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화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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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화엄사에 소재한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들을 소개하는 문서.2023년 현재, 화엄사 내에는 5건의 국보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2.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자세한 내용은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문서 참고하십시오.3.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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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35호 | |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求禮 華嚴寺 四獅子 三層石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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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화엄사로 539, 화엄사 (황전리) / (지번)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12 화엄사 |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탑 |
수량/면적 | 1기 |
지정연도 | 1962년 12월 20일 |
제작시기 | 통일신라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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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5288>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
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華嚴寺四獅子三層石塔)은 국보 제35호로 지정되었다. 불국사 다보탑에 비견될 만한 이형(異形)의 석탑인데 원통전 앞에도 비슷하게 생긴 사자탑이 있기 때문에 착각하기 쉽지만, 이 탑은 각황전 옆쪽에 나있는 108계단을 올라가야 볼 수 있다.
석탑과 앞에 있는 좀 작은 석등인 효대(孝臺)는 연기조사(緣起祖師)가 만들었다고 한다. 석탑의 형식만큼이나 특이한 것은 석탑과 효대 내부에 각각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석상이 있다는 점이다. 석탑 안에 서있는 것은 연기조사의 어머니이며 효대 안에서 석탑을 향해 꿇고 예배하는 것이 연기조사라 전해지고 있는데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석등을 머리에 이고 차를 공양하는 연기조사의 효심을 감동스럽게 표현한 예술품으로 화엄사에서 가장 중요한 볼거리를 각황전보다 이 석탑을 꼽는 사람도 많다.
의천도 이곳을 소재로 슬픈 시 한 수를 지었다.
寂滅堂前 多勝景 [1] 적멸당 앞에는 빼어난 경치도 많은데,
吉祥峰上 絶纖埃 [2] 길상봉 위에는 한 점 티끌도 끊겼네.
彷徨盡日 思前事 [3] 온종일 서성이며 지난 일들 생각하니
薄暮悲風 起孝臺 [4] 날은 저무는데 효대에 슬픈 바람 이누나
- 대각국사 의천
吉祥峰上 絶纖埃 [2] 길상봉 위에는 한 점 티끌도 끊겼네.
彷徨盡日 思前事 [3] 온종일 서성이며 지난 일들 생각하니
薄暮悲風 起孝臺 [4] 날은 저무는데 효대에 슬픈 바람 이누나
- 대각국사 의천
참고로 석탑 앞에 사람(보살)이 서있거나 꿇고 있는 양식은 평창 월정사 구층석탑, 강릉 신복사지 삼층석탑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2011년 기단부가 침하되어 탑이 기울면서 구조적인 문제가 있음을 확인하여 해체 후 보수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 2016년에 탑을 해체, 2018년 5월부터 보수 작업과 재조립에 들어가 2021년 9월 모든 작업을 마치고 다시 공개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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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국보 제35호
지리산 자락에 있는 화엄사는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세운 절로, 호남 제일의 사찰답게 많은 부속 건물과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국보 제12호), 구례 화엄사 동 오층석탑(보물 제132호), 구례 화엄사 서 오층석탑(보물 제133호), 구례 화엄사 원통전 앞 사자탑(보물 제300호) 등의 중요한 유물들이 전해온다. 탑은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절 서북쪽의 높은 대지에 석등과 마주보고 서 있으며,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천인상(天人像)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악기와 꽃을 받치고 춤추며 찬미하는 등의 다양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가장 주목되는 위층 기단은 암수 네 마리의 사자를 각 모퉁이에 기둥삼아 세워 놓은 구조로, 모두 앞을 바라보며 입을 벌린 채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있다. 사자들에 에워싸여 있는 중앙에는 합장한 채 서있는 스님상이 있는데 이는 연기조사의 어머니라고 전하며, 바로 앞 석등의 탑을 향해 꿇어앉아 있는 스님상은 석등을 이고 어머니께 차를 공양하는 연기조사의 지극한 효성을 표현해 놓은 것이라 한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문짝 모양을 본떠 새기고, 양 옆으로 인왕상(仁王像), 사천왕상(四天王像), 보살상을 조각해 두었다. 평평한 경사를 보이고 있는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이 있으며,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만이 남아있다.
각 부분의 조각이 뛰어나며, 지붕돌에서 경쾌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어 통일신라 전성기인 8세기 중엽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위층 기단의 사자조각은 탑 구성의 한 역할을 하고 있어 경주 불국사 다보탑(국보 제20호)과 더불어 우리나라 이형(異形)석탑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천인상(天人像)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악기와 꽃을 받치고 춤추며 찬미하는 등의 다양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가장 주목되는 위층 기단은 암수 네 마리의 사자를 각 모퉁이에 기둥삼아 세워 놓은 구조로, 모두 앞을 바라보며 입을 벌린 채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있다. 사자들에 에워싸여 있는 중앙에는 합장한 채 서있는 스님상이 있는데 이는 연기조사의 어머니라고 전하며, 바로 앞 석등의 탑을 향해 꿇어앉아 있는 스님상은 석등을 이고 어머니께 차를 공양하는 연기조사의 지극한 효성을 표현해 놓은 것이라 한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문짝 모양을 본떠 새기고, 양 옆으로 인왕상(仁王像), 사천왕상(四天王像), 보살상을 조각해 두었다. 평평한 경사를 보이고 있는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이 있으며,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만이 남아있다.
각 부분의 조각이 뛰어나며, 지붕돌에서 경쾌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어 통일신라 전성기인 8세기 중엽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위층 기단의 사자조각은 탑 구성의 한 역할을 하고 있어 경주 불국사 다보탑(국보 제20호)과 더불어 우리나라 이형(異形)석탑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4. 구례 화엄사 각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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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화엄사 각황전[5] |
대한민국 국보 제67호 | |
구례 화엄사 각황전 求禮 華嚴寺 覺皇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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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화엄사로 539, 화엄사 (황전리) / (지번)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12 화엄사 |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불전 |
수량/면적 | 1동 |
지정연도 | 1962년 12월 20일 |
제작시기 | 조선 숙종 23년(1697) |
구례 화엄사 각황전은 국보 제67호로 지정되었다. 본래 이름은 장육전(丈六殿)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사라지자 이후 재건하면서 숙종이 직접 '각황전(覺皇殿)'이라는 이름을 지어 편액까지 하사하였다.[6] 각황이라는 말은 부처의 별명으로 '깨달음의 황제'라는 뜻인데 이에 대한 설화는 문서 참조.
불타기 전 건물의 명칭인 장육전은 불경에 부처의 몸이 장육금신(丈六金身), 즉 키가 1장 6척에 색은 금빛이라고 하는 데서 유래하였다. 그 이름대로 불상의 높이가 1장 6척에 달하는 '장육상'을 만들어 봉안했다고 한다. 장육전 건물은 670년( 신라 문무왕 10년)에 의상대사가 3층 구조에 정면, 측면 7칸[7] 규모로 건립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왜군이 공격하여 화엄사의 건물들이 모두 불탈 적에 장육상 또한 사라졌다. 원래 각황전 외벽은 석벽이고 화엄경문 글자 10조 9만 5048언을 새겼다고 하는데 이 또한 함께 깨졌다고 한다.[8]
이후 다른 건물들은 1636년( 인조 14년)에 다시 복구하였지만, 각황전 건물은 그 규모 때문에 1699년(숙종 25년)에야 공사를 시작하여 1703년(숙종 29년)에 완성하였다. 각황전 상량문 기록을 보면 재건에 동원된 인부는 3015명이었으며 연잉군(훗날의 영조)과 숙빈 최씨가 대시주자로 참여한 것으로 되어있다.[9]
각황전 내부에는 보물 제2139호에 지정된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사보살입상, 즉 3구의 불상과 4구의 보살상이 있다. 이 불보살상들은 17세기 남부지방에서 이름을 날렸던 조각승 색난(色難)과 그의 제자들이 참여한 작품으로 각황전 재건에 왕실이 참여하다보니 최고 수준의 기술로 조각됐다. 왼쪽에서부터 차례대로 관음보살-아미타불-보현보살-석가모니불-문수보살-다보불-지적보살로 배치돼있다.
장육전 자리에 재건한 각황전은 옛 화엄사 대웅전보다도 더 크고 대단해서 전국에서 손 꼽힐 만한 중층 사찰 건물이다. 누각은 아니기에 2층은 없지만, 천장이 아주 높아 시원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아주 높고 두꺼운, 그것도 심하게 휜 통나무 한 그루로 이루어진 기둥들 여러 개가 놓여진 모습도 인상적이다. 천장의 형태도 인상적인데, 가장 중심에 있는 천장은 바닥과 평행하게 놓여있지만 외각의 천장들은 지붕을 따라 비스듬하다. 이러한 천장을 빗천장이라고 하는데, 일반적인 건축물에서는 쉽게 찾아보기는 어렵다.
1768년(영조 44년)년에 자운선사가 수리한 적이 있는데, 이때는 인부 980명을 동원하였다. 1847년(헌종 13년)에는 기둥과 서까래가 썩고 벽도 쓰러지려 하는 등 큰 손상을 입어 어사에게 요청하여 수리했다고 한다. 이후 1885년(광무 22년)에도 수리한 기록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7년에는 기둥이 내려앉아 건물이 기울고 지붕이 파손되어 조선총독부에서 해체수리를 했다. 1936년부터 준비하여 41년까지 수리하였고, 총감독은 유명한 한국 고건축 학자였던 후지시마 가이지로. 해체 당시 마루널을 벗겨내었더니 신라 시절 건물 초석이 있었고, 검게 그을린 임진왜란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소석 사이의 전돌역시 산산조각 났고 뒷벽과 좌우 벽을 가득 채운 화엄경석의 작은 파편들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전의 이야기가 사실이었던 것. 의상의 필적도 검은 돌에 새겨져 있었다고..
근대에 와서 원래 대웅전에 있던 불상을 각황전으로 가져다 놓은 사진이 있다.
현재의 각황전은 높은 기단 위에 서쪽을 바라보고 서 있다. 정면 7칸(26.8 m), 측면 5칸(18.3 m), 높이 15 m로 사찰로써는 상당히 크지만 역시 경복궁 근정전보다는 작다. 칸 수는 더 많기 때문에 가끔 근정전보다 크다는 잘못된 소리가 나온다.[10] 천장도 특이하게 처리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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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국보 제67호
화엄사는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있는 절로 통일신라시대에 지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선종대본산(禪宗大本山) 큰절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버린 것을 인조 때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 각황전터에는 3층의 장육전이 있었고 사방의 벽에 화엄경이 새겨져 있었다고 하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만여점이 넘는 조각들만 절에서 보관하고 있다. 조선 숙종 28년(1702)에 장륙전 건물을 다시 지었으며, ‘각황전’이란 이름은 임금(숙종)이 지어 현판을 내린 것이라고 한다.
이 건물은 신라시대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돌기단 위에 앞면 7칸·옆면 5칸 규모로 지은 2층 집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라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건물 안쪽은 위·아래층이 트인 통층으로 3여래불상과 4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인데, 벽쪽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경사지게 처리하였다.
화엄사 각황전은 건물이 매우 웅장하며 건축기법도 뛰어나 우수한 건축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원래 각황전터에는 3층의 장육전이 있었고 사방의 벽에 화엄경이 새겨져 있었다고 하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만여점이 넘는 조각들만 절에서 보관하고 있다. 조선 숙종 28년(1702)에 장륙전 건물을 다시 지었으며, ‘각황전’이란 이름은 임금(숙종)이 지어 현판을 내린 것이라고 한다.
이 건물은 신라시대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돌기단 위에 앞면 7칸·옆면 5칸 규모로 지은 2층 집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라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건물 안쪽은 위·아래층이 트인 통층으로 3여래불상과 4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인데, 벽쪽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경사지게 처리하였다.
화엄사 각황전은 건물이 매우 웅장하며 건축기법도 뛰어나 우수한 건축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5. 화엄사 영산회 괘불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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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301호 | |
화엄사 영산회 괘불탱 華嚴寺 靈山會 掛佛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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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전라남도 구례군 |
분류 | 유물 / 불교회화 / 괘불화 / 석가불도 |
수량/면적 | 1폭 |
지정연도 | 1997년 9월 22일 |
제작시기 | 조선 효종 4년(16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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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5288> 화엄사 영산회 괘불탱 |
華嚴寺 靈山會 掛佛幀. 화엄사 영산회 괘불탱은 조선 효종 4년(1653년)에 제작된 가로 7.76m, 세로 11.95m의 거대한 크기의 탱화(幀畵)이다.
탱화란 불교의 가르침이나 전해져 오는 이야기를 이미지화 하여 표현한 그림인데, 괘불탱은 탱화 가운데서도 야외에서 행해지는 불교 의식에 사용하는 초대형 탱화이다.[11] 문화재명에서 언급되는 영산회라는 것은 영산회상도를 뜻하는데, 이는 석가모니가 제자들에게 설법하는 것을 묘사한 그림을 말한다. 화엄사 영산회 괘불탱이라는 이름은 곧 화엄사에 보관된 석가모니가 제자들에게 설법하는 모임을 그린 거대한 탱화라는 것을 뜻한다.
1997년 9월 22일, 문화재청은 괘불탱이 가지는 미적인 측면과 불교 미술사적인 중요성을 인정하여 칠장사, 안심사, 갑사, 신원사, 장곡사, 청곡사에 전해지는 괘불탱들을 국보 제296호부터 제302호까지 연달아 지정하였으며, 이와 함께 화엄사 영산회 괘불탱은 국보 제301호로 지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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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국보 제301호
석가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모습인 영산회상을 그린 괘불이다.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을 말한다.
화엄사에 있는 이 괘불의 크기는 길이 11.95m, 폭 7.76m이다. 석가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보현보살과 사천왕상 등이 배치되었다. 화면 중앙의 석가불은 높다랗게 만들어진 단의 연꽃받침 위에 앉아 있으며, 마귀를 물리친다는 의미로 손가락이 땅으로 향한 손모양을 취하고 있다. 둥근 얼굴과 어깨에서 부드럽고 원만한 느낌을 주고 필선은 매우 섬세하고 치밀해 세련미를 더한다.
석가불 좌우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석가를 모시며 서 있다. 사천왕 중 2구는 그림의 하단에, 2구는 상단에 배치해 마치 네 모서리를 지키는 것처럼 보인다. 각 상들의 얼굴은 둥글고 커다란 눈에 작은 코와 입, 길다란 귀를 가지고 균형잡힌 모습으로 서 있다. 홍색과 녹색을 주로 사용하였고 중간색을 사용해 은은하면서도 밝은 느낌을 주며 채색무늬와 금색무늬가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조선 효종 4년(1653)에 만들어진 이 괘불은 각 상들의 늘씬하고 균형잡힌 형태, 밝고 선명하며 다양한 색채, 치밀하고 화려한 꽃무늬장식 등에서 17세기 중엽의 불화에서 보이는 특징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화엄사에 있는 이 괘불의 크기는 길이 11.95m, 폭 7.76m이다. 석가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보현보살과 사천왕상 등이 배치되었다. 화면 중앙의 석가불은 높다랗게 만들어진 단의 연꽃받침 위에 앉아 있으며, 마귀를 물리친다는 의미로 손가락이 땅으로 향한 손모양을 취하고 있다. 둥근 얼굴과 어깨에서 부드럽고 원만한 느낌을 주고 필선은 매우 섬세하고 치밀해 세련미를 더한다.
석가불 좌우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석가를 모시며 서 있다. 사천왕 중 2구는 그림의 하단에, 2구는 상단에 배치해 마치 네 모서리를 지키는 것처럼 보인다. 각 상들의 얼굴은 둥글고 커다란 눈에 작은 코와 입, 길다란 귀를 가지고 균형잡힌 모습으로 서 있다. 홍색과 녹색을 주로 사용하였고 중간색을 사용해 은은하면서도 밝은 느낌을 주며 채색무늬와 금색무늬가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조선 효종 4년(1653)에 만들어진 이 괘불은 각 상들의 늘씬하고 균형잡힌 형태, 밝고 선명하며 다양한 색채, 치밀하고 화려한 꽃무늬장식 등에서 17세기 중엽의 불화에서 보이는 특징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6.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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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336호 | |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불삼신불좌상 求禮 華嚴寺 木造毘盧遮那三身佛坐像 |
|
소재지 | 전라남도 구례군 |
분류 | 유물 / 불교조각 / 목조 / 불상 |
수량/면적 | 불상 3구, 후령통 2건 일괄, 시주질 2건 |
지정연도 | 2021년 6월 23일 |
제작시기 | 조선 인조 13년(1635) |
|
<colbgcolor=#315288>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 |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 보호법>의 개정으로 인해 지정 번호가 폐지되기 전에 지정된 국보(지정번호가 마지막으로 달린 국보)이다.
6.1. 국보 제336호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은 화엄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으며, 1635년(인조 13) 조선 후기 유명 조각승인 청헌(淸軒, 淸憲)과 응원(應元), 인균(印均)을 비롯해 이들의 제자들이 협업해 완성한 17세기를 대표하는 불교조각이다.
‘삼신불’은 법신(法身)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 보신(報身) 노사나불(盧舍那佛), 화신(化身) 석가불(釋迦佛)을 말하며 화엄사상에 근원을 둔 도상으로서, 변상도나 사경(寫經), 불화에서는 많이 보이지만, 조각작품으로는 유일해 조선 후기 불교사상사와 조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받아 왔다.
최근에는 복장유물과 관련 기록 등이 발견되면서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의 제작시기와 과정, 후원자, 참여자들의 실체가 더욱 명확하게 밝혀졌다. 즉 이 삼신불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화엄사를 재건(1630∼1636)하면서 대웅전에 봉안하기 위해 1634∼1635년 동안 조성한 것이다. 전국 승려집단의 대표라 할 수 있는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을 역임한 벽암(碧巖) 각성(覺性, 1575∼1660)의 주관 아래 선조(宣祖, 재위 1567∼1608)의 여덟 번째 아들 의창군(義昌君) 이광(李珖, 1589∼1645) 부부와 선조의 사위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 1588∼1644) 부부, 다수의 왕실 상궁 등 승려 580여명을 포함한 1,320명이 시주자로 참여하였다. 불사를 주관한 벽암 각성은 임진왜란 이후 완주 송광사, 법주사, 화엄사, 쌍계사 등 전란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대사찰의 중창 불사를 주도해 조선 후기 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삼신불은 화려한 연꽃을 갖춘 연화대좌와 팔각의 목조대좌에 결가부좌 자세로 앉아 있다. 대좌를 포함해 총 3m가 넘는 거대한 규모와 더불어 단순하면서도 선이 굵게 표현된 기법 등 조각솜씨가 중후한 느낌을 더해 준다. 이 삼신불상은 청헌파와 응원ㆍ인규파가 참여한 만큼 표현에서도 각 유파의 조각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근엄한 표정의 비로자나불과 석가모니상은 청헌파가 제작한 것으로 판단되는 반면, 부드러운 얼굴에 작은 눈과 두툼한 눈두덩이가 표현된 노사나불상은 응원과 인균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은 17세기를 대표하는 조각승 청헌, 응원, 인균과 제자들이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여 완성한 기념비적인 대작(大作)으로서, 이는 불사를 주관한 벽암 각성, 의창군 등 왕실의 후원이 합쳐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제작된 목조불상 중 크기가 가장 크고, 조각으로 유일하게 표현된 삼신불(비로자나-노사나-석가) 도상이라는 점에서 불교조각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매우 크고 중요할 뿐 아니라 예술적ㆍ조형적 수준도 당대 불상 중에서 단연 돋보인다.
‘삼신불’은 법신(法身)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 보신(報身) 노사나불(盧舍那佛), 화신(化身) 석가불(釋迦佛)을 말하며 화엄사상에 근원을 둔 도상으로서, 변상도나 사경(寫經), 불화에서는 많이 보이지만, 조각작품으로는 유일해 조선 후기 불교사상사와 조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받아 왔다.
최근에는 복장유물과 관련 기록 등이 발견되면서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의 제작시기와 과정, 후원자, 참여자들의 실체가 더욱 명확하게 밝혀졌다. 즉 이 삼신불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화엄사를 재건(1630∼1636)하면서 대웅전에 봉안하기 위해 1634∼1635년 동안 조성한 것이다. 전국 승려집단의 대표라 할 수 있는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을 역임한 벽암(碧巖) 각성(覺性, 1575∼1660)의 주관 아래 선조(宣祖, 재위 1567∼1608)의 여덟 번째 아들 의창군(義昌君) 이광(李珖, 1589∼1645) 부부와 선조의 사위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 1588∼1644) 부부, 다수의 왕실 상궁 등 승려 580여명을 포함한 1,320명이 시주자로 참여하였다. 불사를 주관한 벽암 각성은 임진왜란 이후 완주 송광사, 법주사, 화엄사, 쌍계사 등 전란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대사찰의 중창 불사를 주도해 조선 후기 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삼신불은 화려한 연꽃을 갖춘 연화대좌와 팔각의 목조대좌에 결가부좌 자세로 앉아 있다. 대좌를 포함해 총 3m가 넘는 거대한 규모와 더불어 단순하면서도 선이 굵게 표현된 기법 등 조각솜씨가 중후한 느낌을 더해 준다. 이 삼신불상은 청헌파와 응원ㆍ인규파가 참여한 만큼 표현에서도 각 유파의 조각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근엄한 표정의 비로자나불과 석가모니상은 청헌파가 제작한 것으로 판단되는 반면, 부드러운 얼굴에 작은 눈과 두툼한 눈두덩이가 표현된 노사나불상은 응원과 인균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은 17세기를 대표하는 조각승 청헌, 응원, 인균과 제자들이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여 완성한 기념비적인 대작(大作)으로서, 이는 불사를 주관한 벽암 각성, 의창군 등 왕실의 후원이 합쳐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제작된 목조불상 중 크기가 가장 크고, 조각으로 유일하게 표현된 삼신불(비로자나-노사나-석가) 도상이라는 점에서 불교조각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매우 크고 중요할 뿐 아니라 예술적ㆍ조형적 수준도 당대 불상 중에서 단연 돋보인다.
[1]
적멸당전 다승경
[2]
길상봉상 절섬애
[3]
방황진일 사전사
[4]
박모비풍 기효대
[5]
오른쪽에 잎이 무성한 나무는 2024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화엄매'(홍매화)이다.
[6]
편액 글씨는 예조참판, 형조참판 등을 지낸 성재(省齋) 이진휴(1657∼1710)가 썼다.
[7]
건물 기둥 사이의 공간이 한 칸임.
[8]
여담으로 이 깨진 화엄석경 파편들은 수습해서 각황전 내에 모셨다가 한국전쟁 와중에 노출된 것을 다시 수습해 현재는 사찰 내 성보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으며, 1990년에
보물 1040호로
지정되었다.
[9]
후지시마 가이지로의 저서 한의 건축문화. 주지승 정휘헌의 소장품인 지리산대화엄사지에 의하면 군친왕과 친왕자모 최씨를 비롯한 왕족과 기타 조력인들의 이름에 군인(인부)로 2050명이 쓰여 모두 3015명이라고 한다.
[10]
이는
조계사도 마찬가지인데, 본당 건물이 근정전보다 칸 수가 더 많다. 그러나 크기로 따지면 근정전 크기보다는 작다.
[11]
소위 말하는
야단법석이 이 괘불탱이 걸리는 야외 불교 의식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