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대영제국의 식민지|
대영제국의 식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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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령 식민지 Crown Colony는 1982년 법령 개정에 따라 영국 속령 British Dependent Territory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이후 2002년 다시 명칭을 영국 해외 영토 British Overseas Territories로 개정하여 현재에 이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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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팔 왕국은 1923년까지 영국령 인도 제국 정부에게 외교권을 통제당하여 외무는 오로지 영국 통감(British resident)에 의해 행사되었지만, 다른 토후국들과는 달리 내부 행정에 대해서는 완전한 독립을 유지하였던 보호국이었다. 그러나 완전히 독립한 1923년 이전까지는 간혹 인도 제국의 토후국 목록에 이름을 올리기도 하였다. Imperial Gazetteer of India(1909) | |||||||||||||||||||||
자치령 Dominio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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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디지아는 일방적으로 식민지 남로디지아가 자치령을 선포한 것으로, 영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 |||||||||||||||||||||
조차지 Concessio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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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왕국 · 이란 제국* | |||||||||||||||||||||
* 이란 제국은 1941년 대영제국과 소련의 페르시아 침공 협공으로 점령되어, 영소군 각각이 각 점령지에 주둔하였고 또한 각각의 점령지를 통치하는 분할 통치가 이뤄졌다. | |||||||||||||||||||||
군정 Military Administratio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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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덴 · 에리트레아 · 소말릴란드 · 리비아 |
홍콩 Hong Kong | 香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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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의 식민지 | ||
기[1] | 문장 | |
1841년 ~
1941년 1945년 ~ 1997년 |
||
성립 이전 | 반환 이후 | |
청나라 |
중화인민공화국 [[홍콩|{{{#!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ee1c25; font-size: .8e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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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12169><colcolor=#fff> 언어별 명칭 |
<colbgcolor=#fff,#1f2023>
영어: Hong Kong 광동어: 香港 (Hēunggóng) 중국어: 香港 (Xiānggǎng) |
|
면적 | 1105.5 km²[2] | |
위치 |
[[틀:국기| ]][[홍콩| ]][[틀:국기| ]] |
|
국가 | God Save the King/Queen | |
수도 | 빅토리아 시티[3] | |
정치체제 | 영국의 식민지[4] | |
국가원수 | 국왕 | |
정부수반 | 총독 | |
주요 총독 |
존 보우링(1854~1859) 데이비드 트렌치(1964~1971) 머레이 맥클레호스(1971~1982) 에드워드 유드(1982~1986) 데이비드 윌슨(1986~1992) 크리스 패튼(1992~1997) |
|
언어 | 영어, 광동어 | |
문자 | 로마자, 한자 | |
종교 |
개신교 (
성공회),
중국 토속 종교, 유교, 불교 |
|
민족 | 영국인, 광동인, 인도인 등 | |
통화 | 홍콩 달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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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령 홍콩(British Hong Kong)은 1841년부터 1997년까지 156년 동안 존속했던 영국의 식민지이다. 중간에 1941년부터 1945년까지는 홍콩일치시기로 일본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1997년 7월 1일에 영국이 중국에 반환하면서 해체되었으며 그 후신이 현재의 홍콩 특별행정구이다.영어로는 이 시기를 영국령 홍콩(British Hong Kong)으로 칭하고, 중국어로는 이 시기를 영국 소속 홍콩이라는 의미에서 영속향항( 英 屬 香 港)[5]이라고 한다. 현재 홍콩 특별행정구는 홍콩 차이나(Hong Kong China)라고도 칭한다.
2. 역사
역대 깃발[6] | ||
1843~1871[7] | 1871~1876 | 1876~1955[8] |
1941~1945[9] | 1955~1959 | 1959~1997 |
2.1. 영국의 점령
영국은 청나라와의 교역을 계속 시도했으며 결국 영국 동인도 회사가 건륭제 이후 광저우에 무역항인 공행을 설치한 후 무역을 해나갔지만 영국의 무역적자가 심화되자 마약인 아편을 팔아서[10] 이득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중국인들의 아편 중독이 심각해지자 1839년 청나라 조정의 승인으로 임칙서가 아편 수입을 금지했고 영국은 여기에서 빌미를 잡아 중국을 공격해 청나라와 영국 간 제1차 아편전쟁이 발발해 1841년 광저우 남쪽의 작은 어촌이던 홍콩섬이 영국 해군에 의해 함락당했다. 당시 영국 해병대가 당시에는 광둥성 신안현(新安縣)[11]의 부속 도서였던 현재의 홍콩섬 북단에 상륙, 이렇다 할 방어병력도 주민도 없던 무주지인 이 섬을 처음 점령한 후 빅토리아 시티(Victoria City)[12]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현재의 센트럴이 그 곳이다. 이후 1842년에 체결된 난징 조약에서 아편전쟁의 전리품으로 정식으로 영국에 양도된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1843년에는 영국은 빅토리아 시티를 건립할 겸 홍콩 총독부를 홍콩 섬 센트럴에 신설한다. 홍콩 총독부 시스템이 자리잡은 이후에 홍콩 총독은 영국으로부터 홍콩을 통치할 권리를 인정받은 홍콩 최고위 통치자로서 권력을 행사했고, 행정 부분은 비선출직 각료들과 경력직 관료들에 의해 집행되었다.애로호 사건으로 영국이 프랑스와 합세해 청나라를 두들겨 팬 뒤 1860년에 체결된 베이징 조약으로 육지 부분인 구룡반도가 영속적으로 영국에 귀속된다. 처음 베이징 조약에서는 구룡반도 남단과 스톤커터 섬이 할양되었는데 이 구룡반도 남단이 한국인 비중이 제일 높은 침사추이와 그 이웃 동네인 야우마테이, 몽콕, 홍함이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영국의 육지부분 귀속은 지속되어 1898년에는 영국은 홍콩과 인접한 북부 섬과 신 행정구역으로 알려진 신계를 99년 간 조차받았다. 이때 신계는 초록택시가 운행하는 현 중국 국경 지대와 구룡반도 북쪽 신구룡을 포함하는 곳으로 이 곳과 구시가지의 경계가 바운더리 스트리트이다. 이후 신계 남부 카이탁에 홍콩 카이탁 국제공항을 세워서 사실상 이 지역의 조차 협약을 사문화하고 신계 북부 중국 국경지대만을 반환 대상으로 봐서 택시 색을 신구룡과 다른 초록색으로 지정하고 황무지로 남긴다.
19세기에 홍콩은 영국의 주요 무역항이 되었고 홍콩은 영국의 물산 집산지로서 활용되는 자유무역항 및 중국으로의 관문으로 선언되었다.[13] 이 때 구룡반도-광둥성 광저우 간 철도가 개통되었으며 또한 영국식 교육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1870년대~ 1880년대 이후 홍콩은 아시아의 영국령 중에서 가장 빅토리아 문화가 발달한 지역이 되었다.
그리고 영국의 지배를 받는다는 점에 있어 중국 국내 세력의 손길이 미치기 어려웠기 때문에 군벌이고 혁명당원들이고 궁지에 몰리면 홍콩으로 다들 망명하곤 했다. 쑨원만 해도 멸만흥한 운동을 할 때 청나라 팔기군의 추적 및 청조의 핍박을 피해 미국의 하와이와 영국 영토 홍콩에 와 있었다가 1911년 신해혁명으로 만주족의 청조를 멸망시키고 한족의 민주주의 공화국인 중화민국을 세운다. 이 과정에서 홍콩 역시 중국사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려서 1922년 홍콩 선원 파업과 1925년의 5.30 운동 등 중국의 정치적 격변에 수차례 휩쓸리기도 했다. 또한 중국 내부의 혁명을 저지하기 위한 영국의 기지 역할도 하여서 영풍함 사건, 광저우 상단 사건 등의 사주에 개입되기도 했다.
2.1.1. 홍콩일치시기
태평양 전쟁이 터진 1941년 12월 8일에는 일본 제국이 홍콩을 침공했다. 영국군은 17일 동안 맹렬한 방어전을 벌였지만, 크리스마스가 되자 방어 병력을 물리친 일본군은 성 스테판 병원에서 치료 중인 부상병들과 의료인들까지 몰살하고 군정을 시행했다. 이 때 중일전쟁에 대한 분풀이 등의 이유로 중국계 홍콩인에 대한 학살이 일어나기도 했다. 홍콩 경찰과 홍콩 소방처는 해산되고 그 자리는 일본 제국 육군 헌병들이 차지했으며 일본 육군 헌병들은 영국인에게만 허용되던 스타페리와 홍콩 트램 2층에 앉는 등 위세를 부리고 시민들을 위협하기 일쑤였다.이 땐 영국계 홍콩인 백인들도 일본군의 눈치를 보고 다녔다. 일본군이 뿌린 낮은 가치의 군표는 홍콩 달러의 기능을 대체했는지라 홍콩의 경제 마비까지 초래했다. 그런 과정에서 중국인들은 중화민국군과 연계해 항일 게릴라를 조직해 저항하기도 했으며 영국군은 호주로 후퇴한 후 미군과 함께 동남아시아를 탈환하고자 여러 격전을 치르고 그 과정에서 차츰 미얀마, 방글라데시 등을 탈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홍콩 전선은 탈환하지는 못했다. 미국도 필리핀을 겨우 탈환했기 때문에 미군에 비해 수적으로 밀리는 영국군은 별 수 없었다.
결국 1945년 8월 15일에 일본 제국이 패망하면서 영국은 홍콩을 수복했고, 특별군사법정을 열어 일본군에 부역한 중국인들과 홍콩에서 전쟁 범죄를 자행한 일본인들을 처벌했다. 이 때 중국인 5명이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22명이 투옥되었다. 일본인들은 21명에게 사형이, 85명에게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그 외에는 도주하거나 무죄방면되었으며 추가적인 기소는 없었다.
2.2. 전후와 사회 변동
한편 4대 강국으로 떠오른 중화민국은 홍콩 반환을 요구하면서 영국 정부를 압박했지만 영국은 강하게 거부했다. 사실 이때 미국이 맘대로 홍콩을 중화민국 즉 중국 국민정부에 반환하려 했으나 영국의 결사반대로 결국 불발되었고 홍콩은 다시 영국령이 된다. 그러다가 중화민국은 1949년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에 패배했다.중국 대륙이 공산화되자 본토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공산당의 탄압을 피해 홍콩으로 도망쳐왔다. 특히 공산주의의 척살대상 1순위였던 금융업에 종사하는 자본가들이 많이 도망쳐왔고 그 결과 홍콩 금융업의 발전을 불러왔다. 또한 광둥성과 푸젠성에서 고급 중국 요리를 만들던 요리사들도 많이 들어왔다. 이들은 먹고 살기 위해 싸구려 포장마차인 차찬텡에서 자신들이 고급요리를 만들던 실력을 발휘하여 값싸고 푸짐한 요리를 팔기 시작했고, 작은 홍콩 섬에 중국 각지에서 온 요리들이 현지화되어 보급되었다. 하이난 치킨 라이스라 불리는 하이난성 출신 쿨리들이 말레이시아에서 만들어 먹기 시작한 덮밥 호이남까이판(海南鷄飯/海南鸡饭)[14]과 얌차라고 불리는 딤섬이 그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서양식의 스테이크도 소개되고 영국의 최대 식민지였던 인도에서 커리도 소개되어 각각 홍콩식으로 재해석되기 시작했다.
종전 후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홍콩은 의류와 주석 장난감을 만드는 제조업으로 유명해졌다. 이때 아직 홍콩은 선진 개발도상국으로 인건비가 저렴했다. 이러한 공장이 있던 곳은 주로 구룡반도의 홍함과 산포콩, 쿤통 일대로 특히 쿤통은 홍콩 카이탁 국제공항과 가까워서 공항과 연계해서 보세 의류공장이 많이 생겼다.[15] 이후로 1960년대에 들어서 대만과 대한민국이 의류업에서 강력한 경쟁자가 되자 전자산업에 손을 댔다. 주로 일본에서 부품을 사왔다가 홍콩에서 조립해서 수출하는 방식이었는데, 1960년대에 라디오가 세계적인 대중매체가 되면서 한때 홍콩은 세계 1위 라디오 수출 지역이라는 명성을 얻기도 했지만, 업체들의 규모가 영세해서 확장에 한계가 있었던데다가 대만과 한국에서 전자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고 오일 쇼크가 닥쳐오면서 사양길로 접어들게 되었고, 전자산업도 개혁개방 이후로 중국본토로 건너가게 된다.
한편 1960년대 홍콩은 빈부격차가 극심했다. 오늘날 홍콩 사회도 빈부격차가 큰 편이지만 당시에는 현재보다 더 계층 격차가 심각하고 하층 계급의 생활 수준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상태였다. 홍콩섬은 롤스로이스가 택시 노릇을 하고, 고급 유럽식 사교클럽이 불야성을 이루며 말 그대로 돈이 썩어나는, 아시아 최고로 부유한 곳인 반면 중일전쟁과 국공내전, 게다가 베트남 전쟁까지 겪으며 피난민들이 중국 대륙 및 베트남에서 몰려든 구룡반도는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생활 수준이 처참하게 어려웠었다.[16] 더구나 홍콩 지하철이나 자동차용 크로스하버 해저터널이 개통하기 이전에는 구룡반도와 홍콩섬을 오가는 교통수단이 배뿐이었다. 그래서 구룡반도와 홍콩 섬의 교류가 극히 적어 다른 나라처럼 따로 국밥으로 놀았다. 여기에 홍콩섬에 비해 상당히 낮은 구룡반도 주민들의 경제력이 더해져 몇몇 홍콩 섬 주민들은 아예 구룡반도 주민들을 홍콩인으로 취급하지도 않았고, 홍콩 섬에 사는 사람들은 구룡반도에 절대 발도 들이밀기 싫다는 식으로 구룡반도 주민들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이에 구룡반도 주민들의 불만이 쌓여갔다.
더불어 빈부격차는 물론이고 부정부패도 현재는 상상도 할 수 없이 심각했었다.[17] 소위 차값을 주고 받는다는 은어로 통하던 뇌물은 기본이라서 뇌물을 안 주면 소방관들이 화재 진압도 하지 않거나[18] 병원에서는 의사에게 차값을 안 주면 죽든 말든 내버려 두거나, 취업에서 면접관에게 차값을 줘야 합격하는 식으로 부정부패가 만연했으며 돈 세탁도 기승을 부리는 등 여러모로 개판이었다. 당연히 이 때는 조세 피난처로도 아주 선호받았다.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지만 영국인(백인)들의 중국인에 대한 인종차별과 우월감도 심각했다. 적어도 민권운동 중이던 당시 미국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았다. 단지 백인들의 수가 소수이기 때문에 부딪힐 일이 적었다는 점은 나았지만 말이다.
홍콩의 부정부패는 사실 과거 청나라 시절부터 있었고 19세기 시절에도 당연히 있었다. 부패 자체가 중국 역사에서 아주 뿌리가 깊었다.[19] 청나라는 지역을 불문하고 사회 전체가 뇌물천지였고 홍콩도 예외가 아니었다.
영국은 이에 대해 영국식 법치주의의 관점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지만 괜히 건드려서 현지의 유력자들을 자극할 이유가 없으니 모른 체 해주는 방법을 택했다. 영국의 통치가 전 세계로 확대되면서 영국은 현지의 부조리와 악폐습을 적극 퇴치할지, 아님 유력자들과의 제휴를 위해서 방관할지를 택해야 하는 딜레마에 처했는데 여기서도 같은 상황을 마주한 것이다.[20] 홍콩 통치에서도 엄격하게 부정부패를 때려잡아 사회혼란을 마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21]
그리고 1950년대까지만 해도 홍콩의 관료계층과 홍콩 민중 대다수도 살인, 강간, 강도 등 강력범죄 및 마약 투약 등이 범죄지 차값 좀 주고받는게 뭐가 범죄냐면서 이를 일상적으로 치부하고 영국인들이 이를 눈감아주는 것에 대해서 오히려 만족하는 상황에 가까웠다.
하지만 홍콩 인구가 400만을 넘어서면서 주택 부족 등[22] 민중의 불만을 자극하는 사회 문제들이 누적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많은 홍콩의 상점주들은 가난한 시민들을 상대로 해적판이나 밀수품을 팔면서 연명해왔는데, 이러한 짝퉁 판매는 법적으로 엄격히 금지되지도, 그렇다고 합법화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오로지 일선에서 단속하는 경찰의 자비에 의존했다. 당연히 경찰의 자비는 차값 제공의 대가로 나왔고, 뇌물을 낼 여력도 없는 사람들의 사업체는 폐쇄당했다.
따라서 경찰이 곧 부패의 상징으로 인식되었으며 오로지 기업체적 이익에만 몰두하는 홍콩 총독부의 통치 역량에 대한 시민적 분노는 누적되었다. 여기에 1960년대 말- 1970년대부터 당시 중진국이던 홍콩의 경제적 성장이 대만, 한국, 말레이시아, 태국, 필리핀 등 여타 아시아 개발도상국의 수준을 넘어서기 시작했으며, 전통적 중국식 관세제도를 넘어선 선진적 영국 행정을 전면적으로 도입해야 한다는 대중적 요구가 높아졌다.
이들은 아예 영국 본국에 홍콩 개혁을 호소하면서 홍콩 총독부를 압박했다.
그리고 홍콩을 단순히 피난처나 돈이나 벌려고 잠시 들른 곳으로 여긴 구세대가 아닌, 홍콩을 자신의 집이자 고향으로 여기는 홍콩인의 정체성을 가진 신세대가 성장하면서 기존에 영국이 사용하던 통치 방식이 쓸모가 다했다는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0년대의 대중항쟁 사건들이 터지면서 일부 부패한 기업가와 관료들과의 타협만으로는 홍콩 통치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된다. 이것에 더욱 도화선을 붙이는 일이 아래 사건들이다.
1966년, 당시까지만 해도 홍콩 지하철도 없고 크로스하버 터널도 없어서 홍콩섬- 구룡반도 간 연락을 스타페리가 독점하던 시절, 페리 요금이 인상되자 이에 대항해 비폭력 시위가 일어났다. 홍콩 총독부가 이 항의시위를 탄압하자 어렵게 살던 구룡반도 주민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시위가 폭동으로 격화된다. 주로 조던 로드나 침사추이 등 구룡 일대에서 일어났으며 이때 홍콩 버스도 폭리를 취하다 표적이 되어버려 구룡반도의 버스회사인 KMB도 공격당했다. 중국인들이 벌이는 대대적 폭동에 홍콩 총독부는 당황해서 홍콩 경찰 소속 기마경찰들을 투입해 얼른 진압해 버린다. 이때만해도 기마경찰을 빼고 전문적인 폭동진압부대가 없어서 대개 순찰경관들이 나무로 만든 진압방패와 진압봉을 들고 진압하는 방식이었다. 이후 1969년 전문적인 폭동진압용 경찰기동대인 PTU대가 창설되고 1976년에는 PTU대 예하로 SDU소대 즉 대테러 경찰특공대가 대테러부대로 창설되었다.
반환 이후에는 1당독재 국가인 중국 정부의 홍콩에서의 독재가 널리 알려지고 있지만 사실 영국 정부 역시 썩 민주적으로 홍콩을 통치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나 부유층이 아닌 약자들과 그들을 대변하는 지식인들에 대한 탄압이 없지 않았다. 다만 영국이 아예 홍콩에 대한 민주적인 통치를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니고, 2차대전 직후 마크 애이치슨 영 총독이 이른바 영 플랜[23]을 도입하려 하였으나 당시 공산화된 중국이 홍콩을 해방시키겠다며 영국을 협박해 무산되었다.
또한 이 와중에 몇몇 홍콩인들은 홍콩의 사회 문제를 영국 식민지 체제의 폐단으로 보고 그 해결책을 중국 본토의 문화대혁명에서 찾고자 했다. 1960년대 중국 본토에서 문화대혁명이 발생하자, 중국공산당의 사주로 홍콩 공회연합회가 중심이 되어, 문혁에 호응하는 젊은 청년들과 빅토리아항 부두[24]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1967년에 67 구룡폭동이 발생했다. 영국 정부는 이 때 긴급조치법을 만들었고, 홍콩 당국은 이 폭동을 긴급조치법을 통해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에 중국이 크게 반발하여 홍콩 홍위병들에 대한 배상과 사죄를 요구하자 홍콩 당국은 이를 가차없이 거절했고 흥분한 대륙 홍위병들이 주중 영국 대표부 점령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영국령 홍콩 정부로 하여금 사회 문제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도록 압력을 가했다. 이에 따라 1974년 염정공서가 세워지고 계좌 개설을 어렵게 해 놓는 한편 신설 염정공서가 검은 돈을 전부 적발해내 돈세탁을 더이상 할 수 없게 하였다. 조세피난처 노릇도 불가능해졌다. 그리고 1976년 크로스하버 터널 개통, 1979년 홍콩 지하철 쿤통선[25] 개통, 소방훈련학교 및 경찰훈련학교 설립, 부패 경찰관 전원 해고와 구속수사 및 신임 경찰관 대거 채용, 영국 본토의 반부패 전문가 초빙, 공중위생을 높이는 클린 홍콩 운동 등을 벌이며 말 그대로 홍콩의 질적 선진화가 이루어지게 되고 빈부격차도 많이 해소된다.[26]
1978년에 중국이 경제 개혁안을 시작했을 때, 홍콩은 중국 본토에 투자되는 외국 자금의 주요 공급원이 되었다. 이듬해 경제특구가 홍콩 바로 북쪽에 있는 선전시에 건립되었고, 재정과 금융 분야에서 계속해서 영향력이 커지면서 홍콩의 산업은 제조업과 섬유에서 점진적으로 서비스 업종으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이때를 기점으로 홍콩이 선진국에 진입하며 먹고 사는 문제도 해결되고 오늘날 우리가 아는 홍콩이 된다.
사실 홍콩도 꽤 격세지감이 커서 노인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상전벽해 식으로 모든게 바뀌었다.[27] 실제로도 홍콩 영화를 보면 1980년대 전성기의 영웅본색 시리즈와 1995년 반환 직전의 영화인 성룡의 썬더볼트 등을 보면 확실히 양자가 다른데 전자는 아직까지 낡은 느낌이 나지만 후자는 확실히 현대 홍콩의 스카이라인이 완성되고 사람들의 행색도 깔끔해지며 비로소 선진국다운 모습이 보인다.
2.3. 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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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총독부 측은 1920년대 중화민국 시절에 신계 지역의 조차를 영구할양으로 전환해보려고 시도했으나, 중국의 혼란과 영국 본국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끝내 무산되었다. 이후 중화인민공화국과 협상하려고 해도 영국이 1950년에 중국을 그저 승인했을 뿐 정식 외교관계는 1970년대까지 수립되지 못해서 본격적인 협상 역시 불가능했다. 1979년 25대 홍콩 총독 머레이 맥클레호스가 후속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중국 무역부장의 초청에 따라 베이징시를 방문, 중국 측에 조차 문제의 해결을 부탁했지만 중국은 이를 묵살하였고 다만 이후 홍콩의 중요성과 홍콩 제도에 대한 존중의 의사를 수차례에 걸쳐 밝혔을 뿐이었다. 이러한 시도의 최종판으로 1981년에 대만을 염두에 두고 일국양제를 선포하였다. 따라서 본격적인 협상은 1982년 대처 내각 시절에야 이루어졌다. 영국은 홍콩의 주권만 반환하고 통치권을 유지한다는 타협안을 제시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30-50년 정도 영국령 홍콩을 존속할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하지만 영국의 이러한 제안에 중국은 큰 반감을 보였으며, 덩샤오핑은 "만일 중국이 1997년 홍콩을 회수하지 못한다면 어떠한 중국의 지도자와 정부도 중국인들에게 떳떳하지 못할 것이며, 더 나아가 전 세계에 대해서도 떳떳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만일 회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중국정부는 만청정부이며, 중국의 지도자는 이홍장인 것을 의미한다."라고 할 정도였다. 중국공산당 측은 홍콩에 대한 영국의 영유권은 모두 무효라고 선언했으며, 신계 조차기간 99년에도 역시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한 적이 없었다. 1997년에 반드시 반환이 된다고 아등바등하고 있던 것은 영국이었으며 중국은 당장 반환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에 당장 반환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더 일찍 반환이 될 수도, 더 나중에 반환이 될 수도 있다는 유연한 태도였다. 따라서 영국과 중국 협상장에서 중국 측은 주권과 행정권을 교환하자는 대처의 요구에 대해서 완고하게 전혀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으며, 99년의 조차 기간에도 의미를 두지 않아서 반드시 1997년에 반환되어야 한다는 입장도 아니었다. 즉 중국과 일전을 각오하고 홍콩에 엉덩이를 붙이든가 깔끔하게 모두 돌려주든가 2가지 선택지밖에 없었다. 14개월 간 22차례에 걸친 협상 끝에 결국 영국은 홍콩 전역을 깔끔하게 반환하는 것에 동의, 1984년 9월 26일 리처드 에반스 주중 영국대사와 저우난 중국 외교부 부장이 중영공동선언에 합의하였다. 1984년 12월 19일 베이징에서 영국 측 대표인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와 중국 측 대표인 자오쯔양 중국 국무원 총리가 서명, 1985년 5월 27일 비준서를 교환함으로써 6월 30일부로 정식으로 발효되었다.
영국령 홍콩 정부는 반환 문제가 해결된 1984년부터 1997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민주적 정치개혁을 해놓았다. 구의회를 주민 직선제로 바꾸고 국회 격인 입법국에 일부 보통 선거 선출 의석을 마련했다. 저런 개혁이 하나 하나 있을 때마다 중국은 공동선언 위반이라며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중영공동선언은 중국에 홍콩의 현행 체제를 유지할 것을 규정했는데, 중국은 '현행'의 의미를 선언 발효 시점인 1984년 혹은 그 이전으로 본 반면 영국은 반환 시점인 1997년으로 보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영국 측은 공동선언 제4조 "과도기 기간 중 영국이 홍콩의 행정관리를 책임지고 경제적인 번영과 사회 안정을 유지하며, 중국은 이에 협력한다"라는 대목을 두고 홍콩의 정치개혁을 할 수 있다고 해석했다. 이런 영국에 대해[28] '민주주의를 도입할 거면 미리 했어야지 그동안 비민주적으로 통치를 해 놓고 중국에게 반환할 때가 되니깐 정치적 목적으로 민주적 개혁을 하냐'[29]는 비아냥도 있었다. 물론 민주적 개혁 자체는 옳았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사실 홍콩의 민주개혁은 2차 대전 종전 이후 일본군의 점령으로 실추된 영국의 권위를 만회하기 위해[30] 홍콩인들을 완전히 영국화하여 홍콩에 대한 영국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1950년대에 한번 추진된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무산되었고 패튼 총독 때 다시 추진된 것.
그리고 중영공동선언에 따라 1997년 7월 1일 자정에 영국이 홍콩을 중국에 반환하여 홍콩 특별행정구가 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3. 군사
홍콩/군사 항목에서 주홍콩영국군 문단 참고.4. 의의
영국의 홍콩 지배는 오늘날 세계 최고의 무역항 중 하나인 홍콩을 형성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자유항(自由港)이라는 이미지가 구축된 것도 영국 지배 시기 부터였다.영국은 홍콩을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및 현재의 말레이시아/ 싱가포르가 된 해협식민지처럼 자국 영토의 연장으로서 건설했었고 그래서 극소수인 영국인뿐 아니라 중국인들의 생활 수준에도 신경을 좀 썼다. 그 덕에 홍콩섬은 엄청난 후광을 봤다.
물론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광둥성에서 피난민이 내려와 구룡반도의 생활환경이 나빠지고 빈부격차가 심해졌다. 하지만 홍콩섬에 사는 오리지널 홍콩인들의 생활 수준은 원래부터 높은 편이었다. 구룡반도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롤스로이스가 홍콩 섬에서는 1905년부터 보이는가 하면 아시아에서 다섯 번째 도시철도에 해당하는[31] 홍콩 트램도 홍콩 섬에서는 1904년 이미 개업했다. 현대적인 중형 전철로 보자면 아시아에서 8번째이다.[32] 어쩌다가 홍콩을 거쳐 유럽이나 미국 등에 다녀온 일제강점기 당시 상류층들은 홍콩섬의 부유한 생활상과 조선에서는 물론 일본에서도 구경하기 힘든 진귀한 유럽제 물건들이 일상품으로 쓰이는 풍경에 놀랐다.
그리고 영국의 식민지배 동안 선진적인 행정제도가 홍콩에 잘 안착되었고, 효과적인 공무원 및 홍콩 경찰 등 치안유지 제도와 사회기반 시설, 높은 시민의식, 친절한 공무원 및 공공 서비스 종사자들 등을 자랑한다. 영국은 비교적 민주적이고 청렴한 정부를 구축하여 중국에 반환했기 때문에, 홍콩특별행정구 정부가 이를 승계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또한 식민지배를 받았음에도 영국에 대한 홍콩인들의 감정은 나쁘지 않다. 지금의 특별행정구 체제보다 비교적 더 좋아한다.[33] 젊은 세대는 매우 좋아하는데 젊은 세대 중에서 1980년대 및 1990년대에 태어나 영국령 끝자락을 그나마 겪어본 세대는 기억이 조금은 남아있고[34] 2000년대생 이후 세대는 아예 홍콩이 반환된 지 오래일 때 태어나서 겪어본 적이 없었다. 이는 영국 통치 시기에 대한 그리움보다는 중국에 대한 홍콩 젊은 세대의 불만의 표출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
특히 일본군의 점령에서 벗어난 이후 취임한 21대 총독부터는 뭔가 하나쯤은 홍콩 사회에 긍정적인 업적을 남겨왔고, 비록 영국령 홍콩 정부는 완전한 민주주의 정치체제와 자치를 허락한 적은 없지만 그와는 별개로 67 구룡폭동 이후로는 주민들의 요구를 수용해 사회를 개선하려는 노력[35]을 해왔으며 언론자유지수도 크게 상승했고 미진했던 민주화도 1980년대 이후로는 그럭저럭 이뤄놓고 떠났다.[36]
역대 총독들은 부임할 때마다 스스로 광둥어식 이름을 짓는 전통이 있었다. 비록 홍콩의 상류층 사이에서는 영어를 더 많이 쓰긴 했지만 나름대로 식민지인들과 가까워지려는 노력은 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홍콩 경찰의 백인 간부들 역시 광동어를 배워서 구사하며 현지화를 강조했다. 그리고 일본군이 홍콩을 점령하면서 그 당시 총독과 고위 관리들을 감금하는 등 일본군으로부터 영국 총독부가 핍박을 받은 역사 때문에, 비록 총독과 식민지인 관계지만 일본군 점령 하에서 같이 고생한 사이라는 미묘한 감정도 있다. 이 때 명목상 호주로 후퇴한 홍콩 총독부는 계속 우표를 찍어냈는데 영국 왕실 사람들의 얼굴과 함께 영국인과 중국인이 힘 합쳐 항일투쟁을 할 것을 강조하는 내용들을 담았다.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면서, 많은 중국 대륙 출신 중국인들이 홍콩으로 들어왔고, 이는 홍콩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 시기 들어온 중국 본토 출신의 이민자들은 대부분 부패가 만연했고, 홍콩에서도 중국 본토에서 했던 것과 동일하게 뇌물을 주고 받았다. 주로 민간 영역에서 문제가 빈발하며 염정공서가 단속을 강화하고 있다. 또한 중국공산당은 겉으로는 일국양제를 고수하겠다고 말하고 있지만, 내심 공산당은 홍콩의 민주주의적 자치를 불쾌해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이 말하는 일국양제는 정치적인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며, 국가보안법, 애국주의 교육 등을 실시하는게 그 골자이다. 홍콩에서는 홍콩인들의 강력한 반발로 실시되지 못했으나 마카오는 실시 중이다. 경제적으로 자본주의 구역이고, 홍콩 행정부와 사법부는 홍콩인들이 자체적으로 구성하는 만큼 굳이 민주주의까진 필요 없고 어느 정도 중국화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게 중국공산당의 일관된 입장이다. 그 때문에 서방이나 홍콩 민주파의 민주화 요구를 징징거림으로 일축하며 일국양제를 지속할 것이며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늘 강조한다.[37]
때문에 홍콩인들과 중국 대륙 출신 중국인들은 서로에 대해 상당한 불만이 쌓여있고 이것이 2014년 홍콩 민주화 운동 및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이 벌어지는 이유가 되었다. 민주화 시위에서 꼭 등장하는 깃발이 유니언 잭과 영국령 시절 식민지 깃발인데, 바로 구관이 명관이란 논리에 따라 중국의 특별행정구보다 영국의 식민지가 더 낫다며 중국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는 상징이다.
아예 중국 본토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공공연하게 주장하는 홍콩인들도 있다. 이들은 기존 민주파와 다르게 본토파라고 불리며 세력은 그리 크지 않지만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나름의 세력을 갖고 있었으나 홍콩보안법으로 와해되어 사라졌다. 더 자세한 것은 홍콩 독립운동 문서를 참조할 것.
2020년대 들어 홍콩이 급속히 중국화되면서 이 시기를 그리워하는 홍콩인들은 대게 영국과 캐나다, 더러는 호주, 뉴질랜드, 아일랜드, 싱가포르 등으로 이민을 떠나며 그 자리에 광동성 출신 중국인들이 들어오고 있어 어쩌면 수십 년 뒤에는 이 시기의 기억 자체가 희미해질 수 있다. 당장 1997년 이후 태어난 신세대들 중에는 중국 본토 출신 부모를 둔 대륙인 2세대들도 굉장히 많다.
5. 참고 문서
[1]
1959년부터 사용한 기로 역대 깃발은
이곳을 참고. 무역을 하는 영국과 중국의 상인과 상선 문장이 오랫동안 들어가 있었다.
[2]
현 홍콩 특별행정구에서
구룡채성을 제외한 면적이다.
[3]
홍콩섬의
항구로 현재는 항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다. 현재는
센트럴과
애드미럴티 일대를 일컫는 말로 의미가 바뀌었다.
[4]
참고로 영국령 홍콩은 1982년 이전까지는 영국 본토에서 파견한 총독이 입법, 사법, 행정을 모두 쥐고 지배하는 체제였지 홍콩 주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민주주의 체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근래에 영국이 홍콩 문제에 개입할 때 중국은 이를 들어 비판한다. 하지만
2차대전 직후 마크 애이치슨 영 총독이 구상한 이른바 '영 플랜 (시의회를 설치하여 3분의 2를 주민
직선으로 선출하고, 행정조직 내에 중국계
홍콩인의 비중을 늘리는 방안이다.)'을 도입하려 하자 중국은 홍콩을 해방시키겠다며 영국을 협박했고, 마지막 총독
크리스토퍼 프랜시스 패튼이 실시한 민주적
개혁을 백지화한 걸 보면
내로남불이나 다름없다.
[5]
광동어 발음으로는 '옝쑥횅겅',
표준 중국어 발음은 '잉슈샹강'
[6]
출처
[7]
이 때는 그냥 영국 국기를 썼다.
[8]
1870년대 이전부터 제정된 영국 상인이 중국인들과 장사하는 모습을 담은 Local scene 이라 하는 문장을 추가했다. 1869년에 건의되었다가 채택되지 않았다가 1876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일본이 점령한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사용이 금지되었다.
[9]
홍콩일치시기에 게양된
일장기.
[10]
아편은 당시 최대 식민지인
영국 동인도 회사령 인도, 정확히는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일대에서 재배한 것이었다.
[11]
지금의
선전시.
[12]
'빅토리아 여왕의 도시'라는 뜻이다.
[13]
자유무역항 기능은 훗날
싱가포르가
독립하자 여기 넘겨준 지 오래고
싱가포르도
두바이,
도하 등
아라비아 반도에 차츰 넘겨주고 있다. 중국으로의 관문만은 그 누구도 대체불가라 현재도 잘 활용중이며 오히려 중국의 급성장으로 더 역할이 중요해지고 있는 중이다.
[14]
하이난 치킨라이스는 이름과 달리
하이난성 음식이 절대 아니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로 유입된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이 즐겨 먹는데 그게 본고장으로 역수출되어 대만과 홍콩에도 소개된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거는 말레이시아 요리로 소개된다. 해남계반이라는 한국식 독음은 홍콩이나 말레이시아에서 못 알아 듣기에
광동어로 호이남까이판,
표준 중국어로 하이난지판이라고 해줘야 한다.
[15]
이들은
1980년 중국의 개방 이후 인건비가 비싸지고 금융업이 홍콩 산업으로 떠올라 중국으로 건너가고 현재는 가내 수공업 수준으로 잔존한다.
[16]
이 당시 구룡반도 홍콩인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박물관이 옛날 시영아파트를 개조한 메이호 하우스(Mei Ho House)에 위치해 있는데, 보면 당시 한국전쟁 전후였던 대한민국보다 못 살았으면 못 살았지, 결코 잘 살지는 못했고 더군다나 주거환경은 더욱 더 처참했음을 알 수 있다.
[17]
사실 이는 동시기에 일찍이
말레이시아 연방 시절부터 부패를 때려잡은
싱가포르를 제외하고는
동남아시아/
동아시아 불문
아시아 국가 대부분의 심각한 문제였다.
[18]
돈이 없으면 물도 없다며 소위 물세를 걷었다. 구조대는 중장비 작업비를 받고 구급대는 유류비를 받았다.
[19]
당장
여요전쟁으로 한국에는 빌런 이미지를 갖는
요나라 성종 야율융서만 해도 중국에서는 부패 척결 등 내치 업적들이 많아 성군으로 부각된다. 요나라는 당시
거란족,
한족을 불문하고 사이좋게 부패가 기승을 부렸고 음서도 대놓고 있었는데 요성종이 이를 일소했다.
금나라 세종 역시 부패를 척결하고
여진족 귀족의 횡포 및
한족 차별을 없애 성군으로 추앙받는다.
원나라는 반면 원세조 쿠빌라이 사후 부패와 사치로 망조가 들고 이후
명나라의 위충현,
청나라의 화신 등이 대놓고 전횡으로 나라를 말아먹었다.
[20]
인도 제국에서는 사티 금지를 놓고 불타죽을 여자 몇명 구한 대가로 수천만 인도인의 반란을 직면할 이유가 없다는 관용파의 주장 때문에 사티 금지령 선포에만 수십년이 걸렸고 금지령 이후에도 적극 단속에 나서진 않았다.
[21]
이 상황과 정확히 반대되는 경우가
해협식민지 이후
말레이시아에 합류하고 다시
1965년 독립한
싱가포르의 리콴유가 과감하게 개혁을 벌여 이런저런 악습을 끊은 것이었다. 리콴유는 대다수를 차지하는
중국계 싱가포르인 사회의 악습들은 당연하고 원주민
말레이인들의 여러 악/폐습들 그리고
인도계 싱가포르인 사이에어 내려오던 카스트 제도 및 사티 등의 각 인종들의 모든 악습을 없앴다. 싱가포르는 덕분에
1980년대부터 이미 일찍이
화교들이 주축이 되어 질서를 잡은 나라로서 홍콩보다도 먼저 부패척결에 성공했다.
[22]
홍콩 총독부는 주택 부족 문제에 대해서 오랫동안 무관심하다가
1950년대에야 섹킵메이 대화재로 크게 데이며 대응에 나섰다.
[23]
시의회를 설치하여 3분의 2를 주민
직선으로 선출하고, 행정조직 내에 중국계
홍콩인의 비중을 늘리는 방안이다.
[24]
1980년대 항만 시설을
구룡반도 북서부 콰이충으로 옮기기 전까지 빅토리아항이 주요 항만 역할을 했다. 현재
마카오로 가는
페리가 드나드는 슌탁센터도 이 빅토리아항에 있다.
[25]
그땐 쿤통에서 침사추이, 몽콕을 거쳐 센트럴로 연결되는 식이었다.
[26]
1971년부터
1982년까지 재임한 25대 총독
머레이 맥클레호스의 업적으로 역대
총독 가운데 홍콩의 발전을 가장 크게 이루어냈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다. 이 사람의 이름을 딴 트래킹 코스도 있을 정도로
홍콩인의 평가가 좋다. 다만 재임시절 영국에서는
비난을 받았는데 홍콩의 사회적
인프라를 짓느라 영국의
예산을 엄청 당겨다 써서 중국에 돌려줄 식민지에 예산을 퍼준다고 여야의 비난을 받았다.
[27]
이는
홍콩 영화를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실제로
1950년대 및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 홍콩에서 촬영되었던
이소룡 주연의 영화에서의 홍콩과
1980년대~
1990년대 홍콩 영화 전성기 시대의 홍콩을 비교하면 충격적일 정도다.
1975년을 기점으로 5년 간 현재 홍콩의 기틀이 거진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28]
정확하게 말하면 영국의 보수 세력
[29]
오늘날 중국 본토와 홍콩의 친중 세력이 민주화 인사들을 비판할 때 자주 사용하는 논거이기도 하다. 민주화 인사들이 홍콩의 민주주의를 지키자면서
유니언 잭을 들고
God Save the Queen을 부르며
영국을 찬양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모순이라는 것. 즉 "니들이 그렇게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면서 자꾸 영국을 끌어들이는데, 정작 그 영국령 시절의 홍콩이 민주적이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다.
[30]
천하의 대영제국이 아시아인들에게 졌다는 사실에 장제스를 포함한 중국인들에 동남아시아 전역이 발칵 뒤집힐 정도였다. 장제스는 홍콩 함락 이후 공공연하게 영국의 홍콩 지배에 어깃장을 놓기 시작했고 리콴유 등 식민지 지식인들도 유럽인 지배자들을 영원히 있을 존재들이 아닌, 수틀리면 몰아낼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다.
[31]
교토,
베이징,
나고야,
한성에서 전차가 먼저 개업했으므로 홍콩 트램은 5번째이다.
[32]
2024년 기준이고
소련 해채 이전
1991년만해도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우즈베키스탄을 제외하면 5번째였다.
[33]
영국 초창기 식민지배 시절에는
인종차별 및 의사소통에서 문제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만 맥리호스 이후에 이러한 것들은 개선되었다.
[34]
1990년대 중반 이후 세대는 거의 기억하지 못해서
1990년~
1994년생 정도만 해당된다. 애초
1998년생부턴 이미 홍콩이 중국에 반환될 때 태어났다.
[35]
빈부격차 해소,
영국인과
중국인의
차별 해소, 부패 척결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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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같은 구 영국령인
해협식민지였다가 다시
말레이시아에 합류했고
1965년 독립하여
1980년대 당시에는 20년 남짓밖에 안된 신생국가였던
싱가포르에 비해서도
홍콩이 잘 살던 시기가 이때였다. 싱가포르 경제는 물론 그때도 성장중이었고
선진국에 막 진입하긴 했지만 그 당시에는 아직 후발 선진국이었으며 리콴유가 대만, 말레이시아, 홍콩을 자신들의 경제발전 롤모델로 삼았던 시기였다. 싱가포르가 최선진국이 된건 리콴유의 경제개발계획이 완료되어 비로소 성과를 보이기 시작하고 여기에 홍콩 반환의 반사이익으로 수많은 홍콩 재벌들의 투자가 쏟아지기 시작한
1995년 직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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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적 누수만 없으면 홍콩을 중국본토는 켜녕 마카오보다도 느슨하게 대하는 걸 보면 맞는 말 같기는 한데 문제는
2020년대 들어
코로나19 판데믹과
홍콩 민주화 운동 그리고 국가보안법 파동을 지나가며 급속히 홍콩이 중국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백인들은 너도나도 본국으로 귀국하거나
싱가포르로 다시 옮겨가고 그 자리에 대륙
중국인들이 쏟아져 내려오며 영어의 지위가 하락하고
표준 중국어가
광동어보다 더 많이 들리는 등의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즉 실질적으로 일국양제는 껍데기만 남았다고 봐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