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겸호 閔謙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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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92929><colcolor=#FFF> 이름 | <colbgcolor=#FFF> 민겸호 (閔謙鎬) |
본관 | 여흥 민씨 (驪興) |
자 | 윤익 (允益) |
시호 | 충숙공 (忠肅公) |
출생 | 1838년 |
조선 | |
사망 | 1882년 7월 24일 (향년 44세)[1] |
한성부
창덕궁
중희당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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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정치가, 관료 |
종교 | 유교 (성리학) |
국적 | 조선 |
주요 경력 |
성균관 대사성 한성부좌윤 군무사 경리당상 형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 총융사 선혜청 당상 겸 병조 판서 |
가족관계 |
친부: 민치구 친모: 전주 이씨 형: 민승호 누나: 여흥부대부인 아들: 민영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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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말기의 척신(戚臣)이자 간신(奸臣). 민씨 세도가의 일원[2]으로 전형적인 권신에 탐관오리, 매국노명성황후와의 자신의 가문인 여흥 민씨만을 믿고 온갖 비리와 탐욕을 부렸으며 조선판 군납비리를 자행하다 임오군란의 시발점이 되어 결국 살해당했고, 그로 인해 시작된 임오군란 이후 조선 왕조가 파국으로 치닫는데 간접적인 영향을 준 인물이다. 본인이 초래한 행동으로 국가를 수호하는 중앙 정규군을 공중분해 당하게 만들고 외세에 개입을 초래하게 만들었으니 사실상 매국노로 봐도 무방하다.
2. 생애
1838년 판돈령부사 민치구의 3남으로 태어났으며 흥선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의 어머니, 명성황후의 시어머니인 부대부인 민씨와는 남매 사이로 누님 관계이며 흥선대원군과는 매형 사이이다. 고종과는 외삼촌과 외조카 사이로 1863년 고종이 즉위한 후 왕의 외삼촌으로 승격되었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갈등면에서는 명성황후를 지지하였으며 정치적, 사적으로도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 1874년 흥선대원군이 축출되면서 명성황후의 후방 지원과 고종의 신임을 얻어 한성부 좌윤을 지냈고 홍문관 부제학, 판의금부사 등을 지냈으며 지충추지사, 금위대장, 지삼군부사, 무위도통사, 무위소제조, 어영대장을 역임하였다. 1880년 말에는 군무사 경리당상이 되었고 1881년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를 초빙하여 교관으로 임명하여 별기군을 창설하는데 기여하였다.군란이 일어난 1882년 선혜청 당상을 지냈는데 이 때 별기군에 대한 지나친 애정과 비중을 둔 나머지 성격이 오만해져서 구식 군대에 속하는 무위영과 장어영을 단순히 무시하는 태도를 넘어서 구식 군대 군인들의 봉급까지 횡령하였다. 이 당시 구식 군인들은 무려 13개월 동안이나 제대로 된 봉급을 받지 못했고 그 후에 나온 1달치 봉급은 썩은 쌀에 겨와 모래가 섞여 있었으니 당시 구식 군인들의 분노가 어땠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구식 군대 군인들은 항의를 하지만 민겸호의 부하들이 이들을 모욕했고 그 역시도 사태 수습에 나서기는커녕 심지어 군인들을 붙잡아 매질하며 감옥에 가두기까지 했다. 이로 인해 결국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했는데 민겸호는 성난 군인들이 쳐들어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미리 가족들을 피신시켰고 자신도 도피를 시도하였다. 한편 구식 군대 군인들은 흥인군을 때려죽인 뒤 비어있던 민겸호의 집을 점령하였고 그의 집 창고의 많은 재물들을 모두 태웠다. [3] 구식 군대 군인들이 친민씨 척신들을 참살하게 되는 가운데 그는 지나친 강경 진압을 주도하였다가 실패하자 수염을 가린 채 내시로 변장해 도주하려고 했으나 수염을 깎지 않아 구식 군인들에게 발각되어 난병에게 붙잡혔다. 그는 구식 군대를 홀대하고 명성황후를 지지하였다는 이유로 전임 선혜청 당상이었던 지중추부사 김보현과 함께 창덕궁 중희당에서 향년 44세에 참살당했다.
살해당하기 직전 흥선대원군을 본 민겸호는 "대원위 대감, 나를 제발 살려주십시오."라고 애걸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은 쓴웃음을 지으며 "내 어찌 대감을 살릴 수 있겠소이까."라고 말할 뿐이었다. 이때 민겸호는 군인들에게 붙들려 계단으로 내동댕이 쳐진 다음 계단 아래에서 총칼로 난자당해 사망했고 시체는 이들에게 난도질 당하였다. 그의 시체는 김보현의 시체와 함께 구식 군대의 발길질로 걷어차이게 되어서 개천에 버려졌는데 매천 황현이 남긴 < 매천야록>에 의하면 '그 때 큰 비가 내려서 물에 개천이 가득찼으며 날씨까지 흐리고 더웠다. 이런 시기에 시체가 개천에 수 일 동안 버려져 있었는데 살이 물에 불려서 하얗고 흐느적거렸는데 고기를 썰어놓은 것 같기도 하고 씻어 놓은 것 같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래도 이후 시신은 수습되었고 1882년 8월 '충숙공(忠肅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진 뒤 1883년 6월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3. 평가
국가를 지키는 군인들의 봉급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는 데에서 이미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어려우며 비교 대상 간신으로 지목된 유자광, 임사홍, 윤원형[4]보다 더 악랄하다. 게다가 군납비리는 고대부터 사형에 해당되는 중죄로, 민겸호는 원균, 김자점과 함께 조선이라는 국가 자체에 해를 입힌 간신을 넘어서는 매국노라고 봐야한다. 비참하게 살해당하고 개천에 방치되었다는 부분에서 당시부터 이미 평가가 좋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대광보국숭록대부에 영의정까지 추증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이해하기 곤란한 일이다. 추증된 1883년이 바로 임오군란이 진압된 직후였기 때문에 피난에서 돌아온 명성황후가 가족 띄워주기를 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4. 기타
5. 대중매체에서
- 1965년 영화 〈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에서는 배우 김칠성이 연기했다.
- 1990년 MBC 드라마 〈 조선왕조 500년 - 대원군〉에서는 배우 정호근이 연기했다.
- 2015년 KBS 드라마 〈 장사의 신 - 객주 2015〉에서는 배우 임호가 연기했다.
[1]
음력
6월 10일.
임오군란 문서 참조
[2]
누이가 흥선대원군의 부인이었다. 즉 고종의 외숙부. 또 명성황후의
친척 오빠이기도 하여 명성황후와도 친분이 두터운 편이었다.
[3]
매천
황현에 따르면 '비단, 주옥, 패물들이 타 불꽃에서는 오색이 나타났고 인삼, 녹용, 사향노루가 타면서 나오는 향기는 수 리 밖에서도 맡을 수 있었다'라고 한다.
[4]
이 셋은 간신으로 불리기는 했어도 최소한 국가에 타격을 입히지는 않았으며, 나라를 수호하는 군인들의 봉급을 횡령하는 미친 짓도 하지 않았다.
[5]
명성황후를 미화했다는 평가를 받는 드라마인 명성황후에서도 민겸호만큼은 악하게 묘사했을 정도로 평가가 나쁘다.
[6]
같은 작가의 전작이던
왕과 비에서는 연산군에게 충언을 하는 내시 김처선을 연기했는데, 극과 극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