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09:49

광해군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color:#ffd400"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ffd400>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태조 정종 태종 세종
<rowcolor=#ffd400>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문종 단종 세조 예종
<rowcolor=#ffd400>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성종 연산군 중종 인종
<rowcolor=#ffd400>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명종 선조 광해군 인조
<rowcolor=#ffd400>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효종 현종 숙종 경종
<rowcolor=#ffd400>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영조 정조 순조 헌종
<rowcolor=#ffd400> 제25대 제26대 제27대
철종 고종 순종
}}}
추존왕 · 추존령 · 대립왕 · 선원선계 · 오동천호소 천호 · 대군주 · 상왕 · 왕태자 · 왕세자 · 왕비 · 대리청정 · 분조 지도자 · 비왕족 추존왕

고조선 · 부여 · 원삼국 · 고구려 · 백제 · 가야 · 신라 · 탐라 · 발해 · 태봉
후백제 · 후삼국 · 고려 · 대한제국 · 대한민국 임시정부 · 조선건준 · 대한민국
}}}}}}}}} ||
광해군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조선의 왕자
[[틀:조선의 왕자/중종 ~ 고종|{{{#!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ackground: #ffd400; border-radius: 3px; font-size: .8em"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751232, #94153e 20%, #94153e 80%, #751232); color: #ffd400; min-height:33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bf1400; font-size: .7em"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94153e; font-size: .7em"
[[정원대원군|{{{#!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fd400; font-size: .7em"]]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bf1400; font-size: .7em"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1b0e64; font-size: .7em"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bf1400; font-size: .7em"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bf1400; font-size: .7em"
[[사도세자|{{{#!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fd400; font-size: .7em"]]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1b0e64; font-size: .7em"
[[효명세자|{{{#!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fd400; font-size: .7em"]]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bf1400; font-size: .7em"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d0730, #1b0e64 20%, #1b0e64 80%, #0d0730); color: #ffd400"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color:#1d1d1d; margin: -6px -1px -26px"
태조 정종 태종
이방석
(의안대군)
이방과
(정종)
이방원
(태종)
이제
(양녕대군)
태종 세종 문종 세조
이도
(세종)
이향
(문종)
이홍위
(단종)
이장
(의경세자)
왕세손

이홍위
(단종)
세조 성종 연산군 중종
이황
(예종)
이융
(연산군)
이고
이호
(인종)
명종 선조 광해군 인조
이부
(순회세자)
이혼
(광해군)
이지
이왕
(소현세자)
인조 효종 현종 숙종
이호
(효종)
이연
(현종)
이순
(숙종)
이운
(경종)
왕세손

이연
(현종)
경종 영조
왕세제

이금
(영조)
이행
(효장세자)
이훤
(장헌세자)
왕세손

이정
(의소세손)
왕세손

이산
(정조)
정조 순조 고종
이양
(문효세자)
이홍
(순조)
이영
(효명세자)
이척
(순종)
왕세손

이환
(헌종)
순종
이은 }}}
위패 존령 · 선원선계 · 국왕 · 대군주 · 왕태자
조선의 왕자(목조 ~ 연산군) / (중종 ~ 고종)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color: #ffd400;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ffd400> 선조조 인조조
광해군 소현세자
}}}}}}}}}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조선 제15대 국왕
광해군 | 光海君
파일:광해군묘1.jpg
광해군묘 전경
출생 1575년 6월 14일[1]
(음력 선조 8년 4월 26일)
한성부 경복궁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즉위 1608년 3월 17일 (32세)
(음력 선조 41년 2월 2일)
한성부 정릉동 행궁
(現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사망 1641년 8월 7일 (향년 66세)
(음력 인조 19년 7월 1일)
전라도 제주목
(現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중앙로 82)[2]
능묘 광해군묘(光海君墓)[3]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
1592년 6월 8일 ~ 1608년 3월 17일
(음력 선조 25년 4월 29일 ~ 선조 41년 2월 2일)
조선 제15대 국왕
1608년 3월 17일 ~ 1623년 4월 13일[4]
(음력 광해군 즉위년 2월 2일 ~ 광해군 15년 3월 14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혼(琿)
부모 부왕 선조
양모 의인왕후
생모 공빈 김씨[5]
형제자매 14남 11녀 중 차남
배우자 문성군부인 (1587년 혼인 / 1623년 사망)
후궁
14명 [ 펼치기 · 접기 ]
수빈 허씨, 귀인 윤씨, 귀인 홍씨, 소의 권씨, 숙의 원씨, 소용 정씨, 소용 임씨, 소원 신씨, 숙원 한씨, 상궁 김개시, 상궁 이씨, 상궁 최씨, 궁인 조씨, 궁인 변씨
자녀 1남 2녀 (3남 1녀 + 성별 미상 자녀 1명)
종교 유교 ( 성리학)
아명 경룡(慶龍)[6]
봉호 광해군(光海君)[7]
존호
[ 펼치기 · 접기 ]
체천흥운준덕홍공신성영숙흠문인무
(體天興運俊德弘功神聖英肅欽文仁武)
서륜입기명성광렬융봉현보무정중희
(敍倫立紀明誠光烈隆奉顯保懋定重熙)
예철장의장헌순정건의수정창도숭업
(睿哲莊毅章憲順靖建義守正彰道崇業)
[8]
}}}}}}}}}
1. 개요2. 생애3. 평가4. 여담5. 가족 관계
5.1. 조상5.2. 배우자/자녀
6. 광해군묘7. 대중매체8. 관련 다큐9. 같이 보기10.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조선의 제15대 국왕이자, 1623년 인조반정으로 폐위된채 끝내 복위되지 못하여 조선왕실 역사에서 연산군과 함께 '조(祖)'나 '종(宗)'으로 끝나는 묘호를 끝까지 받지 못한 임금이다. 생전에 받은 '체천흥운준덕홍공신성영숙흠문인무서륜입기명성광렬융봉현보무정중희예철장의장헌순정건의수정창도숭업대왕(體天興運俊德弘功神聖英肅欽文仁武敍倫立紀明誠光烈隆奉顯保懋定重熙睿哲莊毅章憲順靖建義守正彰道崇業大王)'이라는 존호조차 인조반정 이후 삭탈됐다.

2.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광해군/생애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 평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광해군/평가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4. 여담

  • 광해군 3년 별시 문과에서 광해군이 직접 '시급한 나랏일을 논하라.'라는 문제를 출제했다. 그런데 임숙영이라는 사람이 여기에 주제에 맞는 내용은 겨우 두어 문장만 적고 나머지 빈칸에는 광해군에 대한 비난을 마구 적어놓았다.[9] 시급한 문제를 논하라고 했는데 왕을 비판했으니 결국 지금 조선에서 가장 문제는 왕 본인이라는 엄청난 디스였던 셈. 그런데 임숙영은 무려 이런 답안으로 합격했고, 감독관이었던 우의정 심희수가 장원으로 급제시키려고까지 했다.[10] 광해군은 이걸 보고 당연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지만, 각주에서 말했듯이 진짜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인데다 이미 합격자로 분류가 되어버려서 결국 '다음에는 이런 주제랑 관계없는 딴소리는 합격시키지 말라.'고 말하고는 그의 합격을 인정했다.
  • 으로서는 특이한 기록이 있는데 최다 공신 배출, 최다 존호 보유, 친국(親鞫) 직접 참여 등이다. 최다 존호 보유 기록을 통해 그가 나름대로 강력했던 왕권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 광해군의 탯줄을 묻은 곳인 태실(胎室)이 현재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 산136-1번지 태봉(胎峯)에 남아 있다. 2018년 다온문화재연구원에서 정밀 발굴 조사를 실시했고 2022년 11월 10일 대구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태실은 오랫동안 파괴된 상태로 있었는데 연경동 지방에 도는 이야기 중 하나는 이 일대에 세거하는 인천 이씨 집안과 관련이 있다. 조선 시대 연경동 일대에는 인천 이씨 태봉파(胎峯派)가 살았고 서변동 일대에는 무태파(無怠派)가 살았는데 경술국치 이후 무태파에서는 폐위당한 임금의 태실이라 해서 이를 없애려 했고 태봉파가 반대하는 가운데 무태파의 세력이 커지면서 결국 태실은 파괴되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초에는 인천 이씨의 어느 한 집안에서 태실 자리가 정승이 날 명당이라는 말을 듣고 묘를 썼다가 첫째 상주와 둘째 상주가 줄초상이 났다는 이야기도 있고, 이후 어느 날 태실을 깨뜨리라는 점괘를 얻어 태실 주변에 남아 있던 석물들을 깨부수어 태봉못에 버렸는데 그날 밤 그 집안 손자가 갑자기 죽자 사람들이 석물들을 도로 건져내 원래대로 맞춰 놓았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태실에 있던 석물들을 인근 주민들이 집을 짓기 위해 부숴서 가져갔다가 안 좋은 일을 당하자 조각을 다시 모아 원래 있던 위치에 던져놓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금도 산에 올라가 보면 비석이나 거북이 조각 등의 잔해가 남아 있어 위 이야기들의 증거가 된다.
  • 담배 냄새를 몹시 싫어하여 궁중은 물론 신분이 높은 사람이나 어른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하는 예절(예법)을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그 전까지 조선 사회에서는 서구권처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맞담배를 피우는 게 일반적이었다.
  • 계축일기》에 따르면 고기를 먹을 때 익힌 고기는 먹지 않고 육회나 살짝 불에 익힌 정도로만 해서 먹었다고 하는데, 고기 취향이 뚜렷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같은 자료에 '산나물은 더럽다 하여 먹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 결과 심각한 배변 장애에 시달렸으며 혈색도 칙칙했다고 한다. 이것 때문인지 《계축일기》에는 배변시 매화틀을 호출하지 않고 직접 변소로 거둥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다만 이건 귀찮은 일이 생기면 변소에 틀어박히러 갔다는 추측도 있다.
  • 미신을 매우 신봉했으며, 풍수가나 점쟁이들을 늘 가까이 두었고, 정책에서도 이들의 결정을 많이 따랐다고 한다.[11] 이런 미신 신봉은 광해군의 궁궐병으로 이어지게 만들었는데, 선조 말년부터 시작된 창덕궁 공사를 끝낸 광해군은 별궁인 창경궁 경운궁 수리를 마쳤는데, 1617년(광해군 9년) 느닷없이 인왕산 아래 새 궁궐(인경궁)을 지을 것을 명령했다. 이는 풍수학자 시문용이 건의하고 승려 성지가 터를 잡았다고 하는데 어떤 의미인지는 뻔한 일. 이것만으로도 모자랐는지 왕기(王氣)가 흐른다는 풍수가 김일룡의 말을 듣고 한성부 새문동에 궁궐을 짓는데 광해군의 동생 정원군의 집터로 이렇게 해서 완성된 궁이 경덕궁.[12] 2개의 궁전을 1번에 지으려고 하니 국가 재정이 고갈되는 건 당연지사. 풍수가 이의신이 한양의 지기가 다했으니 교하로 천도하자고 하자 교하 천도를 추진했는데 신하들이 반대해 실패했다. 복동이라는 점쟁이를 신뢰해[13] 의심나는 일이 있을 때마다 의견을 물었는데 이후 복동이는 인조반정 이후 바로 처형당한다. 말년에는 칙서를 받는 일도 길일을 택해서 하려고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결국 사신에게 많은 뇌물이 주어져야 했다.
  • 그의 치세 중에 유럽 해적들이 조선 해안을 약탈하려고 한 적이 있다. 나중에 돌던 풍문같은 것도 아니고 광해군 치세의 인물인 지봉 이수광이 쓴 《 지봉유설》과 광해군의 치세를 기록한 《 광해군일기》에도 실린 기록이다. 해적선이 조선 수군의 막강한 화력에 놀라 도망가면서 배를 나포하는데는 실패했으나 당시의 군관들은 유럽제 선박에 대해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14] 이 해적선의 정체는 잉글랜드 해군 사략함대로 추정된다. 일단 《지봉유설》에도 이 함대가 잉글랜드에서 왔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일단 이 침략 자체가 잉글랜드 해군의 소행이라는 사실은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만 《지봉유설》의 기록은 광해군 때가 아니라 아버지인 선조 때의 기록으로 추정되는데 《광해군일기》의 기록은 1622년(광해군 14년) 7월 19일자의 것인데 반해 《지봉유설》은 더 이전인 1614년(광해군 6년)에 저술된 이기 때문이다.[15] 이 시기 잉글랜드 국왕은 제임스 1세. 1622년의 해전은 잉글랜드가 아닌 네덜란드 선박이었다는 설이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흥양 해전 문서를 참고할 것.
  • 그의 치세 초기인 광해 3년(1611년), 제주 목사 이기빈과 판관 문희현이 표류해 온 외국 상선을 해적선으로 몰아 승무원을 모두 죽이고 재물을 약탈한 사건이 있었다. 하지만 이기빈은 무관으로 유능하다 하여 형식적인 처벌 후 인조반정 후에도 승승장구 했으며, 이때 살해된 외국 상선 선원 중에 류큐 왕국 왕자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해 조선 사람들은 거의 사실로 믿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막상 류큐에 표류한 사람들의 기록을 보면 류큐인들은 "그런 일 없었는데?"하는 분위기였고, 오히려 1771년 류큐로 표류했다 돌아온 장한철의 표해록에 따르면 중간에 마주친 베트남 상선 사람들이 "너희 탐라인이 우리 왕자를 죽였으니 우리도 너희를 죽이겠다"고 죽이려 들었다는 기록이 있어 살해된 것은 베트남 고위인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 조선 최초로 후궁 태생의 서자로서 왕세자에 책봉된 인물이다. 광해군이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19세기 이전 문헌에서는 광해주(光海主)라고 일컫기도 하였다. 양위 폐위로 묘호가 추숭되지 않았던 4인의 조선 국왕 중 한 임금이다. 다른 3명은 2대 공정왕, 6대 노산군, 10대 연산군이다. 다만 공정왕은 능호도 후'릉'이라 하고 실록도 일기가 아니라 공정왕'실록'이었으며 종묘에 신주가 모셔지는 등 묘호만 없다 뿐이지 정식 군주의 대우를 받았으며,[16] 공정왕과 노산군은 숙종 대에 들어서 각각 정종 단종으로 추숭되었으므로, 결국에는 연산군과 같이 둘밖에 남지 않았다. 또한, 왕자 시절(세자 책봉 전) 책봉받은 봉호로 불리는 유일한 폐주이다.[17] 더불어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노산군, 연산군과 같이 '실록'이 아닌 '일기'의 형식으로 그들에 대한 기록이 실린[18] 단 셋뿐인 임금 중 하나이다.
  • 조카의 묘호 앞부분에 어질 인(仁)자가 들어간다는 점이 연산군과 공통점이다.[19]
  •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은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를 5대 사고로 정비하였다.
  • 환관에게 어째서 그리도 뚱뚱하냐고 물었다가 되레 역관광을 당한 기록이 있다.
왕이 즉위한 이래로 강연(講筵)을 오랫동안 폐하고 일반 공사의 재결도 태만해서 대간의 계사마저 매양 날을 넘기고서야 계하하였다. 더러 밤에 들이려 하면 왕이 항상 침내에 있기 때문에 환시들까지도 뵈올 수가 없었다. 왕이 일찍이 환시 이봉정(李鳳禎)에게 묻기를 "너는 어떻게 그렇게 뚱뚱하냐?" 하니 봉정이 대답하기를 "소신이 선조(先朝) 때에는 선왕이 장시간 공사청에 납시어 온갖 일을 열심히 재결하시기 때문에, 항상 옆에서 모시느라 낮에는 밥먹을 겨를이 없고 밤에도 편히 잠을 못 잤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전하께서 공사청에 납시는 때가 없으므로, 소신은 종일 태평하게 쉬고 밤에도 편안하게 잠을 자기 때문에 고달픈 일이 없으니, 어찌 살이 찌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한다. 대저 이렇게 풍자한 것이다.
광해군일기[정초본] 46권, 광해 3년 10월 14일 경진 3번째기사

5. 가족 관계

5.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광해군
(光海君)
<colbgcolor=#fff3e4,#331c00> 선조
(宣祖)
<colbgcolor=#ffffe4,#323300> 덕흥대원군
(德興大院君)
중종
(中宗)
창빈 안씨
(昌嬪 安氏)
하동부대부인 정씨
(河東府大夫人 鄭氏)
정세호[20][21]
(鄭世虎)
정경부인
광주 이씨[22]
(貞敬夫人 廣州 李氏)
공성왕후
恭聖王后
공빈 김씨
(恭嬪 金氏)
해령부원군
김희철
(海寧府院君 金希哲)
김종수
(金從壽)
정복이
(鄭福伊)
부부인
안동 권씨
(府夫人 安東 權氏)
권장
(權璋)
김해 허씨
(金海 許氏)

5.2. 배우자/자녀

6. 광해군묘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광해군묘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7. 대중매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광해군/대중매체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8. 관련 다큐


9. 같이 보기

10. 둘러보기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BF1400><tablebgcolor=#bf1400><:>
조선 국왕 관련 문서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color: #ffc224;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black,#ddd> 태조 <colbgcolor=#fff,#1f2023> 생애 | 건원릉 | 왕씨 몰살 | 이성계 여진족설 | 조선태조어진 | 전어도 | 종계변무 | 평가 | 여담 | 대중매체 | 가족 관계
<rowcolor=black,#ddd> 태종 생애 | 평가 | 헌릉 | 태종우 | 일화 | 가족 관계 | 대중매체
<rowcolor=black,#ddd> 세종 업적 | 비판과 반론 | 특이한 기록들 | 한양 대화재 | 가족 관계 | 영릉 | 대중매체
<rowcolor=black,#ddd> 세조 생애 | 평가 | 광릉 | 어진 | 대중매체 | 기타
<rowcolor=black,#ddd> 예종 민수사옥 | 남이의 옥
<rowcolor=black,#ddd> 성종 생애 | 선릉
<rowcolor=black,#ddd> 연산군 생애 | 여담 | 연산군묘
<rowcolor=black,#ddd> 선조 평가 | 목릉
<rowcolor=black,#ddd> 광해군 생애 | 대동법 | 평가 | 광해군묘 | 대중매체
<rowcolor=black,#ddd> 인조 평가 | 장릉 | 대중매체
<rowcolor=black,#ddd> 영조 생애 | 인물(성격) | 원릉 | 대중매체
<rowcolor=black,#ddd> 정조 생애 | 정조 어찰첩, 정조 한글어찰첩 | 가계 | 정조 어진 | 건릉 | 대중매체
<rowcolor=black,#ddd> 순조 홍경래의 난 | 세도정치
<rowcolor=black,#ddd> 철종 생애 | 임술농민봉기
<rowcolor=black,#ddd> 고종 생애 | 즉위 배경 | 홍릉 | 평가 | 여담
<rowcolor=black,#ddd> 순종 유릉 | 대중매체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697455, #c3d89d 23%, #c3d89d 77%, #697455)"
{{{#!wiki style="margin: -10px"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c3d89d><tablebgcolor=#c3d89d> 파일:허균 수결.svg 허균
관련 문서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colbgcolor=#c3d89d><colcolor=#000> 소속 <colbgcolor=#fff,#1f2023> 허씨 5문장 · 북인 · 선무원종공신 · 이달의 문화인물
가족 아버지 허엽 · 이복 형 허성 · 동복 형 허봉 · 동복 누나 허난설헌
이복 누나의 남편 우성전 · 동복 누나 허난설헌의 남편 김성립 · 조카 김희윤
매형 김성립의 이종사촌 신흠 · 딸 소훈 허씨의 남편 폐세자 이지
관련 인물 스승 ( 이달 · 사명당 · 류성룡)
제자 ( 서양갑 · 이식 · 기준격)
친구 ( 강변칠우 · 이매창 · 박엽 · 류몽인)
존경하는 인물 ( 정도전 · 이순신)
본이 되는 인물 ( 방회 · 이지)
작품 내 등장인물 ( 이달 · 홍길동)
주군 ( 선조 · 광해군)
관련 장소 허균 일가의 생가와 외갓집 강릉 · 허균의 친가 한양 건천동
허균 일가의 묘소 용인시 · 허난설헌의 묘소 광주시
친구 강변칠우의 거주지 여주시 · 이매창과 교류한 장소 부안군
관련 사건 임진왜란, 정유재란 · 계축옥사
작품 홍길동전 · 도문대작 · 그 외 작품
기록에서의
모습 및 행적
노비 · 특징 · 생애 · 창작물
평가 평가 · 사상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background: #FFF; border-radius: 4px"
파일:허균 수결.svg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90deg, #330d0d 0%, #a52a2a 10%, #a52a2a 90%, #330d0d)"
{{{#!wiki style="margin: -10px"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a52a2a><tablebgcolor=#a52a2a> 파일:이순신 수결 흰색.svg 이순신
관련 문서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colbgcolor=#a52a2a><colcolor=#fff> 소속 <colbgcolor=#fff,#1c1d1f> 삼도수군통제사 · 선무공신
가족 아내 방수진
장남 이회, 차남 이예, 삼남 이면
맏형 이희신의 아들 이완 · 딸의 시아버지 홍가신
먼 친척 형 이광 · 19촌 이이
후손 ( 이봉상 · 그 외 후손)
관련 인물 친구 류성룡 · 류성룡의 제자 허균
육군 동료 ( 이일 · 신립 · 권율 · 이경록)
수군 동료, 부하 ( 이억기 · 권준 · 김돌손 · 김완 · 김억추 · 나대용 · 무의공 이순신 · 배흥립 · 안위 · 오계적 · 이영남 · 이운룡 · 정운 · 준사 · 최호 · 송희립 · 우치적 · 어영담 · 황세득 · 송여종 · 김인영 · 신호 · 원균 · 배설 · 이언량 · 류형 · 진무성)
주군 ( 선조 · 선조비 의인왕후 · 분조 광해군)
생애 생애 · 전투 관련 · 여담
관련 장소 이순신이 태어난 곳 한양 건천동 · 이순신 일가의 생가 아산
이순신의 묘소 장군묘 · 이순신의 사당 현충사
명량해전이 벌어진 곳 명량수도 · 노량해전이 벌어진 곳 남해 관음포
관련 사건 탄신일 · 니탕개의 난 · 녹둔도 전투 시전부락 전투 · 이몽학의 난 · 백의종군
임진왜란, 정유재란 해전 ( 옥포 해전 · 합포 해전/적진포 해전 · 사천 해전 · 당포 해전 · 당항포 해전 · 율포 해전 · 한산도 대첩 · 안골포 해전 · 장림포 해전 · 절영도 해전 · 초량목 해전 · 부산포 해전 · 웅포 해전 · 장문포 해전 · 명량 해전 · 절이도 해전 · 왜교성 전투 · 노량 해전)
관련 물건 쌍룡검 · 백원 주화 · 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
작품 장계별책 · 난중일기 · 이충무공전서
기록에서의
모습 및 행적
용모 · 창작물
평가 관련 기록 · 평가 · 의문점
창작물 성웅 이순신(1962) · 성웅 이순신(1971) · 난중일기(영화) · 칼의 노래 · 천군(영화) · 명량 · 한산: 용의 출현 · 노량: 죽음의 바다 · 칼의 노래(뮤지컬)
파일:이순신 서명.svg 파일:이순신 수결 흰색.svg }}}}}}}}}

진승총(震乘總)
{{{#!folding [ 본기(本紀) ] 권1기
, 제1대 「태조기(太祖紀)」, , 제2대 「정종기(定宗紀)」, , 제3대 「태종기(太宗紀)」, , 제4대 「세종기(世宗紀)」,
이단 이경 이방원 이도
권2기
, 제5대 「문종기(定宗紀)」, , 제6대 「단종기(端宗紀)」, , 제7대 「세조기(世祖紀)」, , 제8대 「예종기(睿宗紀)」,
이향 이홍위 이유 이황
권3기
, 제10대 「연산기(燕山紀)」, , 제11대 「중종기(中宗紀)」,
이융 이역
권4기
, 제12대 「인종기(仁宗紀)」, , 제13대 「명종기(成宗紀)」,
이호 이환
권5기 권6기 권7기
, 제14대 「선조기(宣祖紀)」, ,제14대 수정기, , 제15대(중초본, 정초본) 「광해기(光海紀)」,
이연 이혼
권8~9기
, 제16대 「인조기(仁祖紀)」,
이종
권10기
, 제17대 「효종기(孝宗紀)」, , 제18대( 개수록) 「현종기(顯祖紀)」,
이호 이현
권11~12기 권13기
, 제19대( 보궐정오) 「숙종기(肅宗紀)」, , 제20대( 수정록) 「경종기(景宗紀)」,
이순 이윤
부록
금상(今上) }}}{{{#!folding [ 평전(評傳) ] 평전
이용 · 김종서 · 황보인
,「부록 사육신(死六臣)」, ,「부록 생육신(生六臣)」,
성삼문 · 박팽년 · 하위지 · 이개 · 유성원 · 유응부 김시습 · 원호 · 이맹전 · 조려 · 성담수 · 남효온 }}}{{{#!folding [ 부록(評傳) ] 저자 · 부록
이민보,저자, · 당파원론 · 국조연대 · 선원록 · 호송 금부도사의 작가 · 김지남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color: #ffd400"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목조
익조
도조
환조
초대
태조 고황제
제2대
정종
제3대
태종
제4대
세종
제5대
문종
제7대
세조
제6대
단종
덕종 제8대
예종
제9대
성종
제10대
연산군
제11대
중종
폐세자 이고 제12대
인종
제13대
명종
덕흥대원군
제14대
선조
제15대
광해군
원종 흥안군
폐세자 이지 제16대
인조
제17대
효종
경안군 제18대
현종
복녕군
임창군 제19대
숙종
의원군
밀풍군 제20대
경종
제21대
영조
안흥군
진종 소황제 장조 의황제 이진익
제22대
정조 선황제
은언군 이병원
제23대
순조 숙황제
전계대원군 남연군
문조 익황제 제25대
철종 장황제
흥선대원왕
제24대
헌종 성황제
제26대
고종 태황제
제27대
순종 효황제
[범례] 실제 혈통 기준 · 세로선(│): 부자 관계 · 가로선(─): 형제 관계 }}}}}}}}}}}}


[1] 율리우스력 6월 4일. [2] 폐위 후 그대로 유배지에서 살다 죽었다. 인조 반정의 명분으로 폐모살제를 주장했으나 오히려 그 명분이 발목을 잡아 선왕을 죽이지는 못했다. 연산군이 폐위 후 두 달 만에 죽은 것에 비하면 꽤 장수(18년)한 편. 죽을 때까지 살던 제주 집은 10년 뒤 제주도에 표류한 헨드릭 하멜이 몇 달 간 거처로 삼게 된다. [3] 폐위되었기 때문에, 왕의 격식인 이 아니라 일반 왕자의 형식인 '묘'로 불린다. [4] 재위 중 폐위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인조반정 문서 참고. [5] 선조의 후궁으로, 광해군의 즉위 후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되었으나 인조반정으로 시호가 삭탈되었다. [6]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 산134-1번지에 있는 대구 광해군 태실에 남아 있는 석물을 보면, '王子慶(왕자경), '龍阿只氏胎室(룡아기씨태실)' 등이 새겨져 있어 광해군의 아명이 경룡(慶龍)이었음을 알 수 있다. [7] 봉호는 강원도 춘천(春川)의 옛 이름인 '광해주(光海州)'에서 따왔다. [8] 재위 중 받은 존호로 인조반정으로 인해 폐위 후 삭탈되었다. [9] 대충 왕이 제 역할을 하지 않으니 외척이 위세를 떨치고 나라가 혼란하다는 내용이었는데, 마지막에는 '죽기를 각오하고 말합니다.'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이것은 진심으로 죽기를 각오했다는 게 아니라, 광해군을 비판도 수용하지 않고 '신하를 죽일 가능성이 있는' 무도한 폭군으로 몰아간 말로, 이 말에 화가 나서 진짜 죽이면 진짜 폭군이 되어버린다는 점을 노린 고단수 디스이다. [10] 실제로는 광해군을 두려워한 다른 채점관들이 반대해 일반 합격자로 합격했다. [11] 가령 길하다 하면 추진하고 흉하다 하면 추진하지 않았다. [12] 결국 정원군의 맏아들 능양군 인조반정을 일으켜 이 된다. 김일룡은 이 일 때문에 인조에게 밉보였는지 반정 직후 처형당한다. [13] 계기가 뭔고 하니 계축옥사 당시 저주한 물건들이 궐 안에 있는데 자신을 풀어주면 모두 파낼 수 있으며 중전의 병세도 회복시킬 수 있다며 만일 효험이 없으면 자신을 죽이라고 말했는데 광해군도 귀가 솔깃했는지 그대로 따라주었고 때맞춰 중전의 병세가 호전되었는지 왕이 많은 상을 내려주었다. [14] 당시 유럽에서 군함이나 상선으로 자주 이용되었던 갤리온이라고 추정된다. [15] 《지봉유설》의 기록도 달달한 떡밥이 있는데 조선을 침략한 해적선의 정체가 영국 해군의 아버지이자 칼레 해전의 명장인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이끄는 사략함대라는 설이 있기 때문이다. [16] 이는 정종이 후대의 다른 셋과 달리 폐위로 쫓겨난 게 아니라 정식적인 절차를 거쳐 동생에게 물려준 것이며, 세종 정통성 등 여러가지 문제가 겹쳐 묘호만 추숭되지 않았을 뿐이기 때문이다. [17] 단종원손→세손→세자→왕을 거쳤으며, 부왕 문종의 유일한 적자였으므로 봉호가 없으며, 작은 아버지 세조에게 강제 양위한 뒤 사육신 사건으로 상왕에서 폐주로 격하되어 새로 노산군으로 봉해진 것이다. 즉, 세손이나 세자 시절에 노산군으로 불린 적이 없다. 마찬가지로, 연산군원자→세자→왕을 거쳤으며 당시 부왕 성종의 적장자였으므로 봉호가 따로 없었다. 그도 단종처럼 폐주로 격하되면서 새로 연산군으로 봉해져 왕자 신분으로 강등되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폐주가 되고 나서 왕자 시절에 쓰던 봉호로 다시 불리기 시작한 것이다. [18] 노산군일기는 후에 단종실록으로 개수(改受)되었으나 알맹이까지 바꾸지는 못했다. [19] 인종, 인조. [20] 세종의 차녀 정의공주 외증손이자, 정인지의 손자이다. [21] 세종 → 정의공주 → 안온천 → 정경부인 안씨 → 정세호 [22] 이극감의 손녀이다. [23] 광해군과 같이 유배당한 문성군부인 류씨는 아들 내외의 비참한 소식을 접하고 우울증 홧병 등으로 죽었다. 야사 대동야승에서는 아들 부부가 죽자 스스로 식음을 전폐해서 아사했다는 기록도 있다. 참고로 류씨는 광해군 재위기에도 친명배금을 주장했을 정도로 강단 있는 여인이었다. 그녀가 왕비였던 시절, 사찰을 돌아다니며 "내생엔 두 번 다시 왕가의 며느리가 되지 않게 하소서"라 빌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녀의 형제들도 반정 직후 모두 처형되었으니, 실로 비극의 가계라 할 만하다. [24] 정탁의 잡저인 피난행록의 기록에 1592년 5월 12일에 태어났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 평안북도 의주군으로 피난갈 당시 만삭이던 류씨가 말을 타야할뻔한 걸 심대가 옥교를 구해준 덕분에 무사히 이동할 수 있었다고 광해군이 직접 말을 한 적이 있다. # 한양이 함락됐던 1592년 5월 3일, 선조 일행은 이미 의주로 가고 있었기 때문에 5월 12일에 류씨가 출산했다는 피난행록의 내용은 사실로 봐도 무방하다. [25] 세자빈(世子嬪)의 산실(産室)을 배설(排設)하였다. - 《선조 29년 5월 22일 무자 1번째기사》 [26] 아내 문성군부인 류씨와의 사이에서 4명의 자식을 두었으나 그 중 3명은 어려서 요절했다. 유일하게 요절하지 않고 장성했던 아들인 폐세자 이지는, 아내 폐빈 박씨와 함께 유배지인 강화도에서 동반 자살 시도를 했으나 죽지 않았다. 마침 한양에서 가위를 보내온 걸 보고 유배지 탈출 계획(탈출기도)을 세웠다. 그리고 그 해 음력 4월, 26일 동안 숟가락과 가위로 땅굴을 파며 바깥으로 나오는데 성공했다. 박씨는 파낸 흙을 자루에 담아 방으로 옮겼다. 불행히도 이지는 도주 3일만에 인조의 감시자들에게 붙잡혔는데, 박씨는 폐세자의 도주 당일 나무 위에 올라가 남편이 안전하게 도망치는지 망을 보다가 그만 군졸들에게 들켜 떨어져 몸을 상했고 이후 남편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절망하여 스스로 아까운 나이에 목숨을 끊었다. 이어서 붙잡힌 이지도 자결을 명령받아, 25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27] 박승종의 손녀 [28] 세자빈 박씨의 소생으로 1614년에 태어나 같은 해에 사망하였다. [29] 이름 미상의 후궁소생으로 1618년에 태어났다. 《선원록》에서 박징원의 처의 생모는 사대부의 딸 윤씨(士族女尹氏, 폐귀인 윤씨를 칭함)라고 적혀있는 반면, 이아기의 생모는 성씨도 모른 채 그냥 양민신분의 여자(良女)라고 기록되어있다. [30] 간혹 허균의 딸 소훈 허씨를 이아기의 생모로 추측하는 경우가 있는데 소훈 허씨가 입궁한 년도와 이아기가 태어난 년도가 1618년이기 때문에 소훈 허씨의 딸일 수가 없다. [31] 의성 김씨 집안의 김문거에게 하가(下嫁)했다. 의성 김씨 족보에 따르면 김문거는 자녀가 없어 김진이라는 양자를 들였다. 김진은 밀양 박씨와 혼인해 김용윤과 김용징을 낳았고 그 이후의 계보는 알 수 없다. [32] 손주로는 폐세자와 폐세자빈 사이에서 자식이 없고 후궁 소생의 현주가 1명 있었는데 김문거와 결혼하였다. [33] 이경무의 딸 후궁 이씨의 소생으로 1620년에 태어났다. [34] 선조실록 168권, 선조 36년 11월 11일 계해 4번째 기사에 마마(천연두)에 걸려 요절했다고 나온다. # [35] 서자녀로는 귀인 윤씨에게서 옹주를 1명 낳았는데 옹주는 인조반정 이후 폐서인되었고, 이후 박징원과 결혼해 2남 3녀를 낳았다. 광해군의 아들 이지가 후손이 없었으므로, 서녀인 옹주의 후손들(즉, 광해군의 외손자의 후손들)이 광해군의 묘를 직접 돌보았고 지금도 제사(제향)를 지내고 있다. [36] 인빈 김씨의 조카 [37] 광해군의 동서인 조국필의 사촌 여동생이었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136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136 ( 이전 역사)
문서의 r136 ( 이전 역사)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