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6 18:29:23

신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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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c5b356> 고구려 제8대 국왕
신대왕 | 新大王
파일:산성하 전창 36호분 도면.jpg
신대왕릉으로 추정되는 산성하 전창 36호를 그린 도면.
출생
(음력)
<colbgcolor=#fff,#1f2023> 89년
고구려
사망
(음력)
179년 12월 (향년 90세)
고구려
능묘 고국곡(故國谷)[1]
재위기간
(음력)
고구려 제8대 국왕
165년 10월 ~ 179년 12월 (14년 2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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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 고남무
왕자 고발기[5], 고발기[6], 고연우[7], 고계수[8]
시호 신대왕(新大王) }}}}}}}}}
"크도다! 신대왕의 덕택이!"
大哉! 新大王之德澤也!
신대왕이 선정을 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사면령을 내리자 사람들이 기뻐서 손뼉을 치며 외친 말.

1. 개요2. 생애3. 신대왕의 계보 문제4. 평가5. 기타6. 《 삼국사기》 기록7. 대중매체에서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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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 제8대 왕.

휘는 백고 혹은 백구였으며, 왕호 자체가 새로운 군주이다. 제6대 태조대왕과 신대왕의 관계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는데, 《 삼국사기》에는 태조대왕의 이복동생으로, 정사 《 삼국지》에는 태조대왕 궁의 서자로, 《 후한서》에는 태조대왕 궁의 손자이자 차대왕 수성의 아들로 나온다.

삼국사기》에 있는 외모 및 성격에 대한 묘사를 보면 "용모가 영특하며, 성품이 어질고 너그러웠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 시호로 보거나 삼국사기의 평가로 보거나 매우 높은 평가를 받는 군주임을 알 수 있다.

2. 생애

삼국사기》에 따르면, 제7대 차대왕이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채 정적 제거에만 몰두하는 등 폭정을 일삼자 연나부[9] 출신의 명림답부 쿠데타를 일으켜 차대왕을 시해하고, 그의 동생인 고백고를 새로운 군주로 옹립하니 그가 바로 신대왕이었다고 한다. 차대왕 시절 태조대왕 때부터 시작된 정복 사업은 더욱 박차를 가했고 후한 부여와의 쟁패에서 패배한 일도 없던 걸 보면, 차대왕이 무능해서 폐위된 게 아니라 이런 군주들이 흔히 그렇듯 군사적 능력은 만렙인데 정치력이나 친화력이 영 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중국측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태조대왕이 승하하고 차대왕이 즉위한 시점은 《삼국사기》의 146년보다 25년 이른 121년이다. 이에 따르면 차대왕의 재위기간은 121년부터 165년까지 총 45년이 되며,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신대왕 세력이 어떤 이유로 차대왕의 재위 기간 중 약 24년을 태조대왕의 것으로 조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학계에서는 차대왕과 신대왕의 실제 출생 년도가 기록보다 훨씬 낮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신대왕은 태조대왕의 친동생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삼국유사》 <왕력>에
'을사년( 165년) 국조왕(태조대왕)의 나이가 119세였는데, 두 선왕( 태조대왕· 차대왕)이 모두 신대왕에게 시해되었다.'
라는 기록이 있다. 차대왕의 치세때는 폭정을 피해 산골로 숨어 살았다가 명림답부가 차대왕을 시해하고 나서 백고를 안심시킨 후 왕위에 올렸다고 한다. 아무래도 친척 형이었던 차대왕에게 미움을 산 듯하다. 수성(차대왕)이 왕위를 욕심내자 백고(신대왕)가 은근히 간접적인 디스를 했던 적이 있었는데, 반대파에게 가혹한 차대왕이 이걸 그대로 넘어갈리가 없다고 판단했던 걸로 보인다. 왕위에 오른 나이가 《삼국사기》에서는 77세로 나오며, 친척 형인 차대왕처럼 매우 많은 나이에 옹립되었다.
신대왕이 사면령을 반포하다.
"과인은 외람되게도 왕의 친족으로 태어났지만 본디 임금으로서의 덕망이 없었다. 지난날 태조대왕께서 형제 사이에 우애있는 정치를 부탁했으나, 차대왕이 자손을 위해 물려준 계책을 자못 망가뜨렸다. 과인은 피해를 입을까 두렵고 안전하기가 어려워 여러 신료와 백성들을 떠나 멀리 도망쳐 숨었는데, 차대왕이 사망했다는 흉흉한 소식을 듣기에 이르니 다만 마음이 꺾여 매우 슬플 뿐이었다. 어찌 백성들이 즐거이 받들고 여러 대신들이 즉위하라고 권할 줄 생각했겠는가? 그릇되게도 보잘것 없는 몸으로 숭고한 자리에 있게 되니, 감히 편안할 겨를이 없는 것이 깊은 바다를 건너는 것과 같도다. 마땅히 은덕을 베풀어 멀리 이르도록하여 마침내 여러 사람과 더불어 스스로 새롭게 함으로써 나라 안에 대사면을 베풀 수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신대왕조-

신대왕 시기, 정치의 대부분은 국상에 오른 명림답부가 처리했는데, 왕은 명림답부를 신뢰했으며 그가 명재상이라 신대왕의 치세는 대체로 평안했던 것으로 사서는 기록한다. 명림답부가 죽은 이후의 고구려는 신대왕의 친정 체제로 돌입했으나 기록에는 특별한 정치적인 치적이 없는 것으로 나와 있다. 그래도 당시 고구려의 좌보와 우보를 합쳐, 최고 관직인 국상을 만든 걸 보면 후대에 미친 영향이 아예 없는 건 아닌 듯하다.

재위 도중 후한과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뒀는데 그것이 좌원 전투이다. 명림답부가 죽은 이후 신대왕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승하했고, 이후 장남인 고남무가 왕위를 계승했다. 기록에 나오는 아들이 4명이나 되고, 그중 2명이 왕이 되었으나 동생인 연우가 제10대 이 되는 바람에 형인 발기가 이에 동의하지 않아서 형제 간 피비린내나는 골육상쟁이 벌어졌다.[10]

신대왕은 자식복이 영 애매한데, 슬하에 네 명의 아들을 두었으나 차남 발기는 왕위 계승전에서 밀려나 적국( 후한)으로 망명했고 아예 군대까지 이끌고 왔으며 3남 산상왕 연우는 왕위 계승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 그래도 장남인 고국천왕 남무가 명군이었고, 막내인 고계수도 개념인이라 자식농사를 완전히 말아먹지는 않았다.

심지어 자식이 한 명 더 있었을 수도 있다. 《삼국지》에 따르면 차남인 고발기 말고도 숨겨진 리얼 첫째 고발기가 더 있었다는데[11], 이 녀석도 동생처럼 왕위 계승에서 밀려나자 후한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고국천왕의 동생 발기와 묘한 동질감이 느껴지는데, 실제로 여러 기록들을 대조해 보면 숨겨진 첫째 고발기는 기록상의 오류로 추정된다. 왕위 계승 실패 후 적국 망명 스탭을 똑같이 밟은 "동명이인"의 형제가 존재할 리가 없다. 또 한 번 《삼국지》의 병크가

3. 신대왕의 계보 문제

태조대왕, 차대왕과 마찬가지로 고구려 초기 왕계 문제의 중심에 놓인 인물 중 한 명이다. 기년을 인상한 백제, 신라와 달리 고구려는 고고학적 건국 연대가 사서 기록과 거의 일치하기에 세 임금의 나이와 세대 문제에 대해 설이 분분하기 때문이다.[12]

신대왕의 계보 문제는 고재사 태조대왕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53년 대무신왕의 아들 모본왕이 시해되는데, 유리명왕의 아들 고재사는 자신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자신의 7살 아들인 태조대왕을 왕위에 올리고 아내인 부여태후가 섭정을 하였다.[13] 121년 동생/서자인 차대왕이 태조대왕에게서 왕위를 빼앗았고, 148년 차대왕은 태조대왕의 적자 또는 원자인 고막근을 죽이고 막근의 동생 막덕이 자살하며 차대왕의 아들 고추안이 태자가 되었다. 165년 차대왕이 죽고 태조대왕의 동생/서자/손자인 신대왕이 즉위하며, 신대왕은 179년 사망한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태조대왕-차대왕-신대왕의 나이는 모두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어 믿을 수 없음이 중론이다. 태조대왕은 47년생, 차대왕은 71년생, 신대왕은 89년생인데, 비정상적으로 늘어진 수명을 배제하더라도 셋의 나이 차이가 지나치게 많다. 셋의 아버지로 기록된 고재사가 태조대왕 즉위 당시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고사했음을 생각해보면, 차대왕은 몰라도 신대왕은 결코 재사의 아들이 될 수 없다. 때문에 신채호는 중국 사서의 기록이 더 현실적이라 보고 차대왕과 신대왕이 태조대왕의 서자라고 주장했다.

태조대왕의 실제 즉위년 문제도 있다. 태조대왕이 53년에 즉위했다는 삼국사기 기록과 달리, 학계에서는 98년 책성 순수 기사에서 중국이 당시 태조대왕을 "장성"이라 표현한 점을 들어 사실 태조대왕이 70년대~80년대 초 태생이며 실제 즉위 년도가 80년대~90년대 초라는 가설이 있다. 이 경우 모본왕부터 태조대왕까지 30~40년이라는 공위기가 생긴다. 또 77년 10월, "부여가 신기한 사슴과 토끼를 바쳤다."라는 기사가 있는데 태조대왕의 어머니가 부여인이라는 점을 들어[14] 실제로는 부여인인 태후가 이때 태조대왕을 즉위시킨 걸 은유했다는 가설도 있다. 이 경우 태조대왕은 71년생이 되므로 98년 중국이 "장성"이라 표현한 것이 맞아떨어지며(27세), 24년의 공위기가 생긴다. 즉위년 인하 가설을 사실로 가정할 경우 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 전부 실제 나이를 수십 년은 인하해야 하며, 태조대왕을 배제해도 신대왕의 생년은 수십 년 인하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삼국사기 기록대로 차대왕이 24세, 신대왕이 42세 연하가 맞을 경우 차대왕은 95년생, 신대왕은 113년생이 된다.

현재 신대왕의 가계에 대한 학계의 정설은 노태돈 교수의 지적대로 태조대왕의 방계 친척 동생이라는 것이다. 신대왕이 태조대왕의 아들이라면 설령 적자가 아닌 서자일지라도 훗날 고구려인들이 굳이 아들을 동생으로 고칠 이유가 없고,《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조-의 후반부와 -차대왕조-의 기사들은 지나칠 정도로 차대왕을 깎아내리고 있다. 따라서 신대왕은 아예 태조대왕의 직계 혈통이 아니며, 신대왕의 후손인 후대 고구려 왕들이 신대왕의 정통성을 높이기 위해 신대왕을 태조대왕의 동생인 것으로 얼버무려 신대왕 이전 잦았던 집단 지도 체제 및 복수 왕계, 방계 계승을 인위적으로 정리했을 가능성이 높다.[15]

삼국사기》보다 수백 년 앞선 중국측 기록인 《 후한서》에서는 태조대왕이 121년에 사망하고 뒤이어 수성이 즉위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 또한 고구려의 이 시기 삼국사기 기년 의심론에 근거를 더해준다. 다만 신대왕 이후 고구려 왕들이 동명성왕 주몽을 선조로 분명히 명시하고 있는 이상 신대왕이 태조대왕의 친동생이 아닌 방계 친척 동생이더라도 촌수는 그렇게까지 멀지 않았을 개연성이 있다. 사서에 따라 태조왕통의 계보를 잇게 되면 제1대 동명성왕 - 제2대 유리명왕 - 고재사 - 제6대 태조대왕인데, 방계인 신대왕이 태조대왕의 친척 동생이고 주몽의 후손이라면 태조대왕의 6촌 동생이 된다. 현대 한국에서도 4촌인데 40살 가까이 차이 나는 경우가 있는 만큼 6촌 형제 사이인 태조대왕과 신대왕의 나이 차가 40살인 경우는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16][17]

다만 여기서 광개토대왕릉비 17세손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 이르러 란 부분을 놓고 중간에 빠진 고구려왕이 있었다고 하면서 삼국사기 기록[18]에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가 있었으나, 한성백제박물관 학술 컨퍼런스 및 여호규 교수의 고구려 초기 정치사 등을 비롯한 학계에서는, 그것이 광개토대왕 이전 임금들을 단순히 센 것으로 보고 큰 의미는 부여하지 않고 있으므로 여기서 꺼내들기는 어렵다.

애초에 고구려 또한 복수 왕계, 복수 왕계끼리의 생전 교대, 방계 계승을 감춘 백제 및 신라와 마찬가지로[19] 유리왕계 자체가 주몽계와 별도였을 가능성이 높은 이상, 여율, 재사의 가계도를 놓고 억지로 삼국사기상 계보와 연도를 짜맞추려 하는 건 자체로 무리한 시도가 될 수 있다.

노태돈, 신형식, 여호규 교수 등을 비롯한 학계에서 현재까지 신빙성 있게 내세우는 사항은 1. 주몽계와 유리(=여달)계는 실은 별도 왕계일 가능성이 높다. 2. 훗날 고구려의 일원화된 직계 계승 조작으로 광개토대왕릉비 및 삼국사기 기록에서 삭제된 고구려왕 내지는 집단지도체제 내부 지도자가 있다. 2-1. 그 중 하나가 고구려 왕실측 공식 기록에서는 삭제되었으나 중국측에 사신으로 간 고구려 귀족에게서 누출된 여율이다. 2-2. 여율은 주몽계였을 것이며, 도절, 해명 또한 유리(=여달)왕 혹은 유리계와의 권력 투쟁에서 져서 밀려난 인물들이었을 가능성이 있다.[20] 3. 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 모두 같은 주몽계다. 4. 신대왕은 태조대왕, 차대왕의 방계 형제다. 이 정도가 전부다.

일단 신대왕의 정확한 가계가 무엇이든, 후대 고구려/왕조가 수명의 비현실성을 감수하고 유리명왕-고재사-태조대왕 & 차대왕 & 신대왕으로 족보를 편찬하게 만들 정도로 모본왕 사후(53년)부터 신대왕 즉위(165년)까지 고구려 왕위 계승이 상당한 미궁에 있었음을 보이는 인물이다. 그래도 안정적인 직계 계승 왕조 확립이라는 측면에서는 4세기 중반 즉위 백제 근초고왕, 4세기 후반 즉위 유력 신라 나물 마립간보다 훨씬 빠른데, 이 또한 고구려가 백제나 신라보다 상당히 스타트가 빠르고 국력도 강했음을 보이는 징표기도 하다.

4. 평가

신대왕은 시조묘 제사를 통해 추락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할 수 있는 의식이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신대왕대 고구려는 연나부와 소노부와의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면서 안정적인 정국 운영을 주도해 나갈 수 있었던 왕으로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21]

동국통감》은[22] 사람들에 추대하여 왕위에 올랐으나 명림답부를 처벌하지 않은 것은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신대(新大)는 난을 피하여 도망나갔으나, 나라 사람들이 마음이 쏠려 그를 추대하여 왕위에 세웠으니, 의당 답부(答夫)가 시역(弑逆)한 죄상을 먼저 밝혀서, 대의(大義)를 폈어야 할 것인데, 자기를 끌어다 세워준 공을 덕으로 생각하여, 도리어 그를 총애하여 임용하였습니다."

5. 기타

  • 태조대왕을 77년 부여 기사와 98년 책성 순수 기사 당시 '장성'이라 표현된 점을 들어[23] 71년생으로 잡을 경우, 사서의 기록(49년)과 24년의 차이가 난다. 따라서 태조대왕과 24세 연하인 차대왕은 95년생, 89년생인 신대왕은 113년생이라 간주할 수 있다. 그리고 태조대왕은 중국 기록대로 121년에 사망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종합하면 71~121년(50세), 95~165년(70세), 113~179년(66세)가 된다. 태조대왕은 생몰년을 인하하면 삼국사기와 달리 장수한 건 아니지만, 차대왕과 신대왕은 확실히 장수했다. 60대 이상의 장수가 흔한 고구려 후기와 달리 고구려 전기에는 30~40대 정도로 수명이 길지 않은 고구려 왕들이 많았는데, 차대왕과 신대왕은 초기 고구려 왕을 기준으로 하면 장수한 드문 사례이다. 나이를 알 수 있는 동천왕 중천왕이 39세, 46세에 사망한 이후 고구려 중기 고국원왕이 60~70대 산 이후(심지어 고국원왕은 전사했다) 소수림왕~ 광개토대왕까지 20~40대로 단명하다 장수왕97세 산 것이 교차검증되고, 문자명왕 80대 추정, 안장왕 33세 이상, 안원왕 47세 전후, 양원왕 20대 이상, 평원왕 33세 이상, 영양왕 59세 이상, 영류왕 60세 이상, 보장왕 80세 이상으로 수명이 극과 극을 오가는 양상을 보인다. 고구려 왕조는 신대왕의 후손에게 이어지기 때문에, 신대왕 이후 장수한 왕들은 대체로 신대왕의 장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고 볼 수 있다. 대소왕이 의붓동생인 동명성왕의 손자(또는 증손자)인 대무신왕에게 죽을 때까지 살아있었고, 대소왕의 막내 동생인 갈사왕이 이후 갈사국을 세워 손녀가 대무신왕의 차비 해씨가 된 보아 둘은 장수한 것이 확실하며, 고씨와 친족인 백제 부여씨도 살해당하는 일이 줄어든 후기에는 60~70대 왕들이 여럿 출몰하는 것으로 보아 부여-고구려-백제 왕가는 특유의 장수 유전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극단적으로 단명과 장수를 오가는 편이긴 했지만. 근친혼 누적이 적을 때는 장수하는데 근친혼 누적이 심해질수록 점점 수명이 줄어드는 현상이 반복되는 신라/왕조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다.
  • 고고학적으로 백제는 2세기 후반 ~ 3세기 초반에 임진강 일대에 고구려계 적석총 세력이 출몰하고 3세기 중후반 한강 위례성으로 남하해 3세기 초반 먼저 그 일대에 정착해 있던 토돈분구묘제 토착 세력과 연합해 한성백제를 건국했는데,[24] 차대왕 고막근을 죽인 게 148년, 차대왕 명림답부에게 죽고 신대왕이 즉위한 년도가 165년이라 시기가 일치한다. 백제 건국 설화에서 동명성왕 소서노를 강조한 점과 고구려 왕가가 소서노가 아니라 예씨부인의 후손인 점, 비류국(소노부)과 백제와의 관계, 일본서기에서 태자 시절 위덕왕이 자신의 성(姓)이 고구려와 같다고 말한 점에서 주몽과 소서노 사이 후손인 온조왕이나, 혹은 주몽과 소서노의 아들인 온조의 후손이 53년부터 165년까지 3대에 걸쳐 일어난 비정상적인 계승 속 혼란 때문에 고구려를 떠나 남하한 것으로 보인다. 주몽이 고구려 왕이 될 수 있었던 건 졸본부여의 소서노와 결혼한 덕이 컸으나, 우태, 소서노, 비류, 온조의 존재 자체는 물론 옛 송양계의 고구려 건국 기여 내러티브 자체를 통으로 삭제한 고구려 건국 사화의 태도를 보건대[25] 옛 송양 혈통은 물론 소서노의 소생 및 그 후손들은 지속적으로 고구려 왕위계승에서 배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와중에 차대왕이 태조대왕의 적자를 죽이거나 차대왕이 신하에게 살해당하고 방계인 신대왕이 즉위하는 혼란이 일어나자 고구려 지배계층 안에서 불안이 가중되었고, 이에 그와 같은 상황을 더는 견딜 수 없었던 소서노의 후손인 고구려 왕실 방계가 임진강 일대로 남하해 백제 부여씨 왕가로 이어졌다는 가정이 가능하다.[26][27] 차대왕-신대왕 계승 과정에서 일어난 혼란이 백제의 출몰로 이어졌고,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백제 때문에 온갖 고생을 했음을 고려하면,[28] 신대왕이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고구려 입장에서 신대왕의 비정상적인 즉위 과정이 불러온 가장 심각한 부작용이 백제의 등장이라 볼 수 있다. 차대왕이 후대 사서에서 그리 욕을 먹었던 건 신대왕 즉위를 정당화하기 위함이겠지만 이 이유도 있었을지 모른다. 적어도 고구려가 존속하던 당시에는 차대왕-신대왕 교체기가 백제 건국의 원인임을 몰랐을리 없기 때문이다.

6. 삼국사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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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유 · 고구부 · 고이련 · 고담덕 · 고거련 고나운 · 고흥안 · 고보연 · 고평성 · 고양성 고원 · 고건무
21-22권 「고구려 9-10권 (高句麗 九-十)」 23권 「백제 1권 (百濟 一)」
고장 부여온조 · 부여다루 · 부여기루 · 부여개루 · 부여초고
24권 「백제 2권 (百濟 二)」
부여구수 · 부여사반 · 부여고이 · 부여책계 · 부여분서 · 부여비류 · 부여계 · 부여구 · 부여수 · 부여침류
25권 「백제 3권 (百濟 三)」
부여진사 · 부여아신 · 부여전지 · 부여구이신 · 부여비유 · 부여경사
26권 「백제 4권 (百濟 四)」 27권 「백제 5권 (百濟 五)」 28권 「백제 6권 (百濟 六)」
부여문주 · 부여삼근 · 부여모대 · 부여사마 · 부여명농 부여창 · 부여계 · 부여선 · 부여장 부여의자
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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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신대왕 본기>
一年冬十月 신대왕이 즉위하다.
二年春一月 대사면을 행하고 명림답부 국상으로 삼다.
三年秋九月 시조 사당에 제사를 지내다.
三年冬十月 졸본에서 돌아오다.
四年 현도에 속하기를 청하다.
五年 현도 태수 공손도를 도와 부산적을 정벌하다.
八年冬十一月 명림답부의 계책으로 후한의 군대를 물리치다.
十二年春一月 신하들이 태자 책립을 건의하다.
十二年春三月 남무를 태자로 삼다.
十四年冬十月 일식이 일어나다.
十五年秋九月 국상 명림답부가 죽다.
十五年冬十二月 신대왕이 승하하다.

7. 대중매체에서

8. 둘러보기

파일:고구려 군기.svg
고구려 왕실의 계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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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제 하백
 
 
해모수
 
유화
 
 
 
부여 왕실 1대
동명성왕
 
 
 
2대
유리명왕
비류 온조
백제 왕실
 
 
 
 
 
 
고도절 고해명 왕녀 3대
대무신왕
4대
민중왕
고여진
 
 
 
고호동 5대
모본왕
고재사
 
 
고익 6대
태조대왕
 
 
 
 
 
7대
차대왕
고막근 고막덕 8대
신대왕
고인고
 
 
 
 
 
 
고추안 9대
고국천왕
고발기 10대
산상왕
고계수
 
 
고박위거 11대
동천왕
 
 
 
12대
중천왕
고예물 고사구
 
 
 
 
 
13대
서천왕
고달가 고일우 고소발 공주
 
 
14대
봉상왕
고돌고
 
15대
미천왕
 
 
 
16대
고국원왕
고무 고림
 
 
17대
소수림왕
18대
고국양왕
 
 
고강 19대
광개토대왕
 
20대
장수왕
고익
 
 
 
 
 
고조다 고승우 공주 고승천
 
21대
문자명왕
 
 
 
22대
안장왕
23대
안원왕
고안학
 
 
24대
양원왕
왕자
 
25대
평원왕
 
 
 
 
26대
영양왕
27대
영류왕
평강공주 대양왕
 
 
고환권 28대
보장왕
 
 
 
 
 
고복남 고임무 고덕남 고덕무 공주
 
부흥
보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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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산성하 전창 36호 추정 [2] 정사 《삼국지》 [3] 《후한서》 [4] 《삼국사기》 [5] 산상왕 때 왕위계승분쟁을 일으켰던 발기와 동일인물인데, 김부식이 산상왕에 대응되는 중국 측 기록의 이이모를 고국천왕으로 착각해 별개의 인물로 적혔다. [6] 차남. [7] 삼남. [8] 사남. [9] =절노부=연내부=제나부=북부 [10] 장자계승 원칙은 선왕의 장자가 임금이 되는 것이 원칙으로서 사실 고국천왕에게 아들이 없는 상황이라면 어차피 방계라는 점에선 똑같은 그 밑의 동생 누가 계승하더라도 장자계승 원칙을 어기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당연한 얘기로 동생에게 왕위를 빼앗긴 형이 기분 좋을 리가 없어 분란이 발생한 것이다. [11] 이렇게 되면 고국천왕 고남무가 첫째가 아니라 둘째가 되며 형도 발기, 첫째 동생도 발기... 발기 패밀리가 된다. [12] 백제는 2세기 후반 임진강 유역에 고구려 적석총 세력이 정착했다 3세기 중후반 한강 위례성으로 남하해 토돈분구묘제 토착 세력과 연합해 한성백제를 건국했고 사로국은 한 특정 세력으로 위계체제가 편성되는 게 2세기 후반이다. 그런데 둘 다 기원전 1세기에 건국했다고 조작했다. [13]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왕위를 고사했으면서 고작 7살 아들을 앉힌 걸 보면 실제 이유는 따로 있던 걸로 보인다. 순치제의 즉위 과정과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는 가설도 있다. [14] 부여태후라는 명칭은 부여씨라는 뜻이 아니라 부여인이라는 뜻이다. [15] 고구려 태조대왕과 신대왕 王系에 대한 재검토 - 초기 王系의 복원을 통한 왕실교대와 국내천도 시기의 탐색 - [16] 신라의 소지 마립간 내물 마립간의 장남 눌지 마립간의 장손이자 내물 마립간의 장증손이었으나, 내물 마립간의 차남인 복호의 손자 즉 6촌 형인 지증왕의 자식뻘일 정도로 나이 차가 많이 났다. [17] 친척 동생 설을 채택할 경우 신대왕의 3남인 산상왕에 대하여 태조대왕의 증손자라고 서술한 중국측 기록이 충돌하는 건 여기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백제와 고려의 경우에서 그랬듯 중국 측이 기년 파악은 정확해도 계보도는 엉성하고 틀린 경우가 잦아서 그것만 신뢰하기엔 어려운 형편이기 때문이다. [18] 삼국사기에 나온 계보대로라면 광개토대왕은 동명성왕의 13세손(12대손)이 된다. 동명성왕 - 유리명왕 - 고재사 - 신대왕 - 산상왕 - 동천왕 - 중천왕 - 서천왕 - 돌고 - 미천왕 - 고국원왕 - 고국양왕 - 광개토대왕'''(13세손) [19] 시공간이 한국 고대 삼국 및 일본과 완전히 다른 4~10세기 동유럽 슬라브-게르만 연합 정권들 또한 90년대부터 지금까지 활성화된 고고학 및 사서 교차 검증 연구 결과, 거의 똑같은 행동을 한 것으로 드러난다. 고고학 자료 및 로마 제국, 프랑크 왕국, 신성 로마 제국, 동로마 제국 등의 사서와 교차 검증해본 결과, 이들이 따로이 인위적으로 편찬하여 한 조상에게서 시작해 아버지에서 아들로 직계 계승했다고 밝힌 공식 사서와는 달리, 실제로는 복수 왕계, 복수 왕계끼리의 생전 교대, 방계 계승 등을 했던 것으로 드러난다. [20] 사실 권력 투쟁에서는 패배했으나 제거당하기엔 너무 강해 귀족층으로 내려앉은 이전 방계 왕가나 교대 계승 왕실은 나름대로 독자적인 전승 자료를 갖고 있기 마련이며, 당연한 얘기로 아무리 권력이 강하고 잔인한 왕실이라한들 이런걸 죄다 색출해서 말살할 수는 없다. 백제의 경우 이걸 견디고 살아남은 전승이 비류계 건국 사화와 구태 전승이다. 고이왕이 너무 업적이 큰데다 비류계가 대단히 오랫동안 왕위를 이어왔기에, 대놓고 비류와 소서노의 업적과 존재를 깎아내리는 온조계 전승을 추종하는 근초고왕계 임금들마저 그런 전승들을 근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신라의 경우는 박씨 족단과 석씨 족단이 비록 왕위 계승에서는 밀려났을 망정 세력이 강하고 역사도 오래되어, 명백히 백제의 비류계보다도 상대적인 비중이 컸다. 때문에 나물 마립간 이래로 확고히 집권한 김씨 족단이 아무리 힘이 강했다한들 본인들 선조인 성한왕을 박혁거세의 윗자리에 놓을 수는 없었고, 당연한 얘기로 백제나 고구려처럼 왕실 관련 전승과 계보를 조작하지는 못하였다. 신라본기의 계보도와 각 임금별 기사가 고구려, 백제보다 유독 정확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21] 고구려 新大王의 즉위와 시조묘 제사 親行 [22]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890416&cid=62135&categoryId=62281 [23] 고대에서 '장성'이라는 표현은 주로 20대에 쓰던 말이다. 71년생일 경우 98년 당시 27세가 된다. [24] 기리영 전투의 결과로 임진강 유역이 완전히 대방군 영역으로 확정된 게 원인으로 추정된다. 임진강 유역 다른 마한 소국들처럼 그냥 위나라 군현 에게 복종하기로 했다면 옮겨올 이유가 없으나, 백제국은 다른 길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시기에 낙랑 혹은 대방 출신 조선인들에 의해 충주 금릉동 마한 소국이 건국된 것도 의미심장한 사실이다. 한편 삼국사기상 기사로는 고이왕이 포로를 반환하고 사죄했다고 되어 있으나 고고학적 하남위례성 천도 시점보다 전인 데다가 그 당시에 백제 군주가 고이왕일 가능성 또한 거의 없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면 기년은 246년 직후가 맞지만 당시 군주는 개루왕 혹은 초고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25] 다만, 이 비슷한 행동은 훗날 온조계 왕실도 비슷한 방식으로 하게 된다. 비류의 건국 기여를 부정하고, 소서노의 이름을 삭제하면서 가계도만 남겨 얼버무렸으며, 적국인 고구려의 건국 시조 주몽을 부각하는 황당한 내러티브 삽입에 온조의 역할만 강조하고 있다. 고구려 건국 설화와 마찬가지로 우태의 존재를 생략함 또한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26] 백제 대성팔족 중 하나인 '부여인' 해씨(解氏)가 이때 온조-초고왕계와 함께 남하한 고구려인으로 추정되는데, 해씨는 부여의 왕성(王姓)에서 유래된 고씨와 부여씨의 종가지만 백제 해씨는 고고학적으로도 위치상으로도 부여에서 남하한 게 아니라 고구려에서 남하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부여인'이라 서술된 점과 해씨라는 성을 고려할 때 백제 해씨는 졸본부여와 연관이 있었으며, 온조-초고왕계가 소서노의 후손이 맞다면 소서노를 매개로 한 인연이 있어 같이 남하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27] 사실 고구려 고씨가 해씨의 한자식 표기라는 점과, 부여가 멸망한 뒤 부여 왕족이 해씨가 아닌 여(餘)/서(徐)씨를 썼고 이게 백제 부여씨의 1자 축약 표기와 동일하다는 점에서 부여 왕가의 분가인 고구려 왕가와 고구려 왕가의 분가인 백제 왕가와 대성팔족 해씨가 본질적으로 전부 성을 공유했음을 알 수 있다. [28] 고국원왕 근초고왕에게 살해당한 것이 대표적이다. 근초고왕은 초고왕계로 주몽의 후손이 맞다는 것이 정설임을 고려하면 엄연히 친족 살해다. 이후 개로왕이 고국원왕의 죽음을 두고 중국에다 고인드립을 쳤다가 이를 알게 된 장수왕이 81세에 친정 나가 개로왕을 죽이고 한성백제를 멸망시켰지만, 백제는 웅진-사비로 남하해 생존에 성공하며 마지막까지 발목을 잡게 했다. 오히려 가까운 친족이었기에 서로 대립이 극심해졌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이유만은 아니고 낙랑-대방인들의 고구려 비토 정서가 생각보다 강해 차라리 백제를 선택하는 경향도 이유의 일부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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