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13:48:49

민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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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407년 민무구, 민무질의 옥으로 인한 제명
2 1404년 태종의 왕자들을 죽이고 상왕 정종을 섬기려 한 혐의로 제명
3 1409년 민무구, 민무질의 옥으로 인한 제명, 후에 신원
4 1416년 불충, 불경죄로 인한 제명
5 1411년 이숭인, 이종학을 죽임 혐의로 인한 제명
6 1426년 노비 불법 모집 혐의로 인한 제명, 1456년 세조 때 복권
7 1415년 민무회, 민무휼의 옥으로 인한 제명, 1422년 세종 때 복권
8 1409년 친척의 아들을 정종의 아들로 속인 혐의로 인한 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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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D400> 민무구
閔無咎
출생 미상
사망 1410년( 태종 10)
부모 아버지 민제
형제자매 누나 원경왕후, 남동생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
본관 여흥 민씨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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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정치인. 민제의 아들이자 원경왕후의 남동생이고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의 형이다.

2. 생애

1369년에 아버지 민제와 어머니 여산 송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392년에 이방원이 정몽주를 암살할 때 가담하였으며 1398년에 대장군으로 임명되었고 민무질과 더불어 이방원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킬 때 이방원과 이숙번이 만나도록 주선하였다. 당시의 공적으로 민무구는 여강군에 봉해진다. 1401년에 중군 총제를 지내다가 병으로 사직하였고 1402년에 참지승추부사에 임명되며 복귀하였다. 1405년에는 참찬을 지냈고 1407년에 이화로부터 민무질, 신극례 등과 함께 외척이 되어 지나치게 교만하고 방자하다고 말한 것이 빌미가 되어 탄핵당한다. 탄핵당한 부분이 왕이 경계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은 것이었지만 민무구의 불충은 완벽한 사실이 되었다.
태종 : 임금에게는 아들이 하나만 있어야 한다고 하였느냐?
민무구 : 그렇사옵니다, 전하! 세자 외에는 영특한 아들이 없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옵니다.

태종의 삼촌인 이화는 민무구의 발언에 대해 왕실의 자손을 제거하라는 뜻으로 해석하였고 결국 민무구는 민무질과 국문을 당한 후에 연안으로 유배되었다. 이후에도 공신, 백관, 대간, 형조 등으로부터 법에 따라 다스려 그를 죽여야 한다는 상소가 계속 올라갔다. 태종은 하륜에게 어떻게 처벌해야 하는지 물었는데 하륜은 가볍게 처벌해도 된다고 답하였다. 하지만 태종이 "곧은 말이 아니다."라고 대답하며 자신의 목적은 숙청임을 명백히 드러낸다. 11월 11일에는 민무질과 함께 직첩이 거둬지고 21일에는 민제의 요청에 따라 여주로 옮겼다.

이후에도 꾸준히 사사하라는 상소가 올라오고 1408년 10월 16일에는 옹진으로 옮겨진다. 1409년 10월 5일에 민무질과 함께 제주로 유배되었다가 1410년 3월 17일에 민무질과 같이 자결하라는 명령을 받아 사사당한다. 남들이 슬퍼하는 와중에 기뻐하였고 남들이 기쁜 와중에 실망한 기색을 나타냈다는 죄목은 대중들이 우습게 볼 가능성이 높으므로 왕자들을 제거하려고 시도한 것이 죄목이 되었다. 민무구의 죄는 누나인 원경왕후도 변호할 수 없는 중죄이다. 민무구와 민무질이 사망한 후에도 태종은 동생들인 민무휼과 민무회를 주시하다가 결국 사사한다.

3. 대중매체


* 1996년 KBS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신동훈이 연기하였다.

* 2008년 KBS 대하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김응수가 연기하였다.

3.1. 용의 눈물

조선 시대 초를 다룬 레전드급 사극답게 가장 행적이 잘 표현된 작품 중 하나로, 배우는 신동훈. 초반부터 등장해 누나인 원경 왕후, 동생 민무질과 함께 매형의 왕위 등극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돕는데, 이 과정에서 아버지 민제의 반대도 무시하고 권근에게 접촉하여 사돈을 맺는 등 세력 불리기에 사활을 걸며 이방원이 권력을 잡는데 온갖 도움을 준다. 2번의 왕자의 난과 조사의의 난 때 동생과 함께 직접 갑옷을 입고 군사들을 끌고 참여했다. 하륜, 이숙번, 조영무 등과 함께 가장 충성스럽게 이방원을 도운 공신으로, 조영무, 이거이 등이 이방원의 사병 혁파에 격분해 반발하다 귀양을 갈 때도 기꺼이 사병 혁파에 찬성하며 사병을 내놓는 등, 이방원이 왕위에 오를 때까지의 행보는 분명 원경 왕후가 늘상 하는 "아우들이 아니었다면 전하가 왕위에 오르실 수 있었겠느냐"란 말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이방원이 태종으로 왕위에 오르고 나서 왕권 강화를 위해 외척을 경계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창창해 보였던 앞날에도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그 징조는 아직 세자 시기의 이방원이 사병 혁파 과정에서 반발하던 공신들을 귀양보낸 후 가진 동생 민무질과의 술자리에서 나타나는데, 이방원은 술자리에서 흥겹게 놀면서도 권력을 위해 자신에게 충성했던 공신들마저 냉정히 귀양보내야 하는 현실이 개탄스러워 민무질에게 "처남, 권력이 무엇인지 아는가?"라 묻는데, 민무질은 눈치없이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아니옵니까, 남자라면 응당 해야 하는 것 아니겠사옵니까"란 답변을 해버리고, 기가 찬 이방원은 술자리를 들어엎으며 "권력이란 자식도, 형제도, 친족도, 그리고 처가도 없는 것"이라며 꾸짖는다. 아마 조만간 외척이 될 처가에 대해 잘 처신해서 숙청의 명분을 피하라는 일종의 경고였을 듯. 그러나 민무질은 후에 형과 누이에게 이 발언에 대해 얘기하지만 그 뒤에 숨어있는 무서운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깨닫지 못했고, 원경 왕후와 민무구 또한 "어째서 그런 말을 함부로 해서 심기를 건드리나"와 같이 면박만 주었을 뿐, 권력을 얻은 후의 처신 또한 별 다를바 없이 행동하면서 화의 씨앗을 틔우고 만다.

결국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처신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권력을 틀어쥐고 부귀영화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에 공신이 되는 과정에서 엄청난 공이 있는데다 외척이라는 뒷배경까지 있는 이들을 견제하고자 한 이숙번이 태종에게 간언하지만, 태종은 '사람이 변했구먼, 제 몸 보신을 위해 남을 헐뜯는 법도 배웠는가'라며 무시한다. 하지만 태종은 이미 이전부터 보아둔 이들의 행동이 결국 왕권을 저해할 강력한 외척으로 성장할 것임을 예측하고 있었고, 결국 1차 양위 소동을 일으킨 뒤, 양위 반대에 소극적이었던[1] 이들의 행동을 트집잡아 세자를 내세워 국정을 농단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연안으로 귀양을 가고 만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일관하다 갑작스레 이들을 찍어내버리는 태종의 행동에 둘을 견제하고자 했던 이숙번마저 '그들을 견제하고자 했지, 파멸시키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며 경악하면서도 한탄한다.

하지만 자신들의 세상이 온 줄 알고 부귀영화를 즐기다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귀양을 간데다, 이러한 사건의 정치적 의미를 파악할 능력도 없었던 두 사람에게는 그저 억울한 마음 뿐이었고, 귀양 도중 아버지 민제의 죽음으로 장례를 위해 일시적으로 도성으로 오는 것이 허용되어, 민제의 장례식에서 매형을 마주한 자리에서 억울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민무질이 실언을 했다가 태종에게 "장인은 훌륭한 분이시지만, 그건 그분에게만 해당되는구만. 어찌하여 장인 어른은 자신과 같은 자식들을 얻지 못하셨단 말인가"이라는 사실상의 최후 통첩을 받고 회생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애초에 민제는 태종의 의도를 이해하고 자식들을 살려보려 귀양 도중 자진해서 여흥으로 귀양지를 옮겨달라 했으며, 죽기 직전에도 태종에게 "자식들을 잘 부탁드린다"며 마지막으로 큰절을 올리는 등 여러 노력을 했지만, 두 형제의 짧은 식견은 끝내 아버지의 노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한 셈.

결국 장례가 끝난지 얼마 안 되어 옹진진을 거쳐 제주로 옮겨지고, 그 곳에서 해안가를 바라보며 동생과 함께 "그 때는 참 좋았었지..."라 회상만 하는 처지가 되어버린다. 말 안해도 두 형제의 한때는 좋았던 과거랑 참 비교가 되는데다, 그런 말을 하는 제주도 해안가의 분위기가 참으로 처량해서 두 형제의 심정에 절로 공감이 간다.[2] 그러나 두 형제의 기구한 운명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으니, 제주로 유배간지 얼마 후 태종에게서 사약이 내려오고[3], 이를 본 민무구는 "우리보고 죽으라구?"란 말만 반복하고 할 말을 잃고 만다. 원경 왕후가 태종의 면전에서 발악을 하며 막으려 해보았지만 역부족이었고, 둘은 태종을 원망하여 전하도 원래는 고려 동북면의 무명의 장수의 다섯째 아들에 불과했음을 털어놓고 저승에서 반드시 보게 될 것이라는 말을 남긴 뒤 사약을 마시고 극중에서 퇴장한다.[4][5] 이들이 죽은 뒤 남긴 말을 들은 태종은 "아무렴, 그런 일을 당하고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리가 있나. 나라도 그랬을 게야."라며 복잡한 감정을 내비쳤지만 동시에 이 말을 절대 잊지 않다가 이 말을 떠올리며 민무휼 민무회도 사사한다.

3.2.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태조, 정종실록과 태종실록에서 등장 여기서는 민씨 4형제가 제 나름대로 몸을 사렸다는 해석을 하였다. 아버지 민제가 "주상께서 우리를 보시는 눈이 썩 좋지 않으니 자중하여라"라고 충고하자 민무구와 민무질이 긴장하며 물러나는 모습이 나온다. 둘은 "주상께서 우리를 먼저 숙청당한 이거이 부자처럼 보시는 것 같다."라며 뒷일을 걱정하고 1410년에 동생 민무질과 함께 태종이 내린 사약을 받는다.


[1] 반대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고, "저하가 왕이 되면 우리에게 좋은 것 아닌가?"라고 생각해 양위 파동 직전에 중궁전에 들렀다가 트집 잡히기 좋은 이들의 행동에 흠칫한 원경 왕후의 꾸지람을 듣고 입궁한 뒤 대신들의 반대 분위기에 마지못해 반대에 동참했다. 그러나 이미 그들의 속마음을 눈치채고 있었던데다 중궁전에 들렀던 뻘짓까지 걸려서 태종에게 꼬투리를 잡히고 만다. [2] 이때까지도 진짜 죽일거란 생각은 못하고 시간 좀 더 지나면 돌아갈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권력을 꿈과 같다며 한탄하는 민무질에게 민무구는 언젠가 다시 그 꿈속으로 돌아갈 수 있을거라며 위로했다. [3] 사약과 교수형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해서 사약을 택한다. 참고로 후에 같은 형을 받게 되는 동생들인 민무휼과 민무회는 교수형을 택한다. [4] 이로 인해 한동안 원경왕후는 자다가 민무구 형제가 자신에게 살려달라며 겁에 질려 있는 모습을 보는 꿈을 꾸게 된다. [5] 심지어 145화에선 세자빈이 무당을 불러 굿을 하던 중 무당이 민무구의 혼이 빙의했는지 원경왕후를 부르짖을 때도 민무구의 환청으로 연출한 바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