偉昌, 전위창) 박사와 첸싼창(錢三強, 전삼강) 박사가 있는데, 첸웨이창 박사는 Caltech 시절 첸쉐썬 박사의 동료였으나, 백화제방 백가쟁명 시절 공산당 독재를 비판했다가, 시골로 여러번 끌려가 삽질을 했다. [32] 물론 이것은 그가 상당히 국가적 과업을 성실하게 수행했기 때문도 있었다. 그는 베이징 소재 호화주택을 배정받았으나, 1960-70년대 내내 내몽골의 사막에 머무르며 중국의 미사일 개발을 지휘했다. [33] 1979년에 첸쉐썬에게 이른바 'Caltech 우수 동문상'이라는 것을 수여할 테니 미국에 와 달라고 했는데 첸쉐썬은 가지 않았다. 결국 그의 대학 시절 동문인 프랭크 마블(Frank Marble)이 이 상을 중국까지 가지고 와서 첸쉐썬에게 전했다고. 프랭크 마블은 2002년에 출간한 회고록에서 첸쉐썬은 자신이 만난 미국인 개인에 대한 원망은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미국 정부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고 썼다. 매카시즘이 그를 포함해 사람 인생 여럿 망쳤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반응. [34] 사실 첸쉐썬만 이렇게 당한건 아니고 매카시즘 시절에는 첸쉐썬 말고도 여러 사람이 당했고 특히 아시아 전문가들이 대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퇴출당했고 그 결과 미국은 아시아에서 죽을 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