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5 17:34:21

여흥 민씨

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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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 · · · · 황목 · 황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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驪興 閔氏
여흥 민씨
}}}
<colbgcolor=#000> 관향 경기도 여주시 여흥동
시조 민칭도(閔稱道)
집성촌 대구광역시 군위군 소보면 송원리
인천광역시
대전광역시 유성구
경기도 여주시· 안성시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마곡리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동해시
충청북도 충주시· 청주시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금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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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해남군 마산면 노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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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청도군
경상북도 상주시 공성면 거창리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명당동
경상남도 산청군 오부면 오전리
황해도 벽성군
함경남도 단천군
인구 171,740명(2015년) | 국내 45위
링크 여흥민씨대종회

1. 개요2. 역사
2.1. 고려 이전 및 여흥 민씨 외의 민씨2.2. 고려2.3. 조선2.4. 개화기 및 일제강점기
2.4.1. 친일2.4.2. 항일 운동
3. 분파4. 인물
4.1. 계보 불명4.2. 민씨를 예명으로 쓰는 인물
5. 가상 인물

[clearfix]

1. 개요



여흥 민씨는 한국에서 민이라는 한자들(閔)을 성씨로 쓰는 씨족 집단이다. 민씨의 본관으로 현대까지 전해지는 것은 여흥(驪興) 하나뿐이며, 여흥은 현재의 경기도 여주시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이전에는 황려(黄驪) 민씨라고도 했는데, 황려 역시 지금의 여주시를 달리 부른 것이다.

시조는 민칭도(閔稱道)인데, 그 출신에 대하여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중국의 민씨가 고려 시대에 북송으로부터 사신으로 왔다가 고려 왕으로부터 황려를 식읍으로 받고 정착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여주시를 관통해 남한강이 흐르고, 현재의 여주시 상동에 소재한 영월루 근처에 마암(馬巖)이라는 기암괴석이 있는 바, 그 마암 꼭대기에 암혈(巖穴)[1]이 있는데 그곳에서 저절로 아이가 솟아나와 민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마암굴 전설 또는 민굴(閔窟) 전설이다.

첫째 설의 근거로는 거론되는 것으로는 주로 고려 중기 이규보가 지은 시에서 여흥 민씨를 일컬어 “대대로 큰 문벌의 집안으로 전해오니, 비후(費侯)의 후예로부터 나왔네”[2]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비후는 공자의 제자로 공문십철의 하나인 민자건(閔子騫)을 일컫는 말이므로, 민씨가 중국에서 건너왔다는 것을 가리킨다는 점이 있다. 또한 1988년 발행된 여흥민씨 파보에 수록된 독립운동가 단원(檀園) 민충식(閔忠植)의 회고로서, 중국에서 활동하던 때 산둥성의 중국 민씨 집성촌에서 “조선의 민씨는 중국의 민씨의 후예이니, 문헌에 송나라 때 민씨 한 분이 고려에 사신으로 갔다는 기록만 있고, 환국(還國)했다는 기록이 없는데 조선의 민씨는 그 사신의 후손이 아니겠느냐?”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증언 등이 거론되기도 한다. 이에 따르면 민씨의 시조는 고려 초에 북송에서 사신의 일행으로 건너왔다가 고려에 정착하여 고려 왕으로부터 황려(黄驪)를 식읍으로 부여받고 정착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러한 설은 조선 이래 거의 정설처럼 취급되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으로부터의 도래설은 그 신빙성이 떨어지며, 현재는 종중에서도 이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다. 우선 민충식의 회고담은 그 문헌적 근거를 전연 찾을 수 없고, 이규보의 시 내용 또한 이규보가 젊었을 때 당시 고관이던 상서공 민식에게 이(李)씨인 자신을 노자의 후예로, 민씨인 민식을 민자건의 후예로 칭하면서 관향[3] 또한 같은 것을 빗대어 벼슬을 청탁하며 그에게 아부하기 위한 목적에서 지어진 것이고, 이규보는 여주 이씨인데 여주 이씨는 노자는 커녕 중국과 전혀 관계가 없는 한국의 토성(土姓)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에 이규보는 “사방으로 떠돌며 밥을 빌어먹자니 기쁘지 않다”[4]며 자신이 관직을 위해 사방으로 청탁을 하러 다니는 것을 한탄하기도 한 바, 청탁을 위해 아부한 시에 나온 구절 하나를 가지고 판단을 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 고려사』에는 현재 시조로 전해지는 민칭도 이전에도 민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는데, 고려 태조 때에 민강(閔剛), 견훤의 신하로 민합(閔郃)[5]의 이름이 전하며, 덕종때의 민가거(閔可擧), 문종 때의 민창수(閔昌壽), 민창소(閔昌素) 등이 그것이다. 특히 고고학적으로 민가거의 증손자인 민수(閔脩) 민영(閔瑛)의 묘지명이 발굴되어 전하는데 자신들의 관향(貫郷)을 명확하게 황려(黄驪)라고 적으면서 현재 족보에는 전혀 전하지 않는 민가거–민창경(閔昌京)–민효후(閔孝侯)–민수·민영의 계보를 밝히고 있다.[6]

이러한 사실을 종합하여 보았을 때, 여흥 민씨는 독자적인 시조설화를 가지고 신라 후대에 현재의 경기도 여주 지방을 근거로 하여 성장한 호족 세력으로 후삼국시기에 이미 그 가문이 존재하였지만, 족보의 편찬이 비교적 늦어 현재 시조로 되어 있는 민칭도 이전의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버린 것이라 봄이 타당하다. #참고1 #참고2

인구는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171,740명이 나타났다. 간혹 여주 민씨 혹은 대전 민씨를 칭하는 일족이 있으나 이러한 일파들은 모두 여흥 민씨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족보 등을 통해 그 세계를 추적할 수 있으므로, 민씨는 다 같은 집안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민칭도의 증손 민영모에게는 민식과 민공규 두 아들이 있는데 민식의 후손이 상서공파, 민공규의 후손이 정의공파이다. 이후 상서공파 26개 지파, 정의공파 20개 지파로 총 46개의 지파로 갈라져서 현재에 이른다. 상서공파는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 수가 많았고, 정의공파는 원경왕후를 시작으로 명성황후 순명효황후에 이르기까지 왕비를 배출한 가문으로 유명하다.

대중에게는 왕가 사극을 다룬 미디어 매체의 영향으로 조선 왕비만 4명씩이나 배출해낸 정의공파가 유명한 편이다. 정의공파에서 분파된 문도공파의 파조인 민제(11세손)의 집안에서 원경왕후를, 역시 정의공파에서 분파된 삼방파의 파조인 민유중(21세손)의 집안에서 인현왕후, 명성황후, 순명효황후를 배출했다.[7][8] 알려진 왕족 민씨 여성 상당수는 비범할 만큼 기가 센 편이었다고 한다.[9]

항렬자를 철저히 지키는 가문으로 유명하며 2023년 현재 생존해 있는 여흥 민씨 대부분은 29~33세손 사이에 있다.[10] 통계상으로는 성씨의 편재성이 높은 제주도 정도를 제외하면 고르게 분포하고 있는 성씨이다. 주로 전라남도, 경상남도, 충청남도, 충청북도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예명으로도 여성 연예인들 일부분이 많이 사용하고 있다. 당장 아래 예명을 쓴 연예인의 대다수가 여성 연예인이다.[11]

2. 역사

2.1. 고려 이전 및 여흥 민씨 외의 민씨

삼국시대나 후삼국시대에도 민(閔)씨를 사용하는 인물들이 몇몇 있으나 이 인물들이 여흥 민씨인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확실히 알 길이 없다. 고려 태조 23년(940) 세워진 강릉 명주 낭원대사오진탑 비문에 따르면 신라 진성여왕 3년(889) 낭원대사를 강릉으로 초빙한 사람으로 지역 호족 알찬(閼飡) 민규(閔規)의 이름이 나타나는 것이 금석문 상으로 확인되는 최초의 민씨 인물이다. 전설에 따르면 여주에 있는 마암굴 또는 민굴(閔窟)이라는 바위동굴에서 나왔기에 민씨라고 한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조선왕조실록》의 세종실록 지리지를 보면 황해도 서흥의 토착 성씨로 민씨가 있고, 조선 시대의 무과 방목을 살펴 보면, 경기도 고양군(高陽)을 본관으로 하는 민대승(閔大承, 1611 ~ ?)[12]이 1637년( 인조 15) 별시(別試) 무과에 병과 3186위로 급제한 기록, 함경도 경흥도호부(慶興)를 본관으로 하는 민유장(閔有章, 1689 ~ ?)[13]이 1717년( 숙종 43) 식년 무과에 병과 168위로 급제한 기록 등이 남아 있다. 또한 경북 영주의 토성으로도 민씨가 있는데 현재는 여흥 민씨 해관지후공파로 족보에 등재되어 있으나 선계가 잘 고증되지 않는다.

또한 민영모의 장자 민식의 부인이 민지녕(閔志寧)의 딸 민씨라고 족보에 기록되어 전해지는데 조선시대에는 이를 어느 민씨인지 알 수 없다고 기록하였지만, 고려 전기까지는 왕실을 비롯한 귀족 사회에서 현대 기준으로 근친혼이라고 치부될만큼 가까운 사이의 족내혼이 흔하게 이루어졌으므로 그 자체로 여흥 민씨 이외에 다른 민씨가 있었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조선시대에 들어 유교적 종법질서가 보급된 후 애써 사실을 덮으려고 한 것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다만 현재 족보에서 민지녕의 이름을 찾을 수 없으므로 적어도 족보에 누락된 민씨의 혈통이 존재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여흥 민씨 외에 다른 민씨는 없거나, 있어도 극소수라고 보고 있다. 여흥 민씨 대종회의 입장은 한국의 민씨는 여흥 단본(單本)으로 다른 민씨라고 하는 경우에도 전부 여흥 민씨에서 갈라져나간 지파라는 것.

2.2. 고려

시조 민칭도는 고려에서 종6품의 벼슬인 상의봉어[14]를 지냈다. 그 아들로 태자소보를 지낸 민세형(閔世衡)이 기록되어 있지만, 그 방주에 “시조 상의봉어공으로부터 공에 이르기까지 그 세계가 멀어 4-5대의 기록이 실전되었으나 지금에 외서 자세하게 고증할 수 없다”[15]라고 기록이 되어 있어 민칭도로부터 민세형까지의 사이에 여러 대 누락된 인물들이 있음이 확실하다. 이후 민세형의 아들 민의(閔懿)를 거쳐 민영모(閔令謨, 1115~1194)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고, 아들 민식도 고려후기 내시, 우산기상시, 형부상서 등을 역임하였다. 그 후손들도 높은 벼슬에 올라 크게 현달하였는데, 이때부터 민씨가 문벌귀족, 권문세족으로서 명성을 누렸다.

고려 말에는 민제가 한 신흥 무인 가문에 셋째 딸을 시집보냈는데 이때 사위가 훗날 조선의 제3대 국왕 태종이 되는 이방원이었고, 시집보낸 딸은 후일 원경왕후가 되었다. 또한 태종의 형인 회안대군 이방간의 부인 역시 판도판서 민선의 딸로 여흥 민씨였다. 여말 선초의 격동기에 고려 왕실에 충절을 지킨 두문동 72현에 이름을 전하는 농은 민안부와 같이 고려에 충절을 다한 인물도 있었고, 민여익과 같이 조선의 개국에 기여해 개국공신 반열에 오르는 이도 있었다.

고려 시대에는 왕씨 왕족과 통혼이 가능한 재상지종(15개 가문)에 선정되었고, 이러한 전력 탓인지 조선 시대에도 여러 왕후를 배출해냈다. 그러나 정작 고려 왕실과 통혼한 경우는 몇 차례 없었다.

2.3. 조선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의 역대 집권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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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대 권력자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
정도전 이방원 정사공신
( 하륜, 조영무 등)
관학파, 종친
( 황희, 맹사성 등)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안평대군, 고명대신 정난공신
( 수양대군)
훈구파
( 한명회, 신숙주 등)
성종 연산군 중종
대신 vs. 대간 대신 궁중파
( 임사홍, 신수근)
반정공신
(3훈)
사림파
( 조광조)
反김안로계
( 남곤, 심정, 이행, 이항 등)
김안로
인종 명종 선조
대윤
( 윤임)
소윤
( 윤원형)
윤원형 vs. 이량 사림파 동인 vs. 서인 서인
( 이이, 성흔, 정철)
동인
( 류성룡, 이산해)
선조 광해군 인조
연립 ( 서인, 남인)
( 윤두수, 류성룡 등)
북인
( 이산해 등)
탁소북
( 류영경)
청소북, 대북
(3청)
대북
( 이이첨)
반정공신
( 이귀, 김류)
공서
( 김류, 최명길 등)
낙당, 원당
( 김자점, 원두표)
효종 현종 숙종
산당
( 송시열, 송준길)
서인 vs. 남인 남인
( 허적, 윤휴)
일부 서인
( 김석주)
산당
( 송시열)
남인
( 민암, 장희재 등)
숙종 경종 영조
소론
( 남구만 등)
노론
(노론 사대신)
소론
(소론 오대신)
노론
( 정호, 민진원 등)
온건 소론
( 이광좌)
노론
( 김재로 등)
영조 정조 순조
완론 탕평
( 탕평당, 청명당)
청명당 vs.
홍인한 정후겸
홍인한 정후겸 외척
( 홍국영)
소론
( 서명선 등)
준론 탕평
( 벽파, 시파)
벽파
( 심환지 등)
시파
( 김조순 등)
순조 헌종 철종
안동 김씨 세도가문
(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반남 박씨 등)
고종
흥선대원군
(+ 풍양 조씨, 안동 김씨, 남인, 소론, 북인)
여흥 민씨
(+ 개화파)
흥선대원군 여흥 민씨
(+ 온건 개화파)
고종 순종
급진 개화파 여흥 민씨 김홍집
(+ 친일파, 친미파, 친러파)
근왕파 친일반민족행위자
고명대신: 김종서, 황보인
3훈: 박원종, 류순정, 성희안
3청: 박승종, 류희분, 이이첨
노론 사대신: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소론 오대신: 최석항, 류봉휘, 조태구, 이광좌, 조태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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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들어선 이후 이방원은 당대의 명문가인 처가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오를 수 있었으나 이후 태종의 외척 정리과정에서 원경왕후는 가문이 풍비박산이 나는 아픔도 겪어야 했다. 민제의 아들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는 태종에 의해 사사되었으나 이들의 후손들은 세종 즉위 후 복권되었다. 이후에도 여흥민씨들은 조선의 명문가로 자리잡아 조선 왕실과 여러 차례 혼인 관계를 맺었고, 많은 문과 과거 합격자(242명, 9위)와 대신들을 냈다. 당파로는 서인 노론에 속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당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남인의 영수였던 민암도 있고 북인으로서 우의정에 오른 민몽룡도 있다. 여흥 민씨 가문은 조선 전기에서 후기에 이르기까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및 6조 판서를 다수 배출하며 명문가의 위세를 떨쳤다.

조선말에는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이후 명성황후 민씨, 순명효황후를 배출한 외척가문으로서 세도정치를 폈다. 애초에 흥선대원군이나 흥선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부터 여흥 민씨와 결혼을 했었다. 남연군-흥선대원군-고종-순종까지 여흥민씨는 처가이자 외가이자 사돈이다. 이때의 여흥 민씨는 신 안동 김씨(장동 김씨)나 풍양 조씨 저리가라 할 정도로 극심한 민폐를 끼치며 탐관오리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훗날 을사조약 체결에 항거하여 자결한 민영환도 당대엔 탐관오리 중 한명으로 인식되고 있었으니... 민영환은 실제로 탐관오리라고 보기엔 힘들긴 하지만 국가가 망해가는 것에 대한 불만은 결국 왕조국가에서 최정점인 국왕으로 향하게 되는데, 정작 왕을 까지는 못하니까 대신에 주변 대신들을 돌려치는게 조선시대의 여론형성 과정이었다. 세도 정치 시기이니 자연스럽게 외척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이런 풍문들을 기록한 야담집에서는 만악의 근원처럼 묘사되게 된다. 특히 황현이 서술한 매천야록에서는 작심하고 명성황후를 공격하고 있다. 독립협회에 참여했던 황현의 입장에서 당시에는 이미 죽었지만 명성황후로 대표되는 온건개화파는 그 누구보다 미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갑신정변에 참여했던 급진개화파들의 제1 목표는, 대놓고 개화를 반대하던 이들이 아니라 급진개화파였다가 온건개화파로 노선을 변경한 민영익 같은 사람이었다. 내부 노선 선명성 대립이야말로 인정사정 없기 마련.

여흥 민씨 세력이 이런 민폐를 끼친 원인으로는 인재 관리 부재와 무분별한 영입이 한몫했다. 안동 김씨의 경우엔 명문가답게 적어도 가문 내의 인재들을 선별하고 관리할 때는 상당히 치밀한 편이었다. 그래서 흥선대원군이 처음 집권할 당시에도 안동 김씨의 인재풀은 포기하기 힘들어서 일부 인사들을 중용하는 등 안동 김씨 세력과 타협했던 것. 하지만 여흥 민씨 세력의 경우엔 명성황후 민씨가 실권을 잡은 이후 민씨 집안 출신이라면 무분별하게 영입하고 제대로 관리도 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안동 김씨 때보다 더한 부작용이 발생해 버린 것이다.

2.4. 개화기 및 일제강점기

이씨의 사촌이 되지 말고
민씨의 팔촌이 되려무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배 띄여라 노다 가세.
작자 미상, <아리랑 타령>
이때 향병(鄕兵) 한 아무개(韓某)라는 사람이 장례지에서 민영휘[16]를 보고 “당신도 호상(護喪)을 하러 왔습니까? 당신의 성이 민씨 아닙니까? 그런데 어떤 민씨는 죽고 어떤 민씨는 살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지금 나라가 망하였지만 한 번 죽어 속죄를 하지 않고 충정공(忠正公)의 영구를 따라 여기까지 왔으니 하늘이 두렵지 않습니까? 속히 이곳을 떠나시오! 그렇지 않으면 뾰족한 내 군화에 치여 죽을 테니까!”라고 하자 민영휘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그곳을 떠났다.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통쾌하게 생각하였다.
매천야록 中 을사조약으로 국민들에게 사죄하며 자결한 애국지사 민영환의 장례식에서 친일파 민영휘가 나타나자 사람들이 보인 반응

항일과 친일로 이어진 명성황후의 후손

2.4.1. 친일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708명 중에 38명, 즉 17명 중 1명 정도가 민씨 집안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한민국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적용, 조사하여 공식 발표한 일제 강점기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1,006명 중에 민씨 반민족 행위자는 총 23명으로 성씨 중에 11번째 순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유는 대한제국 황실 종친인 전주 이씨와 외척인 여흥 민씨는 일본의 대표적인 회유대상이었기 때문이었고, 기득권 층이던 민씨 일족은 나라가 망한 것에 책임이 있었음에도 여기에 잘도 넘어갔다.

덕분에 여흥 민씨들은 세도정치로 유명한 신 안동 김씨들처럼 국사를 배울 때마다 씁쓸해한다. 이는 우봉 이씨들도 마찬가지. 게다가 민씨 본관에 다른 지방을 본으로 삼은 건 없다보니 더 그렇다.

특히 인현왕후 민씨의 아버지였던 민유중의 후손들은 가깝든, 멀든 모두 명성황후의 친족들이다. 자신들의 황후이자 친족을 살해한 자들한테 빌붙었던 것이다.
  • 민건식 (1879~1944)
    대한제국 탁지부 대신 출신의 민영기[17]의 아들이다. 1910년 이후 남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가 되고 그 아버지 민영기도 중추원 고문이 되어 부자가 쌍으로 친일을 했다. 또 친일 유림 단체 조선유교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또 閔原健植라는 명의로 창씨개명했다.
  • 민대식 (1882~1951)
    민영휘의 장남으로 아버지 민영휘의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아 은행업에 뛰어든 후 조선 실업계의 거물이 되었다. 조선총독부에서 1935년 발간한 책자를 보면 그의 영향력을 알 수 있으며 조선토지개량주식회사, 조선신탁회사 등에서 감사역과 경기도 도평의회 평의회원을 거쳤다. 또 사회 여러 단체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고 아버지 민영휘의 재산을 많이 받았으면서 정작 아버지의 장례를 초라하게 치러 손가락질을 받았다. 광복 후에도 살아있어 반민특위에 조사받았으나, 이 활동이 방해를 받으면서 무죄를 받고 풀려났다.
  • 민병석 (1858~1940)
    민영위의 손자이자 민경식의 아들이다. 이완용의 사돈이자 절친한 친구로 경술국적의 한 사람이다. 친러파였던 이완용과 함께 활동하다가 친일파로 갈아탔고 명성황후가 죽은 후에도 요직을 맡았다. 그렇게 친했던 이토 히로부미가 죽자 조문을 갔으며 결국 나라를 팔아먹었다. 그 공로로 자작이 되었고 막판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자리까지 올랐고 아내 심경섭과 함께 친일 단체 애국금체회라는 단체를 만들고 활동하다가 1940년 죽는다. 그의 아들은 대법원장을 역임하다가 2007년 사망한 민복기다. 그의 후손들은 재산이 국가에 몰수당하자 다른 친일파 후손들처럼 당당하게 국가에 소송을 낸 상태다.
  • 민상호 (1870~1933)
    민치억의 친자이자 민치덕의 양자로 원래 궁내부에서 근무하다가 외교관이 되었고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 남작 자리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의관이 되었다. 그의 후손은 일제에게서 받은 토지를 2007년 국가에 반환하라는 조치를 받았지만 오히려 소송을 제기했다.
  • 민영규 (1846~1922)
    민경호의 아들로 태어나 판서와 궁내부 대신을 지냈다. 일제로부터 자작을 받고 그의 작위는 1924년에 그의 손자 민병삼이 습작했다. 1960년 보도에 따르면 민병삼과 그 일가는 일제 강점기 동안 서울 종로에서 부유하게 살았고 손자 중 하나는 군 복무 중 사망했다고 한다.
  • 민영기 (1858~1927)
    민준호의 아들로 군부대신에 임명되어 서재필 독립협회에 대항하는 황국협회를 결성하여 독립협회의 해산에 기여했다. 1905년 을사조약 당시 탁지부 대신으로 한규설[18]과 함께 대신들 중에서 유일하게 조약 체결에 반대했지만 1908년에 변절하여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부총재와 이왕직 장관에 임명되고 남작이 되었다. 또 1916년 세워진 대정실업친목회가 1921년 친일 단체로 변모될 때 회장을 맡았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 또 1923년에는 다시 이왕직 장관이 되었다. 그의 아들은 중추원 참의를 지낸 민건식이다.
  • 민영린 (1873~1932)
    민술호의 친자이지만 민태호에게 입양되었다. 그래서 순명효황후 민씨와 남매지간이다. 1910년 10월 16일 일제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았지만 1919년 아편을 빨다가 걸려서 박탈당했다.
  • 민영소 (1852~1917)
    민철호의 아들이지만 민규호의 양자가 되었다. 그는 민씨 일족이라 빠른 승진을 거듭했는데 호조판서, 병조판서를 거쳤다. 그러나 임오군란 때 목숨은 건졌지만 집이 불탔고 1894년에는 다시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홍종우로 하여금 김옥균을 암살하도록 했다. 1904년 농상공부 대신에 오를때까지 요직을 거쳤지만 일제로부터 자작을 받고 매국 공채 5만 원을 받았다.
  • 민영욱 (1900~1963)
    민상호의 아들로 아버지의 작위를 습작했다.
  • 민영휘(민영준) (1852~1935)
    명성황후의 친척 조카로 민두호의 아들이다. 1877년 병과 급제 이후로 계속 승진과 요직을 거쳤다. 민씨 일족의 대표 거두라서 임오군란 때 집이 완전히 불타기도 했다. 민씨 일족의 중심인물이자 수구파의 거두로 1884년 갑신정변 때는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여 친일 개화 세력을 몰아내고 위안스카이와 결탁해서 사대당에 들어가 전권을 휘둘렀다. 그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도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여 진압하고 갑오경장 때 민씨 일족과 실각하여 유배되었지만 평양으로 도망가 청나라로 돌아갔다. 1895년에 이준용과 교환되어 귀국하고, 1905년에는 휘문학교를 세웠는데 이게 이미지 세탁에 한몫하고 있다. 1910년에는 자작 작위와 은사금, 매국 공채 5만 원을 받았다. 민영휘는 경제에 밝아 쉽게 갑부가 됐는데 탐관오리로 있을 때 수탈한 재물을 잘 불려 일제 강점기 동안 조선 최고 갑부 중의 한 명이 되었는데 권력형 부정축재의 모습을 보여준다. 남이섬 소유자들도 현재 그의 후손들. # 2007년 그의 재산을 환수하기로 했지만 그의 후손들은 반발했고, 결국 환수 불가로 결정됐다. #
  • 민형식 (1875~1947)
    민영휘의 양자로 한때는 을사오적 암살 거사에 거액의 자금을 대기도 했지만 변절한 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고 아버지 민영휘에 1936년 사망하자 자작을 물려 받았다. 그러나 아버지와 달리 어려운 사람 돕기를 좋아하고 의리를 숭상했으며 신민회 회원으로 민족 운동에 기부금을 내는 양면적인 모습도 있었다.
  • 민형식 (1859~1931)
    민영휘의 아들 민형식과 동명이인이다. 명성황후의 친족으로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를 호종한 공으로 병조참판과 형조참판을 지내고 병조의 요직과 삼도수군통제사 등 국방 분야의 요직을 모두 거친 거족이었다. 하지만 일제에게 협조하여 남작 작위를 받았다. 민형식에게는 아들 6명이 있었지만 모두 아편 중독자가 아니면 전과범이라 습작하지 못했다.
  • 민종묵 (1835~1916)[19]
    대제학 민승세의 아들이지만 민명세의 양자가 되었다. 1874년부터 성균관 대사성, 병조참판, 이조참판, 대사헌 등으로 중용되고 갑신정변 이후에는 형조판서와 병조판서를 겸했다. 1905년 을사조약 때는 조약 체결에 찬성한 대신들을 처벌한 것을 상주했지만 정작 일제에게 남작 작위를 받았고 2만 5천 원의 은사 공채를 받았다. 1911년에는 매일신보에 한일 병합 1주년 축하문을 싣기도 하고 1912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 민철훈 (1856~1925)
    민종묵의 장남으로 궁내부에서 일했고 아버지 민종묵이 죽자 1916년 남작 작위를 세습했다. 1920년에는 친일파 윤덕영 등이 세운 해동운행 설립위원장을 맡았다. 유인석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민철훈과는 동명이인이다.

2.4.2. 항일 운동

민씨들이 친일반민족행위자도 많았지만 조국 독립을 위해 노력한 사람도 많았다. 특히 을사조약 체결 후 2천만 동포에 고하는 글을 남기고 자결한 민영환은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의병대장 민종식, 의병대장 민긍호는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같은 민씨라고 해도 성향과 상황은 제각각이라서 근왕주의를 기치로 하여 의병장으로 활동한 민씨가 있는가 하면, 친일매국한 민씨가 있고,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에 참여한 민씨도 있다. 다만 친일/항일과 별개로 고종 시기에 민씨 척족이 나라를 말아먹은 탓에 이미지는 별로 좋지 않다.

아래는 민씨 독립유공자 주요 명단이다.
  • 민영환 (1861-1905):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을사조약 후 2천만 동포에 고하는 글을 남기고 자결했다. 건국훈장 중 대한민국장 수훈자이다.[20] 항목 참조.
  • 민종식 (1861-1917): 의병 (일본헌병이 주둔하고 있는 홍주를 습격 점령하였다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사형언도)
  • 민긍호[21] (1865-1908): 의병활동 (원주 주재 일본경찰분관소를 습격하는등 활약하다. 원주에서 전투 중 순국)
  • 민강(1883-1931): 아버지 민병호와 같이 서울에서 동화약품의 전신인 동화약방을 만들어 경영함과 동시에 대한민국 최초 신약 활명수를 출시해 1910년에 국내 최초로 상표등록했다. 일제강점기 치하이던 1919년에 경성 연통부 행정책임자로서 활명수 판매수익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제공했으며 그 이유로 일제의 갖은 탄압을 받으며 1931년 주식회사로 전환했으나, 민강 초대 사장은 독립운동에 힘쓰다 두 차례 걸친 옥고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죽음으로 사세가 기울어지자 1937년에 독립운동 동지 보당 윤창식(1890~1963)에게 인수되어 지금까지 이어져가고 있다.
  • 민양기 (1899-1922): 독립운동 (은율경찰서를 습격 친일군수 최병혁을 죽였고 체포 되어 사형 당함)
  • 민영구 (1909-1976): 광복군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운동 요원으로 항일 선전 광복군) 광복 이후 대한민국 해군에 입대하였으며 해군사관학교장을 끝으로 전역하였다. 최종 계급 해군 소장.
  • 민용호 (1869-1922): 경상남도 산청군 출생으로, 강원도에서 의병장으로써 활동(강릉 관동동구군도창의소 의병 대장)
  • 민필호 (1901-1963): 임시정부 활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화대표부단장, 무장경비대 창설 등 업무를 맡아 했으며 김구 주석의 비서실장을 했다.
  • 민효식 (1854-1910): 의병 ( 황해도 지역 의병장)
  • 민가현 (?-1908): 의병 (황해도 의병을 이끌고 활동하다가 일본제국 경찰과 교전 끝에 전사순국)
  • 민동식 (?-1896): 의병 (강원도 의병으로 삼보전투 인제전투 등에서 활약 했으며 교전 중 순국)
  • 민동식 (동명이인): 여주군 가서면(加西面) 신문동(新文洞)에 거주하던 양반으로 농업에 종사하던 민동식은 1907년 헤이그특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이 강제로 퇴위되고 군대마저 해산되는 등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워짐에 격분하여 의병을 일으켜 부하 150여 명을 인솔하고 여주·지평·양근·음죽의 4군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22]
  • 민백형 (?-1907): 의병 (황해도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펼치다 평산군에서 토벌대와 교전 중 순국)
  • 민병길 (1884-1942): 임시정부 활동
  • 민병숙 (1873-1919): 3.1 운동 ( 강원도 홍천군에서 일본 헌병과 격투가 벌어지던 중 일본 헌병 총에 순국)
  • 민병태 (1870-1919): 3.1 운동 (홍천에서 일본제국 경찰의 총에 맞아 순국)
  • 민병찬 (1885-1926): 3.1 운동 (홍천에서 만세운동 주도 춘천형무소에 투옥후 만주로 망명 군자금 모집)
  • 민수현 (?-1910): 의병 (황해도에서 의병 활동을 하다 일본군에게 피살 순국)
  • 민영수 (1921-2011): 광복군 (총사령부에 입대 후 광복군 대위로 항일운동)
  • 민영완 (1911-1976): 임시정부 활동
  • 민영학 (1916-1945): 독립 운동 (일본군인 5명 일본군속 등 12명 사살)
  • 민용운 (1876-1929): 3.1운동 당시 홍면이 계획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홍면이 총에 사살되는 것을 보고 격분하여 동료들과 함께 투석으로(!) 자전거를 타고 달아나는 일본 순사를 사살하였다. (징역 7년 받음)
  • 민제호 (1890-1932): 임시정부 활동
  • 민찬호 (1877-1954): 독립 운동
  • 민찬호 (1903-1950): 독립 운동 (투옥)
  • 민태규 (1882-1968): 독립 운동 (징역 1년 받음)
  • 민철훈 (?-1896): 유인석 휘하에서 의병으로 활동하다 일제에게 사살당하였다. (순국) 일제에 남작 작위를 받은 민종묵의 아들 민철훈과는 동명이인이다.
  • 민충기[23] (1888-1932): 임시정부 요인으로 대한독립신문에 쓸 자금과 독립운동 군자금을 모으다 일제에 체포되었다. 풀려난 이후에도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훈받았다. (징역 5년 받음)
  • 민창식 (1899-1938): 독립 운동 (징역 3년 받음)
  • 민치도 (1868-1921): 합방 후에도 독립 운동 의병장에게 개인적으로 자금을 지원하였다. 그 뒤 임시정부에 전달할 목적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다 일제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이후 보석으로 풀려나왔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출옥후 출옥 다음날 일제에 항거하라는 유서를 국민에게 남기고 자결.
  • 민치영 (1892-미상):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고 일제의 밀정을 처단하였다. (징역 10년 받음) 이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훈받았다.
  • 민한식 (1876-1915): 의병 (징역 10년 받음)
  • 민기수 (1884-미상): 독립 운동 (징역 1년 6월 받음)
  • 민순철 (1895-1954): 독립 운동 (징역 3년형 받음)
  • 민창식 (1888-1948): 독립 운동 (징역 6월 받음)
  • 민순호 (1880-1966): 문경에서 의병활동. 의병 (1896년 이강년을 따라 의병 활동하였고, 1905 1907년 의병활동. 특히 1907년에는 적 500여명을 도륙)
  • 민시식 (1878-1947): 의병
  • 민주호 (1887-1942): 독립 운동 (징역 1년 받음)
  • 민영갑 (1888-1965): 독립 운동 (징역 1년 받음)
  • 민영달 (1859-1924): 독립 운동
  • 민영면 (1886-미상): 독립 운동 (징역 1년 6월후 또 징역 2년 받음)
  • 민영팔 (1874-1926): 의병
  • 민영흥 (1911-1983): 독립 운동 (금고 6월형 받음)
  • 민옥금 (1905-1988): 독립 운동 (징역 1년 받음)
  • 민원명 (1876-?): 독립 운동 (징역 2년 받음)
  • 민재봉 (1890-1940): 독립 운동 (징역 1년 6월 받음)
  • 민주혁 (1870-?): 독립 운동 (징역 1년 6월 받음)
  • 민춘기 (1922-2018): 일본 오사카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만주의 독립군과 연락을 꾀했으나 일제에 발각되어 체포당하였고, 징역 3년 받았으나 곧 45년이 되어 일제가 패망하여 풀려났다.
  • 민치방 (1873-1925): 독립 운동 (일본군인이 총검으로 찔러 평생 팔을 쓰지 못하고 여생을 보냄)
  • 민홍식 (1881-1951): 독립 운동 (징역 3년 받음)
  • 민동호 (1874-1938): 의병
  • 민병두 (1885-1960): 독립 운동
  • 민영식 (1899-1980): 독립 운동
  • 민성호 (1836-1908): 의병
  • 민영명 (1909-1960): 독립 운동
  • 민인호 (1854-1925): 의병
  • 민영로 (1919-1950): 독립 운동
  • 민록식 (1897-1962): 독립 운동
  • 민영숙 (1920-1989): 광복군
  • 민재학 (1896-1922): 독립 운동
  • 민충식 (1890-1978): 임시정부 활동
  • 민제식 (1868-1924): 독립 운동
  • 민형식 (1875-1947): 아버지가 일제에게서 받은 조선귀족 작위를 물려받았다. 이 때문에 친일파 708인 명단과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올라가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나인영 등의 을사오적 암살 시도 당시 군자금으로 1400환(1만 4천냥)을 지원했으며, 이것이 발각되어 유배 10년형에 처해졌다.[24] 이후 신민회에 가입하여 항일운동에 참여하였고 각종 신문과 학교, 학회에 자금을 대는 등 민족운동을 지원하였다.
  • 민태곤: 남작. 일본 유학중인 1940년 항일운동을 하다가 체포, 1944년 일본 감옥에서 옥사했다. 그래서 유일한 조선귀족출신 독립유공자가 되었다.
  • 민영익: 의견이 갈리지만 안중근 의사의 변호사 비용을 대주거나 하였다.
  • 민금봉
  • 민선우
그 외 다수가 있다.

3. 분파

큰 분류로는 4세인 민영모의 장남 민식을 파조로 하는 상서공파와 차남 민공규[25]를 파조로 하는 정의공파가 있다. 이후 상서공파에서 26개[26], 정의공파에서 20개의 파로 나뉘어진다. 자세한 분파계도

4. 인물


[세도]: 세도가의 일원 / [항일]: 독립유공자 / [친일]: 친일파인명사전 수록자
이름 생몰년도 비고
1~23세
민희
(閔曦)
? ~ ? [7세] 무신
민제
(閔霽)
1339 ~ 1408 문도공파 [11세] 문신, 외척
원경왕후 1365 ~ 1420 문도공파 [12세] 조선 태종의 왕비
민무구
(閔無咎)
? ~ 1410 문도공파 [12세] 문신, 외척
민무질
(閔無疾)
? ~ 1410 문도공파 [12세] 문신, 외척
민무휼
(閔無恤)
? ~ 1416 문도공파 [12세] 문신, 외척
민무회
(閔無悔)
? ~ 1416 문도공파 [12세] 문신, 외척
민신
(閔伸)
? ~ 1453 충정공파 [13세] 문신
민유중
(閔維重)
1630 ~ 1687 삼방파 [21세] 문신, 외척
민암
(閔黯)
1636 ~ 1694 전서공파 [21세] 문신
민진원
(閔鎭遠)
1664 ~ 1736 삼방파 [22세] 문신, 외척
인현왕후 1667 ~ 1701 삼방파 [22세] 조선 숙종의 왕비
24세(百)
25세(顯/爀)
민종묵
(閔種默)
1835 ~ 1916 공목공파 문신[친일]
26세(致)
민치구
(閔致久)
1795 ~ 1875 삼방파 문신[세도]
민치록
(閔致祿)
1799 ~ 1858 삼방파 문신[세도]
26세(鏞/鎬)
여흥부대부인 1818 ~ 1898 삼방파 흥선대원군의 부인[세도]
민승호
(閔升鎬)
1830 ~ 1875 삼방파 문신[세도]
민태호
(閔台鎬)
1834 ~ 1884 삼방파 문신[세도]
민겸호
(閔謙鎬)
1838 ~ 1882 삼방파 문신[세도]
명성황후 1851 ~ 1895 삼방파 대한제국 고종의 황후(추증)[세도]
민긍호
(閔肯鎬)
1865 ~ 1908 입암공파 독립운동가[항일]
민필호
(閔弼鎬)
1901 ~ 1963 삼방파 독립운동가[항일]
28세(泳)
민영기
(閔泳綺)
1858 ~ 1927 삼방파 문신[세도][친일]
민영소
(閔泳韶)
1852 ~ 1917 삼방파 문신[세도][친일]
민영휘
(閔泳徽)
1852 ~ 1935 삼방파 문신[세도][친일]
민영익
(閔泳翊)
1860 ~ 1914 삼방파 문신[세도]
민영환
(閔泳煥)
1861 ~ 1905 삼방파 문신[세도][항일]
민영은
(閔泳殷)
1870 ~ 1944 감찰공파 기업가[친일]
순명효황후 1872 ~ 1904 삼방파 대한제국 순종의 황후[세도]
민영린
(閔泳璘)
1872 ~ 1931 삼방파 문신[세도][친일]
민영남
(閔泳南)
1907 ~ 1986 충정공파 정치인
민영수
(閔泳壽)
1901 ~ 1968 소경공파 법조인
민영구
(閔泳玖)
1909 ~ 1976 삼방파 독립운동가[항일]
민영빈
(閔泳斌)
1931 ~ 2018 교위공파 기업인
민영수
(閔泳秀)
1921 ~ 2011 삼방파 독립운동가[항일]
민영주
(閔泳珠)
1923 ~ 2021 삼방파 독립운동가[항일]
29세(植)
민응식
(閔應植)
1844 ~ 1903 삼방파 문신
민형식
(閔衡植)
1875 ~ 1947 삼방파 문신[친일]
민원식
(閔元植)
1886 ~ 1921 삼방파 문신[친일]
민충식
(閔忠植)
1890 ~ 1977 교위공파 독립운동가[항일]
민희식
(閔熙植)
1895 ~ 1980 삼방파 고위공무원
민관식
(閔寬植)
1918 ~ 2006 석봉공파 정치인, 고위공무원
민기식
(閔耭植)
1921 ~ 2008 감찰공파 군인, 정치인
민화식
(閔化植)
1939 ~ 2008 충정공파 정치인
30세(丙)
민병석
(閔丙奭)
1858 ~ 1940 삼방파 문신[친일]
민병기
(閔丙琪)
1901 ~ 1973 삼방파 정치인, 고위공무원
민병태
(閔丙台)
1913 ~ 1977 입암공파 교육인
민병도
(閔丙燾)
1916 ~ 2006 삼방파 고위공무원
민병권
(閔丙權)
1918 ~ 1992 이참공파 군인
민병기
(閔丙岐)
1927 ~ 1986 삼방파 교육인
민병돈
(閔丙敦)
1935 ~ 삼방파 군인
민지환
(閔智煥)
1937 ~ 늑암공파 배우
민병채
(閔丙采)
1938 ~ 2021 상의정공파 제34~35대 양평군수
민병초
(閔丙楚)
1941 ~ 충정공파 前 국회의원 (1선)
민병희
(閔炳熹)
1953 ~ 상의정공파 제16~18대 강원도교육감
민병록
(閔丙祿)
1953 ~ 충정공파 스타건설 회장
민병두
(閔丙梪)
1958 ~ 상의정공파 前 국회의원 (3선)
민병주
(閔丙珠)
1959 ~ 호참공파 물리학자
민병주
(閔丙周)
1960 ~ 입암공파 現 지방의회의원 (2선)
민병렬
(閔丙烈)
1961 ~ 의암공파 정치인
민병찬
(閔丙贊)
1966 ~ 현감공파 제14대 국립중앙박물관
민병덕
(閔炳德)
1970 ~ 충정공파 現 국회의원 (1선)
민규동
(閔奎東)
1970 ~ 충정공파 영화감독
민병헌
(閔炳憲)
1987 ~ 의암공파 前 야구선수
31세(基/圭/培)
민복기
(閔復基)
1913 ~ 2007 삼방파 제5~6대 대법원장
민병석
(閔炳奭)
1929 ~ 1983 지애공파 의사
민두기
(閔斗基)
1932 ~ 2000 충정공파 역사학자
민우기
(閔宇基)
1947 ~ 2017 충정공파 배우
민일영
(閔日榮)
1955 ~ 늑암공파 대법관
민상기
(閔相基)
1955 ~ 상의정공파 제20대 건국대학교 총장
민형배
(閔馨培)
1961 ~ 충정공파 現 국회의원 (1선)
민갑룡
(閔鉀龍)
1965 ~ 장령공파 제21대 경찰청장
민현주
(閔炫珠)
1969 ~ 단양공파 前 국회의원 (1선)
민부기
(閔富基)
1971 ~ 문도공파 前 기초의회의원
민부곤
(閔富坤)
1957 ~ 충정공파 민부곤과자 사장
민준호
(閔晙豪)
1979 ~ 늑암공파 배우
민재기
(閔宰基)
1982 ~ 감찰공파 래퍼
민강복
(閔康福)
1989 ~ 청백리공파 체육인
민찬기
(閔燦基)
1989 ~ 단양공파 인터넷 방송인
민가빈
(閔街玭)
1990 ~ 감사공파 가수
민경현
(閔景鉉)
1998 ~ 해관지후공파 前 축구선수
민은기
(閔恩基)
2002 ~ 청백리공파 前 프로게이머
32세(庚)
민경삼
(閔庚三)
1963 ~ 삼방파 SSG 랜더스 사장
민경욱
(閔庚旭)
1963 ~ 삼방파 前 국회의원 (1선)
민경훈
(閔庚勳)
1984 ~ 위양공파 가수
33세(泓/源)
민홍철
(閔洪喆)
1961 ~ 충정공파 現 국회의원 (3선)
민한그루
(閔한그루)
1992 ~ 이정공파 배우
34세(東)
민동욱
(閔東昱)
1991 ~ 호참공파 래퍼
민유라
(閔釉羅)
1995 ~ 입암공파 피겨 스케이팅 선수

4.1. 계보 불명

4.2. 민씨를 예명으로 쓰는 인물

5. 가상 인물

주로 이름자에 쓰이는 '민'자[78] 성씨로 쓰여 독특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매체에서 사용빈도가 높다. 주인공 또는 히로인은 볼드체, 로컬라이징된 캐릭터는 *로 표시한다. 주로 여성적인 느낌이 드는 성씨이지만 2010년 이후에는 주로 악역이나 남성캐릭터들이 많아지고 드라마와 웹툰쪽의 주인공이나 조연으로 나오는 성씨이다.

[1] 돌이 깊이 파인 구멍 [2] 世家傳閥閱,系出費侯賢。 [3] 이규보는 여주 이씨이다. [4] 四方糊口非所歡 [5] 삼국사기에는 민각(閔卻)으로 기록되어 있다. [6] 또한, 민영 묘지명에서 그의 아들로 민언실(閔彦實)과 민언성(閔彦誠), 민수 묘지명에서 자녀 4남 1녀 중 아들의 이름으로 민이함(閔利諴), 민광문(閔光文), 민□화(閔▨和), 민□수(閔▨秀)의 이름이 확인되지만 이들의 이름 또한 현재의 여흥 민씨 족보에서 확인할 수 없다. [7] 다만 순명효황후는 추존황후이다. [8] 실제 인구 순위는 49위 정도로 그다지 높은 편은 아니지만 가상 매체에서는 의외로 많이 보이는 것도 위 같은 왕비 배출 가문으로 이름을 날린 연유에서다. 언급한 4명의 왕비들은 역사에 이름이 남은 여인들이 민씨이기에 실제 인구 빈도에 비해서 비교적 접할 기회가 많다. 이미지가 우아해 보여서인지, 가상 매체에서는 여주인공의 성씨로 쓰이는 경우가 많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반적인 서브컬쳐 남자 주인공이나 히로인 이름에는 선호되지만 그리고 어째 여자보단 남자한테 더 많이 쓰이고 악역 외에는 조연이나 2인자와 사극의 주인공의 성으로 주로 쓰인다. [9] 고종을 쥐락펴락했던 명성황후는 말할 것도 없고 원경왕후가 그 유명한 태종 이방원에게 칼을 들이대며 호통쳤다는 여장부이다. 심지어 상대적으로 대중매체상 다소곳한 이미지인 인현왕후도 실제로는 정사에 기록된 것만 따졌을 때 당대로서는 최초로 후궁을 매질한 왕비였다. [10] 다만 산청의 집성촌에는 시조 26세손으로 致 자 돌림을 쓰는 인물이 있다고 한다. 이는 명성황후친척 아저씨뻘로, 순조 때에 승지를 지낸 민치재(1758~1813)의 생몰년을 감안하면 약 200년 차이가 난다. [11] 2000년에 민경훈, 선예가 등장하기 전에 민씨는 주로 법조계, 정치계, 교육계, 종교계, 아나운서, 언론인, 의료계, 스포츠선수가 주로 많았고 연예인은 드물었다. 민해경이나 일부도 있지만 예명을 쓰는 가수이며 민욱이나 민지환 정도일까나... [12] 당시 거주지는 경기도 수원도호부. 아버지는 보인(保人) 민선(閔先)이고 아래로 동생 민대남(閔大男)이 있었다. 원래 천민이었다가 병자호란 인조 남한산성에까지 호종한 공로로 면천되었다. [13] 자는 여문(汝文). 당시 거주지는 황해도 연안군. 아버지는 유학(幼學) 민영(閔泳)이고 위로 형 민태장(閔泰章)이 있었다. [14] 국왕의 의복을 담당하는 상의국의 책임자. [15] 自奉御至公,世相遠而,四五代闕焉不傳。未知何所考據也。 [16] 1906년 휘문 의숙( 휘문고등학교의 전신)의 설립자이자 대표적인 친일파로 활동한 인물이다. [17] 아래 항목에 있는 민영기 [18] 그는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남작 자리도 거절했다. 1930년 죽을 때까지 민족 독립을 위해 노력하다가 죽었다. [19] 항렬로는 명성황후의 할아버지 뻘인데, 이 항목에 적힌 민씨 척족들 중 명성황후와 관계가 가장 먼 민씨일 것이다. 왜냐하면 명성황후와는 여흥 민씨 4세손(시조 민칭도의 증손자 민영모까지 공통 조상), 그러니까 민종묵 기준으로는 21대조, 명성황후 기준으로는 23대조까지 같고 그 아들 대에서 갈라졌기 때문. 촌수로는 무려 44촌이다. 얼마나 먼지, 항렬 체계도 다르다. 25세손으로, 같은 세대에서 명성황후 일가는 현(顯)자 항렬이지만 민종묵 일가는 종(種)자 항렬이다. [20] 순국 자체도 귀감이 될만 하지만 그의 자결은 3.1만세운동 이전까지 한민족 독립의지에 있어 가장 강렬한 불씨 중 하나였다. [21] 가족들은 대부분 카자흐스탄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 후손 중 한 명이 데니스 텐이다. [22]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84, 『독립운동사자료집』3 [23] 나무위키에 문서가 존재하고 있기는 하지만 해당 인물이 아닌 다른 인물의 문서이다 [24] 특사로 곧 풀려남. [25] 개명 전 이름은 민자충. [26] 후술할 소윤공파를 이정공파와 같다고 볼 때 25개. [세도] 세도가의 일원 [항일] 독립유공자 [친일] 친일파 [7세] [11세] [12세] [12세] [12세] [12세] [12세] [13세] [21세] [21세] [22세] [22세] [친일] [세도] [세도] [세도] [세도] [세도] [세도] [세도] [항일] [항일] [세도] [친일] [세도] [친일] [세도] [친일] [세도] [세도] [항일] [친일] [세도] [세도] [친일] [항일] [항일] [항일] [친일] [친일] [항일] [친일] [72] 활동명 선예, 아버지 항렬이 '기'자 돌림이라 32세손이다. 선예의 큰아버지의 이름은 민원기로 언론에 공개되었다. # [73] 활동명 슈가, '기(基)'자 돌림이 맞고(다만 중국어로 표기할때는 '基'자가 아닌 '其'자를 사용한다.), 아는 형님에서도 32세손 민경훈보다 한 항렬 위라고 본인이 직접 밝혔다. 친형의 이름도 원래 '기' 돌림이었으나 개명을 했다. [74] 흑역사 4(...). 항목 참조. [75] 개명 전 이름은 민성기(閔成基)이다. [76] 특이하게도 성이 '민'씨고 이름이 외자인 '기'이다. [77] 아버지 이름이 민충기(閔忠基)로 31세손이다. [78] 항렬자에 가장 많이 나오는 글자에 속하며, 항렬자가 아니더라도 이름에 흔히 쓰인다. [79] 와타나베 미치아키의 한국식이름 재더빙판에서 그렇게 나왔다. [80] 비디오 더빙판 한정. KBS판과 대원방송판에서는 유리로 나온다. [81] 12.12사태의 진압군 측의 윤성민을 모티브를 한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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