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8-15 11:01:11

뇌(성씨)


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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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한자 표기가 다르더라도 한글 표기가 같으면 합산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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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雷2. 賴

1.

본관은 교동(喬桐 : 현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이 유일하다.

청나라 덕종때 사람으로 형부시랑을 지낸 뇌이성(雷以誠)의 후손이며, 조상이 조선에서 벼슬을 지내다가 화(禍)를 입고 경기도 교동현으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살았으나 후손들이 황해도로 이주하였다고 전해진다.

역사적으로는 1637년( 인조 15) 겸사복(兼司僕)으로 별시 무과에 병과 72위로 급제한 뇌영립(雷永立, 1613 ~ ?)이 있었다. 본관은 교동(喬桐), 당시 거주지는 한성부였으며 아버지는 사과(司果)를 지낸 뇌황(雷滉)이었다. 아래로 남동생 뇌영건(雷永建)이 있었다.

또한 1907년( 융희 1) 탁지부 기수(度支部技手), 임시 재무조사국 기수(臨時財務調査局技手), 1909년(융희 3) 재무감독국 기수(財務監督局技手), 1910년(융희 4) 토지조사국 기수(土地調査局技手) 등을 지낸 뇌달인(雷達仁)이 있었다.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황해도 수안군, 황주군 등지에 30여 가구가 있었으며, 특히 황해도 수안군 율계면 금촌리에 교동 뇌씨가 22가구 살고 있어 당시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 바 있다.

대한민국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1985년에는 총 27가구 100명에서 2000년에는 총 26가구 78명, 그리고 2015년에는 19명으로 그 수가 크게 줄었다고 한다.[1]

중화권에서는 촉한의 무장 뇌동(雷銅)이 있었고, 현재에는 작곡가 뇌송덕(雷頌德)과 샤오미의 창업주 레이쥔(雷军)이 이 성씨를 쓴다. 중국공산당에서 공산주의 도덕의 이상형으로 내세워 선전한 군인 레이펑(雷锋) 역시 뇌씨를 쓴다. 가상인물까지 넣자면 수호전 뇌횡, 레이 우롱(뇌무룡)도 있다.

네이버 지식인에서 자신의 성씨가 뇌씨라고 주장하는 한 사람이 있기도 했다. 뇌씨 주장

로동신문은 11월 21일 평양시 중구역도로시설관리소 도로관리원인 뇌춘옥에 대해 보도했다. 평양이라는 지역 특성상 이쪽 뇌씨로 보인다.

2.

본관은 알 수 없으며, 1960년 국세조사에서 처음으로 충북 1가구, 경기도에 1명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985년에는 총 1명, 2000년에는 총 2가구 12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2016년 기준으로는 5명 정도 있다.

중화권에선 그나마 보기 쉬운편이다. 그마저도 중국 대륙에선 100위권 언저리에 불과한 수준이다. 반면 대만에선 20위 안에 들어가는 나름대로 그 수가 많은 성씨이다.

대만 정치인 라이칭더(賴清德), 대만 출신 가수 라이관린(賴冠霖)이 이 성씨를 쓴다.
[1] 또한 두음법칙 무시로 생겨난 씨또한 19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