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4 01:19:35

대무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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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제3대 국왕
대무신왕 | 大武神王
파일:마선구 626호.jpg
<colbgcolor=#000> 대무신왕릉으로 추정되는 마선구 626호 전경.
<colcolor=#fbe673> 출생
(음력)
4년
고구려 국내성
사망
(음력)
44년 10월 (향년 40세)
고구려 국내성
능묘 대수촌원(大獸村原)[1][2]
재위기간
(음력)
고구려 왕태자
14년 1월 ~ 18년 10월 (4년 10개월)
고구려 제3대 국왕
18년 10월 ~ 44년 10월 (2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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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be673> 본관 횡성 고씨 / 해(解)?
무휼(無恤) / 주류(朱留) / 미류(味留)[3] / 막래(莫來)[4]
부모 부왕 유리명왕
모후 왕후 송씨[5]
형제자매 고도절, 고해명
동생 고해색주, 고재사, 고여진
누이 1명
왕후 원비[6], 차비 해씨[7]
자녀 태자 고해우
왕자 고호동, 고궁?[8]
시호 대무신왕(大武神王)[9]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
대주류왕(大朱留王)[10]
별호 북국신왕(北國神王) }}}}}}}}}

1. 개요2. 이름3. 생애
3.1. 왕자 시절3.2. 왕위에 오르다3.3. 정복 전쟁
3.3.1. 부여 정벌3.3.2. 개마국 & 구다국 정벌3.3.3. 낙랑 정벌3.3.4. 신라 침공과 중원 공격?
3.4. 중국 세력과의 관계
4. 후계5. 대중매체에서6. 《 삼국사기》 기록7. 참고 항목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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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의 제3대 군주. 고구려 초기의 팽창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왕으로 유명하다. 고구려에서 태어난 첫 번째 왕이기도 하다.[11]

2. 이름

시호의 뜻이 참 거창한데 풀이하면 전쟁의 신, 큰 무예의 신이라는 의미다. 최씨낙랑국의 군주 최리는 아예 북국신왕(北國神王)이라고 불렀다. 휘는 '무휼'이다.[12]

호와 휘는 여러 가지가 전해져 오는데 유래는 다음과 같다
왕호 출처 시기 비고
대주류왕
大朱留王
광개토대왕릉비 고구려
414년
고구려 공식 기록.
대해주류왕
(大解朱留王)
삼국사기 고려
1145년
《삼국사기》의 기록.
대무신왕
(大武神王)
삼국사기》, 《 삼국유사 고려
1145년, 1281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
출처 국가 비고
주류
朱留
광개토대왕릉비 고구려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시호인 '대주류왕'에서 '주류'가 이름이라는 주장이 있다.
무휼
無恤
《삼국사기》 고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기록.
미류
味留
《삼국유사》 고려 《삼국유사》의 기록.
막래
莫來
위서 북제 위서》 권100 고구려
이 중 무휼은 현대에 와서 발음이 와전된 것으로, 광운식 발음을 적용하면 실제 이름은 무술에 가까워진다. 막래는 세자(世子)를 뜻하는 고구려어 마카리요모(まかりよも)와 어원이 같은 것으로 보이고 후대의 막리지와도 관계가 있어 보인다.

참고로 '무신'(武神)과 대무신왕의 이름인 '막래'(莫來)는 중국 상고음 발음(*ma-Cə.li[n], *mo-Cə.li[n], *mak(a)rək)이 정확히 일치한다. 이를 보면 대무신왕의 '무신'은 대무신왕의 이름인 '무휼', '막래'의 이표기일 가능성이 있어보인다.

그리고 '무신'(武神)과 대무신왕의 이름인 '무휼'(無恤)은 중국 중고음 발음(*mu-shin, *mu-shut 객가음 : *mu-shṳ̀n, *mu-shin, *mu-sut)이 정확히 일치한다.

3. 생애

3.1. 왕자 시절

유리명왕의 장남 도절태자가 요절하고, 차남 해명태자는 자결하는 바람에 3남 무휼이 태자에 옹립되었다.[13]

삼국사기》에 첫 등장한 것은 유리명왕 재위 28년 8월인데 부여 대소왕이 사신을 보내 고구려에게 복속을 명령하자 고구려의 세력이 아직 약한 것을 염려한 유리명왕은 복속하겠다는 회답을 보냈다. 하지만 어린 나이의 무휼은 동부여의 사신을 만나 대소에게 중국 고사 누란지위에서 따온 경고를 남겼다.[14]

유리명왕 32년 겨울 11월에 부여가 쳐들어오자 무휼은 적은 군사로 복병을 써서 학반령 전투에서 부여군을 격파하고 모두 죽였다.

유리명왕 33년 봄 정월에 태자에 올랐는데 이때 나이가 11세였다. 근데 기록이 뭔가 이상하다. 앞에서 32년에 부여군을 대파했다는데 그럼 10세 때 뛰어난 전술로 적을 죽였다는 말이 된다. 다만 알 수 있듯이 11세는 아닌 것으로 보아 이때 대무신왕의 나이는 20~21세로 추정된다. 물론 진짜 10세 때 대무신왕이 소년병으로 참전하고, 왕자인 만큼 직접 전선에서 싸우기보다는 자신의 부하를 통해 부여군을 격파했다고 볼 수도 있기는 하다.

어머니는 고구려의 땅인 다물도의 영주이자 비류국의 전 왕인 송양의 딸이라고 기록에 나오지만 나이 문제와 얽혀 신뢰하지 않는 여론도 꽤 있다. 정확히 말하면 대무신왕의 어머니가 다물후 송양의 딸이라고 했는데 정작 같은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유리명왕 3년에 송양의 딸이 사망한다. 만약 유리명왕 3년에 무휼이 태어났다면 태자일 때 나이는 이미 장성한 30세이고, 왕위에 올랐을 때 나이는 37세이다. 또는 왕후 송씨가 사망했다는 기록 직후에 화희 치희를 받아들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사망 기사는 왕후의 추가 책봉을 정당화하기 위한 조작이라는 해석도 있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유리명왕이 송양의 다른 딸과 다시 결혼해 무휼을 낳았다는 의견을 제기하기도 한다.[15] 하지만 〈 황조가〉에 있는 기록에는 송양의 딸이 아닌 다른 이가 왕후였으므로 연구가 더 필요하다. 앞서 언급처럼 유리명왕의 손자라면 차라리 해석하기가 더 쉬운데 이 경우라면 장남 도절태자의 아들일 가능성이 있거나 송씨가 속한 비류부(후대의 소노부)가 고구려의 왕후족이니[16] 후계자였던 여율이 송양의 딸 또는 손녀와 결혼해서 대무신왕을 낳았을 수도 있다.

반대로 대수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단서가 되는 기록도 있는데 앞서 등장한 유리명왕 28년 8월 조에 따르면...
時 王子無恤 年尙幼少 聞王欲報扶餘言 自見其使曰 我先祖神靈之孫 賢而多才 大王妬害 讒之父王 辱之以牧馬 故不安而出 今大王不念前愆 但恃兵多 輕蔑我邦邑 請使者 歸報大王 今有累卵於此 若大王不毁其卵 則臣將事之 不然則否
이때 왕자 무휼(無恤)은 나이가 아직 어렸으나 임금이 부여에 회답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그 사신을 만나 말하였다.
“나의 선조는 신령의 자손으로서 어질고 재능이 많았다. 그런데 대왕이 시기하여 해치려고 부왕(父王)에게 말이나 기르는 직위를 주도록 참언하여 욕되게 하였으므로 불안하여 피해 나온 것이다. 지금 대왕이 지난 날의 잘못을 생각하지 않고 다만 병사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나라를 업신여기고 있다. 사신은 돌아가 대왕에게 '지금 여기에 알들을 쌓아 놓았으니 대왕이 만약 그 알들을 허물지 않는다면 신은 왕을 섬길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섬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아뢰어라.”
이와 같이 대무신왕이 추모를 '부왕'이라고 칭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대무신왕은 유리명왕과 같은 대수의 인물이 되며 나이 문제도 해결된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부여 관련 기록에 대해 당시의 사실이 아니거나 후대에 첨부되었다고 보는 의견도 많기 때문에 사료는 참고만 해 두는 것이 좋다.

유리명왕 36년 태자로서 국정에 참가했다.

3.2. 왕위에 오르다

서기 18년, 유리명왕이 승하하자 1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르고 재위 3년 봄 3월에 동명왕묘를 세웠고, 가을 9월에 골구천(骨句川)에서 사냥하다가 신마(神馬)를 얻어서 이름을 '거루'(駏䮫)라고 했다.

3.3. 정복 전쟁

3.3.1. 부여 정벌

재위 3년 10월에는 부여의 대소왕이 사신을 보내 붉은 까마귀를 보내왔는데 머리 하나에 이 둘이었다. 처음에 부여 사람이 대소왕에게 바친 것이었는데 어떤 사람이 '까마귀는 본래 검은 것인데 붉게 되었으니 기이한 일이다. 그리고 몸은 둘인데 머리가 하나인 것은 두 나라가 한 명의 왕 아래에 합쳐진다는 의미이니, 부여가 고구려를 차지할 징조가 아닌가' 하자 기뻐서 보내주고 그 말도 알려준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에서는 이를 보더니 ' 검은색은 북방을 뜻하고 붉은색은 남방을 뜻하니 검어야 할 까마귀가 붉다는 것은 천명이 남쪽으로 흐른다는 뜻이고, 또한 상서로운 물건을 부여가 받아놓고 우리에게 줘버렸으니 이제 둘(부여와 고구려)의 앞날을 쉬이 알 수 없겠구나'라고 풀이했다. 대소왕은 그 말을 듣자 크게 후회했다.[17] 남방이 붉은색이라든가, 북방이 검은색이라든가 하는 것은 오행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해석된다.[18]

재위 4년 겨울에 군대를 내서 숙적 동부여를 공격했다. 이때 여러 가지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비류수 가에서 물가를 보니 마치 여인이 솥을 가지고 있는 듯했는데, 가까이 가보니 솥만 있었다. 그 솥은 불을 피우지 않아도 스스로 열이 나서 밥을 지어[19] 군대를 먹일 수 있었다. 나중에 한 장부가 나타나 그 솥은 자신의 누이가 잃어버린 것인데 왕이 찾았으니 자신이 솥을 지고 따를 수 있게 해달라고 하여 '부정(負鼎)씨'라는 성을 하사했다.

이물림(利勿林)에서 잠을 자는데, 밤에 쇳소리가 들려서 밝은 뒤에 찾아보게 하니 금도장과 병기를 얻었으며, 왕은 하늘이 내린 것이라 했다. 길을 떠나려 할 때 북명(北溟) 사람 괴유라는 기인이 나타났는데 키가 9척에 얼굴이 희고 눈에 광채가 있었다. 그는 왕이 정벌을 하러 떠난다니 자신은 부여 군주의 머리를 베어 오겠다고 하여 왕이 따르게 했다. 또 적곡(赤谷) 사람 마로(麻盧)라는 자가 나타나서 왕을 따라서 창으로 길을 열겠다고 하자 그렇게 하도록 했다.

재위 5년 봄 2월에 부여국의 남쪽으로 진군하였는데, 진흙이 많은 땅의 평지를 골라 군영을 만들어 쉬었다. 그때 부여의 대소왕은 온 나라를 동원하여 출전하였으나 군대가 진창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때 괴유가 공격을 개시하자 부여의 모든 군대가 무너지고, 급기야는 괴유가 대소왕의 머리를 참수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왕의 죽음에 분노한 부여의 군대는 쉽게 굴복하지 않고 계속 고구려군을 둘러싸 위기에 빠졌는데, 대무신왕이 하늘에 영험을 빌자 안개가 피어올라 7일간 지척을 분별할 수 없었고, 풀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무기를 쥐여 거짓 군사를 군영에 만들어 놓은 다음 샛길로 군대를 이끌고 도망쳐 나갈 수 있었다. 이때 신마 거루와 비류수에서 얻은 솥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거루는 이듬해 3월에 부여의 말 100필을 거느리고 돌아왔다.

가을 7월에는 부여 군주의 사촌 동생이 부여 사람 10,000여 명과 함께 투항해오자, 그를 왕작으로 봉하여 연나부(掾那部)에 두었다. 이 연나부는 이후 절노부로 바뀌어 대대로 왕후족을 했으며, 고추가라는 지위를 얻는 등 소노부와 함께 계루부 왕권에 버금가는 세력의 2톱을 달린다. 부여 왕의 사촌 동생의 등에 줄무늬가 있어 '낙(絡)' 씨를 하사했다.[20]

3.3.2. 개마국 & 구다국 정벌

재위 9년에는 개마국(蓋馬國)[21]을 정벌하고, 구다국(句茶國)의 항복을 받았다.

3.3.3. 낙랑 정벌

재위 15년, 최리 낙랑국의 항복을 받았다. 호동왕자 낙랑공주의 이야기는 이때의 일화. 이후 호동은 계모의 참소로 자결.

재위 20년에는 후한의 낙랑군을 정벌하여 멸망시켰다. 그러나 대무신왕이 죽기 직전 도로 후한에게 빼앗긴다.

낙랑 정벌 기록이 두 개가 나온다. 낙랑이 두 번 멸망하는 이상한 내용이다. 낙랑국과 낙랑군은 완전히 별개라는 주장도 있고, 연계가 있지만 다르다는 말도 있으며, 같다는 말도 있는 등 말 그대로 온갖 설이 난무한다. 낙랑군, 최씨낙랑국 항목 참조.

3.3.4. 신라 침공과 중원 공격?

삼국유사》에선 42년, 신라에 고구려가 쳐들어왔다는데 《 삼국사기》에는 내용이 없다.

그리고 단재 신채호에게 광무제와 9년간 전쟁을 벌인 임금으로 지목받기도 했는데, 이 또한 《삼국사기》에 기록이 없다. 참고 대충 낙랑을 빼앗고 다시 털리는데 걸린 기간이 7년여 정도이니 이 즈음해서 전쟁을 벌였을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고구려는 유리명왕때 이미 시라무렌 강에서부터 난하에 걸쳐 존재하는 선비족들을 정복한 적이 있었고, 모본왕 다음에 즉위한 태조대왕 때는 10개의 성을 요서 지역에 건설했다. 《후한서》에 고구려가 선비족을 이끌고 한나라를 공격한 기록이 있다는 점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틀렸다고 볼 수도 없는 상황이다.[22] 이 부분만 해도 오래인 떡밥이다.

게다가 민중왕 때에 동해인이 고래를 바쳤다고 하니 동해 부근의 영토를 이미 차지했어야 했는데 역시 《삼국사기》에 없다. 동예 옥저 세력이 고구려에 복속한 흔적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가장 중요한 점은 32년 이후 10년간의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와있지 않다는 것이다.

3.4. 중국 세력과의 관계

재위 11년에는 요동 태수가 공격해왔으나 위나암성에서 을두지의 지략으로 굳게 지켜서 막아냈다. 자세한 내용은 을두지 문서 참고.

재위 15년에는 사신을 파견해 후한에 조공을 바쳤고,[23] 후한의 광무제가 고구려 왕의 호칭을 회복시켰다.

4. 후계

《삼국사기》에 따르면 첫째 왕후 소생이어서인지 일단 그 아들이 태자를 했지만, 대무신왕이 사망했을 때 워낙 나이가 어려서 대무신왕의 동생인지 친척인지 헷갈리는 민중왕이 대신 즉위했다.

5. 대중매체에서

삼국통일전쟁기, 고려, 조선에 비해 기록이 비교적 상세하지 않은 고대의 왕치고는 꽤 드라마틱하면서도 튀는 행적을 많이 남긴 임금인지라 대중매체에서 다루기에 매우 적합한 임금이다. 왕자 시절에 두 형과 한 동생을 잃고, 특히 한 형은 부왕과의 갈등으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는데, 정작 본인 역시 아들을 끝내 죽게 만들었다는 비극의 연쇄라던가, 그리고 신마 거루나 용사 괴유 같은 뭔가 기이한 요소가 군주를 도왔다는 점이 있다거나, 할아버지 때부터 고구려를 괴롭힌 숙적을 전사시킨 점 등 가정 비극에 초점을 둔 묘사로나 옛 선왕 시대부터 이어진 끈질긴 악연을 끊는 영웅담에 초점을 둔 묘사로나 스토리를 짜기 매우 좋은 요소를 갖추고 있고, 시호인 대무신왕이나 휘인 무휼이나 그리고 별호인 북국신왕 등 거창하고 간지나는 이름 때문에 대게는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 만화 《 바람의 나라》의 주인공이다. 그 덕에 게임, 드라마, 뮤지컬까지 나왔기에 고구려 국왕들 가운데 가장 창작물로 조명을 많이 받았다. 바람의 나라는 유럽에서도 꽤 유명한지, 유럽 팬의 코스프레도 있어 어쩌면 유럽에서 가장 많이 아는 고구려 왕일 수도 있겠다. 유리왕의 셋째 아들로 이복형들이 모두 일찍 죽어 태자가 되었다. 청룡을 신수로 둔 비범한 인물로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고 용맹하여 겨우 10살때 부여와의 전쟁에 나가 승리하기도 했다. 아버지 유리왕이 열등감과 병적인 의심으로 여러 아들(무휼에게는 이복형제들)을 줄줄이 죽게 하는 것을 보고, 자신은 절대로 아들을 죽이는 아버지가 되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그러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인 연을 잃어 큰 심적 타격을 받은데다가, 왕이 된 후로 복잡한 정치판속에서 부대끼며 차츰 인간미를 잃게 되고, 연이 낳은 아들 호동의 신수와 자신의 신수가 상극이라는 잔인한 운명까지 겹쳐서, 결국 자기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게 된다.
  • 2008년 KBS 드라마 《 바람의 나라》에서는 배우 송일국[24]이 연기했다. 유년기를 제외한 청장년기를 배우 교체없이 연기했는데 늙어 보이지만 역사와 대비해보면 9세~11세 때 모습인 실존 인물과 묘하게 위화감이 느껴진다. 물론 실제 역사는 철저히 쌈싸먹었는지 태어나자마자 고구려를 멸망시킬 운명을 타고났다고 하여 죽을 뻔한다거나 왕족이라는 본인의 신분을 모른 채로 부여의 비밀 조직에 가담한다던가 하는 극단적인 픽션이 있다.
  • 2009년 SBS 드라마 《 자명고》에서는 배우 문성근이 연기했다. 중년과 노년의 대무신왕으로 나와서 호동왕자의 지지자이자 호동왕자의 정적으로 상당히 이중적인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 신비소설 무》의 주인공 무당 낙빈이 사역하는 신으로 등장한다.
  • 소설 《대무신왕기》에서는 신화 같은 기록에 작가 나름대로 상상해서 개연성을 붙인 것들이 나온다. 대소왕은 죽였지만 전쟁에서 패한 기사의 경우는 아예 대무신왕이 괴유 등과 함께 대소왕만 암살하러 간 거고 이걸 전쟁으로 포장하는 과정에서 부정이나 이물림 무기들을 대무신왕이 지어낸다라든지.

6. 삼국사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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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 부여온조 · 부여다루 · 부여기루 · 부여개루 · 부여초고
24권 「백제 2권 (百濟 二)」
부여구수 · 부여사반 · 부여고이 · 부여책계 · 부여분서 · 부여비류 · 부여계 · 부여구 · 부여수 · 부여침류
25권 「백제 3권 (百濟 三)」
부여진사 · 부여아신 · 부여전지 · 부여구이신 · 부여비유 · 부여경사
26권 「백제 4권 (百濟 四)」 27권 「백제 5권 (百濟 五)」 28권 「백제 6권 (百濟 六)」
부여문주 · 부여삼근 · 부여모대 · 부여사마 · 부여명농 부여창 · 부여계 · 부여선 · 부여장 부여의자
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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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대무신왕 본기〉
一年秋冬十月 대무신왕이 즉위하다
二年春一月 국내성에 지진이 일어나다
二年春一月 대사면을 실시하다
二年春一月 백제인이 투항해오다
三年春三月 동명왕 사당을 세우다
三年秋九月 왕이 신령스러운 말을 얻다
三年冬十月 부여왕이 붉은 까마귀를 보내오다
四年冬十二月 부여를 정벌하려고 출발하여 세 사람을 얻다
五年春二月 부여 정벌에 실패하다
五年春三月 신마 거루가 부여말을 데리고 오다
五年夏四月 부여 왕 대소의 동생이 압록곡에 와서 갈사국을 세우다
五年秋七月 부여 왕의 사촌 동생이 투항해오다
五年冬十月 북명인 괴유가 죽다
八年春二月 을두지를 우보로 삼다
九年冬十月 개마국을 정벌하여 군현으로 삼다
九年冬十二月 구다국이 항복해오다
十年春一月 좌보와 우보를 임명하다
十一年秋七月 잉어를 적진에 보내 포위를 풀다
十三年秋七月 매구곡 사람이 투항해오다
十四年冬十一月 겨울에 천둥은 치는데 눈은 오지 않다
十五年春三月 백성들이 원망하는 구도 등 세 사람을 서인으로 삼다
十五年夏四月 최리의 낙랑을 정복하다
十五年冬十一月 왕자 호동이 자살하다
十五年冬十二月 왕자 해우를 태자로 삼다
二十年 낙랑을 멸망시키다
二十四年春三月 국내성에 우박이 내리다
二十四年秋七月 서리가 일찍 내려 곡식이 피해를 입다
二十四年秋八月 가을에 매화가 피다
二十七年冬十月 대무신왕이 붕어하다

7. 참고 항목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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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제 하백
 
 
해모수
 
유화
 
 
 
부여 왕실 1대
동명성왕
 
 
 
2대
유리명왕
비류 온조
백제 왕실
 
 
 
 
 
 
고도절 고해명 왕녀 3대
대무신왕
4대
민중왕
고여진
 
 
 
고호동 5대
모본왕
고재사
 
 
고익 6대
태조대왕
 
 
 
 
 
7대
차대왕
고막근 고막덕 8대
신대왕
고인고
 
 
 
 
 
 
고추안 9대
고국천왕
고발기 10대
산상왕
고계수
 
 
고박위거 11대
동천왕
 
 
 
12대
중천왕
고예물 고사구
 
 
 
 
 
13대
서천왕
고달가 고일우 고소발 공주
 
 
14대
봉상왕
고돌고
 
15대
미천왕
 
 
 
16대
고국원왕
고무 고림
 
 
17대
소수림왕
18대
고국양왕
 
 
고강 19대
광개토대왕
 
20대
장수왕
고익
 
 
 
 
 
고조다 고승우 공주 고승천
 
21대
문자명왕
 
 
 
22대
안장왕
23대
안원왕
고안학
 
 
24대
양원왕
왕자
 
25대
평원왕
 
 
 
 
26대
영양왕
27대
영류왕
평강공주 대양왕
 
 
고환권 28대
보장왕
 
 
 
 
 
고복남 고임무 고덕남 고덕무 공주
 
부흥
보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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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러나 고구려 왕릉 명칭 가운데 촌(村)이 붙은 경우가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대수촌(大獸村)은 대수림(大獸林)을 잘못 기재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2] 마선구 626호 추정. [3] 일반적으로 '수류(殊留)'를 오기한 것으로 본다. 이 경우 〈광개토왕릉비문〉에 나오는 이름인 '주류(朱留)'와 음운적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4] 위서》와 《 북사》에 나오는, 주몽-( 여달)- 여율의 뒤를 이어 즉위해 부여를 병탄한 왕이다. 막래의 행적이 대무신왕과 일치하므로 막래를 대무신왕으로 보는 설이 있다. 반대로 조선 후기 한치윤의 《해동역사》는 “이른바 여율과 막래는 지금 상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막래는 '모본' 글자가 와전된 것 같다(所謂如栗莫來今未可考而莫來似是慕本之字訛者也).”라는 주장을 실어, 서로 다른 두 설이 양립하고 있다. [5] 비류의 수장 송양의 딸. 《삼국사기》의 기록이지만 연대 논란이 있다. [6] 첫째 왕후, 모본왕의 어머니. 만화 《바람의 나라》에서는 이지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7] 둘째 왕후, 호동왕자의 어머니. [8] 위서 기준. 정확한 세대수는 누락되어 있다. [9] 고려 표기 [10] 고구려 표기 [11] 대무신왕의 할아버지인 동명성왕과 아버지인 유리명왕 부여에서 태어났다. [12] '휼(恤)'은 '근심하다·걱정하다'라는 뜻인데 앞에 無가 붙었으니 '걱정할 일이 없다'는 뜻이 된다. 조선 태종의 처남 중에도 정확히 같은 의미의 민무휼(閔無恤)이 있었다. 흥미롭게도 춘추시대 晉나라의 가신 조씨의 종주 조양자(趙襄子)의 이름자도 뜻은 달라도 음은 똑같이 '무휼'(毋卹)인데 이쪽이나 저쪽이나 나라(단 조양자의 시대에는 나라까지는 아니었다.)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는 점이 같다. [13] 해명이 자결할 당시 대무신왕은 6세였다. [14] 이 부분 때문에 후세의 성호 이익은 해명태자의 일과 연계하여 "해명태자가 황룡국에게 깝쳤다고 죽였다면서 왜 무휼은 안 죽였냐?"라고 유리왕을 비판하기도 했다. 당시 부여는 고구려보다 압도적인 국력을 지닌 강국으로서 동명성왕과 유리명왕 시절에는 부여에게 눌려 지내는 신세였고, 대무신왕 시절 부여와의 전쟁에서 대소왕을 전사시켰지만 고구려도 꽤나 많은 피해를 입었다. 부여와 고구려의 국력은 초기에는 부여가 강했는데 이 흐름이 역전되기 시작한 것이 서기 3세기 말에 벌어진 모용선비 모용외에 의한 부여 침공 때라고 봐야 한다. [15] 만화 《 바람의 나라》에서는 이 설을 채택했다. [16] 아마도 작성자가 서부(연노부/소노부)북부(절노부/연나부)를 착각하여 적은 듯하다. 송양은 왕비족인 북부 출신이 아닌 본래 비류국의 왕으로 비류국은 후에 다물도로 불리고 다시 비류나부(沸流那部)로 불리다가 마침내 연노부(涓奴部)-소노부(消奴部)로 불리는데 고국천왕 시기에 5부체계를 5방위 체계로 바꾸며 서부(西部)로 불리게 된다. 왕비족으로 알려진 건 절노부(絶奴部)-제나부(提那部)로 불리다 5방위 체계가 되며 북부(北部)가 되는 연나부(椽那部) [17] 시대를 막론하고 전쟁을 일으키려면 명분이 필요했는데, 대소왕은 해당 까마귀를 부여가 고구려를 병합할 명분으로 쓰려고 했지만 대무신왕은 이걸 되려 고구려가 부여를 병합할 명분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18] 사방신 운운하면서 도교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해당 시점에서 도교는 종교의 흔적도 보이기 이전이었고, 원시 도교는 황건적 장각이나 장로의 조부인 장도릉 오두미도에서나 시작된다. 오두미도와 장각 이전의 도교의 씨앗은 말 그대로 방술을 말하는 무당과 같은 샤머니즘이나 마찬가지였다. 대신 음양가도 5행설을 주장했으니 이것이 도교는 물론이고 유교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이는 5행상극설을 5행상생설로 갈아엎은 인물이 전한의 대표적인 유학자 동중서, 그리고 이름에 5행설을 집어넣는 것이 현대의 항렬자까지 영향을 준다거나 하는 등 다양하다. 동아시아, 특히 중국에서는 국호·연호·인명 등이 5행설을 벗어나는 경우가 드물다. [19] 이를 두고 한국사 시간에 역사 선생님들이 시대를 앞서간 전기밥솥이라는 드립을 치기도 한다. [20] 반대로 대소왕의 동생[25]은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해두국 왕을 죽이고 갈사수 근처에 나라를 세웠는데 이게 바로 갈사국이다. 갈사국은 태조대왕시기까지 존속하다 첫번째 갈사국 왕의 손자 도두 대에 스스로 고구려에 나라를 바쳐 멸망한다. [21] 국가명이 '개마'이기 때문에 개마고원 일대의 소국으로 비정하는 설이 있다. [22] 이 주석을 붙인 것이 당고종의 태자로 측천무후의 소생인 장회태자 이현이었다. [23] 《후한서》 〈광무제본기〉 건무 8년(서기 32년) 12월자 기사에 "고구려왕이 공물을 바쳤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24] 2006년 MBC 드라마 《 주몽》에서는 주몽 역. 송일국의 연기는 이번에도 뛰어나서 오로지 예언만 믿고 자신을 매몰차게 버린 아버지에 대한 애증, 한 여자를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 친구를 잃은 슬픔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을 버리고 고구려의 임금으로써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야 했던 복합적인 면모를 지닌 대무신왕을 잘 연기해냈다는 호평을 받았다.


[25] 흔히 영포, 충구 등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창작물의 설정으로 《삼국사기》에는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고 금와왕의 막내아들' 이라고 알려져 있다. 금와왕의 막내아들인 만큼 당연히 대소보다는 동생이지만 어쨋든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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