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6 02:06:45

남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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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오등작(五等爵)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언어별 명칭
<colbgcolor=#dcdcdc,#222222> 한자
영어 Baron[1]
라틴어 Baro
독일어 Freiherr[2]
프랑스어 Baron

1. 개요2. 유럽3. 동아시아4. 남작위를 가진 실존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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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귀족 작위 중 하나. 동아시아의 오등작에서는 제일 낮은 작위이며, 이것으로 번역된 유럽의 작위 Baron의 경우 일반적으로 하위 작위로 여겨지나 문맥에 따라 의미가 다를 수 있다.

2. 유럽

영어의 Baron의 어원은 프랑크어에서 " 자유로운 영주", "전사" 등을 의미하는 Baro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독일어에서 남작에 해당하는 단어인 Freiherr도 "자유 영주"라는 의미이다. 'Baron'이라는 말은 영어나 프랑스어에서는 문맥에 따라서 단순히 하위귀족으로서의 '남작'이 아니라 '(군주의 직속) 봉신'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여, 남작 외에도 공작이든 백작이든 왕의 봉신을 모두 일컬었다. 이 때는 'pair/peer(동료, 동지)'라는 말과 상통하였다.[3]

자유민이라는 어원에서 보듯, 시초는 관직이 아니라 말 그대로 평민이었다. 이는 장군에서 기원한 공작, 행정관에서 비롯한 백작과 대조된다. 게르만족의 "자유민은 곧 전사"라는 관념 상, 자유민 중에서도 마을 왕초 쯤 되는 사람이 자기 부하를 데리고 군주의 소집 명령에 따라 군복무를 한 것이 유래다. 즉 밑에서부터 자연 발생한 소영주로, 군주나 제후를 섬기는 봉신이나 따로 작위가 없어 신분이 애매하던 자유민 영주들에게 붙은 자유영주라는 칭호가 그 자체로 작위로 변한 것이 남작의 유래라 할 수 있다.

현대인의 시각으로는 이처럼 귀족이라 하기에는 애매한 이들에게 굳이 왜 작위를 준 건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는데, 이를 이해하려면 전근대 시기의 지방 호족이라는 개념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전근대 시기에는 중앙정부 입장에서 온전한 지배계급으로 인정하기는 껄끄럽지만 해당 지역에서 그들이 지니고 있는 권세를 없는 것 취급할 수는 없는 토착 세력들이 상존했으며, 오히려 그러한 토착 세력의 협력없이는 향촌 단위까지 지배권을 유지하고 행정력을 투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러한 영세한 세력가들도 어떤 정도로든 중앙에서 주도하는 정치질서에 편입시키기 위해 일단은 귀족 신분으로 편입시킨 것이다.[4] 중앙집권이라는 개념은 근대에나 명확히 자리매김할 수 있는 것으로, 호족들이 완전히 해체된 것은 인류 역사 전체로 보면 매우 최근의 일이다.[5]

봉건시대에는 누구를 모시느냐가 곧 신분의 고하로 간주되었는데, 군주가 직접 거느린 남작은 저 멀리 군주의 손 안 닿는 지방의 공작이나 백작보다 더 가까이서 군주를 보좌했고, 그에 따라 종종 그 권위가 공작이나 백작보다 낮은데도 중앙 권력의 실세가 되기도 했다. 이런 현상은 특히 노르만 잉글랜드에서 두드러졌고, 이런 실세 남작들은 로드(lord)라는 별도 칭호를 수여받기도 했다.

애초에 중세의 공작이나 백작은 그 자신이 지방의 영역제후로서 독자 세력을 구축, 최종적으로는 주군의 국가와 대등한 지위까지 오르는 것을 꾀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찍이 민족 개념과 관료제에 기반한 근대적 국가 개념이 발달한 동아시아 관점에서는 중앙정부에서 군주를 보좌하면 실세가 되거나 더 많은 권력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겠지만, 중세 서유럽에서는 그러한 공적 국가가 해체되었다가 아래로부터 이합집산을 하여 국가를 다시 재구성해나갔으므로, 그러한 현상이 완결되기 전까지는 공작이나 백작은 자신의 영지에서는 군주와 다를 게 없었다. 따라서 대부분은 자기 땅에서 임금 노릇하기를 선호하지 주군을 보좌한답시고 주군 가까이서 눈치보며 살려고 하지 않았다. 선거군주제 탓에 중앙 정치에도 나름 관심가질 일이 많았던 신성로마제국을 제외한다면, 이들 유력 제후까지도 중앙정계에서 활약하게 되는 것은 근대의 일이다.[6]

다만 이런 현상은 수도 근처에서 군주와의 관계가 밀접한 남작의 이야기로, 지방의 남작들은 대개 인근 공작이나 백작의 봉신이었으며 당연히 이러한 시골 남작은 중앙권력과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중세 유럽에서 귀족들은 보통 지주들이었고, 이는 남작 작위마저 없이 그저 선조가 작위를 가졌던 것일 뿐인 귀족도 마찬가지였기에,[7] 근대에 들어서까지 귀족들은 하류층이라도 향촌 사회에서는 농노나 소작농들을 부리는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시골 남작이더라도 그 지역에선 유력자이자 나름 명문가로 대접받는 지위였다. 흔한 경우는 아니었으나 잉글랜드처럼 영지가 주어지지 않는 공작·백작도 간혹 있었던 만큼, 이처럼 영지나 재산이 없는 상위 귀족들보다 경제사정이 좋은 경우도 있기는 했다.

양판소를 비롯한 현대 창작물에 등장하는 남작들은 무늬만 귀족이지 실질으로는 평민 상류층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거나 심지어는 손수 농사를 짓고 끼니를 걸러야할 때도 있는 수준의 가난뱅이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은데, 현실적으로 중·근세에 혹독한 생활고를 겪을 만한 귀족이라면 보통은 이미 작위나 토지까지 포기(매각)했고 생계를 유지할 수입원도 딱히 없는 극단적인 경우에 해당될 것이다. 근대에는 자유민 출신의 부농이나 상·공업자들과의 경쟁에서 패배하거나, 농노제나 귀족에게만 토지 소유를 허용하는 등의 법률이 폐지됨에 따라, 유럽 여러 나라에서 종래의 세습귀족 출신 지주들이 몰락하는 현상이 잦아져서 당대에 쓰인 소설 등에 이렇게 귀족들이 미숙한 농지 경영과 채무 불이행으로 몰락하여 빈곤을 겪으면서도 혈통 자부심만 찾는 모습들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창작물에서 살펴볼 수 있는 구질구질한 최하류 귀족들은 이런 근대적인 시대상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근대에는 부르주아들이 남작 작위를 받는 경우도 상당했다. 유럽의 로스차일드 가문이나, 일본 화족의 경우 에도 중기 이래로의 상인 집안이던 미쓰이, 스미토모의 당주 집안이나 미쓰비시 재벌의 창립자인 이와사키 남작가 등이 있다.[8]

현대에는 기사 작위와 함께 국가유공자나 고위 정치인 및 관료 출신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작위로 남작 작위가 수여되곤 하는데, 나라에 따라 세습 가능 여부가 다르다. 대중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영국에서는 이렇게 남작에 봉해진 사람들을 작위 세습이 불허된 일대귀족으로 분류하며[9], 대부분은 여러가지 정치적인 목적으로 수여한 경우다. 영국에서 상원 귀족만 의원으로 임명될 수 있는데 반해[10] 그 권한은 하원을 견제하는 것 말고는 거의 없어서, 왕실에 밉보이거나 대중들 사이에서 비난을 받는 고위 정치인의 정계 복귀를 막기 위해 일부러 남작 작위를 내리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희대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해 서민들의 증오를 샀던 마거릿 대처의 사례가 있다. 물론 반대로 국가유공자나 기타 공훈자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남작 작위를 내린 경우도 있는데, 국민적인 대배우인 로런스 올리비에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영국에서 남작 본인에 대한 경칭은 The Right Honourable이며, 자녀에 대한 경칭은 The Honourable이다. 작위를 계승하지 못하는 자녀나, 딸이 결혼하더라도[11] The Honourable의 경칭은 평생 사용할 수 있으나, 세습되지는 않는다.

3. 동아시아

갑골 문자부터 '남(男)'이 세력가의 칭호로 쓰이고 있음이 확인되고 있기에 적어도 상나라 시절부터 사용된 칭호임이 분명하지만, 문헌상으로 실제 칭호로 사용한 세력이 극히 드물게 나타나기에 정확히 어떤 부류가 이와 같은 칭호를 사용했는지 알 수 없다. 주나라 때에는 허나라와 여융(驪戎)의 임금이 '남'으로 불렸던 것이 확인된다. 《맹자》만장 하편 2장에선 제후 가운데 최하위로 자(子)와 동격이라 정의하였다.

확인되는 사례가 두 경우밖에 없어 조심스러운 부분이긴 하지만, 여융은 대놓고 이민족 세력이며, 허나라는 주나라의 천자에게 남작으로 책봉을 받았다는 역사 기록과는 다르게 실제로는 춘추시대에는 틈만나면 천자의 신하를 자처하는 제후들이 회맹하여 토벌의 대상으로 지목하는(...) 신세였다. 이 사실에 비춰보면 적어도 주나라 때에는 주나라 천자가 주도하는 통치 질서에 소속되지 않은 세력의 수장들을 '남'으로 지칭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인터넷 상에선 남작이 자작과 함께 "좋게 말해서 호족이고 나쁘게 말하면 오랑캐 취급 받는 부류"나 "아무것도 아닌 일반인"이라는 식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와 같은 평가들이 무엇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우선 춘추시대 이전까지 자작이나 남작으로 칭해지는 부류들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일반인들이 아니었다. 당시까지 중원 지역의 나라들은 도시연맹체 단계의 국가였으며 그 가장 기본이 되는 도시를 '읍(邑)'이라고 하였는데, 자작이든 남작이든 모두 복수의 읍으로 이뤄진 도시연맹체의 수장들이었다. 특히 앞서 살펴본 허나라의 경우에 대입해 보자면, 아무것도 아닌 일반인이나 일개 지방 호족에 불과한 세력을 토벌하겠다고 제후들이 회맹하여 연합군을 결성하는 기행을 벌인게 되어버린다. 허나라의 경우에는 제후들의 지속적인 공격과 초나라의 침공을 양면에서 받는 처지였기에 결과적으로 약소국이 되어 멸망한 것이지, 원래부터 약소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세력으로 볼 수는 없다. 또한 앞서 살펴본 허나라나 여융의 경우 사실상 이민족이었다는 추론은 가능해보이나, 자작의 경우에는 명백히 이민족으로 볼 수 없다. 춘추시대에는 회맹을 통해 국제질서가 좌지우지되었기에, 회맹을 주도할 수 있는 신분인 후작이나 백작이 주목받았을 뿐, 자작들의 세력이 결코 약소하지는 않았고 마찬가지로 이민족으로 분류되는 세력이 쓰던 칭호도 아니었다. 당장에 춘추시대의 강대국이었던 진(晉)나라는 자작 칭호를 쓰던 들에게 나라가 분할되었는데, 그들도 이민족으로 지칭되는 세력이었던가?

사실 춘추시대 이전에 사용되고 있던 '작위'란 일정한 영지가 주어지는 세습 관직이라는 개념이라기 보다는 일정한 단계에 이른 세력들의 수장이 사용하고 있던 칭호의 개념에 가까웠다. 이를 유학자들이 주나라 천자가 책봉한 벼슬로 분류하고 그 서열을 정의하였기에 후대에는 '작위'라는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아무튼 그 영향으로 남작은 후대에는 작위 계층 가운데 최하위 서열의 칭호로 여겨지게 되었다.

동아시아에서 실제 작위로 남작이 쓰인 것은 왕망 오등작을 도입했던 것이 시초이며, 후한 때 오등작이 폐지되었다가 삼국시대 위나라 말기에 사마씨 정권이 오등작을 재도입하면서 보편화되었다. 다만 이 때 도입된 작위들은 실제 영지를 다스리는 제후들에게 수여된 것이 아니라, 공적이나 서열에 따라 수여된 명예적 칭호에 가까운 개념이었기에, 남작이라는 작위 계급이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4. 남작위를 가진 실존 인물

가상 인물은 작위/창작물 참조
세습이 불가능한 일대귀족은 # 표시한다.
[1] 스코틀랜드에서 남작은 Lord (of Parliament)이고 Baron은 일개 영주를 뜻한다. 참고로, 스페인어로 '바론'은 '남자'라는 뜻이다. 철자는 'varon'으로 다르다. 하지만 꽤나 절묘한 우연. [2] 독일인 남작 중 Baron인 경우도 있는데, 제정 러시아에서 작위를 받은 발트 독일인 및 그 후손이다. [3] 이와 반대되는 말로는 '봉신의 봉신'이나 '배신(陪臣)'으로 번역되는 'vavasour'가 있다. 이들은 보통 남작보다 훨씬 작은 토지를 보유하면서 자기 아래에 봉신을 두지 못한, 기사(Miles)나 미니스테리알레스(Ministerialis), 각종 고용인, 기타 자영농으로 구성되었다. [4] 이는 동아시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으며, 단지 이른 시기부터 귀족 신분이 폐지되고 작위 제도가 단순히 공적을 표창하기 위한 상훈 제도로 운영되었을 뿐이다. 이런 토착 세력들을 지배층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고려에서는 이들에게 향직을 수여했고, 조선에서도 유향소 같은 것을 운영하는 방식으로 어떻게든 이들을 양반층으로 만들었다. 중국 고·중세의 호족이나 근세의 신사 등도 본질적으론 이런 토착 세력이었으며, 여러 공적 제도를 통해 우대를 받는 계층이었다. [5] 사실 현대에도 토지를 매개로 한 사실상의 세습적 지배구조가 해체되었을 뿐이지 ' 지역 유지'로 불리는 이들은 여전히 남아있고, 그 영향력도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지방자치도 본질적으로는 지역 유지들이 중앙의 통치력에서 이탈하려는 시도를 방지하고자 그 지역 안에서 합법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공식적인 권한과 절차를 마련하는 제도로, 지방자치를 비판하는 논거 중 하나로 토호가 아닌 일반 지역 주민들의 민주적 권익이 침해된다는 점이 괜히 거론되는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도 관공서에서 ·· 단위까지 통할하는 데에는 여전히 이들과의 협력을 중시하며, 때로는 이장· 통장 같은 공적인 지위를 주거나 지역 관변단체 간부로 선출되는데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6] 신성로마제국의 중앙정치라는 것도, 기실 '내가 황제가 되어 이를 근거로 다른 영역을 집어삼키기'나 '황제의 권력 행사를 견제 혹은 저지하기', '제국의 권위를 활용하여 나의 영역을 외부 세력으로부터 보전하기', 혹은 더 나아가 '제국 질서를 무력화하고 나의 영역을 독립국가로 만들기' 위해서 하는 것이었다. 그나마 범게르만주의가 대두하면서 독일인 정체성이 강화되었던 근현대에조차 심심찮게 옛 영역제후령 단위로 형성된 지역적·민족적 정체성을 바탕으로 분리주의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을 정도다. [7] 단, 영국에서는 작위를 상속받지 못한 귀족의 자손은 법률상 귀족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사실상의 귀족으로 여겨지는 젠트리 신분이었으며, 향촌 사회에서는 대륙과 마찬가지로 지주로 활동했다. [8] 미쓰이, 스미토모, 미쓰비시는 2차대전 이전 일본의 3대 재벌이었다. 일본에서는 오히려 교토 조정의 오랜 귀족가문들에서 주로 유래하는 공작가문이라든지 후작 가문들보다는 폐번치현 이후에도 많은 부동산을 보유한 구 다이묘( 무가) 백작가문이, 그런 백작가문들보다는 미쓰비시의 창립자 가문으로 화족이 된 이와사키 남작가 같은 재벌 출신 하급귀족 가문들이 귀족 사회에서 더 큰 부러움을 받았다. 당장 교토 조정의 귀족들은 헤이안 시대 이후로 거의 언제나 빈궁한 처지였고, 다이묘 가문들도 수십만 석 이상의 다이묘 가문에서 따로 가업이나 부동산을 남겨놓지 않았다면 사실상 작위와 가문에 따르는 소득과 수입은 없다시피 하였다. 와중에 일부 소작행위와 대외무역을 제외하고는 가업이 아닌 생계와 수입을 위한 국내에서의 상업행위가 체면 구기는 행위로 인식되었기에 더더욱 빈궁해질 수 밖에 없었다. 때문에 장남 등 가문을 이어나갈 일부를 제외하고는 딸과 막내아들들을 남작이나 평민 가문으로 보내 사돈관계를 맺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역시 돈이 최고다 같은 이치로 망국의 군주일지라도 이왕가는 실질적 작위로도 직계황족을 제외한 일제 모든 화족보다 높은 지위를 지녔고, 조선 팔도의 수 많은 재산 내탕금으로 풍족한 생활을 누렸기에 일본 화족들의 선망을 샀다. 다만 이왕가의 구성원들이 일부러 재산을 숨긴 것은 아니고 옛 대한제국 황실 재산에 대한 관할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숨기고 뭐고 할 필요 없이 조선으로부터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금전을 인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영친왕 일가가 조금 더 영악했다면 어마어마한 재산을 미리 일본으로 반출했다가 일본의 패망 이후에도 호의호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 [9] 물론 영국에도 세습 남작들이 있긴 한데, 거진 다 원래부터 남작 작위를 대대로 세습해온 세습 귀족들이며, 이들의 가문은 못해도 18세기에서 19세기 이전에 남작으로 봉해진 케이스다. 초대 알라메인 자작에 봉해진 버나드 로 몽고메리같은 일부 전쟁 영웅들이나 정치인을 제외하면, 20세기 중반인 1965년 이후로는 영국에서 남작급 이상의 세습 작위가 해럴드 맥밀런이 받은 스톡턴 백작위를 포함한 4개의 가문 이후로는 주어지지 않고 있다. 참고로 공작위와 후작위는 20세기 초 이후로 서임되지 않았다.( 공작은 1900년, 후작은 1936년.) 21세기 이후의 영국의 공작위는 왕가 인물에게만 일대귀족과 비슷하게 창시하여 수여되고 해당 인물이 작위를 마치게 되면 세습되지 않고 왕가로 돌아간다. [10] 아예 영국 의회의 상원의 공식 명칭이 귀족원(House of Lords)이다. [11] 만약 고위 귀족과 결혼하게 된다면 남편의 작위에 맞는 경칭을 사용하게 된다. [12] 1950년대 이후로는 아일랜드에서 활동했다. [13] 사실 그 전부터 이미 독립운동에 상당히 관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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