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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적 128석 • 500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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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ido Revolucionario Institucional | |
Democracia y Justicia Social 민주주의와 사회정의 |
|
약칭 | PRI |
상징색 | 녹색, 흰색, 붉은색[1] |
한글명칭 | 제도혁명당 |
창당일 | 1929년 3월 4일 |
이념 |
입헌주의 혁명적 내셔널리즘 지도주의 사회민주주의 |
스펙트럼 |
중도 ~
중도우파 (현재)[2] 역사적: 빅 텐트[3][4] |
주소 |
Av. Insurgentes Norte 59 col. Buenavista 06359, 멕시코 시티 |
국제 조직 |
|
대표 |
알레한드로 모레노 카르데나스 (Alejandro Moreno Cárdenas) |
상원 의석수 | 16석 / 128석 |
하원 의석수 | 33석 / 500석 |
웹사이트 |
|
[clearfix]
1. 개요
멕시코의 정당. 혁명제도당으로 번역하는 경우도 있으나, 국내의 스페인어학과나 중남미학과 교수들을 비롯해서 일반적으로는 제도혁명당으로 번역하며 영어로도 Institutional Revolutionary Party라고 쓴다. 이쪽은 멕시코측 문서에서도 쓰는 공식 번역.1929년 창당된 이래 2000년까지 71년간 장기 집권한 정당이다. 만약 2000년 대선에서 승리했다면 소련 공산당의 장기집권 기록을 뛰어넘었을 것이다.[5] 1929년부터 1989년까지 멕시코의 32개 주의 주지사직을 전부 독점하기도 했다. 지금은 과거의 위상에 비해 세가 많이 줄어든 편이다.
2. 역사
전신은 노동자당이었으며, 기존 명칭은 국가혁명당(PNR)이었다.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가 멕시코 혁명의 혼란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을 모아서 창당한 좌익 정당이었다. 알바로 오브레곤과 카예스 정권(1920~1928) 때 노동자당은 강력한 반교권주의 정책을 실행했고, 무자비한 종교인 탄압에 반발한 가톨릭 교인들이 크리스테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은퇴 후에도 권력을 계속 잡고 싶었던 카예스는 바지사장 3인[6]을 각각 2년간 대통령으로 올린 채 본인이 정권을 독점했고 이 시기(1928~1934)를 막시마토(Maximato)라고 부른다.
막시마토 기간 동안 카예스와 혁명 장군들(Caudillo)은 점차 보수적인 성향을 띄게 되었고, 카예스는 국제 파시즘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며 1930년 멕시코 공산당 금지, 파업 금지, 소작농의 지역 카우디요로의 예속화 등 점점 우경화됐다. 또한 반미선동 및 히스패닉 통합을 통한 멕시코 고토 회복을 주장해서 멕시코와 미국의 관계는 험악해졌다. 카예스는 1934년 대선에서도 라사로 카르데나스를 바지사장으로 올리려고 했으나 카르데나스는 카예스의 꼭두각시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카우디요들의 권력을 제거하기 시작해서 결국 권력투쟁에 패배한 카예스가 망명한다.[7]
라사로 카르데나스 하의 국가혁명당은 멕시코 혁명당(PRM)으로 명칭을 바꾸고 1930년대 소작농을 위한 토지개혁, 원주민 보호, 석유 국유화, 공산당과 연합해서 노동조합 증강 등 사회주의적인 정책을 시행하면서도 경제성장 역시 이뤄내 멕시코 대중의 지지를 얻게 된다. 1940년 대선에는 카르데나스의 동료이자 온건파 후보인 마누엘 아빌라 카마초가 당선되었으며 이때부터 당명은 제도혁명당이 되었다. 카르데나스 시기엔 석유 국유화 등 확실히 사회주의 노선을 띈 좌익 성향의 정당이었으나, 이후 시간이 지나며 경제적으론 점차 우편향돼서 중도 성향이 된다. 다만 지금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가입되어 있긴 하다.
한편으론 장기 집권 속에 점차 권위주의적인 색채도 띄기 시작하면서 당내외 인사들에게 비판당하기도 한다. 그리고 도시화에 따른 이촌향도의 여파로 농촌 지역이 황폐화되는 문제점도 발생했다. 결국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을 앞두고 학생들이 시위를 벌이다가 진압과정에서 수백명이 죽어나가는[8] 참사가 벌어지자 제도혁명당 내에서도 노선을 두고 여러 갑론을박이 오갔으며, 이후 학생운동의 주도자들을 영입하기도 한다.
이렇게 제도혁명당의 독주 아래 20세기 멕시코의 정치는 다른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물론 세계적으로 봐도 독특한 색채를 띄게 된다. 제도혁명당 자체는 사실상 유일한 거대 정당으로 공천이 곧 당선일 정도로 권력이 셌지만 선거제는 유지되었고 특히 당내 민주주의는 살아있어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이 확고한 권력을 잡진 못했다. 대통령 후보, 즉 사실상의 후계자를 결정할 때를 비롯해 많은 일들이 관료, 정계 원로, 법조인, 기업인, 노동조합 등의 밀실협의로 결정되었다. 특히 군부나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은 전무해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 대조를 이뤘다. 거의 모든 고위관료들이 제도혁명당 소속이었고 기업이나 노동조합은 정부의 보호를 받았다. 그 대가로 관료들은 정치인들의 정책을 앞장서 실행했고 기업과 노동조합은 직원들을 관제시위 등에 동원하거나 부정선거를 도와주기도 했다.
최종 결정을 내리는 대통령은 혼자서 당의 결정을 뒤집고 자신이 원하는 인물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가졌지만 6년 임기를 마치면 모든 정치적 영향력을 잃게 되며 재선은 불가능하다. 아즈텍 제국 틀라토아니
사실 이 같은 정치체제는 당대에도 지식인들이나 사회운동가들로부터 적지 않은 쓴소리를 들었고, 멕시코의 경제성장이 막을 내린 1980년대 이후로는 멕시코의 발전을 가로막던 일등공신이라며 여러모로 욕도 들어먹었지만, 한편으론 쿠데타가 다반사거나 독재국가가 판을 쳤던 다른 중남미 국가와는 다르게 정치적인 안정과 경제성장을 둘 다 이루었기에 옹호적인 의견도 없는건 아니다. 이시기 멕시코는 비록 제도혁명당이 권력을 사실상 독점했다고는 하지만 ' 실질적 일당독재'가 된거지, 제도적 민주주의에 대한 노골적인 공격은 하지 않았고, 군부가 독재했던 국가에 비하면 파업할 자유나 정부나 기업을 욕할 자유같은 여러가지 자유는 비교적 보장된 편이었다. 물론 알게 모르게 운동권이나 야당에 대한 탄압이 이루어지다 결국 1968년 멕시코 올림픽을 앞두고 대학생 수백명이 학살당하는 저 유명한 틀라텔롤코 광장 학살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이건 상당히 특출난 예외적인 사건이었지 다른 중남미 군사독재 국가들에 비하면 일상에서 정부 비판 같은 민주적 기본권은 그래도 그럭저럭 보장되었다.[9][10] 외교적으로도 본래 사회주의 좌파 정당이었다고는 하지만 점점 우클릭하다보니 냉전 시절 사회주의 정당을 경계하던 미국의 시선에서도 어느정도 자유로우면서 한편으론 대쿠바 관계를 비롯한 냉전기 국제 정치판에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세울 기반도 있어 나름 좌우파 모두에게 지지를 끌어낼 수 있었다.
허나 1982년 석유값 하락과 외채위기로 이른바 '멕시코의 기적(Milagro mexicano)'이라 불린 고도성장 신화는 막을 내렸고[11] 이후로 NAFTA와 노동규제 완화, 민영화, 재정지출 축소, 임금삭감 등 신자유주의, 보수적 정책을 대대적으로 펼쳤고 그 여파로 빈부격차가 엄청나게 커졌다. 이에 반발한 좌파 상당수가 민주혁명당(PRD)으로 떨어져나갔고, 1985년 멕시코시티 대지진 때 그 무능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1988년 대선에서 정권교체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초기 개표에서 라사로의 아들 콰우테목 카르데나스 국민민주전선(FDN)[12] 후보가 카를로스 살리나스 후보를 상대로 우세를 보였고 개표 중반까지도 이 기세가 이어졌는데 정권교체가 두려웠던 제도혁명당이 의도적으로 정전을 시킨 후에 투표함 바꿔치기, 즉 개표조작을 통해 자당 후보를 50%를 겨우 넘는 득표율로 당선을 확정지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개표 초반까지 제도혁명당 후보가 아닌 야당 후보가 앞섰던 것은 멕시코에서 엄청난 일이었고 부정선거로 엄청난 후유증을 앓게 되었다. 이후 선거개혁으로 이어지게 되면서 야권의 세가 넓어지는 계기도 되었다.
한편으로 70년대까지만 해도 멀티정당 신세였던 국민행동당(PAN)이 제도혁명당의 고질적인 부정부패에 진저리 난 보수성향 국민들의 지지로 세를 불려나갔다. 또 금융규제 완화로 경제구조가 외국자본에게 털리기 좋은 구조로 재편되어 경제위기가 반복된 바람에, 제도혁명당의 세가 약화되어갔고 1994년에 금융위기와 더불어서 치아파스 등 남부 일대에서 극좌 무장단체 사파티스타[13]가 제도혁명당 정권을 규탄하며 시위를 벌이는 상황이었지만, 여당 대선후보 루이스 도날도 콜로시오가 도중에 암살당하는 바람에 대타로 출마한 에르네스토 세디요[14]에게 동정표가 모이면서 정권 재창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았고 결국 1997년 중간선거를 기점으로 의회 과반수에 미달하면서 일당우위제가 붕괴되고 우파- 국민행동당 / 중도-제도혁명당 / 좌파- 민주혁명당의 3당 체제로 재편되었다. 그리고 2000년 대선에서 제도혁명당 후보가 고작 36%의 득표를 거두는데 그치면서 71년에 걸친 장기집권을 마감하며 국민행동당(PAN)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12년간 야당으로 지냈다. 2003년 중간선거에서 탄탄한 조직력 덕택에 나름대로 선전할 수 있었지만 딱히 괜찮은 대체 후보를 내지 못한데다가 이미지가 개판이었던 것은 여전했기 때문에 2006년 대선에서 3위에 그쳤고, 동시에 치러진 총선에서도 참패를 거두웠다.
하지만 국민행동당 정부가 아슬아슬하게 재집권에 성공한 뒤로 마약과의 전쟁을 펼쳤는데 마약과의 전쟁이 오히려 마약 카르텔들의 무장화만 가속화시키며 변변치 못한 성과를 거두는데 그치며 지지율이 급감했고 이 틈을 타서 엔리케 페냐 니에토가 멕시코주 지사 당시의 좋은 이미지를 쌓아올렸던 덕택에 2012년 대선에서 정권탈환에 성공하였다. 현재는 민주혁명당(PRD)이 좌파성향을 띄고 있고 국민행동당(PAN)이 확고하게 우파성향을 띄고 있어서 중도 정당으로 분류되고, 심지어 일부 언론에서는 아예 우파에 넣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 그래서 안티들은 이 정당은 정체성이 없는(...) 기회주의 정당이라고 까기도 한다. 실제 좌파 인사 후보와 보수 인사 후보들을 필요할 때마다 골고루 등용해서 대통령에 당선시키기도 했다.
니에토 대통령은 집권 기간 낮은 경제성장률과 경기침체, 친인척들의 부정부패로 인해 지지율이 폭싹 떨어졌고, 2015년 중간선거에서는 국민행동당과 민주혁명당이 쌍으로 삽질한 덕택에 겨우 선전할 수 있었지만 대학생 43명 실종사건에 대한 무책임한 대응으로 썩은 정당이라는 평판이 더욱 강해진데다가, 치안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고, 더군다나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에게 제대로 대항하지 못해서 유약한 대통령이라는 이미지까지 생겨 지지율이 10%대를 겨우 넘나들다, 2018년 대선에서 국가재건운동(MORENA)의 오브라도르에게 자리를 내주게 된다.[15] 호세 안토니오 메아데(José Antonio Meade) 후보는 10%대 득표율을 얻는데 그쳤다. 주지사는 1명도 건지지 못했으며 하원에서 모레나, 국민행동당은 물론이고, 하원에서 모레나당과 정당연합을 구성한 노동당과 사회결집당만도 못한 42석 가량의 의석을 확보, 원내 5당으로 몰락하며(연합정당까지 합하면 60석) 한때 멕시코를 호령하던 정당, 3당제의 한축을 구성하던 정당에서 일개 중견야당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후로도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는데 국민행동당, 민주혁명당과 연합전선을 꾸리고 있지만 지지율은 그닥 좋지 않다. 그나마 2021년 하원 선거에서 이전보다 의석 수를 늘리는 데 성공했다.
3. 여담
멕시코에서 이 당의 당원이나 옹호자는 '프리스타(priísta)' 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당의 약자인 PRI에 '-주의자'라는 뜻의 스페인어 접미사 -ista를 붙여서 만들어진 말이다.[16]멕시코주에서 제도혁명당의 세력이 가장 강한 편인데, 수도인 멕시코 시티에서는 힘이 약하다. 멕시코 시티에서는 좌파 정당들의 세력이 강한데, 지금은 모레나당(국가재건운동)이 강세이며, 과거에는 민주혁명당(PRD)의 힘이 강했다.
부정부패로도 악명이 높았다. 장기집권을 하는 과정에서 각 기업들과 관료들과 협력관계를 맺었는데 집권이 장기화되다보니 변질화되어서 부패가 난무하게 된데다가 이게 일부 조직만의 문제도 아닌 것이 지방 농민이나 노동조합들을 대상으로도 협력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표를 대가로 혜택을 주는 경우가 많다. 당연히 부패가 판을 칠 수밖에 없게 되니 아예 제도혁명당이라는 정당 자체가 부패의 온상이 되어왔다. 1988년 대통령 선거때 초기 개표에서 야당후보인 라사로 카르데나스 전 대통령의 아들 '쿠아우테목 카르데나스'가 당선될 듯하자 개표도중에 정전을 시켰다. 멕시코는 1970년대 남미 각국에서 독재정권들이 판쳤을때 탄압받는 시민들을 대거 망명자로 받아들였었던 나라들 중 하나였는데 자당 후보 당선시키려고 독재정권들이 했던 일을 그대로 따라한 것이다. 정전을 시킨 후 투표함 바꿔치기를 통해 자당 후보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킨 일은 유명하며[17] 이외에도 각종 정경유착이나 권언유착[18]등...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 덕분에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니에토 당시 대통령 후보에게 반대하는 학생운동이 대거 벌어졌을 정도였다.
미드 나르코스: 멕시코편에서도 나오는데 부정부패와 무능의 극한을 달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드라마에서도 시도때도 없이 까인다.
다만 제도혁명당만 특별히 부패한 건 아니고 국민행동당이나 민주혁명당도 시간이 지날수록 부패해졌다는 것이 중론이다. 제도혁명당이 장기집권해서 멕시코의 부패의 큰 축을 담당하며 저지른 일이 많아서 덜 주목받을 뿐이다.[19]
기행을 많이 저지르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대부분 포퓰리즘과 관련된 것인데 멕시코가 1980년대 이후로 제도적인 민주화가 단행됨에도 이러한 짓거리는 오히려 확산되었고 심지어 정권이 교체되고 나서도 이런식으로 유권자 매수를 자행해오고 있다. 2012년 대선에서도 유권자 상당수를 매수하는 식으로 선거운동을 치렀는데 이때 제도혁명당측에서 상품을 뿌렸다는 증거가 속속 나왔음에도 제대로 된 수사조차 진행되지 않았다.. 멕시코주의 대표적인 우범지대 중 하나인 시우다드 네사와코요틀에서는 한 후보자가 자신이 당선되면 도시 내 100만 가구에 매일 1kg씩 또르띠야를 주겠다는 말을 했었고(이 후보는 당연히 낙선했다. 네사와코요틀 투표 2위.), 주민들에게 쥐꼬리만한 돈을 주는 것은 이미 전통적인 수법이다. 2015년에는 PRI 소속의 한 후보자가 여성의 브래지어 사이에 걸 수 있는 동전주머니를 만들어 주민들에게 나눠주고 있다고 한다. 한국 같으면 후보자는 경찰서 정모를 열고, 이를 받은 사람도 최고 50배에 가까운 과태료를 지불해야 하는데, 멕시코는 제대로 된 단속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2018년 대선판에서도 제도혁명당 측에서 돈을 뿌리고 있다거나 하는 식으로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는 증언이 적지 않게 나오고 있지만 미운털이 많이 박혀 있기 때문에 생각보다 별 효력을 얻지 못한다는 말이 나온다.
4. 역대 선거결과
4.1. 대통령 선거
후보자 | 연도 | 득표율 | 당선여부 |
파스쿠알 오르티스 루비오 | 1929년 | 93.6% | 당선 |
라사로 카르데나스 | 1934년 | 98.2% | 당선 |
마누엘 아빌라 카마초 | 1940년 | 93.9% | 당선 |
미겔 알레만 발데스 | 1946년 | 77.9% | 당선 |
아돌포 루이스 코르티네스 | 1952년 | 74.3% | 당선 |
아돌포 로페스 마테오스 | 1958년 | 90.4% | 당선 |
구스타보 디아스 오르다스 | 1964년 | 88.8% | 당선 |
루이스 에체베리아 알바레스 | 1970년 | 86.0% | 당선 |
호세 로페스 포르티요 | 1976년 | 100.0%[20] | 당선 |
미겔 데 라 마드리드 | 1982년 | 74.3% | 당선 |
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 | 1988년 | 50.7%[21] | 당선 |
에르네스토 세디요 폰세 데 레온[22] | 1994년 | 48.7% | 당선 |
프란시스코 라바스티다 오초아 | 2000년 | 36.1% | 낙선 |
로베르토 마드라소 | 2006년 | 22.3% | 낙선 |
엔리케 페냐 니에토 | 2012년 | 38.2% | 당선 |
호세 안토니오 메아데 쿠리브레냐 | 2018년 | 16.41% | 낙선 |
[1]
멕시코 국기 색깔에서 따왔다.
[2]
영어 위키백과 기준. 언론에서는 스펙트럼을 보도하지 않거나 일부에선 친미우파라고 보도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소속인데서도 알 수 있듯 시초는 좌파 정당이었으며, 지금도 당에선 우익
국민행동당과 좌익
민주혁명당 사이에 위치한 중도 포지션을 내세우고 있다.
[3]
국민혁명당(PNR)(1929~1938) 시기. 우경화한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가 바지사장 대통령 3인을 내세운 시기(Maximato)로 혁명기의 노동자당을 승계한 정당이었지만 유사 파시즘, 반공주의, 반미 성향을 띄었다.
[4]
멕시코 혁명당(PRM)(1938~1946~이후) 시기.
라사로 카르데나스 통치기에는
사회민주주의 내지
사회주의 정당이였다. 이후에도 1951년 창립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가입하는 등 꽤 오랜 기간 사회주의 성향이 있는 정당이었다. 국영기업의 민영화같은 경제적 우클릭이 본격화되는 시점은 1980년대 이후.
[5]
이전에는
우루과이의
콜로라도당이나
라이베리아의
트루휘그당이 제도혁명당보다 오래 집권했다. 콜로라도당은 1865년부터 1958년까지 '93년', 트루휘그당은 1878년부터 1980년까지 무려 '102년'을 집권했다. 현재는
1945년 이래 장기집권하고 있는
베트남 공산당과
1948년 이래 장기집권하고 있는
북한의
조선로동당, 그리고
1949년 이래 장기집권하고 있는
중국공산당이 그 기록에 도전하고 있다. 물론 선거로 인한 집권이 아니라 직접적인 비교 대상은 아니다.
[6]
에밀리오 힐,
파스쿠알 오르티스 루비오,
아벨라르도 L. 로드리게스.
[7]
여담으로 카예스를 비롯한 망명파들은 이후 카르데나스의 석유 국유화로 미국 정부의 심기가 불편해지자 이들의 지원을 받아서 정권을 탈환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정작 카예스가 미국의 파시스트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본 당시 미국 정계는 카르데나스가 카예스보단 낫다고 보고 카르데나스 정권을 승인하였다. 이후 카예스는 마누엘 카마초 집권기에 멕시코로 돌아왔다.
[8]
이를 틀라텔롤코 참사라고 한다.
68운동의 연장선상으로 일어난 학생 집회였으며, 결국 1968년 10월 2일에 멕시코시티 역사지구 근처에 있는 틀라텔롤코 광장에서 군경이 데모 학생들에게 발포하여 사상자를 낸 사건이다. 지금도 매년 10월 2일에는 틀라텔롤코 광장에서 집회가 일어난다.
[9]
끔찍한 소리긴 하지만 실제로 제도혁명당이 스페인어식으로 표현하자면 '게으른 독재 (dictablanda)'를 피던 시절 아르헨티나, 칠레, 우루과이 같은 동네에서 틀라텔롤코 학살 같은 유혈사태는 일상이었고(
더러운 전쟁,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문서 참조), 바로 아래 중미 국가들은 아예 그냥 내전 상태였다. 냉전의 그림자는 멕시코에도 당연히 드리울수밖에 없었지만 미국 바로 옆의 나라란 점을 감안하면 다른 중남미 국가들의 피비린내나는 이념갈등 역사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혁명 이후~NAFTA로 인한 90-2000년대 경제, 사회붕괴까지 멕시코의 정세는 안정적인 편이었다. 여담으로 dictablanda에 대해 설명하자면 스페인어로 독재는 dictadura인데, 여기서 dura는 단단함이란 뜻도 있기에 말끝의 dura를 blanda(부드러운, 온순한)로 바꾼
언어유희다.
[10]
실제로
미국의 보수 성향 NGO
프리덤 하우스가 매년 발표하는
세계의 자유 지수에서도 멕시코는 3.5등급(정치적 권리 3/4등급, 시민 자유 4/3등급), 4등급(정치적 권리, 시민 자유 모두 4등급)으로 평가받으며 '부분 자유'로 분류되었다. 다만 이 지수가 냉전 시기 지표에서 편파성이 보인다는 평가가 많다는 것은 감안할 것.
[11]
사실 1976년 금융위기로 멕시코의 고도성장이 막을 내렸다고 평가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후로 석유산업에 힘을 쏟으면서 단기간에 극복했는데 1982년 금융위기는 1976년 금융위기와 다른차원에서 그걸 뿌리채 뒤흔들었고, 1982년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임금수준이 폭락하면서 여파가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중이다. 멕시코의 최저임금 수준이 경제수준에 비해서 말도 안되게 낮은데 이는 1982년 금융위기를 극복을 명목으로 임금 경쟁력을 향상시키겠다고 하면서 최저임금 수준을 낮게 유지했고 이게 21세기 들어서도 계속 유지되다 보니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나마 트럼프 당선 이후로 미국이 멕시코에 수시로 압력을 가하고 멕시코 자체적으로도 내수시장의 중요성을 체감하면서 최저임금 수준을 올려서 빈민층들의 구매력을 크게 늘리는 방식으로 내수시장을 확충시키겠다는 식의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도 크게 낮다.
[12]
민주혁명당의 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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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 무장단체라는 독특한
정체성을 내세우며 활동해서
반군이라기보다는
시민단체에 가깝다.
[14]
본래 콜로시오의 선거대책위원장이었다.
[15]
오브라도르는 제도혁명당 출신 정치인이기는 하다. 물론 출신만 그렇지 대통령이 된 시점에서 제도혁명당에서
탈당한지 30년은 되었고
90년대와
2010년대에 걸쳐서 제도혁명당 측에서 저질렀던 선거부정을 폭로하거나 멕시코 석유공사의
민영화 정책에 항의하는 등 대표적인 反 제도혁명당 활동을 하던 인물이었다. 정치적 파트너이자
라사로 카르데나스 전
대통령의 아들이기도 한
콰욱테목 카르데나스와 더불어 제도혁명당 좌파 탈당파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정치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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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다른 정당에도 똑같이 적용되어,
국민행동당 지지자들은 pianista,
국가재건운동 지지자들은 morenista 등으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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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가장 유명한 일이기는 했지만 그 이전에도 몇개의 위성정당을 둔 사실상의 일당독주체제였고, 선거도 요식행위 정도에 불과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그 당시까지만 해도 멕시코가 그럭저럭 안정적으로 굴러가던 국가다보니 저항이 눈에 띌 정도로 일어나지 않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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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사가 대표적인 친 제도혁명당 언론이다. 물론 따로 국영 방송국을 안 만든것은 아니지만 1980년대까지 텔레비사가 방송시장 점유율의 대다수를 차지하게끔 내버렸던것도 이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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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정당이 부패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멕시코 시티에서 잘 나타나는데, 시민들이 부패에 염증을 느끼고 새로 나온 신당을 지지하게 된다. 일례로
국가재건운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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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단독출마해서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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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선거. 개표 초반까지만 해도 야당 후보인 콰우테목 카르데나스(
라사로 카르데나스 전 대통령의 아들)가 근소한 표 차이로 승리할 것으로 예측되었지만, 개표 도중 의도적으로 정전을 시킨 후에 투표함 바꿔치기를 통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래도 사상 최저득표율을 기록한 것은 부정할 수 없었고 상당한 부담을 떠안게 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에도 말이 많았으며 후에 마드리드 대통령도 자서전을 출간하면서 이 선거가 부정선거임을 시인하고 당시에 사용되었던 투표용지는 1991년에 전부 소각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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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도날도 콜로시오 후보의 선거대책위원장이었다가 콜로시오가 의문의
암살을 당한 뒤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