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8 01:21:06

충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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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제26대 국왕
충선왕 | 忠宣王
출생 1275년 10월 20일
고려 개경 개성부[1] 사판궁
(現 경기도 개성시)
즉위 1298년 3월 2일
고려 개경 개성부 정궁 강안전
(現 경기도 개성시)
사망 1325년 6월 23일 (향년 49세)
대도 연저[2][3]
(現 중국 베이징)
능묘 덕릉(德陵)
재위기간 고려 왕세자
1277년 2월 16일 ~ 1298년 3월 2일 (21년)
고려 제26대 국왕
1298년 3월 2일 ~ 1298년 9월 24일 (7개월)
고려 제26대 국왕 (복위)
1308년 9월 13일[4] ~ 1313년 4월 20일 (4년 7개월)
고려 태상왕
1313년 4월 20일 ~ 1325년 6월 23일 (12년 2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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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본관 개성 왕씨
고려: 원(謜) → 장(璋)
: 이지르부카(益知禮普花)
부모 부왕 충렬왕
모후 제국대장공주
형제자매 4남 3녀 중 3남
배우자 계국대장공주, 의비[5], 정비, 조비
자녀 3남 1녀
종교 불교
중앙(仲昻)
시호 고려: 선효대왕(宣孝大王)
: 충선왕(忠宣王)
작호 심양왕(瀋陽王)
심왕(瀋王)
}}}}}}}}}
1. 소개2. 정체성3. 생애
3.1. 즉위하기 전3.2. 즉위와 폐위3.3. 원 황위계승 분쟁에 개입3.4. 복위3.5. 양위
4. 평가5. 가계6. 기타7. 대중매체에서8. 둘러보기

[clearfix]

1. 소개


고려의 제26대 군주이자 초대 심왕. 묘호는 없으며 시호는 '충선헌효대왕'(忠宣憲孝大王)이다. 왕위에 오르기 전 이름은 '원'(謜)이었으며, 군주가 된 후에 '장'(璋)으로 고쳤다. 외숙모인 원나라의 코코친(闊闊真, 쿠케친)[6] 황태자비로부터 '이지르부카'(益智禮普化)[7]라는 몽골 이름을 받았다. 자는 '중앙'(仲昻).

제25대 충렬왕 제국대장공주 보르지긴 쿠틀룩켈미쉬의 장남이었으며,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이자 태조 칭기즈 칸의 4대손이었다. 즉, 고려왕 중 최초의 몽골계 혼혈왕이었다.[8]

원나라 황제와 가깝게 지내며 고려 국왕과 심왕이라는 두 왕작을 동시에 가졌기 때문에 고려심왕(高麗瀋王)이라고 불린 유일한 인물이다. 즉, 명목상 한반도 요동의 동시 통치자였다.

2. 정체성

원 간섭기 고려에서 원나라 황태제 스승이 될 정도로 어찌보면 원나라 조정 일에도 영향력을 발휘한 왕이였지만, 그래서인지 정작 고려에는 관심이 덜한 편이었다.

고려의 군주였지만 원나라에서 살았던 기간이 고려에서 살았던 기간보다 훨씬 길었고, 특히 두 차례에 걸친 5년여 재위 기간 동안에는[9] 겨우 1년여 정도만 고려에 있었다. 어머니도 원나라 황녀라 외가인 원나라의 언어 문화에 더 익숙한 상태로 자랐을 것이고, 16세부터는 거의 세계적인 초강대국이 된 원나라의 중심부에서 살았기 때문에 원나라 황실에서 고려로 귀국해 통치하라고 압력을 넣었을 때도 기어코 원나라의 수도 대도에 남았다. 즉, 직설적으로 적자면 충선왕은 고려 군주보다 원나라 보르지긴 오복 키야트씨 황실의 인척이라는 지위가 더 중요했던 고려계 몽골인이었다는 주장.

다만 고려사를 전공한 이익주 교수는 이런 견해에 대해 역사저널 그날에서 말하길, 충선왕이 다국적 정체성을 가졌던건 맞지만 고려를 '우리나라', 왕건을 '우리 태조'라고 부르며 중국에서 태어나셨더라면 송태조보다[10] 기개와 덕량이 결코 덜하지 않았을거라고 칭송하는 등 고려에 아예 무관심했던 인물은 아니었다는걸 알아달라고 당부했다.

해당 논문에선 혼혈 다문화 가정에서 자란 충선왕이 고려의 자주성과 개방성을 동시에 고려하고 있던 인물이라고 평하며, 고려와 원 사이에서 문화적 보편성을 지닌 유교 문화를 양국에 부식시키려 했다고 주장했다.

3. 생애

3.1. 즉위하기 전

고려 제25대 충렬왕 제국대장공주 아들(3남)로 태어났다. 득남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렸는데, 충렬왕이 제1비인 제국대장공주와 제2비인 정화궁주[11] 왕씨의 자리를 동급의 서열로 두었다가 제국대장공주가 노발대발해서 결국 연회가 파토나는 해프닝이 있었다.

2세 때 어머니 제국대장공주가 외가인 원나라로 데려간 적이 있었는데, 이때 외숙모였던 코코친 황태자비가 충선왕을 귀여워하며 '이지르부카'라는 몽골식 이름을 지어주었다.

아기 때인 1277년 세자로 책봉되고, 이듬해(1278) 원나라에 갔다. 세조 쿠빌라이 칸은 늦둥이 막내딸에게서 태어난 어린 외손자를 상당히 귀여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처음 외손자가 찾아왔을 때는 고려에 대한 많은 것에 호기심을 가지며 물었고, 세자 왕원의 학문적 소양을 시험했다.[12] 이때 "세자는 머리가 좋고 학문도 좋아하기 때문에 좋은 왕이 될 것이다."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충선왕은 어릴 적 총명할 뿐만 아니라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이 각별하여 주변인들로부터 좋은 평가와 기대를 받았는데, 이러한 기질을 보여주는 일화들이 전해진다. 예를 들어 해진 베옷을 입은 사람이 땔나무를 지고 궁문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사람을 보내 사연을 물었는데, 사실 땔나무 진 사람은 '장작서'의 기인이었고, 형편이 가난하여 베옷을 입은 것 뿐이었다. 그것을 들은 세자 왕원은 측은한 마음이 들었던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좋은 의복을 입고 있는데 백성의 형편은 저러하니 내 마음이 어찌 편안하겠는가?"

궁노가 동리 아이들의 을 빼앗아다가 세자 왕원에게 바치길래 세자가 정색하고 "네가 이 연을 어디서 얻어왔느냐?"라고 묻자 궁노는 우물쭈물하여 동리 아이들에게 뺐었다고 이실직고했다. 그러자 세자는 궁노를 책망하며 돌려주라고 명령했다. 이런 사연을 보면 어릴 적에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소년이었다.

다른 사례로는 1283년, 9세의 꼬마였던 세자 왕원이 아버지 충렬왕 충청도 방면으로 사냥을 나가자 갑자기 구슬프게 울기 시작했는데 놀란 유모가 까닭을 묻자 "현재 백성의 생활이 곤궁한데다 농사철이 닥쳐왔는데 아버지는 어찌하여 멀리 사냥을 떠나려하시는가?"라고 하니 측근 신하가 충렬왕에게 그대로 전한 바가 있었다. 9세에 불과한 어린 아이치고는 제법 성숙한 생각과 발언이라 이 또한 왕원의 총명함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으나, 이 일화는 앞의 두 일화와는 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여지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

왕원의 어머니 제국대장공주는 원세조 쿠빌라이 칸의 딸인 관계로 자신보다 23살 위의 남편이자 한 나라의 왕인 충렬왕을 마치 아랫사람처럼 대했다. 충렬왕이 너무 사냥을 즐기느라 나랏일을 소홀히 한다고 생각하며 못마땅해 하던 중, 1282년 충렬왕이 불을 놓아 사냥을 하다가 백성들의 곡식을 태워버리는 사고가 일아나자, 제국대장공주가 “백성들의 고통은 아랑곳없이 사냥만 일삼으니 나랏일이 어찌 되겠느냐?”며 충렬왕을 꾸짖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나온다. 세자 왕원이 사냥을 나가는 충렬왕을 보고 구슬프게 울었다는 이 일화가 1283년의 일인 것을 보면, 어린 세자 왕원이 속상했던 이유는 "아버지는 작년에 엄마한테 야단 맞고서도 아직도 정신 못 차리네"라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라는 주장. 후일 충선왕이 아버지인 충렬왕과 사이가 안 좋았던 주요 이유 중 하나가 제국대장공주가 세자 왕원에게 어릴 때부터 아버지 충렬왕에 대해 놀기만 좋아하고 나랏일에는 관심이 없는 한심한 군주라는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13]

1291년 쿠빌라이에게서 특진(特進)·상주국(上柱國)·고려국왕세자(高麗國王世子) 벼슬과 금인(金印)을 받으며 교서를 받는데 여기서 쿠빌라이가 철저하게 충선왕을 자신의 외손이라 밝히고 있다. 이를 통해 그의 위치는 원 황실에 의해 확고하게 공인받았다 봐도 과언이 아니겠다.

1296년 계국대장공주 보르지긴 부다시리를 제1비로 맞아들이게 되는데 원나라에서 혼인할 대상을 정한 것이었다. 계국대장공주는 훗날 충선왕이 즉위를 도와주는 제3대 원 무종과 제4대 원 인종의 사촌이었으며, 제5대 원 영종이 시해당한 남파의 변으로 황제가 되는 제6대 원 진종의 누나였다. 또한 그녀는 왕원의 어머니인 제국대장공주의 오빠 칭김 황태자의 손녀였기 때문에 외가 기준으로 5촌 당조카와 결혼한 셈이 되었다.

이는 세조 쿠빌라이 칸 사후 황태후가 된 쿠케친의 뜻이 작용한 것으로, 훗날 원나라 황제가 되는 원 진종의 아버지인 진왕(晉王) 카말라의 딸 계국대장공주와 혼인시킨 것이었다. 진왕 카말라는 칭김 황태자와 황태자비 쿠케친의 장남으로 태조 칭기즈 칸의 황릉이 있는 고비 사막 북쪽 몽골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쿠케친의 3남이자 카말라의 동생이었던 테무르가 원 성종으로 즉위하면서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렸다.

쿠케친은 세자 왕원을 마음에 들어했기 때문에, 제위 계승에서 밀려난 진왕 카말라의 딸 계국대장공주를 고려 왕위가 보장되어 있었던 고려 세자와 인척 관계를 가지도록 배려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또 원나라 인척이기도 한 세자 왕원을 원나라 내에서 상당한 세력을 소유하고 있었던 진왕 카말라의 딸과 혼인시키는 것으로 서로 좋은 배경이 되라는 뜻이었겠지만, 결과적으로 세자 왕원과 계국대장공주의 결혼은 파탄나다 못해 방해만 되었다.

왕원은 계국대장공주와 혼인 이전에 왕영의 딸[14], 홍문계[15]의 딸, 조인규[16]을 이미 아내로 맞은 상태였다. 그리고 충숙왕(제27대)의 생모인 의비 예수진과 혼인한 시기가 계국대장공주와 혼인한 시기보다 이전이라는 추측도 있다. 어쨌든 일찍이 세자 왕원과 결혼한 고려인 세 명은 몽골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계국대장공주와 의비보다 서열이 뒤로 밀렸다.

원나라의 반란군인 ' 카다안의 침입' 당시에는 외조부인 세조 쿠빌라이 칸에게 지원군을 요청하기도 했으며, 1294년 쿠빌라이 칸이 사망한 이후에도 1297년 원나라에 가 들을 잔뜩 가지고 고려로 돌아왔다고 한다. 세자 왕원이 고려로 돌아온 이유는 어머니인 제국대장공주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이때 왕원은 30대 후반의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이유를 당시 부왕 충렬왕 후궁으로 총애를 받으면서 안하무인으로 날뛰던 무비의 소행이라 생각하여 무비 및 그와 관련된 사람들을 죽이거나 귀양을 보냈다.

실제로 아버지 충렬왕은 왕비인 제국대장공주와의 관계가 나빠서 무비에게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게다가 흉년이 와서 백성은 굶고 있는데 시도 때도 없이 큰 돈을 들여 사냥 연회를 즐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제1비인 제국대장공주는 여러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엄격하고 사리에 밝은 성격인만큼 남편인 충렬왕에게 여러 차례 간언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거기다 제국대장공주는 강한 자존심과 사랑받지 못한 불행 때문인지 투기가 매우 강해서 다른 후궁들과 그 자녀들에게 화풀이를 하는 일이 많았다. 특히 자신이 시집오기 이전 충렬왕의 정실이었던 정화궁주 왕씨에게 강한 질투심을 드러냈다. 충렬왕은 그런 제국대장공주의 눈을 피해 무비와 사랑을 나누기 위해 더욱 자주 사냥을 나갔다. 부자 간에는 틈이 생기기 시작했고, 정치에 뜻을 잃은 충렬왕이 양위 의사를 밝히자 1298년에 세자 왕원이 23세의 나이로 제26대 고려 국왕으로 즉위했다.

3.2. 즉위와 폐위

즉위 직후, 혈기 넘치는 젊은 국왕인 충선왕은 의외라면 의외로 원나라의 간섭으로 인한 폐단을 철폐하고, '사림원'(詞林院)을 설치하여 측근 세력을 키웠는데 이로 인해 총애를 받은 인물이 박전지, 오한경, 이진, 권부4학사였다. 이후 관제를 개혁했으며, 무엇보다 권세를 누리던 권문세족의 토지를 몰수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주목할만한 정책을 의욕적으로 실시해 나갔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충선왕의 급진적인 개혁정책이 당시 고려 왕실이 감당할만한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충선왕은 세조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였기 때문에[17] "니들은 내 말에 따라라!"라는 식으로 개혁정책을 밀어붙였고, 이에 고려 대신들 중에서도 특히 친원파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밀어내려는 충선왕에게 반발하며 오히려 충선왕의 정책이 원나라에서 벗어나려는 자주적 시도라고 이간책을 부린다.

그 결과 권문세가의 이 막강해져서 충선왕이 추진한 일련의 개혁정책이 강력한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와중에 부인 계국대장공주와의 불화도 심해져 공주가 왕이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다는 식의 편지를 원나라 황실에 보내기도 했다. 이는 충선왕이 세자 시절 결혼한 고려 여인 조씨를 총애하자 계국대장공주가 조비를 질투해서 벌인 일로 이른바 조비 무고 사건이라고 부른다. 여기에 권문세가의 모략이 더해져 결국 충선왕은 원나라 눈밖에 나 즉위 7개월여만에 폐위당하고 원나라로 소환되었다.[18] 그리고 고려왕엔 충렬왕이 다시 복위한다. 이후에도 충선왕에게 원한을 품은 왕유소 등은 충선왕을 계속 모함하여 충렬왕과 충선왕 부자(父子) 사이를 이간질했으며, 충선왕을 이후에도 다시 복위하지 못하게 아주 폐위시키려고 했는데 이 과정에서 계국대장공주 재가 소동도 벌어진다.

3.3. 원 황위계승 분쟁에 개입

충선왕은 폐위되고 원나라로 온 이후 원 성종 테무르 칸의 형으로 요절한 다르마발라의 두 아들인 카이산 아유르바르와다에게 접근했다. 당시 카이산과 아유르바르와다는 둘 다 소년이었고, 부친인 다르마발라가 일찍 죽은 탓에 제위 계승이 불확실했지만 당시 원나라의 중진들은 대부분 카이두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원정을 나간 상태라서 본국에 남아있던 이들 외에 딱히 접근 대상이 없었기 때문에 충선왕은 이들에게 접근한 것으로 보인다. 충선왕은 학식이 뛰어난 종친이었고,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라서 항렬도 높았으며, 이들 또한 아비 잃은 어린 종친으로서 불안정한 처지였던 만큼 공감대가 형성되어 금방 가까워지게 되었다. 고려사에 따르면 셋이 같이 자고 일어났으며 밤낮으로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몇 년 안 되어 먼저 장성한 카이산이 원정으로 오랫동안 본국을 떠났기 때문에 충선왕은 아유르바르와다와 더 가까워졌다. 충선왕은 학문적 소양만은 원나라 황실의 종친들 중에서도 수준급이었기 때문에 아유르바르와다의 스승 역할을 맡으며 한 집에 머물며 보살폈다. 이들의 어머니 다기[19]는 카이산보다는 오랫동안 함께한 아유르바르와다에게 더 마음이 쏠려 있었다.

1307년 테무르 칸이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붕어하자 몽골 제국에서 되풀이되던 후계자 쟁탈전이 다시 재현되어 황제의 자리를 둘러싸고 황후, 외척, 권신 등 몽골 귀족끼리의 격렬한 권력 다툼이 되풀이되었다. 권력 다툼의 중심이 된 이들은 외척인 곤기라트[20] 부족을 중심으로 결속된 궁정 귀족들이었다. 테무르 칸의 황후 브르간은 곤기라트부 출신이 아니라 튀르크계 위구르족의 바야우트씨(伯岳吾氏) 출신이었기 때문에 테무르 칸의 종제였던 안서왕 아난다를 황제로 밀었다. 당시 고려에서 충렬왕 세력이 테무르 칸의 황후 브르간과 안서왕 아난다에게 줄을 댔기 때문에 충선왕은 아난다의 즉위를 반드시 막아야 했으며, 이때 충렬왕까지 대도로 와서 이 일에 개입할 정도였다.[21]

방계 즉위에 의해 기득권을 위협받는 것을 두려워한 중신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브르간 황후와 안서왕 아난다를 살해하고 아유르바르와다를 먼저 불러들였지만[22] 몽골 고원의 방위를 담당하던 카이산이 대도로 향하자 결국 카이산이 황제에 즉위하는 것으로 상호 합의를 보게 되었다. 훗날 태정제(泰定帝)로 즉위하는 계국대장공주의 남동생 이순테무르도 일단은 후계 순위에서 밀어내는데 성공한 시점에서, 카이산이 대칸이 되어도 상관없었던 충선왕이 원나라의 중신들을 설득해 카이산의 입성을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 공로로 카이산 칸 시절 그는 황태제가 된 아유르바르와다의 스승인 태사로 임명되었다.

3.4. 복위

충선왕은 대칸 계승 경쟁에서 이기게 된 이후 곧바로 권력을 회복하게 된다. 1307년 기습 인사발령을 통해 자신을 모략한 왕유소 일당을 제거하는데 성공했으며, 그를 통해 사실상 국정을 장악하게 되었다. 고려사를 보면 1307년부터는 전왕 즉 충선왕이 인사를 비롯한 모든 국정을 담당하고 있고, 충렬왕은 그냥 놀고만 있을 뿐이다. 또한 1308년 ' 심양왕(瀋陽王)'에 봉해지는데 이때 이미 그는 정동행중서성좌승상에 임명되어 있었다. 아버지인 충렬왕이 1307년에 정동행중서성우승상을 받은 것을 보면 고려 국왕 칭호만 받지 않았을 뿐 사실상 고려국왕이었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같은 해 아버지 충렬왕이 승하하자 고려로 돌아와서 다시 한 번 고려의 국왕이 되었다.

충선왕이 고려 국왕으로 복위한지 2년 후인 1310년 원 무종에 의해 심양왕은 ' 심왕'(瀋王)으로 격상되었다.[23] 형식적으로 만주 최대의 실력자들인 칭기즈 칸의 동생 가문들인 동방 3왕가동격이 된 것이었다. 거기다 충선왕은 후대 심왕들이 명목상일 뿐 실권이 없었던 것과 달리 세조의 외손자라는 출신과 대칸위 옹립의 공적 때문에 진짜 실권이 있었던 동군연합의 군주였다. 동군연합이 해체된 이후에는 고려 왕실을 이이제이하는 역할만 남게 되었지만, 적어도 충선왕 시절에는 그랬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그는 지나치게 원나라의 권력 중심과 가까워졌고, 몽골인이 아님에도 심왕위를 받는 등의 출세 때문에 타 종친들의 견제가 심해져서 고려의 신하들조차 "충선왕의 입지는 무종 인종 때문에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에 원나라 정계에서 조심하셔야 된다"고 간언할 정도였다.

다시 고려 국왕이 되어서 처음 즉위했을 때처럼 일시적으로 개혁정책을 펼쳤으나, 이전에 비해 적극적으로 정치를 펼치지는 않았고[24] 자형(姉兄)이 되는 제안대군 왕숙에게 정치를 대행하게 하며, 자신은 원나라로 가서 이른바 전지 정치라는 일종의 기형적인 원격 통치를 단행했다. 사실 통신 체계도 부실한 당시 원격 통치라는게 말이 안되는 소리긴 한데, 그 와중에도 신기하게 나름의 성과를 거둔 것이 있었으니, 바로 각염법을 시행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권문세가와 사원 소금 전매 독점을 금지하여 폭리를 취하는 것을 막고 재정을 강화했다. 또한 신진사대부가 충선왕 시기를 거치며 성장했다는 의견도 있다.[25]

3.5. 양위

존호 <colbgcolor=#fff,#191919> 태위왕(太尉王) / 대위왕(大尉王)
고려에서의 지위 상왕(上王)
별칭 노심왕(老瀋王)
관저 연경궁(延慶宮)
상왕 재위기간 1313 ~ 1325. 05

전지 정치, 원격 통치라는 기형적인 통치 행위가 당연히 곱게 보일리는 없어서, 신하들이 왕에게 고려로 귀국할 것을 여러차례 요구했으나 충선왕은 번번히 거절했다. 그러자 신하들도 결국 포기하고 세자 왕감을 고려 국왕으로 추대하려고 시도했는데, 충선왕의 심복들이 즉시 이를 대도에 알렸고 충선왕은 1310년 5월, 세자 왕감과 그를 추대하고자 했던 김의중을 살해해버린다. 이리하여 새 왕을 추대하는 것마저 어려워지자 신하들은 재차 충선왕에게 귀국을 종용했고, 원나라에서도 눈치를 주자 결국 심왕 자리만 가지고 1313년 제위 5년만에 고려 국왕 자리를 차남 강릉대군 왕도에게 넘겨줬다. 결국 이럴거면 세자는 왜... 그러고도 뒤에선 한동안 본인이 통치권을 행사해(...) 사실상 심왕과 고려왕 자리를 둘 다 차지하는듯한 꼼수도 부린다.

이후 충선왕은 대도에 머물면서 원 인종의 지원으로 원나라에서 높은 지위에 올랐다. 1314년에는 만권당(萬卷堂)[26]을 설립해 고려와 원나라 양국의 저명한 학자들을 초빙하여[27] 학술을 교류하고, 고전 연구에 힘썼다. 이때 초빙된 학자로 고려 말의 대학자 이제현이 있다. 이 와중에 원 인종에게 과거제를 제의하여 원나라의 과거제 실행을 돕기도 했다.

말년의 그는 점차 원나라 내에서도 권력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1316년에는 부왕 충렬왕과 제2비 정화궁주 왕씨의 아들로 충선왕의 이복형인 강양공의 차남 연안군 왕고에게 심왕 작위도 양위했다.[28] 또한 우승상이 물러나 그 자리가 비워졌을 때, 원 인종이 우승상의 자리를 제안했는데, 충선왕은 자신이 그 자리를 맡기에는 부족하다며 거절했다. 그때 원 인종은 "그대가 권력과 거리를 두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권력에서 아주 떨어져도 좋진 않다는 것을 충선왕은 알고 있었다. 그는 이런 처지 속에서 아버지 충렬왕처럼 사냥이나 연회에 빠지지는 않았지만 만권당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불사에 참가하거나 원나라 영역내의 여기저기에 순방을 다녀오곤 했다. 2차례의 즉위와 폐위, 복위를 겪고 아버지 및 아내 계국대장공주와도 권력다툼을 벌인 그이기에 권력의 무상함을 절실히 깨달았을지도 모를 일이다.[29]

허나 충선왕의 이런 행보에도 원 인종의 반대세력들은 그에게 적대적이었다. 원 무종과 인종의 총애로 눈에 띄는 지위까지 올라간 시점에서 이미 그의 말로는 정해져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특히 자신의 정체성이 원나라의 종친이라도, 고려인의 피가 섞인 혼혈인 충선왕은 완전한 몽골인이 결코 될 수 없었다. 말년의 그의 행보는 화무십일홍을 겪으며 그의 정체성이 경계인[30]에 가깝게 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320년 원 인종이 붕어하고, 그의 아들 영종이 즉위했다. 충선왕은 고려 출신 환관 임백안독고사(빠앤투구스, 伯顔禿古思)와 틈이 생겨[31] 그의 참소로 토번까지 유배[32]를 갔다가 이제현의 간절한 상소가 먹혀 계국대장공주의 남동생인 원 진종 태정제가 풀어줘 3년 후에 돌아왔다. 하지만 태정제는 누나와 매부 충선왕의 사이가 나빴던 것을 감안하여 충선왕을 중용하지는 않았고, 충선왕도 원나라 정계에 더는 진출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후 원나라 수도 대도에서 소일을 하다가 1325년 5월에 승하했다. 이때 그의 나이 향년 51세. 후대의 조선 왕조 임금들의 평균 수명이 47세였고, 고려는 평균 42세였으니 당시 기준에선 무난하게 살다 간 축이었다.

정식 시호는 '충선헌효대왕'(忠宣憲孝大王)으로 원나라에서 내려준 시호를 불러주기 싫어하는 쪽은 '헌효왕' 혹은 '헌왕'이라고 부른다.

4. 평가

충선왕은 성품이 현인을 좋아하고 악인을 미워했으며 총명하고 기억력이 좋아 한 번 보고 들은 일은 끝까지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늘 선비들을 데려다가 역사상 국가들의 흥망과 군신의 잘잘못에 대해 지칠 줄 모르고 열심히 토론했다. 특히 송나라 시대의 옛 일들에 큰 흥미를 가진 나머지, 자신의 막료를 시켜 《동도사략》(東都事略)을 읽게 하면서 왕단(王旦), 이항(李沆), 부필(富弼), 한기(韓琦), 범중엄(范仲淹), 구양수(歐陽脩), 사마광(司馬光) 등 명신들의 전기에 이르면 반드시 손을 들어 이마에 댐으로써 존경의 뜻을 표했다. 그리고 정위(丁謂), 채경(蔡京), 장돈(章惇) 등 간신의 전기를 들을 때면 반드시 이를 갈면서 통분해 하곤 했다.
고려사》 <충선왕 세가> -총서-

사신(史臣)은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충선왕은 세자 시절 원나라 조정에 입시해 요수(姚燧)·조맹부(趙孟頫) 같은 명유들과 교유했으며 간혹 그 나라 정치에 관여해 썩 훌륭한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왕위에 오른 후 상국의 관직 제도와 겹치는 것을 피해 관직 명칭을 바꾼 것은 제후로서의 법도에 충실한 조치였으며, 전부(田賦)를 올바르게 고치고 염법(鹽法)을 제정한 것은 정치의 요체를 안 행동이었다.
그러나 임금의 자리는 온 백성들이 우러르며 모든 정무가 집중되는 자리라 단 하루라도 비워서는 안 되는 것인데도, 왕은 황제의 분부로 복위한 뒤 부녀자들과 내시들의 꾐에 빠져 다섯 해나 연경에 그대로 눌러앉았다. 이에 나라 사람들이 필요한 물자를 대느라 고통을 겪었고 시종하는 신하들은 오랜 객지 생활에 지친 나머지 귀국할 생각만 하면서 마침내 서로 모함하기에 이르렀다.
원나라도 또한 그에게 염증을 느껴 두 차례나 귀국을 종용해오자, 왕은 회피할 구실이 없어 아들 왕도(王燾)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또 조카 왕고(王暠)를 세자(世子)로 삼았다. 때문에 부자와 형제 사이에 온갖 시기 질투가 일어나 결국 그 화(禍)가 여러 대에 이르기까지 그치지 않았다. 장래에 대한 계획이 이처럼 불성실했으니 그가 토번(吐蕃)에 유배간 것도 기실 우연이 아닌 것이다.”[33]

충선왕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감안해야 할 점은 그에 대한 대중의 비판 대다수가 전근대 역사학, 유교식 전통 역사학과 타국과의 관계사를 논하면서 타국 입장에 무지하고 사료 반영도 부족했던 20세기 사학의 잣대를 바탕으로 행해지는 것도 상당하다는 것이다. 충렬왕부터 공민왕까지 원 복속기 고려 임금들은 몽골 케식에서 배우고 성장한 몽골계 군주로 여기고 이해해야 그 행보를 이해할 수 있다.

심왕 직위 역시 마찬가지이다. 애초에 원의 정치분쟁에 개입해 공을 세워 얻어낸 특혜이자 동방 3왕가, 홍씨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 주어진 정치적 안배로 어째서 두 개의 왕위를 홍복원 가문의 반론에 사후 고려왕과 따로 계승된 것인데 이걸 마치 원의 의사따윈 상관없이 충선왕이 마음대로 후계자 지명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하는 경향이 심하다. 입성책동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주장도 결과론에 가깝다. 입성책동이 원 정계에서도 진지하게 다뤄지지 않은 것과 별개로 원이 주도하는 질서에 적응한 신하들이 원을 이용해 국왕을 견제하는 경향은 그 이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원의 지배를 완벽하게 내재화한 신하들과 고려왕과 몽골의 부마, 정동행성 승상에 걸쳐있는 고려왕의 위상에 애매한 부분이 있어서 생겨난 일이지 단순히 심왕 자리 때문이 아니다.

세자 왕감을 고려 왕위에 올리려 한다는 움직임이 있어 측근들이 이를 포착하자 죽여버린 건 단순한 패륜이 아니라 원 복속기 정치 구조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 중 하나다. 고려왕이 원과 통혼하는 유일한 집안이란 관계성을 내세워 무신정권기 땅에 떨어진 왕권을 어느 정도 복구했는데 몽골과 통혼할 수 있는 건 왕만이 아니었다.

세자 역시 원 황실과 통혼하며 원의 지배가 장기화되면 신하들 중에서도 원 황실과 통혼한 이들이 등장한다. 세자는 고려에 가 있는 왕과 달리 케식에서 원 황제를 보좌하기에 황제와의 관계가 고려 왕보다 더 가까웠다. 고려 내에 왕의 지지기반이 없고 원 황실과의 친소 유무로 왕위가 결정되는 시기에 이는 곧 왕과 세자를 정적 관계로 만든다. 충선왕은 왕감을 살해한 뒤에는 충숙왕과도 정적이 되어 그의 즉위 이후에도 한동안 인사권과 재정을 쥐고 실질적인 왕 노릇을 했다.

고려내에 왕의 지지세력이 없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왕과 세자의 정쟁, 양측 측근 세력의 다툼은 원 복속기 정치지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포인트로 단순히 패륜으로 접근할 수 없다.

충선왕이 즉위 직후 추진한 재정, 관제 개혁은 원의 제도를 본 딴 것으로 반원과는 상관없다는 것이 90년대 초반 이익주 교수의 연구로 이미 증명되었으며 이강한 교수는 여기서 더 나아가 공민왕의 개혁이 충선왕의 그것을 이어받았다고 보았다. 원의 제도를 본 딴 충선왕의 개혁을 다시 공민왕이 이어받았다는 것은 흔히 알려진 공민왕의 반원개혁 담론이 오류임을 밝히는 근거 중 하나이다.[34]

원제국의 간접 지배를 받았던 고려의 현실을 대변하는 인물로 오늘날에는 고려 국왕이자 원나라의 부마('쿠르겐'), 정동행성의 승상인 원 간섭기 고려 국왕의 위치를 파악하고, 몽골과 고려의 관계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인물로 다뤄지고 있다.

21세기 한국 사학계는 다각적으로 몽골과 고려의 관계를 연구하는 것이 동향이며[35] 충선왕은 그런 복잡다단한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충선왕은 악평을 받을만한 여지도 있는 것은 사실인데, 부자 간의 권력 암투 끝에 결국 사단이 난 것도 좋은 일은 결코 아니지만 역사에 더한 사례도 있으니 일단은 그렇다 치더라도, 수년간의 원격 통치는 현대적 기준에서 봐도 지도자로서 심각한 결격 사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백번 양보해 정체성을 원에 둔다 치더라도 원 제국의 황족으로써 어찌되었든 자기가 맡은 분봉국을 제대로 통치를 해야 하는 의무가 있음에도 통신 매체가 발달한 시대도 아닌데 대도에서 편지로 원격 통치를 시행한다는 상식 밖의 행태를 보인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36] 결국 능력은 있었을지 모르나 그에 걸맞는 책임감은 부족한 인물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5. 가계

  • 제1비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
  • 제2비 의비 예수진(懿妃 也速眞, 야속진. ? ~ 1316년) - 황족 몽골인.
  • 제3비 정비 왕씨(靜妃 王氏, ? ~ 1345년) - 정화궁주의 조카.
  • 제4비 조비(趙妃)
  • 제5비 순화원비 홍씨(順和院妃 洪氏, ? ~ 1306년) - 홍규(洪奎,1242 ~ 1316년)의 딸. '원비'(院妃)는 고려시대에 '궁주'(宮主) 다음가는 '원주'(院主)인 '비'(妃)를 칭하는 말이기 때문에 '원주'(院主)로 추정된다.[37]
  • 제6비 순비 허씨(順妃 許氏, 1271년~1335년) - 과부 출신이며, 전 남편은 제안공 왕숙의 아들 평량공 왕현(平陽公 眩, ?~1300년)이다. 딸들이 옹주인 것으로 보아 '옹주'(翁主)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는 어머니와 딸이 봉작을 공유했다.) 전 남편 사이에서 3남 4녀를 두었다.
  • 의붓아들: 순정군 숙(順正君 璹)
  • 의붓아들: 쌍봉장로 자각(雙峰長老 慈覺)
  • 의붓아들: 회인군 정(懷仁君 楨)
  • 의붓딸: 영복옹주(永福翁主) - 양양군(襄陽君) 김기언(金基彦)에게 출가
  • 의붓딸: 연희옹주(延禧翁主) - 원나라의 좌승상 길길반의(吉吉反懿)에게 출가
  • 의붓딸: 백안홀독황후(伯顔忽篤皇后) - 제4대 원 인종과 혼인
  • 의붓딸: 경녕옹주(慶寧翁主) - 경양군 노책(慶陽君 盧吸)에게 출가, 손녀는 제34대 공양왕의 비인 순비 노씨이다.
  • 궁인(宮人) - 《고려사》 <이능간 열전>에 따르면 충선왕이 가까이 하던 여인으로, 백문거에게 하사했다고 한다.
  • 3남: 덕흥군 혜(德興君 譓, 생몰년 미상) - 몽골식 이름은 '타스티무르'(塔思帖木兒)
  • 내연녀 숙비 김씨(淑妃 金氏) - 본래 부왕인 제25대 충렬왕의 후궁 숙창원비(淑昌院妃)였다.
  • 생모미상
  • 딸 : 수춘옹주(壽春翁主) 수사도 정안부원군(定安府院君) 허종(許琮)에게 출가, 시아버지인 양천군 허숭(許嵩)은 순비 허씨의 오빠이다.

  • 왕후(王煦) : 본명은 권재(權載)로 안동 권씨 첨의정승 권부(權溥)의 아들이다. 충선왕의 양자로 입양되어 왕씨(王氏) 성을 하사받았다.
    • 왕중귀(王重貴) : 왕후의 아들로 감찰대부를 지냈다. 1369년(공민왕 18) 경원군 노은(盧訔)이 북원(北元) 혜종(원)의 조서를 들고 고려로 들어왔다가 붙잡혀 국문을 받게 되는데 북원과 통하여 고려를 염탐했다고 거짓자복하였다. 이때 전 감찰대부 왕중귀, 추밀원사 이수림 등이 공모자로 연루되어 죽임을 당했다.

6. 기타

  • 예술 감각도 뛰어나서 특히 그림에 능했다고 전해지는데, 예술가적 기질을 가진 군주답게 여성 관계도 상당히 복잡해서 정사인 《고려사》도 그렇고 야사에도 여성들과 얽힌 일화가 많이 남아있다. 여러가지로 드라마틱한 삶을 산 혼혈 군주이다.
  • 여성편력에 더해 양성애자로 동성 애인을 둔 기록이 남아있는 고려의 국왕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충선왕의 동성 연인은 원충(고려)(元忠)이라는 사람이었는데, 18세가 되던 해에 원나라 수도 대도에 머물고 있었던 충선왕을 모시기 위해 파견되었고, 이후 그의 측근으로 남았다. 《고려사》 <열전>에 따르면 충선왕은 원충을 남색으로 총애하여 그가 채 20세가 되기도 전에 국성인 왕씨 성을 내려주고, 벼슬도 높여주었는데 성격이 강직했던 원충은 이를 부담스러워하며 사양했다. 그러자 충선왕은 기분이 크게 상해 그에게 내려주었던 왕씨 성을 거두어가고 벼슬도 강등시켜 버렸으나 후에 충선왕이 고려로 귀국할 때 압록강까지 마중나온 원충을 보고는 화가 풀렸는지 그를 다시 우대하고 보살펴 주었다고 하는데 원충은 이후 충선왕의 아들인 충숙왕까지 섬기다가 죽었다. 역사속에서 전제군주의 동성 연인이 뒷배경을 믿고 오만방자한 짓을 일삼는 것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닌데 원충은 바르게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38]
  • 조선의 제17대 국왕인 효종 청나라로부터 '충선왕'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한자까지 고려의 제26대 충선왕과 같다. 다만 조선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멸시해서 청나라에 보내는 국서 등에만 이걸 쓰고 내부적으로는 사용하지 않았는데, '효종'이라는 묘호는 청나라 몰래 쓴 것이다.
  • 인천광역시 부평구에 충선왕의 이름을 딴 도로인 '충선로'가 있다. '부평'이라는 지명이 정해진 것이 충선왕 시대라는 걸 감안한 듯 하다. 부평의 본래 지명은 '길주목'이었으나 충선왕 2년(1310년)에 '부평부'로 바꾸었던 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한편 '인천'이라는 지명은 조선 태종 13년(1413년)부터 사용되었다.
  • 어진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는 왕인데 공민왕 시대에 왜구에 의해서 흥천사에 소장된 충선왕과 계국대장공주의 영정이 탈취되었기 때문이다. 왜구들 입장에서 어진은 고가품으로 거래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만일 남아있다면 고려시대 유물이 많은 일본 어딘가에 떠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 전설에 따르면 1차 재위 기간 이후 원나라에 끌려갔을 때 어느 공녀 출신 궁녀 가야금을 타면서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본 꿈을 꿨는데, 이상해서 그 궁녀를 찾았더니 고려에서 살았던 소녀로 봉선화 물을 들이면서 고국으로 돌아올 꿈을 품고 있었다. 그런 다음 궁녀는 가야금 음악으로 그의 마음을 달래주었으며, 그는 궁녀를 생각하면서 조국으로 돌아오려는 꿈을 키운 결과, 원 무종 카이산이 제위에 오를 때 큰 공을 세운 덕분에 고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궁녀에게 은혜를 갚으려고 불러오려고 했으나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충선왕은 궁녀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궁궐에 봉선화를 많이 심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 개인적으로는 학문을 좋아해서 책벌레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었다고 하는데, 왕세자 시절 외조부 세조 쿠빌라이 칸에게 학문적인 수준을 인정받기도 했고, 원나라에서 지내던 시절 보르지긴씨 황족들 사이에서 학문에 능하다고 인정받았다. 제4대 원 인종이 어렸을 적에는 수십 년 동안 함께하면서 학문을 가르치기도 했고, 제3대 원 무종 시절에는 황태제였던 인종의 '태사'가 되어 황태제의 스승역을 맡기도 했다. 호학 성향 때문에 상왕 시절 대도 만권당을 세우고, 고려와 원 양국의 학자들을 초청해서 학문 연구에 힘쓴 것도 유명하다. 이 때 원나라의 높으신 분들께서 고려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하자 《 고려실록》을 고려에서 가져와 보여주다가 고려 당국의 항의(...) 때문에 돌려준 일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뛰어난 고려인 학자들을 발굴해 원나라에서 활동하도록 지원하기도 했는데 이제현[39]이 그 중에 한 명이다. 비극적인 애산 전투로 한족 왕조인 남송이 멸망한 이후, 원나라로 전파된 주자 성리학이 원나라에서 고려로 처음 전해질 때 만권당을 경유했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고려시대 후기와 조선시대 유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 경상북도 경산시가 지금의 이름을 갖게 한 국왕이다. 원래는 장산현이었는데 1310년에 충선왕의 즉위로 장을 피휘하면서 경산으로 바뀐 것이다.
  • 왕명을 출납하는 사림원 설치, 소금을 전매하는 각염법, 동성금혼령, 정방 폐지 등을 실시하였다.

7. 대중매체에서

양성애자 왕인데다 부자 갈등, 원나라에서도 활약한 국제인, 학구적 기질, 개혁 군주의 이미지 등을 생각하면 사극의 소재거리로는 충분한 요소를 가지고 있는데 실제 등장한 적은 거의 없다. 이건 충선왕을 다룰려면 원 간섭기 자체를 언급할 수 밖에 없는데 이 시기 자체가 어찌됐든 외세가 개입한 흑역사 요소가 있어 국민정서에 맞지 않아 시청률을 확보하기 힘든 탓도 있다. 또한 역사 교과서에서도 이 시기 자체를 어물쩍 넘어가 버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자연스레 인지도도 높지가 않고[40], 치세 후반기로 갈수록 암군의 면목도 보이기 때문에[41] 매력있는 스토리 짜기가 생각보다 힘든 편이다. 덕분에 퓨전 사극은 몰라도 정통 사극으로는 앞으로도 다른 소재 다 떨어지지 않는 한 나올 가능성이 그리 높진 않다.[42]
  • 만화가 김은희 씨가 충선왕과 무종을 주인공으로 한 만화 《더 칸》을 연재했으나 결국 미완성으로 남았다.
  • 로맨스 소설로는 충선왕을 주인공 중 1명으로 한 《 왕은 사랑한다》가 있는데 고려의 개혁을 꿈꾸는 왕세자로 아버지 충렬왕 및 충렬왕의 측근인 환관 권문세족 등의 기득권 세력과 갈등한다. 고려 제일의 거부인 종실 제후 영인백의 외동딸인 왕산을 사랑하게 되나 종친이자 자신의 절친인 왕린이 그녀와 가까워지자 둘 모두에 대한 애정이 배신감으로 변해 점차 얀데레화 되어 간다. 로맨스 소설이나 정치 상황 묘사도 실제 역사를 따라 사실적으로 쓰여진 편이다. 충렬왕과 충선왕 부자간의 격렬한 갈등과 충선왕의 개혁 시도 등에도 비중을 두어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책을 찾는 사람들도 재미있게 읽을 법하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43]가 2017년 MBC에서 방영되었으며, 배우 임시완이 연기했다.
  • 또 다른 로맨스 소설로는 카카오페이지에서 연재 완료된 《손끝에 물든 향기》가 있다. 조비 무고 사건을 겪는 여주인공 조영경을 사랑하는 남주인공 왕원으로 나온다. 사랑하지만 원나라의 간섭하에 결국 여주인공을 버리는 비운의 캐릭터이다.
  • 채널A의 < 천 개의 비밀 어메이징 스토리>에서 아버지 충렬왕의 후궁이었던 숙창원비 김씨를 취하는 내용이 소개되었다.

8. 둘러보기

<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고려사(高麗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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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세가(世家)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rowcolor=#670000,#fedc89> 1·2권 3권 4·5권
태조 · 혜종 · 정종定宗 · 광종 · 경종 성종 · 목종 현종 · 덕종
<rowcolor=#670000,#fedc89> 6권 7·8·9권 10권
정종靖宗 문종 · 순종 선종 · 헌종
<rowcolor=#670000,#fedc89> 11·12·13·14권 15·16·17·18·19·20권 21권
숙종 · 예종 인종 · 의종 · 명종 신종 · 희종 · 강종
<rowcolor=#670000,#fedc89> 22·23·24권 25·26·27권 28·29·30·31·32권
고종 원종 충렬왕
<rowcolor=#670000,#fedc89> 33·34·35권 36권 37권
충선왕 ·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 충정왕
<rowcolor=#670000,#fedc89> 38·39·40·41·42·43·44권 133·134·135·136·137권열전 45·46권
공민왕 우왕 · 창왕 공양왕
<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 지(志) ]
47·48·49권 「천문(天文)」 / 50·51·52권 「역(曆)」 / 53·54·55권 「오행(五行)」 / 56·57·58권 「지리(地理)」 / 59·60·61·62·63·64·65·66·67·68·69권 「예(禮)」 / 70·71권 「악(樂)」 / 72권 「여복(輿服)」 / 73·74·75권 「선거(選擧)」 / 76·77권 「백관(百官)」 / 78·79·80권 「식화(食貨)」 / 81·82·83권 「병(兵)」 / 84·85권 「형법(刑法)」
[ 표(表) ]
86·87권 「연표(年表)」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후비·종실·공주 열전(列傳)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88권 「후비1(后妃一)」
89권 「후비2(后妃二)」
90권 「종실1(宗室一)」
91권 「종실2(宗室二)」· 「공주(公主)」
태조
신혜왕후 유씨 · 장화왕후 오씨 · 신명순성왕태후 유씨 · 신정왕태후 황보씨 · 신성왕태후 김씨 · 정덕왕후 유씨 · 헌목대부인 평씨 · 정목부인 왕씨 · 동양원부인 유씨 · 숙목부인 · 천안부원부인 임씨 · 흥복원부인 홍씨 · 후대량원부인 이씨 · 대명주원부인 왕씨 · 광주원부인 왕씨 · 소광주원부인 왕씨 · 동산원부인 박씨 · 예화부인 왕씨 · 대서원부인 김씨 · 소서원부인 김씨 · 서전원부인 · 신주원부인 강씨 · 월화원부인 · 소황주원부인 · 성무부인 박씨 · 의성부원부인 홍씨 · 월경원부인 박씨 · 몽량원부인 박씨 · 해량원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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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6px -11px" 혜종 정종 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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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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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희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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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열전(列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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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권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 유금필 · 최응 · 최언위 ( 최광윤 최행귀 최광원) · 왕유 왕자지 · 박술희 · 최지몽 · 왕식렴 · 박수경 · 왕순식 이총언 견금 윤선 흥달 선필 태평 · 공직 · 박영규
93권
서필 · 최승로 최제안 · 쌍기 · 최량 · 한언공 · 류방헌 · 김심언 · 최항 · 채충순
94권
서희 서눌 서공 · 유진 · 강감찬 · 최사위 · 황보유의 장연우 · 양규 ( 양대춘) · 지채문 지녹연 · 하공진 · 김은부 · 주저 · 강민첨 · 곽원 · 왕가도 · 김맹 · 류소 · 윤징고 · 위수여 · 전공지 · 이주헌 · 이주좌 · 안소광 · 조지린
95권
최충 최유선 최사제 최약 최윤의 · 이자연 이자량 이자인 이혁유 이자현 이자덕 이예 이공수 이지저 이오 이광진 · 박인량 박경인 박경백 박경산 · 황주량 · 류신 · 왕총지 · 위계정 · 소태보 왕국모 고의화 · 문정 · 정문 · 김원정 · 손관 · 최사량 · 김선석 · 임의 임원후 임극충 임극정 임부 임유 임익 임항 · 김한충
96권
최사추 · 김인존 · 윤관 윤언순 ( 윤언식 윤언민 윤언이) 윤인첨 윤세유 윤상계 · 오연총
97권
김부일 김부의 · 고령신 · 김황원 이궤 · 곽상 곽여 · 유재 호종단 신안지 · 김경용 ( 김인규) · 최홍사 · 한안인 · 이영 · 한충 · 임개 유녹숭 · 김준 · 류인저 · 강증 · 허경 · 문관 · 정항 정서 · 김극검 · 김약온
98권
김부식 김돈중 김군수 · 정습명 · 고조기 · 김정순 · 정극영 · 박정유 · 최사전 · 김향 · 최자성 · 김진 · 임완 · 최기우 · 김수자 · 최유 · 이숙 이위 · 허재
99권
양원준 · 최유청 최당 최린 최선 최종준 최온 최문본 최평 최옹 · 이공승 · 신숙 · 한문준 · 문극겸 · 류공권 류택 · 조영인 · 왕세경 · 이순우 · 임민비 · 최척경 · 함유일 · 염신약 · 이지명 · 유응규 유자량 · 현덕수 · 최균 최보순 최윤개 · 김거공 · 한유한
100권
두경승 · 우학유 · 노영순 · 조위총 · 방서란 · 박제검 · 기탁성 · 홍중방 · 경대승 · 진준 · 최세보 · 박순필 · 이영진 · 백임지 · 이준창 · 최충렬 · 정세유 정숙첨 정안 · 정국검 이유성 · 정방우 · 정언진
101권
민영모 민식 · 송저 · 김광중 김체 · 안유발 · 최여해 · 최우청 · 왕규 · 차약송 기홍수 · 정극온 · 류광식 · 권경중 · 김태서 김약선 김미 · 문한경 권세후 백돈명 · 노인수 · 김의원
102권
금의 · 이규보 이익배 · 유승단 · 김인경 김승무 · 이공로 · 이인로 오세재 조통 임춘 · 조문발 · 이순목 이수 · 김창 · 송국첨 · 최자 하천단 · 채송년 채정蔡楨 · 손변 · 권수평 · 이순효 장순량 · 송언기 · 김수강 · 김지대 · 이장용
<rowcolor=#670000,#fedc89> 103권 104권
조충 조변 · 김취려 김문연 김변 · 이적 · 채정蔡靖 · 박서 송문주 · 김경손 김혼 · 최춘명 · 김희제 · 이자성 · 김윤후 · 김응덕 김방경 김구용 김제안 김흔 김순 김영돈 김영후 김사형 박구 · 한희유 · 나유 나익희 · 원충갑 · 김주정 김심 김종연 김석견
105권
류경 류승 류돈 류만수 · 허공 허종 허관 허금 허부 허유 · 홍자번 홍승서 홍영통 · 정가신 · 안향 안우기 안목 · 설공검 · 유천우 · 조인규 조서 조연 조덕유 조린 조연수 조위
106권
백문절 백이정 · 박항 · 곽예 · 주열 · 이주 이행검 · 장일 · 김구 · 이승휴 이연종 · 김훤 김개물 · 정해 정오 정포 정공권 · 조간 · 심양 · 추적 이인정 채우 · 김유성 곽린 · 윤해 윤택 · 이영 · 엄수안 · 안전 · 최수황 · 박유 · 홍규 홍융
<rowcolor=#670000,#fedc89> 107권 108권
한강 한악 한수 한방신 · 원부 원충 원호 원선지 원송수 · 김련 · 김부윤 · 정인경 · 권단 권부 권준 권렴 권용 권적 ( 권고) 권화 권근 · 민지 민상정 민종유 민적 민사평 민변 민제 · 김지숙 김인연 · 정선 · 이혼 · 최성지 최문도 · 채홍철 · 김이 · 이인기 · 홍빈 · 조익청 · 배정지 · 손수경
109권
박전지 · 오형 · 이진 · 윤신걸 박효수 · 허유전 · 박충좌 · 윤선좌 · 이조년 이승경 · 이곡 · 우탁 · 안축 안종원 안보 · 최해 · 장항 · 이성 · 조렴 왕백 · 이백겸 · 신군평
<rowcolor=#670000,#fedc89> 110권 111권
최유엄 · 김태현 김광재 · 김륜 김경직 김희조 김승구 · 왕후 왕중귀 · 한종유 · 이제현 이달존 이보림 · 이능간 염제신 · 이암 이강 · 홍언박 홍사우 류연 · 류탁 · 경복흥 · 김속명 · 이자송 · 조돈 조인옥 · 최재 · 송천봉 · 홍중선 · 김도 · 임박 · 문익점
112권
이공수 · 류숙 류실 · 이인복 · 백문보 · 전녹생 · 이존오 · 이달충 · 설손 설장수 · 한복 · 이무방 · 정습인 · 하윤원 · 박상충 · 박의중 · 조운흘
113권
안우 김득배 이방실 · 정세운 · 안우경 · 최영 · 정지 · 윤가관 · 김장수
114권
윤환 · 이성서 · 이수산 이념 · 이승로 · 황상 · 지용수 · 나세 · 김선치 · 전이도 · 구영검 · 오인택 · 김보 · 변광수 · 정지상 · 임군보 · 나흥유 · 목인길 · 김유 · 양백연 · 지용기 · 하을지 · 우인열 · 문달한 · 김주 · 최운해
{{{#!wiki style="margin: -16px -11px" <rowcolor=#670000,#fedc89> 115권 116권 117권
이색 · 우현보 · 이숭인 심덕부 · 이림 · 왕강 · 박위 · 이두란 · 남은 정몽주 · 김진양 · 강회백 · 이첨 · 성석린
<rowcolor=#670000,#fedc89> 118권 119권 120권
조준 정도전 윤소종 윤회종 · 오사충 · 김자수 }}}
121권
<rowcolor=#670000,#fedc89> 「양리(良吏)」 「충의(忠義)」
유석 · 왕해 · 김지석 · 최석 · 정운경 홍관 · 고보준 · 정의 · 문대 · 조효립 · 정문감
<rowcolor=#670000,#fedc89> 「효우(孝友)」 「열녀(烈女)」
문충 · 석주 · 최루백 · 위초 · 서릉 · 김천 · 황수 · 정유 · 조희참 · 정씨 · 손유 · 권거의 노준공 · 신씨 · 윤구생 · 반전 · 군만 유씨 · (현문혁의 처) · (홍의의 처) · (안천검의 처) · (강화부 세 여인) · 최씨 · 배씨 · 문씨 · 김씨 · 안씨 · 이씨 · (권금의 처)
122권
{{{#!wiki style="margin: -16px -11px" <rowcolor=#670000,#fedc89> 「방기(方技)」 「환자(宦者)」 「혹리(酷吏)」
김위제 · 이녕 ( 이광필) · 이상로 · 오윤부 · 설경성 정함 · 백선연 · 최세연 · 이숙 · 임백안독고사 · 방신우 · 이대순 · 우산절 · 고용보 · 김현 · 안도치 · 신소봉 · 이득분 · 김사행 송길유 · 심우경 }}}
123권 「폐행1(嬖幸一)」
유행간 · 영의 · 김존중 · 정세신 · 백승현 · 강윤소 · 염승익 · 이분희 이습 · 권의 채모 이덕손 · 임정기 ( 민훤) · 주인원 · 이지저 고종수 김유 · 인후 인승단 · 장순룡 차신 노영 · 조윤통
124권 「폐행2(嬖幸二)」
윤수 윤길보 ( 송화) · 이정 김문비 이병 · 원경 · 박의 · 박경량 · 전영보 · 강윤충 · 배전 · 민환 · 윤석 · 손기 · 정방길 임중연 강융 · 신청 박청 · 왕삼석 양재 조신경 최노성 윤현 안규 · 최안도 이의풍 김지경 이인길 · 노영서 박양연 송명리 · 김흥경 · 반복해 · 신원필
125권 「간신1(姦臣一)」
문공인 · 박승중 · 최홍재 · 최유칭 · 박훤 · 송분 · 왕유소 · 송방영 · 오잠 석주 · 김원상 · 류청신 · 권한공 · 채하중 · 신예 전숙몽 · 이춘부 · 김원명 · 김횡 · 지윤
126권 「간신2(姦臣二)」
이인임 · 임견미 · 염흥방 · 조민수 · 변안열 · 왕안덕
{{{#!wiki style="margin: -16px -11px" <rowcolor=#670000,#fedc89> 127권 「반역1(叛逆一)」 128권 「반역2(叛逆二)」 129권 「반역3(叛逆三)」
환선길 · 이흔암 · 왕규 · 김치양 · 강조 · 이자의 · 이자겸 · 척준경 · 묘청 ( 정지상) 정중부 이광정 송유인 · 이의방 · 이의민 · 정방의 · 조원정 석린 최충헌 최이 최항 최의 }}}
<rowcolor=#670000,#fedc89> 130권 「반역4(叛逆四)」 131권 「반역5(叛逆五)」
한순 다지 · 홍복원 ( 홍차구 홍군상 홍선 장위 류종) · 이현 · 조숙창 · 조휘 · 김준 · 임연 · 조이 김유 이추 · 한홍보 · 우정 · 최탄 · 배중손 조적 · 조일신 · 김용 · 기철 · 노책 · 권겸 · 최유 · 홍륜 · 김문현 · 김의
132권 「반역6(叛逆六)」
신돈
133·134·135·136·137권
신우(우왕) ( 신창(창왕)) }}}}}}}}}}}}

[1] 충선왕은 '경'(京)에서 태어난 마지막 군주였다. 아버지 충렬왕 재위 34년째에 '경'(京)은 천자국 제도라는 이유로 '개경 개성부'는 '개성부(開城府) 개성현(開城縣)'으로 격하되었기 때문이다. [2] 연저의 '연'(燕)은 단순히 대도의 별칭으로 보인다. 즉 연저는 고유명칭이 아니라 '대도에 있는 자택'이란 뜻으로 보인다. [3] 고려 군주 중 제28대 충혜왕과 함께 외국에서 죽은 군주 중 한 명이다. 이는 지금 기준으로 황금씨족의 일원이었던 당시 충선왕은 원나라를 자신의 조국으로 봤을 수 있다. [4] 충렬왕이 승하하는 건 7월 기사일이지만, 준비 과정을 거치느라 1개월 늦게 왕위에 올랐다. [5] 2비로 몽골인이었지만 보르지긴씨 황족 출신은 아니었던 듯 하다. 세자 광릉군(廣陵君) 왕감(王鑑)과 제27대 충숙왕의 모후였다. 이름은 예수진(也速眞). [6] 쿠빌라이 칸의 아들인 칭김 황태자의 황태자비. 훗날 '휘인유성황후 옹기라트씨'(徽仁裕聖皇后 弘吉剌氏)로 추존되었다. [7] 젊은 힘센 황소라는 뜻. [8] 참고로 제26대 충선왕을 시작으로 제33대 창왕에 이르기까지의 고려 국왕들은 고려인 몽골인 사이에서 태어났거나, 후궁 등 고려인 모친에서 나온 자식들이라도 부왕은 몽골계 계통이었던만큼 한•몽 혼혈을 유지했다. 그러다 창왕 다음 왕이자 고려 왕조의 마지막 왕인 제34대 공양왕때 가서야 공양왕이 원 간섭기 전의 군주인 제20대 신종의 후손이었기에 한•몽 혼혈이 아니게 된다. [9] 사실 2차 즉위 1년 전부턴 이미 부친 대신 실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아들 충숙왕에게 양위 이후에도 태상왕으로 상당기간 영향력을 발휘했다. [10] 충선왕은 송의 학문과 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즉, 고려-몽골 혼혈에 송 문화까지 흡수한 다문화적 요소가 있는 인물이었다. [11] 본래 정비였으나 제국대장공주가 시집오면서 후비로 밀려났다. [12] 어느 날 쿠빌라이 칸이 어린 충선왕에게 "가장 현명한 황제는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충선왕은 " 한 고조 당 태종 아닐까요?"라고 답했다. 또 쿠빌라이 칸은 "나, 한 고조, 당 태종 셋 중 누가 가장 뛰어난 황제라고 생각하느냐"고도 물었는데, 충선왕은 "저는 아직 너무 어려서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했다. [13] 제국대장공주가 나랏일은 돌보지 않고 사냥만 다냔다고 충렬왕을 꾸짓은 일 말고도, 음악을 좋아하는 충렬왕이 틈만 나면 내관과 악사들에게 연주를 시키자 제국대장공주가 사람을 보내 “거문고와 퉁소로 나라를 다스렸다는 말은 들은 바가 없다”며 중단시켰다는 기록도 있다. [14] 정화궁주 왕씨의 조카. [15] 홍문계는 1270년 제24대 원종의 밀명을 받아 송송례와 함께 무신정권의 마지막 집권자인 임유무를 살해하고(경오정변), 무신정권 100여년의 역사를 종결시킨 인물이었다. [16] 몽골어 통역으로 재상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 훗날 조선의 개국공신 조준의 증조부가 된다. [17] 스스로도 '나는 위대한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다'라고 자칭할 정도였다고 한다. [18] 이는 그동안은 먼 상국 정도로만 여겨지던 원나라의 권위를 올렸지만, 반대로 고려국왕의 위상은 임명직 정도로 떨어뜨려놔 이후 고려 왕권 확립에 큰 장애를 남긴다. [19] 곤기라트부 출신, '옹기라트'부라고도 함. [20] 옹기라트 혹은 콩기라트. [21] 충렬왕은 쿠빌라이 칸 부마였기 때문에 종친 내에서 서열이 높았고, 친왕의 딸과 혼인한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였던 충선왕보다도 일단 명목상으론 더 서열이 높았다. [22] 세조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였던 충선왕 또한 계승 경쟁에서 발언권을 발휘할 수 있었으며, 충선왕은 자신과 함께한 아유르바르와다를 밀었는데 기록은 없지만 당시 충선왕은 이 복잡한 정국 속에서 대도에 있었기 때문에 다른 곳에 있었던 아유르바르와다와 중신들 사이를 연결한 것으로 추정된다. [23] 작위의 예법상 글자가 2개인 '2자왕'보다 글자가 1개인 '1자왕'의 격이 훨씬 높았다. [24] 이때 홍중희의 제1차 입성책동 문제가 터진 것도 한 가지 이유였다. 다만 충선왕을 망친 다른 주요 요인으로는 '숙창원비 김씨'가 꼽힌다. 이 여자는 본래 충선왕이 부왕 충렬왕을 위로하고자 바친 후궁이었는데, 충렬왕 사후 충선왕이 취한다. 사실 이건 수계혼이라고 해서, 아들이 아버지의 첩(물론 자신의 생모는 제외)들을 물려받는, 원나라 등 유목 민족에게는 이상하지 않은 관습의 흔적이었지만 고려인들에게는 당연히 패륜으로 받아들여질만한 행위였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충선왕이 이 요부에게 빠지는 바람에 김씨의 오빠 김문연은 종2품 첨의평리에까지 올랐고, 원나라 황제로부터 벼슬까지 받았다. 또 그녀의 요청에 따라 중경과 서경에서 행하던 팔관회도 정지시킨다. 이 꼴을 보다못한 대신 우탁이 왕의 측근들더러 "가까운 신하로서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이와 같은 추악한 일을 저지르게 했으니 그 죄를 아는가?" 라며 일갈하는데 이에 부끄러움을 느낀 충선왕은 얼마 후 원나라로 떠나고 죽을 때까지 숙창원비를 찾지 않았다. [25] 이기남(1971년), <충선왕의 개혁과 사림원의 설치>, 《역사학보》, 52호. [26] 직역하면 '10,000권의 책을 모은 곳'이란 뜻이 된다. 물론 '만'(萬)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정확히 10,000권이 아니라 그만큼 많은 책을 모았다는 수사적인 표현에 더 가깝다. [27] 이때 한족들과 교류하면서 이들에게 관직 진출의 길을 터주고 경계인인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려 했던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28] 허나 이는 훗날 왕도(충숙왕)와 왕고(심왕)가 심왕-고려왕 자리를 놓고 권력 다툼을 하는 후폭풍을 낳게 된다. 충선왕이 이런 선택을 하게 된 내면에는 원 황실이란 뒷백이 있는 자기가 아니었다면 고려의 왕위는 당연히 강양공 왕자에게 돌아갔을텐데 그게 미안해서 조카에게 챙겨준 보상 같은 것 아니었겠냐는 추측도 있다. [29] 자신이 도운 원 무종과 인종 집안도 무종 사후 후계 문제로 뒤죽박죽이 된 것을 봐서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30] 학술적 용어로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정체성을 가진 존재를 말한다. [31] 원나라 인종의 총애를 동궁 때 섬긴 인연으로 권력을 잡아, 남의 토전을 빼앗고 충선왕에게 무례한 짓을 하므로 충선왕이 원나라 태후에게 청하여 매를 치고 빼앗은 토전과 노비를 그 주인에게 되돌려주게 해 원한을 가졌다. 인종이 죽고 영종이 즉위하자 팔사길에게 뇌물을 주어 매수하고 그를 통하여 온갖 수단으로 무고하고 참소하니, 영종이 사신을 보내어 전에 빼앗겼던 토전과 뇌물을 되돌려주게 하였으며, 충선왕을 티베트에 귀양가게 하였다. 허나 이후에도 임백안독고사의 참소가 더 심해지자 1323년 임백안독고사를 사형에 처하였다. [32] 오늘날의 티베트로 유배를 갔다고 해서 비참한 생활을 한 것은 아니고, 제후국 군주까지는 아니어도 꽤 대접을 잘 받았다. 충선왕 본인도 티베트 지역의 토착 문화와 라마 불교에 흥미를 느껴 이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공부를 했다고 전해진다. 유배의 목적이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앙 정계에서 추방하기 위한 의도였던 것 같다. 도중에 이제현 등이 원 황실에 사면을 청하자 사면 대신 감형 차원인지 감숙성의 도스마(朶思麻, 타사마)로 유배지를 옮긴다. [33] 출처. [34] 학계에선 90년대 후반부터 공민왕의 정치를 민족담론에 근거한 반원개혁이라 볼 수 없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김순자, <麗末鮮初 對元․對明關係 硏究> , 연세대 박사학위논문, 1999 / 김경록, <공민왕대 국제정세와 대외관계의 전개양상>, 역사와 현실64, 한국역사연구회, 2007 / 이강한, <공민왕 5년(1356) 反元改革의 재검토>, 대동문화연구 제65호,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2009 / 이명미, <13~14세기 고려.몽골 관계 연구>, 혜안, 2016 등. [35] 대표적인 학자로 김호동, 이강한, 이개석, 이명미 등이 있다. [36] 이에 대해선 폐위 소동을 겪으면서 원나라에 있어야 자신의 목숨과 안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은 것 아니냔 시선도 있다. [37] 홍규의 딸. 홍규(1242년 ~ 1316년)는 젊은 권신 임유무를 죽이고,(경오정변) 100년이나 이어진 무신정권을 종결지은 무신으로, 제26대 충선왕의 할아버지인 제24대 원종과 아버지인 제25대 충렬왕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왕권을 되찾아 준 그야말로 공신 중에 공신이었다. 그러나 장녀가 공녀로 차출될 위기를 겪자, 그녀를 비구니로 분장시켜서 공녀 차출을 피하려다 걸리는 바람에 둘 다 모진 고문을 겪게 되었고, 결국 장녀는 공녀로 차출되면서 원나라의 귀족인 아쿠타이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그리고 충선왕은 홍규의 3녀를 자신의 후궁으로 삼는데 바로 순화원비 홍씨이다. 훗날 제27대 충숙왕이 홍규의 5녀이자 순화원비 홍씨의 친동생과 혼인하는데, 이 사람이 고려 말의 파란만장할 삶을 살았던 공원왕후 홍씨였다. [38] 고려 왕조에 충선왕처럼 동성 연애를 한 기록이 남은 임금이 제7대 목종과 제31대 공민왕인데 세 명의 케이스가 조금씩 다르다. 목종은 여자에게 무심하고, 후사도 안 보며 잘생긴 남자들을 데려다 동성애에 빠졌던 반면 충선왕은 후사도 보고 후궁도 여럿두며 여성편력이 상당했고 원충 외에는 동성 애인을 둔 기록이 없다.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 일편단심이었고, 이 점은 죽을 때까지 변치 않았으나 노국대장공주 사후 맛이 가서 여러 음행을 벌인 케이스이다. 케이스가 케이스인 탓에 사실상 왜곡되었거나 부풀려진 기록으로 보고 있다. [39] 4학사 중 한 명인 이진의 아들이자 권부의 제자였으며 사위였다. [40] 애초에 충선왕 전후 시기 왕들 정도를 빼면 공민왕 전까진 원 간섭기 왕들이 대개 단명한 편이라 딱히 많이 쓸 것도 없다. [41] 오히려 양위 이후 만권당 운영할 때 다시 상승 포인트를 맞기도 한다. [42] 정통 사극으로 가면 또 한가지의 문제가 고증상 충선왕은 아마도 변발을 해야 될텐데(다만 불개토풍 약속에도 자진해서 변발을 했다는 부친 충렬왕과 달리 검색해도 관련 언급이 딱히 없다. 아들 충숙왕은 혼혈왕임에도 몽골식 복장에 거부감을 나타낸 기록이 있다.), 이걸 감당할 주연배우가 아무래도 드물지 싶다. [43] 로맨스 소설인데도 역사적 사실에 충실했던 원작과는 달리 드라마는 각색이 많이 되어 역사에도 원작에도 충실하지 못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