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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22><colcolor=#fff> 주요 사건 | |
제1차 세계 대전의 끝 (1918~1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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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36349> 연표 | 사건 |
1936년 |
3월
라인란트 재무장 | 7월
스페인 내전 발발 | 12월
방공 협정
|
|
1937년 |
7월
중일전쟁 발발(
루거우차오 사건) ·
제2차 국공합작 | 8월
상하이 전투 | 12월
난징 전투(
난징 대학살) ·
파나이 호 사건
|
|
1938년 |
3월
오스트리아 병합 | 6월
1938년 황허 홍수 | 7월
하산 호 전투 | 9월
뮌헨 협정
|
|
1939년 |
4월
스페인 내전 종결 | 5월
할힌골 전투 | 8월
독소 불가침조약 | 9월
폴란드 침공(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
가짜 전쟁 | 11월
겨울전쟁
|
|
1940년 |
4월
노르웨이 침공 | 5월
프랑스 침공 ·
됭케르크 철수작전 | 7월
영국 본토 항공전 | 9월
삼국 동맹 조약 | 10월
그리스 침공
|
|
1941년 |
5월
비스마르크 추격전 | 6월
바르바로사 작전(
독소전쟁 발발) ·
계속전쟁 | 9월
레닌그라드 공방전 | 10월
모스크바 공방전 | 12월
진주만 공습(
태평양 전쟁 발발) ·
말레이 해전 ·
남방작전
|
|
1942년 |
4월
둘리틀 특공대 | 6월
청색 작전 ·
미드웨이 해전 | 7월
엘 알라메인 전투 | 8월
스탈린그라드 전투 ·
과달카날 전역 | 11월
과달카날 해전 ·
횃불 작전 ·
노르웨이 중수 사건
|
|
1943년 |
1월
카사블랑카 회담 | 2월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 4월
바르샤바 게토 봉기 | 7월
쿠르스크 전투 ·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 9월
이탈리아 왕국의 항복(
이탈리아 내전 발발) | 11월
카이로 회담 ·
테헤란 회담
|
|
1944년 |
4월
대륙타통작전 | 6월
바그라티온 작전 ·
노르망디 상륙 작전 ·
필리핀해 해전 ·
사이판 전투 | 7월
브레턴우즈 회의 ·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 8월
바르샤바 봉기 | 9월
마켓 가든 작전 | 10월
레이테 만 해전 | 12월
벌지 전투
|
|
1945년 |
2월
얄타 회담 ·
드레스덴 폭격 ·
이오지마 전투 | 3월
연합군의 일본 본토 공습(
도쿄 대공습) ·
연합군의 독일 본토 침공 | 4월
베를린 공방전 ·
오키나와 전투 | 5월
나치 독일의 항복 | 7월
포츠담 회담 |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만주 전략 공세 작전 ·
일본 제국의 항복(
옥음방송) | 9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
|
※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 |
스페인 내전 [[스페인어|{{{#fff La guerra civil española / guerra de España}}}]] Spanish Civil Wa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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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년 7월 17일 or 18일[1] - 1939년 4월 1일 | |||
장소 | |||
스페인 전역 | |||
원인 | |||
스페인 제2공화국 내의 좌우파 갈등 | |||
교전 국가 및 세력 | |||
[[스페인 제2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틀:깃발| ]][[틀:깃발| ]][[공화파(스페인)| ]] [[틀:깃발| ]][[틀:깃발| ]][[인민전선(스페인)| ]][2] [[틀:깃발| ]][[틀:깃발| ]][[국제여단| ]][3] [[틀:깃발| ]][[틀:깃발| ]][[전국 노동 연맹| ]][4] [[틀:깃발| ]][[틀:깃발| ]][[스페인 사회주의노동자당| ]][5] [[틀:깃발| ]][[틀:깃발| ]][[카탈루냐| ]][6] [[틀:깃발| ]][[틀:깃발| ]][[바스크| ]][7] 기타 지역주의[8]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국민파(스페인)| ]] [[틀:깃발| ]][[틀:깃발| ]][[스페인군| ]] [[틀:깃발| ]][[틀:깃발| ]][[스페인령 모로코| ]] 아프리카군[9] [[틀:깃발| ]][[틀:깃발| ]][[통합 팔랑헤| ]] [[틀:깃발| ]][[틀:깃발| ]][[팔랑헤| ]][A] [[틀:깃발| ]][[틀:깃발| ]][[CEDA(정당)| ]][A][12] [[틀:깃발| ]][[틀:깃발| ]][[알폰소 13세| ]][13][A] [[틀:깃발| ]][[틀:깃발| ]][[카를로스주의| ]][15][A] [[틀:깃발| ]][[틀:깃발| ]][[가톨릭| ]][A] |
]][[틀:깃발| ]][[스페인국| ]]||
지원 국가 및 세력 | |||
[[틀:깃발|[18] 코민테른 [[틀:깃발| ]][[틀:깃발| ]][[멕시코| ]][19] [[프랑스 제3공화국| |
]][[틀:깃발| ]][[소련| ]]
[[나치 독일| ]][[틀:국기| ]][[틀:국기| ]][21] [[이탈리아 왕국| ]][[틀:국기| ]][[틀:국기| ]][22] [[틀:깃발| ]][[틀:깃발| ]][[포르투갈 제2공화국| ]][23] [[바티칸| ]][[틀:국기| ]][[틀:국기| ]] 및 가톨릭[24][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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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스페인 제2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틀:깃발| ]][[틀:깃발| ]][[인민전선(스페인)| ]] 마누엘 아사냐 [[스페인 제2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산티아고 카사레스 이 키로가 [[스페인 제2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디에고 마르티네스 바리오 [[스페인 제2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호세 히랄 [[스페인 제2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바예로 [[스페인 제2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후안 네그린 이 로페스 [[스페인 제2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인달레시오 프리에토 [[스페인 제2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엔리케 리스테르 [[스페인 제2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훌리안 베스테이로 [[스페인 제2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유이스 콤파니스 [[스페인 제2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비센테 로호 유치 [[스페인 제2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호세 미아하 [[스페인 제2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후안 모데스토 [[스페인 제2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후안 에르난데스 사라비아 [[틀:깃발| ]][[틀:깃발|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틀:깃발| ]][[틀:깃발|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메흐메트 셰후[26] |
[[틀:깃발|
호세 산후르호†[27] [[틀:깃발| ]][[틀:깃발| ]][[에밀리오 몰라| ]]† [[틀:깃발| ]][[틀:깃발| ]][[프란시스코 프랑코|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곤살로 케이포 데 야노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후안 야구에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무함마드 메지안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마누엘 고데드 요피스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미겔 카바네야스 [[틀:깃발| ]][[틀:깃발| ]][[마누엘 팔 콘데| ]][[틀:깃발| ]][[틀:깃발| ]][[마누엘 팔 콘데| ]][28]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호세 미얀아스트라이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마리오 로아타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에토레 바스티코 [[틀:깃발| ]][[틀:깃발| ]][[후고 슈페를레| ]]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
전력 | |||
보병 450,000명 전투기 350대 화포 200문 |
보병 600,000명 전투기 600대 화포 290문 |
||
피해규모 | |||
175,000명 사상 민간인 11~13만 명 사망 |
110,000명 사상 민간인 50,000명 사망 |
||
결과 | |||
스페인 국민전선의 승리 프랑코 정권 수립 프랑코 정권의 좌익 대숙청 |
[clearfix]
1. 개요
스페인 내전의 전개[29] |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스페인 제2공화국에서 일어난 대규모 내전.
파시즘, 공산주의, 민주주의, 아나키즘, 반동주의, 군국주의, 반군국주의, 공화주의, 군주주의 등 당대 주류 이념들의 격전장이자 제2차 세계 대전의 예고편으로 평가된다.
2. 전쟁 이전
스페인 내전 몰아보기![30] |
스페인 왕정복고 시대인 1920년대의 정세는 리프 전쟁에서의 고전과 보르본 왕조의 무능, 경제 불황으로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는데 스페인 제1공화국부터 스페인 내전까지의 시기에 무려 40여 차례의 쿠데타와 60여 차례의 정치 위기가 있었다. 1923년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알폰소 13세는 리베라 정권을 승인했다.
하지만 리베라 정권은 스페인 독감과 대공황에 리베라의 갖가지 실책까지 겹치면서 붕괴되었다. 군부마저 등을 돌린 리베라는 총리직에서 사임했고 알폰소 13세는 분노한 국민들을 달래기 위해 총선 실시를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1931년에 실시된 총선에서 공화파가 압승을 거두었고 이에 알폰소 13세가 퇴위하여 프랑스로 망명하면서 스페인 제2공화국이 탄생했다. 다만 이 때의 총선은 당시 기준에서는 실질적인 거라면 몰라도 적어도 법적으로는 지방선거에 해당하는 것이었고 공식적으로 왕정이나 공화정과 같은 체제의 선택이나 헌법 제정 자체를 국민에게 의사를 묻는 선거는 아니었다.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스페인 제2공화국은 민주적 정당성 면에서 취약점을 드러냈고 스페인 제2공화국은 민주적 정당성을 제대로 국민의 의사를 묻기보다 우파가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 퇴진의 여파로 지리멸렬하던 틈을 타서 중도와 좌파 간의 정치적 합의를 통해 획득했다.[31] 마누엘 아사냐가 이끄는 공화주의 좌파 정권이 출범했고 지주들과 가톨릭 교회, 군부가 중심이 된 보수파 기득권층과 대립했다. 다만 이 때 좌파가 보는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20세기 후반 이후의 그것과는 다소 달랐는데 쉽게 말해 공화좌파를 포함해 좌파가 보는 민주주의는 다원주의나 다양성 존중이라기보다는 정교분리와 정도의 차이는 달라도 파시즘 배제[32], 농지분배 등 사회주의적 요소[33]가 들어간 자기들만의 개혁프로그램에 해당했다. 그랬기 때문에 제2공화국은 정부 수립 초기부터 공화국 수호법을 통해 왕정 시대보다 더 검열을 강화시켰다.
교회는 보수파의 중심이 되긴 했지만 당시 스페인 영토의 무려 3분의 1이 교회 소유였다는 낭설과는 다르게 토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교회는 '1837년 개혁'으로 인해 토지를 대거 매각했고 그 과정에서 귀족과 부르주아들이 그 토지들을 전부 사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1936년 기준으로 가톨릭 교회라는 조직 자체는 몰라도 개별 성직자는 부유하지 않았으며 그랬기에 성직자들은 양 진영에 소속되거나 중립을 지키는 등 가톨릭 교단 자체의 의향과는 거리가 먼 행동을 했다. 그리고 가톨릭 교단도 전체 교단과 바티칸을 포함해 해외 각국의 가톨릭 교도들의 입장이 또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1932년까지 2,400만 인구 중 0.97%의 지주가 농지의 42%, 2%가 65%를 소유했다. 1932년에 공화파에 의한 일부 농지개혁이 행해졌으나 단 90,000 헥타르, 그것도 비경작지만 분배되었을 뿐이었으며 보수 세력과 중도세력의 급격한 반발만 초래했다. 전통적으로 스페인 정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스페인 군부[34][35] 또 공화국 정권의 군부 개혁 노력에 반발해 극우화의 길을 걸었으며 1932년에는 호세 산후르호 장군을 필두로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했다.[36]
더군다나 가톨릭 교회와의 갈등까지 겹치면서 공화파는 위기를 맞았고 결정적으로 노선의 차이로 인해 1933년 총선에서 공화파, 급진파, 사회주의자들의 정치적 연대가 해체되자 중도(급진공화당)와 우파들은 좌파를 밀어내고 정권을 교체했다.[37][38] 급진당과 CEDA의 연합정권은 토지개혁을 중단하고 아사냐 정권의 각종 개혁정책들을 후퇴시켰지만 군대를 동원해 무리하게 노조운동을 탄압하면서 지지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아스투리아스 혁명)[39][40] 설상가상으로 정치 스캔들이 겹치면서 지지가 바닥으로 치달았다. 레룩스를 중심으로 한 급진공화당 및 CEDA의 연립정권이 부정부패로 타격을 받자 중도우파 성향이었던 대통령 니세토 알칼라사모라는 내심 레룩스와 CEDA가 마음에 들지 않기도 했고[41] 더이상 전망이 없는 중도우파-우파 연정을 내치고 반공산당, 반 CEDA 중도세력을 결집시키고자 거의 망해가던 인기에 비해 의석은 여전히 많았던 레룩스 내각을 대통령 권한으로 강제 붕괴시킨 다음 개인적인 친구였던 중도파 바야다레스를 총리로 내세우면서 '코르테스'(스페인의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42]
1933년 총선 패배를 타산지석으로 삼은 좌파는 1936년 총선에서 우파들이 그랬던 것처럼 대동단결하기로 결정했다. 마누엘 아사냐가 이끄는 공화주의 좌파 및 디에고 바리오가 이끄는 공화주의 중도파와 라르고 카바예로가 이끄는 과격한 사회주의 좌파가 인민전선(Frente Popular)을 결성했으며 이에 맞서 우파 역시 반혁명 국민전선(Frente Nacional Contrarrevolucionario)을 결성했다.
1936년 총선의 선거 연합은 다음과 같았다.
- 인민전선(Frente Popular: 좌파 연합)
- 반혁명 국민전선(Frente Nacional Contrarrevolucionario: 우파)
- 호세 마리아 힐로블레스가 이끈 가톨릭 보수주의 성향의 스페인 자치 우익 연합( CEDA)[48]
- 이하의 정당들은 일부가 CEDA와 협력했다.
- 민주중도당(PCD/PCNR)의 일부 협력 분파(CEDA-PCNR)
- 급진공화당(PRR)의 일부 협력 분파(CEDA-PRR)
- 진보공화당(PRP)의 일부 협력 분파(CEDA-PRP)
- 보수공화당(PRC)의 일부 협력 분파(CEDA-PRC)
- 자유민주공화당(CEDA-PRLD)
- 스페인 농업당(PAE)
- 비동맹(중도~중도우파 및 지역주의자)
- 중도주의 성향의 민주중도당(PCD)
- 바스크 지역주의 성향의 바스크 국민당(EAJ-PNV): 바스크 지역주의가 주요 당론인 지역주의 정당이었으나 굳이 따지면 보수주의 성향에 더 가까웠다.
- 카탈루냐 지역주의 성향의 카탈루냐 연맹(LR): 좌파 성향의 다른 카탈루냐 지역주의 정당들과는 다르게 보수우익 성향이었다.
- 알레한드로 레룩스가 이끈 보수자유주의 성향의 급진공화당(PRR)[49]
- 니세토 알칼라사모라가 이끈 보수자유주의 성향의 진보공화당(PRP)[50][51]
- 미겔 마우라[52] 가 이끈 보수자유주의 성향의 보수공화당(PRC)[53]
- 그 외
-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가 이끈 팔랑헤주의( 파시즘) 성향의 국민생디칼리슴 공세평의회 에스파냐 팔랑헤(Falange Española de las Juntas de Ofensiva Nacional-Sindicalista: FE de las JONS): 베니토 무솔리니의 영향을 받은 파시즘 정당이어서 CEDA와의 협력을 거부한 끝에 1936년 선거에서는 매우 실망스러운 결과를 받았다. 애초에 산업화도 안 돼있지만 전통 영농 사회 구조도 소규모 자영농 중심이었던 본거지 구 카스티야에서나(그것도 기성 보수 우익을 딱히 압도하지도 못한 채) 존재감을 발휘했고 안달루시아에선 지주 세력의 기성 보수, 나바라/바스크/카탈루냐에선 카를로스파에게 현저하게 밀리는 등 전국적인 세력 규모는 우익 내에서 최약에 가까웠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고 스페인 내전 발발 이후 CEDA의 몰락에 힘입어서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으나(사실 국민진영 점령지 주민들이 반쯤은 살기 위해 몰려든 덕이 크다.) CEDA, 왕당파, 카를로스파, 군부와 통합되어서 국민생디칼리슴 공세평의회 에스파냐 전통주의자 팔랑헤(Falange Española Tradicionalista y de las Juntas de Ofensiva Nacional-Sindicalista: FET y de las JONS, 약칭 '통합 팔랑헤'가 되었다. 통합 이후에는 국민생디칼리슴적, 혁명적 노선 대신 전통주의, 교권주의, 반동주의의 길을 걷게 되었다.
- 전국 노동 연맹(CNT) 등의 아나키스트: 스페인은 유럽, 아니 전세계 노동 좌익 운동사상 거의 유일하게 아나키즘 세력이 한때나마 마르크스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세력보다 더 강성했던 곳으로 꼽힌다. 19세기 중후반 이후부터 당시 이베리아반도에서 거의 유일하게 고도 산업화가 진행된 바르셀로나와 여전히 앙시앵 레짐의 라티푼디움 소작농 경제에 놓여있던 안달루시아를 양축으로 성장했던 스페인 아나키스트 운동은 보르본 왕정 말기 리베라 정권의 가열찬 탄압에도 불구하고 제2공화국 시절쯤 되면 선거에 참여하냐 마냐 하나만으로 스페인 정국 전체를 기울게 만들 수 있는 거대 집단이 되어 있었다. 처음 공화국이 들어선 1931년에 미적지근하게 공화파, 제도권 좌익 정당과 협력했던 아나키스트들은 곧 신생 공화국의 미적지근한 사회 개혁에 실망하며 다시 독자 행동에 들어갔다. 1933년 좌파의 총선 패배를 초래했고 이후 2년간의 우파 정권 기간동안 심지어 다른 온건 좌익 정파도 조지는 데 합류할 만큼 좌익 세력 전반의 시범타로서 집중적으로 두들겨맞았다. 1934년의 아스투리아스 봉기와 그 실패 이후, 독자 행동의 한계를 절감한 CNT 지도부는 선거에는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인민전선을 지지했고 1936년 총선 결과 세워진 신정부에서 아나키스트 출신 정부 장관 배출이란 기묘한 역사적 기록을 세웠다.
인민전선과 국민전선은 총선 직전까지 치열한 선거전을 펼쳤고 그 결과...
1936년 스페인 총선 실시일: 1936년 2월 16일 투표율: 72.95% |
|||
인민전선 | 비동맹 | 국민전선 | |
득표수 |
4,451,300 (47.03%) |
648,300 (6.49%) |
4,375,800 (46.48%) |
의석 | 285석 | 57석 | 131석 |
총 473석(100%) |
양측의 표차는 불과 10만 표도 채 되지 않았으나 인민전선이 소선거구제의 이점을 받아 경합 지역에서 대승을 거둬 과반이 넘는 285석을 차지하는 승리를 가져갔다. 그리고 이 박빙의 승부는 1933년에는 다른 좌파 정파들과 협조를 거부하며 단독행동에 나선 아나키스트 CNT가 우파 정권 2년 남짓한 기간동안 시끗하게 두들겨 맞고 안 되겠다 싶어서 좌파 대연정를 지지하면서 생긴 결과였다.[54] 우익과 치열하게 국정 장악을 두고 경쟁하는 좌익 중 막상 노동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과 지분을 가지고 있던게 다른 나라 같이 강력한 국가 통제를 주장하는 공산당이 아니라 아예 민족 국가란 개념 자체를 배격하는 아나키스트 노동조합이었다는 스페인 근대사의 특수성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발휘된 상황이었다. 그리고 스페인 공화국은 아나키스트들과 끝내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공조가 가능한 관계를 만들지 못한 채 스페인 좌익의 역설을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종국엔 사이좋게 둘 다 망하는 파국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10만 표도 안 되는 표차로 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한 좌파 정권이 등장하자 우파들은 선거 불복을 외쳤고[55][56] 공공연히 스페인에서 러시아처럼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외치면서 '(공산주의의 마수에서) 국가를 지키기 위한 군사행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카바예로의 사회주의노동당 역시 총선 패배 시 공공연하게 '인민전쟁을 통한 정권 탈환'을 해야 한다고 우파를 협박[57]할 정도였다. 스탠리 페인에 따르면 1936년 2월과 7월 사이 스페인에서 인민전선이 주도한 위헌 행위는 다음과 같다.[58]
- 거대한 파업의 물결, 파업 다수가 사유재산을 지배를 제하고 그 어떤 실질적인 목적도 없었으며 종종 폭력과 파괴 동반.
- 특히 남부지방에서의 불법적 재산 몰수, 간혹 소급 입법 적용 사례 불법 몰수와 농업개혁 가속화 사이에서 역사가 마누엘 튀농 드 라라는 5개월 동안 전체 농지의 5%의 임자가 바뀌었다고 계산했다. 불법적 재산 몰수와 농업개혁 가속화는 현대화에도 생산성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았고 경제적 효과 면에서 대체로 파괴적이었으며 자본이나 기술진보 없는 재분배에 가까웠다.
- 방화와 재산 파괴 물결, 특히 남부.
- 남부와 동부에서 교회와 교회재산 몰수
- 자세히 연구되지 않은 중대한 경제 침체, 심각한 주식시장 쇠락, 자본 이탈, 그리고 비용이 시장가치보다 높아짐에 따라 일부 남부지방에서의 경작 포기 발생. 그리하여 여러 남부 시장들은 자산가들이 도주하지 않고 남아있는데 대해 “잔류세” 부과를 시도했다.[59]
- 표현과 결사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제한을 동반한 광범위한 검열.[60]
- 칼보 소텔로 납치로 절정에 이른 수천 건의 자의적인 체포
- 인민전선 정당원들에 대한 사실상 불처벌, 이들은 거의 체포되지 않았다. 아나키스트들은 간혹 체포되었는데 이들이 인민전선 구성원들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 사법을 검열하고 숙청하기 위한 특별 재판소 설치를 통한 사법의 정치화 및 정치적 체포를 촉진하고 우익정당들을 불법화하기 위한 입법 및 정책.
- 3월의 팔랑헤당, 5월의 가톨릭 노조에서 시작하여 7월의 왕당파 에스파냐 혁신에 이르는 우파 조직 해산.
- 5월 쿠엔카와 그라나다 특별 선거에서의 야당 활동으로 절정에 달한 선거 과정에서의 협박 증가.
- 주로 중앙 정부가 임명한 이들이 지방 정부를 채우면서 생긴 독단적인 지방 행정. 도시 선거는 본래 3월 31일에 예정되었지만 무기한 연기.
- 치안 조직의 정치화와 전복.
- 지역마다 정도면에서 상이하지만 정치적 폭력의 성장. 훗날 사가들은 2월과 7월 사이 정치적 폭력에 따른 사망자 수를 낮게는 약 300, 높게는 444명으로 추산한다.
이렇듯 내전 이전에는 좌파가 제2공화국에 맞서 아스투리아스 반란을 일으킨 것은 물론이고 후술할 부정선거, 각종 적색 테러, 재산, 파괴, 좌파 정권에 부역하는 경찰 관료의 거물 정치인 살해 등 각종 위헌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에 내전과 백색 테러는 어느 정도는 좌파가 자초한 감이 있다.[61][62][63]
다만 스페인 내전이 성패여부와 무관하게 공화국 내부의 체제 변경을 목적으로 하는 단기적인 군부 쿠데타를 넘어[64] 공화국 자체의 존폐를 놓고 벌인 3년 간의 피비린내나는 내전이 된 것은 당시로서는 좌우파의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으며 이 점을 잘 알았던 좌파 정권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쿠데타를 일으킬 위험이 있는 우파 성향의 장군들을 스페인 본토에서 멀리 추방했는데 예를 들어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추방된 곳은 카나리아 제도였다. 그러나 프랑코파 군인들이 이미 영국을 통해 프랑코를 귀환시킬 비행기편을 구해 놓고 독일을 통해 병사들을 운송할 수송기와 함선들을 확보하였기 때문에 쿠데타 발발 직후 프랑코와 당시 스페인군에서 그나마 제대로 된 정예병들이었던 아프리카 군단 47,000명은 신속하게 스페인 본토로 건너올 수 있었다.
선거 후에 무력 쿠데타를 통한 정권 장악을 권고받은 CEDA의 힐로블레스가 이를 거부한 후[65] 군부는 팔랑헤당과 단독으로 쿠데타를 준비했으며 이미 인민전선 정부에는 PSOE의 프리에토와 공산당의 돌로레스 이바루리가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아사냐와 총리 키로가를 비록한 정부 인사들은 이 정보를 무시했다. 한편 1936년 7월 12일 밤 팔랑헤가 공화정부가 창설한 경찰조직인 돌격경찰대(Guardia de Asalto) 장교 호세 카스티요(José Castillo)를 암살하자 분노한 돌격경찰대원들은 보복으로 스페인 혁신의 안토니오 고이코에체아와 힐로블레스를 암살하려고 하였으나 두 사람 다 마드리드에 없었기 때문에 포기하고 대신 우파의 거두였던 호세 칼보 소텔로를 몇 시간 후인 7월 13일 새벽에 납치, 암살했다. 이 당시 암살범인 경찰 장교는 프리에토의 파벌이었고 살해를 저지른 후 바로 프리에토가 그 소식을 접했는데 프리에토는 소식을 접하고 '이건 전쟁이다!'고 절규했다. 하지만 막상 이 이후 프리에토는 정부의 신뢰를 회복하고 정치적 빌미를 최소화하기 위해 피의자에 대한 구속과 진상규명이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측 사람인 피의자들을 보호했다. 즉, 스페인 내전과 공화파 패망에 숨겨진 원죄를 지은 셈이다. 이 외에도 카바예로 파벌의 루이스 아라키스타인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살해가 내전의 촉매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고 이러한 내전의 결과는 '우리의 독재'나 '그들의 독재'둘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했다.
소텔로의 암살 이후 정부는 이를 규탄하였지만 정작 사건의 진상조사와 책임자 체포에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실제로 소텔로 암살을 실행했던 사람들 중 체포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으며 오히려 조사 과정에서 수많은 팔랑헤주의자와 소텔로 지지자들이 체포되었다. 당시 이 사건의 책임을 맡고 있던 고메스 카르바호(Ursicino Gómez Carbajo) 판사는 돌격경찰대의 암살 사건 무마에 협조하지 않는 독립적이고 정직한 판사라는 이유로 돌격경찰대원에게 린치를 당해 해당 사건에서 손을 떼게 되는 등의 일들이 벌어졌다. 소텔로의 암살과 이후 벌어진 일들로 인해 소텔로 암살 사건으로 인한 갈등은 점점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소텔로 암살 다음날인 14일에 소텔로의 공개 장례식이 열렸다. 이때 수천 명의 우파가 시가를 행진하며 정부의 사건처리를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정부가 우익 인사에 대한 공공연한 암살 분위기를 조장하고 사건의 진상 조사 및 책임자 처벌을 고의로 외면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가두 행진을 했는데[66] 시위대가 시내 중심부에 다다르자 경찰이 비무장 시위대를 향해 발포해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건이 일어나 스페인 사회의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져 갔다. 소텔로 암살 사건에 대해 오스트리아의 역사학자 브라이언 크로지어(Brian Crozier)는 사건의 중대함을 " 미국에서 케네디 상원의원이 FBI에 의해 납치, 살해당하는 것과 같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당시 스페인에서는 현실이었다"고 지적했다. 결국 소텔로의 암살로 인해 사회 혼란 증가와 우파 결집의 분위기가 무르익자 에밀리오 몰라 장군이 이끄는 군부는 2월 총선 이후부터 계획해 왔던 쿠데타를 7월 17일에 감행하였다. 이 당시 프랑코는 몰라와 함께 반란 가능성을 모의하면서도[67] 한 편으로는 6월 23일에 공화정부에 서신을 보내 군은 기본적으로 충성스럽지만(적어도 이 때 시점까지는 사실이었다.) 정부가 군부와 법질서를 좀 더 존중하는 정책을 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면서 칼보 소텔로 살해 전날인 7월 12일에는 별도로 몰라에게 반란을 일으킬 때가 오지 않았다고 했다가 칼보 소텔로 살해가 있고 그 직후 반란 참가 의사를 보였고 이에 17일 봉기가 결정되었다.
3. 내전의 발발
¡Obreros! ¡Campesinos! ¡Antifascistas! ¡Españoles patriotas!... Frente a la sublevación militar fascista ¡todos en pie, a defender la República, a defender las libertades populares y las conquistas democráticas del pueblo!...
A través de las notas del gobierno y del Frente Popular, el pueblo conoce la gravedad del momento actual. En Marruecos y en Canarias luchan los trabajadores, unidos a las fuerzas leales a la República, contra los militares y fascistas sublevados.
Al grito de ¡el fascismo no pasará, no pasarán los verdugos de octubre!... los obreros y campesinos de distintas provincias de España se incorporan a la lucha contra los enemigos de la República alzados en armas. Los comunistas, los socialistas y anarquistas, los republicanos demócratas, los soldados y las fuerzas fieles a la República han infligido las primeras derrotas a los facciosos, que arrastran por el fango de la traición el honor militar de que tantas veces han alardeado.
Todo el país vibra de indignación ante esos desalmados que quieren hundir la España democrática y popular en un infierno de terror y de muerte.
Pero ¡NO PASARÁN!
España entera se dispone al combate. En Madrid el pueblo está en la calle, apoyando al gobierno y estimulándole con su decisión y espíritu de lucha para que llegue hasta el fin en el aplastamiento de los militares y fascistas sublevados.
¡Jóvenes, preparaos para la pelea!
¡Mujeres, heroicas mujeres del pueblo! ¡Acordaos del heroísmo de las mujeres asturianas en 1934; luchad también vosotras al lado de los hombres para defender la vida y la libertad de vuestros hijos, que el fascismo amenaza!
¡Soldados, hijos del pueblo! ¡Manteneos fieles al gobierno de la República, luchad al lado de los trabajadores, al lado de las fuerzas del Frente Popular, junto a vuestros padres, vuestros hermanos y compañeros! ¡Luchad por la España del 16 de febrero, luchad por la República, ayudadlos a triunfar!
¡Trabajadores de todas las tendencias! El gobierno pone en nuestras manos las armas para que salvemos a España y al pueblo del horror y de la vergüenza que significaría el triunfo de los sangrientos verdugos de octubre.
¡Que nadie vacile! Todos dispuestos para la acción. Cada obrero, cada antifascista debe considerarse un soldado en armas.
¡Pueblos de Cataluña, Vasconia y Galicia! ¡Españoles todos! A defender la República democrática, a consolidar la victoria lograda por el pueblo el 16 de febrero.
El Partido Comunista os llama a la lucha. Os llama especialmente a vosotros, obreros, campesinos, intelectuales, a ocupar un puesto en el combate para aplastar definitivamente a los enemigos de la República y de las libertades populares. ¡Viva el Frente Popular! ¡Viva la unión de todos los antifascistas! ¡Viva la República del pueblo! ¡Los fascistas no pasarán!
¡No pasarán!
노동자! 농민! 안티 파시스트! 스페인의 애국자들이여! 파시스트의 군사 반란에 직면하여, 모두 스스로 일어서 공화국과 인민의 자유 그리고 민중이 이루어낸 민주적 위업을 수호해야 합니다! 정부와 인민전선의 성명을 통해 인민 여러분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있습니다.
모로코와 카나리아 제도에서는 노동자들이 아직 공화국에 충성하는 세력과 연합하여 파시스트 반군에 대항하는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파시즘은 지나가지 못한다! 10월의 교수 집행자는 통과하지 못한다!'는 기치 아래 스페인 모든 지역의 노동자와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공화국의 적에 대항하기 위한 투쟁에 합류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그리고 공화국의 민주주의자, 군인들 그리고 아직 공화국에 대한 충성이 남아있는 모든 세력들이 힘을 합쳐, 군이 오랜 시간 자랑스레 지켜온 고결한 전통을 더럽혀 버린 파시스트 적들에게 최초의 패배를 안겨 주었습니다. 전국토가 스페인을 공포의 심연과 죽음으로 처박아 버리려는 잔혹한 야만인들에게 분노하여 치를 떨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통과하지 못할 것입니다. 스페인은 지금 전쟁에 휩싸여 있습니다. 마드리드에서는 민중이 거리로 나와 정부를 지지하고 정부의 결정에 대한 격려를 보내며 파시스트의 반란과 반군을 쳐부수기 위한 투지에 불타고 있습니다.
청년들이여, 전투를 준비합시다! 여성들이여, 인민의 용맹한 여성들이여! 1934년 아스투리아스 여성들의 영웅심을 다시 불러내어 파시스트의 위협에 그늘진 당신의 아이의 삶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남성들과 함께 힘을 합쳐 투쟁합시다!
국민의 아들인 병사들이여! 진정한 공화국에 머물러 노동자들 인민전선의 군인들 그대의 부모와 형제자매 그리고 그대의 동지의 옆에 서서 함께 투쟁합시다! 2월 16일의 스페인을 위해, 공화국을 도와 승리하기 위해 투쟁합시다!
모든 정파의 노동자들이여! 정부가 우리에게 쥐여준 무기는 10월의 피비린내 나는 교수 집행자가 승리하여 도래하게 될 수치와 공포로부터 스페인과 민중을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누구도 주저해선 안됩니다! 모두 싸울 준비를 합시다. 모든 노동자들, 모든 안티파시스트 여러분은 이제부터 서로를 전우로 보아야 합니다.
카탈루냐, 바스크, 갈리시아의 인민들이여! 모든 스페인인들이여! 우리의 민주 공화국을 수호하고, 우리가 2월 16일에 이룩한 승리를 확고히 합시다.[68] 공산당은 당신의 힘이 필요합니다.
특히 노동자들, 농부들, 지식인 여러분이 공화국과 민중의 자유의 적들을 타도하여 최후의 승리를 이루어 낼 때까지 자리를 지키며 싸워주길 원합니다.
인민전선이여 영원하라! 안티 파시스트 연합이여 영원하라! 민중의 공화국이여 영원하라! 파시스트들은 지나가지 못한다!
그들은 통과하지 못하리라!(¡NO PASARÁN!)[69]
돌로레스 이바루리(Isidora Dolores Ibárruri Gómez)[70], 일명 라 파시오나리아(La Pasionaria). 1936년 7월 19일 라디오 방송에서.
A través de las notas del gobierno y del Frente Popular, el pueblo conoce la gravedad del momento actual. En Marruecos y en Canarias luchan los trabajadores, unidos a las fuerzas leales a la República, contra los militares y fascistas sublevados.
Al grito de ¡el fascismo no pasará, no pasarán los verdugos de octubre!... los obreros y campesinos de distintas provincias de España se incorporan a la lucha contra los enemigos de la República alzados en armas. Los comunistas, los socialistas y anarquistas, los republicanos demócratas, los soldados y las fuerzas fieles a la República han infligido las primeras derrotas a los facciosos, que arrastran por el fango de la traición el honor militar de que tantas veces han alardeado.
Todo el país vibra de indignación ante esos desalmados que quieren hundir la España democrática y popular en un infierno de terror y de muerte.
Pero ¡NO PASARÁN!
España entera se dispone al combate. En Madrid el pueblo está en la calle, apoyando al gobierno y estimulándole con su decisión y espíritu de lucha para que llegue hasta el fin en el aplastamiento de los militares y fascistas sublevados.
¡Jóvenes, preparaos para la pelea!
¡Mujeres, heroicas mujeres del pueblo! ¡Acordaos del heroísmo de las mujeres asturianas en 1934; luchad también vosotras al lado de los hombres para defender la vida y la libertad de vuestros hijos, que el fascismo amenaza!
¡Soldados, hijos del pueblo! ¡Manteneos fieles al gobierno de la República, luchad al lado de los trabajadores, al lado de las fuerzas del Frente Popular, junto a vuestros padres, vuestros hermanos y compañeros! ¡Luchad por la España del 16 de febrero, luchad por la República, ayudadlos a triunfar!
¡Trabajadores de todas las tendencias! El gobierno pone en nuestras manos las armas para que salvemos a España y al pueblo del horror y de la vergüenza que significaría el triunfo de los sangrientos verdugos de octubre.
¡Que nadie vacile! Todos dispuestos para la acción. Cada obrero, cada antifascista debe considerarse un soldado en armas.
¡Pueblos de Cataluña, Vasconia y Galicia! ¡Españoles todos! A defender la República democrática, a consolidar la victoria lograda por el pueblo el 16 de febrero.
El Partido Comunista os llama a la lucha. Os llama especialmente a vosotros, obreros, campesinos, intelectuales, a ocupar un puesto en el combate para aplastar definitivamente a los enemigos de la República y de las libertades populares. ¡Viva el Frente Popular! ¡Viva la unión de todos los antifascistas! ¡Viva la República del pueblo! ¡Los fascistas no pasarán!
¡No pasarán!
노동자! 농민! 안티 파시스트! 스페인의 애국자들이여! 파시스트의 군사 반란에 직면하여, 모두 스스로 일어서 공화국과 인민의 자유 그리고 민중이 이루어낸 민주적 위업을 수호해야 합니다! 정부와 인민전선의 성명을 통해 인민 여러분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있습니다.
모로코와 카나리아 제도에서는 노동자들이 아직 공화국에 충성하는 세력과 연합하여 파시스트 반군에 대항하는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파시즘은 지나가지 못한다! 10월의 교수 집행자는 통과하지 못한다!'는 기치 아래 스페인 모든 지역의 노동자와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공화국의 적에 대항하기 위한 투쟁에 합류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그리고 공화국의 민주주의자, 군인들 그리고 아직 공화국에 대한 충성이 남아있는 모든 세력들이 힘을 합쳐, 군이 오랜 시간 자랑스레 지켜온 고결한 전통을 더럽혀 버린 파시스트 적들에게 최초의 패배를 안겨 주었습니다. 전국토가 스페인을 공포의 심연과 죽음으로 처박아 버리려는 잔혹한 야만인들에게 분노하여 치를 떨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통과하지 못할 것입니다. 스페인은 지금 전쟁에 휩싸여 있습니다. 마드리드에서는 민중이 거리로 나와 정부를 지지하고 정부의 결정에 대한 격려를 보내며 파시스트의 반란과 반군을 쳐부수기 위한 투지에 불타고 있습니다.
청년들이여, 전투를 준비합시다! 여성들이여, 인민의 용맹한 여성들이여! 1934년 아스투리아스 여성들의 영웅심을 다시 불러내어 파시스트의 위협에 그늘진 당신의 아이의 삶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남성들과 함께 힘을 합쳐 투쟁합시다!
국민의 아들인 병사들이여! 진정한 공화국에 머물러 노동자들 인민전선의 군인들 그대의 부모와 형제자매 그리고 그대의 동지의 옆에 서서 함께 투쟁합시다! 2월 16일의 스페인을 위해, 공화국을 도와 승리하기 위해 투쟁합시다!
모든 정파의 노동자들이여! 정부가 우리에게 쥐여준 무기는 10월의 피비린내 나는 교수 집행자가 승리하여 도래하게 될 수치와 공포로부터 스페인과 민중을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누구도 주저해선 안됩니다! 모두 싸울 준비를 합시다. 모든 노동자들, 모든 안티파시스트 여러분은 이제부터 서로를 전우로 보아야 합니다.
카탈루냐, 바스크, 갈리시아의 인민들이여! 모든 스페인인들이여! 우리의 민주 공화국을 수호하고, 우리가 2월 16일에 이룩한 승리를 확고히 합시다.[68] 공산당은 당신의 힘이 필요합니다.
특히 노동자들, 농부들, 지식인 여러분이 공화국과 민중의 자유의 적들을 타도하여 최후의 승리를 이루어 낼 때까지 자리를 지키며 싸워주길 원합니다.
인민전선이여 영원하라! 안티 파시스트 연합이여 영원하라! 민중의 공화국이여 영원하라! 파시스트들은 지나가지 못한다!
그들은 통과하지 못하리라!(¡NO PASARÁN!)[69]
돌로레스 이바루리(Isidora Dolores Ibárruri Gómez)[70], 일명 라 파시오나리아(La Pasionaria). 1936년 7월 19일 라디오 방송에서.
1936년 7월 18일 국민파 군대는 몰라 장군의 지시에 따라 스페인령 모로코 및 스페인 전역에서 쿠테타를 일으켰다. 이들 국민파를 통칭해서 팔랑헤당 또는 내셔널리스트(Nacionalista) 혹은 반란파(Bando sublevado)세력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자유주의가 연합한 공화정부와 마찬가지로 이들도 단일 정파는 아니었고 왕당파, 파시스트, 카를로스파 등 여러 세력이 연합해 있었다. 물론 국민파 내 대표적인 정당은 팔랑헤당이었다.
반란 첫 단계는 수도 마드리드나 당시 스페인 최대도시였던 바르셀로나 장악에 완전히 실패하는 등 성공적이지 않았으나 이걸 막을 공화군도 반란에 참여한 것을 속인 국민파 지휘관에 의해 도시 밖으로 물러난 후 도시를 빼앗기는 등 마찬가지로 어수룩하게 행동했다. 여기에는 한국과 다른 당시 스페인 군사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한국처럼 특정 경계선에 병력이 모여 있는 게 아니고 전국에 흩뿌려져서 거의 모든 도시와 마을에 수비대 병영이 있고 수비대 병력이 있었다. 당시 스페인에게는 딱히 대치하는 적성국이 없었기 때문이고 현대 한국사에서 굳이 비교할 상대를 찾으라면 일제강점기에 동네마다 일본 제국 육군의 헌병 주재소가 있고 헌병이 주둔했던 모습이 그나마 가장 비슷하다. 때문에 주둔군 지휘관의 성향 및 병사와 주민들의 대응 방향에 따라 각 지역에서의 초기 성패가 갈린 것이다.[71]
스페인군은 1898년에 치른 미국-스페인 전쟁 이후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도 중립국으로 남았다. 예외적으로 실전 경험을 보유한 부대는 에밀리오 몰라, 프랑코 등이 배속되었던 아프리카 군단뿐인데, 이 부대는 스페인령 모로코와 스페인령 사하라 식민지의 치안 유지를 위해 편성한 부대로 현지인 반란 진압[72] 때문에 당시 스페인군에서 유일하게 지속적인 실전 경험이 있던 집단이다. 그래서 국민파의 초기 진공과 최종적인 승리에 큰 기여를 했다.
하여간 양측의 허튼 짓으로 속전속결로 스페인 전국의 장악을 계획한 반란의 애당초 목표는 거의 실패에 가깝게 진행되었지만 공화정부 역시 단기간 내 반란군 세력을 진압할 수 있던 기회를 놓치는 바람에 적어도 본토의 35%, 당시 스페인 인구 2500만 명 중 1100만 명 정도가 국민파의 손아귀에 떨어졌고 내전은 이제 서로 장악한 지역을 기반으로 한 장기전으로 흘러간다. 하지만 그 당시의 지도를 보면 혼란의 극치라고 할 정도로 국민파 지배지역과 공화파 지배지역이 섞여 있는 형국이었다.
여기서 이후에 벌어질 결과를 생각해 볼 때 공화파의 패배는 이 쿠데타 과정에서 이미 상당히 예정되어 있었는데 사라고사, 세비야, 바다호스 등 내전 초기 국민파의 핵심 전략적 거점이었던 상당수 도시들에는 쿠데타 세력과 결사항전을 벌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아나키스트 및 사회주의 계열 전투 노조원들 수만 명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공화파 수상이었던 카사레스 키로가가 쿠데타 음모를 쿠데타 발발 이후 4일째까지 부인하고 또한 이에 대비하여 노조들에게 무기를 분배하라는 조언들을 듣지 않았고 결국 국민군에게 (무기만 있었으면 바르셀로나, 마드리드에서 한 것처럼 소수인 쿠데타군을 밟아버릴 수 있었던) 좌익 전투 노조원 수만 명의 목숨과 대도시 여럿만 내 주고 말았다. 이는 스페인 내전에서 좌우파가 모두 참고한 러시아 혁명에 근거한 것이다.[73]
특히 전쟁 발발 전까지만 하더라도 '붉은 세비야'라 불릴 만큼 좌파의 영향력이 강했으며 전국적으로도 제3의 도시였던 세비야를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국민파의 케이포 데 야노(Queipo de Llano)에게 상실한 것이 뼈아픈 실책이었다. 비단 세비야 외에도 안달루시아를 포함한 스페인 남부는 가난한 소작농들이 인구의 대부분이었고 좌경화가 강한 지방에다 경제적 환경도 막장이었기 때문에[74] 총선 승리를 계기로 PSOE와 아나키스트 같은 좌익 세력의 주도 하에 토지 점유 및 대대적인 몰수가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갈등[75]도 최고조에 달하고 있던 지방이었다.[76][77][78][79] 해군은 여전히 공화파가 잡고 있으며 이 당시 항공 기술은 대규모의 병력 수송에 부적합했으니 이 세비야의 쿠데타만 잘 막았으면 스페인 내전의 남부 전선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며 안달루시아에서 깨적깨적 진군하는 국민군을 막느라 똑같이 낭비했던 전력을 파시스트 세력의 중심이었던 북부 전선에 투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세비야를 먹지 못하면 세비야에서 차타고 한 시간 거리 정도밖에 안 되는 당대 스페인 최대의 군항이었던 카디스를 먹을 수 없고[80] 카디스가 없었다면 쿠데타 세력은 무슨 마법을 부려도 국민파의 핵심이었던 모로코 출신 아프리카 군단을 꾸역꾸역 스페인 본토로 실어나르지 못해 야전에서 공화파에 대해 우위를 점할 능력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화정부가 세비야를 뺏김과 동시에 카디스를 빼앗겨 버리는 바람에 군항에 남아있던 해군마저도 국민파에 강제 편입되어 버린다. 결국 공화국 정부의 귀중한 해군들도 날아가게 되어 버린다. 안 그래도 해군이 부족한 마당에 결국 육지에선 국민파에게 아프리카 군단의 상륙교두보를 뺏기고 공중에선 독일, 이탈리아 항공기가 판치는 바람에 공화파 해군은 남은 전력으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상황이 공화정부가 세비야, 카디스 일대를 장악한 채 흘러갔으면 국민파는 뭔 짓을 해도 1939년 여름 이전에 전쟁을 끝내지 못했을 것이며 이때까지 내전이 이어졌으면 우리가 잘 아는 나머지 유럽사의 흐름 때문에 더이상 내전이 아니게 되었을 것이고 스페인이 프랑코 통치 아래 40년간 고생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군대의 질과 외부의 지원, 장비, 내적 통합 면에서 국민파에 비해 현저한 열세에 있었던 공화정부는 이렇게 초반의 결정적인 타이밍을 놓치자 전쟁 내내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다.
또 영국과 프랑스의 초반 비협조적인 태도도 내전 발발에 영향을 끼쳤다. 영국의 경우 심지어 카나리아 제도의 프랑코에게 비밀리에 항공기를 제공했으며[81] 프랑스의 레옹 블룸 내각 역시 중립조약을 근거로 소극적 태도를 취했고 스페인령 모로코에 주둔한 3만 5천에 달하는 스페인 아프리카 군단이 별 견제 없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본토에 상륙할 수 있었던 것은 나치 독일의 해협 견제 덕이었다.[82]
물론 공화파 측도 당하기만 하지는 않아서 이들 폭격기들을 격추시킬 수 있는 소련제 단엽기 I-16을 400대 넘게 주문했지만 첫 실전 투입은 1936년 11월에야 이루어졌기에 초기에는 제공권 장악에 어려움을 겪었다. 심지어 영국령 지브롤터는 공화파 해군에 연료를 판매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독일 수송기가 스페인령 모로코로 식품과 물자, 연료를 수송하도록 승인했다. 당시 영국은 파시즘보다는 공산주의의 팽창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페인 내전은 그 시작을 군부가 주도했던 것은 맞지만 그것이 단순 쿠데타 차원을 넘어서 내전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애초에 제2공화국 자체를 비토하는 감정이 우파 내부에서 팽배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내전 이전 총선 당시 우파들은 선거에서 대부분 CEDA에 표를 던졌는데 이 CEDA에서는 선거 캠페인 과정에서 '제2공화국을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폐지하자'는 주장을 했다.[83] 우파 중 가장 공화국에 온정적이었던 파벌은 공화 우파 파벌인데[84] 물론 이들 중에는 공화국에 대한 충성을 유지한 케이스도 있었지만 제2공화국에서 보여준 혼란과 정치적 테러에 염증을 느꼈고 결정적으로 공화국 경찰의 호세 칼보 소텔로 살해 사건을 계기로 반란을 지지하게 된 사람도 많았다. 당시 참여를 두고 협상 중이었던 카를로스파[85]도 그랬고 바지사장이지만 프랑코 이전 국민진영의 수장 역할을 한 미겔 카바네야스와 프랑코 본인이 이런 사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프랑코는 쿠데타를 본격적으로 설계한 몰라 장군과 지속적으로 계획에 관해 의견을 주고 받았지만 6월 하반기에 이르기까지 본인은 쿠데타 참여를 크게 꺼렸다.[86] 심지어 6월 하반기에 쿠데타에 참여하겠다고 했음에도 쿠데타의 가능성에 회의적이어서 발을 뺄 태세를 보였고[87] 몰라는 이에 경악해 프랑코 대신 산후르호에게 모로코 주둔군을 맡기는 방향으로 계획을 수정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호세 칼보 소텔로 살해 사건이 터진 다음날에는 협상에 미적대던 카를로스파도 그렇고 프랑코도 그렇고 다들 본격적으로 적극 가담하기로 입장을 선회하게 되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반란을 일으키는 것보다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4. 내전의 전개
반란 이후 단 며칠 만에 국민파가 갈리시아, 카스티야이레온, 라 리오하, 나바라 등 북부 지역과 카나리아 제도와 발레아레스 제도, 스페인령 모로코를 장악한 가운데 스페인령 모로코의 주둔군이자 스페인군의 최정예 병력이던 프랑코 휘하의 아프리카 군단이 독일과 이탈리아의 수송 지원을 얻어 본토에 상륙하면서 급속 진격하여 엑스트레마두라와 안달루시아를 장악하자 국민파가 통제하는 영토가 하나로 이어지게 되었다. 반면 공화파 군대는 혼란에 빠져서 한때 수도인 마드리드의 일부 지역까지 국민파에게 내 주었지만 소련에서 들여온 T-26, BT 전차, I-15, I-16 등의 무기와 해외에서 몰려온 국제여단의 분투로 간신히 국민파의 진격을 막았다.이로 인해 내전은 고착화 되어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국민파의 프랑코가 점차 내전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코는 평소 상당히 굼뜨게 움직였다.[88]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파의 공세가 성공하였다. 그 이유는 공화파의 자폭이었다. 점점 공산당이 주도권을 잡게 되면서 공화파는 선전의 목적으로 공세를 추진하기 시작했고 지면 공화주의자, 아나키스트, 비스탈린주의자 장병들을 트로츠키주의자로 몰아 비난하고 숙청했으며 덕분에 알아서 병력과 장비를 까먹게 되었다.
4.1. 공화파의 상황
앞서 언급했듯이 공화파는 사기는 높았으나[89] 단결이 되지 않았다. 러시아 내전 당시 블라디미르 레닌이나 국공내전 당시 마오쩌둥에 비견할 만한 냉혹하고 카리스마적이면서 좌익 세력의 구심점이 될 만한 정치적 역량을 갖춘 지도자가 끝까지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았다는 소리다. 문제는 민주주의 정부가 이런 민주주의와는 정면으로 대치되는 지도자상이 필요했다는 점이었다.우선 스페인 북부에 위치한 스페인 제1의 공업지대인 바스크 지역은 일단 공화국 정부 편에 서서 국민파와 싸우기는 했으나 공화국 정부와도 별로 사이가 좋지는 않았는데[90][91] 내전 발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국민파한테 포위당해 고립당하자 남쪽의 공화국 정부의 지원 없이 국민파와 전쟁을 치르다가 그대로 박살났다. 그리고 이렇게 국민파가 꿀꺽한 바스크의 산업시설은 국민파가 전쟁 수행에 요긴하게 써먹으면서 국민파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심지어 바르셀로나에서는 국민군과 싸우는 와중에 아나키스트들과 공화주의자, 공산주의자의 혁명 여부에 대한 견해 충돌로[92] 같은 편끼리 내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 내전에서 결국 공산주의자들이 승리했는데[93] 이 사건은 공화군 내 결속력이 얼마나 약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바르셀로나 내전에 대해서는 조지 오웰의 < 카탈로니아 찬가>ㅡ영화 < 랜드 앤 프리덤> 등을 참고하면 좋다. 또 국민파 소속의 에밀리오 몰라 장군의 '제5열' 드립 이후[94] 전쟁이 진행될수록 공화국 내 분파들 간에 '우리들 가운데 제5열이 있는 것 같아'란 의심이 갈수록 강해진 데다 제5열에 대한 두려움이 공화국 내의 소수파들을 찍어누르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면서 공화군의 결속력은 더욱 막장의 바닥까지 떨어져 갔다. 위에서 서술한 바르셀로나 내전 같은 경우에도 양측이 서로 내세운 명분 중 하나가 '저놈들이 바로 제5열이다!!' 였다.[95]
또 군부의 지도력이 부재했으며 결정적으로 국민군보다 전쟁이라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군대를 지휘한 덕분에 가지고 있던 병력과 물자와 장비를 앞서 언급한 온갖 뻘짓을 하면서 말아먹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였다. 내전 발발 당시 정규군 영관급 이상 고위 장교 60% 정도[96]가 쿠데타에 가담[97][98][99]했고 지금까지 스페인의 헌병군 노릇을 하는 순찰 경찰대(Guardia Civil)[100] 70% 이상이 반군 측으로 넘어갔다. 아무리 전쟁 발발 이전 스페인군이 비교적 약군이었다 한들 당장 군사경험자와 무경험자의 차이가 이리 확실하게 나니 공화국 측은 처음부터 심각한 군재 부족에 시달렸고, 의미 있는 시도는 여러 번 했지만 끝까지 본질적인 군사적 인프라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프랑코 한 사람 밑에서 굳게 단결한 국민파에게 패배를 거듭하게 된다. 공화정부는 당시 국제 관계의 역학 자체가 아무리 공화파가 동정을 많이 사도 소위 말하는 '외교적 승리'라는 게 불가능하다는 게 뻔히 보이는 와중에도 대외적인 이미지를 위한 삽질성 과시용 공세를 한 두 번도 아니고 1937년 중반부터 브루네테, 테루엘, 에브로에서 세 번이나 벌인 끝에 독일과 이탈리아제 무기로 중무장한 국민파가 쉽게 야전에서 공화군을 격파할 수 있도록 소중한 병력과 물자를 갖다 바쳤다. 공화파가 선전하거나 이겼던 쿠데타 당시 바르셀로나 사수, 마드리드 방어전, 하라마 고속도로 회전, 과달라하라 전투 같은 경우는 거의 대부분 내전 초기 공화국의 실제 군사력의 다수를 차지했으며, 군사적으로 공화국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았던 전투 노조 민병대원들이 자신들에게 익숙한 도시, 마을에서 벌인 수비전이거나, 국민파의 의표나 혹은 이탈리아군과의 연계 과정에서 생긴 실수를 어찌 잘 노려 거둔[101] 경우였지, 일반적인 대규모 야전에서 공화파는 끝까지 열세를 극복하지 못했다.
차라리 스페인 특유의 험한 산지를 이용해서 게릴라 농성전으로 갔다면 더 오래 버틸 수 있었고[102], 실제로 1938년 중순 발렌시아의 험난한 산지에 XYZ 라인이라는 방어선을 설치해 국민파의 공세를 돈좌시킨 적도 있었던 만큼 그 실효성은 더 높았다.[103] 게다가 공화국의 수뇌부가 이렇게 바보같은 공세를 남발하기 시작한 시점 자체가 바르셀로나 5월 사태 이후로 원래 공화국을 구성하고 있었던 정파간 다양함이 사라지고 대중적 기반은 적었던 주제에 소련의 지원을 등에 업고 설친 공산당과 이와 손을 잡은 후안 네그린 총리가 스페인의 인민전선 내 다양성을 강제로 제거하고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통일전선을 세우려고 한 후였다.[104] 이전과 달리 권력에 대한 견제가 전혀 없이 공산당 쪽 지도부만 자기들끼리 짜고 전쟁을 해먹으려고 하니 이런 삽질을 태연히 저지른 것. 민주주의라는 명분을 내 건 공화국이 막상 권위주의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하니 제대로 망조가 났다는 점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하겠다.[105] 이는 본질적으로 공화좌파를 포함해 스페인 좌파가 바라보는 민주주의라는 개념부터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라기보다는 당시 스페인 현실 하에서 정교분리, 정도를 막론하고 사회주의 실현 등을 위시한 자기네들만의 개혁 프로그램에 해당했기 때문이다.[106]
이런 스페인 내전의 공화진영 내 파벌 갈등은 막장 그 자체였는데 상술했듯 바르셀로나에서 아나키스트와 정부 측 간의 내전이 발생한 것은 물론이고, 바르셀로나가 함락된 이후 패전 직전 마드리드에서 반소련적인 카사도 대령과 미아하 장군[107] 같은 비공산당 출신 군인들과 정치인들이 역시 들고 일어나 프랑스로 피난 간 중앙정부에 반란을 일으킨 있었다.[108] 프랑코는 이런 호재가 터지자 카사도 대령과 항복 조건을 두고 대화를 하는 척 했다가 결국 그냥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게 되었다. 즉, 공화진영은 남베트남마냥 망하기 직전까지도 자기들끼리 싸웠다는 거다. 애초에 인민전선 정권 자체가 서로 이념적 지향성이나, 기반이나 달랐던 정파들이 서로 내부에서 권력 분배 관련 합의를 하기도 전에 쿠데타가 터지고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CNT, 지역 민족주의자들 같이 애초에 민족국가, 기본적인 헌정 질서 인정 여부 자체가 사회노동당, 그리고 내전 중엔 공산당이 장악한 공화정부와 달리 하던 정파들이 바르셀로나, 바스크 같은 실제 '국토' 같은 독자적 물리력까지 얻으면서 이런 분열은 더욱 더 심해졌다. 전쟁 와중 급부상한 공산당은 이런 분열상을 타계하고 안정적인 전시 정부 체제를 꾸리려고 하였으나 당장 따라오는 소련의 지원이 막강하긴 했어도 애초에 전쟁 이전 스페인 내부에서 독자적 기반이 너무도 약했고, 오히려 갈수록 스탈린주의적 패악질로 인해 정파 간 불신은 더 조장하면서 결국 공화파의 내부 분열은 시작부터 끝까지 치명적인 패인 중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공화파를 지원했던 소련의 태도도 문제였다. 앤터니 비버의 저서에 따르면 후술할 추축국의 태도와는 달리 소련은 물론 공화군이 이기면 좋겠지만 애초에 개입할 당시만 해도 당장 서방 세계를 자극하기도 싫고 그렇다고 스페인 공화정부 편을 안 들어주면 세계적으로 좌파들에 대한 지도력에 문제가 생기니 지원해 주되 최소한만 지원하자는 것이 기본 방침이었다. 그리고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지원과 달리 그 지원도 결국에는 스페인 공화정부가 가진 금괴를 대가로 한 것이었다. 거기다 환율도 소련에 유리하게 정하여 환차익을 상당히 챙기기도 했다.[109][110] 거기에 더해 1937년부터는 중일전쟁도 터졌기 때문에 주요 관심사가 그쪽으로 가버렸고 그 지원 역시 스페인이 애걸복걸해서 겨우겨우 유지하는 정도에 그치게 되었다.
상황이 이랬다 보니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군은 장비와 물자의 부족으로 큰 문제를 겪었다. 무기를 구하기 힘들어 여기저기서 구한 규격이 제각각인 소총과 기관총, 기관단총, 권총들을 쓰다 보니 총에 맞는 탄환을 찾는 것도 힘들었고[111]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안 맞는 탄환을 장전했다가 총기가 고장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거기에 소련이 제공한 무기들은 전쟁 초반만 해도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당시 노획한 다국적의 구식 무기들이나 러시아 제국 시절에 생산/운용하던 구식 무기들이 다수였는지라 안 그래도 복잡한 보급체계를 몇 배는 더 꼬아 놓았다. 게다가 소련은 이런 재고 무기를 전부 소진하고 나서야 DP28 경기관총이나 PPD 기관단총 등 자국산 최신 무기를 원조하지만 이마저도 전부 무상지원이 아닌 유상지원이었던 데다가 국민파를 지원하던 파시스트 국가들의 견제에 최신 무기들이 제대로 하역되지도 못하면서 무기 부족 현상은 거의 항상 공화파를 괴롭혔다. 잡다한 구식 무기를 최신 무기로 대체하고 보급을 일원화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112]
무기뿐 아니라 식량을 비롯한 다른 물자에서도 공화군의 보급 문제는 아주 심각했다. 국민파 편에 선 이탈리아 왕국군이 제해권을 장악하면서 공화파 항구를 해상봉쇄했고, 귀중한 소련산 군수 물자들이 발렌시아와 바르셀로나 항에 들어오지도 못한 상태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잠수함과 군함들 사이에 껴서 지중해를 빙글빙글 돌기만 하는 일도 잦았다. 게다가 제1차 세계 대전 때 타 유럽국가들이 군 보급용으로 잘 썼던 철도교통은 노조들이 초반에 장악하는데 성공하고도 분기점들이 다 박살난 상태라서 제대로 써먹지도 못했다.
해군은 내전 초기부터 거의 전부가 공화파 정부를 지지했다. 해군에서도 육군처럼 장교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수병들이 장교를 사살하고 반란을 진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선에 사병만 있고 장교가 없다면 전투는커녕 항해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게 당연할뿐더러 무엇보다 지휘체계가 전무하므로 이 시점에서 스페인 해군은 그냥 무늬만 해군이 되었다. 결국 독일과 이탈리아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은 국민파가 공화국 해군을 제압하여 도리어 공화정부를 봉쇄하게 되었다. 하지만 해군력의 부족으로 완전 봉쇄까지는 하지 못해서 소련이 보낸 무기들을 실은 선박들이 간간이 지중해를 통해 들어올 수 있었다. 이 해상 수송작전을 지휘한 이가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제독. 러시아 항공모함에 붙은 그 이름이 맞다.
1936년 스페인 해군은 드레드노트급 전함인 에스파냐급 전함 2척, 카나리아스급 중순양함 2척을 비롯하여 경순양함 6척, 구축함 19척, 수상기모함 1척, 잠수함 14척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국민파 측에 합류한 함선은 전함 1척,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1척에 불과했다.[113] 해군 항공대도 거의 공화파로 남았다. 국민파에 합류한 함선들은 개전 직후 페롤 해군 공창이 국민진영에게 점령되면서 도크에 있던 중순양함 카나리아스와 발레아레스 같이 통째로 국민진영에 속하게 된 케이스이다. 에스파냐급 전함 2번함 에스파냐[114]는 국민파, 3번함 하이메 1세는 공화파의 기함이 되어 서로 맞붙게 되었다.[115] 그러나 상술했다시피 장교진의 공백, 독일과 이탈리아의 빠른 개입과 제공권 장악으로 전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일부 함선은 물자를 싣고 오는 선박 호송을 위해, 일부는 바스크를 비롯한 북부지역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차출되어야 했다.
공군도 거의 공화파 측에 남았다. 주로 뉴포르 NiD 52나 브레게 19 같은 항공기가 주력이었고 전세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제대로 된 공중전은 독일, 이탈리아의 He 51, Ar 68, CR.32와 소련제 I-15, I-16, 투폴레프 SB 폭격기가 맞붙는 1936년 11월 경부터 시작되었다. 여하간 공화파는 모을 수 있는 항공기는 다 모으려 했는데 소련제 항공기 외에도 미국으로부터 그루먼 FF,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S-31, 프랑스로부터 D.371, D.500 등을 구입했다.
4.2. 국민파의 상황
공화파의 혼란한 상황만 본다면 상대적으로 일치단결된 국민군을 운 좋게 지휘한 행운아 프랑코란 이미지가 떠오를 수 있지만 국민파 역시 내부 단결이 그리 잘 되었던 것만은 아니다. 되려 국민파를 형성하는 왕당파, 카를로스파, 자본가, 팔랑헤, 공화주의[116] 우파는 모두가 이념적으로 상반되는 위치에 있어서 공화파보다 일찍 내분이 터질 뻔했으나 프랑코의 수완에 의해 다 찍어눌린 것이다. 물론 프랑코의 경쟁자 대부분이 비행기 사고로 죽어버리는 등 운도 굉장히 크게 작용했다.구체적으로 팔랑헤당은 에른스트 룀과 아돌프 히틀러가 서로 대립했던 것처럼[117] 이념적으로 부유층을 적대하는 파[118][119]와 그렇지 않은 파가 병존했고 또한 가톨릭 색채가 짙고 중앙집권보다 지방분권을 추구했던 카를로스파[120][121]와 반목하고 있었다. 스페인 왕당파도 부르봉 직계를 지지하는 만큼 부르봉 방계를 지지하는 카를로스파와 공존이 불가능한 입장이었다. 국민파의 지도부도 곤살로 케이포 데 야노[122], 후안 야구에[123],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 라몬 프랑코[124], 미겔 카바네야스[125] 같은 사람들은 여전히 헌정체제 자체는 공화정을 선호했던 반면 카를로스파와 알폰소 13세파 왕당파들은 왕정복고를 원하는 등 내부적 반목의 씨앗은 충분했다.
이런 와중에 프랑코가 국민파의 내부적 반목 요인을 모두 제거하고 일인 독재 체제를 굳힐 수 있었던 건 개인적 정치적 수완도 있었지만 운이 굉장히 컸다. 팔랑헤의 경우 개전과 동시에 감옥에 있었던 지도자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126]가 공화국 정부에 의해 처형당했고 기존의 자본가 정당인 CEDA의 당수이자 자본가 세력 자체를 대표했던 힐로블레스는 내전 발발 이전 정치 투쟁에서 이미 지도력에 큰 타격을 입은 후 해외로 도피한 상태였다.[127] 퇴위한 알폰소 13세를 포함한 직계 왕족들과 카를로스파 왕위 사칭자였던 하비에르[128]는 해외에 망명한 상태에서 군부에 의해 귀국이 차단되었고[129] 범 보수 왕당파의 정치적 당수이며 우익 내에서 굉장한 카리스마를 발휘했던 호세 칼보 소텔로 의원은 내전 발발 직전 좌익 테러로 인해 암살당했다. 군부 내에서는 원래 국민파의 지도자였던 호세 산후르호[130]는 내전 발발 3일만에 과적으로 인한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고[131] 프랑코의 경쟁자들인 마누엘 고데드는 바르셀로나 쿠데타가 실패하자 공화파 민병대에게 체포된 후 총살, 장군인 주제에 엄청난 뻘짓을 벌여 전쟁 수행 능력이 엉망이라고 낙인찍힌 지 오래였던 에밀리오 몰라 또한 정찰중 악천후로 인한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하였다. 케이포 데 야노는 세비야와 안달루시아 일대를 장악하고 전쟁 끝날 때까지 동네 왕초 노릇하며 프랑코의 눈에 자주 거슬렸지만 카우디요[132]의 권좌를 위협할 그릇은 못 되었고 결국 전쟁 후 실권을 몽땅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도 잘 먹고 잘 살았지만. 이 외에 프랑코의 소싯적 상관인 호세 미얀아스트라이[133]나 형 니콜라스 프랑코, 동서인 라몬 세라노 수녜르[134] 같은 이들의 도움도 컸다.
왠지 굉장히 절묘한 타이밍에 비행기들이 많이 추락한 것 같긴 한데 애초에 스페인 내전 자체가 군사기술 발달사의 관점에선 저런 우익 진영의 수장들이 직접 몸으로 숭고한 시범을 보이며 대규모 병력의 항공 수송이란 분야에서 초기 발판을 닦은 역사적 경험이다. 예나 지금이나 너무도 당연하게 프랑코가 수작질 부린 거란 의혹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지만, 당시 항공 수송 기술 자체가 이만큼 초기적이고 불안정했던 만큼 타이밍과 대상이 굉장히 미묘하긴 해도 새로 발견되는 증거가 없는 한 딱히 근거는 없는 소리다. 때문에 당시 거의 독점적인 여객 수단은 열차였고 비행기는 이런 내전 상황만큼 정말 어지간히 시급하고 기밀을 유지해야만 하는 상황에나 활용되었다.[135] 사실 국민파 지도자들이 대규모 군사적 공중수송이란 새로운 군사 기술 분야의 의도하지 않은 선구자가 된 것도 정부 몰래 최대한 빨리, 은밀하게, 식민지에서 본토로 병력 수송을 해야 했던 쿠데타 상황이란 특수성 때문에 내린 불가피한 결정에 가까웠다.
힐로블레스, 케이포 데 야노[136] 등의 인물들은 능력이나 카리스마 면에서 애초에 프랑코의 상대가 안 되었고, 각종 왕당파의 수장인 왕족들이야 외국에 망명해 있었지만 우익 군부의 수장이었던 호세 산후르호, 스페인의 자생적 파시스트 팔랑헤의 지도자였던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 범보수파의 정치적 수뇌였던 칼보 소텔로 등은 짬이나 연륜이나 카리스마나 능력이나 프랑코에 의해 하등 밀릴 게 없는 인간들이었다. 이렇게 정적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국민파 내부 균열 또한 대패질이 되자 프랑코는 팔랑헤식 국민생디칼리슴적 파시즘도 아니고, 왕당파나 카를로스파 식의 봉건주의적 신정 정치도 아닌 자신만의 권위주의 독재를 폈다. 그리고 이에 반발한 데 리베라의 후계자 마누엘 에디야(Manuel Hedilla) 등이 팔랑헤의 혁명성을 회복하고 자신의 권력을 확대하려 하자 마누엘 에디야도 숙청해 버렸다. 하지만 팔랑헤는 배신당했다고 보기에 애매한 게 호세 안토니오 사후 팔랑헤당 후계자가 된 마누엘 에디야가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려 같은 팔랑헤당 당원들까지 대포까지 동원해 공격하고 프랑코에게 위협을 가하자 프랑코가 숙청한 것이고[137] 우익들을 통합할 때도 팔랑헤당[138] 중심으로 통합한데다 프랑코 정권 안정화 이후에도 한동안은 완전히 국민생디칼리슴적 파시즘 성향을 버리지는 않았다. 44년부터 연합군이 이기기 시작한 시점부터 연합군에게 잘 보이기 시작한 것을 시작으로[139] 경제도 번영하고 외국물도 먹게 되면서 슬슬 파시즘 물이 빠지게 되었다.
왕당파의 경우 프랑코의 후계자는 알폰소 13세의 손자인 후안 카를로스 1세가 되었기 때문에 왕당파는 배신당하지는 않았다고 보지만[140] 반대로 왕당파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배격한 채 프랑스 혁명 이전 신정적 봉건 자치사회로의 회귀라는 명확한 이데올로기적 비전이 있었던 카를로스파[141]는 배신당한 게 맞다. 공화파와 국민파의 내부적 단결에서 핵심적인 차이는 그냥 프랑코가 군부와 아프리카 군단 내에 독자적인 세력기반이 있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도 정치적 라이벌들을 상대로 간을 보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협상할 줄도 알고 경우에 따라선 통수질을 치는 센스가 훌륭했기 때문이다.[142]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적으로 부각이 덜 돼서 그렇지 내전기 동안이나 프랑코 정권 초기나, 후기에나, 프랑코 사후에나 이런 저런 우파 진영 내부 폭력 사태도 꽤 있었다.[143]
사실 우파도 내전이란 비상 응급상태에 일시적으로 뭉쳤던 게 하나의 정권으로 변하긴 했지만 그 시작은 팔랑헤, 카를로스파, 알폰소파 왕당파, 부르주아 민간 정치인, 군부, 헌병군 전부 다 반공주의, 가톨릭을 제외하면 구심점이 딱히 없고, 독자적인 기반과 내부 풀이 있는 소집단들이 일시적으로 손을 잡았던 건 좌파 공화진영하고 큰 구조적 차이는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프랑코의 외국 후원 세력들도 서로 간에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뭐 사실상 후원 세력인 영국과 독일이야 말할 것도 없고 바티칸도 사실 독일하고는 척지는 사이였다.[144] 그 영향을 받아 카를로스파는 당시 스페인에서 청색사단에 대해 참여를 거부했다.[145]
독일이나 이탈리아는 오직 '프랑코 개인'에게만 지원하겠다고 함으로써 프랑코에게 힘을 실어 주기도 했으며 가톨릭 교회 역시 도움이 되었다. 따지고 보면 국민진영의 각 정파 중 반공 외에 통일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었던 주제 중 하나가 친가톨릭이었기 때문에 이념적 통일성을 다지는 데 유용했다. 여기에 더해서 사실 가톨릭 교회는 명분, 도덕성 따위는 안중에도 없던 국민진영이 그나마 해외에 명분적인 면에서 어필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요소이기도 했다. 본질적인 폭력성이나 학살의 빈도는 비교가 되지 않았지만 가톨릭 교회 사제들은 애초에 구체적인 직업적 네트워크로 연계가 탄탄한 직종인 만큼 내전 초기만 하더라도 이들을 통한 전 세계 가톨릭계를 향한 언론전으로 특히 가톨릭 노동자 계층이 막 중요한 유권자층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영미권 나라들의 외교적 영향력을 통해 공화파를 고립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4.3. 국제적인 연대를 통한 지원
요약하자면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가 잘 묘사하고 있는 분위기지만 1930년대 파시즘의 세계적 연승을 두려워하던 전 세계의 좌파와 자유주의자, 공화주의자, 민주주의자들은 1936년 7월 쿠데타를 막음으로써 만주에서 독일, 에티오피아에서 루마니아까지 국제 파시즘 세력의 연승 행렬을 막은 것처럼 보였던 민주 스페인에 열광적인 심적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이들의 지지는 전쟁에서 이기는 데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정신적, 문화적 연대 정도에 불과했거나 아니면 개인, 잘해봐야 정당 차원에서 직접 가서 싸우다가 죽는 이상의 파급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반대로 이때까지만 해도 열강 정부들은 파시스트가 정권을 잡는 사태보다는 남유럽 지중해의 소련이 탄생하고 언어, 문화가 직접적으로 연결된 중남미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것을 더욱 두려워하였다. 결국 열강 정부들은 쿠데타 세력을 직간접적으로 지지하거나 국내 다른 세력들이 이들을 지지하는 걸 방조함으로써 국민파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46]
언급한 것처럼 전쟁 초기 공화군과 국민군은 어느 한 편이 절대적으로 우세하다고 말하기 힘들었다. 공화군은 수적 우위와 혁명에 대한 열기라는 점에서 우세를 점했지만, 당시 스페인군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돌아가는 전투 부대였던 아프리카 군단이 국민파 측에 있어 군사적으로는 박빙 상태에 있었다. 쌍방에 제공된 무기들의 경우 다른 건 제쳐두고 대충만 따지면 항공기나 조종사들 질은 국민진영이 훨씬 나았고[147] 전차는 공화진영이 훨씬 나았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1936년 가을, 국민군의 진격이 마드리드 방어전에서 막혀 버리고 원래는 일시적 '쿠데타'였어야 할 충돌이 장기적인 '내전'으로 확대되면서 후안 야구에는 지금 상황에서 공화군이 역습을 가하면 바로 털려버린다고 심각한 걱정을 표했고 공화파 대통령 아사냐는 반대로 "주요 공업 지대, 대도시는 다 우리 편에 있는데 저들(국민파)이 어찌 전쟁을 지속한단 말인가?"하며 자신감을 표했다.
그러나 국민파가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 그리고 이웃나라인 포르투갈 제2공화국의 노골적 지원을 받고 있던데 반해 공화파는 외부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했다. 분명 공화파가 합법적으로 선거를 통해 당선된 합법 정권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민주국가들에게 제대로 된 지원은커녕 방해만 잔뜩 받았다. 결국, 스페인 내전의 운명은 결국 스페인이 아니라 강대국들의 외교전 사이에서 결정되었다.
4.3.1. 공화파에 대한 지원
공화파 정부는 영국, 프랑스, 소련, 미국 등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소련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중립정책을 이유로 지원을 거절했고, 돈 주고 사겠다는 무기조차 중립을 유지해야 한다며 판매를 거부해 버렸다.[148][149] 주요 열강 중에서 소련을 제외한다면 일본 제국이 주퇴복좌기도 없는 구형 야포인 31년식 속사포를 내 준 적이 있긴 하다. 중견국가들 중에서는 그나마 폴란드가 자국에서 노후화되어가고 있던 르노 FT-17 전차 중고품 등을 판매해 줬으며 폴란드의 이웃나라인 체코슬로바키아와 북유럽 국가 핀란드 역시 Vz.26 경기관총과 KP/-31 기관단총 등 자국산 총기들을 공화국 정부군에게 판매했다.[150] 레옹 블룸 총재 아래 같은 연립 좌파 정권을 이루고 있었던 프랑스는 내전 초기까지만 해도 공화파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물자도 보내 줬으나 영국의 적극적인 반대도 무시할 수 없고 자국 내의 극심한 좌우 갈등 때문에[151] '스페인 내전이 프랑스 내전으로 이어진다'는 불안으로 결국 지원을 끊고 중립 태세를 유지하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레옹 블룸 내각은 적어도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이 국민파를 지원하는 것만이라도 막으려고 영-불-독-이-미 5개국으로 이루어진 스페인 사태 비간섭 위원회라는 국제기구를 만들었다. 물론 독일과 이탈리아는 그딴 거 무시하고 계속 지원을 해 줬고 영국의 보수당 정권이 이를 암묵적으로 방관하여 결국 국제적 비간섭 정책은 국민파에게 유리했다.영국은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스탠리 볼드윈 총리의 집권 보수당이 파시즘보다 공산주의를 더 경계했으므로 프랑코를 유배지인 카나리아 제도에서 모로코로 태워간 비행기를 제공해 주는 등 은근히 국민파를 도왔다. 지브롤터 주둔군 사령관은 국민군이 이탈리아나 독일과 교신할 수 있도록 통신기까지 빌려주었다.[152]
처칠이 스페인에 관해 가졌던 입장은 복잡했고 시대에 따라 변했다. 처음에는 스페인 내전을 일종의 진흙탕으로 여기며 여기에 영국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고 공화정부측 정치인들과 악수하면서 그 손을 피가 묻은 손으로 여겼다. 다만, 네그린 정부가 들어서면서 비교적 공화정부에 호의적인 입장을 보였으며 38년부터 국민파와 공화파 양측을 화해시키고 스페인 국민들이 평화적으로 스페인의 미래를 정하는 것을 지지했다. 다만 그것과 별개로 처칠은 '자기가 스페인 사람이었다면 프랑코를 지지했을 것이라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153]
미국도 이때만 해도 고립주의적 태도를 버리지 못했고, 여론 자체는 공화정부에게 호의적이었지만[154] 미국 가톨릭계가 국민파를 지지함에 따라 가톨릭 표를 잃을 것을 우려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금수조치를 유지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결론적으로 중립을 유지했으며 결국 1937년에는 교전 중인 어떤 국가에게도 무기를 판매하지 못한다는 중립법을 통과시켰다. 이 와중에도 헨리 포드 등의 기업가들은 프랑코에게 거리낌 없이 헌금을 보냈고 텍사코 같은 석유 재벌들은 돈을 받지 않고 석유를 외상으로 보내 줬다.[155] 하지만 자발적으로 스페인에 건너가 국제여단에 투신한 사람들도 꽤 있었고, 이들은 전후 매카시즘 시절이 되자 반미국적행위 위원회에 한 번씩 붙들려 갔다.[156] 단 루스벨트와 일부 집권 민주당 인사들은 공화국에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불법적으로 일부 지원을 해주기는 했다. 특히 나치 독일을 경계한 루스벨트는 프랑코의 승리가 라틴아메리카에 친독 파시즘이 퍼지는 것을 초래할까봐 두려워했다.[157]
대부분의 군사원조는 소련이 제공했다. 대량의 소련산 군장비, 석유를 포함한 물자 및 전투요원, 군사 고문단이 스페인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이는 무상지원이 아니어서 이들을 보내주는 대신 이오시프 스탈린은 당시 세계 4위의 금 보유국이었던 스페인 정부로부터 막대한 양의 금괴(700톤, 당시 가치로 약 3억 5,000만 달러)[158]를 그 대가로 받았다. 그리고 전세가 기울어지고 공화파가 가진 금괴가 떨어지자 스탈린은 지원을 끊었다. 그나마 한 지원이 있다면 스페인 공화파들의 부모 잃은 자식들을 소련에 데려가서 먹여주고 재워준 정도.[159] 게다가 위에 서술한 지원을 대가로 한 공화국 내부의 정치적 농간질도 심각하게 부려서 도와준 만큼 해악도 심각하게 끼쳤다.
당시 소련은 스페인 내전을 국제 파시즘 세력의 소련을 겨냥한 세계대전의 전조로 해석했고, 소련 내부에서 스페인 내전을 재현하기 위한 반혁명 세력들이 판을 치고 있다는 편집증에 시달리고 있었으므로 어떻게든 소련의 국가안정성을 제고하는데 급급했지 후하게 스페인에게 퍼 줄 처지가 아니었다. 니콜라이 예조프가 내무인민위원으로 대숙청을 지휘하여 모스크바 재판이라는 처형쑈를 연출하던 것이 이 시점이었고 적어도 1938년 겨울에 라브렌티 베리야로 내무인민위원이 교체되기 전까지 스탈린은 내부청소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시점이 되면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를 먹고 폴란드를 회치기 직전이었으므로 역시나 스페인 따위를 신경쓸 상황이 아니었으며 이미 1937년에 발생한 중일전쟁으로 독일뿐만 아니라 일본의 소련 침공까지 걱정해야 할 판이었고 소련 침공할 일이 없는 프랑코 따위보다야 일본 견제를 위해 장제스의 국민정부에 지원을 더 해 줘야 했다.[160] 낙후되었던 소련이 전간기 시점에는 이미 스탈린의 급진적인 공업화 노력으로 군수품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수출할 수 있는 국가로 거듭난 건 분명 사실이다. 그러나 유럽과 동아시아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전쟁에 둘 다 관여한다면 자연스럽게 역량이 분산될 수밖엔 없었다. 중일전쟁의 폭발은 공화파 측에는 추가로 더 나쁜 영향력을 끼쳤는데 구미 사회 언론의 관심이 스페인 내전보다는 새로 터진 중일전쟁 취재에 더 쏠리면서[161] 이전까지 받던 온정적 관심조차 점차 희미해지게 된 것이다.
게다가 외부적, 도의적 관점은 일단 재껴 놓고 보면 소련 입장에서 스페인은 어쨋든 국제 프롤레타리아의 정신적 조국으로서 대놓고 방관할 순 없는데, 막상 현지 정치판엔 비코민테른 계열 독립공산주의자,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독일 공산당을 통해 '사회적 파시스트'라 실컷 욕하던 '개량주의' 사회민주주의자, 러시아 혁명 초기부터 서로 사이좋게 폭탄 주고받던 아나키스트들이 득실거리던 막상 급한 불만 꺼지면 돌아설 게 뻔한 (코민테른의 관점에선) '이단'들이 장악할 가능성이 높은 전형적인 계륵이었다. 심지어 지리적으로도 어디 대충 소련 자체에서 낡은 물자, 예비 부대 몇개 파견하기 쉬운 가까운 나라도 아니다.
물론 이 시점에도 반혁명 5열이 산재해있다는 편집증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는 것은 별개의 얘기다. 거기에 더해 소련은 사실 러시아 혁명 때도 우크라이나에서 네스토르 마흐노의 아나키스트들과도 교전했던 적이 있었다.[162] 내전 초 아나키스트의 정치적 본거지인 바르셀로나로 파견된 어느 코민테른 요원은 눈치없이 아나키스트들을 칭찬했다가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숙청당하기도 했다. 공화진영에 파견된 소련 고문, 요원들은 대외적으로는 공화파 내 제5열 숙청에 열을 올렸고 온화한 스페인 땅[163]에서 편히 지내면서 나름 꿀을 빨았지만 사실 이들조차도 대숙청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다. 아니, 뭐 사실 자유롭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당시 주스페인 소련 대사이자 소련의 군사 지원 밑 국제여단 모집, 인민전선 내 비공산당 좌파 숙청을 주도한 볼셰비키 원로 블라디미르 안토노프옵세옌코부터 시작해서 많은 NKVD, 붉은 군대 간부들이 스페인에선 다른 비공산주의 좌파를 숙청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본국 송환되더니 본인들도 영문도 모르게 사형 or 굴라크행이 되어 버린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이런 기구하고도 비극적인 운명은 비단 소련인 참전용사 본인들뿐만 아니라 소련으로 망명한 공산당계 국제여단원, 스페인 망명객들도 상당수는 마찬가지로 해당됐다. 스페인 내전이 끝나고 몇 달 되지도 않아 갑작스럽게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으면서 어제만 해도 아주 열심히 외쳐대던 반파시스트 선전도 한동안 안 하게 되고 소련이 지금까지 스페인 공화국에게 퍼주었던 지원도 갑작스럽게 정치적 부담요소로 떨어졌기 때문이다.[164] 그나마 이런 우여곡절에서 무탈하게 소련으로 복귀한 스페인 내전 경험자들은 훗날 할힌골 전투와 대조국전쟁에서 남들보다 일찍 경험한 현대 총력전의 경험을 보여주면서 전차, 전투기 에이스로 활약했다.[165] 이 외에도 이런 스페인계 고급인력들은 냉전 시대에 소련의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외교전략에 요긴하게 쓰였다.
국가적 차원에서 진짜 '순수한' 의미로 이데올로기적 동지들을 돕자는 의도로 원조를 보낸 나라는 멕시코 혁명을 겪고 대통령 라사로 카르데나스를 필두로 한 전직 혁명가들이 집권했던 멕시코밖에 없었다. 반란 발발 직후에 멕시코가 보내준 소총 2만 정과 탄약은 정말 모든 게 부족하던 시기에 도착해서 아주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중립주의를 강경하게 밀어붙인 미국의 압력과 방해 공작, 그리고 멕시코 자체의 거리와 열강에 비하면 현저히 부족한 지원 능력 때문에 판을 엎을 만큼의 힘은 못 되었다. 그래도 멕시코는 소련처럼 장사를 하려고 들지도 않았고 내란이 끝난 뒤에 피난처도 제공해 주었다. 공화파 출신 난민들을 대거 받아 주고 이들이 사회적으로 정착할 길도 정부 차원에서 지원해 주었으며 망명 세대로 대표되는 스페인 문화와 예술이 나머지 서방세계로 퍼지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결국 1939년에 득의양양해진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을 터뜨리기 직전에야 루스벨트와 처칠은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고 공화국을 도왔어야 했다고 이전에 보였던 두 국가의 행적을 후회하는 발언을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으며 결국 이 두 국가는 그 파시스트 세력들을 직접 맞서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으로 이전에 공화국을 돕지 않은 대가를 치렀다.[166]
하지만 나머지 유럽과 미국이 스페인을 그냥 버린 것은 아니었다. 정부 차원의 참가는 없었지만 개인 차원의 의용병은 다수였고 이들은 국제여단을 결성하여 국민군에 맞서 싸웠다. 국제여단군의 구성은 대부분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등의 좌파나 유대인, 미국의 경우 흑인 등이 포함된 반파시스트 운동가들이이나 단순히 스릴을 찾는 모험주의적인 동기로 참여한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폴란드, 헝가리 등 자국이 이미 권위주의나 파시즘 독재정에 넘어간 사람들은 스페인을 자국에서 싸우던 파시즘과의 전쟁의 연속으로 보았고 스페인마저 넘어가면 진짜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었기에 굉장히 치열한 투지와 높은 사기를 보여주었다.
- 공화파 정부에 대한 국가별 지원병 수(약간의 오차는 있을 수 있다)
위 수치는 공화파 정부에 의해 정식적으로 집계된 공화파 정부 휘하에서 싸운 국제여단원들만 친 것이고 공화파 측에서 싸우되 공화파 정부 휘하가 아니라 독립적으로 지휘 체계를 형성하여 싸운 POUM, CNT 등의 무장 노조 소속으로 싸운 아나키스트, 트로츠키주의자, 비 소련 계열 사회주의 의용군 또한 대략 5,000명 전후 쯤 된다고 보고 있다. 이 중에서 대표적인 사람이 영국 독립 노동당 소속 의용군으로 POUM 소속으로 싸웠던 조지 오웰과 아나키스트 CNT 산하 국제 의용병 부대였던 세바스티앙 포르 부대에 속했던 시몬 베이유.
안 그래도 격렬했던 20세기 초중반의 복판에 자원해서 뛰어들어간 사람들이니 국제여단은 종전 이후에도 전 세계 좌익 운동 사이에서 일종의 역사적 성역으로 찬양받았는데 뒷 배경이 이렇게 파란만장하니 그 운명도 기구했고 이런저런 의미 있는 일화도 많았다. 예를 들어 미국 출신 의용군으로 구성된 에이브러햄 링컨 대대의 지휘관은 하라마 전투에서 전사한 뉴욕 출신의 흑인이었던 올리버 로였는데 이 사람은 정식 미군의 역사는 아니지만 독립 국가 형성 이후 미국의 전쟁사상 최초로 유색인종이 백인 부대를 지휘한 경우로 역사에 남았다.
훗날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의 초대 독재자가 되는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의 지도자이자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독재자였던 요시프 브로즈 티토, 이쪽은 사실 악명에 가까운 경우지만 슈타지의 수장이었던 에리히 밀케를 포함한 2차 대전 이후 동독의 국가 지도자 다수 등 냉전 초기 동구권의 지도자들이 본격 국제 좌파의 간판들로 명성을 쌓은 무대도 국제여단이었다. 특히 독일 출신의 의용군으로 구성된 에른스트 텔만 대대는 훗날 나치를 청산하고 새로운 일종의 건국 이데올로기를 형성할 필요가 있었던 동독 당국에 의해 '공산주의 독일의 역사적 원류'로 격상되어 대접받았다. 폴란드에서도 국제여단에 참여했던 이들의 상당수가 제2차 세계 대전 독일의 폴란드 점령기에 대독 투쟁에 나섰고[169] 이들은 이후 들어선 폴란드 인민공화국에 의해 영웅시되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위에서 보여주듯이 스페인 내전 참전 용사들에 대한 대접과 처우는 대전기 이후 냉전 시대의 지정학적 논리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일단 포츠담, 얄타 회담 이후 스탈린의 나와바리로 떨어져서 막상 현지 인민들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공산 정권이 소련군과 함께 '설립 당한' 동구권 국가에선 그나마 같은 공산주의자들끼리 때려죽이는 게 허다했던 스탈린 시대 이후에는 정권 원로이자 혁명의 선구자로 존경받았으나 동구권 몰락 이후에는 폴란드, 우크라이나 등지에선 소련과 관련된 과거사 전반을 청산하는 과정에서 스페인 내전 참전 용사들도 '적폐'로 분류당해 공산정권 시절 세워진 이들과 관련된 기념비 등이 철거 논란에 휩싸이는 경우가 많다.
반면 전후 반공주의가 강하게 자리잡은 영미권 출신 스페인 내전 참전자들은 상당한 고초를 겪었다. 막상 2차대전 중에는 OSS, MI5 같은 정보기관원들도 이들의 경험과 연줄을 높게 사 한동안 특수 작전에 중용하기도 했지만 장교 진급은 일괄적으로 막으려고 했고 특히 미국의 경우 전후 매카시즘으로 인하여 취업, 주택, 여권 발급 등 각종 공민권에서 제약을 받는 등 적잖은 핍박을 겪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미국인 국제여단원들은 전후 미국 흑인 민권 운동,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 혁명 이후 쿠바 정권에 대한 봉쇄 반대, 로널드 레이건 정권 시기 산디니스타에 대한 지원 등 미국 사회 내 굵직한 반체제 시민운동 등에 뛰어들면서 그나마 냉전 시기 반공주의도 한풀 누그러진 시절까지 살아 있었던 사람들은 사회운동계 원로로 대접받게 되었다. # 그나마 전후 냉전 시기에 진영 자체로는 서방권으로 들어갔지만 국내 정치에선 항상 좌익의 영향력이 막강했고 무엇보다 스페인 내전 자체와 대전기 레지스탕스 활동 와중 스페인 공화파에게 빚을 지게 된 프랑스, 이탈리아에선 스페인 참전장병들에 대한 공식적, 준공식적 대우나 사회적 입지나 성공적으로 정착한 편에 속한다.
아일랜드인 참가자가 300명 정도였는데 처음에는 아무래도 지리적+언어적 편의성 때문에 영어 화자들이 중심인 제11국제여단 영국인 대대에 편성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십몇 년 전 아일랜드 독립 전쟁 당시 IRA 소속으로 싸웠던 베테랑 혁명가들이 당시 반대편 영국군의 대민 공포 전략으로 악명 높았던 Blacks and Tans 특수부대 출신자들을 만나 버렸던 것이다! 당연히 "저런 천하의 원수들과 손잡으라고!?" 라며 노발대발했던[170] 부대원들의 반발로 인해 아일랜드인들은 1916년 부활절 봉기의 지도자 중 하나이자 아일랜드 사회주의의 시조부쯤 되는 인물인 제임스 코널리의 이름을 딴 코널리 전열(Connolly Column)이란 미국계 링컨 대대 소속 독립 부대로 재편성되었다.
4.3.2. 국민파에 대한 지원
- 국민파에 대한 지원병 수
이 외에도 필리핀, 헝가리나 미국, 호주 국적자들이 국민파 진영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튀르키예 국적자들이나 나라 없는 난민 신세였던 백계 러시아인들의 국민파 가담도 확인된다. 루마니아 왕국의 철위대도 군단을 보내어 국민파를 지원했다.
아일랜드의 경우 깨알 같은 에피소드가 꽤 있다. 일단 국민파에 자원한 600명은 극우파/파시즘적인 아일랜드 의용대였다. 이들은 아일랜드 공화국 성립 당시부터 정치집회당시 푸른색 셔츠를 착용했는데, 이것은 훗날 "청색 셔츠단"이라는 이름으로 길이길이 남게 된다. 물론 스페인 내전에도 같은 방식의 복장을 입고 참전했다. 그런데 전선이 꼬여서 아군의 오인사격을 한번 받고는 놀라서 그냥 본국으로 철수해 버렸다.
이탈리아 왕국군의 경우 이탈리아 지원병 군단[176]이라는 이름으로 완편 군단 수준의 지상군을 전개하고 750대가 넘는 각종 항공기를 배치했다. 거기에다가 해군함들까지 적극적으로 투입해 국민파의 해상 작전을 지원하기도 했다. 적어도 양적으로는 단순한 간섭 전쟁 수준이 아니라 아예 전장의 일각을 담당해도 될 만큼의 파격적인 투자를 한 셈. 규모만 놓고 보면 또 다른 주요 지원국이었던 나치 독일은 그냥 단순히 발만 걸친 수준이다. 기갑차량 140대와 270문의 야포, 62대의 항공기의 지원을 받는 이탈리아군 35,000명과 모로코 레굴라레 15,000명이 45문의 야포와 70대의 기갑차량을 가지고 있었고 80대의 항공기의 지원을 받던 공화파 군대 20,000명과 격돌한 1937년 과달라하라 전역의 전과를 보면 알 수 있듯 전투력이 그렇게 높지 않았다는 건 증명되긴 했다.[177] 또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이탈리아군은 과달라하라 전투와 브리웨가 전투에서 1,400명의 전사자와 4,600명의 부상자를 내는 참패를 당하기도 했다. 대신 이탈리아는 자기네 앞마당인 지중해에서 잠수함으로 공화국으로 향하는 선박들을 격침하거나 아니면 발레아레스 제도를 기지로 삼아 바르셀로나를 포함한 스페인 동쪽 핵심지역을 공중폭격하여 공화파의 물자난을 유발하고 바르셀로나 시민들의 사기를 꺾는 데서 군사적인 기여를 했다.
이와 같은 쌍방의 개입으로 인해 이 전쟁은 각국에게 신병기와 군사전술의 실험장이 되어 버렸고 서유럽에서의 제2차 세계 대전의 막을 연 전쟁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사례가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으로 유명해진 게르니카다.
의외라면 의외지만 일본은 국민파에게 어떤 지원도 하지 않았다. 중일전쟁으로 인한 국제적 고립을 타파하기 위해 방공 협정을 그 지렛대로 삼고자 하는 중이면서도 지원을 꺼렸다. 심지어 1938년 3월 5일에 순양함 발레아레스 호를 상실[178]한 국민파 측에서 해군 전력을 보충하기 위해 일본에서 군함을 사고 싶다[179]고 요청했을 때도 "새로 배를 건조해 달라면 해 줄 수 있지만 현재 보유한 현역 함선[180]을 양도하기는 어렵다"는 등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끝내 팔지 않았다. 러일전쟁 시기에도 이미 구식이었던 31년식 속사포[181]긴 하지만 오히려 공화파에 소량의 무기나마 수출하던 입장이었던 게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다.
다만 정치적으로 일본은 확실히 국민파 편이었고 국민파도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계속 보였다.
4.4. 게르니카 폭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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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니카(Guernica)》, 파블로 피카소, 1937, 캔버스에 유화. |
게르니카는 바스크 지방의 도시[182][183]로, 독일군 파견대인 콘도르 군단의 공습으로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폐허가 되었다. 바스크 공식통계에 따르면 민간인 150명이 사망했다.[184] 이 폭격을 게르니카 폭격이라고 하는데 폭격의 책임자는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이었다. 여기에 동원된 폭격기는 독일 측 22대, 이탈리아 측 3대인데 스탠리 페인의 추정에 따르면 당시 투입된 중(中)형 폭격기의 폭장량이 1톤을 좀 넘기 때문에 실제 투하된 폭탄은 많이 잡아 30~35톤 정도라고 한다. 하지만 이 정도는 사실 국민파와 공화파 쌍방이 상대편의 도시를 상대로 최대 6, 70톤의 폭탄을 쓴 것에 비하면 그냥 보통 수준이라고 한다.
피카소는 이 폭격을 비롯한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다룬 그림을 그렸는데 이게 유명한 게르니카이다. 피카소가 프랑스에서 이 그림을 전시했을 때 한 독일군 장교가 "당신이 한 거요?"라고 말하자 피카소가 "아니, 당신들이 했지."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매우 유명하다.[185]
4.4.1. 의도적인 학살이 아니라고 보는 주장
게르니카 지역은 공화군이 후퇴하는 길목에 있던 중요한 교통의 요지로서 상당수의 공화군이 방어를 위해 포진하고 있었고 폭격 목표는 민간인이 아니라 퇴각로에 있는 다리였다. 이 외에도 게르니카에는 바스크국의 3개 대대 병력과 탄약 생산 공장[186]도 있었다. 문제는 아직 기술이 부족했던[187] 독일 공군 선도기들이 다리를 못 맞히고 주변에만 폭탄을 떨어뜨렸다는 점과 그로 인해 발생한 흙먼지 때문에 후속 폭격기들이 목표를 제대로 못 잡고 '교량이 있을 예상 위치'에 마구 폭격을 해댔다는 점이다. 즉 의도적으로 민간인 지역을 폭격한 게 아니라 오폭[188]이었다는 것이다.정황을 보더라도 당시 공화군의 후퇴를 차단하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었던 만큼 후퇴로의 다리를 놓아 두고 민간인 지역을 공격해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공화군의 후퇴를 차단하는 것은 결국 실패했다.
물론 민간인 공격 자체를 의도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민간인들이 사는 도시에 피해가 발생할 것을 무시하고 함부로 폭격한 것은 사실이며 이러한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4.4.2. 의도적인 학살이라고 보는 주장
위와 같은 주장은 조금 더 보완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이 항목에서 많이 참고한 것으로 보이는 앤터니 비버의 '스페인 내전'의 해당 사건 서술을 보면1. 다리가 목표였는데 오폭한 것이라고 주장한 이들은
콘도르 군단 전역자들이며 기상상태에 대한 그들의 증언도 틀린데다가[189] 최초의 폭탄은 도시 중심가에 투하.
2. 다양한 종류의 폭탄 사용.(소이탄과 대인탄이 돌다리 부수는 데 필요한가?)[190]
3. 국민파의 분리주의자들(카탈루냐, 바스크 등)에 대한 당시의 행태를 생각해 보았을 때 시범케이스로 찍었을 가능성 농후.[191][192][193][194]
4. 인구 7천의 소도시에서 나오기엔 많은 사상자 수치라고 했으나 비버의 저술에 따르면 타지에서 온 피난민이 몰려 있었던 상황
으로 언급되어 있다. 물론 해당 서적에서 인용한 리히트호펜의 당시 기록에는 공화군의 후퇴 저지, 교란이 주 목적으로 언급되어 있다.2. 다양한 종류의 폭탄 사용.(소이탄과 대인탄이 돌다리 부수는 데 필요한가?)[190]
3. 국민파의 분리주의자들(카탈루냐, 바스크 등)에 대한 당시의 행태를 생각해 보았을 때 시범케이스로 찍었을 가능성 농후.[191][192][193][194]
4. 인구 7천의 소도시에서 나오기엔 많은 사상자 수치라고 했으나 비버의 저술에 따르면 타지에서 온 피난민이 몰려 있었던 상황
폭격으로 인한 피해나 영향 자체는 게르니카 폭격보다는 전쟁 후반기에 있었던 이탈리아 공군의 바르셀로나 폭격 쪽이 더 심했다. 아니 오히려 폭격의 경위나 수행 과정, 스케일 면에서 보면 바르셀로나 폭격이 더 악질적이었다. 게르니카 폭격은 적어도 히틀러나 프랑코 같은 수뇌부들 사이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고[195] 스케일이나 희생자도 별로 없었으며 최소한의 군사적 당위성은 있었다. 하지만 바르셀로나 폭격은 민간인을 공격하는 것 외에는 군사적 목표도 없었고 민간인 희생자 수도 게르니카의 몇 배급인 천여명에 달했으며 현장 책임자가 멋대로 저질렀다고 볼 여지가 있는 게르니카와 달리 직접 무솔리니가 마요르카 섬에 주둔한 이탈리아 공군에 직접 연락을 해서[196] 폭격을 명령했다.
4.5. 내전의 종결
공화파가 제대로 된 지원도 못 받고 그나마 받은 지원도 뻘짓으로 날려 간혹 자기네들끼리 싸우는 데 반해서 프랑코는 앞서 언급했듯이 느리기는 했지만 목표지점을 결정하고 공세를 시작하면 성공했기 때문에 공화군이 장악한 지역을 하나씩 박살냈으며 1938년 2월 공화군의 결정적인 뻘짓인 테루엘 공세에 힘입어 아라곤을 점령하고 지중해까지 도달하면서 카탈루냐가 고립되어 버렸다. 다만 이때 이후 프랑코는 당시에는 무방비 상태였던 카탈루냐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훨씬 더 방어가 잘 된 발렌시아 방면으로 남진하는 것을 택했는데 이 과정에서 예상치 못하게 XYZ 방어선에서 큰 피해를 입었고 후대 세대가 볼 때 이는 군사적 삽질이었다. 이런 선택을 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제시되는데 첫째는 카탈루냐를 바로 칠 경우 프랑스가 개입할 가능성을 우려한 것[197]이었고 둘째는 히틀러가 안슐루스나 체코슬로바키아 등에 전세계의 이목이 쏠리는 것을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에 전세계의 관심을 스페인에 묶어둘 생각으로 프랑코에 압력을 가했다는 것이다.[198]프랑코의 잘못된 선택으로 잠시 숨을 돌린 공화국은 카탈루냐와 나머지 지역을 연결하기 위해 동년 7월 마지막 여력을 쥐어짜낸 에브로 공세로 최후의 도박을 벌였으나 이것 역시 처참한 실패로 끝났고 1939년 2월 버티다 못한 카탈루냐마저 함락되면서 프랑코는 마드리드와 발렌시아를 중심으로 한 남동부를 제외한 스페인 전 지역을 수중에 넣었다.
결국 공화정부 지도부는 프랑스로 도망갔고 이 시점을 기해 공화파는 사실상 붕괴되었다. 당장 소련을 등에 업은 공산주의자들이 동료들을 숙청하는 꼴을 보다 못한 공화정부 내 중도파들과 숙청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아나키스트 등이 손을 잡고 프랑스에 있던 공화정부에 맞서 국내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199] 새 쿠데타 세력은 프랑코와 평화 협상을 시도했으나 이미 승리가 확실했던 프랑코가 협상 따위에 제대로 응할 리 없었고 결국 두 세력 다 똑같이 갈려나갔다. 따라서 더 이상 저항이 불가능했던 공화파는 프랑코에게 항복하였고 1939년 3월 28일 국민군은 수도 마드리드에 입성하였다. 그리고 4월 1일 프랑코가 대국민 라디오 연설로 내전 종결을 선언하면서 내전은 국민파의 승리와 제2공화국의 패망으로 끝을 맺었다.
내전 자체는 이렇게 프랑코의 승리로 종결되었으나 일부 공화군은 프랑스로 망명하여 계속해서 저항을 이어나갔다. 이들 망명 공화군을 가리켜 '마키(Maquis)'라고 하는데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당하자 마키는 대거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가담하였고 프랑스가 해방된 이후 이들은 다시 스페인 해방을 목표로 프랑코 정부군에 맞서 게릴라전을 벌였다. 그러나 냉전이 고착화되고 이들 게릴라를 지원해 주던 소련과 스페인 공산당이 이들을 팽하면서 고립된 이들은 195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프랑코 정부군의 진압에 의해 거의 와해되었다. 일부는 60년대까지도 살아남았다고 한다.
5. 결과
5.1. 내전의 여파
5.1.1. 국내
전쟁 자체가 스페인의 좌익과 자유주의자들의 도전에 대한 우익 보수 세력의 반동으로 시작된 만큼 쿠데타 직후부터 국민파는 끔찍하게 많은 피를 뿌렸다. 이 전쟁에서 수많은 스페인 국민들이 좌익에 가담했다는 명목으로 목숨을 잃었다. 대강 소개하자면 내전에서의 공화파 전사자가 11만, 국민파 전사자가 9만, 부상자 100만, 공습으로 인한 사망자 1만, 영양실조에 의한 사망 2만 5천, 후방 지역에서 암살이나 처형당한 상대 진영 지지자 18만 이상.백색 테러와 적색 테러[200]는 후방에서 많은 희생자를 남겼다. 내전기 동안만 국민진영은 약 7만 명[201] 정도의 희생자를, 공화진영은 약 4만 명에서 7만 명의 희생자를 낳았다. 특히 국민진영의 경우, 앤터니 비버는 내전기와 그 이후를 통틀어 직접 처형 외에도 수용소에서의 병사, 아사 등을 포함해 약 20만명의 희생자[202]를 살해한 것으로 추정했다. 공화진영은 지배한 지역에서 발생한 폭력을 중지시키기 위해 노력한 반면에, 국민진영은 가톨릭 교회, 정부 당국자 및 군부가 앞장서서 진보적인 사회적 흐름이나 민주적, 자유주의 성향을 띈 시민을 적으로 명시하는 '정화'라는 개념을 도입하였으며, 적색 테러와 달리 백색 테러는 '위로부터' 조직적으로 자행되었다.[203][204][205] 이 외에도 성직자에 대한 '절멸'은 스탠리 페인에 따르면 양쪽이 저지른 테러 중 유일하게 사회계층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206]
내전 이후의 처형은 확실한 수가 남아 있지 않으나 확실한 건 1975년에 프랑코가 죽는 날까지 정치적인 이유의 사형 선고는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내전 내내 국민파는 자신들이 한 지역을 장악하면 그 지방의 자유주의자, 노조 가맹원, 정치적 성향이 다른 지식인들, 공화파 진영에 친지를 둔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 싸그리 처형부터 하고 보았으며, 이러한 행위는 교회와 우익 매체에 의해 "스페인 내부의 병적 요소들의 척결과 정화"라는 축복을 받아 자행되었다. 당장 무솔리니의 사위이자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의 고위 인사였던 갈레아초 치아노 백작은 내전 종결 직후인 1939년에 스페인을 방문해 "세비야에서 80명가량, 바르셀로나에서 150명가량, 마드리드에서 200명 이상이 매일 총살 당하고 있다"고 충격을 표했으며 1940년에 스페인을 방문한 나치 독일의 한 고위 관료도 그 잔인함에 충격을 금치 못했는데 그 고위 관료가 다름 아닌 슈츠슈타펠 전국지도자 하인리히 힘러다.[207]
시대가 시대인 만큼 스페인 내전이 끝나자마자 2차 대전이 터져 살아남은 자들의 운명도 파란만장했다. 내전 이후 살아남은 이들 중 많은 수가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로 망명했는데 그 수는 약 50만으로 추산되며 절반만이 결국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이들 중 많은 수는 프랑스에서 요주의 인물로 찍혀 수배범 신세로 근근히 살아가다가 검거되어 강제수용소[208]에 끌려갔고 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으로 프랑스 제3공화국이 무너지고 나서 프랑코와 히틀러의 협정에 따라 스페인으로 반송되어 총살당하거나 비시 프랑스와 나치 독일 치하에서 강제수용소의 이슬로 사라졌다.[209] 그러나 프랑스 정부에게 검거되지 않은 채 나치의 침공 속에서도 붙잡히지 않고 살아남은 망명자들은 이후 10여 년 이상 스페인의 파시스트 정부에 대한 게릴라전을 벌였다. 이 중에서 1만 3천명 가량이 비시 프랑스에 맞서는 레지스탕스에 가담해 싸웠으며 샤를 드골의 자유 프랑스 군단에도 3천명 가량이 입대하였다. 이 중에서도 자유 프랑스군 제2기갑사단 산하의 9중대(La Nueve)는 대부분 망명한 스페인 공화파 출신 병사들로 구성되었는데 1944년 파리 해방 당시 파리에 가장 먼저 입성하여 당시 해방군을 맞이하러 나온 파리 시민들은 해방군이 "에보로", "테루엘", "게르니카", "바르셀로나 1936년 7월" 등의 이름이 도장된 전차들 위에서 인민전선식 경례를 하고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면서 파리에 들어오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Los españoles antifascistas saludan a las fuerzas libertadoras, 반파시스트 스페인인들이 해방군에게 경의를 표한다" 1945년 여름,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 해방 당시 수감된 공화파 스페인인들이 내건 현수막.
스페인 공화파 망명객들이 프랑스 3공 시절의 냉랭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레지스탕스 및 자유 프랑스군과 연대하여 피 흘리며 싸워 준 은혜를 잊지 않았는지 종전 이후에도 프랑스는 서방에서도 프랑코 혐오증을 상당히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샤를 드골도 개인적으로는 프랑코와 더 가까운 우익 인사였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 잔류한 망명객들을 후하게 대했고 프랑코 정권을 피하여 도망 나오는 난민들을 적극 받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남아서 활동하는 반프랑코 레지스탕스와 후일 부상한 ETA의 활동을 묵인해 주는 등 스페인 공화파와 긴밀한 사이를 유지했다. 현재까지도 매년 대통령이 직접 참가하여 치러지는 파리 해방 기념 행사에서는 꼬박꼬박 프랑스 삼색기와 더불어 스페인 공화파의 공헌을 기리는 공화국 삼색기가 같이 진열된다.
파리 해방 기념일 행사에서 2차대전 당시 자유 프랑스군 군기들과 나란히 걸린 스페인 공화국 삼색기를 사열하는 당시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 사실 프랑스-이탈리아 좌파 정치권에선 당장 파리 시장 안 이달고부터 스페인 공화파 망명 정치인의 손녀일 만큼 스페인 내전과 역사적 연고가 이리저리 깊다.
멕시코나 아르헨티나, 과테말라, 파나마, 페루, 에콰도르 등 다른 중남미의 스페인어권 국가로 망명한 공화파 인사들은 망명정부와 망명단체를 수립하여 1975년에 프랑코가 죽고 왕정이 복고되어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이 민주화 개혁을 시행할 때까지 저항했으며 중남미 각지의 현지 좌파들에게 정치적, 전술적 교육을 해 주어 훗날 냉전 시기 중남미 좌파 운동의 부상에 숨겨진 공로자가 되었다. 단적인 예로 체 게바라가 유년기 정치적 의식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게 아버지가 매일같이 집에 불러 같이 놀던 공화파 망명객들이었다고 회고했다. 원래는 군인도 아니고 각각 의사, 변호사였던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를 비롯한 쿠바 혁명가들을 군인으로 훈련시켜 준 것도 스페인 내전 당시 실패한 공화국의 발레아레스 제도 탈환작전을 지휘했으며, 원래 본인 출신지도 독립 이전 쿠바 도독부 시절 카마궤이가 고향이었던 군인 알베르토 바요였다.
거기에다가 공화파 고위 인사 1,000명 가량은 전쟁 말기 소련으로 탈출하여 그 중에서 수백 명이 붉은 군대에 입대해서 독소전쟁에서까지 싸운 경력도 있다. 내전 당시 공화파의 가장 유명하고 명망 높았던 장군 중 하나인 엔리케 리스테르가 그러한 경우인데, 이 사람은 레닌그라드 공방전에도 참가하고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과도 협력하여 결국 스페인, 소련, 유고슬라비아 3개국의 군대에서 장군 계급을 딴 진귀한 기록을 새우게 되는 등 공화파 잔당의 운명은 시대의 격조와 함께 이리저리 파란만장했다. 사실 공화진영에서 고생은 비공산당계나 비네그린계가 주로 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종전 시점에서 정부 요직을 차지했던 공산당원들은 주로 타이밍 맞게 배 타고 소련으로 망명할 수 있었다. 중도 자유주의 정치인들도 소련만큼 노골적인 빽은 없지만[210] 전쟁 이전부터 쌓아 온 커넥션도 많고 무엇보다 전후 서방의 냉전기 반공주의에서 그나마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에 주로 서방으로 많이 망명 가 적지 않은 수가 특히 학계, 문화계 중심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
가장 독박을 심하게 쓴 건 비스탈린계, 특히 아예 러시아 혁명 시절부터 공산당과 이를 갈아 오던 아나키스트와 독립공산주의 계열은 대부분 국내에서 죽든가, 프랑스로 육로로 망명했다 2차대전 발발 후 노르웨이에서 외인부대 소속으로 죽거나, 프랑스 점령 후 마우트하우젠에 끌려가거나, 비시 프랑스 정권 아래 북아프리카 수용소에서 강제노역 중 죽거나, 돌봐 주는 열강 빽 없이 사지로 몰렸다. 내전 이전엔 아나키즘과 사회노동당 좌파, 즉 비코민테른 계열 독립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던 스페인의 진보 좌파 정치지형은 이런 프랑코 정권기의 탄압과 정파별 상황에 따라 이후 나머지 프랑스, 이탈리아와 비슷하게 망명 중 처음엔 스탈린의 지령을 따르다가 유럽공산주의를 받아들인 공산당과 서방에 망명 가 있었던 사민주의 정치인, 그리고 인근 카톨릭 교회의 문화적 영향력 아래 세력을 보존할 수 있었던 카탈루냐, 바스크 지역주의자들이 대신 주류가 되었다.
프랑코는 자신의 카리스마로 군부와 정치권을 점점 장악하여 결국 독재자가 되어 1975년에 늙어 죽을 때까지 스페인을 지배했다. 프랑코 독재 치하 스페인 또한 냉전 당시 현지 좌파와 정치적 반대파 탄압에 중남미 현지의 우익 군사 독재자들에게 군사 및 안보 고문을 파견하여 협력했으니 어찌 보면 스페인 내전은 본토에서 끝나니 냉전 시기에 옛날 식민지였던 중남미에서 이어졌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당시 국민군 주력부대 중 하나가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스페인령 모로코 지역에서 징집된 병사들이었는데 이들 식민지군 병사들에 의해 자행된 살인, 강간, 약탈 등은 공화파와 관련된 민간인에 대한 의도적인 테러였다. 내전 내내 국민파와 프랑코가 전쟁과 학살을 정당화하는 명분이 중세기의 레콩키스타를 본뜬 '국제 유대- 볼셰비키- 프리메이슨 세력으로부터 스페인을 정화하는 것'이었는데 막상 북아프리카 아랍인 병사들을 데리고 와 스페인 민간인들을 강간하고 쳐죽인 건 본인들이니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일례로 국민군에서는 붙잡은 공화정부 진영 여자들을 무어인 병사들에게 노리개로 던져주는 게 당연한 일이었고 이런 행위를 외국 기자들에게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211][212]
하지만 공화파 측의 잔혹 행위도 그 규모 면에서 국민진영에 미치지는 않아도 역시 심각했다. 가장 피해를 본 집단은 가톨릭 교회였다. 근본적으로 이 당시 스페인에서 교회는 우익 지주들과 뿌리깊게 결합한 반동적 세력으로 인식되어 좌익의 맹렬한 증오의 대상이었고 내전 이전부터 과격 혁명 세력에 의한 교회 방화 사건 등은 심심찮게 터지곤 하였다. 쿠데타가 터지자 자연히 가톨릭 교회는 국민파 편으로 서서 국민파 점령지에서 자행되는 동지들의 학살을 한치의 꺼리낌 없이 축성했고 이에 분개한 CNT, UGT, POUM 등의 혁명 세력은 눈에 보이는 교회란 교회는 속을 발랑 까 뒤집어 태워 먹고 신부들과 수녀들을 학살하며 감옥으로 쳐들어가 우익 인사들을 학살하는 것으로 회답했다. 조지 오웰은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마드리드에서 파괴되지 않은 교회를 겨우 2개 봤으며 그나마도 모두 개신교 교회였다면서 공화파를 빤답시고 공화파가 교회를 박해하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해서 'pitiful lie'라고 경멸을 표했다. 이 외에도 국제 적십자회에서 공화파 지역 내에서의 탄압 실태를 조사했고 상당한 증거를 수집했는데 당시 실태를 조사한 조사원이 탄 에어 프랑스 항공기를 공화파를 위해 일하고 있던 소련 전투기가 격추시켰다. 다행히 조사원은 살아남았지만 증거는 이로 인해 사라졌다.
특히 카를로스파의 민병대였던 '레케테' 는 "한손에는 수류탄, 한손에는 묵주"라 불릴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 교도들로 구성된 부대였다. 다만 레케테는 그런 가톨릭 성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국민진영에서는 포로 대우를 제일 신사적으로 한 군사집단이었다. 그리고 내전 발발 이전에는 카를로스파들의 전통적인 지방자치적 전통을 스페인 군부의 중앙 민족주의에 대치되는 우익 내의 맞불로 쓰기 위해 공화정부에서 이들을 무장시키고 훈련시킨 전적이 있어 모로코 용병대 다음으로 국민진영에서 정예로 꼽히기도 했었다. 스페인 현지의 미디어 묘사나 당대의 평가에 따르면 레케테는 군사적으로는 정예인데 인간은 대체로 나바라 지역의 농촌 출신자가 많아서 그런지 그나마 좀 순수한 집단, 팔랑헤는 군사적으로는 그닥 유능하지 않은데 후방에서 사상정화랍시고 약자나 괴롭히는 못된 집단 기믹을 보였다. 정작 사상적 스펙트럼이나 행동하는 코드(가령 서로를 동무라고 지칭하거나 노동자의 상징인 푸른색을 자기 제복 색깔로 하거나, 인민전선의 인사법인 주먹 쥔 팔뚝질을 활용하거나) 팔랑헤가 가장 공화진영과 유사하다는 것, 내전 이전에 CNT와 연대를 모색했던 점은 잊고서. 실제로 영화 13송이 장미에서는 레케테 출신 장교와 내전 이전 공화진영 쪽에서 일한 여자가 아무 생각 없이 연애하는 장면이 나왔다. 이는 사실 카를로스파들 자체가 뭐 인성이 좋았다기보단 이들의 주된 활동 지역이 이념적, 사회적 갈등은 나머지 전국보다 덜한 반면 '그래도 같은 바스크족'이란 지역적 유대감이 강했던 북부 전선이었다는 점과 상관이 있다. 그리고 이때부터가 아니라 원래 카를로스파는 사상 자체가 지극히 20세기 후발 산업국답게 무신론자 빨갱이들도 싫지만 지역 사회 작살내는 자본주의도 싫고 우리 고향인 동부 카탈루냐, 바스크 일대의 봉건적 자치권을 적극 수호하겠다는 좌파, 특히 중앙 국가에 반대하는 아나키스트들과도 통하는 코드가 있었다. 따라서 프랑코 정권 시절 자본주의적 경제 개발과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 설립을 추구한 스페인의 우익 진영 내분 중 쩌리가 되고, 프랑코가 죽은 후 1976년 몬테후라 살인 사건에서 꼴통 극우 경찰들에게 테러당해 빡칠 대로 빡친 카를로스파들은 공개적인 사회주의 정당으로 전향한 후 공산당과 합작하여 현대 스페인의 통합 좌파당을 만들었다. 현대 카를로스파들은 친가톨릭, 친왕정이면서도 자본주의와 중앙 정부에 반대하는 오묘한 좌파 중에서도 이단아로 분류된다. 사실 가톨릭은 반자본주의, 전통 왕정은 봉건정이라는 걸 생각하면… 다만 오늘날 카를로스파라는 정파는 사실상 소멸된 것으로 간주된다. 물론 정치적인 영향력이 소멸한 것과 별개로 카를로스파는 그 태생부터가 19세기 이래의 계몽주의, 자유주의 이념의 한계에 기원한 집단으로 스페인 근현대사에서 독자적인 발자취를 남겼기 때문에 스페인 내전과 별개의 역사적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다.[213]
역시 학살 같은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는 점에서 완전한 천사는 아니었지만 팔랑헤나 군부에 비하면 카를로스파는 상대적으로는 착한 것이 맞다. 이념적 코드의 유사성으로 말하자면 팔랑헤(국민생디칼리스트)도 내전 이전 당수였던 호세 안토니오 생전에는 한때 같은 생디칼리스트인 아나코생디칼리스트들과 같이 연대하는 것 역시 진지하게 고민할 정도로 유사한 점이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완전한 설명은 되지 못한다. 더군다나 카를로스파는 바스크, 카탈루냐 지역이 물론 주된 활동지역이기는 해도 거기서만 활동한 것도 아닌 점[214] 역시 고려할 필요가 있다. 레케테는 조직 면에서는 옛날 조선시대 의병이나 마찬가지였다보니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정부군 소속으로 편입된다. 스페인 내전 승리 이후 카를로스파는 유럽에서도 가장 역사가 오래된 반자유주의 세력 중 하나라는 기록을 보유했으면서 의외로 이후 스페인 민주화에도 이름을 남겼다. 2차대전 때는 그들 기준으로 정당한 국왕인 하비에르 공이 2차대전이 터지자 잠시 스페인 활동을 접고 벨기에군에 종군하거나 프랑스 레지스탕스에도 관여했다가 나치 손에 다하우 수용소로 끌려가 체중이 36kg까지 줄어들 정도로 고생했다. 이 외에도 스페인 국내에서 청색사단 반대운동을 전개한 것을 시작으로 독재정권 당시에는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도 관여하기도 했다. 하비에르 공의 아들이자 하비에르 생전에도 실질적으로 카를로스파의 실권자 노릇을 한 큰아들인 카를로스 우고는 프랑코를 만난 자리에서 사회주의 같은 것도 허용을 해야 한다고 대놓고 주장을 하기도 했고, 역시 여동생이자 실권자였던 마리아 테레사는 모스크바에서 부친의 정적이었던 돌로레스 이바루리와 접견하거나 카를로스 우고와 함께 카를로스파를 사회주의 단체로 개조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자료
스페인 내전 종결까지 8,000명가량의 가톨릭 사제들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중에서 12명은 현역 주교들이었을 만큼 타격이 컸으니 가톨릭 교회는 살기 위해서라도 쿠데타군에 가담했다. 물론 개인 차원으로 내려가면 쿠데타와 맞불 혁명 발발 동시에 아나키스트 민병대한테 잡혀 총살당할 뻔했으나 카탈루냐 제네랄리타트(자치정부) 인사들과의 친분을 통해 살아 나온 뒤 이탈리아로 간 후 스페인 주교회의 프랑코 지지 선언문에 사인도 하지 않고 프랑코 정권도 인정하지 않으며 그냥 스페인인 모두에게 처참한 비극이라며 정치 중립적으로 애도만 열심히 한 당시 타라고나 대주교 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전반적으로 스페인 뿐만 아니라 전 세계 가톨릭계가 스페인 내전을 세계적 반공 십자군으로 인식하고 지원했던 와중 바스크 사제들은 종교적, 직업적 소속감과 동향 사람들에 대한 의리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많이 보였고 카탈루냐 가톨릭계는 내전 당시에는 당장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쿠데타 세력을 열렬히 지지했으나 내전이 끝나고 성립된 독재정권의 폭압적인 카스티야중심주의, 지역 언어, 문화 탄압 정책에 반발하며 민주 반체제 인사들을 보호해 주고 교회의 힘을 통해 카탈루냐어와 전통 문화를 정권에서부터 보호[215][216] 프랑코 정권 내 야권세력 1기라 할 만큼 정권과 사이가 점점 벌어졌다.
주로 반란 초기에 집중된 이 성직자 학살은 안 그래도 좌익 공화파를 탐탁치 않게 보았던 영국 정부가 확실하게 공화파에게 등을 돌리게 하는 효과를 불러 왔다. 정부가 무분별한 학살을 중단시켰을 때는 이미 늦었다.[217] 고착된 인상을 뒤집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종교 탄압 문제는 물론 오늘날에 일어난다고 해도 가벼운 문제는 아니지만, 그래도 광신적인 인간들의 도덕성 문제 정도로 치부되겠으나 이때는 정말로 중세적인 신성모독 행위로 다가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교황이 세속정치에 공개적으로 개입할 수 있었던 이 시절에는 가톨릭 유권자들의 이런 문제에 대한 목소리가 매우 높았으며, 교황 비오 11세가 스탈린의 정교회 탄압에 대해 정면으로 맞서 전 세계 기독교도들이 투쟁하자는 포고를 내리자 유럽과 미국의 대소 외교가 한동안 올스톱될 정도였다. 이는 막상 자신들도 바스크족 사제들을 죽이고 있었던 국민파가[218] 열심히 씹어 먹을 선전 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이래 스페인 내전에서 희생된 가톨릭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순교자로 인정받아 시복· 시성 절차가 진행되기 시작했는데 요한 바오로 2세 때 459위, 베네딕토 16세 때 527위, 프란치스코 때는 2019년 1월 기준 889위가 복자품에 오를 정도로 복자가 된 순교자의 숫자가 다른 나라보다 많다.
무엇보다도 공화파의 유명한 큰 실수는 톨레도 공방전에서 알카사르 (요새) 인질 협박 사건이었다. 내전이 터지자 마드리드 외곽에 있는 도시인 톨레도는 주변은 모두 공화파에 붙은 반면 현지 사령관이었던 호세 모스카르도 대령이 우익이어서 혼자 국민파 편에 붙었다. 이를 진압하려고 마드리드에서 공화군과 아나키스트 무장 노조원들이 톨레도로 쳐들어와 산 꼭대기에 있는 요새만 빼고 다 점령했다.[219] 톨레도 알카사르에 고립되어 치안대와 사관생도들을 이끌고 농성하던 수비대장 모스카르도 대령에게 공화군이 "항복하지 않으면 당신의 아들을 처형하겠다."고 협박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모스카르도 대령은 아들 루이스와의 마지막 통화에서 "사랑하는 내 아들아, 사나이라면 주님께 영혼을 맡기고 "그리스도 왕 만세, 스페인 만세!"를 외치며 애국자로서 당당히 죽거라." 라고 작별인사를 했으며, 루이스 역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한 것이다. 이후 루이스는 바로 처형됐다는 설도 있고, 국민파의 폭격에 대한 보복으로 처형되었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이 사건은 톨레도 구원 후 숭고한 미담으로서 국민군을 단결시키는 상징이 되었다. 톨레도 자체가 역사적으로 옛 카스티야 왕국이 무슬림들을 몰아 내고 점령한 후 마드리드가 수도가 될 때까지 수도로 삼았던 도시인지라 안그래도 우익 쪽이 침흘릴 상징성이 넘치는 도시였다. 이 이벤트는 결국 40년이 지나 프랑코 사후에도 어떠한 민주화나 체제 변화도 거부하는 언론에서는 '벙커'파라고 불린 정권 내 극우꼴통들이 이 전투에서 이름을 딴 '알카사르'라는 잡지 중심으로 결집할 만큼 당시 우파의 상징 역할을 톡톡히 했다.[220]
안 그래도 스페인 내전 초기인 1936년에는 주로 공화파의 만행들[221]을 고발하는 기사가 특히 많았는데 여기에 화룡점정을 찍어서 공화진영을 일시적이나마 악당으로 만든 셈이다. 물론 이런 이미지는 공화진영의 선전전+ 게르니카를 시작으로 나중에 서서히 알려진 국민진영의 전쟁범죄+내전 막판에 벌어진 안슐루스, 뮌헨 협정 등으로 순식간에 상쇄된다. 이미지 효과가 공화정부에 결과적으로 큰 도움이 못 되어서 그런 거지… 당시 상대적으로 중립적인 위치에 있었던 언론이 타임스지인데 여기에서는 각 진영을 부르는 호칭이 다음과 같이 바뀌었다. 백군/적군(1936년 정도)-우파/좌파(1937년 정도)-국민파/충성파(1938년 이후)
사실 양측에서 특히 쌍방은 자기네들이 크게 위태롭다고 여겨 긴장했을 때 적들에 특히 가혹했는데 대표적으로 공화파는 1936년 12월 마드리드 공방전 과정에서 형무소 내 재소자들이 안보상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여 1936년 12월에 재소자들을 수천명 단위로 처형했고[222] 이후에는 치안 책임자인 산티아고 카리요가 파라쿠에요스 학살을 벌였다.[223] 이로 인해 마드리드는 가장 적색 테러의 희생자가 많은 지역이 되었다.[224] 반대로 국민파 역시 사라고사에서 비슷한 상황에 처했고[225] 이로 인해 사라고사는 상대적으로 적은 인구에 비해 희생자 수가 상당히 크게 나왔다. 산티아고 수준은 아니라도 세비야, 말라가, 코르도바 같은 남부지역 역시 아나키스트들이 강세를 보이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국민파가 비슷한 이유에서 유달리 잔혹한 탄압을 벌였다.
일단 국민진영이고 공화진영이고 처음에는 위기의식도 강하게 느끼기도 했고 개판 5분 전인 상황에서 체계도 없이 무차별적인 학살을 저질렀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탄압도 다소 질서정연하고 효율적으로 해야 했기도 했고 주변 상황이 안정됨에 따라 행정체제가 잡히면서 법원제도 등을 통한 기소 및 선고와 같은 비교적 질서정연한 사법절차를 통해 희생자도 줄이고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던 점은 동일하다.[226] 물론 그렇다고 처형대가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처형하는 게 아예 사라지지는 않았긴 하지만. 다만 공화파는 지도부가 개입하지는 않았고 좌파 정당 기관지나 기타 좌파 언론들이 수시로 선동하고 축복을 함에 따라 집단의식으로 움직이는 좌파 성향 군중들이 계급의 적을 쓸어버리기 위해[227] 폭동을 일으키는 경향이 초반에 더 강했다.[228] 반대로 국민파에서는 간혹 팔랑헤가 개입하기도 했지만 탄압은 철저히 군부의 뜻에 따라 이루어졌고 팔랑헤가 일선에서 자체적으로 탄압하는 일도 있었겠지만 어디까지나 군부의 허용범위 내에서만 활동했다. 이에 따라 국민파는 더 탄압을 가혹하고 철저하게 하면서도 그 대상자 역시 일반인들보다 범위를 넓히더라도 노조 간부들 같은 정치 지도자들에 더 집중되었다.[229] 내전 이전부터 각종 좌익 언론이, 우파에서는 남부군 사령관 케이포 데 야노 장군 같은 유명 MC같은 이들이 정적들에 대한 절멸을 선동하는 프로파간다를 벌이는 것 역시 한동안 오래되었다.[230] 후기로 갈수록 국민진영은 특히 물자[231] 면에서 적에 대해 훨씬 더 큰 우위를 차지하게 된 국민파는 공화파의 식량난과 물자난 현상을 알아차리고 내전 막바지에는 하던 폭격도 줄이고 대신 폭격기를 동원해 빵을 뿌리는 선전작업을 수행하는 여유를 보였다. 이는 판의 미로, 콜 오브 듀티 2 : 스페인 내전, 13송이 장미 같은 각종 스페인 내전 미디어에서도 묘사된다.
국민파에서도 팔랑헤 좌파[232]는 노동자, 농민들이 좌파들에게 표 좀 던졌다고 학대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발언을 했다. 이 외에도 후안 야구에[233] 장군 같은 거물급 인사 역시 공화파 지역 내의 민간인 폭격에 대해 공개적으로 부정적인 발언을 한 바 있었다. 다만 팔랑헤 좌파는 이로 인해 몰락했고[234] 후안 야구에는 몇 주 뒤 복귀했지만 한동안 감옥에 갇혀 공개석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이런 일에서도 알 수 있듯 팔랑헤 좌파는 아이러니하게도 내전 초반에는 열심히 국민진영에서의 학살작업에 적극적으로 주도했다가 제시된 사건 외에도 국민진영에서는 경원시된 노동자, 농민들에게 정치적으로 구애하는 소위 코인질(?)을 하다 다른 우파 세력이 호소하여 프랑코에 숙청됐다. 독일에서 나치당 내부의 좌파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던 장검의 밤과 대조적으로 에디야는 숙청되었어도 처벌은 고작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 받고 복역 하다 출소 했으며 고액의 연금을 받으며 넉넉하게 생활을 하였고 1970년 마드리드에서 사망 할 때 까지 천수를 누렸다.
반면 공화파 지역에서 일어난 폭력은 대부분이 혁명적 광분[235]과 피난민 등을 통해 들은 국민파의 만행에 대한 보복적 성격으로, 전쟁 초기만 하더라도 중앙 정부의 통제가 닿지 않은 혁명적 민병대 집단에 의해 산발적으로 자행되었다. 전쟁 마지막 순간까지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국제적 동정적 여론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던 공화파 수뇌부들은 대통령 마누엘 아사냐, 라르고 카바예로 총리, 돌로레스 이바루리, 호세 디아스, 인달레시오 프리에토, 후안 가르시아 올리베르 등의 지도부 인사들이 나서서 잘 통제되지 않던 지지자들에게 "혁명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만행"을 자제할 것을 촉구하였고 실제로 해당 지역이 확실하게 공화파 정부의 통제 아래 놓이면 혁명적 민병대들이 해체되면서 막무가내식의 인민재판은 공화국 주도세력이 카바예로의 PSOE 좌파에서 네그린의 PSOE 우파로 바뀌면서 소련 NKVD의 기술지원을 받은 보다 정교한 형태의 탄압으로 형태가 바뀌었다. 실제로 내전 중 총리가 되며 내전 초기 정권의 2인자였던 후안 네그린[236][237][238]만 하더라도 밤만 되면 경호원 없이 사복 차림으로 마드리드와 발렌시아 시내를 돌아다니며 우익 인사들을 끌고 가던 민병대들을 직접 만류하고 다녔다. 하지만 반대로 위에서 나온 제5열 드립으로 인한 공포+ 대숙청 시기의 소련으로부터 직수입한 비밀경찰[239]+고문+공산당의 정권 탈취 기도로 인한 각종 팀킬행위[240]로 인한 만행들이 더 기승을 부렸다. 어찌 보면 산발적이고 야수적일 뿐이었던 만행이 비교적 위계적, 체계적인 탄압으로 바뀐 셈이다. 가톨릭 성직자, 수녀들은 주요 타겟이었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국민진영 지지자들이나 기타 시민들의 피해규모가 더 크다.[241] 이 외에도 공화진영 역시 보복 폭격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국민진영의 폭격 등의 소식을 듣게 되면 감옥에서 국민진영 지지자들이나 성직자들을 끌어내 학살하는 일들이 많았다. 이 외에도 공화진영 특유의 파벌 간 갈등으로 인해 민간인들이 학살당한 전례 또한 있다. 대표적으로 바르셀로나 5월 사태 당시의 희생자를 들 수 있다.[242] 이외에도 공화진영은 농장 등을 집단화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 집단화한 농장을 중앙 정부나 공산당이 관리할지, 카탈루냐 제네랄리타트가 관리할지, 아나키스트들이 자체적으로 관리할지를 두고서도 갈등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도 민간인 희생자가 애꿎게 발생했다.
공화진영이 소련에 금을 주고 무기를 받은 것은 스페인 경제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는데, 당시 화폐 발행 시스템상 금 보유고가 없으면[243] 아무리 화폐를 발행해 봐야 신용도가 없어서 휴지조각과 동일하게 되어버렸다. 실제로 내전 말기로 가면 공화진영의 화폐가치는 군표급으로 추락했다. 국민진영은 애시당초 반란자금 상당수를 외부에서 받았기 때문에 이런게 없었다. 이 문제는 내전 종결 후 주로 북부지역의 광물을 팔거나[244] 간단한 수준의 공산품을 수출하는 것이 대표적이었다.[245][246]
파시즘의 태생지였던 이탈리아는 2차대전 직후 국제 사회에서 복권되었지만 2차대전 당시 참전하지도 않았던 스페인은 1950년대 초반까지 국제 왕따로 남았던 게 괜한 게 아니다. 2차대전 이후 30년 간의 피비린내 나는 과거에서 벗어나 국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평화적 무드를 조성하려고 했던 유럽 국가들에게 있어서 프랑코의 스페인은 당장 역사적 기억 속에서 보여준 야만적인 잔인함의 스케일이 쉽게 용서해 주고 새로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받아 주기에는 너무 컸으며 그게 현재진행형이었다.[247]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248]은 이러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스페인 내전에 대한 나머지 세계의 기억과 이에 따른 프랑코 치하 스페인의 고립을 "민주 스페인에 대한 자유 세계의 철저한 방기와 무시는 전후 자유주의의 양심에 남아 있었던 마주하기 걸끄러운 오점으로 남았다"고 기록하였다. 그것과는 별개로 2차 세계 대전 후 세계 패권의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한 소련에 맞서 한 명의 아군도 아쉬웠던 트루먼 행정부는 프랑코의 스페인이 철저한 반소련, 반공주의 정권이라는 점에 주목해 관계 개선에 나서 협력관계를 구축했다. 프랑코 정권은 마셜 플랜에서는 배제되었지만 별개로 미국의 경제적인 원조와 군사적인 원조[249]를 받았다. 그 대가로 프랑코 정권은 미군에 기지를 제공하고 6.25 전쟁에 참전 의사를 밝히는 등의 유화적인 조치로 응수했다.[250]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피의 독재자였을지언정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중립을 지킨 것만큼은 스페인 국민들에게 더 큰 비극을 가져다주지 않은 셈이다.
스페인이 중립국이었기에 다른 유럽 국가에서 보기 드문 현상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유대인 문제다. 당시 스페인은 물론 친독 성향의 국가였던지라 당연히 독일 대사관을 중심으로 반유대주의 선전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역시 스페인은 중립국이었기에 영국과 미국 대사관도 활동했을 것이고 특히 미국 대사관의 경우 프랑코에게도 호소하는 식으로도 유대인 구호활동에 관여했다. 스페인의 대외적 입장은 '우리는 여권을 들고 합법적으로 국경을 통과하는 이들을 막지 않는다'[251] 정도였다. 반대로 특히 앙헬 산스브리스를 포함해[252]을 포함해 특히 외교관들은 일선에서 혹은 외무부를 중심으로 집단적으로 유대인 구호 활동에 나섰고 이에는 심지어 니콜라스 프랑코[253]도 관여했다. 프랑코[254]는 측근인 후안 블랑코[255]를 통해 이런 정황을 알고 있었지만 그냥 방치했다. 이런 스페인 정부 차원[256]에서 이루어진 유대인 구호 활동은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어떤 의미로 추축국 준회원 취급받던 스페인에 대한 알리바이로 기능할 수도 있었다. 반대로 4~5만 명 가량의 유대인들이 스페인의 손을 거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는데 이는 스웨덴, 바티칸, 스위스 등 다른 중립 성향의 유럽 국가들보다도 더 많은 수치다.
스페인 내전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초기에는 좌파건 우파건 각자 자기가 지지하는 쪽은 선, 반대하는 쪽은 악으로 모는 평가가 대부분이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누가 더 좋고 나쁘냐보다 내전 자체를 스페인 역사의 비극으로 여기는 경향이 점차 세를 얻게 되었다. 이 점이 스페인 내 좌우파를 막론하고 널리 합의되었고 이는 스페인이 프랑코 사후에 평화적으로 민주화가 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침묵 협약도 그렇고 23-F 당시 보여준 극우를 제외한 좌우파의 반응 역시 이런 평가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즉, 어느 한 쪽이 자기들이 절대선이고 남은 절대악이라고 우기면서 싸우기보다는 서로가 정치적으로나마 서로를 인정하게 된 것은 피비린내 나는 그 시절을 반복하기 싫다는 인식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5.1.2. 국외
그리스 독립 전쟁처럼 수많은 지식인들이 이 전쟁에 참여했기 때문에( 어니스트 헤밍웨이, 조지 오웰, 노먼 베순, 앙드레 말로, 비센테 우이도브로 등)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게르니카, 카탈로니아 찬가 등 스페인 내전을 다룬 여러 작품들이 나오기도 했다.하지만 사실 이런 "문화인"들의 참전이 전부 환영받은 것은 아니었다. 참전한 지식인들 중에는 정말로 열심히 싸운 사람들도 있었지만[257] 그저 낭만적인 환상과 작품의 소재를 찾으려는 욕망을 가지고 왔을 뿐 실제 전투에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258] 이런 전쟁터에서 아무 쓸모없는 사람의 사례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도 둘이나 등장한다.[259]
그래도 군사적 인프라가 막장이었으며 그나마 아프리카 식민지 군단 같이 믿음직한 제대로 된 전투 부대 자체가 없었던 공화파 입장에서 국제여단의 개입은 하늘이 내린 선물과 같았다. 실제로 마드리드 또한 1936년 후반기에 들어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국립 대학교[260] 캠퍼스에서 건물 하나, 방 하나 두고 치열하게 싸울 만큼 함락 위기에 몰려 있었는데 이때 국민파의 총공세를 막아 내고 결국 마드리드 포위를 풀어낸 게 방금 도착한 따끈따끈한 국제여단 병사들이었다. 국제여단원들 중에서는 1차 대전이나 전간기의 자잘한 분쟁에 참가하면서 군사적 경험을 쌓은 사람들도 많았고, 전시 경험이 없더라도 사기와 투지 하나는 엄청나게 치열했기 때문에 마드리드 공방전 당시만 하더라도 제11 국제여단은 무려 하루만에 30%의 전력을 상실하면서도 결국 국립 대학교를 비롯한 마드리드 시내를 사수할 수 있었다.
나중에 1938년 하순쯤 되자 누가 봐도 공화파의 패전이 확실시되어 국제여단원들은 이탈리아, 독일 같이 돌아갈 고향이 아예 사라진 사람들을 제외하고 모두 본국으로 돌려보내졌다. 이 중에서 영국이나 프랑스 출신 여단원들은 자국 내 여론이 공화파에 대해 동정적이라 국제 파시즘에 대항한 최초의 투사들로 환영받았던 반면[261] 미국이나 스위스, 아일랜드 대원들은 자국의 중립 노선을 위반했다고 당국에게 체포당하는 등의 수모를 당했다. 아예 돌아가자마자 감방에 끌려가거나 총살당하지 않을 조국 자체가 없었던 이탈리아나 독일, 헝가리, 오스트리아 병사들 같은 경우 전사하거나 프랑코 정권에게 잡혀 '조국'의 철저한 방기 속에 옥사하지 않고 프랑스로 탈출했던 경우 스페인 현지인 출신 망명객들과 똑같이 난민 수용 캠프에 억류당하거나 대전 발발 이후 프랑스 외인부대 같은 곳에서 투쟁을 지속하다가 노르웨이 전역 같은 사지에서 총알받이로 굴려지며 대부분 생을 마감했다.
후일담으로 내전 당시 소련과 달리 깽판치지 않으면서 그나마 스페인을 적극적으로 도우려고 했던 멕시코는 스페인 공화국이 망한 이후 수많은 공화파 인사들의 망명을 받아들였다.[262] 반-프랑코주의자/공화주의자였던 영화감독 루이스 부뉘엘도 스페인 내전 이후 멕시코로 넘어가 커리어를 이어간 케이스.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과 같이 공부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컸던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자신의 초기 필모그래피에 스페인 내전 관련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다.[263]
5.2. 참전국에 미친 영향
내전 기간 동안 전쟁 양상의 변화도 주목할 만하다. 스페인은 상술하였듯이 근대전 경험이 부족했고 사실 내전을 거치며 정예화가 되었다 할지라도 2차대전 주요 열강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내전 초기에는 한쪽 진영의 군대가 개활지로 뛰쳐나오면 반대측이 이를 맞아 나오면서 교전이 벌어졌다. 이는 나폴레옹 시대는 커녕 18세기의 전투양상 보다도 별로 나을 게 없는 것이었다. 스페인은 1차 대전 때 중립국이었기 때문에 특히 참호의 중요성이 많이 간과 되었고 심지어 몇몇 장교들의 경우에는 참호를 파고 쳐박혀 싸우는 건 남자답지 못하다는 이유로 참호 구축을 소홀히 하기도 했다.[264][265]하지만 내전 후기 즈음 들어 국민파는[266] 경험이 누적되어 보포전 제병협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정도로 성장하긴 했다.[267] 물론 소련과 독일에서 파견한 고문단과 파일럿, 물자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불과 3년만에 급격하게 변화한 전투양상과 스페인인들이 이에 빠르게 적응한 점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스페인 내전으로 인한 경험 축적 덕분에 스페인군이 동부전선에 파견한 청색사단은 당시 히틀러도 괜찮게 평가한 정예로 취급받았다. 반대 방향으로 공화파 망명객도 독일 점령하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 초기 활동과 구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자유 프랑스 군에서도 바로 그 파리 입성을 한 정예 기갑사단에 배치되는 등 동기 부여가 확실하고 숙련된 베테랑 취급을 받았다.[268]
국제여단 의용병으로 참전했던 외국인들도 본국 귀환 이후 자연스럽게 파시즘에 대한 투쟁을 이어가기 위해 2차대전 당시 각국 연합군에 입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치적으로 의심받아 장교 직위는 꿈도 못꾸고 진급에서 불이익을 받으며 지속적인 사찰 대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군부대에서는 감투정신이 투철하고 전쟁 초기 소중한 현대 총력전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훈련교관, 고참 부사관으로 쓰거나 아예 그 정치성과 영향력을 무기화해서 추축군 점령지 레지스탕스들과의 연계작전에도 중용되었다. 벌지 전투 당시 기계화부대 분대장으로 타고 가던 탱크가 판처슈렉에 맞고 분대원들이 몰상당한 상황에서 기습가한 독일군을 역관광시켜 명예 훈장을 받은 에드워드 카터 중사, 종군 경험을 살려 현대 대전기 당시 영국 홈가드 교관으로서 게릴라전, 유격전 관련 이론적 체계를 쌓은 버트 레비, 헤밍웨이 소설의 주인공 로버트 조던의 모델 중 하나로 추정되며 2차대전 때는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전선에서 배후 침투, 사보타주, 레지스탕스와의 연계 임무를 수행한 어빙 고프 대위 등이 유명한 사례. 알버트 바움러라는 미국인 공화파 항공의용대 파일럿은 내전 후에도 계속 미군에 남아 2차대전 당시 플라잉 타이거즈에도 파견되었고 훗날 6.25 전쟁 때도 미군 소속 항공 관제사로 파견됐는데 어느 날 소련 공군 미그기 통신 감청 임무 중에 소련 파일럿 콜사인을 알아내니 그게 스페인 내전 시절 자기 편대 전우들의 콜사인이라 주기적으로 감청하던 소련군 미그기 편대를 "내 전우들"이라고 부르며 웃었다는 후덜덜한 일화도 있다. 스페인 내전에서 도출된 전훈은 이후 스페인뿐 아니라 2차 대전에서 여러 국가들, 특히 독일과 소련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독일은 이 전쟁에서 Ju 87, Hs 123 급강하 폭격기, He 111, Do 17, Bf 109, 1호 전차와 PaK 36, 88mm 대공포 등 신병기를 대량으로 투입하여 각 병기의 장단점을 파악하고[269] 여기서 얻은 실전 경험을 새로운 전술을 개발하는 데 참고하여 이후 2차 대전에서 보여준 기동전의 기초를 닦았다. 다만 스페인은 산악지형이 주였고 전차의 활약이 제한적이었다는 점에서 프랑스, 폴란드, 러시아 같은 주요 전장과는 전혀 달랐고 독일은 스페인 내전의 전훈을 제한적으로 받아들였다.
소련은 독일보다도 스페인 내전의 전훈을 가장 적극적으로 반영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우선 스페인 내전은 앞서 보았듯 2차대전의 주요 전장과는 지형도 달랐고 군사기술적으로도 1차대전과 2차대전이 섞인 과도기였기 때문에 이 경우는 너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게 독이 된 케이스였다. 우선 공화파가 우수한 전차전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채로 날려먹었기 때문에 전차전에 대해서 제대로 된 교훈을 얻어내지 못했고 오히려 대숙청과 엮여서 종심작전 이론은 대놓고 폐기했고 전차군단도 폐지했다. 대신에 스페인 내전의 전훈은 T-34같은 이후 소련의 수호신급 전차의 개발이나 전투기 개발 등지에서 유용하게 써먹었다. 정치적으로 볼 때 스페인 내전의 공화파는 후반으로 갈수록 소련의 영향을 받아 인민공화국화[270]되었는데[271] 이 인민공화국화의 경험은 이후 소련이 동구권을 공산화하는 과정에서 써먹었다.
이탈리아는 스페인 내전에서 가장 큰 희생을 치르고서도 거둔 성과에 만족해서 제대로 된 교훈을 얻으려고 하지 않았다. 일단 이탈리아와 스페인이 문화적으로 유대깊은 형제국가나 진배 없고 한쪽이 다른 한쪽에 어떤 식으로건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다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원래부터 스페인 우익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지원 결정 자체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거기에 독일은 스페인에서 원료나 확보하고 프랑스를 견제하는 정도 이상으로 특별히 원하는 것은 없었지만 스페인은 만약 이탈리아의 힘이 좀 더 컸다면 이탈리아의 세력권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봐도 될 정도로 이탈리아는 독일과 비교하더라도 스페인에 미치는 영향력이 컸다.[272][273] 문제는 독일과 비교해 보더라도 이탈리아의 국력에 비추어 스페인에 지나치게 많이 퍼주고 그에 비해 얻은 것은 결과적으로 크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름 알뜰하게 스페인에서 챙길 거 다 챙기면서 지원해 줬던 독일과 소련과는 달리[274] 무솔리니는 프랑코에 그냥 마구 퍼줬고 의용군이라는 명목하에 사단 단위로 부대를 스페인에 파견했다. 소련과 독일도 이러지 않았다. 이탈리아는 이미 에티오피아 전쟁으로 막대한 전비를 소모한데다가 덤으로 국제연맹의 제재를 받아 경제사정이 영 좋지 않았다.[275] 이런 상황에서 스페인 내전 개입은 치명적이었다.[276] 군의 현대화 작업도 자금난으로 차일피일 미뤄져가는 상황에서 무솔리니가 영국과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날렸을 때, 이탈리아군은 전혀 전쟁을 치를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무솔리니는 스페인 내전에 되도 않는 오지랖을 부려 개입함으로써 몰락을 향해 한걸음 더 나아간 셈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이때 독일에서는 헤르만 괴링이 남몰래 무기를 공화군에게 팔아먹었다. 더 막장인 것은 나치 독일과 스페인 공화파 간 무기 밀거래 사이에 소련도 개입했다는 것이었다.[277] 사족으로 이때 중간에 다리 역할을 한 사람이 1차 대전 독일 제국군 에이스 중 하나로 당시 무기상인이었던 요제프 벨첸스(Josef Veltjens). 이런 무기 밀거래는 한두 번 하다 걸린 게 아니라 1937년 1월부터 내전 내내 계속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탈리아는 거의 무상으로 지원을 해 주었으나 독일은 스페인 광산의 채굴권을 착실하게 뜯어간 것도 나중에 스페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중립을 지키게 한 원인을 제공했다.[278] 물론 공식적인 중립과는 별개로 18,000명 규모의 지상군인 '청색사단'과 수백명(실전 참가는 수십명)의 조종사를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동부전선에 파견하고 여러 항구들을 유보트 보급기지로 제공했다. 그나마 이들 의용군 병력은 독일의 전황이 불리해지기 시작한 1944년 초에 스페인 본국으로 귀환했다. 청색사단의 구성원들은 다양했는데 소련으로 탈출하거나 소련에서 싸우려는 사람들도 있었고 카를로스파[279]도 있었는데 다만 주류는 광신적인 팔랑헤나 군 출신자들아었다.
프랑코의 2차대전기의 중립에 대해서는 프랑코의 현명한 줄타기라는 의견이 주류지만 비버는 이에 대해 프랑코의 무리한 요구[280]에 히틀러가 질려서 성사되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교섭이 프랑코의 중립을 위한 의도적인 어깃장이 아니라는 근거로 비버는 프랑코측의 당시 행적에 대해 기술했다. 물론 스페인의 국내적, 국외적 환경도 그 원인 중 하나다. 프랑코의 이러한 꼬장 덕에 그의 정권은 2차 세계 대전 후에도 수십년간 존속했을 뿐만 아니라 엄연한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미국과의 협력관계도 구축할 정도로 국제적인 고립도 타파했으니 아이러니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동시기에 무솔리니의 과욕이 세계 5대 강국의 일원이며 국제연맹 상임이사국이자 1차대전 승전국으로서의 국제적 지위까지 누리던 이탈리아 왕국을 완전히 파멸시킨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대조적이다.[281]
스페인 내전을 보는 관점은 여러가지가 있다. 흔히들 보는 관점은 스페인 내전을 2차대전의 프리퀼격으로 보는 것이다. 특히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연합해서 파시즘과 맞서 싸운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이것이 반드시 들어맞는다고 볼 수 없다는 관점도 있다.[282] 우선 스페인 내전의 국민파와 공화파 지지세력과 2차대전의 추축국과 연합국을 지지하는 이들이 반드시 일치하지도 않는다. 대표적으로 톨킨 같이 국민파를 지지했으면서 반추축국이었거나 적어도 이념적으로는 친국민파였던[283] 연합국 내의 일부 보수 우파들과 가톨릭 같이 이 흐름에서 이탈하는 이들을 들 수 있다. 아니면 메탁사스[284] 장제스처럼 이념적으로는 국민파에 가깝지만 2차대전에서는 연합국인 경우도 있고. 무엇보다도 2차대전 시작단계에서 국민파 최대 물주인 이탈리아는 처음에는 중립이었고 두번째 물주인 독일은 공화파 최대 물주인 소련과 야합했고 둘이 함께 폴란드를 침공했다.[285] 그리고 이 때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는 유럽의, 특히 스페인 공산당은 독소전 이전까지만 해도 2차대전을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열강들만의 전쟁이며 스페인 내전과 2차대전은 완전히 별개라고 주장하면서 무시했다. 후기 프랑코 정권의 관영학자들과 교조적 스탈린주의에 빠진 스페인 공산당 등은 둘다 스페인 내전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싸움으로 규정했다.[286] 비슷한 관점으로 러시아 내전과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주장도 있다.[287][288]
6. 관련 어록
HEMOS PASADO!
우리는 통과했다!
위 슬로건에 대항하는 국민파의 슬로건
우리는 통과했다!
위 슬로건에 대항하는 국민파의 슬로건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는 게 낫다.[289]
공화파 정치가, 돌로레스 이바루리 정작 본인은 죽는 게 낫다는 말 어기고 소련으로 도망갔다 무릎은 꿇지 않았으니까 괜찮지 않을까?서서 살았다
공화파 정치가, 돌로레스 이바루리
정의도 패배할 수 있고, 무력이 정신을 굴복시킬 수 있으며, 용기를 내도 용기에 대한 급부가 전혀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바로 스페인에서.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바로 스페인에서.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7. 주요 인물
- 국민진영 주요 인물
- 프란시스코 프랑코
-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
- 마누엘 팔 콘데[290]
- 에밀리오 몰라
- 호세 산후르호
- 호세 마리아 힐로블레스
- 후안 야구에
- 무함마드 메지안
- 호세 칼보 소텔로
- 곤살로 케이포 데 야노
- 미겔 카바네야스
- 마누엘 고데드 요피스
- 마누엘 에디야
- 호세 미얀아스트라이
- 라몬 세라노 수녜르
- 호세 모스카르도 이투아르테
- 공화진영 주요 인물
- 마누엘 아사냐
- 호세 디아스
-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 산티아고 카사레스 키로가
-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바예로
- 돌로레스 이바루리 고메스
- 후안 네그린 이 로페스
- 인달레시오 프리에토
- 호세 미아하 메난트
- 비센테 로호 유치
- 안드레우 닌 페레스
- 시프리아노 메라
- 유이스 콤파니스
- 훌리안 고르킨[291]
8. 대중문화
8.1. 문학
- 마누엘 마틴 - 38년 죽음의 밤 - 죽은 자들의 골짜기라는 제목으로 영화화.
- 어니스트 헤밍웨이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 - 영화화도 되었다.
- 조지 오웰 - 카탈로니아 찬가(Homage To Catalonia)
- 하비에르 세르카스 - 살라미나의 병사들(Soldados de Salamina) - 영화화도 되었다.
8.2. 회화
8.3. 영화
- 켄 로치 - 랜드 앤 프리덤
- 기예르모 델 토로 - 판의 미로, 악마의 등뼈[292]
- 빅토르 에리세 - 벌집의 정령, 남쪽[293]
- 카를로스 사우라 - 갈가마귀 키우기[294]
- 후앙 카를로스 메디나 - 페인리스[295]
-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296]
- 호세 마리아 신부의 길(There Be Dragons, 2011)[297]
- 호세 루이스 쿠에르다 - 마리포사
- 알렉스 데 라 이글레시아 - 광대를 위한 슬픈 발라드
-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 비우티풀[298]
- 이마뇰 유리베 - 마이 러브
- 안제이 바이다 - 재와 다이아몬드[299]
-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 주인공 알란 엠마누엘 칼손이 공화파 참전용사다.
- 비센테 아란다 - Libertarias(한국에선 프론트 라인이란 이름으로 나왔다.)
- 페드로 알모도바르 - 패러렐 마더스[300]
- 하비에르 루이스 칼데라, 알베르토 데 토로 감독 공동 연출작 - 죽은 자들의 골짜기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8.4. 음악
이하 공화파:- 리에고 찬가 - 공화국의 국가.
- Ay Carmela - 인민전선 병사들이 즐겨부르던 노래를 통칭하는 말로, 추임새로 넣이는 '룸바 라 룸바 라 룸바 라'와 '아이 카르멜라(때로 마누엘라라고 바뀌기도 한다)'의 후렴구를 특징으로 하며, 같은 멜로디에 가사만 바꿔서 불렀다. 대표적으로 'Viva la Quince Brigada', 'El Paso del Ebro'가 있고 수많은 변종이 있다. 이 중 피트 시거, 크리스티 무어 등의 포크 가수들이 리메이크했고 문명 5 스페인 테마로 쓰이기도 한 'Viva la Quince Brigada'[301]가 유명하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 바리케이드를 향해 - CNT/FAI의 조합가.
- 더 클래시 - Spanish Bombs[302]
-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 - If You Tolerate This Your Children Will Be Next
이하 국민파:
- 콘도르 군단의 분열행진곡
- 오리아멘디 - 카를로스파의 찬가. 원곡은 바스크 민요로, 바스크 지방이 공화파 편에 가담한 전황을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다만 이는 카를로스파의 본거지 역시 바스크 일대였기 때문으로, 우연의 일치가 겹친 것이다.
스페인도 지역적 성향과 이념적 분열이 딱 맞아떨어지는 나라가 아니었다. 쿠데타군 세력이 처음으로 장악해서 전쟁의 교두보가 된 세비야는 '붉은 세비야'라 불렸을 만큼 좌파적인 지방이었고, 반대로 공화국이 사수한 카탈루냐, 신 카스티야 지방은 대도시 밖으로 조금만 나가면 가난하지만 신심 깊은 자영농 중심 농촌 경제가 유지되어 계급 투쟁이 덜하고 가톨릭 문화가 매우 중요했던 시골들이 많았다.[303] 이러니 쿠데타군 쪽에서 국가적으로 사상 '정화' 한답시고 안달루시아, 아스투리아스 일대에서 노조원들을 잡아서 학살하면 좌익 공화진영에선 보복으로 감옥에 처넣었던 동네 신부 끄집어 내 쏴 죽이던게 스페인 내전기의 비극적이고도 전형적인 테러의 패턴이었다.
이 와중에 바스크 지방은 예나 지금이나 지역 자본가들이 장사로 벌어 온 돈을 노동자들과 지역 사회에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전통이 강한지라 군부와 왕실이 상징하는 스페인 중앙 국민는 싫지만 공화주의 세력을 혁명적 좌파가 장악한 다른 지방의 극렬 계급 투쟁과는 볼 일 없수다 하고 따로 돌아갔던 것. 애초에 이 동네는 21세기에도 몬드라곤 같은 각종 지방 협동조합, 개발 프로젝트에도 대기업, 노동자들이 골고루 참여하는지라 경제위기 이후에도 실업률이나 노사갈등 문제가 가장 덜한 지방이라고 평가받을 만큼 지역 내 사회적 유대감이 강한 곳이었으며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근대 자체가 싫다는 카를로스주의 운동의 역사적 안마당이기도 한지라 지방 정부는 공화파에 남았어도 개인 단위로 국민파에 투신한 골수 가톨릭, 우익 인사들도 많았다.[304] 정치적으로 바스크 자치 정부는 1937년 중순에 아예 군사적으로 쿠데타군을 물리칠 희망이 사라지자 다른 인민전선 정파를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항복했다. 다른 정파들에겐 배신이다 뭐다 욕을 굉장히 많이 먹었지만 애초에 스페인 북부 지방 일대에서 국민파의 주축을 이루었던 카를로스파 입장에선 연고가 가까운 사람들이었던지라 테러와 정치적 보복도 다른 지방에 비해 좀 온건했다.
스페인 내전 극초반에는 공화정부의 행정부를 차지하다시피 했던 공화좌파 진영의 총리 마르티네스 바리오가 당시 반군 수장으로 간주되었던[305] 에밀리오 몰라와 협상하고자 했다. 앤터니 비버에 따르면 이때 몰라의 반응이 뜻밖이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당신에게는 당신의 국민이 있고, 내게는 내 백성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과 내가 합의에 이른다면 그것은 우리 둘 다 각자의 이념과 지지자들을 배신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
8.5. 관련 서적
- 앤터니 베버 - 스페인 내전
-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 카탈로니아 찬가
8.6. 관련 게임
- Hearts of Iron 시리즈[307]
- 인민전선[311]
- 인민전선-단계적확장[312]
9. 참고 자료
- Payne, Stanley G. (2012). The Spanish civil war #. Cambridge University Press
- Antony Beevor. (2006). The Battle for Spain #. Penguin Books / 김원중 역. (2009). 스페인 내전. 교양인
10.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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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 1936 ~ 19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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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토니아-소련 국경분쟁 ,1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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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일본 국경분쟁 1938 ~ 19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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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1939 ~ 19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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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7일은
스페인령 모로코 주둔 아프리카군이 거병한 시점이고 18일은 스페인 본토의 스페인군이 들고 일어난 날짜다.
프랑코 정권 하에서는 18일을 공식적인 개시일로 간주하고 기념했다.
[2]
스페인 사회주의 노동자당, 공화좌파, 공화연합,
스페인 공산당,
통합 마르크스주의 노동자당,
조합주의당, 기타 정당(민주 연방 공화당, 국민 좌파 공화당).
[3]
미국,
프랑스,
영국,
폴란드,
벨기에,
네덜란드,
캐나다 자치령,
스웨덴,
스위스,
아일랜드 자유국,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유고슬라비아 왕국,
그리스 왕국,
헝가리 왕국,
불가리아 왕국 등 50여 개 국가에서 의용병들이 왔다.
[4]
따지고 보면 일개 노동조합 주제에 왜 독자적인 세력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나 싶겠지만, 전쟁 당시 아나키스트 CNT는 이념을 충실히 따라 처음부터 공화국 정부에 협력만 했지 지휘 같은 건 하나도 안 받는 독자적인 군대인 '연맹 민병대'(Milicia confederal)를 가지고 있었고 혁명의 과격성을 멈추려는 공화국 정부에 반발했다. 마침 PCE에 숙청당할 위기에 몰린 POUM 등이 가세해 '카탈루냐 반파시스트 민병대 중앙 위원회'(Comité Central de Milicias Antifascistas de Cataluña)라고 불린 독자적인 지휘체계를 가지고 전쟁을 수행했다. 이걸 강제로 중앙 정부군에 편입하려다가 터진 사태가 바르셀로나 5월 사태였다. 결론적으로 5월 사태에서 정치적으로는 중앙 정부에게 패배했어도 CNT 전국위원회는 군제 재편입에 있어서 버틸 수 있는 곳에서 최대한 버텼고 결국 내전 끝까지
카스티야라만차,
카탈루냐 북부에 있었던 CNT의 혁명 공동체와 독자적인 민병대는 무장해제되지 않았다.
[5]
사회주의노동자당 산하의 노동조합. 카바예로 등의 급진적인 혁명주의자들도 있었으며
1934년
아스투리아스 광부 노동자 파업에서 활약했다.
[6]
카탈루냐 공화좌파당, 카탈루냐 행동, 카탈루냐 공산당. 카탈루냐어로는 Generalitat라고 하고 카스티야어가 아닌 카탈루냐어 명칭이기 때문에 '헤'가 아닌 '제네랄리타트'라고 발음한다.
[7]
바스크 국민당, 바스크 국민 행동. 참고로 바스크 자치정부는 시장자유주의 이념으로 상당히 우파적이었고 인민전선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스페인 공화국의 바스크 자치정부에 대한 인정을 이유로 손을 잡았다.
[8]
발렌시아 좌파, 갈리시아당.
[9]
당시 스페인군 중 유일하게 실전 경험이 풍부했던 정예부대로 국민파의 핵심 전력이었다.
[A]
1937년 이후엔 통합 팔랑헤로 흡수.
[A]
[12]
스페인 농업당, 스페인 국민당,
카톨릭 포함
[13]
스페인 혁신, 스페인 행동 포함. 국왕
알폰소 13세의 복위를 주장한 세력이었다.
[A]
[15]
전통적 교우회 및 '레케테'(Requeté; 카를로스파 정예 민병대). 정통성 측면에서 하비에르의 즉위를 주장하던 파벌이었다.
[A]
[A]
[18]
군사고문단 및 정보요원, 전차, 전투기 등의 무기 지원.
[19]
라사로 카르데나스
대통령과 당시의
제도혁명당이 좌파 성향이어서 식량 및 무기 지원을 했다.
[20]
일시적인
군사통행권과 공군 비행기 및 조종사, 전차 제공.
[21]
'
콘도르 군단'을 비롯한 공군 지원 및 전차, 전투기, 대공포 등의 무기 지원 및 군사고문단 지원.
[22]
육•해•공군으로 이루어진 이탈리아 왕국군을 '이탈리아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파병.
[23]
의용군 파병 및 물자 지원.
[24]
좌익의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국민파에 대한 자금 지원 및 국민파 옹호.
[25]
바티칸과 가톨릭이 친국민파라는 것은 큰 틀에서 논란의 여지가 없으나 가톨릭은 전세계적인 종교조직이라는 특성상 그 정도도 달랐고 예외도 많았다. 스페인 국내에서야 국민파 내의 대부분의 가톨릭은 친국민진영이고, 바스크 내에서 비교적 멀쩡히 활동할 수 있었던 소수의 가톨릭은 친공화파였다. 해외의 경우 바티칸은 가톨릭을 은근슬쩍 탄압하고 교리를 마개조하는 독일과는 사이가 안 좋았기 때문에 스페인 내의 가톨릭 세력이나 카를로스파는 좀 더 대놓고 지지한 반면 국민파 스페인의 정부는 독일과 친했기 때문에 승인을 해주는 것 정도만 했고 적당히 거리를 두었다. 프랑코도 이걸 알았기 때문에 스페인 내의 교회의 특권을 바로 회복시켜주는 것도 아니고 바티칸과 협상할 때 쓰기 위해 그대로 두었다. 미국의 가톨릭은 약하게 프랑코를 지지하면서 그래도 민주주의에 대한 동정어린 시선도 보낸 반면 반대로 아일랜드는 서구에서 유일하게 대놓고 프랑코를 지지하던 자유민주국가였다.
[26]
알바니아인이었다.
공산정권 시절
엔베르 호자의 후임자가 될 것이라고 여겨졌으나 1981년 12월 18일 '자살'했고 호자의 고립주의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인민의 적'이자
유고/
CIA/
KGB의 간첩으로 격하되었다. 다만
알바니아에서는 여전히 그의 죽음을 두고 정말 자살이 맞는지 의견이 분분하며 유족들은 셰후가 살해당했다고 주장했다. 이스마일 카다레의 소설 《누가 후계자를 죽였는가》(The Successor)가 셰후의 죽음을 다루고 있다.
[27]
내전 이후 국민파의 지도자가 될 예정이었으나 내전 발발 3일만에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28]
카를로스파들의 지도자이다.
[29]
빨강은 국민파, 파랑은 공화파이다.
[30]
함께하는 세계사의 영상.
[31]
바로 이러한 문제 때문에 이후 프랑코 사후 민주화 과정에서 당시 정부는 좌우파간 합의를 얻어내는 것은 물론이고 공식적으로도 헌정체제 이행절차 자체를 국민투표를 거쳐 민주 체제를 마련했다.
[32]
이는 팔랑헤만 해당할 수 있고 경우에 따라 왕당파나 CEDA로도 확장될 수 있다.
[33]
그나마 공화좌파는 이 점에서 조금 낫기는 했지만 PSOE나 공산당, 아나키스트, POUM을 넘어가면 그냥 이런 사회주의적 요소가 훨씬 강화된 인민민주주의로 변질되게 된다.
[34]
스페인 군부, 특히 육군의 정치판은 역사적으로 꽤 복잡하다. 해군 장교들은 보수적이고 귀족적인 성향을 계속 유지했지만 육군의 경우 19세기 이래 페르난도 7세에게 맞선 리에고 장군(<
리에고 찬가>의 주인공이다.) 등과 같이 자유주의자들의 영향력도 꽤나 강했다. 군부의 정치 환경이 크게 바뀐 건
스페인령 모로코에서의
리프 전쟁이 계기가 되었다. 리프 전쟁을 계기로 스페인 내부에서는 아프리카 파견 경력이 있는 이들이 스페인군의 엘리트라는 의식을 지니고 뭉침으로써 이른바 '아프리카파'(Africasta)라는 파벌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 아프리카파 군인들이 쿠데타의 주도 세력이었다.
[35]
물론 세바스티안 포사스, 호세 미아하 메난트, 비센테 로호 유치처럼 장성들 중에서는 공화국에 충성하는 군인들이 과반수였다. 장성진들 일부는 공화정부의 숙군으로 갈려나갔거나 호세 미아하처럼 크게 정치적 야망이 없이 그냥 현재 정부를 차지한 세력에 대해 별 생각 없이 봉사한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비센테 로호의 경우에는 가장 평가가 안 좋을 때조차도 국민파 측에서 '적들 중 유일하게 제대로 된 놈'이라는 평가를 하면서 그 군사적 재능을 찬탄했고 훗날 타향살이를 마치고 귀국했을 때도
프랑코 정권이 '명장'이라며 거의 건들지 않았던 스페인 내전 중 손꼽히는 명장이었다. 국민파에 주로 가담한 것은 좀 더 젊고 야심만만했던 영관급 이하 장교들이었다.
[36]
참고로 산후르호는 바로 전 해인 1931년, 보르본 왕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며 공화국 설립에 기여한 개국공신 중 하나였다. 그러나 1931년에 발생한 카스티블랑코 사건 당시 전쟁장관 마누엘 아사냐가 산후르호의 일처리를 비난하며 한직으로 좌천시키는 바람에 원한을 품어 쿠데타를 계획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전에도 산후르호는 정치적 야망이 커서 애초에 왕정 폐지에 동조한 것도 리베라 정권이 국왕의 지지 철회로 몰락한 후 그 후임자로 본인이 될 걸 기대하고 있었으나 자신을 제끼고 다마소 베렝게르를 지목하면서 알폰소 13세의 통수를 친 것이었다.
[37]
결정적으로 1931년만 하더라도 좌파 정권에 대한 기대감이 어느 정도 있었으나 1931~1933년 사이 1차 좌파 정권 시절 좌파 정당들, 특히 사회노동당 내부의 프리에토, 베스테이로 같은 중도파가 오히려 기득권에게 잘 보이기 위해 토지개혁도 미적지근하게 하고 노동단체도 그대로 때려잡자 이 모습을 보면서 크게 실망한 아나키스트 노조 CNT가 다시 선거 불참여를 선언하며 지지를 철회한 것이 핵심이었다.
[38]
다만 이 때문에 아사냐는 자기가 제2공화국 초기에 지나치게 중도와 우파에게 유화적으로 나갔다고 착각하게 되었고 36년 총선으로 총리가 된 후에는 철저히 중도와 우파를 배제하고 극좌에 끌려다녔는데 이 과정에서 좌파와 우파 간 유혈사태에 대해 일방적으로 좌파에 유리하게 대응하였고 이는 내전의 원인 중 하나가 된다.
[39]
근데 이는 약 2년동안 준비한 반란이다. 스페인의 50개 주 중 15곳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그 중 성공한 곳이 아스투리아스 딱 한 곳이다. 그리고 잔인한 진압이라고 하는데 비슷한 시기 다른 나라들이 벌인 것에 비하면 관대한 것이 맞다. 단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PSOE는 불법화되지 않고 이후 선거에도 잘만 참여했고 이 당시에 재판을 통해 처형된 사람은 딱 둘이었다. 그런데 그 둘 중 하나는 여러 사람을 살해했고 다른 하나는 하사관임에도 반란에 가담했기 때문에 당시 일반적인 유럽 국가 기준으로도 사형에 해당했다. 반대로 좌파 인민전선은 집권하자마자 3월에 팔랑헤당부터 불법화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스페인 혁신 당수 칼보 소텔로 암살 이후 한창 상을 치르고 있을 와중에도 그가 속한 정당인 스페인 혁신의 불법화를 7월에 공산당이 의회에서 발의함으로써 불난 집에 기름을 부었다. 스탠리 페인에 따르면 이러한 조치는 그 직후 바로 내전이 터짐으로써 의회가 연기되어 법적으로는 실행되지 않았지만 사실상 폭력적으로 시행되었다.
[40]
1936년 인민전선은 선거에서 이기고 아스투리아스 혁명으로 형사처벌받은 이들을 대거 사면하고 손해배상도 하는 반면 반대로 당시 정부 아래에서 진압군으로 참여한 이들의 가혹행위를 단죄하는 법안을 제출하는데 이는 이후 프랑코 정권이 한 소위 '거꾸로 선 정의'(프랑코 정권의 수립 공신이면서 초창기 실세였던 세라노 수녜르가 일기장에서 쓴 그 표현)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41]
레룩스가 중도우파 진영에서 상대적으로 친CEDA였던 것과 달리 알칼라사모라는 반CEDA였다. 레룩스의 급진당이 부패 스캔들로 좌우파 양쪽에서 얻어맞을 때 알칼라사모라도 급진당을 똑같이 팼다.
[42]
스탠리 페인은 이를 두고 순전히 19세기적인 전민주주의적 정치질이면서 중도는 이미 경쟁력을 잃어버렸고 거기에 가장 책임이 있는 사람은 알칼라사모라라고 지적했다.
[43]
인민전선의 주요 분파이며 상대적으로 좌파를 담당했다. 카바예로의 과격한 성향과 혁명 운운한 발언 및 UGT(노동자 총연맹)의 잦은 파업과 폭동으로 인해서 우파에게는 가장 위협스러운 정당이었다. 내전 당시 총리나 장관을 맡은 대표적인 인물인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바예로와 인달레시오 프리에토, 후안 네그린, 훌리안 베스테이로 등이 소속된 정당이었다. 비교적 온건했던 프리에토와 베스테이로는 초반에는 CNT를 위시한 혁명 극좌를 너무 싫어하여 공산당과 협력했지만 그 이후에는 공산당과의 협력을 반대했고, 라르고 카바예로는 제2공화국 정부를 그저 자기들의 혁명의 길 중간에 놓인 스페인판
케렌스키 정부 정도로 보고 이들을 혁명으로 타도하며 부르주아들을 없애 버려야 한다고 공공연하게 주장하고 다녔다. 이는 선거로 집권한 좌파 인민전선 중 비교적 중도적인 공화좌파 진영이 스페인 내전 초반에 사회주의자들을 경계해 대응을 못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그로 인해 공화좌파가 정권을 잃어 카바예로가 총리가 되었지만 점차 소련의 괴뢰나 다름없게 되었고 동지들을 가차없이 숙청하면서 자기들의 지지기반을 흡수하려던 공산당의 활동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결국 카바예로는 말라가 함락과 바르셀로나 5월 사태를 계기로 공산당의 압력을 받고 물러나게 되었다. 이후 집권한 네그린은 온건한 성향에도 불구하고 공산당과의 협력을 주도해서 공화정부를 소련에 팔아넘겼다는 비판을 받았다. 주로 노동자 계층이 지지기반이었다.
[44]
인민전선의 주도 분파 중 하나로 1936년까지만 해도 대통령, 총리, 장관직의 대다수를 차지한 정당이었다. 내전 당시 대통령이었던 아사냐가 이끄는 중도좌파였다. 그러나 당시의 스페인의 혼란상을 이끌 지도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해서 아나키스트 CNT나 공산당 등 과격주의자들의 부상을 막지 못했고 허수아비로 전락하게 되었다. 카탈루냐 공화좌파라는 동맹정당이 있었으며 주로 지식인 계층과 공화주의자들이 지지기반이었다.
[45]
중도좌파 성향으로, 인민전선에서 상대적으로 우파를 담당했으며 원래 진보정당이었던 레룩스의 급진공화당이 반동적 성향의 CEDA와 협력하는 것을 거부하며 뛰쳐나온 정당이었다. 주로 진보적인 사업가나 전문직 종사자들이 지지기반이었다.
[46]
원래는 세력이 약했으나 스페인 내전 이후 소련의 지원을 받아 세력을 대규모로 팽창시켰다. 초기에는 공화진영 내 고질적인 결함인 분파주의와 지역주의를 극복하고, 민주공화국의 깃발 아래 중앙정부 중심의 통일된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로 인해 온건파들의 지지를 받아 사회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쥐게 되었다. 겉으로는 공화국 내각의 중요 직책을 차지하지 않았으나 스페인 주재
NKVD와
소련군의 위협으로 실질적으로 공화정부를 조종했다. 후에 CNT, POUM 등의 공화국 내의 동지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고 네그린과 협력하며 공화정부를 내분과 타락으로 몰고 가 멸망시킨 주범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카탈루냐 공산당'이라는 동맹 정당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사회당에 비해 숫자는 현저히 적었지만 모자라는 쪽수를 코민테른의 군사정치적 인프라 지원과 철저한 조직력과 일관적인 정치전략으로 메움으로써 네그린 정부 시기에는 제한적으로나마 지배적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디아스와 이바루리는 개인적으로 숙청 대상 인사들을 구조한 적이 있었으나 소련 고문단의 악행이 매우 심했다. 오죽하면 내전 막판에 고문단이 모스크바로 철수하자 스페인 공산당원들마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정도였다.(하지만 이는 양면적인 속성이 있었다. 이는 소련이 공화진영에 대한 지원을 중단한다는 의미도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대에 이는 소련이 스페인에 아직 신경을 쓴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고문과 살해 등의 범죄 증거를 숨기기 위해서 스탈린은
대숙청 기간 동안 스페인에 있었던 고문단과 NKVD 요원 대부분을 숙청했다. 다만 증거를 없애는 것 외에도 이들을 서방 자본주의 세계에 오염된 이들로 본 것도 있다. 스페인에서 행패 부리고 소련으로 돌아오자마자 똑같은 방법으로 모가지(문자 그대로)가 날아간 구
볼셰비키 원로 중 하나가
러시아 혁명 당시 우크라이나 볼셰비키의 지도자였던 블라디미르 안토노프옵세옌코였다.
[47]
초반에는
트로츠키주의 성향이 있었으나 이후
트로츠키와 결별했으며 CNT처럼 공산당에게 매우 큰 팀킬을 당해 사실상 당이 붕괴했다. 당수인 닌도 마드리드의 NKVD 본부로 끌려가서 고문 끝에 처형당했다.
[48]
반동적 보수정당들의 연합체였으며 가톨릭을 주된 정체성으로 삼은 교권주의적 정당이었다. 1933년 선거에서 좌파 정권의 혼란과 분열을 틈타 의회에서 다수석을 차지했지만 대통령이었던 알칼라사모라가 힐로블레스를 싫어했기 때문에 알레한드로 레룩스의 급진공화당에게 총리직과 주요 장관직을 주어서 권력이 없는 상태였지만 급진공화당의 여러 추문과 정권의 불안정성으로 1934년쯤부터는 정부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1931년~1933년의 공화주의적 개혁을 폐지했다. 그러나 끝내는 알칼라사모라가 레룩스와 힐로블레스의 반동적 정책들을 거부해서 결국 1936년에 선거를 치르게 되었으며 알폰소 왕당파의 '스페인 혁신'(RE)과 카를로스파의 '전통적 교우회'(CT), 카탈루냐 부르주아의 '카탈루냐 연맹'(LC)과 함께 국민전선을 구성해서 지주, 자본가 및 가톨릭 교회의 전폭적 지원을 받았지만 간발의 차이로 인민전선에게 패배했다. 초기에는 법질서를 준수하는[313] 교권 보수주의적인 성향이었지만 점차 반공화주의적 유사 파시즘적 정당이 되었으며 결국 선거 패배[314] 후에는 힐로블레스가 지도력을 잃으면서 당이 와해되어 내전 중이었던 1937년 프랑코의 명령에 의해 팔랑헤당과 통합되었다.
[49]
한때는 혁명적이고 반교권적이었으나 우파로 전향한 레룩스가 이끈 정당으로 1933년 권력을 잡은 후 점차 기득권에 매몰되어 부정부패와 무능으로 점철되었다. 1936년, 대규모 부정부패 스캔들로 결국 스페인 정치 불안정성에 크게 기여했으며 당내 진보적 성향의 사람들은 '공화연맹'을 따로 창설해서 인민전선을 구성했으며, 보수적인 성향의 사람들은 CEDA와 협력했다. 주로 자본가들이 지지했다.
[50]
보수적인 공화주의 정당으로 원래 이름은 '자유공화우파'였다. 중도우파 성향이었지만 당의 애매한 정체성과 노선으로 인해 당내 보수파가 분당해서 '보수공화당'을 만드는 등 쇠퇴하다가 결국 1936년 선거를 계기로 무너졌다.
[51]
스탠리 페인은 알칼라사모라를 스페인 제2공화국을 몰락시킨 숨겨진 트롤러 중 하나로 보았다. 본인은 중도 계열이면서 같은 중도 계열인 레룩스와 우파의 CEDA를 반대하여(막상 본인은 스페인 내전 이후 안달루시아에서 국민진영의 사실상 총독이 된 케이포 데 야노의 장인어른이었다.) 자기 정당이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중도정당이 되도록 하게 하고자 부패 스캔들 당시 좌우파와 같이 급진당을 비토하고 1936년 2월 총선을 치르게 하였지만 결국에는 총선 결과 정국 주도권을 인민전선에 넘겨주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민전선의 지지를 받은 것도 아니고 인민전선은 이후 아스투리아스 반란의 뒤처리를 두고 알칼라사모라와 사소한 충돌을 겪은 이후 알칼라사모라를 탄핵했고 결국 공화좌파 소속 아사냐가 후임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본인은 해외에 망명해 있다가 내전 발발 이후 공화파 폭도가 자기의 자택을 털었다는 소식을 듣고 프랑스, 아르헨티나를 전전하다 사망했다.
[52]
마우라는 주로 해외로 도피한 중도우파 인사들과 달리 공화파에 남아있었다. 초기에 인민전선 민병대에게 습격당했으나 프리에토의 도움으로 보호를 받은 후, 나중에 네그린 정부를 지지했다.
[53]
1932년 자유공화우파 내의 분란으로 생긴 정당이었다. 역시나 별 존재감 없이 있다가 1936년 선거에서 무너졌다.
[54]
엄밀히 말하면 CNT는 인민전선은 아니었기 때문에 팔랑헤 수준은 아니라도 좌파 정부 하에서 필요하다면 형식적인 처벌은 받았다. 다만 개인적 차원에서 인민전선을 지지하면 감옥에 갇힌 동지들이 풀려날 여지가 크다고 생각했기에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인민전선에 투표했다.
[55]
엄밀히 말하면 총선에서 제1당은 여전히 CEDA였다. 하지만 좌파는 공화 좌파와 사회당과 달리 다른 좌파 성향의 중소 정당들도 나름 성과를 거둔 것과 달리 우파는 CEDA 외에는 의석 면에서 지지부진했다.
[56]
스탠리 페인은 최근 저서에서 1936년 당시 일선에서 부정선거가 이뤄졌을 가능성을 진지하게 주장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부정선거는 4단계에 걸쳐 이루어졌다. 1. 선거일인 2월 16일 개표 과정에서 좌파 군중들이 다수 도시에서 투표소에 난입했고 그 이후 좌파에 대한 몰표가 나왔으며. 2. 2월 16일 좌파가 과반의석을 차지하고 정부를 구성한 후 이런 식으로 군중이 난입해서 결과가 불분명하다고 간주된 지역에서 재선거를 했는데 일반적인 지역 정치색에 맞지 않게 좌파가 당선된 점, 3. 제2공화국 헌법상 선거로 이긴 의회는 이후 위원회를 열어 개표결과를 복기하고 선거과정에서 하자가 있었던 경우 해당 지역구의 결과를 취소하거나 당선자를 바꿀 수 있었는데 이것 자체는 중도-우파 연정도 했던 원래대로라면 합법적인 조치지만 좌파는 이 과정에서 일종의 재량의 일탈남용을 저질러 결과를 좌파에 유리하게 짜맞췄다는 점, 4. 추후 치러진 쿠엔카 지역의 보궐선거에서 우파 후보를 협박해 사퇴시킴으로써 좌파가 이겼다는 점을 제기하고 있다. 이를 두고 스탠리 페인은 선거 민주주의는 내전 시작 한참 전에 명백하게 끝장났으며 내전은 분명 선거민주주의의 종말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였다고도 했다. 여튼 이런 과정을 통해 2월 16일 당시 기준으로는 단순 과반이었던 좌파는 추가로 의석을 얻어 개헌선을 확보하게 되었다. 여기에 내전이 터지면서 우파 의원들 상당수, 중도파 일부가 국민진영에 합류함에 따라 내전기 내내 공화파 의회는 바스크 자치법을 통과시킨 것 외에 정치 기구로서는 그냥 무력화되었고 스페인 공화파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라기보다 사실상 소련이 배후에서 조종하고 사회당, 공산당을 위시한 주요 파벌들이 이끄는 일종의 과두제처럼 돌아가게 되었다.
[57]
근데 사실 카바예로는 인민전선이 승리하자 승리에 대한 보상으로 지방에서 혁명 비슷한 것을 시행할 수 있었는데 특히 중남부를 중심으로 토지에 대한 합법적 혹은 불법적인 몰수가 대거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농민들이 대거 알박기를 시전하게 되었다. 이 밖에도 고용에 대한 무거운 규제를 통해 생산비가 배 이상으로 상승함에 따라 경영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58]
Payne, Stanley G. The Spanish civil war.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2. p. 59, 60
[59]
참고로 제2공화국은 헌법상 재산권 보호를 명시했음에도 피해자들이 겪은 위에서 제시한 것과 같은 재산권 침해 조치에 대해서는 그 어떠한 사법적, 행정적인 구제도 불가능했다.
[60]
주로 공화국 수호법이 그 근거 법률이 되었는데 공화파가 한 검열은 독재정권이라는 이전의 왕정제보다 더 심각했다고 한다.
[61]
이후 반프랑코 활동을 한 스페인 정치인 마다리아가는 좌파는 1936년 반란을 비난할 자격을 잃었다고까지 했다.
#
[62]
스탠리 페인은 내전 발발 3주 전 아사냐/카사레스 키로가 정부의 정책이었는데 무장 충돌이 일어날 것이라는 심각한 위협을 무시하면서 반대세력을 경멸적으로 거부했으며 겉보기에 반대세력의 반란 원인을 제공하게 된 모욕과 도발 정책을 유지했다고 하여 마지막에는 좌파에게도 반란 원인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Payne, Stanley G. The Spanish civil war.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2. p. 229
[63]
# 더 정확히는 해당 기사에서 보이듯 좌파의 뻔뻔함과 중도의 부주의, 우파의 비겁함을 내전의 원인으로 지적했다.
[64]
에밀리오 몰라만 해도 원래는 파시스트 이탈리아식 정부가 아니라 포르투갈식 공화독재 모델로 가되 문맹자와 범죄자만 빼고 유권자들이 선거로 새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65]
비슷한 성향의 포르투갈 UN(Estado novo)의
살라자르와는 달리 힐로블레스는 선거 패배 이후에는 같은 우파 진영을 비난하고 모욕하는 등 비정상적인 행보를 보였으며 이에 따라서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칼보 소텔로에게 지지층을 빼앗겼다.(소텔로와도 사이가 좋지 않아서 심지어는 소텔로 암살 의혹까지 받았다) 내전 이후에는 조용히 포르투갈로 망명했고 웃기게도 적이었던 망명 공화정부 인사들과 교류하기도 했다.
[66]
실제로 당시 좌파 계열 신문들의 지면에는 우파들을 '근절'시켜야 한다는 기사가 몇 달째 실리고 있었고 소텔로 암살사건 이전 몇 개월 간 크고 작은 우파 인사 대상 암살 및 폭력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67]
다만 3월 이후 카나리아로 유배를 가버렸기 때문에 관여라면 모를까 주도는 불가능했다.
[68]
2월의 선거에서 인민전선이 승리하여 파시스트들이 쿠데타를 감행했다.
[69]
NO PASARÁN. 이 말은 안티파 사이에서 유명한 구호가 되었다. 출처를 엄밀히 따지면
베르됭 전투 당시
로베르 니벨이 했던 말인 그들은 지나가지 못한다 (Ils ne passeront pas)의 인용이다. 이에 맞서서 국민파 측은 "우리는 통과했다(HEMOS PASADO)!"는 구호를 내놓아 대항했다.
[70]
스페인 공산당 소속 정치인으로, 스페인 내전이 파시스트들의 승리로 끝난 후
소련으로 망명했다가 민주화 이후 81세의 나이로 고국에 돌아와 공산당 소속으로 다시 국회의원에 선출된 인물이다.
[71]
그리고 북한과 전쟁도 치렀고 곳곳에 군 부대가 있는 대한민국조차도 2번의 쿠데타를 막지 못해, 특히 12.12는 육군본부 측이 소위 신사협정과 북한을 고려해 망설이는 가운데 반란군이 무작정 서울로 진입해 최규하 대통령 등 요인을 확보하고 요충지를 장악하면서 대세가 결정되었다.
[72]
대표적으로 아브드 엘 크림의
리프 전쟁과 샤이크 마 알아이아인의 봉기가 있었다.
[73]
러시아 혁명 당시
케렌스키가 지도하던
러시아 공화국 육군의 총사령관
라브르 코르닐로프는 케렌스키의 임시정부에 대해 쿠데타를 일으켰고 코르닐로프의 쿠데타를 진압하기 위해 케렌스키 임시정부는
트로츠키를 석방하고 노동자들에게 무기를 뿌렸다. 그 결과 코르닐로프의 쿠데타는 진압했지만 케렌스키 정부는
볼셰비키들의 손에 전복당했다. 즉, 러시아 혁명의 사례를 참고할 때 당시 중도파가 차지한 스페인 제2공화국 정부는 반란을 일으킨 우파도, 선거철 중 반란을 운운했고 실제 지방 폭동도 좀 일으켜 본 좌파도 믿을 수 없었다. 당시 공화파에 있었던 군인들이 봤을 때도 이런 극좌 폭도들은 군사적으로는 잉여기도 했고 실제로 이런 폭도들에게 무기를 뿌린 결과 대도시의 반란을 일시적으로 제압은 했지만 그 이후에는 이들 무기를 쥔 폭도들이 우파와 교회를 상대로 대대적인 적색 테러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들 폭도들은 군사적 한계가 뚜렷했기 때문에 대도시 방어에 관여한 거 외에는 특별히 군사적으로 기여하는 바가 없었고 이 때문에
소련의
붉은 군대를 모델로 정규군 해산 이후 새로 창설된 공화파의 인민군은 이들 민병대를 디스하게 되었다.
[74]
대공황이 스페인 경제에 미친 타격은 제한적이었지만 그건 도시권에나 그랬고 지방 향촌은 상당히 타격을 받았다. 거기에 후술할 토지 몰수와 좌파의 경제규제로 인해 생산비용이 폭증하고 자본이 이탈하면서 경제는 더 타격을 받았다.
[75]
이 갈등이라는 건 공화정부가 지주들에게 훨씬 더 막대한 임금 부담과 저가 소작료를, 원치 않는 노동자들의 채용을 강요하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소작농들이 토지를 강탈, 점유한 데 따른 것이다. 참고로 이런 토지의 강탈, 점유행위 중 일부는 좌파 정부가 법적으로 공인하기도 했고 지주들이 이에 대해 법적, 행정적으로 맞설 수단 자체는 거의 봉쇄되었다. 지주들 땅 좀 뺏어서 소작농들에게 퍼주는 게 무슨 문제냐고 할 수 있었겠지만 문제는 공화국이 헌법상 재산권을 인정하는 나라임에도 법적 절차를 제대로 거치지 않고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76]
이랬으니 물론 내전 도중, 그리고 이후 우파 세력의 가장 집중적인 학살이 벌어진 지방이기도 하다. 이는 이 지역이 하필 잔학행위에 익숙한 아프리카군이 마드리드로 진격하면서 한 것도 있고, 내전 추기에 자기들이 약하고 적이 강하기 때문에 기선을 제압해야 한다는 군사전략적 측면에서 이루어진 것도 있고, 후술하듯 어느 정도 우익의 영향력도 있긴 한 지역 특성에도 기인한다.
[77]
안달루시아 지역은 좌경화가 강한 지역이면서 기성 지주들도 그렇고 동시에 팔랑헤나 카를로스파 같은 대중적 영향력이 좀 있는 우익들도 지점을 낸 지역이었다. 특히 카를로스파는 한 때 자기네 본거지인 나바라 외에 마드리드와 더불어 가장 중시한 지역이기도 했다. 오늘날의
VOX도 원래는 안달루시아 지역정당 출신이었다.
[78]
대지주 귀족 가문들이 기업화된 다국적 농업 회사로 바뀌었을 뿐 안달루시아 지방의 토지 분배 문제나 경제적 낙후성 등은 현대까지 와서도 해결이 안 된 채 결국 심각한 인구 유출을 겪고 있어 안달루시아에서 현대까지 끼치는 스페인 내전의 그림자는 한층 더 짙지만 그래도 프랑코 사후로는 주도 세비야와
말라가,
그라나다 등이 관광거점으로 떠오르면서 어느 정도 살아난 편이다. AVE 역시 최초 개통이 세비야였을 정도로 나름대로 중앙정부에서 신경써 주기도 했다.
[79]
세비야를 함락한 공로 덕분에 전직 공화파 케이포 데 야노는 순식간에 국민파 서열로 보더라도 북부를 장악한 몰라와 핵심 전투군사조직인 아프리카군을 장악한 프랑코에 맞먹는 거물로 성장했다.
[80]
원래
대항해시대 시절만 하더라도 세비야까지 배가 들어올 수 있었지만 강에 퇴적물이 쌓이면서 19세기 정도에 세비야의 항구 기능은 거의 사라졌고 카디스와
말라가가 대신에 뜨기 시작했다. 다만 말라가는 세비야 기준으로 카디스보다 훨씬 더 멀리(도로교통으로 세비야-말라가는 1시간 반 이상이 걸린다) 있으며 말라가에서 대서양으로 나가려면 결국 카디스, 그리고
지브롤터 앞으로 지나가야 한다.
[81]
이때 중재격으로 관여한 인물이
오토자이로의 발명가 후안 데 라 시에르바(Juan de la Cierva)이다.
[82]
가령 1936년 8월 5일 해협수송의 경우 독일제
Ju 52 수송기와
Do 17 폭격기가 엄호에 동원되었다. 8월 7일에는 공화국 해군의
드레드노트급 전함 하이메 1세(ESPS Jaime I)와 경순양함 Liberted(ESPS Liberted)가 아프리카 군단의 상륙지점인 지브롤터 항구와 마주한 항구도시 알헤시라스(Algeciras)를 포격하고 건보트 Dato를 손상시켰다. 그러나 독일 융커스 폭격기와 이탈리아 폭격기가 전함 하이메 1세에 큰 손상을 입혔고
도이칠란트급 장갑함 도이칠란트(Deutschland)와 아트미랄 셰어(Admiral Scheer)가 투입되자 공화파 해군은 더이상 해협 견제를 할 수 없었다.
[83]
문제는 이 입장을 내건 CEDA의 힐로블레스조차도 내전 발발 이후 우파들 사이에서는 '피할 수 없고 그렇기에 진작에 시작했어야 할 내전을 저 놈 때문에 늦게 시작했다'는 생각이 널리 퍼짐에 따라 일종의 왕따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다.
[84]
공화 우파는 왕정 시대만 하더라도 좌파들과 함께 왕정 타도 및 정교분리 공화국 수립에 정력적으로 참여한 정파였기에 그 계보나 성향상 일반적인 우파와는 딴판이라 스탠리 페인과 같은 일부 역사가들은 공화 우파를 일반적인 우파가 아니라 중도파라고 하기도 했다.
[85]
공화국을 싫어했던 것은 맞지만, 조건으로 가톨릭 국교화와 왕정복고를 내걸었는데 포르투갈식 공화주의 군사독재 모델을 생각하던 몰라는 이를 받아들이길 꺼려 협상이 난항을 겪었다. 카를로스파가 봉기에 참여한 후에도 몰라는 카를로스파의 왕정 깃발을 끌어내리는 태도를 보였고 사실 카를로스파도 몰라보다는 산후르호를 보고 봉기에 가담했다. 다만, 산후르호는 봉기 3일만에 비행기 추락사고로 추락사해 버리고 몰라는 그나마 얼굴이라도 익숙하지 모로코에서 기어올라온 생판 남인 프랑코가 국민진영의 최고권력자가 되면서 카를로스파는 국민진영 내부 정치싸움에서도 다소 밀리게 된다.
[86]
사실 몰라 본인도 호세 칼보 소텔로 암살 전까지 이런 쿠데타 성공에 대해 의심하고 실패하면 파리로 도망갈 생각을 했다. 적어도 이 때 시점에서는 프랑코를 포함해 대부분의 군인들은 좌파가 더 강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쿠데타에 직접 관여하기를 꺼렸다. 군부만 그런 것도 아니고 좌파들도 성향을 막론하고 자기들이 군부나 우파보다 더 강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내전 초반에는 군부나 우파가 오히려 불안해했다.
[87]
한 편으로는 공화정부에도 연락해서 쿠데타 가능성을 경고한 것도 이 때 일어났다.
[88]
프랑코가 굼뜨게 움직인 것에는 여러 평가와 가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독일군은 프랑코가 너무 느리게 움직인다면서 불평을 쏟아냈다. 한 편 프랑코는 특히 카탈루냐에 진격할 경우 전통적으로 스페인에 일이 터질 때마다 간섭했던 프랑스가 움직이지 않을까 조심했다. 이 외에도 사실 프랑코는 전격적으로 단숨에 마드리드를 먹기보다(단숨에 전쟁에서 이기더라도 좌파들이 여전히 살아있는 한 다시금 들고 일어날 것을 우려해) 여유있고 안전하게 좌파들을 하나하나 쓸어버리고 추가로 공화국에게 소모전을 걸어 공화진영이 물자 부족에 시달리도록 유도했다는 설도 있다. 실제로 내전 말기로 갈수록 공화진영은 각종 생필품 부족에 시달렸다. 특히 내전 막바지에 마드리드에서는 국민진영이 물자에 여유가 생겨 항공기로 빵을 뿌려가면서 선전 활동을 수행하는 동시에 공화진영에서는 빵에 독이 들었다는 식의
가짜 뉴스를 뿌리는 식으로 대응하곤 했다.
[89]
그 높은 사기는 내전이 지속되고 공화진영 내 물자가 부족해지면서 사람들이 피로를 겪음에 따라 1937~1938년부터 슬슬 고갈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기가 높다는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었는데 뽕은 차기 쉽지만 효율성은 떨어지는
반자이 돌격식 군사적 낭비를 유발했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중앙정부와의 정치적 갈등과 맞물려 일선 부대의 사기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아나키스트들은 지휘 체계의 단일화에 미적댔다. 상대편인 국민파는 그나마 일선에서 싸울 인력을 충분히 공급하면서 상대적으로 프랑코에 반항할 요인이 있었던 카를로스파조차도 정규군 군단으로 통합된 것과 대조된다.
[90]
똑같이 공업화된 지역이지만 좌익/아나키즘 세력이 강했던 카탈루냐와 달리 바스크는 우익/보수적 색채가 강한 지역이었다. 산업화 당시 바스크 지역은 자본가들이 유럽, 아메리카와 장사해 번 돈을 지역 사회에 적극적으로 투자했기에 현지 산업 노동자들과 소위 '민족 자본가'의 갈등이 심하지 않은 편이었고 바스크 가톨릭 사제들도 스페인 전국 규모의 극우 정치판과 거리를 두어 바스크 지방 자체가 전반적으로 스페인의 다른 지방보다 좌우 계급/이념 갈등, 세속주의/가톨릭 교권 사이의 갈등이 확연하게 적었다. 때문에 바스크 지역은 좌익/아나키즘 세력이 날뛰던 공화국 중앙 정부를 혐오했지만 내전에서 싸워야 하는 상대가 하나의 스페인을 주창하며 소수문화를 힘으로 찍어누르려는 프랑코니까 어쩔 수 없이 그나마 자치권 확대를 약속한 공화국 중앙 정부한테 협력한 것이었다.
[91]
반대로 똑같은
바스크어권인
나바라는 카를로스파의 본거지 격인 곳이었고 그래서 반란이 일어나자 재빠르게 레케테에게 장악당했다.
[92]
자유주의/공화주의자, 공산당(PCE), 사회주의자(PSOE)들은 '우선 전쟁부터 이기고 보자'고 했으나 아나코-생디칼리스트(CNT)들과 평의회 공산주의자들(POUM)은 스페인에 궁극적인 사회혁명을 가져오는 것이 목표였다. 물론 공산당도 궁극적으로는 소련처럼 공산독재를 수립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일단은
코민테른의 명에 따라 자유주의 공화국을 보조했다.
[93]
이후 아나키스트들과 집권여당 중 상대적으로 PSOE와 친했던 라르고 카바예로가 밀려났고 후안 네그린이 집권하면서 스페인 공화국은 공산당이 언론, 군과 정부 내의 관료를 차지함으로써 사실상 실세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와 가장 비슷한 방식으로 굴러가던 나라가 바로
만주국이다.
[94]
몰라가 마드리드 공세를 앞두고 기자들에게 "우리에게는 공세에 참가할 4개 부대 외에도 전투가 시작되면 마드리드 안에서 봉기할 '
제5열'이 있다!!"고 허세를 부린 데서 유래된 말. 몰라의 마드리드 공세 자체는 탈탈 털렸고 제5열 그런 것도 전혀 없었지만, 이후 '제5열'은 공화군 내에서 일종의 도시전설이 되어 버렸으며 이후 다른 나라에서도
오열(五列)은 첩자, 간첩과 같은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원작이었던 TV 드라마 시리즈의 한국 방영 당시 제목이 "제5전선"이었다.
[95]
당시 소련과 공산당은 특히 안드레우 닌을 위시한 POUM당과 아나키스트들을 프랑코와 놀아나는
트로츠키주의자로 모는 언플을 심하게 했다.
[96]
의외로 장성급 중에는 호세 미아하 메난트와 비센테 로호 유치를 포함해 공화파에 남은 사람들이 더 많아 국민파에 가담한 장성급 중 현직 소장은 프랑코 포함 4명이었고 준장은 그보단 많아 장성급은 48%가 반란군이었고(공화파에 남은 장성의 비중은 52%) 영관급의 비중은 훨씬 더 높았다. 영관급이 이렇게 많이 가담한 데에는 한 건 크게 터뜨려서 출세하고 싶은 열망도 있을 것이고, 이들이 볼 때 연배나 기수가 비슷한 프랑코가 공을 세워 34세에 준장으로 진급함으로써 유럽 최연소 장군 타이틀까지 달았을 정도로 젊은 나이에 출세했기 때문에 이들 중 프랑코의 팬들이 많았기 때문인 것도 있다. 실제로 프랑코와 소장 계급인 케이포 데 야노와 한 때 프랑코의 외인부대 상관이었다가 내전기에는 최측근으로 활동한 예비역 준장 호세 미얀아스트라이는 프랑코보다 무려 12~15살이나 더 많아 그 시기 코흘리개였던 프랑코와 달리 엄연히 장교로서
미국-스페인 전쟁에도 참전했을 정도로 세대 차이가 뚜렷했다. 그 당시 프랑코의 육사 동기이면서 국민진영 내에서 독일군도 인정한 맹장이었던 후안 야구에조차도 내전 발발 당시에는 3계급 아래인 중령에 불과했다.
[97]
프랑코는 반란 참가를 거부한 장교들을 잡히는 대로 처형했다. 심지어 프랑코의 사촌도 반란에 참여하기를 거절했다가 총살당했다고 한다.(당시 아프리카에서 근무중이었던 프랑코의 사촌은 계급은 대위였으며 전투에서 패배하고 붙잡혀 총살당했다)
[98]
사라고사 군 사령관이자 프랑코 이전에 임시로 국민진영에서 바지사장으로나마 수장을 맡은 미겔 카바네야스는 내전 초반에는 딱히 어느 쪽에 가담할지 결정을 안 했으나 공화진영이 포섭하기 위해 친구를 보내자 그 친구를 총살하고 국민파 가담을 결정했다.
[99]
국민진영의 수도 역할을 맡은 부르고스에서는 현지 사령관인 도밍고 바테트 장군은 쿠데타에 가담하기는 커녕 오히려 쿠데타에 가담하려는 부대 병사들의 소요를 막으려고 하였으나 부관인 참모장이 그를 배신하여 체포한 뒤 부대 전체가 국민파에 합류했다. 오비에도에서는 해당 지역 군사령관인
안토니오 아란다 마타 대령이 공화국 지지자로 명망이 높아 별 의심을 안하고 있었는데. 쿠데타가 발생하자 아란다 대령은 국민파에 합류한 뒤 공화국에 충성하는 노동자들을 상대로 마드리드를 지키자고 선동해 오비에도 바깥으로 향하게 한 뒤, 오비에도를 장악해 현지 지사인
이시드로 리아르테 로신과 현지 돌격경찰대 대장인
알폰소 로스 에르난데스를 포로로 잡았다.
그라나다에서는 현지 사령관인
미겔 캄핀스 장군이 공화정부 편이어서 지사에게 부하 장교들을 믿어도 된다고 장담했다. 그런데 휘하 장교 두 명이 국민파에 가담해 캄핀스 장군을 체포한 후 그라나다를 점령했다. 그 후 캄핀스 장군은 케이포 데 야노의 명령에 따라 사형 판결을 받았는데 캄핀스의 친구인 프랑코가 케이포 데 야노에게 직접 친필 편지를 보내 감형을 요청했으나 데 야노는 프랑코의 편지를 씹었다고 한다.
[100]
고속도로를 비롯한 광역시외의 경찰력을 담당하는 군경 조직이다. 비슷한 시기 도심의 소요사태는 돌격경찰대(Guardia de asalto)가 담당했는데 순찰 경찰대와는 반대로 오히려 이들은 아무래도 시내에 거주하니 가족 친지 관계 등으로 인해 프롤레타리아와 더 가까울 수밖에 없었고, 공화국 정부가 직접 창설한 조직이니 대부분이 공화파에 잔류하여 초기 공화파의 몇 안 되는 소중한 군사 경험자 집단이었고, 또 이로 인한 괘씸죄로 패전 이후 프랑코 정부에게 해산당한 다음 무장경찰대(Policia Armada)라고 하는 조직으로 대체 되었다. 그리고 이 무장경찰대는 프랑코 사후 민주화 과정에서 그 노골적인 억압성, 정치성 때문에 해산당하며 현대 스페인의 보통 경찰화가 이루어졌다. 덤으로, 이 돌격경찰대는 호세 칼보 소텔로를 암살함으로써 내전을 결정적으로 일으킨 방아쇠를 당긴 장본인 집단이기도 하다.
[101]
마드리드 외곽의 카스티야 라만차 일대의 고속도로를 둘러싼 전투 중 공화국이 크게 승리한 과달라하라 전투가 대표적이다. 이 전투에서 마리오 로아타가 이끌던
이탈리아 왕국군이 역포위당할 때까지 열심히 두들겨 맞으면서 미끼 역할을 하며 분투했던 공화파 부대는 바로 같은 이탈리아인들이 주축이 된 공화 인민군 제12국제여단 가리발디 대대였다. 이탈리아는 무식하게 대대적인 병력을 파견해서 남의 내전에 열심히 퍼부었는데 막상 건진 건 하나도 없었던 결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스페인에서 낭비한 예산, 병력, 물자를 만회하지 못하고 그 전설적인 졸전을 펼치게 된다. 이에 비해 나치 독일의 경우
콘도르 군단이라는 명칭으로 항공, 기갑 분야에서 소수의 특수 인력, 특수 부대 중심으로 보냈기 때문에 그다지 많은 비용을 쓰지 않았으나 히틀러가 군대를 보내고 싶었더라도 당시 독일에 파병할 만한 병력이 거의 없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102]
크게 보면 북쪽의 피레네 산맥과 칸타브리아 산맥, 남쪽의 과다라마, 시에라모레나 산맥 지대로 중부의 고도는 높고 평평하고 인구 밀도가 낮은 메세타에 자리 잡은
카스티야, 그리고 험한 산지로 바스크, 카탈루냐, 안달루시아 같은 대도시들이 있는 지방들이 분리되어 있다. 당연히 이런 지리적 조건도 전쟁 과정에 반영돼서 카스티야 일대에선 수도 마드리드행 고속도로, 주요 거점을 두고
회전이 많이 벌여졌고, CNT 중심의 북부 전선은 1차대전 당시
이탈리아 전선을 방불케 하는 산악, 고지대 점령전이 주된 형태였다.
[103]
물론 이러한 공화국의 일련의 공세들이 삽질이 아니라 국민파의 병력과 전력을 분산시켜 마드리드에 대한 압박을 줄인다는 전략적 당위성이 있었던 작전들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허나 전략적으로는 그런 계산이 말이 된다 쳐도, 전술적인 측면에서 경험없고 미숙했던 공화국 지휘관들의 삽질로 거하게 말아먹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104]
모스크바에 기반한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는 공산당은 스페인에서 겨우 1921년에야 창설됐고, 그 세력도 다른 비소련계 좌파에 비해 세력이 현저히 적었다. 이 당시 대중적 기반과 동원력을 기준으로 두면 좌파 중에서 가장 지분이 컸던 건 누가 뭐래도 제2공화국 정권의 대표 정당이었던 사회노동당(PSOE) 산하 UGT랑 당연하게 선거엔 참여 안해도 정규 노조원 백만, 방계조직 2백만의 세력을 자랑했던 아나키스트 CNT가 서로 맞먹는 상황이었다. 공산당은 저어어 멀리 동떨어진 3위 수준의 세력밖에 없었고, 그나마 이것도 본인들 입장에서는 불구대천의 원쑤인 트로츠키주의 계열 POUM을 위시로 한 비소련계 공산주의 정당들과 위태위태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 구도를 한번에 뒤집은 게 바로 나머지 '자유' 진영의 방기와 소련의 지원이었다.
[105]
덕분에 스페인 공산당은 민주화 이후에도 우파에게는 당연히 빨갱이라며 까이고 같은 좌파에게도 이 때의 일 때문에 까인다. 그래서인지 민주화가 되고도 40년 넘게 각료 배출을 못하다가 2019년에야 배출하게 되었다.
[106]
스탠리 페인의 입장이다.
[107]
마드리드 방어 책임자로 형식상으로는 공산당원이었다. 물론 정말 신념이 투철했다기보다는 대세에 편승했던 것에 해당한다.
[108]
내전의 시작과 끝을 정부가 공산당에 지나치게 오염되어 학정을 일삼았다는 이유로 군부가 궐기하는 사건이 함께한 것은 아이러니하다.
[109]
이 과정에서 소련의 눈에 띈 사람이 당시 공화파 정부의 재무장관이었다가 나중에 총리가 되는 후안 네그린이다.
[110]
이 부분은 논란이 있다. 스페인까지의 운송 비용 등을 포함해서 계산해보면 소련이 별다른 차익을 얻은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111]
지금이야 서방제 소총이나 기관총들 대부분이 나토탄 계열로 규격 통일이 되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는 서방제 총기들도 국가별로 제식 탄약이 달랐다. 당장 이후에 벌어진
바르샤바 봉기에서도 노획한 독일제 무기를 쓰는 폴란드 국내군에게 소련제 탄환을 공수로 뿌려서 전혀 도움이 못 된 것은 물론이요 그것도 대충 뿌린지라 대부분을 노획한 소련제 무기를 쓰는 나치에게 선물하고 말았다.
[112]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도 주인공이 길을 잃고 우연히 게릴라들의 야영지에 들어온 카를로스파
기병을 사살한 뒤 그 기병이 가지고 있던 신품 독일제
기관단총에 자기가 가진 낡은 소련제 기관단총 탄환이 맞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아쉬워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그 기관단총은 파블로가 차지했다. 영화에서는 생략된 장면.
[113]
구체적으로는 전함 España, 중순양함 Canarias, Baleres, 경순양함 Almirante Cevera, 구축함 Velaso. 잠수함대의 이탈은 한 척도 없었다. 내전 중반기쯤 이탈리아가 대량의 항공기와 함께 구축함 4척, 아르키메데스급 잠수함 2척을 공여해 주기도 했다.
[114]
원래 함명은 알폰소 13세였으나 제2공화국이 수립된 후 1932년 1번함의 이름이었던 에스파냐로 개명.
[115]
에스파냐는 1937년 4월 30일 바스크 해역에서 작전 수행 도중 국민파 기뢰부설함이 부설한 기뢰와 접촉해 침몰하였고, 하이메 1세는 이탈리아 공군 폭격기의 폭격을 맞고 수리에 들어갔다가 1937년 6월 17일 원인 불명의 화재로 수리 불가능한 큰 손상을 입어 내전 이후인 1939년 7월 스크랩되었다.
[116]
케이포 데 야노나 미겔 카바네야스, 에밀리오 몰라는 공화주의 성향을 보인 주요 인물이었다.
[117]
갈색 셔츠를 제복으로 한 돌격대(SA)의 대장이었던 에른스트 룀의 경우 히틀러의 오랜 동지였지만 히틀러가 손을 잡고자 했던 독일의
융커들과 연합하는 것을 반대한 데 이어 프로이센 귀족의 전통이 강한
독일 국방군을 뒤집고 SA를 독일의 정규 군사조직으로 만들려고 꾀하였다. 당연히 히틀러,
괴벨스,
괴링,
헤스 등 나치당 주요 인사들은 권력을 용인해주었던
힌덴부르크를 비롯한 프로이센 융커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을 원치 않았고 그에 따라
장검의 밤 사건을 일으켜 에른스트 룀과 주요 돌격대 수뇌부, 그리고 중앙당의 반나치 인사들을 숙청했다.
[118]
팔랑헤는 조직 문화가 의외로 좌파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제복이 파란 셔츠에
로마식 경례 말고 인민전선식 경례도 했다. 그 외에도 소싯적에 CNT와 연대하려고 했던 경력도 있어서 특히 팔랑헤 좌파는 주변 세력들로부터 반쯤 빨갱이 취급을 받았다. 그리고 특히 초기 파시즘은 무솔리니 개인의 경력 뿐만이 아니라 사상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사회주의의 파생 그 자체다.
[119]
의외로 파시스트들이 경제적 관념에 있어서는 그들의 정적인 사회주의자들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사실상 경제관에 한해서는 파시스트의 이념적 비조라 할 수 있는 조르주 소렐의 영향력이 컸다. 이 조르주 소렐은 평생 극좌와 극우를 오가다가 죽을 때는 레닌주의자로 죽었다. 그 사상적 경향으로 인해 조르주 소렐을 극좌로 볼지, 극우로 볼지는 오늘날에도 주된 떡밥이 된다. 특히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그 정적인 이탈리아 공산당은 제각기 자기네 이념의 태조로 모시다시피 했다. 사망 당시에 조르주 소렐의 묘소에 극좌와 극우가 나란히 헌화하기도 했다고. 그리고 팔랑헤는 이탈리아, 프랑스 파시즘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참고로 조르주 소렐의 조합주의적 개념은 오늘날에도 사회적 경제의 이념적 기원이 되기도 했다.
[120]
정작 카를로스파도 그 태생이 19세기의 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보수주의에 기원하는데 이 보수주의는 전통적인 봉건적 지주와 가톨릭 종교계 외에도 자유주의적인 경제체제 하에서 소외감을 느껴 온 지방의 자작농, 소상공업자, 서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예를 들어 19세기 후반 카를로스 전쟁 당시 반란의 주 참여자들 중에는 자신들을 보호해 주던 길드가 망해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던 상공업자들도 있었다.
[121]
이런 지지 기반과 후술할 가주의 반나치 성향 때문에 프랑코 정권에서 팽당한 이후 좌경화를 선택하여 아예 기독교 좌파 사회주의로 성향을 바꿔버린다. 현재도 세력은 미약하지만 스페인 공산당이 주도하는
좌파연합에 참여 중이며 엄연한
수마르 소속의 공동 여당(!)이다.
[122]
이 사람은 제2공화국 개국공신이기도 했다. 국민진영이 노선 정리가 안 된 초반에 세비야를 먹었을 때는 여전히 공화파식 삼색기와 국가가 유지되었던 것도 이 영향이 있다. 케이포는 제2공화국 대통령이었던 니세토 알칼라사모라와 사돈 관계이기도 했다.
[123]
국민진영 유력 군인이면서 호세 프리모 데 리베라와 친했다.
[124]
프랑코의 동생인데 공군 조종사에 국회의원도 역임한 당대 명사였다. 쿠데타가 일어날 당시에는 미국 파견 무관으로 있었는데 정치성향은 좌파였지만 그래도 일단은 형을 따라 국민진영에 가담했다.
[125]
레룩스 계열 급진당원이었고 그 아들은 정적인 PSOE에서 국회의원이었다가 망명했다. 명색이 바지사장이라도 한때나마 사장이었지만 자기 아들을 구할 힘은 없었다.
[126]
변호사 출신의 팔랑헤 창시자로 알폰소 13세 때 군사 독재를 했던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의 장남이다. 쿠데타 소식이 터지자마자 공화파 정부에게 체포당해 알리칸테 교도소에 수감되었고 프랑코가 포로 교환이나 석방을 위한 자금 마련, 심지어 호세 안토니오의 국제적 석방 여론 조성마저 차단하여 1936년 11월 처형당했다. 프랑코가 이 양반을 싫어했던 이유는 전통적 우파 권위주의 성향 프랑코에게 순수 혁명적 성향의 데 리베라는 과격한 혁명 사상으로 인해 영 거슬리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른 의견으로는 오히려 공화국이 포로 교환을 거절했고 프랑코가 호세 안토니오를 구하려 그가 수감되어 있는 알리칸테 교도소를 공격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127]
이 양반은 자신이 집권했던 1933~36년 사이 선거로 당선된 우파 정권 시절에는 때 맞추어 부흥한 국제 파시즘의 기세를 타 본인도 우익 독재 비스무리하게 밀어붙이려고 했으나 애초에 뒷심이나 전투적인 결단력 같은 건 부족했던 사람이라 자기 지지층이 처음에는 팔랑헤, 그 다음에는 프랑코에게 홀랑 넘어간 이후 망명지에서 세월을 보내면서 되려 같이 망명 중인 공화파 인사들과 함께 반 프랑코 모의를 꾸미는 등 노골적으로 기회주의적인 면을 보였다. 그러다 프랑코 사후 스페인으로 돌아와 정계 복귀를 노렸지만 끝내 실패하고 늙어 죽었다.
[128]
그런데 이쪽은
보르보네파르마 가문, 다시 말하면 원래는 이탈리아 출신이라서 망명이라고 하기도 거시기하다. 카를로스파 직계는 원래 따로 있었지만 80살 넘게 살아 골골대던 최후의 직계 왕족이 내전 발발 직후에 죽고서 갑론을박을 거친 끝에 방계인 하비에르로 계승하게 되었다.
[129]
알폰소 13세는 무솔리니를 설득해 국민파를 지원하게 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프랑코는 독재자가 되고 나서 알폰소 13세의 시민권과 재산을 다시 되돌려 주었다. 하지만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이 국민진영에 가담하기 위해 프랑스 국경을 넘어 오자 내부 교통정리도 안 된 상태에서 왕위 계승자가 설치는 꼴을 봐주기 싫있던 몰라는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을 프랑스로 도로 추방해버렸고 국민파가 고분고분한 보르본 왕조의 충신이 아니란 것을 깨달은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은 반 국민파로 전향하여 처음에는 히틀러, 그 다음에는 연합국에게 반프랑코 로비를 하면서 프랑코 타도 운동을 벌이게 되며 아들
후안 카를로스 1세와 스페인 왕위를 두고 경쟁하게 된다. 물론 아들이 스페인을 민주화시키기 시작하자 쿨하게 아들을 스페인의 왕으로 인정하며 계승권을 포기했다.
[130]
이 사람은 대단한 친독일 인사였다. 이 사람이 국민파의 지도자 자리를 유지했다면 스페인이 독일과 연합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해리 터틀도브의
대체역사소설 "일찍 찾아온 전쟁" 편은 이 사람이 죽지 않고
뮌헨 협정에서
네빌 체임벌린이 히틀러의 요구를 거절해서 2차 대전이 일찍 벌어진 시대를 그리고 있다. 실제로 스페인이 독일 편을 들었더라면 프랑스 침공이 좀 더 수월하게 풀리기야 했겠지만 어차피 프랑스 침공은 대성공이었으니 큰 의미가 없고 그 외에는 스페인이 단합이 잘 되었다면 모를까 스페인은 이 내전 이후로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내부 단결에 힘을 쏟았기에 스페인 자체의 메롱한 국력과 단합이 전혀 안 되는 내부상황을 생각할 때 큰 변수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 기껏해야 루마니아나 헝가리 같은 C급 동맹국이 하나 추가되는 정도였으며 굳이 도움되는 정도 생각해 보면 영국의 지브롤터를 차단시켜 영국의 지중해 세력을 약화시켰을 수 있겠지만 B급 동맹국 이탈리아가 그리 결정적인 큰 도움이 되지 못했던 만큼 영국과 소련을 밀어버리는 데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은 안봐도 비디오.
[131]
추락 이유가 골 때리는 게 자기 군복을 너무 많이 실은 나머지 비행기 무게 조정을 실패하여 비행기가 추락해 사망했다. 산후르호의 비행기는 쌍발 엔진을 탑재한 중형 수송기가 아닌
드 해빌랜드 DH.80 경비행기였기 때문에 무게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32]
직역하면 'The Leader'라는 의미.
무아마르 카다피가 자기 자신을
대령이라 칭한 것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133]
리프 전쟁 당시
스페인 외인부대 창설자다. 당시 프랑코가 이 사람 직속 부하였다. 리프 공화국군과 싸우는 과정에서 한쪽 팔과 눈을 잃은 것과 후술할 내전 당시 스페인의 대철학자
미겔 데 우나무노와 논쟁을 벌인 사건으로 유명하다.
[134]
친독파 정치인으로 프랑코 정권의 정부 구성 등에 기여했고 청색사단 창설 같은 일에도 관여했다. 군인 일색이었던 초기의 프랑코 정권 하 몇 안 되는 민간인으로 극초기에는 그냥 군정에 불과했던 프랑코 정권이 외부세계에 그나마 정상국가 같아 보이는 모습으로 보이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본인이 사상적으로 동경했던 추축국들이 2차대전에서 패망하고 대전 후 프랑코 정권 내 권력구조 재편 과정에서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프랑코와 사이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2차대전 이후 한편으론 옆나라
프랑스 제4공화국의
알제리 전쟁에서
샤를 드골 상대로 쿠데타를 획책한 OAS의
라울 살랑을 지원하는 한편 반대론 또 패망 후 망명을 떠난 구 공화파 지식인, 정치인들 중 사상적으로 그나마 중도에 가까운 자유주의자들을 다시 받아들여 내각에 초청하자고 프랑코에게 건의했다가 까이는 등 상당히 종잡기 힘든 행보를 보이다 결국 뒷방 늙은이 신세로 밀려났다. 심지어 프랑코 사후에는 프랑코 정권과 본인이 참여했던 쿠데타에 비판적인 모습을 보이며 본인들이 저지른 쿠데타는 명분 없는 반란이었음을 쿨하게 인정하는 회고록을 써내기까지 했다. 이러한 수녜르의 행보에 관해선 스페인 내에서도 '말년에 생긴 진실성 있는 변화였다' vs '단순한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옛 공신의 기회주의적 행보와 개인적 원한일 뿐이다'라는 식으로 평가가 갈리는데 어쨋든 그의 회고록은 권력 투쟁의 당사자로서 당연할 수밖에 없는 주관성을 감안하더라도 프랑코 정권 핵심 내부자의 시선으로 정권을 묘사한 책으로 사료로서 가치가 높다.
[135]
사실 시급한 상황이라고 해서 꼭 비행기가 활용되었던 것도 아니다. 독일의 분탕이 본격화되면서 영국, 프랑스, 소련이 공동전선 구축을 모의할 때 영불의 사절은 느긋하게 기차로 오고가서 소련의 개탄을 받았다.
[136]
느닷없이 세비야를 먹은 공로는 인정받았지만 전직 공화국 개국공신에 튀기 좋아하는 성격이었고 주정뱅이여서 평판이 안 좋았다.
[137]
다만 아예 처형당한
에른스트 룀과는 달리 마누엘 에디야는 4년 복역 끝에 석방되고 1970년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138]
통합 팔랑헤에서 구 팔랑헤 출신자들의 비율은 54%였다.
[139]
해외 정치적 망명자들이나 국내 정치범 수감자들에 대해 대대적인 감형을 하거나 형기가 얼마 안 남은 이들에 대해서 사면조치를 내렸다. 축구선수 중에서도 공화파에 연루되어 망명했다가 이런 사면조치로 인해 귀국해서 정상적으로 리그에서 활동한 사람도 꽤 있다. 좀 시간이 지난 후지만 심지어 공화국의 명장인 비센테 로호 유치도 어떤 의미로 사면받았고 심지어 정권 말인 1960년대 후반에는 극우 신문사인
알카사르에서도 비센테 로호가 죽었을 때 부고기사를 내면서 왕년의 적장의 군사적 공로를 인정하기도 할 지경이었다.
[140]
물론 이마저도 완전히 맞는 것은 아니다. 알폰소계 왕당파에 따르면 정당성 있는 국왕은
알폰소 13세의 4남인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이었다. 그렇지만 국민파가
바르셀로나 백작을 비토했기 때문에 바르셀로나 백작은 1945년 이후에는 국내의 알바 공 같은 거물 왕당파나 제2공화국 망명정부와도 손잡고 대놓고 반프랑코 움직임을 보였고, 심지어는 카를로스파에게도 어필하는 메시지도 보냈다. 그리고 내전으로부터 한참 후의 일이지만 만약
루이스 카레로 블랑코가 멀쩡히 프랑코의 후계자가 되었다면 왕당파는 그대로 배신당했을 것이다.
[141]
카를로스파는 의외로 이미지처럼 단순한 수구꼴통 집단은 아니었다. 19세기부터 나름대로 대중운동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여러 사조의 영향을 받는 모습을 보여줬다. 특히
하비에르의 맏아들인 카를로스 우고(Carlos Hugo de Borbón-Parma 1930~2010)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딸 정도로 공부했고
스페인어도 익숙하지 않을 정도로 외국물을 오래 먹었다. 그 친척인 여공작은 자치적 사회주의 모델을 접목하여 1950년대 후반부터 카를로스파를 좌경화시켰다. 특히 당시 카를로스파가 왕으로 추대했던 하비에르가 나이도 들고 자동차 사고를 겪어 상태가 안 좋아지면서 그 역할을 카를로스 우고가 대행하다시피 했다. 이 덕분에 카를로스파는 60년대 프랑코 정권 하에서 물론 종교의 자유 부여에 격하게 반대했지만 사회적 변화에 영향을 받아 나름대로 반프랑코 민주화 운동에도 관여했다. 물론 이에 모두가 동의한 것은 아니라 카를로스파 기준으로는 하비에르 사후 카를로스 우고가 정당한 스페인 국왕이 되었어야 했지만 카를로스파 일각에서는 "빨갱이 왕이라니 말도 안 돼!" 라면서 반발해 새 분파를 차렸다.
[142]
단적으로 케이포는 내전이 끝나고 정치적으로는 숙청하면서도 내전기 영웅으로서 영예는 누리게 해 줬고 위에서 말한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이나 돈 하비에르와 같은 왕족들은 그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완전히 제압은 못하고 정치활동에 방해를 가함과 동시에 한 편에서는 나름 내줄 건 내주는 식으로 협상도 했다. 그 밖에 카를로스파들의 경우 그나마 순종적인 인물들은 주로 법무장관이나 국회의장, 어용 야당 포지션 격으로 의원 관직을 뿌리면서 팔 콘데 반항적인 인사들은 가택연금하거나 그냥 자기네 본거지인 나바라에 몰아 버렸다. 이념적 영향력이나 규모가 훨씬 커서 프랑코도 함부로 무시하기 어려운 구 팔랑헤 출신 오래된 셔츠들을 대할 때도 다른 건 몰라도 군부가 쥐고 있던 핵심적인 권력은 주지 않았다.
[143]
프랑코가 물론 스페인 역사에서 유례 없는 권력을 행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후에는 미국이나 자유주의 물을 먹은 바티칸 등 외국의 영향을 갈수록 심하게 받게 되었기 때문에 함부로 내전기처럼 정적에 대해 무자비한 탄압을 가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프랑코의 정적들 중에는 외국에도 아는 친구들이 많은 거물급 왕족, 귀족, 가톨릭 사제들도 많았던 점도 있었다. 특히 사제들은 그 무시무시한 내전기 시기에조차도 탄압을 덜 받았다.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이나 하비에르나 반프랑코 행보를 보이기는 매한가지였는데 죽이기는 어려워서 프랑코는 '쟤들은 외국인'이라는 태도를 고수하고 추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외에도 하비에르가 국내의 대리인으로 썼던 마누엘 팔 콘데 같은 이도 물론 프랑코 정권 하에서 수차례 옥살이나 가택연금을 겪었다.
[144]
독일은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반유대주의 때문에 기독교 교리를 마개조했고 그에 거부하는 가톨릭 사제들을 탄압했다. 그리고 독일이 침공한 나라들 중에는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프랑스 같은 가톨릭 국가도 많았다. 물론 바티칸은 이탈리아나
오스트리아 등
교권 파시즘 국가들과는 친했다.
[145]
카를로스파가 반나치 움직임을 취한 것은 그들의 왕인 하비에르 공과도 관련이 있다. 하비에르 공은 1차대전과 2차대전 양차대전에서 벨기에군에 장교계급으로 복무했다. 2차대전의 경우가 더 복잡한데 이때는 벨기에가 망하면서
독일 국방군의 포로로 잡혔다가 일단은 풀려났다. 이후 하비에르 공은 유산으로 받은 성을 제공하는 등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에도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또
독일 국방군에 잡혀 죽을 뻔한 걸
필리프 페탱과의 연줄 덕분에 목숨만 건져
다하우 수용소에 수감되어 체중이 36kg까지 빠질 정도로 고생했다가 간신히 해방되면서 풀려났다.
[146]
당시 민주주의 열강 정부들은 자본주의를 용인하는 파시즘의 확산보다는 자본주의를 완전히 부정하는 공산주의의 확산을 더 우려하고 있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베르사유 조약의 배상금을 내지 못해 허덕일 때 미국과 영국이 프랑스를 열심히 설득해 가며 배상금을 감면해 준 것도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제 상황이 악화되면서
독일 공산당이 10%가 넘는 득표율로 득세하기 시작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147]
심지어 국민진영측 구형기들이 공화진영측 신형기들을 상대로 공세를 걸고 이들이 도망치는 경우도 많았다.
[148]
사실 내전 중인 진영에 돈 준다고 무기 파는 짓은 돈에 눈이 멀어서 내전이 격화되거나 말거나 무기 장사질하는 양심 없는 짓거리로 인식되는 것이 정상적이며
신해혁명 이후 오랫동안 내전 상태였던 중국 상대로는 이미 1910년대부터 미국의 주도로 무기 금수조치가 이루어져서 생각보다 그런대로 금수조치가 잘 지켜지고 있었다.
[149]
당시 주영미국대사
조셉 P. 케네디는 무기 금수조치가 해제되면 전쟁이 스페인을 넘어 유럽 전체로 퍼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150]
나중에 프랑코가 내전에서 승리하고 정권을 쟁취하자, 프랑코 정권은 이 공화국 정부군이 운용하였던 Vz.26 경기관총들을 베이스로 1950년대까지 푸실 아메트라야도르 오비에도(Fusil ametrallador Oviedo)라는 Vz.26의 복사본 경기관총을 생산, 운용하기도 했다.
[151]
당시 프랑스 대통령인
알베르 르브룅은 지원을 반대했고, 그래서 블룸 내각의 공화파 지원에 적극적으로 훼방을 놨다. 내각 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렸는데 공군장관
피에르 코트는 공화파 지원에 동의했으나 국방장관
에두아르 달라디에가 반대했다. 그리고 프랑스 인민전선 내 급진파 장관들도 블룸이 영국의 지지를 받는 전제 하에 지원에 동의하겠다고 엄포를 놓는 바람에 결국 공화파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만다.
[152]
영국은
러시아 내전 당시
윈스턴 처칠의 주도로 적군에 맞서 백군을 지원했을 정도로 공산주의를 경계하던 국가였다. 프랑코 역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러시아 전선에만 비공식적인 의용군을 파병하는 선이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등에 대항한 직접적인 참전도 진지하게 고려했다는 점에서 결과론적인 얘기긴 하지만 프랑코 역시 2차 세계 대전 당시 공식적으로는 끝까지 중립을 지킴으로써 영국의 이러한 태도는 적어도 영국에겐 패가망신 수준의 비참한 결과를 유발하지는 않았다.
[153]
서방 정치인들의 프랑코에 대한 평가는 복잡하다. 일단 미국의 루스벨트와 트루먼이 프랑코에 비판적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처칠의 경우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키기 전 잘나갈 때는 공화파를 도왔어야 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했으나 막상 스페인이 중립으로 남자 적어도 스탈린, 트루먼에 비해서는 훨씬 프랑코에 온건하게 대했다. 물론 그렇다고 스페인이 국제 미아가 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드골 역시 프랑코에 대해 개인적으로 우호적이었지만 2차대전 당시 점령 아래 프랑스 레지스탕스가 스페인 공화파 잔당 게릴라에게 진 빚을 고려해 집권기 다른 프랑스 정치인들이 유럽 내 프랑코 정권을 고립시키는 걸 막지 않았다.
[154]
앤터니 비버에 따르면 70%가 공화진영 지지, 20%가 국민진영 지지였다.
[155]
당시 텍사코 CEO였던
토르킬드 리베르가 친나치, 친파시즘 인사였던 점도 한몫했다. 리베르는 1940년에 친나치 인사라는 이유로 잘렸다.
[156]
1938년 말이 되어서야 루스벨트 행정부는 공화파를 돕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공화파 지지자였던 영부인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 역시 남편을 설득하지 않은 걸 후회했다고. 프랑코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동부전선에는 사단 단위 병력을 의용군으로 파병해 사실상 참전하되 서방 연합국에 대해서는 침묵을 유지하면서 본전은 건진다만.
[157]
실제로 라틴아메리카 일부 지역에 팔랑헤 조직이 있었고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는 미국에 빼앗긴 지역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158]
이마저도 답이 없는 것이 금을 무기 대금인
루블로 환산하는 과정에서 환율을 소련에게 유리하게 책정해 환차익을 챙겼다. 게다가 내전 초반에 제공한 무기들은 소련의 조병창들에서 생산된 최신 무기가 아니라 무기고에 방치되어 있던 옛 제국 시절의 무기 또는 그간 노획한 다국적의 구식 무기들이었다. 일본제 볼트액션 소총이나 19세기에 제작된 태엽식 기관총 같은 희귀한 무기들이 스페인 내전 당시 사용된 이유이기도 했다. 소련 측은 구식 무기들을 다 소진하고 나서야
PPD 기관단총이나
DP28 경기관총 같은 소련제 최신 무기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159]
이후
독소전쟁이 터지자 이 스페인
고아들은 소련인 고아원 직원들이 우왕좌왕하는 동안 재빨리 참호를 파고 엄폐해서 소련인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이들과 같이 소련으로 망명한 공화파 파일럿 등의 스페인 난민들은 소련 내부의 복잡한 파벌 갈등에 휘말려
대숙청 당시
중앙아시아
굴라크에서 삶을 마감하기도 했다. 이것이 중앙아시아의 공동묘지들에서 스페인계 이름을 가진 묘비가 종종 발견되는 이유다.
[160]
중소관계는 1차 국공내전 발발 이후 국민정부가 소련을 폭동 배후로 지목하여 단교를 선언함으로 단절되었고,
봉소전쟁까지 터지면서 최악으로 치달았지만
만주사변 이후 일본을 견제할 것은 소련 밖에 없다는 판단 하에 다시 밀월관계로 접어들었다.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중소 군사동맹은 중일전쟁 이전부터 계속 논의되어 왔고 일본 육군은 스탈린과 장제스가 연합하여 만주를 침공할지도 모른다는 대단한 불안감에 휩싸였고 이것이 결국
루거우차오 사건 당시 일본군이 폭주하는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어쨌거나 스탈린은 장제스에게 일본이 중국을 침공하면 당연히 소련이 만주에서 일본을 견제할 것이라고 립서비스는 했으나 실제로는 일본과 싸우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이 일본에게 굴복하게 되면
블라디보스토크 등의
극동 영토에 가해지는 압박이 거세질 수 있다는 계산 하에 스탈린 역시도
중국공산당을 합법 정당으로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선에서 국민정부에 대한 대대적 원조를 제공하였다. 소련은 실제로 많은 양의 무기와 차량,전투 파일럿들을 중화민국 측에 제공했고, 아예 스페인 공화파 측에는 내민 적도 없는 막대한 차관까지 제공함으로서 스페인 내전보다는 중일전쟁에 더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161]
스페인 내전으로 유명한
로버트 카파,
어니스트 헤밍웨이 모두 중국에도 갔다. 중일전쟁의 주역인 국민정부가 국공내전에서 망하면서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서 그렇지.
[162]
혁명 초에는 사이좋게 의회민주주의 임시정부를 타도하는 사이이기는 했다. 실제로 아나키스트 중 일부 개인은 여전히 볼셰비키에서 전쟁영웅 대접을 하기도 했으니. 하지만 연대의 필요가 사라진 후에는 서로가 적으로 돌변했다.
[163]
예를 들어 스페인을 포함한 라틴 문화권은 식사 중 와인을 곁들이는데 소련인들이 이런 관습을 접하면서 근무 중 합법적으로 술에 취할 수 있었다.
[164]
아이러니한 것은
독소 불가침조약이 스페인이 초반에 2차 세계 대전에 참전을 안 하게 된 이유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훗날 틀어지지만 자기네 주요 물주가 그토록 욕하던 빨갱이와 손을 잡은 것이기 때문이다.
[165]
할힌골 전투 항공전에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소련 공군 파일럿들의 기여가 컸다.
[166]
스페인 제2공화국은 4월 1일에 프랑코에게 항복했고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은 9월 1일에 있었다.
[167]
링컨 국제여단을 보냈다.
[168]
이는 연인원으로, 특정 시점의 인원이 800명을 넘은 적은 없었다고 한다.
[169]
특히 동브로프스키 대대(Dąbrowszczacy, 동브로프슈차치)는 위의 마드리드 방어전에도 참여한 역전의 용사들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공산주의 성향의 반독 파르티잔인 인민군(Armia Ludowa)과 역시 공산주의 성향의 폴란드 인민군(Ludowe Wojsko Polskie)에 많은 이들이 참여했다.
[170]
역시 켄 로치 작품인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보면 원한이 가시지 않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171]
스페인 현지에서는 레굴라레(Regulares) 라고 불렀다. 정확하게는 스페인령 모로코 주둔군인 아프리카군 산하의
아스카리인 현지인 정규군(Fuerzas Regulares Indígenas)의 약칭이다. 당시 모로코는 프랑스와 스페인이 분할 점령한 상태였는데, 즉 '레굴라레'는 다른 나라에서 온 지원병들처럼 스스로의 명확한 정치적 의사에 의해 참가한
의용군이 아니라 원래 스페인 식민당국이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모로코 현지에서 모집한
모로코인 부대다. 스페인 정부는 내전 이전에도 의도적으로 이들을 스페인 본토에서 발생한 시위나 무장 봉기 진압 임무에 투입하고는 했는데 이들은 평소 식민지 종주국인 스페인인들로부터 멸시와 차별대우를 받아 왔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복수할 기회가 생기면 한없이 잔인해졌다고 한다. 프랑코 휘하에서 공화정부와 싸우기 위해 투입된 내전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국민파가 얼마나 많은 모로코인 용병을 고용했는지 당시 스페인령 모로코에 거주하던 모로코인 성인 남성 7명 중 1명은 스페인으로 건너갔을 정도였다고 한다. 거기에 추가로
몬테카시노 전투 당시 자유 프랑스군 장교들이 북아프리카 출신 무슬림 병사들에게 현지인에 대한 강간과 약탈을 일정 기간 동안 허락한 것과 유사하게 이들 역시 전투 후 포상으로 스페인 민가를 약탈하고 여성들을 차지해도 좋다는 허가를 종종 받기도 했다. 스페인은 중세시대에 수백년 동안 무슬림 왕조들의 식민지배를 받아 무슬림에 대한 감정이 특히 좋지 않다. 그래서 이러한 행위는 전후에도 오랫동안 스페인인들의 뇌리에 특히 깊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이것과는 별개로 전투력은 스페인인들로만 구성된 부대 이상이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국민파 진영의 정예병으로 간주되었다. 현지 종교 지도자들은 스페인에서 벌어지는 내전에 참전하는 게
무신론과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지하드라고 설교했기 때문에 금전적인 보상에 혹하지 않더라도 참전에 응하는 경우도 있었다. 주로 보병과 기병부대로 편성되었다.
[172]
내전이 절정에 달했을 때는 최대 75,000명까지 늘어났다. 4개 보병사단과 758대의 각종 항공기, 그리고 그 운영요원으로 구성되었다. 전쟁 초기에는 지상군은 파시스트 이탈리아군의 상징인 M33 철모보다는 아드리안 철모를 쓰고 전투에 투입된 경우가 상당했다.
[173]
항공기 128대와 운용요원,각종 포병부대,
1호 전차를 장비한 전차부대 등으로 편성되었다.
[174]
페루,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칠레,
아르헨티나,
푸에르토 리코,
브라질,
니카라과,
과테말라,
코스타리카,
온두라스,
에콰도르,
볼리비아,
도미니카 공화국,
엘살바도르 국적자들.
[175]
48%는
크로아티아인, 23%는
슬로베니아인, 18%는
세르비아인, 2.3%는
몬테네그로인, 1.5%는
마케도니아인.
[176]
Corpo Truppe Volontarie, CTV.
[177]
이탈리아군과 국민파는 공화파 군대에 6,000명 정도의 사상자를 강요하고 400명을 포로로 잡은 대신 7,000명의 사상자를 내고 800명을 포로로 잃어야 했다. 공화파는 65문의 야포와 500정의 기관총, 10대의 탱켓을 노획하는 보조 전공도 올렸다.
[178]
이 배가 격침되면서 국민파 측은 해군력의 1/3을 잃었고, 프랑스가 해상으로 공화파에 무기를 보낼 수 있는 구멍이 뚫렸다.
[179]
당시 시점에 국민파를 지원하던 독일-이탈리아 해군은 영국 해군의 감시와 견제를 받아 스페인 영해 밖으로 밀려난 상태였다. 배를 사려고 해도 독일은 해군 재건을 막 시작한 시점이었고 이탈리아 역시 영국과 프랑스에 맞서느라 군함을 한 척이라도 늘려야 했기 때문에 배를 팔 여유는 없었다. 그래서 배를 팔아줄 여유가 있는 국가로는 일본이 유일했다.
[180]
당시 국민파 측이 넘겨달라고 제안한 배는 확실한 구형함인
미네카제급 구축함 아키카제,
카미카제급 구축함(1922) 카미카제였다.
[181]
주퇴복좌기조차 없는 물건이다.
[182]
나름 군사적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게르니카는 바스크 지방에서 어마어마한 정치적 정통성을 지닌 도시였다. 게르니카 지방에서 최고 명물인 게르니카의 백색 참나무 아래에서는 바스크 지방의 각 도시들의 의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 외에도 바스크 지방의 관료들이 모여 이전 세대에 선서를 하는 전통이 있었다. 이 외에도 바스크 지방의 영주, 이후에는 카스티야나 스페인의 국왕이 영주권을 행사하기 전 이 나무 아래에서 선서를 하는 전통이 있기도 했다. 특히 카를로스파 국왕 참칭자들이 자기들이 국왕임을 선서할 때 이 곳에서 선서를 했다.
[183]
이 문제의 백색 참나무, 게르니카 나무는 도시의 절반 이상이 소이탄으로 잿더미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으로 거의 아무 피해도 받지 않고 무사히 살아남았다.
[184]
1,654명은 실제 수치가 아니라 프로파간다이고 오늘날 학설은 아무리 높아도 사망자를 300명이 넘지 않는 것으로 본다. 대신 후술할 화재 때문에 도시의 절반 이상이 타버린 것은 사실이다.
[185]
로망스어군 언어 중에는
프랑스어의 faire,
스페인어의 hacer 등과 같이 '하다'와 '만들다'라는 동사가 같은 형태를 띄는 경우가 많은 것에서 기인한 일종의 뼈 있는 말장난이다. 이는
프랑스어로 된 버전을 보면 잘 이해가 된다. 독일군 장교가 "C'est vous qui avez fait cela ? (이것을 한/만든 이가 당신인가?)" 하고 묻자 피카소가 "Non, c'est vous ! (아니, 당신들이지!)" 라고 답한 것.
[186]
아이러니하게도 그 공장에서 주로 생산된 것은 독일군이 쓴 것과 비슷한 소이탄도 있었다.
[187]
당시에는 급강하 폭격 같은 것을 빼면 정확히 군사적 목표만 겨냥해서 폭격을 성공시키는 것이 기술적으로 굉장히 어려웠던 것도 있다. 이후 2차대전기 미군과 영국군이 일본과 독일, 나치 점령기 프랑스 같은 주요 지역에서 도시 폭격을 해댄 것도 따지고 보면 이후 더 발전된 기술을 가지고도 정확히 폭격기를 통해 목표물만 명중시키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188]
민간인 희생자가 증가한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당시 게르니카에는 방공호가 7개 있었는데 그 중 한 곳에 폭탄이 떨어져서 사망자가 급증했다. 둘째로는 당시 바스크 지역의 건물 대부분은 목조건물이었던지라 소이탄에 취약했다. 실제로 폭격 그 자체보다도 그 이후 터진 화재는 수시간 뒤 파견된 소방대원들도 진압을 포기했고 희생자는 이때 많이 증가했다.
[189]
바람 때문에 오폭이 된 거라는 주장을 했다.
[190]
하지만 바스크에는 군 병력도 있었고 도로시설과 탄약 공장도 있었기 때문에 소이탄은 그러한 목표물을 공격하는 데 적합한 수단이기는 했다.
[191]
이 문제도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데 사실 콘도르 군단은 스페인 내부의 복잡한 정치상황이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현지인만큼 알지 못했다.
[192]
그리고 프랑코 측의 경우 1937년 2월 말라가 함락 이후부터는 1936년 내전이 터졌을 때와 달리 어느 정도 흥분이 가시고 냉정을 찾기도 했고 바스크 지역이 분리주의만 빼면 그럭저럭 전반적인 성향도 맞았기 때문에 이런저런 이유로 도시를 직접 타깃으로 하여 어그로를 끄는 것은 삼갔고 어디까지나 2차대전기 미국과 영국이 프랑스 도시를 상대로 그랬던 것처럼 그 도시가 중요한 군사적 목표물이 있는 경우에나 예외적으로 폭격을 허용했다.
[193]
독일은 독일대로 이전에 낙하산 탈출한 조종사 한 명이 바스크 시민들에게 붙잡혀 맞아 죽었다는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바스크 지방의 도시를 목표로 하는 것은 불허했다.
[194]
거기에 바스크 지역은 영국과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영국의 관심을 끌기 쉬웠다.
[195]
리히트호펜이 책임자인 것은 확실한데 이걸 두고 프랑코는 게르니카는 빨갱이(정확히는 아나키스트들)들이 폭격했다고 거짓말을 하거나 자기들은 책임이 없다고 잡아떼기만 하는 등 선전 면에서 공화파에게 득될 삽질만 했다. 히틀러는 프랑코가 자기네 콘도르 군단에게 책임을 떠넘기려 한다고 격노했다. 다만, 이 게르니카 폭격이 독일군의 악명을 키워 영미가 독일 유화책을 선호하게 되었다는 면에서 득을 본 건 있다.
[196]
스페인 내부의 명령체계나 프랑코는 이 과정에서 상큼하게 무시되었다.
[197]
다만 이 시기 프랑스 내부의 군과 정계에서는 카탈루냐가 함락되어도 개입하지 않겠다고 이미 결정을 내려놓았다.
[198]
압력 수단 중 하나로 거론되는 것은 콘도르 군단을 시켜 프랑스 국경에서 일정 거리 범위 안은 폭격하지 말도록 명하는 것이다. 실제로 독일이 광물 등을 두고 프랑코와 협상이 잘 안 되거나 군사적 숙제를 콘도르 군단에게만 부담시키는 기미가 보이면 이렇게 콘도르 군단에 파업을 주문하는 일들이 여럿 있었다.
[199]
여기에 공화진영 점령구역 내에 숨어 있던 5열들도 가세했다.
[200]
아나키스트 진영에 의한 흑색 테러 포함
[201]
Payne, Stanley G. The Spanish civil war.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2. p. 110
[202]
엔터니 비버, 김원중 역, 스페인 내전, 20세기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 교양인, 2006, ISBN 89-91799-42-6, 182쪽.
[203]
앤터니 비버, 김원중 역, 스페인 내전, 20세기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 교양인, 2006, ISBN 89-91799-42-6, 168-172쪽.
[204]
정확히 말하면 백색 테러건 적색 테러건 둘 다 조직적으로 자행된 것은 동일했다. 다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백색 테러가 중앙집권적으로 이루어진 반면 공화진영은 과두제적인 특성상 경우에 따라 정치화된 일선 활동가들이 자발적으로 수행하거나, 중앙정부 내무부 장관이나 보안국장 같은 최고위 관료가 인가하거나 아니면 칼보 소텔로 살해처럼 일선 관료나 정당원이 자의적으로 수행하거나 파라쿠에요스 학살처럼 마드리드의 공화정부 당국이 집단으로 공모하여 수행되기도 했다.
[205]
적색 테러를 연구한 줄리어스 루이스는 적색 테러를 범한 이들이 단순히 통제불능의 인간들이 아니라 통치 연합을 구성한 당원들이며 경찰관들도 단순한 폭도가 아니라 나름대로 교육받은 인사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줄리어스 루이스는 2009~11년에 이미 공화파 정부가 살인에 공모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
#
[206]
Payne, Stanley G. The Spanish civil war.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2. p. 1
[207]
힘러는 대규모 학살을 계획했음에도 생각보다 비위가 약했다고 한다.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에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총살을 시연하는 자리를 마련했을 때 구역질을 하며 자리를 피해 경멸을 샀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 그냥 한 마디로 자기 눈앞에서 죽이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208]
스페인 내전이 끝나자 스페인 본토 출신의 공화파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몰려온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자유주의자 등 혁명정신으로 똘똘 뭉친 국제여단 패잔병들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오면서 남프랑스는 물론 파리를 비롯한 프랑스 전역에서 급증했는데 프랑스 정부는 이 '골치아픈' 프로혁명꾼(?)들을 남프랑스를 중심으로 곳곳에 설치한 강제수용소에 쑤셔넣었다. 그런데 프랑스가 독일에게 항복하자 이들 수용소는 유대인 강제 수용소로도 겸사겸사 쓰이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이들 중 (주로 유대인) 일부 수감자들은 나치 독일이 직접 운영하는
아우슈비츠 등의 절멸수용소로 끌려가기도 했다.
[209]
대부분은 정치범과 외국인 전쟁 포로들이 수감된 마우트하우젠 강제 수용소에 떨어졌다.
[210]
게다가 소련행도
시절이 시절인지라 진짜 사소한 이유로 하루가 멀다하고 어제의 인민영웅이 오늘의 인민의 적으로 사형당하거나 굴라크로 끌려가는 일이 빈번했던지라 관점에 따라선 오히려 만만찮게 위험했다.
[211]
미국 기자 존 휘태커(John Whitaker)의 기록에 따르면, 1936년 10월 국민파 소속 모로코인 장교 무함마드 메지안(Mohammed Mizzian)이 두 여자를 심문한 다음 40명의 모로코인 병사들이 묵고 있는 학교 건물로 보내버렸다. 휘태커가 저 여자들은 어떻게 되냐고 묻자 메지안은 이렇게 답했다. "오, 4시간 내로 죽을 거요." 프랑코의 측근이었던 메지안은 훗날 스페인군 중장(당시 스페인군의 사실상 최고위 계급이었다. 중장 위인 Capita General은 국왕 아니면 명예직, 사후추서용 계급이다.) 자리까지 올랐으며 모로코 독립 이후
모로코군에 들어가 원수 자리까지 올랐다. 참고로 프랑코 이전 독재자인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도 원수보다 한 계급 아래 중장이었고 마지막으로 명예직 원수가 되었던 사람은 1994년
23-F 당시의 행적으로 유명한 마누엘 구티에레스 메야도 전 국방장관이다.
[212]
엄밀히 따지면 이러한 관행에 가까운 만행은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고 현지인들을 병사로 고용한 웬만한 유럽 열강들의 공통점이기도 했다. 파시즘 추종국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독일 제국의
파울 폰 레토포어베크 역시 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령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영국군을 상대로 전쟁을 치를 때 병사들에게 포상으로 강간과 약탈을 허락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시간대적으로 좀 더 가깝고 군국주의나 파시즘의 대척점에 있다고 평가되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샤를 드골의 자유 프랑스군에 소속된 북아프리카 무슬림 병사들도 프랑스인 장교들에게 전투 후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이러한 행위를 저질러도 좋다는 허락을 여러 번 받기도 했다. 강간 피해자만 수천명이 넘어가는 몬테카시노 전투 당시의 사례나 슈투트가르트 점령 당시 사례가 그 예시. 이들은 최소한 자국민과의 내전에서 이런 만행을 용인하진 않았다는 점에서 스페인 국민파에 비해 약간은 낫긴 하다. 게다가
무슬림에게 수백 년간 식민지배를 받아 좌우파 상관없이 전근대 이전부터 민간에서
이슬람 공포증이 만연했던 스페인의 특수성까지 생각하면 내전 당시 국민파의 이러한 만행은 일부 병사들의 일탈이 아니라 명백한 성적 테러임은 분명하다.
[213]
애초에 이 나라 자체가 지역마다 다른 지방색을 빼곤 얘기가 안 되는 나라라서 정치판도 마찬가지다. 현대 마드리드나 세비야, 바르셀로나 같은 스페인 인구, 경제 중심지에서 카를로스파는 진짜 그냥 역사적으로 그런 단체도 있었다는 수준이지만, 본진인 바스크, 나바라 지방에선 일종의 정치문화이자 지역 고유의 이념적 유산으로 여전히 의미는 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카를로스파 특유의 포지셔닝 덕분에 전국적으로 보면 여전히 유럽 평균에 비해 좌우익 이념대결이 살벌하고 감정도 많이 섞인 전국적 정치지형에 비해 해당 지역에선 좌파, 우파 모두 이념적 대립을 넘어 초당파적으로 존경할 수 있는 지역의 역사적 정치 운동으로 대접받는다. 그렇다고 해서 물론 현대에도 군소정당으로 존재하긴 하는 좌파 카를리스타당과 카를리스타당에서 분파된 우파 카를리스타 전통주의 교단이 군소정당 신세를 벗어날 기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사실 세가 작기 때문에 존경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세가 컸다면 그냥 공격 대상이지만 작다면 문화유산 취급을 할 수 있으니까.
[214]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주인공 조던이 사살한 국민파 기병이 바로 카를로스파 출신이었다.
[215]
사실 이런 카탈루냐어를 그나마 유지하려고 했던 가톨릭 인사 중에는 내전 중에는 카탈루냐 출신으로 열심히 국민파를 지지했던 이시드로 데 고마 톨레도 수석주교같은 이들도 있었다.
[216]
가톨릭이 국민파를 지지하면서도 은근 슬쩍 프랑코와 거리를 둔 데에는 교황청이 나치 독일을 종교나 이념적 이유로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프랑코가 내전 승리 이후에는 2차대전이 터지면서 그래도 친하게 지냈던 이탈리아 파시스트보다 독일 나치하고 더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었다. 교황청은 스페인 내전 때부터 '너네 빨갱이와 싸우는 건 괜찮은데 나치 독일 애들은 좀 경계해라'라는 마인드를 보였고 그렇기에 상찬을 하더라도 프랑코군보다는 그 내부의 스페인 가톨릭계나 카를로스파를 중심으로 했다.
[217]
다만 이런 성직자 학살은 강도만 완화되었을 뿐 39년 공화파가 몰락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218]
내전 당시 바스크 자치 공화국은 이념적으로는 우익이었지만 공화국 정부에게 자치권을 약속 받아 공화국 편에 섰으며 따라서 나머지 공화군과 다르게 군종 사제, 군인들의 축성 등 종교적 영향력이 여전히 유지되었다.
[219]
도시 자체가 옛날 옛적
로마 제국이 산 위에 세우고 몇 세기 뒤 이베리아반도를 점령한 무슬림들이 산 주위로 성벽을 쌓아 놓은 구조다.
[220]
톨레도의 알카사르는 스페인의 군사 박물관 역할을 하며 사건의 장본인인 모스카르도 본인도 그곳에 묻혀 있는데 2018년에
전몰자의 계곡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무덤을 이장할 때
포데모스 당에 의해 알카사르에 있는 하이메 미란스 델 보슈(
23-F의 가담자)의 무덤과 모스카르도의 무덤도 이장하자는 제안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복스 당에 의해 거부되었다.
[221]
당시 공화진영은 난리통이었던 데다 다들 피난이다 뭐다 정신이 없었다 보니 자기가 경험한 만행을 과장하는 경향도 상당했다. 마지막으로 유언비어까지 파다하게 퍼졌으니…
[222]
쌍방이 저지른 학살 중 단일 사건 중에서는 가장 희생자가 많았다.
[223]
훗날 카리요는 이러한 의혹을 부정했지만 여러 정황을 볼 때 카리요가 학살을 저지른 게 맞다는 것이 정설이다.
[224]
반대로 마드리드 이상으로 인구가 많았던 바르셀로나는 카탈루냐 제네랄리타트(지방정부)가 적색 테러를 누그러뜨리려고 했기 때문에 인구가 더 많음에도 희생자는 마드리드의 대략 2/3에 불과했다. 혁명의 광풍이 미치지 않던 바스크 지역은 예외적으로 공화파 지역에서 적색 테러가 극히 적었다.
[225]
사라고사는 국민파의 주적 중 하나인 아나키스트들이 강세를 보인 아라곤의 주도였다.
[226]
탄압이 더 체계적이고 온건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한 기점을 공화파 지역에서는 1936년 12월 마드리드 공방전, 국민파 지역에서는 1937년 2월 말라가 함락 이후로 본다. 그 이후에는 1939년 내전이 끝나고 국민파가 공화파 점령 구역 내에서 공화파 지도자들을 숙청하면서 1942년까지는 비교적 탄압이 가혹하게 이루어졌고 그 이후에는 다시 사형수건 비사형수건 감형 내지 사면하는 식으로 완화되었다.
[227]
이런 우파 성향 민간인을 상대로 한 적색 테러는 공화정부가 내전 극초반에 인민에 무기를 뿌리면서 더 심각해졌다.
[228]
그 이후에는 공산당이 통제하는 인민법원이 생기면서 탄압과 행정이 다소 질서를 찾게 되었다. 대신 민간인이 아니라 그 폭동을 일으켰던 아나키스트, 라르고 카바예로파, POUM들이 반대로 탄압의 희생자가 되었다.
[229]
대체로 비교적 노조 간부와 같은 정치 지도자들을 우선적으로 때려잡는다는 방침은 39년 스페인 내전이 끝난 후에도 빨갱이들을 때려잡으면서 재확인되었다. 국민파는 구 공화파 지역 내에서 적색분자로 의심되는 이들 20만 가량을 잡아들였는데 이들 중 죄가 없다고 판단되거나 있다고 해도 경미한 경우라고 할 수 있는 대부분의 인원들은 바로 석방, 수감된 이들 중에도 상당수는 몇 개월만 살고 나왔다. 정말 죄가 있다고 판단되어서 징역을 살던 이들의 경우 처음에는 무기징역으로 선고받는 경우도 많았지만 이들 중 대부분은 5년 내로 감형이나 사면을 받고 석방되었다. 그렇게 거르고 걸러서 대략 28000명 가량이 적색 테러 등 범죄가 있다고 판단되어 처형되었다.
[230]
케이포 데 야노의 프로파간다는 1938년까지 계속되었다.
[231]
특히 식량. 농촌을 중심으로 한 국민진영과 달리 대도시를 근거지로 한 공화진영은 집단농장과 노동자 경영의 한계로 생산성이 추락함에 따라 내전 말기로 갈수록 심각한 식량난, 물자난에 시달렸다.
[232]
이들은 한때
CNT와 손잡으려고 했던 경력이 있었고, 코드 역시 이들과 맞아 떨어지는 면이 있었다. 그 때문에 스페인 내전 당시 국민파 내의 다른 집단에서 경원시되었다.
[233]
국민파 진영 내에서 막대한 전공을 세웠기 때문에 국내외적으로 명망이 높았던 장군이었다. 당시 스페인에 파견된 콘도르 군단의 독일군 장교들은 은근히 스페인 장교들을 한 수 아래로 취급하던 경향이 있었는데 이들도 후안 야구에만큼은 인정했다.
[234]
정확히 따지면 종래 팔랑헤당 2인자인 마누엘 에디야(Manuel Hedilla)가 처형된 호세 프리모 데 리베라 대신 감히 자기가 당 지도자가 되겠다며 반항했고(당시 프랑코는 국민진영 수반이었을지언저 팔랑헤당의 수반까지는 아니었다.) 이것 때문에 반역자로 찍혔다. 위에서 말한 민간인 폭격에 대한 부정적인 발언도 그 반항의 일환이었다. 심지어 에디야의 지지자들은 팔랑헤당 내에서 다투는 과정에서 대포까지 동원해 당내 반대파를 공격하기도 했다.
[235]
특히 1936년, 1937년에 이런 경향이 더 심했다. 내전 이전에도 정치 테러 등 낌새는 있었지만 이때는 말 그대로 도시 등 후방은 감옥이 제 기능을 상실하는 등 다소 무법천지였다고 한다.
[236]
막상 그 네그린은 정권을 쥐자 공산당과 협력하면서 공산당이 군과 정부조직, 언론의 중요 자리를 차지하고 소련으로부터 검열 제도, 비밀경찰, 숙청 등을 수입해오다시피 하는 것을 방조했다. 물론 폴 프레스턴이나 스탠리 페인 모두 네그린이 소련에 나라를 팔아먹을 의도로 그랬다고 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네그린은 사회당 내에서도 카바예로처럼 대중적 인기가 있는 사람은 아니면서 민주주의는 커녕 좌파 권위주의적인 성향을 보였고 그런 사람이 총리로 있으면서 공산당이 군과 공직 분야의 요직을 틀어쥐는 가운데(특히 공군은 사실상 소련의 텃밭이었고 소련 고문 야코프 스무시케비치 대령은 사실상 스페인 공군 사령관이라는 보고도 있었다.) 소련식 숙청도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정권 2인자에 당시에는 반소적인 성향을 보였던 프리에토는 폴 프레스턴에 따르면 대놓고 네그린을 소련의 꼭두각시라고 디스했다.
[237]
앤터니 비버는 네그린은 제2공화국 이전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 이상의 권력을 휘둘렀다는 표현까지 썼다.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프랑코를 벤치마킹해서 스페인 내의 정당들을 전부 단일당으로 통합하려는 시도까지 한 바 있다.
[238]
다만 네그린이 진짜 공산당의 꼭두각시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네그린의 기본전략은 스페인 내전을 2차대전과 연결지어서 국외의 도움을 받으려고 한 것이었다. 카사도의 쿠데타 없이 몇개월만 더 버텼으면 그게 실현되었을 것이기에 어느 정도 현실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네그린 초기 집권의 원인은 CNT, POUM 등의 혁명세력이 너무 급진적으로 나섰기에 반파시즘 인민전선의 통일성을 위배한다고 자유주의자나 공화주의자들 및 온건한 사회주의자들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공산당의 팀킬과 각종 만행들을 통일성을 명목으로 방조했기에 이 부분은 잘못한 게 맞다. 특히 마지막은 이 때문에 한 때 네그린의 집권을 지지했던 중도 공화주의자나 자유주의자들조차도 결국에는 질려서 아나키스트와 함께 카사도 쿠데타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239]
군 수사국 SIM은 그냥 스페인판 NKVD였다. 이들의 악명이 높아 간혹 이들이 최전선을 방문하면
눈 먼 탄환으로 실수로 죽는 일들이 많았다고.
[240]
비공산당계 병사들은 장비나 의료지원을 안 해 준다거나 전공을 제대로 대우 안 한다든가 작전 도중 협력을 거부한다든가. 가장 압권인 것은 자기들 마음에 안 드는 군인이나 정치인들을 의사결정에서 배제하거나 심하면 트로츠키주의자나 프랑코나 파시스트 첩자로 몰다시피한 것이다. 실제로 무고한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조작한 사례도 많았다.
[241]
3만에서 7만까지로 추산하는 게 일반적이고 11만까지 부르는 학계 조사 결과도 있다.
[242]
POUM당의 안드레우 닌은 이 과정에서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려 쥐도새도 모르게 마드리드 NKVD 본부로 끌려가 처형당했다.
[243]
금본위제 하에서 당시 화폐의 가치는 얼마만큼의 금과 바꿀 수 있는지에 따라 결정되었다.
[244]
특히 독일이 이에 관심이 많았다. 독일의 주요 참전 목적 중 하나가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텅스텐(볼프람)을 포함해 괜찮은 원료 수입선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반쯤 소련 괴뢰로 떨어진
스페인 제2공화국과 달리 프랑코는 독일과 이탈리아가 국내정치에 개입하는 것만은 막았는데 그 수단으로 이런 광물을 먹고 떨어져라 마인드로 제공했다.
[245]
대표적인 사례로
아스트라 권총이 있었다.
[246]
다만 정치범의 경우 강제노역으로 볼 수 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당시 정치범 강제수용소 환경이 혹독했기에 법적으로는 정치범들 선택일지라도 개개인들 입장에는 사실상 강요로 볼 수도 있지만, 감형 혜택은 그렇다 치더라도 규정에 따라 식량을 포함해 일반 노동자 수준의 임금을 지급했고 또 가족 면회부터 자유로운 등 인센티브도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불법이지만 가족과 작업장 근처에서 외박도 했다는 증언도 있었다. 본격적인 노동을 하기 전에 2차대전 종결 전후로 이루어진 대대적인 사면, 감형 과정에서 중간에 출소한 사람도 있었다. 물론, 사회적인
빨갱이 낙인 때문에 일반 노동자 신분으로
전몰자의 계곡 같은 곳의 건설 현장에서 재소자 시절과 마찬가지로 계속 일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특히 전몰자의 계곡의 경우는 스페인의 정치적으로 중요한 대표적인 랜드마크가 될 예정이라 외국에서 보는 눈도 많았고 현장에서도 노동자들이 외부와 접촉을 꾀할 여지가 많았기에 위에서 말한 대로 인센티브를 지급해서 달랬기 때문에
정치범수용소에서 받는 대우보다는 훨씬 나았다.
[247]
결국 스페인의 EU와 NATO 가입 역시 프랑코가 사망하고 스페인이
왕정복고되면서 받아들여졌다.
[248]
마르크스주의 사학자다.
[249]
단 스페인이 원조된 미국 무기를 북아프리카의 식민지 전쟁에 사용하는 것은 용인하지 않았다.
[250]
북대서양 조약기구 가입만큼은 상당히 늦은 1982년에 이뤄졌는지라 나름의 선은 지킨 셈.
[251]
사실 죽기 일보 직전의 막장 환경에서 유대인이 여권을 무사히 챙겨서 출국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다만 실제로는 그냥 위와 같은 정부의 입장을 무시하고 제3국으로 통과하거나 에브로 강 일대에 수용되어 있다가 미국을 포함한 연합국 쪽 외교관들의 조치 등을 통해 제3국으로 빠져나가는 경우가 많았고 운 없는 이들만이 국경을 못 넘어갔다.
[252]
이 사람은 다른 경우와 달리 중앙정부의 승인을 받고서 했다.
[253]
당시 포르투갈 대사였고 내전기 개국공신 겸 카우디요의 형이다.
[254]
사실 프랑코와 유대인의 관계는 복잡하다. 프랑코가 근무한 식민지 모로코에서 유대인들은 식민정부에 협조적이었고 자연히 프랑코도 일부 유대인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내전기가 되면서 스페인도 나치 독일발 반유대주의 선전이 몰려들어왔는데 프랑코 본인은 내전기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다가 2차대전 들어서 독일과 스페인이 국경을 맞대고 힘러가 마드리드를 방문했을 때는 반유대주의에 대한 립서비스도 여러 번 했다.
[255]
훗날 스페인 최초의 우주비행사가 되는 그 분 맞다.
[256]
프랑코 본인은 그냥 손을 놓았지만 정권 핵심 측근을 포함해 외교관들이 집단적으로 한 것이니 정부 차원인 건 맞다.
[257]
조지 오웰이 대표적이다.
[258]
일례로 작가
앙드레 말로는 한 무리의 폭격기를 동반하고 스페인에 갔는데, 공화파 지휘관에 의하면 말로가 데리고 온 사람들은 "작가, 화가, 사진사, 여자, 어린이 등으로 다양했는데 비행기를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말로는 이런 작자들을 데려와서 각종 비용을 청구하고 사기나 쳐 재산이나 모았다고 한다.
[259]
하나는 작중 과거 시점에서 주인공 조던이 한참 전투를 치르는 중에 유유히 나타나 지금 상황이 어떠냐고 물었던 한 교수. 그나마 이 사람은 짜증은 나게 해도 해는 끼치지 않았지만 다리를 폭파하기 직전에 사령부에 보내는 조던의 보고서를 가로챈 프랑스군 부사관 출신 고위 간부 '마르티'는 심각했다. 마르티는 소위 '혁명 사상가'로 꽤 명성을 쌓았으나 본래 전투원이 아니라 보급창고 담당이었던지라 군사적인 능력은 전혀 없다. 그동안 쌓은 명성이 있어서 고위직을 얻기는 했으나 지도조차 볼 줄 모를 정도로 군사적 능력이 전혀 없으므로 지휘는 졸렬하기 그지없었고, 급기야 사방이
오열로 가득하다는 의심에 사로잡혀 닥치는 대로 사람을 총살하는 돌아이가 되어 있었다.
[260]
위치나 위상이나 딱 스페인의
서울대학교라고 보면 된다. 이공계와 자연과학에선 최근 마드리드 자치대학의 위상이 더 높지만 역사성은 그 기원은 15세기 말까지 올라가는 콤플루텐세와 비교할 수 없다.
[261]
물론 이것도 사회 일반에서 그랬다는 거지, 영국 정부는 국제여단원들을 백안시했고, 훗날 2차대전 중에도 국제여단 복무 경력이 있으면 무조건 간부로 승진하는 걸 금지시켰다.
[262]
그리고 그런 공화파 망명 정객들의 영향을 받은 인물 중 대표가 바로
체 게바라 되시겠다. 즉
쿠바 혁명은 어떻게 보면 스페인 내전의 유산인 셈.
[263]
데뷔작인
크로노스와
악마의 등뼈. 그리고 비교적인 최근작인
판의 미로.
[264]
이는 스페인의 자연환경도 크게 영향을 주었다. 돌투성이 산악과 드넓은 황야로 뒤덮인 이베리아반도는 참호를 구축하기 적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 교전마다 감당하기 힘든 수준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누가 따로 시키지 않아도 죽자사자 참호를 파게 되었다.
[265]
1차 대전 이전까지 수백년간 전쟁은 기동을 통해 결정지어진다는 것은 전쟁의 상식이나 마찬가지였다. 기동을 통한 승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참호전은 당시의 상식을 뒤엎는 것이다. 때문에 직접 체험한 것이 아니고서야 쉽게 납득하기 어렵기도 했다. 1차대전 때 서부전선에서도
마른 전투 이후 교착상태에 빠지기 전까지 참호의 중요성이 간과되었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훈은 결국 피로 대가를 치르면서 얻어진다.
[266]
공화파는 전차 전력 정도를 빼면 상대적으로 군사적 역량이 떨어졌기 때문에 그 정도는 아니었다.
[267]
전격전 비스무리한 걸 구사할 정도였다고 했는데 사실 스페인 내전에서 포위섬멸 같은 건 없었고 당시에는 독일도 전격전이라는 걸 떠올리지 못했으며 무엇보다도 국민파는 전차 전력이 공화파보다 현저히 빈약했다.
[268]
파리를 해방시키고 가장 먼저 입성한 부대가
필리프 르클레르가 이끄는 프랑스 제2기갑사단 산하 9중대(La Nueve)로 스페인인으로 구성된 부대였다.
[269]
1호 전차의 부실함, 전차는 적 전차를 더 주의해야 한다는 점 등.
[270]
이 당시 공산당은 모든 우파, 반동, 파시스트적 요소가 제거된 민주주의의 새로운 종류라는 개념을 내걸었는데 이러한 개념은 내전이 터지기 전에도 아사냐의 공화좌파를 포함한 스페인의 좌파 세력 전반이 공유한 개념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그 중에서도 누가 제1당을 하느냐의 차이일뿐이었다.
[271]
차이가 있다면 스페인은 하도 거리가 멀어서 소련이 통제를 하려고 해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동유럽처럼 완전히 괴뢰하하기는 어려웠다. 그랬기 때문에 후반부 스페인은 네그린의 사회당 우파계열과 공산당이 서로 협력하면서도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 미묘한 긴장을 유지했다.
[272]
그리고 가능만 했다면 에티오피아 정복 따윈 사소하게 보일 정도의 거대한 무솔리니 정권의 국뽕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알려진 대로 스페인은 르네상스 시대 이래 통일 이전 이탈리아 열국들 상대로 줄곧 상국으로 군림했고 밀라노는 150년, 나폴리와 시칠리아 왕국, 사르데냐는 아예 300년에 걸쳐 통치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반적으로 지방분권 친화적인 통치 방식과 스페인과 이탈리아반도 나라들이 북쪽으론 개신교 북유럽 세력, 남쪽으론 이슬람 세력이란 공적에 맞서 협력해야 했던 시대적 문맥, 그리고 종교-문화적 친밀감 때문에 19-20세기를 휩쓸고 파시즘의 토양이 된 이탈리아 급진 민족주의 사관에서 스페인은 오스트리아, 프랑스만큼 증오하진 않았지만 어쨋든 얄미운 옛날 상전국 중 하나를 영향권 아래 넣었으면 국뽕이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탈리아의 대외 인식상 국력이 최전성기를 달렸을 때는 그 실체가 까발려지지 않았고 히틀러 상대로 맘대로 움직이면 한대 맞는다 으름장 놓을 패기까지 있었던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상국 비스무리한 영향력을 끼쳤던 30년대 초반이었다.
[273]
독일은 개신교인 북독일이 주도권을 쥔 국가라 남독일 중심의 가톨릭을 은근슬쩍 차별했다. 그리고 그 괴상망측한 인종주의 때문에 국민파 스페인 입장에서는 팔랑헤를 중심으로 적극적인 지지층이 있는 것과 동시에 카를로스파나 종교계를 중심으로 적극적인 반대세력도 있었다. 반대로 이탈리아는 어디까지나 독일보다는 인종주의하고도 거리를 두었고 문화적으로도 비슷하고 종교적으로도 같은 가톨릭이라는 것 때문에 훨씬 익숙했다. 이 때문에 국민파 스페인은 초기에는 독일보다는 이탈리아를 모델로 삼고자 했다.
[274]
대표적으로 스탈린은 공화정부 측에 무기 등을 지원할 때마다 공화정부가 보유한 금을 꼬박꼬박 털어먹었다.
[275]
현대 이탈리아야 기술 수준도 우수하고 튼튼한 산업기반을 보유하고 있는 G7의 일원이라지만 이 시기만 해도 이탈리아는
메이저 열강에 비해 국력이 낮은 열강 포지션을 담당하면서 농업 비중도 높고 기술 수준은 그럭저럭 봐줄 만하다고 친다고 해도 산업 규모는 영세한지라 현대 이탈리아와도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다. 아무리 숙적인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쓰러진 상황이라고 해도 누울자리도 안 살펴보고 설칠 입장은 아니었던 셈이었다.
[276]
에티오피아 전쟁 시점에서 이탈리아의 군사비는 GDP의 20%, 예산의 70%를 차지하고 있었고 이마저도 군의 현대화에 투자되기보다는 고위 장성들과 결탁한 군수업자들의 배를 불렸다.
[277]
그래도 팔아먹은 무기는 구식. 공화정부가 무기를 사는데 경험이 없다 보니 이곳저곳에서 사기를 많이 당했다.
[278]
하지만 프랑코 입장에서는 큰 손해는 아니었다. 이탈리아는 말할 것도 없고 자꾸 빌린 거 갚으라고 독촉하는 그 독일의 경우에도 결과적으로 이런 저런 거 다 합쳐도 프랑코는 독일에게 진 빚의 고작 18%만 상환했다.
[279]
공식적으로 카를로스파는 참전을 거부했지만 개인 중에서는 이런저런 이유로 싸우겠다는 이들이 있었다.
[280]
무기, 물자 이외에 북-서 아프리카에 있는 프랑스 식민지 거의 전부를 달라고 했다. 단, 이는 프랑코만의 의견도 아니고 내부에서 연합군 스파이로 활약하던 독일의 정보국장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이 권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281]
국민진영 중에는 반독일, 친영도 있었고 영국이 겉으로는 중립을 표명했어도 그 와중에 추축국급은 아니라도 상당한 지원을 했기 때문에 관계가 유지된 점도 있었다. 당장 프랑코에게 무기는 독일, 이탈리아가 지원해 줬지만 그 무기를 굴리는 석유는
텍사코를 포함한 미국 석유재벌 회사에서 샀다.
[282]
대신 2차대전의 직접적인 서곡까지는 아니라도 2차대전 이전에 터진 여러 국제적 이슈 중 하나라고는 볼 수 있겠다.
[283]
자기가 스페인인이었다면 국민파를 지지했을 것이라고 했던 처칠이나 이념적으로는 프랑코에 동정적이었지만 자국 이익을 고려해 공화파를 지지할까 망설였던 프랑스 육해군 장교들
[284]
여담이지만 메탁사스 정권 하에서 메탁사스와 친했던 그리스 기업가 보도사키스 아타나시아데스는 위에서 언급된 괴링과 공화파 간의 무기 밀매 사건에서 괴링 대신에 무기 밀매 사업의 실행역 역할을 했다. 1930년대 그리스 산업사에서는 중요 인물이라고도 한다.
[285]
그리고 소련은 심지어 독소전이 터지기 전날까지만 해도 독일에 철도편으로 지하자원을 수출하고 있었다.
[286]
물론 둘의 속셈은 정반대이다.
[287]
다만 중도좌파와 극좌의 싸움이다가 극우가 중도좌파를 배신한 러시아 내전과는 전개 양상이 다르다. 스페인 내전으로 따지만 카바예로의 쿠데타에 아사냐가 도망쳐서 프랑코의 도움으로 대항혁명을 일으키다가 배신당한 꼴이다.
[288]
물론 내전 직전에는 좌파도 우파도 이 주장을 지지했고, 카사레스 키로가를 케렌스키에 비유하기도 했다. 심지어 키로가 본인도 총리로 있으면서 자기 대에 내전이 터져서 자기가 케렌스키 꼴이 나는 건 막겠다고 다짐했고 아예 본인 사무실 책상에 케렌스키 사진을 두었다.
[289]
이 말은 이후
훌라송 가사의 일부가 되기도 했다.
[290]
카를로스파의 지도자.
[291]
안드레우 닌의 후임자.
[292]
판의 미로의 경우 작중 배경은 1944년으로 내전이 이미 끝났으며 저항하는 시민들이 반군으로 나온다. 악마의 등뼈는 배경이 멕시코인데 주인공은 스페인 내전으로 인한 피난민이다. 악마의 등뼈의 경우 스페인 내전 시기가 배경으로, 감독 본인의 가족은 스페인 내전과 관련 없지만 아는 사람들 중에서 스페인 내전으로 인해 멕시코로 넘어온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293]
스페인 내전 자체를 다룬다기보다는 내전 이후 지식인들의 절망감을 아이들의 시선으로 풀어냈다.
[294]
이쪽도 에리세와 비슷하다.
[295]
스페인 내전이 주제라기보다는 스페인 내전과 이후 프랑코 집권기를 보낸 무통증을 앓은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296]
스페인의 국민적 시인. 스페인 내전 중 사살당했다.
[297]
2011년에 개봉한 실화 기반의 스페인 내전을 다룬 영화.
[298]
배경 자체는 현대 스페인이지만 주인공 욱스발의 아버지가 스페인 내전 때문에 멕시코로 망명했다.
[299]
작중 주인공이 암살해야 하는 타겟인 스추카가 공화파 진영에 자원하여 싸웠다.
[300]
배경은 현대이나 주요 내용으로 등장한다.
[301]
'15여단(국제여단 중 아일랜드인들이 15여단에 속했다고 한다) 만세' 정도의 뜻이다.
[302]
인민전선의 병사들에 관한 노래다. 3집 "London Calling"에 수록되어 있다.
[303]
반대로 안달루시아는 전형적인 소규모 봉건 지주 계층이 대규모 독점 농지를 소유하면서 여기에서 수많은 땅없는 소작농들이 일했던 전형적인 라틴식
라티푼디움 경제구조를 내전기 까지 유지했다.
[304]
사실 이런 카탈루냐와 바스크 지역주의자들 중에서도 우파들은 국민파로 간 경우가 많았다.
[305]
스페인 내전의 봉기 계획은 원래 에밀리오 몰라가 주도했는데 여기에 케이포 데 야노는 세비야에서, 프랑코는 카나리아와 모로코 식민지에서 따로 봉기하는 식으로 숟가락을 얹은 셈이다. 그리고 원래 계획은 케이포 데 야노와 프랑코가 남쪽에서 올라올 것도 없이 마드리드, 바르셀로나를 포함한 북부 주요 지역에서 핵심 지역을 장악하면 끝나는 거였고 원래 장군들 서열도 이 지역을 맡은 이들이 위였다. 하지만 몰라가 주도한 북부 주요 지역에서의 쿠데타는 대부분 실패로 끝난 반면 프랑코는 여유롭게 모로코를 장악한 뒤 정예 아프리카군을 이끌고 스페인 본토에 상륙하면서 상황이 역전된다.
[306]
물론 따지고 보면 이는 사실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도 일단은 들고 일어나는 것에 관심을 가졌지 막상 어떤 나라를 만들지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당시 쿠데타에 가담한 주요 유력인사들의 정치성향은 그야말로 제각각이었다. 저 말을 한 몰라는 일단 본인은 공화주의자였는데 막상 주요 세력 기반은 왕당파와 카를로스파였다. 산후르호 후임 바지사장이었던 미겔 카바네야스도 알레한드로 레룩스의 급진당, 공화우파 출신이었으며 스페인에서 발렌시아와 더불어 3위를 다투는 대도시 세비야를 초반에 장악하는 로또를 터뜨려 후일 독자적인 군벌로 군림한 케이포 데 야노는 물론 리베라 정권과 개인적인 악연도 있었지만 대놓고 반팔랑헤에 제2공화국 개국공신이기도 했다.
[307]
2차대전기 전략게임으로 바닐라에서는 제일 빠른 시작년도가 1936년이다. 역사대로 위대한 스페인을 택해 국민파에게 승리를 안기느냐 아니면 인민전선을 따라 공화국 정부군에게 승리를 안겨 국민파를
군기교육대에 보내느냐를 선택할 수 있다. 4편 기준으로 진행 상황에 따라 기본 공화파 vs 국민파 2등분에서 왕정복고주의자들의 카를로스파 스페인과 아나키스트들의
아라곤 지역방위위원회에 의해 최대 4등분까지 벌어지며, '이베리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를 찍어서 땅 한 입 하려는 포르투갈까지 끼어들면 5파전으로 이베리아반도 버전 전국시대가 벌어진다. 만약 포르투갈이 내전이 났는데 스페인 내전과 꼬이면(내전 AI 정부가 스페인에 선전포고하는 경우) 최대 6파전이 되며(대표적으로 아라곤이 일으킬 수 있는 포르투갈 지역방위위원회 내전) 포르투-브라질 연합왕국이 실패해서 포르투-브라질 전쟁이 터진 상황에서 안정도 부족이나 아라곤의 내전 공작으로 내전이 터지고 스페인 내전에 개입 중점을 찍어 버린 경우 7파전이라는 속칭 '방구석 세계대전'이 터진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소련 등 열강의 의용군까지 몰려오면 상황이 개판이 나면서
TNO 미리보기 그 자체가 되며, 이베리아가
혼돈 파괴 망각 그 자체가 된다. 이베리아반도 특성상 추축의 양면 공세선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프랑스 뒤에서 연합의 교두보가 될 수 있어 지정학적 중요성도 낮은 편이 아니다. 다만 호이4의 스페인 내전은 공화파가 내전이 쉽다는 의견이 많다. 그래서 비역사적 AI로 돌리면 국민파가 떡실신하는 편이다.
[308]
1차대전에서 독일 동맹이 승리한 대체역사모드로 여기선 3등분된다.
[309]
동양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난 대체역사모드로 여기선 무려 4등분된다.
[310]
카이저라이히내의 연합국 승리를 가장한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모드로, 여기 역시 4등분된다.
[311]
스페인 내전을 바탕으로 한 보드게임.
[312]
위 보드게임의 확장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