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04:48:45

스탠리 볼드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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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석 제6대 공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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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2대

토머스 칼라일
3대

제임스 몬크리프
남작
4대

윌리엄 스털링맥스웰
준남작
5대

에드워드 스탠리
백작
6대

스펜서 캐번디시
공작
7대

아치볼드 프림로즈
백작
8대

스태퍼드 노스컷
백작
9대

숌버그 커
후작
10대

조지 고셴
자작
11대

제임스 로버트슨
남작
12대

알렉산더 브루스
13대

프레드릭 해밀턴템플블랙우드
후작
14대

로버트 핀리
자작
15대

리처드 홀데인
자작
16대

조지 윈덤
17대

길버트 엘리엇머레이키닌먼드
백작
18대

허버트 키치너
백작
19대

데이비드 비티
백작
20대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백작
21대

스탠리 볼드윈
백작
22대

존 길모어
준남작
23대

윈스턴 처칠
24대

이언 해밀턴
25대

에드먼드 알렌비
자작
26대

허버트 그리어슨
27대

존 도널드 폴록
28대

앤드루 커닝엄
자작
29대

앨러스터 심
30대

알렉산더 플레밍
31대

시드니 알프레드 스미스
32대

제임스 로버트슨 저스티스
33대

조 그리몬드
남작
34대

제임스 로버트슨 저스티스
35대

맬컴 머거리지
36대

케네스 올솝
37대

조너선 위트니 개리옥 윌즈
38대

고든 브라운
39대

마그누스 마그누손
40대

앤서니 로스
41대

데이비드 스틸
남작
42대

아치 맥퍼슨
43대

뮤리얼 그레이
44대

도니 먼로
45대

맬컴 매클라우드
46대

존 커훈
47대

로빈 하퍼
48대

토머스 디엘
준남작
49대

마크 밸러드
50대

이언 맥워터
51대

피터 맥콜
52대

스티브 모리스
53대

앤 헨더슨
54대

데보라 카옘베
}}}}}}}}}}}} ||
KG PC PC (Can) JP FRS
파일:스탠리 볼드윈 총리.jpg
<colbgcolor=#01013A><colcolor=#FFC224>본명 스탠리 볼드윈
Stanley Baldwin
출생 1867년 8월 3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잉글랜드
우스터셔 주 뷰들리
사망 1947년 12월 14일 (향년 80세)
영국 잉글랜드 우스터셔 주 스토어포트
재임기간 제55대 총리
1923년 5월 23일 ~ 1924년 1월 16일
제57대 총리
1924년 11월 4일 ~ 1929년 6월 5일
제59대 총리
1935년 6월 7일 ~ 1937년 5월 28일
서명
파일:스탠리 볼드윈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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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1013a><colcolor=#ffc224>작위 1대 뷰들리의 볼드윈 백작[1]
가터 기사 (Order of the Garter)
학력 해로우 스쿨 ( 졸업) (-1884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컬리지[2]
버밍엄 대학교[3]
정당
}}}}}}}}}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정치 입문2.3. 보수당 중진 시절2.4. 총리 취임 이후
2.4.1. 1차 내각(1923 ~ 1924)2.4.2. 짧은 야당 당수 시절(1924)2.4.3. 2차 내각(1924 ~ 1929)2.4.4. 치욕의 두번째 야당 당수 시절(1929~1931)2.4.5. 거국내각과 추밀원 의장 시절(1931 ~ 1935)2.4.6. 3차 내각(1935 ~ 1937)
2.5. 은퇴 이후와 사망
3. 선거이력4. 기타5. 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영국의 55대, 57대, 59대 총리.

세 번째 임기 때 조지 5세가 사망한다. 또한 에드워드 8세의 양위, 스페인 내전 등을 겪었다.

2. 생애

2.1. 초기

스탠리 볼드윈은 1867년 잉글랜드 우스터셔 주 뷰들리의 부유한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볼드윈의 아버지 알프레드 볼드윈은 1892년에 선거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된 이후 1908년에 사망할 때까지 의원직을 역임한 거물급 정치인이었다. 볼드윈은 좋은 집안의 배경으로 둔 덕분에 사립명문학교인 해로 스쿨과 이후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컬리지에서 역사학을 전공하는 등 명문가 자제로서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이후 그는 그의 가족들이 운영하던 철강회사에서 커리어를 쌓았고 볼드윈은 철강회사를 운영하며 영국에서 현대적인 산업가라는 평판을 얻었다. 볼드윈은 아버지가 정치계에 진출한 1892년에 루시 리즈데일과 결혼하였고 이후 아버지가 1908년에 사망하자 20만 파운드에 달하는 유산과 그레이트 웨스턴 철도의 감독직을 물려받았다.

2.2. 정치 입문

볼드윈은 1906년 총선에서 키더민스터에 보수당 후보로 입후보하여 정치계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하지만 당시 보수당은 자유무역 문제로 심각한 분열상황에 놓여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보수당은 총선에서 참패하였고 볼드윈도 결국 낙선하고 만다. 이후 1908년 아버지인 알프레드 볼드원이 사망하자 볼드윈은 아버지의 지역구인 뷰들리의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하원의원에 당선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의 정치적 후광과 본인의 능력으로 정치적 커리어를 쌓으며 제1차 세계 대전이 한참일 때 보수당 당수인 앤드루 보너 로의 의회 내 비서를 겸직하게 되었고 1917년에는 재무차관이 되기에 이른다. 그는 재무차관 당시에 가명으로 영국의 전쟁부채 상환을 위해 부자들과 귀족들의 기부를 독려하는 글을 여러차례 언론에 투고하였고 볼드윈 자신도 재산의 5분1을 정부에 기부하는 모범을 보였다.

2.3. 보수당 중진 시절

볼드윈은 1919년 추밀원 요직과 상무성 회장[4]직을 지냈다. 그리고 이후 그는 보수당의 원내 중진으로서 활동하며 자신의 계파를 만들어 당내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리고 그는 한편으로 자유당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내각을 실각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당시 보수당 자유당 노동당이 득세하자 이에 위기감을 느껴 연정을 하였으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내각이 잇따라 소련과의 외교관계 수립과 아일랜드 자치법안 통과시켜 실질적으로 아일랜드 독립을 승인하고 제1차 세계 대전이 종전한 지 몇년밖에 안된 시점에 터키 독립전쟁에 무리한 파병을 부르짖자 보수당 내부에서 큰 불만이 터져나왔고 결국 10월 칼튼 클럽 모임[5]에서는 다수 의원들이 당내 지도부에 반기를 들어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의 연정을 탈퇴하여 보수당 단독 내각을 구성하여야 된다는 의견을 강력하게 개진하였고 그 중심에는 볼드윈이 있었다.

결국 보수당의 신임을 잃은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자유당 내각은 1922년 10월에 붕괴하였고 같은해 11월에 열린 총선에서 보수당 자유당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내각에 염증을 느낀 민심에 의해 대승을 거머쥐었고 단독내각을 성립시킬 충분한 요건을 갖추었다.[6] 그리고 보수당의 당수였던 앤드루 보너 로는 영국 제54대 총리가 되었고 볼드윈은 보너 로 내각의 재무장관으로 입각하였다.

2.4. 총리 취임 이후

2.4.1. 1차 내각(1923 ~ 1924)

앤드루 보너 로 총리는 1923년 5월 식도암 말기판정을 받으며 사실상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이 때문에 보너 로는 불과 임기를 1년도 채우지 못하고 사임하였고 보너 로 본인은 사임 5개월만에 사망하였다. 이렇게 되자 보수당은 새로운 총리를 뽑아야 했고 그 결과 총리 후보군이 재무장관 스탠리 볼드윈과 외무장관 조지 커즌으로 압축되었다. 그러나 당시 당내 분위기는 국내문제에 대해 커즌보다 전문성이 높았던 볼드윈으로 지지가 쏠리고 있었고 결정적으로 커즌은 귀족 출신의 귀족원 의원이었다. 때문에 당시 귀족적 이미지를 탈피하여 중산층과 서민층에 친근한 이미지를 내세워 중산층과 서민층의 지지를 얻으려던 보수당에서 귀족 출신의 총리가 다시 나온다는 것은 자칫하면 국민의 신임을 잃을 수 있는 문제였다. 이러한 까닭으로 전 총리이자 보수당 내부에서 큰 계파를 가진 당내 원로인 아서 밸푸어가 나서 볼드윈을 지지하였고 밸푸어가 나서자 당시 국왕이었던 조지 5세도 볼드윈을 총리로 낙점하였다. 그리고 1923년 5월 22일에 볼드윈은 영국의 55대 총리가 되었다.

당내 지지와 단독과반의석으로 야심차게 출범한 볼드윈 내각이었으나 첫번째 임기는 무역정책을 두고 당내 분열로 무력한 모습을 보였다.

총리가 된 볼드윈은 보호무역과 식민지 내의 경제블록 조성을 외치던 인물이었고 때마침 당시 영국은 자유무역으로 인해 영국제품이 가격경쟁력을 상실하여 무역적자가 발생하고 이것이 실업률을 상승으로 이어지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가 보호무역 정책을 펼치기에는 정치적 명분과 당내 지지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당시 보수당은 의회내에서 단독과반 내각을 결성할 수 있는 충분한 의석을 확보하였으나 그의 전임자인 앤드루 보너 로는 관세는 낮은 수준으로 유지될 것이라는 공약을 내세웠고 결정적으로 보수당 내부에서는 자유무역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볼드윈의 보호무역 정책에 크게 반발하여 사실상 분열상태였다.

볼드윈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의회를 해산하고 국민들에게 보호무역관세 정책에 대한 지지를 묻는 조기총선을 1923년 12월에 실시하였으나 결과는 보수당 258석 노동당 191석 자유당 159석으로 보수당은 제1의석을 얻었으나 의회내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한 만족할 수 없는 결과가 나왔다.

이것은 보수당의 분열과 나아지지 않는 실업문제로 볼드윈 내각과 보수당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표출된 결과물이었다.

이런 선거 결과속에 자유당은 과거 보수당의 배신으로 연정이 붕괴한 것을 잊지않고 복수를 하기위해 칼을 갈고있었고 또한 캐스팅 보드를 지기위해 전략적으로 노동당을 지지하기로 한다. 볼드윈은 이러한 불리한 요건속에 총리 자리를 지키기 위해 소수당 정부 출범을 각오하고 새 의회가 열리는 1924년 1월까지 사임을 거부했지만, 조지 5세의 개회 칙유 발표 이후 있었던 정부 계획안에 대한 승인 투표를 노동당과 자유당이 손잡고 부결시키면서 더이상 버틸 수 없게되었고 국왕을 찾아가 사임의사를 밝히고 사임하였다. 게다가 자유당 노동당은 볼드윈 내각에 대한 내각불신임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차피 정권을 더이상 지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새 의회가 개회하자 자유당 노동당을 지지하였고 노동당 당수인 램지 맥도널드가 제56대 영국 총리로 지명되었다. 이렇게 볼드윈 내각은 출범한지 반년만에 무너졌고 정권을 노동당에게 내주고 만다. 그리고 이때부터 맥도널드와 볼드윈 이 두사람의 질긴 정치적 악연이 시작되었고 1937년까지 두사람이 번갈아가며 영국 총리직을 맡았다.

2.4.2. 짧은 야당 당수 시절(1924)

볼드윈은 총선 패배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는 당 안팎의 당수직 사퇴압박을 받았으나 볼드윈을 비롯한 당 지도부는 신임투표에서 자리를 지키는데 성공한다.

한편 자유당의 협조를 얻어 출범한 첫 노동당 내각이 출범하였으나 소수 정부였던 탓에 그 기반이 불안하였다.

노동당 램지 맥도널드 내각은 런던에서 전시 연합국 회의를 소집해 프랑스가 도스 안을 수용하도록 압박하고 영독 상업조약을 체결해 바이마르 공화국의 숨통을 터줬는데 이 과정에서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견해를 많이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프랑스가 루르 점령을 포기하고 배상금 조정을 받아들이면서 취임 후 여럿 외교적 성과를 내었다.

하지만 맥도널드 내각은 소련을 승인하고 수교 협의를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자유당의 반발을 사게 된다. 특히 신생 국가인 소련에 차관을 제공하는 문제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대했고 보수당과 볼드윈은 이런점들을 공략하여 자유당에 호응하며 맥도널드 내각을 붕괴시키기 위한 계략을 세우기 시작하고 이효과는 주요하여 노동당과 자유당 간의 느슨한 연대가 깨지게 된다.

특히 이 사이에 벌어진 캠벨 사건(Campbell Case)가 맥도널드 내각의 운명을 끝장내고 만다.

공산주의자이자 신문 편집자이었던 존 로스 캠벨(J.R. Campbell)이 공개적으로 군인을 모욕하는 서한을 기고한 것에 대하여 영국 검찰에서 폭동을 선동한 죄로 기소하자 맥도널드와 노동당 내각이 기소를 중지하도록 압박했다는 폭로가 터져나오면서 그야말로 난리가 나고 말았다.

램지 맥도널드는 이에 대응해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 총선을 선언했다. 1924년, 1년만에 열린 조기 총선에서 노동당이 40석을 잃고 151석에 그친 상황에서 보수당이 의석을 무려 154석을 늘려 401석을 확보해 단독 과반을 달성. 1월에 굴욕을 당했던 스탠리 볼드윈이 화려하게 총리로 복귀하게 된다.[7]

특히 선거를 4일 앞두고 지노비예프 서간 사건이 터진 것이 치명타였다. 보수 계통 일간지인 데일리 메일에서 지노비예프가 서명한 ‘코민테른 서간’의 비밀문서를 공개했는데 거기에 영국 노조와 군대에게 공산주의 쿠데타를 호소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던 것. 이로 인해 노동당은 색깔론에 대책없이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반면 보수당과 볼드윈은 이틈을 놓치지 않고 맥도널드 내각과 노동당 전체를 공산주의자로 몰아가며 색깔론을 덮어씌워 정권을 다시 차지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뒷날 지노비예프의 서간 사건과 맥도널드 내각에 대한 불신임 결의의 근거가 되었던 캠밸 사건은 보수주의자들의 선동과 날조로 드러나면서 노동당은 치를 떨었으며 지금까지도 영국 정치사의 대표적인 흑역사로 기록되어있다.

아무튼 결국 야심차게 출범한 영국 역사상 첫 노동당 내각은 근거없는 마타도어식 날조에 10개월 만에 무너졌고 스탠리 볼드윈은 총리직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2.4.3. 2차 내각(1924 ~ 1929)

1924년 11월의 조기총선에서 보수당은 승리하였고 볼드윈 2차 내각이 시작되었다.

볼드윈 2차내각의 특징은 전 총리였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계열의 자유당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는데 여기에 대표적으로 보수당으로 당적을 바꾼 윈스턴 처칠이 있었고 처칠은 볼드윈 2차 내각에 재무장관으로 입각하였다.

볼드원 2차 내각은 기존에 귀족들과 기업가들의 자선사업과 지역사회단위로 자선적 기부와 의존을 통해 유지해오던 영국의 전통적 사회복지체제와 이것을 토리당 시절부터 지지해오던 보수당의 이념과는 다른 국가가 직접 개입하는 사회복지 정책을 펼친다.

볼드윈이 총리가 되어 제일 먼저 밀어 붙여 의회에서 통과시킨것이 바로 1925년부터 실시된 과부와 고아 및 노령에게 10실링씩 연금을 지급하는 연금법이었다.

이는 일할 수 없거나 국가 보험에 가입한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생활 수준을 보장하는 인도주의적 복지 국가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기존 보수당의 정책과는 정반대였던 정책이었다.

당시 볼드윈이 이러한 연금 정책을 실시한 까닭은 당시 보수당이 비록 선거에서 이겼으나 노동당이 주장하던 국가가 개입하는 적극적 사회보장제도는 영국 전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고 당대 영국인들에게는 매우 신선하게 느껴지는게 사실이었다. 또 국가사회보장제도가 점차 대세가 되어갔기 때문에 볼드윈으로서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또한 볼드윈 내각은 전력회사 통합화를 단행하였다. 1926년 보수당은 전력공급법을 의회에서 통과시켜 모든 전력회사를 하나로 통합시키고 국가가 새로운 전력회사의 재정의 절반을 책임지고 절반은 각 지역의 전력생산기업들이 책임지는 사실상의 반 국영화를 단행하였고 이렇게 탄생한것이 중앙 전력 기구(Central Electricity Board)였다.

그러나 볼드윈 2차 내각은 많은 경제정책의 실정과 보수적인 재정정책으로 인하여 심각한 불황과 파업 그리고 10%를 훨씬 상회하는 높은 실업률에 시달렸고 국민들은 매우 큰 피로감에 휩싸였다.

특히 재무장관 윈스턴 처칠이 고수해온 금본위제와 1926년 영국노동조합(TUC)의 총 파업은 볼드윈 내각에 치명타를 입혔다.

금본위제는 세계 기축통화로서 영국 파운드 스털링의 위치를 지키기 위한 조치였으나 이는 영국상품의 가격경쟁력을 두고두고 하락시키는 원인이 되었으며 또한 금리상승으로 인해 기업들뿐만 아니라 서민들도 힘들어졌다. 이로인해 당시 재무장관이던 윈스턴 처칠은 두고두고 까이게 되었으며 이는 영화 다키스트 아워에서 조지 6세가 처칠을 깔때 언급되기도 하였다.

또한 볼드윈 내각의 금본위제는 나비효과를 일으켜 영국 석탄사업에도 타격을 입혔는데 석탄 산업가들은 이윤을 유지하기 위해 광부들의 임금을 삭감하고 노동시간을 더 늘이는 등의 행태를 보였고 심지어 대량해고의 조짐이 보였는데도 보수당과 볼드윈 내각은 뒷짐을 지며 아무런 구제책을 내놓지 않았고 분노한 광부들은 1926년 총파업에 돌입하였고 다른 노동자들도 잇따른 경기불안과 나이지지 않는 노동환경에 분개하며 연대파업을 개시하였다. 이후 영국노동조합(TUC)의 중심으로 360만명이 참여하는 총파업에 돌입하며 영국 전역이 혼란에 빠졌다.

볼드윈 내각은 공급정비기구( Organization for Maintenance of Supplies)를 설치하는 한편 1920년에 재정된 비상대권법(Emergency Powers Act)을 이용하여 필요한 보급물자를 비축하며 파업에 대비하였고 효과적으로 대응하고있다는 평을 받았다 그리고 노동조합과도 지속적으로 여러차례 협상을 하였으나 양측의 의견이 평행선을 달렸다.

결국 노동조합 측에서 사회의 불안정을 우려해 총파업을 풀고 정부가 승리한 것처럼 보였으나 이후로도 산발적인 파업은 계속되었고, 산발적인 파업과 금본위제와 보수적인 재정정책으로 인한 경기불황은 볼드윈 내각을 지속적으로 타격하였다.

볼드윈 내각은 이러한 악재속에서도 상류층들과 중산층들의 지지를 받아 임기를 모두 채우는 기염을 토해냈지만 결국 경기불황을 해결하지 못하였고 이로 인한 인기하락으로 보수당 1929년 5월 총선에서 260석을 차지하고 사회보장제도를 기치로 내건 램지 맥도널드 노동당이 288석을 차지하며 노동당에게 원내1당을 내어주고 말았으며 여기에 59석을 획득한 자유당 노동당에 협조하기로 하면서 램지 맥도널드가 영국의 58대 총리로 지명되었고 보수당 노동당에 또 다시 정권을 내어주며 볼드원은 총리직에서 사임하였다.

2.4.4. 치욕의 두번째 야당 당수 시절(1929~1931)

선거에서 패배하며 정권을 내준 볼드윈은 당 안팎의 비난에 휩싸이며 치욕적인 두번째 야당 당수 시절의 보내야했다.

또한 볼드원은 당대에 영향력 있는 언론인이자 미디어 소유주였던 로서미어 남작과 배버룩스 경으로부터 '창녀의 특권인 책임없는 권력'을 누린다는 거샌 비판을 받았고 이로인해 볼드윈은 껍질뿐인 당수로 전락하는 굴욕을 겪어야만 했다.

2.4.5. 거국내각과 추밀원 의장 시절(1931 ~ 1935)

그러나 상황은 뜻밖의 형태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바로 대공황이었다. 미국발 대공황의 여파가 영국 경제도 덮치면서 1930년 말즈음에 이르러서는 실업률은 두 배가 되었고, 실업자 수도 250만 명이 넘었다. 문제는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전 총리와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맥도널드 총리에게 적극적인 확장 재정 정책을 펼 것을 요구했음에도 재정보수주의 성향에 가까운 필립 스노든 재무장관이 재정 압박을 이유로 적자 지출을 한사코 거부하였다.

여기에 반발한 아서 핸더슨 외무장관 등 노동당 내 일각에서는 이런 압박에 굴해선 안된다며 즉각적으로 확장 재정 정책을 실시해야 한다고 반대로 맥도널드를 압박했고, 결국 진퇴양난에 빠진 맥도널드는 총리직 사임을 선택했다.

그러자 대공황의 한가운데에서 갑작스럽게 정권이 바뀌는 것을 원하지 않은 국왕 조지 5세가 직접 개입하여 맥도널드 총리에게 위기 극복을 위한 거국내각 수립을 제안했고, 맥도널드는 이를 받아 보수당, 자유당과 국민정부(National Government)라는 이름의 거국연립정부를 수립하기로 한다.

이로 인해 노동당은 그야말로 두 개로 쪼개졌는데, 맥도널드의 노선을 따르는 사람은 국가노동당(Natinal Labour)으로 분리되어 나갔으며 노동당에는 아서 핸더슨 등 보수당과의 연립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남았다. 졸지에 정권을 잃은 노동당은 분노에 차 맥도널드 총리, 스노든 재무장관 등을 당에서 제명했지만 이미 버스는 떠나버린 상황이 됐다.

노동당의 강력한 지지층이었던 노조의 분노가 맥도널드와 국가노동당을 덮쳤고, 런던과 맨체스터에서는 연이어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노동당에 남은 수많은 사람들 역시 맥도날드가 자기만 살려고 당을 버린 배신자라고 비판했으며 맥도널드는 그 희생이 공익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을 변호했다.

취임 직후 있었던 총선에서 국민 정부 내 다수당을 차지한 보수당이 국민정부가 선거 연합을 해 선거를 치르도록 맥도널드 총리를 압박했고, 노동당은 사실상 유일한 야당으로서 선거에 임하게 됐다. 결국 선거에서 국민정부 연합이 615석 중 554석(90.1%)을 확보하는 압승을 거두며 정권을 연장하는 데 성공한다. 근데 이중 470석을 보수당이 차지하면서 거국내각은 사실상 보수당 정부가 된다

사실상 거국내각의 총리인 맥도널드는 바지사장으로 전락하였고 실질적인 내각의 지도자는 보수당 당수이자 추밀원 의장이었던 볼드윈이 되었다.

거국내각은 당면한 대공황에 파운드 중심의 식민지 경제 블록 조성으로 대응하여 위기를 넘겼으며 경제 블록으로 인해 외국제품 대신 영국제품이 제국내에서 더많이 소비되기 시작하여 경기가 안정되기 시작하였고 이는 평소 보호무역과 블록경제를 주창하던 볼드윈을 입김이 작용된 결과였다. 이로 인해 볼드윈은 국민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고 영향력을 거의 회복하였다.

이 대연정시기에는 영국 외교사에 있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우선 대표적으로 영연방 자치령과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하는 웨스트민스터 헌장이 1931년에 체결되어 영연방 자치령 각국의 총독과 총리는 영국총리와 동등한 권한을 가지게 되는 등 자치령들은 매우 높은 자치권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잠잠하던 유럽의 정세에는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 1922년 로마 진군이라는 무혈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탈리아 베니토 무솔리니와 1933년에는 독일에서 나치당이 정권을 잡아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총리가 되어 군비확장을 가속화 하는 등 파시즘 군국주의 열풍이 불기 시작하였다.

이에 맥도널드 총리와 내각의 실질적인 지도자 볼드윈 추밀원 의장은 독일 문제의 원인이 가혹한 배상금과 합리적이지 못한 전후처결의 문제라 생각하여 유화정책을 폈고[8] 이탈리아와 독일의 빠른 군비확장도 전세계적인 군축협약을 통한 외교적 압박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더구나 당시 영국은 미국에게 세계경제주도권을 빼앗기며 대영제국의 위상을 잃고 있었고 대공황으로 인한 심각한 경기악화와 재정소모로 인하여 과거와 같은 대규모의 군대를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었기 때문에 군축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협력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였지만 독일은 1933년 말부터 빠른속도로 군비를 확장시켰고 1934년 3월 29일 독일의 국방력이 크게 증가하여 공군력이 250%나 증가되었다는 발표를 듣자 볼드윈은 이에 독일이 군축에 더이상 협조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항공부대의 증강과 비행중대의 확대 개편 그리고 기존함대의 유지를 지지하며 적극적 재무장론자로 돌아섰다.

그러나 볼드윈은 평화주의자였고 평화를 통해 독일을 군비확장을 억제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그가 제1차 세계 대전의 참상을 눈으로 봤었기 때문이었다. 당대의 영국의 정치인들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참상을 겪었기 때문에 볼드윈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정치인들이 공통적으로 평화주의를 지향하고 있었고 더 이상 젊은이들을 전쟁에 몰아넣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영국 전 사회에 뿌리깊게 박혀있었기 때문에 평화주의는 전국민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영국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재무장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국외의 불안 조짐속에 램지 맥도널드 총리가 심각한 건강악화로 퇴임하였고 스탠리 볼드윈이 총리로 복귀하였다.

2.4.6. 3차 내각(1935 ~ 1937)

1935년 다시 총리에 취임한 볼드윈이 해결해야할 산적한 과제 중에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할 건은 재무장 문제와 유화책을 존속할것인가의 여부였다.

1935년 10월 볼드윈 총리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탄탄하게 하기 총선을 실시하였는데 뒷날 총리가 되어 뮌헨 협정을 체결한 재무장관 네빌 체임벌린조차 볼드윈 총리에게 재무장을 노동당에 반대하는 선거 운동의 주요 쟁점으로 삼으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볼드윈 총리는 재무장을 선거의 핵심 쟁점으로 삼지 않았다.

볼드윈 총리는 유권자들에게 국제 연맹을 지원하고 영국의 방어를 현대화하며 결함을 개선할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대규모 군비는 없을 것이라고 약속합니다"라고 말했고. 주요 공약으로 주택, 실업, 경제 불황 타파 등 그 당시 영국 국민들이 우선적으로 당면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내새웠다. 그래서 선거에서 보수당은 386석이라는 과반 의석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뒷날 볼드윈 총리의 작은 아들 A. 윈덤 볼드윈(A. Windham Baldwin)을 말과 당시 각료들의 말을 따르면 재무장 계획을 계획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전쟁 자체에 혐오감을 느끼는 대중의 적대감을 피하기 위해 비밀리에 재무장 계획을 세워야 했다고 한다.

그러나 볼드윈 총리를 당혹하게 한것은 독일의 히틀러가 아닌 바로 왕실과 새로 동극한 국왕 에드워드 8세였다. 1936년 1월 20일 영연방에서 국민들로부터 가장 큰 존경을 받으며 내각에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던 국왕 조지 5세가 서거하였고 조지 5세의 큰 아들 에드워드 8세가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에드워드 8세는 안정과 굳건한 책임감을 강조하던 부왕 조지 5세와는 달리 현재의 셀럽들처럼 자유분방하고 튀는 인물이었다. 그 때문에 새왕의 사생활 문제와 유부녀들과의 바람 등으로 인하여 늘 내각과 의회에서는 그의 신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고 이어지는 왕실 스캔들과 새왕이 독일과의 관계개선을 주장하며 정치에 개입하려는 의사까지 보이자 볼드윈 총리는 뒷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여기에 화룡점정을 찍은것이 에드워드 8세 월리스 심슨과의 연애였다. 왕은 심프슨과 결혼을 하겠다고 통보하였는데 심프슨은 두번이나 이혼한 이혼녀이자 미국인으로 평소 상류층의 모범과 책임감을 강조하던 볼드윈 총리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고 내각과 여당인 보수당과 야당인 노동당까지도 반대하였다.

노동당 당수이자 훗날 총리가 되는 클레멘트 애틀리는 왕이 미국인 여자와 결혼하는 것은 반대하지 않으나 심프슨 같은 친독성향의 이혼녀가 새 왕비가 되는 것에 강력히 반대한다라는 입장을 내각에 전달하였고 캔터베리 대주교와 각 지역의 성공회 주교들도 국교회의 수장인 국왕이 이혼녀와 결혼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결사 반대하였다.

게다가 영연방 각국의 총리들도 왕과 심프슨의 결혼해 대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왕을 지지하는 인물들과 세력들은 윈스턴 처칠을 비롯한 골수 왕당파 의원 40인과 보수왕당파 언론밖에 없었다.

볼드윈 총리로서는 왕과 심프슨에 대해 우려할만한 일이 더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심프슨이 독일의 나치 인사들과 긴밀하게 접촉을 하며 매우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자 왕의 통해 국가기밀이 세어나갈 것을 우려한 볼드윈 총리와 내각은 왕에게 올리는 공식보고문에 국가기밀문서를 제외시키기에 이르렀다.

볼드윈 총리는 수차례 왕을 설득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였고 계속된 의회와 국교회의 압력과 왕의 태도에 폭발한 볼드윈 총리는 1936년 12월에 왕으로서 의무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며 결혼과 왕위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하며 만약 왕좌와 결혼 모두를 선택할 시에 내각은 총사퇴를 할 수밖에 없고 헌법적인 위기가 도래할 것이라고 왕에게 최후통첩을 날렸다.

그러는 한편 왕의 어머니이자 왕실의 큰 어른인 메리 왕대비와 왕위계승순위 1위인 왕의 동생 요크 공작에게도 이러한 내각의 뜻을 전하였다.

결국 1936년 12월 10일 에드워드 8세는 마지막까지도 왕으로의 의무를 지키길 바라는 내각의 기대를 저버리고 심프슨과의 사랑을 선택하여 퇴위조서를 발표하였고 에드워드 8세에 이어 동생 조지 6세가 새로운 왕에 동극한다.

왕실의 문제를 깨끗하게 매듭짓고 강력한 블록경제정책과 동시에 금융개혁으로 1935년 말부터 경기가 크게 회복되기 시작함으로서 볼드윈 내각은 인기를 얻기 시작하였다.

볼드윈 총리는 조지 6세의 대관식을 치른 1937년 5월 27일 고령의 나이로 인한 피로도로 인해 총리직 은퇴를 발표하였고 왕에게 사임의사를 전달하였다. 이렇게 볼드윈은 시기적절한 때에 인기있는 총리로 국민들의 박수를 받으며 떠났으며 그는 오랜 재임 공로로 제1대 뷰들리 백작에 봉해져 세습귀족이 된다. 그리고 그의 후임 총리는 네빌 체임벌린이 되었고 세계는 점차 2번째 세계대전을 향해 가게 된다.

2.5. 은퇴 이후와 사망

볼드윈의 은퇴 이후 체임벌린의 뮌헨 협정에 대해 국가가 완전히 싸울 준비가 될때까지 재무장을 계속할 시간을 벌었다고 평함과 동시에 체임벌린의 용기에 찬사를 보낸다는 지지성명을 발표하였고 그는 재무장을 하더라도 1%의 평화가능성이라도 포기하여서는 안된다고 말하며 체임벌린의 '우리 시대의 평화'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상황은 결국 우려한대로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치닫게 되고 그는 새로 총리로 취임한 처칠과 거국내각에 여러 조언을 하였다.

종전 후 1945년 6월 볼드윈의 아내가 사망하였고 1947년 10월 조지 5세의 동상 제막식에 그가 참여하자 사람들이 환호하여 여전히 그의 인기가 식지 않았음을 증명하였으나 그의 건강은 악화되어있었고 이 동상 제막식이 볼드윈의 마지막 공식석상이 되었다. 결국 볼드윈은 해를 넘기지 못하고 1947년 12월 14일 우스터셔 주 스투르포르온세번의 그의 영지에 있는 별장 애슬리 홀에서 수면 중에 향년 80세로 사망한다.

3. 선거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06 영국 하원의원 선거 키더민스터
2,083 (46.9%) 낙선(2위)
1908 뷰들리 무투표 당선 초선
1910.1 6,618 (73.6%) 당선(1위) 재선
1910.2 무투표 당선 3선
1918 4선
1921 14,537 (89.6%) 당선(1위)
1922 11,192 (66.2%) 5선
1924 무투표 당선 6선
1929 16,593 (62.9%) 당선(1위) 7선
1931 무투표 당선 8선
1935 9선

4. 기타

  • 장남인 2대 뷰들리 백작 올리버 볼드윈도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다만 아버지와 달리 노동당 당적이었다.
  • 러디어드 키플링과는 이종사촌이다. 더욱이 이들 모친만이 아닌 이들의 다른 이모도 유명인사와 결혼한 덕에 모계 성을 붙어, 맥도날드 자매들로 알려져 있다.
  • 윈스턴 처칠이 자신의 저서 <제2차 세계 대전 회고록>에서 램지 맥도널드와 함께 비난한 인물이기도 했다. 후임자 네빌 체임벌린 뮌헨 협정이 워낙 유명해서 그렇지, 볼드윈이 더 오랫동안 수상으로 재직하면서 히틀러의 팽창에 유화적으로 대응했기 때문. 다만 이에 대해선 반론도 있는데, 이들은 평화정책을 내걸었지만 동시에 재무장도 실시하며 혹시나 모를 위기상황에 대응하고자 준비했다는 것. 만약 전임총리들이 만반의 준비를 하지 않았다면 처칠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더구나 노르웨이 침공은 처칠 본인이 해군장관으로서 주도해놓고 작전이 실패하자 자신은 책임을 회피하는 행태를 보이며 모든 책임을 상관인 체임벌린에게 떠넘겨 그를 사임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도 저 회고록은 볼드윈과 맥도널드가 사망한 후 나왔다. 어떻게 보면 고인드립일 수도 있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벌인 셈이다. 애초에 저 둘의 시대에 처칠이 뒷방 늙은이 취급 받은 걸 생각하면, 개인적으로 그들을 혐오한 것으로 보인다.

5. 매체에서

  • 2002년 제작된 처칠 TV전기영화 The Gathering Storm에선 데릭 제이코비가 스탠리 볼드윈으로 분했다.
  • 영화 킹스 스피치에서 처칠을 제외하면 가장 비중이 높은 총리다. 에드워드 8세의 난봉질에 국왕이 민의를 무시한다면 퇴위하거나 내각이 총사퇴할 수밖에 없다고 요크 공작에게 진언하면서, 그가 왕위를 이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조지 6세 즉위 이후 네빌 체임벌린에게 총리직을 넘기면서 조지 6세에게 사의를 표명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퇴장한다. 배우는 안소니 앤드류스.
  • 게임 Hearts of Iron IV의 1936년 시나리오에서 영국 총리로 등장한다. 다만 얼마 안 가 스탠리 볼드윈의 정치 은퇴 이벤트가 발생하기 때문에 네빌 체임벌린에게 내각을 넘겨주고 퇴장한다.
  • 몬티 파이선에서도 언급되긴 하는데, 그의 후임자인 램지 맥도널드가 볼드윈을 이기고 다우닝 가 10번지에 입성하면서 스트립쇼를 했다는 식으로 몬티 파이선답게 매우 아스트랄한 형식으로 몇 번 나온다.


[1] 1st Earl Baldwin of Bewdley [2] 역사학 / B.A. (1884-1888년), M.A. (1888-1892년) [3] 당시에는 메이슨 대학교. [4] 상공회의소와 같은 역할 [5] 보수당 의원들의 사교 모임으로 1801년 토리당 시절 부터 시작된 유서깊은 사교 모임이다 [6] 여담으로 1922년 11월 총선에서 자유당은 원내 3당으로 밀려나고 노동당 자유당을 대신할 핵심 축으로 떠올랐다. 이기점으로 기존의 보수/자유 양당체제가 무너지고 보수/노동 양당체제가 새로이 성립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7] 웃긴 점은 자유당은 노동당보다 더 큰 피해를 입었다. 무려 118석을 잃으면서 의석이 겨우 40석으로 줄고 당수였던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도 낙선하고 말았다. 자유당 입장에서는 가미카제 총선이 된 셈. [8] 사실 바이마르 공화국을 파멸로 밀어넣은 원인이 독일에게 압도적으로 불리한 베르사유 조약 루르 점령으로 독일로부터 배상금을 강제적으로 뜯어먹으려는 프랑스와 벨기에의 깽판 대공황 등이 원인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맥도널드와 볼드윈의 판단은 틀린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1930년대 시점에서는 너무 늦은 상황이었고 기존의 바이마르 공화국의 숨통을 터준 도스 안도 근본적으로 베르사유 조약의 불합리성을 개정하지는 못하였기 때문에 대공황으로 인한 독일 경기파탄으로 그 약발이 오래가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