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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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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등 |
소판(蘇判) 서발한(舒發翰) |
|
골품 | 진골(真骨) | |
직위 |
고성군 태수(固城郡 太守) 중원 대윤(中原 大尹) 무주 도독(武州 都督) 창부령(倉部令) 시중 겸 병부령(侍中 兼 兵部令) |
|
자칭 | 평동장군(平東將軍) | |
당 검교직 | 검교 위사경(檢校 衛尉卿) | |
본관 | 강릉 | |
성씨 | 김(金) | |
이름 | 양(陽) | |
자 | 위흔(魏昕) | |
아버지 | 김정여(金貞茹) | |
생몰연도 | 808년 ~ 857년 8월 13일 (향년 49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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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의 왕족, 무장, 정치가. 자는 위흔(魏昕).2. 생애
태종 무열왕의 9세손(8대손).열조 원성왕(제38대)과의 왕위 다툼에서 밀린 무열왕 방계 후손인 강릉 김씨의 시조 김주원의 증손자이다. 김주원의 맏아들 김종기의 아들인 김정여의 아들이 바로 김양이다. 신라 중대가 끝나고 하대로 접어들면서 무열왕계 왕통은 정계에서 그다지 힘을 쓰지 못했지만 김양의 집안만은 제법 위세를 떨쳤다. 특히 헌덕왕(제41대) 때 김주원의 둘째 아들인 김헌창이 일으킨 반란( 김헌창의 난 참조)이 실패하고, 그 혈족이 몰살당했는데도 김양의 집안은 큰 피해가 없었는지 아버지 김정여는 4등급인 파진찬까지 지냈다. 김흔의 사촌동생이었다.
김양 본인도 젊은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는데 고성군(경상남도) 태수, 중원( 충주시) 대윤, 무주( 광주광역시) 도독 등 지방 관직을 수 차례 역임하면서 다스리는 곳마다 행정능력이나 근무실적이 뛰어났다는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흥덕왕(제42대)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왕실에 왕위 다툼이 벌어졌는데 흥덕왕의 사촌인 김균정과 김균정의 조카인 김제륭(후의 희강왕)이 대립했다. 이 다툼에서 김양은 김균정의 아들인 김우징(후의 신무왕)과 함께 김균정을 적판궁으로 모시고 가 왕으로 받들고 김균정을 호위했지만 김제륭의 군사들이 곧 김균정이 있던 적판궁을 포위하자 화살을 쏘아 10여 사람을 맞추는 등 저항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제륭의 부하 배훤백(裵萱伯)이 쏜 화살에 다리를 맞고 부상당했다.
결국 수세에 몰리자 김균정은 김양에게 후일을 도모하라며 그를 탈출하게 했고, 김양은 포위망을 뚫고 탈출에 성공했다. 그 사이 김균정은 결국 김제륭의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 이 소식을 들은 김양은 크게 통곡하고는 태양을 가리키며 복수를 다짐하고 산야에 은둔했다. 그러던 중 간신히 살아남은 김우징이 청해진의 장보고에게 의탁했다는 소식을 듣자 김양도 병사를 모집하여 자신도 청해진으로 들어가 김우징을 만나고 거사를 도모했다.
그 후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중앙 조정에서는 다시 반란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희강왕(김제륭)이 자진하고 희강왕을 지지했던 민애왕(김명)이 즉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김우징은 그 틈을 노려 거사를 일으킬 것을 결의, 마침내 거병했으며 김양을 평동장군으로 삼아 장보고 휘하 청해진 군대와 함께 민애왕의 관군을 연전연파했다. 장보고는 이 때 부장 정연에게 5,000명의 병력을 내 주어 김양을 도왔다. 이 병력이 청해진에서 서라벌까지 진격해가며 정부군을 무너뜨리는데, 청해진군이 정예병이라 잘 싸운 것일 수도 있지만 당시 신라 중앙군의 전투력도 오랜 평화기를 보내며 어지간히 막장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아무튼 무주와 남원을 거쳐 달벌(현재의 대구)에서 벌어진 달벌대전에서 그 5,000여명으로 무려 20배에 달하는 100,000명의 신라 중앙군을 괴멸시켜버리고[1] 민애왕 측의 저항 능력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이후 반군을 피해 별궁으로 도주하던 민애왕을 붙잡아 시해하여 김균정의 복수를 이루고 김우징을 신무왕(제45대)으로 옹립시켰다. 전란 이후에는 민심의 수습에 힘썼다.
이 때 김양은 과거에 자신의 다리를 화살로 쏘아서 맞추었던 배훤백을 불러서는 이렇게 말했다.
"개는 각기 그 주인이 아니면 짖는다.[2] 네가 그 주인을 위하여 나를 쏘았으니 의사(義士)다. 나는 따지지 않겠으니 너는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한마디로 배훤백을 용서했다는 의미로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배훤백이 저런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겠냐며 모두 안심하고 기뻐했다고 한다.[3]이후 신무왕이 즉위한지 1년도 되지않아 승하하고 그 아들인 문성왕이 즉위했다. 이후로도 김양은 승진을 이어나가며 권세를 누렸다. 소판 겸 창부령을 제수하였고, 오래지 않아 시중 겸 병부령으로 영전했다. 당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문안하고는 검교위위경을 제수했다. 더욱이 문성왕 4년(842)에는 김양의 딸이 문성왕과 혼인하면서 국구(國舅)가 되었다. 그야말로 국가의 공신이자 실세로 대접받으며 산 것이다.[4]
아무튼 영화로운 말년을 보내다가 문성왕 19년(857)에 50세의 나이로 집에서 사망했다. 부음을 들은 문성왕은 애통해하며 김양에게 제1관등인 각간( 이벌찬)을 추증했고, 장례 절차는 모두 김유신의 예에 따르게 했으며 무덤은 태종 무열왕의 능역에 함께 장사지냈다. 복수귀같이 살다가 결국 복수에 성공하여 승승장구했고 죽어서까지도 최고의 예우로 대접받은 후덜덜한 인물이다. 그리고 김양이 죽은 그 해의 한 달 뒤인 9월에 사위인 문성왕도 승하했다.
3. 무덤
김양의 무덤은 지금도 무열왕릉 바로 앞 도로변 맞은편에 김인문의 묘와 함께 있어서 접근성이 꽤 좋다. 바로 옆에 중앙선 철길이 있어서 기차를 타고 경주에 오는 사람들은 차창 밖으로 지나가면서 거대한[5] 김양의 무덤을 얼핏 보고 경주에 왔음을 실감한다.김양의 무덤은 조선 시대까지도 상당히 중요하게 관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 선조가 이전 왕조의 유명한 왕과 신하들의 무덤을 찾아서 훼손된 부분을 고치고 나무를 심어 단장하라는 명을 내린다.(《 선조실록》 166권, 선조 36년 9월 9일 임술 1번째기사 ) 여기에서 언급되는 이름들을 보면 동명성왕, 태종 무열왕, 김유신, 강감찬, 김방경 등과 더불어 김양도 등장한다.
광해군과 숙종도 김양을 김유신, 백제의 계백과 성충, 고려의 강감찬과 정몽주와 함께 전대 한국사의 충신의 대표격으로 언급하고 그 무덤을 특별 관리할 것을 지시했다. 이 중 나머지 5명이 현대까지 이름이 잘 알려진 네임드 중의 네임드란 점에서 조선 시대까지는 김양이란 인물의 인식이 상당히 좋았고 나름대로 알려져있었던 걸 알 수 있다. 이 정도면 오히려 현대에는 별로 안 유명한 것이 이례적일 정도.
4. 대중매체에서
KBS 2TV의 < 해신>의 중후반부에 등장했으며 배수빈이 열연했다. 후반부 권력에 대한 욕망이 꽤나 큰 야심만만한 인물로 최종 보스격 인물로 묘사되었다. 장보고를 실제로 죽인 것은 염장이지만, 장보고에게 원한이 있는 염장을 뒤에서 조종하여 "장보고만 없애면 청해진은 보존해 주겠다."며 꼬드기면서 장보고를 죽이도록 곁에서 사주했으며 그가 장보고의 목숨을 빼앗자 곧바로 군사를 동원해 청해진을 공격한다. 염장이 약속이 다르지 않느냐며 항의하자 처음에는 공신이 될 것이라며 달래보지만 염장이 뜻을 굽히지 않자 꽁꽁 묶어놓기까지 한다. 이후 전열을 재정비하여 청해진을 쓸어버린 뒤 정화의 목숨을 지켜주기 위해 앞을 막아선 염장의 목숨마저 무자비하게 빼앗았다.[6]
일단 사료에서는 딱히 장보고와 대립했다거나 김양이 장보고를 견제했다는 식의 기록은 직접적으로 나와있지 않지만, 진골 귀족 김양과 밑바닥에서 출세한 지방 세력가 장보고가 서로 사이좋게 지냈을지는 미지수다. 더욱이 똑같이 신무왕 즉위의 공로자들임에도 장보고의 딸이 아니라 김양의 딸이 문성왕과 혼인한 것도 그렇고, 여러가지로 볼 때 김양과 장보고가 <해신>의 묘사처럼 서로 알력이 있었을 가능성도 꽤 높은 편. 조선의 국학자였던 안정복이 실제로 이러한 주장을 펴기도 했다. 장보고가 죽을 때 김양이 재상이었으면서도 그를 위해서 변호 한 마디 해주지 않았다면서 "세력과 명성이 자기와 대등했던 장보고를 꺼려서 그런 거 아니었겠냐"고 직설적으로 지적한 것. 다만 장보고 암살 사건이 벌어진 이후 곧바로 김양도 시중 자리에서 해임당하는데 만약 김양이 암살의 주범이었다면 이러한 일련의 행적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거기에 더해 문성왕과 김양의 딸이 혼인한 시기는 842년으로 장보고가 난을 일으키기 4년 전이라는 사실 또한 김양이 장보고 암살의 주범이라는 견해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한다. 이로 인해 그가 주범이 아니라는 반론 역시 만만치 않은 편. 실제로 당시 국왕인 문성왕 때 숱한 반란이 많이 일어났는데 이것조차 반란을 빌미로 한 문성왕의 숙청극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으니 말이다.[7]
실제 명궁이었던 점을 반영해 장보고와도 대등한 활솜씨를 보여주고 왕위쟁탈전 도중에도 직접 검술을 펼치는 모습도 나오지만 실제 역사상 보여준 무예실력에 비해 너프를 심하게 먹어 자미부인 휘하의 간부급 무사 중 실력이 그리 좋지 못한 태봉에게 손쉽게 털리는 모습으로 나온다. 실제 김양은 검술에서 털린게 아니라 배훤백이 쏜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었을 뿐이고 이때도 스스로의 힘으로 포위망을 뚫고 나온 용력을 보였기에 해신에서의 모습은 지나치게 폄하된 면이 크다. 다만 무력을 제외한 다른 능력은 결코 떨어지지 않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염장이 장보고에게 어느 정도 감화되었음에도 장보고를 죽인 건 김양이 군권을 쥔 이상 달벌대전때 처럼 청해진의 1만 군사로 10만 신라 대군을 물리치는 건 불가능하다. 장보고를 죽여서라도 전쟁을 막지 않으면 청해진은 전멸이다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배수빈과 염장역의 송일국은 훗날 < 주몽>에서 고구려의 시조와 개국공신으로 다시 재회하게 된다.
훗날 본작에서 장보고로 나온 최수종이 < 대왕의 꿈>에서 태종 무열왕으로 나오는데, 김양은 무열왕의 후손인지라 장보고로 환생한 자기 선조를 암살하게 사주한 불효막심한 놈이 되는 개그가 성립됐다.
< 와이파이 한국인>에선 이자영이 김양을 맡았다. 작중 초반에 장보고와 일찍 알게 되는 것으로 나오며, 신무왕[8]과 친분이 있는 것으로 나온다. 흥덕왕 사후부터 김우징과 같이 행동하며, 민애왕을 퇴위시키고 신무왕을 옹립하는데 장보고와 같은 공신 반열에 오른다. 신무왕 사후 문성왕 재위 때, 염장과 결탁해 장보고를 죽이는 것으로 나온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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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0만 대군 중 반절이나 죽었고 그 외 다수가 생포되었다고 한다.
[2]
전한 때
한신의 참모였던
괴철이
유방에게 붙잡혀 가서 했던 말이 원전이다.
[3]
여담으로 유방이 자신을 배신한 옹치에게 포상하여 부하들을 안심시켰다는 고사와 구조가 같은데 김양이 이를 알고 써먹었는지는 불명.
[4]
비슷한 처지였지만 왕위를 탐내서 주군을 시해하고 본인이 그 자리에 올랐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은 김명(민애왕)과는 정반대가 되었다.
[5]
물론 경주에 있는 신라 왕, 귀족의 무덤치고는 평균보다 작은 편이지만 경주가 아닌 곳에서는 이만한 크기의 무덤은 보기 힘들다.
[6]
실제로는 이후 염장은 새로운 청해진 대사로 임명되었다.
[7]
하지만 장보고 암살과 청해진 동란이 841년에 있었다는 일본 측 기록을 받아들이면 모순이 말끔하게 해결된다. 846년 암살설은 《
삼국사기》 외에 전거가 없고, 841년 암살설은 당대 기록인 《속일본후기》와 《입당구법순례행기》를 통해 교차검증되기 때문에 현재 국내 사학계에서도 841년 암살을 정설로 보고 있는 것 같다. (
#)
[8]
초반이므로 김우징.
[9]
다른 게 있다면 제안하는 쪽이
염장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