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27:17

마오쩌둥/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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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군사3. 정치4. 경제
4.1. 재평가
5. 교육, 문화6. 외교7. 각국의 입장

1. 개요

우리의 인식에 깊이 박힌 것은 대약진과 문화대혁명의 오점이다. 이런 역사적 모험이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엄청난 인명의 희생을 초래했다는 것을 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미래의 역사가들은 이런 실패와 죄상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인민공화국 역사에서 마오주의 시대를 세계역사상 위대한 근대화를 이룩한 시대의 하나로, 그리고 중국인에게 커다란 사회적 인간적 이득을 가져다준 시대로 틀림없이 기록할 것이다.
모리스 마이스너
중국의 유능한 정치가, 역사가, 시인, 철학자, 막강한 권력을 지닌 독재자, 활기 넘치는 조직가, 숙련된 외교가, 유토피아 사회주의자,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의 국가 원수 등 이미 성취한 것에 안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수백만 인민의 삶과 사고방식을 개조하고자 했던 지칠 줄 모르는 혁명가이자 민족 혁명과 피비린내 나는 사회 개혁의 영웅이기도 했다. 이것이 역사가 기록하고 있는 마오쩌둥의 모습이다. 그가 보여준 삶은 규모가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그 의의를 한 가지로 말할 수 없다.
알렉산더 판초프, 스티븐 레빈

마오쩌둥은 블라디미르 레닌, 이오시프 스탈린과 함께 공산주의 역사는 물론 현대 중국과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매우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마오쩌둥의 이름을 딴 마오주의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 스탈린주의와 함께 공산주의의 대표적인 분파를 형성하였으며, 중화인민공화국 소비에트 연방을 제외하면 외세의 개입 없이 내부 혁명을 통해서 공산화에 성공했던 유일한 강대국이었다.

게릴라 지도자로서 샤를 드골이나 요시프 브로즈 티토, 체 게바라 등을 넘어서는 불리한 조건을 이겨내고 최종적인 승리를 거머쥐었고, 큰 나라에서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켜 국부가 되었다는 점 때문에 블라디미르 레닌과 비교되며, 공산주의 대국의 폭압적인 독재자라는 점에서 이오시프 스탈린과 유사하고, 독재자가 된 혁명가라는 점에서는 올리버 크롬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유사하다. 강대국으로 성장할 나라의 내전을 끝냈고 강력한 중앙 정부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에이브러햄 링컨과, 중국을 통합한 후의 폭압적인 정치가였다는 점은 시황제와 비슷하고, 농민 출신의 중국 통치자라는 점은 한고조 홍무제와 유사하고, 중국인들의 기복적 존숭의 대상이 된 실존인물이라는 점 때문에 관우 제갈량과 비교되기도 하는 등 다면적인 인물이다.

마오쩌둥의 존재는 중화인민공화국과 6.25 전쟁으로 이어졌고, 이는 초기 냉전에서 미소 양국의 대전략을 완전히 뒤흔들었다. 중화민국 국공내전에서 살아남았거나 적어도 중국을 반분하는 선에서 버텼더라면, 혹은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공산권의 위협이 가시화되지 않았더라면, 냉전은 우리가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는 세계사를 뒤바꿔놓았다고 평가되기도 하는 몇 안 되는 인물이며, 지금까지도 마오쩌둥에 대해 많은 연구와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2. 군사

마오쩌둥은 훌륭한 군사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그 능력을 바탕으로 중국공산당의 최고사령관이자 군사전략가로서 국민당을 대만으로 밀어내고 공산당의 중원 점거를 달성시켰다.
"중일의 싸움은 본당 발전의 절호의 기회이며 우리 공산당의 기본정책은 전력의 70%를 자기 세력 확대에, 20%를 국민정부와의 대응에, 나머지 10% 항일에 사용한다"
마오쩌둥
중국 공산당 입장에선 국민당이 일본이랑 처절하게 항일투쟁을 하는 상황 궁지에 몰린 당 부흥의 기회로 봤다. 즉 중일전쟁 시기에 자기 세력 불리는 게 제일 합리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중국 공산당은 일본과 붙은 대규모 전투가 백단대전 하나뿐이고 그것도 우발적인거라 마오가 펑더화이를 자아비판시키기도 했다.

이렇게 마오쩌둥은 중일전쟁에서 중국 국민당에게 진짜 뿌리까지 뽑히기 직전 당시 토벌군이었던 장쉐량에게 접촉해 "일본이 중국 전토를 유린하는데 우리끼리 싸울때인가?"라며 마음을 흔들었고 장쉐량에게 중국 국민당 휘하에 들어가 먼저 일본군을 내쫓자는 제안을 하였다. 장쉐량은 이에 홀랑 넘어가 시안사건을 벌였고 이후 장제스는 하는 수 없이 국공합작을 성사시키며 동맹을 맺었고 공산군에게 공격 지시를 내렸지만 마오쩌둥은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일본 제국과의 직접적인 싸움을 피하고 최소한의 싸움만 하며 모든 싸움을 국민당에게만 맡긴 뒤 일본 제국군의 경비가 허술해진 지역을 해방하며 공산당의 세력을 늘리는 데에 집중하였다.[1]

이를 통하여, 중국 공산당은 나중에 일본과 국민당을 모두 밀어내고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2] 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대장정에 이르기까지 국민당의 초공 공세가 강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공산당이 싸움을 피하고 세력을 키우는 것에 집중한 것에는 국민당의 과거 행보가 원인이 되었다. 이를 통하여 전력상 가장 열세이던 공산당으로서는 일단 직접적인 싸움을 피하고 기회를 도모하는 것이 가장 나은 선택이었다. 휘하 장수들이 일본 제국과 싸우려 들 때, 마오쩌둥은 자신들의 현재 전력을 냉철하게 파악하고 종전 후의 판도를 생각해 교전을 제한하며 국공내전 승리의 포석을 깔았다. 세력을 키우겠다고 중국이 망하건 말건 신경을 끄지도 않았다는 게 공산당 지지자들의 항변이긴 하지만 사실 일제의 최종 승리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중국 국민당의 당위와 희생에 비하면 이때 중국 공산당의 기여도가 거의 없다는 것은 사실에 가깝다. 다만 전면전으로는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정면 교전은 피하고, 세력 확대에 집중하였다.[3] 이처럼 중국 공산주의 혁명사에서 그의 기여와 영향력은 러시아 혁명에서의 레닌보다도 훨씬 컸으며,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 정권의 수립자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마오쩌둥은 중국공산당이 불리한 여건에서 국공내전을 승리하고 살아남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코민테른의 지시를 따랐던 초기 중국 공산당의 투쟁 노선이 실패로 끝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중국 공산당에 인재가 마오쩌둥밖에 없었던 건 아니지만, 대장정과 같은 절망적인 상황을 이겨내고, 중일전쟁을 전략적으로 이용할 만큼의 대국적인 시각을 가졌으며 그 와중에 내부반발을 제압할 만한 정치력을 가졌던 인물은 마오쩌둥만한 인물이 없었다고 평가된다.

그리고 그의 군사적 재능은 게릴라 전사를 새로 쓰게 만들 수준으로 탁월했다. 마오쩌둥보다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장제스 공격할 때 마오쩌둥이 없었다면 공산당이 그날로 멸망했을 것이다. 마오쩌둥의 게릴라 전술에 대해서는 적군이던 한국군도 크게 고평가한 바 있으며, 채명신 장군이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기본 전략인 중대 전술 기지 개념을 만들 때 마오쩌둥의 게릴라 병법을 참고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

그러나 마오쩌둥의 군사적 능력이 다소 부풀려졌다는 의견 또한 존재한다. 마오쩌둥은 서안 사건 이전까지 장제스에게 밀리고 있었고, 초공작전 문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초반에는 게릴라전에 적응하지 못한 국민혁명군이 토벌에 실패했으나 점점 국민혁명군이 공산당의 게릴라 전술에 적응하면서 탈탈 털려서 결국엔 도망가야 했다. 장쉐량이 공산당의 숨통을 완전히 다 끊어버리기 전 장제스를 감금하는 서안 사건이 아니었더라면, 공산당은 박멸당했을 것이며 최후에 공산당이 국민당을 이긴것도 거의 10여년간 국민당이 사실상 혼자 일본 제국과 싸우느라 국공내전 당시 힘이 다 빠진 상태였던 데다 부패 문제가 심각하였고 가장 중요했던 점은, 마오쩌둥의 프로파간다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4]

3. 정치

중국 공산당 중앙 위원회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부터 당이 걸어온 역사에 대한 몇 가지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였다. 회의실 문이 닫히고 비공개 회의가 시작되기 직전 천윈이 이런 고백을 했다.

"만약 마오 주석이 1956년( 대약진 운동 이전)에 서거했다면[5] 그는 틀림없이 중국 인민의 위대한 지도자로 남았을 겁니다.[6] 그가 1966년( 문화대혁명 이전)에만 서거했어도 뛰어난 공이 조금 퇴색될지언정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는 1976년에 서거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덩샤오핑은 마오가 스탈린을 어떻게 생각했던가를 회상했다. 마오는 스탈린이 70%의 위업과 30%의 과오를 남겼다(공칠과삼, 功七過三)고 평했었다. 덩은 마오쩌둥의 행적도 대략 비슷한 비율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다분히 냉소적으로 말했다. 덩의 발언은 일종의 공식 판결이 되어 마오를 비판할 때마다 으레 나오는 말이 되었다. 덩은 중공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탈마오주의' 선전은 피하는 편이 낫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981년 6월 27일

마오쩌둥은 데이비드 샴보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중주의적 폭군(populist tyrant)이라고 불리운 유형의 정치가로, 이런 유형의 정치가가 그렇듯 굉장히 평가가 갈린다.[7]

마오쩌둥은 대중들에게 계속해서 직접적으로 호소했고, 그들을 동원하려고 했던 반엘리트주의적 요소가 강한 정치인이었다. 마오쩌둥의 시대를 특징짓는 것은 대중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대중을 동원하여 관료제에 대항하는 것으로 사용하였다. 그는 1956년 이후에는, 대중을 반복적으로 국가관료조직에 대항하는 식으로 사용했다. 그는 민중의 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중국 사회를 문화적으로 변화시키고 싶어했고, 정부기관, 관료들에게 대항하기 위한 힘으로 대중들에게 계속해서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것을 뛰어넘었다. 이것이 그의 대중주의적 요소라고 불리는 것이다. 마오쩌둥의 이런 강력한 대중주의로 인해 발발된 문화대혁명에 학을 땐 중국 공산당 간부들의 반동으로, 대중주의적 요소를 철저히 탄압하는 것이 중국 공산당의 기조가 되었으니, 천안문 6.4 항쟁 탄압으로 대표되는 오늘날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중국 공산당 정치가 만들어진 원인이 이것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사회주의로 체제가 전환된 이후에도 끊임없는 혁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혁명을 국제적으로 전파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러한 대중에 대한 직접적인 호소의 과정에서, 마오쩌둥이 만들어낸 중국 공산당의 정치 체계는 서구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비해 폭압적이었다. 그리고 그의 정책과 정치체제 하에서 수많은 중국인들이 죽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죽은 사람의 수는 히틀러와 스탈린, 히로히토가 학살한 사람의 수를 합친것과 비슷하다.

이러한 식의 평가에서는 마오쩌둥은 혁명가로서는 성공적이었지만, 정치가로서는 실패로 끝났다고 본다. 중국 공산당에서조차도 마오는 분명 성공적으로 공산 혁명을 완수했지만 집권 중에 저지른 실책은 상당히 많다고 여긴다. 이것은 중국 내에서도, 중국 밖에서도 많이 보이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즉, '성공한 혁명가, 실패한 정치가'로서의 관점은 일반적인 관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전근대 군주로 치면 시황제, 이존욱,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 자신이 속한 나라를 통일한 업적과 이후 그 나라를 자기 손으로 다시 혼란에 빠뜨린 실책이 공존하여 난세의 명군이자 치세의 암군이 된 인물들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여기에 반대하는 관점이 있을 수 있다. 일단 첫째로는 그가 '성공한 혁명가'였는지의 문제가 지적될 수 있고, 둘째로는 그가 '실패한 정치가'였는지의 문제가 지적될 수 있다. 모리스 마이스너(Maurice Meisner)의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에서 그는 이 평가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기하려고 시도한다. 대약진과 문화대혁명의 엄청난 실패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은 중국의 국제적 위상을 끌어올리는 데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수많은 인명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중국의 인구 및 기대수명은 마오 시기 때에 급격하게 증가했고, UN에서의 상임 이사국도 되는 등 국제적 위상이 높아졌다는 것이다.[8] 하지만 결국 현재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중국은 강대국이 되었기는 했지만, 정치 체제도 민주적이지 않고, 경제적으로는 사회주의가 아닌 실질적인 자본주의 국가가 되지 않았느냐는 이유를 들어 정치가로서의 마오는 강대국 중국의 유산을 남겼지만, 혁명가로서의 마오의 영속적인 유산은 뭐가 있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 정치에 마오가 남긴 유산이 굉장히 모순적인 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남긴 유산은 마오가 구성한 굉장히 강력하고 권위주의적인 중앙 정부가 있고, 동시에 조반유리로 대표되는 그러한 시스템을 무너뜨릴 수도 있는 민중주의적인 요소이다. 마오는 문화대혁명기에 자기 자신이 구성한 공산당에 굉장한 위기를 불러일으켰으나, 이를 대체할 새로운 탈권위적인 정치 질서를 만드는 데 실패하였다. 마오쩌둥은 생전에 중국 공산당이 홍색 귀족집단으로 변질되는 것을 굉장히 우려했지만 결국 자신의 사후 중국 공산당이 변질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실제로 현대 중국에서 마오쩌둥은 일단 존경받고 숭배받는 경향에 비하면 좀 현실정치에 반영되는 부분에선 미묘한 구석이 있다. 현대 중국은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덩샤오핑이 주도해 마오쩌둥의 뒤를 이은 화궈펑을 밀어낸 다음, 1981년 2차 역사결의에 따라 마오쩌둥의 행위가 일종의 반혁명 행위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덩샤오핑이 마오가 7할이 잘하고 3할이 못했다고 규정한 것을 따라서 마오쩌둥이 국부인 것만 인정하는 것이지 마오주의는 헌법에서만 거론할 뿐 직접적으로 집행하지는 않는 것이다. 현재도 마오쩌둥에 반대하는 말들은 전부 정당한 정책집행이었다고 언급하고 있는 사안이기도 하다.

마오쩌둥의 노선은 평균주의, 집체주의, 그리고 농촌지향으로 요약된다. # # 그래서 마오쩌둥이 초기 대약진운동에서 토법고로, 즉 농촌의 자립적 산업화와 인텔리 하방, 농촌의 지식 자립화를 추구했고 종내에는 자립을 달성한 농촌 코뮌들의 반관료주의-비도시 혁명 지속을 추구했다. 소위 말하는 '계속혁명론'을 지향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대약진은 말 그대로 이상만 좋았지 현실은 시궁창이었고 이러니까 어쩔수 없이 62년 이후부터 수정에 들어가, 류사오치 중심의 비모택동 노선 - 중앙집권적, 도시중심적 발전이 이뤄진것이다. 이 시기에는 나름대로 평균수명도 오르고 공업생산량도 오르고 농업생산량도 오르는 등의 발전이 있었다. 도시 중심이라도, 농촌 산업화한다고 토법고로 같은 뻘짓 안하고 도시에서 트랙터 등 농기구 생산해서 내려보내니 당연히 농업생산량이 늘었던 것이다.

반면 지금 중국은 사회지출은 철저히 억제하고 세수확보도 제대로 안하고 그냥 재벌들 윽박 질러서 기부금 십몇조 뜯어내는 수준이다. 진짜 제대로 재분배를 하려면 결국 나라가 나서서 세제 개편하고 돈 확확 걷어서 다시 확확 뿌려야 하겠지만 현대의 중국은 세수를 확확 걷지도 확확 뿌리지도 않는다. 현 중국은 말만 번드르하게 하며 복지 기피하고 국가주도 산업투자에 몰빵하는 중앙집권적 발전이며 평균주의는 잊은지 오래인 정책을 펼치는 것이다. 격차를 인정하지 않고 평균주의를 지향했던게 마오의 노선이고, 시진핑의 현행 정책노선은 이미 부유한 사람이 있는 것을 인정하고 그 부유한 사람이 책임을 지라면서 기부를 권장하는 것인데, 마오의 평균주의보단 덩샤오핑 선부론에 훨씬 가깝다. 마오가 제창했던 생산수단 사회화와는 거리가 안드로메다 수준으로 거리가 있는 셈이다. # 시진핑의 공동부유(共同富裕) 제기 배경 및 정책적 함의, 이민자[9]

다만 이는 마오 본인의 잘못도 있다. 마오가 남긴 유산이 굉장히 모순된 것은 마오 본인부터가 자신의 정책과 사상에 모순적이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반수정주의자였고 반관료주의자였으며 지방자치, 농촌 자립을 원했다. 그러나 만년의 마오는 농촌자립-지방자치 운동이 중앙을 타격하고, 종내는 그 중앙의 최정점 자신을 타격하며, 반수정주의-반관료주의 기류가 당을 타격함을 넘어서 당의 정점인 자신에게 칼이 돌아가자, 자신이 구상하고 외쳤던 노선을 따르던 사람들을 공격했고, 이것이 바로 마오 특유의 대중주의와 결합해 문화대혁명을 부른 것이다. 결국 만년의 마오는 본인의 노선이 본인에게 위협이 되자 자신의 노선조차 배반하고 날뛰는 자였던 셈이며, 그의 통치는 사상가+혁명가 마오 vs 통치자+권력자 마오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과정에서 마오쩌둥주의는 중공은 물론이오, 마오 자신에게부터 버림받은 것이다.

어쨌거나 그렇기에 마오의 실책이 단죄받았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마오주의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현재의 공산당 통치에 반대하는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 되다 보니, 현재의 집권 정당인 중국 공산당도, 그 공산당에 반대하는 세력도 모두 마오의 강력한 영향 아래 있게 되었다.

4. 경제


전반적으로 집권 초기에는 당시 국공내전으로 초토화된 중국을 되살리기 위해 경제 개발 정책을 시도했고, 이것이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에 추진력을 얻은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으로 무리하게 비현실적인 경제 계획을 세워 크게 실패하더니 결국 본인의 정치 권력을 위하여 이용한 사건인 문화대혁명으로 심하게 말아먹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종합적으로는 비판받고 있으며, 중국공산당의 공식적인 평가 역시 초기에는 괜찮았으나 집권 중기 이후로는 실패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천윈의 평가에서도 드러나는 것인데, 호평과 악평이 갈리는 지점으로 잡히는 것은 보통 반우파투쟁이다. 이 때 이후로 마오의 권위가 강해져서 대약진 운동 등으로 인한 대기근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현재 중국 공산당이 보는 시점에 가깝다고 할 수 있고, 중국 외에서도 이 평가를 약간의 변화를 주고 수용한다.

마오쩌둥은 친화력과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인재 모으는 능력 자체는 매우 좋았고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류사오치, 펑더화이, 주더, 린뱌오, 천윈 같은 유능한 인재들을 휘하에 두고 있었지만[10] 국공내전으로 국민당 정권을 격파하고 중화인민공화국 정권을 수립한 이후에는 이들을 정적으로 대하며 이들의 능력을 제대로 써먹지 못한다. 집권후에 조급증과 함께 독선적인 면모를 크게 드러내며 주변인들의 충고를 무시하는 것도 모자라 반동이라며 그냥 목을 뎅강 잘라버리는 등 숙청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1949년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천윈을 기용하면서 투기자본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물가를 안정화시켰고, 그 이후로 화폐개혁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으며 스탈린이 살아있을 때는 그래도 눈치를 보는 모습을 보이며 일단 평균 이상의 경제적 성적을 거두며 1936년도의 경제력을 웃도는 성과를 보였지만 흐루쇼프가 들어서면서 외교적 고립 우려와 함께 조급한 모습을 보이며 천윈 등 경제관료들이 주도하던 안정성장 노선을 파기하고[11] 대약진 운동을 펼쳤는데[12] 경제정책이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경제정책을 조기에 수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고 그 결과 3,000만명 이상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했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국가주석 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문화대혁명을 일으켰고, 홍위병들이 사회 인프라와 문화재를 파괴하고 사회전반적으로 광기가 휩싸이는 과정을 조장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학자나 지식인들, 동료나 후배 당원들이 홍위병들에게 모욕당하고 한직으로 끌려나갔으며 심한 경우에는 살해당하기까지 했다. 총리인 저우언라이가 마오쩌둥의 실책을 수습하고자 나름대로 노력은 했다지만 마오쩌둥 때문에 불가능한 꿈이었고, 결국 중국은 마오쩌둥이 죽는 그 순간까지 문화대혁명의 후유증을 완전히 수습하지 못했으며 또한 경제적으로도 중국 전체를 2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침체기에 빠트리면서 일본, 서독, 이탈리아, 캐나다, 브라질, 멕시코, 스페인에게 하나하나 추월당했으며, 1980년대 들어서는 인구수로 1/40 이하인 대만에게 국가생산의 40% 가량을, 1/20 정도인 한국에게는 70%(!)까지, 심지어 영국의 식민지이자 일개 도시인 홍콩에게 27%까지 따라잡히는 충격적인 결과를 불러왔다. 중국/경제성장률을 보면 마오쩌둥 집권기간 내내 중국의 경제가 쭈욱 침체였던것은 아니었는데 1950년~1957년의 기간 동안 고성장세를 기록하여서 한국보다 잘살았기도 했고, 류사오치 집권기간인 1963년부터 1966년까지 기저영향이 있기는 해도 4년 연속 10% 경제성장을 기록하기도 했으며 홍위병이 하방되면서 문화대혁명의 혼란이 일정부분 수습된 1969년과 1970년에는 각각 19%, 16%의 고성장을 기록한적도 있다.

그러나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두차례씩이나 경제성장의 성과를 완전히 잠식해먹었고, 1969년과 1970년에 경제가 문혁의 후폭풍에서 회복된 이후로도 1970년대 초중반에 경제성장률이 침체된 영향으로 결국 중국이 마오 생전에 경제성장의 포텐션이 제대로 터지지 못한 것이었다. 해당 기간 동안 대만과 홍콩이 비교적 안정적인 성장세를 유지하며 1인당 국민소득을 수십배 이상 성장시키는 동안 중국은 고작 몇배의 성장을 거두는데 그쳤다. 1980년 기준으로 홍콩이 1인당 국민소득 5,000달러, 대만이 2,000달러를 달성하는 동안 중국은 194달러에 그쳤는데 1950년대에 대만과 홍콩과의 1인당 국민소득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이 기간 동안 경제성장을 중간중간에 리셋시켜서 성장을 늦추게 만들고 타 국가에 크게 뒤쳐지게 만든 책임은 마오쩌둥의 몫이다. 또한 1980년대에 중국이 본격적인 고성장세에 접어들었을 때가 대만, 홍콩 경제의 전성기였을 시점이다보니 대만과 홍콩의 경제성장률이 조금씩 둔화되기 시작하는 1990년대가 되어서야 이 누적된 차이를 좁히기 시작한 것이었다.

다른 관점은 마오 후반 그러니까 60년대, 70년대에도 긍정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https://jacobin.com/2022/07/china-mao-zedong-capitalism-history-party-state-market-economy 신제도주의 경제학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은 마오 시기의 경제 정책에 대해 얼마간 긍정적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마오쩌둥의 경제 정책은, 마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아이러니하게도 중국에서 자본주의가 발달하는 데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마티아 센(Amartya Sen)은 <자유로서의 발전>에서 마오가 이를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마오 시기의 문해율과 기대수명의 향상이 중국의 자본주의의 발전 및 경제 성장을 가져왔다고 논하였다. 맨슈어 올슨(Mancur Olson)은 자신의 저작 <지배권력과 경제번영>에서 마오 시기의 문화대혁명이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 성공의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여, 장기적으로 경제발전에 기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문화대혁명이 기존의 관료층 및 권력의 상층부까지 공격함으로써 기득권층의 이익잡단화를 억제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올슨은 독일과 일본이 패전국임에도 왜 경제가 성장하였는지, 소련은 중국과 다르게 왜 개혁개방에 실패했는지도 이와 같은 논리로 설명하였다. 마오 시기의 경제 정책에 대한 신제도주의 경제학의 일반적 평가는 로널드 코스(Ronald Coase), 왕닝(Ning Wang)이 저술한 <How China Became Capitalist> (2012)의 1장에 잘 나와 있다.[13]

4.1. 재평가

중화인민공화국이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이후, 간판만 공산당이고 실질적으로 자유시장경제에 가까운 체제로 변화하며 거대한 관료주의 시스템이 청년 실업과 불평등 등에 대한 대처가 미흡하자, 중국 각지에서는 당의 공식입장에 가까운 마오쩌둥에 대한 추상적 숭상이 아니라, 진지하게 마오주의를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이 있다.

중국은 개혁개방을 한 이후인 현재도 종교, 특히 기독교 등에 절대 호의적이지 않아 성탄절인 12월 25일을 마오쩌둥의 생일로 대신 기념하는데, 주로 중동지역의 뉴스를 전하는 유튜브 memri-TV채널에서, 중국에서 마오쩌둥의 생일 마오쩌둥의 고향인 샤오산에서 일어난 진정한 마오이즘을 이행하라고 요구하는 시위를 보도하기도 했다.

[14]

이러한 움직임은 중국마오쩌둥주의공산당등과 같은 조직에서도 나타나며, 일부는 이를 중국공산당이 억압한다고 주장하지만 딱히 이런 움직임이 표면적으로 나타나거나, 그걸 또다시 억압하는 현상이 유의미한 수준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5. 교육, 문화

본격적으로 간체자를 고안하여 쓰기 어려운 정체자를 대체함으로써 문해율을 상당히 높였고, 막장 수준이던 중국 대륙의 참담한 문맹율을 개선시켜 사회개혁에 성공적으로 해낸 것은 공산당이 집권하고 나서이다. 마오쩌둥은 간체자를 '고안'하였고 중국 공산당이 실질적으로 보급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간체 관련 논의는 국민당이 집권할 때에도 계속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국민당 정부는 이것을 실질적으로 실현시키지는 못했다. 중국의 문해율이 높아진 것은 공산당이 집권하고 나서부터이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고등교육 분야에서는 타격이 굉장히 컸다. 특히 대학 교육에서는 타격이 컸고, 상산하향 운동으로 인하여 중앙의 주요 인력들이 지방으로 가게 되면서 타격은 더욱 커졌다.

이러한 교육은 마오쩌둥이 엘리트교육보다는 대중적인 초등교육의 확산을 선호했다는 점 때문으로 해석되고는 한다. 문혁 시기의 맨발의 의사에서도 이러한 점이 드러나는데, 그는 전문인력을 기르는 것보다 예방의학이나 기초적인 지식의 대중적 확산을 선호했다. 마오쩌둥은 본인도 사상가이자 지식인이었으나 고등교육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본인이 베이징대학에서 사서를 하면서 청강도 하고 공부하던 도중에 대학교수들이나 지식인들의 모순을 간파해서 그렇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런 고등 지식인들이 입바른 소리는 하는데 막상 하는 게 없다는 마오의 지론이었다.[15] 대신 마오는 요새로 치면 초등교육을 광범위하게 하는 걸 좋아하고 문맹율 퇴치에 신경썼던 것이다. 중국의 문해율이 이로 인해 낮아진 점은 인정할 만한 부분이다.

중국의 전통문화 파괴 측면에선 문화대혁명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실책이다. 마오는 진시황을 호평하면서 분서갱유까지도 좋게 본 사람인지라 본인 입장에서 그깟(?) 문화재 파괴, 전통문화 파괴는 대수롭지 않게 보았다. 일단 본인부터가 연속적인 계급투쟁을 강조하면서 끝없는 모순의 해결을 위해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라서 그런 문화재 불지르고 지식인 박살내는 것도 마오쩌둥의 세계관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귀결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이런 반달리즘에 많은 이들이 경악하고 마오야 말로 시대에 뒤떨어진 반지성주의적 파괴자라고 비판하지만, 마오 입장에서 자기 나름대로는 필연적이었다는 것이다. 문화재를 아끼고 중국 전통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집착이 있었던 장제스와는 대조적인 부분이다.

6. 외교

1950년에는 북한이 멸망할 경우 중국에까지 미국의 영향이 미치게 된다는 순망치한의 논리에 따라서 김일성의 요청에 찬동해 6.25 전쟁에 참전했다. 명분상으로는 38선을 넘어 진격한 미군을 중국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함과 동시에 동맹국을 보호하기 위해서 참전하였다고 하나, 마오쩌둥은 스스로 주장한 명분을 어기고 중공군을 38선 이남으로 진격시켜 '방어 전쟁'이 아닌 '침공 전쟁'을 수행하는 전쟁 범죄를 저질렀으며 그 대가는 수많은 중국 인민들의 죽음과 현재의 파탄 국가 북한의 온존이었다.

7. 각국의 입장

7.1. 중화인민공화국

7.1.1. 중국공산당

명실상부 중국의 국부로 불리는 인물이나 중국공산당에서는 기본적으로는 국부로써의 그를 존중하되 그가 저지른 실책은 명백히 짚고 넘어간다. 덩샤오핑공칠과삼(功七過三)이라는 표현이 이를 잘 드러내 준다. 이 표현은 원래는 마오쩌둥이 스탈린을 평가한 것을 재인용한 것이다. 실제로 중국 내에서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은 아예 언급조차 금지된 천안문 6.4 항쟁과 달리 여전히 중국공산당 내에서도 크게 비판받는 그의 가장 대표적 실책 중 하나로 여겨진다.

이것은 학술적인 평가라기보다는, 굉장히 정치적인 평가였다. 마오가 죽은 이후, 화궈펑이 다음 권자에 오르면서 양개범시를 내새웠는데, 이와 차별화된 것을 내세우고자 했던 덩샤오핑이 마오는 공도 있고 과도 있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마오 및 화궈펑과 자신을 차별화하려는 의도였다는 해석이 있다. 헌법보다 당장(黨章)이 위에 있는 중국 정치 체제상 당의 창건자를 격하하면 당의 권위가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정략적 이유도 있다. 니키타 흐루쇼프 이오시프 스탈린을 격하하면서 스탈린주의를 추종하던 타 공산국가들에 대한 주도권에 도전을 받았던 것이나 1980년대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공산국가들이 과거와의 섣부른 단절을 택하다가 붕괴했던 것을 감안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실제로도 덩샤오핑은 마오의 권위를 이어받아 개혁개방을 이끌어내며 현대 중국의 기반을 안정적으로 구축하였다. 천안문 학살 같은 비극적인 사건들도 있었지만, 반대로 급격한 자유화를 추구하다가 정부가 붕괴되고 연방내 소속국들이 독립해 나가면서 국가 자체가 해체되어버린 구 소련이나 구 유고 연방의 사례도 있다. 폴란드, 헝가리, 체코,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소련의 위성국이었다가 냉전 체제가 종식되고 소련이 붕괴된 이후에 소련의 위성국 신세에서 벗어난 동유럽의 나라들은 공산 정권 붕괴 이후 민주주의 체제가 환영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해당 국가들은 제2차 대전 이후 소련과 소련의 지원을 받는 자국내 공산당 정치 세력들에 의해 공산화된 경우가 많아서 중국의 경우와 동일선상에 놓기는 어렵다. 하지만 중국 역시 자국내 공산당 정치 세력에 의해 공산화 된것이다. 중국이 민주화되었다면 자유진영의 지원을 받으며 지금보다 더 성장했을 것이고 자국 내에서의 인권탄압이 크게 줄었을 것이다.

2010년대 시진핑 집권 이후로는 시진핑이 자신의 위상을 계속 높이며 마오쩌둥에 대한 위상이 더욱 내려가고 있다.

7.1.2. 지식인들의 평가

좌파 성향이 강한 지식인 계층 역시 마오쩌둥에 대한 평가가 갈린다. 문화대혁명 당시 반지성주의의 영향으로 지식인 계층이 가장 집중적으로 탄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문화대혁명 특유의 개혁적인 색채는 어느 정도 참작의 여지가 있다는 것.

지식인 중에서 중국의 마오주의나 신좌파의 경우, 최근 중국 경제성장의 과실이 공산당을 비롯한 상류층 내지 해안 도시에 편중되며 빈부격차가 크게 늘어나자, 엄격한 평등주의를 견지하던 문화대혁명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하기도 한다. 이들은 문화대혁명을 일종의 실패한 참여민주주의 실험으로 보기도 한다. 개방 후 중국은 급격한 경제 성장의 대가로 어지간한 개발도상국이나 선진국을 능가하는 빈부격차와 부정부패를 겪고 있고, 이에 대한 반감으로 공평하게 가난하기라도 했던 문화대혁명 시절이 나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최근 마윈이 코로나 사태와 관련해서 기부하겠다고 올린 동영상에 "부자의 것을 빼앗아 빈자에게!" 따위의 구호를 외치는 세대가 바로 이들이다. 물론 아직은 어디까지나 소수의 목소리고, 이러한 마오주의적인 목소리는 중국 당국의 굉장한 탄압을 받는다. 그러나 보시라이를 통해 정책에 참여한 적도 있고, 시진핑이 공동부유를 내세우는 등 중국 공산당도 극심한 빈부격차를 아예 외면하지는 못하여 이들의 목소리가 어느 정도는 정책에 반영되고 있다.

또다른 지식인들의 목소리로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있다. 이들은 심각한 불평등의 문제가 있다는 것에 동의하면서, 마오에 대한 제한적인 긍정을 하기도 하지만 문화대혁명 같은 사건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이들은 마오주의자들에게는 우파적이라고 비난받고, 자유주의자들에게는 마오주의라고 비판받는 중간에 끼인 신세다.

마오쩌둥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지만, 또 민중의 참여라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문화대혁명을 보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제한적으로 문화대혁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측의 지식인들은 마오가 문화대혁명을 어떻게 일으켰느냐보다는 마오가 문화대혁명을 어떻게 진정시켰는가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문화대혁명의 '조반유리' 정신이 대중 운동으로서 1980년대의 갖가지 민주화 운동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 주목하는 경우가 있고, 문화대혁명이 공산당 관료의 힘을 약화시키면서 개혁개방 이후의 경제성장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 역시 문화대혁명에 대한 기본적인 평가는 영 부정적이다.

7.1.3. 대다수 중국 국민


중국에서의 마오쩌둥은 국부나 정치인이라기보다는 인물신[16]에 가까운 인식으로, 중국인들의 기복적 존숭의 대상이 된 실존인물이 되었다. 오히려, 마오쩌둥의 이미지는 부적처럼 쓰이는 경우가 많다. 마오의 조각상도 많은데, 많은 경우 관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복이나 재물을 기원하는 데 쓰이는 경우가 많다.

어찌됐건 중국 현대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인 것은 사실인지라, 후난성에 위치한 마오쩌둥의 생가에는 중국인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으며, 중국에는 마오쩌둥과 다른 건국 영웅들을 신으로 모시고 있는 사당도 존재하고 있다. 왼쪽은 주더 원수, 오른쪽은 저우언라이 초대 총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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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중국 인민들에게는 대체로 초대 지도자이자 국부로써보다는 인물신이자 부적의 일종으로 상징적 인물로 여겨지나 젊은 층에서는 그의 실정으로 인해 그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인물들도 생기고 있다.

또한 전술했듯이 현재의 중국은 마오쩌둥의 위상을 당의 직/간접적 개입으로 격하시키고, 현 주석인 시진핑을 치켜세우는 개입을 몇 년째 진행중인 상황이기에 민간에도 마오의 위상이 꽤나 내려갔다. 예시를 들자면 류츠신 삼체가 마오쩌둥의 역대급 흑역사인 문화대혁명을 다루었음에도 중국에서 별 탈 없이 소비된 것을 들 수 있다. 또 다른 예시로는 2024년 8월 16일 중국의 콘솔, PC 게임 검은 신화: 오공 발매를 나흘 앞두고 이 게임의 디자이너 양치가 과거 천안문 광장에서 마오쩌둥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날리는 장면이 발굴되어 현지에서 논란이 발생했고 기사로도 보도되었으나 # 정작 이후 게임 발매에는 큰 문제가 없었으며 오히려 중국 스팀 게이머들은 여전히 이 게임에 호평을 보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7.2. 아시아 주변 국가들

주변국에서의 평가는 중국 내부에 비해 훨씬 박하다. 그나마 대한민국의 정치현실주의자들은 마오의 실책으로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에 간접적인 도움이 되었다는 평가를 하지만 이마저도 사실상 적국의 지도자로써 실책에 대한 평가이기에 악평과 다를 바 없으며 한국에서도 트로츠키주의는 있을지언정 마오주의자는 거의 없다.

7.2.1. 한국

대한민국에서는 6.25 전쟁 당시 UN의 지원을 받은 남한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통일까지 눈 앞에 둔 상황에서 백만대군에 가까운 인해전술을 구사하며 북한을 지원한 장본인이고 후일 인터넷을 통해 무식에 가까운 대약진 운동과 토법고로, 문화대혁명 등의 굵직한 흑역사를 조장한 자이다보니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공산주의 독재자 중 하나였기에 정치가로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국익을 우선시하는 정치현실주의적 성향의 국민들에게는 엇갈린 평가를 받는다. 물론 후술하겠지만 이조차도 "마오쩌둥이 트롤링 해준 덕분에 중국이 빨리 강대국이 되지 못했고 그 사이에 우리가 성장했다"라는 사실상 조롱에 가까운 평가지 진짜로 마오쩌둥이란 인물 자체를 고평가하는 건 아니다.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일반적으로 인식이 매우 나쁜 독재자 중 한 명이다. 일단 집권 이후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중국 국민들을 잔인하게 살육한 공산당 독재자라는 점은 물론이요, 6.25 전쟁 당시 펑더화이와 중공군의 파견을 지시하여 북진통일을 가로막는 바람에 북한을 존속시켜 한반도가 아직도 분단국가로 남게하는 등 어마어마한 악영향을 끼치게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에 도움을 받은 북한이 아닌 대부분의 한국 국민들과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악평을 듣고 있다.[17] 실제로 정치현실주의자들 역시 마오쩌둥이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에 어느 정도 보탬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6.25 전쟁 당시 중공군 파견을 지시하였다는 점은 빼놓지 않으며, 이로 인하여 북진통일을 막은 원흉이기에 전반적으로는 부정적인 평가 쪽으로 기울어있다.

다만 대한민국의 정치현실주의자들에게는 ‘마오의 여러 정책 실패로 인하여 대한민국의 경제가 성장했다’라는 평가를 듣는다. 중국은 한반도가 일본과의 교역로에 위치해있기에 수없이 지배하려고 시도하는 등 한반도 국가에 이런저런 간섭을 가했지만 중화인민공화국 초창기 당시 중국의 여러 실책으로 인하여 중국 내부의 인프라는 말 그대로 초토화되었고, 1970년대 당시에는 전후로 복구되던 대한민국보다도 인프라가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로 인하여 대한민국은 상대적으로 중국의 압박을 덜 받으면서 미국의 지원을 받아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룩, 한반도 국가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달리고 있다.

따라서 민족주의적 반중주의자나 정치현실주의자의 경우 마오쩌둥은 욕을 먹을 만한 짓만 골라서 한 것은 맞지만 오히려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반사이익을 가져다주었다는 평가를 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오히려 마오쩌둥보다 덩샤오핑과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 등 개혁개방 이후의 중국 지도자들을 더욱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이오시프 스탈린에 비해서도 스탈린이 대한민국에서는 히틀러와 다를 바 없는 악랄한 독재자로 인식되는 경우가 잦은 반면 마오쩌둥은 내치에 있어서는 그만큼의 독재자는 맞으나 대한민국의 관점에서 손해가 될 만한 짓만 골라서 한 것은 아니라는 의견또한 소수 존재한다. 실제로 중국이 개방된 이후 급속도로 강대국으로 성장하여 현재 소련에 이어 벌써 미국과 적대하고 있는 걸 보면, 마오쩌둥이 상식적이었을 경우[18] 한국과 일본에게는 최소한 당분간은 심히 껄끄러운 시나리오가 펼쳐졌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사실 그럴 만도 했던 것이 마오쩌둥이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으로 중국의 국력을 침체시키지 않고 안정 성장 노선을 내세우던 집권 초반기의 모습 그대로 중국의 공업화를 이끌었으면[19] 일본은 중국의 압도적인 규모에 밀려 아시아 1위 경제대국이자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올라설 수 없었을 것이다. 한국도 1990년대 이후로 중국에 물건 팔아먹을 일이 줄어들기 때문도 있고, 북한의 국력이 크게 쇠퇴할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냉전 체제 경쟁의 최전선에 섬으로서 받은 미국의 원조가 이른바 한강의 기적의 원동력 중 하나였다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물론 이런 평가도 지도자로서 마오쩌둥이 너무 부적합했기에 경쟁국 입장에서 좋은 소리를 하는 것이므로 별로 좋은 평가는 아니기는 하다.

반대로, 중국에 여유가 있어서 주변국에 간섭하기를 원 역사보다 훨씬 일찍 시작했다면, 여타 동아시아 국가들의 반공 명분이 훨씬 강해져 이들의 사이가 더 가까워졌을 것이다. 한일관계 개선도 현실적인 이유(= 중국의 위협) 때문에 원 역사보다 훨씬 빨리 이루어졌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공산주의 독재자이기에 대다수의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미움의 대상이지만 정치현실주의자들에게는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의 숨은 공헌자이자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통일을 막은 원흉이라는 평가가 공존한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정치적 실책이 결과적으론 한국에게 발전의 기회를 가져다주었을지라도 그게 한국을 위한 실책은 아니었기에 한국인들이 마오쩌둥에게 굳이 고마워해야 할 필요는 없다. 실제로 마오쩌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한국인들도 정치를 못해서 대한민국이 발전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지, 이런 식의 정치현실주의자의 경우 반중인 경우가 대다수이기에 고맙다는 식의 결과론적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여담으로 대한민국 정치인과 비교할 시 이승만과 가장 유사한 포지션의 인물이다. 독립운동가 출신에 건국자인 국부로 건국 초기 치명적인 내전[20]을 겪었으며 그 내전에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었고, 일본에 대한 태도의 대중적 인식과 현실이 다르며,[21] 현실주의적이기보다는 이념적인 성향이 강했으며[22] 그러한 이념을 기반으로 하는 국가를 세웠으나 학살과 내정 실패[23]로 객관적인 평가는 부정적으로 기울어 있으며 본인과 정치적 스펙트럼은 비슷하나 개인적으로는 사이가 매우 나빴던 후임자[24]에게 영 좋지 않은 상태로 국가를 물려주게 되었다. 해당 후임자가 국가를 개발시키며 근현대사 최상위권의 업적을 올렸으나, 동시에 권위주의적 통치를 하며 사건을 일으켜 호불호가 갈리는 것[25]까지 거의 똑같은 위치를 가지고 있다 봐도 무방하다. 다만, 대한민국은 자유로운 민주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이승만이 개인에 따라 호불호가 매우 갈리는 정치인 혹은 역사속 인물로 간주되는 것과 달리 마오쩌둥은 인권탄압 독재국가인 중국 내에서 이미 신격화가 완료되었기에 숭배의 대상 혹은 인물신으로 간주된다.

7.2.2. 대만

그나마 정치현실주의자들에 의해 어느 정도 재평가를 받고 있는 대한민국 일본과는 달리, 대만은 마오쩌둥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본 당사자이기에 정치 파벌이나 성향 등을 막론하고 일말의 긍정적 평가는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중국국민당을 위시한 통일파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대만으로 쫓아내고 대륙 본토를 점거한 장본인이고, 독립파의 입장에서는 우리나라를 자기네 땅이라 우기며 호시탐탐 노리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초대 지도자로 여기며 장제스 집권 시기에는 모비(毛), 모적(毛), 주모한간( 漢奸) 등 온갖 멸칭을 갖다 붙이기도 했다.[26] 지금도 대만인들은 대놓고 친중파가 아닌 이상 그나마 중국에 유화적인 범람연맹 보수주의 계열까지도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다.

7.2.3. 일본

대체로 대한민국과 비슷한 평가를 내린다. 한 국가의 지도자로써는 대부분 좋지 않은 평가를 내리나, 정치현실주의자들 사이에서는 마오쩌둥이 일본에 도움이 될 만한 행위를 했다는 의견을 내는 경우도 잦다. 마오쩌둥이 6.25 전쟁을 장기화시킨 덕에 일본의 경제가 성장하는데 보탬이 되었고 중국이 마오의 실정으로 허덕이는 동안 일본은 세계적 경제대국이 되었는데, 대한민국에서 마오쩌둥을 비판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인 6.25 전쟁 중공군 참전이 일본에게 있어서는 되려 도움이 된 요소이기에 정치현실주의자들 사이에서는 평가가 높아질 여지가 있으나 일본의 보수~극우 세력은 대체로 정치현실주의같은 이성적 요소보다는 감성적 요소를 위주로 판단하는 경향이 강하기에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일본인들은 극도로 적다. 어쨌거나 오랜 기간 일본과 대립한 공산권 독재자이기에,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그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다고 할 수 있다.

한때는 극좌 과격주의자들이 주체사상과 함께 마오주의를 추종했던 전적이 있지만 일본의 극좌 운동이 아사마 산장 사건 이후로 사라진 현재는 마오주의자 역시 없어졌으며 극우쪽에서도 마오쩌둥 일본 제국을 면피하는 용도로 가져다 쓰기 위해 그와 중공의 만행을 집중 조명하며 비난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마오쩌둥 중국공산당 장제스 중국국민당에게 맞설만큼 힘을 키우는 계기가 된 중일전쟁을 일으킨 나라가 바로 일본 제국이며 마오쩌둥의 중화인민공화국 6.25 전쟁에 참여하여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이익을 본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즉 마오쩌둥은 공산권 독재자라는 상징성으로 인하여 거의 대부분의 일본인들에게 욕을 먹고 있으나 의도치 않게 일본과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던 것이다. 물론 마오쩌둥이 일본 제국의 도움을 받지 않았더라도 애초에 본토 중국인과 중국 공산당은 동일시될 수 없으니 마오쩌둥의 실책들이 중국에서 저지른 중일전쟁을 포함한 일본 제국의 전쟁범죄를 면피하는 용도로 쓰일 수는 없다. 일본 극우가 마오쩌둥을 거론하며 일본 제국을 쉴드치나, 그 마오쩌둥을 만드는 데 일본 제국이 상당한 역할을 했으므로 넓게 보자면 일본 제국도 중국의 공산화와 현재 중국에서 일어나는 인권 문제에서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7.2.4. 베트남

공산국가이지만, 중국과 역사적으로 앙숙인 베트남 역시 마오쩌둥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인도차이나 전쟁, 베트남 전쟁 당시 중공의 지원을 받으며 프랑스, 미국과 싸우긴 했지만 베트남의 국부인 호찌민[27]조차도 중국 공산당과 마오쩌둥을 경계했을 정도였으며,[28] 각각 호찌민, 마오쩌둥 사후에는 양국 간 전쟁도 벌였으니, 오죽하면 베트남 국민들이나 역사학자들조차 중국에서 마오쩌둥이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중국 국민들 수천만명을 죽이던 것에 비하면 차라리 호찌민이라도 국가를 제대로 다스리고 간 게 천운이었다고 평가할 정도이며 오늘날 베트남의 국민들도 중국 국민들의 앞에서 '그래도 호아저씨는 우리나라의 국민들을 굶겨죽이거나 집단광기를 일으켜서 국가를 망치는 짓은 안 했는데, 너네 나라 국부라는 사람은 뭐했냐?'라는 식으로 말하기도 할 정도로 마오쩌둥을 모국의 호찌민과 비교하며 마구마구 비난한다.[29] 게다가 실제로 호찌민과 마오쩌둥은 살아생전에도 공산주의 통치 과정에서 반동분자에 대한 처리 방식과 해석을 두고 논쟁을 벌인 적도 있었는데 마오쩌둥은 반동 우파 인사들은 많이 죽이면 죽일수록 사회주의 체제 확립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 반면, 호찌민은 자본가 등 공산주의에 반하는 반정권 인사들을 처벌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일방적인 살육에 기반한 숙청은 정권 확립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마오쩌둥의 극단적 주장에 반박했다.

7.2.5. 인도

인도 역시도 마오쩌둥에 대해서 적대적이다. 마오쩌둥 시기에 일어난 중인전쟁에서 카슈미르의 일부인 아크사이친을 중국에게 강탈당하고 아루나찰프라데시 등 영토분쟁을 벌였으니. 또한 인도에도 낙살라이트 등 마오주의를 추종하는 반정부군 단체 세력들이 존재한다.

7.2.6. 북한

북한에서는 6.25 전쟁 당시 중공군을 파견해서 국가의 멸망을 막아준 은인이기에 일반적으로 대단히 좋은 평가를 받는다. 물론 극단적인 주체사상 국가인 북한 특성상 마오주의는 제대로 취급받지도 못하나 북중관계를 단단히 고착화시킨 장본인이기에 북한 정권의 마오쩌둥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는 매우 좋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죽은 우방국 지도자를 비판해서 북중관계를 악화시킬 이유도 없고.

그러나 최근에는 시진핑이 마오쩌둥 격하 작업에 들어가는 중인데 이 역시 굳이 태클걸어서 중국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없으니 신경쓰지 않는다.

7.3. 기타 외국

한때 서구권 좌파 진영에서는 마오의 정책을 높게 평가하기도 했지만[30][31], 80년대 이후 죽의 장막이 열리면서 그의 정책이 벌여놓은 실정이 온 천하에 드러나 이런 평가는 종말을 고하게 되고 해외 에서는 독재자이자 학살자로 보는 시각이 우세해졌다. 적어도 냉전기 중국과 이해관계가 별로 없고 객관적으로 그를 판단하는 서구권에서는 객관적으로 그의 평가가 좋지 않으니만큼[32] 당연히 정치적 스펙트럼 불문 비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주로 서구권 좌파의) 인권과 민주, 사회 화합을 중시하는 관점에서는 수 천만을 굶겨죽인 정책 실패, 그리고 개인의 권력욕을 위해 무질서한 포퓰리즘을 선동하며 문화 파괴행위를 저질렀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동시에 (서구권 우파나 권위주의 국가들의) 국가 대전략을 중시하는 입장에서도 공산주의 특유의 주의주의[33]를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중국의 경제성장을 30년 가량 늦추고, 불필요한 전쟁 개입과 사상대립으로 자국의 외교적 입지를 악화시켰던 점을 어리석었다고 본다.

반면 제3세계 공산주의 운동에서는 상당한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마오쩌둥이 혁명가이던 시절 중국의 농경사회적 배경이나 "농민으로 도시를 포위한다"는 게릴라 전술이 해당 혁명가들의 처지와도 부합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쪽에서도 21세기에 들어서부터는 마오쩌둥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느는 추세이다.

[1] 이후 중국은 하나의 중국이라는 이름 하에 국민당 즉, 현 대만 정부가 한 전투마저 중국의 역사라며 자기네들 공적인마냥 영화를 내기도 하였다. [2] 장제스의 국민당이 중일전쟁 시기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부패 문제가 심각했으며 장제스가 간첩들을 색출하지 못했던 것도 있지만, 마오쩌둥의 선동이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3] 마오쩌둥은 나중에 일본에 고맙다는 말을 했다... 이렇게 흔히 알려져 있지만 이건 국교 정상화 과정 중 사석에서 개드립 친 것에 불과하다. [4] 사실 장제스의 세력이 일본제국과 싸우며 껍데기만 남은 그 상황에서도 마오는 장제스와 협상하면서 장제스의 역량을 두려워해 회담 이후 며칠동안 앓아 누웠을 정도였다. [5] 현재에도 중국에서 공식 석상에서는 마오쩌둥을 일컬을 때 꼭 마오 주석이라고 경칭을 써야 하고 그에 대한 비판을 함부로 할 수 없다. 그러나 북한과는 달리 사석에서까지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6] 이때 마오의 나이가 62세로 당시 평균수명으로 처도 오래 살았다. [7] 율리우스 카이사르,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평가가 갈리는 것을 생각해 보면 된다. [8] 중국 기대 수명의 변화 [9] 다만 시진핑 역시 신 하방운동을 주도하면서 이런 부분은 마오를 따라하는 지점도 있다. # 집체주의는 독재정권의 특징이고, 평균주의는 부유층의 존재를 인정하는 선에서 이미 물건너갔고, 농촌 자치 자립은 포기한지 오래고 그냥 도시 실업자들 짬처리하려고 던지는 거라 홍위병 처리를 위해서 하방시킨 것과 완전히 같다고 할 순 없지만 말이다. [10] 특히 린뱌오는 1966년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을 일으키자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을 지지하는 등 권력에 변질된 모습을 보였다. [11] 반대로 장제스는 1930년대에서부터 1940년대까지 전비를 대기 위해 통화를 팽창시켰는데 이러한 정책을 전후복구가 시급할 때에도 진행한 결과 대륙에서 밀려나는 참패를 당했고, 대만으로 쫓겨난 뒤에는 국공내전에서의 패배원인을 상기하며 안정성장 노선을 취해서 중국의 국력을 크게 따라잡는데 성공한 점과는 대조적이었다. [12] 비슷한 시기 베트남의 공산주의 지도자 호찌민 보응우옌잡, 반티엔중, 판밤동, 쯔엉찐, 레주언 등 자기 휘하의 여러 인재들을 잘 활용하여 그럭저럭 나라를 안정시켰던 것과도 대조된다. 다만 이웃나라라고 해도 프랑스의 식민지였다가 베트민 등 공산주의 계열 세력들이 독립투쟁을 주도하여 독립국가를 수립, 공산 정권을 창건한 베트남과 국공내전으로 공산당이 승리해 공산화된 중국의 역사적 배경은 다르다. [13] 이러한 입장은 중국이 어떻게 인도나 소련과는 다르게 냉전이 끝나가는 위기 상황에서도 어떻게 성공적인 경제성장을 할 수 있었느냐 하는 논의와 연결되어 있다. 다만 신제도주의 경제학자의 역사 해석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 로버트 포겔(Robert Fogel)의 미국의 철도의 역할에 대한 논의나, 노예제의 경제적 합리성에 대한 논의가 유명한데, 굉장히 논쟁적인 논의였다. [14] https://m.youtube.com/watch?v=9Vnm1G8BziA [15] 때문에 문화대혁명의 경우는 젊은 시절 염증과 환멸을 느꼈던 지식인 계급도 아작내 버려야겠다라는 것도 있었다. 마오 본인이 나름대로 독서광이기도 했지만 베이징 대학 사서시절에 교수들의 위선적인 모습을 한 두번 본 게 아니니까. 대표적으로 베이징대 교수였던 후스는 멋대로 청강하는 마오쩌둥에게 모욕을 주어 쫒아낸 일화도 있다. [16] 마오쩌둥은 본인을 우상화하기는 했으나 아예 신격화한 것은 아닌데 현재는 우상화가 상당히 오래 진행되었고 워낙 옛날 인물이다보니 자연스럽게 인물신에 가까운 이미지가 되었다. [17] 실제로 마오쩌둥이 없었다면 중국 6.25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6.25 전쟁은 국공내전이 끝난 지 불과 1년 뒤에 터졌고, 대부분의 수뇌부들은 미군과 맞부딪칠 위험을 감수하느니 내부 전열이나 정비하고 대만부터 쳐서 합병하자는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마오쩌둥은 국제사회에서 고립될 위험과 대만 침공 계획이 무산될 가능성을 감수하면서까지 북한을 도와야 한다고 강경하게 밀어붙였다. 물론 미국이 한반도를 넘어 중국까지 공격하면서 국공내전을 재개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아무튼 결과적으로 중국 마오쩌둥 정권이 북한을 지켜낸 것의 수혜국에 중국과 북한 뿐만 아니라 대만까지 포함된 것은 현재까지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에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18] 마오쩌둥의 상식과 별개로 모든 삽질의 시작이 된 중소결렬은 거의 필연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 소련의 공산권 패권경쟁, 그에 따른 중국의 삽질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으로 필연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19] 공산주의식 시장 경제인 이상 한계가 크긴 했겠지만 그 엄청난 규모 덕분에 총 GDP는 절대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중국 지도층이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의 개판을 경험하고 나서도 자본주의 도입에 반대할 정신이 있었다는 걸 감안할 때, 중국이 1950 ~ 60년대에 안정적이었다면 개혁 / 개방에 따른 엄청난 속도의 경제 성장 같은 건 없었을 것이다. 대략 처음에는 나름 할 만하지만 가면 갈수록 수렁에 빠져드는 모양새. [20] 각각 국공내전과 6.25 전쟁. 이로 인하여 중국과 한국은 나라가 파탄나버렸다. [21] 마오쩌둥은 좌파 정치인이기도 하고 현재도 중국이 반일 성향이 강하기에 반일로 간주되곤 하나 장제스에 비해 반일성향이 약했으며 오히려 일본 제국과 중화민국이 싸우는 바람에 일본 제국의 도움을 받았다고 평가된다. 반대로 이승만은 친일파를 제대로 숙청하지 않아 친일로 오인되나 실제로는 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혐일이었다. [22]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에서 볼 수 있듯 현실적으로 피해를 보더라도 본인의 이념에 따르는 정책을 많이 펼쳤으며 이승만은 극단적인 혐일, 반공보수 성향을 집권기 내내 드러냈다. [23] 마오쩌둥은 학살 인원이 전세계 최고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이승만의 경우 수하르토, 히틀러처럼 이승만보다 더 많은 인원을 학살한 반공 성향 독재자들이 존재한다. 내정 면에서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등이 크게 실패했으며 이승만 같은 경우에도 개발국가로 나아가지는 못했고 집권기 말기에는 미국의 원조가 줄며 경제가 많이 어려워졌다. [24] 각각 덩샤오핑, 박정희. 이 둘은 스펙트럼상으로는 거의 같으나 마오쩌둥, 이승만과 사이가 나빴다. 덩샤오핑은 문화대혁명 당시 잠시 숙청된 적이 있고 박정희는 이승만을 비롯한 구시대적 정치의 잔재를 몰아낸다는 명분으로 쿠데타를 진행하였으며 이승만이 사망할 당시 태도 역시 딱 전직 국가원수이자 건국자로써 체면을 지켜주는 정도였다. [25] 덩샤오핑과 박정희는 각자의 스펙트럼을 지키되 반대 이념까지 다소 혼합한 정책들을 여럿 펴며 국가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천안문 6.4 항쟁 당시 학살, 박정희는 인혁당 사건/유신 개헌/부마민주항쟁 당시 학살 등 인권탄압과 독재로 큰 사건을 일으키며 현재까지도 호불호가 갈린다. [26] 그런데 2014년 대만의 한 웹사이트에서 " 20세기 가장 위대한 중국인은 누구냐?"라는 설문 조사에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덩샤오핑이 1, 2, 3위를 차지하자 황급히 설문 조사를 중지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마오쩌둥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도 생기고 있다기 보다는 대륙에서도 좌표 찍고 VPN으로 우회해 참여했을 것이라는 의혹이 대부분이다. [27] 사실 호찌민도 미국이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적대/배척하여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미국과 손을 잡아 중국을 견제하려고 시도한 바 있었다. 자세한 건 미국-베트남 관계 문서 참조. 거기에 생애를 보면 알겠지만 호치민은 공산주의자라기보단 공산주의를 수단으로 사용한 민족주의자의 모습에 더 가까웠다. [28] 호찌민은 1960년대 말 문화대혁명 시기 중국에 갔던 외교 특사들을 통해서 문화대혁명 당시 중국에서 일어나던 홍위병들의 폭력, 파괴 행위와 마오쩌둥이 자행하고 있는 폭정들의 실상을 전해듣고 난 뒤 '이런 건 인민을 위한 사회주의가 아니다.'라며 문화대혁명을 간접적으로 비판했다. [29] 호찌민 역시 베트남이 프랑스의 식민지배에서 독립 후 토지개혁 등 사회주의 정책을 펼치면서 토지 국유화에 반대하던 농민, 노동자들의 시위, 파업을 유혈진압을 한 전적이 있었지만 마오쩌둥이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으로 학살해 죽인 사람들보다는 그 규모가 작았다. 그리고 국가 체계 정비 과정에서 벌어진 농민들의 저항을 군경의 유혈진압으로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비판과 논란이 오가자 자기 스스로 민주적으로 분란을 막지 못했다며 과실을 인정하고, 정책을 주도한 책임자 일부를 경질하는 등 비교적 수습도 잘했기에 1950년대 말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부정하는 행보를 보이던 마오쩌둥과 대조되는 모습을 보였다. [30] 사실 그럴 만도 한 게 당시( 1980년대 이전) 중국에 대한 정보가 워낙 없어서, 국경일에 천안문에서 지난번에 봤던 특정인이 보이지 않으면 그 특정인이 숙청되었다고 추측했을 정도였다. 당시 구 공산권 국가들은 워낙 정보 통제가 심각해서 어쩌다 나오는 뉴스 자료 화면에 줄을 서있는 순서라든지, 누가 먼저 악수를 하는지, 누구 제스처가 더 크다든지 이런 사소한 걸 가지고도 권력 관계를 추측했다. 현재의 북한을 보면 된다. 지금도 정부의 정보국이나 민간 언론에서 북한 내부 상황에 대해서 추측하는 것도 이런 방식이다. 대체로 몇 달 동안 최고 지도자의 현지 지도 명단에 빠져있으면 사망 혹은 숙청으로 추정한다. [31] 마오 시절에는 대외적으로 중국이 발전했다고 홍보하기 위해 구 동구권 국가들에게 다량의 식량과 자원 원조를 하기도 했다. 문제는 바로 그 때 중국에서는 저렇게 죽어나가고 있었던 것을 중국 밖에서는 몰랐다. [32] 자국 우선주의적 성향이 강한 대한민국과 일본의 정치현실주의자들도 마오의 실정인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이 대한민국과 일본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는 식의 호평을 내리는 것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관점에서 좋은 평가를 내리는 것은 아니다. [33] "할 수 있다/없다"의 통계적, 현실적 데이터보다 "해야 한다/아니다"의 이념적 당위론을 강조하는 사상. 스탈린주의를 비롯한 구미권 공산주의는 유물론에 의거하여 인간을 통계의 부품처럼 대하는 면이 컸다면, 반대로 마오주의를 비롯한 아시아권 공산주의는 정신을 강조하여 합리적인 결론조차 무시해버리는 문제가 있었다. 같은 전체주의 추축국 국가임에도 극도의 기계적 효율을 중시한 나치 독일과, 인간의 의지나 희생정신을 강조한 일본 제국의 차이와도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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