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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155호 | |
<colbgcolor=#315288> 무령왕비 금제 관식 武寧王妃 金製 冠飾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용산동6가, 국립중앙박물관) |
분류 | 유물 / 기타종교공예 / 유교공예 / 의례용구 |
수량/면적 | 1쌍 |
지정연도 | 1974년 7월 9일 |
제작시기 | 백제시대 |
1. 개요
武寧王妃 金製 冠飾.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송산리 고분군에 위치한 무령왕릉에서 1971년 여러 유물들과 함께 출토된 무령왕비의 순금 관식 1쌍.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중이고 국보 제155호로 지정되었다.2. 내용
복원을 완료한 모습.
왼쪽 관식 높이 22.6 ㎝, 너비 13.4 ㎝
오른쪽 관식 높이 29.2 ㎝, 너비 13.4 ㎝
1971년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무령왕비의 금제 관식으로, 유물의 제작연대는 6세기이다. 당시 왕릉에서 관 꾸미개는 모두 4점이 출토되었는데 왕과 왕비의 머리 부분에 각각 2점씩 쌍을 이룬 채로 발견되었다. 왕의 것은 무령왕 금제 관식이란 명칭으로 국보 제154호로 따로 지정되었다.
원래는 발굴 당시 일부분이 파손된 상태였는데 2012년, 발굴 40년만에 보존처리 및 원형복원을 한 것이다. 충청타임즈 : 무령왕비 금제관식 원형 회복
전체적인 제작방법은 무령왕 금제 관식과 동일하게 2㎜ 두께의 얇은 순금판을 두드려 편 후 문양에 따라 오려내는 기법을 사용하였지만, 왕의 것과는 달리 금달개, 영락 등의 장식은 따로 달지 않았다. 그리고 순금으로 이루어진 왕의 것과는 달리 아래쪽 부분은 따로 구리로 된 것을 붙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연화현병 인동당초문 문양은 중국으로부터 유행한 것으로 대표적으로 이보다 앞선 중국 육조시대 전기 하남성(河南省)에서 발견된 고분현실 석문 빗살무늬 석조의 문양이 이 무령왕, 무령왕비 금제 관식과 완전히 똑같이 생겼다. 관식에 사용되는 인동당초문은 계급 사회의 지위를 나타내려는 의도로 시문되는 중국의 전통적 귀족 문양으로, 중국 육조에서 내려온 불교 미술의 영향이 짙다고 할 수 있다. 당시 한반도 남부에 유행했던 중국 문화에 대해 연구해볼 수 있는 자료이다.
특히 이보다 1세기 정도 앞서 만들어진 신라의 금관총 금제 관식, 천마총 금제 관식 등과 함께 한국의 고대 금제 관 꾸미개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 매우 미려하고 호사스러운 형식을 보여주는 유물로, 무령왕 금제 관식과 함께 백제의 순황금 유물 중 최고의 예술성을 갖추었다고 평가되므로, 신라의 각종 금관( 금관총 금관, 황남대총 북분 금관, 천마총 금관, 서봉총 금관, 금령총 금관 등) 및 황남대총 비단벌레 장식 금동 말안장 뒷가리개 등의 최고 위세품들과 함께 한국 고대사에 있어 최상위 예술품으로 손꼽힌다.
6세기 백제의 화려한 금 공예술을 보여주는 왕비의 유물로, 그 화려함은 가히 으뜸이라 할 만하다. 이에 1974년 7월 9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1955년부터 매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하는 백제문화제의 마스코트 중 하나인 '금이'가 이 무령왕비 금제 관식을 모티브로 제작된 것이다. 옆에 있는 짝꿍 마스코트 '동이'는 백제금동대향로를 모티브로 했다. 백제문화제 홈페이지, 백제문화제 상징물
3. 외부 링크
4. 국보 제155호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왕의 관식과 함께 출토된 왕비의 금제 관(冠)장식으로, 모양과 크기가 같은 한 쌍으로 되어 있다.
높이 22.6㎝, 너비는 13.4㎝로 1971년 무령왕릉이 발견·조사되었을 때, 왕비의 널(관) 안쪽 머리 부근에서 포개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금판에 무늬를 뚫어서 장식하고 밑에 줄기를 달았다. 투조(透彫)로 표현된 문양은 좌우대칭을 이루도록 정돈되어 정연한 느낌을 준다. 문양은 중심부의 연꽃받침 위에 놓인 병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덩굴무늬가 있고 병 위에는 활짝 핀 꽃 한송이가 있으며, 중간부터 위쪽의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가 솟아 있는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무령왕릉 안에서 같이 발견된 왕의 관(冠) 장식보다 규모가 조금 작고 구슬 등의 장식이 달려있지 않아 간결한 인상을 준다.
무령왕릉은 백제 25대 무령왕(재위 501∼522)과 왕비의 무덤으로, 벽돌을 이용해 만든 벽돌무덤(전축분)이며,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6세기 전반 백제문화의 수준과 묘제, 사장 등의 일면을 알려주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 가운데 지석(誌石)은 삼국시대 고분 중 최초로 무덤에 묻힌 주인과 만든 시기를 밝혀주는 자료가 되고있다.
높이 22.6㎝, 너비는 13.4㎝로 1971년 무령왕릉이 발견·조사되었을 때, 왕비의 널(관) 안쪽 머리 부근에서 포개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금판에 무늬를 뚫어서 장식하고 밑에 줄기를 달았다. 투조(透彫)로 표현된 문양은 좌우대칭을 이루도록 정돈되어 정연한 느낌을 준다. 문양은 중심부의 연꽃받침 위에 놓인 병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덩굴무늬가 있고 병 위에는 활짝 핀 꽃 한송이가 있으며, 중간부터 위쪽의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가 솟아 있는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무령왕릉 안에서 같이 발견된 왕의 관(冠) 장식보다 규모가 조금 작고 구슬 등의 장식이 달려있지 않아 간결한 인상을 준다.
무령왕릉은 백제 25대 무령왕(재위 501∼522)과 왕비의 무덤으로, 벽돌을 이용해 만든 벽돌무덤(전축분)이며,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6세기 전반 백제문화의 수준과 묘제, 사장 등의 일면을 알려주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 가운데 지석(誌石)은 삼국시대 고분 중 최초로 무덤에 묻힌 주인과 만든 시기를 밝혀주는 자료가 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