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틀:대한민국의 국보 1~30호, version=27, uuid=b16ef97f-b363-494a-ab2a-e95ccd5f503f,
title2=틀:대한민국의 국보 31~60호, version2=23, uuid2=979147df-3a26-481f-b049-2bed6c206bdc,
title3=틀:대한민국의 국보 61~90호, version3=18, uuid3=a651288c-6ac5-4be6-aabd-d4ff8ce28b2d,
title4=틀:대한민국의 국보 91~120호, version4=16, uuid4=47b78863-c197-4fb3-8fa6-911be58d2f63,
title5=틀:대한민국의 국보 121~150호, version5=18, uuid5=38233d15-3cf9-4c93-833c-94c06a6fbf8b,
title6=틀:대한민국의 국보 151~180호, version6=15, uuid6=edf3cf60-9adb-4a8f-8ee0-0b7fbc07c52f,
title7=틀:대한민국의 국보 181~210호, version7=13, uuid7=dc5f6abf-c5c1-4679-b79e-a752e027eb8b,
title8=틀:대한민국의 국보 211~240호, version8=15, uuid8=0da4ae8e-4b56-4578-9135-01ed7dddf02a,
title9=틀:대한민국의 국보 241~270호, version9=13, uuid9=98999a90-809a-452b-9fd0-6721c558ff35,
title10=틀:대한민국의 국보 271~300호, version10=12, uuid10=d3cf8eb4-7dea-45c4-8db8-f764102672c0,
title11=틀:대한민국의 국보 301~330호, version11=21, uuid11=654db38a-ea8b-426b-a33e-245918ddd995,
title12=틀:대한민국의 국보 331~360호, version12=14, uuid12=6bc2ec27-8f76-40cf-9ef0-c2d80032b65e)]
|
|
<colbgcolor=#315288> |
|
소재지 |
|
분류 |
|
수량/면적 |
|
지정연도 |
|
제작시기 |
|
지정해제일 | 1996년 8월 31일 |
[clearfix]
1. 개요
고고학계와 대한민국 해군의 흑역사로 남은 발굴 조작 사건.범인은 해군 황동환(黃東煥, 해사 22기) 당시 대령 및 수산업자이자 유물발굴단에 민간탐사용역으로 참여한 홍무웅(洪武雄), 골동품상 겸 발굴단 자문위원 신휴철(申休哲)로, 이들은 1992년 경남 통영군 한산도 해저에서 거북선에 장착되었다고 알려진 총통을 인양했다고 보고하여 화제가 되었다. 해당 총통은 불과 17일만에 국보로까지 지정되기에 이르렀으나 후일 광주지방검찰청 순천지청 지익상 검사[1]가 수사하던 뇌물죄 사건에서 관련 증언이 나오면서 조작이었음이 드러났다. 이에 문화재관리국은 1996년 총통을 국보에서 해제하였다. 국보 168호였다가 중국산 도자기로 밝혀져 해제된[2] 백자 동화매국문 병, 278호였다가 상대적으로 가치가 떨어져 격하된 이형 좌명원종공신녹권 및 함[3]과 함께 국보로 등록되었다가 해제된 세 건 중 하나다.
2. 경위
1992년 8월 18일 해군사관학교를 중심으로 조직된 ' 충무공 해전 유물 발굴단'은 경상남도 통영군 한산도 문어포 서북방 460 m 수역 해저에서 조선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총통을 인양했다.조사 결과 총통의 포신에는 " 만력 병신년(1596) 6월 일 제조하여 올린 별황자총통(萬曆丙申六月日 造上 別黃字銃筒)",[4] "귀함( 거북선)의 황자총통은 적선을 놀라게 하고, 한 발을 쏘면 반드시 적선을 수장시킨다(龜艦黃字 驚敵船 一射敵船 必水葬)"는 명문이 있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귀함(龜艦)이라는 글귀는 이제까지 기록으로만 전해질 뿐 실물로는 전하지 않는 거북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역사학계와 고고학계는 단번에 흥분의 도가니에 빠지기에 충분했으며 발굴한 지 겨우 17일이 지난 9월 4일 문화재청은 이 황자총통을 ' 국보 제274호 귀함별황자총통'으로 지정했는데 아무리 임진왜란 당시의 유물로 보인다고 해도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등록된 것이었다. 비슷하게 문화재가 잊혀 있다 현대에 '발견'된 다른 사례와 비교해 보면 백제를 대표하는 무령왕릉의 황금 유물들도 그 가치는 당연히 국보로 지정되어야 마땅하다는 데는 이미 발견 첫 날부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의 대발견이었지만 1971년 발굴 이후 약 3년이 지나 1974년 9월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한편 1973년 발굴한 천마총의 신라 금관도 당연히 국보 지정 확정이 당연한 중요 유물이었지만 5년이 지나서야 지정되었다.
이렇게 아무리 출처가 명확하고 문화재적 / 역사적 의미가 중요한 유물이라도 충분히 검토를 한다면 최소한 몇 년은 지나야 국보가 될 수 있다. 그런데 겨우 17일 만에 국보로 지정된다는 것은 비상식적으로 이례적이었다. 문화재전문위원 현장답사 등 절차를 생략했으니 당시 한 문화재위원이 작성했다는 200자 원고지 5매 분량 평가서가 국보를 평가하는 유일한 근거가 되었다. 당시 언론은 이순신의 유물이 나왔는데 빨리 국보 지정 안 하고 정부는 뭐하느냐고 보도했는데 이순신이라는 이름값에 휘둘려 질 낮은 가짜 유물을 제대로 된 검증절차도 없이 졸속으로 넘겨 버린 것이다.
국보가 된 황자총통은 진해시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었다. 해군은 이후 이를 바탕으로 실물복원은 물론, 포격시험까지 실시하기에 이르렀으며 포신에 새겨진 일사적선 필수장(一射敵船 必水葬)은 해군 전체의 슬로건이 되었다.[5] 게다가 1992년이 임진왜란 400주년이었기 때문에 전국적으로도 관심이 엄청나게 집중된 것은 물론, 대한뉴스에서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38톤급 소형 탐사정 한 척과 운영요원이 불과 30명인 초미니 발굴단으로서는 믿기 어려우리 만큼 큰 업적을 올린 것이기 때문에 발굴단장 황동환 대령(해사 22기)은 보국훈장 삼일장을 받았다.
3. 범죄 인지와 수사 결과
그런데 별황자총통이 발굴된 지 4년이 다 되어 가던 1996년 5월 광주지방검찰청 순천지청 지익상 부장검사는 수산업자 홍무웅을 조개 채취 허가와 관련된 뇌물 사건으로 조사하던 중 홍씨로부터 "황동환 대령에게도 돈을 줬는데, 그로부터 국보 별황자총통은 가짜란 말을 들었다."는 이야기를 접했다. 검찰은 총통을 발굴했던 황동환 대령을 은밀하게 불러 조사했지만 황 대령은 "나도 그런 소문을 듣긴 했는데, 해군의 명예도 있고 하니까 대충 덮어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홍무웅의 말이 사실무근이라고 화를 벌컥 내면서 명백한 진품이니 조사해 보면 다 나온다고 당당하게 나와야 했건만 황씨의 태도는 누가 봐도 수상했다. 당연히 검찰은 이 말을 그냥 넘기지 않고 증거를 잡기 위해 수사에 착수했다.[6] 수사와는 별도로 황 대령을 다시 소환해 자백을 유도했지만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두 달이 지난 6월 중순에야 황 대령은 결국 사건의 전모를 실토했는데 홍무웅을 통해 골동품상 신휴철이 가지고 있던 총통을 사서 바다에 빠뜨렸다가 마치 정말로 발굴한 양 건져올렸고 이 과정에는 해사 박물관장 조성도 대령[7]도 관여했다는 것이었다. 6월 18일 대한민국 해군이 이 사실을 공식발표하자 학계는 물론 전 국민이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총통을 판 신씨의 집에서 제작시기를 알 수 없는 총통 13점과 글씨를 음각하는 도구들이 발견되었는데 체포된 신씨는 며칠 뒤 사위와 함께 총통을 만들고 글씨를 새긴 후 그 위에 화공약품을 부어 1년간 부식시켰다고 자백했다. 심지어 조선시대 유물도 아니었다는 수사결과가 나오자 해군과 문화재청은 개망신을 피할 수 없었다.
신휴철은 가짜 별황자총통 외에도 모조 총통, 모조 갑주, 모조 측우기 등 40여 종을 만든 혐의로 구속되었다. # 대한민국 전통 화약무기연구계의 대표적 인물인 채연석 교수의 저서 《우리의 로켓과 화약무기》에도 전체 이름이 다 나온 것은 아니지만 채연석 교수와 있었던 일이 나오는데 당시 채연석 교수가 그와 그가 가진 총통을 보고 잠시 설렜으나 뭔가 미심쩍어했다고 나오며 이후 이 글의 주제인 총통 위조 사건이 등장한다.
1996년 8월 30일 문화재위원들은 별황자총통을 국보에서 해제했고 국보 제 274호는 영구결번 처리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문화재의 과학적 전수 조사와 국보 등 지정 절차 개선이 이루어졌다.
4. 의혹
사실 발굴 당시부터 유물을 두고 이상하다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여럿 있었다. 금속으로 만든 총통이 400년 가까이 바다에 잠겨 있었다면 당연히 표면이 부식되어야 했지만 발굴(?)된 총통의 상태는 지나칠 정도로 양호했다. 보통이라면 녹으로 덮여 글씨는 알아볼 수도 없어야 정상이었을 텐데 별황자총통에 새겨진 글씨는 금방 새긴 듯 너무나 선명했다.총통의 상태가 수상할 정도로 좋은 것은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총통에 새겨진 문구에도 조선시대에는 사용하지 않는 단어가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당장 그 유명한 귀함황자...필수장의 글귀가 그 예.
- 함( 艦) - 오늘날 해군에서 대체로 전투에 쓰이면서 일정 규모 이상의 주력 함선에는 '전함', '순양함', '구축함' 등 배 함(艦)자를 사용함이 일반적이지만 이는 한반도가 근대화하면서 일본식 한자어를 차용하면서부터로, 당대에는 조선[8]이고 일본[9]이고 모두 배 선(船)자를 사용했다.
-
적선(敵船) - 왜란 당시 조선에서는 일본군을 대적하는 상대인 "적(敵)"이 아니라 "도적(盜賊)"할 때 사용되는 한자를 써서 "적(賊)"으로 규정하였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단어들이 그냥 한자에서 유래한 조어로서 별다른 뉘앙스 없이 사용되지만 옛날에는 결코 그렇지 않았는데 한 글자 한 글자가 확실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적(賊)"이라는 용어의 사용에 대한 규정은 《맹자》 양혜왕편에 등장하는데, 그에 따르면:
"인(仁)을 해치는 자를 적(賊)이라 하며, 의(義)를 해치는 자를 잔(殘)이라 한다."
賊仁者 謂之賊 賊義者 謂之殘
즉, "적(賊)"은 원래 해친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고 양혜왕편에서 맹자는 그 단어들을 사용하여 인(仁)에 어긋난 행위를 하는 사람을 해치는 사람/해로운 사람 = 적(賊), 의(義)에 어긋난 행위를 하는 사람 = 잔(殘)으로 규탄한 것이다. 따라서 "잔혹"과 같은 단어들은 이후에 조어가 된 것이다. "의를 해치는 혹독한 행위"를 "잔혹"이라고 한 것. 마찬가지로 "도적"도 그냥 물건을 훔치는 사람을 일컫는 일반적인 용어가 아니라 "남의 것을 빼았아 인을 해치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빼앗고 훔치는" 것은 왕위, 권력 등 정당한 소유자의 것을 억지로 빼앗아 찬탈하는 급의 큰 행위를 뜻했기 때문에 원래 "도적"이란 그냥 노상강도 같은 것이 아니라 좀 더 커다란 악당을 뜻하는 것이었다. 거기서부터 일반적인 도둑놈, 강도 등에도 "도적"이라는 말이 점점 가벼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전쟁이 발생하였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대등한 두 당사자간의 각자의 뜻과 명분이 있는 싸움이라면 그 상대에 대해서는 "대적하는 상대방=적(敵)"을 사용했으나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어떠한 명분도 없이 뜬금없는 배신행위로 이웃나라간의 인의를 저버린 패악한 무리로 보았기 때문에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전쟁을 벌이는 당사자가 아닌 "의(義)와 인(仁)을 저버린 잔적(殘賊)"으로 규정한 것이다. 즉, "남의 나라를 훔치려는 이 도적놈들!" 같은 의미로 '賊'으로 규정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인의를 저버린 패악무도하고 흉악한 무리, 동등한 입장에서 싸우는 전쟁의 당사자조차 못 되는 쓰레기 같은 최악의 말종으로 공식적으로 규정힌 것이다. 그만큼 조선 조정의 커다란 분노가 담긴 규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의 문서에서는 대체로 일관되게 일본군을 "賊"의 무리로 분류했다.
실제로 이러한 인식은 전쟁 중에도, 이후에도 명분론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조선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일본군의 행위를 "의를 저버린 배신행위", "이유도 명분도 없는 난데없는 무도한 행위"로 거론하였으며 심지어 전쟁 와중에 조선에 항복하는 김충선과 같은 항왜들도 바로 그 "의"의 문제를 거론할 정도였다. 즉, 사용하는 한자는 예나 지금이나 같다고 할지라도 오늘날과 과거는 서로 해당 단어에 가해지는 무게, 의미, 용법 등이 다르기 때문에 한 번 조정에서 "賊"으로 규정했다면 공문서와 같은 곳 혹은 그에 버금가는 중요성을 지니는 기념문구 등에서 섣불리 다른 낱말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즉, 당시의 '프로토콜'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한 이유로 해당 유물에 "적(敵)"이 사용되었다는 것이 큰 의아함을 불러일으켰다. 위조범들이 어느 정도 한자나 한문을 안다고 해도 이러한 자세한 부분까지 검증이 가능한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지점 등을 밝혀내는 것이 사료비판의 주된 목적 중 하나다. - 사(射) - 현대에는 ' 사격' 등 화포류를 쏠 때도 사 자를 쓰지만 이는 근현대에 일본에서 유입된 것이다. 사(射)라는 단어의 뜻은 <주례>에서 일컫는 육예(六藝)[10]중 하나로 막연히 "뭔가를 쏘는 행위"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활을 쏘는 행위"를 의미했다. 그래서 당시 사는 화살을 쏠 때 썼으며 화약무기를 썼을 땐 '방(放)'이라 하였고[11] 이는 당시 일본에서도 전혀 다르지 않았다.[12] 그런데 후대에 총기가 보편화되고 총포류에 기반한 군대가 나오자 구체적으로 '활'을 지칭하는 의미가 빠지고 보편적으로 '쏜다.'는 뜻으로 변했다.
- 수장(水葬) - 葬이라는 한자가 들어간 이상 당대의 장례법에 수장이 있었는가의 여부가 검증되어야 하는데 조선은 신체발부 수지부모가 중요 도덕관 중 하나였던 유교가 국가 이념이었던지라 매장만이 합법적인 장례법이었다. 다만 승려들이 행하는 다비식, 장지가 멀어서 운구하기 힘들 때 하는 화장, 전사자나 전염병으로 죽은 이들의 시신을 처리하는 화장은 예외적으로 허용되었다. # 이런 예외 사례 이외의 화장이나 수장 등은 조정에서 철저히 금지하고 처벌했다.[13] 더구나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적을 물에 빠뜨려 죽인다는 의미에서 "수장시킨다"는 말은 말하자면 알종의 빈말, 비유다. 즉, "물에 빠뜨려 죽인다"는 것을 "물에 장례를 지내 준다"는 조롱이나 비웃음이 섞인 비유로 사용하는 건데 이는 사람들끼리 문어체로 주고받는 대화에서나 사용될 법한 용례고 기념문구 등에 사용될 만한 용례가 아니다. 더군다나 오늘날도 그렇지만 조선시대에는 오늘날 이상으로 장례라는 것은 경건한 것이자 예를 갖춰야 하는 엄숙한 것으로 취급받았다. 따라서 "적을 몽땅 장사지내주마!" 같은 비속어적 비유법, 욕지거리 등에서 사용될 수는 있어도 기록으로 남는 문구에서는 적을 경건하게 "장(葬)" 해 줘야 할 이유가 없다. 특히 위에 언급된 것처럼 그 적이 "적(敵)"조차도 아닌 "적(賊)"에 무슨 "장(葬)"이 있다는 말인가?
이와 같은 언어학적 고증은 사료를 비판하는 여러 가지 방법 중에서도 대단히 중요하다. 언어학적 고증으로 위조임을 밝혀낸 서양의 대표적인 사례로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서(기진장)가 있는데 교황이 서로마 황제를 임명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이 있음을 천명하고 교황권이 황제권보다 우위에 서 있음을 명시했다는 이 문서는 15세기에 활동한 이탈리아의 인문학자 로렌초 발라가 위조임을 밝혀내었다. 4세기에 쓰인 문헌 자료와 비교하여 당대에는 용례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라틴어 단어가 잔뜩 들어갔음을 확인하여 위조라고 결론내렸다.
즉, 만약 정말 조선시대 유물이었다면 '귀함황자 경적선 일사적선 필수장(龜艦黃字 驚敵船 一射敵船 必水葬)'이 아니라 대충 '귀선황자 경적일방 필침적(龜船黃字驚賊 一放必沈賊)' 정도의 맥락으로 적혔을 것이며 이러한 문구를 새기는 통례적인 습관, 양식에 따라 4자씩 4줄로 이루어진 형태를 띠었을 것이다. 나름 문학 매니아들인 조선에서는 저런 식으로 운율을 맞추지 못하는 '한마디'는 크게 미숙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말 진품이었다면 "귀선황자 / 경적일방 / XXXX (주로 수사적 구문) / 필침잔적" 같은 4/4/4/4 16자로 맞춰서 새겨넣었을 것이 분명하다.[14]
게다가 총통의 성분을 분석해 보니 아연이 무려 8.06%나 포함되었다는 결과가 나왔다. 아연은 열에 약하기 때문에 별황자총통을 실제로 무기로 썼다면 총통이 화약의 열을 버티지 못하고 녹아 버릴 수준이었다. 화공약품을 1년간 부어 인위로 부식시켰으니 저런 수치가 나왔을 수도 있지만 이는 총통을 발굴한 해군사관학교 측이 총통 발굴 이후 기본적인 시료 조사조차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무언가 수작이나 외압, 은폐가 없이 정상적으로 신중히 연구하고 절차를 밟았다면 처음부터 위조 사실을 쉽게 밝혀낼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충무공 이순신의 후예들을 양성한다.'고 자처하면서 유물 발굴을 주도한 해군사관학교는 물론, 유물을 정확히 검증하지도 않고 졸속으로 국보로 지정한 문화재위원들 모두 학문적 정합성 및 연구/고증기간을 무시하고 치적 쌓기에만 정신이 팔린 결과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발굴조작 사건으로 역사에 남았다. 당시 국보 지정 심의과정에 참가한 문화재위원 중 군사유물 전문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사실상 해군의 설명만 믿고 국보로 지정한 것이다. 객관적인 연구방법론을 무시하고 딴 생각하는 비전문가들이 정책을 주도하는 데 제동을 걸지도, 감시하지도 않으면 어떤 식으로 나라의 역사에 오명을 남기는지 보여준 사례다.
결과적으로 신안 해저유물 발굴 등으로 쌓아올린 해저유물 발굴사에 씻을 수 없는 불신을 안긴 사건이 되었다. 2012년 11월에 진도 앞바다에서 진품 승자총통 유물이 인양되었을 때도 이를 쉽게 믿지 않고 의구심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정도였다.
5. 국보 제274호(지정해제)
※ 이 귀함별황자총통은 해군 이충무공해저유물발굴조사단에 의해 1992년 8월 경상남도 통영군 한산면 문어포 서남쪽 해저에서 발굴 인양되었다. 우리나라 국방과학기술문화재 화포 연구 사료로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어 1992년 9월 4일 국보 제274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진품이 아닌 모조품으로 밝혀져 문화재적 가치를 상실하여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친 뒤 1996년 8월 31일 지정 해제되었다.
6. 외부 링크
[1]
전라북도
김제시 출신. 사법연수원 19기로
우병우
박근혜 정부 전 민정수석과 동기이며 검찰에서 같이 사직했다. 現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
[2]
원나라 시기의 백자이긴 하지만 그 외에는 중국 본토에서도 흔할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자기 역사에 아무 영향도 없었다.
[3]
기존에 보물로 지정된 동일한 물건이 있어 격하하여 재조정했다.
[4]
별황자총통은 조선 후기에 제작된 대형
황자총통이다.
[5]
별황자총통이 조작된 유물임이 드러난 이후로도 문구의 의미만 따진다면 해군과 아주 어울리기 때문에 해군에서는 이 문구를 계속 사용했다.
2012년 기사
[6]
해당 건은 지 부장검사가 당시
유창종 지청장에게 보고를 올렸는데 유 지청장은 문화재에 조예가 깊었던 사람이었던 만큼 보고를 받은 직후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미술상을 통해 관련자의 신상을 알아보는 등 직접 수사를 지휘했다고 한다.
[7]
발각되기 전인 1993년에 사망했다.
[8]
거북선,
판옥선,
조운선 등
[9]
세키부네,
아타케부네 등
[10]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
[11]
임진왜란을 다룬 역사매체물에서 "방포하라"라는 대사가 나온 이유가 이것이다.
[12]
일본에서도 원래 우테(射て)는 '활을 쏴라.'는 의미였고, 포를 쏠 때는 하나테(放て)라고 구별해서 표현했다.
[13]
대명률직해 200조-喪葬 "其 從 尊長 遺言 將 屍 燒化 及 棄置水中者 杖一百".
[14]
비슷한 사례로 이순신의 검에 새겨져있는 문구들이 있다. 해당 검이 진짜 이순신의 것이었는지에 대한 논쟁은 있으나 오늘날보다 명백히 앞선 옛날에 제작된 것은 분명한데 소위 "쌍룡검"으로 알려진 것에는 "鑄得雙龍劍 千秋氣尙雄 盟山誓海意 忠憤古今同" 20자가 5/5/5/5로 맞춰져있다. 그 외에 통칭 "쌍수도"로 알려진 두 자루의 검에는 각각 "三尺誓天山河動色"와 "一揮掃蕩血染山河"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두 자루가 한 셋트로 각 8자씩을 사용해서 4/4 + 4/4 형식을 맞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