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대의 역임 직책
|
||||
{{{#!folding ▼ |
둘러보기 틀 모음 | |||
대표팀 | ||||
12대, 15대, 19대, 22대, 36대 |
대한민국의 前 축구 감독
|
||
이름 |
민병대 閔丙大 / Min Byung-dae |
|
출생 | 1918년 2월 20일 | |
경기도 경성부 | ||
사망 | 1983년 1월 4일 (향년 64세) | |
신체 | 170cm | 72kg | |
직업 |
축구선수 (
센터백,
하프백 / 은퇴) 축구 감독 |
|
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조선전업 축구단 (1947~1950) 특무부대 축구단 (1951~1955) |
감독 |
대한민국 대표팀 (1958) 대한민국 대표팀 (1960) 대한민국 대표팀 (1962) 대한민국 대표팀 (1963) 대한민국 대표팀 (1972~1973) |
|
국가대표 | 16경기 1골 ( 대한민국 / 1948~1954)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출신 축구 감독. 총 5회 대한민국 대표팀의 감독직을 수행했다. 본관은 여흥 민씨[1]이다.2. 생애[2]
2.1. 어린 시절
민병대는 1918년 경성부에서 태어나 배재고등보통학교와 보성전문학교를 거쳤다.민병대는 1938년 보성전문학교 재학 시절에 조선 축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어 관서, 관동, 조선 전일본삼지방(全日本三地方) 축구대회에 출전했다.
1939년 6월 일본축구협회에서 민병대를 포함해 김용식, 이유형, 현효섭, 박이석, 김희수 등 조선인 10명과 함께 일본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일본, 만주국, 중화민국이 참가한 3개국 축구대회에 출전하기도 했다.
2.2. 선수 경력
2.2.1. 클럽
해방 이후 민병대는 1947년 조선전업 축구단에 입단해 1949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우승을 차지했다.1951년에 민병대는 특무부대 축구단의 선수가 되어 1955년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
2.2.2. 국가대표
민병대는 대한민국 대표팀 멤버로 1948 런던 올림픽, 1954 마닐라 아시안 게임,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등에 참가했다.민병대의 대표팀 데뷔전은 1948년 올림픽 1라운드 멕시코전이었는데 대한민국은 멕시코를 5:3으로 꺾는 파란을 일으켰다. 비록 다음 경기에서 대한민국은 스웨덴에 0:12로 대패하며 올림픽 여정을 끝냈지만 대한축구협회는 민병대를 우수 선수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1954년, 당시 36세의 민병대는 스위스 월드컵 지역 예선 일본전에 주전 수비수로 출전해 대한민국의 첫 월드컵 본선 진출에 공헌했다. 그리고 월드컵 개막 한달여전에 열린 1954 마닐라 아시안 게임에서 대한민국은 은메달을 획득했다.
아시안 게임을 끝낸 대한민국 대표팀은 엄청난 고생 끝에 경기 시작 10시간 전에서야 스위스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시절에 선수들의 뒤를 담당할 주무가 있을 턱이 없던 대표팀 선수들은 시차 적응 대신 등번호 없던 유니폼 상의에 직접 바느질을 해서 등번호를 넣었고 자신들의 장비를 직접 손질했다. 그렇게 맞이한 대한민국의 첫 상대는 당시 최강팀인 헝가리였다. 민병대는 센터백으로 경기를 시작했다. 대한민국 대표팀 선수들은 체력의 한계로 인해 쓰러져가면서도 처절하게 헝가리 선수들을 상대했지만 투혼만으로 실력차를 뒤집기에는 너무나 격차가 컸다. 결국 대한민국은 헝가리에 0:9로 대패했고 튀르키예와의 2차전을 준비해야 했다.
2차전의 선발 명단에 민병대의 이름은 없었다. 헝가리와의 시합에서 체력을 너무 많이 뺀 1차전 멤버들 중 7명이 교체되어 튀르키예와의 2차전을 치렀지만 대한민국은 튀르키예에도 0:7로 패했다. 헝가리와의 1차전이 민병대의 마지막 A매치가 되었다.
2.3. 이후
민병대는 37세까지 현역 선수로 활동한 후 은퇴했으며, 1957년 2월 대한축구협회 이사로 선임되었다. 제3회 도쿄 아시안 게임에서 민병대는 대표팀 감독으로 준우승을 이끌었다.민병대는 1960년 아시안컵 대회의 개최준비위원회 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962년 3월에는 대표팀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동년 6월 인도네시아의 초청으로 친선 경기에 참가한 국가대표 축구팀의 밀수사건이 불거지자 책임을 지고 대표팀 감독과 대한축구협회 이사직에서 사퇴했다.
민병대는 여러 실업팀들의 감독과 단장직을 맡으면서 이를 계기로 실업축구연맹의 전무이사, 부회장직을 역임한 후 1980년 회장에 임명되어 실업축구 1부, 2부 리그제를 도입하기도 했다.
1973년 5월, 민병대는 다시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태국 킹스컵 국제대회에 출전했으나 3위의 성적에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1975년에 민병대는 그동안 대한민국 축구발전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문교부와 대한체육회의 추천으로 선정되는 대한민국 경기지도자 자격을 축구분야에서 한홍기, 김용식, 김규환과 함께 발급받았다.
이후 민병대는 대한축구협회에서 기술분과위원장, 전무이사, 국가대표 선수선발위원회 위원장, 부회장, 상임고문을 지냈으며, 그 외 전국시도대항 청소년축구대회 서울특별시팀 단장, 제10회 아시아청소년축구선구권대회 조직위원의 사무국장 및 선수선발위원회 위원장, 대한체육회 축구분야 대의원, 고우체육회(高友體育會) 경기분야 상임임원, 축구 원호연금 심사위원회 위원, 박대통령컵 국제축구대회 조직위원회 부위원장, 한일축구 정기전 한국대표단장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역할을 수행했다.
1982년 12월, 민병대는 고혈압으로 병원에 입원했지만 건강이 회복되지 않아 집으로 보내졌고 1983년 1월 4일 서울 은평구 갈현동 소재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대한축구협회장으로 효창운동장에서 민병대의 영결식이 거행되었고 사후에 문교부가 선정한 대한민국 체육상 및 체육훈장을 추서받기도 했다.
3. 수상
3.1. 선수
3.1.1. 클럽
-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우승 1회: 1949(조선전업 축구단)
-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우승 2회: 1952, 1953(특무부대 축구단)
-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준우승 1회: 1954(특무부대 축구단)
3.1.2. 국가대표
3.2. 감독
3.2.1. 국가대표
[1]
30세손 丙○ 항렬.
[2]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