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31 17:22:34

효소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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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32대 국왕
효소왕 | 孝昭王
파일:효소왕릉.jpg
효소왕릉 전경.
출생
(음력)
687년 2월[1]
신라 금성
사망 702년 8월 28일[A][3] (향년 15세)
신라 금성
능묘 효소왕릉(孝昭王陵)
재위기간 신라 왕태자
691년 4월 7일[4] ~ 692년 8월 22일[5] (1년 4개월 15일)
신라 제32대 국왕
692년 음력 7월 ~ 702년 8월 28일[A] (10년 1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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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理洪) / 이공(理恭)
부모 부왕 신문왕
모후 신목왕후
형제자매 김융기, 김근질, 김사종[7]
종교 불교
시호 효소대왕(孝昭大王)
골품 진골(真骨) }}}}}}}}}

1. 개요2. 생애3. 효소왕릉4. 일화5. 《 삼국사기》 기록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신라의 제32대 군주. 신문왕 태자이고, 어머니는 김흠운의 딸 신목왕후이다.

중요한 업적을 많이 남긴 신문왕과 오래 재위하며 많은 업적을 남긴 성덕왕 사이에 끼어서 상대적으로 오래 재위하지도 못하고 존재감이 희미하지만 나름 업적을 남기기는 했다.

2. 생애

효소왕은 《 삼국사기》에 생년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는데 <신문왕 본기> 신문왕 7년(687년) 봄 2월에 원자가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효소왕이 태어나던 날 날씨가 매우 어두웠으며 천둥 번개가 많이 쳤다고 한다. 692년 즉위했으니 기록대로라면 6세(만 5세) 때 즉위하여 16세(만 15세)에 죽은 것이 된다.[8] 역대 신라 군주들 중에서 최연소 즉위다.[9] 어쨌든 효소왕은 신문왕의 태자로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당연히 유년기에 즉위한 왕이 친정(親政)을 했다기보다는 모후(母后)나 신하들의 섭정(攝政)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일단 《삼국사기》에 그런 뉘앙스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왕권을 대변하는 중시 자리에 신문왕 시기 공신들이 연이어 임명된 것과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된 황복사 3층 석탑 금동사리함기를 보면 발원자가 효소왕과 신목태후(신목왕후) 명의로 되어 있는 것을 보아 신문왕 시기 공신들의 조력으로 신목왕후가 섭정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효소왕이 즉위한 692년에 좌리방부(左理方府, 형법 법률 담당, 651년 설치)와 우리방부(右理方府, 형법 및 법률 담당, 667년 설치)를 각기 좌의방부(左議方府)와 우의방부(右議方府)로 바꿨는데 효소왕의 이름 '이홍'(理洪)에 '이'(理) 자가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고려 조선 시대에 철저히 지켜졌고, 현대 한국에도 일부 남아있는[10] 피휘(避諱) 문화가 슬슬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좌의방부와 우의방부는 정부 관청 이름이니까 바꿨지만 이외 부분에서는 고려나 조선과 달리 피휘를 철저히 지키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멸망하고, 발해 건국되기 전의 중간기인 효소왕 시대에는 신라 북쪽에 여전히 고구려 잔존 세력이 어떤 나라의 통치도 받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는데 《 삼국유사》에 따르면 693년 3월 국선 부례랑이 원산 인근에서 그들에게 납치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효소왕 시대부터 옛 고구려 남부 영토를 본격적으로 개척하기 시작하는데 훗날 500년 고려 왕조 수도가 될 송악성을 694년에 축성하고, 이것을 신호탄으로 이후 훗날 패서(浿西)로 불릴 지역에 계속 을 쌓고 주민을 이주시켰다.

695년 수도 서라벌에 서시(西市)와 남시(南市)를 설치했다. 이미 지증왕 때 동시(東市)가 세워진 바 있으므로 이제 서라벌에는 3개의 큰 시장이 들어선 것이다. 이는 삼국통일 이후 수도 서라벌의 상업 유통이 크게 발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후속 조치로 서시와 남시를 관리하는 서시전(西市典)과 남시전(南市典)도 설치하고 조세를 담당하는 조부(調府)의 사(史, 서기관) 2인을 증치(增置)했다.

698년 일본의 조공을 받고 699년 화해하여 오랜만에 조공을 재개했다. 이는 성덕왕대 결실을 맺을 당과의 관계 회복의 전조로서 이해된다. 밑의 발해가 건국되자마자 대조영에게 벼슬을 하사한 것이나, 남단덕 묘지명에서 거란과 고구려 유민들의 반란으로 안동도호부가 상당한 타격을 입어 주민들이 일부는 내지로, 일부는 남하해 평양으로 이주한 정황이 보인다는 점, 그 즈음 들어 기존의 원로 중심 중시 인사가 전면 교체되고 상대등 개원 이하 젊은 인사들이 등용되는 등 관료세력의 교체가 보인다는 점[11], 비슷한 시기 망덕사 창건 기사가 들어가 있는 점 등을 들어 불교계 통합, 대당 외교노선 전환을 포함한 전면적인 정책 기조 전환을 선언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출처] 다만 해당 주장에서는 효소왕대 견당사가 단 한차례만 파견된 이유로 소고구려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있기에 주의가 필요하다.

698년 발해가 건국되는데 통일신라는 발해가 건국되자마자 대조영에게 대아찬이라는 벼슬을 하사한다.[13] 이는 발해를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면서도[14][15] 통일신라가 발해보다 위라는 자신감을 나타낸 것이다.[16]

700년 이찬 경영이 반역을 도모하다 살해당했는데 중시였던 김순원이 여기에 연좌되어 파면당했다. 예전에는 이찬 경영의 반역 도모를, 이후 왕비를 배출하게 되는 김순원의 파문을 들어서 전제 왕권에 도전하는 진골 귀족 세력에 대항하여 일으킨 것으로 보았으나 최근에는 당나라와의 관계를 복구하고자 했던 세력과 일본과의 관계를 강화하고자 했던 세력 간의 다툼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17] 신라와 당나라는 나당전쟁 이후 7세기 후반 동안 데면데면한 관계였던 반면 일본과는 교류가 오히려 늘었는데 이 때쯤부터 다시 일본과의 교류가 점점 줄어들고 당나라와는 다시 관계를 회복하기 때문이다.

700년 6월 어린 효소왕 대신 정치를 했을 신목왕후가 세상을 떠났다. 당시 효소왕은 14세에 불과했는데 < 신라 촌락 문서>에 따르면 신라에서 성인으로 여기는 나이는 15세 ~ 16세인만큼 아직 미성년일 때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까지 사망한 것이다.

702년에는 효소왕도 사망하는데 이 때가 15세였다. 고대 사회 기준으로도 일찍 세상을 떠난 편인데 효소왕 역시 아버지 신문왕처럼 치세 10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효소왕은 결혼도 하지 않았고 아이도 없었으므로 친동생인 김융기가 즉위하는데 그가 바로 성덕왕이다.

신라 하대의 혼란을 왕들의 이른 죽음에서 보는 견해가 있는데 그렇다면 신라 중대에도 같은 혼란이 올 위험이 있었을 것이다. 전왕의 이른 죽음으로 다음 왕이 지나치게 어릴 때 즉위하게 되기 때문이다. 신문왕과 효소왕에 이어 성덕왕 역시 즉위시 10대 초반이어서 신문왕 초기 김흠돌의 반역 사건이나 효소왕 시기 이찬 경영의 반역 사건과 같은 국정 혼란이 발발할 것으로 보였지만 다행히 효소왕 시대는 부왕 신문왕이 철저하게 판을 깔아두어 왕권이 가장 안정화된 시대였다. 또한 성덕왕 대에는 본인 자체가 명군이라 8세기 신라는 위기를 벗어난다.

3. 효소왕릉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효소왕릉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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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조양동에 있다. 대한민국의 사적 제184호.

4. 일화

  • 《삼국유사》에 따르면 진평왕 천사옥대의 장식이 실제 임을 간파하고 하나를 연못에 넣어보아 용이 승천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왕이 총명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퍼진 설화로 추측된다. 또 잠시 잃어버렸었던 만파식적을 되찾아 '만만파파식적'이라고 개명시키기도 했다 한다. 사실이라기보다는 설화적 성격이 강한 일화들이지만 왕으로써 내세울 부분이 '총명'이기는 했던 모양이다.
  • 《삼국유사》에서만 전하는 혜통 스님의 일화도 효소왕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 《삼국유사》에 따르면 < 모죽지랑가>의 배경 사건이 되는 호족 익선의 화랑도 모독 사건이 일어나 익선의 아들이 익선 대신 사형당하고, 익선의 고향 모량리 출신 사람들은 전부 연좌제에 걸려 관직과 승직에서 추방된 사건이 있었다. 다만 이 사건이 진짜 효소왕대 일어난 사건이 아닌 신라 중대부터 효소왕때까지 일어난 다양한 사건이 문자화되면서 합쳐졌고, 이것이 죽지랑과 연관되어 전승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왜냐하면 전반부는 분명히 효소왕 또는 그 즈음 일어난 사건으로 추정되지만, 정작 후반부에는 죽지랑이 화랑이 되어 '진덕왕, 문무왕, 신문왕'을 섬겼다고 되어있어 전후의 시간대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원측대사에 대한 부분 등 일부는 일연이 끝에 부기한 것으로 보인다.[출처2] 해당 논문에서는 전반부의 모량리 탄압설화는 부산성 축조시기나 '추화군'이라는 표현을 보아 문무왕~경덕왕 사이, 후반부의 죽지랑 탄생설화는 '도독사'라는 표현의 용례를 고려해 최소 흥덕왕 이후인 것으로 보았다.

5.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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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40권까지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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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효소왕 본기>
一年秋七月 효소왕이 즉위하다
一年秋八月 원선을 중시로 삼다
一年 도증이 당에서 돌아와 천문도를 바치다
三年春一月 신궁에 제사지내고 사면하다
三年 문영을 상대등으로 삼다
三年 김인문이 당에서 죽다
三年 송악성과 우잠성을 쌓다
四年春一月 자월을 정월로 정하다
四年春一月 개원을 상대등으로 삼다
四年冬十月 도읍에 지진이 일어나다
四年 중시 원선이 물러나다
四年 서시와 남시를 설치하다
五年春一月 당원을 중시로 삼다
五年夏四月 가뭄이 들다
六年秋七月 완산주에서 가화를 바치다
六年秋九月 임해전에서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다
七年春一月 체원을 우두주총관으로 삼다
七年春二月 도읍에 지진이 나고 태풍이 불다
七年春二月 당원이 물러나자 순원을 중시로 삼다
七年春三月 일본국 사신이 오다
七年秋七月 도읍에 홍수가 일어나다
八年春二月 살별이 나타나다
八年 당에 방물을 바치다
八年秋七月 동해 물이 핏빛으로 변하다
八年秋九月 동해에서 수전이 벌어지다
八年 미짐이 주운 황금을 왕에게 바치다
九年 인월을 정월로 하다
九年夏五月 경영이 반란을 도모하여 죽이다
九年夏五月 순원이 반란에 연좌되어 파면되다
九年夏六月 목성이 달에 들어가다
十年春二月 혜성이 달에 들어가다
十年夏五月 영암군 태수 제일을 벌하다
十一年秋七月 효소왕이 죽다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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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영
 
 
 
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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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3
유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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昔4
시조 탈해왕
지소례왕 일지왕 태조 성한왕 사요왕의 딸
 
 
 
 
 
朴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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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5
파사왕
석구추 김아도 허루왕
 
 
 
 
朴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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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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昔9
벌휴왕
김수류 마제왕
 
 
 
 
 
 
아도왕 세신왕 이칠왕 김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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눌지왕
파호왕
 
 
김미사흔 金18
실성왕
 
 
 
 
金20
자비왕
습보왕
 
 
김내숙
 
 
 
 
 
 
 
 
金21
소지왕
金22
지증왕
 
 
선혜부인 김물력
 
 
 
 
 
 
 
聖23
법흥왕
입종왕
 
 
김거칠부
 
 
 
 
聖24
진흥왕
김숙흘종
 
 
 
 
 
 
 
 
복승왕 동륜왕 만천왕 聖25
진지왕
 
 
김만명
 
 장인
 
 
 
 
 
 
 
 
 
마야부인
김행의
聖26
진평왕
진정왕 진안왕
문흥왕 김마차
 
 
 
 
 
 
 
 
 
 
 
 
 
 
 
聖27
선덕왕
김천명 비담 聖28
진덕왕
김알천 眞29
태종 무열왕
현성왕 흥무왕
 
 
 
 
 
眞30
문무왕
김인문 무열왕의 딸
신영왕
 
 
 
眞31
신문왕
 
흥평왕
 
 
 
 
 
 
眞32
효소왕
眞33
성덕왕
 
명덕왕
 
 
 
 
 
 
 
 
개성왕
김사소 효상태자 眞34
효성왕
眞35
경덕왕
김주원 眞38
열조 원성왕
 
 
 
 
 
 
 
 
 
眞37
선덕왕
眞36
혜공왕
김헌창 혜충왕 헌평태자 혜강왕
 
 
 
 
 
 
眞39
소성왕
眞41
헌덕왕
眞42
흥덕왕
선강왕 익성왕 성덕왕
 
 
 
 
 
 
 
 
 
 
 
 
眞40
애장왕
헌덕왕태자 ? 眞44
민애왕
眞43
희강왕
眞45
신무왕
眞47
헌안왕
 
 
 
 
 
의공왕 眞46
문성왕
궁예(?)
 
 
 
 
 
 
 
성무왕 ? 眞48
경문왕
혜성왕 문성왕태자 문성왕의 딸
 
 
 
 
 
 
 
선성왕 흥렴왕
박정화 眞49
헌강왕
眞50
정강왕
眞51
진성왕
의흥왕
 
양부 
 
 
 
 
 
 
 
朴53
신덕왕
김의성 김계아 眞52
효공왕
김억렴 신흥왕
 
 
 
 
朴54
경명왕
朴55
경애왕
眞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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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유사》 기록에 근거해서 677년에 출생했다고 보기도 한다. # [A] 음력 7월 27일, 율리우스력 8월 24일 [3] 삼국사기》에서는 효소왕이 7월 27일에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 황복사금동사리함기』에 기록된 효소왕의 기일과 일치한다. 공교롭게도 할아버지, 아버지와 같은 달에 죽었다. 한편 《 삼국유사》 <탑상> -오대산 오만진신조-에서는 16세에 즉위하여 26세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일연이 6세에 즉위하여 16세에 사망한 것을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삼국유사》의 기록에 신빙성을 두고 실제로 26세에 죽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4] 음력 3월 1일, 율리우스력 4월 4일 [5] 음력 7월 2일, 율리우스력 8월 19일 [A] [7] 이 둘은 모두 성덕왕의 동생으로 서술되어 있기는 한데, 둘 모두 하정사로 갈 때만 등장해서 왕제라는 표현이 정말 친동생인지 단순히 왕족을 이르는 수사인지는 다소 불명확하지만, 일단은 성덕왕의 동생으로 보고 있다. [8]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효소왕이 16세(만 15세)에 즉위하여 26세(만 25세)에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신문왕 7년에 태어난 원자가 효소왕이 아니라 다른 왕자라고 보고 효소왕의 실제 출생연도를 677년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존재한다. [9] 효소왕에 이어 2번째로 어린 나이에 즉위한 왕은 상대 최고의 정복 군주 진흥왕(7세, 만 6세)이었고, 대조적으로 가장 최고령에 즉위한 군주는 지증왕으로 즉위 당시 나이가 무려 64세(만 63세)였다. [10] 현대에도 우리나라는 상대방을 이름보다는 직책이나 관계로 부르는 일이 많고 절친한 친구가 아닌 이상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어감상꺼리는 문화가 남아있다. 박 일병, 이 사장, 김 선생, 황 서방 등. [11] 밑의 이찬 경영의 반역 시도에 대해 친당파와 친일파 간의 대립으로 해석하는 것과 연관된다. [출처] 윤태양. "孝昭王代 후기 新羅의 對唐 사절 파견의 의미." 한국문화 0.92 (2020): 53-83. [13] 그러나 신라가 대조영에게 대아찬 벼슬을 수여한 시기는 정확히 언제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렇지만 연구자들은 최치원이 쓴 사불허북국거상표의 내용을 통해 그 시기를 효소왕 재위 후반기로 유력하게 추정하고 있다. [14] 대아찬은 신라 골품제에서 왕족과 똑같은 진골이고, 신라가 신라인이 아닌 외부인에게 진골 대접을 해 준 건 그 외부인이 다른 나라의 왕족급일 때 뿐이었다. [15] 다만 이 인정이 발해를 고구려의 정식 후계자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통일신라는 고구려를 신라가 흡수했다는 입장을 견지했기에, 최치원의 표현을 인용하면 발해는 고구려의 '잔당'으로 간주했다. 고구려 후손이 아닌 건 아닌데 일부 이단인 셈. 그래서 발해는 신라나 당나라와 외교할 때는 고구려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일본과 외교할 때만 고려라고 했다. [16] 두 나라는 옛날 삼국시대처럼 전쟁을 크게 벌어진 않았지만 이런 묘한 자존심 싸움은 이후 200여년간 계속된다. 어느 나라 사신이 당나라에서 더 윗자리에 앉느냐, 어느 나라 유학생이 당나라 빈공과 시험에서 1등을 차지하는가 등등. [17] 김순원은 복권되었는지 이후 성덕왕 효성왕 시대에 신라 정계에 복귀해 활동한다. [출처2] 여성구. "신라 효소왕대의 『삼국유사』 기록 검토 - 기이편 죽지랑조를 중심으로 -." 한국학논총 44.- (2015): 59-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