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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윗첨자의 경우에는 독립적인 열전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해당 인물의 열전 속에서 함께 설명되는 인물들이다. | }}}}}}}}} |
1. 개요
素那(? ~ 675년 9월)
소나는 삼국통일전쟁 시기 신라의 장수이다. 삼국사기에 소나(素那; 음차) 또는 금천(金川; 훈차)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2. 상세
《 삼국사기》에서는 "素那(소나) 혹은 金川(금천=쇠내)은 백성군 사산 출신이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이를 통해 고대 한국어를 표기할 때는 마치 오늘날의 일본어처럼 한자를 음차, 훈차하여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대 한국어는 관련 자료가 적은 편인데, 그 중에서도 옛날이라서 보기 드문 고유명사 표기의 몇 안 되는 예시로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많이 소개된다. 이 사람의 진짜 이름은 소나, 쇠내 등으로 추정된다. 소나의 아버지는 침나(沈那) 또는 황천(煌川)이다.앞서 언급하였듯 소나는 신라의 변방이자 당시에 전투가 잦던 최전방인 백성군(白城郡) 사산현(蛇山縣) 출신이었는데, 그의 아버지 침나가 백성군에서 주로 활동한 무장이었다. 침나는 선덕여왕 시절 백제군과 용맹하게 싸워 날아다니는 장수[飛將]라고 불릴 정도로 무력이 뛰어났다. 한 번은 신라군이 백제 정예 군사들에 밀려 후퇴하는 와중 홀로 수십 명을 베며 싸워 이를 물리쳤다고 한다. "침나가 아직 살았으니 백성에 가까이 가지 말라.”는 말이 백제인들 사이에 돌았다고 할 정도였다.
침나의 아들 소나도 무인이 되어 신라 북쪽 국경 지대인 아달성[1]에 배치되었다. 아직 나당전쟁이 끝나지 않은 시기인 675년 9월, 아달성의 태수 한선(漢宣)이 성민들을 삼을 심으러 밭에 보낸 사이에 말갈족[2]이 기습해 들어왔다. 장정들은 대부분 밖에 나가 있어 아달성에는 노인과 어린이뿐이었고 당연히 혼란에 빠졌는데, 소나가 이때 칼을 빼들고 외쳤다.
너희는 신라에 침나의 아들 소나가 있는 줄을 아느냐? 나는 진실로 죽음을 두려워하여 살길을 찾는 사람이 아니다. 싸우고자 하는 자는 어찌 나오지 않느냐!
《 삼국사기》 47권 〈소나 열전〉
그리고
말갈군과
맞서
싸우다가[3] 말갈인들이 그의 기개에 눌려 감히 접근조차 못하고 화살만 쏘아대서, 진시(오전 7~9시)부터 유시(오후 5~7시)까지 막아내다가[4] 끝내
고슴도치마냥 온몸에 화살이 꽂혀 전사했다고 한다.《 삼국사기》 47권 〈소나 열전〉
당시 국왕 문무왕이 크게 감명받아 경위 3등의 잡찬을 추서했다. 이게 정말 대단한 게, 잡찬은 현대 군 계급으로는 '소장' 정도에 해당하며, 원래 진골 귀족만이 받을 수 있는 관등이다. 소나는 차별이 극심한 계급제인 골품제였던 신라 사회에서 진골이 아닌 사람 중 유일하게 장성이 된 인물이었다. 게다가 신라는 경위와 외위를 따로 설치했을 만큼 수도와 지방의 차별이 극심했는데, 소나는 저 멀리 떨어진 구 백제 지역 출신인데도 벼슬로 외위가 아닌 경위를 받은 것이다. 저 혼자서 싸운 게 과장인 것 같아도 일개 지방 출신 무인에 불과한 그가 특별 대우를 받고 수백 년 이후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삼국사기에까지 열전으로 수록될 정도로 기록이 남았으니, 당시 말갈을 상대로 무쌍을 찍은 게 신라의 공식기록으로 남아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소나의 아내는 가림군(加林郡)의 양갓집 딸이었는데, 소나가 아달성에 갈 때 그 지역이 적국에 가까이 있다는 이유로 아내는 집에 남겨 두었다고 한다. 가림군 사람들이 소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조문하니, 아내는 울면서 "남편이 평소 말하기를 '장부는 진실로 마땅히 싸우다 죽어야지 어찌 병상에 누워서 집사람의 보살핌 속에서 죽을 수 있겠는가?' 하였으니, 이제 뜻대로 죽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무왕은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시면서 "아버지와 아들이 나라의 일에 용감하였으니 대대로 충의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하고 그에게 잡찬의 관직을 추증하였다.
사실 신라는 오랫동안 전쟁을 겪었던 만큼 전장에서 장수들이 임전무퇴로 용맹히 싸우도록, 명예롭게 전사한 자와 그 가족은 상당히 보상하는 편이었다. 비슷하게 공을 세우고 죽은 인물로 야이차, 찬덕 등이 있다. 그러나 보통 일반적으로 전사한 자에게 급찬[5], 특별히 높이 주어야 사찬[6]으로 올려주는 정도였고 잡찬[7]으로 올려준 경우는 소나가 유일하다.
3. 기타
소나의 출신지로 기재된 백성군 사산은 백성군의 속현이었던 사산현을 말하는 것으로, 백성군은 현재의 경기도 안성시 일대이고 사산현은 현재의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일대에 해당한다. 이 출신지가 상당히 특이한데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백제의 영역이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지역 출신이라는 침나부터 소나까지 모두 지리적으로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온 신라에 충성을 바쳤다. 물론 소나 가문이 전통적인 신라 지역에서 전쟁을 위해 국경 가까운 곳까지 온 이주민 가문이었을 수도 있고 더 가능성이 높은 경우로는 신라의 정복전쟁에 협력해서 출세하게 된 신흥 호족 가문이었을 수도 있다.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는 중앙집권화가 아직 완전하지 않아 지방 호족세력들이 가문의 이익에 따라 정권을 갈아타는 경우가 흔했다. 참고로 더 거슬러 올라가면 백제에게 복속되기 전의 천안 일대는 나름 세력을 갖췄던 마한 목지국의 영역에 해당했으며 이 때문에 만약 유독 격렬히 백제에 저항했던 목지국 유력자 가문 출신이었다면 백제에 대한 반감이 오랜 시간 뒤에도 남아있었을 수도 있다. 물론 가능성이 떨어지는 데다 확인도 어렵지만.
소나의 부인의 출신지도 특이한 편이다. 가림군은 현재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에 해당하는, 즉 백제의 수도 사비성의 근방인 수도권에 해당하는 지역이다.[8] 당장 소나의 사망 연도인 675년에서 그리 멀지 않은 664년에 백제부흥 및 반신라 항쟁인 사비성 봉기가 있었다. 그런데 반신라감정이 가장 거셌을 지역의 유력한 백제 가문 출신이 비록 전통적인 신라 가문 출신은 아닐지라도 2대에 걸쳐 신라에 충성을 바친 신라 장수와 혼인을 한 것이다. 가림군 사람들이 조문까지 갔다는 걸 보면 소나에 대한 감정이 그리 나쁘진 않았던 걸로 보인다.[9] 삼국시대에도 이미 중앙의 귀족들은 몰라도 호족이나 평민들끼리는 서로 동질성이 상당해졌고, 삼국의 유민의식과 더불어 느슨한 동질의식 또한 만연해 있었음을 확인해주는 사례일 수도 있다.
사산현은 고려 개국 후 직산현으로 개명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독립된 고을로 있다가 일제 강점기에 천안, 직산, 목천 세 고을이 천안군으로 통합되었다.
[1]
현재는 북한에 속하는 강원도
이천군에 해당한다.
[2]
말갈이라 하면
만주,
연해주 지역에 살던 종족이 떠오르기 쉽지만, 삼국시대에는 말갈인들이 강원 북부 및 함경도 남부에도 살았던 적이 있다. 만주의 말갈과 한반도의 말갈이 명칭만 같을 뿐 사실은 다른 종족이란 설도 제기된 바 있다.
위말갈 문서 참조.
[3]
삼국사기 원문에는 다른 병력이 성에 쳐들어온 말갈과 싸웠다는 내용이 없다. 다만 장정들이 대부분 나갔다고 해도 병력이 일부는 남아있었을 테고, 홀로 싸웠다는 언급도 없으니 병력이 한참 밀리는 상황에서 분전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4]
최소 9시간, 최대 12시간 동안 계속 싸운 것이다.
[5]
경위 9등 - 약 소위 정도
[6]
경위 8등 - 약 중위 정도
[7]
경위 3등 - 약 소장 정도
[8]
소나의 집도 거기였다는 걸 보니 소나는 백제 정복전 후 사비성 일대에 주둔군 장수로서 머물게 되면서 거기서 결혼하고 아예 눌러앉은 듯 하다.
[9]
소나의 출신지 때문에 더 그러했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