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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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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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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최치원
崔致遠 | Choi Chiwon
파일:/image/041/2006/11/19/news1200611192002530.jpg
출생 857년
금성 사량부
(現 경상북도 경주시)
사망 908년 이후 (향년 51세 이상)
강주 신안현 가야산 해인사
(現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
시호 문창후(文昌侯)
골품 6두품
사량부(沙梁部)
고운(孤雲)
해운(海雲)[1]
파일:최치원 표준영정.jpg
최치원 표준 영정

1. 개요2. 주요 사상3. 생애
3.1. 신라에서 온 유학생3.2. 당나라로 건너간 이후
3.2.1. 짧은 미관말직 시기3.2.2. 신라출신 백수의 구직활동기3.2.3. 황소의 난과 고병과의 인연
3.3. 신라 귀국과 시무책 건의3.4. 은퇴 이후 말년
4. 경력5. 저서6. 기타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통일신라 6두품 출신 문인.

최승우, 최언위와 함께 신라삼최 중 하나로, 한국 유학 문학에 큰 족적을 남겨 후대 고려, 조선시대까지 숭앙되었다. 삼국사기에서 <난랑비>의 서문에 유-불-도의 핵심 가르침이 이미 한국의 고유정신인 풍류( 화랑도)에도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경주 최씨(慶州 崔氏)의 중시조이다. 최씨의 시조는 신라 건국기의 인물 소벌도리지만, 사실상의 시조는 최치원으로 여긴다. 다른 최씨의 시조도 경주 최씨에 비롯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대한민국의 대부분 최씨의 중시조라 할 수 있다.[2]
뛰어난 천재로서 신분의 벽을 넘기 위해 해외 유학을 가 " 개천에서 용난다"는 속담을 실현한 후 나라를 살리기 위해 돌아왔지만 다시 한 번 신분의 벽에 막혀 좌절한 사람의 대표격으로 알려져 있다. 드라마틱한 인생 때문인지 그를 신격화하여 주인공으로 한 《 최고운전》이라는 고전소설이 있다.

2. 주요 사상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한다
그 가르침의 근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하게 실려있으니, 실로 (풍류는) 유·불·선 을 포함하면서 모든 백성들을 이어준다.[3]
집에 들어와선 효도하고, 밖으로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 공자의 취지이고
억지로 일을 시키지 않고, 말없이 행동을 통해 가르치는 것이 노자의 가장 뛰어난 부분이며,
악행은 만들지 않고, 선행을 높이는 것은 부처의 감화이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24 진흥왕 37년조 난랑비서에서-
최치원은 유불선의 가르침이 이전부터 전해오던 '풍류'라는 가르침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중국사상이 들어오기 전부터, 한국에는 집에선 효도하고 나라에는 충성하며, 억지로 가르치지 않고 행동으로 따르게 하며, 악행을 멀리하고 선행을 칭찬하는 문화가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가르침에 ' 세속오계' 가 있는 것으로 볼 때, '풍류'라는 가르침이 실제로 화랑 사이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최치원은 이렇게 우리의 사상과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우리 스스로 제시하고 이를 표현하였기에 그 공로가 크다.[4]

3. 생애

3.1. 신라에서 온 유학생

문성왕 19년( 857년) 통일신라의 사량부(沙梁部)에서 최견일(崔肩逸)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최견일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원성왕의 원찰 숭복사(崇福寺) 창건에 참여했다는 행적이 전한다.[5]

친형 현준(賢俊)이 있었으나 출가 해인사로 갔기 때문에[6] 집안의 사실상의 장남인 최치원은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다 12살 때인 868년 당나라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당시 신라에서는 837년 한 해에만 216명이 당나라에 유학생으로 떠났을 만큼 당나라 유학 열풍이 불고 있었고, 당나라 유학 경력이 있으면 신라에 돌아와서도 출세길이 보장된 엘리트 코스였기 때문이다. 떠나는 배 위에서 아버지에게 "10년 안에 과거급제 못하면 어디가서 내 아들이라고 하지도 마라. 나도 아들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겠다" 라는 말을 듣게 된다.[7] 최치원은 "남이 백의 노력을 하는 동안 나는 천의 노력을 했다"라는 기록을 남길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던 듯하다. 당초 10년 기약을 4년 단축하여 6년[8]만에 18세 나이[9]로 당나라 빈공과에 급제했다.[10]

종종 최치원이 합격한 것이 중국인들과 함께 경쟁하는 진사과였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의 진사는 과거시험의 최종합격자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중앙관서로 올라가지, 장원급제자를 2년 후에야 현위에 임명하지는 않는다. 등과기고에도 언급되는 것처럼 이전의 경쟁상대를 발해인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최치원이 합격한 것은 외국인 대상시험으로 치러지는 빈공과가 맞다.

3.2. 당나라로 건너간 이후

최치원은 고려 사람으로 빈공과에 급제하여 고병의 종사관이 되었다.
신당서》 예문지의 주석

3.2.1. 짧은 미관말직 시기

최치원은 빈공과에 급제한 후 2년간 관직이 나오지 않아서 허송세월을 하면서 동도(東都) 낙양에서 유람하면서 서류대필과 저술활동으로 끼니를 때웠으며 이 때 금체부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 100수 1권, 잡시부 39수 1권 등의 시를 썼다. 2년만에 지금의 강소성 난징 지방인 선주 율수현의 현위[11]에 임명이 되었으나 임기를 마친 3년 뒤 다시 대기발령 상태가 된다.[12]

당나라에서 율수현의 현위로 있던 시절의 일화로 쌍녀분 전설이 전한다. 짧게 요약하면 율수현 남쪽에 쌍녀분이라는 오래된 무덤이 있었는데 옛날부터 많은 명현들이 유람하던 곳이었다. 최치원이 무덤 앞 바위에 시를 써 놓고 천천히 거니는데 쌍녀분의 두 주인 원혼이 나타났고, 그들과 시를 주고받고 술도 마시며 친해지고 세 사람이 한 이불 속에 누워 하룻밤을 보내고 두 여인은 천년의 한을 풀고 이승을 떠났다는 내용이다. 옛날부터 많은 명현들이 주기적으로 방문한 까닭이 혹시...

3.2.2. 신라출신 백수의 구직활동기

이렇게 백수가 돼버린 최치원은 산에 들어가 박학굉사과(博學宏辭科)라는 중국 내국인 대상 시험을 준비하는데, 이는 현직 관리를 대상으로 하는 일종의 승진시험으로 조선시대 과거의 중시(重試)에 해당한다. 그러나 당시 황소의 난으로 당나라가 혼란스러워[13] 박학굉사과는 열리지 않았다. 결국 관직에 있던 시절 나오던 녹봉이 떨어져 배를 곯을 상황이 되어버린다. 이후, 양양의 이위라는 사람의 문객(門客)으로 들어가서 시험 준비를 하던 중, 황소의 난이 일어나며 당해 시험은 물론 앞으로의 시험 일정마저 불투명해지는 상황이 벌어진다. 결국 최치원은 2년만에 시험을 포기하고, 23세 나이인 879년에 대신 구직활동에 나섰다. 당시 절도사 중 1인으로 이름을 떨치던 회남절도사 고병[14]의 문객으로 들어가려 했다. 이 시기 최치원은 동년배인 고운을 통해서 고병에게 자신의 소개와 관직청원인 자천서를 2회에 걸쳐서 올려서 결국 고병의 문객이 되었고, 고병의 추천으로 관역순관(館驛巡官)이라는 비교적 높은 벼슬을 얻었다.

3.2.3. 황소의 난과 고병과의 인연

24세 나이인 880년, 당시 당나라를 어지럽히던 황소의 난 토벌을 고병이 맡게 되자 최치원도 함께 참전하였다. 이러한 고병의 덕으로 최치원은 도통순관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의 직책을 받아 4년간 종군했으며, 황소가 읽다가 너무 놀라 침상에서 굴러 떨어졌다는 것으로 유명한 토황소격문[15]을 쓴 것도 881년의 일이다. 그러나 토황소격문을 썼고 그걸 황소가 장악한 지역에 퍼뜨린 것은 사실이나, 그 효과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다소 부풀려진 이야기라고 파악되고 있다.[16] 포상으로 882년 비은어대를 받고 이어서 다시 자금어대를 하사받았다.

최치원이 임명된 도통순관은 토벌군이 편성되는 과정에서 군 내부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 내렸던 명예직으로 이런저런 글을 열심히 썼다지만 실권은 전혀 없었다. 실제로 이 시기의 최치원은 당나라의 기록에 고병의 문객으로만 기록에 남아있을 뿐이다.[17] 다만, 〈신당서 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치원 찬(致遠 撰)’이라고 하여 〈사륙집 四六集〉·〈 계원필경〉이 소개되었다.

최치원이 문객으로 의탁한 고병은 도교에 심취해서 나중에 그 때문에 군무마저 내팽개쳤다가 내부 반발로 살해당한 인물이었다. 최치원은 한국 도교사에서 비조로 꼽히는데, 이 고병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라는 추정도 존재한다.[18]

최치원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토황소격문이 이 시기에 고병의 이름으로 나왔지만, 그 역할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길은 없다. 그리고 당 내부에서 최치원의 유명세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간단히 말해서 현대 유명 정치인들의 연설문이나 자서전의 상당수에 대필작가가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를 통해서 알려지는 것은 이름을 건 유명인이지 고스트 라이터가 아니다. 최치원이 바로 그 고스트 라이터였던 것이다.

오히려 고병이 황소의 난을 토벌하는데 관할지인 양주에 머무르기만 하고 정작 수도 장안을 점령한 황소군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이유로 반란의 의심을 받아서 882년 파직당했을 뿐이다. 최치원과 관련해서 고병이 황소의 난을 토벌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황소의 난을 제압한 것은 사타족 이극용 등의 활약이 지대했지 고병은 사실상의 활약이 별로 없었다. 이후에도 고병은 양주에 머무르면서 거의 반 독립군벌처럼 움직였으며, 최치원이 나중에 신라로 귀국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고병은 내부 반발로 살해당했다. 고병이 파직된 882년과 최치원이 귀국하는 885년 간의 3년간의 행적은 전혀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이 882년에 자금어대를 받았으며 이후 당나라 황제의 서신을 가지고 귀국하였기 때문에 이때 할거한 고병을 이탈한 것이 아닌가 추정되기도 하지만 분명하지 않다.

어찌되었든 당시 당나라는 이미 혼란기로 접어든 상태였고, 최치원이 의탁하고 있던 고병은 실권하고 도교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 마침 884년 당나라를 방문한 친척 최서원으로부터 오랫동안 궁금했던 집안 사정을 들었고, 결국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있어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최치원은 신라로 귀국해버렸다. 당시의 신라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라는 자체 관리등용 시험은 있었지만 그보다는 당나라 유학 경력을 상당히 우대해주는 편이었던 덕분에[19] 빈공과 합격 후 나름대로 공직 경력도 있는 최치원 정도면 신라에서 출세는 거의 보장된 상태였다.

3.3. 신라 귀국과 시무책 건의

날씨 때문에 산동반도 등주에서 겨울을 보낸 뒤 만 28세인 885년 당희종이 신라왕에게 내리는 국서를 가지고 통일신라로 귀환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지은 책 20권을 헌강왕에게 바치고, 헌강왕과 정강왕, 진성여왕 시대까지 서라벌 중앙에서 시독(侍讀) 겸 한림학사(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郎), 지서서감사(知瑞書監事) 등의 벼슬을 지냈다.[20]

알려진 것과는 달리 신라로 귀국한 최치원이 귀국해서 아주 홀대받진 않았는데, 당시 신라의 임금이었던 헌강왕은 당나라 유학생 출신들을 중용하였고, 최치원이 맡은 벼슬 중 시독은 한자 그대로 국왕의 곁에서 경연을 담당했던 관직으로 보인다. 그리고 한림학사로 임명되어 외교문서 작성을 담당하게 되었는데[21] 즉 국왕의 최측근 역할을 맡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헌강왕의 신임이 두터웠지만 헌강왕은 최치원이 귀국한 지 1년 4개월만인 886년 7월 승하했고, 이후 최치원은 자청하여 외직으로 나가게 되었다. 이 때는 웅주의 태산군[22]과 부성군[23] 태수를 지냈는데 이 지역들은 해안 지방의 곡창 지역으로 중요도가 높은 지역이었다. 천령군[24] 태수 시절에는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25]를 바치고 6두품의 한계인 아찬(阿飡)까지 임명되는 등 최치원에 대한 신라 왕실의 신임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단적으로 진성여왕이 물러나고 효공왕이 즉위하는 과정에서도 진성여왕의 '양위표(讓位表)'와 효공왕의 즉위에 대한 '사사위표(謝嗣位表)'를 당나라 황실에 보내는 등 효공왕 초기까지 대당 외교의 최전선에서 활약했다. 이 시기에 작성된 대표적인 외교문서가 발해의 출자문제와 엮이는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로 효공왕 원년에 효공왕의 이름으로 최치원이 작성하여 당에 보낸 국서였다.[26]

당나라 유학파 중에서는 가장 유명해서 신라에 머물면서 문장을 한문으로 써달라는 요청을 여럿 받았던 모양으로,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27] 등 전국에 여러 비석에 최치원의 문장이 지금도 남아있다. 최치원이 쓴 비문은 이밖에도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경주 초월산 대숭복사비가 있는데 이 네 개의 비석을 묶어서 사산비명(四山碑銘)이라고 부른다. 이 중 초월산대숭복사비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 셋은 비석 실물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최치원의 문체를 현재도 직접 감상할 수 있으며, 유일하게 소실된 대숭복사비 역시 비석 실물은 파편만 남아있지만 아직 비석이 멀쩡하던 조선시대에 비문을 탁본한 것이 많이 남아있어서 비문 내용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28]

귀국 후 어느 때인가 사신으로서 당나라에 다시 한 번 갔다온 것으로 추정되지만, 기록이 애매해 정확히 언제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893년에는 사신으로 발탁되어 당나라로 떠날 예정이었지만, 사실상 후삼국시대의 실질적인 시작으로 보는 892년 이후에는 전국에서 도적떼가 늘어난 상황이라 서해로 이르는 길이 막혀서 이 때는 가지 못했다. 동사강목에 의하면 효공왕이 즉위한 897년에 다시 시도해 입당했다고 한다.

894년 2월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라는 개혁 정책을 건의했고 진성여왕은 기쁘게 받아들였다고 하지만 이미 쇠약해진 신라 사회에서는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실, 시무십여조가 혁신적인 정책이었는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내용이 전혀 남아있지 않기 때문. 최치원이 6두품이므로 아마도 6두품을 포함한 신귀족정을 주장한 것이 아닐까라고 추측만 할 뿐이다. 혹은 후삼국시대에 대부분 호족들이 사용한 성주, 장군 칭호가 자칭이 아니라 신라 정부가 명목상 부여한 호칭으로 파악해, 과거 통일신라의 도독 태수를 지방에 파견해 다스리는 직접 통치는 한계에 부딪혔으니 당나라의 제도를 참고해[29] 지방 세력가에게 성주, 장군직을 하사해 자율성을 인정해서 간접 통치로서 체제를 유지하는 제도 개편을 입안했다는 설도 있다.[30]

진성여왕은 그의 시무책을 받아들여, 최치원을 6두품 신분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아찬에 제수하고 그의 제안대로 개혁을 펼치려 했다. 실제 진성여왕은 막장 암군이라는 이미지와 달랐으리라는 시각이 있다. 암군의 대표적 근거라는게 근친, 하렘과 그들에게 정치적 권력을 줘서 기강이 문란해졌다는 것인데 전자는 사실 따지고보면 시대상을 고려해야 하는 문제기도 하고, 조선시대는 몰라도 현대인이 보기에는 개인사가 도덕적으로는 몰라도 통치력과 직결되는 문제는 아니다. 물론, 후자는 전형적인 암군의 그것이 맞다.

그러나 당시의 신라는 망해가는 상황이었다. 최치원이 실질적으로 정치에 손을 댈 수 있게 된 시기는 이미 지방 호족들이 궐기해서 이를 사전에 미리 막아야 할 신라의 중앙정부는 제 역할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었다. 진성여왕 시기에 이미 양길, 기훤, 궁예, 견훤처럼 굵직굵직한 인물들이 궐기해서 신라 땅 털어먹기를 시작한 최악의 상황이었다. 정강왕 때까지만 해도 서라벌은 번창하는 태평성대였다고 하는데 몇 년 지나지 않은 진성여왕 즉위 초기에 이미 지방에서 세수가 안 올라와서 곤궁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해져서 최치원이 정계에서 은퇴한 효공왕 초기 정도 되면 궁예 양길에게 승리해 여러 작은 세력에서 궁예와 견훤이라는 두 개의 큰 세력이 형성되어 후삼국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된다. 효공왕 즉위 4년만에 신라의 영역은 경주를 중심으로 영남 지역 호족들만이 떠받드는 불안한 정권으로 전락한 상황. 그나마 신라 귀국 초기에 나라에 힘이 있을 때는 골품제와 실적의 문제로 왕의 신임을 받으면서도 할 수 있는게 없었고, 그나마 뭐 좀 할 수 있는 위치가 되니까 신라가 바로 젊은 시절에 경험했던 당나라 꼴이었던 것이다.[31]

3.4. 은퇴 이후 말년

결국 신라와 당나라 모두에서 맞이한 난세 속에서 자신 같은 인재가 쓰일 데가 없다는 사실에 절망한 최치원은 898년 2월 은퇴한다.[32] 그보다 전인 897년 1월에는 하정사 김영과 함께 당나라에 마지막으로 사신으로 갔다오는데, 이미 견훤이 왕을 자칭한 게 892년이므로 897년경이면 서라벌에서 당나라까지 가는 길에서 그 혼란상을 제대로 둘러봤을 것이고 정계 은퇴에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조선 말에 편찬된 동사강목에서는 최치원이 스스로 신라 정계에서 은퇴한 게 아니라, 신라 입장에선 지방 반란군인 왕건을 지지했다가 파직당해서 가야산 해인사로 갔다고 하는데 이 기록은 신빙성에 의문이 있다. 아래 왕건을 지지했는가 단락 참조.

삼국사기》에 의하면 898년 은퇴하여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 지리산 등지를 돌아다니다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없다고 했으며, 고려 이인로의 《 파한집》에 의하면 그가 머물던 집에 신발 등이 그대로 남아있는 채 그의 흔적만 사라졌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후대에는 최치원이 가야산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광범위하게 생겨났다. 은퇴 후 전국을 유람해서 남산(경주), 합천의 빙산과 청량사, 지리산 쌍계사, 부산 해운대, 창원의 월영대 등에 그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해운대의 경우는 자신의 호인 해운(海雲)을 동백섬 바위에 새겨 그것이 지금까지 지명으로 이어진다. 월영대가 있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해운동도 같은 해운에서 이름을 따왔으며, 구 산복도로의 이름도 최치원의 별호인 고운(孤雲)애서 따서 정식 이름은 고운로다. 금강산에도 외금강 구룡폭포가 올려다보이는 바위에 '천장백련 만곡진주(千丈白練 萬斛眞珠, 천 길 흰 비단 드리웠는가, 만 섬 진주알을 흩뿌렸는가)'라는 최치원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글씨는 이후 고려~조선시대까지 근 1천 년간 문인들의 금강산 순례 붐이 일었고, 산 바위에 자기들의 문장을 새기는 것이 유행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실제로 가장 오래된 글씨가 이 최치원의 것이기 때문이다.[33]

일단 900년 가야산 해인사 선안주원벽기, 901년 석순응전과 석이정전, 904년 해인사 화엄선원에 은거하면서 법장화상전[34][35], 부석존자전 등을 집필한다. 이 가운데 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를 제외하면 모두 한국에는 전해지지 않고, 법장화상전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에도 시대에 승려들이 편집한 것이 다이쇼 신수대장경에 실렸고[36] 한국에는 동국대학교 김복순 교수가 발견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석순응전과 석이정전은 대가야 왕실의 후손으로써 해인사의 개창조로 알려진 순응과 이정 두 승려의 생애를 다룬 것이고, 부석존자전은 부석사의 개창조인 의상대사의 전기로,[37] 전자의 두 책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일부 인용되어 있어서 조선 중기까지는 전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부석존자전도 삼국유사에 일부 인용되어 있을 뿐이다. 이밖에 삼국유사에는 최치원이 고구려의 승려로 백제로 망명해 열반종의 개조가 되었다는 보덕화상의 전기도 집필했었다고 전하고 있다.

최치원이 쓴 글 가운데 연대가 밝혀진 것 중 가장 마지막으로 지어진 것이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新羅壽昌君護國城八角燈樓記)로, 908년에 지어졌으며 수창군[38]의 호족 이재가 부처의 힘으로 국가의 위기를 타개해 줄 것을 빌며 지은 팔각등루의 연원을 적은 기록이다. 857년생이므로 50대에 들어선 나이인데, 물론 더 오래 살 수도 있었겠지만 의학이 미비한 전근대시대라 얼마나 살았을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신라 말에 태어나 고려 초에 활약한 최승로는 그의 증손자다. 여담으로 그의 말년에 혼란스러웠던 신라는 증손자 최승로가 태어난지 8년이 지난 935년에 멸망했다. 이후, 후삼국시대는 936년 고려의 통일로 종결.

고려 현종 11년( 1020년) 8월 내사령에 추증되고, 고려 문묘에 종사되었다. 이후, 조선시대까지 문묘에서 배향된다.

1023년에는 현종에 의해 문창후 작위에 추봉되었다. 훗날 이규보 이색도 명문장가로 최치원을 꼽았다.

조선시대에도 신라인으로서는 설총과 함께 문묘에 배향된 2명 중 한 명이며, 태인 무성서원, 함양 백연서원, 경주 서악서원, 안동 용강서원, 서산의 부성사, 포천의 청성사, 영평의 고운영당 등에 배향되었다. 김종직, 남효온, 이황, 김창협, 최북 등이 최치원의 행적이 닿은 곳을 찾아 추억하고 기리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최고운전이라는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 쓰여지기도 했다.[39] 현대에는 그가 당나라에 있을 때 근무했던 양저우시에 최치원 기념관이 건립되기도 했다.

경주에는 최치원이 머물렀다는 곳이 배반동의 '독서당(讀書堂)'과 인왕동의 '상서장(上書莊)' 이렇게 두 곳이 남아 있다. 상서장의 경우는 '계림황엽 곡령청송(鷄林黃葉 鵠嶺靑松)'이라는 고려 태조에게 최치원이 보냈다고 전하는 유명한 글귀를 여기서 썼다고 고려 시대 최자 보한집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걸 안 신라왕이 노여워해서 그를 죽이려고 하자 가족을 거느리고 상서장을 떠나서 해인사로 갔다는 얘기인데, 이에 대해서 학계에서는 신빙하지 않는 견해가 대세다. 독서당은 최치원의 옛 집터라고 전해지는데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모두 조선 시대 이후에 지은 것이고 원래는 비석만 세워져 있었다. 2021년에 독서당에 원인 불명의 화재가 나서 전소되고 2022년에 다시 지었다. #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황룡사 남쪽에 미탄사라는 절이 있고 그 미탄사 남쪽에 최후(崔候) 즉 최치원의 집터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공교롭게도 독서당이나 상서장 모두 미탄사터 남쪽에 위치해 있다.

4. 경력

<colbgcolor=#00008b><colcolor=#fff> 신라 관직
관등 아찬(阿飡)
직위 시독(侍讀) - 한림학사(翰林學士) - 지서서감(知瑞書監)
대산군 태수(大山郡太守)
부성군 태수(富城郡太守)
수직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40]
당나라 관직
무산계 품계 승무랑(承務郞)[41]
직위 율수 현위(溧水縣尉)[874년]
시어사내봉공(侍御史內供奉)
고려 추증 관작
시호 문창후(文昌侯) 고려 현종 14년(1023년) 때 추증.
직위 내사령(內史令) 고려 현종 때 추증. 직명은 내의령 → 내사령 → 중서령 순으로 바뀌었다.
중서문하성의 명예직으로 명목상 문하시중의 위에 있는 직위이다.

5. 저서

5.1. 문헌

  • 계원필경
  • 법장화상전
  • 부석존자전
  • 사륙집
  • 사시금체부
  • 상대사시중장
  • 석순응전
  • 석이성전
  • 쌍녀분전기
  • 오언칠언금체시
  • 잡시부
  • 제왕연대력
  • 중산복궤집
  • 수이전 - 조선시대 몇몇 서적에서 지은이가 최치원이라고 쓰고 있으나 이설이 있다.
  • 천부경 - 진위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다.

5.2. 금석문

6. 기타

  • 창원시 마산합포구] 일대에는 말년의 최치원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 많다. 마산합포구에서 가장 큰 동 중의 하나가 '월영동'으로, 이는 최치원이 노닐었다는 '월영대'에서 비롯했다. 현재 월영대는 누각이 잠겨 있어 담장 밖에서만 들여다봐야 하지만, 월영대 앞 경남대학교 입구 오거리는 정식 공문서에서는 월영광장이라고 불린다. 또한 마산지역 옛 산복도로의 이름은 최치원의 별호 중 하나인 고운로(孤雲路)이다.[43]
  • 마산항 입구에 있는 섬인 돝섬에도 황금돼지 요괴와 최치원의 전설이 전해져 온다. "(가락국 궁녀가 황금돼지로 변해 섬으로 들어간 이후) 밤마다 섬에서 돼지 우는 소리와 함께 괴이한 광채가 일기 시작했다. 마침 골포에 은거하던 최치원이 어느 날 그 소리를 듣고 활을 쏘자 소리와 함께 광채도 사라졌다. 이후 최치원이 섬에 건너가 화살이 꽂힌 곳에 제를 올린 뒤에는 괴이한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라는 것이 최치원 설화의 내용이다. 이 때문에 설화가 와전되어, 심지어는 최치원이 금돼지의 후손이란 이야기까지도 전승되어 온다. #[출처]
  • 역사스페셜 113회 <중국은 왜 최치원을 기억하는가>가 2012년 9월 6일 방영되었다. 제목 그대로 중국에 남은 최치원의 흔적을 다루고 있으며 국내에는 비교적 덜 알려진 젊은 시절 중국에서 지내던 최치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각종 한국사 시험에 자주 출제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매년 몇 문제씩은 시험종류를 가리지 않고 꾸준히 출제된다. 특히 수 많은 저서를 남겨 지엽적인 문제를 선호하는 공무원시험에 더욱 많이 출제되며 2016년 국가직 7급에서 그의 저서가 만점방지용 문제로 출제되어 많은 공시생들을 공공의 적으로 만든 인물이다.
  • 2018년 5월에 지리산 폭포 옆에 완폭대 석각이 발견되었다. #
  • 2020년 3월, 코로나 19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주한 중국 대사관이 대구광역시에 마스크를 보내며 상자에 최치원의 문구를 인쇄하여 보냈다.
    道不远人,人无异国[46]

    도불원인, 인무이국

    : 도는 사람과 멀리 있지 않고, 사람은 나라에 따라 다르지 않다.[47]
  • 경주에서 월정교를 복원하면서 북쪽 현판을 최치원의 글씨체로 복원했다. 남쪽 현판은 신라의 명필 김생 글씨체로 했고 둘 다 집자현판에서 인용해서 만들었다.
  • 고려 후기의 문인 최자의 보한집(補閑集)에는 최치원이 왕건에게 " 계림(= 신라)은 누런 잎이요, 곡령(= 고려)은 푸른 소나무다"라는 참서를 건네 주었고, 이 때문에 신라 조정에서 파직당해 가야산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48] 조선 후기에 편찬된 동사강목에도 같은 말이 적혀 있으며, 안정복은 최치원이 신라에서 고려로 갈아타 지조 없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898년에 왕건은 궁예의 일개 부하에 지나지 않았고 이 때까지는 딱히 내세울 만한 공도 세우지 못했다. 왕건 본인을 포함해 누구도 왕건이 500년 ' 고려' 왕조의 창시자가 될 거라고는 확실히 알 수 없는 시점이었기도 하다. 그리고 최치원이 추켜세웠다는 곡령이 왕건이 아닌 궁예의 고려를 말한다 해도 최치원이 신라 조정을 나온 때는 아직 고려 왕조가 건국되기 전인데다 궁예 세력도 양길과 대치하고 있던 중소 군벌 시절이라 대세라고 말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최치원의 마지막 행적으로서 확인되는 것이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를 지은 908년이고 857년생인 최치원의 나이가 이 때 51세였는데 십여 년 뒤인 왕건의 거병 시점에는 61세로 그때까지 살아있었는지도 확실치 않다.[49] 더구나 최치원은 신라로 귀국한 후 왕실의 덕을 많이 본 당사자이기도 했고 스스로도 신라 왕실에 대한 충성심이 매우 컸기 때문에 다른 6두품들과는 달리 쉽게 호족들과 결탁하지도 못하는 입장이어서 끝내 좌절한 채 은거에 들어간 케이스였다. 당장 위에 언급한, 최치원의 확인되는 마지막 행적이자 908년에 지은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를 봐도 최치원이 이재 장군을 신라 조정의 충신이라고 칭찬하는 내용이다. 즉 최치원의 충성심도 908년까지 변하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때문에 매우 큰 명성을 떨쳤던 학자 최치원을 고려 시대에 들어와 높이는 과정에서 후대에 가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추측이다. 최치원의 후배격인 최언위, 최승로 등의 문인들이 훗날 고려에서 활발히 활동한다는 점에서, 스승을 신격화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이야기일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 최치원의 업적은 신흥 국가 고려에서 일한 최언위, 최승로 등의 후배들에게 자연스레 이어지면서 한국 유학 사상의 도통으로 모셔지고 있다. 고려 현종 시기 최치원은 내사령[50]으로 추증되었고, '문창후'라는 시호를 받으며 홍유후 설총과 함께 나란히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런데 최치원의 사상은 난랑비서라는 글에서 화랑의 사상을 역설하는 부분이나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비문에서도 드러나듯 유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유, 불, 도의 가르침을 하나로 합쳐서 이해하려고 했고, 그는 세 종교가 궁극적으로 하나의 도로 통하므로 구별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불도의 가르침을 모두 깊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직접 쓴 여러 고승비[51]에서도 불교만이 아닌 유교와 도교의 경전을 폭넓게 인용한 것을 확인해볼 수 있다. 여기에 영향을 받아 고려 시대에도 유교 정치 이념을 상당히 강조한 최승로와 같은 유학자조차도 "불교는 수신의 근원이고 유교는 치국의 근원"이라고 말할 정도였고, 숭유억불이 더 강화되어 삼교 중 불, 도를 배제한 유를 추구한 후대 조선 시대와는 기본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그의 인생 행적도 유학자의 이미지보다는 주로 문인 예술가의 이미지가 짙은 탓에 이후 퇴계 이황은 최치원을 문묘에 배향하는 것을 비판하기도 했다. 최치원의 비문학적 활동이라는 것이 결국 시무 십조인데, 이것은 유학자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전형적인 실무형 관료로서의 모습이라고 봐야하기 때문이다. 최치원이 유학의 선구자로 존중받았다는 이야기는 문묘에 배향되었다는 결과론 외에는 근거를 찾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오히려 한국 도교의 비조로 꼽히고 3교 융합의 이미지도 강해서 유학자 최치원의 이미지는 지금도 약하다는 게 맞을 것이다. 최치원이 왕건을 지지했다는 표현은 문묘 배향 과정에서 그 이유로 등장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신라계가 점점 세력을 강화하는 과정 또는 거란족의 침략 등 혼란한 상황에서 현종이 충신으로서 최치원과 설총을 강조하였다는 등의 평을 받는다.
  • 서산 태수 시절에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어느날 인근 마을의 최고 부자 노인이 최치원을 찾아와서 염라대왕 고발할 테니 상소문을 올려 달라는 요청을 했다. 황당한 최치원이 그 이유를 물으니 노인은 자신의 아들 둘이 한꺼번에 죽었다며 제 아무리 염라대왕이더라도 어찌 이럴 수 있느냐고 하였다. 이에 최치원은 3일 후 염라대왕을 이곳에 모실 터이니 그때 직접 따지라며 노인을 돌려보냈고, 이어 고을에서 제일 빨리 달리는 말과 말을 잘 타는 군졸을 불러 사흘 후 그믐날 밤네 운산 쪽으로 말을 타고 달려가면 염라대왕이 이리로 오고 있을 터이니 모시고 오라고 명을 내렸다. 군졸은 반신반의하며 그곳엘 갔더니 진짜 불빛과 함께 매우 화려한 의관을 하였으나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말을 타고 있어 그를 데리고 왔다. 관청에는 염라대왕을 고발한 노인이 와 있었는데 노인이 염라대왕에게 왜 자기 아들을 둘 다 한꺼번에 데려갔냐고 묻자 염라대왕은 호통을 치며 "네놈은 어째 네놈 아들들의 죽음만 억울하다 하고 다른 이의 아들들의 죽음은 아무렇지 않다 하느냐? 네놈이 13년 전 원북땅에서 주막을 할 때 한 보부상 형제를 독살하여 시신을 매장하고 돈을 가로채서 그 돈으로 지금의 재산을 모은 게 아니냐? 네놈의 명줄은 길지만 네놈의 아들들은 애비의 업보를 받아 단명할 운세였다. 그리고 네놈의 죄는 여기 계신 군수께서 다스릴 것이다." 라고 일갈하고 사라졌다. 사람들이 황망해 있는 가운데 최치원은 노인의 죄를 물어 감옥에 가두었고, 최치원이 염라대왕을 소환한 소문은 진성여왕의 귀에까지 들려 여왕이 이 이야기를 따로 책으로 만들게 해서 최치원의 시문집인 계원필경 [桂苑筆耕]에 이야기를 적었다고 한다.
  • <신라수이전>이라는 책에 '쌍녀분'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최치원이 밤길을 가다 두 개의 무덤이 나란히 솟은 근처에서 잠들었는데, 두 아리따운 처녀귀신이 나타났다. 실은 두 자매의 아버지가 장사치에게 시집보내려 하자, 반항으로 함께 자살한 자매였던 것이다. 무시무시한 것은 최치원이 이 두 여자(귀신)과 함께 술을 마시며 시를 지어서 꼬슬렸고, 결국 두 자매 귀신과 성관계 를 맺었다는 사실이다. 날이 새자, 자매는 놀라며 천년의 한을 풀었다고 사례하며 시를 지어주니 최치원이 눈물이 흐르는 줄 깨닫지 못하였다. 뒷날 이곳에 오게 되면 거친 무덤을 살펴 달라 부탁하고 두 낭자가 사라지니, 그는 무덤에 돌아와 두 사람을 애도하는 장시를 지었다고 한다. 성불까지 시켜준 것을 보면 꽤나 절륜했던 모양이다
추야우중(秋夜雨中, 가을 비오는 밤 중에)
秋風唯苦吟 (추풍유고음) 가을 바람에 괴로이 읊조리나,
世路少知音 (세로소지음)[52] 세상에 알아 주는 이 없네.
窓外三更雨 (창외삼경우) 창 밖엔 밤 깊도록 비만 내리는데
燈前萬里心 (등전만리심) 등불 앞에 마음은 만리 밖을 내닫네
  • 그가 남긴 시문은 현전하는 ' 계원필경'(20책), '사산비명'을 포함하여 ' 삼국사기'에만도 문집 30권이 전한다고 기록할 정도로 방대하다. 지금은 계원필경만 전해지는데, 인삼사 연구의 자료가 되는 헌생일물장(獻生日物狀), 베트남사 연구의 자료인 보안남록이도기(補安南錄異圖記) 등 다양한 주제로 글을 써서 다방면에서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고 있다. 계원필경 외의 작품은 조선 초의 동문선에도 많이 실려 있다. 여기에 실린 《추야우중(秋夜雨中)》, 《산양여향우화별(山陽與鄕友話別)》도 유명하다. 이 중에서 당나라 유학시절인 25세(881년) 때 지은 온 천하 사람들이 너를 드러내놓고 죽이려 할 뿐 아니라, 지하의 귀신들까지 너를 죽이려 이미 의논했을 것이다라는 내용의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적장 황소가 혼이 빠져 평상에 내려앉았다는 일화가 전해올 정도로 오늘날까지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이 글의 발표자는 당연히 고병이었고, 고병이건 토황소격문이건 황소의 난 해결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황소가 주저 앉았다느니 놀라서 죽었다느니 하지만, 이건 우리나라 고려-조선 유학자들 사이에서 유명하긴 했어도 신빙성이 부족한 이야기이다.[53] 이전에는 자금어대를 받은 것을 황제가 최치원의 능력을 인정했다로 적혀 있었지만, 역시 상단에 적힌 것처럼 자금어대와 (저자가 고병으로 되어 있는) 토황소격문은 아무 상관없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이미 망조에 접어들었던 당나라는 어대나 명예직을 마구 남발하고 있었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렇다면 왜 중국에서 오랫동안 최치원을 기억하고 있고, 또 현대 중국에서 최치원의 기념관까지 만들어 주었는지 논리적으로 납득할만한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 흔히 신분차별이나 6두품의 한계로 인해 꿈이 좌절된 불운한 천재로 여겨지지만 정작 최치원도 이런 차별적 인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는 시선도 있다. 자신을 비롯한 6두품들을 자신의 저서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문(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文)'에서 '득난(得難)'[54]이라고 표현하며 나름의 자부심과 진골들에게 차별당하는 울분을 표했기 때문. 6두품이 역사 창작물이나 간단한 역사교양서, 학습만화 등에서는 진골 귀족들에게 차별받는 능력 있는 비주류처럼 묘사되는 경향이 있지만, 6두품은 사실상 넓은 의미의 왕족인 성골과 진골을 제외하면 왕족이 아닌 골품 중에서는 가장 높은 골품인지라 신라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엄연한 기득권층에 속하는 계층이다. 하지만 최치원이 이중잣대를 부렸다고 단정짓기에는 무리다. 사실, 득난(得難)자체가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문(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文)'밖에 없는 말인데 학자들 사이에서도 아직 제대로 정립된 것 없이 의견만 나돌고 있는 상태다. 원본을 제시하자면, '나라에 5품이 있어 성이(聖而)요, 진골이요, 득난이니, (득난)은 귀성(貴姓)의 얻기 어려움을 말한다. 문부(文賦)에 ‘혹 구하기는 쉬우나 얻기는 어렵다’(或求易而得難)고 했는데, 따라서 육두품을 말하는 것이다. 수가 많은 것을 귀히 여기는 것은 마치 일명(一命)에서 구명(九命)에 이르는 것과 같다. 그 4·5품은 족히 말할 바가 못된다.'인데, 이는 득난을 육두품 그 자체로 볼 것이냐, 아니면 진골과 육두품 사이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계급층으로 봐야하냐에 따라 해석이 갈릴 수 있다. 최근 새롭게 제시되고 있는 해석은 후자인데, 이마저도 다른 논란에 쌓여 제대로 된 것이 없다. 즉, 제대로 지식화되지 않은 정보를 믿지 말라는 것이다. 해석에 따라 육두품이 귀성이 되기도 가장 낮은 관등에서 가장 높은 관등에 이르는 것과 같이 어려운데 그 아래인 4, 5품은 오죽할까?로 될 수 있는 것이다.

7. 관련 문서



[1] 현재의 부산광역시 해운대구의 지명이 그에게서 유래한 것이다. 최치원이 이 일대를 지나가다 해운대해수욕장 근처 경치가 너무 좋아서 거기서 좀 머무르다가 자신의 호를 따서 '해운대'라고 바위에 글씨를 새겼던 것. 이 바위는 지금 해운대 동백섬 APEC 누리마루 국제회의장 옆 등대 아래에 현존하고 있는데, 가운데의 雲 자가 풍화가 심해 많이 지워진 상태다. 사실 이 글씨가 최치원이 직접 파서 남긴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고려시대 인물인 정포가 이 글씨를 언급한 기록이 남아있으므로 적어도 고려시대나 그 이전부터 해운대라는 이름이 바위에 새겨져 있었던 것은 맞다. 또한 동백섬 정상에 조성되어 있는 공원에 최치원의 동상이 있다. 이외에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있는 법정동 해운동의 이름도 여기에서 따온 것인데 최치원이 말년에 머물며 제자들을 가르치던 월영대가 이곳에 남아 있다. [2] 정확히는 모든 최씨가 최치원 계통인 것은 아니다. 소벌도리에서 나와 최치원 이전에 분가된 최씨 가문들이 있다. 하지만 많은 최씨가 경주 최씨에서 분가된 것은 사실이고, 경주 최씨만 따져도 최씨 성을 가진 인구의 과반을 넘는다. [3] 원문에 접화군생(接化群生)이라 쓰여져 있다. 접화는 이어준다. 군생은 모든 백성 또는 모든 생명을 뜻한다. [4] 유교와 도교는 서로 비판하는 관계이며, 또한 유교와 불교는 서로 지향하는 바가 다른 가르침이다. 이를 조화롭게 합쳐 볼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최치원이 중국 밖에서 온 유학자였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 신라는 이제 막 불교가 들어왔지만, 아직 유교와 도교는 생소하였다. 이에 최치원은 중국의 여러 가르침들 중 신라의 풍습에 맞는 것을 뽑아 신라의 사상을 제시하고 적절하게 표현하였으니 그 공로가 크다고 볼 수 있다. [5]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 고군산도에는 최치원이 금돼지의 자손이라는(金豚始窟) 전승이 전해져 온다. [6] 형이 있는 곳이라서인지, 최치원은 말년에 해인사를 자주 찾는다. [7] 12살은 현재에도 미성년자 취급을 받지만 최치원이 살았던 신라 당대에도 관례(성인식)도 치르지 못한 어리다 못해 핏덩어리였다(관례는 보통 14, 15세 정도에 치른다). 이런 어린 나이의 아들을 아버지가 유학보내야겠다는 결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신라의 출셋길이나 관로(官路)는 철저하게 진골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로서는 냉혹하지만 또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8] 868년 출발, 874년 9월 급제. [9] 당시 빈공과에 합격한 가장 이른 나이가 50세였다. [10] 이걸 두고 빈공과 발해 출신이 많이 붙었는데 신라에서 뛰어난 인재가 왔다라고 표현했다. 역대 과거 합격자의 명단을 모은 '등과기고(登科記考)'에 최치원은 '지난해 신라가 발해인에게 장원급제를 빼앗긴 수치를 씻었다'라고 적었다. 신라인과 발해인이 라이벌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대목. 다만 남북국시대 당시 양국이 서로를 남국, 북국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과도한 확대해석이다. 신라에서 발해를 북국으로 부르기는 했지만 이는 단순히 '북쪽 나라'라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신라인들 스스로가 자신들을 발해에 대응되는 남국으로 인식했는가에 대해서는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 [11] 지방 현령 밑에서 잡무를 보던 하위 관직. [12] 이황진, '최치원의 재당생애 재고찰' [13] 880년에는 황소가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점령할 정도로 이 때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14] 변 자는 한자에 두 가지 음이 있으며, 고변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15] 혹은 '격황소서'라고 불린다. [16] 심지어 황소가 굴러 떨어져 죽었다는 얘기도 나왔다. [17] 훗날 고려의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에서 〈당서〉 열전에 최치원전이 없다는 것에 "당나라인들이 질투한 것"이라며 분노한 마음을 글로 남긴적 있다. 하지만 막상 당의 역사서를 정리하는 입장에서는 그 많은 외국인 유학생의 열전까지 일일이 남겨줄 필요가 없었던 것. 최치원보다 앞서 일본에서 유학 와서 당에서 조형(晁衡)이라는 이름으로 비서감이라는 중앙의 높은 관직까지 지내고 아예 귀화해서 당에서 죽은 아베노 나카마로(阿倍仲麻呂)도 독립된 열전이 없고 일본측의 기록이나 중국에서 그와 교유하던 문인들과 주고 받은 당시를 통해서만 존재를 전할 뿐이다. 세이 신세이(井真成)는 묘지명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아예 존재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 [18] 일단 공식적으로는 역시 신라 유학생 출신으로 도교에 최치원보다 더욱 심취한 김가기의 영향이 크고, 난랑비서의 경우는 고유의 풍류도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런 가능성은 낮게 평가된다. 역으로 고병이 도교에 심취하게 되는 영향을 최치원이 제공했을 수도 있다. [19] 원성왕 시대의 자옥이라는 인물은 당나라에서 10년 동안 공부만 하다 과거에 합격도 하지 못한 장수생이었는데 유학 경력만 보고 관리로 임명한 사례도 있다. 하지만 자옥의 사례는 자질이 의심스럽다고 관리 임용에 반대한 기록도 있다. [20] 이 벼슬들은 한꺼번에 맡은 것이 아니라 기록된 순서에 따라 역임한 것으로 추정된다. [21] 역시 6두품 출신으로 이름을 떨친 강수와 마찬가지 포지션이다. [22] 오늘날 전라북도 정읍시. [23] 오늘날 충청남도 서산시. [24] 오늘날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 지역에는 최치원이 왔다 갔다는 흔적이 남아 있는데 홍수를 막기 위해 조성했다는 함양상림이나 최치원이 자주 올랐다는 학사루가 그것이다. [25] 혹은 시무 10조(時務十條)라고 불린다. [26] 물론, 당시에도 그리고 그 이전과 이후에도 글 잘 짓는 관료가 황제 및 조정의 국서를 대신 쓰는 일은 많았고 그게 당연한 것이었으므로 대필가라고 비아냥거리고 낮춰 볼 일은 아니다. 당장 현대에도 국서급 문서를 대통령 혼자서 마음대로 작성하지는 않는다. 애초에 글재주 없으면 대필가도 못하고, 국서 작성 정도면 나라 최고의 문장가 반열이라고 할 수 있다. [27] 대한민국의 국보 315호 [28] 경주 숭복사 터에 대숭복사비 내용을 그대로 새긴 복제품을 세워 두었다. [29] 최치원 본인은 고병의 종사관으로 머물며 당나라 말의 지주군주사 제도를 충분히 접할 수 있었다. [30] 당나라가 절도사의 난립을 100여년 동안 겪으면서도 어찌저찌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균형만 맞는다면 왕조의 수명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러나 후삼국시대가 너무 빨리 궁예와 견훤이란 두 큰 세력으로 정리되면서 9세기 당나라의 상황과는 다르게 흘러간 것이 문제. [31] 최치원이 해인사에 있을 때인 895년 인근 지역 농민들이 봉기해 초적이 되어 해인사를 공격하다가 해인사에서 승려와 신자들을 모아 자체적으로 조직한 자경단과 충돌해 사상자가 났는데, 최치원은 이때 죽은 승병 59명들을 위령하면서 쓴 해인사묘길상탑기에서 "당에서 소종 황제가 중흥을 이루고 있을 때 두 가지 재앙( 전쟁 흉년)이 서쪽에서 멈추고 동쪽으로 오니, 흉하다 하는 것들 중에서도 이보다 더 흉한 것이 없었고, 굶어죽은 시체와 전쟁으로 죽은 시체가 한데 엉켜 하늘의 별처럼 들에 널브러져 있다."고 처참했던 당시 모습을 묘사하였다. [32]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을 읽어보면 당시 신라 사회의 혼란과 모순, 신분적 한계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절망했던 최치원의 착잡한 심정을 느낄 수 있다. [33] 현대에는 남북이 분단되면서 김씨정권이 말도 안 되는 선동구호들을 새겨놓아서 산을 베려놨는데, 최치원이나 요산요수를 즐겼던 고려·조선시대 문인들이 봤으면 가슴을 칠 일이다. [34] 정식 명칭은 당대천복사고사주번경대덕법장화상전 (唐大薦福寺故寺主飜經大德法藏和尙傳)이다. 당의 승려로 측천무후의 중용을 받았던 화엄3조 현수법장(法藏: 643~712)의 전기로, 최치원이 해인사에 머무를 때에 마침 그곳에 승려로 머무르던 형 현준이 의뢰해서 집필하게 되었다고 서문에 썼다. 현수법장의 전기로 전해지는 23종 가운데 최치원의 법장화상전이 가장 수준이 높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35] 최치원이 지은 저술로 현존하는 것들은 그의 불교관계저술은 사산비명에 속한 선사비 세 개와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화엄 관계 저술이라서, 주로 화엄종과 관련하여 불교를 접한 것으로 여겨진다. [36] 이 다이쇼 신수대장경이 모본으로 삼은 것이 최치원이 머물렀던 해인사에서 소장하던 고려대장경이었다. 해인사에는 최치원이 지팡이를 꽂은 자리에서 자랐다는 나무가 남아 있어 학사대라고 불렸는데, 2019년 태풍 링링에 피해를 입어 부러졌다. # [37] 참고로 의상 대사와 현수법장은 모두 지엄(화엄제2조)으로부터 배운 동기다. 중국 화엄종의 계보는 초조 두순-2조 지엄-3조 현수법장-4조 청량징관-5조 규봉종밀 [38] 지금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일대. 조선 시대까지 수성구는 대구와는 독립된 고을이었다. [39] 그런데 웹상에서는 최고운전의 내용을 실제 최치원의 행적으로 뒤섞여 서술하는 경우가 있다. 마치 삼국지연의와 실제 중국 삼국시대를 헷갈리는 것과 같다. 최고운전은 최치원을 도사, 신선 같은 인물로 묘사하기 때문에 당연히 실제 역사인물 최치원과는 구별해야 한다. [40] 시독 한림학사 지서서감과 겸직. [41] 시어사내봉공을 제수할 때 받음. [874년] [43] 마산의 산복도로는 마산여자고등학교 마산중앙고등학교, 마산제일여자고등학교 앞을 지나는 구 산복도로가 고운로이고 이후 산기슭에 새로 뚫은 큰 도로는 무학로이다. [출처] "최치원이 남기고 간 이야기", 마산문화원, 2012. 중앙일보 2차 인용. [45] 오래되다 보니 이 비문은 가운데 雲 자가 풍화가 심해 많이 지워진 상태다. [46] 정자로 쓰면 道不遠人,人無異國이다. [47] 국적(國籍)은 다르지만 어려울 때 서로 돕는 양국 관계를 나타낸다. [48] 그리고 이 참서를 올린 곳이 지금의 경주 남산 밑에 있는 상서장(上書莊)이라고 한다. [49] 최치원이 해인사에 은거하던 시절, 왕건을 지지하던 승려 '희랑'의 견해를 존중하여 시를 써주었다 해서 이의 가능성 자체는 긍정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 쪽도 '당시 신흥 궐기하던 송악 세력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정도로 보고 있다 . 예시 [50] 고려 3성 중 하나인 내사성의 장관. 문종 15년에 내사령은 중서령으로 개칭되었다. 품질은 종1품, 정원은 1인이다. [51] 국사(國師) 왕사(王師), 혹은 그에 준하는 고승들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비석이다. [52] 擧世少知音(거세소지음)이라고 쓴 것도 있으며 중학교 한문 교과서에서도 이렇게 쓰고 있다. [53] 관련 작성글에서 고전소설 < 최고운전>에나 나오는 이야기라고 자꾸 들먹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최고운전의 창작연대는 높게 잡아도 1700년대를 넘어가지 않고, 이 이야기 자체는 이 작품이 나오기 이전인 고려말-조선초부터 당시의 유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졌던 일화이다. 학자들의 문집 등을 보면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소금 밀매상인 황소가 글자를 읽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이야기가 많지만, 실제 황소가 지었다는 한시가 존재한다. 국화를 몹시 좋아했던지 얼마 안 남은 그의 한시 작품은 모두 국화를 소재로 하고 있는데 부제후부국(不第後賦菊), 즉 '과거에 떨어진 뒤에 국화를 보고 지음' 이라는 이 한시의 제목은 황소가 한때 과거 시험에 응시했다가 낙방한 적이 있음을 시사하는데, 한시를 짓고 과거 시험에 응시한 경험도 있다면 글을 자연히 알고 있을 것이다. 상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글을 모른다고 보는 것도 편견인데, 당장 중국 소설이나 영화들만 봐도 상인의 아들로서 공부한다던가 공부하다가 때려치우고 상인이 된다던가 하는 내용이 숱하게 나온다. 부를 축적하는 만큼 오히려 글을 접할 기회가 늘어나는 것. 해당 한시는 다음과 같다. "가을이 되어 9월 8일을 기다리니/내 꽃이 피고 나면 다른 꽃은 질 테지/충천하는 향기는 마침내 장안을 채우고/온 성이 황금 갑옷 두르리(待到秋來九月八/我花開後百花殺/衝天香陣透長安/滿城盡帶黃金鉀)" 이 한시의 마지막 구절인 '만성진대황금갑(滿城盡帶黃金鉀)'은 2007년 중국에서 개봉한 장예모 감독의 영화 < 황후화>의 중국 원제목이기도 하다. [54] 말 그대로 얻기 어렵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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