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각국의 영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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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란의 영화에 대한 문서. 중동 영화 시장 중에서는 터키와 함께 가장 활성화된 나라로 손꼽히고 역대 세계 명화인 IMDb Top 250에 들어가거나, 3대 영화제에 초청되거나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에 올라가기도 하는 등 영화 산업 경쟁력은 충분하다고 꼽히는 나라이다.2. 영화 시장
장기간 계속된 이란의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과 이에 대한 경제제재로 영화 시장의 성장이 더딘 국가이다. 비록 자국 영화 점유율이 대단히 높기 때문에 생각보다 영화로 얻는 수익이 적지는 않지만 영화 시장 규모에 대한 추산조차 안 되어있다.3. 역사
3.1. 이란 혁명 이전
카자르 왕조의 5대 왕이었던 모자파르 알딘 샤가 1900년 유럽 여행 중, 프랑스에서 시네마토그래프로 촬영된 영상을 보고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영상기 도입의 시초이다. 모자파르 알딘 샤는 아커스 버쉬라는 개인 사진사에게 모든 관련 장비를 구입하고, 영상 촬영 및 영사 관련 지식을 배우게 했다. 왕의 명령을 받은 한 달 후, 아커스 버쉬는 벨기에에서 꽃 축제 영상을 첫번째 영상으로 만들어 테헤란에서 왕족, 장관 및 궁중의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첫 선을 보이게 되는데, 이것이 이란 영화와 이란 영상물의 시초이다. 이란의 영화는 이렇게 궁중 오락물의 형태로 시작하게 된다.1930년 아르메니아 출신의 이민자였던 호브한네스 오하니안(Hovhannes Ohanian)은 이란에 연기 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연기 학교 출신 배우 및 촬영자인 컨 버버 모타제디는 프랑스 영화 스튜디오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데, 그가 1930년 슬랩스틱 코미디인 '어비와 라비(آبی و رابی)를 제작하게 된다. 이것이 이란인이 제작한 영화의 최초 등장이었다.
레자 샤 통치기 때에는 영화 제작자들이 국가 기반 시설의 급속한 발전을 보여주는 뉴스 릴을 제작하기만 하면 영화 산업을 지원하였고, 이는 이란의 영화 발전을 위한 길을 열었다. 레자 샤는 통치 초기에 권력을 과시할 수 있는 수단으로 카메라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이란답게 본인이 보여주기를 원하는 대로 카메라를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궁정의 허가 없이는 누구도 카메라를 소유할 수 없었다. 이 시기의 대부분의 영화는 유럽, 미국, 러시아에서 수입되었다. 레자 샤의 문화정책은 서양 영화 유입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였다. 1928 ~ 1930년 동안, 1000편 이상의 외국 영화가 이란에 수입되었다. 이 중 절반이 미국에서, 나머자기 프랑스, 독일, 러시아 및 기타 국가에서 수입되었다. 후에 레자 샤가 독일에 대한 호의가 생기면서 독일 영화 수입 편수가 증가했다. 1941년 레자 샤의 퇴위 후, 독일 영화는 이란 영화계에서 급속히 사라졌고, 그 결과로 미국 영화가 증가하였고, 1940년 60%에서 1940년 70~80%까지 증가하였다.
이란 혁명 이전의 영화들은 지금 시점에서도 파격적인 영화들이 많았는데, 이란 여성 감독인 포루그 파로흐자드의 한센병 다큐멘터리 검은 집, 모하마드 레자 아슬라니의 바람의 체스가 대표작으로 꼽힌다. 특히 바람의 체스는 레즈비언 커플과 가족 암투극 등 이란 혁명 이후 영화들에서 볼 수 없는 파격적인 내용으로 아직도 회자된다.
3.2. 이란 혁명 이후
사실 이전부터 이란 영화는 나름의 계보를 가지고 발전해 왔지만, 이란 영화가 본격적으로 세계에 알려진 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공이 크다. 키아로스타미는 이후 이란 영화계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한동안 국제 무대에 소개된 이란 영화는 키아로스타미 대표작처럼 순진하고 따뜻한 감수성과 리얼리즘을 내세우는 영화들이 많았다.하지만 바흐만 고바라던가 아시가르 파라하디의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같은 현대적이고 동시대 이란을 다루는 영화들도 서서히 해외에 알려지고 있는 편이다.
그러나 검열이 깐깐하기로 악명이 높고 이러한 검열 문제는 매우 오래된 문제인데 단순히 범죄나 정치적인 일은 물론이고 히잡을 안 쓰거나 하는 사소한 일에까지 지나칠 정도로 깐깐하게 굴고, 정치 상황에 따라 검열 정도가 오락가락하기도 하기에 감독이나 배우들이 마음 편히 활동하기가 힘들다. 대표적인 예로 자파르 파나히는 투옥 후 자택 감금 상태에서[1] 게릴라전을 방불케 하는 다큐픽션 영화를 찍고 있으며, 쿠르드계 감독인 바흐만 고바디 역시 검열과 싸워야만 했다. 극단적인 탄압을 받진 않더라도 검열로 인한 자국 인재들 유출 현상도 심각한 편이다. 파라하디는 유럽과 이란을 넘나들며 검열을 피하고 있으며 키아로스타미도 2008년 이후 타계 직전까지 이란에서 검열을 견디지 못하여 유럽이나 아시아로 옮겨 활동했다. 심지어 2020년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한 모하마드 라술로프는 출국 금지 당한 상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하자마자 보란 듯이 징역 1년형을 선고받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라술로프는 결국 2024년 몰래 만들던 신성한 나무의 씨앗 작업을 마치자마자 또 구속될 위기에 처했고, 끝내 망명해버렸다. 당연하겠지만 자국에서도 불만의 목소리가 많아서 마니 하기기는 피그를 통해 노골적으로 검열과 탄압을 비꼬기까지 했다.
악명높은 여성들을 향한 탄압도 여전해 여배우들에게 히잡 강요를 하며 조금만 뜨면 태클이 걸려서 억압당하다 보니 여배우들이 못견디고 망명해버리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히잡 안 쓴 사진 올렸다가 활동 정지당한 뒤 아랍 에미리트로 간 사다프 타헤리안라던가 아예 누드 사진을 공개해 이란 정부에게 가운뎃 손가락을 날리고 거처를 유럽/미국으로 옳겨버린 골쉬프테 파라하니가 대표적이다.
2022년 이란 시위로 인한 정부의 탄압으로 이란 영화계도 뒤숭숭한 상태로, 가석방 상태였던 자파르 파나히가 동료 감독 탄압에 항의 시위에 나섰다가 재수감되었으며 2022년 이란 시위 지지를 표한 타라네 알리두스티도 투옥되는 등 탄압 강도가 다시 올라가고 있다. 역설적으로 2022년 이란 영화는 유례없을 정도로 걸작이 많이 나와서 풍년이라는 평이 많다.
4. 작품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세일즈맨(영화), 천국의 아이들 등이 한국에도 개봉한 유명 이란 영화이다.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 영화상을 받은 작품도 꽤 있다.어느 독재자는 조지아어를 사용하고 조지아인 배우들이 출연하기 때문에 조지아 영화로 분류되지만 이란인 감독의 작품이다.
EIDF 출품작인 2019년작 다큐멘터리 단편 영화 아쇼가 작중 등장하는 소년, 소녀의 풋풋하고 귀여운 모습 때문에 한국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5. 영화감독
-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 마지드 마지디
- 모흐센 마흐말바프
- 바흐만 고바디
- 아스가르 파르하디
- 자파르 파나히
- 탈미네 밀라니
- 호세인 샤하비
6. 유명 영화 배우
7. 영화관
1905년 골동품상이었던 사허프버쉬는 영사기를 이란에 수입하여 가게 뒷마당을 노천극장으로 개조해 테헤란에서 영화 상영을 시작하였다. 당시 관객은 주로 상류층이었으며, 러시아를 통해 이란으로 수입된 무성 영화를 상영했다. 그러나 상영한 영화에 히잡을 착용하지 않은 여성이 등장했다는 소문이 돌자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결국 극장은 폐쇄된다.1912년까지는 외국 태생, 특히 러시아 태생의 이란인들이 극장을 세웠으나 10년 이상 유지한 사람은 아르메니아 사업가인 아르다쉬르 컨 버트먼갸리연이 유일했다. 그는 프랑스 회사와 협력하여 Cinema Jadid를 1913년 오픈한다.
테헤란에 서점을 소유하고 있었던 프랑스 여성 Bernadotte는 작은 영사실에서 주로 프랑스어 화자인 고객들을 대상으로 뉴스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상영하였다. 이 영화 중 일부는 그 당시 민족주의 정신에 기여했으며, 이란 대중들 사이에 자극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Bernadotte가 영화에 사탄을 불러왔다고 주장하며 비난하였고, 곧 영화관은 폐쇄된다. 1920~1930년대에는 다수의 영화관이 설립된다. 1930년대 초까지만 해도 테헤란에만 15개의 극장, 그 밖의 도시에 11개의 극장이 설립되었다.
레자 샤는 쿠제스탄에서 앵글로-페르시아 석유 회사의 인상적인 다큐멘터리를 시청한 후, 테헤란에 새로운 극장을 건설하도록 명령한다. 이 극장은 당시 테헤란 북부 도로였던 럴레저르 로(路)에 유럽식 호텔들과 함께 건설된다. 레자 샤는 테헤란 남부의 빈곤 지역에도 영화관을 건설하도록 하였다. 이 영화관은 레자 샤가 이란 국민을 현대적 생활 방식으로 교육시키려는 결단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이란 내에서 하위 계층의 극장 이용이 증가하면서 극장의 계층 구조도 나타나게 되었는데, 엘리트 극장과 대중 극장으로 구분된다. 엘리트 극장은 그 시대의 고품질의 영화를 보여주었고, 그 영화들이 모티브로 받아 들인 서구 문학에 익숙한 교육받은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였다. 또한 서구음악을 감상할 수 있었다. 반면, 대중극장은 외국, 코믹, 액션 및 어드벤처 영화를 상영했고, 교육을 상대적으로 덜 받은 대중들이 이용했다. 엘리트 극장과는 달리 대중적인 페르시아 음악이 연주되었다.
21세기 이후로는 테헤란 등의 대도시 지역에서는 추세에 맞게 멀티플렉스 극장이 다수 건설되었다.
[1]
2015년 택시 이후로는 그나마 상황이 나아져 국내 여행은 가능해졌지만 해외 출국은 여전히 불허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