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창 三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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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창부원군 이이첨 |
밀창부원군 박승종 |
문창부원군 류희분 |
이이첨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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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82642><colcolor=#fff> 조선 판의금부사
광창부원군(廣昌府院君) 이이첨 李爾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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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60년( 명종 15) |
사망 | 1623년 3월 14일 (향년 62~63세) |
참수 | |
봉호 |
- |
본관 | 광주 이씨 |
자 | 득여(得與) |
호 | 관송(觀松)· 쌍리(雙里) |
공훈 |
선무원종공신 1등(宣武原從功臣) 수성결의분충정운공신 1등(輸誠結義奮忠定運定運功臣) 익사공신 3등(效忠奮義翼社功臣) |
부모 |
부친 - 광안부원군 이우선(李友善) 모친 - 진주 류씨 류우일(柳惟一)의 딸 |
주요 경력 |
병조좌랑(兵曹佐郞) 이조정랑(吏曹正郞) 우부승지(右副承旨) 의주부윤(義州府尹) 부제학(副提學) 이조참의(吏曹參議) 대사성(大司成) 대사헌(大司憲) 예조판서(禮曹判書) 대제학(大提學) 예조판서 겸 대제학(禮曹判書 兼 大提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원접사(遠接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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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 광해군 시기의 문신이자 실권자.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득여(得輿), 호는 관송(觀松) 또는 쌍리(雙里).대북의 영수였지만 인조반정으로 처형당했다. 직함상 광창부원군이라 불렸으며 당대의 권신 '삼창(三昌)' 중 필두이기도 하다.[2][3]
2. 생애
2.1. 배경
1560년(명종 15) 충청도 충주목 지내면 대사동리(현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양덕1리 동리마을)에서 아버지 이우선(李友善)과 어머니 진주 류씨 류유일(柳惟一)의 딸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조선 초기 최대 벌열 가문 중 하나인 광주 이씨 출신으로 연산군 당시 김일손을 무오사화에 연루시켰다고 알려진 이극돈의 5대 손자이다.[4] 그러나 이 가문은 연산군 대인 갑자사화로 멸문당했다. 억울하게도 이세좌(이극돈의 조카)가 폐비 윤씨 사사 집행을 봉행하는 역할을 성종에게 강요당했기에 그것이 화근이었다. 연산군이 축출된 뒤 그나마 정상이 참작되고 명종 이후로는 이세좌의 손자인 이준경이 재상을 지내는 등 어느 정도 가문의 위세를 회복했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이이첨이 활동할 당시의 광주 이씨는 그다지 큰 위세를 떨치지 못했다.
이이첨도 편모 슬하에서 어렵게 자라났다. 이극돈의 후손이란 것 때문에 출세 전까지 억울한 일을 많이 당했다. 벼슬 좀 오르려다가도 두고두고 탄핵당해서 파직당하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가문의 뒷배경도 없었고, 뿐만 아니라 뒤를 봐줄 스승도 없었다. 말하자면 이이첨은 순전히 자기 능력 하나만으로 재상까지 오를 만큼 자수성가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임진왜란 때 온몸을 날려 불타는 창고에서 세조의 어진을 구해낸 것이 대표적이다.[5]
하지만 현대 사회와 마찬가지로 당시는 학연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뒷배경이 없다는 것은 출세하는데 큰 걸림돌이었다. 현대 사회에서는 이른바 라인이 없다고 줄고생을 할지언정 대놓고 차별하지는 않지만 연줄 시대였던 조선, 특히 이이첨이 활동하던 시대에는 누구 누구 제자라는 타이틀이 없다는 것 자체가 대놓고 약점으로 지적되는 시대였다. 비슷한 사례가 대표적으로 율곡 이이와 정여립이다. 실제로 이이첨은 승진 때마다 제대로 된 줄이 없어서 고생을 많이 했다. 그래서 이이첨은 자신의 편을 만들기 위해 임진왜란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대북파의 정인홍과 기자헌을 접촉했고 그들의 지지를 얻는데 성공했다.
2.2. 어진을 구해 벼슬에 오르다
임진왜란 때는 광릉의 능참봉으로서 광릉에 있는 세조능의 위패를 지키고 세조의 어진을 혼자 들고 나온 일로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 조선 시대에 어진은 단순한 그림이 아닌, 임금 그 자체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이첨의 이런 공로는 엄청난 것이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세조의 영정은 봉선사로 옮겨졌는데 하필 이때 일본군이 들어와 봉선사를 불태웠다. 광릉 참봉이던 이이첨은 도망가는 승려들을 붙잡아 영정의 위치를 묻고는 홀로 불타는 절간을 헤치고 들어가 영정을 끌어냈다.이후 영정을 안전하게 호송하기 위해 홀로 머나먼 여정을 떠나는데 낮에는 숨고 밤에 90리를 걷는가 하면 2번이나 몰래 일본군 진영 한복판을 통과했고 심지어는 중간에 의병 부대에 합류해 전투까지 치르는 등 갖은 고생을 다한 끝에 평안북도 의주로 세조의 영정을 무사히 호송했다. 이 때 남아난 초상화가 태조와 반쯤 타버린 문종, 그리고 이이첨이 찾아온 세조의 것이 전부다. 물론 후대에 태조의 것을 빼고는 모두 불타서 없어지지만 세조의 어진은 초본으로나마 남았으니 오늘날 세조의 모습을 볼 수 있는건 이 사람 덕이라고 하겠다. 다만 이이첨의 공로 자체와는 별도로 선조실록의 경우 아래에 언급하듯이 이이첨을 비롯한 북인 세력이 자화자찬을 한 내용이 적지 않으므로 어느 정도는 걸러서 받아들이는게 좋다.
세조 어진 호송으로 조정의 눈에 들어 선조 30년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병조좌랑, 사간원 정언, 시강원 사서, 지평, 홍문관 부수찬을 거쳐 선조 31년에 다시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어 사간원 헌납, 지평, 홍문관 부교리를 거쳐 선조 32년에 이조정랑에 임명되었다. 이외에도 당시 세자로 분조를 이끌며 각지를 위무하던 광해군과 함께 임진왜란 내내 위험한 지역을 누볐다. 그래서 광해군에게 호감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시기의 이이첨은 초심을 잃지 않고 민생을 염려하던 모범적인 관리였다. 전쟁 이후에는 시강원 사서로 일하며 이 때에도 젊은 광해군과 이해를 같이 해 더 돈독한 관계로 발전했다.
정유재란에서 선조 사망까지의 간극 시기에 광해군의 가장 중요한 후원인인 정인홍[6]은 경상남도에 머물렀고, 당시 조정 내에서 대북을 이끄는 리더는 훗날 폐모론을 둘러싸고 대적하게 되는 기자헌이었다. 하지만 기자헌은 긴 세월 조정에 봉사하고 노구를 이끌어 의병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던 정인홍만큼의 무게감은 없었다. 기자헌은 정인홍에 비해 역량이라든가 입김이 여실히 미치지 못했다. 선조가 광해군을 의심하고 양위 소동을 벌이기도 할 때 정인홍만큼 직설적인 상소를 올리지 않은 것에서도 기자헌의 약점이 드러난다.[7] 그래서 기자헌은 광해군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고, 이이첨한테 밀리게 됐다 .
2.3. 광해군기의 실세
광해군 즉위 이후 이이첨은 궁궐 공사 문제에서 광해군과 기자헌에게 죽이 제대로 맞아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며 광해군과 대북파의 환심을 사는 동시에 대북파 내부에서 영수로서 자신의 역할을 차츰 차츰 넓혀나갔다. 기자헌이 폐모론에 반대해 유배를 당한 직후엔 국정을 주도했다. 이이첨은 동부승지, 우부승지, 좌부승지, 의주부윤, 이조참의, 대사간, 병조참지, 부제학, 대사성 등을 하면서 권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여기에는 광해군이 전면에 나서기 꺼리는 태도와 불안한 즉위 기반 때문에 반역을 경계하는 성격도 일정 부분 도움을 주었다. 이이첨이 권력을 강화해나가는 과정을 간단히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반역(무고) 사건 발생 → 서인과 남인의 처벌 반대 의사 표시 → 이이첨과 대북파들이 나가서 상소 → 광해군이 처벌을 반대 → 기자헌을 비롯한 대북 중진들까지 다시 강경하게 나감 → 광해군이 처벌을 가함 → 이이첨과 기자헌을 비롯한 대북파들이 다시 강경하게 나감 → 광해군 처벌 강화.이러한 이이첨의 공격 패턴이 봉산옥사와 칠서의 옥에서 꾸준히 반복되었기 때문에 이이첨의 도움으로 광해군과 기자헌은 권력이 집중되었지만, 그만큼 이이첨과 대북파의 악명도 같이 가중되었다. 류영경과 임해군, 영창대군과 인조의 동생 능창군도 광해군과 대북파의 공작으로 죽었고 이원익, 이덕형, 이항복, 심희수를 비롯한 서인계와 남인계 정승들도 이렇게 쫓겨났다. 적어도 폐모살제에 대해서는 광해군이 이이첨에게 끌려다녔다는 말도 일리 있다고 볼 수 있다. 칠서의 옥에 연루될까 두려워한 허균을 행동 대장으로 부리고, 그가 불안하게 행동하자 즉각 숙청한 것은 백미이다. 봉산옥사 이후로는 이이첨이 대사헌으로서 권력을 더 강화시켰고, 계축옥사 이후로는 예조판서 겸 대제학에 올라서 실세가 되었으며 한 때 신경희의 옥으로 인해서 이이첨이 위기에 처했지만 이내 해주옥사로 위기를 반전시키면서 권력을 더 강화시켜 나갔고 동시에 폐모론 당시에는 판의금부사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하지만 다른 안건에 있어서는 광해군과 정면 대립하는 일도 많았다. 주로 후금에 대한 외교에서였는데 광해군은 중립 외교를 주창한 반면 이이첨은 "후금 사신 목을 베고 후금과 한판 싸워보자"고 맨날 선동하고 다녔다. 그러니까 이이첨은 척화파였다. 광해군이 하도 열받아서 "니가 한번 붓으로 싸워보지 그래?" 라고 하니까 이이첨은 "부모와도 같은 명나라가 맹수 같은 오랑캐들에게 당하는데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냐"고 당당히 항변했다. 이러한 이이첨의 항변에 황당해한 건 광해군 뿐이었고, 소북의 류희분 등 유자들로 이루어진 조정은 오히려 감동했다.[8]
그래서 광해군은 말년이 되자 이이첨 처리 문제로 골치깨나 썩었다. 대북 세력 내에서 기자헌이 폐모론에 대해 반대하자 이이첨은 하극상을 벌이며 그를 유배 보냈고, 그 결과 조정 전체에서 그의 권력이 지나치게 비대해진 것이다. 문제는 이이첨의 권력이 강해졌다고 해도 그 위치 또한 어중간했다는 것이다. 기자헌을 유배보낸 직후에 이이첨은 대북파의 실질적 영수였으나 그보다 더 경륜 있던 정인홍의 관록을 넘을 수는 없었고, 그래서 무슨 일을 하고 싶어도 정인홍을 비롯한 여타 대북파 주도자들과 항상 타협을 해야 했으며, 때로는 본인이 필요 이상 더 강경하게 나가야 할 때도 있었다. 이이첨이 바보도 아니고 당시 정세를 몰랐을 리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중립 외교를 주장하는 광해군에게 그냥 동조를 해버리면 자신의 권력이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그래서 이이첨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강경 반대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광해군은 폐모 이전 시절 이이첨에게 보낸 신뢰를 점점 거두게 된다. 결과적으로 그는 다른 시대의 권력자들과 달리 보는 눈이 많은 앞에서 행동대장으로 움직여야 했다.[9] 광해군 재위 후반에 들어가면 이이첨이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기자헌에게 하극상을 일으키고, 허균까지 팀킬한 이이첨의 권력이 커지자 그 반동으로 당시 왕권이 다소 약화되어 있었다. 결국 광해군은 말기에 이이첨을 견제하고 균형 잡힌 인사를 추진하려 했다. 이이첨은 1621년을 기점으로 권력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고 삼사에서도 이이첨의 세력이 물러나면서 이이첨은 유생들과 삼사에게 여러차례 탄핵을 받는다. 이에 대북은 광해군과 슬슬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를 틈타 서인 세력이 정권을 탈취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인조반정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반정 직전에 치명적인 기밀이 소북 출신 정승인 박승종과 박홍구한테 누설됐으나 광해군은 이를 접했음에도 이이첨의 농간이라 보며 큰 신경을 쓰지 않아 역모 진압의 중요한 기회를 놓쳤다.
2.4. 인조반정과 최후
평생을 '광해군의 충신'이라 자처했으나[10] 정작 광해군은 반정 후 안국신의 집에 달아나 그의 집사람인 정담수(鄭柟壽)에게 상황을 알아보게 했는데, 정담수가 돌아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고 고하자 "혹시 이이첨이 한 짓이 아니던가?"라고 묻을 정도로 그를 의심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는 류희분이 광해군에게 "이첨의 세력이 너무도 높으니 그가 꺾임을 받지 않고 변란을 일으킬 계략을 가질듯 합니다."라고 고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이첨은 반정 당일에 고향 이천으로 달아났으나 군사들이 따라와서 체포하였다. 그를 독사나 전갈을 보듯 하며 집에서 '대'자를 쓰지 못하게 해서 집안의 대문 조차 "외문"이라고 불렀던 박승종은 그래도 의병이라도 일으키려고 했지만 경기도를 돌다가 일이 틀렸음을 알고 음독 자결했다.[11] 박승종의 인척인 훈련대장 이흥립도 인조반정에 참가했기에 광해군은 박승종도 믿었을지 의문이다.이이첨은 붙잡힌 후엔 반정 가담자 신경유의 누이가 자신의 아들인 이대엽의 아내였으므로, 이대엽의 아내를 보내 석방해줄 것을 청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후 같이 체포된 류희량에게 인조가 자신을 보면 반드시 무죄석방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등 기괴할 정도의 근자감이 가득했다. 다음날 처형장에 끌려가면서 반정 주동자이자 1등 공신인 이귀에게 목숨을 구걸하면서 "대감은 나의 마음을 알 것이다. 대전께서 이제까지 보전하실 수 있었던 것은 어찌 나의 공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12] 연려실기술과 인조실록에서 이귀의 비명에 의하면 이귀가 한교를 이이첨에게 보내 이이첨이 폐모론을 강하게 주장하지 못하게 설득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혼정편록의 기록에 의하면 이귀가 광해군에게 올린 상소에 의견은 다르더라도 위기에 처한 이이첨을 자신이 구해주었다고[13] 언급했다고 한다. 이이첨은 이귀와 어느정도 인연이 있는 몸이니 자기를 살려달라고 빌 생각을 한 걸로 보인다.
그러나 이귀는 "네가 이전에 모든 일을 자신이 하지 않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하게 했던 것은 오늘 이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진정 너의 말과 같다고 할 경우 유폐의 화액을 겪으신 것이 과연 누가 한 짓이겠는가."(=이런 날에 변명하려고 그간 직접 하지 않고 쫄따구들 시켜서 행패를 부렸냐? 네놈이 아니었으면 대비께서 유폐는 왜 당했냐)라고 응수하였다. 이에 이이첨이 대답하지 못하고 형장에 끌려갔으나 처형 직전에 "하늘이 나의 무죄를 내려다보고 계실 것이다. 살아서는 효자이고 죽어서는 충신이다!"라고 외쳤다. 어쨌든 청렴하게는 살았던 걸 보면 적어도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심복이던 이위경이 "우리가 죽게 된 것은 모두가 네가 악한 짓을 했기 때문인데, 네가 어떻게 충신이 될 수 있으며 효자가 될 수 있겠는가?"라고 반발했다고 한다. 이위경은 원래 서인계 인물이었는데 이이첨의 사주를 받아 인목왕후의 폐위를 앞장서 상소하였다. 그 대가로 이조 참의에까지 올랐으나 반정으로 같이 죽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위경도 억울해할건 하나도 없다. 폐모 자체는 이이첨 계열 빼면 모두 반대했고 당시 이위경은 진사였다. 이 정도면 일단 유학자란 명칭을 붙여줄만한데 그런 사람이 왕에게 어머니를 폐하자는 상소를 올린 건 그 당시 사회에서 잘 한 행동이 아니었다. 소북 핵심들은 폐모에 반대했기에 서인들이 구명을 해줬는데, 이위경은 절대 해선 안 될 짓을 한 셈이었다. 더군다나 이위경은 협박받아서 상소를 올린 것도 아니고 자기 의지로 한 것이었다. 이후 이이첨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들이 몰려들어 이이첨의 시신을 갈기갈기 찢어 시신도 남지 못하였다.
이이첨의 집안은 인조반정으로 이이첨의 아들들도 함께 참형당해서 망했기 때문에 이이첨의 초상화는 남아 있지 않다. 손자인 이영식(李英植)은 거제도에 정배되었다. 또다른 손자인 이정식(李廷式)은 인조 6년에 공청도( 충청도)에서 자수해 역시 정배에 처해졌다. 의외로 반정 당시 안 죽고 옥중에 가둬둔 아들이 있는데, 놀랍게도 유력한 반정공신인 신경진이 그를 구명했다. 실은 그의 부인이 바로 신경진의 누이동생이었기 때문. 실제로 이 때문에 이이첨은 자신의 아들 이대엽의 아내가 신경진의 누이동생이기 때문에 신경진 형제를 통해 목숨을 구하려 하기도 했다. 하지만 거듭되는 탄핵을 받았고 처형 사실이 확정되자 그 소식을 들은 이대엽은 결국 감옥안에서 자결로 삶을 마감했다.[14]
서인은 권력을 휘두른 이이첨과 류희분 같은 북인의 거두들을 죽인 것에 그치지 않고 북인의 씨가 마르다시피 숙청했다. 서인들이 정권에 참여시켜준 남인들도 서인들에게 공조했다. 이이첨과 류희분 말고도 류몽인은 광해군을 복위하려 했다는 무고를 받아 처형 당하고 기자헌을 비롯한 다른 북인 권신들과 광해군의 측근세력들은 이괄의 난까지 거치며 모두 목숨을 잃었다.
무자비한 숙청에 북인들은 반발해서 박홍구, 임취정, 류효립[15] 등을 주축으로 광해군을 태상왕으로 복권시키는 한편, 인성군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거사를 세웠지만 발각되어서 처형당했다. 그 결과 이이첨, 류희분, 기자헌, 박승종, 류몽인, 임취정 박홍구를 비롯한 북인은 완전히 멸망했고, 남이공과 김신국 등 소북의 소수만 살아남아 정계에서 구색 수준으로 활동하다가 이후에 남인에 의해 흡수되면서 조정에서는 자취를 감추었다.[16]
3. 평가
“이이첨과 허균은 너희 나라의 귀한 신하인데, 이이첨은 가을바람에 울고 있는 계집의 상이며, 허균은 늙은 여우가 묶이어 있는 상이며, 그 밖의 재상도 모두 좋지 않으며, 여러 관원들 중에는 살기를 띠고 있는 자가 매우 많으니, 너희 나라가 어찌 무사할 수 있겠느냐.”
명나라의 사신, <공사견문> #
계축옥사 이후
허균이 이이첨 밑에서 일하던 시절 명나라 사신이 조선의 통역들에게 한 말. 여기서 명나라 사신은 허균이 뭔가에 "묶여 있는 늙은 여우" 같다고 묘사했으며, 이이첨은 "가을바람에 울고 있는 계집"이라고 묘사했다.명나라의 사신, <공사견문> #
대북의 영수로서 강한 권력을 휘둘러 서인 집권 이후 조선 말까지 부정적으로 평가받았던 인물이다. 대북파 내에서도 팀킬과 하극상으로 악명이 높았고, 왕명에조차 개길 정도로 권력을 독식해 휘둘렀다는 것이 비판의 주된 이유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명나라에 대한 태도에서 보이듯 타 당파와 노선을 맞춘 적도 많고, 아래 내용처럼 개인적으로는 청렴했으며, 고려시대 최충헌 등 다른 시기의 독불 장군형 권신에 비해 의외로 주변 눈치도 많이 보던 인물이다. 이황, 이언적을 문묘에 종사하는 것을 두고 사상적으로 남명학파인 그가 정인홍, 기자헌과 함께 반대하여 남인, 서인 계열에게 큰 반발을 샀다.
이후 1621년(광해군 13년)부터 이황, 이언적의 문묘종사를 반대한 것과[17] 인목대비 폐모론을 주동한 것에 대한 사림의 상소와 유배, 탄핵 등이 계속되었으며 그의 사후에도 서인은 물론 스승이 비판당한 남인에게 근세에 이르기까지 비난을 당했다. 특히 이이첨의 주도 하에 대북이 작성한 선조 실록의 내용은 대북어천가에 서인과 남인을 다 싸잡아 까는 내용이라서 빡친 서인과 남인들이 인조반정 이후 수정실록을 간행하기까지 했다.
이이첨은 광해군 재위 후반에 접어들자 막대한 권력을 손에 넣었고 반대 세력에게 철저하게 끌어내려진 인물임에도, 위에 서술했다시피 탐욕적이라는 평가는 거의 묘사되지 않는다. 사택을 짓는데 선조의 목릉의 나무를 쓰고 개간지를 일부 사유화했다는 점이 지적되나 이 정도는 웬만큼 실권이 있던 인물이면 흔히들 하던 일이었고 시비거리도 되지 않는다는 평가이다. 가택에는 사방에 책만 둘러져 있을 뿐 어떤 사치도 보이지 않았다고 하며 심지어 평소엔 조촐하게 베옷만 입고 지냈다고 한다. 게다가 요즘에도 자주 스캔들이 터지는 여색 문제조차 전혀 시비에 걸리지 않는다는 점을 보면 이는 그의 권력을 생각할 때 놀라우리만치 근검한 면이다. 게다가 이이첨은 권력이 막강했음에도 의외로 삼정승(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자리에는 오르지를 않았고 권력의 정점이라고 불리는 이조판서, 병조판서 자리에도[18] 오르지를 않았고 돈을 담당하는 호조판서 자리에도 오르지를 않았다.[19]
어쩌면 그의 끈이었던 정인홍이 조식의 강건한 기풍을 계승해 꼬장꼬장하단 평까지 들을 만큼 굉장히 강직한 선비였는지라 그의 학풍을 계승하려고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야사에서도 다른 권력자들과 다르게 사리사욕은 적었다고 한다. 그래서 현대 연구에서는 서인 집권 이후 지나치게 하향평가된 것을 보정하기 위해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지만, 대북파 시절에 이이첨이 보여준 행적은 하극상과 팀킬로 얼룩져 있기 때문에 나쁜 평가를 내린다.[20]
결과적으로 대북의 영수 기자헌을 유배하는 하극상을 저지르고 허균을 팀킬한 사례를 봐도 주군을 망친 냉혹한 권신이라는 평가이다. 이이첨의 경우 역모에 게거품을 무는 광해군에게 영합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취해왔다. 유교적 사고관에서 진실된 충신이란 오히려 군주가 옳지 않은 일을 하면 자기 목숨을 내걸고 반대하는 것이고 현대에도 뉘앙스는 어느정도 비슷함을 감안하면 이이첨은 결코 좋은 평가를 받을 수가 없다.
역사를 보면 이이첨 외에도, 사적으로는 의외로 청렴하고 올곧지만 지나치게 독선적이고 명예욕과 권력욕이 심각해서 일을 망치고 본인도 파멸한 경우는 생각보다 흔했다.
4. 가족 관계
이이첨의 할아버지는 '이범', 아버지는 '이우선', 외할아버지는 류우일, 어머니는 '진주 류씨'이다.이이첨의 아내는 이응록의 딸 이씨이고 아내 이씨와의 사이에서 6명의 자식을 얻었다. 아들로는 이원엽, 이대엽, 이홍엽, 이익엽이 있고 며느리로는 신립의 딸 평산 신씨와 소릉 이상의의 손녀이자 이지완의 딸 여주 이씨가 있으며 사위로는 이창후의 아들 이상항과 박승종의 아들 박자흥이 있다. 박자흥은 광해군의 아들 폐세자 이지의 아내 폐빈 박씨의 아버지로 즉, 이이첨은 세자빈 박씨의 외조부이다.
이정립과 남인 계열로 간 이덕형은 이이첨의 10촌아우였다. 며느리 여주 이씨는 이지완의 딸로, 성호 이익의 당고모이자, 반계 류형원의 이모가 된다.
5. 기타
- 이이첨과 관련된 이야기로는 "자신의 권세가 얼마 못갈 것"이란 얘길 하다 몰매맞은 맹인 점쟁이 얘길 듣고는 그를 불러 위로하고 후히 대접해 돌려보냈다는 얘기도 있는 등 나름 체통 유지는 했다고 한다.[21] 그러나 물욕이 적은 것과는 별개로 학맥없이 자수성가한 배경이 컴플렉스로 남았는지 명예욕은 상당했던 정황은 보인다. < 선조실록>에 적힌 자화자찬을 비롯하여 마지막에 충신으로 기억되기를 원했던 점 등 본인은 자신의 이름이 후대까지 영예로운 이름으로 남기를 매우 간절히 원했던 모양이다.
- < 송천필담(松泉筆談)>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이이첨이 함경 감사로 부임하던 날 수레를 타고 만세교(萬歲橋)를 건넜는데 그는 서안(書案)에 놓인 책만 보며 바깥 풍경에 눈길 1번 주지 않았다. 감영의 기생들이 그의 잘생긴 얼굴과 단정한 거동을 보고는 신선 같다며 난리가 났는데 늙은 기생 하나가 말했다. "내가 사람을 많이 겪어 보았는데 사람의 정리란 거기서 거기다. 이곳 만세교는 우리나라에서 손꼽는 기이한 볼거리다. 누구든 처음 보면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을 쳐다보지도 않는다면 사람의 정리가 아니다. "그는 성인이 아니면 소인일 것이다.''이이첨은 인물이 관옥(冠玉)처럼 훤했다. 대화할 때 시선이 상대의 얼굴 위로 올라오는 법이 없었고 말은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것처럼 웅얼거렸다(視不上於面, 言若不出口). 그를 본 이항복이 말했다. "한 세상을 그르치고, 나라를 망치고, 집안에 재앙을 가져올 자가 반드시 이 사람일 것이다." 뒤에 그대로 되었다.
- 류몽인이 남긴 < 어우야담>에는 이이첨에 관한 괴담이 하나 실려있다. 승정원 자리가 터가 안좋은 흉지였는지 귀신 소동이 자주 있었고 숙직한 승지들이 가위에 자주 눌리거나 헛것을 보고는 했다. 어느 여름날 숙직하던 한 승지가 오밤중에 더워서 열어둔 창문 밖에서 키가 8척이 넘는 귀신을 포함해 여러 귀신들이 서있는 것을 보았다. 보통 사람같으면 놀라 기절하거나 도망쳤을텐데 이 승지는 되려 미동도 없이 그들이 어떻게 하나 보고만 있었다. 시간이 흘러 귀신들이 제 풀에 못 이겨 달아났는데 <어우야담>에 의하면 이 승지는 이이첨일 수도 있다고 한다. 실제로 이이첨은 동부승지를 지낸 적이 있기에 어느 정도 교차검증이 된다. 귀신을 보고도 전혀 움츠러들지 않고 오히려 빤히 쳐다보았다니 어지간히 간이 컸던 모양. <송천필담>의 얘기처럼 역사적으로 유명한 간신들은 인간으로 기본 감정이 결여되거나 메마른 사람들이라 초인적인 담력과 자제심을 가졌고 남들이 하지 못하는 악행도 기계처럼 서슴없이 한다고 여겼다.
-
간신이라는 이미지는 구한말뿐만 아니라 의외로 현대에까지 이어졌는데, 일례로 삼성당에서 나온 아동용 전집인 이야기 한국사에 보면 구들장을 뜨겁게 데워 살해당한
영창대군의 최후를 그리며 "이 또한 이이첨이 시킨 짓이었습니다"라고 서술된다.
맞기는 맞는 말인데...그나마 이이첨의 평가가 "권신이되 탐욕적이진 않았다" 정도로 수정된 것은 21세기 들어서 광해군 관련 사료(특히 실록의 번역)가 폭넓게 연구되고 재평가된 이후다.
6. 대중매체에서
6.1. 소설
1999년 MBC 드라마 < 허준>의 원작으로 유명한 이은성의 < 소설 동의보감>에서 잠깐 등장한다. 선조의 배려로 궁궐 안에서 구안와사를 치료받을 것을 허락받은 공빈 김씨의 남동생 김병조가 입궐하여 내의원들의 치료를 받는데 중간에 무료해하는 김병조의 말동무를 하기 위해 잠시 나타나 김병조와 바둑을 두고 하룻밤을 같이 잔다. 남자들조차 돌아볼 정도로 대단히 잘 생긴 미남으로 묘사되는데 성격은 크게 좋은 편이 아니라서 쓴 탕약을 조제해서 올리는 허준에게 "더 먹을만한 약을 가져오라"고 설치는 김병조의 횡포에 꼽사리 끼어서 허준을 면박주는 역할이다.6.2. 영화
- 1967년 영화 <인조반정>에서는 배우 박노식이 연기했다.
- 1973년 영화 <박수무당>에서는 배우 권오상[22]이 연기했다.
6.3. 드라마
- 2021년 MBN 드라마 < 보쌈-운명을 훔치다>에서는 배우 이재용이 연기했다.
[1]
인조반정 이후
익사공신 삭제로 인한 삭탈.
[2]
광창
부원군(廣昌府院君) 이이첨(李爾瞻), 밀창부원군(密昌府院君)
박승종(朴承宗), 문창부원군(文昌府院君)
류희분(柳希糞).
[3]
참고로 이들 삼창이 정권을 장악한 시기는 광해군 재위 후반기로, 이때
서인·
남인·
소북계·
중북계 인물들이 파직당하거나 유배를 갔다. 그래서 삼창에게 권력이 집중될 수 있었는데 사실상 실세는 이이첨이었다.
[4]
사실 이극돈은 상당히 억울한 케이스로 능력있고 잘 나가던 엘리트였다가 김일손 등 사림파의 경솔한 행동에 인생 꼬여버린 피해자에 가깝다. 자세한 것은
조의제문 항목 참조.
[5]
별개로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극진해서 그가 살던 마을에 효행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6]
대북과 남명학파의 영수
[7]
물론 이건 기자헌이 부족해서라기보다 지지자들이 엄청났던 정인홍이니까 가능했던 것이다.
[8]
사실 이이첨이 폐모살제를 주장했기에 되려 이런 부분에서는 의리론을 강력히 주장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사실 폐모살제를 명분삼아 집권한 서인은 권력을 이끄는 상층부의 경우 외교 방침이 이이첨보다는 광해군에 가까웠다.
[9]
실제로 이이첨보다 몇 배나 강한 권력을 가졌던
한명회는 실록의 묘사만 보면 이이첨보다 약해보일 정도다.
[10]
그런데 충신이라 하기에도 뭣한게 왕의 불안감에 동조해 권력을 잡을 수 있었고, 같은 세력인 대북파한테도 하극상과 팀킬을 저질렀으니 충신이라 하기도 뭣하다.
[11]
이 때문에 광해군에게 의리를 지키기 위해 죽었다며
류몽인과 함께 광해군의 충신으로 인정되었다.
[12]
연려실기술에서는 류순익을 통하여 "대감의 말을 듣고 힘껏 폐론(廢論)을 멈추게 하였으니, 대비께서 지금까지 보존된 것은 다 내 힘이오. 그런데 어찌 특별히 용서하지 않고 죽이는 것이오"라고 말한 걸로 나온다.
[13]
혼정평록에 의하면
기축옥사로 이창후와 이이첨이 유적에서 삭제되었는데, 이창후가 이귀에게 자신의 사정에 대해 말하자 이귀가 구면에게 "이이첨과 이창후가 때를 맞추어 회문(回文)을 내지 않았다 하여 갑자기 역적을 구해내려 했다는 죄를 씌웠으니, 이로 인하여 마침내 망극한 지경에 이른다면 그대들은 앞으로 선비들의 논의에 죄를 얻을 것이니, 우리들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해 구면이 즉시 편지를 동료에게 내어 정거(停擧)가 해제되었다고 한다.
[14]
인조반정 당시 실록의 기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광해 15년 3월 14일 갑진일의
광해군일기 중초본과
광해군일기 정초본 기사이다.
[15]
광해군비의 장조카이자, 인조의 동생 능원대군의 장인
[16]
결국 영조 대에 사색당파에서 거론되는 명단은 "노론 소론 남인 소북"이었다. 소북은 존재감이라도 있었지만, 대북은 전멸했다는 것.
[17]
두 사람의 호인 회재와 퇴계에서 따와 회퇴변척이라 불리는 사건. 물론 역관광 당하고 역으로 이 주장을 뱉은 정인홍이 청금록에서 제명당했다.
[18]
이조판서는 인사권을 담당했고 병조판서는 병권을 담당했던 자리이다. 이조와 병조를 통틀어 전조라고 부르기도 했다.
[19]
이이첨이 올랐던
예조판서는 조선의 판서 중 세 번째로 서열이 높았던 직책이지만 의외로 요직이 아니었다.
[20]
이이첨이 보여준 행동들은 조선사에 아무리 찾아봐도 매우 비합리적이며, 과거
신라 하대에 벌어진 왕위 다툼이거나
고려 시대에
무신정권이 보여준 권력 다툼과 가까운 행동이기 때문에 옹호받을 필요도 없다.
[21]
오히려 자신이 지은 죄가 많아서 훗날 몰락할 것을 예견한 모습을 보이며 점쟁이를 불러서 사과하며 후하게 대접했다고 한다.
[22]
제일모직 축구단 축구선수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