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22:45:13

조선태조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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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國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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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 숭례문
  1.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
  2.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3. 여주 고달사지 승탑
  4.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
  5.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6.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
  7.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8.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9.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10. 익산 미륵사지 석탑
  11.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12.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13. 영천 거조사 영산전
  14. 안동 봉정사 극락전
  15.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
  16.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17.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18. 영주 부석사 조사당
  19. 경주 불국사 다보탑
  20.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21. 경주 불국사 연화교 및 칠보교
  22. 경주 불국사 청운교 및 백운교
  23. 경주 석굴암 석굴
  24. 경주 태종무열왕릉비
1.#26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
  1.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2.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3. 성덕대왕신종
  4.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5. 경주 첨성대
  6.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7. 창녕 진흥왕 척경비
  8.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
  9.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10. 상원사 동종
  11.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12.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
  13.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
  14.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15.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16. 순천 송광사 목조삼존불감
  17. 혜심고신제서
  18. 장흥 보림사 남 · 북 삼층석탑 및 석등
  19.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20. 부석사 조사당 벽화
  21.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22. 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 / 평창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23. 예산 수덕사 대웅전
  24. 영암 도갑사 해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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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51~10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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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bordercolor=#fff,#1f2023>
1.#76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
  1.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
  2.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3.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좌상
  4.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
  5.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6.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
  7.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8.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9. 금동신묘명삼존불입상
  10.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
  11. 금관총 금관 및 금제 관식
  12. 금관총 금제 허리띠
  13. 평양 석암리 금제 띠고리
  14. 경주 부부총 금귀걸이
  15.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
  16. 청동 은입사 포류수금문 정병
  17. 백자 철화포도원숭이문 항아리
  18. 청자 참외모양 병
  19. 청자 투각칠보문뚜껑 향로
  20. 청자 구룡형 주전자
  21. 청자 음각연화당초문 매병
  22. 청자 상감모란문 항아리
  23. 김천 갈항사지 동 · 서 삼층석탑
  24. 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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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101~150호]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fff,#1f2023>
1.#101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1. 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
  2.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3. 전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
  4.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
  5.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
  6.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
  7. 계유명삼존천불비상
  8.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
  9. 이제현 초상
  10. 안향 초상
  11. 경주 감은사지 동 · 서 삼층석탑
  12. 청자 철화양류문 통형 병
  13. 청자 상감모란국화문 참외모양 병
  14. 청자 상감당초문 완
  15. 청자 상감모란문 표주박모양 주전자
  16.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17.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18.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
  19. 용주사 동종
  20. 안동 하회탈 및 병산탈
  21. 양양 진전사지 삼층석탑
  22.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23.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
  24. 녹유골호(부석제외함)
1.#126 불국사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1. 서울 삼양동 금동관음보살입상
  2. 금동관음보살입상
  3. 금동보살입상
  4. 구미 죽장리 오층석탑
  5. 고려말 화령부 호적 관련 고문서
  6. 징비록
  7. 청자 동화연화문 표주박모양 주전자
  8. 금동보살삼존상
  9. 신윤복필 풍속도 화첩
  10. 금동 용두보당
  11. 대구 비산동 청동기 일괄-검 및 칼집 부속 / 투겁창 및 꺾창
  12. 전 고령 금관 및 장신구 일괄
  13. 김홍도필 군선도 병풍
  14. 나전 화문 동경
  15. 정문경
  16. 동국정운
  17. 화순 대곡리 청동기 일괄
  18. 영암 월출산 마애여래좌상
  19. 귀면 청동로
  20. 전 논산 청동방울 일괄
  21.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
  22. 십칠사찬고금통요 권16 / 십칠사찬고금통요 권17
  23.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 권4, 5 /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 권6
  24. 송조표전총류 권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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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151~200호]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fff,#1f2023>
1.#176 백자 청화‘홍치2년’명 송죽문 항아리
  1. 분청사기 인화국화문 태항아리
  2. 분청사기 음각어문 편병
  3. 분청사기 박지연화어문 편병
  4. 김정희필 세한도
  5. 장양수 홍패
  6. 구미 선산읍 금동여래입상
  7.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
  8.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
  9. 상지은니묘법연화경
  10. 양평 신화리 금동여래입상
  11. 영양 산해리 오층모전석탑
  12. 천마총 금관
  13. 천마총 관모
  14. 천마총 금제 허리띠
  15. 황남대총 북분 금관
  16.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
  17. 경주 98호 남분 유리병 및 잔
  18. 황남대총 남분 금목걸이
  19. 토우장식 장경호
  20.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10, 44~50
  21.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22. 단양 신라 적성비
  23.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24. 금동보살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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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201~250호]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fff,#1f2023>
1.#201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1. 대방광불화엄경 진본 권37
  2.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6
  3.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36
  4. 충주 고구려비
  5. 합천 해인사 고려목판
  6. 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
  7. 도리사 세존사리탑 금동 사리기
  8. 보협인석탑
  9. 감지은니불공견삭신변진언경 권13
  10. 백지묵서 묘법연화경
  11.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언해)
  12. 금동탑
  13. 흥왕사명 청동 은입사 향완
  14. 감지은니대방광불화엄경 정원본 권 31
  15. 정선필 인왕제색도
  16. 정선필 금강전도
  17. 아미타삼존도
  18. 백자 청화매죽문 항아리
  19. 청자 상감용봉모란문 합 및 탁
  20.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21. 백자 청화매죽문 유개항아리
  22. 경복궁 근정전
  23. 경복궁 경회루
  24. 창덕궁 인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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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251~300호]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fff,#1f2023>
1.#251 초조본 대승아비달마잡집론 권14
  1. 청자 음각'효문'명 연화문 매병
  2. 청자 양각연화당초상감모란문 은테 발
  3. 청자 음각연화문 유개매병
  4. 전 덕산 청동방울 일괄
  5.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
  6.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9
  7. 백자 청화죽문 각병
  8. 분청사기 상감운룡문 항아리
  9. 분청사기 박지철채모란문 자라병
  10. 백자 유개항아리
  11. 백자 달항아리
  12. 백자 청화산수화조문 항아리
  13. 포항 냉수리 신라비
  14.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3
  15.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 75
  16. 초조본 아비달마식신족론 권12
  17. 초조본 아비담비파사론 권11, 17
  18. 초조본 불설최상근본대락금강불공삼매대교왕경 권6
  19.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
  20. 초조본 현양성교론 권12
  21.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32
  22.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15
  23. 귀함별황자총통(1596년조)
  24. 도기 기마인물형 뿔잔
1.#276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53
  1.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36
  2. 태종11년이형원종공신록권부함
  3.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74
  4. 성거산 천흥사명 동종
  5. 백자 병형 주전자
  6.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7. 통감속편
  8. 초조본대반야바라밀다경 권162, 170, 463
  9.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10. 백자 ‘천’ ‘지’ ‘현’ ‘황’명 발
  11. 백제 금동대향로
  12.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13.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14. 양산 통도사 대웅전 및 금강계단
  15. 용감수경 권3~4
  16.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
  17.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
  18.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 병
  19. 나주 신촌리 금동관
  20. 칠장사 오불회 괘불탱
  21. 안심사 영산회 괘불탱
  22. 갑사 삼신불 괘불탱
  23. 신원사 노사나불 괘불탱
  24. 장곡사 미륵불 괘불탱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min-width:max(12%, 7em)"
{{{#!folding [301~336호]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fff,#1f2023>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min-width:max(12%, 7em)"
{{{#!folding [ 번호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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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국왕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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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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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black,#ddd> 태조 <colbgcolor=#fff,#1f2023> 생애 | 건원릉 | 왕씨 몰살 | 이성계 여진족설 | 조선태조어진 | 전어도 | 종계변무 | 평가 | 여담 | 대중매체 | 가족관계
<rowcolor=black,#ddd> 태종 생애 | 평가 | 헌릉 | 태종우 | 일화 | 가족관계 |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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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국보 제317호
조선태조어진
朝鮮太祖御眞
소재지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태조로 44-0 (풍남동3가, 경기전 경기전) 어진박물관
분류 유물 / 일반회화 / 인물화 / 초상화
수량/면적 1폭
지정연도 2012년 6월 29일
제작시기 1872년( 고종9)
파일:태조 어진.jpg
<colbgcolor=#315288> 조선태조어진

1. 개요2. 다른 어진3. 외부 링크4. 국보 제317호

[clearfix]

1. 개요

파일:태조 어진 얼굴 확대.jpg
얼굴을 확대한 모습[1]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 어진. 현재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의 어진박물관(전주 한옥마을 경기전 내)에 소장되어 있으며, 대한민국 국보 제317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신정면의좌상(全身正面椅坐像) 초상화로, 총 26축으로 이루어져 있던 태조 어진 중 현존하는 유일한 본이다.

건국왕인 태조 이성계는 조선의 시조인 만큼 특별히 국초부터 경복궁 내에 선원전(璿源殿)이라는 어진 봉안처를 만들어 보관하였고, 각 지방에도 서울 문소전(文昭殿), 영흥 준원전(濬源殿), 평양 영숭전(永崇殿), 개성 목청전(穆淸殿), 경주 집경전(集慶殿), 전주 경기전(慶基殿) 등에 각각 어진을 모사하여 봉안하였다.

기록에 남아있는 이성계의 어진 26축 중 현존하는 유일한 이 어진은 태조 말년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태종 10년인 1410년에 경기전에 봉안되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모든 이성계의 어진들이 왜군의 손에 불타 사라질 때 전주 경기전에 있던 이 어진만은 유일하게 안의와 손홍록이라는 두 인물이 죽음을 무릅쓰고 조선왕조실록, 고려사 등의 다른 중요 문적들과 함께 보관하여 무사할 수 있었다.[2] 전쟁이 끝난 후 경기전이 재건되면서 다시 소장되었고, 이후 시간이 지나며 낡아진 원본을 고종 9년인 1872년에 원본 모습 그대로 옮겨 그린 것이다.

어진상단에 ‘太祖大王御容小子嗣服之九年壬申移摸’와 ‘太祖高皇帝御眞’이라는 표제가 있다. 전자는 위와 같이 1872년 고종 9년 임신년에 어진을 새로 이모하면서 붙인 것이고, 후자는 1899년에 태조를 고황제로 추존하면서 고종이 써서 규장각에 봉안해 두었던 어진표제로, 1900년 9월 29일에 윤용선의 건의로 날을 받아 10월에 원 표제 안쪽에 5푼分간격으로 붙였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가면 실록에 "왜 태조대왕께서는 곤룡포가 청색이시지?" 하고 후대 임금들이 궁금해하는 대목이 간간히 보인다. 당시에 신하들이 내놓은 답은 "아마 고려의 곤룡포를 입으셔서 그런듯 합니다"였고, 그래서 1837년에 헌종이 이 그림을 그릴 때 조선의 곤룡포인 홍룡포로 바꿔 그리라고 했다고 한다. 네이버 캐스트 자료. 홍룡포를 입기 시작한 것은 세종대왕 26년(1444)부터다. 이전에는 태조 이성계의 어진에서 나온 바와 같이 파란색이었는데, 이는 명 태조 홍무제가 조선과의 기싸움 때문에 이성계에게 고려의 군주 대행이라는 뜻을 가진 '권지고려국사'라는 직책만 내리고 바라던 조선왕 책봉을 안 해준 게 발단이었다. 조선왕 책봉은 1401년 명 혜종 건문제가 태종 이방원을 정식으로 책봉한 이후부터였으며, 이후 세종 시대부터 새 군주가 즉위하면 명나라 쪽에서 단령과 단삼(團衫)을 내려줬지만 명나라가 망한 이후로는 조선에서 알아서 만들어 입게 되었고, 단삼은 원삼으로 바뀌게 된다.

2020년 12월 기준 경기전 진전에 태조어진 뒤에 있던 경기전 일월오봉도를 비롯해 1872년 봉안 당시 사용한 가마와 의장물들이 전라북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자세히 보면 오른쪽 눈썹 위에 사마귀가 돋아있는 것도 묘사되어 있다.

2. 다른 어진

파일:b9q6wTs.jpg 파일:attachment/taejo123.jpg
2011년 복원한 조선 태조의 어진 반쯤 타버린 원본
원본은 위에 나온 청포 어진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현존하는 다른 조선 시대 어진들과 마찬가지로 6.25 전쟁 기간 동안 부산에 옮겨져 있던 중 화재로 얼굴을 포함한 절반이 탔다. 그래도 태조는 위의 어진이 남아 있었던 덕분에 얼굴은 그대로 옮겨서 그릴 수 있어서 붉은색 용포 버전의 어진은 복원할 수 있었다.[3]
파일:EBeYnnj.jpg
준원전의 어진과 같은 얼굴[4]

신숙주가 쓴 《영모록(永慕錄)》에 따르면 당시 선원전이라는 경복궁내 열성어진 봉안처에 받들던 태조 어진이 무려 26축[5]이나 있었으며 그중에는 말을 타고 있는 태조의 어진도 있었다고 한다. 반쯤 타버린 홍룡포 어진은 전주 경기전에 있는 청룡포 어진을 참조해 복원한 것이다.

청룡포 어진 원본은 태조가 승하한지 2년뒤인 태종 10년(1410년)에 이성계가 64세 때 모습이 담긴 경주 집경전 어진을 모사해 제작되었다. 여러가지 일을 겪으며 현재까지 남았는데 한반도에 있었던 주요 사고들을 볼 수 있다.
  • 1636년 병자호란때는 무주 적상산으로 옮겨졌고 이듬해인 1637년에 다시 전주로 돌아왔다.
  • 1763년엔 한 차례 수리를 했고, 1767년에 일어난 전주성 대화재 당시엔 전주향교로 옮겨지기도 했다.

현재 남아있는 어진은 고종 9년이던 1872년 당시 경기전에서 받들던 어진이 오래되고 낡아서 영희전에 있던 태조의 어진을 화사 박기준, 조중묵, 배은배 등 8명이 4월 22일부터 5월 4일까지 모사 한 것이다. 모사본이 완성되고 1410년에 제작된 원본은 세초한 후 백자 항아리에 넣어 경기전 본전 뒤편에 있는 북쪽 계단 위에 묻었다고 한다.[6]

청룡포의 어진의 경우 곤룡포의 각진 윤곽선은 물론 양쪽 트임새로 보이는 내공(內工)과 첩리(帖裏)의 형태가 조선 초기 초상화법을 닮았으며, 정면관을 훌륭히 소화해 낸 작품으로 보(補)와 견룡(肩龍)의 이금(泥金) 효과에 의하여 왕의 품위가 돋보이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참고로 태조 이성계의 최초 어진은 1389년 고려 공양왕이 왜구 토벌을 성공적으로 마친 이성계의 공적을 치하하면서 그의 초상을 벽화로 그리라는 명에 따라 그려진 벽화다. 조선 왕으로써 그려진 어진은 1398년으로 왕위에 오른지 7년째 되던해에 그린 어진인데 그해 함주(함흥)의 준원전에 자신의 진영을 봉안토록 하였고 8월에는 계림(경주)의 집경전, 문소전, 장생전 등에 봉안되었는데 이는 고려를 무너트리고 세운 조선 왕실의 권위와 왕조의 정통성을 세우려는 의도로 보여진다.

현재 경기전 정전의 어진의 원본은 2008년 보존 처리후 2010년 부터 경기전 경내 어진 박물관에 있으며 1999년 전주시가 권오창 화백에게 모사를 의뢰해 제작된 모사본은 어침실 문앞에 전시되어 있다. 원래는 전주시에서 어진 원본을 박물관으로 옮기고 모사본을 배치하려 했으나 전주 이씨 종친회의 강력한 반발로 모사본과 원본 2개를 보유하게 되었다.

붉은색 홍룡포 어진은 1837년 영흥본궁 준원전에 있던 어진을 모사한 것인데, 헌종이 용포의 색깔을 붉은 색으로 바꿔 채색하도록 지시하여 홍룡포로 채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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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흥본궁 준원전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조선 태조 어진
함흥본궁에 봉안되어 있 태조 어진. 위의 어진보다는 이전 시기에 그려진 듯한 모습이며, 곤룡포에 가려져 있지만 기골이 가려지지 않아 왕년의 역전의 용장 포스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7] 이 어진은 일제강점기 때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함흥본궁이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현재 행방을 알 수 없다고 전해진다. 따로 들고 나오지 않았다면 소실됐을 확률이 높다. 북한은 도서정리사업도 했다

1913년, 일본인 순사가 촬영한 사진이다. 영흥본궁 준원전 어진은 전주 경기전 어진과 마찬가지로 전란을 피했던 어진이었기에 1398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여지는데 당시 이성계의 나이는 64세가 되었을 때다. 저 얼굴이 예순넷이라면...(아닌게 아니라 저그림 그릴시점에 이성계는 딸(숙신옹주)도 하나 만들었다.)
파일:조선 태조 어진 2013 복원.jpg 파일:조선 태조 어진 2013 복원 얼굴 확대.jpg
사진을 토대로 복원한 젊은 태조 어진. 확대 모습
2013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영흥본궁 준원전 태조어진을 복원하였는데 일본인 순사가 남긴 준원전의 태조 어진 사진을 참고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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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성어진에 실린 태조 모습 출처[8].
일제강점기 만들어진 열성어진에 실린 태조의 모습이다. 매우 간략한 그림이지만 복식이나 수염의 형태를 보면 실제 어진을 보고 그렸을 확률이 있어보인다. 조선시대 초상화는 초기에는 정면상이었다가 중기로 접어들면서 묘사가 쉬운 측면상으로 바뀌었고, 조선말에 이르러 서양식 화법이 가미되어 정면상으로도 충분히 개성을 나타내기 쉬워지면서 정면상으로 회귀했다. 열성어진의 다른 초상과는 달리 조선초기 양식대로 태조만은 정면상으로 그려진 것으로 볼 때 최소한 열성어진을 그렸을 때 뭔가 보고는 그렸을 확률이 있어보인다. 다만 어떤 어진을 보고 그렸을지는 짐작하기 힘들다. 열성어진이 편찬될 당시에는 전주 경기전, 함흥 준원전, 한성 선원전에 각각 태조의 어진이 있었기 때문에 그 중 하나를 참고해 그렸을 것이다. 우측에 있는 초상화와 매우 흡사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초상화를 보고 그렸을지도 모른다.

3. 외부 링크

4. 국보 제317호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로 가로 150㎝, 세로 218㎝이다. 태조의 초상화는 한 나라의 시조로서 국초부터 여러 곳에 특별하게 보관되어 총 26점[9]이 있었으나 현재 전주 경기전에 있는 태조 초상화 1점만이 남아있다.

이 초상화는 임금이 쓰는 모자인 익선관과 곤룡포를 입고, 정면을 바라보며 용상에 앉아있는 전신상으로 명나라 태조 초상화와 유사하다. 곤룡포의 각진 윤곽선과 양다리쪽에 삐져나온 옷의 형태는 조선 전기 공신상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또한 바닥에 깔린 것은 숙종 때까지 왕의 초상화에 사용된 것으로, 상당히 높게 올라간 것으로 보아 오래된 화법임을 알려준다. 의자에 새겨진 화려한 용무늬는 공민왕상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고려말에서 조선초까지 왕의 초상화에서 나타나고 있다. 익선관은 골진 부분에 색을 발하게 하여 입체감을 표현하였고, 정면상임에도 불구하고 음영법을 사용하여 얼굴을 표현하였다.

고종 9년(1872)에 낡은 원본을 그대로 새로 옮겨 그린 것인데, 전체적으로 원본에 충실하게 그려 초상화 중 가장 표현하기 어려운 정면상임에도 불구하고 훌륭하게 소화해 낸 작품으로 조선 전기 초상화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된다.


[1] 자세히 보면 왼편 귀 위쪽부터 입술 아래를 지나 오른턱 옆으로 찢어진 흔적이 있는데 이는 2000년 3월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분향제 중 실수로 창호문이 넘어져서 훼손된 흔적이다. # [2] 이 때 만들어진 책이 수직상체일기이다. [3] 순조 문조는 두 점 모두 얼굴을 포함한 절반이 타서 복원이 불가능하다. 철종은 구군복본 얼굴이 남아서 복원할 수 있었다. [4] 출처 [5] 개수를 뜻하는 단어. [6] 세초란 실록이나 어진을 새로 작성한 뒤 오래된 기존의 어진이나 실록을 파기하는 것이다. 즉 모두 물로 빨아 내용이 보이지 않게 한다. 실록의 경우 물에 씻어서 글을 지우거나 불에 태우는 방법으로 세초를 했다. 하지만 어진의 경우 어떻게 세초하고 매안 했는지 구체적 기록은 없다. 다만 태조의 어진을 고종 때(1872년) 세초하여 백자 항아리에 넣고, 경기전 북편에 묻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이 항아리를 발굴하면 자세한 방법을 알 수 있을 듯 하다. [7] 이성계가 태조가 됐을 때 나이가 50대 후반이라는 것과 당시 평균 체격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타고난 체격. [8] 1926년 6월 10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태조 어진 사진이다. 일제강점기 기록에 따르면 선원전에 태조의 어진 3축에 봉안되어 있었다고 한다. 흐릿한 형상이지만 현재 전주 경기전에 남아 있는 어진과 사진으로만 남아 있는 영흥 준원전 어진과 모습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선원전에 모셔졌던 3축의 어진이 각각 전주와 함흥의 어진을 이모한 것이라 해도 나머지 1축은 분명 다른 어진 있었을 확률이 있다. 그런 점에서 미루어 볼 때 선원전에 봉안 되어 있던 어진이 아닐까 싶다. [9] 명종 시점까지만 해도 이 만큼 남아있었다고 한다. 특히 이 중에는 말을 탄 채로 그려진 어진도 있었다고 한다. 사진으로 남은 함흥본궁 봉안 어진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