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22 11:01:57

신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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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53대 국왕
신덕왕 | 神德王
파일:배동 삼릉.jpg
배동 삼릉 전경.
출생
(음력)
870년대 (추정)[1]
신라 금성
사망
(음력)
917년 7월 (향년 40대 중후반)
신라 금성
능묘 배동 삼릉(拜洞 三陵)
재위기간
(음력)
신라 제53대 국왕
912년 4월 ~ 917년 7월 (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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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휘(景暉) / 경휘(景徽)[2]
부모 양부 선성왕 박예겸[3]
부왕 흥렴왕 박문원
모후 정화태후
왕후 의성왕후 김씨[4]
자녀 태자 박승영
왕자 박위응, 박효렴
종교 불교
시호 신덕대왕(神德大王)[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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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배동 삼릉 묘비.jpg
배동 삼릉 묘비

1. 개요2. 생애
2.1. 출신2.2. 즉위2.3. 치세2.4. 신덕왕릉
3. 《 삼국사기》 기록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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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의 제53대 국왕.

시호는 신덕왕(神德王). 경명왕(제54대) 대에 지은 <태자사 낭공대사 비문>에는 '성고대왕'(聖考大王)이라고 불렸다. '고'(考)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높여 부르는 말인데, 군주의 아버지라 거룩할 '성'(聖) 자를 붙혀 '성고'(聖考)라고 부른 것이다.

휘는 경휘(景暉). 신라 초기의 마지막 박씨 군주였던 아달라 이사금(제8대)의 먼 직계 후손이기도 하다.[6][7]

다만 신라 사회에서는 다름아닌 이미 경덕왕 때부터 시작되어 정착된 유교적 부계 관념 일색인 대한민국 통념으로는 이해가 안 될 정도로, 모계도 대단히 중요했다. 골품제의 원리는 부모 양친 둘 중 낮은 골품을 따라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진골이라도 어머니가 6두품이면 본인은 당연히 6두품이 되는 것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일종의 귀천상혼적인 개념으로서 예컨대 아달라 이사금이 못해도 진골 가문의 여식으로부터 자녀를 보지 못했다면 그의 다른 자녀들은 모조리 6두품 이하 골품으로서, 사서에는 (적)자녀가 없다고 적혀도 할 말 없는 상태였다. 그러니 박석김 각 가문들이 그토록 같은 성ㆍ진골인 박석김 안에서만 혼인했던 것이며, 김씨 성을 받아 일단 진골로 편입된 옛 가야 왕족 가문인 김유신 계열 및 보덕국 안승 계열이 적어도 신라 사회 기준으로는 대단한 특혜를 받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덕왕이 정말로 아달라 이사금의 후손일 가능성을 마땅한 근거 없이 마냥 부정할 순 없다.

아버지는 '선성대왕'으로 추증된 박 예겸(乂兼 또는 銳謙)이고, 어머니는 정화부인(貞花夫人)이다. 삼국유사에서는 박예겸은 의부이고, 친아버지는 '흥렴대왕'(興廉大王)으로 추봉된 이찬 박문원(文元)이라고 했다. 의부 박예겸과의 관계에 대해서, 친아버지 박문원이 사망한 후, 신덕왕 박경휘의 친어머니가 박예겸에게 재가했다는 설과 박예겸과 박경휘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의부와 의자 관계를 맺었다는 설이 존재한다. 이 외에도 그의 이름인 '경휘'는 제42대 흥덕왕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인 '정화'는 흥덕왕의 왕비인 장화부인과 음운상 유사점이 있다[8][9].

신덕왕의 왕비는 제49대 헌강왕의 딸인 의성왕후다.

2. 생애

2.1. 출신

박경휘의 의부 박예겸 헌강왕 치세에 시중을 역임하는 등 상대등 김위홍과 대등한 정계의 실력자로 급부상했으나 경문왕계가 사실상 정치를 독점하면서 잠시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헌강왕 이후 경문왕의 딸인 진성여왕(제51대) 시기에 이르러 각 지방의 반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호족들이 사실상 독립해버리고, 후삼국시대에 이르는 파국을 맞게 되자, 수도(서라벌) 시민을 뜻하는 국인(國人)들의 여론이 진성여왕과 김위홍 등 경문왕계를 거세게 비판할 정도로 민심이 악화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위기의 신라에서는 대안으로 박씨 족단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진성여왕이 스스로 퇴위한 후 즉위한 효공왕(제52대) 김요는 왕자 신분을 숨기고 민간에서 성장한 서자 출신으로 혈통적 정당성에 문제가 있는데다 12세의 나이 어린 왕으로 사실상 징검다리 역할이었고, 실상 진성여왕 재위 후반기에 이르면 박씨가 실권을 장악했을 가능성이 높다. 박예겸은 자신의 딸을 효공왕의 왕비로 들이고, 박경휘는 헌강왕(제49대)의 딸과 결혼하는 중첩된 혼맥으로 박씨 왕위 계승의 명분을 쌓았다.

사실 박씨라는 점이 중요하다기보다 신덕왕 박경휘 자신은 효공왕의 매부 자격으로 왕위를 계승한 것인데 자신이 왕위 계승권 1위임에도 매부로서 왕위에 오른다고 하면 정통성에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특히 '아달라 이사금은 왕자가 없다'고 떡하니 사서에 적혀 있기 때문에 의문이 생긴다. 아달라 이사금이 딸이라도 있었으면 사위에게 왕위가 계승되었을 텐데 그렇지 않은 점도 그렇다. 이렇게 된 이유를 《 삼국유사》를 보면 알 수 있는데 <왕력>편에 따르면 신덕왕이 대왕으로 추봉한 사람은 아버지, 양아버지, 외할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아버지 박문원이 아닌 양아버지 박예겸이 《 삼국사기》에서 그냥 아버지로 나와 있고, 친아버지 박문원은 관등이 2등급인 이찬, 할아버지 박문관은 관등이 3등급인 파진찬으로 의붓아버지 박예겸, 외할아버지 박순홍, 외증조할아버지 박원린이 전부 1등급인 각간인 것과 대비된다. 더불어 외가가 아달라 이사금의 원손일 뿐 친가에 대한 언급은 없으므로 엄밀히 따지자면 부계가 박씨라고 장담할 수도 없다. 일단 자신의 아버지 박문원은 물론 양아버지 박예겸에 외할아버지 박순홍까지 추봉하고, 아들인 경명왕 또한 자신의 장인인 김대존을 갈문왕도 아닌 '성희대왕'에 추봉한 것을 보면 왕권의 정당성이 약하기는 했던 모양이다. 다만 신라시대엔 현대와 달리 부계가 모계보다 딸리면(?) 모계 가문의 일원으로 칭하기도 했으므로 당시 기준으로는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기는 하다.

《삼국사기》를 바탕으로 하자면 석씨, 박씨, 김씨는 신라의 국성으로 한 집안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서로 통혼을 매우 많이 했다. 박씨는 김씨부인, 김씨는 박씨부인 이런 식으로 근친 간 통혼을 한 것이 1,000여 년간 몇 백번은 족히 될 것으로 추산된다. 게다가 중간중간에 같은 성씨끼리의 근친혼도 덤이다. 이 정도면 두 집안의 유전자가 하나로 합쳐진 수준인데 예외는 1,000년 신라사 전체를 찾아봐도 김유신의 여동생 문명왕후 성왕의 딸인 소비 부여씨와 같이 제한적이다. 이는 신라의 특징적인 모습으로 고구려 백제와는 많이 다른 부분인데 권력을 하나로 모으기에 효율적인 방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족 혹은 귀족들끼리의 분열을 막기 위함이라 추정되고[10] 쿠데타가 일어나더라도 같은 성씨쪽에서 일어난 것이라 한 쪽이 진압되어 처형되고 재산이 몰수되더라도 가문 전체의 재산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진실은 알 수 없지만 김씨 중에 한 명이 박씨를 칭한다 하더라도 유전자상으로나 정통성으로나 별다른 문제는 없다.

신라를 연구한 역사학자 이노우에 히데오에 의하면 신덕왕은 원래 김씨인데 여동생이 효공왕 왕비가 되면서 박씨를 칭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다만 원래 김씨였는데 박씨를 칭하게 되었다는 주장의 문제점은 김씨였어도 왕위 계승에 별 어려움이 없었을텐데 왜 굳이 박씨를 칭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11]

다만 박씨 왕의 재등장을 부정하는 견해만이 정설인 것은 아니다. 당장 신덕왕의 성이 박씨가 아니라는 적극적인 반증은 역사 관련 기록 어디에도 없다. 고대사 중에서도 특히 후삼국시대는 혼란+훗날 여요전쟁 때 대대적 기록 소실까지 겹쳐서[12] 너무나 기록이 부족해서 이런 것도 어떻다고 단정하기가 어려운 현실이다.

어쨌거나 당시 후삼국시대가 막 개막하여 후백제의 공격을 받기 시작한 신라에서 경문왕계는 후삼국 발생에 따른 정치적 책임을 져야 했다. 진성여왕이 자진 퇴위한 명분도 "후삼국시대 발생"에 따른 책임 아니었던가. 그래서 이후로도 박씨를 내세운 집권세력이 짧게나마 이어졌던 것이다. 다만 신덕왕이 설령 김씨였다고 해도 김씨 족단이 아닌 박씨 족단이라는 것을 내세워서 집권해야만 했다는 건 이후 신라가 가뜩이나 부족한 자원과 역량에서 김씨 족단으로 추정되는 내부 반대 세력 탓에 잦은 곤욕을 치렀던 일들을 보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일단 신덕왕 자체는 정말로 박씨였을 개연성이 높다고 봐야 한다.

2.2. 즉위

신덕왕의 즉위는 신라 역사에서 큰 의미를 가지는데 바로 후기 박씨 왕조의 초대 왕이었다는 점. 이는 제8대 아달라 이사금이 죽은 지 수백 년 만에 박씨 왕이 다시 즉위한 것이다.[13]

경문왕계가 4대 연속으로 후사가 없는 상황에서 신덕왕 박경휘가 헌강왕(김정, 제49대)의 사위로 경문왕가의 일원이 되었기 때문에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었다. 신덕왕은 효공왕 김요의 처남이기도 했는데 신덕왕의 양아버지 박예겸의 딸이 효공왕의 왕비로 들어갔다. 과거 석탈해 김미추가 전 왕과 성씨가 다른데도 왕위에 올랐던 과정과 유사한 과정을 거쳐 왕위에 오른 것이다.[14] 다만 석탈해나 김미추는 임시로 왕위를 물려받고 다시 원래 성씨에게 왕위가 넘어갔던 케이스지만, 신덕왕은 즉위한 직후, 아들 박승영을 태자로 삼아서 앞으로도 박씨로 이어진다고, 대내외에 후계 구도를 명확히 선언했다. 이는 진성여왕과 효공왕을 거치며 너덜너덜해진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한 의도였을 것이다.

태종 무열왕 김춘추에 의해 성골이 폐지되고, 진골 왕위 계승 체제가 확립되었으면서도 시조묘와 신궁 나정 주변에서 박혁거세와 하늘신에 대한 제사는 계속 지내져오고 있었고, 박씨가 신라의 시조로써 신성한 존재로 여겨지며 계통이 꾸준히 이어져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덕왕은 본인에 그치지 않고, 박씨 계승이 그의 아들들에게 이후 계속된다는 점에서 적어도 신덕왕의 시대에는 박씨가 신라 조정의 실권을 잡고, 박씨 왕조를 회복했다고 볼 수 있으며, 그동안 박씨가 숙청되지 않고 중앙 귀족으로써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의 국왕이 되었던 때가 이미 육칠백 여년 이상 훨씬 넘은 박씨를 칭하며 왕위를 계승하여 계통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점에서 후삼국시대 신라의 난맥상을 추측할 수 있기도 하다.

2.3. 치세

915년 6월, 참포(槧浦, 현재의 경상북도 포항시 흥해읍의 곡강(曲江) 추정.)의 물과 동해의 물이 서로 부딪쳐 물결의 높이가 20장(丈) 쯤이나 되었는데 3일만에 그쳤다는 기록이 있다. 참포는 당시 신라 4독의 하나로 국가에서 제사지내는 중요한 하천이었다. 다만, 두 물결이 3일 동안 서로 부딪혔다는 것이 신덕왕과 반대 세력과의 대립을 상징적으로 남긴 기록으로 보기도 한다.

916년 10월, 큰 지진이 났다는 기록도 있다. 일반적으로 백두산 폭발에 따른 영향으로 보고 있다.[15]

후삼국시대의 신라 왕들 중에서는 경애왕(제55대)과 함께 선전했는데 916년 대야성에 처들어온 견훤을 막아내기도 했다. 덕분에 신라 중앙은 920년 대야성이 함락당할때까지는 안전할 수 있었다.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신라가 현 경상남도 일대인 강주 지역에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고, 이런 승리는 서라벌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주었을 것이다. 신덕왕은 소율희 등 친 신라계 호족과는 교류했지만 신라에서 벗어나 국가 건설을 자칭한 견훤이나 궁예의 세력을 반란 세력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그들과 손을 잡거나 힘을 빌린다든가 하는 시도는 전혀 하지 않았다.[16] 신덕왕 때까지는 아직 신라의 이름 아래 남아 있는 호족이 많이 존재했는데 이런 기조가 깨지는 건 다음 군주인 경명왕 때였다.

진성여왕과 효공왕이 그랬듯 당대 민중에게 종교적 영향력을 가진 선종의 고승들을 수도로 불러들이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는 전국 각지의 고승비에 기록이 남아 있다. 신라 조정에 우호적인 호족이었던 소율희 형제가 다스리고 있었던 김해부에는 낭공 선사가 머물고 있었는데 낭공 선사를 서라벌로 초빙하고, 남산에 있는 실제사에 머물게 했다. 이 실제사는 신덕왕이 임금으로 즉위하기 전에 살았던 집이라고 하는데 그만큼 낭공 선사를 존중한다는 의미와 선종 불교의 수호자 역할을 하던 김해 호족과의 관계 강화 시도로 풀이되고 있다.

4남 1녀를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슬하에 승영(昇英)·위응(魏膺)·효렴(孝廉) 등이 있었는데 박승영은 제54대 경명왕이 되었고, 박위응은 제55대 경애왕이 되었다. 조상인 아달라 이사금의 바로 옆에 묻혔고, 나중에 경명왕도 옆에 묻혀 지금의 배동 삼릉이 되었다.

2.4. 신덕왕릉

파일:Baedongsam.jpg
배동 삼릉 중 가운데 있는 능이 신덕왕릉이다. 아래쪽은 먼 조상인 8대 아달라왕릉, 위쪽은 아들인 54대 경명왕릉.

1963년 7월 19일에 도굴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원래 왕릉으로 지목된 능은 대한민국에 현존하는 후손들[17]의 영 좋지 않은 시선도 감안해 발굴조사하지 않는 게 대부분이지만, 도굴로 훼손된 능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조사가 이루어졌다. 3개의 능 모두 돌로 방을 만들고 문이 있는 전형적인 굴식 돌방무덤이었으며, 왕과 왕비의 합장묘였고, 능 내부에서 신라 왕릉에서 찾아보기 힘든 채색 벽화의 흔적이 발견되어 주목을 받았다. 원래는 사신이 그려져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으며, 벽화 외 다른 유물은 이미 없었다.

3. 삼국사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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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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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신덕왕 본기>

一年夏四月 신덕왕이 즉위하다
一年夏五月 아버지를 추존하다
一年夏五月 아들 승영 왕태자로 삼다
一年夏五月 이찬 계강을 상대등으로 삼다
二年夏四月 서리가 내리고, 지진이 일어나다
三年春三月 서리가 내리다
三年春三月 궁예 연호를 정개로 고치다
四年夏四月 참포의 물과 동해의 물이 서로 부딪치다
五年秋八月 견훤 대야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다
五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다
六年春一月 태백이 달을 범하다
六年秋七月 왕이 죽다

자연재해에 관한 이야기와 궁예, 견훤 이야기를 제외하면 아버지 추존, 아들을 태자로 삼은 거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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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인 헌강왕(제49대)인데 자신보다 나이 많은 사위를 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승하할 당시의 나이는 아무리 많이 잡아봤자 40대 중후반 정도일 듯하다. [2] 《삼국유사》 <왕력>편에서의 표기지만 이건 흥덕왕(제42대)의 이름이다. 다만 발음 자체는 중고한어 기준으로 둘 모두 kiängx hüei로 동일하다. [3] 왕족인 양아버지. [4] 헌강왕(제49대)의 딸. [5] 태자사낭공대사비 기록. [6] 밀양 박씨 세보》에 따르면, 아달라 - 벽방(碧芳) - 무영(武英) - 판득(判得) - 광흠(光欽) - 미일(美一) - 내물(乃物) - 상건(相建) - 인엽(仁燁) - 계보(啓輔) - 명신(明信) - 정환(貞環) - 노겸(露兼) - 남선(楠善) - 금산(金山) - 응찬(應燦) - 덕흥(德興) - 대녕(大寧) - 이순(尼淳) - 융검(隆劒) - 지곤(之坤) - 성순(成順) - 2남 예겸(乂兼) - 신덕왕 경휘로 계보가 이어진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신덕왕은 제8대 아달라 이사금의 24세손이 된다. 그러나 삼국사기에선 아달라의 후손은 공식적으로는 없다고 못박았고, 예겸은 신덕왕의 친부가 아닌 양부인데다가 아달라와 예겸 사이의 인물들 21명 모두 역사서에 행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으므로 족보에만 나오는 이 가계는 후대에 창작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딱 보기에도 신라시대에 쓰였을 법한 이름들이 아니다. [7] 실제로는 하대 신라사 곳곳에서 보이는 박씨 가문( 희강왕(제43대)의 모친 순성태후 박씨, 민애왕(제44대)의 모친 선의태후 박씨, 신무왕(제45대)의 모친 헌목태후 박씨, 문성왕(제46대)의 모친 정종태후 박씨, 경문왕(제48대)의 모친 광의왕태후 박씨 등)의 일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왕위 계승의 명분부터 있어야 하기 때문에 당연히 순수 박씨가 아니라 박씨 가문의 마지막 임금인 아달라 이사금을 끌어다 자칭했을 가능성이 높다. [8] 희강왕(제43대)의 부친 김헌정(金憲貞)을 다른 사료에서는 '김헌장'(金憲章)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9] 이를 생각해보면 ‘박순홍’이라는 이름은 제39대 소성왕 형제의 손자 항렬임을, ‘박경휘’와 ‘박정화’라는 이름은 제42대 흥덕왕 장화부인을 계승한 인물임을 나타내는 지표일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이 흥덕왕 및 장화부인과 혈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면, 박순홍이 흥덕왕의 손녀 또는 증손녀와 결혼해 박정화를 낳은 듯 하다. 신덕왕 박경휘의 누이 역시 박순홍의 아내(박순홍의 아내가 흥덕왕의 외손녀일 경우, 흥덕왕의 딸도 가능하다.)와 이름을 공유할 가능성이 높다. [10] 고구려나 백제도 외척 가문 때문에 국력을 낭비하고 나라가 망할 뻔했던 적이 있다. 고구려는 안원왕 문서, 백제는 대성팔족 참고. 반면 신라는 이런 외척간 이유로 난리가 났던 적은 별로 없는 편인 대신에 제36대 혜공왕 때부터 그야말로 왕족간 왕위 쟁탈전으로 무려 100년 동안 바람 잘 날이 없었다. [11] 신라 하대에서 박씨를 달고 있는 사람들의 계보는 익성대왕(김헌정)의 아내 순성태후 박포도 → 선강대왕( 김충공)의 아내 선의태후 박귀보 → 성덕대왕( 김균정)의 아내이자 헌덕왕(제41대)의 맏며느리 헌목태후 박정교 신무왕(제45대)의 아내 정종태후 박정종 → 의공대왕( 김계명)의 아내 광의왕태후 박광의로 이어진다. 한 가지 특이사항으로는, 피비린내나는 하대 왕위 계승과는 대조적으로 헌안왕(제47대)을 제외한 43대~48대 국왕의 태후는 어머니에서 딸로 안정적으로 계승되고 있다는 점이다. [12] 고려사》도 여요전쟁 이전은 《 삼국사기》와 기록 밀도가 비슷한 수준이고, 전쟁 이후 시점부터 기록량이 늘어난다. 여요전쟁 때 얼마나 태워먹었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13] 비슷한 경우로는 오초칠국의 난에서 반역자인 초왕 유무의 후손인 송무제 유유가 600여 년 후 유송을 세운 사례가 있다. [14] 생각해보면 신라의 왕위 계승은 사망한 왕의 자녀 모두에게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남녀간의 차이보다는 출생의 순서가 계승 순서가 된 것 같다.) 따라서 효공왕 사후 가장 가까운 근친인 신덕왕이 즉위한 것이 결코 이상할 이유가 전혀 없다. 경순왕 김부의 아버지인 김효종도 신덕왕과 마찬가지로 헌강왕의 사위인데 여기서는 헌강왕의 왕녀의 출생 순서가 작용하여 박씨인 신덕왕이 즉위했다. 만약 부계 혈족으로만 왕위 계승을 했었다면 제46대 문성왕의 후손인 김효종이 즉위했어야만 한다. [15] 최근에 백두산 폭발이 일어난 것은 946년 전후로 파악하고 있기에 신빙성이 꽤 떨어진다. 그러나 일종의 전조였을 가능성은 있다. [16] 사실 견훤은 그렇다 쳐도 궁예의 경우, 신라에 적대적인 스탠스를 취하며 재위 기간 내내 싸움을 벌였다. [17] 한국에 존재하는 박씨의 80%를 차지하는 밀양 박씨의 시조 밀성대군 박언침이 신덕왕의 손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