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21:08:17

정사(역사)

1. 개요2. 정사와 야사3. 국가별
3.1. 한국
3.1.1. '조선사'는 없는 이유
3.2. 중국3.3. 일본3.4. 류큐3.5. 베트남

1. 개요

정사(正史)란 한국(韓國)과 중국(中國) 등의 동아시아 나라들에서 각 왕조(王朝)가 정통(正統)으로 인정하고 공식 편찬한 사서(史書)이다. 중국의 <사기(史記)>, <한서(漢書)> 등의 이십사사(二十四史)나 한국의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등이 대표적이다.

정사(正史)는 주로 국가에서 편찬한 관찬(官撰) 사서(史書)로 민간(民間)에서 개인이 편찬한 사찬(私撰) 사서(史書)인 야사(野史), 패사(稗史) 등과 구별되는 말로 쓰인다. 하지만 중국에서도 당(唐, 618~907) 이전에 편찬된 사마천의 <사기(史記)>, 반고의 <한서(漢書)>,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 등은 정사(正史)이면서도 모두 개인이 편찬한 사서(史書)들이다. 따라서 국가가 편찬했으면 정사(正史), 개인이 편찬했으면 야사(野史) 하는 식의 구분은 옳지 않으며, 누가 편찬했느냐보다는 왕조(王朝)가 그 정당성을 인정했느냐가 중요하다. 결국 정사(正史)는 근대(近代) 이전의 왕조(王朝) 국가에서 나타난 개념으로, ‘왕조(王朝)에서 정통(正統)으로 인정된 역사서’를 뜻한다.
-두산백과, 〈정사(正史)〉
정사(正史)란 동아시아사 특유의 개념으로서, 어떤 대상이나 주제에 대하여 왕조가 권위 있다고 인정한 역사 서술이나 이론, 혹은 기록물을 말한다. 다른 말로는 공간사(公刊史; Official history)라고도 한다.

2. 정사와 야사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정사와 야사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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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정사/야사의 구별법을 자주 사용하지만, 오해를 부르기 쉬운 개념으로 주의해서 사용할 것이 요구된다.

3. 국가별

3.1.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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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正史)
국가 공인 역사서
삼국사기 고려사
실록(實錄)
제왕의 일대기를 다룬 편년체 기록물
고려실록 조선왕조실록
절요(節要)
방대한 정사 기록을 요약한 기록물
고려사절요 삼국사절요
통감(通鑑)
통치에 도움이 되는 기록물
동국통감
강목(綱目)
강목체를 적용한 기록물
동사강목 동국통감제강 본조편년강목
여사제강 동사회강 대동사강
휘찬려사 국조정토록
사략(史略) 본조사략 동국사략
일기(日記)
국가 공문서
승정원일기 일성록 동궁일기
각사등록 비변사등록
역사시(歷史詩) 응제시주 제왕운기
기타 삼국유사 개황력 대사편년
대사기 속무정보감 국조통기
발해고 해동고승전 동국병감
단군세가 기자지 동사
해동명장전 단군고기 신라고기
백제고기 해동고기 본국고기
삼한고기 고려고기 연려실기술
동사보유 동국역대총목 동사세가
해동역사 열조통기 동사찬요
기타 실전(失傳) <colbgcolor=#fff,#191919>고구려 유기 신집
신라 국사 제왕연대력 화랑세기
백제 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 서기
고려 구삼국사 가락국기 편년통록
왕대종족기 성원록 금경록
위서(僞書) 환단고기 규원사화 단기고사
부도지 화랑세기 박창화 필사본 격암유록
†: 실전(失傳)되어 현재는 존재하지 않음.
번외: 현대 역사서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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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도 삼국시대 때부터 신집, 국사 등 자국사를 책으로 편찬하기도 했지만 인용된 일부 내용을 제외하면 현전하지 않고, 중국에서 있었던 전 왕조 역사는 망한 뒤 왕조가 써 준다는 전통도 아직 들어오지 않아서 예를 들어 고구려 백제를 멸망시키고 정통성을 흡수했다고 주장한 통일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의 관찬 기전체 정사를 편찬하지 않았다.[1] 그리고 확실하지는 않지만 실전된 고대 사서들은 대부분 중국식 기전체 구성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식 정사 전통을 받아들여 고려 중기에 편찬한 삼국사기를 시작으로 이후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 등이 정사로 편찬·구분되어 전해지고 있다. 삼국사기와 고려사는 중국의 전통에 따라 기전체 양식으로 기록되었고, 고려사절요는 이름 그대로 고려사의 내용을 축약한 것이다.

3.1.1. '조선사'는 없는 이유

고려사 이후 한민족이 펴낸 전통적인 양식의 정사 역사책은 아직 없다. 전통적인 기전체 양식은 아니지만 광복 이후 1970년대 대한민국 정부의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국가 공식 역사서인 《한국사》를 편찬한 바 있다.[2] 다만 이 한국사와 신편 한국사는 자치통감, 동국통감처럼 고조선부터 현대까지 한국사 전체를 요약하여 다루는 통사서다. 다시 말해 기존의 존재하는 역사서를 요약해서 책 한권으로 묶어낸 것이지 새로 나온 정사서가 아니다.

따라서 고려사처럼 조선왕조의 역사만 다루는 정사서인 '조선사'는 아직 없다. 원래 후대 왕조가 전대 왕조의 정사를 편찬하는 것이 전통이지만 조선이 망한 뒤에 일제와 대한민국, 북한 모두 조선시대만을 다루는 기전체 형식의 정사를 따로 편찬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전체 《조선사》는 없다. 1938년 조선총독부(조선사편수회)에서 편찬한 '조선사(朝鮮史)'가 있기는 한데 이는 일단 편년체 구성인데다, 해당 사서가 말하는 '조선'은 '이씨 조선'이 아니라 Korea로서의 조선을 뜻한다. 즉 조선시대의 역사가 아니라 한국사 전반을 다루는 사서다.[3] 그리하여 기전체 '조선사' 편찬에 사용될 원사료여야 했을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가 현재까지는 정사로 취급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원래 실록이지 좁은 의미의 정사는 아니지만 넓은 의미의 정사(국정 및 검정 사서)에는 해당한다.

개인이 만드는 사찬서를 내놓기도 힘든게, 조선시대 역사 기록이 워낙 방대해서 사기와 정사 삼국지처럼 개인이 만든 편년체 혹은 기전체 형식의 사찬서가 나오기도 힘들다. 사실 중국의 사례를 보면 알겠지만 이십사사도 후기 들어서는 기록량 자체가 많아지기 때문에 개인이 펴낸 사서는 없고 죄다 관찬서다. 하물며 압도적인 기록량을 자랑하는 조선왕조실록을 가지고 사찬서를 만들기란 매우 힘들다고 볼 수 있다.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이 각종 한국사 연구 편찬 작업에 손을 놓고 있는게 아닌만큼 국가가 시도해도 엄청난 노력과 방대한 시일이 걸리는 작업을 개인이 하기란 힘들다고 볼 수 있다.

결론을 내리자면, 조선왕조의 역사만을 다룬 기전체의 관찬 '조선사'가 아직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전근대 동아시아 왕조의 전통이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당시의 일본 제국이나 현대 대한민국 정부 북한 모두 동아시아 전통의 왕조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전근대 동아시아 왕조의 관례를 따라 정통성을 인정 받는 절차 중 하나인 이전 왕조의 역사만을 별도로 다룬 기전체 관찬 정사서 '조선사' 편찬을 해야할 당위성이 적었다.

    물론 위에서 설명했듯이 조선왕조만을 다룬 전통적 기전체 사서를 편찬하지 않은 것 뿐이지 일제나 대한민국 정부나 한국 역사 전체를 다룬 통사는 편찬했다. 또한 중국은 한국과 약간 입장이 달라서, 후술하듯 중국 역시 전근대 왕조가 단절된 것은 마찬가지이나 전근대 역사서 형식의 청사고를 편찬했다. 중화인민공화국과 대만 양쪽 모두 자신들이 정통이라면서 '청사공정'까지 벌이고 있는 것은 덤.
  2. 전근대 역사관에서 탈피했기 때문이다. 현대 역사학은 왕조나 소수의 권력자 중심으로 역사를 파악하기보다는 다양한 분야별로 다각적으로 그 시대 전체를 종합적으로 바라보는 접근 방식으로 역사를 연구하고 있으므로 전통적인 왕조 중심의 기전체 역사 서술과는 맞지 않는다. 상술한 ' 한국사' 역시 현대적 역사 연구방식에 입각하여 단순한 왕조나 권력자 중심의 서술이 아니라 문화, 경제, 사회 등 분야별로 종합적이고 다각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3. 실록이 이미 사료로 쓸만하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자체가 워낙 세밀한데다가 온전히 보관되어 있으며 현대시대는 과학기술이 매우 발달하여 이렇게 기록량이 많더라도 쉽게 데이터베이스화하거나 관리하기 용이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제는 예전과 달리 당시의 기록을 있는 그대로 이용해도 별 무리가 없는데 굳이 여기서 더 요약과 편집을 거쳐야할 필요성이 적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전통적으로 기전체 정사를 편찬해온 이유는 왕조가 바뀌고나서 기존 왕조가 남긴 기록을 수집, 요약, 편집하여 간략히 알아볼 수 있도록 도우며, 신왕조의 정치적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해서이다. 당대 왕조가 남긴 기록은 '실록'으로 존재하는데 이 실록이 부실하거나 보충해야할 부분도 많고 빠진 부분이 많아서 추가적으로 기록을 찾아 교차검증하고 이를 한데 요약한 것이 정사인 것이다. 헌데 조선왕조실록워낙 세세하게 잘 기록되어 있어 임진왜란 시기나 세도정치 시기 정도를 제외하면[4] 정사를 편찬하여 보완해야 할 만한 부분이 별로 없다. 따라서 조선 역사를 다룬 매체에서도 실록 위주로 내용을 전개하다가 임진왜란 정도만 난중일기 같은 현장의 기록을 덧붙이는 정도다.
  4. 사료의 양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즉, 정사 편찬 작업이 너무 험난하다. 아직까지 진행중인 것이지 관심이 없는건 아니다. 정사 편찬에 있어서는 관련 기록을 총정리할 필요가 있는데, 조선이 망하고 난 뒤, 워낙 급격하게 사회적, 기술적 변혁을 겪었기 때문에 관련 자료를 분석하는 작업이 쉽지 않다. 단적으로 말해서 조선의 승정원일기가 마지막으로 쓰여진지 고작 100년 남짓한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한국이나 중국이나 대만이나 많은 사회적 변화가 진행되었고 그나마 한자 사용은 유지하여 옛 문서를 읽을 수라도 있는 중화권과 달리 한국은 아예 한자 에크리튀르(écriture) 자체가 무너졌다.[5] 관련 기록을 다 파악하지 못한 채 역사서를 편찬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므로 '정사 조선사' 편찬을 위해서는 국역 과정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번역이 험난하다보니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19세기 조선의 사대부들은 3, 400년 전의 실록을 무리없이 직독직해가 가능했다. 하지만 현대 한국인 식자층들은 아무리 한자 각 글자를 아는 경우는 많이 있다 해도 한문 문장을 제대로 구사하고 해석하려면 별도의 학습이 필요한데 한문을 정식으로 익히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한문 문장을 읽는 것은 단순히 생활용 한자를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높은 차원으로, 일부 전공자와 지식인 외에는 읽을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하다. 심지어 '조선사' 편찬에 필수적인 마지막 과제라 할 수 있는 승정원일기의 번역에는 초서체 해독이 필요한데 초서체를 읽을 수 있는 전문 인력 자체가 많지 않은데다가 초서체는 필기체이다보니 쓴 사람에 따라서도 필체가 달라져 번역이 더욱 험난하다.

    승정원일기의 경우 2035년까지 번역 완료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인공지능 딥러닝 기술의 도입으로 한자 해독과 OCR 작업이 박차를 가하게 된 것도 긍정적인 부분. 이 작업이 완성되면 현존하는 조선의 관찬 기록에 대한 국역은 완료된다.

    사실 조선왕조가 남긴 기록량이 너무 방대하다보니 조선 멸망 이후 주체가 누구든 간에 기전체 정사 편찬에 열성적이었다고 한들 제대로 된 역사서가 나오기는 힘들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국역이나 분석 작업이 제대로 되지 않은 채 '조선사'가 나왔어도 승정원일기가 번역이 완료된다면 다시 써야할 정도로 남은 기록량이 장난이 아니라는 이야기. 만약 그랬다면 '구오대사-신오대사', '구당서-신당서', '구원사-신원사'처럼 '구조선사-신조선사'와 같이 새로 보충해서 정사를 펴냈을 가능성도 있다.

3.2. 중국

중국의 정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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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사사
사기 한서 후한서 삼국지 진서 송서
사마천 반고 범엽 진수 방현령 심약
남제서 양서 진서 위서 북제서 주서
소자현 요사렴 요사렴 위수 이백약 영호덕분
수서 남사 북사 구당서 신당서 구오대사
위징 이연수 이연수 장소원 구양수 설거정
신오대사 송사 요사 금사 원사 명사
구양수 토크토아 토크토아 토크토아 송렴 장정옥
기타
동관한기 신원사 청사고
유진 커샤오민 자오얼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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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사기에서 기전체라는 기록 양식을 창시한 이래, 하나의 왕조가 멸망하면 그 뒤를 이은 왕조에서 전 왕조 혹은 전 시대의 역사서를 기전체로 편찬하는 전통이 수립되었다. 이는 일종의 정통성 확립 작업의 일환이기도 했는데, 정사 편찬을 진행한다는 것은 '이전 왕조가 확실히 망했다'는 선언이자 이를 편찬하는 우리가 정통 후임이라는 프로파간다이기도 했다.[6]

당대에 자신이 소속된 왕조의 역사를 직접 편찬하는 것이 가장 사료가 풍부하고 정확하겠지만, 이런 경우는 아무래도 이미 망해 없어진 존재를 설명하는 것에 비해 객관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가령 삼국지의 사마의나 삼국사기의 왕건처럼 전왕조 정사의 후반부에는 편찬자가 소속된 왕조의 시조가 으레 등장하기도 하는데, 당연히 객관성을 잃고 극존칭 사용에 찬양에 가까운 문구, 일부 곡필이 의심되는 대목들을 찾아볼 수 있다.[7]

보통은 한 왕조당 하나의 정사가 편찬되지만, 혼란기인 경우에는 여러 왕조 및 지방 정권의 역사를 묶어서 하나의 시대로 다루는 정사를 편찬하며, 앞서 편찬된 정사가 미흡하다고 판단하여 새롭게 정사를 편찬한 경우도 있다. 구당서와 신당서, 구오대사와 신오대사가 대표적인 경우.

정사 편찬을 가지고 '정통성 경쟁'을 딱히 벌이지는 않고 있는 남북한과 달리 중국은 청나라가 망한 뒤에 들어선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이 이를 가지고 정통성 경쟁을 벌이고 있다. 둘다 전근대 왕조가 아닌 근현대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치열한 정사 경쟁을 벌이고 있다. 1961년에 중화민국이 먼저 ' 청사'를 펴냈고, 중화인민공화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청사를 펴내는 이른바 '청사공정'을 벌인 바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 대륙 시기 중화민국에 대한 정사서를 편찬하지 않았는데, 이는 양안관계를 일종의 '분단'으로 보지 (국가의 공식 입장이 어쨌건) 중화민국(대만)이 완전히 망했다고 여기지는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만약 양안통일이 대륙 주도로 이루어진다면 중화민국사가 중화인민공화국에 의해 편찬될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대만 주도로 이루어진다면 '중화인민공화국사'가 편찬되거나, 중화민국 연감의 ' 열전'에 중국 공산당 치하의 역사를 기록할 것이다.

중국에서도 기전체로 기록되었으나 정사에 포함되지 않은 사서들도 많고, 오늘날에도 여러 저자에 의해 새로운 기전체 사서들이 편찬 중인 듯 하다[8]. 물론 이는 역사 서술의 방식이 기전체라는 것일 뿐, 여러 사람들에게 공인된 "정사"가 새롭게 편찬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또한 여러 사람들에게 공인된 "정사"의 여부가 곧 그 역사의 신뢰도를 좌우하는 것 또한 아니다.

3.3. 일본

[[일본사 관련 정보|
파일:일본 황실.svg
일본의 역사서
日本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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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0000><colcolor=#FFF> 고사기 고사기
정사 육국사 일본서기 | 속일본기 | 일본후기 | 속일본후기 | 일본 몬토쿠 천황 실록 | 일본삼대실록
근현대 실록 고메이 천황기 | 메이지 천황기 | 다이쇼 천황실록 | 쇼와 천황실록
무가정권 사서 아즈마카가미 | 도쿠가와 실기
기전체 대일본사
편년체 본조통감 | 부상략기
기타 일본세기(실전) | 풍토기 | 유취국사 | 신장공기 | 선대구사본기 }}}}}}}}}


일본은 일본서기를 시작으로 나라 시대~ 헤이안 시대 중기 까지 6개의 역사서가 국가 주도로 편찬되었다. 이를 육국사(六國史)라고 부르며, 일본에서 정사의 개념은 이 육국사만을 의미한다. 일본서기, 속일본기, 일본후기, 속일본후기, 일본문덕천황실록, 일본삼대실록이 육국사로, 꾸준히 정사가 편찬된 한국이나 중국과 달리 901년에 일본삼대실록이 편찬된 이후에는 국가에 의한 정사의 편찬은 중단되었다.

일본의 정사 편찬이 중단된 이유는 중세부터 정사 편찬의 주체가 되어야 할 천황의 조정이 유명무실해지고 지방세력의 난립, 막부 정치라는 이중체제가 정립되었기 때문이다. 10세기에 신국사(新國史)를 편찬하려는 계획이 있었으나 실패하였고, 에도 시대에는 도쿠가와 미츠쿠니(徳川光圀)가 대일본사(大日本史)라는 역사서를 편찬하였는데, 조정이 아닌 무가정권에 의해 편찬된 책은 일본에서도 따로 분류한다.

동아시아의 정사 편찬 개념은 보통 하나의 왕조 시대를 닫고, 새로운 왕조 시대를 여는 과정에서 이전 지배 주체를 역사의 뒤안길로 보내는 선언이자, 그 주체의 사료를 정리하고 기록하는 의식에 가까웠다. 어떻게 보면 하나의 '국가'에 대한 장례절차였던 셈. 허나 일본의 막부는 허수아비라고는 해도 천황의 '만세일계'를 유지한 상태에서 명목상으론 '신하'인 쇼군이 권력주체가 되어 통치하는 행태였기 때문에 정사 편찬 같은 행위를 할 당위성도 옅었고 감히 하기도 힘들었다. 쉽게 말해, 에도 막부가 들어섰다고 해서 이전 무로마치 막부에 대한 '정사 역사서'를 편찬할 이유가 없었다는 말.

중국과 한국에선 한 왕조가 멸망하면 다음 왕조가 전 왕조의 정사를 쓰는 전통이 있었지만 일본에선 적어도 역사기록이 시작된 이후로는 왕조가 교체된 적이 없으므로[9] 이전 왕조의 역사를 기록한다는 일 자체가 발생하지 않았다. 후대 천황 시대에 전대 천황들의 역사를 사서로 펴낸다고 해도, 직계 후손인 만큼 많은 곡필이 들어갈 여지도 컸다.

오랜 세월이 지나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 황실과 중앙정부가 위신을 되찾은 이후 실록 작성이 재개되고 육국사 이후의 정사를 편찬해보려는 사업이 진행됐다. 책 이름은 대일본사료인데, 아직 완성하지 못했다. 일본의 정사는 기전체가 아닌 편년체 양식이며, 속일본기에서 사용한 기록 양식을 국사체(國史體)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일본의 정사 역사서들은 천황 체제가 같은 핏줄로 유지되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역사를 스스로 편찬한 것들이다. 그래서 일본의 정사는 자화자찬이 많고, 이게 과해서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운 기록이 많다. 임나일본부설도 이 때의 기록을 곧이곧대로 믿고 제국주의적 팽창에 활용해 생긴 일. 비록 다른 동아시아의 '정사'들에도 윤색과 왜곡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지만, 이들은 왕조 혈통 자체가 다르니 최소한 나름의 객관성은 깔고 간다. 반면 일본의 정사는 현재 집권중인 천황 본인의 조상들 이야기이므로 곧이곧대로 쓰기 힘들었다. 오늘날 일본 주류 사학계에서도 육국사가 윤색이 있다는 건 기본 전제로 깔고 본다.

3.4. 류큐

류큐 왕국의 정사인 중산세감(中山世鑑)이 1650년에 6권으로 편찬되었다. 권두는 한문, 정권 5권은 일본문으로 기술되었다.
#국립국회도서관 소장본
#전문 웹페이지

3.5. 베트남

  • 대월사기(大越史記, Đại Việt sử ký) - 쩐 성종 재위기인 1272년 레반흐우(Lê Văn Hưu, 黎文休, 여문휴, 1230~1322)에 의해 편찬된 베트남의 역사서. 베트남 역사의 시작을 남월로 보았다. 현재는 소실.
  • 대월사기전서(大越史記全書, Đại Việt sử ký toàn thư) - 레 성종 시기인 1479년에 응오씨리엔(Ngô Sĩ Liên, 吳士連, 오사련, ?~?)에 의해 편찬된 역사서. 남월 이전의 반랑이나 어우락의 기록을 추가하여 베트남 역사의 시작을 끌어올렸다. 현재 후 레 왕조 이전의 베트남 역사를 연구할 때 중요한 사료로서 취급된다. 그 위상은 한국으로 치면 삼국사기급. 하지만 기전체 역사서인 삼국사기와는 달리 편년체 역사서이며, 이전 역사서인 대월사략이 현존하기에 최고(最古)의 역사서는 아니다.
  • 흠정월사통감강목(欽定越史通鑑綱目, Khâm định Việt sử Thông giám cương mục),
  • 대남식록(大南寔録, Đại Nam thực lục) - 응우옌 왕조 시대에 편찬된 실록.


[1] 다만 견훤이 후백제 건국을 선포할 때 참고한 역사책의 내용처럼, 지금 존재가 남아있지는 않지만 백제 멸망 이후에 백제 역사를 건국부터 멸망까지 나름대로 정리한 역사서는 통일신라에서 편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그것이 신라 정부에서 국가적 사업으로 시행되지 않은 것이다. [2] 이후 국사편찬위원회는 90년대에 개정판인 신편 한국사를 편찬했다. [3] 물론 이 책은 일제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반영한다는 비판도 있지만, 이건 정사의 전반적인 특징이라서 일제가 편찬한 《조선사》만의 문제는 아니다. [4] 세도정치 시기는 확실히 실록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승정원일기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승정원일기는 아직 번역이 덜된 채로 남아있다. [5] 물론 한문은 어디까지나 고대 중국어를 기본으로 한 문어체이기 때문에 현대 중국어와는 발음도 문법도 다르다. 한문과 백화문을 별개의 언어로 취급하기도 한다. 그래서 현대 중국인들도 별도의 학습이 없으면 한문을 해독할때 엉뚱하게 해석을 하거나 아니면 해석에 애를 먹는 경우가 있긴 하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일반인 기준에서나 해당하는 말이고 이를 번역하고 정리할 전문 인력의 숫자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큰 차이가 있다. [6] 대표적으로 원사 명사의 편찬 작업 시작은 각각 원나라( 북원)과 명나라( 남명)이 완전히 멸망하기도 전에 진행되었다. 전 왕조의 운이 다했다는 일종의 선언을 위해 전통을 이용한 것이다. 하지만 북원은 결과적으로 명에 패배하긴 했지만 카라코룸으로 밀려난 뒤에도 한때 서달의 15만 대군을 코케 테무르가 격파하기도 했고 만리장성을 넘어 산서성을 탈환할 정도로, 원사를 편찬한 1368~1370년 시점엔 아직 어느정도 저력을 가지고 있었다. [7] 다른 예시로 해당 왕조 당대에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의 이성계에 대한 즉위 이전 기록이 그렇다. 물론 그가 고려말 구국의 명장임은 검증이 가능하지만 당대 기록으로서 시조 찬양식 비현실적인 일화나 객관성을 잃은 부분을 꽤 찾아볼 수 있다. [8] 가령 해당 목록에 있는 2000년에 출간된《진사(秦史)》의 경우, 무려 2,200여 년 전의 일들을 기전체 사서로 편찬한 것이다. [9] 이걸 일본에선 만세일계라고 일컫는다. 역사학계에선 신화적 요소가 많이 가미된 부분은 배제하기도 하고, 사실 고대에 알려지지 않은 왕조 교체가 일어났었다는 이론이 진지하게 제기되기도 하지만, 아무튼 일본서기가 집필된 8세기 이후의 일본 황실은 검증 가능한 기록상으로도 확실하게 단일 왕조다. 설령 먼 과거에 교체가 일어났다고 가정을 해도, 교차검증 가능한 기록부터 계산한 시기만으로도 굉장히 오래 지속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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