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22:53:52

문화대혁명/악영향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문화대혁명
{{{#!wiki style="margin: -10px" <tablebordercolor=#ee1c25> 파일:마오쩌둥 투명.svg 마오쩌둥
관련 문서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생애 · 평가 · 창작물 · 마오주의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ee1c25> 주최 운동 삼반오반운동 · 반우파 투쟁 · 대약진 운동 ( 제사해 운동 · 토법고로 · 인민공사 · 치수사업) · 양탄일성 · 문화대혁명 ( 악영향)
사건 대장정 · 국공합작 · 중일전쟁 · 국공내전 · 6.25 전쟁 · 암살 음모 사건 · 베트남 전쟁 · 중소 국경 분쟁 · 9.13 사건 · 데탕트
마오쩌둥 가문 증조부 모조인 · 조부 모은보 · 아버지 마오이창 · 어머니 원쑤친 · 남동생 마오쩌민 · 남동생 마오쩌탄 · 이처 양카이후이 · 삼처 허쯔전 · 사처 장칭 · 아들 마오안잉 · 아들 마오안칭 · 손자 마오신위
선전물 선전물 틀 참조
관련 문서 관련 도서 · 마오쩌둥 어록 · 모주석기념당
관련 틀 마오주의 틀 · 공산주의 틀
파일:낫과 망치.svg 공산주의 · 파일:마오주의 깃발.svg 틀:마오주의 }}}}}}}}}
파일:문화대혁명 당시 베이징 천주당의 모습.png
파일:문화대혁명 당시 파괴된 동티베트 사원의 모습.jpg
환호하는 홍위병들과 불타 파괴되는 천주당 남당 소장도서들[1] 홍위병들에 의해 파괴된 동티베트 파서사(巴西寺)와 망연자실한 승려
파일:문화대혁명 당시 파괴되는 칭화대학 정문의 모습.jpg 파일:문화대혁명 당시 파괴된 티베트 불상의 모습.jpg
홍위병에 의해 붕괴되는 칭화대학 이교문의 모습 홍위병에 의해 분쇄된 티베트 불상
파일:문화대혁명 당시 청화대학의 모습.jpg
파일:/image/028/2007/01/30/117003423221_20070130.jpg
홍위병들에 의해 파괴되는 칭화학당[2] 공림과 사당에 있었던 1,300년된 대성문의 명필 현판을 떼내어 부수는 홍위병들

1. 개요2. 상세
2.1. 전통의 피해2.2. 종교 및 문화 박해2.3. 무술2.4. 스포츠2.5. 식문화2.6. 미술2.7. 애니메이션2.8. 연극2.9. 음악2.10. 영화2.11. 인문학, 시민의식2.12. 집회·결사의 자유 말살2.13. 경제2.14. 군사
3. 유명인 피해자
3.1. 당3.2. 군3.3. 교육/문화/예술
4. 결론

[clearfix]

1. 개요

"불파불립(不破不立), 선파후립(先破后立)"
"부수지 않으면 세울 수 없다. 먼저 부수고 다음에 세운다."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주석 마오쩌둥
을 보고 싶다면 대만으로[3]
을 느끼고 싶다면 한국으로[4]
이 궁금하다면 몽골[5]
이 그립다면 베트남으로[6]
을 알고 싶다면 일본으로[7]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문화대혁명을 표현한 글[8]. 항상 그렇듯 시작은 모른다.

중국이 문화대혁명으로 입은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한족뿐만 아니라 소수민족 고구려, 발해 등의 유적들이 대규모로 약탈되거나 파괴되었다. 또한 중국 역사상 그 어떤 침략이나 전란도 문화대혁명만큼 중국의 문화를 파괴하지 못했다는 평이 있을 정도로 거대한 파장을 몰고 왔다. 이와 같은 내용들은 문화대혁명이 중국 문화와 전통에 끼친 영향의 심각성을 짐작케 한다. 중국이 지금도 장제스가 대만으로 가져갔던 문화재를 내놓으라고 하지 않는 것이 문화대혁명으로 일어난 문화 파괴 때문에 제 발을 저려서 그런 거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을 정도다.

그 반달리즘의 규모와 철저함은 전 세계 역사를 둘러 봐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수준으로, 중국 문화 전반이 파괴되어 분야에 따라 수백~수천 년 전 수준으로 돌아갔다.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홍위병들이 저지른 폭력은 단순히 사람에게만 가해진 것이 아니라, 기존의 중국 문화 전체에 심대한 악영향을 끼쳤다. 중국의 수많은 문화 유산과 서적 등이 이때 홍위병들에 의해 파괴되고 소실되었다. 음악, 미술, 영화, 체육, 소설, 만화, 심지어 애니메이션까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어이없는 정책과 숙청이 벌어졌고, 중국 문화계도 당연히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굳이 중국인이 아니더라도 문화예술 분야에 조금이라도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서술된 홍위병들의 수많은 반달리즘 행위에 대해서 기분이 나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며, 특히 해당 분야에서 종사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화가 치밀어오를 수도 있을 정도의 만행이었다.

문화대혁명의 악영향은 오늘날 중국이 하드 파워는 충분하지만 소프트 파워 미국과 비교하기도 민망할 수준의 넘사벽으로 밀리는 이유 중 하나가 되고 있다.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끝난 지도 수십 년이 지났지만, 중국 대륙의 문화계는 주변 국가인 대한민국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대만이나 홍콩에 비해 매우 심각한 수준으로 열세인 것이 현실이다.

단순히 근현대 문화를 미국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서양 문화가 주도하고 있어서라고만 보기는 어려운 것이, 한때 중국의 경제중심도시 상하이는 20세기 초까지 아시아에서는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 도쿄보다도 재즈, 소울 등의 음악과 영화 등 각종 문화가 번성하고 앞서가는 도시로 주목받고 있었다. 단순히 세계 열강의 조차지라서가 아니라, 당시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중국 배우나 뮤지션들은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그나마 10년 간의 광풍에서 살아남은 전통 문화유산도 적지 않았고(이 마저도 당시 총리였던 저우언라이의 적극적인 보호가 없었다면 전부 잿더미가 되어 사라질 위기였다) 개혁개방 이후로는 전통 문화 복원 및 보전에 노력을 하고 있는 덕분에 현재 중국 소프트 파워에서 문화 분야는 세계 30개국 중 8위로 나름 높은 편이다(한국은 12위). 그러나 정치와 디지털 분야의 점수가 워낙 낮은 탓에(이 두 분야는 30개국 중 꼴찌다) 현재 중국의 소프트 파워 순위는 세계 30개국 중 27위에 그치고 있다. 하드 파워로 분류되는 국력이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인 것을 감안하면 소프트 파워는 아직도 한참 뒤떨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중국은 이를 만회하려고 한국의 문화를 강탈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오늘날 중화권의 문화 컨텐츠 중에 세계적으로 꽤 수준을 인정받은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면 대만이나 홍콩/ 마카오에서 제작된 것들이 대부분임을 알 수 있는데, 그만큼 중국 본토에서 만들어지는 문화 컨텐츠들이 변변치 않다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대중음악 분야에서 확연한데, 인구가 13억 명이 넘는 중국 본토에서 다 합쳐야 3천만 명 가량의 대만, 홍콩, 마카오와 경쟁이 될 만한 음원을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중국 본토의 경제 규모는 익히 알려진 대로 무시받을 정도의 수준을 아득히 넘어선 지 오래이며, 이는 곧 중국 본토의 하드 파워가 뒤쳐진다는 것이 절대 아니다. 소프트 파워의 무서움을 단적으로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예를 들어 한국의 경우 6.25 전쟁 이후 본격적인 경제 성장으로 먹고살 만해진 1980년대부터 문화를 키우는 데도 힘을 쏟았다. 물론 독재 시절의 문화 육성은 3S 정책 같이 정치적 목적이 다분하긴 했지만, 한류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다만 한국도 1980년대까지는 독재 정권들이 집권했기에 소설가들이 경찰에 잡혀가 고문을 받거나 대중가요들이 금지곡으로 지정되는 등 대중 문화에 대한 검열과 탄압이 매우 심했다. 한국의 대중문화가 정부의 검열과 탄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성장 가도를 달렸던 시점은 1993년에 개봉된 헐리우드 영화 쥬라기 공원이 전 세계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어서 벌어들인 수익이 한국이 1년 동안 자동차들을 해외에 판매한 수익과 맞먹는다는 이른바 ' 쥬라기 공원 쇼크'로 인해서 한국도 그런 식으로 문화 상품들을 해외에 팔아서 수익을 벌어들임과 동시에 국가 이미지의 개선이라는 두 가지 효과를 노리기 위해서 영화나 드라마 및 가요 같은 대중문화는 검열과 탄압을 엄격히 하지 않는다는 일종의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 1990년대 초반부터였다. 다만, 그 배경은 말할 것도 없이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 세력이 독재 정권을 타도한 것이었고 문화대혁명과는 정반대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참고로 중국 문화대혁명으로 입은 경제적인 피해는 대략 5천억 위안으로 추산하고 있다. 2019년 기준으로 볼 때 한화로 82조 600억 원 가량에 해당되는 금액으로 중국으로써는 감당이 불가능한 피해액이 아니라지만 이건 중국의 경제가 발전해서 그런 것이고, 1970년대 중국의 경제규모와 위안화의 가치를 생각해보면 엄청나게 큰 피해액으로 1980년 당시 중국의 총 GDP가 4588억 위안으로 추산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금액임을 알 수 있다.[9] 게다가 이 피해가 단발성이 아니라 중국의 소프트 파워에 영구적으로 치명적인 손상을 남겨 차후에 얻을 수 있는 경제, 사회적 부가가치까지 없애버렸다고 생각하면 피해 규모는 더욱 커진다. 막말로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지 않고 4천년 넘는 중국의 역사와 문화가 오늘날까지 그대로 보존되었다면 중국이 일찌감치 미국을 추월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미국이 세계 최강대국인 이유는 세계 1위 전력의 미군 달러를 앞세운 하드 파워 덕분인 것도 있지만 청바지, 할리우드, 코카콜라, 팝송으로 대변되는 강력한 소프트 파워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요소임을 감안하면, 중국이 4천년 간 쌓아온 문화도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다.

대약진 운동의 피해 규모와 합치면 대략 6천 2백억 위안에 달하는데, 이는 중국 정부가 건국 이후 30년 동안 기반시설에 투자한 총액보다 큰 금액이다. 거기에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후발 국가들에게 하나하나 경제적으로 따라잡혔고, 또한 문화대혁명의 후유증이 장기간 이어지며 1990년대에는 도시 국가 규모인 홍콩의 경제력이 중국 전체 경제력의 최대 1/4까지 도달했으며[10], 이제야 인구 2천만을 넘기기 시작한 대만에게 경제력의 45%를 따라잡혔고[11], 심지어 1991년부터 1994년까지 4년간은 인구가 12억 가까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구가 4,400만 명 남짓이던 대한민국에게 GDP의 무려 80% 이상[12] 따라잡혔다는 점까지 생각하면[13] 문화대혁명은 중국 내 모든 자산을 소모하고, 적지 않은 인민들에게 정신적인 후유증을 남긴 것은 물론이요 경제 및 문화 위상까지 크게 추락시킨 세계 역사상 최악의 반달리즘이었음을 입증하는 사건이다.

물론 문화대혁명이 없었다면, 악·폐습이 남아 중국 문화와 사회 발전에 상당히 저해되는 요소가 되었을지도 몰랐다는 시각도 있지만[14] 이미 힘을 잃고, 유산으로만 남아 있던 애꿏은 문화재까지 때려부순 것은 도가 지나쳐도 한참 지나쳤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게다가 축첩, 남아선호사상, 차부두어, 고질적인 인권문제 등 정말로 사라져야 할 악습들은 오히려 사라지지 않고 더욱 악화되었다.

2. 상세

2.1. 전통의 피해

문화대혁명으로 가장 피해를 본 분야는 사실상 전통과 문화에 대한 부분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중국 내에서의 문화유산 소실과 훼손, 전통문화 단절이 10년 동안 매일같이 이어졌다. 아래 항목은 문화대혁명 당시에 파괴된 유적들과 역사적 인물들의 무덤이 파묘된 현황을 대략적으로 보여준다. 참고로 묘는 무덤(墓, 陵)과 사당(廟, 祠)으로 구분한다.
  • 염제릉(炎帝陵)의 주전(主殿)은 불에 탔다. 염제릉은 파묘되었고 신농의 유골은 불태워져서 뿌려졌다.
  • 창힐의 능원(무덤)은 훼손되었고, "열사능원"으로 개조되었다.
  • 산서성 순제릉(舜帝陵)은 훼손되었고, 무덤 위에 큰 나팔이 박혔다.
  • 저장성 사오싱시 회계산에 있는 대우릉(大禹陵)과 대우묘(大禹廟)는 훼손되었고, 우임금의 조각상은 머리와 목이 잘렸다.
  • 1966년 11월 29일에는 무려 공자의 무덤(孔墓)이 파묘되어 평평해졌다.[15] '대성지성선사문선왕(大成至聖先師文宣王)'이라는 비석과 묘비가 파괴되어 돌가루가 되었다. 공묘(孔廟)의 이태소상(泥胎塑像)도 훼손되었다. # 또한 공자의 76대손 연성공 쿵링이의 무덤이 파묘되었다. 당시 기록과 증언에 따르면, 홍위병들이 공자 후손들의 묘들을 파묘해서 아직 죽은 지 오래되지 않아 형체가 있는 멀쩡한 시신들은 나무에 매달았다고 한다.
  • 화현(和縣) 오강(烏江)변의 항우의 패왕묘(霸王廟), 우희묘(虞姬廟)가 파괴되었다. 우희의 무덤은 파묘되었고, 이후 패왕묘에 남은 것은 반쯤 땅에 묻힌 석사자(石師子)밖에 없었다고 한다.
  • 곽거병의 무덤(霍去病墓, 霍陵이라고도 불린다.)은 파괴되었고 향촉(香燭)과 첨통(簽筒)이 부서진 것 외에 곽거병의 소상(塑像)도 하루아침에 훼손되었다.
  • 이화원의 불향각(佛香閣)이 부서지고, 대불(大佛)이 훼손되었다.
  • 고성태원(古城太原)의 신임 시위원회는 첫째 묘우(廟宇)를 파괴하고 전시의 190여 곳의 묘우 고적(古蹟)은 10여 곳을 제외하고 모두 훼손되었다. 그나마 산서성 박물관 관장이 급히 방림사(芳林寺)로 가서 겨우 이소인두(泥塑人頭, 흙으로 빚어 구운 사람의 머리 형상이다.) 한 무더기를 구했다.
  • 후한 말 한의사인 장중경의 소상이 훼손되었다. 묘정(墓亭), 석비(石碑)도 파괴되었다. 장중경기념관의 전람품은 하나도 남지 않았고, 의성사(醫聖祠)는 사라졌다.
  • 하남성 뤄양시 제갈량의 제갈초려(諸葛草廬)(혹은 무후사(武侯祠)라고 불린다.)의 천고인룡(千古人龍), 한소열황제삼고처(漢昭烈皇帝三顧處), 문도무략(文韜武略)의 3개의 석방(石坊)과 인물소상, 명나라 성화연간(成化年間)에 만든 18개의 유리나한(琉璃羅漢)이 모두 훼손되었다. 전각의 장식물도 모두 파괴되었다. 청나라 강희(康熙)가 지은 《용강지(龍崗志)》, 《충무지(忠武志)》등의 목각본도 불에 타버렸다.[16]
  • 한중 면현(勉縣)의 고정군산(古定軍山) 석비는 제갈량이 지주(地主)분자라는 이유로 훼손되었다.
  • 산시성 운성박물관은 원래 관우의 사당이었다는 이유로 파괴되었다.
  • 왕희지의 무덤과 20무(畝)[17]에 달하는 금정관(金庭觀)이 평평해졌다. 현재는 우군사(右軍祠) 앞의 오래된 몇 그루의 측백나무만 남아있다.
  • 중국 최초의 불교사원 백마사가 있었는데 천여년 전에 요나라 때에도 있었던 18나한상과 2천여년 전 인도 고승이 갖고 온 패엽경과 옥마를 네 가지 구습으로 몰아서 파괴하고 불태웠다.
  • 당나라의 고승(高僧) 포선(褒禪)이 말년에 머물고 왕안석이 유람하고 《유포선산기(游褒禪山記)》를 짓고 유명해진 포선산에 있던 대소(大小) 2개의 탑이 모두 훼손되었다.
  • 북송의 시인인 임화정(임포)(林和靖, 967~1028)의 무덤이 파묘되었다. 하지만 《서호몽심(西湖夢尋)》에 따르면, 아주 오래 전에 남송이 멸망했을 당시 도적떼가 임화정의 무덤을 파묘했었을 때 시체는 없었다고 한다.
  • 북송 대문호(大文豪) 구양수(歐陽修)의 《취옹정기(醉翁亭記)》는 소동파(蘇東坡)가 글을 비석에 새겨져 안후이성 제현에 있었는데, 홍위병들은 천 년을 이어온 이 석비(石碑)를 넘어뜨리고 소동파의 글을 파내고 훼손했으며, 취옹정(醉翁亭) 안에 보관되어 있던 역대 명가(名家)들의 서책과 그림들을 모조리 훼손했다. 지금까지도 뭐가 훼손되었는지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
  • 합비에서 대대로 보호하고 매년 제사를 지내오던 포청천의 무덤이 파묘되었다.
  • 허난성 탕음현 중학생이 악비 등의 소상, 동상, 진회 등 오간당(五奸黨)의 철궤상(鐵跪像)을 포함해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비각(碑刻)까지 모두 파괴해서 없애버렸다. 또한 항저우 혁명청년이 악묘(岳廟)를 파괴했다. 악비의 무덤은 파묘되었고, 악비의 유골은 불태워져서 뿌려졌다.
  • 주원장의 거대한 황릉석비(皇陵石碑)가 쓰러졌다. 황릉에 있던 석인(石人), 석마(石馬)가 폭약으로 파괴되었고 명나라 황성(皇城)도 깨끗하게 철거되었다.
  • 영락제의 무덤 장릉(長陵) 능은전에 있던 영락제의 석상도 파괴되었다.[18]
  • 왕양명의 문묘(文廟)와 왕문성공사(王文成公祠)의 2개의 건축과 왕양명의 소상(塑像)이 전부 훼손되었다.
  • 1966년 8월 24일에는 만력제의 묘인 정릉을 점령하고 부장품을 닥치는 대로 파괴한 후 만력제와 황후들의 시신을 끌어내어 "봉건지주계급의 우두머리를 심판한다"는 구실로 인민재판에 회부해 투석형에 처해 가루로 만들었고, 남은 잔해는 모조리 불태워서 빗물에 흘려보냈다. 만력제의 시신은 현재 머리카락 일부와 사진 자료만 남아있다. 민간에서는 만력제의 악명 때문에 사라진 것에 대해 별로 아쉬워하지 않는 분위기이나, 학술적으로는 큰 손실이다.
  • 베이징 내의 원숭환의 무덤이 파묘되어 평지가 되었다. 또한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목을 맨 회나무가 베어졌다.
  • 여평고리(黎平故里)에 안장되었던 명나라 말의 명신 하등교(何騰蛟)의 사당에 있는 불상이 파괴되었고 무덤이 파묘되었다.
  • 서유기》의 작가 오승은의 옛집은 장쑤성 회안현 하하진 타동항에 있었는데, 폐허가 되었다. 이 집은 3개의 담으로 구분되어, 남쪽은 객청(客廳), 가운데는 서재(書齋), 북쪽은 침실(卧室)로 구성된 단출한 집이었고, 수백 년간 "회안현에는 많은 절경이 있으나, 사람들이 가서 문안하는 곳은 이 오래된 집과 그의 묘밖에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또한 오승은의 무덤이 파묘되었다.
  • 요재지이(聊齋志异)》 작가인 포송령(蒲松齡)의 묘가 파묘되었다. 파묘해보니 담뱃대와 머리맡의 책 1권만 있었는데 책에는 4개 구절의 문장이 쓰여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홍위병들은 이것이 포송령의 글인지 알아보거나 하지도 않고 찢어서 들판에 마구 흩어버린 후, 포송령의 유골을 불태웠다.
  • 1959년에 세워진 청나라의 문인 오경재(吳敬梓) 기념관이 파괴되었다.
  • 청나라의 무신 천고의개(千古義丐) 무훈(武訓)(1838~1896)의 무덤이 산둥성 관현중학 홍위병들과 교사의 선동에 의해 파묘되었고 무훈의 유골이 불태워져서 뿌려졌다.
  • 청나라 말기의 개혁가인 장지동(張之洞)의 무덤이 파묘되었다. 장지동이 청백리여서 보물이 없자, 홍위병의 지역 수장인 장 씨 부부는 장지동의 시체를 나무에 매달고 수 개월간 방치하여, 개가 장지동의 시체를 뜯어먹었다.
  • 청나라 말기의 장태염(章太炎), 서석린(徐錫麟), 추근(秋瑾) 및 양내무(楊乃武)와 소백채(小白菜)의 사건에 관련된 양내무(楊乃武)의 무덤이 파묘되었다. 홍위병들은 "소의 귀신과 뱀의 요괴(우귀사신)를 모조리 없애버린다"는 구호를 외쳤다고 한다.
  • 베이징 교외의 은제장(恩濟庄)에 묻힌 동치제, 광서제의 궁정대총관(宮廷大總管) 이연영의 무덤이 파묘되었고 비문이 파괴되었다.
  • 저장성 봉화현 계구진의 장제스의 옛집은 파괴되었다. 또한 장제스의 생모 왕차이위의 무덤이 파묘되어 왕차이위의 유골은 불태워졌다.
  • 남장현의 항일명장 장자충(張自忠)이 건축한 장공사(張公祠), 장씨의관총(張氏衣冠冢)과 3개의 기념정(紀念亭)이 파괴되었다.
  • 쑹자수의 무덤이 장칭의 명령에 의해 파묘되었다. 참고로 이때는 쑹자수의 딸인 쑹칭링이 살아있었다.
  • 중화민국 주석을 지낸 린썬[20]의 무덤이 폭파되고 린썬의 유골은 불태워져서 뿌려졌다.
  • 양후청이 국민당반동파로 몰려서 파묘되었고 묘비가 훼손되었다.
  • 전국최대의 도교성지인 노자강경대(老子講經台)와 주위 근 100여 개의 도관(道館)이 훼손되었다.
  • 자금성의 황성과 내성, 그리고 외성을 5년 만에 전부 헐어버렸다. 현재 2환로가 내성과 외성 자리에 있고[22], 내성이 있던 자리에는 베이징 지하철 2호선이 정확히 똑같은 선형으로 지어졌다.
  • 그 외에도 이 글의 내용처럼 수많은 명사들이 남긴 위대한 유산들이 엄청나게 유실되었다. 심지어 더욱 놀라운 것은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피눈물을 쏟아낼 이 참혹하기 그지없는 내용들은 문화대혁명 당시 문화재 파괴 목록 중 극히 일부라는 것이다.

참고자료 1 참고자료 2(중국어 위키백과)

위에 열거된 것만 해도,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이 피눈물을 줄줄 쏟을 만큼 귀중한 문화재들이지만 이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실제로 1966년 8월부터 9월까지 단 1개월 동안 베이징시에서만 1958년에 시립 보호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80곳 중 30곳이 소실되었으며, 같은 해에 베이징 정부의 결정으로 보호 중이었던 유적지 6,843곳 중 4,922곳이 훼손되거나 파괴되었다.[24] 수도 한 곳에서만, 그것도 수도 당국이 손수 보호했던 문화재들만 해도 이렇게나 소실되었으니 수도가 아닌 곳에 있었거나 당국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민간에 전해져온 문화재들이 얼마나 많이 소실되었는지는 가늠하기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문화대혁명 시기에 중국 전역에서 방화와 약탈, 테러, 철거, 도굴 등으로 사라진 문화재만 추산하면 최소 10만여 점 이상으로 추정된다.

심지어 이 추정치에서 빠진 무형문화유산과 지방 유림, 도교, 불교, 소수민족 등의 문화까지 추산하면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각하다. 실제로 홍위병들은 베이징에서만 11.4만 가구를 수색했고, 상하이에서는 ( 저우언라이의 말에 의하면) 자본가 10만 가구가 몰수당했으며, 전국적으로는 1천만 가구를 수색했다고 하고, 랴오닝, 지린, 허난, 장시, 구이저우 이렇게 단 5개의 성에서만 무려 700만 권의 서적이 망실되었다. 이것으로 미루어보면, 소실된 문화재들의 수는 최대치로 치면 천만 단위일 가능성도 있다.

파괴된 문화재와 유적의 상당수는 덩샤오핑이 집권한 이후로 중국 전통문화에 대한 재평가 기조가 이어지고 있고 또한 중국 내 관광 및 레저산업이 1990년대 주5일제 시행과 소득수준의 상승으로 발달되기 시작하면서 관광산업에 대한 중요성이 인식되어 가며 복원되거나 복원작업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원 모습을 알 수 없어 영영 복원하지 못하거나 엉터리 고증으로 원 모습과 영 딴판으로 복원된 여러 문화재와 유적들을 생각하면 그저 눈물이 날 뿐이다.

다만 저렇게나 많이 파괴했음에도 2023년 기준으로 중국 이탈리아 다음가는 세계 최대의 세계유산 보유국이다. 문화대혁명으로 죄다 싹쓸이된 마당에도 중국의 세계유산 등록 건수는 무려 56건으로, 58건이 등재된 이탈리아 다음으로 현재 세계에서 2번째로 많다. 다만 이들 세계유산 중 일부는 문화대혁명 때 파괴되었다가 나중에 복원이 된 것도 있다. 즉, 현재 중국에 남아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과 각종 박물관에 있는 수많은 문화재는 문화대혁명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문화재이거나, 문화대혁명 이후에 발견된 문화재들, 혹은 문화대혁명 이후로 복원 작업을 거친 문화재들이다.

항저우의 유명한 사찰 영은사(靈隱寺)도 홍위병들에게 습격당해서 파괴당할 뻔했다. 하지만 온건파였던 저우언라이 총리가 '절 입구와 대웅전 앞에 마오쩌둥 사진을 붙여놓으라'고 지시해서, 사진을 본 홍위병들이 절을 부수는 걸 주저하다가 그냥 돌아갔다는 일화도 있다. 심지어 저우언라이가 배치한 경비병이 아니었다면 자금성조차 무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하는데, 저우언라이는 문화대혁명의 광기를 막기 위해 자신의 위치에서 은밀한 활약을 펼쳤다. 일례로 문화대혁명 시절, 과학자들에게 경호병력을 붙여 보호했다. 포탈라궁이나 막고굴에도 역시 위기가 찾아왔지만, 문화재 보호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던 저우언라이의 은밀한 보호 지시 덕분에 추가로 파괴되는 봉변은 피하게 되었다.

특히 중세 봉건주의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자금성은 문화대혁명 때 파괴당할 뻔했으나 위기를 넘겼다. 1957년 반우파 투쟁에서 '우파 우두머리'로 비난을 받았던 전 중국민주동맹 간부인 장보쥔의 딸 장이허가 마오쩌둥의 전 비서 리예에게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마오쩌둥은 자금성을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자신의 집무실을 설치하려 했다고 한다. 1963년에 만들어진 베이징시 도시계획도에 의하면 마오쩌둥이 자금성의 천안문, 오문,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 등을 모두 해체하고 공산당 중앙당사를 그 자리에 지으려 했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장이허는 문화대혁명 시기에 자금성의 모든 건물들에다가 붉은색 천을 줄줄이 걸어놓거나 노동자의 동상을 거대하게 세워놓겠다는 흉측한 발상들도 연이어 나왔으나, 문화재 보호주의자였던 저우언라이의 절박한 반대로 인해 실현되지는 않았다고 폭로했다. # 저우언라이가 보호를 위해 애썼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 때 자금성이 밀려나가고 공산당 당사가 들어섰다면 중국은 문화적으로도, 관광산업적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명나라 황릉도 피해를 당해 만력제와 황후 효정현황후 왕씨, 후비들(공각황귀비 정씨, 공순황귀비 이씨)의 유골이 가루가 되어 유실되고 부장품 일부가 파괴되어서 결국 만력제의 더 자세한 행적과 건강상의 특징 등은 영원히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만력제의 황릉인 정릉(定陵)은 1956년에 발굴을 시행했는데, 한창 연구를 진행하던 와중에 홍위병들의 공격을 받은 것이다. 발굴 및 연구에 참여한 연구원들도 상당수가 살해, 감금 등의 학대를 당해서 추가적인 연구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발굴의 총책임자는 베이징 부시장이었던 우한(吳晗, 1909~1969)이었는데, 문화대혁명의 시발점이 된 ' 해서파관'을 제작한 그 사람이다.

중국에서 국부로 추앙받는 쑨원과 관련된 유적들도 이 당시에 파괴될 뻔했다. 한 번은 쑨원이 광둥 정부 시절에 머물렀던 사저를 파괴하려고 홍위병들이 몰려오자, 관리인이 기지를 발휘해서 마오쩌둥이 쓴 쑨원을 찬양하는 글을 들고 나와 홍위병들에게 "자, 이래도 여길 부술 테냐!"고 소리치자 홍위병들이 그냥 물러가 버렸다고 한다. 반면 저장성에 있던 장제스 생가는 홍위병들에게 파괴되었고 장제스의 생모인 왕차이위의 무덤이 파묘되어 그녀의 유골이 불태워져서 가루가 되었다. 당연히 현재의 생가는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사라지고 장제스도 어느 정도 재평가된 이후로 복원된 것이다. 그리고 충칭시에 있던 국민정부 주석 린썬의 묘소도 가차없이 폭파되었고 린썬의 유골도 불태워져서 가루가 되었다. 또한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안창남의 무덤도 문화대혁명 중에 파묘되었으며, 이덕삼 지사 등이 묻힌 상하이 외국인 묘역 '만국공묘'와 베이징 외국인 묘역 2만 5천여 기도 홍위병들에 의해 파묘되었다.[25] #

아이러니하게도, 공산화 이전부터 매국노 수준으로 평판이 나빴던 위안스카이의 무덤은 홍위병들의 무덤 뽀개기 광풍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보전되었다. 마오쩌둥이 '이런 자도 역사에 있었다는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라며 묘지를 보전할 것을 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은 홍위병들이 위안스카이의 무덤도 파묘하려고 했으나, 콘크리트로 만들어서 그런지 너무 단단하여 가장자리만 조금 깨졌다.

유교 사상의 대부로 여겨지는 공자 역시 봉건적인 사상가로 취급당해 분서갱유아주 가볍게 능가하는 극단적인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1966년 11월 9일에는 여교사 출신이었던 탄후란(譚厚蘭, 1940~1982)[26]이 이끄는 베이징사범대학의 학생 200명이 기차를 타고 공자의 고향인 산둥성 취푸시(曲阜市)로 가 대성전에 모셔져 있던 공자상이 도끼로 박살났고, 공자묘도 상당 부분이 훼손되었다. 1966년 11월 9일부터 12월 7일까지 이 한 곳에서 파괴된 유물들은 정확히 6,618개[27]에 달했으며 2000개의 무덤들이 파헤쳐졌다. 진시황이 벌벌 떨겠다. 문화대혁명 당시 공자의 고향에서 일어난 일들을 정리한 문서이다.

그외에도 고화들은 찢겨나갔고, 벽화들은 얼굴 부분이 의도적으로 훼손되었으며, 도자기 화병들은 바닥에 던져졌고, 두루마리들은 정치적 슬로건으로 낙서를 당한 데다가, 고서들과 족보들은 공개적으로 불태워졌다. 그외에도 베이징의 골동품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던, 돌과 나무로 역사적 사건과 일화들을 묘사한 작품들은 인물 조각에서 머리가 잘려나가거나 아예 인물 전체가 잘려나가 이후 골동품 조각품들은 대부분 얼굴과 인물 조각을 복원할 수밖에 없었다. #

또한 무형문화재도 상당수 실전되었다. 대표적으로 문묘에 제사를 올리는 것이 있는데 제향(祭享)하는 법이기도 한 《제공대전(祭孔大典)》도 실전(失傳)되어, 한중수교 이후 대한민국 석전대제를 참고해서 재현해야 했다. 그리고 석전대제(문묘제례)를 참고했기 때문에 석전대제와 같은 고증오류를 제공대전에서도 볼 수 있다. 문묘제례악(文廟祭禮樂)을 연주하는 악사나 팔일무(八佾舞)를 추는 일무원(佾舞員)은 악공이 맡았으며 모두 남성이었다. 입고 있는 복식 자체가 모두 남성 관복인데 남장 여자 문서에서 보듯이 국악, 전통무용 전공자 등의 제례를 수행 가능한 인원 중에서 남성만으로는 숫자가 부족하여 여성이 남자 악인복을 입고 악사와 일무원을 맡고 있다. 현실적인 문제로 발생한 고증오류인데 중국의 제공대전에서도 남성 관복을 입은 여성들이 제관이나 일무원을 맡은 모습이 보인다. # 다만 이러한 고증오류는 구성원의 성별보다는 형식을 얼마나 잘 재현했느냐가 중요한 것이고, 어차피 복장을 보면 실제로는 다 남자가 하던 일이었다는 걸 알 수 있으니 이는 역사왜곡이라고 보기에는 애매하다.

게다가 이 제공대전도 어디까지나 후대에 형식만 임시로 부활한 것이지, 실제 제사와 그 제사를 수행하는 직책인 대성지성선사봉사관(大成至聖先師奉祀官)[28] 중국에서는 다시 부활하지 못해서, 대만에 거주하는 공자의 종손인 쿵쑤이창이 대성지성선사봉사관 직책을 수행하고 있다. 쿵쑤이창의 할아버지이자 국부천대 당시 장제스가 대만으로 데려간 봉사관 본인인 쿵더청은 당연히 이 참사에 경악하여서 중화인민공화국에 큰 반감을 가졌다. 국부천대 이후 생전에 한 번도 취푸의 공묘(孔墓)를 찾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죽은 뒤에도 자신의 묘지를 취푸에 두지 말도록 했다. 그래서 쿵더청의 묘지는 취푸가 아닌 대만에 있다. 쿵더청은 중국 본토에 남은 누나 쿵더마오[29]를 만날 때도 곡부가 아니라 해외인 일본에서 만났다. 취푸의 친척들이 대만을 직접 방문했을 때, 공자 가문에서 대대로 제작하는 술로 알려진 공부가주를 소개해서 대접하며 취푸를 방문해달라고 부탁하자 쿵더청은 '우리 가문에는 이런 술이 없다.'라며 내치기도 했다. 쿵더청이 공부가주를 몰라봤을 리는 없으므로 이 술을 인정하지 않을 정도로 반감이 심했다고 보면 된다.

사실 장제스가 봉사관 쿵더청 대만으로 데려간 이유는, 중국을 지배한 역대 왕조들이 전부 연성공을 두어 공자 제사를 지내도록 했기 때문이다. 즉 봉사관을 데려간 것 자체가 '우리가 공자의 제사를 지내는 진정한 중국의 지배자'임을 보여주는 정통성을 확보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자를 통해 소프트파워를 키우려는 중국의 시도가 평가절하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중국은 하드파워는 강하지만, 소프트파워가 취약해 가까운 장래에 미국을 넘어서기 힘들 거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래서 중국은 공자학원 등을 통해 소프트파워를 증진시키려 하나, 위에 열거된 엄청난 피해들 때문에 그 노력이 가까운 미래에 보상받기는 어려워 보인다. 게다가 그러면 그럴수록 대만의 정통성을 더 부각시켜주는 면이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결국 자신이 판 함정에 자신이 빠진 꼴이 된 것이다.[30]

국부천대 이전에도 중국사를 보면, 이렇게 공자의 종손을 보호해서 정통성을 주장한 사례가 많았다. 심지어 송나라 남송으로 쫒겨날 때도 종손들을 데리고 가서 남종 가문을 세우고, 금나라도 이를 따라해서 취푸에 남아있던 다른 종손들을 보호해서 북종 가문을 세워서 공자 가문이 둘로 갈라지는 사례도 있었다. 이후 원나라가 통일한 이후에 남종과 북종이 협의해서, 취푸에 남아서 선영을 지킨 공로가 있는 북종으로 정통성을 정리하는 것으로 해결하였다. 위에 언급한 쿵더청이 바로 이 북종 가문의 종손이다. 남종 가문의 후예들은 아직 중국 대륙에 남아 있다. 남종에서 별도로 세운 공자 사당도 저장성 취저우에 남아 있다.

공자의 예시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곽거병, 제갈량, 악비, 해서, 왕희지중국사에 길이 남을 명사들의 무덤이 파묘되었고 기념물이 대규모로 파괴된 것은 물론이고 중국의 인쇄 및 무수한 기록과 자료가 유실되었다.

그 와중에 자금성 내에서 소장 중이었던 청나라 황실이 수집한 최고급 문화재 중 69만여 점은,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장제스 대만으로 튀면서 가지고 가버렸기에, 운 좋게도 홍위병의 광란 속에서 보존될 수 있었다. 문화재를 심히 아끼던 장제스가 중국의 문화적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먹튀한 것이 살아남았으니, 예상은 못했겠지만 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현재 해당 문화재들은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에 보관, 전시 중에 있다.

중국 내에 있던 고구려 발해의 유적도 문화대혁명의 영향에서 벗어났다. 이 역시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가 고구려와 발해는 중국의 역사가 아닌 한민족의 역사라고 했기에 무사했던 것이다. 하지만 무식한 홍위병들이 유적을 중국 유적, 한민족 유적을 따져가며 신중히 파괴했을 리가 없었고 조선족이 문화대혁명 때 피해를 입었던 것을 보면 그냥 있는지도 몰라서 파괴하지 않았다는 해석이 옳을 것이다.[31]

문화대혁명 후에 발견되어 살아남은 문화재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진시황릉이다. 1974년에 발견되었는데, 이때는 문화대혁명 초기에 있었던 광적인 반달리즘이 사그라든 상태였기에 파괴를 면했고, 그 압도적인 크기와 수량의 병마용이 보존되었다. 또한 미국으로 넘어간 일부 유물들도 보존되었다. 그리고 관우 숭배 사상 때문인지 관림 등 관우와 관련된 일부 유물들도 살아남았다. 사실 관우와 같은 경우에는 중국에서는 살아있는 역사인 것이, 6.25 전쟁에도 관우의 후손이 참전한 전적이 있다. 레드팀 참가자라는 사실은 넘어가자.

이런 일을 저지른 홍위병 중국인들에게 얼마나 원수냐면, 명나라 말기의 명장으로 중국의 민족영웅 중 한 명인 원숭환의 무덤은 마오쩌둥이 심혈을 기울여서 보존하라고 지시했음에도 마오쩌둥을 따른다는 자들이 무덤을 파묘한 것이다. 또한 이 자들이 중국인들에게 평생까임권을 받은 계기 중 하나가 바로 중국인들이 존경하는 남송의 명장 악비의 무덤과 상을 건드린 것이다. 악비는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한족의 영웅인데, 한족이라는 작자들이 악비의 무덤을 파묘해서 악비의 유골을 불태워서 가루로 만들었다. 그 때문인지 홍위병 출신들은 자신들이 홍위병 출신인 것을 숨긴다. 들키는 날에는 보복을 당하거나 먹고사는 데 지장이 생기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이순신 장군 묘를 파묘해서 때려부순 셈이다.[32]

반대로 프랑스 대혁명의 경우, 혁명정부가 귀족, 교회의 고문서나 예술작품을 싹 다 긁어모아 창고에 보관했고, 프랑스 혁명전쟁이나 나폴레옹 전쟁 등 이후에 벌어진 난리통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자료, 예술품이 보존될 수 있었다고 한다.

역설적이게도 중국 역사상 유명한 폭군, 간신, 역적, 탐관오리들의 무덤들 상당수는 이러한 파괴의 광풍 와중에도 파헤쳐지지 않고 멀쩡히 살아남았는데(대표적으로 조조 수양제의 무덤), 이는 후세에 무덤을 돌보는 사람이 없어서 오랫동안 방치되는 바람에 잊히거나, 사후에 있을 보복, 부관참시를 방지하고자 미리 가짜 무덤을 여러 개 만들어 진짜 무덤을 감추었기 때문이다.

2.2. 종교 및 문화 박해

문화대혁명으로 괴멸적 타격을 입은 것은 중국 전역의 종교들도 마찬가지였다. 홍위병들 입장에서는 문화재와 함께 모조리 박해하고 때려 부수고 타도해야 할 1순위가 종교였으며, 특히 소수민족들의 종교가 공격 목표였다.

이 시기에는 종교는 착취계급이 이용하는 도구로 반드시 계급투쟁을 중심으로 하여 종교 문제를 처리한다는 종교 말살정책으로 당의 모든 종교 사무 부분을 완전히 폐쇄시켜서 중국 공산당 치하에서 형식적으로나마 존재하던 각 지방 종교단체의 활동이 중단되었다. 천주교의 경우, 각 지역의 홍위병들은 각 성당에 들어가, 건물과 성상을 부수고[33] 성경을 태우는 등 기도와 전례, 성경 읽기 등을 모두 금지시켰다. 또한 교회 재산은 모두 몰수되었고 난징의 금릉협화신학원(金陵協和神学院)을 비롯한 신학교도 폐교되었다. 다른 종교들 역시 비슷한 상황을 맞았으며, 이에 중국에서 공식적인 종교 활동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다.

티베트 자치구에서는 문화대혁명 이전까지 최소 2,176개에 달하던 티베트 불교 사찰 1976년 기준으로 단 10개만 남게 되었으며,[34] 가장 크고 티베트 내에서 3번째로 중요한 사원이었던 간덴 사원은 다이너마이트로 폭파되었고, 사원의 건축 자재들은 인민해방군 군대 막사와 중국 관리들의 주택으로 재활용(?)되었다. 심지어 사원 철거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이들이 강제로 동원되었다. 수많은 승려들이 추방되고 고문을 당하다 학살당했다. 홍위병들은 비참한 모습의 시체들이 완전히 썩을 때까지 대로변에 전시했다고 한다. 나머지 승려들은 강제 환속되었으며 아예 대중들 앞에서 알몸으로 남녀 승려 및 민간인 남녀 간의 성관계를 강제하고 아기의 출산을 확인한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중국사에서 이런 식으로 불교에 대한 박해 즉 폐불(廢佛)은 이른바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이라고 해서 4차례에 걸쳐 벌어졌지만, 그 법난조차 이런 식으로 불교를 가혹하게 박해하지는 않았다.

이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예시 몇 개만 들자면, 5~9대 판첸 라마의 무덤들이 파괴되었고, 철거된 사원의 터에 있던 불상들은 한마디로 말해 점토 불상들은 비에 녹아내렸고, 구리 불상들은 부서져 더미로 쌓였으며, 금불상들은 먼 곳에 있는 제련소에서 녹여졌다.[35] 심지어 수많은 경전 및 관련 문서들은 문자 그대로 화장실 휴지로 사용되었는데, 이 경전들 중에는 무려 8세기경에 인도에서 직접 가져온 산스크리트어 사본들도 있었기 때문에 만약 사본들이 그대로 살아 남았다면 세계 불교사가 다시 쓰였을 것이라고 한다. 간덴 사원에서 가장 신성하게 모셔지던 쫑카빠(1357~1419)의 등신불을 모시고 있던 탑은 "구습과 결별했음을 보이라"며 승려들로 하여금 스스로 탑을 부수고 등신불을 꺼내어 불에 소각하게 하였는데, 홍위병들이 물러나자 불을 놓은 승려가 직접 불 속에 뛰어들어 불에 타다 남은 유골을 구출했다. 후에 유골은 인도에 있는 달라이 라마에게 보내지고 유품과 사리를 수습하여 다시 탑을 세웠다.

포탈라궁도 파괴될 뻔 했으나 역시 문화재를 지키려 했던 저우언라이가 편지를 보내 "이런 건물이 하나쯤은 남아 있어야 후에 봉건계급이 어떻게 농노들을 착취했는지 교육할 수 있다!"라고 회유함으로써 겨우 살아남았다. 그러나 포탈라궁 언저리에 있던 달라이 라마의 직속사원인 남걜 사원과 옛 티베트 의회 건물은 파괴되었다.[36]

무슬림들이 많은 신장 위구르 자치구 지역에서는 홍위병들이 쿠란을 불태우고, 대부분의 모스크를 일부러 돼지[37] 사육시설로 만들고, 무슬림에게 돼지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했으며, 이맘들이 끌려나와 물감을 뒤집어쓰고 조리돌림을 당하고 무슬림과 비무슬림 간의 동화와 혼혈을 강제하는 등[38] 린치의 대상이 되었다. 1975년에는 중국인민해방군 회족 무슬림 1,600명을 학살하는 샤덴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연변 지역의 조선족들도 그들의 출신을 한반도 지역으로 기록한 족보가 훼손되거나 소각되었다. 단순히 족보가 소실되었다는 정도로 끝나지 않고, 그때까지만 해도 "중국에 살고 있지만 내 고향은 한국", " 연변 조선족 자치주는 조선인들이 중국의 항일전쟁에 함께 참가하여 피흘려 싸운 급부"라는 민족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던 연변 지역의 조선인들의 머릿속 조국관, 민족관 자체가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사라졌고 지금과 같은 "우리는 중국내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인 중국조선족", "우리의 조국은 중국"이라는 식으로 사상이 개조되었다. 4인방의 한 명인 장칭의 사주를 받아 연변에 온 마오위안신(毛遠新)[39]과 그 일당은 "조선족은 믿을 수 없다", "조선어의 수명은 기껏해야 10년 내지 15년이다", "연변 문화대혁명이 외국(북한)이 손을 뻗쳤다", "연변에서는 다시 한 번 대동란과 대분화가 일어나야 한다", "조국의 동북변방 연길에 몸서리치는 반혁명 반란사건이 일어났다"며 민족 의식이 뚜렷한 이들을 반혁명분자, 조선(북한) 또는 일본의 특무(간첩), 지식분자로 몰아 집중적으로 박해했는데, 당장 북한의 특무로 몰려 실각한 연변 조선족 자치주 초대 주장 주덕해를 시작으로, 분리주의자로 몰려 조선족자치주의 주장과 서기들은 물론 학교에서 조선의 역사와 말글을 가르치던 교사들이 홍위병들에게 끌려나와 조리돌림을 당하고 자아비판을 강요당하고 구타당해 죽었다. 남한이나 북한에 친척이 있으면 조선특무(간첩), 공산당을 위해 소련에 갔다 온 사람은 소련특무,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일본 공장에서 일했다고 해서 일본특무, 교사들은 노동자와 대립된다고 해서 지식부자라는 누명을 썼고, 자본주의의 길로 나가는 자들이라 하여 일삼은 감금과 폭행을 당했다.

이때 고초를 겪은 이들 가운데는 조선인 출신으로 중국에서 '영화 황제'라 불리던 배우 김염, 조선인 출신의 음악가로 중국인민해방군가의 작곡가로 유명한 정율성, 한인애국단의 일원으로 조선의용대로도 활약했던 여류 독립운동가 이화림도 있었다. 특히 정율성의 경우는 1956년 북한에서 8월 종파사건으로 연안파가 숙청되는 것을 보고 북한을 떠나 중국 국적을 얻어 정착했던 인물이었다. 북한을 피해서 중국으로 왔는데 중국에서조차 소수민족이라는 이유로 박해를 당한 셈이다.

조선인 공동체였던 용정의 명동촌에 위치한 명동학교[40]와 명동교회의 설립자인 독립운동가 김약연의 칭송비도 문화대혁명 때 파괴되고 땅에 파묻혔다가 후에 다시 파내서 세웠다. # 길거리에 '평양냉면', '함흥냉면', '인천백반점' 등 한국 관련 지명이 붙은 음식점 간판까지도 홍위병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집에서 한글로 된 편지 한복을 입은 사진만 발견되어도 홍위병들에게 고초를 겪었기 때문에, 연변 지역 조선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이 과정에서 자신들의 족보는 물론 한글로 쓴 책과 편지, 한복을 입고 찍은 사진 등 '한국적(조선적)' 색채가 짙게 드러난 물건들은 모두 불태워 없앴다.

또한 이때 만주에 있던 항일 독립운동 관련 자료가 상당수 소실되어[41], 독립운동가의 후손임에도 증명할 자료가 없어서 국가유공자 인정을 받지 못하고 전혀 엉뚱한 인물이 국가유공자로 인정받는가 하면, 현재까지도 한국 학계에서 만주 지역의 항일무장투쟁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심각한 자료 부족을 겪고 있다.[42] 또 박해를 피해 수없이 이사를 다녔으며 심지어 성씨까지 한국과 관련이 없는 중국식 성씨로 바꾸기도 했다. 문화대혁명을 피해 북한으로 달아난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오히려 북한 정권으로부터 '중국의 간첩' 내지 '수정주의자'로 몰려 고초를 겪었다. 과장 조금 보태면 중국조선족들이 극성스럽게 그들의 한민족 문화를 중국과 연계시키며 중국의 입장에서 중국의 문화로 소개하려고 드는[43] 편집증적인 태도 역시 문화대혁명을 겪은 PTSD라고 할 수 있다. 그걸로 인해서 한국인들이 중국조선족들에게 곱지 않은 감정을 품게 되었으니, 문화대혁명의 여파는 당대 중국 안에서만 그치지 않고 후대 한중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중국조선족들이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겪었던 고초나 당시의 상황을 사진으로 찍은 사진집이 2010년에 한국에서 출간되었다. 제목은 <연변 문화대혁명 - 10년의 약속>이다. 저자인 한국인 류은규는 중국 조선족 사료를 수집하면서 문화대혁명 때의 공백을 백방으로 찾던 중, 1999년 용정시(룽징시)의 조선족 사진가로 문화대혁명 당시 연길현문화관에서 근무하면서 연변에서 벌어졌던 문화대혁명의 광기를 가까이서 지켜보고 사진으로 찍었던 황영림이라는 인물을 알게 되었다. 류은규는 그를 찾아가 몇 차례나 설득한 끝에 그가 당시 촬영한 사진을 얻어 <잊혀진 흔적-사진으로 보는 조선족 100년사>(2000년)를 엮을 수 있었다. 얼마 뒤 황영림은 "사진을 당신에게 주겠으나, 바로 공개하면 절대로 안 된다. 꼭 내가 사망한 후 공개하라"는 말과 함께 자신이 찍은 사진 6천 장을 모두 류은규한테 넘겼고, 황영림이 2006년에 타계한 뒤에 류은규는 그와의 약속대로 그 사진을 공개했다. 부제 '10년의 약속'이 붙은 연유다.

중국의 기독교 신자들도 배교(背敎)를 강요당했고, 거절하면 당국에 끌려가 구타와 가혹행위 및 고문을 당했다. 개요의 소개영상에서도 나오듯이, 성당들도 홍위병들에게 습격당해, 성모상 등 각종 성상들은 그 자리에서 꺼내져서 파괴되었고, 그 자리엔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걸리는 일도 있었다. 몇 남지 않은 수도원들도 파괴되었으며, 가정 예배 기도도 금지되고, 홍위병들은 기독교 신자들의 집에도 들어가, 성경 찬송가 서적 등을 빼앗아 불태우고 다녔다. 종교인들은 끌려나와 공개적으로 홍위병들 앞에서 갖은 치욕을 겪었다. 쉬자후이 성당의 서광계 유적지도 훼손되었다.

등록되지 않은 종교활동은 물론이고, 중국 정부에 종속되어있는 어용 종교단체의 활동마저 완전히 금지되었다. 중국의 관제 종교단체를 관리하는 국가종교사무국이 이때 모든 활동을 멈추고 사실상 해체 상태에 있었을 정도였다. 등록되지 않은 종교활동을 하는 종교인들은 물론이거니와 어용 종교단체 소속 종교인들도 당국과 홍위병들에 의해 끌려나와 수모를 당했다.

이외에도 나시족의 동파문자 문서들 중 대부분이 파괴되었으며, 카이펑 유대인 커뮤니티가 박해당했다. 여러 소수민족들 중 문헌기록을 가졌던 이들은 이때 자신들의 전통을 대부분 잃어버렸다. 이 때문에 상당수의 중국 소수민족들은 한족에 많이 동화되었다.

2.3. 무술

사제관계가 봉건주의적이라고 중국 무술도 박살 났다. 이는 유명한 소림사도 예외는 아니어서 무승이 소림사에서 무술을 전하고 익히는 전통이 끊어졌고 실전(失傳)된 무술도 많다고는 하는데, 사실 소림사는 이미 민국 시대부터 중국의 정치적 혼란상으로 인해 쇠퇴중인 상태였다. 그나마 민간으로 퍼진 소림 무술은 실전되지 않았고 억지로 현대에 소림사를 복원했지만, 과연 제대로 복원된 것이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본래의 진면목과 각 문파나 고명한 무술가들 고유의 기술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기초 수련법조차 알 수 없게 된 경우가 하나둘이 아니다. 실질적으로 당시 유명하거나 수련 인구가 거의 없던 마이너한 무술들은 전부 무술인들이 살해를 당하면서 없어진 무술이 한 둘이 아니다. 그나마 홍콩으로 도망을 간 무술가들이 문화대혁명을 피해 그나마 유지될 수 있었고 남은 것, 복원된 것이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중국권법들이다.

그나마 문화대혁명의 광기로부터 안전했던 홍콩, 마카오, 대만 등의 타 중화권 말레이시아 태국, 싱가포르, 오스트레일리아, 페루, 브라질, 아르헨티나, 멕시코, 캐나다 등의 화교 거주지에서 보급된 것들로 인해 무술의 맥이 겨우 유지된 상황이다.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광둥성 계열의 무술이고 다른 지역의 무술은 거의 실전되었다. 그래서 무협영화들의 무술도 사실 그 시대에 존재했을 지 의문인 광둥성 무술이 주종이다.

우리나라의 서당 훈장처럼, 문화대혁명 이전까지 중국에서 무도가들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었고, 노쇠해서 은퇴한 후에는 제자들의 봉양을 받으며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고 제자들을 보내 마을 순찰도 하는 등의 생활을 이어갔다. 허나 이런 모습을 유파, 문파를 세워 제자를 받아 돈을 벌고 자경단 행세를 한다 하여 중국공산당 정권에서 좋지 않게 봤던 터라, 문화대혁명 이후로 무도가들은 홍위병들의 탄압으로 제거당하는 것은 물론, 무술서적들도 상당수 자취를 감추었다. 그래도 무사히 살아남은 사람들은 음지에서 수련하거나 기억을 되살려 무술을 복원하기는 했지만 개혁개방 이후로 무술이 건강, 호신 용도나 관광상품 등으로 인기몰이를 하자 이번에는 돈을 벌려고 온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현재는 중국 무술이라는 이름 아래 장사꾼들 위주로 남은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탄압에서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무술은 바로 태극권이었다. 사실 태극권도 1966년 다른 무술들과 함께 수련을 금지당하며 탄압을 겪기는 하였다. 그러나 태극권은 소림사 무당파처럼 종교적 색채를 띠지 않았고, 마오쩌둥이 등산·조깅·수영과 함께 태극권을 심신 단련의 수단으로 권장한 까닭에 4년 만에 금지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중국공산당은 기존의 투로를 간소화한 간화 태극권을 개발하고 전국의 학교와 지역 사회에 보급하였고 태극권은 21세기 현재까지도 국기(國技)로 대우받고 있다.

하지만 중소 국경 분쟁에서 중국군이 소련군과 몸싸움을 벌일 때 나무봉 등을 이용한 것을 보면 전투력이 필요한 군 중심으로 아주 명맥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다만 심신수양 목적이 있는 전통 무술보단 순수 격투용인 군 제식 무술은 필요한 것만 취하고 새로 만들었기 때문에 전통무술과는 거리가 멀다.

당연하지만 문혁당시 탄압으로 많은 무술가가 무술을 죽거나 포기하면서 가뜩이나 폐쇄적이라고 비난받았던 중국무술들이 더욱 움츠러들면서 다른 무술과 교류를 못하게 되고 여기에 한몫 챙기려는 장사꾼들 까지 개입하면서 중국무술은 변화를 거부하고 실전성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중국 전통무술가들을 박살내는 쉬샤오동도 이를 안타깝게 여긴다.

2.4. 스포츠

스포츠도 예외는 아니어서 중국 축구 농구 분야에서 많은 인재와 옛 기록, 흔적 등이 말살되었다. 이 당시 중국은 선수들이 외국풍에 물든답시고 올림픽은 물론 모든 체육종목의 해외대회에 참가를 거부할 정도였다. 한국 축구인으로서 한국과 전 세계 축구 역사, 용품 등을 수집하는 이태형이 1950년대 중국 연변팀 축구 유니폼을 겨우 구했는데, 조선족인 정지승이 어렵게 보관하여 겨우 남은 것이었다. 당시 클럽 유니폼까지 불타서, 지금도 중국에서는 이 시절의 축구 유니폼을 구하기가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 정지승도 문화대혁명 당시 인민재판에 끌려나와 축구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온갖 모욕을 당했다고 한다. 그는 1990년대 후반 한국으로 귀화하여 한국 축구계에서 일했으나, 심부전증으로 66세에 급사했다. 중국 슈퍼 리그 팀들 중 역사가 오래된 팀들도 1970년대 이전 역사자료를 찾기 힘든 이유가 이것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중국에서 국기(國技)라 일컫는 바둑도 4구악[44]이라 하여 금지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탄압해놓고서 정작 진짜 도박으로 유명한 마작은 어찌하지도 못했다. 괜히 리콴유" 중국인들에게 어지간한 것은 다 금지시킬 수는 있어도 마작은 금지시킬 수 없었다"고 말한게 아니었다.

당시 손꼽히던 청년 기재로 이름을 떨치던 녜웨이핑 헤이룽장성의 돼지 도살장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45] 다행히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 바둑에 대한 중국 정부의 인식 전환으로 인해 다시 바둑을 두게 되었다. 훗날 녜웨이핑은 중국의 1인자가 된 뒤, "헤이룽장성의 기억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회상한 바 있다.

그나마 스포츠 분야는 중국의 수많은 인재와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에서 들여온 트레이닝 시스템을 통해 재빠르게 피해가 복구되었다.

2.5. 식문화

문화대혁명은 중국 요리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궁중예식을 기록한 문헌 다수가 문화대혁명 때 소실되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만한전석으로 이것이 소실되면서 중국 궁중요리들의 대접 순서, 즉 조합법을 알 수 없게 되었다.

프랑스 코스요리처럼 순번을 지키는지, 아니면 그냥 한꺼번에 늘어놓는지 등의 예식 자체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알 수가 없게 된 데다가, 문헌도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만한전석에 대해 알고 있던 청나라 시절 환관을 찾아내었는데, 이 사람이 요리를 그만둔 지 워낙 오래되기도 했고 나이를 먹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한 탓에 최면요법으로 기억을 불러내려고 시도하기까지 했다고 한다.[46] 그러나 애석하게도 중국 본토에서 만한전석의 복원은 실패로 끝났다. 지금의 만한전석은 그저 값비싼 샥스핀 같은 고급 요리들을 코스 요리로 만든 것으로 중국 서민들이 먹기에는 물론이고, 어지간한 외국인 관광객들이 먹기에도 터무니없이 비싸다.

이렇듯 중국 요리의 전통이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거의 끊어질 뻔한 위기를 겪었다. 베이징에는 (明)·(淸) 시대부터 이어진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음식점들이 많았으며, 황실요리에 버금가는 고급음식을 취급하는 고급음식점이 많았다. 당시 이런 류의 음식점들은 홍위병의 공격을 받고 가게 이름을 죄다 향양(向陽), 동풍(東風) 따위의 근본 없는 이름으로 개명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양고기 샤브샤브를 팔던 '동래순(東來順)'에는 유명 소설가 라오서[47]의 휘호 '노점신풍(老店新風)'이라는 간판이 걸려있었으나 이 또한 홍위병에게 파괴되었다. 그리고 가게는 '민족찬청(民族餐廳)'이라는 이름으로 개명당했다. 청나라 시절 건륭제가 혼자 몰래 와서 먹고 갔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샤오마이(烧卖, 딤섬의 일종이다.) 가게인 '도일처(都一處)'는 '연경소매관(燕京烧賣館)'으로 개명당했다.

홍위병들은 음식점을 멋대로 점령하고, 요리사들에게 "농민과 노동자를 위한 요리를 하라"고 강요했다. 이로 인해 황실요리를 팔던 고급 음식점들이 삽시간에 만터우, 따위를 파는 간이 급식소로 전락해버렸다. 이는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중국 요리의 심각한 단절을 가져왔다. 물론 고급 음식점에서도 만터우나 빵, 죽을 팔긴 했으나, 이런 곳에서 팔던 음식은 요리사들이 최고급 재료들을 이용하여 작성된 조리법이 수백 년간 고급 음식점의 요리사들에게 전수되던 것들이다. 그러니 죽 한 숟가락과 만두 1개에도 역사가 담겨 있는 것인데, 홍위병들은 이런 걸 깡그리 무시하고 일반 음식을 팔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니 은나라 시대부터 중화민국 시대까지 4천여년 간 발전해 왔던 중국의 식문화가 단 3년 만에 백지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이로 인해 지금도 중국 요리의 정수를 맛보려면 중국 본토가 아니라 홍콩이나 대만 혹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 호주 화교 거주민이 많은 동남아시아/ 오세아니아, 혹은 북미, 영국 등의 화인 거주지 등으로 가야 한다.[48] 중일전쟁 국공내전 그리고 공산화 이후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 등 계속되는 본토의 혼란을 피해서 수많은 요리사들이 전쟁의 화마를 그나마 피할 수 있었던 홍콩이나 대만으로 그리고 다시 북미, 동남아시아, 오세아니아, 영국 등으로 도피해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의 요리 또한 각지에서 현지화되면서 또 한 번의 변형 과정을 거쳤기에 과거의 전통 방식과는 또 다른 점도 많다. 특히 고급요리는 주로 홍콩 거주 영국인들과 외국인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했으므로 이들의 입맛에 맞게 변형되었다.

물론 중국 요리라 해도 서민 요리들의 조리법은 실전되지는 않았고[49] 고급 음식점이라고 해도 무조건 문을 닫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문화대혁명이 잠잠해지자 전수받아온 기술을 되살려 고급음식들을 다시 만들었다. 또한 1980년대 개혁개방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 이후로 경제성장에 따라 외식산업이 급속도로 발달하면서 부유층들도 급속히 늘어나며 고급 음식점들도 프랜차이즈화되었다. 그리고 전통 조리법을 재개발하는 과정을 거쳐서 수많은 전통요리들이 되살아났다. 그러나 상당수의 전통 조리법과 기술들이 사라져서 위에서 언급한대로 홍콩과 대만의 조리법을 역수입해야 했고, 그 결과 중국 요리 전체가 홍콩, 대만의 영향을 받아서 각 지역의 특색이 많이 사라졌다. 게다가 홍콩과 대만의 전통 요리들도 위에서 언급했듯이 현지화되고 수십년을 거치면서 과거 전통요리와는 어느 정도 달라졌던지라, 전통 방식이라고 복원한 것조차 과거와는 많이 다르다.[50]

상술한 만한전석 홍콩 마카오에선 지금도 잘만 만들어지지만 정통과는 상관이 없고, 청나라 궁중요리와 아무 상관없는 그냥 비싼 광동 요리들을 진열해 놓고 자기들 맘대로 만한전석이라 부를 뿐이다.

아무튼 이러한 연유로 인해 많은 종류의 조리법이 사라졌거나 극적인 변화를 맞았다. 귀족과 황제가 먹던 음식이 무엇인지 살려낼 수도 없는 상황 자체만으로도 외국인들에 식문화를 내놓는 입장에서는 큰 타격이라 할 수 있다. 왜 궁중요리가 여행객들 사이에서 유명하냐면 가장 높으신 분의 식사이기 때문이다. 높으신 분의 음식은 당연하게도 모든 면에서 까다롭게 준비된다. 가장 신선하고 고급스러운 식재료를 엄선하고, 그 가운데 격이 낮은 재료도 어떻게 조리하면 그 격식이 극상으로 높아질지도 끊임없이 고민한 산물이 현재 고급 음식점에서 볼 수 있는 궁중요리다.

그런데 베이징을 포함한 중화인민공화국 본토에서는 이것이 거대한 타격을 입고 그 상당수가 기억의 소실로 인해 불완전해진 상황에서, 국공내전 당시 대만과 홍콩으로 피난을 온 요리사들이 만드는 요리및 광둥성, 푸젠성 및 대만의 영향도 받는 요리가 도로 들어오는 것이니 모든 면에서 다를 수밖에 없다.

위와는 별개로 문화대혁명은 중국 본토 음식 문화에 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는데, 매운 음식이 상대적 득세를 하게 된 점이다. 다름아닌 마오쩌둥의 고향이 후난성이기도 하고, 그래서 매운 음식 부심 또한 매우 강해서 대중에게도 적극 권장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매운 요리를 매우 좋아했으며 고추를 곁들인 요리를 즐겨 먹었다. 정적들을 숙청할 때도 돌려서 " 저놈들에게 고추를 좀 먹여야겠다"라고 표현할 정도. 그러다보니 다른 지방 요리들은 어느정도 몰락을 면치 못했으나, 후난성 및 그 인근인 쓰촨성 구이저우성 방식의 음식법은 마오쩌둥의 비호 아래에 널리 퍼져나갈 수 있었다. 마라탕 마파두부만 해도 원래 쓰촨 계열 요리다. 물론 마파두부도 문승두부(...)라는 개명을 당한 적이 있었다.

2.6. 미술

21세기가 되면서 중국 출신 현대미술가들이 뜨고 있는데[51] 이들 상당수가 문화대혁명 당시의 트라우마를 작업 주제로 삼고 있다. 중국 출신 현대미술가들 중 가장 이름이 널리 알려진 아이웨이웨이[52]와 같은 경우, 시인이었던 아버지가 시골로 하방당하면서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내야 했다. 장샤오강과 같은 작가도 문화대혁명 시절 홍위병들을 주제로 작업하기도 하였다.

다만 문화대혁명의 포스터들은 홍보 효과는 뛰어났다는 점에서 프로파간다적으로는 높이 평가되기는 하는데, 그림 자체가 독특하다고 평가되고 있기 때문에 서구에서는 이 문화대혁명 포스터만 모아서 전시회를 할 때도 있다. 지금은 북한에서 이런 류의 포스터를 아직도 프로파간다에 쓰고 있다.[53]

2.7. 애니메이션

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야 하는 애니메이션 특성상, 중국은 애니메이션 산업이 발전하기에 상당히 유리한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대혁명 이전에는 상당히 다양한 소재의 중국산 애니메이션이 나왔고 그 중에는 국제적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은 애니메이션도 있었다.

애니메이션 산업의 역사를 따져보면 중국이 일본보다 훨씬 일찍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 정도로 애니메이션 사업에 있어서 선발주자였다. 일본에서는 1943년에 나온 모모타로의 바다독수리가 첫 장편 애니메이션이고 공식적으로는 1958년에 만들어진 백사전이 첫 장편 애니메이션인데, 중국은 이미 그보다 앞선 1941년에 데즈카 오사무가 큰 인상을 받았던 동아시아 최초의 장편 셀 애니메이션인 서유기를 만들었다.

중국공산당은 초창기에는 애니메이션을 장려하였고, 상술한 서유기를 제작한 완씨 형제를 밀어주었지만, 애니메이션이 정부 비판의 도구가 될것을 우려하여 1960년대 말부터 본격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상하이 애니메이션 필름 스튜디오도 덕분에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중순까지 공산당 찬양물 수준 홍보물을 빼면 제작조차 할 수 없었으며 각본가가 감독들도 끌려가서 사상검증을 해야하는 등 온갖 고생을 해야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들어 그 이전에 제작된 작품들과 그 작품을 제작한 감독들은 어처구니없는 비난을 받기 일쑤였고, 작품 소재와 촬영 기법도 제한을 받게 되어 내용도 단순화되었다. 거기에다가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강력한 심의의 영향으로 애니메이션 제작도 급감하여, 문화대혁명 동안 중국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제작된 작품수는 단 17편에 그치는 암흑기를 겪게 된다. 당시 중국에서는 연환화 역시 굉장히 발달하여 중국 특유의 만화 및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이 연환화 기법을 통해 만든 애니메이션이 1950년대에만 해도 부흥기를 맞이했지만 문화대혁명으로 명맥이 아예 끊겨버렸고 중국의 애니메이션과 만화 산업도 완전히 박살났다. 결국 동아시아 애니메이션 산업의 주력이 대부분 일본 쪽으로 쏠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로 인해 현재 중국의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산업에서는 창의력 부족과 모방이 심하게 나타나는데, 중국의 꼰대들은 이 분야에 대해 왜 니들은 일본처럼 좋은 작품을 못 만드냐고 중국의 젊은 세대를 많이 깐다. 하지만 중국식 만화인 연환화나 수묵화 애니메이션 등이 제일 타격을 입게 만든 계기가 문화대혁명인 것을 보면, 자신들의 세대가 애니메이션 산업을 박살내놓고서는 현대의 중국 청년들만 탓하고 있는 것이다. 홍위병 세대 꼰대들의 과거세탁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다.

2.8. 연극

문화대혁명으로 가장 피해를 많이 본 영역 중 하나이다. 이는 유명 연극, 영화배우 출신이었던 4인방의 수장이자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이 특히 몸소 앞장서서 제대로 공격한 분야였기 때문이다.

이미 그 전에 장칭은 1964년에 경극 공연대회에서 한 연설을 통해, "기존 경극이 구시대적이고 봉건적인 내용만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건전한 사회주의 노선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디스했고, "모든 경극은 인민들의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삶의 표본이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경극 전반에 대한 개작을 지시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장칭의 방침에 반발하거나 미온적이었던 경극 배우들은 모두 숙청되었는데, 당시 경극 배우들에 대한 처우는 문화대혁명 시절 홍위병이었던 천카이거가 감독한 영화 《 패왕별희》에서 리얼하게 묘사되고 있다.

그렇게 해서 1967년에 우선 기존 경극을 개작하거나 아예 새로 만든 소위 혁명경극 5편, 혁명무용극 2편, 혁명 교향곡 1편까지 8편의 공연물이 '문화대혁명의 이상적 음악 작품'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들 작품은 곧 양판희(樣板戱)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엄청나게 자주 상연되고 방송되었다.
  • 제1차 양판희 목록
    • 혁명경극
      • 《홍등기(紅燈記, The Red Lantern)》
      • 《사가빈(沙家浜, Shajiabang)》
      • 《지취위호산(智取威虎山, Taking Tiger Mountain by Strategy)》
      • 《기습백호단(奇襲白虎團, Raid on the White Tiger Regiment)》
      • 《해항(海港, On the docks)》[54]
    • 혁명무용극
      • 《백모녀(白毛女, The White-haired Girl)》
      • 《홍색낭자군(紅色娘子軍, The Red Detachment of Women)》
    • 혁명교향곡
      • 《사가빈》(같은 이름의 혁명경극을 연주회용 작품으로 개작한 것)

혁명경극 중에 장칭이 특별히 좋아했던 작품이 《기습백호단》과 《홍등기》였다. 《기습백호단》은 한국 전쟁 당시 금성 전투를 다룬 작품으로, 중국인민지원군 명의로 참전한 중국군 한국군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의 백호연대를 섬멸하고 그 군기를 노획한 사건을 극화한 것이다. 이 군기는 아직까지도 단둥의 항미원조(抗美援朝) 기념관[55]에서 전시되고 있다. #

《홍등기》는 중일전쟁 당시 만주국 점령 하의 후린 철도역 탈환을 위해 잠입한 중국공산당의 공작원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 원작으로, 신해혁명 이후 대를 이어 중국 공산당의 혁명에 동참한 리씨 집안의 내력을 서술하면서, 적에 대한 섬멸 의지와 순국하면서도 대를 잇는 혁명의 기상을 선전하는 작품이다.

《백모녀》는 가난한 소작농의 딸인 여주인공이 악덕 지주의 으로 팔려 온갖 학대를 당하다가 탈출한 뒤, 팔로군 병사로 지원해 싸우던 남주인공과 만나 공산 혁명의 대열에 동참한다는 내용이고, 《홍색낭자군》은 빈농 출신인 여주인공이 공산당 여군 부대에 입대해, 혁명 전투에서 맹활약한다는 줄거리를 갖고 있다.

경극과 가무극 모두 기존의 화려한 의상과 무대 미술을 지양하고, 가수와 배우, 무용수들이 평범한 인민복이나 군복, 기타 수수한 평복을 입고 연기하도록 했고, 주인공은 무조건 사회주의 정신에 충실한 영웅으로 설정되어, 그에 반하는 인물이나 사건을 철저히 타도한다는 내용이 골자가 되도록 했다. 극의 음악 반주는 기존의 소규모 기악 합주단이 아닌, 합창단과 관현악단이 동원되어 맡도록 했고, 각본과 작곡, 안무를 개인 창작가가 아닌 여러 창작가들의 공동 창작 형태로 맡도록 했다.

그리고 이들 양판희가 성공적으로 뿌리내렸다고 판단한 장칭은 2번째 양판희 창작을 지시했고, 여기서 뽑힌 9편의 작품이 제2차 양판희로 이름 붙어 보급되었다.
  • 제2차 양판희 목록
    • 혁명경극
      • 《용강송(龍江頌, In Praise of the Longjiang)》
      • 《홍색낭자군》[56]
      • 《평원작전(平原作戰, The Warfare on the Plain)》
      • 《두견산(杜鵑山, Cuckoo Mountains)》
    • 혁명무용극
      • 《기몽송(沂夢頌, In Praise of the Yimeng)》
      • 《초원아녀(草原兒女, Little Sisters of the Grassland)》
    • 혁명교향곡
      • 《지취위호산》[57]
    • 피아노 반주곡
      • 《홍등기》[58]
    • 피아노 협주곡

2.9. 음악

그나마 경극이나 무용극은 상대적으로 공연할 레퍼토리가 많은 편이었다. 그러나 피아니스트나 관현악단의 경우, 이 1~2차 양판희나 대중 집회 때의 혁명가요 반주를 빼면 연주할 곡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인터내셔널가를 제외한 모든 국외 작품은 연주가 금지되어 있었고, 피아니스트는 오로지 《홍등기》 피아노 반주곡판과 《황하 협주곡》만을 연주해야 했다. 관현악단도 《사가빈》과 《지취위호산》의 교향곡판과 《황하 협주곡》, 그리고 혁명 경극과 무용극 반주만 하면서 이 시기를 버텨내야 했다.

당연히 이 시기에 활동했던 지휘자와 관현악단 단원들, 피아니스트들은 문화대혁명 후, 전부 당시 상황에 학을 떼며 부정적인 증언을 남기고 있다. 중국중앙교향악단(현 중국국립교향악단) 상임 지휘자였던 리더룬(李德倫)은 "하도 같은 곡을 수백 번 반복해 공연하다 보니, 나뿐만 아니라 모든 악단원들이 악보 없이, 심지어 눈 감고도 완벽하게 연주할 수 있었을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마찬가지로 상하이가무단 관현악단 지휘자였던 천셰양(陈燮阳)도 "우리는 문혁 시기 《백모녀》만, 그것도 수백 번을 공연했다. 이러다 보니 모두가 이 일을 지겨워했지만 그런 내색도 할 수 없었다."라고 밝혔다.

물론 시기와 장소에 따라 이 양판희 외의 작품을 연주할 기회도 있었지만, 그것도 양판희 작품을 편곡해 정부의 검열을 거쳐 허가받은 것만 가능했다. 이 때문에 이 시기 중국의 양악 분야는 나락으로 추락했고, 1977년에 가서야 수많은 금지곡 조치들이 해제되면서 재기할 수 있었다.

연주자뿐만 아니라 작곡가, 대본 작가, 연출가, 안무가들도 심한 탄압을 받았고, 양판희의 공동 창작 때를 빼면 개인 이름을 붙여 작품을 내놓을 수도 없었다. 아예 거기서 배제된 인물들은 홍위병들에 의해 반혁명적이라며 조리돌림을 당하거나, 투옥 혹은 하방(下放)되어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더 심한 경우는, 여자는 아예 홍위병들의 성노리개가 되고, 남자는 숙청을 당하거나 실종되어버리기도 했다.

몇 가지 예로 조선 출신 작곡가 정율성도 이 시기에 마찬가지로 고문과 투옥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문화대혁명 말기에 세상을 떠났고, 비슷하게 고문과 하방(下放) 노동을 당해야 했던 작곡가 왕시린(王西麟)도 홍위병들로부터 치아를 몇 개 잃고 얼굴 모양이 변할 정도로 심하게 구타당하는 등의 고초를 겪다가 살아남았다.

중국 최초의 바이올리니스트들 중 한 사람이자 촉망받는 작곡가였고 베이징 중앙음악원장과 중국 정치국원이라는 요직까지 올라갔던 마시총(馬思聰)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졸지에 사대주의자로 몰려 홍위병들에게 위협받기 시작했고, 결국 1967년에 가족들과 홍콩으로 밀항한 뒤 미국으로 망명해 그 곳에서 활동했다. 소련에서 개최된 제1회 차이콥스키 콩쿠르의 피아노 부문에서 공동 2위를 차지했던 피아니스트 류시쿤(劉詩昆)도 "문화대혁명 시기 고문과 투옥 생활을 겪었고, 6년 동안 징역을 살면서 감방 벽에 피아노 건반을 그려놓고 그걸로 연습을 대신했다"고 증언했다.

이런 이유로 문화대혁명 이후의 연주가나 작곡가들은 그 당시의 음악이나 어법을 일부러 피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후 중국이 사상적으로 보수화되기 시작한 1980년대 후반에 들어 양판희의 연주가 다시 재개되기 시작했다. 다만 중국 정부도 문화대혁명 시기처럼 이들 양판희의 공연과 관람을 강제하지는 못하고 있고, 공연 횟수도 그 당시에 비하면 현저히 적어져서, 일종의 추억팔이 식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외에 중국공산당에서는 문화대혁명 시기에 마오쩌둥 어록을 인민들에게 보급하기 위해 어록 구절에 가락을 붙인 어록가라는 혁명가요풍 노래를 만들어 보급하기도 했다. 그 외 정부나 당의 정책을 홍보하기 위해서 이렇게 혁명가요의 아이디어를 빌려 노래로 만들었다. 물론 이 운동 자체가 마오쩌둥에 대한 개인숭배를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마오쩌둥 찬양가도 수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이 노래들도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에는 평가절하되어 부르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현재 중국의 국가인 《 의용군 진행곡》도 이 당시의 희생자라고 볼 수 있는데, 이 곡의 작사자인 톈한(田漢, 1898~1968)이 문화대혁명 당시 반당분자로 몰려 숙청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 노래는 한동안 가사 없이 연주만 되는 곡으로 전락했다. 1978년 마오쩌둥 중국공산당을 찬양하는 가사가 나오긴 했는데, 이때 중국인들의 반응은 영 좋지 않았다.[60] 이후 1982년에 톈한이 복권되자, 원래의 가사로 돌아오게 된다.

결국 중국의 음악계를 무자비하게 탄압한 후유증은 오늘날 중국의 대중음악계에도 크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으로, 2012년 대한민국의 예능 프로그램 《 나는 가수다》가 중국으로 수출되었는데 과거 문화대혁명 시절 대중음악계를 검열하는 바람에 실력 있는 중국 대륙 출신의 가수들이 크게 활약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싸그리 사라져버리는 공백이 있었고, 중국 대륙 출신의 가수들보다 실력이 있는 대만의 가수들에게 높은 순위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결국, 현재에도 중국 대륙 출신의 가수들보다는 대만이나 홍콩 출신의 가수들 중에 실력자들이 더 많고 인기도 더 많다. 결국 10억 인구의 중국 대륙 출신 가수들이 처참하게도 상대적으로 비주류가 되어버렸다.

원래 중국에서는 1930~1940년대 재즈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상하이 시대곡(時代曲)들이 크게 유행을 했었지만[61], 국부천대 이후 대부분의 뮤지션들이 홍콩이나 대만 등지로 이주한 후, 중국은 일반적인 대중음악이라고 부를 것이 없었다. 게다가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표현의 자유 제한과 검열이 극도로 심한 공산주의 국가의 환경에서, 대중음악이 제대로 발전을 할 리가 만무했다. 그리고 1960년대에는 그 악명 높은 문화대혁명이 터지면서 중국의 대중음악계가 완전히 전멸해 버렸다. 1960년대를 대표하는 대부분의 대중가요들은 마오쩌둥 찬양가와 같은, 공산혁명가, 공산당 찬양가, 인민해방군가와 같은 것들이었다. 결국 공산당의 무자비한 검열로 인해 중국의 대중가요계가 위축되고 완전히 퇴보하면서 날이 갈수록 대만의 대중가요계보다 인재풀이 크게 좁아졌다.

그러다가 1970~1980년대에는 개혁개방으로, 광동어 노래와 대만 가수들, 등려군이 음악계를 평정했는데, 문제는 이들은 중국 대륙 출신이 아니라 대만 출신이라는 것이다. 또한 1990년대에는 배우로 더 유명한 장국영 등이 가수 활동을 하면서 중화권의 가요계를 빛낸 적이 있었는데, 이들 역시 중국 본토 출신이 아니라 대부분 홍콩 출신이었다. 그 때문에, 중국은 지금까지도 대만이나 홍콩 출신의 가수들을 불러오지 않으면 사실상 유능한 인재를 배출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결국 현재 중국 경제가 크게 발전함과 동시에 시민들의 문화 수준도 향상되면서, 중국의 대중가요가 질적으로 제대로 된 발전을 할 기미가 보이나 싶었으나 현실은 반대로 영미권의 가수들과 K-POP, 라틴 팝 등이 오히려 중국의 대중음악계까지 완전히 점령해버리는 상황이 되었다. 덕분에 가뜩이나 좁아터진 상황에서 중국을 대표할 유명 가수가 나올 인재풀이 더 좁아져버렸고 중국의 소프트파워는 옆동네 대한민국보다도 훨씬 허약하기만 하다.

그나마 힙합 쪽이 어느 정도 가능성을 보이긴 했는데 힙합마저도 중국공산당과 광전총국의 규제 검열로 많이 꺾였다. 2017년 랩 오브 차이나가 엄청난 대박을 터뜨리고 그동안 문화 검열도 잠시나마 유해지며 언더, 오버 실력파 뮤지션들이 빛을 보면서 힙합이 본격적으로 주류에 오를 기회를 잡았지만 아니나 다를까 바로 중국공산당에서 검열을 시작하여 금지드립까지 치고 힙합 발전이 꺾였다.

이후 중국 힙합계선 사회비판, 풍자, 노골적인 머니 스웩, 섹스어필 등은 상당히 보기가 힘들다. 랩 오브 차이나 출연 래퍼들도 다소 밝고 희망찬(...) 가사들로 나와야했고 크리스 우는 아예 중국혼(...)이란 제목의 국뽕 요소가 가득한 랩을 랩 오브 차이나 프로듀서 공연에서 불렀다.

2020년대 들어 유튜브 등지에 널리 알려진 중국 본토 음악은 거의 대다수가 공산당 선전물이다(...). 틀:중국의 선전물 참조.

2.10. 영화

중국의 연극계와 영화계는 경극 등으로 명맥을 이어가다가, 문화대혁명 이후부터는 발전이 아예 정지되어 버렸다. 물론 비단 문화대혁명 탓의 영향도 있지만, 문화대혁명이 끝난 이후에 TV가 널리 보급되면서[62] 영화계가 한 번 더 큰 타격을 입은 것도 있기는 하다. 물론 중화권 영화가 성룡, 주윤발, 장국영 등을 중심으로 1970년대부터 발전을 이루기 시작하면서,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에 절정을 이루며 중화권 문화를 빛내긴 했다.

그러나 문제는 저런 영화계 인재들은 전부 중국 본토 출신이 아니라 당시 영국령이던 홍콩 출신이라는 것이다. 중화권 음악계를 빛냈던 등려군 대만 출신이었다는 점과 같은 이치다. 실제로 홍콩 영화는 1997년에 사실상 중국 영토가 되고나서는 과거의 명성을 잃어버리고 침체[63]되었으며, 이전의 전성기 시절에 남긴 수많은 영화들은 전부 홍콩 영화로 취급하지, 중국 영화로 취급하지는 않는다.

중국 영화계가 쑥대밭이 되었던 1970년대 당시, 중국인들은 북한 영화를 많이 봤다. # 북한 만수대예술단과 예술단체들이 간혹 중국에서 공연하면 입장권 쟁탈이 너무 심하여, 행정급별 혹은 중국 공산당원 위주에 따라 입장권을 배분할 정도였다. 중국 장년층은 그 당시 유행하던 북한 영화들을 '추억의 영화'로 떠올린다.

물론 홍콩 영화가 붐을 일으키던 시절에도, 중국 본토에서 장예모, 천카이거 등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영화감독들은 계속 나오고, 공리와 같은 재능이 있는 배우들도 꽤 나와서 중국 영화의 명맥을 가까스로 이어가긴 했다. 이들을 5세대 감독이라 하는데 대부분 하방이나 홍위병 경험이 있으며, 당시에 대해 트라우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게 대다수다.

그런데 사실 홍콩 영화는 멜로, 액션 등 상업성 영화가 인기였던 것이지, 홍콩 영화가 세계 영화제에서 주목을 받거나 수상한 경력은 드물다. 1997년 홍콩 감독 왕가위가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면서 처음으로 세계 3대 영화제에 등판한 반면, 중국 본토는 1988년 장예모의 <붉은 수수밭>이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칸 영화제, 베니스 영화제 등에서도 상을 석권한 바 있다. 갈수록 심해지는 중국의 검열 체제가 없었다면 문화대혁명과 상관없이 동아시아에서 가장 발전한 영화 강국이 되었을 수도 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자장커와 같은 중국 감독이 칸 영화제, 베니스 영화제 등 세계무대에서 상을 받으며 끊겼던 중국 영화 맥이 살아나고는 있지만, 문화대혁명 시기에 갈려 나갔을 영화 인재들을 생각하면 그 손실이 엄청나다. 무엇보다 지금의 중국은 문화대혁명의 영향보다 현재 진행 중인 검열의 폐단이 상당히 크다. 아무리 능력있는 감독과 배우과 있어도 검열 때문에 절대 능력을 발휘할 수 없고, 조금이라도 공산당에 거슬리는 작품은 산채로 매장된다. 어찌보면 문화대혁명보다 더 큰 손실인셈.

2.11. 인문학, 시민의식

문화대혁명을 겪은 세대를 ' 잃어버린 세대'라고 부른다.
노인들이 나쁘게 변한 것이 아니라, 나쁜 사람들이 나이를 먹었다. - 중국 유행어

어쩌면 문화대혁명으로 잃어버린 가장 큰 것이다. 전통적인 미풍양속들은 봉건 잔재 취급을 받았고, 오히려 자식이 부모를, 학생이 선생님을 공격하는 행위가 장려되었다. 문화대혁명 때 이미 중년이었던, 현재 아주 나이 든 중국의 노인들은 "문화대혁명 이전에는 윗세대를 존중하는 문화가 있었는데, 이후엔 없어졌다."라고 말한다. 교육은 제 기능을 못하고, 이성적인 논리보다는 우격다짐이 옳은 세상이었다.

세대가 물갈이가 되면서 이러한 경향은 점점 줄어들겠지만[64] 아직도 갈 길이 요원해 보인다. 당장 문화대혁명은 2024년 기준으로도 겨우 반세기 전의 일이고 개인적으로 보면 짧은 시간이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그렇게 긴 시간도 아니다.

다시 말해 문화대혁명은 그저 역사책 안에서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당시 실제로 홍위병으로 한창 활동하던 10대~20대들이 2024년 현재 중국의 60~70대로 노인층에 고스란히 포진되어 있다는 것이다.[65] 굳이 홍위병이 아니더라도 그 시대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교양 부족 문제를 겪기가 십상이기 때문에 실제 나이대를 좀 더 넓게 잡을 필요도 있다.

좀 더 어린 나이에 문화대혁명 시대를 겪고 그 영향을 받은 사람도 많을 것이며, 문화대혁명이 지나갔다고 예절 교육 등이 당장에서 회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다 중국의 평균수명이 약 77세라는 것을 감안하면, 진짜로 홍위병 출신들이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만도 앞으로도 최소 10년에서 20년은 더 필요하다는 소리다.

뉴스에서 말하는 ' 따마'(大媽)는 바로 이들, 중노년 여성들을 칭하는 말이다. 즉, 전직 홍위병과 진상 아주머니를 합친 것이라 자국에서도 유난히 구설수에 오르고 비난을 듣고 있다.

인문학도 크게 망가졌는데, 중국의 박사급 인문학자가 한국의 석사 수준도 안 된다는 충격적인 실태가 그 현실을 보여준다. 실제로 한국의 여러 대학 사학과에서 중국사 개설 과목들의 교재들을 보면 대부분 서구나 일본 학자들의 저서지를 사용하지, 중국 본토 학자들의 저서를 쓰는 경우는 정말 드물다.[66] 당연한 결과지만 중국의 대학교에서 인문학의 연구 성과는 미진하게 되었으며, 고등교육도 엉망진창이 되었다. 이 당시 중국인들 중에는, 한국에서 "나 어렸을 때 6.25 전쟁이 터져가지고 학교를 못 갔어!" 라고 하는 어르신들이 계신 것처럼[67] "나 어렸을 때 문혁이 터져서 대학에 못 갔어!" 라는 세대가 존재한다.

본래 중화권의 정계, 지도부에서는 문과 전공자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고 특히 문화대혁명을 겪지 않은 홍콩은 여전히 그런 성향이 있지만 중국 본토는 그런 경향이 사라진 것도 문화대혁명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 고위층, 지도부에 이공계 출신이 많은 것도 이공계를 우대하는 정책[68] 때문만이 아니라 문화대혁명 당시 최상위권 대학들의 문과 학부들이 말 그로 아작났고 문과 전공자들이 대거 숙청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가의 부당한 결정으로 인해 피해만 본 사람들이 가만히 있기만 할 턱이 없으니, 이들 상당수가 반정부 세력이 되었고 일부는 민주화 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한다.

결국 이러한 여파로 인해, 문화대혁명의 피해를 덜 보고 눈밖으로 나갈 걱정이 덜했었던 이공계 출신의 인재들이 중국 공산당의 고위급 인재로 쏠림 현상이 이어지는 경향은 문화대혁명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또한, 서구권으로 해외 유학을 갈 수 있는 기회가 문과 대학생보다 이공계 대학생에게 상대적으로 많이 주어진 점도 있다. 그나마 2010년대 이후로는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중 리커창[69] 한 명을 제외한 전원이 이공계 출신이었던 후진타오 재임기 때보다는 인문사회과학 전공자 출신이 많아지긴 했다.

2.12. 집회·결사의 자유 말살

중국 인민들이 가장 피해를 많이 본 것 중 하나다. 비록 홍위병들의 해악 때문이기도 하지만, 홍위병이 비판하는 대상이 중앙 정부를 향한 직후 중앙 정부에서 이들을 진압하게 되었고, 문화대혁명 이후로 1차 천안문 사태를 제외하면[70] 중국의 집회·결사의 자유는 완전히 탄압받게 되었으며 중국공산당 입맛에 맞는 어용집회만이 허용되게 된다.[71] 덩샤오핑이 2차 천안문 사태를 그렇게 잔인하게 진압한 것도 문화대혁명의 공포 때문이다.

2.13. 경제

대약진 운동으로 인한 피해를 단기간에 수습했었는데 말짱 도루묵이 되었다. 이로 인해, 중국의 경제력은 후발 국가에 하나둘씩 밀려나갔다. 인구면에서 중국보다 훨씬 아래에 있던 국가들이 하나 하나 중국을 따라잡았다. 1976년 당시 중국의 경제순위는 10위로 1966년도의 6위에서 4계단이 더 내려갔고, 1981년에 세계 13위를 기록하여 인구 2천만 명도 안 되었던 호주에 경제력을 따라잡히기까지 했다. 물론 경제는 개혁개방 정책 시행 이후에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빠르게 회복되었고, 다시 이 나라들을 하나 하나 따라잡으면서 30년 후 세계 2위의 자리까지 오르는 데는 성공했다.[72]

또한 이 당시 대만 중국을 경제력면에서 괄목할 정도로 따라잡아서,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대만의 경제력이 중국 전체 경제력의 40%이고, 일개 대도시인 홍콩의 경제력이 중국 전체 경제력의 1/4 정도에 달했을 정도였다. 인구 차이를 감안하면, 문화대혁명으로 인한 성장침체로 인한 피해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다.

어찌보면 대한민국의 1970년대 경제 개발인 한강의 기적을 이끈 보이지 않는 조력이기도 하다. 만약 문화대혁명이 없어서 중국이 공업 위주의 개발을 했다면, 십중팔구 한국의 값싼 노동력에서 나오는 경쟁력은 더 싸고 더 많은 물량의 '메이드 인 차이나'에 밀려서 제대로 팔리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2020년대가 된 현재의 중국은 일당독재로 집권하는 공산주의 국가인데도 사실상 세계 최고의 자본주의 경제 시장으로 굴러가는 국가나 다름없다. 물론, 어디까지나 문화대혁명 시절보다 빈부격차는 수십 배 이상은 커진데다 정치적인 자유도가 상실되었고 중국공산당에 반항하지 않는다는 악랄하기 짝이 없는 조건이 들어간데다가[73] 날조된 경제지표를 들이미는 빛 좋은 개살구가 되어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다만, 당시 경제성장이 정체되지는 않았다. 문화대혁명에 적대적인 중국 주자파도 매년 9~10% 정도의 경제성장이 있었음을 통계에서 인정했다.

2.14. 군사

문화대혁명 당시 아주 처참하게 박살난 분야 중 하나다. 이 표현만 몇 번인지

당장 펑더화이 마오쩌둥에게 충언했다고 숙청당했다. 그리고 문화대혁명이 터지자마자 마오쩌둥이 " 홍위병의 행동을 방해하지 말라"고 하여, 홍위병들이 어떤 짓을 해도 먼 산을 보듯이 바라만 봐야 했다고 한다. 펑더화이는 예전에 마오쩌둥 개인숭배와 대약진 운동을 비판해 마오쩌둥과 다투었는데, 그 개인적인 악감정 때문에 더욱 지독하게 고문을 받았다. 비투(批鬪, 비판과 투쟁)라고, 홍위병들이 사람을 묶어서 끌고다니며 군중 앞에서 모욕과 비판, 폭행을 퍼붓는 인격살인 행위가 있었는데 그는 이걸 수없이 당했다. 그것도 모자라 수사기관도 그를 끌고가 모욕과 구타를 했다. 얼마나 얻어맞았는지 온몸이 붓고, 얼굴이 짓이겨지고, 갈비뼈가 부러지고 폐를 못 쓰게 되었다. 결국 그는 감옥 의무실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그 덕에 문화대혁명 당시 펑더화이, 뤄루이칭, 양상쿤으로 대표되는 중국 인민해방군의 현대화론자들이 주자파 반동으로 몰려 참혹하게 숙청당한 후 인민해방군의 현대화는 1950년대 이후로 전혀 진전이 없었으며 9.13 사건 때는 공군의 야간 전투 자체가 불가능하여 소련으로 도주하는 린뱌오 일가를 먼 산을 보듯이 바라봐야만 했다. 거기에 문화대혁명으로 고위직 장성들이 대대적으로 숙청당하고, 1967년 7.20 사건 이후로 군부 자체가 반혁명 세력으로 몰려 장칭을 필두로 "농민과 노동자를 무장시켜 반동 인민해방군을 대체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주장이 나오는 판이었다.[74]

"장교 몇 명이 당했을 뿐 군에는 피해가 없다"는 주장이 있는데 총참모부 정치부주임, 총후근부 부장, 군구의 사령과 부사령과 정치위원 등의 고위직 장교들을 동네 학생 양아치들이 임의로 잡아가서 죽도록 패거나 아예 때려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니, 군의 지휘계통이라는 것이 남아날 리가 없었다.[75] 이런 상황이다보니 군대는 홍위병에게 무력도 쓰지 못하고, 군부대는 홍위병에게 습격당해 무기와 군사 장비들이 털리는 일들이 많았다. 국가의 무력의 중심이고 상징이자 나라의 국방을 책임지는 집단이 고작 동네 양아치 건달들에게 털린 것이나 마찬가지고 국가의 기본틀이 얼마나 무시당했는지를 알 수 있다.

콰이다푸, 상하이 1월 폭풍 사건, 경서빈관 대소동, 2월 역류의 항목을 참조하면 당시 4인방 홍위병들이 군대를 향해 부린 패악질들이 어떤지를 알수 있다.

거기다 군부대와 더불어 군수공장도 습격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 때 당시 모든 공장들이 습격당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당연히 군수공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군수공장 노동자들도 반동으로 몰려서 구타를 당하거나 살해당하는 일들이 많았고, 그 과정에서 숙련된 노동자들도 죽어나갔다. 때문에 군수품 생산에 큰 차질을 빚게 되었고, 총이나 탱크 등 군수품들은 불량품이 되거나 품질이 나빠진 경우가 많았다. 이 당시 홍위병들은 군수공장의 기계와 부품들을 훔쳐서 총과 장갑차를 제작해서 상대 캠퍼스나 건물, 도심에 쳐들어가는 내전을 벌였다. 결국 국가가 어떻게 되건 국방이 어떻게 되건 관심없이 국방물자를 훔쳐서 자신들끼리 정치, 파벌싸움을 했다. 오죽하면 공장 노동자들이 문화대혁명을 그만하라는 데모와 파업을 했을 정도였으니 말을 다한 셈이다. 뿐만 아니라 핵미사일을 만드는 핵물리학자들이나 로켓 과학자들까지 두들겨패고 수용소로 보내기까지 했다. 덕분에 중국의 국방력은 날이 갈수록 피폐해져만 갔다.

또한 이 시절 때 군 내의 베테랑 병사나 장교들이 많이 없어졌는데 당장 위에 문구에서 펑더화이가 충언하나 했다고 숙청당했다. 그리고 이걸 시작으로 중일전쟁 때부터 참가하여 6.25 전쟁, 중국-인도 국경분쟁 때 참전했던 베테랑들이 하루 아침에 반동으로 몰려서 참혹하게 죽거나 숙청되어나갔다. 결국 중국군에는 실전적 지휘나 전투를 제대로 할 줄 아는 병사들은 없어졌고, 실전경험도 없는 장교나 병사들로만 채워지게 되었다.

이로써 중국은 대숙청 직후 숙청으로 고위직 장교 대다수가 날아간 소련 비슷한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1차적으로 1969년 중국-소련 국경분쟁에서 대가를 치르자 중국 군부는 공포에 질려, "임박한 소련의 침공을 막기 위해서는 미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린뱌오를 제외하고 예젠잉, 녜룽전, 쉬샹첸 등 살아남은 원수들 모두가 이러한 주장을 지지했고, 마오쩌둥은 그의 수제자로 국가 2인자였던 린뱌오가 반대하자, 그를 "대국주의에 매몰된 쇼비니스트"로 마구 모욕을 주고 데탕트를 강행했다.

2차적으로는 마오쩌둥이 죽은 후에 중국-베트남 전쟁에서 치르게 되었다. 물론 당시 베트남은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을 물리친 엄청난 성과를 거운 동남아시아의 맹주이긴 했지만 중국은 국력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였던 베트남을 상대로 압도적 승리를 거두지 못했고, 고작해야 몇 개 도시를 점령하는데 그치며 체면을 구겼다.[76] 그리고 문화대혁명은 대만을 살려낸 또다른 사건이기도 하다.

3. 유명인 피해자

3.1.

  • 덩샤오핑 : 중국공산당 총서기[77]에서 공장 노동자로 하방되었다. 아들은 홍위병때문에 하반신 마비를 당했다.
  • 덩퉈 : 해서파관 사건 당시 베이징 시 당 위원회 서기처 서기였다.
  • 류사오치 : 정계 최고의 피해자다. 한때의 국가주석이 홍위병에게 린치당하여 의무실에서 병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 리리싼 : 계속되는 조리돌림을 견디지 못하고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다.
  • 시진핑을 포함한 시중쉰 일가 : 시중쉰의 실각은 문혁보다 4년 앞서 일어난 일이지만,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시중쉰 일가는 더욱 가혹한 박해를 받게 되었다. 시진핑의 누나는 홍위병들의 박해때문에 자살했다. 이는 현 집권자인 시진핑이 문화대혁명에 부정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 양상쿤 : 문화대혁명 당시에 위연이라는 비판을 받고 쫓겨났다.
  • 왕광메이 : 류사오치의 아내다. 조리돌림을 당했다.
  • 왕치산 :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시골에 내려가서 삽질을 했다.
  • 우한 : 해서파관 사건 당시 베이징 부시장이었다.
  • 자오쯔양 : 덩샤오핑처럼 공장으로 하방되었다.
  • 장보쥔 :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그를 포함한 온 가족은 홍위병들로부터 갖은 모욕을 받았다.
  • 장쩌민 : 문화대혁명 당시 열기관 연구소의 소장으로 있었고 수용소에서 강제노역을 했다.
  • 저우언라이 : 끝까지 공직을 유지했고 그나마 피해도 덜한 경우였지만 자신의 수양딸인 쑨웨이스[78]가 배우였다는 이유로 문화대혁명 중 홍위병에 조리돌림당한 뒤 죽었으며, 지속적으로 조반파의 공격으로 정치적으로 위험에 처하여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79]
  • 주덕해 : 후베이성 일대 농촌지역으로 하방당하며 말년을 비참하게 보냈다.
  • 주룽지 : 1970년에 시골로 하방되어 1975년까지 5년 동안 돼지에게 인분을 퍼날라 먹이는 강제노역을 했다.
  • 지펑페이 : 차오관화와 함께 납치되어 조리돌림을 당했다.
  • 차오관화 : 1967년 정권탈취운동 중 홍위병들에게 감금되어 조리돌림을 당했다.
  • 천윈 : 처음에는 류사오치를 비판하면서 마오쩌둥과 뜻을 함께 했지만 홍위병들이 재산을 약탈했고 하방되어 석유기계공장에서 강제노역을 했고 당적을 박탈당했다.
  • 탄전린 : 국무원 부총리였다.
  • 펑전 : 해서파관 사건 당시 베이징 시장이었다.
  • 후야오방 : 후커스, 후치리와 함께 조리돌림을 당했다.
  • 후치리 : 중국공산당 중앙판공청 주임이었다.

3.2.

  • 녜룽전: 1967년 2월 역류에서 패한 이후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 예젠잉 : 녜룽전처럼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 예페이 : 고향이 필리핀이라는 이유로 박해를 당했다.
  • 샤오징광 : 상하이 1월 폭풍 사건 이후 홍위병들에게 납치되어 조리돌림을 당하다가 전군문혁소조장 쉬샹첸의 개입으로 풀려났다.
  • 샤오화 : 중국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주임 재직 시절 장칭의 명령으로 한밤중에 가택 수색을 당하고 예젠잉의 집으로 피해야 했다.
  • 쉬샹첸 : 녜룽전처럼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 쉬스유 : 난징 군구 총사령관 재직 시절 홍위병들에게 납치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어 조리돌림당하다 마오쩌둥의 개입으로 풀려났다.
  • 장즈중 : 홍위병들이 가죽채찍을 들고 장즈중의 집을 여러차례 습격해 재산을 약탈했다. 그러나 저우언라이가 그를 보호할 것을 마오쩌둥에게 제의했고, 마오쩌둥은 이를 수락해서 더 이상의 박해를 받지 않았다.
  • 주더: 주모군이라 불리며 군의 최고 원로로 존경받던 주더조차도 참소와 공격을 받았다. 그나마 마오쩌둥이 주더를 신뢰하고 있어서 실각이나 숙청을 당하지 않았다.
  • 천이 : 원수들 중에서 문화대혁명파에 강경했던 인물로, 2월 역류 이후 가장 크게 비판받아야 했으며, 그의 가족들도 끌려나와 조리돌림을 당했다.
  • 추후이쭤 : 총후근부 부장이며 린뱌오의 최측근인 그조차도 1967년 1월 홍위병들에게 납치되어 머리가 박박 깎이고 늑골이 부러질 때까지 고문당했다.
  • 펑더화이 : 군부의 피해자 중 끝판왕이었다. 1959년 루산회의에서 마오쩌둥의 정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실각한 상황이었는데, 1966년 장칭의 명령에 따라 홍위병들이 몰려와 쓰촨성의 자택에 있는 그를 납치해서 베이징으로 끌고 왔고 100번이 넘는 고문을 가한 후 비투회에 끌고 다녔다. 결국 직장암이 악화되어 감옥 의무실에서 사망했다. 또한 이걸 신호탄으로 위의 군의 피해에 서술했듯이 중국 인민해방군 베테랑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 푸쭤이 : 자신은 보호되었으나 가족들은 홍위병들에게 조리돌림을 당했다.
  • 허룽 : 반당 분자로 낙인찍히고 투옥되었다가 옥사했다.

3.3. 교육/문화/예술

  • 녜웨이핑 : 헤이룽장성에 있는 돼지 도살장에서 비참한 생활을 했다.
  • 라오서 : 1967년 베이징 8월 폭풍 사건 중 홍위병들에게 버클이 달린 허리띠로 무수히 두들겨맞는 고문과 조리돌림을 당한 후, 수치를 이기지 못해 다음날 호수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 량수밍 : 베이징대학 교수로 박해를 받았다.
  • 류시쿤 : 피아니스트로 감옥에 투옥되었다.
  • 마시총 : 홍콩으로 밀항해서 미국으로 망명했다.
  • 메이바오주 : 경극 배우로 남단(男旦) 배우들과 함께 피해를 당했다. 그리고 홍위병들이 아버지가 남긴 유물과 기물을 훔쳐갔다.
  • 슝스리 : 베이징대학 철학과 교수로 자살했다.
  • 쑨웨이스 : 저우언라이의 양녀이자 여배우로, 장칭의 개인적인 원한으로 모함당해 스파이로 몰려 투옥되었고 그 부하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수모를 당한 후 죽었다. 뒤늦게 장칭으로부터 그녀의 사망 소식을 들은 저우언라이가 그답지 않게 분노를 표출하며 시체의 부검을 하기 위해 경찰들을 동원해 수색했지만 장칭의 지령으로 시체는 이미 화장된 상태였다.
  • 왕시린 : 작곡가로 홍위병들한테 구타를 당해서 치아를 잃었다.
  • 장이머우 : 1968년에 시골로 하방되어 강제 노역을 했다.
  • 정율성 : 원고가 모두 수색당해 많은 악보 등이 유실되었다.
  • 톈한 : 의용군 진행곡 작사자로 숙청당했다.
  • 후펑 : 베이징대학 교수로 박해를 당했다.

이 외에도 헤아릴 수 없는 교육계, 문화계, 예술계 인사들이 피해를 입어서 중국 대륙에서는 인문학이 죽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게 된다.

4. 결론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이라는 사건으로 인해 중국의 전통 문화는 말 그대로 박살났으며, 이 악영향은 수십 년이 지난 이후까지도 막대한 후유증을 남겼다. 외세가 침입해서 작정하고 중국 문화를 말살하려고 해도 문화대혁명보다 피해가 크기 힘들었다. 당장 중일전쟁 때만 해도 일본군이 중국을 침략하여 괴뢰국을 세우고 학살도 하고 중국 문화에 큰 피해를 끼쳤지만 문화대혁명보다 문화적 피해가 적었다. 일본군이 점령하지 못한 중국 영토도 있었던 데다 당시 중국인들이 작정하고 문화를 지키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지켰던 문화를 문화대혁명 때 자기들 손으로 부숴버린 것이니 아이러니하기 그지없다.

그나마 문화대혁명 이후 개혁 개방 이래 시간이 꽤 지나면서 중국의 소프트 파워는 매우 빠르게 발전하는 현대 중국 사회로 서서히 회복되는 단계지만, 소프트 파워가 강해진다 해도 다른 열강들의 소프트 파워를 모방해 뒤따라가고 있는 것이지, 잃어버린 중국만의 문화력을 되찾는 개념은 아니다. 그리고 중국 당국의 문화검열과 통제 또한 문화력 회복을 늦추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게다가 시진핑이 집권한 이후로는 문화산업의 검열과 통제를 더욱 더 강화하여 간신히 복구시킨 문화마저 도로 말려죽이는 심각한 실정이라 역시 완전한 회복은 어려울 듯하다.

이렇게 자국 문화의 회복이 더디자 중국공산당은 결국 한국의 문화를 강탈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무리수를 저지르고 있다. 이러한 역사 왜곡 및 문화 찬탈 행위는 비단 한국에만 국한된 건 아니다. 주공이 한국과 한민족의 문화유산과 역사인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 베트남, 몽골[80], 티베트도 중국과 중국인의 역사 왜곡과 문화 찬탈의 피해자들이다. 무리수도 이런 무리수가 따로 없을 정도로 이들의 행위는 막장일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 사진 속 홍위병들이 점령한 천주당 남당 벽면에는 ' 모(毛) 주석 만세!'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2] 칭화대학의 전신이자 청나라에서 설립한 최초의 유학 전문학교 [3] 대만청치시기를 거쳐 청대 문화가 대만 전역에 퍼졌으며, 중화민국 국부천대 당시에 청대 유물을 싹 쓸어간 이후 국립고궁박물원에 소장하고 있다. [4] 명대 유물 및 문서들이 유교문화를 통해 조선에 전달되었으며 지금도 잘 보전되어 있다. [5] 원나라는 몽골인들이 중원을 장악해 세운 나라다. [6] 흔히 우리가 아는 쌀국수, 고수를 곁들여 먹는 식문화 등은 원래 남송의 식문화였다. [7] 견당사를 통해 유입된 문물들이 잘 보전되어 있다. [8] 문화대혁명 당시 수많은 문화재가 파괴되는 바람에 위에서 언급한 나라들이 과거 차지했던 영토 대부분이 현재 중국의 영토임에도 불구하고 그 문화를 느끼려면 본토인 중국이 아닌 타국에 가야 한다는 블랙 유머다. 위 글에서 언급된 국가들은 해당 시대의 전통을 잘 유지했거나 그때 서로 깊은 관계를 맺은 덕에 그 흔적이 상당히 남아있다. 가끔 문화대혁명 그 자체를 느껴보고 싶으면 북한 혹은 아프가니스탄으로 가라는 드립이 추가되기도 한다. # [9] 대한민국이 2020년 1년 동안 국정을 운영하는 예산으로 470조원 정도를 설정했는데, 갑자기 520조 원이 국고에서 증발해버렸다고 생각하면 피해가 어마어마할 것이다. [10] 1994년 중국의 GDP는 5643억 달러였으나 홍콩의 GDP는 1358억 달러로, 홍콩 GDP가 중국의 24%를 차지했다. 세계은행 통계 기준 1991~1992년에도 홍콩이 중국의 20%를 돌파한 바가 있으며, 1990, 1993, 1995~1997년에도 중국의 18~19%를 차지했다. [11] 1990~1994년(1993년 제외) 대만의 GDP는 중국의 40%를 넘겼고, 심지어 1990년(42%)를 제외하면 모두 중국의 45%를 넘겼다. 이 사이트에 나온 바에 따르면 1988~1999년까지는 1998년을 제외하면 대만의 GDP가 중국의 30%를 넘겼다. [12] 사실 1987~1997년에는 한국 GDP가 중국의 50%를 넘겼다. 화궈펑, 덩샤오핑을 넘어 장쩌민이 집권한 시절인데도 이랬을 정도면 문화대혁명의 후유증이 어떠했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인 셈이다. [13] 덤으로 중국의 1인당 GDP는 ( UN 통계 기준으로) 1992년까지도 북한보다도 낮았다. 다만 이는 북한이 지금처럼 경제적으로 처참히 몰락하기 직전이란 것은 감안해야 하지만, 이를 감안해도 문화대혁명이 얼마나 중국의 잠재력을 깎아먹었는지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14] 예를 들면 전족이 있다. 물론 전족은 북양정부, 국민정부, 공산당 모두가 폐지하려고 노력했기에 문화대혁명 이미 진즉에 사라졌다. [15] 이는 천보다 중앙문화혁명소조장의 승인을 받은 것이었다. 게다가 천보다는 공자 일가의 묘소를 파괴하는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홍위병에게 하달하기까지 했다. 그나마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렇게 파헤친 공자의 무덤 안에서는 정작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16]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청두의 무후사, 즉 청두 유비혜릉은 용케도 문혁에서 살아남아, 삼국지 관련 전근대 유적 중 대표적인 유적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17] 전답의 단위로, 6척 사방을 보(步), 100보(步)를 무(畝)라고 한다. [18] 지금 영락제의 동상이라고 알려진 것은 후에 금속으로 복원한 것이다. [19] 문화대혁명의 직접적인 계기와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20] 참고로 장제스의 상관이었던 자이기도 하다. 심지어 당시에 장제스는 아직 살아 있었다. [21] 길이만 50km가 넘어가는 초대형 성곽이었다. [22] 내성과 외성이 겹치는 부분은 2환로가 아니다. 그래서 2환로 선형은 남쪽 부분이 더 넓다. [23] 파괴하고 남은 흙은 1500년 동안 놀고 있던 흙이라서 작물이 잘 된답시고 비료로 만들어서 밭에다 뿌렸다. [24] 참고로 홍위병들은 이 문화재 파괴가 '우리 수도를 더 맑고 붉게 만들고 열일곱 번째 국경일을 품위 있게 맞이하기 위해 하는 일'이라고 굳게 믿었다고 한다. 여기서 '국경일'은 1949년 10월 1일에 있던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의미한다. [25]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인 조지 쇼의 무덤도 파묘되었다고 전해진다. [26] 모택동의 고향 사람으로 '북경 홍위병의 5대 우두머리(北京紅衛兵“五大領袖”)' 중 하나로 악명 높았다. 4인방 몰락 후 체포되었으며, 천벌을 받았음인지 자궁암으로 죽었다. [27]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고서 약 2700점, 회화 및 서예품 약 900점, 국가 1급 문화재 약 70점, 석비 약 1000점, 희귀서적 약 1000점이 소실되었다. [28] 본래는 ' 공자의 뒤를 잇는 제후'란 뜻의 연성공으로 불렸으나, 신해혁명으로 공화제가 되자 더 이상 귀족 작위란 형태를 가지기 곤란해졌다. 결국 1935년에 중화민국 정부에서 명칭을 대성지성선사봉사관으로 바꾸었다. 본문에 언급하는 쿵더청이 바로 마지막 연성공이자 초대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이다. [29] 남동생인 쿵더청보다 더 오래 살았다. 2021년에 105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30] 사실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자기들이 다 파괴해놓고는 이제와서 딴소리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중국 문화가 문화대혁명 이후로 문화의 깊이가 크게 얄팍해진만큼 공자를 다시 내세우는 이유도 관광산업, 즉 돈 때문이 아니냐는 의심도 충분히 나올 만하다. [31] 요즘에는 동북공정을 위해서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지를 방치하거나 훼손시키거나 조작을 가한다. 가령 고구려 박작산성을 뜬금없이 만리장성으로 둔갑시켰다. [32] 당장 한 사채업자가 빚 대신 압수한 부동산과 유물이 이순신 사당과 그 유물이라는 것을 알고 식겁해서 이순신 장군 후손들에게 신고한 사례도 있을 정도인데( #) 중국에서 이순신 장군급 위인으로 존경받는 악비의 묘를 파괴한 주동자라는 것이 밝혀지면 답이 없을 정도이다. [33] 일례로 1602년에 세워지고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사제서품을 받은 상하이의 쉬자후이 성당(徐家汇聖堂)은 홍위병들에 의해 성상과 성화, 파이프오르간이 파괴되었고 문화대혁명 동안 과일창고로 사용되었다. 이후 1982년에 복원되었다. 또한 조선에서 최초로 선교활동을 하다가 신유박해 때 처형된 주문모 야고보 신부의 생가가 파괴되었다. [34] 그나마 보존된 사찰들까지 대부분이 곡물 창고나 군대 본부로 쓰이게 되었다. [35] 실제로 베이징에 있는 제련소에서 녹여진 티베트 불상이 단 1곳에서만 600에 달했다고 한다. [36] 사실 티베트 억압은 진주 직후인 1951년부터 행해졌는데, 당시 증언에 의하면 중국공산당 간부들은 사람들에게서 명망이 높던 티베트 불교 승려들을 강제로 데리고 나와 채소밭에서 거름을 주는 천한 일을 공개적으로 시키거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고양이를 죽이게 하는 등의 행동을 시켰고 티베트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37] 이슬람교 교리에서 돼지는 매우 불결한 존재로 취급된다. [38] 굳이 말하면 명나라 때부터 위구르족은 일단 한족과 결혼하도록 주원장에 의해 법제화되어 있었다. [39] 마오쩌둥의 조카이다. 어릴 때 아버지가 위구르인한테 살해당했고, 마오쩌둥의 절대적인 신뢰를 얻어 동북의 태상황이라 불릴 정도로 막강한 권세를 자랑했다고 한다. 마오위안신이 연변에 왔던 사실은 중국 정부의 기록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고, 후술할 연변의 조선족 사진사가 찍은 사진을 통해 공개되었다. [40] 윤동주 시인의 모교다. [41] 당연히 '조선독립'이니 '대한독립'이니 하는 구절이 들어있는 문서를 홍위병들이 그냥 놔둘 리가 없었다. [42] 한국 항일무장투쟁사에서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과 함께 '3대 대첩'으로 꼽히는 대전자령 전투의 경우, 박창욱 등 연변 지역의 조선족 학자들 사이에서는 중국 측 항일투쟁 집단이 주도한 전투를 한국 독립군이 자신들의 행적인 것으로 부풀려 과장한 것이라는 주장까지 나오기도 한다. [43] 대표적으로 윤동주 시인을 중국조선족의 대표시인으로 소개하고 있는 현지 안내문 등이 있다. # [44] 낡은 문화, 사상, 풍속, 습관을 가리키는 말이다. [45] 이때 같이 반동의 자식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으며 시골에서 고생하고 있던 시진핑과 만나면서 절친이 되었다고 한다. [46] 디스커버리 채널 : Cultural Revolution under China에서 그 내용이 나온다. [47] 라오서 또한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에게 끌려다니며 구타와 모욕을 당하고 결국 수치심을 이기지 못해 호수에 투신자살하였다. [48] 한 예로 우리가 생각하는 고급 중식의 대부분은 레시피가 중국 본토가 아닌 대만, 홍콩/ 마카오에서 전수되고 있으며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3대 중국 황실의 궁중요리도 대만에 더 잘 보존되어 오고 있어서 원산대반점 등 타이베이의 특급호텔 레스토랑들에서 더 잘 전해지고 있다. 중국본토에서는 문화대혁명에서도 살아남은 취엔쥐더/펜이팡 등 양대 오리요리 전문점 정도가 살아남고 나머지는 대만이나 홍콩 혹은 화교들의 영향으로 겨우 재건되고 있다. [49] 말 그대로 서민들의 대다수가 농민과 노동자였고, 서민을 대상으로 한 조리법이므로 그다지 건드릴 이유가 없었다. 마파두부 같은 요리가 대표적이다. [50] 이는 시대가 변하면서 신세대의 입맛에 맞게 개량한 영향도 있다. [51] 물론 중국의 경제성장과 맞물려, 투기자본이 미술품을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급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52]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베이징 주경기장의 설계 과정에 미술 컨설턴트(Artistic Consultant)로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반정부 성향이 강해서, 정작 올림픽이 끝난 후 가택 연금을 당했다. [53] 사실 북한에서 이 용도로 쓰는 것들은 5할이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제국, 4할이 중국, 1할이 제1-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유럽 것과 비슷하다. [54] 원제 그대로 영역하자면 The Harbour가 맞겠지만, 중국 정부의 공식 번역은 저렇게 되어 있다. [55] 미국에 저항하고 북한을 원조한 것을 기념하는 곳이다. [56] 같은 이름의 혁명무용극을 경극으로 개작한 것이다. [57] 같은 이름의 혁명경극을 연주회용 작품으로 개작한 것이다. [58] 같은 이름의 혁명경극을 관현악 반주 대신에 피아노 반주로 공연이 가능하도록 발췌 편곡한 것이다. [59] 시안 싱하이의 칸타타를 피아노 협주곡으로 편곡한 것이다. [60] 이 노래가 쓰일 당시 중국은 일제의 위협에 시달리던 시기였고, 《 의용군 진행곡》은 항일투쟁을 위해 만들어졌다. 가사가 바뀔 당시 '일제가 침략한 때를 벌써 잊은 것이냐'라는 비판이 주를 이뤘다고 한다. [61] 사실 중국국민당은 이러한 시대곡들을 선정적이고 퇴폐적인 음악이라며 비판했다. [62] 중국에서 TV가 대중화된 시기는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전반기에 이르는 시기이다. [63] 중국 탓만은 아니다. 이미 1980년대부터 홍콩 영화계는 투자가 줄었고 무수한 아류작이 판치며 서서히 붕괴조짐이 보여왔다. 1980년대 말, 홍콩 영화를 앞장서서 소개하던 국내영화 월간지 '로드쇼'조차도 "홍콩 영화 전성기는 1960년대였다"고 많이 평한다. 1980년대에 "지금은 붕괴가 보이는 시초라고 판단될 지경"이라고 평가했을 정도였다. 천녀유혼, 동방불패, 영웅본색 같은 영화들이 대히트를 치자 영화 제작사들이 죄다 무협물과 범죄 영화들만 잔뜩 찍어내서 홍콩 주민들도 식상하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64] 당장 위의 유행어가 생기는 것도, 기성세대의 행패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65] 특히 감수성이 민감한 사춘기 때 문화대혁명을 겪었던 세대는 이제 겨우 60대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66] 게다가 한국 또한 중국 근현대사 및 명청시대사 분야에서는 나름대로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67] 원로배우 신구 6.25 전쟁이 일어나서 피난을 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고등학교를 3년 더 늦게 졸업했다. [68] 문화대혁명 이전에도 첸쉐썬등이 이공계 지원에 나서긴 했지만 군사, 항공우주 등 특정 분야에 집중되어 있었고 중국이 본격적으로 이공계 및 기초과학 육성, 지원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건 문화대혁명 후 한참 시간이 흐른 1990년대 이후부터다. 이때부터 육성된 이공계 인재들은 공청단의 상당수를 차지하나 아직 지도부까지 오를 만한 나이, 위치에 다다르지 못했고 현재의 고위층, 지도부는 문혁 전후의 이공계 전공자, 문혁 직후 숙청 빌미를 피해 이공계를 선택한 엘리트들이 주를 이룬다. [69] 그리고 리커창도 문과가 아닌 사회과학에 속하는 경제학 전공자다. [70] 1차 천안문 사태는 문화대혁명과 홍위병에 반발해서 일어난 시위라 중국 당국의 평가가 좋다. [71] 물론 공식적으로는 집회의 자유가 존재한다. [72] 그러나 세계 2위의 국가 경제 규모와 달리 중국의 1인당 GDP는 개혁개방 이후 45년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12,000달러 안팎으로 구미 각국은 물론 한국, 일본, 중동의 석유 부국들 보다도 훨씬 낮은 중진국 수준(세계 60위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중국의 인구는 미국의 4배 이지만 1인당 GDP는 미국의 6분의 1 정도여서 전체 국가 경제 규모로 놓고 봐도 미국의 3분의 2 수준에 그치고 있다) 중진국 진입 이후 경제 성장이 갈 수록 정체되면서 태국이나 말레이시아 처럼 중진국 함정에 빠지고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73] 당장에 중국공산당의 고위직은 금융계나 기업인 출신들이 정말 많다. [74] 이 시기 제작된 선전물과 포스터를 보면 노동자와 농민이 총을 메는 포스터들이 많은데 이것 때문이다. 포스터를 보면 강력한 위엄을 내뿜지만 실상은 오합지졸이다. [75] 1967년에 장칭의 특명을 받은 베이징의 홍위병들이 쓰촨성까지 쳐들어가서 펑더화이를 납치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저우언라이 총리는 청두군구를 이용하여 펑더화이를 구출하려 했으나, 청두군구의 군구사령과 정치부 주임이 모조리 홍위병에게 조리돌림을 당하고 있어서(...) 끝내 펑더화이 구출에 실패할 정도였다. [76] 사실 베트남은 천년 전 대월 시절부터 대중국 투쟁을 치렀던 역사적 경험이 있었으며, 미국-베트남 관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최근에는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있는 추세다. [77] 1956년부터 1969년까지 중국공산당 총서기였으며 이 시기는 마오쩌둥이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군권을 움켜지고 있았지만, 당 내부에서는 대약진운동 실패로 실질적 권한이 별로없는 명목상으로 당내 서열 1위인 당 주석직이라는 위치로 물러나 있었다. 그리하여 덩샤오핑은 지금의 중국공산당 1인자 위치인 총서기와는 조금 다른 당의 모든 실무 총 책임자로서 중국공산당 내 서열 2위의 자리를 맡게 되었다. 물론 지금의 총서기와는 완벽하게 같은 집무를 하는게 아니지만 당시 1인자였으나 뒤로 물러나 있던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겸 중국공산당 주석인 마오쩌둥에 당 활동과 권한을 모두 대리하여 당 내 일상적인 실무를 총 책임지는 막중한 자리였다. [78] 저우언라이의 아내 덩잉차오가 대장정에서 몸이 상해 불임이 되는 바람에 평생 친자녀를 얻지 못하고 아이들을 입양해야 했다. [79] 그래도 저우언라이 본인은 끝까지 마오쩌둥에게 붙어서 그에게 아첨함으로써 살아남긴 했다. 반대로 마오쩌둥에게 거역하지 않음으로써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피해를 줄였다는 평가도 있다. [80] 내몽골과 원나라를 빌미로 몽골의 역사를 찬탈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