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8-09 16:03:33

선조(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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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4대 국왕
선조 | 宣祖
파일:선조.jpg
선조 추정 어진[1]
출생 1552년 11월 26일
조선 한성부 인달방 덕흥군 사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2]
즉위 1567년 8월 7일
조선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3]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사망 1608년 3월 16일 (향년 55세)
한성부 정릉동 행궁 정전
(現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능묘 목릉(穆陵)[4]
재위기간 제14대 국왕
1567년 8월 7일 ~ 1608년 3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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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균(鈞) → 연(昖)[5]
부모 생부 덕흥대원군
생모 하동부대부인
양부 명종
양모 인순왕후
형제자매 3남 2녀 중 3남
배우자 정실 의인왕후, 인목왕후
후궁 공빈 김씨, 인빈 김씨, 귀인 정씨
자녀 14남 11녀
종교 유교 ( 성리학)
군호 하성군(河城君)[6]
전호 영모전(永慕殿)
묘호 선종(宣宗) → 선조(宣祖)
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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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륜입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
(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
계통광헌응도융조경명신력홍공융업
(啓統光憲凝道隆祚景命神曆弘功隆業)
시호 조선: 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
(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
: 소경(昭敬)
}}}}}}}}} ||
파일:external/photo-media.hanmail.net/20060929163306.254.0.jpg
선조의 한글 어필[7]

1. 개요2. 생애
2.1. 잠저(하성군) 시절2.2. 즉위2.3. 목릉성세(穆陵盛世)2.4. 임진왜란2.5. 후계 문제2.6. 대여진 정책(여진 정벌)2.7. 목릉
3. 평가4. 가족관계5. 기타6. 대중매체에서
6.1. 소설6.2. 만화6.3. 게임6.4. 영화6.5. 드라마6.6. 교양ㆍ다큐멘터리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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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제14대 국왕. 묘호 선조(宣祖), 시호소경정륜립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경명신력홍공융업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景命神曆弘功隆業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 는 연(昖).

중종 창빈 안씨의 차남인 덕흥군 이초 하동부대부인 정씨의 3남으로 태어나 '하성군(河城君)'에 봉해졌다.

조선 왕조 최초로 대군 출신이 아닌 방계 출신의 국왕이다. 원래 명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예정이었던 순회세자가 갑자기 이른 나이에 사망하면서 명종의 뒤를 이을 후사가 친자식 중에 없자, 왕실 종친의 근친 가운데 후사(後嗣)를 정하도록 하였고 덕흥군 제삼자(德興君第參子), 어린 하성군이 선택되어 명종과 인순왕후 양자로 들여 명종의 를 잇게 하였다. 선조는 왕위 계승은 생각도 못했던 그 어린 나이에 갑자기 즉위하였는데 심지어 방계 중 서자 출신이어서 정통성에 상당히 불안한 측면이 있었다. 곧 해소되었지만.

초창기에는 숙모이자 법적으로 어머니인 인순왕후 수렴청정을 했지만, 어린 나이에 곧 신료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루고 정치력이 뛰어나 무난히 조정을 휘어잡았다. 무려 41년의 재위기간 중에서 추한 모습을 보였던 임진왜란 6년을 뺀 35년 동안 목릉성세(穆陵盛世)[8]라고 칭송받은 선조의 모습은, 그가 통치자의 자질만은 타고난 인물임을 방증하는 부분이다. 이후로도 국가 경영에 관하여서 만큼은 매우 숙련된 모습을 보였으며, 조선의 병폐와 한계에 대하여 여러가지 통찰력을 보이며 여러 방면에서 개선점을 만들었다. 조선 역사의 중간에 위치한 임금으로 왕위 계승도를 보면 선조 시기와 임진왜란을 기준으로 전기와 후기로 계보도가 나눠지며, 이후 조선 임금들은 모두 선조의 직계 후손들이 된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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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잠저(하성군) 시절

1552년(명종 7년) 11월 11일, 조선 한성부 인달방(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서촌지역)에서 덕흥군 하동군부인[9] 3남으로 태어났다. 덕흥군은 중종 창빈 안씨의 아들로 선조는 중종의 방계 서손자이다. 선조의 원래 이름은 이균(李鈞)으로, 즉위 전 받은 군호는 하성군[10]이다.

그가 태어난 사직동 집 덕흥군이 어릴 때 아버지 중종으로부터 직접 하사받은 저택으로, 터가 어떻다는 말을 들었는지 공사가 거의 다 될 때쯤 우물물이 안 나온다는 핑계를 대면서 바꿔 달라 했다고 한다. 중종은 '멀쩡히 우물이 나오는구만, 별 말을 다한다'며 계속 집을 짓게 했다. 터가 나쁜 줄 알았더니 떠-억하니 왕(선조)이 태어난 셈이다.

덕흥군은 선조가 8살이 채 되기도 전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하성군은 숙부였던 명종의 명으로 중종의 장남이자 서백부인 복성군 양자가 되었다.

하성군의 숙부였던 명종은 죽은 이복형을 대신해 조카들에게 잔정을 주었는데, 이는 외아들 순회세자가 요절한 이유도 있었다. 3형제를 곧잘 궁으로 불렀는데 특히나 막내 하성군을 이뻐했다고. 《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어느 날 명종 덕흥군의 세 아들인 하원군 이정, 하릉군 이린[11], 하성군 이균을 궁으로 불렀다. 명종은 대뜸 익선관(왕관)을 벗어 한 번씩 써보라고 시켰다. 두 형은 시키는 대로 써 보았는데 하성군만 극구 사양했다. 명종이 하성군에게 임금과 아버지 중 누가 중요하냐고 묻자 하성군은 둘은 다르게 보이지만 본디 충과 효는 하나라고 대답했다. 감동한 명종이 하성군에게 '이 관은 네 것이다라 했다'고 쓰여있다. 비록 신빙성에 의심이 가나 소경 대왕 행장을 근거로 광해군일기에 기재된 엄연한 실록이다.

1565년(명종 20년) 9월에 명종이 잠시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에 신하들은 후계자 지정을 서둘렀다. 명종은 9월 15일 혼수로 인사불성인데도 신하들이 우루루 명종 곁에 모였다. 영의정 이준경이 말을 꺼냈다. 명종은 인사불성이라 대답이 없었는데, 이틀 뒤인 9월 17일에도 깨어나지 않자 신하들은 인순왕후 심씨에게 후계자 문제를 물었다. 인순왕후는 명종이 평소 이뻐했던 하성군에게 병 간호를 시킨다. 조선에서 국왕의 간병은 거의 왕세자의 업무였기에, 이 병 간호는 하성군을 후계자로 낙점해 생각한다는 매우 중요한 상징적인 행동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명종이 다시 의식을 회복하고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때문에 하성군을 명종의 후계자로 지정하는 문제는 수면 밑으로 다시 들어갔다. 다만 명종도 자식이 없는 지금 상황에서 조카인 하성군을 후계자로 삼는 것도 괜찮다 생각했는지, 군왕인 자신을 두고 하성군을 후계를 논한 신하들을 트집잡지 않았다. 선조 시절 정철 광해군 왕세자(건저 문제)로 내세우다가 죽을 뻔 한 사례를 보면 알겠지만 신하가 왕의 후계자를 논하는 것은 '택군(擇君)'이라고해서 역모처럼 취급되는 국가 대 중범죄였다. 영의정 이준경의 건의도 별 책망없이 넘어간 점이나 양자를 들이라는 상소를 올린 선비 김택에게 벼슬을 준 점 등을 볼 때 명종은 하성군을 자신의 후계자로 간접적인 묵시적 동의를 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다만 이게 명종 또한 내심 하성군을 후계자로 완전히 인정했고 단지 공개적으로 확정하지 않았던 것 뿐인지, 아니면 하성군 왕위 계승도 인정하긴 했으나 '내 나이도 많지 않으니 좀 더 기다려서 중전으로부터 세자를 새로 얻으면 그게 최선이고 정 안되면 조카 하성군에게 계승하자'는, 일종의 차선책 정도였는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일단 《 선조실록》과 그 행장에는 1565년(명종 20년) 당시 병환이 깊어진 명종이 직접 하성군을 후계자로 지정했다고 기록되어는 있으나 이렇게 중요한 내용이 정작 당대인 《 명종실록》에는 없다는 점이 신빙성에 의심을 두게 한다.

후대의 추측으로는, 하성군을 공식 후계자로 확정짓는 것 자체가 굉장히 위험한 행동이기 때문에 '암묵적'으로만 표시를 해두었다고 보는 시각이 보편적이다. 명종이 이후 후사를 남기지 않고 사망했음을 우리는 알지만 당대에는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만약 하성군, 즉 선조를 후계자로 확실히 점찍었다가 명종 적자라도 낳는 순간 후계 문제는 심각하게 복잡해진다. 멀리 갈 것 없이 선조 본인도 이러한 사태가 발생하여 광해군- 영창대군 간의 대립을 낳아버렸고 결국 선조 사후 영창대군은 이복형 광해군에게 정적으로 찍혀 그의 손에 짧은 생을 비극적으로 마감하고 만다. 이렇기 때문에 명종 사망 전까지, 하성군은 공식 후계자는 아니지만 사실상 후계자나 다름없는 애매한 상황에 계속 놓이게 된다.

2년 후인 1567년(명종 22년) 6월 28일, 명종이 다시 위독해지자 인순왕후 심씨는 하성군을 후계자로 점찍었다. 《 선조실록》의 총서에 따르면 인순왕후는 ' 을축년의 일에 따라 덕흥군 제삼자, 하성군으로 한다'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을축년의 일'(1565, 嘉靖 44년)이란 앞서 말한 하성군의 병 간호를 말한다. 즉 인순왕후 역시 당시 일을 계기로 하성군이 후계자로 인정을 받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준경 외의 신하들도 이를 순순히 수용하였던 것을 보면 이미 신하들 사이에서도 하성군이 적합하다는 공감대가 어느정도 형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앞서 말했듯이 마침 하성군의 친부인 덕흥군은 일찍 사망했고 친모인 하동부대부인 정씨 역시 하성군이 공식 즉위하기 1달 전에 이미 사망했다. 게다가 정씨의 친정, 즉 하성군의 외가 역시 권세가 큰 편이 아니었으며 아직 혼인하지 않았으므로 처가의 문제도 없었다. 따라서 척신들이 딱히 발호할 여지도 적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반감도 크지 않았다.

그리고 위에 언급했듯이 선조는 그냥 복성군의 형식적인 양자였다. 중종의 적자인 인종 명종의 후사가 없는 상황에서 중종의 서장자 복성군의 (양)아들인 그가 서열상으로도 가장 높았다. 복성군의 처가가 문제가 될 수도 있지 않나? 할 수 있지만 복성군의 부인 역시 저 때 이미 고인이어서 문제없었다.

어쨌든 명종 1567년, 승하하자 하성군이 조선 제14대 국왕, 선조로 즉위한다. 혹시나 요행을 바라고 하성군 즉위에 공이 있음을 주장하는 투서가 밀려들었는데, 영의정 이준경이 '이미 대행대왕(大行大王)께서 직접 정하신 일인데 공은 무슨 공?'하면서 모두 싸그리 모아 불태웠다고 한다.

야사에는 영의정 이준경이 숨을 거둔 명종에게 귀를 대고 "신이 귀가 잘 들리지 않사온데 하성군으로 하여금 대통(大統)을 잇게 하오리까?" 라고 속삭이고는 좀 뜸을 들인 후 '양위(讓位)를 허락하셨다'고 외쳤다고. 이때 "덕흥군의 제삼자(德興君之第參子)"라고 조서를 쓰는데 한림 윤탁연이 '三(3)'을 어음 등 중요 문서에서 변조를 막기위해 쓰는 參(3) 자로 적어 이준경이 매우 칭찬했다고 한다.[12]

선조는 조선의 첫번째 서출 방계 임금으로 적통에게서 낳은 대군 출신이 전혀 아니다. 그동안 적장자까지는 아니라도 모두 왕비 세자빈이 낳은 적자들이 왕위를 이었다. 성종은 삼촌 예종의 양자로 입적돼 왕위에 올랐지만, 원래부터 왕위도 그들 몫이었던 의경세자[13]와 세자빈 한씨[14] 사이에서 태어난 세조의 장적손이었다. 당시 예종의 친아들 제안대군도 엄연히 있었다. 3살이었기 때문에 너무나 어려서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적통 문제를 따져들어가면 왕위에 있어서 성종에게 큰 위협이 될 소지는 있었다. 그래서 의경세자를 추존하고 인수대비 예종 비 안순왕후보다 높이는 약간의 억지(?)를 쓰긴 했다. 반정[15]으로 즉위한 세조, 중종 역시 '대군'들이었다.[16] 참고로 적장자 출신 왕은 7명[17] 뿐이고 그 중 연산군, 현종, 숙종을 제외하면 재위기간이 모두 10년 미만이다.

조선 역대 군주 중 경복궁에서 즉위한 마지막 임금이다.[18]

2.2. 즉위

처음부터 선조는 왕이 되기에는 정말 어려운 위치였다. 선조의 부친인 덕흥군 중종의 9남, 그것도 서자이며 선조 자신은 3남이었다. 그리고 그 때까지 조선에는 방계 승통의 사례가 조선 역사상 없었다. 성종의 경우 선대 왕 예종의 조카이기는 하지만 성종은 예종의 형이자 요절한 의경세자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방계승통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자리에 뒤늦게 올랐을 뿐이다.[19]

익선관 건은 명종이 잘하던 놀이였고 으레 체면치레하는 걸 선조가 왕이 된 이후 확대 해석한 것으로 보이며 위의 기록도 애초에 기록 자체가 신빙성이 없는 죽은 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사후에 칭송하기 위한 행장이다. 물론 선조는 명종 승하 2년 전, 을축년 명종이 크게 앓았을 때 왕위 계승의 물망에 오른 왕족 중 하나였지만 물망에 올랐던 왕족 중에는 선조보다 항렬이 높은 왕족들이 있대도 왕의 아랫항렬에서 양자를 뽑기 때문에 원칙상 제외 되며 명종은 한 항렬 아래의 조카들 중에서 후계자를 뽑아야만 했다. 명종이 혼수상태에 빠지다가 말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후 이준경이 만일의 경우 후사를 묻자 명종이 그런 사람 없다고 대답한 일이 실록에 실려있다. 덕흥대원군 문서를 참조하면 덕흥군 부부는 일찍 사망한데다 덕흥군의 외가도 한미한 집안이었기 때문에 문정왕후에게 20년간 시달린 조선 신료들에게 정치적 목적으로 선택된 임금 재목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조선시대에 적서 차별이 있긴 했지만 왕실에선 사대부들과 달리 그렇게 심한 차별이 있진 않았다. 적자가 있으면 당연히 승계할 수 없지만 적자가 없거나 양자로 들이는 건 허용되었기 때문.

즉위 후 나이가 어려서 양모이자 법적으로 모후인 인순왕후 수렴청정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인순왕후는 수렴을 단 1년 만에 그쳤다. 이를 보아 총명하다 할 만 했다. 즉위 초기에는 낭비를 줄이고 쇠락한 훈구파 대신 사림파를 끌어들여 부족한 정통성을 다잡는 한편 명종 치세 때 외척의 전횡이 심했던 내정을 장악하고 조광조의 관례가 된 그간의 폐정을 회복시키려는 제스처를 취했다. 기묘사화 조광조가 밀려난 후 무시되었던 방납의 폐단을 비롯한 각종 사회모순 해결을 위해 민생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정치적으로는 사림 정치 세력들을 상호 견제시켜 정계를 장악했다.

즉위 2년 만인 1569년(선조 2년) 송영종의 예를 들어 아버지 덕흥(君)을 덕흥 대원군(大院君)으로, 어머니 하동군부인은 하동 부대부인으로 추존했다. 그러나 바로 그 송 영종의 예 때문에 아버지를 왕으로 승격시키지는 못했다. 선조는 자신의 덕흥대원군의 제사를 받드는 자신의 맏형 하원군과 그 후손들을 정1품으로 세습하려 했지만 신하들이 그런 예가 없다고 반대하여 무산되었다.[20] 조선 예법상 덕흥군은 이젠 선조에게 종친 숙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명종의 후사로 왕위를 이었으므로 법적이나 종법상 아버지는 명종이었기 때문에 친부모인 덕흥군이나 하동부대부인의 제사상에 한낱 절을 할 수도 없었다.[21] 실록에서 즉위 40년차에 다시 생부에 대한 추숭 떡밥이 여럿 나왔지만 별 논의 없이 무산되기도 한다.

다만 총명하였다고 할지라도 즉위 당시 16세라는 어린 나이로, 그것도 왕위 계승자로서 제대로 된 후계자 수업도 없이 즉위하여 아직 제왕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기에 적극적인 개혁을 추진하기 어려운 면은 분명 있었다. 오랜 기간 왕조가 이어지면서 적지 않은 문제들이 발생한다는 것을 스스로도 인식하였으나 제대로 이를 고치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명종의 후사(後嗣)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척신 집안의 일원인 대비 인순왕후 심씨의 지명을 받아 왕위에 올랐기에 적어도 인순왕후가 살아있는 1575년 전까지는 적극적으로 나설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2.3. 목릉성세(穆陵盛世)

즉위 직후 율곡 이이를 통해 즉위를 반대하던 부패한 척신 심통원[22]을 파직시키는 등 단호한 면모는 보였지만, 사림 붕당이 크게 대두되면서 파당(동인VS서인) 갈등 문제도 새롭게 수면 위로 부각되었다.

무엇보다 사대부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명종 임금 시절 역적으로 몰려 숙청된 윤임을 사면 복권시켰다. 그 이후 윤임의 5남 윤흥신이 무과에 급제해 다대포 첨사가 되었고, 그 윤흥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과 싸우다 부하들과 함께 부산 다대포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이 시기의 치세는 선조의 능인 목릉을 따서 목릉성세(穆陵盛世)[23]라고 일컬어지기도 했다. 사실 목릉성세는 한문학의 융성을 뜻하는 용어로 선조 이후 사림파가 대대적으로 흥기했다는 사실에 바탕해서 나온 표현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해 당대의 정치 백성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반영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선조 치세에 백성들의 삶이 마냥 어지러웠던건 아니었다. 선조 대는 세조가 씨 뿌리고 연산군 중종이 키워놓은 조선 중기의 사회 모순[24]에 대한 보완과 개선 노력이 시작되는 의미있는 시기이다.

2.3.1. 종계변무 기축옥사

1588년(선조 21년) 명나라 측에서 태조 이성계 간신 이인임의 아들로 잘못 기록한 조선 왕실 선원록을 마침내 제대로 고쳤다.[25] 사대를 했던 조선 왕실 성리학 유학계의 너무나 오랜 숙원으로 이른바 '종계변무'[26]라고 한다.

정치 분야에서는 선조의 치세 때 본격적인 당쟁이 시작되어 격렬한 정치투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처음엔 다소 덜 다듬어진 면이 있던 선조도 왕으로서 감각을 기른 중기 이후 상당한 정치적 수완으로 신하들을 편가르고 이용했다. 이러한 선조의 정치적 수완을 볼 수 있는 사건이라면 정철과 합작하여 몰아간 정여립의 난 사건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사건과 여파로 선조는 정언신, 김우옹, 이발, 백유양 정개청, 최영경을 왕의 권력을 위협할 권신이나 국정을 농단하여 나라를 망칠 간신으로 생각하여 죽이거나 쫓아냈다. 그러면서 이 일의 실질적 배후로 까이기는 커녕 오히려 방관하거나 필요에 따라 편을 바꿔 붙는 등의 제스처로 피해자처럼 행세하는 피해자 코스프레의 형태에 놀라운 모습을 볼 수 있다.

참고로 사화라는 딱지가 붙진 않았으나 피해자들은 대부분 동인계 유림이었고 피해 규모는 4대 사화를 합친 것보다 크다. 사실상 선조가 옥사를 주도한 것이라는 견해도 많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정언신, 김우옹, 이발, 백유양, 정개청, 최영경은 왕의 권력을 위협하는 권신과 국정을 어지럽하게 만들어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게 하는 간신으로 누명을 씌어서 억울하게 희생되었다. 결과적으로 선조에게 '복종' 하는 신하들은 많았으나 '충성' 하는 신하들은 드물었으며, 이 점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에 대한 하극상이 일어난 점을 볼 때 선조가 정권 장악에 능했음은 사실이나 그 방식이 결코 건강한 것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선조의 입장에서 본다면 즉위 후 11년에 걸처 '원상제'와 비슷한 형태로 신하들에게 가르침을 받는 과정에서 취약해진 왕권을 강화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술수였고 실제 선조의 입김이 강해지는 결과로 이어졌지만 정치적으로 이러한 방식은 올바른 정치 기술이 아닌 정치 술수 및 공작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가령 기축옥사의 주요 연루 인물이자 호남 사림을 이끌었던 곤재 정개청은 본인이 권신이나 간신이 아니며, 차라리 조정에서 들어와 관리를 생활한 다음 감옥에 가두는 것이 낫다고 결백을 주장했으나 모진 고문으로 끝내 사망했다.

그의 자산서원은 추종자들에 의해 꾸준히 재건되었으나 효종 숙종 때 반대파 서인 측에 의해 지속적으로 훼철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우득록에 따르면 "남쪽 선비 중 곤재를 추종했다 하여 옥에 가둔 자가 50여 명, 귀양 보낸 자가 20여 명, 금고된 자가 400여 명이었다" 며 후폭풍이 굉장했음을 밝히는 내용도 있다. 자산서원의 훼철은 영조 때에도 있었다. 이런 정황을 종합하면 기축옥사는 선조 재위기에 왕권 강화를 위해 선조가 정언신, 김우옹, 이발, 백유양, 정개청, 최영경을 예비 권간(權奸)으로 몰리고 난 뒤에 제거했다. 그래서 이들은 수대가 거듭되고도 서인의 경계대상으로 찍혀 누명이 벗겨지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옥사의 핵심 연루 인물들은 후대에도 괴로움을 겪었다.

옥사를 주도해 정적들을 제거한 정철 등 22명은 평난공신에 올라 권세를 떨쳤지만 송강연보에 따르면 정철은 오래지 않아 세자 책봉(건저 문제)과 관련해 류성룡, 이산해 등과 함께 광해군을 건저하려다가 그 두명은 어느샌가 쏙 빠지고 오히려 정철만 제대로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당한다. 선조는 정철에게 미운 털을 박기 무섭게 입장을 급선회하여 자신이 조정에서 관리로 추천받지 않으면서 권간이라는 이유로 옥사 당시에 희생된 최영경에 대해 "음흉한 성혼과 악독한 정철이 나의 어진 신하를 죽였다" 고 몰아세우기도 했다. 정국도 반전되어 선조 후반기에는 서인이 실각하고 동인이 집권당에 올라섰으며 이들은 서인의 처분 수위를 다루는 과정에서 남북으로 분당된다.

2.4. 임진왜란

많은 유림들이 억울히 피를 흘린 기축옥사로 인해 더 서인 동인 사이에서 치열해진 당쟁이 3년째 진행되던 1592년, 조선 역사상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던 그 임진왜란이 벌어졌다.

전쟁 발발 전 신립에 의해 "왜군이 수전에 강하다"며 "육상전에 주력하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27] 축성을 비롯한 실제 전쟁 대비도 이에 역점을 두어 이루어졌다. 하지만 당초 조정의 예상을 벗어난 너무나 많은 왜군의 대규모 외침에 전면 패주 상황이 계속되었다. 왜군의 북진 소식에도 선조는 이를 자력으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고 신임하는 신립에게 육군 주력을 넘겨 왜군을 잘 격퇴해 쫓아내주리라 기대하고,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본래 신립이 끌고 갈 수 없는 경군 8천여까지 지휘권을 주어서 전장으로 보냈지만 신립의 무모한 지휘[28]로 인해 참패. 수도 한양을 사수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선조는 즉시 몽진[29]을 결정하고, 평안도 영변부에서 광해군에게 임시로 세자로 책봉하고 왕권의 일부 권한을 일부 위임하여 조정의 절반인 분조(分朝) 책임을 회피하고 떠넘기듯 넘겨줬다.

이때 실록은 선조에 대해 아주 시니컬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회의 중에 혼자 사라져서는 점을 치고 있었던 정황이라든가, 한양에서 도망간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종친들에게 "나는 여기서 죽을 것"이라고 말하고 몇 시간 후에 도주를 한다든가, 자기만 강을 건너고는 배를 가라앉혀 자기를 따라오며 고생하던 신하들을 버린다든가 하는 내용들이 마치 슬랩스틱을 곁들인 블랙코미디처럼 묘사된다.

그리고 선조는 부랴부랴 해주목, 개성부 평양부를 거쳐 의주목으로 급하게 몽진길에 오른다. 파천 자체는 고려-거란 전쟁이나 고려-몽골 전쟁 때 고려 왕실처럼 전쟁 수행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합리적인 전쟁 수행을 위해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를 택하며 결국 여요전쟁(거란전쟁)을 승리로 이끈 성군 현종과 달리 선조의 파천은 오늘날까지 두고두고 욕을 대차게 먹고 있다. 그 이유는 당연히 조선의 국토와 만백성을 버리고 자기 안위만 챙기고자 명나라로 튀려고 했다는 것 때문이다.

한양을 떠난 선조는 급기야 조선 자체를 버리고 요동에 망명할 요량으로 튈 계획을 세웠는데(이른바 요동 귀부), 파천 직후인 개성에서부터 윤두수가 요동으로 튀니마니하는 소리( 선조실록 1592년 5월 4일)가 나왔고, 평양에서 나온 후 영변에서는 선조 본인이 대놓고 요동으로 튀겠다고 징징대기 시작하고, " 명나라에 망명하겠다"고 공식 요청을 하는 비열한 모습까지 보이기도 한다(선조실록 1592년 6월 13일).

명나라는 명나라대로 조선군을 통제해야 할 임금이 딴 나라로 튀는 어처구니없는 상황과 너무나 재빠른 선조의 도망 속도 때문에 혹시 조선 일본과 내통해서 명을 치는 게 아닌가 하는 점입가경의 의심을 하게 되고, 이에 수행원을 100명으로 제한하고[30] 압록강의 배를 요동 쪽으로 철수시켜서 거부 의사를 완강히 표했다. 거기에다 신하들의 눈물 머금은 반대[31]에 결국 의주목까지 피난한 선조의 명나라 망명은 일단락되듯 무산되었다. 특히 영변대도호부에서 왕실과 종묘사직과 신주에 대한 모든 권한을 세자였던 아들 광해군에게 떠넘기고 본인은 명나라로 도주하려고 하였기에, '종묘사직과 왕실을 지키기위해 도주하였다'는 명분도 사라지면서, 사실상 한 나라의 왕이자 어버이가 자신의 안전만을 지키기 위하여 백성과 나라, 자식들마저 일신에 버린 것이라는 비판을 크게 받게 되었다. 특히, 그냥 내준 평양성의 함락은 두고두고 왜군에게 전략적 거점을 내어준 실책이 되었고, 명군을 동원하고도 수개월 이상을 소비해야 했다.

거기에 파천 이후 분노한 백성들이 한양에 쳐들어가 발생한 혼란으로 인해 궁궐이 방화되어 손실되었다.[32] 그 외에 백성들이 관청을 습격하고 궁성의 창고가 약탈당했다는 실록 기사가 존재하고. 서애 류성룡의 문헌인 징비록에 따르면 ' 남대문 안 창고'가 약탈, 방화당했다고 한다. 이 와중에도 왕자인 임해군 순화군은 왕족으로서 체면과 자존심을 지키기는커녕 각지에서 온갖 횡포와 민폐만 끼치고 다녔다. 결국 함경도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왜장 가토 기요마사에게 그들을 잡어들어다가 바쳤을 정도.[33] 이쯤 되면 당시 왕실의 평판이 밑바닥까지 실추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치질의 달인인 선조 자신도 당연히 그 후폭풍을 감지하고 있었으며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군사력을 가진 군벌이 지방 정치세력과 결합, 반란군을 일으켜 조선을 멸망시키는 것을 내심 우려했다.[34] 임란 말기에 우려한 대로 1596년엔 종실 출신이 벌인 이몽학의 난이 터졌을 때 굶주림으로 지치고 불만이 많던 백성들이 순식간에 규합해 수천 명으로 세를 불리기까지 하였다. 물론 난민이 속출하고 민심이 불안한 전시라서 가능했던 거고, 흩어지는 속도는 더 빨랐지만 선조를 불안하게 만들기엔 충분했고, 의심병이 매우 심해졌다. 이는 곧 이순신의 각종 고문 백의종군으로 이어진다.

문제는 한창 전쟁 중인데도 이런 숙청을 벌였다는 점과[35] 그 대용으로 뽑은 원균부대 해체능력을 온전히 파악 못했다는 것. 이순신의 대체자로 지정한 원균 삼도수군통제사의 형편없는 지휘로 칠천량 해전에서 참패한 조선 수군이 개초전박살나고 하삼도(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모든 백성들이 몽땅 왜구한테 어육이 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 부분에선 자신도 양심상 찔렸는지, 이순신에게 보낸 교서에서 "자기도 사람인지라 실수를 했고 뭐라 할 말이 없다"고 말할 정도.[36]

따지고 보면 칠천량 해전 대패의 원흉 자체가 선조였다. 안 나가려고 필사적으로 각 잡는 원균에게 "안 나가면 사사로이 자신도 절대 용서 못한다"고 죽일 듯한 협박까지 했기 때문이다.[37] 그러나 사건이 터지고 나서는 하늘이 한 일이라고 둘러댔다. 이에 대한 책임 회피는 전후 논공행상에 이어져 조선 수군을 녹여버린 일본 국가유공자 원균 따위를 억지로 선무일등공신으로 추증시켰으며 이것이 1980년대 원균 옹호론(역사왜곡)의 시발점이 된다. 원균정론으로 원균옹호론을 처음 부각시켰을 때 그 목적은 어디까지나 선조 옹호였으며 원균을 일등공신으로 추증할 때 " 이순신에게 도움을 청한 공이 있다" 라고 했으며 이것은 "도움을 청한 것도 공"→"나는 명나라에 도움을 청했음"→"나도 공이 있다!" 이러한 식으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다는 일부 주장도 있다.

2.5. 후계 문제

임진왜란 발발 후 평안북도 의주까지 몽진하는 와중에 광해군 영변부에서 임시로 세자로 책봉하였고 그에게 분조(分朝)를 맡겨 황폐해진 민심을 달래고 만약을 대비하도록 했다. 사실 장남 임해군이 차남 광해군보다 왕위 계승에서 우선 순위이긴 하지만, 임해군이 취미삼아 백성들을 살해할 정도로 워낙 싸이코패스적 기질의 광패한 망나니인지라 사회적 인식이 나빴고 그로 인해 세자로 책봉되지 못했다. 그런데 세자에게 분조를 맡겨놓고서도 항전 활동 중인 그 세자 때문에 자신이 왕 자리에서 밀려날까 불안감을 가진다. 그래서 아들 광해군을 왕위를 위협하는 정적으로 보았고 임진왜란 중에도 잦은 양위 소동을 벌였으나 당연히 생전 양위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잦은 양위 소동은 세자의 정치적인 위상을 떨어뜨리고자 하는 왕권강화 쇼로 보는 입장이 많다.
사신은 논한다. 상(上)이 200년 조종(祖宗)의 기업(基業)을 당저(當宁)에 이르러서 남김없이 다 멸망시켜 놓고 겸퇴(謙退)하면서 다시는 백성의 윗자리에 군림(軍臨)하지 않고자 하여 하루아침에 병을 이유로 총명(聰明)하고 인효(仁孝)한 후사(後嗣)에게 대위(大位)를 물려주려고 하니, 그 심정은 진실로 서글프나 그 뜻은 매우 아름다운 것이다. 진실로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이러한 결론( 몽진)을 내릴 수 있었겠는가. 대신(大臣)으로서는 눈물을 흘리며 봉행(奉行)하더라도 잘못됨이 없을 것인데 어찌하여 백관(百官)을 인솔하고 끈질기게 설득하고 극력 간쟁(間爭)하여 반드시 승락(承諾)을 받고서야 그만두려 하는가.
(중략)
끊임없이 간쟁(間諍)하여 상(上)의 훌륭했던 생각을 중지시켰으니 매우 애석한 일이다.

선조실록 1593년(선조 26년) 음 9월 7일
요약하자면 "열심히 나라 멸망시키고 갑자기 왕 그만하겠다는데 아주 훌륭한 생각이다. 근데 왜들 시답잖은 핑계로 말렸냐. 말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매우 안타깝다" 라는 뜻이다. 보다보다 열받은 사관의 심정이 드러난다.

잦은 양위 소동에서 드러난 변덕과 견제, 이후 선조와 계비 인목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적자 영창대군의 탄생까지 겹치면서 세자 광해군으로선 아버지와의 사이가 한층 더 껄끄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광해군의 세자 자리가 위협받진 않았다. 조정 당파 중에서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건 소북 그 중에서도 유영경의 탁소북에 국한된다. 나머지 대북, 청소북, 서인, 남인은 모두 광해군을 지지했다. 전란 기간 중 신하들에게 전위 권유를 받았을 정도로 선조의 권위가 취약했던지라 전란을 통해 충분히 능력이 검증된 세자를 교체할 힘이 없었고 나이(20살 이상)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할 명분도 없었다. 선조 승하 당시 영창대군 나이는 겨우 만 2살이다. 게다가 광해군이 서자라는 것도 당시 종법 해석으론 별 문제가 안되었다. 왜냐하면 이미 16세기에 이미 사대부 사이에서도 적자가 태어나 양자를 파양하고자 하는 소송은 기각하는 판례가 형성되었고[38] 왕가의 법도대로 광해군이 서자이건 차자이건 정식 세자로 옹립된 이상 군신명분이 세워져서 영창대군은 태어난 순간 신하가 되기 때문에 한번 세워진 명분을 뒤집을 수 없다는게 그 당시 성리학 종법 제도로 왕가는 물론 사대부들 사이에서도 널리 받아졌기 때문이다. 설사 아무리 정통성이 있다고 한들 군국 대사를 처리해야 할 군주 2살짜리를 옹립하는것은 선조나 인목왕후는 물론 유영경의 소북에서도 불가능한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문제삼은 살제에서 폐모로 이어지는 일련의 비극은 어디까지나 광해군이 지고 가야할 책임이자 숙명이다.

결국 이런 양위 소동에 제대로 열받은 대북파의 거두 정인홍은 선조에게 양위 소동을 두고 유영경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는데, 양위 소동의 주범이 누구인지를 생각해보면 사실상 선조를 의도적으로 돌려까는 상소다. 이 상소를 읽은 선조는 빡쳐서 정인홍을 귀양보낸다. 결국 선조는 양위 소동은 권력 유지를 위해서 세자의 지위까지 흔들어가면서 벌인 쇼라는 것을 선조가 직접 인증해버렸다.

음모론 중에는 위험을 느낀 광해군이 아버지를 독살했다는 설도 있다. 계축일기 등에 등장한 이른바 "찹쌀밥 독살설". 간신히 몸을 회복하던 선조가 찹쌀밥을 먹고 그날 바로 승하했기 때문이다. 이런 음모론 때문에 당시 어의자 국왕 주치의였던 허준까지도 졸지에 국왕 살해범으로 왜곡되기도 했지만 이런 모함에 낚이지는 말자. 당대에 이미 헛소리 취급받고 있었다. 당장 광해군을 쫓아낸 인조반정 세력도 이 주장은 믿지 않았다. 그야말로 "찹살 떡밥거리" 정도이다.

선조가 때때로 영창대군 세자로 바꿔볼까 잠깐 방황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왕조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왕과 왕세자의 갈등 구도의 연장선이었고 나이 차이 때문에 실질적으로 불가능했다. 실제로 선조는 죽기 며칠 전에 장성한 광해군을 정식 후계자로 인정한다는 교지까지 완성해 영의정 유영경에게 건넸으나, 유영경은 이를 자신의 집에 몰래 빼돌린 채 선조가 입장을 번복해주길 빌며 시간을 끌다가 끝내 적발당했다. 결국 대역죄로 참수형에 처해진다.

2.6. 대여진 정책(여진 정벌)

"선조 대왕께오선 북로(北虜, 여진족)에 대처함은 명석하고 뛰어났으나, 남왜(南倭, 일본)를 대처함은 명석하지 못했다."

선조의 대표적 치적 중 가장 많이 간과되고 있는 치적이다.

선조대는 여진족 내부의 정치적·사회적 변동으로 인해 대규모 침입이 잦아졌고, 이에 대응하여 여진 정벌도 마지막으로 빈번히 이루어진 시대였다. 특히 조선의 지배로부터 이탈하여 반란을 일으킨 번호에 대한 응징이 주된 목표가 되었다. 1583년(선조 16년)에는 함경북도 경원부(慶源府)의 니탕개(尼湯介) 등이 2~3만 명이 넘는 대군을 일으켜 경원부와 아산보(阿山堡)를 함락시키는 니탕개의 난이 일어나 6진이 위협을 받게 되자, 조정에서는 현지에 증원군을 파견하여 이를 격퇴시켰다. 그러나 이는 정벌이라기보다는 본질적으로는 방어전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약 10년 전에 발생한 이 니탕개의 난 신립을 보내 효과적으로 막아냈다. 방어에 성공한 선조는 북병사 이제신과 장수들을 보내 금득탄 등 여진족 소굴 700여 개를 무자비하게 초토화시켰다.

1587년(선조 20)에는 녹둔도(鹿屯島)에 설치한 둔전을 여진족이 습격하여 국경을 지키는 조선의 국경수비병을 죽이고 백성들을 포로로 납치해 끌고 가는 사태가 빚어졌다. 이렇게 여진족들이 기습적으로 녹둔도를 습격하여 조선인 10여 명을 살해하자, 선조는 2천 5백여 명의 경장사와 토병 군대 등을 보내 여진족 수급(머리) 380여 급을 베고, 여진족 산채 200여 채를 불태웠던 적이 있었다.

녹둔도 침공에 대한 당시 선조의 대응을 자세히 설명하자면 당시 조선은 이에 대한 응징·보복을 위해 북방병마절도사 이일(李鎰)은 11월에 우후(虞侯) 김우추(金遇秋)에게 400여 기를 주어 강을 건너 추도(楸島)의 여진족을 치게 하여, 33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으며, 이어서 이듬해인 1588년(선조 21)에는 본격적으로 녹둔도를 공격한 여진족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져, 1월 14일 함경도의 토병(土兵) 및 경장사(京將士) 2,500여 명이 두만강을 건너 시전부락(時錢部落)을 향해 진격, 15일에 장막 200여 채를 태우고 380명의 목을 베는 등의 큰 전과를 거두었다.

특기할 만한 사항이 있다면 바로 왜란 뒤의 여진족 정벌이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혼란스러운 조선의 상황을 틈타 노략질을 감행했던 여진족[39], 임진왜란이 끝나자 본격적으로 그 세가 강성해지기 시작하더니 임란 후의 혼란한 조선의 국내정세와 맞물려 본격적으로 국경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그 탓에 여진 정벌은 임진왜란으로 큰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도 곧바로 이루어졌다. 임진왜란 당시 일부 여진족들은 조선이 약체화된 틈을 타서 함경도의 변경을 수차례 공격하고 약탈하였는데, 특히 두만강 건너의 여진족 추장 이라대(伊羅大)·역수(易水) 등은 먼 곳에 사는 홀라온과 연결하여 조선의 변경을 활발히 침공했다. 이에 대해 함경북도병마절도사(咸鏡北道兵馬節度使) 정현룡(鄭見龍)은 군사 1,325명, 항왜(降倭) 25명을 동원하여 역수의 부락을 공격, 266명의 수급을 베었고, 투정내(投丁乃) 등이 추장으로 있는 두만강변의 부락도 공격하여 60명의 수급을 베었다.

함경도 지역에 이렇게 빈번한 여진 정벌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으로 인해 변경의 수비가 약화된 상황에서는 번호의 이탈 및 여진족의 침입을 완전히 근절하기 어려웠다. 특히나 그 중에서도 무산(茂山) 부근에 있던 노토(老土)의 부락은 1598년(선조 31년)경부터 조선의 변경을 위협하기 시작하였고, 분노한 선조와 조정은 이들을 토벌할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그 즈음에 1599년(선조 32년) 함경감사 윤승훈(尹承勳)이 노토 정벌의 의견을 15개항으로 정리해 올리자, 선조는 이에 대해 크게 칭찬하며 전폭적인 지지를 천명하게 된다. 사헌부가 2차례에 걸쳐 반대 의견을 개진했으나, 선조는 듣지 않고 자신을 지지하는 신하들과 함께 노토 토벌에 대한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1600년(선조 33년) 4월 14일 병사(兵使) 이수일(李守一)[40]이 이끄는 5천 명의 기병을 중심으로 한 조선 정벌군이 출병하여 명천현감(明川縣監) 이괄(李适)· 회령부사(會寧府使) 조경(趙儆)· 길주목사(吉州牧使) 양집(梁諿)이 각각 부대를 이끌고 좌위, 중위, 우위의 3로로 나누어 진격했다. 여기서 조선군은 가옥 1천여 채를 불태우고 적 110명을 참수했다. 이번 원정에서 조선군 전사자는 7명에 불과했다. 여진족이 철저하게 다시 일어서지 못하도록 가옥을 모두 불태우고, 잘 타지 않은 가옥들은 도끼로 때려부쉈다. 산위(야산)로 도망간 여진족은 위에서 바라만 보고 울부짖었고, 여진족이 파묻은 곡식까지 쌍그리 다 파내어 불태웠으며, 밭에 심은 곡식은 모조리 짓밟고 곳곳에 방화를 저질렀다. 이수일은 후에 올린 장계에서 '매우 장쾌(壯快)했다'라고 평했다. 이를 통해 아주 오랜만에 대규모 여진족 집단에 큰 타격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함경도 지역의 여진족들이 다시금 조선에 투항하고 복속하도록 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진족의 정세는 조선이 정벌로써 통제하기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누르하치에 의한 여진족 통일 전쟁이 격화되면서, 그 여파가 조선에 미치게 된 것이다. 1600년대 초반 누르하치 및 그와 적대하는 홀라온 양쪽은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조선의 번호를 끌고 가고자 했는데, 이 중 홀라온은 더 나아가 1603년(선조 36년) 조선의 변경을 직접 군사적으로 습격하였고, 1605년(선조 38년) 3월에는 동관진(潼關鎭)을 함락시키기까지 했다. 동관진을 약탈한 여진 홀라온의 본대는 본거지로 퇴각하였으나, 300여 기는 건가퇴(件加退)에 남아 있었고, 원래 있던 1천여 명의 여진족과 함께 조선의 북변에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이들을 징벌하기 위해 북병사 김종득(金宗得)은 현지의 병력을 징집하여 4월에 1차로 이항(伊項)과 우허(牛虛) 부락을 공격하여 80여 명을 죽였고, 5월에 2차로 함경도의 포수·사수(射手) 3천 명과 번호 탁두(卓斗)가 거느린 여진족 기병 3백 기를 이끌고 건가퇴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하였다. 그러나 여진족 기병과의 접전에서 위기에 몰려, 우후 성우길(成佑吉)의 활약으로 적 50여 명을 죽이고 간신히 후퇴에 성공하였으나 정군(正軍)으로서 전사한 자만 213명이라는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이로 인해 함경감사 서성(徐渻)이 파직되고 김종득은 유배되는 등 처벌을 받았다.

이후 1607년(선조 40년) 누르하치가 홀라온 세력을 격퇴한 이후 두만강 유역에 거주하는 상당수의 여진족을 자신의 본거지로 이주시킴으로써, 조선은 울타리가 되어주던 번호를 상실한 채로 강대해진 후금 누르하치 세력을 상대하게 되었다. 물론 선조는 이후에도 대규모의 병력을 다시 일으키려 하였으나 그 뒤로는 움직임이 없었고, 그렇게 조선의 울타리가 되어주던 복속 여진족인 번호(藩胡)들은 누르하치에게 완전히 흡수되어 이후 여진족을 정벌하는 것이 아닌 방어해야 하는 어려운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2.7. 목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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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경내에 있는 목릉(穆陵). 원래는 의인왕후 박씨의 능역이었다가 선조도 이 곳으로 이장[41]된 것이다.

의인왕후의 능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의인왕후의 장지를 찾던 도중 지관이 현대의 경기도 용인에 있는 명당을 꼽았다. 하지만 그 곳에는 사대부들이 특히 존경하던 인물인 포은 정몽주의 무덤이 있는 곳이었다. 선조도 차마 이 곳에 의인왕후의 무덤을 쓰지 못하고 동구릉(東九陵) 경내에 모셨다는 야사이다. 계비 인목왕후 김씨도 죽어 여기 묻힘으로써 동역이강릉의 형태로 묻혀 있는데, 1986년부터 비공개 능역이었지만 2006년 비공개가 완전 해제되어 관람 가능하게 되었다. 다른 동구릉의 능들은 능침 앞까지 올라가 볼 수 없고 왕릉 언덕 밑의 정자각 쪽에서 구경해야 하지만 선조의 목릉은 동구릉의 능들 중에서 유일하게 능침 앞까지 올라갈 수 있는 능이였다. 2015년에 변경되어서 선조와 의인왕후의 능은 능침 앞까지 못 올라가게 막아 놓았고 유일하게 올라갈 수 있는 능은 인목왕후의 능 뿐이다.

목릉 능역 안으로 들어가면 능이 3개가 있는데 선조의 능은 능역 홍살문 기준으로 맨 왼쪽에 위치하고 있다. 선조 능 뒤편에 의인왕후의 능이 있고 맨 오른쪽이 인목왕후의 능이다. 위 사진에서는 왼쪽에 있는게 선조의 능이고 오른쪽에 있는 게 의인왕후의 능이다. 그런데 목릉의 석물들은 조선 왕릉 중 최악의 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하는데 목릉이 조성된 인조 병자호란으로 경제가 피폐해진 데다가 우수한 석공들을 구할 수 없어서 이렇게 된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다른 왕릉들과 비교해보면 목릉의 석물들은 크기만 컸지 다른 능들의 석물보다 균형이나 조형미 같은게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목릉의 석물에서는 총탄 자국도 볼 수 있으며 이는 한국전쟁 때의 흔적이라고 하는데 살아서도 전란을 겪었는데 죽어서도 끝내 전란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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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라는 초유의 국난 때문에 전란기와 평상시의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왕이다. 통치(내정) 면에서 보면 선조의 시절부터 주목할 만한 정책들이 많이 만들어졌고 후대로 이어졌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드러난 국가 지도자로서의 결격 사유 때문에 전반적인 여론은 긍정적이지 못하다. 특히 파천으로 대표 되는 무책임한 면모와 이순신 해임 등 전시의 무능에서는 대중의 이미지는 최악이라고 해도 좋다.

긍정적인 면모로는 정말 내치에서 유능한 왕이었다는데 있다. 조선은 초기 이후로 여러가지 국가 체제의 모순이 쌓여서 다양한 병폐가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었고, 선조는 이러한 병폐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다. 대동법의 프로토 타입인 대공수미법[42] 등 많은 개혁안과 국가 경영을 개선하기 위한 수많은 방향책을 남겼다. 선조의 정책 비전과 유능한 인재를 알아보는 상당히 뛰어났으며 실제로 그 인재들은 다방면에서 많은 공로를 남겼다.[43] 군사와 첩보에서도 많은 인재들을 긁어모아서 후대인 광해군, 인조 때까지도 그나마 쓸만한 실무자들은 선조가 직접 발탁해둔 케이스일 정도로 인재의 등용과 배치에 있어서 유능했다.

몇몇 미디어에서 "선조는 성리학 카르텔의 수장이었으므로 좋은 기록을 받았다", "전시 대비에 무능하고 게을렀다"는 식으로 평가하는 것과는 달리 오히려 선조는 대의명분이나 유교적인 허례허식 따위를 냉소적으로 보며 제멋대로 정치를 했다. 그러나 그 방식이 합리적이었기 때문에 신하들도 따를 수 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선조는 유교 국가의 허례허식과 권신들에게 휘둘리지 않으면서 당대의 비효율적인 모순들을 정비하는 유능한 경영자에 가까웠다. 즉, 왜란기를 제외하면 선조의 이기적인 인격은 중흥을 준비하는 합리적인 통치라는 의외의 모습으로 발휘되었다.[44]

그러나 전쟁 중의 선조의 평가는 국가 지도자로서 결격 수준이며, 가히 최악이다. 선조는 왜군이 파죽지세로 진격하자 쉬지 않고 북으로 몽진, 의주에 이르러서는 타국으로 도주하면서 어린 아들에게 선위할 듯이 하다가, 전쟁이 끝나자 돌아와서 실권을 잡았다.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서도 선위 파동을 통해 왕권 강화를 꾀했을 정도로 두뇌 회전이 너무 빠르고 가히 음험했다.

전술하듯 안정적인 시대에는 유교 같은 도덕 원칙을 벗어나 국가 경영에 대한 엄청난 통찰력을 보였지만 국가 파멸의 위험 속에서는 도덕적인 책임감이 일절 없었다. 한 마디로 국왕임에도 국가를 손절해버렸다(...) 선조가 전시 암군으로 일컬어지는 까닭은 이 탓이다. 덤으로 명신, 명장들이 세력을 키운다 싶으면 여지없이 숙청했다. 조선을 탈출하여 요동에서 새로운 정권을 만들고 전쟁이 끝나면 다시 돌아와 통치하겠다는 발상을 하여 조선, 명나라, 일본을 모두 당혹시켰다.

선조는 능력이 없어서 혐오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똑똑하고 계산적인 기업가 같은 영악한 인물이기 때문에 혐오 받는 왕이다.[45] 전술하듯 선조의 이기적이지만 유능했던 특성 때문에 유교의 이데올로기가 많이 약해진 현대 사회에서 태어났더라도 사업가/경영자로서는 크게 성공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도 정치 지도자로 결격이란 점은 변하지 않아서, 이완용의 조선 왕 버전 혹은 휠체어를 타고 정치쇼를 하는 CEO 국가원수까지 올라버린 격이라고 을 먹는다. 선조은 혐오받는 과정은 왜곡과 오해가 가득할지 모르나, 그러한 왜곡과 오해가 없어도 국가의 지도자로서 긍정적으로 평가해주는 것은 어렵고 더 나아가서는 부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총평하면 선조는 능력과 두뇌가 특출나고 도덕성이 낮은 만큼 각종 허례허식과 대의명분에는 휘둘리지 않고 합리적인 통치를 했지만 군주로서의 책임감이 낮아 국가적 위기에서 백성을 포기하고 극단적 "합리성"을 추종하는 ' CEO 같은 마인드'를 갖춘 국가 지도자였다. 선조는 조선 왕 중에서도 손에 꼽힐만큼 똑똑했고 평소에는 밀덕후로서 좋은 평가를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진짜 국가적 위기에는 지나칠 정도의 명석함이 국가와 백성을 손절(...)하는 이기성으로 국가 멸망 직전에 몰아넣었다.

그럼에도 선조는 결코 유치하기 짝이 없는 선악 구도로 해석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다. 선조의 능수능란한 판단력은 본인의 권력이 확고할 때는 분명 실력을 발휘했다. 선조는 즉위기간 대략 40여년 중에서 임진왜란 6년을 제외하고도 전쟁 앞뒤의 34년 동안 유능한 통치자였으며, 임진왜란 이후에도 국가를 재건하려 노력했으며 재위 후반기에도 죽는 순간까지 온갖 군사 정책과 첩보망 형성, 농경과 국가 부흥 등 조선 전기의 산업적인 모순을 개선하기 위한 비전을 물려주었다.

책임감이 부족하고 이기주의 성향을 지닌 지도자들이 대개 그렇듯이 자식들에게 그러한 장점이 계승되지 못했는데, 자식들이 하나 같이 그 모양이 된 데에는 아버지인 선조의 탓이 없다고 보기 힘들다.[46] 국가의 지도자로서 선조가 무척 유능하되 대국적이지 못한, 정확히 말하면 사악한 면모를 보인 왕의 사례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다.[47]

4. 가족관계

선조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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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순번 작호 생몰기간 모후 비고
<colcolor=#ffd400> 1남 <colcolor=#b82647,#d94767><colbgcolor=#fff> 임해군
臨海君
<colbgcolor=#fff><colcolor=#000> 진
<colbgcolor=#fff><colcolor=#000> 1572년 ~ 1609년 <colbgcolor=#fff><colcolor=#000> 공빈 김씨 <colbgcolor=#fff>
2남 광해군
光海君

1575년 ~ 1641년 15대 국왕
3남 의안군
義安君

1577년 ~ 1588년 인빈 김씨
4남 신성군
信城君

1578년 ~ 1592년
5남 정원군
定遠君

1580년 ~ 1619년 추존 국왕
- 왕자 ~ 1603년
6남 순화군
順和君

𤣰
1580년 ~ 1607년 순빈 김씨
7남 인성군
仁城君

1588년 ~ 1628년 정빈 민씨
8남 의창군
義昌君

1589년 ~ 1645년 인빈 김씨
9남 경창군
慶昌君

1596년 ~ 1644년 정빈 홍씨
10남 흥안군
興安君

1598년 ~ 1624년 온빈 한씨
11남 경평군
慶平君

1600년 ~ 1673년
12남 인흥군
仁興君

1604년 ~ 1651년 정빈 민씨
13남 영창대군
永昌大君

1606년 ~ 1614년 인목왕후
14남 영성군
寧城君

1606년 ~ 1649년 온빈 한씨 }}}}}}}}}

자식이 10명을 넘겼던 왕 중 하나로 이후에는 인조(6남 1녀), 효종(1남 7녀), 현종(1남 3녀), 숙종(6남 2녀)[53]을 거쳐[54] 영조 때가 되어서야 2남 12녀로 10명 이상의 자녀를 둔 왕이 나온다.[55]

5. 기타

  • 선조 재위 시기에 민간에서의 조보(朝報) 인쇄를 금지하기도 했다. # 조보란 오늘날의 관보와 같은 것으로 왕의 하교 등 조정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이다. 인쇄가 아니라 필사를 시켜 한성부윤(정 2품의 고위직, 현재의 서울시장) 이상 고위 관리 몇몇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시 민간에서 활자 인쇄해 배포하였는바 금지한 것.
  • 실록에 따르면 선조는 직접 신무기를 만들어 류성룡에게 베타테스트를 권하기도 했다.

    상(上)이 류성룡에게 전교(傳敎)하였다.

    조총(鳥銃)은 천하에 신기한 무기인데 다만 화약을 장전[56]하기가 쉽지 않아서 혹시라도 선(線)이 끊어지면 적의 화살에 맞아 죽게 될 것이다. 과인이 이를 염려하다가 우연히 이런 총을 만들었는데, 한 사람은 조종하여 쏘고 한 사람은 화약을 장전하여 돌려가면서 다시 넣는다면 탄환이 한없이 나가게 될 것이다. 다만 처음 만든 것이라 제작이 정교하지는 못하다. 지금 경(卿)에게 보내니 비치해 놓고 한번 웃기 바란다.”

    【사관 : 옛부터 중흥(中興)한 임금들은 영웅(英雄)을 맞아 들이는 것과 민심을 기쁘게 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겼고 무기를 정교하게 갖추기에는 구구히 마음쓰지 않았다. 조총(鳥銃)이 적을 막는데 관계가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임금 자신이 무기의 공졸(工拙)을 논하게 된다면 도리의 본말(本末)에 어두운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천하에 위엄을 보이는 것은 병혁(兵革)으로 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오늘의 급무(急務)는 진실로 여기에 있지 않은데도 대신이 임금의 뜻에 아첨하여 그대로 순응하느라 묵묵히 한마디 말도 없었으니 통탄(痛歎)스럽구나. 】

    ㅡ 《조선왕조실록》 선조 26년 ( 1593년 11월 12일) 원문

    기록이 저것이 전부라 선조가 만든 총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부사수가 돌려가며 장전한다는 언급으로는 리볼버 개틀링의 원리로 작동하는 공용화기로 추측된다. 이 와중에 사관은 임금이 전시에 직접 무기를 만들고 살펴보는 걸 왕이 쓸데없이 공졸을 논한다며 까고 류성룡도 세트로 깠다. 전쟁 발발 전에도 국방 강화에 힘을 쏟은 것을 보면 군과 국방에 상당히 관심이 많았던 듯 보인다.
  • 선조는 인물 욕심이 많았다. 과거 시험이 아니라 추천이나 평판 등을 누군가에게 듣고서 꼭 곁으로 불러 관직을 줬다. 중종- 인종- 명종 대를 지나면서 훈구파가 퇴조하고 사림파가 득세를 하게 됐는데, 선조는 사화(士禍)를 당하고 역적 취급을 받은 선비들을 죄다 사면하고 그 후손들 중 뽑을 만한 자를 가렸다.[57] 덕분에 선조 대와 임진왜란 때 이름을 떨친 선비들이 현재도 많이 조명되고 있다. 아울러 자연에 은둔해서 도를 닦는 사람들(산림 세력)까지 학행으로 천거를 받아서 현감직이라도 꼭 내렸다고. 반면 비리를 저질러 탄핵된 인사들은 여지없이 끝까지 쫓아내 벌을 줬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처럼 끊임없이 많은 인재들을 발탁하고 돌아가며 등용하고 갈아치워 권력이 한 곳에 집중하는 일을 막았다고 평가했다.
  • 조선시대 대부분의 왕이 그랬지만 선조는 그 중에서도 유난히 피로 스트레스를 받은 듯 하다. 애초에 태어날때부터 몸이 허약했다고 하니... 실제로 왜란 전에도 이명 소화불량, 심질[58]에 시달린다고 스스로 인정할 정도였을 지경. 특히 왜란 이후에는 정신적으로 충격을 크게 받아 온갖 병이 도져 도저히 못하겠다며 광해군에게 계속 양위하려 하였다. 물론 이를 당대나 지금이나 왕권강화를 위한 선위파동 쇼라고 보기도 하나 극심한 정신병으로 실제로 양위하려 했던 걸로 보는 의견도 없지는 않다. 그의 아들들이 대부분 성격이 거칠고 모난지라 특유의 기질이 유전된 것일지도 모른다. 임해군도 난폭함과 더불어 우울증이 있었다고 한다.
  • 파일:선조.jpg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첫째아들 임해군을 수행해 피난했던 윤탁연의 후손들이 이것을 선조의 어진이라 주장했는데, 후손들은 이 어진을 윤탁연의 『중호관북일기』와 함께 대대로 보존해 왔다고 하지만, 감정사들은 ①전복 차림이 측면의 자세이고 ②좋은 필치가 못 되며 ③아무 기록이 없는 점을 들어 선조의 어진으로 봐야 할 근거가 희박한 것으로 보고 있다. 관련 기사 만약 이 그림이 진짜 선조의 어진이라면 광해군의 얼굴을 유추해볼 수 있는 자료이다.
  • 파일:1610636a2e221d3ed.jpg
그리고 원본은 아니고 누군가 모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선조 어진으로 추정되는 어진이 이베이에 떴었다. 현재는 판매된 상태이고 이 어진은 선조라고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아무런 기록이 없어 진짜 선조의 모습을 보고 그렸을 가능성은 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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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는 속리산 법주사에 있는 오언절구 중 첫 수로 '담장 가의 매화 한 가지가 / 추위에도 능히 홀로 피었네 / 멀리서도 눈송이가 아님을 알겠으니 / 은은한 향기가 나오고 있음이어라.'(墻角一枝梅 凌寒獨自開 遙知非是雪 爲有暗香來)라고 쓴 것이다. 아래는 여동생 정안옹주의 병을 걱정하며 편지를 보낸 딸 정숙옹주에게 보낸 답장으로 언문 편지다. 만력 31년 계묘 복월 사시라 적혀 있는 것을 번역하면 복월(復月)은 음력 11월을 뜻하고 사시(巳時)는 대략 오전 9시 반~11시경이므로 1603년 11월 19일 오전에 쓴 편지. 전문 현대어 해석은 #을 참조. 선왕들과 마찬가지로 선조는 글씨(서예)와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고 평가된다. 특히 글씨는 명나라 장군들이 얻고 싶어할 정도로 뛰어났으며 당대의 명필인 한석봉의 글씨에 대해서도 "한석봉이는 액자(額字)가 비록 훌륭하지만 초서와 해서는 부족하다."라고 평가했을 정도로[65] 자신의 글씨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던 모양. 실제로도 조선 역대 국왕 중 명필의 하나로 꼽히며 후대 왕들의 서체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하는데[66] 지금까지도 그의 친필은 곳곳에 많이 남아 있다. 계비 인목왕후와 유일한 적녀(嫡女) 정명공주도 명필로 유명했다.
  • 은근히 삼국지연의에 관심이 많았다. 즉위 초 삼국지 내용을 언급하다가 기대승에게 까인 것은 유명한 일화인데 주변에서 들었다고 핑계를 대긴 했지만 잠저가 되었든 궁중이 되었든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연의의 내용을 어린시절부터 접한 것은 확실하기에 한국 최초의 삼국지덕후들 중의 한 명으로 추정된다. 선조 2년(1569년) 기사 그 외 선조 38년인 1605년엔 선조가 향시 과거에 ' 제갈량 관우를 구하지 않았다'는 주제를 냈는데 '제갈량이 관우를 죽이려고 일부러 그랬다'라고 쓴 합격자를 보고 '이건 무슨 개소리냐?'라고 합격을 취소시키기도 했다. 선조 38년(1605년) 기사, 또 자치통감강목(제왕교육)을 공부하면서 왠만한 촉빠들도 실드치기 어려운 유비 유장 통수를 가지고도 "유비는 호걸일 뿐 아니라 사실 인자한 사람이었다. 유장에 대한 처리를 보면 그의 선(善)함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작은 악이라 하여 행하지 말고 작은 선이라 하여 행하지 아니하지 말라.'는 말은 삼대(三代) 이후에 없었던 말이다.","'사자(嗣子)가 하잘것 없다면 그대가 스스로 차지하라.'하였으니, 이 어찌 천하를 공공물로 여기는 마음이 아니겠으며 제갈량이 아니면 어찌 그 말을 들을 수 있었겠는가."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선조 21년(1588년) 기사 사실 본인이 원하지는 않았다지만 임진왜란 때 관우 신앙을 처음 받아들인 왕이기도 했고 왜란 직후 나온 소설 임진록에서는 장비의 환생 취급을 받기도 했으니 여러모로 삼국지와 촉한과는 인연이 많은 왕이긴 했다. 그래서 일각에선 사실 진성 촉빠라는 얘기를 듣기도 한다. 위에서 나온 일화 정리.
  • 조선 역대 임금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모진 풍파를 겪은 임금이다. 정여립의 난, 이몽학의 난 등 반란이 계속 일어난 데다가 조선 역사상 최고로 큰 전쟁인 임진왜란까지 겪었다. 선조의 입장에서 보면 왜 하필 나냐고!라며 고함을 지를만할 정도로 고생을 엄청나게 했다. 이 풍파는 선조가 죽어서까지 병자호란으로 이어지게 된다.

6. 대중매체에서

6.1. 소설

  • 이우혁의 소설 < 왜란종결자>에서는 임진왜란기 당시 선조의 부정적인 행동들을 놓고 선조의 몸에 마수가 처박혔다는 판타지적 해석을 소재삼아 이야기를 진행하였다. 사실 원균도 같은 케이스로 설정되었다.[67]
  • 김성한의 소설 < 7년전쟁>에 등장하며 특유의 찌질함이 잘 묘사되었다. 정여립의 난 에피소드 때 우의정 이양원이 이발의 팔십 노모를 제대로 고문하지 않고 보고를 올리는데 이 때 이양원을 갈구는 모습은 가히 인상적. 임진왜란 발발 후부터는 말할 것도 없다.
  • 김훈의 소설 < 칼의 노래>에서는 무능하고 잔혹하게 표현되는 "칼로 벨 수 없는" 권력의 정점에서 정치로 전쟁을 수행하며 유능한 지휘관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악인으로 표현된다.
  • 대체역사소설 < 명군이 되어보세!>에서는 현실 역사와 달리 왕이 되지 않았고[68] 하성군으로 남았다. 주색잡기를 비롯한 비행으로 악명은 자자하나 주인공의 명으로 볼모로 가게 된 일본에서는 스파이 활동을 충실히 수행하여 나라에 큰 도움을 주기도 한다. 허나 경인왜란이 벌어지자 그의 가솔들 중 상당수가 순왜가 되고 아들인 임해군 오다 노부나가에게 포섭당해 왕을 참칭하는 바람에 의금부에 투옥되는 고생까지 하게 된다.[69] 그래도 스파이 활동의 공이 커서 죽음은 면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 연해주로 전가사변된 뒤 아들들과 첩들까지 모두 잃게 되고 남은 유일한 아들 광해군 유럽으로 떠나면서 비참한 삶을 살고 있다. 작중에서 광해군은 가톨릭에 귀의한 후에 사제 서품을 받고 신부가 되면서 선조의 대가 끊겨버리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 대체역사소설 < 선조 삼국지 헌제가 되다>에서는 삼국지 헌제로 빙의한다. 그리고 여기서는 월드클래스 혐성이 무엇인지 다 보여주며 조조에게 엿이란 엿은 다 먹이고 있다. 그리고 선조의 혐성의 최대 피해자는 당연히 조조.

6.2. 만화

파일:attachment/fat_seonjo.png
  • 온리 콤판의 만화 < YI SOON SHIN>에서는 무능찌질한 임금 이미지를 극대화하여 짜리몽땅하고 비만한 왕으로 나오는데 실제로 선조가 뚱뚱했다는 기록은 없다.[70]
  • 웹툰 < 호랭총각>에 나오는 왕의 모델이 선조가 아니냐는 의견도 있는데 그 이유는 아무래도 호랭총각의 배경이 임진왜란 직전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의 시대가 명나라인 점이 크다. 선조 이후의 중국은 청나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 통신사 설정이라든가 박문수가 작중에 등장하는 등 호랭총각은 작가의 말 그대로 '조선시대 비슷한 시대' 정도로 보는 것이 맞다. 즉, 나대용이 나온다는 사실만으로 그 시대의 왕인 선조로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왜구네이터 편에서 나대용이 이순신의 부하 나대용과 동일 인물이며 시대도 임진왜란 직전임이 밝혀져 사실상 선조가 맞다는 것이 드러났다.
  • 웹툰 < 오성X한음>에서 등장해 명군처럼 보였으나 역시 두 얼굴의 왕이었다. # 율곡 이이에게 일부러 스트레스를 줘서 죽게 만들었고 정여립을 예의 주시하면서 한바탕 피바람을 예고하는 등 인식이 좋지 않았는데 결국에는 정철을 배후에서 조정해 기축옥사를 일으켜 왕권을 강화시키는데는 성공했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오성과 한음에게 울면서 살려달라 통곡하는 등 찌질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6.3. 게임

  • < 임진록 2> 오리지날 캠페인에서 유일한 캠페인 전용 등장 인물로 등장한다. 완전한 픽션을 다룬 확장팩과 달리 그나마 현실의 임진왜란 사건을 어느 정도 재현한 <임진록 2>의 캠페인에서 등장하는 빈도가 높은 편이며 전용 초상화도 있지만 이순신이나 권율처럼 자신이 직접 싸우는 장수 유닛이 아닌 '선조의 어가'라는 이동 밖에 할 수 없는 유닛으로 딱 1번 등장한다. 확장팩에서는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 < 토탈 워: 쇼군2>의 임진왜란 모드인 Morning Sun에서 조선 국왕으로 등장하며 후계자로 광해군을 두고 있다. 전투에서 장군 호위대와 함께 말을 타고 전투에 참여할 수 있고 플레이어의 플레이에 따라 능력 6성에 명예수치 만땅을 찍는 명군이 될 수도 있다.

6.4. 영화

6.5. 드라마

40년 8개월이라는 긴 재위 기간을 자랑하는데다가 재위 기간 중 동서분당, 기축옥사, 임진왜란 등 굵직굵직한 사건과 관련이 있는 군주라서 드라마에도 자주 등장하는 왕이다. 드라마에서 등장할 때는 대체로 전란과 당쟁 속에서 허둥대는 무능한 군주로 묘사되는 경향이 강한 편이나 광해군이나 이순신과 관련한 드라마에 등장하면 이들을 의심하는 모습이 많이 드러나며 악역을 많이 맡는다. 2000년대 중후반 이후 드라마에서는 무능하거나 허둥대는 이미지는 거의 사라졌고 오히려 왕권 강화나 전란 중 왕권 유지에 혈안이 된 소심해 보이면서도 정치판에서는 음험한 군주의 모습이 부각되어 묘사되는 경향이 커진 편이다. 2000년대 이전 드라마와 이후 드라마에 등장하는 선조들을 비교해보면 묘사가 다른걸 볼 수 있어서 비교해보는 재미도 있다.
  • 1995년 KBS 드라마 《 서궁》에서는 배우 김성옥이 연기했다.
  • 1999년 MBC 드라마 《 허준》에서는 배우 박찬환[72]이 연기했다. 사람 좋은 임금님으로 묘사되어서 사극 매니아나 역덕후들이 충격에 빠지기도 했다.[73] 주인공 허준 편에 서서 허준을 지원해주고 임진왜란 때는 분조를 이끄던 광해군을 걱정하는 인자한 성군으로 그려졌다. 다만 광해군과의 사이가 돈독하게 나온 것은 아니고 광해군과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실제 역사나 이후 다른 사극에 등장하는 선조에 비하면 부자지간이 나쁘지 않게 나온다. 인기있던 드라마라 선조의 이미지 재고에 도움이 될 법도했지만 대중들이 여기서 나온 왕이 선조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극 중에서는 다른 사극에서 흔히 보이던 인물 이름을 알리는 자막이 1번도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적 배경을 알지 못하면 선조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없다. 극 중에서 허준이 존재했던 시기를 알 수 있는 단서는 오로지 1부에 등장한 '선조 1년'이라는 자막과 후반부에 등장하는 임진왜란뿐이다.
  • 2000년 KBS 드라마 《 천둥소리》에서는 배우 이호재[74]가 연기했다. 기존의 선조에서 다르지는 않지만 조선군을 매우 나약하게 여긴다. 이순신의 첫 승전을 과대하게 부풀린 장개라고 여기는가 하면 서산대사가 행재소에 찾아와 "5천 승병이 일어났다"고 하자 서산대사가 떠난 이후 "파리 때만 모인다"고 비난하는 등 오로지 명나라 군대만 찾는다. 특이점이라고 하자면 호통칠 때 벼락치는 듯이 우렁차다는게 특징이며 다른 임진왜란 배경 드라마와는 다르게도 신하들에게 하대한다.[75]
  • 2003년 SBS 드라마 《 왕의 여자》에서는 배우 임동진이 연기했다. 위엄은 전혀 없는 선조인데 왕비인 의인왕후에게 내심 고마워하는 모습이 보인다. 드라마 내내 임해군과 충돌하며 광해군 역시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
  • 2004년 KBS 드라마 《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곽정욱(아역), 최철호(성인)[76]가 연기했다. 이 작품에서는 왕권에 집착하는 왕으로 묘사되었고 임진왜란으로 몽진을 하던 도중 이순신의 첫 승전보에 감격하며 이순신을 매우 중용하는 듯 보였으나 민중들이 이순신을 추앙하는 모습과 류성룡을 시기하는 윤두수, 이순신의 공적을 시기하는 원균의 보고가 겹치면서 점차 이순신을 위험시하기 시작하며 점차 암군의 면모를 보인다. 마지막까지도 명나라 유정의 말을 듣고 선전관을 보내 노량 해전을 준비하는 이순신을 방해하는 것도 모자라 "칙사를 가두고 출전했다"며 노발대발하는 모습으로 끝이 난다.

6.6. 교양ㆍ다큐멘터리

1994년 KBS 교양 프로그램 《역사의 라이벌》 〈이순신과 원균〉 편에서는 배우 임혁이 연기했다.

7. 관련 문서


[1] 선조의 전란 시기 어진으로 전해지나 확실하지는 않다. 임진왜란이 발발했던 시기 윤탁연이 평소 어진을 그리는 것을 꺼리던 선조의 초상화를 발견하여 보관했고, 그가 입수한 어진은 후손에 의해 보존되어 오다가 1974년 이은상이 윤탁연의 후손을 찾아내면서 발견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해당 어진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선조의 어진으로 단정짓기 보다는 연구가 더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2] 조선시대에 사직단이 위치했었던 사직공원 근처다. 도정궁(덕흥군 사저)의 건물이었던 경원당은 오늘날 건국대학교 서울캠퍼스 내부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3] 애석하게도 선조 재위 중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전란 중 경복궁이 불타버리면서 선조는 조선왕조 역사 중 경복궁에서 즉위한 마지막 왕이 되었다. [4] 선조 시기 신하들 중 유명하거나 뛰어난 인물, 재상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이 시기의 왕인 선조의 무덤, 목릉을 따와서 목릉성세(穆陵盛世)라고 역사학계에서는 부른다. [5] 선조가 명종의 양자로 입적되었으니 이름이 부()였던 형 순회세자의 이름을 따라 '날 일(日) 변'의 한자로 바꿔야 한다는 건의로 바꾼 것이다. [6] 군호는 경상도 하동군(河東郡)에서 유래했다. [7] (네가 쓴) 편지 보았다. ( 정안옹주의 얼굴에) 돋은 것은 그 방이 어둡고 (너 역질 앓던 방) 날씨도 음하니 햇빛이 (그 방에) 돌아서 들거든 내 친히 (돋은 것을) 보고 자세히 기별하마. 대강 약을 쓸 일이 있어도 의관과 의녀를 그 방에 들여 대령하게 하려 한다. 염려 마라. 자연히 좋아지지 않겠느냐. 만력 31년 계묘 ( 1603년) 복월(11월) 19일(9일) 사시(오전9~11시) [8] 선조 재위 시기에 우리가 잘 알만하고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나왔다. 대표적으로 류성룡, 이항복, 이순신, 이덕형, 이원익, 권율, 이황, 이이 등이 있다. [9] 하동 정씨라는 뜻. 집현전 학사,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정인지의 증손녀이다. [10] 군호는 경상도 하동군(河東郡)에서 유래했다. [11] 중종의 아들이자 서숙부인 금원군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12] 이런 방식의 글자를 갖은자라고 하며, 오늘날까지 이어져 결제 수단에 쓰인다. 석 삼(三. 3)을 쓰면 다섯 오(五, 5)나 심지어 만(萬, 10000), 억(億 : 초기에는 10만의 표현이었으나 현재는 100,000,000!)으로 바꿔버리기 쉬우니까. 이것은 한 일(一, 1 → 壹)과 두 이(二, 2 → 貳)에도 적용된다. [13] 덕종 추존 [14] 소혜왕후 추존 [15] 계유정난, 중종반정 [16] 다만 정현왕후는 처음에 후궁으로 입궁했다가 폐비 윤씨가 쫓겨나자 후궁에서 왕비가 되었고 뒤이어 적자인 진성대군을 낳았다. [17]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 [18] 재위 기간 중에 발발한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 사라졌기 때문이다. 경복궁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270년 간 복구되지 못했다가 고종 시대에 수렴청정의 형태로 섭정을 하고 있었던 흥선대원군이 주변의 반대와 원성에도 불구하고 복구, 복원했다. 고종황제의 아들인 순종 경운궁(덕수궁)에서 즉위했다. [19] 사실 위로 세조의 장손이자 의경세자(덕종)의 장남 형 월산대군이 있기는 했지만, 당시 실세였던 한명회의 사위였기 때문에 그 권세에 힘입어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20] 그러나 결국 후대에 덕흥대원군 봉사손들은 경술국치 전까지 정3품 대우를 받으며 종친부 군 작위를 대대로 세습한다. 조선 말 효종의 자손이 희소해진 상황에서 이들은 선조 가문의 적통 계파로서 우대받았으며 철종 시절 봉사손이었던 이하전의 경우 안동 김씨 세도의 경계를 사서 사사되기도 했다. [21] 대원군은 왕의 생부라서 인정(人情)상 예우하는 것이지 그 지위가 신하에 불과하기 때문에 임금이 신하에게 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22] 심의겸 인순왕후작은 아버지 [23] 또는 '목릉지치(穆陵之治)' [24] 지배층의 횡포, 노비 인구 증가, 토지 잠식, 군역과 요역의 문란. [25] 명나라가 처음 편찬을 시작했을 시기에도 이인임 이성계의 관계를 모르지 않았겠지만 그 당시 조선 명나라의 관계가 정말 나빴기에 누군가 의도적으로 악필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조선은 이후에 새로운 기록들이 추가되어서 재간행될 때마다 이를 수정하고자 하였으나 명나라는 과거 이유가 있어서 기록한 것이라니, 재간행이 이미 완료되었다느니 하는 핑계로 유야무야 흘리듯 쌩까고 넘겨 버렸었다. [26] 태조 이성계 고려 권력을 독재하듯 휘어잡은 간신 이인임의 아들이라고 바꾸기 전까지 명시되어 있는데 이걸 이인임의 아들이 아닌 이자춘의 아들로 바꾼 것을 왕실 종사의 '종(宗)'과 계통의 '계(繼)', 무(務)인 바꾸는 정무를 바꿨다고 해서 '종계변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선조 사후, 즉위한 아들 광해군에 의해 종계변무를 명분 삼아 '불천위(不遷位)'로 지정하여 종묘 정전에 5대가 지나더라도 자리를 영원히 보존하는 세실(世室)에 들어가게 된다. [27] 당시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격렬한 반대로 수군 전폐론은 없어졌지만 부산진, 다대포의 경상 좌수군이 바다가 아니라 각 성에서 항전한 점, 경상좌수사 박홍이 2천 병력으로 동래산성으로 간 점 등을 보면 경상 좌수영에 한해서는 이루어진 듯하다. [28] 신립이 전쟁 발발 전부터 일본 풍신수길의 전략과 당시 조선군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왔던 조총의 위력을 전혀 무시한 채로 과거의 경우처럼 평지에서 싸울 수 있다고 오만했다. 그리하여 신립은 오만한 자신감에 고무되어 방어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산악지형의 조령(지금의 문경새재)을 버리고 사방 뻥뚫려 있는 충청도 충주 탄금대 평야지대에서 기마 전술로 펼치다가 왜군의 제1군 선봉장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에 의한 조총 전술로 거의 전멸당한다. 그러고는 책임을 지지 않고 탄금대 절벽에서 투신해 생을 마감한다. [29] 말이 몽진(피난하는 일)이지, 그냥 왜군이 들어 닥쳐서 자기 신변이 위험하니 수도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냅다 도망치는 것이나 다름없다. [30] 100명이라 함은 작은 고을의 수령 쯤으로 대우하겠다는 뜻이다. [31] 이 때만큼은 동인이든 서인이든 간에 모두 한목소리로 '요동으로 가면 안 된다'며 명을 거두어 달라고 흰 소복차림으로 머리 풀고 정말로 결사 반대했다. [32] 노비 문서가 있고 노비들을 혹독하게 추쇄한 것으로 유명한 장례원에 난민들이 방화했고 이것이 경복궁으로 번져 궁궐이 소실되었다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다. 왜군의 한양 입성 후 경복궁을 묘사한 듯한 기록도 존재하기 때문에, 이때 경복궁이 불타지 않았다는 설도 존재한다. [33] 물론 이들은 정문부가 이끄는 함경도 의병에게 변절(순왜)을 이유로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34] 일단 조선부터가 대홍건적, 대왜구 전쟁에서 공을 세운 변방의 장수 이성계 고려를 무너뜨리고 건국한 나라다. [35] 숙청으로 유명한 한고제 이오시프 스탈린도 적어도 강력한 적을 앞두고 전쟁을 할 때는 숙청을 하지 않았고, 한신, 게오르기 주코프 등 마음에 안 들어도 유능한 인재들은 더욱 중용했다. [36] 이 부분은 선조만의 잘못은 아니다. 당시 원균이 자기어필(자기합리화)을 너무 잘했기 때문에 선조뿐만 아니라 많은 신하들도 원균의 능력을 상향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37] 물론 원균이 스스로 자초한 일이기도 한데, 스스로가 자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면 부산에 있는 왜구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겠다고 호언장담하는 되지도 않는 자신감 넘치는 장계를 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원균이 출정을 막상 하니 왜군의 수가 엄청 많아서 전투를 하기엔 여력이 부족하다고 장계를 올리자, 권율은 이에 분노하여 직접 찾아가 원균을 장형으로 볼기짝에 때렸다. 현재로 치면 합참의장 해군참모총장을 때린 격 [38] 서강대학교 계승범 역사학 교수 [39] 당시 정현룡(鄭見龍)이 군사 1,325명, 항왜(降倭) 25명을 동원하여 반격을 가해 역수의 부락을 공격, 266명의 수급을 베었고, 투정내(投丁乃) 등이 추장으로 있는 두만강변의 부락도 공격하여 60명의 수급을 베었다. [40] 곤양군수로 이순신 아래서 백의종군 했다. [41] 동원이강릉의 형식으로 조성되어 있다. [42] 율곡 이이들 신하들이 대공수미법을 제시하자, 농업국의 한계에서는 매우 적절한 정책이라고 관심을 가졌다. 다만 진행 과정에서도 현실성을 따지며(...) 당대에는 지주들의 반발로 제대로 시행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 후대의 신하들 및 현대 학자들과 비슷한 선견지명을 보였다. 선조는 당대의 현실성을 생각하여 이러한 정책에 수정을 거치고 담당하는 신하들과 함께 후대에 시행하도록 기록을 남기는데 그것이 대동법으로 이어진다. [43] 충무공 이순신을 비롯한 수많은 명신들을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앉도록 발탁하고 배치한 임금이 선조였다. 유교 사회에서 멸시받았던 의학에 관심을 가지고 허준 같은 인물을 지원했고 권율처럼 40대에 들어서 관직에 나선 인물도 재능만을 보고 중용했다.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서애 류성룡 등 내로라하는 인재들을 누구보다 적극 챙겨주고 그 능력을 간파한 임금도 선조였다. 선조는 어지간한 군왕의 관심 분야 이상으로 세심하게 다방면에서 신하들을 뽑았다. 실제로 선조 시절에 중용받은 신하들은 이후의 왕조를 그나마 유지시켜주었던 여러 개혁안에 대해 탐색했으며, 후대에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44] 선조가 임진왜란 중에 보인 모습만 보더라도 대의명분보다 눈앞의 합리성만 중시하여 긴급한 파천으로 침략군조차 당혹시킬 정도로 판단력만큼은 빠른 왕인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선조는 국가적인 위기 도중에도 사회 전반의 안녕을 도모하기보다는 철저한 손실 계산이 중요한 경영자였기에 원균 같은 간신을 발탁하여 국가 전체를 위험에 빠트리는 계략을 의도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야심찬 경영꾼이었다. [45] 선조의 유능한 면을 아는 역사학자 혹은 역덕후들이나, 선조의 유능한 면을 모르는 일반 대중들이나 정도에 차이는 있어도 선조를 혐오하는 반응을 보이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46] 임해군, 순화군만 보더라도 자식을 지나치게 감싸고 돌아 강간범, 살인범에 해당할 정도의 싸이코패스 갑질러로 만들어버렸다. 게다가 정식 후계자라 할 수 있는 광해군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오히려 핍박하면서 후계 구도를 어그러트릴 뻔하는 등, 후계를 굳건히 해야하는 유교 사회의 이상적인 임금과는 대비되는 혐성을 저질렀다. [47] 여담이지만 역사속에서는 선조보다 더했던 왕도 있었는데 당장 충렬왕 카다안의 침입 당시 행적으로 인해 선조 인조 명군으로 보이는 한국사 최악의 졸렬 군주라고 악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 [A] 영창대군이 영성군보다 약 9개월 정도 일찍 태어났다. [B] 정원군이 순화군보다 약 2개월 정도 일찍 태어났다. [B] 정원군이 순화군보다 약 2개월 정도 일찍 태어났다. [A] 영창대군이 영성군보다 약 9개월 정도 일찍 태어났다. [52] 송강 정철의 조카이다. [53] 이 중에서 성인까지 성장한 건 세 명 뿐이다. [54] 경종은 아예 없어서 제외 [55] 이후 고종 때가 되어서야 또다시 자식이 10명이 넘는 왕이 나온다. [56] 실록 웹버전에는 '장진'이라고 되어 있는데 작성 시 용어를 헷갈린 듯. [57] 윤흥신이 그 중 한 사람으로 훗날 다대포 전투에서 목숨걸고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58] 心疾, 발작이나 혼절을 하고 감정 기복이 심한 증세로 추정. 조현병으로 추정하는 경우도 많다. [59] 광해군 재위 시기의 침공도 잉글랜드 해적들의 소행이었다. [60] 시기 상으로도 광해군 치세에 있었던 잉글랜드 해군의 침공은 1622년(광해군 14년)에 일어난 일인데 반해, 지봉유설은 그보다 8년 전에 쓰인 책이다. 그래서 지봉유설에서 언급하는 사건이 광해군 시기의 일이었을 리는 없다. [61] 칼레 해전의 주역인 그 드레이크다. 실제로 선조의 치세 기간에 드레이크의 사략함대가 태평양 아메리카에서부터 서쪽으로 횡단하여 세계일주 항해를 하는 중이었으므로, 중간에 일본이나 조선 앞바다를 지나갔을 가능성도 있다. [62] 선조실록》에서는 '마리이(魔離異)'라고 기록되어있다. 마링예이루는 본명이 아니고, 포르투갈어로 선원을 뜻하는 일반명사다. [63] 신라 시대나 고려 시대 동로마 제국에서 추방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들이 한반도에 정착했다는 설은 있으나, 이를 입증할 만한 사료나 유물 등이 전무하다. [64] 다만, 《선조실록》에는 이들 흑인들의 출신국이 프랑스라고 잘못 기록되어 있다. [65] 한석봉은 조선 4대 명필로 꼽히는데다가 선조 자신부터가 한석봉 팬이라 한석봉에게 가평군수에 앉혀준 적도 있었다. [66] 인조 효종이 선조 서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67] 정확히는 원균도 그렇고 원래 성격부터가 문제가 많았는데 마수들이 이성과 절제력을 없애자 숨겨왔던 본성이 튀어나와 부정적인 행동을 일삼았다고 묘사했다. 작중 주인공측 등장인물인 태을사자도 저사람은 마수가 아니였어도 본래부터 의심이 많고 음험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68] 이는 진성대군 대신 세자 이황이 왕이 되었고 그 때문에 덕흥군은 왕자가 아닌 왕족에다 인성과 행실이 개차반이라 왕위 계승에서 배제하였다. [69] 실은 그가 일본에 갈 볼모가 된 원인도 임해군이었다. [70] 오히려 기록을 통해서 실제로 비만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왕으로는 세종 경종이 있다. [71] 2008년 SBS 드라마 < 일지매>에서는 인조 역. [72] 2004년 KBS 드라마 <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순천부사 겸 이순신의 심복인 권준 역. [73] 실제로 기록상에 선조는 허준에게 중인이라는 신분임에도 정1품 보국숭록대부라는 작위를 내리려다 실패하는 등의 허준을 총애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이후 허준이 사망했을 때 광해군은 비로소 정1품 작위를 추증하였다. 물론 허준이 정1품 작위를 받을만큼 충분한 공적을 세운 것은 명약관화지만 이순신이 당시 정2품 정헌대부에 불과했던 것을 볼 때 신하를 대함에 있어 편차가 컸다는 것을 볼 수 있다. [74] 2006년 MBC 드라마 <>에서는 내관 역. [75] 선조보다 나이가 많은 신하도 예외는 없어서 하였소? 와 같은 체는 거의 보이지 않고 하였느냐? 하였는가? 라는 어체를 쓴다. 간혹 화를 낼 때 하였소? 라는 어투를 쓴다. [76] 당초 배우 조민기가 선조 역이었으나 제작진과의 마찰을 빚고 심지어 무단으로 촬영을 펑크내자 최철호로 변경되었다. 배우가 교체되면서 캐릭터의 성격도 달라졌는데 조민기의 선조는 의심이 많고 음험한 군주의 인상이라면 최철호의 선조는 말 그대로 찌질이. 훗날 이 이야기는 조민기가 미투 운동에 엮이면서 재조명되었는데 당시 들리는 말로는 조민기가 <불멸의 이순신> 촬영장에서 뚱한 표정만 짓고 있었으며 1번은 "어떻게 여자 1번 보기가 힘드냐? 내 평생 이렇게 여자없는 작품은 처음이다. 엑스트라 궁녀가 이뻐보일 지경이다."라고 한 적도 있다고 하며 궁녀 역할 엑스트라를 사진으로 찍어가려고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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