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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levision S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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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파신호를 받아 그것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전자기기. Television이란 명칭은 '원격의', '멀리 떨어진'이라는 뜻인 그리스어 접두사 'tele-'[1]와 '시야', '화상'을 뜻하는 ' vision'의 합성어다. 줄여서 흔히 TV라고도 하며, 가전업계 등지에선 '텔레비전 수상기'라고도 한다.1.1. 명칭
한국어 |
<colbgcolor=#fff,#1f2023> 텔레비전, TV(티브이[2], 티비), 테레비[3] 텔레비죤 북 |
중국어 | <colbgcolor=#fff,#1f2023> 电视 | ||
일본어 | テレビジョン, テレビ | 영어 | <colbgcolor=#fff,#1f2023> Television, TV, telly[4] | 프랑스어 | Télévision |
스페인어 | Televisión | 독일어 | Fernsehgerät, Fernseher | 포르투갈어 | Televisor, Televisão |
이탈리아어 | Televisione | 스웨덴어 | Television | 라틴어 | Televisio |
에스페란토 | Televido | 러시아어 | телеви́дение, телеви́зор | 태국어 | โทรทัศน์ |
2. 역사
2.1. 기계식 TV
셀레늄의 광전효과, 즉 빛을 받으면 전기가 흐르는 효과를 아일랜드 전신기사 조지프 메이가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이후 이 원리를 이용하여 빛을 셀리늄판에 투과시켜 전자신호로 바꾸고, 역으로 과정을 거쳐서 빛을 발산하여 화면을 보이게 하는 기술을 알렉산더 베인이 개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기계식으로만 동작했기 때문에 단일사진만 보낼 수 있었다.
이후 독일 전기기술자 파울 고틀리프 닙코라는 사람이 닙코 디스크라는 것을 개발하였는데, 디스크에 24개 구멍을 나선형으로 뚫고, 각 부분을 영화처럼 전기 신호를 한 프레임씩 보내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영화필름을 세로로 24조각으로 나눈 후 각 조각마다 순서대로 빛을 보내는 식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영국 사업가 존 로지 베어드가 텔레바이저(televisor)라는 이름으로 상용화하였고[5], 러시아에서는 여전히 이 표현을 사용하여 'телевизор(텔레비조르)'라 부르며, 독일어로는 저 '텔레바이저'를 번역차용하여 '페른제엔(Fernsehen, 멀리 있는 것(fern)+보다(sehen))'이라고 부른다.[6]
1929년 BBC에서 최초로 기계식 TV방송이 시작되었다.
2.2. 전자식 TV ( 브라운관)
카를 페르디난트 브라운이 1897년에 전자를 쏘아서 형광 물질을 때리게끔 하여 형상을 나타내게 하는 브라운관을 발명한다. 1926년, 일본의 다카야나기 겐지로가 브라운관을 이용한 텔레비전을 만들었지만 화면 표시만 전자식이고 찰상 과정은 여전히 기계식이었다. 1927년 미국 필로 판스워스(Philo Taylor Farnsworth)가 세계 최초로 완전한 전자식 브라운관 텔레비전을 발명하면서 우리가 잘 아는 화면이 볼록한 TV가 등장하였다. 이 필로 판스워스의 텔레비전은 이후 모든 텔레비전의 기초가 되었다. 이후 1936년 BBC를 시작으로 방송국들이 브라운관 TV 방송을 선택하면서 기계식 TV는 3년 뒤인 1939년에 완전히 사라진다.2015년 샤프전자 및 인도 업체들을 마지막으로 브라운관 TV 생산은 중단되었다. ##
아날로그 TV 방송 중단으로 인해 못 쓰게 된 브라운관(아날로그) TV는 KODI와 라즈베리 파이 조합을 이용해 스마트 TV로 개조되거나 레트로 게임용 디스플레이로 재활용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흑백 TV를 패미컴용 디스플레이로 재활용하고 있다.
2.2.1. 컬러 TV
컬러로 방송한다는 생각은 19세기부터 존재했었지만 본격 컬러방송을 시도한 것은 1950년 4월 미국 CBS에서 '필드 연속 컬러 시스템(Field-sequential color system)'이란 방식을 선보인 것이 최초이다.이 방식은 브라운관과 유리막 사이로 3원색이 칠해진 원판을 모터로 돌려서[7] 컬러신호를 주고받는 방식으로 당연히 전용 촬상관이 있는 카메라로 제작된 프로그램이어야 한다. 아무 프로그램이나 저 색원판을 돌린다고 컬러화면이 되는 게 아니란 소리. 그래서 구조가 복잡하고 소음이 당시로서도 심했으며[8] 실용성이 떨어졌기 때문에 자연히 수상기가 필요 이상으로 비싸져 상업적으로 실패한 데다 하필이면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져버리는 바람에 얼마 못가서 사장되었다. 전시상황으로 주파수 자원을 통제하기에 보편적인 라디오와 흑백 정도만 남긴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54년 1월 1일 우리가 아는 NTSC 방식이 등장하면서 디지털 TV가 생겨나기 이전까지 오랫동안 북미권과 한국, 일본의 방송 시스템으로 군림했었다. 그리고 1960년 9월 10일 NTSC 방식을 받아들인 일본이 컬러방송을 시작한다. 1974년 네덜란드 필립스가 예열없는 '퀵스타트(순간수상방식) 브라운관'을 개발해냈다.
NTSC가 본래 원본과의 색상 왜곡에다가 나라별로 조명이 다르듯 커스텀도 있고 채도와 색상 등이 다르고 노이즈가 타는데 CBS의 방식처럼 대역을 뺏기고도 기존 전파자원뿐이라 음성신호를 컬러신호에 눌러담는 식이어서이다. 고급영상단자가 아니라 단순 RCA만으로도 안테나 수신과 다른 것도 그 때문.[9]
역시나 NTSC 음성신호는 FM과 동일한 규격이고 일부 대역은 국가나 수신기에 따라 라디오에서 TV 방송이 그대로 청취도 가능하다. 이것도 자원을 아끼며 호환성을 챙긴 것으로 보인다. 물론 아날로그 TV는 6번과 7번사이(국내기준이라 살짝 판이하지만)가 보호대역삼아 그 틈에 들어간 것이라서 FM대역이 연속성은 살짝 멀지만 동일한 라디오 방송규격이고 수신기기가 살짝 걸려야만 들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2.2.1.1. 외국의 상황
그리고 의외로 쿠바가 1959년 아바나 등 일부 지역에서 일찍 시작했다. 물론, 이 때는 시험방송에 가까웠던 형태였기에[10] 쿠바 혁명 이후 NTSC 방식 컬러방송은 종료되었고, 1976년에 PAL 방식으로 컬러방송이 재개될 때까지 쿠바인들은 흑백으로 TV를 봐야 했다.다만 쿠바가 지속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에 있어서 명맥이 이어졌더라도 즉각 보편화되는 것은 어려웠을 거라는 의견이 있다. 일찍 컬러방송을 시작한 미국과 일본도 완전 대중화에 15년이 걸렸고, 당대 쿠바의 빈부격차가 몹시 커서 하루하루 먹고사는 빈민들과 돈이 썩어날 정도로 넘쳐나는 부유층이 공존하는 심각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보급이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자본주의 체제로 흘러갔어도 실제보다 고작 몇년 정도 더 앞당겨졌을 수준이라는 것이 대다수 평가이다.
이러한 현상은 1970년대 중반 베네수엘라에서 재현된다. 1960년대 말 컬러방송이 시작되었지만 1970년대 중반 갑자기 송출이 종료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오일쇼크의 영향으로 2000년대 중반과 더불어 역대 최고 호황을 누렸던 시절이었기에 왜 인지 이해가 잘 안 되겠지만 컬러 TV가 베네수엘라에서 생산되지 않아 전량 수입해야 하는 사치재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물론 당시 대통령인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가 흑백 TV 업자들에게 뇌물을 받아 챙겨서라는 이유도 있다.
주요 강대국인 소련, 영국, 프랑스(1967년 ORTF 제2텔레비전(지금의 France 2)에서 개시), 서독 등이 각각 PAL과 SECAM 방식으로 개시하여 전세계 컬러TV 수요가 급속히 늘기 시작했다. 다만 이 나라들은 처음부터 올컬러로 방송을 개시했던 것이 아니었다.
미국은 1950년 CBS가 전세계 최초로 컬러방송을 시작했지만 1950년대 당시에 컬러TV는 가격이 무척이나 비싸서 부유층들이나 가지는 것이었고 송출지역도 상당히 제한적이라서 컬러방송 초기 10년간은 흑백 프로그램이 대부분이었고 컬러 프로그램은 적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부터로 이 시기 즈음해서 컬러 텔레비전의 생산량이 크게 늘고 가격도 합리적인 수준으로까지 떨어졌으며 컬러 프로그램이 차차 늘어나기 시작하자 1960년대 초반이 되어서야 컬러 텔레비전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
일본도 마찬가지라서 1960년대는 대부분 프로그램과 광고들을 여전히 흑백으로 방송했었고 컬러로 제작된 프로그램을 1~2편 정도 따로 편성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당시 컬러 프로그램들을 보면 밑에 '컬러방송'이란 식으로 자막이 뜨거나[11] 본방송이 시작되기 전에 "컬러로 방송됩니다"라는 안내방송이 떴다.
옛 일본을 배경으로 한 매체를 보면 1960년대 중반까지는 일본에서도 아무나 쉽게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단 걸 알 수 있다. 1960년대 초반 컬러TV 1대가 수 년치 연봉 수준인 데다가(당시 일본 공무원 초봉이 월 1만 엔 정도였는데 흑백TV 가격은 6만 엔이고 컬러TV 가격은 10배에 가까운 54만 엔.) 기껏 사와도 컬러 프로그램이 많지 않아서 그다지 큰 메리트를 가지지 못해 부잣집에서나 가졌던 물건이었다. 60년대 중반 도쿄 올림픽의 영향으로 좀 늘어나긴 했지만 (당시 대졸 신입사원의 월 초봉은 2만 엔 수준이었고 컬러TV 가격은 20만 엔 정도) 대부분 가정집에서 꿈도 못 꾸고 흑백TV로 만족해야 했으며 컬러TV는 밖에 나갈 일이 있을 때에나 조금 볼 수 있었던 물건이었다. 번화가나 기차역, 백화점에서 컬러TV 홍보 목적으로 설치하는 일은 있었지만 사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1년치 봉급... 체감으로 매칭하면 PDP 초기 가격이나, 버블경제기 일본 전자 업체가 졸부도 안 사는 기기를 만든 거 생각하면 된다. 또는 2021년 현재의 LG전자 시그니처 롤러블 TV( LG 시그니처 TV R 모델)을 생각하면 되겠다.[12] 말 그대로 종이처럼 말리는 65인치 OLED 4K TV인데, 가격이 1억 원이었다. 한국에서 아직 10대도 안 팔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초반에 걸쳐서 전면 컬러화가 이루어지고[13] 일반 가정집 소득이 컬러TV를 살 수 있을 정도가 되어가면서 대중화되었다. 여기엔 불편한 진실도 좀 숨어있다. 당시 일본 가전업체들이 카르텔을 결성하고 국내에서는 컬러TV를 비싸게 팔면서 미국 수출은 반값에 떨이로 판다는 사실이 폭로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
서유럽권도 전체가 컬러화된 건 1970년대 초중반부터이다. 프랑스는 제1텔레비전이 1974년 TF1로 분리 독립한 뒤에도 1976년 1월까지 흑백으로 방송했었다. 당시 프랑스의 경우 흑백방송이 819주사선, 컬러방송이 615주사선으로 흑백이 화질이 좋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거라고 한다. 이때는 어느 정도 텔레비전 기술이 발전되어가던 때였기 때문에 빠르게 대중화되었다.
그러나 동유럽은 널리 보급되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흑백 TV에 비해서 몇 배나 비쌌던 데다가 1970년대 후반 경기침체로 인해서 보급이 더뎌졌기 때문이다. 또한 북유럽은 1970년대 말까지도 뉴스는 흑백으로 내보냈으며, 교육방송은 어린이들이 컬러 영상을 보면 모방심리를 가질 수 있다고 우려해서인지 1980년대 초까지도 흑백으로 방송하는 비중이 높았다.
세계에서 가장 늦게까지 흑백 방송만 송출한 나라는 캄보디아인데, 실제로 캄보디아는 1986년 7월 19일에야 컬러 방송을 시작하게 되었다.[14]
세계에서 가장 늦게 TV 방송을 송출하기 시작한 나라는 2006년 4월 7일에야 TV 방송을 시작한 코모로이다.[15] 참고로 전술한 국가들 외에 2000년 이후에 TV 방송을 시작한 나라는 보츠와나, 통가(이하 2000년), 키리바시(2002년)[16] 3개국밖에 없다. 물론 TV 보급은 이보다는 먼저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자국의 TV 방송국이 없었기 때문에 위성안테나로 외국방송을 봐야했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2.2.1.2. 한국의 상황
도입 시기는 1950년대 초, 중반 외국에서 수입으로 들어온 흑백 텔레비전이 시초이고, 텔레비전 방송이 1956년 5월 12일 대한방송에서 시작되었으며, 미군 PX를 통해서 흑백 텔레비전이 상당수 도입되었다. 최초의 국산 TV 수상기는 금성사 VD-191이다.[17] 19인치짜리 진공관 흑백 TV로 1966년부터 생산이 시작되었고, 1968년까지 생산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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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의 국산 TV인 VD-191 |
하지만, 1950년대 중후반과 1960년대 초중반에는 서울과 수도권 등 일부지역만 시청할 수 있었던 데다, 전부 수입품 밖에 없었고 심지어 사치품으로 분류되어 관세도 높았기 때문에 일반인은 범접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부유층의 전유물이 된 덕분에 보급률은 상당히 낮았다. 국산 TV 수상기 생산이 시작되어 상대 가격이 내려간 1960년대 후반도 일본산이 10만 원, 미국산이 13만 원, 위 금성TV가 7만 원 정도로 당시 서울 집값이 평당 5~10만 원 정도라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고가였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전력보급률이 낮았기 때문에 기껏 TV를 얻는다해도 보지 못해서 애물단지가 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텔레비전은 전화기와 마찬가지로 동네에서 몇 집에만 있었고, 서민층들에게 말 그대로 그림의 떡같은 존재였다. 물론 비싸다보니 도둑맞기 쉬운 물품이었던 것도 당연지사였다. 하여튼 그렇기 때문에 한일전이나 인기 드라마 같은 대박 프로그램이 있는 날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동네 한두 군데 있는 텔레비전 있는 집으로 몰려들어서 방송을 보기도 했고, 당대 대다수 만화방이나 다방, 일부 구멍가게에서 거금을 들여 TV를 설치한 다음에 만화책을 단골로 보는 애들이나 푼돈을 낸 청소년, 커피를 단골로 마시는 고객들을 상대로 TV를 볼 수 있게 하는 식으로 영업했다고 하며 수입도 제법 짭짤했다고 한다. 물론 프로레슬링이나 권투 세계타이틀전, 한일전같이 인기 스포츠 중계라도 있는 날은 가격이 몇 배로 올라가기 일쑤였기 때문에 원성도 자자했고, 간혹가다가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당시 TV가 있으면 동네에서 엄청나게 떵떵거리는 것이 당연해서 TV 있는 집안 아이에게 각종 아부를 떨면서 보려고 애썼던 아이들이 많았고 어른이라고 크게 다를 것이 없어서 TV 있는 집 주인에게 성격이 어떻건 간에 아부떨기 바빴다는 후문이 전해져 내려온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만화방이나 다방, 구멍가게나 전파상 같은곳에서 돈내고 봐야했으니까. 그래서 한동안 TV가 있는 집들이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 시골 같은 곳에서 이 풍경은 1970년대 들어 가정 TV 보급과 '아동도서 정화대책'을 계기로 없어지는 듯하다가 1980년대 VTR 보급으로 인해 비디오 상영 목적으로 만화방에 재등장한 바 있었다.
1970년대 첨단 기술이 들어간 삼성 이코노 TV[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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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70년대 들어 본격 보급된다. 당시 정부에서 뉴스 시사 전달 목적으로 TV 물품세를 면제해주고 일명 새마을 TV라고 불린 저가형 텔레비전을 싸게 공급하는 방식으로 TV 보급을 적극 지원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TBC의 전국 방송화가 진행되지 않아서 수도권과 PK지역만 방송되거나 DBS의 TV 방송 허가가 나지 않았던 것도 그와 연관이 있다. 1975년 이전까진 진공관/트랜지스터 방식이라 TV 한 번 켤 때마다 전자총이 예열되기까지 몇 초 정도를 기다려야 했는데, 이로 인해 전기세만 먹으며 수명도 줄어들기도 했다. 게다가 튜너 접점부분이 은으로 되어 있어 일정 횟수를 돌리면 닳고, 연탄가스와 먼지에도 취약했다.
이를 해결코자 1972년 금성사가 먼저 진공관을 버리고 트랜지스터로 채워 수상시간을 1초로 단축시켰고, 1974년 IC와 트랜지스터를 결합한 'IC-TR 회로'와 함께 '소프트화면 브라운관'을 개발해내 종전의 자극적인 화면을 부드럽고 선명하게 바꾸어 시력을 보호하게끔 만들었다. 1975년 삼성전관은 예열 없는 순간수상방식 '이코노 브라운관'을 국내 최초로 개발하여[19] 삼성전자가 만든 '이코노TV'에 적용시켰고, 금성은 튜너 접점부분을 순금 99.99%로 바꾸어 마모율을 줄인 '황금회로'를 개발했다.
1976년 대한전선은 스네이크 현상[20], 스팟 현상[21], 에미션 현상[22] 등을 배제해 '무결점'을 강조한 '디제로 TV'를 개발했고, 금성은 녹색 형광막을 검정 글래스로 감싸 시력을 보호하는 '블랙그린 브라운관'을 개발해냈다. 뒤이어 1977년에 금성은 브라운관 핀트적중률을 높여 화질을 선명하게 하는 'GG전자총'도 개발했다. 이렇듯 1970년대 TV 경쟁은 가히 기술 싸움이라 할 수 있었다.
디자인에서 약간 현지화가 이루어졌는데 한국의 좌식생활에 맞게 다리가 짧아지고 연탄가스를 맞지 않도록 화면을 가리는 미닫이문과 자물쇠가 채워진 형태, 즉 보편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형태로 바뀌게된다.
한편, 컬러 TV 도입과 관련해서 일종의 흑역사가 있는데 1974년 한국나쇼날전기가 처음 생산하기 시작하고, 1975년에 삼성전자가 토종 기업 중 최초로 생산했으나 상당수는 수출만 했고, 1978년부터 상공부가 교통부 요청에 따라 1급 관광호텔에 한해 내수 공급을 했다. 그래서인지 방송사들(그래봐야 KBS, MBC, TBC 뿐이었지만)도 이미 1960년대 말즈음부터 컬러방송 실시 계획이 있었으며, 그 때문에 1970년대 초반 와서는 컬러방송 송출용 장비를 전부 도입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기계만 컬러이지 방송국에서 컬러 송출을 하지 않아서 흑백만 나오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러한 이유로 흑백이건 뭐건 삼색 셀로판지를 브라운관에 이어붙여 컬러처럼 보이려고 용을 썼다.
대신 1976년부터 AFKN은 컬러로 볼 수 있었다. 여담으로 AFKN이 컬러방송을 시작한 이유가 흥미로운데, 한국 온지 얼마 안 된 주한미군 장병들이 아직도 TV 화면이 흑백으로 나오는 후진국(...)에 왔다며 문화 충격을 느껴서라고 하며, 한국에 관광을 온 외국인들도 AFKN을 많이 시청하는 터라 사유는 매한가지였다.
당시 부산직할시나 울산시 등 영남 해안가 지방에선 일본방송 전파가 잡혀서 이미 1960년대 초반부터 컬러로 나오고 있는 일본 TV 방송을 볼 수 있었다. 단, 양국 TV 채널이 겹쳤기 때문에 일부 채널만 볼 수 있었다.[23] 때문에 일부 부유층들은 컬러 화면을 즐기기 위해 해외여행 선물로 직접 들여오든지 주한미군 PX를 통해 밀수된 일제 컬러TV 수상기를 사거나( 참고 기사), 일제 VCR(U-MATIC이나 베타맥스 등)을 같이 들여놓기도 했다.
1970년대에 준비가 된 상황에서도 컬러 TV 수상기 시판과 송출 전반을 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박정희와 신문사들의 반발 때문이었다. 수출과 관련된 기업들의 의견은 충분히 들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기 부족 문제"와 "계층 간 위화감 조성"을 이유로 내수판매 자체를 하지 않은 정책 탓. 실제로 이 시기 농촌도 흑백 TV가 집집마다 보급된 터라 이때 컬러 TV를 보급하면 도농격차가 생길 지 모른다는 우려도 한몫했다.
당시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었던 프로스포츠는 프로 복싱이었는데 대부분 국가에서 컬러방영을 할 시기라서 국제대회 같은 경우 당연히 양 선수가 파란 트렁크, 빨간 트렁크를 입고 경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걸 흑백TV로 중계하면 둘 다 같거나 비슷한 색으로 보여서 구별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으므로 아나운서가 설명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물론 한국 선수가 경기하는 경우는 흑백TV 사용자를 배려, 트렁크에 흰색 띠를 부착한다든가 하는 방법으로 흑백에서도 트렁크 색상이 구분되도록 했다.
특히 1975년 10월 8일 박정희는 한국전자박람회 개막식에서 가전업체 사장들 앞에서 "컬러 TV는 아직 시기가 이르다."고 못을 박았으며 신문사들 역시 광고를 컬러 TV에 빼앗긴다는 우려를 내세워 내수 판매 자체를 거세게 반발하였다.
실제로는 유신정권의 여느 정책들이 그렇듯 풍기문란과 '퇴폐문화'를 막기 위한 의도가 더 컸다는 주장도 있다. 당시 서구권과 일본에서 컬러 TV가 막 보급되던 당시는 히피와 사이키델릭 문화가 같이 유행하던 시대였고 실제로 이런 것들을 표현하는 데는 안성맞춤이었다. 1960년대 당시 미국 내 민권운동도 이 컬러 TV의 대대적인 보급으로 인해 활발해졌다는 분석도 있을 정도.
관제 뉴스영화 대한뉴스는 1973년부터 컬러 필름으로 상영되었다. 당시 방송 쪽은 시험방송에 가깝게 컬러 텔레비전 방송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제작은 이미 컬러방송 중인 외국에도 중계되는 국제적 이벤트에 한정되었다. 예를 들면 1974년 당시 국내 1천여 대 TV를 통해 미국 대통령 제럴드 포드의 김포국제공항 도착 광경과 한국을 떠나는 모습이 컬러로 방영된 바 있었다. 또 1975년 9월 8일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한-일 축구 정기전 중계방송 당시 KBS가 일본 NHK로부터 요청받아 컬러로 중계했는데, 당시 국내에 있던 컬러 TV 수상기로도 방영된 바 있었다.
1977년 10월 29일 정동 문화체육관에서 생방송으로 중계된 MBC 10대가수 가요제. 제작 단계에서는 흑백과 컬러가 섞여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1978년 3월 하순 미국 백악관 특별통상대표부가 한국 정부에 국내에서 팔지 않는 컬러TV를 남에게 수출한다는 것이 국제 상도의에 어긋난다며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당시 컬러TV 수출 물량은 1977년 12만 대, 1978년 50만 대였는데, 대다수가 미국 시장에 팔렸던 것이다. 미국 측의 시비는 1979년부터 노골화되어 미국 측은 한국산 컬러 TV 수상기 수입물량을 연 30만 대로 규제해 버리면서 수출길이 가로막히기 시작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1980년 4월 8일 이한빈 경제부총리가 삼성전자 수원공장에 수출을 하지 못한 컬러TV들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걸 보고 화를 낸 나머지 대만 방문 후 삼보전자를 찾아가 15일 저녁 수행기자들과의 회견에서 귀국시 컬러TV 방영을 허락하는 쪽으로 정책전환을 시도한다고 선언하여 다음 날 국내 신문에 대서특필되었지만, 박정희의 컬러TV 불가론을 이어받은 최규하 대통령 고집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전두환의 국보위가 정권을 잡은 뒤부터 상황이 바뀌었다. 당시 삼성전자 사장 강진구(1927~2017)는 국보위 상공분과위원장 금진호로부터 전두환 상임위원장에게 컬러방송을 건의해보겠다는 언질을 받아내면서 "꼭 되게 해 주소. 지금 전자산업은 앞이 꽉 막혀 있소. 수출도 한계에 이르렀는데, 국내시장이 막혀 있으니 큰 야단났소. 국민여론을 조사해보면 찬성하는 사람이 더 많을 거요!"라고 하소연한 뒤, 국보위는 삼성전자와 금성사 양대 업체 의견을 일부 수용하여 8월 1일부터 컬러 TV 시판이 허용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컬러 TV에 대해 국민들의 여론이 좋지 않았기에 국내 컬러방송을 전제로 시판한 것은 아니었으며 이는 어디까지나 미국과 유럽의 수출 규제로 턱턱 막힌 국내 가전업계 숨통을 트이기 위한 정부의 임시 조치였다.
11월 30일 문화공보부 장관 이광표의 발표에 따라 12월 1일부터 KBS가 수출의 날 기념식 생방송을 시작으로 하루 3시간 동안의 컬러 텔레비전 시험방송이 시작되었다. 첫 방송 당시 정부의 큰 관심사는 전두환의 정장 색이었다. 이에 업계 전문가들과 비서진들이 협조한 결과 회색 바탕에 가는 청색 줄무늬 옷이 적합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또 행사 당일 상공부 공무원들은 가전 3사 대리점들을 대상으로 컬러방영 색상에 대한 반응 조사를 실시하기도 했다.
당시 아시아, 아프리카 개도국들 중 컬러 TV 나이가 동갑이거나 더 늦었던 나라들이 수두룩하긴 했다. 공산권도 중국(1973년)이나 윗동네(...)(1974년), 베트남(1978년)처럼 남한보다 더 빠른 나라가 있는가 하면 미얀마(1984년)나 부탄, 네팔, 라오스처럼 더 늦은 나라도 있을 정도다. 서아시아는 이스라엘과 시리아, 터키가 한국과 동갑이다. 그리고 유럽에서 컬러방송이 가장 늦었던 나라는 포르투갈로, 한때 식민지로 두었던 나라가 1972년 개시한 것보다도 훨씬 늦었으며, 대한민국보다 9개월 빨랐다(1980년 3월 7일). 이스라엘은 노동당 정권이 도입을 반대했었고, 리쿠드당 소속인 메나헴 베긴이 집권하고 나서야 해금되었다.
한국은 1980년 12월 22일 컬러 방송이 전면적으로 실시되었지만, TV 수상기 문제가 일어난다. 당시 전국에 깔린 흑백 TV 수상기는 전국에 7백만 대나 있기에 하루 아침에 수상기 전체를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흑백과 컬러 모두를 시청할 수 있는 시스템이 요구되었다. 게다가 조명료만 해도 흑백의 네 배나 되는 컬러방송에 쓰는 비용이 너무 들었기 때문에 자연광선을 많이 쓰는 뉴스와 스포츠 중계부터 컬러방송이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애석하게도 이는 정권홍보에 TV를 적극 활용하는 전두환 정권의 책략으로 시행된 것이었다. 결국 컬러 텔레비전은 땡전뉴스를 더욱 효과적으로 방송하는 기계로 전락하고 말았다.
또 방송 개시 바로 전날은 언론통폐합이 시작된 일자로, TBC는 컬러 시험방송은커녕 본방조차 못 해보고 신방겸영 금지로 폐국되었다. 그래도 TBC에서 제작된 쇼쇼쇼 700회 특집이라던가 몇몇 드라마와 같은 일부 프로그램은 컬러로 제작된 것이 존재하는데, 공연 프로그램은 컬러로 제작된 것이 존재하며 고별방송 프로그램도 컬러로 제작되긴 했었다. 다만 대부분 사람들이 흑백으로 봐서 그렇지.
이듬해인 1981년 초에는 광고도 전면 컬러화되었다. 또 TV 컬러화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서 그동안의 '바보상자'나 '판도라의 상자'외에 유해색소까지 첨가된 격이라는 말까지 나왔으며, 안부인사로 "컬러 TV를 구입했느냐"는 말까지 나온 데다가 심지어는 컬러TV 때문에 극장이 망할 거라는 말까지 나왔다고 한다. 물론 극장은 망하지 않았지만 당시 침체기를 겪던 영화산업이 또 타격을 입었다. 1981년 당시 영화관 관람객 수는 전년도 5천 3백만 명에서 4천 4백만 명으로 줄었고, 전국 영화관 수는 전년도 447개에서 423개로 줄어 영화제작 편수 역시 87편으로 나와 저조하였다.
이에 영화계는 컬러TV에 대항해 영화의 대형화란 대안을 모색하여 당대 1억 원 단위로만 제작되었던 통례를 깨고 평균 3~4억 원에서 최고 10억 원까지 투입된 작품들이 제작되었으며, 배우들 역시 컬러TV와 동시녹음 시대에 대비하기 위해 연기훈련을 기획했고, 영화진흥공사 역시 조감독 20명을 선발해 영화 이론과 기법을 교육시켰다.
이런저런 반응에도 불구하고 컬러TV는 방영 1년 뒤인 1981년에 37억 9천 1백만 달러를 기록해 전년도 대비 33%를 올려 수출길을 터 주었으며, 당시 주류이던 볼록화면 형식 브라운관 컬러 텔레비전은 1980년대 당시 전성기를 누리게 되고 1980년대 후반 당시 연령대가 대략 만 5~6세 이상이셨던 분들이라면 대부분 이런 텔레비전으로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이나 1988 서울 올림픽 경기 중계 방송을 시청했던 기억도 있을 것이다. 물론 당시 방영했던 각종 TV 프로나 광고들도 해당한다. 이후로 텔레비전은 크기는 더 커지면서 성능 및 기능은 더욱 향상되어 나왔다.
2.3. 컬러 TV 보급 이후~ 199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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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대 당시 판매된 브라운관 텔레비전. |
1985년 10월 1일 수도권을 시작으로 음성다중방송[24]이 시작되었다.
1980년대 초반 고급형 기종을 시작으로 # 채널을 이동할 때 버튼 및 리모컨으로 바뀌었으며 1990년대부터는 다이얼 방식은 자취를 감추었다. 또한 컴포지트 단자가 기본으로 탑재되었으며 고급형은 S-Video 및 컴포넌트 단자도 있었다.
크고 무겁고 발열도 많은 CRT가 주류였는데 1990년대 초반까지 25인치/볼록화면(슈퍼플랫), 1990년대 중후반 32인치/평면화면이 대세였다. 1990년대 중반부터 16:9 비율인 와이드 TV도 판매되기 시작했으며 1994년에 나온 금성 아트비전 그린처럼 4화면 동시시청(PIP) 기능이 있는 기종도 있었다.
한편 1992년 한국갤럽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체 가구의 TV 보유율은 99.2%이며 보유 가구 중 29.3%가 2대 이상의 TV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컬러 TV 보유율은 94.9%, 14인치 이하 44.0%, 15~19인치 31.0%, 20인치 이상 24.9%, 리모컨 방식 50.3%, 로터리 방식 49.7%로 나타났다.
또한 기존 CRT로는 38인치 이상이 될 경우 브라운관 무게 때문에 더 이상 대형으로 제작을 할 수 없었으므로 기기 아래쪽에서 상을 비스듬히 쏴올리면 거울을 통해 반사되어 화면에 비춰지는 방식인 '프로젝션 TV'가 고가의 대형 화면 제품 포지션을 맡았다. 1980년대 초반에도 있었지만 199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초고가라 보급이 잘 되지 않다가 1998~99년부터 점차 보급되었다.
16:9 모델과 4:3 모델이 동시에 팔렸다. 프로젝터와 유사한 방식으로 동작되어서 DLP, 3색관 방식 등이 사용되었다.
프로젝션 TV는 CRT에 비해 두께는 같고 대신 아래에서 쏴올릴 공간이 확보되어야 하기에 높이가 약간 높다. 크기도 크기지만 제법 보급됐던 DLP 방식은 램프 수명 문제가 심각했다. 램프 수명이 다해 밝기가 떨어질수록 화면도 어두워지기에 보통 2년에 1번씩 교체해줘야 하는데 램프값으로 10만이 기본으로 깨지는 환상적인 유지비용을 보여줬다. 정 중앙에 앉아서 보지 않는 이상은 화면이 거무튀튀하게 보이는 게 심했다.
프로젝션 TV는 대한민국에서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사이에 학교 멀티미디어화의 일환으로 전국 각 학교 교실에 보급되었다. 그 TV가 워낙 크기에 학생들 탈의실 역할을 하기도 했다. 노후화로 현재는 옥상 거치형 LCD TV로 거의 교체되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PDP/ LCD TV도 개발되기 시작했으며 프로젝션 TV보다 고가의 대형 제품 포지션을 맡았다.
한편 CRT 수상기가 주력이던 시절 일부 회사는 다양한 스피커를 내장한 수상기를 만들어 판매 했다. 저음을 보강해줄 서브우퍼가 가장 많았으며 상단에 5.1채널의 센터 스피커 같은 스피커를 달기도 했고 기본 스피커도 고급화해서 출시했다. 물론 아무리 고급화를 해도 결국은 TV 스피커였기 때문에 음질이 획기적으로 좋아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TV 소리를 RCA 단자로 출력 가능한 모델이라면 RCA 케이블로 별도의 하이파이 오디오 시스템에 연결하는게 더 좋은 소리를 들을수 있었다.
2.4. 200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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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2010년 세계 TV 시장 비중[25] |
물론, 2003년 들어서 가전제품 매장에서 판매하는 볼록화면 CRT TV는 5대도 채 안 됐으며, 그마저도 인기가 없어 방치되고 있는 실정이었다.[26]
프로젝션 TV는 2000년 정점을 찍고 2001년부터 PDP, LCD 패널 보급과 함께 금방 사장되어버린 과도기 제품이 되었다. 국내기업의 경우 삼성전자와 LG전자가 2006년에 CRT 프로젝션 TV의 생산과 판매를 중단했고 #, 일본기업으로는 소니가 2008년에 프로젝션 TV의 생산과 판매를 중단했다. # 대략 2007년 정도만 해도 크고 저렴하다는 점 때문인지 학교에서 많이 쓰였지만, 수명 문제와 시야각 문제로 2000년대 말부터는 전부 LCD TV나 프로젝터로 교체되는 추세였다. 램프 교체비용도 많이 들지만 잔고장도 의외로 많아서 여러모로 골치였다. LCD TV가 많이 싸진 마당에 더 이상 굴릴 이유가 없었던 것. 게다가 프로젝터는 작아서 설치하기도 쉽다. 이런 사정을 모르고 가끔 무료나눔 같은 걸로 프로젝션 TV가 나오면 얼씨구나 업어가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그러나 시장이 LCD로 바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1997년부터 2006년까지 제조된 LCD는 반응 속도와 가격 문제, 그리고 잦은 고장 때문에 보급이 더뎠다. 특히 2006년 소비자보호원[27]에 접수된 디지털 TV 불만 상담건수가 1년전인 2005년에 비해 두 배 가까이 급증해 정점에 달했는데, 짧은 무상수리 보증기간에다 고장까지 자주 일어나니 몇 백만원을 주고 LCD TV를 구매한 소비자들의 속만 타들어가게 만들었다. 당시 브라운관 TV는 무상수리 보증기간이 4년이었지만, LCD와 PDP는 보증기간이 1년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짧은 보증기간 때문에 TV를 몇 년 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업체들이 거액의 수리비를 요구하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때문에 LCD TV를 구매했다가 이러한 낭패들을 직면하고 구매 이전 사용하던 브라운관 TV를 다시 사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며, 당시로썬 모든 방송들이 디지털 방송으로 변하는 6~7년 후에 LCD TV나 PDP를 구매하는게 적합하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
LCD와 PDP의 잦은 고장도 문제였지만은 무엇보다 디지털 TV 보급률이 현저하게 낮은 것도 문제였다. 2006년 기준으로 지상파 디지털 방송이 도입된 지는 5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였고, 무엇보다 당시 지상파 디지털 방송은 전국 90% 지역에서 송출 중에 놓여있었다. 하지만, 여러 문제들로 인해 디지털TV가 잘 보급되지 않아 2006년 2월 말 디지털 TV 보급률은 전 가구의 18%에 불과하였다. 지상파 디지털 전환 지지부진 아날로그 TV에 비해 고가라는 점이 주요 원인이었다. 당시 아날로그 TV는 30만원 대였으며, 디지털 TV는 70만원이 넘었다. 거기다가 대부분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대형으로 가는 추세였다. 또한 디지털 TV를 구입해도 2001년 이전에 지어진 아파트는 공시청 시설이 노후화 되어 디지털 방송 수신이 잘 안되는 것도 전환이 더딘 이유 중 하나였다. 결국 2006년 9월 14일, 방송위원회와 정보통신부 산하 '디지털방송활성화위원회'가 출범하였다. 당일 1차 회의를 거쳐 #, 동년 12월 28일 방송위원회에서 개최된 디지털방송활성화위원회의가 이견 끝에 무산되면서 이듬해로 넘어가게 되었다. 무산된 사유는 지상파 방송사업자와 문화관광부, 산업자원부 등 일부 유관부처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항을 명시할 것을 요구하고 나선 까닭이었다. #
CRT에서 LCD로 넘어가는 과도기 중 1997~2000년에는 프로젝션 TV가, 2001~2006년에는 PDP가 대형 TV 시장 주류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PDP는 LCD가 빠르게 치고 올라오면서 2014년을 마지막으로 생산이 중단되었다. 결국 2006년 3분기 들어서 금액 기준에서 LCD TV 시장규모(490억 달러)가 CRT TV 시장규모(265억 달러)를 크게 앞질렀으며, 이듬해인 2007년 4분기는 LCD 출하량이 브라운관 출하량을 사상 처음으로 뛰어넘었다. 시장조사기관 디스플레이서치에 따르면, 2007년 4분기 LCD TV 출하량이 2천850만대로 전체 TV 중 47%의 점유율을 보인 반면 CRT TV는 46%의 점유율을 기록하면서 사상 처음으로 추월하였다고 보도했다. # 2007년 12월 20일 삼성SDI 브라운관 공장 최후의 2개 생산 라인인 8,9 라인의 가동을 모두 중단, 폐쇄하면서 삼성의 브라운관 TV 사업은 이 날로 끝이 났다. #
DVI/ HDMI 입력과 DTV 디코딩으로 HD 해상도를 지원하기 시작했고, 2006년 LG 엑스캔버스처럼 특정 장면을 돌려보는 '타임머신 기능'이 탑재되는가 하면 2007년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특수 안경으로 보는 3D DLP TV를 만들었다.
2008년 2월까지는 LCD TV의 BLU(back light unit)로 CCFL(Cold Cathode Flourscent Lamp)이나 EEFL(External Electrode Flourscent Lanm)이 많이 쓰였고, 2007년 말부터는 고급형으로 LED 백라이트 유닛을 사용한 LCD TV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보편 LED 백라이트 LCD TV를 LED TV라고 많이 표현하나 LED는 단지 백라이트 유닛 발광만 담당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잘못된 표현이다. LED 백라이트는 2010년부터 대중화되어 기존 백라이트 유닛을 빠르게 대체했다.
2.5. 2010년대
2010년 이후로 기존 CCFL 백라이트 TV보다 더 밝고 전력 소모도 적고, 더 얇은 팬널의 생산이 가능한 LED 백라이트 LCD TV가 보편 백라이트로 자리 잡았다. 2009년 초 3D TV를 시작으로 2010년 이후 스마트 TV가 본격화했으며, 2011년 WOLED 방식 OLED TV와 OLED와 LED 백라이트 기반 4K UHD TV, 2013년 커브드(곡면) TV, 2015년 양자점을 백라이트로 이용한 SUHD[28] LCD TV와 HDR을 지원하는 TV가 등장했다. 디지털 TV가 새로 등장하고, 2010년대도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이제는 아날로그 텔레비전을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29]LCD 패널 가격이 급속도로 하락되어 HDTV가 대중화되어 기존 아날로그 방식 CRT TV는 시장에서 완전히 사장되어 자취를 감추었고,[30] LCD 라이벌 격이었던 PDP도 LCD에 화질/전력 소모/제품 수명 등에 약점을 보여 시장에서 도태되다가 2014년을 마지막으로 생산이 중단되었다. 그리고 2010년 S-Video를 시작으로 중반부터는 D-Sub와 D-Sub/DVI 음성 출력 단자가 제외되었으며, 후반부터는 컴포지트와 컴포넌트 단자마저도 점차 빠지고 있다.
또한 이때부터 유튜브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2019년 기준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최고급품은 LG전자 OLED TV와 삼성전자 QLED TV이다. 삼성전자의 QLED는 LCD에 양자점 필름을 입힌 QD-LCD로 명암비와 색 재현률이 일반적인 컬러 필터를 사용하는 LCD에 비해 우수하다. 하지만 거의 비슷한 기술이면서 더 저렴한 LG 나노셀이 있으며, OLED에 편승한 마케팅 용어라는 욕을 먹고 있다. LG전자의 OLED는 공항 등 고정화면을 띄우는 경우에 번인이 생기는 경우도 있지만 암부 표현능력이 LCD인 QLED에 비해 크게 우수하고 얇으며 롤러블 등 다양한 폼팩터를 구현하기에 좋다.
그리고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모니터에 텔레비전 기능이 추가된 제품이 출시되어 컴퓨터와 같이 쓰는 사람들 때문에 그 수요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증강현실 장비를 착용할 경우 어디서나 가상으로 감상할 수 있기 때문에 증강현실 기술 발전 또한 TV의 도태에 한몫할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홀로렌즈로 TV를 시청하는 모습이다.
한국에서는 2012년 12월 31일 오전 4시부터 서울과 경기도권 지역을 마지막으로 1956년 이후 56년간 지속되던 전국 지상파 아날로그 방송이 전면 중단되었다. 이에 맞게 2013년 1월 1일부터 새로운 디지털 방송 시대가 개막되어 불필요한 HD 로고를 없애고 영상을 16:9에 맞게 제작하고 있다. 이제 디지털 방송 리시버를 달거나, 기존 아날로그 TV를 교체하지 않으면 방송을 볼 수 없다. 다만 기존 아날로그 TV 이용자들에게는 정부에서 무상 임대 방식으로 디지털 → 아날로그 변환 셋탑박스를 제공해 준다. 일반 안테나를 이용하여 TV시청을 하는 가정에만 해당하며 유선방송, 케이블TV, IPTV, 위성방송인 스카이라이프 시청 가정은 해당 사항이 없다. 현재 케이블TV 방송사는 아날로그 TV 수신기에 DTV 수신 장비를 달아주는데, 하나는 지상파 DTV처럼 작동하는 방식, 또 하나는 스카이라이프처럼 셋톱박스를 설치한다.
디지털 수신기 보급이 미비한 북한 주민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정부는 전방 지역 아날로그 송출을 유지하기로 했다. 기사 1, 기사 2 전파라는 특성상 파주, 동두천, 연천, 포천 등 최전방 지역은 수신이 가능했다. 가령 송신소가 근처에 있는 동두천시, 연천군이라든가. 단, 북한과 중국의 아날로그 TV 방식은 PAL이라서 한국용 NTSC TV는 수신 불가능하다. 북한을 향해 송신되는 KBS1 아날로그 전파는 PAL 방식 10번으로 통일이 될 때까지 송출될 것으로 전해졌다. 멀티 시스템 수상기[31] 또는 TV수신카드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국에서 수신은 전혀 불가능하다. 북한지역에서는 따라서 PAL방식으로 계속해서 시청중일 것으로 추정된다. 접경지역과 평양 남부 일부지역에서는 약한 전파로도 멀리까지 신호 전달이 가능한 DTV 특성상 ATSC방식으로 DTV수신을 직접 하는 북한 주민들이 상당히 많다고. 북한 내부의 태블릿과 노트북 보급도 일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화이트박스 태블릿 가운데 TV수신기능을 가진 모델들이 상당히 많은데, 그것들이 흘러들어간 듯하다. 링크[32] 다만 평양 거주 상류계층을 제외하고 남한과의 접경 지역에서 PAL 방식으로 시청하는지는 아직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보통 이런 통계들은 탈북자들의 증언에 의존하는데 알려져 있다시피 탈북자들이 많이 발생한 곳은 평안북도나 량강도, 함경북도 같은 북중 접경지대다.
KBS1의 PAL 송출 영향을 간접적으로 가늠해 볼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있는데, 바로 연변라지오TV방송국 등 중국 동북지역의 조선족 동포들을 대상으로 하는 조선어 채널들이 그것이다. 여기서 자체제작하는 프로그램들은 2010년대 들어 진행자의 말씨, 무대 디자인, 방송 연출 기법 등이 영락없는 KBS1의 레귤러 프로다. 다만 이는 한때 인기 있던 위성방송 수신기의 불법 수입도 영향이 있다.
2.6. 2020년대
기존의 TV로서의 기능이 도태되고 있다. 2010년대 후반부터는 컴퓨터의 일종으로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이를 테면 드라마 같은 경우 넷플릭스를 쓰는 용도로 바뀌고, 현재는 화면 잘나오는 TV에 스마트 셋톱박스를 연결한 뒤에 넷플릭스, 왓챠플레이 등을 구독하여 온라인 스트리밍으로 드라마, 영화, 유튜브 등을 본다. 아니면 아예 스마트 TV로 자체 앱을 깔든지 스마트폰과 연동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TV 프로그램 방송을 굳이 텔레비전이 아니더라도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볼 수도 있다. 즉,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리모콘 딸깍거리며 채널을 돌리는 방식의' 기존 형태와는 달라지는 것이다.선술했다시피 TV는 그 기능 중 상당 부분을 유튜브 등에 빼앗겼고 1990년대~2010년대 초반에 비해 텔레비전 프로그램들 시청률이 떨어지는 실정이다. 요즘은 지상파 프로그램도 0~1% 대가 나오는 편이며, 10% 이상 받기도 힘들어진 상태다. 그나마 일부 잘 나가는 지상파나 종편, 케이블 프로그램 정도가 체면치레를 하고 있으나,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거의 중장년층 이상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들인 관계[33]로 젊은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TV는 나이 든 사람들을 위한 미디어'라는 인식이 강해지고 있다. #[34]
과거에 한국 전역을 휩쓸었던 예능, 만화, 개그 프로 등이 종영 및 컨셉트 변화 등으로 인해 추억이 되어버린 상황이다. 단, TV라는 물건 자체가 사라진다기 보다는, 기존 TV 프로그램들 방식이 바뀐다고 보면 된다. 방송사들도 TV만 의존하지 않고 인터넷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35] TV는 TV 프로그램만이 아닌, 더 넓은 의미의 영상 컨텐츠들을 보는 기기로 바뀌어 가고 있으며, 대형 모니터나 프로젝터같은 포지션으로 변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 하여도 가정에 TV를 두지 않는 경우 또한 늘어나고 있으며 모니터로의 사용처 변화 또한 'TV'라는 분류가 의미가 없어지고 흡수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텔레비전'의 범위는 아주 넓다. 유튜브, 인터넷 방송 등도 텔레비전의 정의에는 전부 포함된다. 지금 바로 이 순간 스마트폰, 컴퓨터, 태블릿 등 수많은 디스플레이들이 텔레비전의 역할을 하고 있다.
단순히 한 프로그램이 특정 시간대만 방영되고, 그것을 보기 위해 스케줄을 따로 맞춰 고정된 화면을 바라봐야 하는 기존 시스템은 자신이 원하는 프로그램을 언제 어디서든 시청할 수 있는 유튜브나 OTT 서비스를 위시로 한 스마트폰이나 PC에 비해 굉장히 불리하다.[36] 즉, 1980년대에 주류매체가 라디오에서 TV로 변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 재현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90년대 전화기와 지금 스마트폰이 모양, 기능이 같은 물건이 맞나 싶을 정도로 판이해졌듯이, TV도 같은 절차를 밟게 될 전망이다.[37]
한편 이렇게 TV가 일부 프로그램을 제외하면 사람들에게 외면받고 시대에서 도태되면서 새로운 수요층으로 노년층을 찾게 되는데, TV 방송사들은 노년 시청자층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TV조선은 미스트롯 시리즈, KBS는 나훈아 콘서트를 방영하여 노년층들의 수요를 모으고 있는 한편, 각종 OTT 등에 구작과 신작을 판매하면서 사업 모델을 기존의 플랫폼 중심에서 콘텐츠 중심으로 앞다투어 전환하고 있다. # # #
2020년 대 들어서는 지상파, 종편할 것 없이 시청률 파이가 줄어들고 있으며, 장수 프로그램 정도만 명맥을 잇고 있다. 신생 예능들은 2~3개월도 못 가고 종영되는 일이 빈번하며[38], 그나마 성공한 건 일부 드라마나 정신적 후속작, 신선한 포맷을 차용한 예능 정도다.
2020년 TV 자체가 돌돌 말려 들어가는 TV가 출시되었다.
3. 종류/규격
텔레비전 방송 방식 | ||||||
아날 로그 |
CCIR 비디오 포맷 | |||||
컬러 인코딩 방식 | ||||||
NTSC | PAL | SECAM | ||||
디지털 | ATSC | DMB | DTMB | DVB | ISDB | 원세그 |
HDR | ITU-R BT.2100 표준 | |||||
PQ | HLG | |||||
HDR10 · HDR10+ · 돌비 비전 |
3.1. 디지털 방송
3.1.1. ATSC
디지털 방식으로 미국에서 표준화되었다. 단, 기술 자체는 대한민국 기업이 간접 보유하고 있다. 특허 대부분을 LG전자를 비롯한 한국 기업이 갖고 있다. LG전자는 미국 자회사인 제니스사가 가지고 있는 거지만. 아무튼 미국식이 한국의 디지털 지상파 TV 방송 방식으로 채택되고 UHD 기술도 DVB-T2에서 ATSC 3.0으로 표준이 변경된 것에는 이런 측면이 큰 것으로 보인다. 변조방식으로는 8VSB를 사용한다. 2~6ch(54~88MHz)는 사실상 DTV 서비스가 불가능하므로 예비용으로 사용하고 7~13ch(174~216MHz)는 지상파 DMB용으로 사용하도록 되었다. 이전에 할당된 698~806MHz는 다른 용도로 분배하기로 결정.3.1.2. DVB
유럽 방식.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만, 호주 등에서 채택하고 있으며 전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방식. 지상파 표준인 DVB-T와 그 후속인 DVB-T2는 별다른 변조없이 이동수신이 가능하며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디지털 텔레비전 방식이다. HD에 특화된 방식은 DVB-T2이지만 대만과 프랑스 및 호주를 비롯한 몇몇 국가에서는 DVB-T 포맷으로 HD 방송이 실시되고 있다.한국의 경우 지상파 디지털 텔레비전 방식에서는 ATSC에 졌지만 Skylife에서 위성방송 전송방식인 DVB-S 방식을 채택하고 있고 2015년 6월, UHD 방송의 기술검증을 위한 시험방송이 DVB-T2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다만 UHD 최종 표준확정은 복잡다단한 어른의 사정으로 ATSC 3.0로 채택. UHD 표준 채택에는 하위 호환 문제도 중요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한국의 지상파 HDTV 표준이 ATSC이므로 ATSC 3.0을 UHD 표준으로 하면 이 표준의 UHDTV로 지상파 UHD와 HD 모두 시청할 수 있지만, DVB-T2를 UHD 표준으로 하면 UHDTV는 지상파 UHD 전용이 되고 지상파 HD를 시청할 수 없게 된다. UHD 방송 실시 이후로도 HD 방송은 장기간 존속할 텐데, 이렇게 되면 직접수신을 위해서는 심하면 TV를 2대 장만해야 하고, 이를 피하고 UHD와 HD 둘 다 한꺼번에 보려면 유료방송을 피할 방법이 없어 어느 쪽이든 시청자에게 부담을 야기한다. 같은 이유로 만일 한국이 DVB-T를 지상파 HDTV 표준으로 채택했다면 ATSC 3.0은 DVB-T2에 밀려 UHD 표준으로 뽑히기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다.
북한도 2018년부터 디지털 TV 방송을 개시하여 이걸 쓴다고 한다. DVB-T2. 의외로 중국 방식이 아닌 유럽식 기술표준을 썼다. 다만 그렇게 놀랄 것은 아닌게 기존 아날로그 TV규격이 유럽식인 PAL이었다.
- 공식 홈페이지: https://www.dvb.org
3.1.3. ISDB
일본과 필리핀, 태국, 몰디브, 남미 대부분 국가에서 채택하고 있는 디지털TV 전송 방식으로 사단법인 전파산업회(Association of Radio Industries and Businesses, ARIB)에서 관리한다. 모바일 방송으로 원세그가 있다.3.1.4. DTMB
중국 방식. 중국과 홍콩, 마카오에서 사용하는 디지털 텔레비전 방식이다.3.2. 아날로그 방송
CATV 대역을 지원하는 수상기는 Cable Ready라고 불렀다. 해외는 80년도 초반부터 생산하였으나 국내는 거의 1990년도 중반부터 생산한 듯 하다.[42][43][44]3.2.1. CCIR 비디오 포맷
3.2.2. NTSC
한국에서 사용되는 NTSC 방식의 경우 채널당 대역폭 6MHz씩으로 영상은 4.5MHz의 VSB으로 변조하며 음성은 1.5MHz의 대역폭으로 50~15kHz의 음성 신호를 FM으로 변조하여 전송한다. 이론적으로는 주파수만 맞으면 FM 라디오로 아날로그 TV 방송의 음성신호를 들을 수 있다곤 하지만 대한민국과 미국의 경우 라디오보다 주파수가 너무 낮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채널6번 빼고는 거의 불가능했다. 다만 일부 라디오 제조사들은 수신 대역폭을 넓혀서 '텔레비전 소리[45]'를 들을 수 있는 제품을 만들기도 하였다.- VHF
- 2ch~6ch: 54~88MHz: 원래 NTSC 초기에는 45MHz 대역으로 1ch가 있었으나 미국에서 타 무선통신과 겹친다는 이유로 해당 주파수대역을 회수했다. 또한 대역 특성상 노이즈가 많은 등 TV방송용으로는 영 좋지 않았던 것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채널번호가 방송사의 브랜드처럼 여겨지는 상황에서 채널번호를 하나씩 밀어 재할당하기가 곤란하자 그냥 1번 채널을 비워놓은 채로 표준화했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 참조. 한국의 FM라디오 주파수대역은 미국과 동일한 87.7 ~ 107.9MHz(200kHz)로 87.75MHz에서 6ch의 TV 음성전파와 겹친다. FM라디오[46]에서 SBS TV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이유.
- 7ch~13ch: 174~216MHz
- UHF
- 14ch~59ch[47]: 470MHz~746MHz, 휴대이동통신이 800MHz 대역을 사용하는데 채널과 채널 사이다.
- CATV
3.2.2.1. NTSC-J
일본에서는 NTSC를 자국에 맞게 변형해서 썼었다. 채널 1~3번의 주파수 대역이 타국에서는 FM방송[51]으로 쓰는 대역이었기 때문에 1번 채널이 존재했었다. 색온도는 9300K를 사용한다.[52]- VHF
- 1ch~3ch: 90~108MHz: 한국의 FM라디오/CATV 95, 96, 97ch 주파수대역과 거의 중복된다. 당연히 한국제 FM라디오를 가지고 일본의 1~3ch TV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참고로 일본의 FM라디오 주파수대역은 76~90MHz이며 일본에서만 이 대역이다. 이런 이유로 일본에서는 과거 국내/해외 수신 가능한 76~108MHz 밴드의 FM라디오를 만들었었다. 해외에서는 FM라디오로, 국내에서는 FM + TV 1~3ch 음성수신용으로. 일본의 아날로그 TV 송출 종료 이후로 일본내수용 라디오는 76~90MHz 대역만 잡히게 제작되었으나 최근 와이드FM 도입으로 다시 76~108MHz 대역의 라디오가 발매되고 있다.
- 4ch~12ch: 170~222MHz
- UHF
- CATV
13ch~62ch: 470~770MHz
일본 내수용 TV를 한국에 가져와서 수신을 하면 2~6번 채널을 수신할 수 없었다. 단 채널 미세조정 기능이 있는 경우 운좋게 수신할 수 있다고 한다.[55] 아날로그 케이블 방송도 마찬가지였는데 한국기준 2 ~ 6, 98 ~ 99(C13 ~ C14)[56]번을 제외한 7~64번 채널은 수신이 가능했다. 물론 최대 송출 채널은 미사용 번호가 존재하지만 97번까지 송출한다.
과거 경남 해안가 등지에선 일본방송을 수산하기위에서 채널 다이얼을 6번, 7번, 13번에 맞춰놓고 미세조정 다이얼을 끝까지 돌리곤 했으나 전자식 텔레비전이 보급된 뒤로는 Cable Ready를 지원하는 수상기에 유선방송으로 설정해 자동채널검색을 하곤 했다.
3.2.3. PAL
유럽 방식으로 디지털 전환 이전에는 세계적으로 폭넓게 이용되었다. 유럽에서는 SÉCAM을 사용하는 프랑스와 러시아를 제외한 유럽 전역이 이용했다. 폴란드나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발트 3국, 우크라이나등 동구권 국가들도 SÉCAM 방식을 체택했지만 1990년대 중반에 PAL로 방식을 전환했다. 그리고 남/동/북아프리카, 아르헨티나, 브라질[57], 오세아니아 등에서 정말 폭넓게 이용되었다.물론 한국/일본의 전파월경을 바라지 않았던 냉전시절 중국/북한도 PAL 방식을 사용. 상당수 국가들은 PAL과 SÉCAM을 동시에 송출했다. 원칙적으로는 NTSC와는 달리 채널 번호 1번부터 사용할 수 있지만 미국의 영향을 받은 나라들은 관습적으로 안 쓰기도 한다. 참고. 이건 북한도 마찬가지, 그런데 여기는 반미 성향이 강함에도 채널번호 1번부터 사용하지 않았다.
기계적으로 보았을 때 유럽의 1960~80년대 초반 텔레비전 수상기는 동시기 NTSC권 수상기와 채널을 돌리는 방식도 좀 달랐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로터리 방식(VHF, UHF 다이얼을 돌려서 채널을 바꾸는 방식)이 아니라 프리셋 버튼 방식 즉 자동차 라디오의 숫자버튼과 비슷하게 1에서부터 7까지 임의로 버튼이 있으면 각 버튼마다 일일이 실제 채널을 맞춰주는 방식이었다. 유럽의 몇몇 텔레비전 방송국이 채널 1 비슷한 이름을 달고 있는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 70년대 텔레풍켄 수상기의 채널 버튼)
NTSC와 PAL/SÉCAM과는 주사선 수부터 많은 것이 다르므로 한쪽 수상기로 다른 쪽 방식은 전혀 수신할 수 없다. 물론 가격이 비싼 겸용 수신기를 사용하면 세 방식 모두 수신 가능하다. 주로 중동지역처럼 같은 아랍어를 사용하면서 국가마다 TV 방식이 다른 지역을 위해 이런 수신기를 만들었다. 물론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필요 없다.
다만 북한에서 남한 방송 보는 경우에는 전방지역(파주, 동두천, 연천, 포천, 철원, 개성 및 그 외 북한 인접지역) 송신소 전파도달범위에 한해서 ATSC 디지털 HD방송이 PAL로 변환 후 동시에 송출되므로 현재는 필요 없다. 시청하는 것이 들키면 아오지로 가겠지만... 뒤집어 말해서 남한에서도 남한 지상파만 시청할 것이고 디지털 TV를 새로 구매하고 싶지 않다면 전방지역에서는 PAL->NTSC 컨버터를 달면 되긴 한다. 대개 이러느니 그냥 TV를 새로 사거나 전국에서 사용 가능하며 정부보조금도 제공되는 ATSC->NTSC 컨버터를 달겠지만, 어쨌든 굳이 대북선전을 위해 재전송되는 PAL 방식 KBS를 수신하고 싶다면 가능은 하다고 한다.
참고로 PAL/SÉCAM의 경우 UHF대역은 모든 지역이 동일하다.
- B/G, I, D/K: 47~806MHz
4. 대중매체에서
여러 대중매체에선 은근히 호러 쪽으로 자주 묘사되는 주 아이콘. 매체에서 주로 TV 속의 존재가 TV 밖으로 빠져나오는 연출이 자주 보인다.- 야마무라 사다코
- 우는 천사
- 방송이 끝난 뒤에는
- 트릭아트
The Twonky처럼 텔레비전 수상기 자체가 생명력을 지니는 작품도 있다. 호러라기보단 코미디에 가깝지만.
1990년대 ~ 2000년대까지만 해도 주파수가 안 잡히거나 스크램블이 걸려 화면이 나오지 않는 경우 기계의 옆이나 뒤를 쳐서 다시 화면이 나오게 하는 경우가 있어 드라마나 만화의 클리셰처럼 여겨졌지만, 방송송출이 안정화된 2010년대부터는 거의 사라졌다. 그 외에 외지에서는 전파를 잡기 위해 기와집의 지붕 위로 올라가 안테나의 방향을 고치는 일도 있었다. 나라는 다르지만 아이언맨 3의 개리가 대표적인 사례.
각종 매체에서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의 대중화 이전 시대를 표현할 때는 사람들이 가게 유리벽 안에 있는 텔레비전이나 번화가 빌딩 위에 있는 옥외 광고판에 등장하는 텔레비전 방송을 보고 뉴스를 알게 되는 장면이 흔히 등장한다.[58]
4.1. 동요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2번 반복)
춤추고 노래하는 예쁜 내얼굴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텔레비전에 엄마[A]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2번 반복)
아기가 엄마[A]하고 부를테니까
텔레비전에 엄마[A]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작사/작곡 - 정근
김지호의 춤추는 동요나라, 노래하며 춤추는 꾸러기 율동동요,
어린이 만화 동요 노래방에 나오는 노래 제목이다.춤추고 노래하는 예쁜 내얼굴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텔레비전에 엄마[A]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2번 반복)
아기가 엄마[A]하고 부를테니까
텔레비전에 엄마[A]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작사/작곡 - 정근
5. 기타
그러니 제 말 들으십쇼. 똑바로 들으십쇼. 텔레비전은 진실이 아닙니다! (Television is not the truth!) 텔레비전은 놀이 공원이란 말입니다! 서커스이고, 카니발입니다! 무용수와 이야기꾼과 가수와 춤꾼과 저글러와 괴물과 사자 조련사와 축구 선수가 놀아납니다! 지루함을 달래서 돈을 쓸어담을 뿐입니다! 그러니 진실을 원하신다면 하나님에게 가십시오! 상담을 받으십시오! 자기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오직 그렇게 할 때만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것입니다!
― 영화 네트워크(1976) 中 영상 참조
종종 '바보상자'라고 불리기도 하며 이 때문에 투철한 교사나 교수 같은 교육자 집안은 아예 텔레비전이 없는 경우도 있다. 인터넷을 즐기는 원룸 자취생의 집도 텔레비전이 없는 경우가 많다. 1990년 6월
가와시마 키코가
일본 황실로 시집올 때, 그녀의 친정에 텔레비전이 없어 가와시마 가문의 독특한 교육이 화제가 되었다.
키코 비의 친정아버지 가와시마 타츠히코(川嶋辰彦)는 저명한 경제학자로
가쿠슈인 대학 교수였으며, 가와시마 가문은 대대로 학자, 의사, 교수 등이 많이 나온 집안이다.― 영화 네트워크(1976) 中 영상 참조
- 긴급지진속보 등 TV는 위기 상황을 가장 빨리 접할 수 있는 매체가 되기도 한다.
-
"텔레비전은 처음 6개월이 지나면 시장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매일 합판으로 만든 상자를 보는 데 지겨움을 느낄 것이다."
― 대릴 자눅(Darryl F. Zanuck). 당시 20세기 폭스 회장
이 말은 현재 와서 희대의 망언으로 회자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폭스사는 이후 방송 프로그램 제작에도 뛰어들었고, 루퍼트 머독의 뉴스 코프에 인수된 이후 아예 전국 지상파 TV 방송망도 개국한다.
- 유럽 국가의 텔레비전 방송은 프로그램과 프로그램, 혹은 프로그램과 광고 사이에 아나운서가 음성으로, 혹은 직접 화면에 나와서 다음 프로그램이나 예고편에 대한 해설을 해주는 개념이 존재한다. 다만 직접 화면에 나오는 형태는 비용이나 스튜디오 공간문제 등으로 인해 사라져가는 추세. KBS TV를 보다 보면 "주말의 KBS 1TV" 따위의 제목을 달고 아나운서나 아이돌들이 주말 편성표를 안내해 주는 것이 있는데, 맹장처럼 남은 유럽식의 흔적이라고 보면 된다. 한때 KBS 1TV도 1990년대 초반까지 프로그램 사이에 아나운서가 나와서 이어질 프로그램을 설명해 주기도 하였다. KBS 1TV 항목 참조.
-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은 옛 세대들은 일본식 축약어인 '테레비(テレビ)'라고 부르고 있다.[64] 젊은 세대들에게도 테레비는 상당히 익숙하며 흔하게 사용한다. 다른 일본식 표현들은 대부분 사용을 지양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나 유독 테레비만은 아직도 사회적으로 거부감없이 흔하게 쓰이고 있다. 또한 현행 외래어 표기법이 마련되기 이전인 1970년대 광고 등에서는 텔리비젼, 아니면 '텔레비죤[65] 등 오늘날에는 생소한 표기도 자주 등장했다.
- 2010년대부터 텔레비전이 LCD와 HD 해상도로 대동단결하고 DVI, HDMI 등의 출력 단자를 채용함에 따라, 컴퓨터와 연결해서 모니터 대용으로 쓸 수 있게 되었다. 반대로 컴퓨터 모니터에 IPTV를 HDMI로 연결해 소형 TV로 쓸 수도 있다. 단 일부 모니터는 TV용으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스피커가 없어서 소리를 못 들을 수도 있다.[66]
- 지금이야 텔레비전 놓는 방향이 전 세계적으로 통일(?)되었지만, 과거 브라운관 아날로그 TV시절에는 나라마다 차이가 있었다. 한국은 예나 지금이나 거실 벽면 가운데에 놓지만, 서양권과 일본은 거실 구석에 대각선 방향으로 놓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당연히 요즘 TV는 화면이 크다보니, 대각선으로 안들어간다.
- TV 보기를 꺼리거나 아예 혐오하고 멀리하는 사람들도 은근히 있다. 우선 요즘 나오는 티비는 특히나 화면이 커서 전자파( 전자기파)를 더 많이 빠르게 쐬느라 금세 피로해지기도 하고(다만 전자기파의 인체 유해성은 아직까지 과학적으로 검증된 바 없다.), 특히 뉴스나 스포츠 중계, 드라마 같은 경우 싫어하는 사람들은 소리가 들리는 것도 시끄럽게만 느끼기도 하며, 여러 정보와 각종 뉴스를 인터넷으로도 요즘 다 볼 수 있는 세상에 사실 신세대는 TV보다는 컴퓨터로 다 한다. 뭣보다 TV는 거실에 두고 컴퓨터는 방에 두는 방식이 일반적으로 퍼져있어 거실에 가족이 티비 켜서 자기는 관심도 없는 프로그램 틀어두는 것을 시끄러워서 싫어할때가 있다. 특히나 귀가 어두운 중장년 세대들은 음량 더 크게 키워서 문제가 된다. 다만 혼자 살거나 혼자 있는 경우 외로워서 그냥 적당한 음량 수준으로 티비를 켜두기도 한다. 자동 꺼짐 기능은 오래 전부터 있었으니 취침하면 알아서 전원종료.
- 리모컨이 등장하고 TV의 레버가 사라진 지금에도 수신 채널을 다른 곳으로 변경하는 경우 '틀다'는 표현이나 '돌린다'라는 표현을 지금도 쓰는데 이는 옛날 로터리식 TV의 채널을 변경하는 방식이 레버를 직접 틀어서 돌리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텔레비전 방송을 1976년부터 방송하기 시작했는데 컬러TV로 바뀌어가고 있던 시기에 방송을 시작하다보니 처음부터 컬러방송을 하였다. 다른 아프리카 국가보다도 늦었고, 다른 대륙 국가보다도 늦었다. 이는 도입하기 전의 총리였던 헨드릭 페르부르트가 텔레비전을 악마의 산물로 보고 도입을 거부, 이로 인한 금욕주의 정책 때문이라고 한다.
- 브라운관 시절에는 TV가 과열 등으로 폭파되어 인명피해가 나는 사례가 수차례 있었는데, 대표적인 예가 1978년 3월과 12월에 두 차례 발생한 대한전선 TV 폭발사고가 있다.( 1차, 2차)
- KBS2 위기탈출 넘버원 30회(2006년 2월 25일)에서 TV 추락사고를 방영했다. 지금도 위험하기는 하지만 30회가 방영했던 2006년에는 아직 CRT TV[67]가 많았던 시기였다. 특히 CRT TV는 무게중심이 앞쪽으로 쏠려있어 넘어뜨리기 쉬우며 압사 사고의 위험까지 있다. 실제로 2006년 11월달에는 무게가 50kg이 넘는 브라운관 tv에 깔린 생후 9개월된 아이가 압사당해 숨진 사고가 뉴스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 여담으로 2002년 한국소비자보호원이 텔레비전 전도로 인한 어린이 안전사고에 대해 소비자 경보까지 발령했지만 여전히 사고는 끊이지 않았으며 2006년 한 해동안 발생한 텔레비전 전도사고가 35건으로 최종 집계되면서 아기를 키우는 부모들에게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
-
LCD TV가 대중화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LCD TV는 충격에 약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TV를 치거나 짓눌러 망가뜨리는 일이 간혹 발생하기 시작했고,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TV 보호가드 제품을 찾는 부모들도 종종 보인다. # 가끔 고양이도 TV를 치거나 깨물어서 망가뜨린다. # - LED TV가 대중화되면서 상황이 또 바뀌었다. LED가 문제라기 보다는 툭 치면 넘어갈 정도로 얇고 가볍지만 크기는 사람 몸집보다 큰 대형TV의 특징이 새로운 문제가 되고 있다. 아이가 TV를 잡아 당기면서 TV가 전도되어 아이가 다칠 위험이 커진 것이다. 2015년 전후로 미국에서는 매 3주 마다 어린이들이 TV가 넘어져서 사망한다는 뉴스가 있었다고 한다. #
- 미국에서는 OTT 서비스가 부상하면서 아예 케이블 방송을 끊어버리는 경우도 잦다. 우리나라야 매달 몇천원 나가는걸 끊기가 귀찮아서라도 그냥 둘다 쓰지만 미국은 케이블 방송 요금도 꽤 나가기 때문이다.
- 과거 1970년대 시절만 해도 유럽은 미국과 함께 TV시장 양대산맥이었을 정도로 잘 나간 적이 있었다. 1970년대 서독만 하더라도 TV 만드는 회사만 10개가 넘었었지만, 1970년대부터 떠오르기 시작하는 일본 가전회사들[68]이 대거 성장하면서 1980년대에 상위권 자리를 내준 뒤 대부분 몰락했다. 현재 뢰베(Loewe), 메츠(Metz),[69][70] 테크니자트(TechniSat), 보트만(Wortmann). 이렇게 4개만 살아남았고, 이마저도 사실상 독일과 그 주변 내수용에 그친다. 어느정도냐면 다 합쳐도 LG전자만도 못한 수준이다.
- 프랑스의 톰슨(Thomson),[71] 이탈리아의 브리온베가(Brionvega) 등도 전부 망하거나, TV 사업 철수했다.
- TV 사업을 접거나 아예 망한 회사들은 이쪽 방면에 대해 관심있는 사람들 외엔 한국에선 평생 거의 들어볼 일이 없지만, 그나마 한국에서 조금 인지도가 있다 싶은 회사를 꼽으면 그룬디히 정도다.[72] 참고로 2003년 파산한 후 2007년 터키의 코치 그룹이 인수해 아르첼릭 그룹 산하에 두었으며, 아르첼릭 그룹은 그룬디히를 유럽 백색 가전 상표로만 활용하고 있다.
- 잘 나가던 일본 회사들은 2000년대 들어서 한국 삼성전자, LG전자가 급부상하면서 내리막을 걷게 되고, 2010년대 이후엔 중국 회사들이 급부상하고 있다. 2010년대 후반부터 전세계 TV 시장은 하이얼, TCL 등이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 텔레비전 하면 텔레비전 방송과 수상기를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조금 오래된 문헌 등에는 텔레비전이 영상 디스플레이 및 비디오 자체를 뜻하는 용어로 쓰이기도 한다.
- 2021년에 일본 메이지대학의 미야시타 호메이 교수가 '맛보는 TV'를 발명했다. #
- 전자식 텔레비전는 입력단자 관련이 아닌 채널개조같은걸 하려면 생산라인 단계까지 가야한다. TV마다 MCU와 단자 개수가 다르기 때문에 MCU를 교체하는것 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물론 단자 개수가 동일하면 가능하긴 하다. 단 LCD는 기판과 일체형이라 불가능하고 CRT만 어찌가능한데 전류가 방전되어야해서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6. 참고 자료
-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1권 - 강준만 저. 인물과사상사. 2003. p272~279.
7. 관련 문서
8. 제조사
그외 등등
[1]
망원경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서 telescope다.
[2]
외래어 표기법상 원칙
[3]
일본식 표현인 テレビ에서 유래했다.
일제강점기 및 전후세대와 그 영향을 받은 세대에서 주로 쓰이고 있다.
[4]
영국식 애칭 및 속어.
[5]
최초로 상용화한 인물 타이틀을 달았지만, 막상 생전에는 크게 이득을 보지 못했다. 주력했던 기계식이 표준이 되지 못하자
방송사를 차리려고 전 재산을 털어놓았다가 화재로 인해 빈털터리로 전락했다. 게다가
세계 대공황과
제2차 세계 대전이 겹쳤을 때라서 널리 보급이 되지 못했던 시절이었고, 널리 보급되기도 전인
1946년에 세상을 떴다. 사실 전후 TV방송을 개시한 나라가 하나 둘 생겨났을 때였기 때문에 조금만 오래 살았어도 후학을 양성하는 등 최소한의 과실을 따 놓을 공상이 크지만, 오래살지 못해서 그 과실을 맛보지 못한 예이다.
[6]
독일 제2공영
ZDF의 F가 이것이다. 즉, ZDF=Zweite(2nd) Deutsch(독일) Fernsehen(TV).
[7]
여담이지만, DLP 방식의
프로젝터가 이 방식을 사용한다.
[8]
리뷰한 영상이 존재하는데, 색원판이 돌아가는 소리가 상상 이상으로 거슬린다. 한밤중 고요한 방에서 보는데 색원판 모터 소리가 크게 난다고 생각해보자. TV 소리가 너무 커서 이웃집까지 들릴 정도가 된다.
[9]
단자/비디오 항목처럼 크로마값이 S단자부터 다르거나 그보다 고급은 신호를 뭉개지 않고 나눈정도 차이가 나는데 S단자차럼 FM라디오와 동일한 음성대역을 간섭없이 준 것이 아니어도(컬러신호대역이 온전히 들어갔다.) RCA가 상대적으로 선명해진다는 것이다. 무선송출을 제외하고 보더라도 선명해진다.
[10]
미국만 봐도 컬러TV가 대중화 되지 않았을 시점이었다.
[11]
미국에선 컬러방송 초기에 'In Color'라는 자막을 띄웠고, 영국 BBC도 1969~1974년까지 ID/시보 영상마다 'BBC1 COLOUR' 식으로
자막을 띄웠다. 21세기 이후 워터마크로 뜨는 '(방송사명)HD 혹은 UHD'를 생각하면 된다.
[12]
과거의 평균 노동 가치와 상대 임금 수준은 현재보다 대체로 낮았음을 감안. 물가차이를 보정해도 60년대 직장인이 연봉을 다 모아서 살 수 있는 물건과 현대의 직장인이 연봉을 다 모아서 살 수 있는 물건이 다른 점을 감안하면 된다. 다른 말로 하면 평균 구매력의 상승.
[13]
1960년부터 컬러 TV방송을 도입한 일본은 1971년까지 전면 컬러화를 달성했고
#, 1970년대 후반에는 99% 이상이 컬러였다고 한다. 1980년대는 100%였다.
[14]
다만 캄보디아는 원래 1966년 2월 2일에 국영 방송국이 세워진 적이 있었지만, 1975년 4월 17일에
크메르 루주가 집권하자마자 방송국을 파괴하고 스태프들을 모두 처형했기 때문에 이후의 혼란상까지 겹치며 국영 방송국이 1983년 12월 3일에야 재건되었던 것은 감안해야 한다.
[15]
물론
리히텐슈타인은 코모로보다 2년 늦은 2008년 8월 15일에 자체적인 첫 TV 방송국이 개국되었지만, 리히텐슈타인은 인구가 4만 명 미만인
미니국가라는 것을 감안해야 하는 데다가 애초에 리히텐슈타인 국민들은 1950년대부터
오스트리아와
스위스의 TV 방송을 대체용으로 시청하고 있었다.
[16]
2004년에 시작되었다고 기록된 자료도 있다. 참고로 당시 키리바시의 방송국은 국영 방송국 1개밖에 없었는데, 이 방송국은 평일에만 1시간 정도 방송된 데다가, 방송 구역도 수도권 인근에 국한되었다고 하는 등 사실상 시범 방송 수준에 머무른 데다가 재정 문제 등의 이유로 2013년 3월부터 5년간 TV 방송이 중단된 적이 있었다.
[17]
진공관식을 뜻하는 영어 "Vacuum Desk Type"에서 앞글자 VD를, 19인치라는 의미에서 19를, 첫 텔레비전이라는 의미에서 1을 더해 만든 모델명이다.
[18]
기존 TV보다 전력소비량 30% 감소, 수명 2배, 선명도 10% 증가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성능을 자랑하는 광고다. 프리미엄급 TV에 속했다.
[19]
네덜란드 필립스, 일본 NEC에 이어 세 번째다.
[20]
화면이 갑자기 줄어들거나 일그러지는 현상.
[21]
전원을 끌 때 브라운관 형광막이 타들어가 점 모양 불빛이 3~4초간 뜨는 현상. 이럴 경우 수상기 수명이 줄어든다.
[22]
화면이 쉽게 흐려지거나 얼룩지는 현상.
[23]
당시의 TV채널에선 CATV대역이 없어 유선 95, 96, 97, 22, 33번에 해당하는 1, 2, 3, 4, 12번을 직접 수신할 수 없었고, 채널을 6, 7, 13번에 맞추고 미세조정 다이얼을 돌려서 해당 주파수를 맞춰야 했다.
[24]
Zweikanalton 방식. A2 스테레오 방식으로도 불린다.
[25]
2007년까지는 CRT가 세계 시장에서 1위였으나, 2008년 LCD가 CRT를 역전하게 된다.
[26]
영업장마다 케바케이긴 하다.
[27]
現
한국소비자원.
[28]
삼성전자 측 마케팅 용어이다. 이후 LG전자도 같은 낱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가리키는 의미는 서로 다르다. 그러나 최초로 사용한 삼성은 2017년 들어서 플래그쉽 TV 라인업에 사용하던 SUHD를 QLED로 변경한다.
[29]
2010년대 초반만 해도 CRT 소지하는데가 다소 있었고 심지어 일부 판매했고 2010년대 초반에는 CRT를 소지하긴 해도 LCD TV를 대부분 구입했을 것이다. 2010년대 중반에는 시골과 도서지역, 일부 오래된 곳을 제외하면 소멸되었고 2010년대 후반 들어서는 시골집이나 도서지역도 TV를 바꾸기 시작하면서 2020년 이후로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싶다. 물론 드물게 소지하는 곳도 있다.
[30]
삼성은 2007년, LG는 2010년 국내에서 볼록/평면 브라운관 생산을 전면 중단하였다.
[31]
중소기업 TV들은 대다수가 멀티시스템을 지원하지만 입/출력만 지원하며 유럽에서 PAL방식 VCR을 직구하여 연결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다.
[32]
이런 제품들은 타 국가로 여행을 가거나 하는 경우로 인해 멀티 시스템 튜너를 내장하고 있다.
[33]
젊은 층들을 대상으로 했던 TV 프로그램들마저 2020년을 전후하여 중장년층으로 목표 대상을 옮겨가는 추세다.
[34]
2021년 하반기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어쩔티비라는 유행어도 이런 인식에서 기원했다는 가설도 있다.
[35]
음악 방송처럼 10~20대를 모으기 위한 프로그램은 주로 유튜브 등으로 조회수를 모아서 홍보하며 그 때문에
시청률 무용론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36]
당연히 TV로도 인터넷을 할 수 있지만, 검색 시 리모컨으로 한글자 한글자 눌러야하는 불편함이 있어 현재의 TV는 큰 화면 외에는 휴대폰과 컴퓨터보다 뛰어난 점도 없다는 지적도 있다. 그래서 아예 리모콘 뒷면에 키보드가 달린 제품들도 나왔다.
[37]
라디오의 기능이 TV 등으로 계승된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38]
사실 이는 처음부터 드라마처럼 횟수를 정하는 시즌제 예능 프로그램이 많아진 영향도 존재하지만, 그 시즌제 중에서도 성공한 건 거의 없는 상황이다.
[39]
텔레비전 기능이 있는 제품 한정.
[40]
규정상 69ch(806MHz)까지나 실제로는 51ch까지만 사용
[41]
2005년 이전 출시된 TV는 125ch까지, 2006~2013년 출시된 TV는 135ch까지 지원한다.
[42]
국내에서 생산된 Cable Ready 수상기중 2 ~ 36CH, 95 ~ 99CH를 수신할수 있는 수상기가 있는데 이것은 NTSC-J 수상기(1CH ~ C35)의 MCU에서 NTSC-M VHF-Low 대역을 추가하여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에 생산된 수상기는 2 ~ 79CH 또는 2 ~ 125CH까지 가능하며 최근에 나온 수상기들은 2 ~ 134CH를 수신할 수 있다.
[43]
당시 삼성전자의 경우 확장채널이라고 불렀다.
[44]
일부 수상기들은 OSD가 영어로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주로 구형 국산 수상기나 당시 소니, 히타치, 파나소닉, JVC와 같이 미국/캐나다/멕시코산을 들어온 경우.
[45]
이걸 응용해서 일본(5 ~ 6CH)이나 OIRT FM(3 ~ 4CH)을 청취헐수 있다.
[46]
87.7MHz로 시작하는 미국 내수용 카오디오도 가능.
[47]
83ch(~890MHz)까지 할당되어 있으나 규정상 69ch(~806MHz), 실제로는 59ch(~746MHz)까지만 사용. 하지만 일부 지역의 중계소처럼 60ch대에 배정된 경우가 있다.
[48]
국내에서는 100ch 이상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49]
2005년 이전 출시된 TV는 125ch까지, 2006~2013년 출시된 TV는 135ch까지 지원한다.
[50]
한국에서는 2011년도 까지 유휴대역으로 분류되었다. 사유는 음악유선방송, 항공기 무전과 겹친다는 이유때문인데 음악유선을 제공하는 종합유선방송이 드물었고 겸업하던 중계유선방송은 종합유선으로 사업변경, 폐업 등으로 축소되어 유휴대역이 되어버렸다.
[51]
한국을 포함한 M방식 국가들은 CATV 95 ~ 97ch
[52]
기존의 NTSC-M은 6500K.
[53]
물론 C35번까지 스크램블을 걸지읺는 SO도 있긴했다.
[54]
SONY: ~C35, JVC: ~C38, 사실 대부분 수상기들이 C35번까지만 지원했다.
[55]
다이얼 식인경우
[56]
유휴대역이다.
[57]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은 System N/M호환이다.
[58]
대표적으로 2013년작 tvN 드라마 《
응답하라 1994》 12화에서 성나정이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뉴스 속보를 접하게 되는 매체가 빌딩 위에 있는 옥외 광고판의 뉴스 속보를 시내버스 안에서 보고 알게 된다. 다만 이 장면은 옥에 티라고 볼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A]
아빠/형/누나/친구이름 등 변형해서 부르기도 한다.
[A]
[A]
[62]
가장 대표인게 아이돌 가수들이 루시퍼 등을 내세운다는 이유.
[63]
아비지트 배너지, 에스테르 뒤플로 저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 참고.
[64]
이것은
북한도 마찬가지로, 장년층 이상 세대는 테레비라는 단어를 흔히 사용한다.
[65]
북한에서는 이 표기가 표준이다.
[66]
그대신 외부스피커 단자가 있는 제품이 있어서 스피커를 연결하면 된다.
[67]
4:3 TV가 가장 많이 보급되었고 16:9는 유럽(HD-MAC, PALplus)/일본(하이비전 시험방송/와이드 클리어비전)을 중심으로 1990년도에 생산되었지만 완전한 디지털시대인 2000년에야 보급되었다. 참고로 와이드TV는 더 무겁다!
[68]
대표적으로
소니,
파나소닉,
도시바,
산요전기,
히타치,
미쓰비시전기 등.
[69]
한국에서도 팔고는 있다.
[70]
한국에서 검색하면 대부분
뉴욕 메츠나 전혀 엉뚱한거만 나온다. 메츠 TV로 검색하자.
[71]
과거 대우전자에서 인수하려고 하자, 프랑스에서 난리난 그 회사. 현재는 망해서 중국
TCL에 넘어갔다.
[72]
한국에선 오디오 쪽으로 들어본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외는 전기 면도기로 접해보는 정도다. 카오디오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