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4 15:15:23

기루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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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제3대 국왕
기루왕 | 己婁王
<colbgcolor=#008080><colcolor=#fbe673> 출생
(음력)
33년 1월 이전[1]
백제 위례성
(現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일대)
사망
(음력)
128년 11월
백제 위례성
(現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일대)
능묘 미상
재위기간
(음력)
백제 왕태자
33년 1월 ~ 77년 9월 (44년 8개월)
백제 제3대 국왕
77년 9월 ~ 128년 11월 (51년 2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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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루(己婁)
부모 부왕 다루왕
모후 미상
왕후 개루, 질의 모후
자녀 개루
[2]
왕호 기루왕(己婁王) }}}}}}}}}

1. 개요2. 생애3. 기타4. 《 삼국사기》 기록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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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제의 제3대 군주이자 건길지. 제2대 다루왕의 장남.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백제 초기 기록에서 많이 드러나는 문제점이지만 재위 기간이 굉장히 길다. 경기도 일대 고고학적 기록마저 고이왕 후반부 외엔 삼국사기 기년과 전혀 부합하지 않고 중국 사서와도 교차검증되지 않기 때문에, 기년과 재위 기간은 그냥 무시해도 좋을 수준이다. 그나마 계보는 딱딱 맞아떨어지는 신라 초기 기록과는 달리 기록이 더욱 영성한 백제 왕계는 그런 상황도 아니다.

사실 이는 기원후 3~10세기 초기 게르만족, 슬라브족 왕가 연구에서도 드러나는 문제인데, 엄연히 여러 가문이 서로 수장 자리를 주고 받거나 한 가문에서 계속 집권했어도 계보가 아버지에서 아들로만 가진 않았던 게 주변 공동체 혹은 거대 제국들(=로마 제국, 이슬람 제국)이 남긴 기록에서 드러남에도, 이런 공동체들이 보유하고 있는 '공식' 기록은 최종적으로 국가 형성을 확정지은 가문이 처음부터 계속 즉위했고 계보도 아버지에서 아들로 제대로 승계한 걸로 되어 있다. 즉 본인들이 역사 서술을 정립할 때 다소 왜곡에 가까운 축약을 저지른다는 점인데, 초기 백제도 이러한 점에서 예외가 아니었을 개연성이 있다.[3]

2. 생애

삼국사기상 계보와 기년으로는 다루왕의 큰아들로 서기 33년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다루왕이 서기 77년에 죽자 즉위한 걸로 되어 있다. 태자 생활이 44년이고 재위기가 52년인데 당연히 이는 엉터리다.

그 외 기록상으로는 다루왕 후반부 때처럼 신라의 변방을 때리다가 105년에 화친을 청해 사이좋게 지냈으며 113년에도 신라에 사신을 보낸 걸로는 되어 있다. 이런 화친 정책의 결과물이 바로 신라를 침공한 말갈[4]을 저지하기 위해 보낸 장군 5인과 지원군이다. 하지만 아들 개루왕의 재위기인 155년에 신라 아찬 벼슬의 길선이 반란을 도모했다가 백제로 도망온 걸 받아준 것 때문에 신라와 백제 사이 우호는 50여 년만에 깨지고 다시 으르렁거리게 된 걸로 나온다.

이 기록의 '신라'는 경주가 중심지인 우리가 아는 신라가 아니라 나중에 신라로 흡수될 진한 계통의 나라를 신라로 소급해 기록한 것이라는 학설도 있었으나, 이는 고고학적 연구가 축적되기 이전에 삼국사기 초기 기년을 맹신하여 이뤄진 아주 오래전 추정이다. 고고학적으로는 목지국이 건국되기도 전 시기인데다 진한의 경북 일대 공동체와 마한의 경기도 혹은 충북 일대 공동체가 서로 다툴 이유가 딱히 없었고, 백제가 목지국에게 하극상을 저지른 후에는 오히려 목지국 지지 세력인 충북 일대 마한 거수국들이 경북 일대 진한 거수국들의 지원을 받아가며 경기도-충남 북변 일대를 장악한 백제와 대결한 게 드러난 맥락과도 전혀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백제가 신라 변방 일대를 건드리려면 그 경로 상에 있는 목지국의 방해를 치우는 게 우선이므로, 이 일은 실제로는 고이왕 이후에 일어났을 개연성이 높다. 즉 온조왕 때 기록과 마찬가지로 훗날 일어난 일이 상당 부분 소급되어 전제된 것이다.

별다른 내용은 없으나 천재지변 등에 대한 기록이 상당수이다. 재위 13년에는 89년 서울 지진이 발생했으며, 심지어는 32년에 가뭄이 극심해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었다고 했을 정도이다. 재위 21년에는 군주를 상징하는 동물인 이 2마리씩이나 한강에 나타났다고 하는 걸로 보아 백제의 내부 사정이 힘들었으리라고 추측하기도 하는데 나라 내부의 변고를 천재지변에 빗대어 기록하는 케이스도 있기 때문에 뭔가 있었을 듯 하다. 기루왕은 재위 21년에 죽고 두 왕자가 차기 국왕 자리를 두고 싸운 것에 대한 은유라는 설도 있다.

제2대부터 제8대까지 재위 기간이 비정상적으로 길기 때문에 실제로는 중간에 누락된 왕이 있을 것이란 추정은 있었으나, 이는 고고학적으로 백제 초기사 기년이 삼국사기 기년과 거의 부합하지 않음이 밝혀지기 전 학설이다. 그보다는 2~8대 임금들의 기년이 고구려 주몽 재위기에 맞추기 위해 인위적으로 죽죽 잡아늘여졌을 가능성이 크다.[5]

쉽게 말해서 1대 온조왕 재위 46년, 아들인 2대 다루왕이 재위 49년, 손자인 3대 기루왕이 재위 51년, 증손자인 4대 개루왕이 재위 39년, 고손자인 5대 초고왕이 재위 48년이다. 평균 수명 계산하면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1~5대인 본인, 아들, 손자, 증손자, 고손자까지 5명이 나라 다스리니까 223년이란 세월이 흘러간다. 교차검증 가능한 삼국시대 중반기~조선시대 왕들 재위기간과 비교하면 말이 안 되는 수준.

3. 기타

  • 부여왕 해부루[6], 고구려의 제2대 왕인 유리왕(해유류), 고구려의 제3대 왕인 대무신왕(해주류) 등 婁(별이름 루), 留(머무를 류) 등을 왕명으로 쓰는 왕들이 모두 해씨였기 때문에[7] 婁를 쓰는 다루왕, 기루왕, 개루왕을 모두 마찬가지로 해씨로 보고[8] 해부루 우태 비류 다루왕 기루왕 개루왕으로 이어지는 소위 해씨의 비류왕계 왕가로 보기도 한다. 이 경우 다루왕 및 '루'자 돌림 왕들은 온조왕계와는 다른 왕통이 되며, 후에 초고왕이 즉위함으로써 비류왕계 왕가가 물러나고 온조-초고왕계 부여씨 왕가의 시대가 열렸다고 본다.[9] 게다가 이후 고이왕이 집권한 뒤 초고왕계와 고이왕계가 권력 투쟁을 벌이다가 근초고왕 대부터 초고왕계로 일원화되는데 고이왕 시기 우씨(우태를 통해 연관된다) 왕족의 대거 출현을 근거로 고이왕계를 비류왕계를 이은 우씨의 비류-고이왕계 왕가로 해석[10]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에서 초기 백제를 비류 & 고이계 - 온조 & 초고왕계 사이 알력 다툼으로 볼 수도 있을 듯 하다.

4.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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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
{{{#!folding [ 열전(列傳) ]
}}} ||

《삼국사기》 <기루왕 본기>
一年秋九月 기루왕이 즉위하다
九年春一月 신라의 변경을 공격하다
九年夏四月 객성이 자미로 들어가다
十一年秋八月 일식이 일어나다
十三年夏六月 지진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이 죽다
十四年春三月 큰 가뭄이 들어 보리가 나지 않다
十四年夏六月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쓰러지다
十六年夏六月一日 일식이 나타나다
十七年秋八月 횡악의 큰 바위 다섯 개가 땅에 떨어지다
二十一年夏四月 두 마리 용이 한강에 나타나다
二十三年秋八月 서리가 내려 콩이 죽다
二十三年冬十月 10월에 우박이 내리다
二十七年 한산에서 사냥하여 신성한 사슴을 잡다
二十九年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다
三十一年 겨울에 얼음이 얼지 않다
三十二年 봄과 여름이 가물어 흉년이 들다
三十二年秋七月 말갈이 우곡에 침입하다
三十五年春三月 지진이 일어나다
三十五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다
三十七年 신라에 사신을 보내다
四十年夏四月 서울 성문 위에 황새가 둥지를 틀다
四十年夏六月 한강 물이 넘쳐 가옥이 유실되다
四十年秋七月 수해를 당한 논밭을 복구하다
四十九年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아 장수를 파견하다
五十二年冬十一月 기루왕이 죽다

보면 알겠지만 재위 기간 52년 중 기록은 고작 25줄. 그나마도 자연 재해를 제외하면 5줄밖에 안 남고 그조차 전부 <신라본기>에서 베껴온 것이다.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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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성왕
비류국
비류왕
덕좌왕
장남
13대
근초고왕
12대
계왕
14대
근구수왕
부여신제
19대
구이신왕
부여주
순타태자
26대
성왕
(?)
부여법사
28대
혜왕
(?)
아좌태자
29대
법왕
30대
무왕
부여교기
32대
풍왕
부여선광
부여문사 부여문선 부여덕장
부여사
부여창성
[범례]
실재 혈통 기준
세로선(│) 부자, 부녀, 사위관계
가로선(─) 형제, 자매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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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문단 참조 [2] 고이왕 치세 때 숙부인 질을 우보에 임명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우씨 왕가설이 맞다면 전체 이름이 우질(優質)이 된다. [3] 그런 의미에서, 적어도 계보는 정확히 기술하고 왕위도 세 가문에서 오갔던 점을 솔직하게 피력한 신라측 기록이 꽤 양심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 같은 경우는 고구려의 잦은 약탈 탓에 중원 제국이 고구려에게 관심이 많았던 터라 중국 문관들 또한 기록을 그나마 상대적으로 많이 남긴 편이다. 그러나 백제는 두 경우 모두 아니었다. [4] 만주 쪽의 퉁구스계 말갈이 아니라 2번 단락의 가짜말갈, 동예 예맥계 집단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5] 신라 초기사 또한 적어도 계보는 백제보다 훨씬 정확하지만 기년이 잡아늘여진 정도는 더욱 심하다. 백제는 그나마 고이왕 후반부부터는 삼국사기 기년으로 합리적 설명이 가능하지만 신라는 그보다 훨씬 늦은 4세기 말 광개토대왕이 출현하여 내물 마립간의 신라를 속국으로 복속시킨 이후부터 맞아들어가기 때문이다. [6] 비류 시조설에 따르면 비류의 아버지인 우태가 해부루의 서손이 된다. [7] 비류는 流(흐를 류)자를 쓰지만 역시 해씨이다. [8] 해씨는 고구려의 국성인 고씨와 동일시되고, 부여계 성씨로 추정되며 한성백제때부터 활동한 귀족으로 백제의 개국공신이었던 해루가 있다. 훗날 해씨는 대성팔족 중 하나가 되었다. [9] 노중국. 1988.《백제정치사연구》 [10] 천관우. 1976.《한국의 국가형성》, 노중국. 1988.《백제정치사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