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0 17:40:49

북인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의 역대 집권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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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인
北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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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인
선조
(1591 ~ 1608)
서경덕 조식 최영경 정인홍 이산해
김면 이발 홍여순 곽재우 이이첨
대북 (광해군파) 소북 (영창대군파)
정인홍 이산해 정구 류영경 박승종
홍여순 이이첨 기자헌 류희분 남이공
광해군
(1608 ~ 1623)
대북
육북 중북
이산해 이이첨 정인홍 정구 곽재우
허균 기준격 정창연 류몽인 정온
대북 소북
골북 청북 (남당) 탁북 (유당)
홍여순 류희분 남이공 김신국 류영경
인조
(1623 ~ 1649)
남이공 정창연 정온 김신국 김세렴
남인 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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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인
北人
<colbgcolor=#113> 형성 전 동인[1]
형성 1589년[2]
해체 1599년[3]/ 1613년[4]/ 1623년[5]
종주 남명 조식
내암 정인홍
화담 서경덕
수장 이산해[6]
이이첨[7]
류영경
박승종
류희분
주요 인물 홍여순
남이공
기자헌
정창연
허균
분당 대북, 중북, 소북

1. 개요2. 역사
2.1. 북인의 집권 기간2.2. 등장2.3. 분당2.4. 몰락2.5. 번외: 인조반정 이후 경상우도 북인의 동향
3. 북인의 주요 인물
3.1. 대북3.2. 중북3.3. 소북3.4. 인조반정 이후 북인의 주요 인물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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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인()은 조선의 붕당 초기 4색 당파 중 하나이다. 동인에서 남인과 더불어 갈라져 나왔으며, 서인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최전성기는 1599년부터 1623년까지. 남명 조식의 제자들(남명 학파)이 주축을 이루긴 했지만, 이황을 종주로 모신 남인이나 이이를 종주로 모신 서인처럼 확고한 중심축을 구성한 건 아니었다.

이산해, 홍여순 같은 서경덕 계열 문인을 비롯한 이이첨, 김신국처럼 특별한 학맥이 없는 신진 사림 등 여러 집단들이 참여했기에, 짧은 전성기에 비해 갈래가 많은 게 특징이다. 대표적 인물로 정인홍 류영경이 있으며, 이들에 의해 대북 소북으로 나눠서 광해군 즉위 이후로는 대북은 기자헌, 유몽인, 이이첨이 속했고, 소북은 박홍구, 박승종, 류희분이 속했다.

1623년 인조반정 이괄의 난이 일어나면서 대북과 소북 영수들은 몰살 당했고, 그나마 남은 남이공과 김신국 등도 조정에서 제대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할 정도로 추락했다. 이후 잔존 북인은 모두 남인에 흡수되어 활동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 역사

2.1. 북인의 집권 기간

  • 서인과 남인의 대거 실각 때부터 대북과 소북의 분열 때까지: 류성룡, 윤두수 등을 비롯한 서인과 남인 거물들의 대거 실각 ( 1598년 ~ 1599년) ~ 이조판서 이기가 홍여순을 대사헌에 천거 하자 같은 북인인 남이공과 김신국이 홍여순을 대사헌으로 임명하는 것에 대해 반대해 북인 내에 분열이 생겨 홍여순의 대사헌 천거를 지지하는 대북과 홍여순의 대사헌 천거를 반대한 남이공과 김신국을 지지하는 소북으로 분당 된다.[8]
  • 대북과 소북으로 분열 직후 류영경의 소북 집권부터 선조 승하 이후 광해군 즉위까지의 류영경 내각: 대북과 소북의 분열 및 류영경 내각 집권 ( 1604년) ~ 선조 승하 및 광해군 즉위 ( 1608년)
  • 광해군 즉위 이후 계축옥사 이전까지 대북, 소북 공동 집권: 광해군 즉위 ( 1608년) ~ 계축옥사 ( 1613년)[9]
  • 계축옥사 이후 인조반정 때까지 대북 단독 집권 내각: 계축옥사 ( 1613년) ~ 인조반정 ( 1623년)

2.2. 등장

등장의 발단은 정여립의 난을 빌미로 서인 강경파 정철이 실권을 쥔 사건이었다. 기회만 되면 정적들을 손봐주려고 벼르고 있던 정철은, 실권을 쥐자마자 선조의 동의 하에 정여립을 빌미삼아 무려 네자릿수에 달하는 동인의 유력 인사들을 죽이는 피의 숙청을 실시했는데, 이것이 기축옥사이며, 그 과정에서 이발 등 동인 명문가의 사람들이 많이 죽고 서인이 권력을 독식하게 된다. 물론 엄청난 피해를 치른 동인들은 이를 되갚아 줄 때를 기약하게 되었다.

그 직후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관직에 있던 자들 중 더러는 선조를 호송하기도 했지만, 재야로 내려간 이들 중에서는 조식의 문하(남명 학파)를 중심으로 남쪽 지방에서 정인홍 의병을 지휘하는 자들이 나타난다. 이들이 훗날 북인, 특히 대북파의 거두로 발돋움한다. 북인의 사상이 특출나서 타 당파보다 의병 활동을 활발히 한 것은 아니다. 북인보다 많았으면 많았지 적지 않았던 서인계 의병장은 대부분 전사해서 내세울 사람이 없었고, 남인은 향촌 근거지인 경상 좌도가 왜군 진격로라 다 쓸려나간데다 전시 행정부를 이끈 집권 여당이라 유력인사들이 대개 정부에 몰려있었다 보니 의병 활동이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래서 왜란 때의 의병장들이 살아서 종전을 맞이했고, 이후 집권당이 된 북인이 돋보이는 것이다. 정여립의 난 이후에는 선조의 후계자 논의가 정계의 핵이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정철은 선조의 심중도 모르고 후계자 논의를 강권하다가 미운 털이 박히고 만다. 마침 서인 일변도의 정계를 한바탕 물갈이 할 필요도 있다고 본 선조의 암묵적인 의중을 바탕으로 정철의 건저[建儲]  사건을 계기로 서인은 대거 몰락하고 동인이 실권당으로 급부상한다.

처음에는 동인 내 강경파와 온건파 정도였던 의견차는, 선조가 임진왜란 이후에 최영경 추증 등을 명하며 정철을 확실하게 내칠 뜻을 밝히면서 극단적으로 갈리는데, 이때 정철에게 깊은 원한이 맺혀 강력한 처벌을 주장한 측은 북인, 온건한 처분을 주장한 측은 남인으로 분당된다.

다만 본격적으로 남북이 분열 된 건 건저의 사건으로 정철과 서인이 몰락해 정철의 처벌 수위를 놓고 다툴때였지만 그 이전에도 이미 동인 내에서도 남북의 설은 있었다 윤국형의 문집인 갑진만록에 선조 21년인 1588년에 북인 남인이 언급되고[11]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에서도 기축옥사 때 백유양이 선조에게 본인과 이발 이길 형제 정언신 정언지 정여립등이 북인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존재한다.

2.3. 분당

분당 이후로도 북인과 남인은 나름대로 균형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나, 남인의 핵심 인물인 류성룡이 실각하면서 본격적으로 이산해를 영수로 한 북인이 정계를 주도하게 된다. 1599년(선조 32) 이조 판서 이기가 홍여순(洪汝諄)을 대사헌으로 천거하자 같은 북인인 남이공과 김신국 등이 반대하였다. 그러자 정인홍 류영경이 만나 논쟁을 펼쳤는데 서로 타협을 보지 못해 결국에는 북인 내에 분열이 일어나 정인홍을 지지하는 북인인 대북과 류영경을 지지하는 북인인  소북으로 갈렸다.

대북에는 의병 지휘로 명성을 쌓은 정인홍이 영수가 되고, 기자헌, 류몽인, 이이첨 등이 있었고 소북에는 류영경이 영수가 되며, 박홍구, 류희분, 박승종 등이 있었는데, 이 중 류영경은 선조와 혈연도 이어져 있었기에 선조 말년에 최고의 총애를 누리던 조정의 실세 중의 실세였다. 임진왜란 이후로 광해군이 세자가 되기는 했지만 이 시기까지도 정철 몰락의 계기인 선조의 후계자 문제가 여전히 정리되지 못한 상태였는지라, 선조의 후계를 두고 치열한 의견 대립이 벌어져 대북은 광해군을 지지했고 소북은 영창대군을 지지하였다.

소북이라고 모두 광해군을 반대하고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남이공이 류영경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면서 소북 내에 류영경 파와 남이공 파 사이에 알력이 발생했고, 결국 다시 갈라졌다. 전자는 탁소북, 후자는 청소북이라고 불리게 되는데, 이름이 너무 장황해서인지 보통 각 영수의 성을 따서 유당(柳黨)과 남당(南黨)으로 불렸다. 물론 이쯤 되면 존재감이 너무 희미한 수준이라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어쨌든 영창 대군을 밀다가 분당까지 감행한 류영경은, 선조가 광해군을 싫어하는 것이 눈에 보이자 선조에게 광해군을 쫓아내고 영창 대군을 세우자며 은근히 밀었고[12], 만력제의 후계 문제로 신경이 곤두선 명나라가 광해군의 승계를 반대하는 점을 선조와 같이 이용해먹으면서 광해군의 뒤통수를 쳤지만, 선조가 57세로 갑자기 승하하면서 류영경의 정치적 명줄도 종언을 고한다.

류영경은 선조가 광해군을 후계자로 책봉한 교지를 받고서도 가택에 빼돌리는 등 마지막까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결국 그것이 탄로나 끝장이 난 것이다. 아무튼 광해군 집권 이후 류영경을 지지하는 탁소북은 전멸했다. 많은 사람들이 광해군 집권 이후 소북이 멸망한 줄 아는데, 밑에도 기술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류영경을 중심으로 영창 대군의 계승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탁소북만 거의 전멸하고 청소북은 살아 남았을 뿐만 아니라 광해군 초기 정권도 잡았었다. 광해군 대의 최강 권신이자 6명의 북인 대신들이 3명씩으로 각각 대북파(기자헌, 이이첨, 류몽인) 청소북(박홍구, 박승종, 류희분)이 골고루 3명씩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다.

이후 권력을 잡았는데 광해군 즉위부터 인조반정으로 인한 폐위까지 의외로 소북과 대북은 어떠한 우위를 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청소북의 일원인 류희분이 광해군의 처남으로 왕의 외척이지만 단 한 번도 권세를 행사하지 못했다. 그래서 탁소북 계였으나 류희분과 손을 잡아 권세를 얻은 박승종과 박홍구가 주요 인물이 되었다.[13] 대북의 경우에는 기자헌, 류몽인, 이이첨이 있기는 했으나 학식과 경륜 면에서는 정인홍을 능가하는 인물이 없었기에 그가 대북 전체의 웃어른 노릇을 했다.

그러다 봉산옥사를 거치면서 이이첨의 권세가 강해지고 대북이 실권당에 오르면서 소북 계열은 상대적으로 찬밥 신세가 되었다. 박승종이 대북이 지긋지긋해 "대"짜 들어가는 대문도 외문이라고 부르게 했으며, 칭병으로 자주 출사하지도 않았다는건 유명한 이야기. 물론 애초에 그가 소북 내에서도 강경파인 탁소북 출신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권당 대북은 폐모론이 불거지는 과정에서 또 다시 영창 대군만 죽여야 한다는 계통의 골북(骨北), 인목왕후도 죽여야 한다는 이이첨, 허균 계통의 육북(肉北), 영창 대군과 인목 대비의 사형을 모두 반대하는 소수의 중북(中北, 기자헌, 유몽인)으로 나뉘었다.[14]

대세가 몰리자 중북인 류몽인과 기자헌까지 영창대군 제거에는 찬성하나 폐모론에서는 반대했으며, 정인홍은 폐모론에 지지하나 인목왕후의 예우를 전과 같이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찬성한 것은 허균. 어쨌든 이이첨 등 실권자들이 주로 가담한 것은 육북이었으나, 대비를 대놓고 죽이자는 쪽은 허균파 말곤 없었다. 이이첨도 겉으로는 사사에는 반대했을 정도.

한편 남은 중북 세력은 정창연[15]을 중심으로 구성이 되어있으나 폐모론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바람에 결국에는 서인 남인 등과 더불어 유배 생활을 겪어야했다. 소북에 속했던 박홍구, 박승종, 류희분 역시 폐모론에 소극적으로 반대했으나, 폐모론을 주장하는 이이첨이 기자헌과 류몽인까지 몰아내어 대북 내 교통정리를 하는 동안 (봉산옥사, 계축옥사 때와 마찬가지로) 방관했다. 이에 대북과 소북에 대해 완전히 실망해버린 서인과 남인은 능양군( 인조)를 옹립할 반정을 준비했다.

2.4. 몰락

이후 인조반정이 터지고 반격의 기회를 엿보던 서인과 남인 다시 정권을 독식하는 과정에서 북인 내의 실력자들과 광해군의 총애를 받은 측근들은 처참한 피의 숙청을 겪는다. 대북의 경우는 이이첨이 죽임을 당했고,[16] 소북의 경우는 반정 공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조의 강력한 주장으로 유희분을 처형했으며, 박승종은 의병 모집을 시도했다가 궁궐이 점령당하고 임금이 바뀌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미 일이 틀렸음을 깨닫고 광해군에게 절의를 지키기 위해 아들 박자흥과 함께 처벌당하기 직전에 자결했다.[17]

중북 계열인 유몽인과 기자헌도 인조 정권에 출사를 거부하고 광해군에게 의리를 지키려 했기에 숙청을 당했다. 유몽인은 광해군 복위를 꾀한다는 무고를 받아 아들 유약과 함께 처형당하고 중북 원로 기자헌은 이괄의 난때 이괄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며 여러명의 북인쪽 사람들과 함께 처형당하고 임취정과 박홍구는 유배를 가나 북인 내의 실력자들과 광해군의 측근 세력에 대한 냉혹한 숙청에 반발해서 광해군을 태상왕으로 모시고, 흥안군 인성군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거사를 세웠지만 이내에 발각되어서 처형되었다. 이후에도 북인들은 박홍구 임취정 유효립등이 주축이 되어 광해군을 태상왕으로 인성군을 왕으로 옹립하려고 하였고 1629년에 후금과 내통해 반역을 꾀했다가 틀통 난 양경홍의 역모사건과 1631년에 발각 된 정한추대사건[18] 등을 꾸미는 등 서인 세력에게 계속해서 반격을 하려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래서 이이첨, 정인홍, 유희분, 박승종, 유몽인을 비롯한 북인 권신들은 인조가 집권하는 과정에서 대거 숙청되었으며, 이괄의 난때 이괄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기자헌을 포함한 38명의 북인 정치범들이 숙청되자 이원익도 탄식할 만한 정도였다.

남인들도 북인들에게 원한이 컸기 때문에 반정 직후에 범안동 지역 일대에서 남인들의 주도로 향회가 열렸고 남인계 사족들은 광해군의 실정에 가담하여 온갖 악행을 저지른 북인계열에 대한 처벌을 단행하였는데 이강 이장 이영구 금대웅 이잠 이광계 이광렬등의 집을 허물고 고을에서 축출하는 유벌을 감행하였고 영주 지역을 대표하던 정인홍의 문생 오여온은 동생 오여발이 애걸한 탓에 출입문만을 부수는 정도로 형량을 낮출 수 있었다.

인조 시기까지 살아남은 북인 잔존 세력들인 김신국, 윤휘, 이경전, 정온, 남이공, 남이웅, 김세렴, 심열, 정창연, 이명 등 비교적 연배가 낮고 급변기에 필요한 능력을 갖춘 소북, 중북계 실무관료들은 살아남아 중용되었다. 좌의정을 거친 남이공과 김신국을 구심점으로 근근이 명맥을 유지했으나 과거 같은 존재감을 되살릴 수가 없었다. 효종 현종 시기를 거치면서는 사실상 남인에 흡수당하다시피 했고, 영조 대에 이르러서는 과거의 존재가 되었다. 정창연의 집안처럼 서인으로 갈아탄다음 크게 번창한 가문도 있기는 했다.

그나마 소북 양명하 이인좌의 난에 참여했다는 영조 실록의 기록, 그 밖에 원경하가 대탕평을 주장하면서 남인 소북과 결탁해 남인 소북등을 등용하려 했고 영조가 정조에게 대리 청정을 명하면서 "어린 세손이 노론을 알겠는가? 소론을 알겠는가? 남인을 알겠는가? 소북을 알겠는가? 이판으로는 누가 좋고 병판으로는 누가 좋을지 어찌 알겠는가?"라고 할 때 사색 당파의 하나로 언급되면서 어느 정도 흔적은 밝히면서 일부에 불과하지만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진 대북 중북과 다르게 소북 당색을 가진 이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물론 당파를 바꿔도 인맥 자체는 후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가령 윤휴 허목은 당파상 남인의 계파인 청남에 속했으나 원래 그들의 가문은 기호 지방의 소북 출신 가문이다. 중농학파의 거두였던 반계 유형원의 아버지가 북인이었다가 인조 반정에 사망했고 유형원은 범남인에 속했지만 어린시절의 트라우마로 뛰어난 학자로 명성을 떨쳤음에도 본인이 스스로 벼슬길을 마다했다. 이 점에서 소북계의 인맥은 남인에 흡수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고, 이후 실학의 등장에도 영향을 끼친다. 같은 이치에서 훗날 정약용 같은 기호 지방 남인의 후예(신서파)는 서인의 노론 시파에 가담하기도 했다.

한참 후 19세기 말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옛 북인의 후예들을 제법 등용하였다 하나, 어차피 이 시기에 이르러선 붕당 정치라는 것 자체가 크게 퇴색한 상황이었고, 결국 조선은 일제에 의해 망국을 맞는다.

2.5. 번외: 인조반정 이후 경상우도 북인의 동향

인조반정 이후 정치적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남명학파는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야만 했다. 그 선택지는 정온을 중심으로 한 중북계 인사들을 통해 남명학파가 재결집하거나, 집권세력인 남· 서인으로 편승하는 방법이었다. 집권세력으로의 편승은 곧 퇴계학과 기호학의 수용으로 이어졌다.

중북계로의 결집은 반정 직후 살아남은 가장 원로 격인 동계 정온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그는 반정 이후 용암서원의 원장을 지내는 한편, 덕천·신산서원에서 하항·김우옹을 추향하려 할 때 자문해주기도 했다. 그의 문인들은 대체로 정인홍과 관련있거나 중북계에 해당하는 인물이 많았다. 무민당 박인 역시 생전에는 대북에 반대한 전력으로 남명학파 내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지는 못했다. 그러다 반정 이후부터 용암서원의 원규를 새로 작성하고 남명문인록인 『산해사우연원록』을 편찬하는 등 남명학파 내 위상도 높아져갔다. 이에 박인은 합천 사족의 결속력 강화를 위해 수구계를 결성하고, 용연재를 건립하여 문인을 양성했다.

퇴계학으로의 전도는 퇴계·남명 양 문하에서 수학한 정구를 매개로 이루어졌다. 정구는 남명학파의 일원이기도 했지만, 광해군 집권기 정인홍과 대립하며 이미 남인의 종장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정구 이후에는 진주·단성·함양·함안 일대 남명학파의 가문에서 장현광의 문인이 되기도 했다. 이들의 학맥은 각각 한강학파, 여헌학파라 불려 합쳐서 한려학파라 호칭되며 낙동강 중류를 휩쓴다. 퇴계학과의 절충이라는 특성으로 인해 남인과 밀접했고, 결과적으로 그들의 학문은 남인에게로 합쳐져 계승된다. 이 무렵 상주 일대에서는 정경세를 중심으로 학단이 형성되고 있었다. 우도에서는 합천의 강대수와 고령의 박응형이 문인으로 확인되었다.

한편 우도의 서인화는 삼가의 팔계정씨 정지린·함양의 남원양씨 양홍주가 그 시초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남명학파 내에서도 비중 있는 인물로, 정지린은 남명의 생질이자 남명의 첫 제자이기도 했다. 또 양홍주는 정인홍의 처남이었다. 우도의 서인화가 남명·정인홍과 인척관계인 이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점이다.

17세기 후반 남인계는 이현일을 중심으로 한 갈암학파로 이어지게 된다. 이현일은 유배에서 풀려나 1년간 진주에서 머물렀는데, 이때 40여 명의 우도 문인들을 규합하였다. 이 중 절반은 선대부터 정구·장현광의 문인으로서 퇴계학을 계승한 경우이고 나머지는 새롭게 문인이 된 경우였다. 여기에는 남명 후손과 남명학파 핵심인물의 후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18세기 우도 내 퇴계학통은 더욱 확대되어 이상정·정종로의 문인도 다수 배출되었다. 이상정 문인은 단성·밀양을 포함하여 13개 지역에서 확인되며 이들은 스승에게 선조에 대한 현양 문자를 청하기도 했다. 이상정이 찬술해준 문자를 보면, 퇴계학파적 시각에서 내용이 기술되고 있었다. 반면 정종로의 문인은 진주·함안을 포함하여 8개 지역에서 확인된다. 정종로는 이상정과 달리 남명학파에 대해 비교적 개방적 시각에서 기술해주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 퇴계학통의 확대에는 근기남인 이만부의 역할도 컸다. 바로 1721년·1724년 그가 덕천서원의 원장을 역임하면서 우도의 침체된 학풍을 다시 일으켰던 것이다. 이때 이만부와 교유한 인물은 서원이 소재한 진주권 유림들이 대부분이었다.

이이의 학통은 김장생-송시열·송준길-권상하로 이어져 이들에게 사사한 우도 문인 수는 약 47명이었다. 이중 가장 비중이 높은 지역은 삼가로, 팔계정씨·안동권씨·은진송씨 가문에서 27명이 확인된다. 문인록에는 확인되지 않지만, 1637년 송준길의 우거를 계기로 안음 일대 서인화도 상당히 진행되어 있었다. 특히 삼가의 문인들은 송시열 변무소·사계 승무소·양송문묘종사와 관련된 정치적 현안에 있어 우도 서인계를 대표하며 상소를 주도해 나갔다. 한편 18세기 우도의 기호학통은 호론계 윤봉구·송환기 문인과 낙론계 이재-김원행·송명흠 문인이 배출되면서 더욱 확대되어 갔다. 윤봉구·송환기 문인은 약 46명, 낙론계 문인은 약 29명 확인되었다. 17세기는 삼가를 중심으로 문인이 형성되었다면, 이제는 거창을 비롯한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가문의 인물들이 확인된다는 것이 특징이다.

한편 경상우도 사족들의 학파적 분화와 함께 그들의 자치기구인 서원 역시 정파적으로 변화해갔다. 북인계 서원으로 분류되는 합천 용연서원은 인조반정 이후 박인을 제향하는 서원으로 건립되었다. 그런데 성주·거창 일대에서 박인이 정인홍 문인이었다는 것과 회퇴변척에 동조했다는 혐의로 서원의 건립과 사액 여론에 반대하고 있었다. 이에 서원 측에서는 두 혐의에 대한 변무를 끊임없이 해야만 했다. 이후 용연서원은 남인계 성향을 보이면서 남명학파권 서원과의 교유도 지속하였다.

진주 덕천서원과 함양 남계서원은 우도 남명학파를 대표하는 서원으로 정인홍 문인들의 참여도 높았다. 그렇기 때문에 두 서원은 반정 이후 정치적 부침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덕천서원은 하홍도 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정인홍이 관여했던 『남명집』을 훼판하면서 대북과의 연결을 차단시켰다. 이후 이만부·채제공·정종로 등 남인계 인사들이 원장을 지내며 서원은 친남인화 되어갔다. 남계서원은 1685년까지 『경임안』에 원장이 없어 운영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이 서원은 노론화한 정여창의 후손들이 서원 운영을 주도하면서 서원 역시 노론화하였다.

이처럼 중앙 정계로의 진출이 막힌 상황에서 우도의 사족과 서원은 학파·정파를 달리하며 집권세력에 편승해갔다. 그 과정에서 남·서간의 갈등을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공조의 모습도 나타났다. 밀양에서는 사림파의 종장인 선산김씨 김종직의 후손과 여흥민씨 민구령 후손들이 혼반에 있어 정인홍을 비롯한 남명학파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데 대북에 반대했던 남인계 인사들이 반정 이후 향론을 주도하면서 이들은 노론계로 전향하였다. 반정 이후 남인계가 밀양 향론을 주도하다보니, 17세기 후반 노론계 부사의 부임은 자연스레 갈등으로 이어졌다. 밀양의 신흥 노론세력들은 수령과 짜고 남인계 인사들을 모함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창녕조씨 조광익의 후손들은 소론의 영수였던 윤증의 힘을 빌려 위기를 해결하였다.

한편 19세기 초반 밀양 출신 송계 신계성 가문에서는 후손 신호인을 중심으로 『송계실기』 편찬에 들어갔다. 신호인은 기호학통을 계승한 송환기의 문인이었는데, 이 가문은 삼가의 팔계정씨 가문과의 혼반을 계기로 밀양에서 삼가로 이거해왔다. 한편 밀양에 남아 있는 신계성 후손들은 남명학파적 면모를 보이다가 한강 정구를 매개로 남인화했다.

3. 북인의 주요 인물

잠깐이나마 권력 자체는 충실히 장악했으나 워낙 어그로를 잔뜩 끌다가 삽질과 민폐를 벌이고 맞을 짓을 하고 사라진 집단이라 같은 계열이자 적수였던 남인과는 달리 긍정적인 인물도 적고 영수가 적다.(...) 사실은 북인 자체가 꼬장꼬장한 강경파 선비들이 현실타협적인 남인들과 갈등을 빚고 떨어져서 나온 집단으로서, 시작이었던 이산해의 분당 배경부터 실질적인 조선시대 붕당싸움의 시발점에 가까울 정도이다.
  • 이발: 동인 강경파로 동인 온건파 우성전과 대립하였는데 우성전은 남산에 살아서 남인이라 하였고 이발은 북악에 살아서 북인이라 하였다.
  • 최영경: 조식의 문인으로 서인에게 매우 강경했다 정여립의 난이 터지자 길삼봉이라 지목되어 국문을 받았고 감옥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하였다
  • 정언신:[19]
  • 정여립
  • 김응남[20]

3.1. 대북

  • 아계 이산해: 북인과 남인으로 분당하기 전에는 동인 전체의 영수이기도 했다. 이후 육북 의 영수가 되었다.
  • (재야 영수) 내암 정인홍: 대북의 영수이기는 하지만 연배로 보나 경륜으로 보나 학식으로 보나 그가 이산해 사후 북인 전체의 영수격으로 존중받았다. 특이하게도 폐모론에는 찬성했지만, " 서모도 어머니는 어머니인데 어떻게 자식이 어머니를 죽이는가?"라며 인목왕후와 영창대군을 죽이는 걸 반대했다.
  • (조정 영수) 광창부원군 관송 이이첨: 정인홍이 대북의 정신적인 지주였다면 이이첨은 대북의 행동 대장 겸 실세였다.
  • 홍여순: 골북의 영수.
  • 허균
  • 한찬남
  • 이충: 명종시절 외척 이량의 후손으로 잡채판서로 유명한 인물이다
  • 임취정: 임진왜란 때 파천 길에 조존세 박정현 김선여등과 함께 사초를 태우고 선조를 버리고 도망갔다고 비판받은 문제 인물이다 광해군의 후궁 소용 임씨의 숙부로 이이첨을 견제하기 광해군이 힘을 실어줘 이이첨과 대립하였다 1628년 임경후(任慶後)·박동기(朴東起)·이종충(李宗忠)·오현(吳玹)·이후강(李後崗)·안대홍(安大弘)·고경성(高景星) 등과 함께 광해군의 복위를 모의 하다가 실패해 죽었다.

3.2. 중북

3.3. 소북

3.4. 인조반정 이후 북인의 주요 인물

  • (조정영수, ~인조 중기) 정창연: 중북으로서 대북들에게 어찌나 공격을 많이 받았는지 인조반정 이후에도 무사해 몇 안되는 조정 내 북인 원로가 되었다.
  • (재야영수, ~인조 후기) 정온: 정인홍의 제자로 정인홍과 류영경이 대립하자 스승 인 정인홍을 옹호하고 류영경을 공격하는 상소로 올렸다 임해군의 옥사때는 전은설을 주장하는 등 임해군의 목숨을 살려줄 것을 주장하였다. 영창대군이 죽자 영창대군의 죽음과 관련 되어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정항을 죽이자고 주장했다가 광해군에게 찍혀 처형 당할 뻔했지만 이원익 심희수 기자헌등의 여러 대신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구명해 제주도에 10년 동안 위리안치 되었다. 그를 지지한 문경호 강익문 이대기등과 함께 대북에서 분파하여 중북을 형성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인조에게 폐모론을 반대한 공로와 강직함을 인정받아 관직에 다시 진출하였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 옛 스승 정인홍의 처형에 유일하게 반대한 조정인물이었다 결국 정인홍이 처형당하자 정인홍의 제사에 바치는 음식까지 보냈으며 인조를 폐주인 광해군에 비유하며 간언을 하는 등 강직한 인물이었다 반정이후 북인의 원로로서 낙동강 하류의 남인이나 서인으로 전향하지 않은 북인계 유림들을 이끌었다.
  • (조정영수 인조 중~후기) 남이웅: 남이공의 사촌으로, 소북계. 김신국과 비슷할 정도로 만만치 않게 오래 살았고, 인조 정권 하에서 북인 중 유일하게 정승까지 올라갔다.
  • 심열(?):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의 아들로, 광해군의 폐모살제에 저항하지 않았고 인조 즉위 이후 이때문에 사직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무려 영의정까지 올랐다. 다만 그가 북인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 (조정영수, 인조 초중기~효종 초기) 김신국: 소북계이긴 하지만 신진관료에 가까우며 인조반정 이전 북인 계열 명사들 중 가장 오래 살며 관직생활을 했다.
  • (조정영수, 효종 중기 ~ 숙종 초)강백년: 소북계 인물로 소위 관각문학의 대표. 인조 효종 현종 숙종 4명의 임금을 섬겼다 숙종 시기 소북들은 문한(文翰)이 뛰어나고 청수(凊修)한 선비를 셀 적에 강백년을 꼽았다고 한다. 각종 판서와 대사간 등 주요직을 역임하였으며, 강세황이 그의 손자이다.
  • (재야영수, 인조 중기~현종 중기) 하홍도: 조식의 제자 각재 하항으로부터 하항-하수일-하홍도로 이어지며, '남명 이후 제일인자'라는 칭송까지 들으며 남명학파 및 재야 북인의 수명연장에 크게 기여했다. 이후 그의 동생 하홍달과 그의 일가가 남명학파를 이어갔으며, 18세기의 하대명은 그의 종증손자, 19세기 남명학파 유학자 하달홍이 그의 후손이다. 이외에도 하씨 일가의 수많은 학자들이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남명학파를 근근히 이어갔다.
  • 이경전: 대북 영수 이산해의 아들 본디 이이첨과 절친한 사이였지만 중북이 되면서 이이첨과 대립하였다. 아버지와 함께 건저의 사건을 일으켜 정철을 실각시켰기 때문에 서인들의 원한을 받았지만 어지쩌지 살아남았다[22] 그의 아들 이무가 남인으로 활동한 것을 보면 그의 집안은 남인으로 전향한 것으로 보인다.
  • 이명(李溟): 이충의 동생으로 이량의 손자로 중북계 인물이다. 이귀가 반정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하자 은밀히 척리(戚里)에게 발설하여 이귀를 파직 당하게 하였다. 다만 연평일기와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따르면 이귀는 이명이 반정에 찬성하였다고 생각하였다. 반정으로 북인들이 숙청된 와중에도 이귀의 추천으로 등용되었다.
  • 죽천 이덕형(李德泂): 소북계 인물로 한음 이덕형과 동명이인이다. 인조반정이 일어나 군사들에게 붙잡혀 끌려왔는데도 처음에는 인조에게 절을 하기를 거부했다가 반정이라는 사실을 듣고 나서야 인조에게 절을 했다 이 와중에 살해 당할 뻔했지만 이귀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다 인조에게 광해군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청했기에 충성심을 인정 받았다. 류희분의 처형을 반대했기에 인조에게 의로움을 인정 받았지만 이덕형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류희분을 처형했다. 예조판서·판의금부사·지돈녕부사·우찬성등을 지내는 등 나름 중용받았다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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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인과 분당. [2] 정여립의 난 이후. [3] 홍여순이 대사헌으로 천거되자 남이공이 반대하면서 분열. [4] 계축옥사. 이를 계기로 일부 소북이 숙청당하고, 박승종과 대북의 갈등도 시작되었다. [5] 인조반정. 남이공을 중심으로 어찌어찌 소북( 청소북)은 존속했고 중북 역시 재야 유림으로 잔존했다. 그러나 그 이후엔 모두 남인으로 흡수되었다. 남인이 집권당이었다면 남인 속 북인계 계파가 힘을 썼을 수도 있지만, 남인 역시 순탄치 않은 길을 걸으며 북인이란 정체성은 없어졌다. [6] 북인의 수장으로, 선조 때와 광해군 초기 시절엔 재야엔 정인홍, 조정엔 이산해와 이이첨으로 대북은 나뉘어져 있었다. [7] 대북 육북의 수장. [8] 다만 1604년까지만 해도 집권당인 북인은 그리 큰 여당이 아니었는데 이 때만 해도 정승판서는 주로 서인, 남인들이 차지했다. [9] 다만 이 때 내각은 서인과 남인이 독차지했는데 이 때 조정은 여소야대였던 것이다. [建儲] 세자를 세운다는 뜻. 이 부분의 본문에서 서술하고 있는 서-동 정권교체사건 자체를 건저 사건, 건저 문제, 건저의사건(建儲議事件 건저에 대한 의견을 냈으므로 '의논할 의'자를 쓴다) 등으로 칭하기도 한다. [11] 이른바 남북이란 말도 유래가 있다. 무자년(1588, 선조 2가을에 문소(聞韶)에 가서 부모님을 뵙고 돌아오니, 중숙(重叔)이 나에게 말하기를, “근래 남북이란 말이 있는데, 그대는 들은 일이 있소?” 하므로, 내가 놀라 묻기를,“그것이 무슨 소리오?” 하니, 대답하기를, “남은 이현을 우두머리로, 그 다음이 경선ㆍ자앙, 그리고 그대 등 몇 사람이며, 북은 여수(汝受 이산해(李山海))를 우두머리로, 중겸(仲謙 백유양(白惟讓))ㆍ경함(景涵 이발(李潑)) 형제 및 나까지 몇 사람이오.”하였다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46A_0010_000_0010_2002_014_XML [12] 대놓고는 못한다. 명색이 국본이요, 그것도 임진왜란 때 공이 큰 세잔데 "쫓아내시졈?"이라 했다가는 "니 목부터 떼고 이야기 하지."가 된다. 그런데 은근한 푸시조차도 너무 큰 배팅인지라 결국 그는 제 명에 못 죽는다. [13] 이들 대북과 소북 인물 중에서 광창부원군 이이첨(李爾瞻 1560년 ~ 1623년, 예조 판서 겸 대제학), 밀창부원군 박승종(朴承宗, 1562년 ~ 1623년, 대제학을 거쳐 정승), 문창부원군 류희분(柳希奮 1564년 ~ 1623년, 대사간, 도승지)의 "삼창"이 부원군으로 봉해지면서 광해군 재위 후반기에는 정계의 실세로 자리매김한다. [14] 사실 골북 육북 중북은 이미 선조실록부터 등장하는 말로, 당시에는 강경파인 홍여순을 골북, 온건파인 이산해를 육북이라고 했으니 폐모론에 빗대어 분파를 판별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 중북은 중자(中子) 혹은 골북 육북에 대응하여 더욱 온건파라는 의미로 피북(皮北)이라고도 하였다. [15] 다만 정창연은 서인 계열과도 접촉점이 많다. 인조반정 이후로는 정창연은 서인으로 전향한다. [16] 정인홍의 일가 제외. 당사자는 88세의 나이로 참형당했다. [17] 그러나 대북에 의해 탄압을 받은 소북의 일부는 오히려 인조반정이 일어나 인조가 즉위한 이후 직첩과 신원을 복권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류영경 등이다. [18] 이 역모에 정인홍의 조카들도 참여하였다. [19] 백유양의 초사(招辭)에 착오가 많았다. 역적에게 보낸 서찰 중에 조정의 남북(南北)에 관한 말이 있었다. 상이 비로소 조정이 또 분당한 것을 알고 유양에게 묻기를, "이른바 남인 북인은 누구인가?" 하니, 백유양이 아뢰기를,"북인은 이발·이길·정언신·정언지 및 정적(鄭賊)정여립)과 신(臣) 유양(惟讓) 등 모두 10인입니다."https://sillok.history.go.kr/id/knb_12212001_007#footnote_1 [20] 예전 남인 항목에 남인이라고 서술되어 있었지만 연려실기술과 갑진만록등의 기록에 따르면 북인이라고 한다. [21] 서인의 주요 인물인 김류, 이귀(서인 강경파)와도 친했다 라고 전해진다. [22]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따르면 최명길의 아버지 최기남과 친구 사이였기 때문에 최명길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00A_0240_010_0060_2000_005_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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