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7 17:43:48

현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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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조선 제18대 국왕
현종 | 顯宗
파일:현종 숭릉.jpg
숭릉 전경
출생 1641년 3월 14일
(음력 인조 19년 2월 4일)
심양 봉천부 봉림대군 관저
(現 중국 랴오닝성 선양시)
즉위 1659년 6월 28일 (18세)
(음력 효종 10년 5월 9일)
한성부 창덕궁 인정문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사망 1674년 9월 17일 (향년 33세)
(음력 현종 15년 8월 18일)
한성부 창덕궁 양심합[1]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능묘 숭릉(崇陵)
재위기간 조선 왕세손
1649년 3월 30일 ~ 6월 22일
(음력 인조 27년 2월 18일 ~ 5월 13일)
조선 왕세자
1649년 6월 22일 ~ 1659년 6월 28일
(음력 효종 즉위년 5월 13일 ~ 효종 10년 5월 9일)
조선 제18대 국왕
1659년 6월 28일 ~ 1674년 9월 17일
(음력 현종 즉위년 5월 9일 ~ 현종 15년 8월 18일)
서명
파일:현종(조선)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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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원(棩)[2]
부모 부왕 효종
모후 인선왕후
형제자매 1남 7녀 중 장남
배우자 명성왕후
후궁 없음[3]
자녀 1남 4녀
종교 유교 ( 성리학)
경직(景直)
전호 효경전(孝敬殿)
묘호 현종(顯宗)
존호 소휴연경돈덕수성
(昭休衍慶敦德綏成)
시호 조선: 순문숙무경인창효대왕
(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
: 장각(莊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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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1263947987_126346466324419.jpg
현종의 어필
1. 개요2. 생애3. 평가4. 기타5. 가계6. 대중매체7. 관련 문서8.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조선의 제18대 국왕. 묘호는 현종(顯宗).

예송논쟁에 휘말렸던 정치적 입지 때문에 단명한 국왕으로 착각되기도 하지만 현종의 재위 기간은 15년으로 짧지 않으며, 10년간 재위했던 아버지 효종과 비교하더라도 긴 기간이다. 다만 나이 자체로만 보면 33세라는 이른 나이에 승하했으므로 오래 살지는 못한 편이다.

2. 생애

효종의 외아들이고 숙종의 아버지이자 경종 영조의 할아버지로 효종 봉림대군이던 시절 심양에 인질로 있을 때 태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 역대 임금 중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임금[4]이기도 하다. 인조 봉림대군 세자로 책봉하면서 왕세손이 되었고 아버지 효종이 즉위한 뒤에는 세자로 책봉되었다. 이는 조선 왕사에서 단종과 더불어 드물게 세손-세자-왕의 절차를 정상적으로 밟은 극소수 경우에 해당한다.

1659년(현종 즉위년) 아버지 효종이 죽은 뒤 즉위하자마자 예송논쟁에 크게 휘말리게 된다. 이 예송논쟁 한국사에 자주 언급될 정도로 당시에는 중요한 정국의 이슈가 되었지만, 알려진 것만큼 현종과 당시 조정 신료들이 재위 기간 내내 예송논쟁에만 매달린 건 아니었고 아들인 숙종 후대 사례이나 다른 나라의 사례와 비교해보면 심각한 정쟁 이슈를 평화적이고 유려(柔麗)하게 풀어나간 현종의 정치력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으나 그 과정에서 자기 아내인 인현왕후 장희빈을 집권세력에 따라 이용하고 신하들까지 죽이는 등 피바람을 부른 아들 숙종이 정치력으로 보면 아버지인 현종보다 아래라 볼 수도 있다. 아무리 정치라도 극단적인 수단 없이 평화롭게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그래서 현종이 더 오래 재위했더라면 붕당은 평화로운 논쟁이 되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현종은 아들인 숙종과 달리 강경하게 환국 사화로 인한 피바람을 일으키지 않아서 명군이라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현종은 손자 영조와 현손자 정조 붕당으로 대립하는 당을 서로 평화적으로 견제하고 자신은 중립을 지키는 균형정책인 탕평책의 입안을 선구 · 선도한 군주라 할 수 있다.

1663년(현종 4년) 발생한 공의/사의 논쟁에서도 왕권과 신권의 대립에서 강경한 입장으로 서필원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신권의 상징인 조차도 필요할 경우 청나라에 사신으로 갈 수 있다는 말도 하였던 바 있다. 논쟁이 격해지는 와중에도 탁월한 정치력으로 자신의 뜻이 충분히 전달되었다는 느낌이 들자 논쟁을 종결시키며 정국을 안정시켰다.

1666년(현종 7년) 귀신 소동이 궁궐에서 일어났는지 현종이 직접 대화 중 귀신 소동에 대해 언급한 장면이 《 현종실록(顯宗實錄)》에 나온다.

백성들을 강력하게 장악하기 위하여 오가작통사목을 제정했고 수리 시설과 양전 사업에 힘썼으며 나라 재정을 수습하고 동활자 10만 개를 주조하는 등의 치적도 남겼다. 국가적인 관계와 대국가적인 문제로 효종 대에 준비하던 북벌을 일시 중단시키기도 했으며 군사적으로 북벌 정책은 계승하지 않았으나 군사력 강화 정책을 계승하여 화포( 신기전)를 개량하여 대량 생산하는 등 군비 증대를 했고 온천 행차 때마다 군사 훈련을 시키기도 했을 정도로 군사력 증강에 심혈을 기울였다. 큰아버지 소현세자처럼 서양의 문물이나 과학 기술 분야에도 관심이 많아서 혼천의의 개량이나 자명종 제작 착수에도 힘을 기울이기도 했다. 1669년(현종 10년), 서인의 영수 송시열의 건의를 받아들여 성씨가 같으면 본관이 다르더라도 혼인(동성혼인 금지)을 못하게 했으며 문묘 안에 계성묘(階聖廟)[5]를 세웠다.

몸이 병약하여 평생 동안 고생했는데 특히 《 현종실록(顯宗實錄)》의 언급으로는 종기를 달고 살다시피 했으며 종기에서 고름이 한 되 가량 나온 적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재위 기간 내내 온천을 자주 애용한 군주로 가히 조선 역대 국왕 중 '최고의 온천 마니아'라 해도 과언이 아닌 왕이다.[6]

조선 민생 역사상 최악의 순간을 넘긴 임금이기도 하다. 전 세계적인 이상 저온 현상(소빙기 현상)으로 인해 곡물 생산이 뚝 떨어져 조선 역사상 최악의 기근이 일어나고 각종 전염병이 연이어 창궐하는 등의 사태가 일어났다. 경신대기근 이전의 효종 시대 ~ 현종 초기 동안 사치 풍조가 만연했던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경제 대공황보다 몇 수 위의 호황 뒤의 대재앙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현종은 나름대로 민생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고 현종 시대에 대동법 호남 지역까지 확대 시행되었는데 호남이 곡창 지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민생고 해결에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을 듯하다. 현종 3년에는 호남 내륙 산군에도 역시 확대되었으나[7] 현종 6년에 중단되었다가[8] 현종 7년에 재실시되어[9] 호남 전역을 집어넣게 되었고, 경기선혜법(京畿宣惠法)이 지방의 대동법과 동일하게 개정, 일원화되면서 비로소 수도권인 경기도도 완전한 대동법 실시 지역이 된다.[10]

현종은 여기서 참으로 꼼꼼한 면모를 드러냈는데 대동법 전국 확대 기조에 발맞추어 선결조건인 양전사업을 인조 대에 갑술양전(甲戌量田)의 실시에서[11][12][13] 이루어지지 못한 삼남외 지역 위주로 실시했다.[14] 현종 4년에 경기도 양전이 이루어지고[15][16][17][18] 현종 6년에 그중 경기도 양주 양전이 다시 이루어졌다.[19][20] 그리고 현종 6년[21][22]부터 현종 8년[23]까지 함경도 양전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현종 9년[24][25]부터 현종 10년[26]까지 충청도 21개 고을과 황해도 4개 고을에 기유양전(己酉量田)이 이루어졌다.

현종은 붕당이 가장 격렬하게 날뛰는 예송논쟁과 심각한 자연재해 속에서 왕으로서의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만 그 때문인지 스트레스를 자주 받아 잔병에 시달렸고 결국 오래살지 못하고 1674년(현종 15년), 30대 초반의 나이로 끝내 단명한다.[27]
파일:숭릉.jpg
<colbgcolor=#bf1400> 숭릉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있는 숭릉. 아내인 명성왕후와 나란히 묻혔다. 숭릉은 다른 점과 특이한 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정자각이 8각 지붕이라는 점이다. 이 능은 비공개 능역이었는데 동구릉 관리소 직원에 의하면 숭릉 남쪽에 연못이 있는데 그 곳에 서식하는 희귀 조류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한다.[28] 능의 정자각 등에 파손된 부분이 있어 복원 정비 중이며 동구릉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있어서 안전상의 이유로 비공개하고 있었으나 2013년 1월 1일부터 전면 개방해서 이제는 찾아가서 볼 수 있다. 동구릉의 능들이 거의 그렇듯이 능침 앞까지 올라갈 수는 없기는 하지만 말이다.

3. 평가

북벌론이라는 대표적 키워드가 있는 아버지 효종 장희빈 인현왕후로 잘 알려진 아들 숙종에 가려서 상당히 관심도나 존재감이 떨어지는 임금이다. 심지어는 예송논쟁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 때문에 무능하거나 심약한 군주로 기억되고는 한다.[29]

존재감과 개성이 그렇게 뚜렷한 임금은 아니지만 예송논쟁을 통해 서인 중심으로 빠진 붕당 정국의 균형을 일정하게 맞추려고 어느 정도 노력했고, 여기에만 매달리지 않아 병자호란 이후 혼란에 빠진 나라를 재건해 수습하는데 노력하는 등, 치적을 제법 남겼다. 더군다나 2차 예송 논쟁 당시에는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아버지 효종의 위상을 장자(長子)로 확정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때 서인들의 기세가 대폭 꺾일 정도였고, 김수흥 같은 거물들도 군소리 못하는 강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다만 그러고 나서 1달여 만에 훙서(薨曙)해서 문제였지만 말이다. 예송논쟁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 때문에 조선 역대 국왕 중 과소 평가되고 있는 군주 중 1명. 다만 현종이라는 동일한 묘호를 썼던 전대의 군주가 현재까지도 한국사에서 손꼽히는 명군 중 한 명인 고려 현종이라는 뛰어난 군주인 것을 생각하면, 당대에는 높은 평가를 받았을 수도 있다.

4. 기타

  • 현종은 보통 유약하다는 모습으로 많이 그려지는 경우가 잦은데 이는 아버지 대의 가계를 살펴보면 대충은 짐작할 수 있다. 현종의 부왕이었던 효종은 왕비 인선왕후와의 사이에서 3남 7녀를 두었으나 이 중 현종의 누나 1명(숙신공주), 형 1명과 남동생 1명, 여동생 1명은 일찍 죽었고 실질적으로 장성한 자녀들은 1남 5녀였다. 이 중에서도 현종은 위로 5살, 1살 차이 나는 큰누나와 작은누나가 있었고 아래로도 4명의 여동생들이 있었는데[30] 이렇게 누나들과 여동생 사이에서 자라났던 현종은 가족 덕인지 상당히 온화한 성격이었다. 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유약하지는 않았는데 이는 누나들과 여동생들이 대부분 여걸에 가까운 성격이기 때문이다.
  • 효종 부마였던 정재륜[31]이 궁궐을 드나들며 보고 들은 내용을 적은 야사 공사견문록을 보면 현종의 소소한 일화들도 적혀 있다. 비록 정사는 아니지만 저자 정재륜이 효종의 부마였고 그 시대의 사람으로 궁궐을 드나들며 보고 들은 내용을 적은 책이므로 신뢰도는 낮지 않을 것이다. 정재륜(1648년 ~ 1723년)은 효종의 4녀인 숙정공주의 남편으로 아버지는 영의정 정태화이다.[32]
  • 당시 궁궐에는 광해군의 후궁인 허씨를 모셨던 조씨 성의 상궁이 있었는데 조상궁은 현종의 조부인 인조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것을 그리 좋게 보지 않았던 듯하다. 어쨌든 현종이 탄생한 후 조 상궁이 현종의 보모가 되었는데, 어느날 어린 현종이 불장난을 하는 것을 보고 "할아버지가 로써 나라를 얻은 것을 배우려는가"라고 중얼거렸다. '불로써 나라를 얻은 것'은 인조반정 때 궁궐이 불에 탔던 것을 의미한 것으로 이건 그야말로 인조의 집권을 비야냥대는 말이다. 현종은 이를 마음속에 담아 두었다가 뒷날 즉위 후 조 상궁을 불러서 그 일을 거론하며 "내가 그거 그냥 부왕께 일러바칠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대가 나를 양육한 공이 있었기에 차마 중한 벌을 받게 할 수 없어서 참고만 있었다"고 타이른 후 조 상궁을 출궁만 시키고 더 이상 벌을 주지 않았으며 조 상궁이 죽을 때까지 식량도 계속 대주었다고 한다.
  • 청나라 사신을 서교(西郊)[33]에서 전송하면서 섬돌 위에 나섰는데 청나라 사신이 떠난 후 한 병사가 빨리 걷다가 주위를 살피지 못하고 현종과 부딪혀서 거의 넘어질 뻔 했다. 주위에서 이 병사를 처벌할 것을 건의했으나 현종은 "모르고 한 일인데 어찌 다스릴 것이 있겠는가"라며 곤장 대여섯 대를 치는 것으로 퉁치고 끝냈다고 한다.
  • 세자 시절에는 효종에게 새끼 을 바친 사람이 있어서 이 곰을 궁에서 길렀는데, 1년 뒤 곰이 크게 성장해서 사람 말을 안 듣자[34] 내시가 "오래 되면 사람을 해칠지도 모르니 죽이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청해서 효종이 이를 받아들이려 하자, 현종은 "곰이 사람을 해치는 동물이라 하지만 아직은 그 해를 받은 이가 없는데, 지금 만일 앞날의 일을 염려하여 미리 죽인다면 어진 마음이 아닙니다."라며 곰을 야산에 놓아줄 것을 청했다. 효종은 현종을 "네가 임금이 되어서는 시기와 의심 때문에 죽음을 당할 사람은 없겠다. 너의 신하가 되는 사람은 복 많은 사람들일 것이다."이라고 크게 칭찬했다고 한다. 실제로 현종 치세에는 예송논쟁의 대립이 격화되긴 했어도 현종의 중재와 교통 정리 덕에 죽은 사람은 없었다. 가장 큰 형벌을 받은 이가 삼수로 유배되어 위리안치당한 윤선도. 그리고 그 윤선도조차 제위 후반기에 서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석방시켜 고향에서 여생을 마무리하게 해주었다. 문제는 아들이 이 성격을 못 물려받았다.
  • 《현종실록》의 현종 행장에 의하면 할아버지 인조가 살아있을 때 표범 가죽을 인조에게 바친 자가 있었다. 그런데 그 표범 가죽이 품질이 좋지 않아서 도로 퇴짜를 놓으려고 했는데, 당시 세손이었던 현종이 "(더 좋은 가죽을 얻기 위해) 표범 1마리를 잡으려면 분명히 많은 사람들이 다칠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인조는 그 뜻을 가상히 여기고 그 표범 가죽을 받았다고 한다.
  • 서인들이 허적을 공격하는 소가 올라오면, 온화한 현종도 화를 내며 노발대발했다. 탄핵소를 들어온 자들을 파직과 유배를 때렸다. 현종이 서인과 남인을 서로 견제하게 하는 편이 그나마 왕권이 자리 잡을 공간을 만들어 줄까 생각한 것이다.
  • 현종은 효종 인선왕후의 외아들로 위로 누나가 2명, 아래로 여동생이 4명 있었다. 7남매 중 유일한 외아들이니 얼마나 귀하게 자랐을지 쉽게 짐작된다.[35] 다른 누이들과 사이가 나쁘지는 않은 듯하지만[36] 《숙명신한첩》을 보면 유독 연년생 누나인 숙명공주와 사이가 좋았던 것 같다. 1살 위인 연년생 누나인 숙명공주가 왕실 사람들과 나눈 서간첩인 《숙명신한첩》을 보면 현종과 나눈 편지도 실려 있다. 내용을 보면 현종이 당시에는 귀하디 귀한 과일이었던 제주도 밀감을 아껴두었다가 준다며 이 누나에게 생색(?)을 내기도 하고, 숙명공주에게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정성스럽게 답장을 써 놓고 그 한 쪽 귀퉁이에다가 동생들인 숙휘공주 숙정공주에게 보내는 추신을 적어 두었는데 "(너희들이) 악착스럽고 독하게 편지 1장을 보내라고 해서 이렇게 쓴다"고 적어 놓은 것도 볼 수 있다. 왕도 일개 오빠몬이었다.
  • 《공사견문록》에 기록된 일화들을 보면 무인 기질이 강했던 아버지나 괴팍했던 아들과는 달리 온화하고 관대한 사람이었던 듯하다. 특히 조 상궁과의 일화는 거의 대인배 인증. 조 상궁의 발언은 인조의 집권 자체를 부정하는 말로도 볼 수 있으니 아무리 그녀가 보모상궁이였다고는 해도 이는 역모죄로 처형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특히 정통성 문제 때문에 골칫덩어리(스트레스)를 엄청나고 심하게 압박받았던 부왕 효종에게 알려졌다면 바로 목이 댕강 달아나고도 남을 그럴 상황. 실제로도 조 상궁 아니, 그 이상의 행위를 벌였다고 할 수 있는 김홍욱의 경우[37] 국문 당하여 곤장을 맞다가 사망했다.
  • 역대 계후가 없는 조선 국왕들 중 유일하게 후궁을 들이지 않고,[38] 중전인 명성왕후 김씨[39]에게만 충실했다. 부부간의 금슬 자체는 그럭저럭 좋았다고 하나 사이가 좋아서라기보다는, 명성왕후가 태종 원경왕후 민씨처럼 워낙 성깔 있기로 유명했기 때문에 후궁을 들이지 못했다고도 한다.[40][41] 화를 낼 때는 단호했지만 아버지, 아내, 아들과는 정반대로 현종은 기본적으로는 매우 온화한 성품[42]이었다고 한다.[43][44][45] 정종처럼 애처가와 공처가의 일면을 동시에 지녔다고 할 수 있겠다. 명성왕후 김씨와의 사이에서 1남 4녀를 두었는데 첫 딸은 아기 사망했고 명선공주 명혜공주는 혼례 직전에 급사[46]했고 왕세자와 막내 명안공주만이 장성하여 혼인[47]을 했다. 그나마도 명안공주는 1687년(숙종 13년) 5월 16일에 20세의 나이로 요절.[48] 그리고 이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조선 왕실에서는 점점 후손이 귀해지기 시작했다. 이후 어렵게 왕통을 이어가다가 헌종 때 단절되었고 철종이 간신히 이었으나 그마저도 단절되면서 왕위를 이을 가까운 왕손이 없다는 명종 사후 때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까지 갔다. 이것은 조선 후기에 들면서 조선 초기와 달리 자손 자체가가 귀해진 것도 있고 역모에 거론된 왕족들이 자꾸 죽어나갔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모에 의해 사사되지 않은 왕녀들부터가 이 때부터 신기하게도 시집가서 아들이든 이든 자식을 보지 못하거나 자식을 낳아도 요절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자식이 아예 없는 경종 순종 황제는 일단 빼고 정조 순조의 딸들은 자식을 낳았으나 나중에 대가 끊기거나 요절했고 숙종, 헌종, 철종, 고종 황제의 딸들은 대부분 요절했다.[49]

5. 가계

현종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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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世子
<colbgcolor=#fff><colcolor=#000> 순
<colbgcolor=#fff><colcolor=#000> 1661년 ~ 1720년 <colbgcolor=#fff><colcolor=#000> 명성왕후 19대 국왕 }}}}}}}}}

6. 대중매체

아버지 효종과 마찬가지로 명군임에도 불구하고 사극에서 그리 많이 다뤄지는 왕은 아니다. 주로 숙종 시대를 다루는 사극에서 숙종의 아버지로 특별출연하는 경우가 많고, 정작 현종 시대를 비중있게 다루는 사극은 드라마 마의와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을 제외하면 거의 없다.
  • 2002년 KBS 드라마 < 장희빈>에서는 배우 양재성[50]이 연기했다. 드라마 초반 승하 직전 숙종의 회상에서 잠시 등장하는데 여기서도 종기에 시달리는건 마찬가지. 그래서인지 장희빈을 다룬 사극에서도 초반부에 사망하는 장면으로만 등장하거나 선왕으로 이름만 언급된다.[51]

7. 관련 문서

8. 둘러보기

진승총(震乘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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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록에는 현종의 승하 장소가 창덕궁 '재려(齋廬)'라고 기록되어 있고, 국조보감에는 '여차(廬次)'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재려는 '제사를 지내는 곳', 여차는 '상주가 상중에 지내는 움막'을 의미한다. 이것은 현종이 죽기 2개월 전에 모후 인선왕후가 승하했기 때문이다. 양심합은 창덕궁 대조전 남쪽에 있는 별각이다. [2] 휘 棩의 발음은 《인조실록》에 따르면 '원'이고 《열성어휘》에 따르면 '연'인데, 전자는 당사자인 현종이 생존해 있던 시기에 쓰인 기록이고 후자는 현종 사후 약 2백여 년 뒤에 작성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연'보다는 '원'이 맞는 발음일 것이다. '연'으로 읽으면 '굽다'라는 뜻인데, 1648년 음력 9월 9일 작성된 현종의 정명단자에 따르면 棩은 '굽어지지 않았다'라는 뜻에서 채택된 글자인 데다, 현종의 고조부인 선조의 휘가 이미 '연'이므로 현종의 휘를 '연'으로 읽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3] 역대 조선 왕들 중 경종, 순종과 함께 후궁을 두지 않은 왕이다. [4] 고려 영토가 아닌 원나라 영토였던 쌍성총관부 화령( 함경남도 영흥군. 북한 행정 구역 기준 금야군, 요덕군)에서 태어난 이성계가 있으나 쌍성총관부는 고려 시대에 이성계의 활약으로 수복하여 동계(동북면)에 재편입되었고 조선 왕조 개창 후에 국호를 명나라에 문의할 때 조선이라는 명칭과 함께 이성계의 고향이었던 화령이라는 지명이 아예 국호 명칭 후보로 고려되었을만큼 조선 왕조 입장에서는 조선령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5] 계성(階聖)의 단어 뜻이 성인의 디딤돌, 즉 성인을 태어나게 한 인물이란 의미다. 공자의 아버지인 숙량흘(叔梁紇), 안자(안회)의 아버지인 안무유(顔無繇), 증자(증삼)의 아버지인 증점(曾點), 공자의 아들이자 자사의 아버지인 공리(孔鯉), 맹자의 아버지인 맹격(孟激), 정자(정이, 정호)의 아버지인 정향(程珦), 주자(주희)의 아버지인 주송(朱松), 채침의 아버지인 채원정(蔡元定)을 배향했다. [6] 그 외 온천을 자주 애용한 왕으로는 세종, 세조, 숙종, 영조가 있다. 세종은 안질(眼疾), 세조는 가려움증, 숙종은 어지러움, 영조는 피부병으로 고생했는데 온양온천이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해진 이유가 네 임금들이 모두 여기서 큰 효험을 봤다고 했기 때문. 물론 현종 온양온천을 자주 이용하고 애용했다고 한다. [7] 김좌명(金佐明)이 아뢰기를, "호남의 산간 고을은 올 가을부터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할 예정인데, 영상이 장차 나라 밖으로 나가게 되어 있으니 속히 의논해 정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입시한 신하들에게 두루 하문하였는데, 어떤 이는 수령에게 전담시키는 것이 편하다고 하고, 어떤 이는 호조가 주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현종 3년 7월 24일) [8] 호남(湖南) 산군(山郡)의 대동미(大同米)의 설행을 파기시키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호남에 대동미를 설행하고 나자 소민(小民)들은 모두 편하게 여겼으나 부가(富家)·대호(大戶)에서만 한때에 쌀을 내는 것이 곤란하다고 모두 불편하게 여겼는데 조정의 의논이 그 말을 믿고 모두 파기해야 된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상이 본도의 감사 민유중(閔維重)에게 민정(民情)을 상세히 물어서 장문(狀聞)하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유중이 백성들에게 두루 묻지 않고 호우(豪右)의 말만을 믿고서 드디어 민정이 불편하게 여긴다고 성대히 진달한 다음 산해(山海) 여러 고을의 대동미를 모두 파기시킬 것을 청하였다. 상이 제신들에게 다시 하문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지금 유중의 장계를 살펴보면 산해의 고을까지도 아울러 파기하려고 하는데, 해읍(海邑)은 폐단이 있는 줄 모르겠습니다만 산군(山郡)에는 결단코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하고, 허적과 비국의 제신들도 모두 파기해야 된다고 했으므로 상이 파기하라고 명한 것이다. 조복양이 아뢰기를, "대동미를 파하고 난 뒤에 법식을 정하지 않으면 각 고을에서 옛 법을 그대로 행하는 즈음에 반드시 외람된 폐단이 많게 될 것입니다." 하고, 태화는 아뢰기를, "감사에게 분부하여 법식을 정하여 장문(狀聞)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현종 6년 12월 27일) [9] 상이 이르기를, "호남의 산골 지방에서는 대동법이 불편하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있으며, 도신(道臣)도 그 폐단을 진달하였기 때문에 혁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어사가 서계(書啓)한 내용을 보니, 백성들이 모두 다시 실시하기를 원한다고 하니 어찌된 일인가?" 하니, 홍명하가 아뢰기를, "대동법을 혁파한 후에 호남 사람들이 모두 잘못을 신에게 돌리는가 하면 심지어 글을 보내 책망하는 자까지 있었는데, 소읍(小邑)의 백성들은 모두 혁파하지 않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정태화가 아뢰기를, "지금 백성들의 심정을 들어보니, 모두 혁파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백성들의 소원이 이와 같으니 산골에 대동법을 다시 실시하는 것이 좋겠다." 하자, 형조 판서 김좌명이 아뢰기를, "올봄에 연해(沿海)의 대동법은 1결 13두 중에 이미 1두를 감하여 길이 정식으로 삼았으니, 산골의 대동법도 똑같이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현종 7년 11월 6일) [10]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경기에서 거두는 쌀에 관한 일을 지금 회의하여 변통하였습니다. 대간의 의견은 8두를 수봉하자는 생각이었고, 신은 10두를 수봉하였으면 하는 생각이었는데, 홍명하 및 김좌명은 12두가 정식이라고 하였습니다. 일을 주관하는 신하의 논의가 이와 같기 때문에 신 등도 그 의논을 따랐고 지금도 별다른 이의가 없습니다." 하였고, 좌상 원두표가 아뢰기를, "호남·호서·경기에 모두 대동법을 시행하고 있는데도 도(道)마다 제각기 다르니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8두는 절대로 안 되고 10두나 12두로 의논해 결정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어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원임 대신(原任大臣)에게 물으니 영돈녕 이경석(李景奭)은 처음에 10두를 알맞게 여기더니 나중에는 우상의 말을 따랐고, 판부사 정유성(鄭維城)은 이미 12두로 출령(出令)한 이상 지금 느닷없이 바꾸는 건 곤란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였고, 헌납 이민서가 아뢰기를, "이번에 양전(量田)하는 일을 백성이 모두 바라고 있었는데, 오늘날에 와서는 처음에 바라던 것과 서로 크게 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전이 역사(役事)가 번다한 것은 모두 공물(貢物)의 종류가 많기 때문입니다. 공안(貢案)은 바로 연산(燕山)의 폐정(弊政)이니, 만약 공안을 개정하게 되면 비록 8두를 수봉하더라도 절대로 부족하게 되는 걱정이 없습니다. 이 일을 초기에 상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12두로 하는 것은 비록 여러 모로 합당하여 폐단이 없다고 하더라도 결코 부세를 균등하게 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12두로 하자는 것이 일을 담당한 자의 의견이고, 8두로 하자는 것이 국외자(局外者)의 의견인데, 차라리 이미 정해진 12두로써 시행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현종개수 4년 12월 3일) [11] 경상좌도 양전사(量田使) 신득연(申得淵)이 치계하였다. "본도의 평시 원장부에 올라 있는 전결은 16만 9천 5백 75결인데, 계묘년 양전 때에는 시기전(時起田)·잡탈전(雜頉田)을 합쳐서 6만 8천 5백 60결이었고, 금년에 새로 측량한 것은 진기전(陳起田)·잡탈전을 합쳐서 모두 15만 9천 5백 75결이며, 시기전은 10만 1천 4백여 결입니다." (인조 13년 2월 28일) [12] 전라좌도 양전사(量田使) 박황(朴潢)이 치계하였다. "신이 관장하고 있는 좌도 25개 고을의 타량(打量) 총수는 묵는 토지나 경작하는 토지를 모두 합쳐서 도합 12만 3천 2백 60결로서, 평상시의 총수에는 3만 7천 40여 결이 모자라고, 계묘년 양전 때의 총수보다는 5만 3천 2백 20여 결이 더 많은데, 여기에서 면세전 5천 결을 제하고 나면 조세를 받을 수 있는 실수(實數)는 7만 6천여 결입니다." (인조 13년 3월 7일) [13] 하삼도(下三道)의 전지를 다시 측량하였다. 전라좌도는 12만 4천 2백 62결 21부로 경작하고 있는 것은 8만 2천 5백 1결 28부 7속이고 그 나머지는 황폐된 전지이며, 전라우도는 21만 1천 43결 28부 3속으로 경작하고 있는 것은 11만 9천 9백 27결 92부 9속이고 그 나머지는 황폐된 전지이며, 경상좌도는 15만 9천 1백 80결 65부 3속으로 경작하고 있는 것은 10만 1천 8백 48결 82부 7속이고 그 나머지는 황폐된 전지이며, 경상우도는 14만 2천 5백 44결 71부로 경작하고 있는 것은 10만 5천 6백 76결 22부 7속이고 그 나머지는 황폐된 전지이며, 공청좌도(公淸左道)는 11만 7천 7백 34결 13부 3속으로 경작하고 있는 것은 5만 8천 7백 69결 1부 2속이고 그 나머지는 황폐된 전지이며, 공청우도는 14만 7백 26결 65부 2속으로, 경작하고 있는 것은 7만 2천 2백 39결 3부 6속이고 그 나머지는 황폐된 전지이다. (인조 13년 7월 24일) [14] 충청도는 문제가 있어서 거의 새로 실시하긴 했다. [15] 경기의 균전(均田)이 끝났다. 기전(畿甸)의 전결(田結)이 난리 뒤로 많이 감축되어 통상 그 숫자가 겨우 7만 2천 9백 80여 결에 불과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더 얻은 숫자가 좌·우도를 합하여 모두 2만 5천 4백 10결이었다. (현종 4년 12월 26일) [16] 경기의 균전이 끝났다. 경기 지방의 전결이 난리를 겪은 후로 많이 줄어들어 행용(行用)하는 수가 겨우 7만 2천 9백 80여 결이었는데, 이때 와서 예전 결수보다 늘어난 것이 좌·우도를 합하여 모두 2만 5천 4백 10결이었다. (현종개수 4년 12월 26일) [17] 균전청(均田廳)을 폐지했다. 좌·우도의 한전(旱田)015)(註 015)(한전(旱田) : 밭(田).) 과 수전(水田)016)(註 016)(수전(水田) : 논(畓).) 의 원결(元結) 9만 8천 4백 56결(結) 36부(負) 4속(束) 중에서 여러 탈이 있는 것을 제외한 실결(實結)은 6만 1천 4백 52결 10부 4속이었다. 지난해 가을에 양전(量田)을 끝냈는데 문서를 수정하는 관계로 이때에 이르러서야 폐지한 것이다. (현종 5년 1월 16일) [18] 지금 균전을 겨우 마쳤는데 새로운 결수가 한 배에 지나지 않으니 관수(官需)를 감하지 않아서는 안 되며, 비용을 절약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지난해의 양전(量田)의 결수를 모두 계산해 보면 6만 3천 7백 21결인데 여러 가지 복호(復戶) 6천 7백 21결을 제하고 나면 실지의 결수가 5만 6천 6백 45결이 됩니다. 여기에서 매결마다 12두의 쌀을 징수한다면 4만 5천 3백 16석이 되는데, 그 중에서 3만 석은 25사 공물 및 진상할 물선 값으로 정하고, 1만 5천 3백 16석은 본도에 유치해두어 영수(營需)·관수(官需)와 사객(使客)의 지공과 대소 잡역의 비용으로 삼으니, 그전에 쌀 16두를 징수하던 것에 비추어 보면 4두를 이미 감하였고 또 부과한 외에 징렴하는 것을 금지한다면 백성들이 실질적인 혜택을 받을 것입니다. (현종개수 5년 1월 16일) [19] 양주(楊州)의 전부(田賦)를 다시 측량하였다. 이에 앞서 양전(量田)할 때 양주의 관리가 적격자가 아니어서 전결(田結)의 경중이 균일하지 않았다. 이에 백성들이 매우 고통스럽게 여겨 모두들 국가에다 원망을 돌렸기 때문에 다시 양전하라고 명하고, 호조 판서와 경기 감사가 구관(句管)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양전을 끝마쳤는데 줄어든 전결의 수량이 거의 1천여 결(結)이었으므로 백성들이 비로소 조금 소생될 수 있게 되었다. (현종 6년 10월 23일) [20] 양주(楊州)의 전부(田賦)를 다시 측량하였다. 이에 앞서 양전(量田)할 때 양주의 관리가 적격자가 아니어서 전결(田結)의 경중이 균일하지 않았다. 이에 백성들이 매우 고통스럽게 여겨 모두들 국가에다 원망을 돌렸기 때문에 다시 양전하라고 명하고, 호조 판서와 경기 감사가 구관(句管)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양전을 끝마쳤는데 줄어든 전결의 수량이 거의 1천여 결(結)이었으므로 백성들이 비로소 조금 소생될 수 있었다. (현종개수 6년 10월 23일) [21] 함경도에 양전(量田)이 있었다. 이보다 먼저 함경 감사 민정중이 사사로이 함흥(咸興)의 전부(田賦)를 측량하였는데, 일을 마친 뒤에 경기를 양전할 때의 사목(事目)에 따라 도(道) 전체의 전정(田政)을 균평하게 할 것을 청하자, 호조가 민정중으로 하여금 그 일을 주관하여 거행하게 하도록 청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정중이 도사(都事)로 하여금 남도(南道)의 7개 고을을 주관하게 하고, 평사(評事)로 하여금 북도의 부령(富寧)·경성(鏡城)·명천(明川)·길주(吉州) 4개 고을을 나누어 주관하게 하고, 회령(會寧) 이북 및 삼수(三水)·갑산(甲山) 등 고을과 문서를 주관하는 일은 함흥 사람인 전 군수 주목(朱楘)·한우기(韓友琦), 전 참봉 정시원(鄭時元)으로 하여금 나누어 살피게 하면서, 갑술년020)(註 020)(갑술년 : 1634 인조 12년, 삼남(三南)을 양전한 해.) 의 예에 따라 그들을 종사(從事)로 가칭(假稱)하여 그 일에 신중을 기할 것을 청하였는데, 호조가 그대로 시행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북도는 토질이 척박한데 양전을 한 뒤에 요역과 부세가 전보다 가중되었으므로 백성들이 불편하게 여겼다. 정중은 자기의 재주를 자부하였으나 그가 시행하는 모든 일이 잗달고 대체를 잃어 훗날의 폐단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현종 6년 7월 23일) [22] 함경 감사 민정중이 장계를 올려 양전(量田)을 실시하였다. 초기에 정중이 사사로이 함흥(咸興)의 전부(田賦)를 측량하였는데, 일을 마친 뒤에 경기를 양전할 때의 사목(事目)에 따라 도(道) 전체의 전정(田政)을 균등하게 할 것을 청하자, 호조가 민정중으로 하여금 그 일을 주관하여 거행하게 하도록 청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정중이 도사(都事)와 평사(評事)로 하여금 남도와 북도를 나누어 주관하게 하고, 회령(會寧) 이북 및 삼수(三水)·갑산(甲山) 등 고을은 함흥 사람인 전 군수 주목(朱楘)·한우기(韓友琦), 전 참봉 정시원(鄭時元)으로 하여금 나누어 살피게 하면서, 갑술년006)(註 006)(갑술년 : 1634 인조 12년, 삼남(三南)을 양전한 해.) 의 예에 따라 그들을 종사(從事)로 가칭(假稱)하여 그 일에 신중을 기할 것을 청하였는데, 호조가 그대로 시행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북도는 토질이 척박한데 양전을 한 뒤에 요역과 부세가 전보다 가중되었으므로 백성들이 불편하게 여겼다. (현종개수 6년 7월 23일) [23] 함경 감사 민정중(閔鼎重)이 도내의 전결(田結) 총수를 죽 적어서 아뢰었는데, 모두 6만 5천 6백 결이었다. 북쪽 변방은 땅은 넓으나 사람이 적어서 대부분 개간하지 않았으며, 전정(田政)을 치지도외한 지 오래되었다. 이 때에 이르러 민정중이 비로소 전결을 측량하였다. (현종개수 8년 7월 8일) [24] 충청도에 양전(量田)을 명하되 네 큰 고을부터 시작하도록 명하였다. 【홍주·공주·청주·충주이다.】 (현종 9년 11월 23일) [25] 또 황해도에 양전을 명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불가하다고 하였는데, 판부사 송시열, 호조 판서 민정중이 힘써 주장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명이 있었다. 이때 민유중(閔維重)이 충청 감사로 있으면서 다른 고을까지 차례대로 거행하기를 계청하였는데 조정에서 따랐다. 유중이 결수(結數)를 확보하려고만 힘써 대부분 실상대로 하지 않았으므로 호민(湖民)의 인심을 크게 잃었다. 이것은 이른바 ‘도신(盜臣)을 두는 것이 차라리 낫다.019)[53] ’는 격이다. (현종 9년 11월 23일) [26] 충청도에 양전(量田)을 하되 4곳의 큰 고을부터 시작하도록 명했다. 【홍주(洪州)·공주(公州)·청주(淸州)·충주(忠州)이다.】 황해도도 마찬가지로 양전을 하라고 명했다. 이때 영상 정태화는 한꺼번에 변통하는 것을 어렵게 여겼지만, 호조 판서 민정중이 힘껏 주장하고, 판중추 송시열도 행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다. 이때 충청 감사 민유중이 다른 고을까지 차례로 거행하기를 계청하자, 이에 모두 따랐다. 다음해에 이르러서 끝냈는데, 충청도는 4곳의 큰 고을 외에 천안(天安) 등 17고을을 양전했으며, 【목천(木川)·보령(保寧)·청안(淸安)·은진(恩津)·평택(平澤)·이산(尼山)·온양(溫陽)·부여(扶餘)·제천(堤川)·임천(林川)·청양(靑陽)·결성(結城)·정산(定山)·비인(庇仁)·연풍(延豊)·전의(全義)이다.】 황해도는 네 고을만 양전하고 그쳤다. 【황주(黃州)·안악(安岳)·해주(海州)·평산(平山)이다.】 (현종개수 9년 11월 23일) [27] 다혈질이었던 아내 명성왕후, 아들 숙종보다 훨씬 단명하였다. 그 명성왕후 아들을 살린답시고 무속신앙에 기반한 무리한 얼음물세례를 받다가 당시로서는 치명적인 감기(독감)에 걸린것 때문에 죽은것이라지만 그 나이도 어쨌든 40대였음을 감안하면 30대에 죽은 현종의 단명이 더욱 체감된다. 거기다 아들이면서 자신대에는 세자였을 숙종, 그리고 아내이자 중전인 명성왕후보다도 스트레스를 받기도 쉬운 왕이라는 위치 그리고 경신대기근을 비롯한 고난들이 몰려있는 상황이면 아무리 온화한 성격의 왕이라 평가받아도 화를 어느정도 많이 낼법도 한데 실록에도 안쓰여있을 정도면 내야할 화조차도 거의 내지를 못할 정도라서 더욱 단명에 영향이 갔을것이다. [28] 오색딱따구리, 해오라기, 딱새, 직박구리 등의 희귀한 조류들이 생태군을 이루고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29] 이 평가는 현종 본인한테 매우 억울한 평가인게 예송논쟁의 원인은 현종의 할아버지 인조에게 있었고, 봉림대군이었던 효종이 원손을 밀어내고 세자가 될 당시에는 현종 본인은 어린 나이였다. [30] 효종의 막내딸 숙녕옹주와 현종의 나이 차이가 무려 8살이다. [31] 즉, 현종의 매형. [32] 다만 족보상으로는 작은아버지인 정치화의 양자로 들어갔다. 정치화 역시 좌의정까지 지낸 인물인데 친아버지와 양아버지의 집안과 능력이 뛰어나기도 했지만, 그가 부마가 된 것도 영향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부마 재혼 금지 법제화의 계기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숙종 대에 숙정공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이 죽자 전례를 들어 재혼을 청했는데, 거절당하고 도리어 부마 재혼 금지만 법제화되었다. 정재륜의 후사는 종손(從孫) 정석오를 죽은 외아들의 양자로 들임으로써 잇게 됐다. 조선 전기 정인지의 차남 정현조는 세조의 부마가 되었으나 공주가 자녀를 낳지 못하고 죽자 재혼했다는 걸 보면 이전에는 상황에 따라서 재혼이 불가능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33] 한양의 서쪽 성곽 부근을 말한다. 영은문 근처로 현재의 서울 서대문구. 당대 중국 사신의 전송, 전별연을 주관하던 모화관이 있던 지역. 현재 독립문이 있는 곳이다. 마포구 서교동이 아니다! 지금이야 독립문에서 서교동으로 이동하기 수월하지만 조선 시대에는 금화터널이 없었다 [34] 사실 곰은 잘만 다루면 사람 말을 잘 듣게 할 수 있다.(현대에도 가끔씩 곰과 함께 사는 집이 나오곤 한다.) 다만 이 당시에는 그걸 몰랐거나 그럴 재주가 없어서 못한 듯 [35] 그렇다고 효종 인선왕후가 아들 딸 차별이 심하지는 않았지만 현종이 유일한 왕세자이니 정말 귀하게 자랐을 것이다. [36] 숙안공주 숙정공주 안하무인격에 정치에도 관여해서 사대부의 비난을 받았는데 효종과 현종이 공주들을 적극 보호했다. [37] 이 사람이 뭘 했냐면 효종 5년 구언의 전교를(뭔 소리냐면 재난이 일어난건 왕 탓이니 쓴소리 좀 해 봐라 벌 안 줄테니) 내리자 강빈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다. 정통성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효종에게는 본의는 아니지만 제대로 아픈곳 찌른 셈이었다. [38] 경종 순종도 후궁이 없었지만 이쪽은 적어도 계후는 있었다. [39] 명성황후 민씨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40] 다만 차이점이라면 태종은 ( 이복 동생들을 죽이고 동복형 제압할 정도였으니) 마찬가지로 그 성깔이 보통이 아니었던지라 수많은 후궁을 들였다는 것. [41] 사실 현종 재위기간 내내 친어머니이자 왕대비 인선왕후가 살아 있었으므로 명성왕후도 시어머니인 인선왕후의 눈치를 봐서 마냥 대놓고 후궁 들이는걸 반대하거나 할순 없었지만 명성왕후의 친가가 워낙에 권세있는 명문가였기 때문에 인선왕후조차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실제로 명성왕후 숙종 재위 시절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이자 자신에게는 (법적) 시조모인 장렬왕후가 멀쩡히 살아있는데도 서인집안 출신의 인현왕후 간택을 거의 독단적으로 강행하고, 장렬왕후의 궁녀였던 희빈 장씨를 내쫓기도 했다. [42] 아들은 물론, 손자, 증손자, 현손자, 내손자든 간에 현종 아래로 그 성품들은 아내였던 명성왕후를 빼박 닮아 다들 성질이 한성깔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결과로 인해 조선 역사상 왕이 세자를 죽이는 참혹한 일이 벌어지게 된다. [43] 이 온화한 성품을 그나마 많이 닮은건 장손자인 경종 정도로 추정된다. 이 경종의 경우에는 사실 되려 신하들이 임금열외를 시킬정도로 본인을 무시한 점이 실록에 등장하기까지 한걸 감안하면 다혈질을 타고나지 않더라도 충분히 화가 많아도 이상하지 않은 쪽인데 되려 많이 참다가 터트린걸 감안하면 숙종의 아들들 중 할아버지의 성품을 가장 많이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다. [44] 아무리 온화한 현종이라도 경종때처럼 신하들이 자신을 기수열외 시키듯이 무시하는 행태를 보였으면 화를 냈을 것이다. [45] 안타깝게도 이런 경종은 세자 시절 어머니인 희빈 장씨를 잃은 시점부터 스트레스를 많이 받다가 세자 말년엔 정비인 단의왕후까지 떠나보내고, 왕이 되고난 후에는 앞서 서술한 고난까지 겪은 영향 때문인지 할아버지 현종보다 겨우 2년 더 산 35세로 단명하고 말았다. [46] 당시 둘 다 부마를 정해 놓고 봉작까지 내린 때였는데 1673년(현종 14년)에 두 공주가 4개월 간격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떴다. 공주들의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명선공주의 경우 사망 1주일 전 《 현종실록》 기사에 천연두를 앓고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한편 공주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조정에서는 부마들의 작호를 유지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행해졌다. 그 결과 길일을 정하지 못한 상황에서 사망한 명혜공주의 부마는 작호를 환수하고 혼례일이 잡힌 명선공주의 경우는 작호를 유지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후 부마 재혼을 금하는 법례 때문에 명선공주의 부마가 평생 재혼하지 못하고 늙을 판이 되자 현종은 이를 불쌍히 여겨 이마저도 다시 환수하도록 명을 내려준다. [47] 다만 현종은 명안공주가 시집가는 모습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명안공주는 1680년(숙종 6년) 2월 18일에 전 공조참판 오두인의 아들 부마 오태주와 혼례를 올렸다. 막내 여동생을 지극히 아꼈던 숙종이 이 날도 승지를 보내 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 숙종실록》에 남아 있다. 오태주의 아버지 오두인은 훗날 인현왕후 폐위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화를 사 모진 형신을 받고 의주로 귀양가는 도중 고문 후유증으로 파주에서 객사한다. [48] 오원은 시동생 오진주의 아들로 공주 사후 들여온 양자이다. [49] 그나마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는 77살까지 살았지만 덕혜옹주도 딸 하나만 낳았고 그마저도 24살의 나이에 유서를 남기고 행방불명 되었다. 결정적으로 덕혜옹주가 태어났을 땐 나라가 이미 망한 뒤였다. [50] 불과 30대인데도 엄청 나이든 모습으로 그도 당연할 것이 해당 배우는 1945년생으로 2002년 당시 57세였다. 병약한 이미지라지만 연령대를 생각해보면 20대나 30대의 젊은 배우에게 역할을 맡기는게 적절했을테니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연령대를 고려하지 않은 배역이 이 드라마의 문제점인데 같은 배역 선정 오류를 복선군 이남 김익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51] 그러나 사극의 소재거리를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큰 격변없이 정국을 이끌어 갔다는 뜻도 될 수 있다. 예송논쟁을 사극으로 만들기에는 현대인 입장에서는 그다지 흥미있는 소재가 아니라는 것도 있다. [52] 모후인 인선왕후는 통통한 체격이었다고 하니 모계의 체형을 물려받았다고 설정되었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