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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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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건립된 통일전(統一殿)의 기념비.[1]

1. 개요2. '삼국통일' 이란 개념은 성립하는가?
2.1. '신라통일론'의 전개2.2. '신라통일론'을 부정하는 여러 설
2.2.1. 고려시대의 인식 - 고려의 진정한 통일2.2.2. 남북국시대론2.2.3. 후기신라론2.2.4. 삼국불성립론
3. 삼국통일 전쟁은 언제부터 시작하였나?
3.1. 4세기 후반설3.2. 6세기 중엽설3.3. 중국 통일제국의 등장에서 찾는 설3.4. 642년설
4. 전쟁의 서막
4.1. 남북조시대의 종결과 수나라의 탄생4.2. 고구려의 반응4.3. 백제의 움직임4.4. 신라의 움직임4.5. 고구려-수 전쟁의 결과
5. 또 다른 서막
5.1. 당나라의 성립과 팽창5.2. 영류왕의 유화책5.3. 대야성의 참극5.4. 연개소문의 정변5.5. 연개소문과 김춘추
6. 제1차 고구려-당 전쟁
6.1. 신라의 사신과 당의 전쟁 준비
6.1.1. 신라, 백제에 대한 당의 압박
6.2. 설연타의 움직임6.3. 신라와 백제의 움직임
7. 국제전(國際戰)
7.1. 각자의 사정
7.1.1. 고구려의 입장7.1.2. 신라의 정변 - 비담의 난
7.2. 김춘추의 움직임
7.2.1. 김춘추의 왜국 방문7.2.2. 김춘추의 당나라 방문7.2.3. 백제의 입장7.2.4. 당나라의 입장7.2.5. 왜국의 입장
8. 백제멸망전
8.1. 백제 내부의 혼란8.2. 나당연합군의 진격8.3. 백제 조정의 대응8.4. 황산벌 전투8.5. 사비성 함락과 백제의 멸망
9. 백제부흥운동과 2차 고구려-당나라 전쟁
9.1. 백제부흥운동의 시작9.2. 노도처럼 번지는 부흥군의 기세, 고구려의 지원공격9.3. 2차 고구려-당 전쟁과 유인궤의 전략
9.3.1. 왜국이 고구려를 도우려 했다?
9.4. 백제부흥군, 패배하다
9.4.1. 복신의 사정9.4.2. 부여풍의 사정
9.5. 주류성 공략전과 백강 전투9.6. 에필로그
10. 고구려멸망전
10.1. 연개소문의 사망과 후계자 구도10.2. 남생의 반란10.3. 평양성은 불타오르고10.4. 고구려 유민들의 에필로그10.5. 말갈족의 행보
11. 고구려부흥운동12. 나당전쟁13. 삼국통일전쟁 연표14. 대체역사
14.1. 고구려가 통일했다면?14.2. 백제가 통일했다면?
15.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창작물들
15.1. 영화15.2. 드라마15.3. 게임, 만화15.4. 소설
16. 관련 세력17.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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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三國統一戰爭

한국 고대 삼국시대 말기, 고구려, 백제, 신라의 대결과 그로 인한 신라의 삼국통일과정, 그리고 이 과정 속에 중국 통일 제국들과 일본, 북방 유목민족, 넒게 보면 티베트에 이르기까지 얽힌 전쟁, 전투 외교에 대한 총괄적인 문서.
“과인의 시대는 운이 어지러울 시기에 속하고 때는 다투어 싸우던 때였다.

서쪽을 정벌하고 북쪽을 토벌하여 능히 영토를 안정시켰고 배반하는 자들을 치고 협조하는 자들을 불러 마침내 멀고 가까운 곳을 평안하게 하였다. 위로는 조상들의 남기신 염려를 위로하였고 아래로는 부자의 오랜 원한을 갚았으며, 살아남은 사람과 죽은 사람에게 두루 상을 주었고, 중앙과 지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균등하게 벼슬에 통하게 하였다.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었고 백성을 어질고 오래살게 하였다.

세금을 가볍게 하고 요역을 살펴주니,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들이 풍족하며 민간은 안정되고 나라 안에 걱정이 없게 되었다. 곳간에는 곡식이 언덕과 산처럼 쌓였고 감옥에는 풀이 무성하게 되니, 혼과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았고 관리와 백성에게 빚을 지지 않았다고 말할 만하다. 스스로 여러 어려운 고생을 무릅쓰다가 마침내 고치기 어려운 병에 걸렸고, 정치와 교화에 근심하고 힘쓰느라고 다시 심한 병이 되었다.

운명은 가고, 이름만 남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이제 갑자기 긴 밤으로 돌아가는 것에, 어찌 한스러움이 있겠는가?"
문무왕의 유언. 《 삼국사기》 권 제7 신라본기 제7

"옛날엔 조그마했던 가, 이제는 장하게도 한 집이 되었다."[2][3][4]
최치원, 지증대사적조탑비문(智證大師寂照塔碑文)

한국사에서 가장 거대한 영향력을 끼친 사건 중의 하나.
노태돈,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9

한국사에 있어서 삼국시대의 삼국이라고 하면 위에 쓴 대로 고구려, 백제, 신라를 말하지만, 사실 엄밀히 따지면 부여, 가야 등을 제외한 삼국만이 남아있던 시대는 562년~660년 뿐, 고작 98년이다. 그러나 이 수많은 국가들 중 율령제를 통해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한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세 나라뿐이였고 6세기까지 잔존한 마한이나 가야계열 소국들은 역사 흐름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 피동적인 성향의 군소 정치체에 불과했기에 삼국시대라는 단어 자체는 타당성이 높은 편이다.[5]

그리고 바로 이 시기, 완성된 중앙 집권 국가인 삼국은 그 이전보다 훨씬 치열한 규모로 전쟁을 벌였고, 이는 결국 상대 나라의 멸망과 분열로 이어져 삼국시대의 종말, 그리고 통일신라 혹은 30년 뒤에 세워지는 발해와의 남북국시대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결과가 나오게 된다.

삼국통일전쟁은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된 삼국의 사회적 변화와 국가적 발전의 귀결인 동시에, 동아시아 국제전의 면모를 띠었던 전쟁이었다. 삼국 외에 탐라나 중국의 , 과 일본의 왜국(倭國)이 직접적으로 참여했으며, 돌궐, 철륵(鐵勒), (奚) 등 북아시아 유목종족이 당군의 일원 등으로 동원되어 참전하였다. 거란 말갈의 일부는 고구려에, 일부는 당에 가담하여 전투하였다.

그리고 몽골 고원의 유목민 국가인 설연타(薛延陀)는 직접 개입하여 한반도 혹은 만주 지역에서 전투를 벌이지는 않았지만, 고구려와 연결하여 당에 대항하는 정책을 취해, 오르도스(ordos) 방면에서 당과 전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직접 군대를 파견하여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토번(吐蕃)의 발흥은 이 전쟁의 추이에 바로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이처럼 삼국통일전쟁은 가히 파미르 고원(Pamir Plat) 이동 지역 대다수의 나라와 종족들이 직·간접으로 관계된 국제전이라 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 각국의 정세 변동은 직·간접적으로 크든 작든 삼국통일전쟁의 진행에 영향을 미쳤다. 임진왜란, 원말명초[6]와 더불어 동아시아 대전이라 불리기에 충분한 국제 전쟁.

이 삼국통일전쟁 과정은 한국사에서 매우 많이 논의되었던 연구 주제이고, 세세한 부분에 대한 논의는 물론이고 심지어 기본적인 개념 설정에서부터 국내외 여러 학자들이 논쟁을 벌이고 있다.

2. '삼국통일' 이란 개념은 성립하는가?

구체적으로 삼국통일전쟁에 관한 그간의 논의를 살펴보면 많은 경우 논지 전개의 기저에는 ' 민족'이라는 화두가 깔려 있고 그것을 둘러싸고 다양한 시각이 교차하고 있다. 그것은 '삼국통일' 개념이 성립할 수 있는지를 둘러싼 논란으로 집약되어 표출되고 있다. 비단 대한민국 학계 만이 아니라, 남북한 학계 간, 한국 학자와 외국 학자들 간의 상이한 역사 인식의 틀을 보여주고 있다.

국내외 학계에서는 삼국통일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널리 사용되지만, 동시에 그것은 성립하지 않는 개념이라는 인식이 뿌리 깊게 퍼져 있다. 후자는 다시 그 안에 여러 갈래의 시각이 있다. 그 하나가 민족주의 사학의 일부 입장에서 신라의 통합을 삼국통일이라 볼 수 없다는 주장이라면, 다른 한 주장은 민족주의적 시각을 비판하는 입장에서 삼국통일 개념은 그 전제와 사실 파악이 잘못되었다고 강조한다.

생각해보면 신라의 삼국통일과 고려의 삼국통일을 비슷하게 보기도 하지만 양상은 매우 다르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그전까지 한 번도 같은 나라 안에 있어본 바 없는 민족, 문화, 언어 모든 것이 비슷한 세 민족을 한 국가 안에 있게 한 획기적인 현상이었다.[7] 한편 고려의 삼국통일은 이미 신라가 미리 짜두었던 한 국가 체계 안에서 함께 지내봤지만 결국 별도의 국가 정체성이 완전히 불식되지 않은 결과로 짜개진 국가를 다시 그러모아 통일한 것이기에, 비록 완전한 통합은 완수해냈을망정 신라가 해낸 첫번째 통일과는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다. 다만 신라는 융화에 실패하고 고려는 성공한 결과가 달라지지 않음 또한 명심해야겠다.[8]

한편 근래 중국 학계에선 중국 고구려사 시각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은 성립할 수 없는 그릇된 가정이라고 강변하고 있다.[9] 일본에서도 (신라, 백제, 고려, 조선, 한국 등의) 반도사와 (고구려, 발해 등의) 만주사라는 두 분류로 나누어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하는 사관이 한때 유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 극우를 제한 현대의 일본 학계에서는 발해는 좀 애매하게 볼지언정 고구려의 한국사 귀속을 부정하진 않는다.[10]

따지고 보면, 삼국통일을 둘러싼 이런 상이한 주장들은 전문적인 학자들간의 논의를 넘어, "한국인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는 역사인식의 차이"를 반영하는 면이 있다.

2.1. '신라통일론'의 전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였다는 주장을 처음 제기한 것은 당대의 신라인들이었다. 삼국을 통일하여 한 집안을 이루었다는 삼한일통 의식이 그것이다. 이런 의식은 7세기 종반에 등장하였다.

신라 조정은 668년 평양성을 공략한 후 곧이어 고구려 유민들이 일으킨 반당적 성격의 고구려부흥운동을 지원하였고, 고구려 유민 집단을 금마저(오늘날의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에 안치하여 괴뢰국인 보덕국을 만들고, 고구려 유민들이 직접 왕으로 추대한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였다. 이 '고구려'는 684년에 해체되었고, 고구려 왕가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안승과 함께 신라에 완전 흡수되었다. 그리고 백제의 주민과 지역은 669년부터 벌인 당과의 전쟁을 통해 완전히 병합되었다. 이는 신라 조정이 삼국을 통합하였다고 자부하는 데 있어 객관적 요소가 되었다. 이들 유민들은 통합 초기 20여년간은 대문의 반란과 같이 다소간의 충돌도 있었지만, 680년대쯤부터는 신라 영역 내의 옛 고구려인과 백제인들도 신라의 삼한일통 사상에 순응하여 이후 200여년 동안 구삼국 유민의식에 기반한 다툼은 거의 사라진다.

중대 신라 왕실은 삼한일통을 그 정통성의 근저로 삼아 강조하였다. 신문왕 대에 당의 사신이 무열왕의 시호 태종 당태종과 같다며 바꿀 것을 요구하자, 무열왕이 일통삼한(一統三韓)의 위업을 달성하였음을 들어 거부한 사건이나, 혜공왕대에 행한 5묘제에서,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은 '백제와 고구려를 통합한 대공을 세운 임금'이라며 태조 격의 불천지주(不遷之主)(영원히 제향을 받드는 임금)로 종묘에 모신 것은 그런 면을 말해준다.

삼한일통 의식은 주요 정책에도 반영되었다. 신라 조정은 전국을 9주로 나누었는데, 소백산맥 이남 지역을 신라 영역으로 설정해 3개 주를 설치하고, 옛 백제 지역에 3개 주, 한강 유역 등을 고구려 남계라고 하여 3개 주를 두었다. 그리고 왕 직속의 중앙 군단인 9서당(九誓幢)을 만들면서 고구려인으로 3개, 백제인으로 2개, 신라인으로 3개, 말갈인으로 1개 서당을 편성하였는데, 이 또한 같은 의식이 배경이 되어 행해진 조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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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신라인들의 삼한일통 의식은 다름 아닌 발해의 등장으로 중대한 도전에 직면하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합했다 선언한 지 30여년이 지난 698년, 옛 고구려 영토 중에서도 머나먼 동북쪽 동모산에서 세워진 발해는 건국 직후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통교하였다. 이에 신라 조정은 대조영에게 대아찬(大阿飡) 관등을 수여하였다. 이 대아찬은 신라의 17등 관등에서 제5등에 해당하는 진골에 준하는 대우를 한 셈인데, 당시까지 신라가 발해의 실체를 몰랐을 리가 없었다. 발해는 고구려의 후신임에도 고려란 국호를 대외적으론 쓸 수가 없었는데, 당연히 당과 신라의 강력한 견제 탓이었다. 물론 발해가 이런 뼈아픈 견제를 좋아했을 리가 없었다. 현대에서도 중화민국이 그 국호를 제대로 국제사회에서 쓸 수 없는데 좋아하던가? 다만 이것 때문에 남북한이 발해사를 자국사로 주장하기가 어려워지기도 했지만, 바로 그랬기에 신라의 삼국통일 주장이 적어도 국제무대에서 더욱 강하게 인정받았음도 인정해야 한다.

또한 신라는 당나라의 요청으로 발해를 공격하여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다만 혹한으로 인해 상당수 병사들이 얼어죽는 등 피해가 심해서 전투 없이 도중에 회군, 두 국가 간에 뚜렷한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이에 대해 신라군이 애초부터 제대로 싸울 생각이 없어 보여주기식 명분만 세운 후 적당한 핑계를 대고 도중에 철수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양국은 시종일관 대결만 하지 않고 적잖은 교류가 있긴 있었다.

발해는 때문에 일본과의 교섭에서만 자국을 고려라 칭하였는데, 이는 발해가 적어도 국제 사회에서는 당과 신라의 강력한 주장에 밀리고 만 것이다. 이렇게 국력이 만만찮은 발해를 온갖 외교적 수단으로 고려를 자칭하지 못할 정도로 찍어눌러 인정받은 삼한일통 의식이, 신라 지배층에서 계속 견지되었음은 신라 하대의 금석문(金石文) 등을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지난날 우리 태종대왕께서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기 위해……무력과 예로서 삼한을 일통할 때에……
월광사(月光寺) 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圓朗禪師大寶禪光塔碑)[11] 中.
과연 여·제(麗濟)를 크게 무찔러서 재앙을 제거하도록 하며, 무기를 거두고 경사를 칭송하게 하니, 옛날엔 조그마했던 세 나라가 이제는 장하게도 한 집이 되었다.
지증대사비(智證大師碑)[12] 中.

어느 면에서는 발해가 고구려 계승 의식을 표방하여 신라의 삼한일통론에 도전하고, 당나라에서의 쟁장(爭長) 사건[13] 등으로 신라를 압박함에 따라, 신라 지배층에서는 신라통일론을 더 강조하게 되었고, 아울러 발해를 고구려의 직접적 후신이 아닌 말갈족의 나라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나타났을 수 있다.[14]

이후에도 고려시대에 간행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신라의 삼국 통합 사실을 긍정하고 있으며, 이 중 삼국사기는 관찬 정사로서 고려왕조의 공식 사관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15세기 조선(朝鮮) 초기에 편찬된 동국통감(東國通鑑)은 변화된 면을 보여주었다. 동국통감에서는 고조선에서 비롯하는 일원적인 역사 체계를 정립하여 삼국 유민 의식 청산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구체적인 사서의 구성에서 삼국기 다음에 신라기를 설정하여 삼국 병립기와 문무왕대 이후의 통일기를 명확히 구분하였다. 즉, 신라의 삼국통일을 긍정하고 그 의의를 뚜렷이 인식했던 것.

신라통일론을 긍정하는 동국통감의 구성은 그 뒤 조선 시대의 각종 사서에 기본적으로 이어졌다. 18세기의 조선 후기의 대표적 사서인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도 '신라통일도'를 실어 신라통일론을 이어갔으며 발해사는 수록하기는 했지만 부록처럼 취급하였다. 통일 이후 신라를 정통으로 처리한 것은 조선 후기 강목체 사서에서 공통적으로 보인다. 발해고를 편찬한 유득공처럼 신라통일론을 어느 정도 부정하는 목소리가 조선 후기에 등장했지만 동사강목의 예에서 알 수 있듯 유득공의 의견은 실학자들 사이에서도 주된 의견은 아니었고 남북국시대론은 현대에 들어서야 크게 확산되었다.

신라통일론은 20세기를 거치면서 부정하는 견해도 있었으나 전근대 인식에 대한 예우 차원 및 표면상으로 통일을 목적으로 하는 남북한관계로 인한 정치적 이유 등으로 꾸준히 견지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남한의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와 다수의 개설서에서도 신라의 삼국통일론을 취하고 있다. 남북국시대론을 취함과 동시에 신라의 '삼국통일'을 긍정하는 서술을 하는 경우도 있으며 21세기를 들어서는 이 쪽이 교육 과정에서 주류에 가깝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일제강점기 등 민족주의 사학이 심화되던 시절에는 통일론 비판이 강했었다.

이에 대한 재반론 및 통일론의 논리는 다음의 링크들을 참고하자.

삼국통일전쟁의 역사적 의의 (上)
삼국통일전쟁의 역사적 의의 (下)
과연 삼한일통 의식은 신라 지배층의 허위의식인가? - 上
과연 삼한일통 의식은 신라 지배층의 허위의식인가? - 下 노태돈 교수
비판에 대한 노태돈 교수의 답변
신라의 백제통합론에 대한 비판 나당전쟁연구의 이상훈 교수

2.2. '신라통일론'을 부정하는 여러 설

2.2.1. 고려시대의 인식 - 고려의 진정한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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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金富軾)과 《 삼국사기(三國史記)》
그런데, 신라 말 후삼국시대가 정립되고 이어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시대에 들어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론'과는 다른 일통론이 제기되었다.

고려인들은 고구려와 신라 중 어느 나라가 정통인가, 바꾸어 말하면 고려 왕조가 어느 나라를 이었는가에 대해 두 인식이 있었음은 많은 사람들이 논했던 부분이다. 고구려 정통론, 신라 정통론이 그것으로 고려 왕조 개창에 중심적 역할을 하였던 이들은 고려라는 국호가 말해주듯 고구려 정통론의 입장에 섰다. 그러나 왕건 시기 부터 더 이상의 분열을 막고 하나의 정체성을 심어주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15] 했던 고려 지배층 입장에선 기존의 분립적 계승의식인 고구려 계승의식만 이어가는건 미래의 또 다른 견훤 궁예를 낳을 수 있다는 생각을 안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한국의 각종 재현 오류가 넘치는 사극에서 들고 나오는 신라계의 신라 계승의식 강조는 헛소리다.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에선 고려인의 역사 인식을 설명하며 고씨에서 내려와 왕씨가 이어받았다고 서술하고 있고 고려의 중심지는 황해도와 경기도 북부 일대로, 신라가 통일하기 이전에 엄연히 수백년 동안 고구려의 영토였던 곳이며 본관으로 신라계라곤 해도 출생지 따져보면 개경 출신인 경우(즉 이미 누대에 걸쳐 현지에 동화된 경우)가 적지 않다. 당장 평양 연고가 강해야할 고구려의 성씨부터가 횡성 고씨로 원신라 영역 안에 본관이 있었다. 고려 왕조가 주목했던건 신라말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삼한일통 의식이었다.

동아시아에서 왕조의 정통을 확립하는 방안이 앞 시대의 역사서를 만드는 일이다. 그래서 고려 초기에 고려 이전의 역사를 정리한, 흔히 《 구삼국사》(舊三國史)로 알려진 삼국사가 편찬되었고, 이어서 12세기 유교에 입각한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편찬되었다. 두 사서 모두 삼국의 역사를 정리한 것이고, 《구삼국사》의 내용은 윤곽이 전해지지 않지만, 삼국사기와 마찬가지로 신라 말까지의 역사를 정리한 것으로 보이며, 신라의 삼국통일을 인정하는 역사인식이라면 삼국시대의 역사를 하나의 사서로 편찬하고, 통일 후에 신라의 역사를 따로 신라사라는 이름으로 편찬하여야 하는 것이 순리이다. 중국의 삼국시대를 예로 들면 정사 삼국지 진서를 따로 편찬한 것과 비슷하게 말이다.[16]

그런데 고려시대의 역사가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삼국사(기)》라는 책명으로, 삼국 초기부터 시작해 더이상 삼국이 아니게 된 신라 중기~후기까지의 역사를 한꺼번에 편찬하였다. 이는 곧 진정한 삼국통일은 고려에 와서 이루어졌다는 인식의 반영이라고 여겨진다.

물론 김부식의 《 삼국사기》에서는 신라의 삼국 통합 사실을 전하고 있고, 견훤 궁예를 제대로 된 왕으로 본기에 싣는 것이 아닌 반역 열전에 기술하여 신라 정통론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책의 명칭과 구성에서, 고려 초 이래로 나려오던 '고려 통일론'의 틀을 전면전으로 거부하기 어려웠음을 보여준다. 이는 고려 전기까지도 삼한일통의식이 가진 양면성이 청산되지 못함과도 관계가 있다.

즉 고려인들의 의식 기저에는 그때까지도 삼국의 주민을 아우른 차원의 통일체 의식과 함께 삼국별 분립적 역사 계승 의식인 삼국 유민 의식의 잔재가 남아 있었음을 의미한다.[17] 실제로도 무신정권기에 담양에서 이언년 형제의 백제 부흥운동이, 서경에서 최광수의 고구려 부흥운동이, 동경에서 이비·패좌 등의 신라 부흥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물론 이들이 옛 삼국이라는 간판만 가져다쓴 반란자라 할지라도, 지역에 사는 백성들은 어느 정도 유민의식이 있으니까 이런 간판이 먹혀드니 사용한 것이다. 사실 유민의식을 이용하기 위해 간판만 가져다썼다는 점에선 선배인 궁예나 견훤도 마찬가지였다.

2.2.2. 남북국시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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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삼국통일론에 있어서 반대적인 시각으로 가장 먼저 지적된 것은, 영토의 불완전성 문제다.[18] 조선 중기의 한백겸(韓百謙)이 대표적이며, 그의 글이 18세기 안정복 동사강목에 재인용되었다. 더욱이 같은 시기 발해고를 쓴 유득공은 남북국 시대론을 최초로 주장하면서, 통일신라론을 정면적으로 부정하기에 이른다. 단재 신채호 1908년 독사신론에서도 신라의 통일은 반민족성과 비자주성에서 크게 비판 받았으며, 이것이 민족주의적 입장에서의 "통일신라"개념 반대의 주류가 되었다.

영토의 불완전성 문제가 의외로 늦게 제시된 것은, 의외로 오랫동안 우리나라 지식인들에게 고구려의 강역에 대한 연구가 상당히 불완전했기 때문이다. 조선 왕조 실록의 삼국사에 관한 논의를 보면 조선 초기에는 '고구려는 조선보다 작은 나라'로 인식했던 것으로 보이며 고구려의 강역은 겨우 ' 평양을 중심으로 하여 평안도, 황해도와 요동을 합친 정도'로밖에 파악하지 않았다.[19][20]

이렇게 남북국 시대를 깊이 추구하다 보면 결국 통일신라라는 명칭에 대해 거부감을 보일 수밖에 없고, 이에 따라 7세기 말 이후의 신라 국가의 명칭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남한 학계에서도 남북국론에 서서 후기신라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이 시기의 역사를 서술한 개설서 등이 출간되었다.[21] 자세한 내용은 남북국시대 참조.

이러한 견해 등에서 일반적으로 공통적인 시각이 7세기 이전의 이른 시기에 한국 민족이 형성되어 있었고, 삼국이 마치 현대의 남북한처럼 비록 나라는 다르지만 서로 같은 민족이라고 하나의 세계관을 이루고 있다는 식이다. 그런 인식에 의거하면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의 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죄악의 행위이며, 그나마 온전히 통합하지 못하고 남은 일부가 따로 나라를 세웠으니, 이를 남북국 시대로 규정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2.2.3. 후기신라론

통일은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던 공간과 집단들을 통합하거나, 원래 하나였다가 나누어진 여러 지역과 집단들을 다시 하나로 합치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삼국인들이 주관적으로 서로를 외국인으로 간주하였고, 객관적으로도 서로 다른 존재 양태를 지녀 하나의 동질적 족속이 형성되기 이전이었다면, 이 시기 역사상과 인물을 대상으로 '민족'을 기준으로 한 포펌이나 통일의 허실을 논하는 것은 민족주의 역사학의 자위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결국 '삼국통일'이라는 점도 후세인의 관념에 따라 만들어진 주장이므로, 삼국통일의 개념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무리라는 식이다. 즉, 삼국통일이 아니라 단순히 신라의 "정복"이라는 주장이다.[22]

민족 근대 형성설 입장에 선 논자들이 피력한 이런 개념은 삼국시대에 삼국은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지 못하였고, 신라와 발해는 서로 이질적인 실체였다고 주장하면서, 7세기 후반의 신라를 통일신라라는 말 대신 후기신라로 명명하는 개념이다. 이는 남북국 시대론에서의 후기신라와 같은 표현이지만 뜻은 전혀 다르다.

8세기 이후 신라인들은 발해 지역을 이역(異域)으로 여겼고, 양자는 시종 대립적이었다고 보며, '말갈족의 발해'와 신라가 시종 대립적 관계였다고 보기도 한다. 이런 견해에서 신라 삼국통일론은 부정되며, 더 나아가서 아예 발해사를 한국사에 포함시키는 일 자체가 거부되는 것이다. 남북국시대론도 이런 견해에선 설 자리가 없다.

북한 학계에서는 '후기신라'라는 명칭을 본격적으로 사용했고, 초기에는 신라가 당과 결전을 벌여 이를 몰아낸 사실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다가 1960년대 이후부터는 발해사를 강조하고 신라통일론을 부정하였다. 나중에 가면 오히려 더 발해에 비중을 두는 식으로 전개가 되었다. 남한에서도 일부 사학자들이 후기신라의 개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면 왜 통일 이전의 신라는 '전기신라'라고 부르지 않느냐는 반박도 나오고 있다.[23]

2.2.4. 삼국불성립론

고구려사는 한국사에 속하지 않으므로, 삼국이라는 범주를 설정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시각이다. 이 논리에선 한강 이남에 거주하였던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의 삼한과 이들에 바탕을 둔 신라와 백제의 역사만이 한국사에 속한다는 것이다.

중국 측의 주장이자 전형적인 고구려 중국사론이다. 한강 이북 지역에 거주하던 예맥족(濊貊)과 관련된 고대 국가들은 모두 중국사 범위에 귀속시키며, 이들에 세운 부여 고구려의 역사는 중국사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입장에서는 자연히 삼국통일론을 부정하고, 한강 이북 지역을 중국의 역사영역으로 설정하는 식의 역사관을 내세웠다. 이 역시 신라통일론을 부정하는 논리이다. 물론 남북국시대론도.[24]

반면 서강대학교 사학과의 김한규는 다른 입장에서 '삼국'을 부정한다. 김한규는 기본적으로 현재의 만주 및 한반도 북부에 ' 요동'이라는 별개의 '역사 공동체'가 존재했다고 주장하며, 고구려가 이에 포함된다고 본다.[25] 따라서 고구려, 백제, 신라를 같은 소속감을 갖는 '삼국'으로 묶는 주장은 부당하며, 고구려는 발해라는 또 다른 '요동 국가'에 의해 계승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한국 학계나 중국 학계 모두에서 지지 받진 못하는 주장이다.

3. 삼국통일 전쟁은 언제부터 시작하였나?

대체로 그 끝은 나당전쟁이 끝나고 당나라가 한반도에서 철수하는 676년으로 보는 것이 거의 확실하지만, 그 시작 시점이 언제인지에는 이견이 있다.

삼국통일전쟁은 삼국의 성장에 따라 삼국 사이에 벌어진 장기간의 전쟁, 대립인 동시에 동아시아의 많은 나라와 종족이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국제전이었기 때문에, 긴 기간에 걸쳐 전개된 만큼 어느 시기를 끊어 삼국통일전쟁기로 설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삼국통일전쟁 시기를 서술하려면 자연적인 시간의 흐름에서 어느 시기를 정해 전쟁기로 특정화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간 이에 관한 다양한 견해가 발표되었다.

3.1. 4세기 후반설

4세기 전반 낙랑군, 대방군(帶方郡)이 소멸된 뒤, 국경을 접하게 된 고구려와 백제가 옛 중국 군현 지역 지배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전쟁을 벌인 데서부터 통일 전쟁의 시작을 설정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당시 양국은 중앙 집권적 영역 국가 체제의 구축을 지향하였으며, 전쟁으로 획득한 영토와 주민을 중앙 정부가 직접 장악하여 통치하려 했다. 이런 영역 국가 체제로의 발전에 필연적으로 고구려와 백제 간에 더 많은 영토와 주민 획득을 위한 상쟁이 벌어졌고, 신라도 뒤이어 영역 국가 체제로 발전해 이 대열에 참가하게 되어 삼국 간의 혈전은 더욱 치열해졌다.[26]

많을 때는 수만 명이 동원되던 대규모 전쟁은 막대한 인력과 물자의 징발을 요구했고, 이에 부응하기 위해 삼국은 조직력, 동원력 확충에 거의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 과정 속에 새로운 야철 기술 보급, 수리시설 확충 등의 생산력 정진에 성공하고, 관등제 정비, 중앙 관서 조직과 지방제도 확충이 이루어지는 등 중앙 집권적 영역 국가 체제로의 진전이 있었고, 삼국통일은 4세기 중엽 이후 장장 3백여 년에 걸쳐 벌어진 움직임의 산물로 보아야 하며, 이 과정 속에 한국 고대 사회가 중세 사회로 전환하였다고 보는 시각이다.

즉, 이러한 담론에서 삼국통일 전쟁의 가장 큰 역사적 의의는 고대에서 중세로 전환하는 진통이었다는 것이다.[27] 통일신라 시기를 중세로 볼 수 있느냐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이 점은 삼국통일 전쟁의 근본적 동인을 삼국 사회 내부의 변화와 발견에서 찾은 견해로서 거시적 관점에서 통일 전쟁의 역사적 성격을 조망하는 부분이다.

다만 이는 삼국통일전쟁이라는 제한된 용어를 지나치게 거대하게 부풀려 잡은 것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흔히 근초고왕이 백제의 전성기를 이끌었다고 말하지만 실제 학계에서는 "백제의 전성기"라는 것 자체가 허상이며, 실제로는 200~300년 이상 벌어져 있던 고구려와 백제의 격차를 좁히는 시기이고, 중국 쪽의 혼란으로 인해 야기된 "고구려의 암흑기"에 오히려 가깝다는 것이다. 이는 백제가 별다른 대실책을 벌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군주의 사망으로 멸망의 위기까지 몰렸던 고구려가 내부를 정비하자마자 백제를 속절없이 털었다는 것으로서 증명된다.

그리고 이어서 광개토대왕, 장수왕, 문자명왕, 안장왕, 안원왕 5대에 걸쳐 고구려는 무려 160년 동안 한반도를 지배했으며, 특히 장수왕에서 안장왕에 걸치는 시기에는 신라와 백제가 거의 성읍국가 수준까지 퇴락했었다. 이 때문에 이 기간을 과연 "삼국통일전쟁"에 넣어야 하느냐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사실상 장수왕에서 안장왕 기간 동안에는 고구려가 통일을 해 버린 상태나 다름없었고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의 산발적인 소요 외에 별다른 대규모 도발이 없었다.[28] 그러니까 애시당초 전쟁의 기간이 아닌데, 왜 이 기간을 전쟁 취급하느냐는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다만, 문자명왕 시기에는 신라가 지증왕이라는 걸출한 명군의 영도 아래 국경지대에 성 40여 개를 쌓고 급격히 힘을 길렀으며, 백제는 무령왕이라는 시대의 정복군주를 맞아 침미다례의 기나긴 저항을 끝장내고 한강 일대까지 잠시 탈환하기도 했다.

3.2. 6세기 중엽설

삼국 간의 전쟁이 6세기 중엽, 그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띠어 통일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시각이다. 즉, 신라가 관산성 전투 등으로 한강 유역과 삼국의 역관계에서 중대한 변화가 발생했고(대표적으로 나제동맹의 붕괴), 이는 6세기 중엽 이후 전쟁은 성숙된 집권국가들 간의 격렬한 쟁패전으로 이어졌으며, 일방의 군사적 승리는 즉각 상대국 내부의 질서를 위협하는 주요 동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영역 지배의 강화에 따른 삼국의 새로운 전쟁 양상이, 수·당 왕조의 출현 이후의 변화와 결부되어 국제적인 대전으로 치닫게 되었다는 식이다.[29]

이 설은 주요한 역사적 진전의 동인을 삼국 내부의 발전에서, 구체적으로는 영역 국가 체제로의 발전에서 찾은 견해로, 내재적 발전론 시각을 깔고 있다는 점에서는 첫번째 설과 동일하다. 실제 신라의 6세기 대약진은 삼국의 역관계에 한 획을 긋는 중대한 사항이었다. 그리고 신라가 뒤늦게 이 무렵에 영역 국가 체제를 구축함에 따라, 삼국 사이의 전쟁의 양상도 더 많은 영토와 인민의 쟁취를 위해 대규모화하고 빈번해지며, 전쟁의 결과가 한 국가나 집권 세력의 안위와 직결되었다. 하지만 고구려는 이미 그 전부터 영역 국가 체제로의 진전을 계속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4세기나 5세기가 아닌 6세기 중엽설을 내세운다면 이는 통일 전쟁의 승자인 신라의 처지에서 그렇다는 것이 된다.

이 시각의 또 다른 하나는 신라사를 보는 범위에서, 신라의 국가적 기반을 확립한 것은 다름 아닌 진흥왕(眞興王) 시대였으므로, 통일의 기반도 이 시기(540 - 576)에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견해이다.[30]

이러한 시각에 따른다면, 통일 전쟁사의 시작은 한강 유역과 낙동강 서안을 차지한 진흥왕대의 팽창이 그 시점이다.

3.3. 중국 통일제국의 등장에서 찾는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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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위진남북조시대 관구검, 오호십육국시대 모용황 등, 고구려 역시 대륙의 혼란상에서 불똥이 튀면서 고생하였으나 이를 극복하면서 동아시아의 강대국이 되었고 이에 따라 동아시아는 고구려를 포함한 4강 체제의 다원적인 구도가 정립되었다. 남북조시대에 접어든 중원 대륙은 고구려를 제어하기에 힘이 부쳤기에 고구려는 동방과 북방에 패권을 장악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했고 어느 정도 안정된 국제정세가 수백년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후 수나라가 중원을 통일하면서 힘의 균형이 깨지기 시작했고 이는 거대한 파장을 일으켰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물론 백제와 신라 역시 전란에 휩쓸리게 된다.

3.4. 642년설

642년 이후의 일련의 상황 전개가 삼국통일로 귀결되었다는 사실에 토대를 두는 주장이다.

642년 7월, 백제의 의자왕이 친히 신라의 낙동강 서쪽 40여 성을 공략하였고, 8월에는 백제 장군 윤충(允忠)이 대야성(大耶城)을 공략하였다. 이듬해인 643년 고구려와 함께 신라의 서해안 주요 항구인 당항성을 공격해 당과의 교통로를 차단하려 하자, 신라가 급히 당에 구원을 요청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어 신라와 당이 동맹으로 연결되어, 백제 멸망과 고구려 멸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한편 642년 이후 일련의 상황 전개는 562년 대가야를 멸망시킨 뒤 유지되던 신라의 가야 지역 지배권과 기존 삼국 관계를 뒤흔드는 것이며, 왜국에도 외교 노선을 둘러싼 갈등을 표면화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아, 이 해를 특히 주목한 논고들이 발표되었다.

즉 당의 출현에 따른 동아시아 국제 관계 재편 파장 속에서 그것이 구체적으로 삼국 관계의 갈등과 연결되고, 또 왜국의 동향과 연결되는 계기로 642년에 주목한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4. 전쟁의 서막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시작점을 설정하는 부분에서만도 수많은 주장과 논의들이 있다. 본 문서에서는 편의성과 집약성 등을 위해 고구려-수 전쟁 시점부터 이야기를 전개한다.

4.1. 남북조시대의 종결과 수나라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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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문제(隋文帝) 양견(楊堅)

팔왕의 난과 그 뒤를 이어 밀려든 이민족으로 서진이 붕괴되고, 화북에서 이민족 국가들이 끊임없이 서로 죽고 죽이며 헬게이트가 벌어졌다. 이어 북위가 강력한 힘으로 화북을 통일하면서 혼란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남북조시대가 개막하였다.

하지만 북위는 남조를 정벌하는 데 실패하였으며, 동위/서위로 분열하였다가 다시 왕조가 교체되면서 북주와 북제가 건국되었고, 강성해진 북주가 무제(武帝) 시절에 북제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무제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사망하고, 후계자인 선제가 몰락하면서 틈을 보던 양견이 제위를 얻어내고 마침내 수나라를 건국하였다. 수문제 양견은 남조의 마지막 왕조 (陳)을 멸망시키고 건강 진숙보에게 항복을 받으면서 남북조시대를 끝냈다.

그는 전란으로 피폐한 대륙을 수습하고 국력을 융성하게 하여 소위 개황의 치(開皇之治)라고 칭송받는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수는 대외적인 행보에서도 성공 일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서아시아에서 동로마, 사산 왕조를 상대하고, 몽골 초원에 눌러앉아 북제, 북주를 제압하며 강대한 패권을 장악하던 돌궐이 수나라의 이이제이 이간책으로 동돌궐, 서돌궐로 나눠지고 복속된 것이다.

그 여파는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삼국에게도 밀려들어왔다.

4.2. 고구려의 반응

수나라가 국제정세 판을 새로 짜면서 가장 먼저 충돌한 것은 고구려였다.

고구려는 전성기 이래로 쭉 팽창적인 정책을 펼쳤다. 6세기 중반의 혼란상을 수습하고 융성하던 시절의 돌궐이나 수나라의 전신인 북주 등과의 대결에서 승리하였다. 수나라가 들어서면서도 이 기조를 유지하며 동서 6천리에 이르는 영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수나라를 상대로 지속적으로 소규모의 공세를 가하거나, 수나라 내부에 공작을 시도하고, 기술을 빼냈으며 내부적으로는 중흥군주 평원왕을 중심으로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에 수문제는 노하여 '요수의 넓이가 장강과 비교하면 어떠하고, 고려의 인구가 진과 비교하면 어떠한가!' 라는[31] 국서를 보내는 등 고구려를 상대로 불편함을 숨기지 않았다.

새로 즉위한 영양왕은 속말 말갈 일부가 반란을 일으켜 수나라에 포섭되는 등 동진하는 수나라의 위협을 좌시할 수 없었고, 이에 말갈 거란 등을 동원해 요서를 선제 공격하였다.
파일:map02.jpg

이 싸움에서 수나라측 영주총관(營州總管) 위충(韋沖)이 고구려군을 막아냈으며 이어 수나라는 30만 대군을 거병하여 고구려의 서쪽을 공격하였으나 요서와 서해에서 전멸한다.

4.3. 백제의 움직임

앞서 598년 무렵, 백제 위덕왕은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고, 스스로 군도(軍道)가 되기를 요청하였다. 이건 고구려 좀 어떻게 해주라는 움직임에 가까운데, 당시 수문제는 패전한 상황이라 해줄 수 있는게 없었다.
"왕년에 고구려가 조공을 바치지 않고 신하로서의 예절을 갖추지 않았기에 장군들로 하여금 그들을 토벌케 하였는데, 고원(高元)의 신하들이 겁을 내며 잘못을 시인하기에 내가 이미 용서하였으니 그들을 칠 수는 없다."
삼국사기》 권 제27 백제본기 제5

이에 고구려는 백제의 변경을 공격하여 복수한다. 이후에도 백제는 무왕 시대에도 자주 수나라와 연락하였고, 607년에는 좌평(佐平) 왕효린(王孝隣)을 보내 다시 한번 고구려 공격을 제안하였다. 이는 고구려의 남진을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또한 신라 변경에 대한 집요한 공격 등이 성과를 내었고, 혜왕 법왕으로 이어지는 불안한 정국을 수습하면서 자신감을 가지고 국제 무대에 뛰어든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4.4. 신라의 움직임

파일:무왕 대의 백제와 신라의 충돌 지점.jpg
무왕 즉위 이후 신라와의 전투 지점들. 가장 짙은 색인 남원 운봉은 아막성 전투가 벌어진 지점이다.

신라 역시 백제와 마찬가지로 수나라의 개입을 바라고 있었다. 진평왕(眞平王) 시절 신라에 대한 백제와 고구려의 공격이 가중되었다. 602년에는 백제가 아막성(阿莫城)을, 불과 1년만인 603년에는 고구려가 북한산성을, 605년 8월에는 역으로 신라가 백제를 공격해보기도 했지만 608년 2월에는 고구려가 신라 변경을 침략하여 8천여 명을 잡아가 버렸다. 다시 2개월 뒤인 4월에는 고구려가 우명산성(牛鳴山城)을 공략해서 함락시켰다. 611년 음력 10월에는 백제 군대가 가잠성(椵岑城)을 100일간 포위한 끝에, 결사항전을 한 찬덕(讚德)이 죽고 성이 함락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견딜 수가 없었던 신라는 611년, 수나라와 연락하여 군사를 청하였고, 수양제는 이를 허락하였다. 그리고 611년 2월, 마침내 수양제가 움직였다.

자세한 전황에 관해서는 고구려-수 전쟁 문서 참고. 간단하게 결과만 놓고 보자면 수나라의 멸망이었다. 특히 2차 침공에서는 113만 3천 8백 명을 끌고왔는데도 성 하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4.5. 고구려-수 전쟁의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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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ap01.jpg

수나라는 문제, 양제의 2대에 걸쳐 고구려와 싸웠으나 결국 패배하였다. 특히 30만 대군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살수대첩이 가장 뼈아팠다. 이미 수양제는 대운하 등의 토목 공사로 민심을 잃었고, 각지에서는 군웅들이 들고 일어났다. 결국 수양제 자신도 고구려 원정 당시 육군 대장 중 하나였던 우문술의 아들 우문화급에게 피살당하며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한편 장안으로 입성해 수양제의 손자인 공제에게 양위받은 태원유수(당국공) 이연 당나라를 세움으로써 수 왕조는 완전히 멸망하였다.

고구려는 결과적으로 수나라의 엄청난 공격을 막아낸 명예를 얻었고, 어찌 보면 만주와 한반도에 가해지는 중국 세력의 확대를 저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구려 역시 국력 회복의 필요성을 느꼈는지 영양왕의 뒤를 이은 영류왕 고건무는 팽창적인 대외정책을 지양하고 당나라와 화친을 맺는다. 하지만 이것이 전쟁의 끝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5. 또 다른 서막

5.1. 당나라의 성립과 팽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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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
수양제의 폭정과 대운하 공사, 무리한 고구려 원정 실패 등으로 중국은 엉망이 되었고, 각지에 군웅이 할거하여 호시탐탐 천하를 노렸으나 이세민은 20대의 나이에 왕세충(王世充), 두건덕(竇建德) 등을 모두 격파하여 단숨에 중국을 통일시켰다. 그후 위징(魏徵), 방현령(房玄龄), 두여회(杜如晦) 같은 명신과 이정(李靖) 같은 명장의 도움을 얻어 수나라 시기의 혼란상을 극복한다.

비록 국력으로 따지면 당나라는 수나라 전성기에 비해 훨씬 뒤떨어졌으나[32] 그 지도부의 능력이나 판단력에 있어서만큼은 비교도 안되는 능력을 지녔던 것이다. 당나라의 시선이 동쪽으로 향하면서 다시 한번 전운이 감돌게 된다.

영류왕이 제위 말년에 당태종은 신강성 투루판에 위치한 고창국을 멸한 뒤, 위징(魏徵) 등의 반대를 뿌리치고 주현으로 편제하여 당 조정이 직접 지배하는 영역으로 삼았다. 고창국 멸망은 곧 중원대륙의 북쪽과 서쪽에 있던 세력들이 모두 당에 복속되었음을 말한다. 이제 동으로 바다에 이르고, 서로는 카라샤르[33], 북으로는 사막, 남으로는 임읍(林邑)에 이르기까지 동서 9천 5백 10리, 남북 1만 9백 19리에 달하는 방대한 영역을 장악하였다.

한편, 서남의 티베트 방면에 대해서도 당은 641년 공주를 출가시키는 등 회유책을 써서 안정을 꾀하였다. 게다가, 당나라 명장 이정은 628년, 동돌궐 힐리가한(頡利可汗)을 격파하고 동돌궐을 완전히 멸망시켰으며, 몽골 고원을 제압하였다. 이에 당의 위세에 압도된 유목민 집단들은 630년, 당 태종을 유목 세계의 패자라는 뜻을 지닌 천가한(天可汗) 으로 추대하였고, 돌궐 패망과 함께 그간 돌궐의 세력에 예속되어 있던 거란, 해, 습(飁) 등 동부 내몽골의 홍안령 기슭 일대에 거주하던 유목 민족들도 일부가 당나라에 투항하면서 점차 고구려를 포위한 모양새가 되었다.

게다가 당나라는 티베트 고원 북편 경사면에 있던 토욕혼을 격파하였고, 고창국 격파와 더불어 서쪽으로 실크로드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제 당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나라들 가운데, 당에 대적할 수 있는 정도의 나라는 오직 고구려만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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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5.2. 영류왕의 유화책

이세민이 집권하면서 당의 팽창적인 대외정책은 동방에도 큰 파장을 일으켰으며 고구려에도 큰 위협이 되었다.

고구려는 당의 동돌궐 정벌을 축하하면서 봉역도를 보냈으며, 태자를 사절로 보내는 등 적극적으로 친당정책에 임하였다. 당에서는 짐짓 화친을 받아주는듯 하였으나 모욕적인 의전이나 경관의 파괴 등 도발행위를 통해 고구려의 위상을 깎아내리면서 서열정리를 시도하였다.

고구려에서는 당을 두려워하며 천리장성을 쌓는 등 소극적으로 전쟁에 대비하였으나 당에서는 첩자를 보내어 침공할 기회를 엿보는 등 침공 의지를 무마하지도 못하였다.

그 무렵, 한반도 남부에서도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5.3. 대야성의 참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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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년 3월, 백제의 무왕이 사망하고 의자왕이 즉위하였다. 의자왕은 궁정 내부의 문제를 정리한 뒤 곧바로 신라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의자왕은 642년에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미후성(獼猴城) 등 40여 성을 공략하였다. 단기간에 새로운 군주의 지도력을 과시하는 데는 전승 이상만한 것도 없으니. 이후에도 의자왕은 계속해서 공세의 고삐를 조였다. 다음달 8월에는 신라의 대당 교통로인 당항성을 고구려와 협력하여 공략하려 하였으며, 장군 윤충에게 1만의 병력을 주어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대야성은 신라의 낙동강 서쪽 지역을 전수하는 요충지였다. 백제는 무왕 대에 무산성 속함성 등을 공략하여 소백산맥 이동으로 진출하였는데, 더 나아가 황강 유역의 대야성을 공략하려 하였다. 당시 대야성을 지키던 신라의 도독 김품석은 김춘추의 사위였다. 윤충이 이끈 백제병이 대야성을 포위하였는데, 대야성은 내부가 더 문제였다.

성주 김품석은 여색을 밝히는 색골이었고, 자신의 참모인 검일(黔日)의 부인이 예쁘다는 이야기를 듣자 불륜을 저질렀다. 이를 갈던 검일은 백제군이 성을 포위하자 창고에 불을 질러 호응하였다. 화염이 치솟고 민심이 흉흉하여 상황이 어려워졌는데, 죽죽(竹竹) 등은 끝까지 싸우자고 하였으나 김품석은 항복하여 목숨을 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도 여의치 않아서 처자식을 죽이고 자결하였다. 죽죽 등은 최후까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대야성이 함락되자 신라 조정이 당혹스러워했다. 대야성 함락으로 백제군은 낙동강 본류 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게 되어, 신라의 본거지를 바로 위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울러 대야성을 비롯한 40여 성이 함락됨에 따라 낙동강 서안 옛 가야 지역에 대한 신라의 지배권이 뿌리채 흔들릴 위기에 처해졌다. 그리고 김춘추는,
춘추가 이를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5 신라본기 제5

김춘추는 사위와 딸을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몹시 곤궁해진 상황이 되었다. 대야성 성주 김품석의 입신에는 아무래도 장인인 김춘추의 영향력이 있었을텐데, 대야성 상실의 주요 원인이 김품석의 부도덕 행위이니 이것은 김춘추에게 큰 짐이 된다. 김춘추는 대안을 강구해야만 했다.

이번 사태는 1차적으로 백제의 공세로 벌어졌다. 즉, 해결하려면 백제를 압박해야 하는데, 당장 638년에도 고구려와 칠중성에서 격전을 벌인 바 있던 신라로서는 고구려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바다 건너 왜국은 신라를 외교적으로 압박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그 해 10월, 마침 고구려에서 일대 파란이 일어났다. 연개소문의 정변이 발생한 것이다.

5.4. 연개소문의 정변

冬十月 蓋蘇文 弑王

겨울 10월에 개소문이 왕을 시해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20 고구려본기 제8
임진일, 고려의 사신이 나니와진(難波津)[34]에 다다랐다.
정미일, 여러 대부들을 나니와부(難波郡)에 보내어 고려국에서 바치는 금,은 등과 아울러 물건을 살피게 하였다. 사신이 물건을 바치고는 “지난해 6월 아우 왕자[35]가 죽고 가을 9월에 대신 이리가수미(大臣 伊梨柯須彌)가 대왕 이리거세사(伊梨渠世事) 등 180여명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아우 왕자의 아들을 왕으로 삼고 자기와 같은 성씨(姓氏)인 도수류금류(都須流金流)를 대신(大臣)으로 삼았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일본서기》 권 제24 고교쿠 덴노(皇極 天皇)
有蓋蘇文者, 或號蓋金, 姓泉氏, 自云生水中以惑衆. 性忍暴. 父爲東部 大人·大對盧, 死, 蓋蘇文當嗣, 國人惡之, 不得立, 頓首謝衆, 請攝職, 有不可, 雖廢無悔, 衆哀之, 遂嗣位. 殘凶不道, 諸大臣與建武議誅之, 蓋蘇文覺, 悉召諸部, 紿云大閱兵, 列饌具請大臣臨視, 賓至盡殺之, 凡百餘人, 馳入宮殺建武, 殘其尸投諸溝. 更立建武弟之子藏爲王, 自爲莫離支, 專國, 猶唐兵部尙書·中書令職云.

개소문(蓋蘇文)이라는 자가 있는데, 혹은 부르기를 개금(蓋金)이라고도 한다. 성(姓)은 천씨이며, 스스로 이르길 물 속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사람을 홀렸다. 타고난 바는 잔인하고 거칠었다.. 아비인 동부대인 대대로가 죽자, 개소문이 마땅히 이어 받아야 했지만, 나라 사람들이 그를 미워하여서 섬을 얻을 수 없었다. 머리를 조아려 많은 사람들에게 잘못을 빌고, 섭직을 청하면서 시켜보아 옳지 않으면 비록 못하게 하여도 아쉬움이 없다 하였다. 뭇 사람들이 슬피 여겨서 드디어 자리를 잇게 하였다. 그러나 너무 난폭하고 나쁜 짓을 하므로, 여러 대신(大臣)이 건무(建武)와 더불어 말을 나누어 그를 죽이기로 하였다. 개소문이 이를 깨닫고 여러 곳을 모두 불러 모아 거짓으로 크게 열병(閱兵)을 한다고 말하고, 잔치를 베풀어 대신(大臣)들의 임석(臨席)을 청하였다. 손님이 이르자, 다 죽여버리니 무려 백여 명이나 되었다. 왕궁(王宮)으로 달려 들어가 건무를 죽여서 그시체를 찢어 여러 도랑에 던져 버렸다. 이어 건무 아우의 아들인 장(藏)을 임금으로 삼고, 스스로 막리지(莫離支)가 되어 나랏일을 마음대로 하였다. 당(唐)의 병부상서(兵部尙書)와 중서령(中書令)를 합한 것과 같은 벼슬이라 이른다.
신당서》 권 제220 열전 제145 동이

신당서에 따르면 연개소문의 아버지는 동부대인이었고, 구당서 고려전에 따르면 서부대인으로 나온다. 하지만 당시 고구려의 동향을 민감하게 파악할 수 있었던 당나라 영주도독 장검(張儉)이 정변 발발 한 달 뒤인 11월에 보낸 보고문에서 '고려 동부대인 천개소문' 등등의 언급을 하고 있으므로 동부대인으로 보는게 더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를 보면 정변 전 연개소문의 위치는 동부대인으로 보인다.

노태돈은 동부대인이 '동부 소속의 대인' 이 아니라, '동부를 관장하는 장' 이라는 의미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대신들이 연개소문의 섭직을 거부한 것은 연씨 집안이 동부의 병권을 오랫동안 장악한데 대한 견제와 반발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결국 오랫동안 동부의 군병을 장악해온 연개소문 집안의 연고권과 위세를 부정할 수 없어, 그의 섭직에 동의하였다는 식이였다.

여하간에 이러한 귀족 회의의 견제를 뚫어버리고 그 자리에 오른 연개소문의 세력은 오히려 더욱 강력해졌고, 그 기세에 위협을 느낀 귀족, 그리고 영류왕은 연개소문을 없애버리려고 했다. 또한 일본서기에서 연개소문은 '이리가수미'로 기록되고 있는데,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키는 와중에 '이리거세사'를 죽였다는 언급에서 나오는 이리거세사는 같은 이리(伊梨) 씨로 보이며, 그렇다면 연씨 집안 내에서도 이에 가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연개소문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그해 초에 조정이 천리장성 축조의 감시역으로 연개소문을 임명하면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이 시도는 연개소문을 지방으로 내려보내, 중앙 정계에서 격리시키거나 혹은 동부 대신 직을 내놓게 하려는 등의 시도로 보이는데, 자신에 대한 압박이 가중되자 연개소문은 열병식을 개최한다고 하면서 여러 대신과 고위 관인들을 초대하였다. 그러나 식이 열리자마자 정변이 시작되었고 왕궁까지 무자비하게 유린되었다.

수도에서는 정변과 함께 순식간에 반대파를 제압하고 보장왕을 옹립하며 고구려를 장악한다. 양만춘(楊萬春)으로 알려진[36] 안시성주가 이 때 연개소문과 마찰이 있었다는 소문이 당태종에 의해 언급되기도 한다.

이렇게 정세가 요동치는 와중에 남쪽에서 김춘추가 고구려를 찾아왔던 것이다.

5.5. 연개소문과 김춘추

新羅謀伐百濟遣 金春秋 乞師不従
신라가 백제를 정벌하려고 김춘추를 보내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삼국사기》 권 제21 고구려본기 제9
冬王將伐百濟以報 大耶 之役乃遣伊湌 金春秋 於高句麗以請師初 大耶 之敗也都督 品釋 之妻死焉是 春秋 之女也 春秋 聞之倚柱而立終日不瞬人物過前而不之省旣而言曰嗟乎大丈夫豈不能呑百濟乎便詣王曰臣願奉使高句麗請兵以報怨於百濟王許之高句麗王高臧素聞 春秋 之名嚴兵衛而後見之 春秋 進言曰今百濟無道爲長蛇封豕以侵軼我封疆寡君願得大國兵馬以洗其恥 乃使下臣致命於下執事麗王謂曰 竹嶺 本是我地分汝若還 竹嶺 西北之地兵可出焉 春秋 對曰臣奉君命乞師大王無意救患以善鄰伹 威劫行人以要歸 地臣有死而已不知其他 臧 怒其言之不遜囚 之別館 春秋 潛使人告本國王王命大將軍 金庾信 領死士一萬人赴之 庾信 行軍過 漢江 入高句麗南境麗王聞之放 春秋 以還
겨울에 왕이 앞으로 백제를 쳐서 대야(大耶)에서의 싸움을 갚고자 이찬(伊湌)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서 군사를 청하였다. 처음에 대야가 패하였을 때 도독(都督)인 품석(品釋)의 아내도 죽었는데, 이는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가 이를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얼마가 지나서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삼키지 못하겠는가?”
하고 곧 왕을 찾아 뵙고 말하기를
“신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게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라고 하자 왕이 허락하였다.

고구려의 왕인 고장(高臧)은 평소 춘추의 명성을 들었기 때문에 군사의 호위를 엄중히 한 다음에 >그를 만나 보았다. 춘추가 나아가 말하기를
“지금 백제는 무도하여 긴 과 큰 돼지가 되어 우리 강토를 침범하므로 저희 나라의 임금이 대국(大國)의 군사를 얻어서 그 치욕을 씻고자 합니다. 그래서 신하인 저로 하여금 대왕께 명을 전하도록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고구려의 왕이 말하기를

죽령(竹嶺)은 본래 우리의 땅이니, 그대가 만약 죽령 서북의 땅을 돌려준다면 군사를 보낼 수 있다.”라고 하였다. 춘추가 대답하기를
“신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군대를 청하는데, 대왕께서는 어려운 처지를 구원하여 이웃과 친선을 하는 데에는 뜻이 없고 단지 사신을 위협하여 땅을 돌려 줄 것을 요구하십니다. 신은 죽을지언정 다른 것은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고장이 그 말의 불손함에 화가 나서 그를 별관(別館)에 가두었다. 춘추가 몰래 사람을 시켜서 본국의 왕에게 알렸는데, 왕이 대장군(大將軍) 김유신(金庾信)에게 명하여 결사대 1만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게 하였다. 유신이 행군하여 한강(漢江)을 넘어 고구려의 남쪽 경계에 들어가자 고구려의 왕이 이를 듣고 춘추를 놓아 돌려보냈다.
삼국사기》 권 제5 신라본기 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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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金春秋)

이 당시 김춘추는 고구려 수뇌부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양국이 그간의 항쟁을 중지하고, 나아가 고구려가 현재 백제의 공격으로 곤경에 처해있는 신라를 군사적으로 구원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에 보장왕이 죽령 이북의 땅을 원하자 김춘추는 거부했고, 이에 김춘추가 구금되자 신라 조정과 김유신은 분개하여 1만 명의 구원병을 이끌고 출격, 이에 보장왕은 김춘추를 석방시켰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러한 보장왕의 태도는 연개소문의 태도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 당시 김춘추의 의도에 대해서는, 정변이라는 유혈 내분을 겪고 현재도 불안정한 면이 있는데다, 당나라와의 긴장이 고조되는 고구려에 동맹을 청해, 주력을 당의 침공에 대비하게 만듦으로서 신라의 위협을 덜게 하려는 정도로 추측해볼 수 있다. 연개소문의 정변 사실이 신라에 알려지지 않았을 리는 만무하며, 당나라와 고구려의 대립은 고구려의 십수 년이 넘는 천리장성 공사만으로도 파악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나라의 침입이 예상되는 이 상황에서 왜 고구려 조정은 제발로 찾아온 김춘추의 제안을 거부했을까?

642년까지 신라가 백제보다도 당나라와 '특별하게' 더 가깝다고 볼 근거는 없는데, 642년까지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한 횟수는 되려 백제가 신라보다 더 많았다. 그런데 643년 신라가 고구려의 공격을 당에게 호소하며 구원을 요청하자, 당이 상리현장(相里玄奬)이라는 사신을 고구려에 파견하여 공격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연개소문은 수나라와 고구려가 싸우던 상황에서, 신라가 자신들의 뒤를 쳐서 땅 500리를 탈취했다면서 이를 거부하였다. 김춘추가 연개소문의 제안을 따른다면 신라 - 고구려 관계는 5세기 중반 이전의 형세로, 즉 고구려가 신라에 대해 압도적 우위를 가지고 있으면서 신라와 협력하던 과거의 형세로 돌아가는 모양이 된다. 그리고 당나라가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 신라가 후방을 위협하는 문제는 백제와 말갈, 왜를 이용해 신라를 충분히 견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어찌되었건 삼국시대 말기, 가장 거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두 거물들의 회담은 이렇게 끝났다. 신라는 절망적인 고립 상태에 빠졌고, 결과적으로 자신들을 살려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즉 당나라에 절대적으로 매달리게 되었으며, 이는 신라와 당의 군사적 동맹으로 이어졌다. 고구려는 돌궐, 말갈, 백제, 왜를 통해 남과 북, 양쪽으로 적을 맞이하는 상황을 제어하면서 동아시아의 정세는 십자형 판도를 이루게 된다.

이제 당나라와 고구려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신라는 의지할 곳이 없어져 당나라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단순히 당나라와 고구려의, 백제와 신라의 전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동아시아 각국들에 크고 작은 영향력을 끼치는 국제전의 성격으로 전개된다.

6. 제1차 고구려-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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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신라의 사신과 당의 전쟁 준비

김춘추와 (실질적으로)연개소문의 회담이 결렬된 후, 고구려는 신라에 한층 압박을 가하였다. 또한 백제 역시 고구려와 연결하여 신라의 당항성을 공략하려고 하였다. 신라에 있어 당항성은 황해를 통해 당나라와 연결될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었고, 가뜩이나 고립된 상태에서 백제가 당항성을 차지하면 신라는 더욱 절망적인 늪으로 빠지게 된다. 최대의 위기에 직면한 신라는 당에 사신을 파견해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 당시 사태를 주시하고 있던 당나라 조정, 그리고 당태종은 신라 사신에게 세 가지 방책을 제시하였다.
  • 첫째. 거란, 말갈병을 동원[37], 고구려의 서부 국경을 기습하는 안. 이 제안을 따르면 고구려가 방어에 주력할 터이고, 신라에 대한 공세가 중단될 것이며, 신라는 1년쯤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가 당나라의 주력이 공격해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결국 안전해질 수 없을 터이다.
  • 둘째. 신라군에게 당나라군의 깃발 수천을 주어 성에 걸어놓게 하여, 백제와 고구려군을 놀라게 하는 계책. 그야말로 단발성의 계책으로, 상식적으로 큰 효과가 일어날 것이라고 보긴 힘든 계책이다.
  • 셋째. 백제가 바다의 험함을 믿고 방어에 소홀할 것이니, 수백 척의 배를 동원해 바다를 건너 백제를 기습하게 한다. 그런데 신라의 왕이 현재 선덕여왕으로 여자가 왕이라 백제의 업신여김을 받고 있으니, 당나라 이씨 종친 한 명을 보내 신라의 왕으로 삼고 당병으로 호위하게 한다.
파일:선덕여왕 김덕만.jpg
선덕여왕(善德女王)
신라 사신은 이 세가지 제안 중 어떤 것이 좋냐, 하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당태종 입장에서 이 제안은 그 자리에서 막 나온 상당히 즉흥적인 제안인듯 하며, 실제로도 그저 한 차례 해프닝 정도로 끝나버렸다. 그런데 신라 입장에선 그렇지만도 않았는데, 특히 여자가 왕이라서 업신여김을 받는다.는 발언이 그것이다. 이는 나중에 벌어진 신라 내부의 난리인 비담의 난과 어느 정도 연관성을 찾을 수도 있다.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에 사람을 보내 신라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라고 요청하면서 양국의 상황을 파악하고 명분을 쌓아올렸다. 전통적인 조공 책봉 관계로 보면, 제후국들이 서로 싸움을 벌이는데 천자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이를 계속한다면, 천자가 개입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기는 셈이다. 연개소문은 이러한 당나라 사신의 요구를 거절하였고, 의자왕의 경우에는 겉으로는 일단 응하는 듯한 자세를 보였다. 고구려에 대해 당나라가 다시 한번 사신을 파견하여 압박하자 연개소문은 당 사신을 굴에 가두어버렸다.

이렇게 되자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당 태종은 드디어 연개소문의 쿠데타를 근거로 고구려 정벌을 천명했고, 연개소문이 정탐을 위해 보낸 관원들과 백금도 거부, 체포되었다. 모든 상황이 전쟁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이미 연개소문은 644년에 당나라를 선제공격하였으며 당에서도 644년 7월 우선 영주도독 장검과 이도종을 파견해 요동을 먼저 공격하도록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1월 이세적(李世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보병과 기병, 그리고 난/하주의 유목민 항호를 거느리고 요동으로 진군하게 하고, 형부상서 장량을 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수군을 태운 500척의 함선으로 산동반도에서 출발해 바다를 건너 평양성을 공격하게 했다. 또한 자신이 친위대 6군을 거느려 직접 낙양에서 출격했다.

6.1.1. 신라, 백제에 대한 당의 압박

또한 당태종은 644년 귀국하는 신라의 사신 김다수(金多遂)에게 국서를 보내어, 선덕여왕에게 신라군이 대고구려 전에 참전할 것을 요구하였다. 논란이 벌어졌는지 신라 조정에선 별다른 소식을 전하지 않았고, 당태종은 이듬해인 645년 2월 고구려 원정에 나서면서 다시 한번 조서를 보내어 당군이 4월 상순에는 고구려 경내에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니, 신라군이 당의 수군대총관 장량의 절도를 받을 것이며, 장량의 주둔처에 신라 군관을 파견할 것을 요구하였다.

한편 백제 의자왕에게도 당나라의 조서가 도착하였다. 644년 말 무렵 백제 사신인 부여강신(扶餘康信)이 당나라에 파견되어 백제가 당나라의 명을 어기고 고구려와 협력하여 신라를 공격하지 않았다고 발뺌하고, 당나라 의원을 백제에 보내줄 것, 백제 학문승의 귀환 등을 요청하였다. 그에 대한 답신의 형태로서 당태종은 의자왕이 요청한 사항에 대해 조처하였음을 알리고, 대 고구려전에 백제가 참여할 것을 요구하였다. 동시에 신라에 파견하는 당의 사신이 안전하고 신속하게 신라에 도착하게 협조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조서는 645년 초봄에 전해졌다.

그런데 이 조서에선 선덕여왕에게 보내진 앞의 조서와는 달리, 파병이 주요한 목적으로 다뤄지진 않고 여러 가지 사항을 포괄적으로 언급하였으며, 파병을 요청하면서도 당군이 언제 출병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고, 여하간에 구체적인 내용이 없었다. 그리고 첫머리에 백제가 고구려와 한편이 되었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며 은연중에 백제를 위협하는 서술을 하였다.

이 조서는 오히려 신라가 대고구려전에 참전할 경우, 백제가 이를 공격하여 저지하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백제를 견제하려는 목적도 있을 것이다.

6.2. 설연타의 움직임

당군은 전쟁 초기 고구려 요동 방어선의 여러 성을 함락하는 등 수나라에 비해 나은 성과를 보이나 이내 신성, 건안성, 안시성에서 발목이 잡히게 되었다. 그러한 때, 당나라에 있어 이변이 발생하였다. 그 당시 몽골 고원의 강자였던 설연타의 개입이 그것이었다.

설연타는 튀르크 계통의 유목민으로서 철륵(鐵勒)의 한 부족으로, 북방의 최강자였던 돌궐이 당나라의 힘에 의해 망해버린 뒤 강자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마침 고구려에 대해 당나라가 공격을 하게 됨으로서, 당나라의 심장부인 관중 지역의 방어가 약해질 것은 자명한 일이었고, 당태종 역시 그 사실을 알아 고구려 원정에 나서기 전에 설연타의 진주가한(進駐可汗)에게 사신을 보내 "내가 지금 고구려 작살내러 가는데, 그 사이에 쳐들어오고 싶으면 함 해봐."라는, 대단히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러면서 돌궐 사람인 집실사력(執失思力)에게 병사를 주어 주둔하게 하여 설연타를 막아내게 하였다.

고구려-당 전쟁 발발 이후 연개소문 말갈 사람을 보내 설연타의 참전을 요청한 것으로 보인다. 설연타는 645년 9월, 진주가한이 사망하고 난 뒤, 발작(拔灼)이라는 인물이 다른 형제인 예망(曳莽)을 습격, 살해하고 새로운 가한, 다미가한(多彌可汗)으로 즉위하였다.

이러한 정황을 당군이 몰랐을 리가 없다. 새 가한의 동향은 의심이 대상이 될 만하고, 특히 고구려는 설연타와 동맹을 맺으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 게다가 점점 겨울이 다가오면서 요동 평야의 기온이 떨어졌고 풀이 시들고 서리가 내렸다. 안시성 철옹성이었으며 신성과 건안성의 10만의 고구려군 역시 당군의 진격로와 군량 수송로를 위협하고 있었다. 결국 더 머뭇거리지 않고 당군은 전면적인 철수를 명령하였다.

설연타의 동향이 문제가 되는 만큼, 당군은 신속한 철군이 요구되었다. 당군은 추위 속에 요하 하류의 뻘밭을 통과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고, 고구려군도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온갖 고생 끝에 당태종은 12월 14일 무렵 산서성 태원에 도착하였고, 그 사이에 설연타 오르도스 지역으로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에서 전인회(田仁會)가 급파되어 미리 파견되어 있던 집실사력과 힘을 합쳐 설연타 군대를 격파하였고, 퇴각하던 설연타 군은 재차 하주를 공격하였다. 이제 당군은 고구려 정벌이 문제가 아니라 설연타의 압박을 저지하는 것이 더 큰 목적이 되었다.

이로서 1차 고구려-당 전쟁은 끝이 났다. 당태종의 고구려 정벌은 대실패했다. 열흘만의 요동성 함락과 주필산 전투 등 수차례 승리에도 불구하고[38] 신성, 건안성, 안시성을 필두로 하는 요동 방어선 공략에서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함으로서, 당나라는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돌아왔고 설연타와 싸워야만 했다.

당태종 위징이 살아있었더라면 자신이 원정을 나서지 않게 하였을 것이라고 후회하였고, 이정은 강하왕 이도종의 계획, 즉 오골성을 치고 평양성을 치는 계책을 써야 했다고 주장하였다. 여하간에 전쟁은 실패로 끝났지만, 당태종은 패배를 설욕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다만 수양제와 같은 막무가내 원정을 계획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6.3. 신라와 백제의 움직임

고구려군이 당군과 격돌하고 있었을 당시, 한반도의 남부 지역에서도 전쟁의 여파가 번졌다. 당태종은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면서 신라에게 움직임을 요구했는데, 과거 수양제가 요구할 당시 신라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지금 신라에게 당나라 말고는 믿을 대상은 아무도 없었다. 당과의 협력 여부를 확실하게 표현하여야 하는 만큼, 신라 조정은 참전과 파병을 결정하였다. 신라는 이제 대외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반 고구려·친당의 선택을 내렸다.

645년 4월 당군이 요하를 건너 고구려 침공을 감행할 때, 신라는 5월 무렵 신라는 북으로 임진강을 건너 수구성(水口城)을 공격하였다. 이때 동원된 병력은 3만.

그런데 백제의 움직임이 문제가 되었다. 신라가 북진함에 따라 당연히 백제 방면의 수비는 약해졌고, 이에 백제군은 서부 국경선을 공격, 신라의 7성을 함락시켰다. 신라는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카드인 김유신을 파견하여 대응하였고, 결국 북진하던 신라군은 더이상 작전 수행이 불가능해져 백제군의 침공을 막아내는 데 주력하였다.

신라는 당나라와 확실한 연합 작전을 벌였고, 백제는 당나라와 교전하진 않았지만 결과론으로 신라의 당에 대한 협조를 저지시켰으니 이는 당나라와 척을 지게 되는 셈이다. 이제 동아시아의 정세는 묘한 합종연횡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7. 국제전(國際戰)

7.1. 각자의 사정

645년, 당태종이 고구려에서 깨지면서 당나라의 위신은 크게 손상을 입었고 고구려는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여전히 당나라는 압도적인 강대국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구려는 당이 새로 짜려는 판에 균열을 내려 했고 이러한 구도는 백제와 심지어 바다 건너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자신들의 입장을 정할 것을 강요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는 새로운 국제 질서에 가장 필사적으로 반응하였다.

7.1.1. 고구려의 입장

전쟁이 끝난 후 고구려는 자부심에 찬 친선사절을 보냈으나 자존심이 구겨질대로 구겨진 당나라는 오히려 더 화가 나서 전쟁을 계속하였고 전략전술도 수정하였다. 대규모 전쟁을 맞은 고구려는 강대국 당나라에 맞설 우방을 구하는 것이 필요했다. 중국의 왕조를 견제할 최고의 파트너는 북방의 유목민족이었다.

하지만 이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돌궐 설연타 등 동아시아 전역에서 세력 균형을 이룰만한 대세력들은 당에 깨졌고 이후 북방민족들은 일부는 당에 복속하고 일부는 맞서거나 달아나는 등 산산히 흩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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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965년부터 3년간 이루어진, 사마르칸트(Samarkand) 시 교외에 있는 아프라시압 언덕의 궁전 유지 발굴에서 벽화가 발견되었다. 이 궁전 벽에는 소그드어로 와르흐만(Varkhman)이라는 왕의 이름이 쓰여져 있는데, 벽화의 내용은 와르흐만 왕이 인근의 차가니안(Chaganian)국의 사절을 맞이하는 것이 주된 주제이고, 그 밖에 여러 외국 사절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 벽화에 고구려인으로 여겨지는 두 명의 외국 사절이 있다.

이 사람들이 이곳에 왔던 시기의 정확한 연대 측정은 할 수 없다. 무슨 성과를 거두었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최소한 7세기 후반으로 추정은 해볼 수 있고 고구려가 우군을 구하러 북아시아 중앙아시아 방면까지 적극적으로 손을 뻗어보았다는 식으로는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어 650년대에는 내몽골의 초원 지대가 주 전장이 되었다. 요서 북부와 내몽골 지역의 해, 거란족을 놓고 고구려는 당과 다투어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동시에 바다 건너 왜와의 연결을 공고히 하고, 백제, 말갈과 연합하여 신라에 대한 파상적인 공세를 지속하였다.

7.1.2. 신라의 정변 - 비담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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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金庾信)

백제와 고구려, 왜국의 압박에 찌부라져 있던 상황에서, 믿었던 당나라의 동진마저도 고구려에 저지당했고, 이 과정에서 백제의 대침략까지 당한 신라는 고립무원의 상태였다. 이 때 백제와 달리 당을 지원한 것이 신뢰도를 쌓아서 이후 당나라가 한반도의 세 나라 가운데 신라를 최종 파트너로 삼는 중요한 명분과 계기가 되었다는 해석도 있지만, 이건 결과적인 이야기이고 당장에는 신라가 아무 이득이 없이 피해만 본 상황이었다. 이에 신라 내부에서 상대등 비담을 비롯한 귀족들은 선덕여왕 정부의 국가운영에 불만을 가지고 내부의 갈등을 증폭시켰다. 마침내 647년 초, 비담의 난과 같은 대규모 내분이 폭발하였다.

비담의 난은 김유신의 심리전이 성공해 10여일만에 진압되었으나 선덕여왕이 이 와중에 병으로 사망하고 진덕여왕이 계승하는 등 여러 변화가 있었다.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것은 김유신과 김춘추 같은 진골 출신의 세력의 부각이다. 김유신은 금관가야 출신의 지방 출신 진골이고, 김춘추는 귀족회의에 의해서 폐립된 진지왕(眞智王)의 손자라는 점이 두드러진다. 이들은 지방세력과 하위인사를 소집하여 자신의 세력으로 삼았고, 나아가 이들을 자신의 세력 기반으로 규합하여 국가의 공적 질서에 포괄하기 위해 관료 조직의 확충과 왕을 정점으로 하는 집권 체제 확립을 지향하였다. 비담의 난도 그러한 과정에서 벌어진 대립 과정일 가능성이 있다.

비담의 난이 진압되고, 그 후 진덕여왕 재위 기간 중 신라에선 중앙 관서 조직이 크게 확충되었다. 진덕여왕 5년인 651년에는 재정 지출을 담당하는 창부(倉部)와 형률과 입법을 관장하는 좌리방부(左理方部)가 창설되었으며, 국가의 기무를 총괄하는 최고 집행 기구로서 집사부가 개설되었다. 집사부는 왕에 직속되어 정치적으로는 강력한 왕권과 중앙 집권력을 뒷받침하는 기관이었다. 또한 뒤에 보듯 중국화가 훨씬 진전되었다.

7.2. 김춘추의 움직임

진덕여왕 즉위와 함께 대내적 문제가 일단락 되자, 신라 조정의 최대 과제는 국가적 위기의 원인인 대외 관계의 혼돈을 수습하고, 대외 정책의 방향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이 과제를 풀기 위해 비담의 난 이후 권력의 핵으로 부상한 김춘추 본인이 직접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7.2.1. 김춘추의 왜국 방문

일본서기에 따르면, 646년 9월 왜 조정이 도당 유학생 출신 타카무코노 쿠로마로(高向 玄理)를 신라에 보내어 '질(質= 인질)'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에 신라가 응해 비담의 난이 진압된 뒤 647년 쿠로마로와 함께 김춘추가 왜국으로 건너갔다(일본서기 권25). 물론 이는 진덕여왕의 명령에 의한 것이겠지만, 김춘추 자신의 판단과 의지가 주요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인질이라고 표현했지만, 김춘추는 신라 최고 귀족이고 실제로 왜국을 방문한 후 곧바로 신라로 귀환하였다. 김춘추가 왜국의 인질이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일본서기에 종종 나타나는 서술 태도다. 더 나아가서, 아예 일본서기의 이 기록을 회의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일단, 김춘추가 이찬의 관등을 지닌 고위 귀족[39]이고 신라 정계의 실력자였다는 점이 주목되는데, 이전의 신라 사신들이 급찬이나 사찬이었던 것과 뚜렷이 다르다. 이는 신라 측으로서도, 고위 귀족의 방문을 요구한 왜국으로서도 이 방문을 통해 무엇인가를 추구하였음을 말한다.

우선 김춘추가 왜국에 대백제전의 군사 원조를 요청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있다. 물론 왜국은 백제의 오랜 지원국이다. 하지만 모처럼 신라의 최고위급 인사가 왜국을 방문하였던 만큼 백제에 대한 왜국의 군사적 지원을 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는 없다. 고위급 회담으로 왜국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려는 시도는 신라에게 주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그러면 왜국의 조정은 어떤 배경에서 무슨 목적으로 쿠로마로를 신라에 파견하여 고위귀족 파견을 요청하였을까. 쿠로마로는 607년 승려 민(旻)과 함께 당으로 건너간 유학생 출신이며, 640년 귀국할 때 신라를 거쳐 왜국으로 돌아갔고, 다이카 개신 후 국박사(國博士)로서 민(旻)과 함께 개신 정권의 주요 브레인 노릇을 했다. 민(旻)도 632년 당에서 신라를 거쳐 귀국하였다. 그리고 개신정권은 친백제적인 소가씨 세력을 타도하고 집권하였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쿠로마로와 김춘추의 상대국 방문은 무엇인가를 둘러싼 양국 협상이 시도되었을 가능성을 암시할 수도 있다. 646년은 당의 고구려 침공이 있은 다음 해이며, 그 전쟁에서 신라는 당의 편에 서서 참전하였고, 백제는 신라를 공격하여 당의 반대편에 섰다. 쿠로마로는 당나라의 힘을 아주 잘 알고 있던 만큼 적어도 반당적인 인사는 아니었던 것 같고,[40] 당에서 귀국할때 신라를 통한 적이 있어 오히려 당과 신라에 우호적인 입장을 지녔을 수도 있는 인물이다. 왜국이 신라에게 쿠로마로를 파견한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이런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그 점에서 유의되는 것은 왜국이 648년 신라사에 부탁하여 당에 국서를 보내어 교섭을 시도하였다는 것이다. 이 해에 김춘추의 경우를 포함해 신라는 당에 세 차례 사신을 파견하였다. 김춘추가 왜국의 국서를 당에 전달하였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어느 편에 왜국의 국서가 전달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당시 국제정세에서 신라가 왜국의 국서를 당에 전달하는 것은 신라나 왜국으로선 중대 사안이다. 이런 주요 문제를 고위 귀족인 김춘추가 왜국에 갔을 때 논의는 하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왜 조정이 신라에 '질' 요청을 하였을 때는 이 문제도 고려하였을 것이다.

당시 왜국과 당은 632년 당의 사신 고표인(高表仁)의 왜국 방문 때 마찰이 있은 이후 국교가 두절된 상태였다. 이런 면을 파악하였기에 김춘추는 직접 왜국으로 건너가 왜국의 개신 정권 핵심인사와 협상하려 하였을 수도 있다. 구체적으로 양자 간 협의된 내용이 무엇인지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또 왜국이 신라에게 그리고 신라를 통해 당에 전달하려는 메세지의 내용도 전해지는 바가 없다.

다만 추정을 하자면 왜국이 고구려와 백제 측에 일방적으로 기울지 않았다는 뜻을 전달하려 하였을 수는 있다.[41] 그런 의향을 표한 바 있었기에, 왜국은 오랜 국교 두절 이후인 653년 제2차 견당사로 240여 명에 달하는 유학생을 파견하였고, 이듬해 3차 견당사를 파견하였다.

그런데 646년 이후 왜국의 대외 관계를 볼 때 앞서 말했듯이 왜국이 대외 정책을 두드러지게 변경한 것처럼은 보이지 않는다. 즉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였지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당과 신라라는 두 개의 대립 축에서 어느 한 편에 일방적으로 기우는 선택을 하여 노선을 분명히 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백제와의 우호 관계를 중시하던 기존 대외 정책이 지속되었음을 의미한다. 직접 일본까지 왔지만 별 성과를 보지 못한 김춘추는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였다.

7.2.2. 김춘추의 당나라 방문

마침 신라에는 당나라와의 연호 사용 문제가 발생했다. 648년 3월, 당나라에 파견된 신라 사신에게 당태종은 신라가 독자적인 연호를 쓰는 것을 문제 제기했고, 이는 신라가 정변 이후 새로운 왕이 즉위한 것을 기회로 삼아 신경전을 벌이는것으로 보여진다. 그러자 일본에서 돌아온 김춘추가 당나라로 파견되었다.

당태종은 김춘추를 광록경(光祿卿) 유형(柳亨)으로 하여금 교외에 나가 그를 영접하는 등, 매우 융숭하게 대접하였다. 김춘추에게는 정2품인 특진의 관작을 주었고 춘추의 아들 김문왕(金文王)에게 정3품의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을 봉하였다.

당시 당 조정은 수년째 치고 빠지는 기습전으로 고구려를 괴롭히고 있었다. 소모전 결과 고구려가 피폐해졌다는 보고를 접한 당태종은 다음 단계로 대규모 병력을 투입한 전면적 공격에 나서겠다고 다시 한번 선포하였다.
○ 二十二年, 又遣右武衛將軍薛萬徹等往靑丘道伐之, 萬徹渡海入鴨綠水, 進破其泊灼城, 俘獲甚衆. 太宗又命江南造大船, 遣陝州刺史孫伏伽召募勇敢之士, 萊州刺史李道裕運糧及器械, 貯於烏胡島, 將欲大擧以伐高麗. 未行而帝崩. 高宗嗣位, 又命兵部尙書任雅相·左武衛大將軍蘇定方·左驍衛大將軍契苾何力等前後討之, 皆無大功而還.

○ 22년에 또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설만철(薜萬徹) 등을 보내어 청구도(靑丘道)로 가서 치게 하니, 만철(萬徹)은 바다를 건너 압록수|鴨綠水로 들어가서 박작성(泊灼城)을 함락하고 많은 포로를 사로잡았다. 태종(太宗)께서는 강남(江南)에 명하여 큰 배를 건조하게 하는 한편, 합주자사(陜州刺史) 손복가(孫伏伽)를 보내어 용감한 병사를 모집시키고, 협주자사(莢州刺史) 이도유(李道裕)를 보내어 군량과 병기를 운반하여 오호도(烏胡島)에 쌓아두게 하는 등 장차 군사를 크게 일으켜 고려(高麗)를 치고자 하셨다. 그러나 끝내 시행하지 못하고, 태종(太宗)께서 붕어하셨다. 고종께서 유지를 이어받아서 또 병부상서(兵部尙書) 임아상(任雅相),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계필하력(契苾何力) 등에게 명하여 앞뒤로 보내어 토벌케 하였으나, 모두 큰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구당서》 권 제199 열전 제149 동이

태종이 장군 설만철(薛萬徹) 등을 보내 쳐들어왔다. 바다를 건너 압록강으로 들어와 박작성(泊灼城) 남쪽 40리 되는 곳에 도달하여 진영을 멈추니, 박작성주 소부손(所夫孫)이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이를 막았다. 만철(萬徹)이 우위장군(右衛將軍) 배행방(裴行方)을 보내 보병과 여러 군대를 거느리고 이를 이기니, 우리 병력이 무너졌다. 행방 등이 병력을 보내 성을 포위하였으나, 박작성은 산에 의지하여 방어시설을 해놓고 압록수로 굳게 막혔으므로, 공격하였지만 빼앗지 못하였다. 우리 장수 고문(高文)이 오골(烏骨), 안지(安地) 등 여러 성의 병력 3만여 인을 거느리고 나와 지원하였는데, 두 진으로 나누어 설치하였다. 만철이 군사를 나누어 이에 대응하니 아군이 패하여 무너졌다. 황제는 또 내주자사 이도유(李道裕)에게 명령하여 양곡과 기계를 옮겨 오호도(烏胡島)에 쌓아두게 하고 장차 한꺼번에 크게 공격하려 하였다.
삼국사기》권 제10 고구려본기 보장왕
이런 방책과 함께 당태종이 645년 전쟁 이후로는, 대고구려전의 새로운 전략으로 주목하게 된 것이 고구려 서부 국경선 이외에 타방면에 제2전선을 구축, 고구려의 방어력을 분산시키고, 가장 중요한 군수품 보급의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세력을 찾는 데 집중하였다. 따라서 앞으로의 고구려-당 전쟁의 향방에 있어서, 신라의 중요성이 급부상하게 되었다.

1차 고구려-당 전쟁 당시에 당나라가 백제, 신라에 군사 협조를 촉구하였지만, 실제로는 전쟁 자체에서 거의 한반도 남부 세력의 원조를 크게 필요로 하지도 않았고 전쟁 과정에서 이 문제로 말이 나온 적이 없었다. 하지만 한 차례 패배를 당한 상황에서는 또 이야기가 달라, 이런 과정에서 김춘추에 대한 환대가 더욱 커졌던 것이다.

김춘추는 당태종 이세민을 비롯한 당 조정의 중신들과 교류했고, 돌아오면서 아들 김문왕 장안에 머물게 하였다. 이제 신라는 당과 교섭하는데 유리한 거점을 확보했고, 김춘추 개인으로서도 자신의 아들을 당 조정에 두어 당나라 유력자들과 교류하게 함으로서, 다른 진골귀족들보다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김문왕이 귀국한 후에도 김춘추는 훗날 문무왕이 되는 아들 김법민(金法旼)을 650년 당나라에 파견하는 등 당나라와의 교섭을 주도하였다.

또, 이때 당태종과 김춘추 사이에서 주목되는 것이 문무왕이 671년 설인귀에게 보낸 서한이다. 이는 이해 7월에 설인귀가 문무왕에게 신라가 신의를 등지고 당을 공격한 것을 힐난하는 서한을 보내온 데에 대한 답신 형태로 보낸 것이었다.

여기서 문무왕은 당나라의 배신을 언급하면서, 구체적으로 648년에 김춘추와 당태종 사이에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뒤, 대동강 이남 지역은 신라에 귀속시킨다는 약속이 있었음을 지적하였다.
선왕께서 정관(貞觀) 22년에 중국에 들어가 태종 문황제를 직접 뵙고서 은혜로운 칙명을 받았는데, ‘내가 지금 고구려를 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너희 신라가 두 나라 사이에 끌림을 당해서 매번 침략을 당하여 편안할 때가 없음을 가엽게 여기기 때문이다.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내는 바가 아니고 보배와 사람들은 나도 가지고 있다. 내가 두 나라를 바로 잡으면 평양(平壤) 이남과 백제 땅 모두 너희 신라에게 주어 길이 편안하게 하겠다’ 하시고는 계책을 내려주시고 군사 행동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삼국사기》 권 제7 신라본기 제7

이 기록은 삼국사기 외에 보이지 않고, 어디까지나 당과의 개전을 합리화하기 위해 신라가 일방적인 주장을 펼친 것에 불과하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김춘추와 당태종 간의 대화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별도의 공식적 기록으로 남지 않았을 수도 있으며, 당시 고구려 원정을 앞둔 당태종의 입장에선 그런 식으로 김춘추를 회유하려 할 수도 있다. 648년에 두 사람이 평양 이남 지역을 신라령으로 한다고 약속한다면, 이는 곧바로 바로 그때 당군이 백제 공략에 나설 것을 약속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향후에 벌어진 대백제 전쟁 등의 군사동맹의 큰 틀은 바로 이때 김춘추가 당나라에 건너가서 확정지은 것이 된다. 물론 아직 그런 것들은 구체화되진 않았다.

당에서 귀국한 김춘추는 신라 조정에 건의하여 관복의 양식을 바꾸어 당과 같이 하였으며, 그간 행해왔던 신라 고유의 연호를 폐지하고 당의 연호를 사용하도록 했다. 신라가 취한 조치는 신라가 당나라 중심의 천하 질서에 귀속하겠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표명한 것이었다.
하쿠치(白雉)[42] 2년(652) 여름 6월 백제(百濟)·신라(新羅)가 사신을 보내 조(調)와 물건을 바쳤다.
이 해 신라(新羅)의 공조사(貢調使) 지만사손(知萬沙飡)[43] 등이 당나라의 옷을 입고 츠쿠시(筑紫)[44]에 이르렀다. 조정에서 함부로 풍속을 바꾼 것을 싫어하여 꾸짖고 돌려 보냈다. 그 때 코세노오오미(巨勢大臣)[45]가 “지금 신라를 정벌하지 않으면 나중에 반드시 후회할 것입니다. 그 정벌하는 상황은 모든 힘을 다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니와진(難波津)[46]으로부터 츠쿠시해(筑紫海)[47] 가운데까지 서로 이어지도록 배를 가득 띄우고 신라를 불러 그 죄를 묻는다면 쉽게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청하였다.
일본서기》 권 제25 코토쿠 덴노(孝徳 天皇)

이때 신라가 650년부터 656년 사이 왜국에 해마다 사신을 파견하자, 왜국은 신라 사신이 당 양식의 새로운 관복을 입고 왜국을 방문한 것을 보고 극렬한 반응을 보이며 접견을 거부했다. 왜국에 있어 신라의 당복 착용은 당과 연결한 신라가 노골적으로 왜국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였다. 반면에 신라 입장에선 당나라와 자신들의 결속을 과시하며, 왜국의 선택을 촉구하는 방향도 있을 것이다.

백제, 고구려 등의 압력에 시달리는 신라로서는 배후의 왜국에 대해 항시 민감한 주의가 필요했다. 신라로선 당과의 동맹을 확실히 하고 백제와의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는 상황에서 왜국의 미온적인 태도는 불안인 동시에 위협이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관복 시위도 하면서 해마다 사신을 보내었지만, 왜국이 계속 미온적인 태도를 계속하자 신라 역시 왜국과의 관계에 매달리기보다 대결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이에 따라 657년 왜국 조정이, 사신과 유학생들이 신라를 거쳐 당나라에 파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하였는데, 신라 조정은 이를 거부하고 그들을 왜국으로 돌려보냈다. 이후 신라와 왜국 사이의 공식적 접촉은 단절되었다.

이제 동북 아시아의 국제 관계의 구도는 점차 명확해졌다. 당나라와 신라를 연결하는 횡적인 연결과, 고구려와 백제, 왜국이 연계하는 종적인 연결이 그것이었다. 합종연횡의 움직임 속에서 전쟁의 폭풍이 한반도를 휘감아 몰아치려 하였다.

7.2.3. 백제의 입장

당태종이 고구려 원정을 선포하면서 백제에게 호응을 요구하자, 백제 조정은 당초에 이에 응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645년 신라군 3만이 고구려 공격을 위해 북진하였을때, 되려 신라의 공백을 이용하여 서부 국경선을 공격하였고, 신라는 이를 막기 위해 황급히 퇴각하여 백제군에 대처하였다. 이는 백제가 고구려 편을 들어버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백제가 배짱을 부린대로 전쟁은 고구려의 승리로 끝났고, 더욱더 판단에 확신이 들었는지 백제는 647년, 648년, 649년 연속으로 신라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다. 당나라의 공격은 고구려가 위에서 막아줄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말이다. 혹은 고구려 측이 신라 견제를 위해 백제를 부추겼을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백제는 당나라와의 관계 파탄만은 피하려고 했는데, 651년에도 조공사를 파견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라에 대한 공세는 여전했고, 이런 형태 속에서는 결국 당나라와의 대결은 피할 수가 없었다.

사실 백제 입장에서는 당나라와 고구려의 대결보다는 눈 앞에 있는 신라가 더 큰 눈엣가시였다. 백제 입장에서 보면 신라는 고구려, 왜, 당을 떠나 가장 큰 원수지간이기 때문이다.

7.2.4. 당나라의 입장

1차 고구려 원정 실패 후, 당태종은 곧바로 설연타 정벌전에 착수했다. 토번의 세력이 절정으로 치닫기 이전에, 설연타야말로 당의 수도권을 직접적으로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라는 점에서, 나중에 다시 고구려로 진격한다고 해도 설연타는 반드시 눌러놓을 필요가 있었다. 646년 6월, 당나라는 대규모 군단을 동원, 설연타를 대파하여 다시는 세를 떨치지 못할 지경까지 만들었다.

이어서 당태종은 고구려 원정 재개를 논의하였고, 일전과는 조금 다른 전략을 선택했다. 대규모 군단으로 직접적으로 강대한 타격을 주는 전략에서, 소규모 부대를 이용, 해로나 육로로 고구려를 기습하고, 반격하면 치고 빠지는 형태로 소모전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647년 5월, 이세적은 3,000명의 병사와 영주도독부의 병력을 동원해 남소성 등 소하자 유역 일대에 기습적인 타격을 가했고, 성의 외곽에 불을 지른 뒤에 신속히 퇴각하였다. 7월에는 해군 10,000여 명이 요동 반도의 남쪽 해안 지대로 침입하여, 고구려군을 물리친 후 석성을 공략하고, 적리성(積利城)을 공격하다가 퇴각하였다.

이듬해 648년 4월에는 당의 해군이 압록강 하구로 진입, 100여 리를 거슬러 올라가 박작성(泊灼城)을 포위하였다. 고구려가 병사 30,000명을 보내어 강력하게 방어하려고 하자, 당군은 서둘러 철군하였다.

이러한 전황 속에, 당태종은 648년 8월 재차 고구려 원정 계획을 발표하였다. 30만 대군을 동원해 일거에 고구려를 무너뜨리겠다고 호언했고, 방현령이 이는 무익하며 시망인 일이라고 반대하였지만 무시당했다. 바로 그 무렵, 신라는 김춘추를 파견하였다.

7.2.5. 왜국의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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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토쿠 덴노(孝徳 天皇)

왜 조정에서는 6세기 중엽부터 불교 수용 문제를 둘러싸고 유력 귀족들 간에 갈등이 벌어졌는데, 불교 수용에 반대하던 모노노베(物部)씨와 수용을 찬성하던 소가(蘇我)씨가 각각 양 편을 대표하는 집단으로서 대립하였다. 소가씨는 도래인(渡來人)[48] 세력을 휘하에 포섭하면서 확대를 거듭해 모노노베씨를 타도하였다. 이후 소가씨는 왜 조정의 대표적 귀족세력으로 대두하였고, 명망있던 쇼토쿠 태자(聖德 太子) 사후 세력을 더욱 강화하였다.

고구려와 당나라의 싸움이 한창이던 645년 6월 고교쿠 덴노(皇極 天皇) 재위기에, 왜 조정에서 정변이 벌어졌다. 소가씨의 전횡에 위협을 느끼고 불만을 품은 황족과 귀족들이 합세, 고교쿠 덴노의 아들인 나카노오에 황자(中大兄 皇子)와 나카토미노 카마타리(中臣 鎌足)가 소가씨의 수장인 소가노 이루카(蘇我 入鹿)를 죽이고 소가씨를 몰아내었다( 을사의 변). 이 정변으로 고교쿠 덴노가 퇴위하였고, 그녀의 동생인 코토쿠 덴노(孝徳 天皇)가 즉위하였다. 코토쿠 덴노는 실권자였던 조카 나카노오에 황자를 황태자로 삼았는데 그가 바로 후의 덴지 덴노(天智 天皇)이다. 나카노오에 황자는 조정의 실권을 잡은 후 다이카 개신(大化 改新)을 단행하였다.

복잡한 국제 정세의 흐름을 느끼면서, 개신 정권은 653년, 654년에 제2차, 3차 견당사(遣唐使)를 당나라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고구려, 백제와 교류하면서 신라와도 어느 정도 교섭 관계를 지속하였다. 그리고 백제와 신라, 어느 한쪽에 완전히 편을 드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으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였다.

654년 당고종은 왜국에 사신을 보내 출병하여 신라를 구원하라 요청하였으나, 왜 조정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만약 신라를 구원하러 간다면 고구려, 백제와의 관계는 파탄될 것이다. 단 신라에 대해서도 드러내놓고 적대적인 태도는 취하지 않았다. 당나라의 직접적인 압박을 받지 않고, 삼국간의 상쟁에서도 한발 떨어져 있는 지정학적 위치에서 왜 조정은 사태를 관망하면서 지켜보았고, 신라는 어떻게 해서는 자기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그 입장을 선회시키려고 노력하였다.

8. 백제멸망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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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와 당나라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나당연합군이 일어났다. 연합군의 첫 표적은 신라의 숙적 백제이며, 다음 표적은 당나라의 숙적 고구려였다. 700년에 가까운 백제 사직이 먼저 풍전등화의 형세에 놓인 것이다.

8.1. 백제 내부의 혼란

16년 봄 3월에 왕이 궁녀들을 데리고 음란과 향락에 빠져서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좌평 성충이 적극 말렸더니, 왕이 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간하려는 자가 없었다. 성충은 옥에서 굶주려 죽었는데, 그가 죽을 때 왕에게 글을 올려 말했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한 마디 말만 하고 죽겠습니다. 제가 항상 형세의 변화를 살펴보았는데 전쟁은 틀림없이 일어날 것입니다. 무릇 전쟁에는 반드시 지형을 잘 선택해야 하는데 상류에서 적을 맞아야만 군사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다른 나라 군사가 오거든 육로로는 침현(沈峴)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고, 해군은 기벌포(伎伐浦)의 언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방어해야만 방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은 이를 명심하지 않았다.
삼국사기》 권 제28 백제본기 제6

삼천궁녀 이야기야 훨씬 후대에나 나온 야사이니 그렇다치더라도, 그 이전까지 해동증자라는 언급까지 나오며 좋은 면모만 보였던 의자왕이 갑자기 폭정을 저지르고 향락에 빠졌다, 라는 평가를 받으며 충신을 옥에 가두는 의아한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모습은 삼국사기에서만 나타나는 기록이 아니라 백제 사비성의 주요 사찰인 정림사(定林寺)의 그 유명한 오층탑에 새겨 넣은 대당평제비(大唐平濟碑)에도 비슷한 내용이 새겨져 있으며
항차 밖으로 곧은 신하는 버리고 안으로 요사스러운 부인을 믿어, 형벌은 오직 충직스럽고 어진 자에게만 미치고 총애와 신임은 아첨하는 자에게 먼저 더해졌다.
『정림사지오층석탑 대당평백제비명』

친백제적이었던 일본의 일본서기에도 이러한 언급이 있다.
고구려 승려 도현(道顯)의 일본세기(日本世記)[49]에 "7월에 운운, 춘추지(春秋智)가 대장군 소정방(蘇定方)의 도움을 얻어 백제를 협공하여 멸망시켰다. 혹은 백제는 자멸하였다. 왕의 대부인이 요사스럽고 무도하여 국정을 좌우하고 현명하고 어진 신하를 주살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화를 초래하였다.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일본서기》 권26 사이메이 덴노(斉明 天皇)

주목할 만한 것은 지속적으로 언급되는 임금의 부인이 문제를 일으켰다는 표현이다. 정확히 누군가를 말하는지도 알 수 없고[50], 임금의 권한과 그 부인이 맞섰다는 것인지, 혹은 임금을 등에 업고 횡포를 부렸다는 것인지 알 방법이 없다.

그리고 의자왕의 뒤를 이을 태자가 의자왕 초기엔 부여융인데, 의자왕 후기로 가면 부여효가 태자고 부여융은 일반 왕자로 기록되고 있다. 많은 학자들은 도중에 태자가 교체되었다고 보며, 나아가 위에서 말한 '임금의 부인'이 부여효의 생모고 태자 교체도 의자왕 시대 권력다툼의 결과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부인의 존재가 기록된 대당평백제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은 그 뜻을 풀어보면 알 수 있듯 당나라가 백제를 절벌한 뒤 소정방이 지시하여 정벌 과정을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새긴 것이다. 즉, 당대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나열하기 보단 당나라의 입장에서 백제를 공격하는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의자왕을 깎아내렸을 확률이 높다. 일본서기의 내용 역시 잘 살펴보면 일본의 입장에서 쓰여진 것이 아니라 도현(道顯)이라는 인물이 쓴 《 일본세기(日本世記)》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이 도현이라는 인물이 고구려인이라는 언급만 몇번 있을 뿐 정확히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다만 기록을 종합해볼 때 도현은 고구려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서 일본세기를 작성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삼국에 대한 정보는 고구려의 사신을 통해 전해 들은 것으로 보인다. 재밌는 점은 대당평백제비명과 일본서기 양쪽에서 '요사스러운 부인'이라는 정체불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해당 인물의 언급이 전혀 없으며, 심지어 옥중에서 성충이 올린 마지막 상소에도 부인이나 간신들을 멀리 하라는 충고가 적혀 있지 않다는 것이다. 도현이라는 인물이 전해들은 이야기가 당나라나 신라에서 왜곡시킨 정보일 가능성을 의심케 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국내에서 쓰여진 삼국사기의 내용은 어떠할까. 우선 첫 문장부터 '왕이 음란과 향락에 빠졌다.' 라고 시작하면서 성충을 옥사하게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성충이 올린 상소의 내용이 심상치 않다. 성충 자신이 상소에 썼듯이, 성충은 감옥에서 목숨이 다하기 직전 마지막 충성심으로 왕에게 직언을 하고자 했다. 참수당해 죽나 옥중에서 굶어 죽나 죽는것은 매한가지인데 왕에게 무슨 말인들 못했을까. 하지만 상소문을 읽어보면 '사치', '향락', '음란'과 같은 단어는 전혀 등장하지 않으며, 성충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전쟁은 틀림없이 일어날 것입니다.' 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성충이 걱정한 의자왕의 모습은 주지육림을 즐기는 폭군의 모습이 아닌, 당나라가 공격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안일한 의자왕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의자왕의 생전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있지 않은 한 어느쪽이던 단정짓기 어려운 문제이지만, 종합하자면 실제로 의자왕이 폭정을 일삼았을 수도 있으나, 의자왕이 사치와 향락을 일삼은 모습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은 점, 의자왕이 사치를 부렸다고 언급되어 있는 기록은 대부분 당과 신라의 입장에서 백제 정벌의 정당성을 논하기에 앞서 등장한다는 점, 성충이 옥중에서 마지막으로 올린 상소에도 의자왕이 폭정을 행했다는 근거는 찾아볼 수 없다는 점 등을 미루어볼 때, 의자왕이 말년에 비뚤어졌다는 것은 후대에 왜곡된 것이거나 과장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의자왕은 초기부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힘쓴 군주인 만큼, 성충을 감옥에 가둔 것은 정치적 숙청의 의미가 더 강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약간의 추측을 더하자면, 당과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으리라 예상하고[51] 신라와의 전쟁에 박차를 가하고자 하는 의자왕과, 언젠간 당나라가 공격할 것으로 내다보고 외교 정책을 바꾸고자 하는 성충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에게는 애석하게도 결과적으로 성충의 예상이 정확히 적중했으며, 계속되는 숙청으로 삐걱대는 군주와 신하들간의 관계는 서서히 백제를 멸망의 길로 몰아넣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서기 660년, 백제에게 멸망의 암운이 드리우게 된다.

8.2. 나당연합군의 진격

당나라는 대백제전에 앞서 위협요소를 먼저 제거하였다. 당의 서부 지역에서 서돌궐의 아사나하로(阿史那賀魯), 즉 사발라가한(沙鉢羅)이 노실필 부족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서부의 칸국을 부활시켰고, 곧바로 중국의 종주권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제거하거나 적어도 통제하지 않고는 한반도 방면의 작전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는데 어려움이 예상되었다. 당나라는 이에 따라 소정방(蘇定方)을 사령관으로 하는 원정군을 구성하여, 바람이 휘몰아치는 서북의 황야로 출정하였다.

소정방은 10세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를 나갔다고 하는, 그야말로 전쟁을 위해서 태어난 인물이었다. 구당서에서는 그를 날쌔고 사납고 힘이 셈, 담력이 대단히 뛰어남, 등의 수식어로 묘사하고 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어서 두 자 정도의 눈이 쌓여 있었고, 소정방은 병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안개는 어디든지 어둡게 만든다. 바람은 얼음같이 사납다. 야만인들은 우리가 이런 계절에 원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신속히 진군하여 그들을 놀라게 해주자."
르네 그루세,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

소정방은 준가리아의 에비 노르 근처에 있는 보로탈라 강에서 아사나하로와 조우하여 정말로 그들을 놀라게 하였고, 이어 그를 이식쿨의 서쪽에 있는 추 강가에서 대파하여 타슈켄트(Toshkent)로 달아나게 했다. 타슈켄트인들은 아사나하로를 잡아서 중국으로 보냈다. 659년에는 도만(都曼)이 소륵(疏勒[52])·주구파(朱俱波[53])·알반타(謁般陀[54]) 등 3국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켰는데, 소정방은 안무대사(按撫大使)에 임명되어 반란을 평정했다. 이제 당나라의 천하는 천산 파미르를 넘어가고 있었다.

한편 당은 백제 공략전에 앞서 658년과 659년 고구려 서부 국경에 공격전을 감행하였다. 658년에는 영주도독 정명진(程名振)과 설인귀가 고구려의 적봉진(赤峰鎭)을 습격해 함락하였으며, 659년 11월에는 계필하력(契苾何力)과 설인귀 요동 지역을 공격하였다. 이는 제1, 2차 고구려-당 전쟁처럼 본격적인 침공은 아니었지만 언제 후속타가 날아올 지 알 수 없는 고구려는 방어력을 서부 국경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당은 이로 인해 백제를 공략하려 하면서 고구려가 개입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양동작전을 구사했다.[55]

659년 당나라에는 왜국의 사신이 와 있었는데, 백제의 동맹인 이들이 일본으로 돌아가면 백제공략전 준비와 관련한 정보가 새버릴 수 있기 때문에 당나라는 이들을 감금했다. 백제 공략전이 기습적으로 전개된 것을 보면 전쟁 준비는 최대한 은밀히 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서북면에서 소정방 도만을 사로잡아, 낙양의 건양전에 바친 것이 현경 5년 정월. 그리고 곧바로 3월이 되자 소정방은 대총관(大摠管)에 임명되어 백제 전선에 파견되었다. 원정군의 숫자는 모두 13만의 대군. 삼국유사에서는 향기(鄕記)를 인용해 당군 병력이 12만 2711명, 배는 1천 9백 척이라고 기록하였다.

이와 동시에 신라에서도 무열왕 김유신이 이끈 신라군이 5월 26일 수도 서라벌을 출발하여, 6월 18일에는 남천정(오늘날의 경기도 이천)에 이르렀다. 6월 21일 무열왕은 태자 김법민을 배 100척 규모의 신라 수군과 함께 서해의 덕물도로 파견하여 당군을 영접하게 하였다. 이상훈 교수는 이 100척이 원래 서해안 당항성에 소속된 수군이며[56] 승선 인원은 약 6,500명으로 추산했으며[57] 신라 수군 지휘관은 병부령 김진주와 장군 천존으로 추정했다.[58] 양측은 7월 10일, 동쪽과 서쪽에서 동시에 백제를 협공해 백제의 수도에서 만나기로 일정을 맞추었다.

신라 최고의 명장 김유신이 이끄는 병력은 모두 5만. 당나라 부대의 절반 정도 되는 숫자였다.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 육군은 7월 9일, 황산벌로 나아갔고, 신라군 수군이 가세한 당군은 덕물도에서 10여 일 이상 항해의 피로를 풀고 휴식을 충분하게 취한 뒤, 서해안 연안을 따라 항해해 백강구(白江口, 오늘날의 금강)를 바라보고 진격하였다.

서쪽과 동쪽에서 도합 20여만에 가까운 대군이 백제를 압박하고 있었다. 백제 측은 덕적도에서 나당연합군이 만났음에도 이 때까지는 백제가 이를 자신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라고 완전하게 느끼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수나라 때부터 서해를 횡단하여서 고구려 평양으로 직공하던 적이 몇 번 있었고, 전과는 달리 약간 남쪽으로 오기는 하였지만, 신라왕이 군대를 이끌고 한강유역까지 북상하였기에 황해도를 공격해서 평양으로 갈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늦어도 이후 덕적도에서 수군이 남하하면서 백제 영역인 당진 일대를 통과할 때쯤에는 백제도 상황을 파악했을 것이다.

8.3. 백제 조정의 대응

파일:성충(백제).jpg
성충(成忠)

나당연합군이 양쪽에서 공격해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백제 조정은 패닉에 빠졌고, 어떻게 대응할지를 놓고 논란이 분분하였다. 좌평 의직은 당군이 상륙할 때 당군을 먼저 공격하자는 의견을 냈고 달솔 상영은 당군을 일단 틀어막고 신라군을 먼저 공격하자고 했다. 의자왕은 결정을 못 내리고 귀양을 가 있던 흥수(興首)에 자문을 구했다. 흥수는 주요 방어책으로 백강, 즉 금강 입구를 막아 적의 해군이 백강으로 진입하지 못하게 하며, 육로는 탄현을 봉쇄하자고 했다. 일전에 백제의 성충도 같은 내용을 간언했었다.

요약하면 성충과 흥수의 주장은 적군이 요충지에 진입하는 것 자체를 막아야 한다는 방어 중심적 주장이다. 그에 비해 의직이나 상영의 의견은 적군을 요충지로 진입하게 한 뒤, 말이나 배가 나란히 횡대를 지어 나아갈 수 없는 좁은 진격로의 중간에서 적군을 요격하자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편이 더 나은 판단이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런데 백제 조정에서 이런 논란을 벌이는 동안 이미 신라군은 탄현을 통과했고, 당군은 백강 입구를 통과해 버렸다. 백제 조정이 나당연합군의 진격 속도를 오판한 셈. 아무튼 틀어막는 건 이미 늦었고, 백제군 5천여 명은 황산벌로 나가 신라군을 막으려고 하였다. 사령관은 계백이었다.

8.4. 황산벌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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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階伯)

전쟁에 나서기 앞서, 계백은 가족들이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한다며 자신의 일가를 몰살하고 비장한 각오로 전쟁에 나섰다.[59] 계백의 목적은 신라군을 황산벌에서 최대한 저지, 지연전을 펼치는 동안 후방에서 전력을 추스르고 서쪽의 수군에 대한 대비도 하겠다는 계획이었으므로 얼마나 오래 막느냐가 관건이지, 완전히 신라군을 막고 살아 돌아갈 가능성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백제군은 황산벌에 세 개의 군영을 설치해 서로 의지하며 방어 태세를 취하였다. 좌평 충상과 상영, 그리고 달솔이었던 계백이 각기 하나씩 군영을 지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60] 전투를 이끌던 중심은 계백이었다.

계백의 비장한 태도와 함께 백제군도 용맹하게 싸웠다. 7월 9일부터 10일까지 신라군은 4차례나 백제군을 공격했으나 백제군은 4번 모두 신라의 공격을 패퇴시켰다. 이에 신라군의 사기가 떨어지고 당군과의 합류 날짜를 맞추기 어렵게 되자 신라군은 화랑 반굴 관창을 백제군을 향해 돌격시킨다.

반굴은 처음 돌격 때 전사하고, 관창은 한 번 사로잡혔다가 풀려났으나, 다시 돌격하여 결국에는 사로잡히고, 계백도 이번엔 어쩔 수 없이 관창의 목을 베어 돌려보낸다. 이에 분노한 신라군이 백제군을 향해 마지막 공세를 펼친다. 그 전까지 4차례의 전투로 크게 소모되어 있던 백제군은 마지막 5번째 공세에는 버텨내지 못하고 3영이 붕괴되었으며, 충상, 상영을 비롯한 20여 명만이 사로잡히고 계백을 위시한 결사대 5천은 전멸한다.

백제군이 신라군의 진격을 저지한 것은 하루에 불과하다. 약속된 합류 일자보다 늦춰서 최소한의 성과는 냈지만 그게 겨우 하루 늦춘 정도라는 점에서 백제군의 전략은 실패한 것에 가깝다. 하지만 애초에 제대로 된 방어 진지도 아닌 3개의 군영에서, 당군과의 합류를 위해 최대한 공격적으로 나왔을 신라군을 상대로 4차례나 승리한 것은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고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다. 더구나 신라의 지휘관이 지난 1세기 동안 신라를 지탱하던 희대의 명장 김유신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8.5. 사비성 함락과 백제의 멸망

그 사이 백강에서는 백제군이 강 입구를 막고 강변에 주둔하였는데, 당군이 강의 왼편 기슭으로 상륙하여 산 위로 올라가 진을 쳤고, 양군이 접전하여 백제군이 패배하였다. 만조때가 되자 당나라 해군은 일제히 강을 거슬러 진격하여 사비성 부근까지 나아갔고, 이곳에서 서진하는 신라군과 만났다. 그런데 양군이 합류하자마자 사단이 벌어졌다.

소정방은 신라군이 약속한 기일을 하루 넘긴 11일에 도착했다고 역정을 내며 신라의 독군(督軍) 김문영(金文潁)을 책임을 물어 참수하겠다고 나섰다. 그러자 김유신이 대노하여 소리쳤다.
“대장군(大將軍)은 황산(黃山)에서의 싸움을 보지도 않고 약속한 날짜에 늦은 것만을 가지고 죄를 삼으려고 하는데, 나는 죄가 없이 모욕을 받을 수 없다. 반드시 먼저 당나라의 군사와 결전을 한 후에 백제를 깨뜨리겠다!”
삼국사기》 권 제5 신라본기 제5

이 당시 삼국사기의 표현으로는 김유신이 큰 도끼를 잡고 군문에 섰는데, 그의 성난 머리털이 곧추 서고 허리에 찬 보검이 저절로 칼집에서 뛰어나왔다.고 할 정도. 이런 기세를 보고 소정방의 우장(右將)이었던 동보량(董寶亮)이 슬쩍 소정방의 발을 밞고 "이러다 신라군이 변란을 일으키겠음.' 하고 주의를 주자 소정방은 김문영의 죄를 풀어주었다.[61][62]

일단 상황을 봉합한 뒤 7월 12일, 양군은 사비성을 포위하고 소부리(사비성) 들판에 진을 쳤다. 13일에 의자왕과 그 아들 부여효 웅진성(熊津城)으로 달아났다. 웅진성은 과거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해 문주왕이 피신했던 곳인만큼 방어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지형적으로 산과 산 사이에 위치해 있어 개활지인 사비성보다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비성과 웅진성이 서로 의지하는 기각지세를 이루어 침공군에 대항하는 모양새를 취하려 했을 수도 있다. 이 때 백제는 수도권만 공격받은 것이라서 여전히 지방에는 수만명의 지방군이 있었으므로[63] 의자왕은 최대한 버텨보는 게 합리적인 전략이었다.

왕이 사비성을 떠나자 왕자 부여융(扶餘隆)과 대좌평 사택천복(沙宅千福) 등이 성을 나와 항복하였다. 사비성에 남아 있던 왕자 부여태가 이제 자신이 백제왕이라 자칭하며 즉위하였으나, 태자 부여효의 아들들이 불안을 느껴 항복하였고, 이 항복을 막지 못한 부여태도 이제 더는 견디기 어렵다 판단해 항복하였다. 그리고, 7월 18일에는 웅진성의 의자왕 부여효도 항복하였다. 웅진성에 들어간지 단 5일만이었다. 이는 나당연합군이 웅진성을 포위해서 크게 싸워보기도 전에 너무 빨리 항복한 것에 가까운데, 웅진성 안에서 예식진(禰寔進)이라는 인물이 사실상 왕과 태자를 사로잡아 항복을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64] 이 날은 당군이 기벌포에 상륙한 7월 9일부터 겨우 10여 일만인 18일이었다.(2011년 공산성 발굴과정에서 갑옷과 화살촉 등이 대량출토되면서 실제는 일련의 전투가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되었다)

수백 년을 이어오며 한국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백제는 이로써 멸망하였다.

9. 백제부흥운동과 2차 고구려-당나라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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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백제부흥운동의 시작

한 나라가 망하면 승전국은 온갖 정복의 과실을 가지지만, 패전국은 비참한 처지로 떨어지게 되기 마련이다. 백제 땅은 여러 곳이 약탈당했다.[65][66] 또한 의자왕이나 부여융 등은 온갖 굴욕을 당해야만 했다. 그도 그럴만 한 것이, 김춘추는 대야성 함락때 자신의 딸을 백제군에 잃었던 것이다.

660년 8월 2일에는 공식적으로 의자왕의 항복식이 열렸다. 현장에 도착한 무열왕은 소정방과 함께 상석에 앉고, 의자왕 등을 마루 아래 앉혀서 자신의 술을 따르게 하였다. 백제 신하 중에 이 모습을 보고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 이전에 김법민은 부여융을 자신의 아래 꿇게 해놓고 얼굴에 을 뱉으면서, "너의 아비가 나의 누이를 죽였다."고 비난했다. 부여융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땅에 엎드리기만 했다. 8월 15일, 소정방은 사비 시가지에 서 있는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백제를 평정한 것과 자신의 공적을 기념하는 비문을 새겼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의자왕이 완전히 굴복했지만, 실제 전쟁은 아직 종식되었다고 보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신라군과 당군이 점령한 것은 사비성과 웅진성 등, 백제의 중심지 지역 뿐이었다. 이 지역을 제외한 백제의 군사적 역량은 아직 온전하게 남아 있었고, 당나라 군사들의 노략질이 겹쳐지면서[67] 백제인들은 계속해서 봉기했다. 흑치상지(黑齒常之)처럼 처음엔 의자왕을 따라 항복한다고 했다가 나중에 상황을 보고 다시 반기를 드는 경우도 있었다.

두시원악(豆尸原嶽)에서는 좌평 정무(正武)가, 구마노리성(久麻怒利城)에선 달솔 여자진(餘自進)이, 그리고 임존성에서는 복신(福信)· 도침(道琛)· 흑치상지 등이 봉기하였다. 소정방은 8월 26일 임존성을 공략하려 했지만 실패하는 등 부흥군의 기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하지만 나당연합군은 우선은 철수하기로 하였다. 이미 백제의 중심부는 공략당했고, 대규모 봉기를 주도할 만한 왕과 핵심 인사들은 이미 사로잡았다. 정통성을 한군데로 모으기 힘든 한, 따라서 나머지는 힘을 합치기 어려운 잔병에 가까울테고, 좁은 백제의 수도권에 당나라와 신라의 대규모 부대가 모여있는 것 또한 유지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당나라의 최대 목표는 고구려. 백제는 고구려를 치기 위한 징검다리일 뿐이었다.

신라로서도, 661년 초 전염병이 창궐하여 백제 부흥군을 진압하기 위한 병력 동원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 전염병은 당나라 원정군이 중국에서 가져온 전염병일 가능성이 있다.[68]

9.2. 노도처럼 번지는 부흥군의 기세, 고구려의 지원공격

660년 8월 말~9월부터 나당연합군은 유인원(劉仁願)을 지휘관으로 한 당나라 군사 10,000명과 태종 무열왕의 서자인 김인태(金仁泰)가 이끈 신라군 7,000명을 주둔군으로 남겨놓고 전면 철수를 시작하였다. 소정방의 당군은 의자왕 이하 왕족과 귀족 93인, 백성 12,000여 명의 포로를 끌고 9월 3일 귀국하였다. 의자왕은 낙양에서 당고종이 승자의 아량을 보여주는 도구로 이용되었다.

일단 나당연합군이 대부분 철수하자 백제 유민은 기세를 탔다. 각지에서 일어난 봉기 가운데, 9월 23일 백제 부흥군이 사비 도성까지 진격, 나당연합군과 격전을 벌였다. 부흥군은 패퇴하였지만 사비성 남쪽 산에 버티면서 여전히 사비를 위협하였다. 10월 9일에는 무열왕과 태자 김법민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백제 부흥군을 공격하여 18일에는 이례성(尒禮城)을 점령했고, 이를 따라 백제의 20여 성이 한번에 항복하였고, 또 30일에는 사비성 주변에 있는 부흥군을 격파하여 우선 사비 주둔군에 대한 포위는 풀어 내었다. 보통 무열왕은 김유신 등 장수에게 전쟁을 맡기는 편이었는데 이 때는 사태가 크다고 느꼈는지 이례적으로 친정을 했다.[69] 11월 5일에는 무열왕이 금강을 건너 왕흥사잠성을 일주일 동안 공격해 점령했고, 일단 부여 근처 전선에서 초기 백제부흥군이 한 풀 꺾였는지 이 전투 이후 무열왕은 장수들에게 백제 땅을 맡기고 11월 중순 서라벌로 돌아간다.

하지만 신라군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음에도 백제 부흥군은 부여 바깥 지방 서천, 청양, 논산 등에서 힘을 모은 뒤 661년 2월에는 다시 병사를 모아 사비성을 공격해왔다. 그 당시까지 부흥군의 움직임은 조직적인 면이 없었으나, 점차 임존성 귀실복신이 부흥운동의 중심으로 떠올라 승려 도침과 함께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그는 소정방이 당나라에 개선하기 직전, 그를 막아내는 기염을 보이기도 했다.

그 뒤 복신은 660년 10월, 왜 조정에 좌평 귀지(貴智) 등을 보내 당나라 포로 100여 명을 바치고, 일본에 머물고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扶餘豊)[70]의 귀환을 요청하였다. 왜 조정은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12월에는 일본의 사이메이 덴노(齊明天皇)가 거처를 나니와(浪速)로 옮기고 무기와 군사 등을 점검하였으며, 이어 북큐슈의 쓰쿠시로 가서 백제 구원군을 보낼 계획을 세웠다.

당나라가 대고구려 전쟁의 준비에 열중하던 사이, 661년 2월 복신과 도침 사비성을 재차 포위하였다. 아울러 웅진강구를 봉쇄하여 당의 보급로를 차단하려고 하였고, 이에 당나라 사령관인 유인원은 지난해 9월 웅진도독으로 임명되어 왔다가 갑자기 죽은 왕문도(王文度)의 병사를 다른 지휘관인 유인궤(劉仁軌)에게 맡기고, 그와 함께 방어에 나서는 한편,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당군은 웅진강구의 양편에 구축한 백제 부흥군의 목책을 격파하여 부흥군을 압박했고, 부흥군은 포위를 풀고 도침 등은 임존성으로 물러갔다. 한편 신라군은 이해 3월 두량윤성(豆良伊城)을 공략하려 했으나 백제 부흥군의 저항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이어 주류성(周留城)을 포위하였으나 백제 부흥군의 반격에 타격을 입고 퇴각하였으며, 되려 이 패배의 여파로 백제 남방 여러 성들이 반기를 들어 복신에 귀속하였다. 복신은 주류성에 머물렀고, 이 무렵을 전후로 주류성은 부흥군의 주요 거점으로 부각되었다. 사비성 공략이 실패로 끝났지만 백제 부흥군은 오히려 더 세력을 떨쳤다.

한편 백제 멸망 후 고구려는 신라의 정예 주력이 백제 쪽에 쏠려있는 상황을 간파하고 신라 북방의 한강 유역 거점들을 장수 뇌음신, 그리고 생해(生偕)가 이끄는 말갈인 군대에 명해 여러 차례 공격했다. 칠중성 전투, 술천성 전투, 북한산성 전투가 이것인데, 이는 신라가 백제 전선에 집중할 수 없도록 해 백제부흥군에게 간접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었지만, 북쪽 전선은 무열왕이 유능한 인재를 수소문해 직접 앉힌 뛰어난 장수라고 한 필부(匹夫), 동타천(冬陁川) 등의 분전으로 신라 전체 전력에 큰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다. 이런 지원공격은 제2차 고구려-당 전쟁이 격화되기 전까지 있었다.

하지만 신라군, 그리고 무엇보다 백제 주둔 당나라 군은 부흥군보다도 고구려가 더 큰 목적이었다. 따라서 계속해서 병력을 투입, 전투를 지속할 형편은 못 되었다. 신라군은 백제를 무너뜨리는게 가장 큰 목표였지만, 평양성 공략에 나서는 당군의 식량을 보급하고 또 백제 주둔 당군에도 보급해야 했기 때문에 여력이 부족했다. 따라서 나당연합군은 일단 대고구려전 이후로 모든 것을 미루고, 백제 지역에서 한동안 현상유지에 들어갔다.

이에 따라 당군은 사비성에서 방어에 유리한 웅진성으로 사령부를 옮겼고, 신라와의 수송로 확보에 주력하였다. 이 사이에 부흥군은 661년 9월, 왜국으로부터 부여풍이 돌아오자 그를 왕으로 옹립하였고, 백제의 서부와 북부 지역, 남부 지역 등이 복신에 호응하였으며, 왜국의 원병 5,000여 명까지 도착하여 기세가 대단해졌다.

9.3. 2차 고구려-당 전쟁과 유인궤의 전략

당나라에게 있어서, 실질적으로 백제와의 전쟁은 어디까지나 고구려를 집어삼키기 위한 교두보 마련이었다.

백제 공략전에서 해로를 통한 작전이 성공하였고, 병력 손실도 경미한데다, 병사들의 사기가 한껏 달아오르자 당고종은 660년 12월 15일 고구려 원정 계획을 발표하였다.
현경(顯慶) 3년, 고구려 보장왕때 다시 명진(名振)을 보내어 설인귀(薜仁貴)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2년 뒤에 천자가 백제를 평정하였다. 이에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계필하력(契苾何力), 우무위대장군(右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 좌효위대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에게 명하여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패강(浿江)·요동(遼東)·평양도(平壤道)로 각각 진군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용삭(龍朔) 원년(元年), 大募兵, 拜置諸將, 天子欲自行, 蔚州刺史李君球建言: 「高麗小醜, 何至傾中國事之? 有如高麗旣滅, 必發兵以守, 少發則威不振, 多發人不安, 是天下疲於轉戍. 臣謂征之未如勿征, 滅之未如勿滅.」 亦會武后苦邀, 帝乃止. 八月, 定方破虜兵於浿江, 奪馬邑山, 遂圍平壤. 明年, 龐孝泰以嶺南兵壁蛇水, 蓋蘇文攻之, 擧軍沒, 定方解而歸.
신당서》 권 제220 열전 제145 동이

이어서 661년 정월 하남, 하북 등지에서 모병한 44,000여 명을 평양 누방(鏤方) 방면으로 진발하게 하고, 같은 달에 소사업(蕭嗣業)을 부여도행군총관(扶餘道行軍摠管)으로 삼아 회흘(回紇)( 위구르 제국) 등 여러 유목민 집단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4월에 당고종은 튀르크계 철륵 출신의 계필하력을 요동도행군대총관, 소정방을 평양도행군대총관, 임아상을 패강도행군대총관, 방효태를 옥저도행군총관, 정명진을 루방도행군 총관, 소사업을 부여도행군 총관으로 삼아 6개 도행군에 총 35도(道) 병력을 동원하여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아울러 6월, 당에서 숙위하던 김인문을 귀국시켜 신라의 문무왕에게 군사작전 날짜를 알리고 출병을 요구하였다. 이 달에 부왕인 무열왕이 병사함에 따라 바로 즉위한 직후였지만, 문무왕은 빠르게 응해 7월 17일, 신라의 영웅인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한 북벌군을 편성하였다. 이어 8월에는 스스로 제장을 거느리고 남천주로 나아갔고, 그 와중에 오늘날의 대전 일대인 옹산성과 우술성 일대의 백제 유민군을 진압하였다. 이 때, 웅진성에 머물고 있던 당나라의 유인원도 일부 당군을 끌고 해로를 통해 혜포(鞋浦)로 와서 그곳에서 남천주로 나아가 신라군과 화합하였다. 다만 신라군은 백제부흥군과 싸워서 실효지배 영역을 넓히는 게 더 중요했기 때문에 661년 가을까지 대전 근처에서 멈춘 채로 있었고 더 이상의 고구려 방면 출병에는 소극적이었다.

당나라군의 행로나 전쟁 양상은 기록이 적어 확인하기 힘들다. 소정방이 661년 8월, 패수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마읍산을 점령하며, 평양성을 포위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보다 뒤인 9월, 계필하력이 압록강에서 연남생(淵男生)이 이끄는 고구려군을 돌파하기 위한 전투의 기록이 보인다. 그렇다면 소정방은 당 본토에서 요동으로 진군하여 압록강을 돌파하여 간 것이 아니라, 해로로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으로 진격하였다는 식으로 볼 수 있다. 이런 견해라면 계필하력의 움직임은 소정방의 움직임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 고구려 방어군을 끌어내려는 의도로 볼 수도 있다.

그런데 고구려에서는 거란과 연합하여 서쪽으로 당을 역습하였고 이어 철륵도 같이 연동하여 당나라군을 전멸시켜버린다. 이에 철륵 출신인 계필하력이 급히 철군하여 싸우러 나갔다. 소정방은 갑자기 오도가도 못하고 고립되어 버렸고, 그 상태에서 평양성 포위를 지속하였다.

평양성은 쉽게 함락되지도 않았고, 싸움은 장기화되었다. 게다가 날씨도 점점 추워지고 식량 공급이 매우 빈곤해졌다. 이에 당고종의 사신에게서 칙서를 받은 문무왕이 김유신을 보내어 쌀 4,000석, 조 22,000석을 평양으로 보내게 하였다. 김유신은 최고 권력자이자 이제 완연한 노장이었지만 강건하게 직접 현장으로 출동했고, 또한 웅진성의 당군이 식량이 바닥나자 신라는 전력을 기울여 군대와 보급품을 보냈다.

신라가 보급을 위해 필사적일 무렵, 전열을 가다듬은 고구려군의 대대적인 반격이 이어졌다. 662년 시점에서는 루방도행군 사령관인 정명진과 그의 부장 양사선[71][72], 패강 도행군 사령관이자 병부상서 임아상이 진중에서 사망한 것이 확인된다. 소정방과 합류하기 위해 대동강 인근에 상륙한 것으로 추정되는 방효태가 이끌던 옥저도행군은 사수(합정강 부근)까지 전진해 왔다가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직접 지휘하는 고구려군과 교전, 대패하고 전군이 몰살당하며 총관 방효태도 사수 전투에서 전사한다. 당나라 35군을 편제한 6개 도행군 가운데 가장 주력인 1개는 무력화, 2개는 사령관을 잃고 1개는 아예 전멸했으며 2개는 전선을 이탈한 상황인 것이다.
고려[73]인이 말하기를 '12월에 고려국에서는 추위가 매우 심해 패수가 얼어붙었다. 그러므로 당군이 북과 징을 요란하게 치며 운거와 충팽을 동원해 공격해왔다. 고(구)려의 사졸들이 용감하고 씩씩하였으므로 다시 당의 진지 2개를 빼앗았다. 단지 2개의 요새만이 남았으므로 다시 밤에 빼앗을 계책을 마련하였다. 당의 군사들이 무릎을 끌어안고 곡을 하였다. (그러나) 날카로움이 무디어지고 힘이 다하여 (당의 진지를) 빼앗을 수가 없었으니, 후회해도 어찌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라는 것이 이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라 하였다.
일본서기》 권 제27 덴지 덴노(天智 天皇)
662년 봄 정월, 당나라의 좌효위장군백주자사옥저도총관(左驍衛將軍白州刺史沃沮道摠管) 방효태(龐孝泰)가 연개소문과 사수(蛇水)에서 싸웠다. 그의 군대가 전멸하였고, 방효태도 그의 아들 13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상
위기에 빠진 평양도행군에게 신라의 지원은 너무나 절실하였고, 간신히 퇴로를 확보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소정방은 계속 사람을 보내어 신라의 지원을 재촉하였다. 그러나 북상하던 신라군은 눈으로 큰 곤경에 처했고, 고구려군이 출몰하여 행군이 더뎌졌던 상황이었다. 당의 요청에 신라군은 많은 희생을 내면서도 강행군하여 662년 2월 6일 당군 진영에 양곡을 운송했다. 신라군의 식량 공급을 받은 당군은 퇴로를 확보하여 바닷길로 간신히 철군하였고, 신라군도 압록강 이남에서 철병하였다.

대승을 거두었지만 고구려로서도 마냥 기뻐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내몽골 초원지대의 지배는 흔들리고 있었으며, 남방에서는 신라의 뒤통수를 막아줄 백제가 멸망했다. 제2차 여수전쟁 이래 평양 수도권은 수차례 적의 직공을 받아 전장터가 되었고, 이는 고구려가 힘들여 확보, 구축한 대동강 연안 평양평야가 제대로 생산기지로써 역할을 수행할 수 없음을 의미했다. 이 때는 부흥군과 왜가 신라를 막아줬지만 이듬해에는 백제와 왜가 나당 연합군에 작살나버리니 이후 신라의 공격에도 크게 반응하지 않고, 전쟁 확대를 피하며 당나라의 봉선 의식에 태자를 보내는 등 기존에 상상하기 힘들었던 수위의 친선 의사를 표한다.

이 상황에서 기세가 살아오른 것은 바로 백제 부흥군이었다. 부흥군이 기세가 오르자 웅진성의 당나라 군대는 고립되었고, 본국인 중국 본토와의 연락, 군량미를 비롯한 군수품 보급의 어려움에 시달렸다. 믿을 것은 우방인 신라의 현지 보급이었는데, 신라와의 교통로마저 백제 부흥군에게 자주 차단당하는 형편이라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런 기세를 부흥군은 한껏 드러내었고, 부여풍 복신 웅진성 유인원에게 "언제 당나라로 돌아갈 것이냐, 마땅히 환송하겠다."면서 조롱하는 태도를 보였다. 실질적으로는 희롱하는 동시에 역으로 평화적 귀국을 보장하겠으니, 철병하라는 제의도 담겨 있었을 것이다.[74]

아무튼 당나라는 고립된 당군을 구원하고, 확대된 백제인의 저항을 어떻게 진압할지가 문제였다. 당고종 웅진성에 틀어박혀 있는 유인원에게 칙서를 보내, 평양의 당군이 회군하는데 웅진성만 홀로 버티기는 어려우니 신라로 철수하고, 다시 신라와 상의하여 (당나라 본토로) 귀환하여도 좋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당연히 대다수 장졸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좋아라 했다.

만약 이때 당군이 철수했다면 전개가 묘하게 돌아갔을텐데, 검교대방주자사(檢校帶方州刺史) 유인궤가 반대하고 나섰다. 지금 철수하면 순식간에 백제는 다시 일어날 테고, 고구려를 무너뜨릴 기회는 영영 다시 오지 않게 되어, 결국 당나라의 대 동방 전략은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이었다.
만일 고구려를 병탄하길 원한다면 먼저 백제를 멸해야 한다. 그리고 군대를 주둔시켜 배와 가슴을 눌러야 한다. 즉 고구려의 뒤뜰을 압박하여야 한다. 신라로 들어가면 당군은 한갓 빌붙어 지내는 식객 따위에 지나지 않게된다. 백제 지역은 능히 제압할 수 있다. 병력을 증파해달라.
유인궤

662년 7월, 유인궤는 신라군과 연계하여 진현성(眞峴城)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이것이 의미가 있는 것은 백제 부흥군의 포위망을 뚫고 신라에서 웅진성에 이르는 수송로를 재차 확보하였다는 것이다. 신라의 보급품이 조달되자 웅진성은 위기에서 벗어났다. 곧바로 당나라 조정은 손인사(孫仁師)를 장수로 하여 7,000명의 지원병을 증파하였다.

유인궤의 제안과 활약으로 당나라의 백제 주둔은 여전히 이어지게 되었다.

9.3.1. 왜국이 고구려를 도우려 했다?

2차 고구려-당 전쟁 당시, 왜군이 고구려를 지원하려고 했다는 전승이 전해지기도 한다.
661년에 왜국에서 고구려를 구하러 간 군의 장수들이 백제 가파리(加巴利)의 해안에 배를 대고 불을 피웠다. 재가 변해 구멍이 되어 작은 소리가 났는데 화살이 날며 우는 소리와 같았다. 어떤 사람이 고구려와 백제가 끝내 망할 징조인가라고 했다.
일본서기》 권 제27 덴지 덴노(天智 天皇)

그렇다면 과연 왜군이 실제로 고구려에 파견되었을까? 일본서기가 전하는 왜국의 고구려 구원 움직임에 관한 기사가 있다.
이 달에 당과 신라인들이 고구려를 공격했다. 고구려가 우리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므로 장군과 군사들을 보내어 소류성(梳留城)에 웅거하게 했다. 이로 말미암아 당나라가 그 남쪽 경계를 침략할 수 없었으므로, 신라가 서쪽 진지를 떨어뜨릴 수 없었다.
일본서기》 권 제27 덴지 덴노(天智 天皇)

즉 당시 왜 조정은 고구려를 구원하기 위해 왜군을 백제 부흥군 본거지인 주류성에 주둔시켰고, 그것이 실효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왜국과 고구려의 군사동맹 가능성이 제기된다. 그런데 이로 말미암아 당나라가 그 남쪽 경계를 침략할 수 없었으므로, 신라가 서쪽 진지를 떨어뜨릴 수 없었다. 의 뜻은 분명하지 않다. 다른 기사 등에서 말하는 당시 상황과 맞물려지지 않는다. 따라서, 이 기사의 '고려'가 백제를 착오로 적은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75] 곧 백제를 지원하려고 주류성에 왜군이 주둔함에 따라, 당군이 웅진성 이남의 구 백제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지 못하였고 신라군 또한 서진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기사가 전하는 왜국의 고구려 지원은 없었던 것이 된다.

혹은 백제 부흥운동에 왜국이 개입하여 주류성에 주둔, 당과 신라를 측면에서 견제하여 고구려를 지원한 것을, 그런 식으로 표현했다고 보기도 한다. 백제에 주둔하던 왜국의 장수가 고구려에 가서 군사 사항을 협의하고 백제 부흥군으로 돌아와 규해(糾解)에게 보고하였던 일도 있었다. 왜 조정은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는 것이 고구려를 지원하는 방략이 될 수 있다고 여겼을 수도 있고, 결과적으로 어느 정도 지원하는 면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때는 일본서기가 만들어질 시점 편찬차의 해석과 의미 부여라는 시각이 강하다. 왜국의 당면 과제는 눈앞에 전개되는 백제 부흥군 지원이었다.

9.4. 백제부흥군, 패배하다

9.4.1. 복신의 사정

해가 지날수록 강해지는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 인물은 바로 복신이었다. 백제 부흥운동을 이해하려면 복신을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복신의 단편적인 기록들은 또 차이가 있다.
8월에 왕이 조카 복신(福信)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니, 태종 이 백제와 신라가 대대로 원수를 맺어 서로 자주 침공한다고 하면서 왕에게 조서를 보내 말했다.
삼국사기》 권 제27 백제본기 제5

무왕의 조카 복신(福信)은 일찍이 군사를 거느리는 장수였는데, 이때 중 도침(道琛)을 데리고 주류성(周留城)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켜서, 전 임금의 아들로서 왜국에 인질로 있던 부여풍(扶餘風)을 맞아서 왕으로 추대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28 백제본기 제6

백제 본기에서 복신은 무왕의 조카로 기술되었다. 그런데, 앞서 전자의 기사인 무왕 시대의 기사는 기본적으로 백제 사신에게 준 당태종의 새서에 근거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구당서는 그 당사자의 이름이 복신이 아니라 신복(信福)으로 되어 있다.
"매번 듣건대 군사를 보내어 쉬지 않고 행토(征討)하며, 무력만 믿어 잔인한 행위를 예사로 한다 하니 너무나도 기대에 어긋나오. 짐은 이미 왕의 조카 신복(信福) 및 고려, 신라의 사신을 대하여 함께 통화(通和)할 것을 명(命)하고, 함께 화목할 것을 허락하였오. 왕은 아무쪼록 그들과의 지난날의 원한을 잊고, 짐의 본 뜻을 알아서 함께 인정(鄰情)을 돈독히 하고 즉시 싸움을 멈추기 바라오."
구당서》 권 제199 열전 제149 동이

후자의 경우는 신당서의 백제전 기사를 전제한 것인데, 신당서 백제전의 기록은 앞부분 조금을 제외하면 구당서 백제전 기사와 동일하다. 그래서 후자인 의자왕 시대의 삼국사기 기록은 구당서 백제전이 전하는 왕의 조카 복신의 기록과 부흥운동에 관한 기사를 조합하여, 전자의 신복과 후자의 복신이 다른 사람인데 동일인으로 간주하여 후자의 복신을 왕의 조카로 기술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또 660년 8월 거병하였을때 귀실복신(鬼室福信)의 관등에 대해 유인원기공비(劉仁願紀功碑)에서는 5위인 한솔이라고 하였고, 일본서기는 3위인 은솔이라고 하였다. 복신이 이미 무왕 28년인 627년부터 당에 사신으로 파견되는 등 이른 시기부터 활약하였고, 장수로 복무한데다, 심지어 무왕의 조카라는 고위 왕족이기도 하다면 만년에 해당하는 660년에 여전히 한솔, 혹은 은솔이었음은 납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성씨가 부여가 아니라 귀실이라는 점도 이러한 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흑치상지의 흑치처럼 부여씨에서 분기되어 그 봉지에 따라 성을 취하였듯이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만년의 낮은 관등은 여전히 이해하기엔 어렵다.

만약 복신을 무왕의 조카로 여기기 어렵다면, 되려 복신에 대한 평가는 더욱 올라가야 한다. 달리 말하면 복신이 부흥운동의 중심으로 부상한 것은 출신 가계보다는 그의 군사적·정치적 역량에서 비롯된 면이 더 크다는 것이다.

복신은 사비성 함락 직후 거병하여 임존성을 중심으로 점령군에 저항하였고, 그 명성이 자자한 명장 소정방 휘하 당군의 공격을 격퇴하여 부흥군의 기세를 크게 세웠다. "오직 복신만이 신기하고 용감한 꾀를 내어 이미 망한 나라를 부흥시켰다."는 이 일본서기 권26에 남아있을 정도. 또한 복신은 정치적으로 기민하게 움직여 왜국에 사신을 보내 왕자 부여풍의 환국과 왜국의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였다. 부흥운동이 산발적으로 각지에서 일어나던 상황에서, 정통성을 지닌 의자왕의 적자인 부여풍을 영입하여 옹립하고 덤으로 왜국의 지원까지 확보함으로서 부흥운동의 구심력을 만들어내었다. 그에 따라 각지의 부흥군이 복신과 연계하게 되었다. 흑치상지와 사타상여가 거병하여 복신과 연계 호응한 것이 그 증거이다.

특히 그는 군사적으로 나당연합군과의 전투를 통해 군사적 역량을 확대함과 동시에 자신의 세력 기반을 구축하였고, 뒤이어서 부흥군 동료 장수인 승려 도침을 죽여 막강한 지위를 차지하는듯 했다. 하지만 이런 복신의 지나친 영향력은 결국 부여풍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9.4.2. 부여풍의 사정

부여풍은 부여풍장이라고도 불린다. 일본서기의 기록으로는 631년 백제에서 왜국으로 건너갔으며, 의자왕의 아들이었다. 다만 631년은 백제 무왕 32년으로 의자왕 즉위 전이다. 그 때문에 실제로 건너간 시점에 대해 631년 설과 641년 설이 있다. 어느쪽이건 간에 부여풍은 왜국에서 십수년을 보내며 긴 시간을 지나다가, 660년 10월 복신이 왜 조정에 부여풍의 귀환을 요청하자 되돌아왔다. 귀환 시기도 661년 9월과 662년 5월로 기록이 제각각이다.[76]

일본서기의 기록으로는 부여풍이 입국하자, 복신이 영접하여 맞이하면서 머리를 조아리고 나라의 정사를 모두 맡겼다, 고 한다. 일단 명목상으로는 부흥군의 모든 국정이 왕족인[77] 부여풍의 휘하에 귀속되었다. 그런데 합리적으로 생각해보자. 과연 정말로 부여풍이 실권자일까?

부여풍은 일본에서 최소 20년 이상을 보냈고, 백제 땅은 최근에야 발을 디뎠으며, 당연히 내부 세력 기반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복신은 반대로 소정방 등을 물리치며 자신의 능력으로 부흥군을 이끌었다. 부여풍이 귀환한 직후인 662년 정월, 왜국은 복신에게 화살 10만개, 실 500근, 포 1천단, 쌀종자 3천곡을 보냈으며, 3월에 부여풍에게 포 300단을 주었다. 이것이 단순히 부흥군에 대한 지원이라면 별 문제는 없다. 그런데 '복신'과 '부여풍' 으로 구분을 짓고 복신에게 주요 군수 물자를 직접적으로 하사한 것은, 그가 부흥군의 중심임을 현실적으로 왜국에서 인정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부여풍의 기반도 무시할 수 없다. 부여풍의 기반은 왜군으로, 그를 호송한 세력이기도 하다. 백제 부흥군에게 백제 주둔 왜군은 가장 중요한 지원 세력이었다.

한편, 662년 12월, 백제 부흥군은 중심지를 주류성에서 피성(避城)으로 옮기려 시도했다. 피성은 김제로 비정된다. (이케우치 히로시의 학설.)
겨울 12월 병술(丙戌) 초하루 백제왕 풍장은 그 신하 좌평 복신 등과 사이노무라지(狹井連)[78], 에치노 타쿠츠(朴市 田來津)[79]와 의논해 말하기를

“이곳 주유(州柔)[80]라는 곳은 농토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도 메말라서 농사지을 땅이 아니고 막아 싸우기에 적합한 곳이다. 이곳에 오래 있으면 백성들은 굶주릴 것이니 피성으로 천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피성은 서북으로는 옛부터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강물이 띠를 두르듯 흐르고 있고 동남으로는 깊은 수렁과 커다란 제방의 방벽에 의거하고 있으며, 주위에는 논으로 둘려져 있고 물꼬를 터 놓은 도랑에는 비가 잘 내려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이 삼한에서 가장 비옥하다. 의복과 식량의 근원이 하늘과 땅 사이에 감추어진 곳이다. 비록 지대는 낮으나 어찌 천도하지 않으리오.”하였다.

이에 에치노 타쿠츠(朴市 田來津)가 혼자 나아가 간하며 말하기를,

“피성과 적이 있는 곳과의 거리는 하룻밤이면 갈 수 있습니다. 서로 이렇게 매우 가까우니 만약 예기치 못한 일이 있게 되면 후회하여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무릇 굶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망하는 것이 먼저일 것입니다. 지금 적이 함부로 오지 못하는 것은 주유가 산이 험한 곳에 설치되어 있어 방어력을 모두 갖추고 있고, 산이 높고 계곡이 좁아 지키기에는 쉽고 공격하기에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약 낮은 곳에 거처한다면 어찌 굳건히 살겠으며 흔들리지 않음이 오늘날에 미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결국 간청을 듣지 않고 피성에 도읍하였다.
일본서기》 권 제27 덴지 덴노(天智 天皇)

경제적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농산물이 풍부한 피성으로 천도하자는 말이고, 반대하는 측에서는 방어의 문제점을 말한 것이다. 결국 천도가 결정되었는데, 천도 후 663년 2월, 신라군이 백제 남부의 4개 주를 불태우고 안덕(安德)(오늘날의 충남 논산) 등을 점령하였고, 이곳이 신라군 수중에 들어가자 너무 피성이 신라군 점령지에서 가까워 바로 위협을 받게 되자 결국 2달만에 주류성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이 사태 자체만 보면 해프닝에 가까우나, 해석에 따라 백제 부흥군 내부의 권력 다툼과 연결시킬 수도 있다. 인용문에서는 피성 천도를 주장한 사람이 부여풍이다. 그런데 도침이 제거된 이후로 복신의 권한은 대단히 막강하여, 부여풍은 심지어 단지 제사를 주재할 뿐 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는데, 그렇다면 이 일은 적어도 복신이 동의는 했다는 것이다. 복신이 동의한 일에 대해서 백제부흥을 도우러 온 왜군 장수가 반대하였다.

타쿠츠 등은 5,000여 명의 병력으로 부여풍을 호송했고, 주류성에 주둔하였다. 왜군은 지원군의 본진이 도착할때까지 나당연합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버티는 것이 중요한 목표일 테고, 그들에게 있어 이 전쟁은 전쟁의 차원에서 끝나는 단기적인 일이다. 즉 그들은 군사적 판단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하지만 토착 기반을 지닌 복신 등은 장기적 측면에서 백성을 결집할 정책을 추구하여야만 한다. 그에 따라 복신과 왜 장수들 사이에서 입장 차이가 있을 수 있고, 그 경우 부여풍은 자신의 기반인 왜군의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갈등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는, 비록 모든 근거가 추정에 불과할 뿐이지만 한번 해봄직한 가정이다.

혹은 진짜로 이 일은 복신보단 부여풍이 주도하였을 수도 있다. 아무리 복신이 권한이 막강하다 해도 부여풍이 일단은 백제부흥군의 왕이니만큼 자기가 하고 싶은 의견을 강하게 밀어볼 수도 있을테니 말이다. 주류성 인근 지역은 부흥운동 초기부터 이를 주도하던 복신의 세력 근거지였으므로, 왜국에서 온 부여풍은 아무래도 거북하여 금강 남쪽의 평원인 김제 지역으로 천도하여 새로운 근거지를 구축하려고 했을 수 있는 것이다.[81] 그리고 위 기록을 보면 주류성이 농사짓기 안 좋다는 점은 팩트였던 듯 하니까 복신으로서도 한 방책이라고 여겨 특별히 반대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말이다.

물론 이 모든건 추정에 불과할 뿐이며 어느 정도 확실해 보이는건 피성 천도가 실패한 뒤 복신과 부여풍의 갈등이 좀 더 노골화 되었다는 정도다.

신라군의 압박이 한층 강화되자 백제 부흥군은 왜국에 달솔 금수(金受)를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왜국은 663년 3월 전장군(前將軍) 카미츠케노노키미 와카코(上毛野君 稚子)에게 27,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신라를 치게 하였다. 이해 5월에는 이누카미노키미(犬上君)[82]라는 인물이 고구려로 가서 군사 관계 일을 고하였다. 아마도 3월에 있었던 왜 지원군 본진 출병에 관한 사항을 알리고, 왜국과 고구려가 남북으로 협동하여 나당연합군에 대응할 전략적 문제를 상의하려고 했던 것처럼 보이나, 고구려는 당시 평양성 침공을 막 저지한 후였기 때문에 백제 부흥군을 지원한 여력이 없었다.

여하간에 그는 이후 돌아와서 석성으로 가 규해(糺解)를 만났는데, 규해는 복신의 죄를 거듭해서 말하였다. 규해는 부여풍의 다른 이름으로 여겨진다. 부여풍이 왜군에게 복신의 죄를 계속해서 말하였다, 라는 것은 그가 복신 처리 문제에서 왜군의 지지를 요청했다고 볼 수 있다. 왜군 입장에서도 토착 기반 세력을 지닌 복신보다 부여풍 쪽이 좀 더 기호에 맞을 것이다. 당나라의 기록에 따르면 양자 간의 불신이 심해지자 복신이 부여풍을 제거하려고 병을 칭하였고, 부여풍이 문병하러 오면 죽이려 하였다. 음모를 눈치챈 부여풍이 측근을 규합하여 기습, 복신을 제거하였는데 일본서기에서는 복신의 최후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였다.
백제왕 풍장은 복신이 모반하려는 마음을 가졌다고 의심하여 손바닥을 뚫고 가죽으로 묶었다. 그런 뒤에 이를 어떻게 처결하여야 할지 몰라 여러 신하들에게 '복신의 죄가 이미 이와 같으니 목을 베는 것이 좋겠는가, 아닌가?' 라고 물었다. 이에 달솔 덕집득(德執得)이 '이 악한 반역 죄인은 풀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라고 하였다. 복신이 덕집득에게 침을 뱉으며 '썩은 개와 같은 어리석은 놈' 이라고 하였다. 왕이 시종하는 병졸들로 하여금 목을 베어 소금에 절이도록 하였다.
일본서기》 권 제27 덴지 덴노(天智 天皇)

풍운아 복신은 이렇게 사라져 버렸다. 백제 부흥운동에 있어 복신의 절대적인 비중을 생각하면 이는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일이었다. 복신의 목을 소금에 절이는 매우 강경한 처벌은 복신의 추종 세력에 대한 경고의 차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일로 백제 부흥군의 상호신뢰와 헌신은 큰 타격을 입었고, 내분의 틈을 타 신라군과 당군도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부여풍이 믿을 것이라곤 왜와 고구려의 지원 밖에 없었다.

9.5. 주류성 공략전과 백강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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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진성에 버티고 있던 당군은 여러모로 힘든 상황이었으나, 유인궤의 제안 이후 당나라 본토에서 손인사의 7,000여명의 구원병이 도착하자 사기가 크게 올랐다. 이 7,000명의 병사는 산동 해안 지역에서 선발되었다. 여기에 문무왕 김흠순· 김인문 등 장군 28명과 대병을 동원하여 합세, 웅진성으로 향하였다.

나당연합군은 웅진성에서 합동 회의를 열어 최종 작전을 마무리 지었다. 육군은 문무왕이 이끄는 신라군과 손인사· 유인원의 당군이 주류성으로 진격하고, 유인궤와 두상(杜爽), 그리고 부여융[83]이 지휘하는 해군과 식량 보급선단은 '웅진강에서 백강으로 가' 육군과 합류하여 주류성으로 진군하기로 합의하였다. 이 백강(白江)이 어느 강인가, 의 문제는 금강 하류설, 그리고 동진강(東津江) 설이 대립하고 있고, 이는 주류성의 위치 비정 문제와도 연결된다.

일단 나당연합군의 이 당시 주력은 분명히 육군이었다. 당장 참가하는 인원들의 면면만 봐도 알 수 있는데, 문무왕과 손인사, 유인원이 이끌었고, 이에 반해 해군은 유인궤와 두상, 부여융 등이 이끌었다. 물론 유인궤는 나중에 가면 열전이 남을 정도로 유명해지지만, 이 당시는 유인원이 웅진도독부의 책임자였고 유인궤나 두상은 참모, 별장급 인물들이었다.[84] 병력도 문무왕이 28명의 장수들을 동원한 만큼 숫자는 수만명이 넘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나라 부대 중 웅진성에 주둔하던 유인원의 10,000명은 이미 오랜 전투로 피폐해졌을 것이고, 새로 투입된 병력도 손인사의 7,000명 정도라는 점을 보면 이 당시 육군의 핵심은 절대적으로 신라군이었다.

나당연합군은 진격로에 대해 논의했고, 여기서 결정된 것은 부흥군의 세력 아래 있는 성으로서 지금의 서천군 임천면의 성흥산성(聖興山城)으로 비정되는 가림성(加林城)은 사비성에 근접해 있지만 성이 가파르고 험준한만큼 공략하려면 병력 손실이 많고 기일이 걸릴 것이므로 건너 뛰어버리고, 주류성을 직공하자는 계책이었다.

이 움직임은 부흥군 진영에도 알려졌다. 동시에 이오하라노키미 오미(廬原君 臣)가 이끄는 왜군 지원병 10,000여 명이 온다는 소식이 있자, 8월 13일 부여풍은 이를 맞이하러 백강구로 나섰다. 이 부대가 앞서 말한 신라를 친다는 27,000여명 병력의 일부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 당시 파견된 부대는 사비기노강(沙鼻岐奴江) 등 두 개의 성을 빼앗았다는 것만 알려져 있다. 상대적으로 신라군이 백제에 집중되어 정작 본토가 약할테니 이를 공격하여 백제 지역에서 신라군의 공세를 풀어보려 했다는 시각이 있다.

그런데 그 부대 일부가 부여풍이 긴급하게 구원을 요청하자 진로를 급하게 바꿔 백강구로 달려갔는지, 혹은 또 다른 파견군이 도착했는지 기록 부재로 알기가 어렵다.

8월 17일 무렵, 나당연합군 주류성을 포위했고, 170여척의 당나라 해군은 백강구에 이르러 육군에 공급할 군량을 하역한 후, 진을 치고 바다로부터 주류성을 구원하러 진입하려는 왜군을 대비하였다. 27일 왜 해군이 백강구에 도달하여 주류성에 온 일부 왜군 및 부흥군과 합세하였고, 백제의 기병이 강어귀 언덕에 포진하여 왜선을 엄호하였다.[85] 곧이어 왜 해군의 선단이 당 해군에게 선공하였으나 불리해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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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경총요(武经总要)의 몽충(艨衝) 그림
당나라 해군은 그런 왜 선단을 추격하지 않았다. 이 당시 양측의 전력을 보면, 당나라 함선은 170여척. 왜 함선은 400여척이었다.[86] 접전은 다음 날부터 벌어졌다.

먼저 신라의 기병이 백제의 기병을 공격했고, 왜 해군이 당나라 해군에 돌격하였다.
일본 장수들과 백제왕은 기상을 살피지 않고 서로 일러 말하기를,

"우리들이 앞다투어 싸우면 저들이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

라고 하면서, 중군의 군졸들을 이끌고 대오가 어지럽게 나아가 굳게 진치고 있는 당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당이 바로 좌우에서 배를 협공하여 에워싸고 싸우니 잠깐 사이에 일본군이 계속 패하여 물에 빠져 죽는 자가 많고 배가 앞뒤를 돌릴 수 없었다. 에치노 타쿠츠가 하늘을 우러러보고 맹세하고 분하여 이를 갈며 성을 내고, 수십 인을 죽이고 전사하였다. 이때 백제왕 풍장이 몇 사람과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로 달아났다.
일본서기》 권 제27 덴지 덴노(天智 天皇)

간단하게 결과만 말하자면 백제 부흥군의 대패. 그야말로 처참할 정도의 패배였다.

원인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견해들이 있다. 우선, 당나라 군대가 백강구에 도착한건 8월 17일로 충분히 여유가 있었고 주변 환경이나 전술 준비에 유리한데 비하여, 왜 해군은 뒤늦게 도착했는데도 불구하고, 앞의 일본서기의 기록처럼 기상도 살피지 않고 바로 전투에 들어간 전술적 실책이다. 구당서의 기록으로 이 전투에 대한 묘사를 보면 연기와 화염 혹은 바닷물이 모두 붉게 물들었다 같은 언급들이 보이는데 왜군의 선단들이 화공에 당해버렸다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화공에서 제일 중요한건 기상을 살피는 일이다.[87]

또 관련 기록을 보면 당나라 군대는 진을 형성하여 일정한 전술에 따라 절도 있는 움직임을 보여준 것이 나타난다. 이에 비해 왜군은 그런 모습이 부족했는데, 왕조 국가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는데는 세계에서 최고로 이골이 난 중국이나, 여하간에 국가가 징발 편성하여 훈련시킨 신라군에 비해 왜군은 여러 지방 세력가들의 군대를 연합한 상태라 일원론적 지휘체계에 따른 군령들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중군의 군졸들을 이끌고 대오가 어지럽게 나아가 굳게 진치고 있는 당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라는 기록에서 보이듯, 왜군은 개별적인 전투에선 개인적으로 용맹하게 돌진하는 식으로 싸우려 했으나 이에 비해 중국은 집단 전술에 관해서는 이미 일본이 신석기 시대였던 조몬 시대 무렵에 역량이 쌓일대로 쌓인 나라다.[88] 왜군의 개별적인 용약 돌진은 당군의 두꺼운 진형을 뚫지 못하였고, 당의 전선이 정연하게 대오를 갖추어 좌우로 전개하여 왜 선단을 포위하자, 왜 함선들이 우왕좌왕하며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혼란에 빠진 채 화공을 당하여 대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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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경총요(武经总要)의 해골선 그림

아예 이런 점을 토대로 백강 전투뿐만이 아니라 백제 부흥운동에 파견된 왜군 전체의 성격을 보려는 경우도 있다. 662년 5월의 1차 파견군이나 663년 2월의 2차 파견군은 전·중·후 장군이 이끈 것으로(1차에선 중군은 생략) 되어 있고, 백강 전투에서도 중군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그런데 이게 상호간의 상하 통속관계를 나타내는것이 아니라 징병 지역에 따른 편제나 혹은 출병 시간에 따라 구분된 것으로 여기면서, 각 장수는 죄다 상호 병렬적 관계이며 3군 또는 2군 전체를 통솔하는 수직적 지휘계통 결여 상태였다고 보는 것이다.[89]

이런 면에서 볼 경우, 백강 전투의 승패는 단순히 싸우고 잘 싸우고를 못 떠나서 양측 국가 체제의 상이함에서 비롯하는 군대의 편성 원리와 성격 차이, 율령(律令) 제도에 기저를 둔 국가와 군대 운영 여부에 따른 차이에서 근본 원인을 찾는것이 되어버린다.

이에 대해서 출전한 장수와 사병의 출신 지역이 매우 광범위함을 지적하기도 한다. 즉 당시 참전한 사병과 장수의 출신지가 일치하지 않음으로, 이를 중시하여 병사가 장수에 사적으로 속한 병력이 아니라 국가가 각지에서 징발한 병력이고, 장수는 조정 관원 중에서 파견하였음을 말한다고 해석하여, 이들 군대가 각지 호족의 무장력을 임시적으로 규합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전·중·후 표현 역시 보편적인 군대 편제이고, 출정군에 '대장군'의 존재를 전하는 기록이 중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 입각할 경우, 당시 왜군 부대의 성격을 지방 유력자 휘하 부대들의 임시적 연합이라고 보는 그간의 설은 백강 전투에 관한 구체적 기사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그 무렵까지 왜국의 군대 동원 형태와 성격 이해를 토대로 설명한 것으로서,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논리적 비약이라는 것이다.
  • 일단 당시 왜국이 율령제를 정착시키기 전이기는 하다. 그것만으로 전투 패배에 대한 설명이 다 되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더 나아질 수 있는 부분이 그렇지 못하게 된 부분 정도는 있을 것이다.
  • 복신의 처형에 따른 부흥군 내부의 분열과 갈등 문제다. 왜군과 부흥군 사이의 갈등과 불협도 상정할 수 있다. 어느정도 전투력 저하의 요인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 함선의 차이에 대한 고려다. 당나라의 여러 주력함들은 견고한 대형 군선이고, 몽충은 높고 커서 접근전에서 적을 내려다보며 싸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배끼리 부딪쳐 상대방 배를 부수는 방법에서도 우위를 가지고 있고, 해골선은 적선을 쳐서 격파하는 부분을 장치하여 접근전에서 유리하게 고안된 군선이다.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왜군의 함선들은 소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백강 전투에 대해 생각해볼 것은 이 전투의 비중을 어느 정도로 볼 것이냐는 문제이다. 이 전투를 동아시아 국제 정세를 판가름하는 결정적인 회전이라고까지 보는 경우도 있지만, 이 전투의 주력이 당군과 왜군이었음을 매우 강하게 의식하여, 마침 임진왜란이나 청일전쟁처럼 고대 중국세력과 일본 세력이 한반도에서 양자간에 자웅을 겨룬 전투인 것처럼 인식하려는 의도가 어느정도 있다.[90]

물론 이 전투를 고비로 왜국 세력이 고대 한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니, 이는 한일 관계사에서는 대단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전투 후에 일본이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인 율령제를 형성하였던 만큼, 일본사 전개에 있어서도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당나라에게는 이 전투는 별로 비중이랄 게 없는 전투였다.[91] 이는 신라에게도 주된 전장은 아니었고, 전투 규모도 양측 모두 실제 동원한 병력이 만수천여 명 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백강 전투에 관한 과도한 강조는 신라군의 존재를 홀시하게 하고, 신라는 피동적 존재로 파악하는 부작용이 있다.

백강 전투가 벌어지기 전인 8월 13일, 신라군이 주축인 육군은 주류성 지역에 도착했고, 8월 17일부터 성을 에워싸고 공략전을 펼쳤다. 일본군이 백강구에 도착한 것은 이때부터 10일 후였다. 또 부여풍은 신라군이 도착한 13일 휘하의 일부 왜군과 성에서 빠져나가 왜군을 맞이하러 떠났다. 성이 포위되기 전에 나가서 왜국의 지원군과 연결, 성 안팎에서 협공하려 하거나, 최소한의 퇴로를 확보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앞서 설명한 대로 백강 전투에서 부여풍은 대패했고, 주류성은 며칠 더 버텨보았지만 부여풍이 고구려로 달아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마침내 9월 7일 농성하던 백제 부흥군과 왜군이 항복하였다. 주류성의 함락 소식이 전해지자 인근 백제의 여러 성도 잇따라 투항해버렸고, 좌평(佐平) 여자신(余自信), 달솔(達率) 곡나진수(谷那晉水) 및 억례복류(憶禮福留)와 목소귀자(木素貴子) 등이 많은 백제인과 함께 퇴각하는 왜군을 따라 일본 열도로 망명하였다.

그런데 이례적인 기록이 있는데, 이 백강 전투 당시 탐라 국사가 포로로 잡혔다는 것이다(구당서 유인궤전). 이 말은 탐라인이 어떤 형식으로든 전투에 참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탐라가 동성왕 시기에 백제에 귀복하였고, 백제 멸망 후인 661년 5월에는 왜국에 '왕자' 아파기(阿波伎) 등을 보냈다고 한다. 그 해 8월에는 당나라에 조공사를 보냈고, 문무왕 2년에는 탐라국주좌평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신라에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백제 멸망 이후 급변하는 주변 정세를 탐라국 나름으로 탐색하려는 움직임으로 보인다.

백강 전투 현장에 탐라인이 있었음은 탐라인이 백제와 왜국 측에 가담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탐라국사가 잡혔다는 이야기로 보아 군사적인 참여는 아닌것으로 보이고, 백제 부흥군에 보낸 사절로 보인다.

백제부흥운동의 핵심이었던 복신이 비참하게 죽었고, 왜국의 지원군마저 모조리 박살나며 주류성이 함락된 시점에서 백제의 부흥운동은 사실상 실패가 결정되었다고 불 수 있다. 하지만 임존성에서는 지수신(遲受信)이 끝까지 저항을 계속하였다. 그러자 당군이 한때 백제 부흥군의 장수였던 흑치상지 사타상여를 전면에 내세워 압박하자, 마침내 연말에 임존성이 함락되었고 지수신은 고구려로 달아났다.

이로 만 3년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7세기의 백제부흥운동은 일단 끝이 난다.

9.6. 에필로그

백제는 일단 망했고 그 결과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일본 역시 백강 전투 이후로는 백제 유민을 받아들이기만 할 뿐 더 이상 백제 부흥을 지원하지 않았다. 이 전투 이후로 신라와 왜국의 관계가 더 악화되었을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의외로 정반대로 일본서기 기록상 신라와 왜국은 서로 사신을 주고받는 횟수가 이전보다 크게 늘어난다. 백강 전투 직후~8세기까지 외교교섭의 빈도수는 백제 때만큼 끈끈하지는 않았지만 후대 고려시대나 조선시대보다는 훨씬 잦고 활발했다. 이는 왜국과 신라의 이해관계가 서로 맞아떨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왜국 측은 백제 저항세력 수뇌부가 백강 전투로 완전히 무너졌으니 더 이상 백제를 도와줘봐야 백제 부흥의 가능성이 없는데다가 백제 저항세력을 완전히 제거한 나당연합군이 이번엔 왜국에도 쳐들어오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규슈 지역 해안에 방어성을 쌓는 등, 혹여나 나당연합군이 왜로 쳐들어올 가능성을 대비했다. 결국 실행되진 않았지만 답설인귀서에 의하면 당이 왜를 공격한단 명분으로 함선을 수리했던 일도 있어 일본 측의 설레발만은 아니었다. 또한 신라 측 역시 이 전투 직후 고구려, 그리고 결국 당나라와도 싸우게 될 것을 차츰 확신할 여러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에[92] 그 전에 후방의 위협을 없앨 필요가 있었다. 국제사회에선 영원한 동맹도 영원한 적도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러나 치열하게 저항하던 백제인들 중 일부가 왜국으로 망명하였다. 지배층이 아닌 일반 민중 중에서도 바다를 건너간 사람들이 있어, 지금의 도쿄 일대의 관동지역인 동국에 거주하던 백제인 2,000여명에게 663년부터 3년간 식량을 왜국의 조정에서 공급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백제인들에게 조국이던 백제는 완전히 사라졌고, 이제 다시 일어날 방법도 없었다. 왜국으로 떠나간 백제인들은 이제 돌아올 곳이 없었고, 일본 땅에 남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일본인으로 동화되었다.

왜국으로 망명한 백제인 가운데 상당수는 자신들의 재능을 최대한 활용하여 왜 조정에 등용되었다. 665년, 달솔 답발춘초(答鉢春初)는 장문성을, 달솔 억례복류와 사비복부(四比福夫)는 다자이후의 방어를 위해 쌓은 오오노성과 연성의 축초 책임을 맡았다. 671년에 목소귀자·곡나진수·억례복류·답발춘초 등은 병법에 밝다는 점을 평가해 대산하(大山下)의 관위가 주어졌다. 좌평 여자신과 사택소명(沙宅紹明)은 법관대보(法官大輔)에 임명되었다. 그 이에 몇몇은 의약, 오경, 음양 등에 밝다는 재능을 인정받아 관위를 받았다. 이처럼 백강 전투 이후 망명한 그들은 일본에서 전문인으로 능력에 대한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일본 조정의 배려에 의지하여 살아갈 수 밖에 없었고, 여기에 기댈 수 밖에 없었다. 백제부흥운동과 고국 복귀를 바라더라도, 자력으로는 이를 구체화할 역량 같은건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자연스럽게 사라져갔다.

나머지 백제의 지배층은 충상과 같이 일부는 신라의 지배층으로 포섭되거나, 백제부흥운동 과정에서 죽어나갔고, 일반 민중들은 신라인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로의 동화는 결국 실패했고, 백제는 약 250년 만에 다름 아닌 신라 군인이었던 견훤의 손에 후백제로 부흥하게 된다.

신라는 바로 이런 일을 막기 위해 부여-공주 일대에 진골 귀족을, 익산 이남 전남북 지역엔 고구려 유민을, 전남 중동부에는 원신라 지역 사람들을 대거 사민했지만, 왕경인이 아니면 권력층에 진입할 수 없었던 체제를 극복하지 못했던 탓에 지역에 이식된 귀족층은 신분 하락과 푸대접에 분노해서 신라를 버리고, 여전히 백제 유민 의식이 잔존했던 지역 분위기에서 실력을 획득해 성장한 호족들이 이에 편승하면서 이런 안전 장치들은 의미를 잃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성공한 백제부흥운동에 정작 백제의 원래 영토였던 옛 침미다례인 전남 서남부 영산강 세력은 참여하지 않았으나, 신라가 고구려, 백제와 맞서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육성했고 그 이후로도 그 두 나라에게 한 번도 함락되어 본 바 없는, 말하자면 신라 중의 신라라고 할 충북 남부-경북 서남부 일대[93]는 백제부흥에 동참했다. 한편 이 과정에서 후백제는 옛 백제가 광개토대왕에게 빼앗긴 이후 끝내 수복하지 못했던 충북 일대도 확보하게 된다.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는 후백제 참조. 요약하면, 옛 백제 지역이 백제유민의식을 잃지는 않았으나 밀도 높은 신라의 직접 지배를 이백여 년 겪어 정치, 경제, 군사, 문화, 사회적으로는 신라화가 크게 진행된 사실이, 백제 부흥을 성공시킨 이가 신라인 혈통의 신라 정규군 장수였던 일과 맞물려 발생한 아이러니였다.

후삼국시대 후백제가 망했어도 유민 의식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어서 한참 후 고려시대인 1237년에 나주에서 이연년이 주도하여 백제 부흥을 기치로 이연년 형제의 난을 일으키지만 김경손에게 패해 진압당하고, 이후 대몽항쟁 과정 중에 소멸된다.

10. 고구려멸망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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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연개소문의 사망과 후계자 구도

백제가 손쓸 새도 없이 무너진 충격 속에서도 고구려는 괴력을 발휘하며 또다시 당나라를 물리치는데 성공했으나 왜군은 백강 전투에서 궤멸당하여 한반도 전선에서 한 발 물러났기에 고구려는 양면으로 포위된 형국이었다. 하지만 당나라는 여기서 더 몰아붙이는 것이 아니라 봉선행사를 올리면서 동방정책에 대한 갈무리를 암시하고 있었다. 당의 전쟁의지도 한계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전란의 시대는 소강의 문턱에 올랐다. 하지만 문제는 내부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연개소문은 막리지, 대모달로서 군사권을 장악하여 국정을 주도하였다. 과도기를 거친 후엔 대대로가 되어 귀족 회의를 통해 국정을 운영하는 방식을 부활시켰는데, 공고해진 자신의 권력을 귀족 회의라는 공식적인 기구를 통해 행사함으로서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연개소문은 뒤이어 아들에게 자신의 권력을 넘겨주기 위한 조처를 취하였다.

장남인 연남생은 묘지명에 따르면 이미 15살에 중리소형(中裏小兄)을, 18살엔 중리대형(中裏大兄), 23살엔 중리위두대형(中裏位頭大兄)이 되었으며 이듬해 장군직을 받았고, 28세에는 막리지 삼군대장군이 되었으며 32세에 태막리지가 되어 군국을 총괄하였다. 이는 연남산도 비슷하며, 연개소문의 아들들은 아버지를 뒤이어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연남생이 태막리지가 될 무렵 연개소문이 사망하였다. 연개소문은 세 아들 중 누구 한명을 골라 권력을 집중시키지 않았고, 세 아들 모두 군국의 운영에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 이는 그가 죽은 후에 권력 투쟁을 야기할 수도 있는 조치였다. 물론 세 아들이 협력을 하며 외적을 물리친다면야 죽은 연개소문이나 고구려 입장에선 아주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어떻게 사람 마음대로 되겠는가. 특히나 자식 일이란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세상 이치다.
이 달에 고려 대신 개금이 죽었다. 그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유언하기를 '너희 형제는 물과 고기처럼 화합하여 작위를 둘러싸고 다투지 마라. 만약 그렇지 못하면 반드시 이웃 나라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라 하였다.
'''《 일본서기》 권 제27 덴지 덴노(天智 天皇)
실로 그렇게 되었다. 그저 웃음거리가 되는 것보다는 더 심각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10.2. 남생의 반란

연씨 집안의 장남 연남생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최고 집권자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666년 초, 지방의 여러 성을 순시하러 나가면서 수도의 일을 두 동생에게 일임하였다.

그런데 수도를 비운 사이 두 동생에게 어떤 사람이 형인 남생이 그들을 미워하니 먼저 도모하는 것이 옳다고 이간질하였고, 남생에게는 두 동생이 형이 수도로 돌아오면 권력을 빼앗을 것을 두려워하여, 형을 몰아내려 한다고 참소하였다. 남생은 그런 말을 듣자 불안함을 느껴 평양으로 사람을 몰래 보내 두 동생의 동태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 사람이 남산과 남건에게 사로잡혔다. 두 동생에게 있어서는, 형이 자신들을 의심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셈이다.

위기의식을 느낀 남산과 남건은 즉시 평양으로 돌아오는 남생을 가로막아 오지 못하게 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졸지에 권력에서 밀려난 남생은 급히 옛수도였던 국내성으로 달아나 그곳에 자리를 잡고 동생들과 대결하였다. 하지만 국내성 세력만으로는 수도 탈환이 어려웠고,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해지는 처지에 초조해하다가, 결국 당나라에 나라를 들어 항복하는 길을 택하였다.

남생은 대형 불덕(弗德)을 당나라에 파견하였고, 오골성을 공격하였다. 오골성 공격은 쉽지 않았고, 당나라는 고구려의 최고 집권자가 느닷없이 투항하겠다고 하자, 전혀 예상외라 쉽게 믿어주지 않았다. 다급해진 남생은 다시 서북쪽으로 소자하 유역을 거쳐 혼하 방면으로 나가 대형 염유(冉有)를 재차 보내 투항의 의지를 밝혔고, 여름에는 아들인 연헌성(淵獻誠)을 보내 당에 거듭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제 당나라가 보기에도 남생의 투항은 분명해졌다. 일단 확신이 생기자 당은 적극적으로 나섰고, 계필하력을 파견하여 남생을 구원하였다. 666년 9월, 요하를 건너 침공해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남생군과 조우하였으며, 남생은 가물(可勿)·남소(南蘇)·창암(倉巖) 등의 성을 들어서 당나라에 바치고 투항하였다.

남생은 또 국내성 등 6개 성을 바쳤는데, 이렇게 되자 고구려 서북부 지역 깊숙이 당의 세력권이 뻗쳐서 들어온 형상이 되었다. 고구려 중앙 정부는 군대를 파견하여 남생을 공격하려 했지만, 고구려의 옛 수도인 국내성은 압록강 중류 지역의 요새로 외부에서 공략하기에 힘들었으며, 무엇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고구려 최고 집권자였던 남생이 적이다 보니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667년 남생은 직접 당나라에 입조하였다.

연남생은 고구려의 최고 집권자였고, 연개소문 생전부터 단계를 밞아 올라가면서 이 자리에 오른 만큼, 고구려 내부의 각종 기밀이나 정보에 대해서는 빠삭했다. 더구나 남생이 당나라에 투항한 것도 형제간의 원한인 만큼 어떤 가치나 이념보다도 강한, 복수심이라는 요소 때문에 그는 당나라에 적극 협력하였다.

집권층의 분열이 벌어지면서 방위에 구멍이 뚫리고 후방의 중핵지역이 흔들리자 누가 보아도 고구려의 패망은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그 기미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것은 고구려인들 본인들이었던 듯 하다.

666년 12월,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淵淨土)는 자신의 관할 지역인 12개 성과 수천명의 백성을 들어 신라로 투항하였다. 이 12개 성은 지금의 강원도 북부와 함경남도 남부 일대로 추정된다.

기록의 부재로 이 형제들의 다툼이 벌어지며 분열되는 과정에서 어느 편이 먼저 대립을 촉발시켰는지, 그 중간에서 부추긴 주체들이 과연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형제들이 분열하고 그 과정에서 당이나 신라의 공작이 있었을 수는 있다. 이미 20년 동안의 연개소문 집권기를 거친 고구려의 정치 기구는 이 분열의 대립에서 별다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왕이나 귀족 회의 등 어떠한 권력 장치도 이 과정에서 작용하지 못했고, 갈등을 조정한다던가 혹은 어느 한 편으로 힘을 몰아주어 권력의 혼돈 상태가 빨리 종결되게 하는 일에도 실패하였다.

10.3. 평양성은 불타오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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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남생의 투항이라는 절호의 기회를 이용, 당나라는 666년 12월, 이세적을 사령관으로 한 50만 대군을 투입하였다. 667년 2월 이세적이 이끈 대군은 요하를 건너 신성을 포위하였다. 요동 방어선 북방의 최고 요충지인 신성은 수십만 당나라 군대에 맞서 수 개월간 치열하게 항전했지만, 9월 사부구라는 자가 신성 성주를 묶어서 당군에 항복함으로써 신성은 허무하게 당나라에 함락당하게 된다.

함락시킨 신성 고간(高侃) 등의 장수를 두어 지키게 한 이세적은 주력군을 이끌고 요동성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이에 대응해 연남건은 요하 지류에 주둔하고 있던 수십만의 고구려군과 말갈군을 동원하여 신성 탈환에 나서며 한편으로는 소자하 유역의 목저성·창암성·남소성 등을 공격하여 재차 고구려 중앙 정부에 귀속시켰다. 그렇게 되자 신성의 당군과 연결이 차단된 국내성 지역의 남생군은 고립되었다.

만일 이 작전이 유효하게 전개되었다면 고구려는 국내성 지역을 회복하고 신성을 탈환, 이세적의 군대를 북쪽에서부터 압박하고 보급선을 위협하면서 지구전을 펼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은 그렇게 희망사항대로 전개되지 않았다.

신성을 공격하던 고구려군은 당군에게 격파당했고, 나아가 계필하력 설인귀는 당군을 이끌고 소자하 유역에 진출, 고구려군을 박살내고 남생군과 다시 조우하였다. 이에 당군은 신성을 중심으로 동으로는 국내성에 이르는 넒은 지역을 확보하고, 압록강 이북의 고구려 영역을 남북으로 양단하는 형세를 구축하였다. 당군은 이 축을 중심으로 점령지의 폭을 확대하면서 고구려의 숨통을 조였다.

이세적이 이끄는 당나라 본대는 신성을 떠나 16개 성을 한번에 쓸어버린 후, 압록강 하구에 있는것으로 알려진 대행성(大行城)으로 나아갔다. 국내성 방면으로 진격하던 계필하력의 당군도 오골성을 지나 대행성으로 나아가 이세적의 군단과 결합하였다.

이미 여기까지만 해도 고구려는 국가 존립이 위태로울 지경이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슬슬 신라군마저 북진을 개시하였다. 667년 이세적의 당군이 요동을 공격할때 신라는 파진찬 지경(智鏡)과 대아찬 김개원(愷元)을 요동 전선에 파견하였고, 당으로부터 평양성 공략전에 신라군이 합류해줄 것을 요청받았다. 이에 따라 문무왕은 8월 김유신 등 장군 30여명을 거느리고 수도를 떠나 9월 한성정(漢城停)에 도착하여 당군이 평양으로 오기를 기다렸다. 같은 시기 당나라 장군 유인원과 신라 장수 김인태는 각각 백제 지역에 주둔하던 당군과 신라군을 거느리고 비열도(卑列島)를 따라 북진하였다.

10월 2일, 이세적은 평양성 북쪽 2백여리 지점까지 도달하였다. 그리고 촌주 대나마 강심을 거란병 80여기와 함께 한성에 파견, 신라군의 진격을 촉구하였고, 이에 응한 문무왕은 북진하여 11월 11일, 장새에 이르렀다. 그런데 11월 이세적의 군대가 회군하였다는 소식을 들어 별 소득도 없이 철수하였다.

평양성 일대에서 당군이 철수하였지만, 당나라 군이 본토로 철수한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듬해 668년의 작전은 다시 요동에서부터 진군해야 한다. 하지만 668년 2월 설인귀는 당군을 끌고 북으로 진격하여 지금의 장춘 농안 지역에 있었던 북부여성을 공략하고, 부여천 일대의 30, 40여성을 점령하였다. 당은 이 작전으로 요서의 연군 ─ 통정진 ─ 신성으로 이어지는 당군의 주된 보급선을 북에서 위협할 수 있는 고구려 세력을 제거하였다.

이는 설인귀의 당군이 신성 상변에 주둔하던 당군 본영에서 출발하여 북으로 진군했음을 말한다. 당군은 667년 11월 이후 당 본토와 연락이 용이한 요동의 신성과 요동성 일대로 전선을 축소하고, 국내성 일대의 남생군과 연결하여 방어에 임하면서 겨울을 버텨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영역에서 당군이 월동할 수 있음은 고구려의 저항력이 바닥에 바닥까지 약화되었음을 말한다.

충분히 휴식하고 보급을 받아 전력을 재정비한 당군은 668년 여름, 재차 평양성 공략에 나섰다. 신라군도 6월 21일 평양성을 향해 수도를 떠나 진발하였다. 신라군의 규모는 삼국사기 김인문 열전에 따르면 20만에 달하는 대군이었다.[94]이번에는 김유신이 고령에다 풍병에 시달리고 있어 수도에 머물면서 후방의 주요 문제를 총괄하게 하였다.[95]

신라군 본대가 출진한 지 얼마 안 지나 6월 25일에는 고구려의 대곡성( 평산군)과 황해도 신원군에 있는 한성 등 2군 12성이 웅진도독부에 항복하였다. 이제 한강 하류에서 대동강까지 신라군의 진격로는 문이 훤하게 열려졌다. 7월 16일 문무왕은 한성주로 행차하여 독전하였다. 신라군은 이렇게 황해도를 거의 무혈입성하고 평양 근교까지 다가갔고, 신라군에 대해 연남건은 상당한 숫자의 고구려군을 투입해 성문을 열고 평양성 동쪽 근교 사천 들판에서 신라군을 저지하려 하지만 김문영이 지휘하는 신라군이 크게 승리하고( 사천 전투), 남하한 당군과 합세하여 평양성을 포위했다. 마침내 9월 21일, 신라군과 당군이 회합하여 평양성을 포위하였다.

이후 나당연합군이 포위한 평양성을 적극적으로 공격해 한 달 이상 많은 전투가 벌어졌는데, 삼국사기 문무왕본기의 논공행상 기사에 의하면 평양소성(平壤小城), 평양성 대문, 북문, 평양 남쪽 다리(南橋) 등 여러 장소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평양 군주 술탈(述脫)이 신라 한산주 소감 박경한(朴京漢)에게 죽었을 정도로 치열했다고 한다.

고구려는 이미 물리적으로는 역량이 바닥난지 오래고, 정신적인 저항력도 지배층끼리의 내분과 투항 등으로 고갈된지 오래였다. 한달 남짓 포위가 이어지자 보장왕 연남산을 보내 당군에 항복했지만, 연남건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농성을 이어가려 했다. 그러자 평양성 방어 임무를 총괄하는 승려 신성(信誠)이 당군에 내응하여 성의 문루에 불을 지르고 투항함에 따라 마지막 방어벽도 무너졌다. 연남건은 칼로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포로가 되었다.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 한 영역을 차지하고, 기나긴 세월동안 동아시아 세력권의 한 자리를 차지했던 고구려는 이렇게 멸망했다. 당나라 부대는 성에 올라 북을 쳤고, 성에 불을 질렀다. 둥둥 북치는 소리가 울려퍼지면서, 타오르는 불꽃과 함께 고구려는 무너져내렸다.[96]

10.4. 고구려 유민들의 에필로그

고구려 멸망 후 졸지에 '유민' 이 되어버린 고구려인들의 행보는 몇 갈래로 나뉘어졌다. 평양성 함락 이후 이세적 보장왕 이하 고구려 지배층을 포로로 잡아 회군하였다. 보장왕 등은 당군의 전승 기념 의식으로 당태종의 무덤에 포로로 바쳐졌으며, 당고종에게 사죄하는 의례를 올려야 했다. 당고종은 보장왕에게 벼슬을 주었다.

연씨 삼형제 중 연남생고구려 공략에 힘쓴 군공을 인정받아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의 벼슬을 받았고, 연남생의 아들 연헌성도 관직을 얻었다. 평양성에서 일찍 항복한 연남산은 사재소경(司宰小卿)에 임명되었다. 끝까지 저항한 연남건은 머나먼 중국 남부에 유배되었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은 평양성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고 설인귀에게 20,000명의 병사를 주어 주둔하게 하였다. 그런 뒤에 5부 176성 69만 호의 옛 고구려를 9도독부, 42주, 100현으로 재편하고 고구려인 가운데 투항하였거나 협력한 자들을 도독·자사·현령으로 임명하여 표면에 내세우고, 당나라인 관리가 실제적으로 통치하게 조처하며, 안동도호가 이들을 총괄하게 하였다. 새로이 행정 단위를 구획하는 등의 일에는 장안에 머물던 연남생이 깊이 간여하였다.

안동도호부는 고구려인의 반발을 원천적으로 약화시켜 당의 지배를 원활히 하기 위한 방책으로, 부유하고 힘 있는 고구려인을 당의 내지로 대거 강제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감행하였다. 고구려 중심부 지역에 거주하던 유력한 민호 28,200여 호가 강제 이주당했고, 이는 고구려인 사회를 뿌리채 흔들어버리는 일이었다.

이에 고구려 유민 중 일부는 당의 지배에 적극적으로 무력 저항하였다. 또 다른 방책으로는 당의 지배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였는데, 전자의 경우는 검모잠의 봉기가 그 예에 해당한다. 요동 지역에서도 고구려 유민의 봉기가 잇따랐다. 당태종의 침공을 저지했던 안시성이 주요 근거지로, 다만 유민들의 무력 봉기는 서로간의 조직력 부족과 당군의 대처 때문에 673년 무렵까지는 거의 진압되었다.

이러한 반당 저항 운동 과정에서 다수의 고구려 유민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나갔다.
  • 첫 번째는 신라로 합류한 이들로, 원주지가 신라로 병합되면서 귀속된 사람들과 연정토 등 처럼 집단적으로 신라에게 내투해온 이들이 있었다. 물론 전쟁 포로로 잡혀온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 부흥운동 과정에서 활약하던 사람들은 전황이 좋지 않아 대부분 신라군으로 합류하였다. 다만 신라로 내투한 집단은 크게 세 부류가 있었는데 각기 입장은 조금씩 달랐다.
    고구려 멸망 직후 내투했다가 전북 금마저로 사민된 부류, 고구려의 중심지였던 패서 지역(지금의 황해도 일대)에 그대로 남은 부류, 그리고 대조영 집단과 함께 영주 지역에서 탈주하다가 요동 방면에서 남쪽으로 빠져 같은 고구려계들이 널리 분포했던 황해도 일대로 복귀한 부류. 이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후 이들은 한민족 역사에서 중심으로 올라서게 된다.
    고구려의 제2수도권이었던 패서 지역은 평양에 비해 강제 이주가 그렇게 철저하게 이뤄지지 않았던 데다가 영주 방면에 있다가 탈주한 유민 집단의 합류로 더욱 고구려색이 짙어지게 되었고, 훗날 신라의 영향권 안으로는 들어갔으나 경주에서 워낙 거리가 먼 데다 신라가 세력을 뻗치기 전까지의 시간도 길었고 신라 정부 자체도 그렇게까지 중앙 행정력을 강하게 투사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에 신라 치하 옛 백제 지역보다는 훨씬 큰 자율성을 더 누리게 되었다. 황해도 서부 절반은 신라가 아예 군현 조차 설치하지 못하고, 황해도 서쪽 연안에 군부대 몇 개만 설치하여 간접 지배로 만족했을 정도.
    덕택에 이들은 신라가 혼란기로 빠져들자 어렵지 않게 고려를 건국하고, 궁예의 힘을 빌려 옛 통일신라 영토의 절반 이상을 석권하면서 한민족 정체성의 뿌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다만 백제의 제2수도인 금마저 일대로 일단 사민된 고구려 유민들은 보덕국 해체 과정에서 신라로 인해 강제로 익산에서 조차 쫓겨나서 그 이하 전라남북도 지역으로 분산되어 강제 사민당했고, 이 부류는 앞서 패서 지역에서 모여 정체성을 보존한 고구려 유민들과는 달리 옛 백제 지역의 백제 유민들 사이에서 분산당한 탓에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히 잃고 만다.[97]
  • 두 번째는 발해가 건국되면서 발해인이 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고구려 멸망 후에도 계속 만주 지역에 거주하던 집단과, 대조영 집단처럼 요서 지역의 영주 방면에 옮겨져 있다가 동으로 탈주한 집단, 그리고 요동 방면에서 동부 만주 지역으로 옮겨온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대광현의 내투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발해 멸망 즈음을 기점으로 해서 꽤 많은 수가 첫째 사례의 집단에게 합류한다.
  • 세 번째로는 일본 열도로 이주해간 집단도 있었다. 일본세기(日本世記)의 저자인 승려 도현(道顯)처럼 668년 이전에 일본에 갔다가 고구려가 망해버려 아예 그곳에 머문 사람들도 있고, 대부분은 고구려 멸망 이후 일본 열도로 건너간 사람들이다.
  • 네 번째는 당나라 내지로 강제 이주당한 사람들이다. 세분하면 요서의 영주 지역에 정주하게 된 이, 농우도(隴右道) 방면 등 변경 지대로 옮겨진 이, 회하 유역 등 강회 방면에 배정된 이들로 나뉘어지는데 농우도 방면을 보면 지금의 산시성(陕西省) 서부, 간쑤성 지역 등으로 많이 옮겨졌다. 이 지역은 티베트와 몽골 고원의 유목민 세력의 연결을 차단한 긴 회랑 지대로서, 당은 고구려인들의 군사력을 활용하기 위해 이 지역에 정착시키고 단결병(團結兵)으로 편성하였다. 단결병은 이 지역의 자위를 위한 일종의 지방병이었다. 이 사람들의 후예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이 고선지(高仙芝)이다.
  • 다섯 번째로는 몽골 고원의 유목민 사회로 이주한 사람들로, 당의 지배를 피해 집단으로 옮겨갔는데 게중에는 고문간(高文簡)처럼 묵철가한(默啜)의 사위가 되어 '고려왕막리지'라 칭한 이도 있었다. 이들 중 고문간, 고공의(高拱毅), 고정부(高定傅) 등이 각각 이끄는 집단은 돌궐에서 내분이 일어나자 몽골 고원을 떠나 당으로 내투하여 내몽골 지역에 정주하였다.
  • 여섯 번째는 요동 지역에 그대로 머문 이들이다. 이 부류는 668년 이후 당의 안동도호부 통치를 받았는데, 여러 차례의 저항과 당 내지로의 강제이주를 겪였고, 많은 수는 동만주나 몽골 고원 및 신라로 이주해 안동도호부에는 약하고 가난한 소수만 남게 되었다.

676년 당은 한반도에서 철수한 뒤 요동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재건하기 위한 조치들을 취했다. 그 일환으로 보장왕이 677년 고구려 유민과 함께 요동으로 귀환하여 고구려 유민들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맡겼는데, 이 보장왕이 귀환한 후 얼마 안되어 속말말갈 등과 연결하여 당에 반대하는 거사를 도모하려 하였다. 하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당 내지로 유배되었고, 귀환 조치했던 고구려 유민은 다시 당 내지로 강제 이주되었다.

10.5. 말갈족의 행보

다수의 말갈족은 오랫동안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었고, 상당수는 이런저런 경로로 고구려화되었다. 당사자들이야 별 문제는 없겠지만 당나라와 같은 제삼자 입장에서 보면 고구려화 된 말갈족과 말갈족과 인접해서 살던 변경의 고구려인 등을 제대로 구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를테면 대조영에 대한 당나라 사서의 언급이 그렇다.

이렇게 관련이 깊다보니 말갈족은 고구려 지배 아래 고구려군에 많이 동원되었다. 당연히 고구려 멸망은 그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수나라 대의 말갈 7부 중에 백산(白山)부, 백돌(伯咄)부, 안거골(安車骨)부, 호실(號室)부 등은 분산되어 미약해졌다. 그 밖에 속말부는 속말수 유역에 거주하던 돌지계 집단 등 일부가 이미 그 이전에 수나라에 투항하여 당군에 종군하였다. 돌지계의 아들이자 나당전쟁에서 활약한 이근행이 가장 대표적인 경우이다. 속말부의 나머지는 고구려에 복속하여 대당전에 참여하였다. 걸사비우(乞四比羽)가 대표적이다.

668년 이후 말갈족의 기존 질서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고구려에 충성하던 유력 말갈 촌락들은 전란의 피해를 입어 약화되었고, 하위 촌락들이 이탈과 저항을 하였다. 668년 이후 월희부(越喜部), 철리부(鐵利部) 등 새로운 집단이 출현하였고, 고구려 세력권 밖에 있던 흑수부가 강성해졌다.[98]

나당전쟁이 한반도 중, 남부에서 펼쳐지고, 신라가 당나라의 공격을 격파함으로서, 중·동부 만주는 당과 신라, 돌궐 등 어느 국가도 세력을 뻗치지 못하는 국제적인 힘의 공백 지대가 되었다. 대내적으로도 고구려인과 말갈족의 여러 집단이 소규모 단위로 흩어져 자치를 영위하는 상태가 지속되었다. 이들 집단을 규합하는 새로운 정치적 구심력 형성은 7세기 말 요서 지역에서 탈주해온 대조영 집단의 등장을 기다려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고구려가 버티고 있는 동안의 신라는 당나라의 직접적인 야욕에서 한발자국 물러나서 버티고 있을 수 있었다. 당나라의 목표가 고구려의 소멸인 만큼, 고구려가 멸망하지 않았는데 신라를 건드릴 순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종이 호랑이로 전락한 고구려의 패망이 눈 앞에 보이자, 전쟁의 징조들이 속속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때에, 668년 9월 12일, 신라 사신 김동암(金東嚴)이 왜국을 방문하였다. 신라와 왜국의 국교가 단절된지 11년 만이었다. 자세한 목적은 전해지지 않으나, 김동암이 왜국을 찾은 시점이 고구려 멸망 직전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11월 5일 김동암은 귀국했고, 그 뒤 나당전쟁이 발발하였다. 이에 따라 김동암이 당시에 반당적인 주장을 했고, 이를 전제로 해서 양국의 화평과 국교 회복 제의가 있었으며, 왜국이 동의했다는[99] 시각이 있다.

하지만 당시 당의 위세가 절정에 달했고, 구체적인 증거가 없으며, 무엇보다 신라가 국운을 거는 사업임에 분명한, 당나라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 의사를 표명하기에는 더욱 큰 국제적 계기가 필요했다는 시각 때문에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갈의 부족 가운데 유일하게 고구려에게 완전 봉속되지 않고 동맹관계만을 이어왔던 흑수말갈은 발해기에도 부분적 봉속만 이어가며 예맥족과 같으면서도 다른 길을 걸었다. 이들은 오랜 타국의 지배와 나라 없는 설움을 겪은 끝에 고구려를 능가하는 만주 역사상 최강의 족속으로 분화, 당나라의 후예들을 집어삼켜 버리기에 이른다.

11. 고구려부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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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나당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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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했지만 당나라는 한반도 전체를 당나라의 직접 영향권에 두려는 마각을 드러냈다. 멸망한 두 나라의 옛 영토의 중심부에 당나라는 웅진도독부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옛 백제의 태자 부여융을 신라 문무왕과 동격으로 취급하고 서로 화해하게 하는, 즉 신라를 견제하는 취리산 회맹을 억지로 맺게 하는 등 신라를 다각도로 압박했다. 일단 문무왕은 아직 때가 아니라 판단해 따랐지만 은밀히 검모잠, 안승 고구려부흥운동 세력과 손을 잡고 전쟁을 준비해 나갔다.

670년 옛 백제, 고구려 지역의 당군을 대대적으로 공격해 6년간의 나당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이 전쟁에서 신라는 당의 통치기구들을 한반도 바깥으로 쫓아내고 재침입을 단념시켜 유리하게 전쟁을 종결하는 데 성공해 기나긴 삼국통일전쟁이 끝나고 한반도에서 전쟁이 사라지게 된다.

13. 삼국통일전쟁 연표

<고구려-수 전쟁>
577 CE 북주 무제, 북제를 멸망시키고 중국의 화북을 통일하다.
578 CE 신라가 백제의 알아샨성(閼也山城)을 공격하다.
579 CE 북주 무제, 사망하고 선제가 뒤를 잇다. 신라, 진평왕이 즉위하다.
580 CE 북주 선제, 사망하고 정제가 뒤를 잇다.
581 CE 북주 정제, 양견에게 제위를 양위하고 살해당하다.
양견, 수문제로 즉위하여 수나라를 건국하다.
고구려, 수나라에 조공하고, 수문제, 평원왕을 대장군 요동군공으로 임명하다.
582
~584 CE
고구려, 평원왕이 수나라에 수차례 조공하여 상황을 탐색하다.
589 CE 수문제, 50여만이 넘는 대군을 동원하여 진을 멸망, 중국을 통일하다.
590 CE 고구려에 중국 통일 소식이 알려지다.
평원왕, 크게 놀라며 병기를 수리하고 곡식을 모으며 전쟁 대비를 하다.
수문제가 표문을 보내 질책하다.
10월에 평원왕이 사망하다. 영양왕이 즉위하다.
수문제가 영양왕을 상개부의동삼사(上開府儀同三司)에 요동군공으로 삼다.
591 CE 고구려가 정월,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3월에 수문제가 영양왕을 고구려왕으로 봉하다.
592 CE 고구려가 수나라에 조공을 보내다.
597 CE 5월, 고구려가 수나라에 조공을 보내다.
598 CE 2월, 영양왕이 수나라를 공격하나 영주 총관 위충이 이를 막아내다.
수문제, 격노하여 대군을 진군시키나 이기지 못하고 9월, 수나라 군이 철수하다.
백제 위덕왕이 수나라가 움직일것을 청하다. 고구려가 이에 백제를 공격하다.

<고구려-당 전쟁>
640 CE 고구려가 2월에 태자를 당에 파견하다.
9월에 당나라의 후군집이 고창을 멸망시키고, 군현을 설치하다.
641 CE 당이 직박랑중 진대덕을 고구려에 파견하다.
당태종이 고구려 침공 의지를 표방하다.
백제 무왕의 뒤를 이어 의자왕이 즉위하다.
642 CE 백제가 대야성을 위시한 신라의 40여 성을 공략하다.
고구려에 정변이 일어나 연개소문이 정권을 잡다.
김춘추가 평양으로 가 회담하지만 제의가 거부당한다.
643 CE 백제와 고구려의 협공에 몰린 신라가 당나라에 원병을 요청하다.
644 CE 당이 고구려 침공을 위한 동원을 시작하다. 백제와 신라에 참전을 요구하다.
645 CE 4월에 당군이 고구려를 공격하다. 요동성과 백암성을 순식간에 무너뜨리다.
5월에 신라군 3만이 당을 돕기 위해 북진하다.
백제군이 신라 서부지역을 공격하자 북진하던 신라군은 퇴각.
6월에 안시성 공방전이 전개된다.
왜 조정에서 정변이 벌어지고 신정권이 다이카개신을 단행하다.
9월에 당군이 안시성 공략의 실패와 설연타의 동향으로 인해 전면 퇴각.
646 CE 당이 6월에 설연타를 무너뜨리다.
왜국이 9월에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고위 귀족의 파견을 요청하다.
647 CE 1월, 신라에 비담의 난이 일어나다. 선덕여왕이 사망하고 진덕여왕이 즉위하다.
김춘추가 왜국에 파견되다.
당이 고구려에 대한 장기 소모전을 개시하다.
648 CE 당이 내년, 고구려 정벌을 위한 계획을 발표하다.
11월, 김춘추가 당으로 가 당태종과 회담하다. 신라와 당의 군사동맹 타결.
649 CE 신라가 고유한 연호를 폐지하고 당의 연호와 관복을 따르기로 하다.
당태종이 사망하고 4월에 당고종이 즉위하다. 고구려 원정 계획이 중단되다.
650 CE 신라가 김법민을 당에 파견하다.
651 CE 백제가 당에 사신을 파견하다. 당고종이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는 일에 대해 경고하다.
신라 사절이 당복을 착용하고, 왜국을 압박하다. 왜국이 이에 거세게 반발.
652 CE 백제가 당에 마지막 사신을 파견하다. 이후 당과의 관계가 단절된다. 백제와 왜국의 관계가 강화되다.
653 CE 왜국이 2차 견당사를 당나라에 파견하다.

<백제의 멸망>
654 CE 3월, 신라의 진덕여왕이 사망하고 김춘추가 즉위하다(태종 무열왕).
5월, 율령에 따른 60여 조가 반포되다.
왜국이 3차 견당사를 당나라에 파견하다.
655 CE 고구려가 3월에 신라를 공격하다.
당이 5월에 고구려를 공격하다.
백제가 7월, 왜국에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하다.
656 CE 고구려가 8월, 왜국에 사절을 파견하다.
657 CE 신라가 왜국의 사절이 신라를 거쳐 당으로 가는 견당사 루트를 막고 거부하다.
왜국과 신라의 국교가 단절되다.
659 CE 7월, 왜국이 4차 견당사를 당나라에 파견하다. 연말에 귀국하려는 것을 당측이 억류하다.
당이 서돌궐을 반란을 진압하려 당군을 투입하다.
11월에 고구려 서부 지역을 공격하다.
백제가 4월에 신라의 독산성과 동잠성을 곡격하다.
660 CE 정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서돌궐을 진압하다.
3월, 백제를 향해 소정방이 이끈 13만 대군이 출병하다.
7월 9일, 기벌포에 상륙하다.
신라군 5만이 9일, 황산벌에서 백제군을 격파하다.
7월 18일,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함락하다.
9월 3일, 나당연합군 주력이 철수하다.
9월 23일, 백제 부흥군이 사비성을 포위하다 실패하다.
10월, 복신이 왜국에 부여풍의 귀환을 요청하다.
12월 15일, 당고종이 고구려 원정을 발표하다.

<백제 부흥운동>
661 CE 백제 부흥군이 4월, 두량윤성에서 신라군과 교전하다.
5월, 고구려가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하다. 남생이 막리지 대장군이 취임하다.
8월, 소정방이 이끈 당군이 평양성을 포위하다.
7월, 신라군이 평양성을 향해 군대를 진발하다. 백제 부흥군과 교전하다.
8월, 왜국이 부흥군에 병장기와 곡식을 지원하다.
9월, 부여풍과 병력 5천이 백제에 도착하다.
10월, 철륵이 당에 반란, 계필하력의 군대가 회군하다.
662 CE 정월, 사수에서 연개소문이 방효태의 군대를 격파하다.
왜국이 백제 부흥군에 화살 10만 개 등 군수 물자를 지원하다.
2월에 신라군이 소정방의 군단에 식량을 공급하다. 3월에 소정방의 군대가 퇴각하다.
12월, 백제 부흥군이 주류성에서 피성으로 중심지를 옮기다.
663 CE 신라가 백제 남부의 4개 주와 덕안을 점령, 피성을 압박하다.
백제 부흥군이 피성에서 주류성으로 돌아가다.
4월, 당이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방하다.
손인사에게 7천여 명을 주어 웅진도독부에 병력을 보강하다.
6월, 부여풍이 복신을 죽이다. 왜국이 2만 7천 명의 병력을 파견하다.
문무왕이 김유신 등을 이끌고 주류성으로 진격하다. 8월 17일, 나당연합군이 주류성을 포위하다.
27일, 왜군 1만 명이 백강구에 도착하다. 8월 28일, 백강 전투에서 백제 부흥군이 대패하다.
9월 7일, 주류성이 함락되다.

<고구려의 멸망>
664 CE 2월, 당나라가 부여융과 김인문, 천존이 웅령에서 회맹케 하다.
5월, 웅진도독부가 곽무종을 왜국에 파견하다.
10월, 부여융이 웅진도독으로 봉해지다. 왜국이 일본 열도 서부 지역에 조선식 산성을 쌓기 시작하다.
곽무종의 접견을 거부하다.
665 CE 8월, 웅진 취리산에서 웅진도독 부여융과 계림주대도독 문무왕이

당나라 장수 유인원의 주재하에 회맹하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사망하고, 연남생이 태막리지가 되다.
9월, 당이 유덕고를 왜국에 파견하다.
666 CE 연남생이 동생들과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 국내성으로 달아나 당에 투항하다.
10월, 당군이 신성을 공략한 후 남생군과 합류하다.
12월, 대규모 고구려 원정군이 투입되다. 연정토가 12성을 들어 신라에 투항하다.
667 CE 당나라와 고구려가 각지에서 교전하다.
왜국이 오우미오츠노미야(近江大津宮)로 천도, 타카야스성(高安城) 등을 축조.
신라가 고구려 원정군을 진격시키다.
668 CE 2월, 당이 부여성을 공략하다.
6월, 신라군이 북상하다. 고구려의 한성과 대곡성 등이 웅진도독부에 투항하다.
7월, 왜국에 사신을 파견하다. 9월 12일, 신라 사신 김동암이 왜국을 방문하고, 후대를 받다.
9월 21일, 평양성이 함락되다. 11월에 김동암이 귀국하다.

<고구려 부흥운동과 나당 전쟁>
669 CE 고구류 유민이 각지에서 부흥운동을 전개하다.
4월, 당이 고구려 유민 2만 8천 호를 강제로 이주시키다. 안동도호부가 신성으로 이치되다.
신라가 당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다. 5월, 당이 신라에 사죄사를 파견하다.
670 CE 연초에 검모잠이 봉기하고 신라와 연락하다.
2월, 왜국이 경오년적 작성 시작.
3월, 신라군과 고구려 부흥군이 압록강 서쪽의 오골성 지역으로 원정하다.
4월, 토번이 당을 공격하다. 설인귀가 토번전에 투입되다.
고간과 이근행의 4만 군대가 요동지역에 파견된다.
고구려 부흥군과 신라군의 대치, 신라가 안승을 옹립하다.
7월,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남하, 금마저에 안치하다.
신라가 당군을 격파하고 백제 지역 82개 성을 점령하다.
7월, 설인귀가 대비천에서 가르친링에게 패배하다.
8월, 안승이 고구려왕으로 봉해진다.
9월, 왜국이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다. 이해 왜국이 일본으로 국호를 개정하다.
671 CE 정월, 안승의 소고구려국이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다. 당이 정월에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다.
2월, 당이 백제인을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하다.
6월, 신라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다. 신라군이 석성과 가림성에서 당군을 대파하다.
7월, 고구려 유민군의 안시성이 당군에 함락되다.
10월, 당의 함선이 70여척 격파되다. 신라가 일본에 사신을 또 파견하다.
11월, 곽무종과 사택손등 등 2천여명이 일본에 도착하다.
672 CE 신라가 소부리주를 설치하다. 백제인들로 백금서당을 편성하다.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다.
5월, 곽무종 일행이 군수 물자를 받고 떠나다.
6월, 덴지의 동생 덴무가 거병, 임신의 난을 일으키다.
7월 고간과 이근행이 당군 4만명을 이끌고 평양이 진주하다.
8월, 당군과 신라군이 평양 지역과 황해도 일대에서 전투,
한시성과 마읍성, 백수성에서 당군을 격파하나 석문 전투에서 대패하다.
9월, 신라가 당에 사죄사를 파견하고 일본에서 덴무가 집권하다.
12월, 일본에서 신라가 김압실에게 배 1척을 사여하다.
673 CE 신라가 백제 관인에게 경위 사여 기준을 마련하다. 외사정 2인을 각 주에 파견하다.
7월 친당 귀족 대토 등을 숙청하다.
9월, 호로하와 왕봉하 등 임진강과 한강 유역 지역에서 당군과 격전하다.
674 CE 정월, 당이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봉하고 2월에 유인궤를 계림도 행군 총관으로 임명하다.
6월, 신라가 일본에 덴무 즉위 축하사절을 파견하다.
9월, 안승이 보덕왕으로 임명되다.
675 CE 2월, 신라가 당에 사죄사를 파견하고 일본에 왕자 충원 등을 파견하다.
당이 신라의 칠중성을 공략하다.
3월, 신라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다. 보덕국이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다.
7월, 일본이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다.
9월, 당이 천성을 공격하고 김인문의 신라왕 임명을 취소하다.
9월, 매소성에서 신라군이 당군을 격파하다.
676 CE 2월, 당이 웅진도독부를 요동의 건안성에 교치하다.
7월에 도림성을 공략하다. 안동도호부를 요동고성에 옮기다.
10월, 일본이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다.
11월, 신라가 기벌포에서 당나라 해군을 대파하다.
보덕국이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다. 신라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다.
677 CE 2월, 당이 부여융을 웅진도독 대방군왕으로, 보장왕을 요동도독조선군왕으로 임명하다.
고구려 유민을 요동으로 귀환 조처하다. 연남생이 안동도호부 관리로 파견되다.
안동도호부가 신성으로 다시 이치되다.
10월, 일본이 신라에 사신 파견.
11월, 신라와 보덕국이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다.
678 CE 당이 신라에 대한 대규모 원정을 추진하려다, 토번과의 전쟁을 이유로 한 반대에 폐기되다.

<전쟁 이후>
679 ~ 680 CE 당이 보장왕의 반당 동기 계획을 발각하고, 유배 보내다. 유민들이 재차 강제 이주 당하다.
681 CE 8월, 신라가 김흠돌 등 고위 귀족을 숙청하다. 당의 사신이 무열왕의 시호 '태종'을 시비 걸다.
684 CE 신라가 대문이 주도한 반란을 계기로 보덕국을 해체하다. 군현으로 편제되다.
685 CE 신라가 9주 5소경을 완비하다.
686 CE 신라가 예작부를 설치하다. 중앙관서가 완비되다. 2월, 당에 사신을 파견하다. 당이 고보원을 고려조선군왕으로, 부여경을 백제 대방군왕으로 봉하여 수도에 머물게 하다.
687 CE 신라가 백제 유민으로 청금서당을 편성하다. 9서당이 완비되다. 5묘제가 시행되다. 관료전을 지급하다.
689 CE 신라가 녹읍을 파하다.
698 CE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다.
699 CE 당이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를 안동도독으로 임명하다.
701 CE 일본이 양노율령을 완성하다.
702 CE 일본이 견당사를 파견하고 당과 국교를 재개하다.
703 CE 신라가 당에 사신을 파견하고, 이후 매년 사신을 보내면서 당나라와의 갈등이 해소되다.

14. 대체역사

14.1. 고구려가 통일했다면?

한국사를 공부한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은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으면 하는 아쉬움을 가져본 이들이 꽤 많이 있다. 만약 정말로 고구려가 통일했다면 오늘날의 한국의 영토가 만주와 한반도에 걸쳐 그러한 국토를 바탕으로 강대국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다. 또한 고구려 영토를 간직함으로써 고구려인까지 대다수 포함한 보다 온전한 민족 통합이 가능했을 수 있다.

하지만 정말로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고 해도 끝이 좋지 않았을 것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우선 고구려는 고구려인 말고도 거란, 말갈 등 수많은 북방민족들이 모인 다민족국가였고, 실제 왕조 말기에도 고구려가 쇠퇴하면서 복속한 북방민족들이 이탈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이 와중에 백제와 신라까지 병합한다면 수많은 부흥운동과 반란이 일어나 고구려가 중국 진나라처럼 분열될 가능성이 있다.[100] 또한 중국과 별로 얽힐 일이 없었고 나당동맹까지 성립한 신라와는 달리 고구려는 삼국시대 내내 중국과의 사이가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다. 신라조차도 통일 직후에 나당전쟁을 겪었는데, 나당 관계야 직전까지 동맹이었으니 당나라가 적당히 퇴각하는 결말로 끝났지만 고구려가 통일했다면 당나라가 그런 정도로 물러나진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미 이전부터 중국 왕조 국가들은 "요동에 10만 군대가 생기면 중원을 위협할 수 있다"고 말해왔으며, 실제로도 역사상 요동에 10만 대군을 두었던 세력[101]들은 모두 요하를 넘어 중원을 친 적이 있다. 즉 중국과 고구려는 중국이 망하느냐 아니면 고구려가 망하느냐를 놓고 100년, 200년, 아니 천 년이라도 싸웠을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가 설사 중국과의 전쟁에 승리해 중원을 차지했다하더라도 훗날의 요나라, 청나라처럼 머리수가 압도적인 한족에게 역으로 먹히거나 현대의 몽골처럼 약소국으로 전락했을 가능성도 있다.

만약 고구려가 통일했다면 평양이 대한민국 제1의 고도가 되면서 오늘날 한국의 수도가 서울 대신 평양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14.2. 백제가 통일했다면?

백제의 삼국통일은 고구려의 통일보다는 주목받지 못하는 대체역사지만 백제가 통일을 했다는 시나리오도 존재한다.

우선 백제는 신라처럼 영토가 한반도 남부에 위치한 관계로 삼국을 통일한다면 영토가 통일신라와 마찬가지로 대동강 유역으로 한정될 가능성이 크고 과거 수도였던 한성으로 다시 천도하면서 오늘날 서울이 경주와 평양을 제치고 한국 제1의 고도가 되어 서울이 수도로서의 지위가 굉장히 확고하게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백제는 고구려와 신라와는 다르게 해상을 통한 진출과 교류가 활발했으므로 향후 한국이 개방적 분위기를 가진 해상강국이 되었을 지도 모르며, 특히 일본과 친선관계를 끝까지 유지했던 백제가 통일한 만큼 오늘날 한일관계가 매우 좋았을지도 모른다. 또한 신라와는 달리 부여의 후손인 백제인이 다스리는 통일국가라면 마찬가지로 부여의 후손인 고구려인이 건국한 발해와도 더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을 수도 있다.

15.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창작물들

워낙 역동적인 시대였고 한국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시기였으며 뛰어난 인물들도 많았던 만큼 역사를 소재로 한 창작물에서 자주 배경으로 차용되는 시기이다. 한국 사극 소재로도 여말선초, 임진왜란과 함께 가장 자주 회자되는 배경 소재이며, 특히 조선 시대를 제외한 고대 중세사 사극에서는 압도적인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2000년대~ 2010년대 초반에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다만 시대 상황상 대규모 전쟁을 많이 연출해야 하므로 자연히 제대로 만들려면 제작비가 하늘로 치솟기 때문에 2010년대 중반 들어서는 한국 사극계가 전반적으로 저예산 트렌디화되는 추세라 창작물로 많이 제작되지 못하고 있다. 중국에서도 수당연의라는 소설의 배경과 겹치고 수양제와 당태종, 당고종 모두 고구려와 전쟁을 벌인데다가 측천무후와의 치세와도 어느정도는 겹치기 때문에 사극으로도 많이 제작되는지라 직, 간접적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

15.1. 영화

  • 평양성: 2011년 작품. 황산벌의 속편격. 나당연합군의 고구려 공격이 소재다.

15.2. 드라마

  • 삼국기: 1992년 작품. 고구려-당 전쟁(640년대)무렵부터 김유신의 죽음(670년대)까지를 다루고 있다.
  • 서동요: 2005년 작품. 백제의 30대 왕인 무왕이 주인공이다. 다만 무왕의 즉위 과정이 중심.
  • 연개소문: 2006년 작품. 연개소문을 중심으로 삼국시대 말기와 수당 교체기를 다룬다. 고구려 사극이지만 삼국 모두를 비중있게 다룰 뿐더러 중국 국내사까지도 비중이 높다.[102]
  • 대조영: 2006년 작품. 발해의 시조 대조영이 주역이지만 초반에 고구려-당 전쟁과 고구려의 멸망, 고구려 부흥운동이 다뤄진다.
  • 선덕여왕: 2009년 작품. 선덕여왕과 미실이 주역. 다만 삼국통일전쟁은 극의 중심 주제는 아니다.
  • 계백: 2011년 작품. 백제의 마지막 영웅 계백을 주인공으로 했다.
  • 대왕의 꿈: 2012년 작품.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인 무열왕과 김유신이 주인공.

15.3. 게임, 만화

  • 천년의 신화: 특히 신라 미션이 이 시기를 다루고 있으며, 2편은 고구려, 백제, 신라 미션 모두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 천랑열전: 무협 만화이긴 하지만 일단 시대적 배경은 고구려 말엽.

15.4. 소설

16. 관련 세력

17. 같이보기


[1]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에 있는, 신라가 이룩한 삼국통일의 위엄을 기리고, 나아가 대한민국 남북통일에 의지와 염원을 밝히는 목적으로 1977년 건립되었다. 순서대로 태종 무열왕, 문무왕, 김유신 기념비다. 호국영령의 뜻을 기리는 장소여서 초·중등학생들의 통일 이념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남산 칠불암과 전망대로 오르는 등산로도 설치되어 있다. [2] 이는 그렇게 틀린 얘긴 아니다. 통일신라 시대에도 고구려 유민 상당수는 평양 및 황해도 일대에 남아 있었고 이들이 바로 후삼국 통일의 주역인 패서호족들의 선조다. 물론 통일신라 시대에는 구주 중 하나를 이루지도 못하고 한주 아래에 있었지만 그건 예성강~ 대동강 구간이 인구가 적어서가 아니라 신라의 통제력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랬기에 이 일대의 고구려 유민들이 정체성을 잃지 않고 고구려를 부흥시킬 수 있었다. (이후 신라가 한주에서 독립된 패강진이라는 특수 행정구역을 설치하기도 하는데 군사적 기능에만 초점을 맞추었고 강력한 행정을 관철하진 못했다.) 어찌되었든 신라는 황해도와 평남 남부를 명목상 병합했고 원래 고구려의 중심지는 만주가 아니라 평안도, 황해도였음을 감안하면 통일신라가 큰 집을 이뤘다고 자부할 만한 근거는 있었다. [3] ' 당나라가 고구려인 대부분을 중원으로 끌고 갔으니 이후 한국사는 고구려와 무관하며 고구려의 알맹이는 신라가 가져간 게 별로 없다'라는 동북공정식 헛소리가 다름아닌 한국 내에도 퍼져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동서고금 사례를 통틀어봐도 인구 수백만인 국가의 주민 대부분을 다 잡아가서 사민하는 건 불가능하며,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은 격렬했다. 그리고 애초에 당나라로 끌고 갔던 고구려인들도 상당수는 탈출해서 발해의 건국에 기여했다. [4] 물론 고구려 하나보다 작은데 '옛날엔 조그마했던 세 나라' 운운하는 것은 지적할 만하다. [5] 물론 가야 등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있다. 삼국시대 문서 참고. [6] 홍건적, 왜구, 여진족, 한반도 왕조, 중원왕조, 일본, 몽골 지역에 이르기까지 정세변동이 일어났다. [7] 물론 삼국의 언어가 통했다는 반론도 있다. [8] 고려의 삼국통일을 긍정하는 건 북쪽으로 영토를 넓히고 발해 유민을 받아들인 것 때문이 아니라, 고려의 삼국통일 이후로 결국 백제의 국가 정체성, 신라의 국가 정체성이 완전 소멸한 게 이유다. 물론 부흥운동이 있었지만 적어도 통일신라 말기 때보다는 그 호응도가 크게 낮았고, 후삼국시대처럼 그런 시도들이 성공하지도 못했다. [9] 다만 '삼국통일' 부정론은 중국만의 주장은 아니다. [10] 사실 중국을 제외한 국제 학계에서도 고구려는 한국의 역사로 간주하지만 발해는 역사적으로 복잡한 관계로 온전히 한국사로 보지 않는 시각이 많다. [11] 890년 세워짐 [12] 924년 최치원(崔致遠)에 의해 세워짐 [13] 발해 왕자 대봉예가 발해 사신의 서열이 신라보다 위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사건. 동사강목에서는 이 일에 대해 "발해가 강대국을 자처했다.(時渤海國 自謂國大兵强)" 고 말했다. 일 자체는 당나라의 반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14] 『三國史記』의 靺鞨 認識 -통일기 신라인의 인식을 매개로- 이강래(李康來) [15] 왕건이 강조했던 연등회, 팔관회도 따지고보면 전부 한나라 백성이라는 통합의식을 심어주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16] 게다가 통일에 성공한 정통 왕조는 본기, 나머지는 세가의 형식으로 저술하여 급의 차별을 두었다. [17] 노태돈, 『삼한에 대한 인식의 변천』『한국사 연구』38, 1982, 『한국사를 통해본 우리와 세계에 대한 인식』 [18] 여기에 대해 박노자는 만주 상실을 전제로 한 통일이 불완전했다는 시각에 대해, 고려 말기와 조선 전기에 한반도 남부와 중부에서 그 종족적 틀이 공고화된 ‘조선인’ ‘한인’(韓人)이라는 종족 집단은 만주를 ‘상실’했을 리가 만무하다고 말했다. 그 집단은 만주를 차지한 일이 애당초에 없었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 더 나아가면 통일 과정에 내포된 '비자주성'을 문제로 삼는 시각이다. [19] 단 조선 입장에서 그리 파악할 만한 이유가 있는게 조선이 차지하지 못한 구고구려령(한만국경 이북)보다 고구려가 차지하지 못한 구신라령과 구백제령, 소위 삼남이 면적을 작을지언정 인구, 생산력 등에서 압도적이었다. [20] 다만 이는 지식인에 따라 달랐던 것으로 보이며,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주창할 때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던 것이 "군량미는 갖추어졌고 병정들은 단련되었으니 동명성왕의 고토를 되찾을 만하다"였다. 즉 적어도 고구려가 매우 강했으며 현재 조선에 비해 넓은 강역을 가졌다고 여기는 인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얘기. [21] 한영우「다시 찾는 우리 역사」,1997, 제3장 발해와 그 문화, 제4장 후기신라의 사회와 문화 [22] 애시당초 고구려 옛땅을 신라가 전부 정복한 것도 아니다. [23] 보통 후(後) 고(古)를 붙여 시대의 전후를 구분하지, 전기라는 말을 붙이지는 않는다. 예, 고구려-후고구려-고려. [24] 이 주장에는 여러 맹점이 있는데, 먼저, 이 주장을 따르면 백제가 고구려에서 왔기에 신라 역사만 우리의 시초로서 유일한 초기역사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 신라조차도 신라의 기원이 되는 6촌의 주민들이 -중국의 주장에 따르면 예맥족이 세운 국가로 취급되는- 고조선의 유민들이었다고 삼국사기에 나온다. 이 기록은 경상도에 있던 진한과 변한의 유물에서 고조선이 있던 평안도 지역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난다는 사실로 교차검증되며, 진변한보다 먼저 자리잡았던 마한도 원래는 요동에서 내려온 세력임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었고. [25] 다만 고구려는 한강 장악 이후 삼한계 국가들의 구성원들과 활발히 영향을 주고 받은 '통합 국가'임을 주장한다. [26] 다시 말해서, 광개토대왕이 사망한 이후부터를 삼국통일전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27] 김기흥,『삼국 및 통일신라 체제의 연구』 [28] 이런저런 기사가 있지만 정말 쉴새없이 근성으로 수천에서 수만 단위의 군대를 일으켜 도전하던 아신왕 시절에 비하면 한참 모자란 글자 그대로 소요이다. [29] 이강래,『삼국의 성립과 영역확장』 『한국사』3 pp.228-30, 1994 [30] 이호영, 『삼국통일』『신편 한국사』9 p.16,1998 [31] 근데 진의 집계 인구는 당시 50만 가구 정도로 앞으로 70년간 전쟁을 하고도 멸망 당시 70만 가구를 찍은 고구려가 모로 봐도 더 강대한 상대였다. 실제 인구와 잠재력은 진나라가 우위였겠지만 당장 손이 닿는 동원력이나 내부적인 결속력 등에서 고구려가 앞서는 것이다. 그리고 장강과 달리 요하는 고구려 쪽에 산맥이 마주 서 있고, 현재와 달리 수시로 범람하여, 최대 강변 1km를 갯벌처럼 만들어버려 도강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등 장강보다 훨씬 강력한 천연 방어선이었다. [32] 당고종 시기까지도 수나라 최전성기의 호구를 넘지 못했다. [33] 언기(焉耆) [34] 현재의 오사카시에 위치한 난바(難波) 인근을 의미한다. [35] 영류왕의 동생이자 보장왕의 아버지인 고태양 [36] 정사에 나오는 이름이 아니다. 야사에서도 훨씬 후세에나 등장하는 이름이다. [37] 그런데 이 당시만 해도 말갈의 대부분과 거란은 당보다는 고구려에 가까웠다. [38] 이를 당군의 용맹과 분전을 유리하게 과장하는 성향과 수사를 제외하고 보면 그냥 요동 방어선 표피에서 거점 몇 개를 점령하다가 실패한 수준에 불과하다. [39] 당시 삼국사의 기록에 따르면 김춘추는 이찬이었다. 하지만 이 방문 기록을 담은 일본서기의 기록에서 김춘추는 대아찬으로 나온다. 설사 대아찬이었다 한들 이전의 신라 사신들에 비해 고위 관등이었음은 분명하다. [40] 게다가 그는 중국계 도래인의 자손이었다. [41] 노태돈, 삼국통일전쟁사 [42] 코토쿠 덴노가 650년 3월 22일부터 654년 11월 24일까지 사용한 연호. [43] 치마사산(チマササン)이라는 훈이 달려 있다. [44] 현재의 후쿠오카 [45] 오오미(大臣)는 카바네(姓)로 추정되며 본명은 기재되지 않았다. [46] 현재의 오사카시 난바(難波) 일대를 말한다. [47] 현재의 후쿠오카시 인근 바다 [48] 주로 5세기에서 6세기 중기에 이르는 기간에 중국 혹은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건너간 사람들을 말한다. 애초에 소가씨 자체도 한반도계 도래인 출신이라는 설이 있다. [49] 일본서기가 아니다. 즉 해당 기록은 일본서기가 이 일본세기의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50] 일본서기에 기록된 의자왕의 처 은고로 추정하기도 한다. [51] 물론 의자왕의 예상도 아예 터무니 없다고 볼 수는 없다. 아무리 당나라가 당대 최고의 세계 제국이었다해도 13만이나 되는 대군을 그 큰 황해를 건너 수송해와 상륙할 것이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었을까? 이 정도 규모의 상륙작전은 수양제의 고구려 정벌전은 물론 동아시아 역사 전체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52] 카슈가르 [53] 카르가리크 [54] 타슈쿠르간 [55] 결국 고구려는 백제가 망하고도 세 달이 지난 660년 10월에야 칠중성을 비롯한 신라 북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것도 후술할 백제부흥운동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셈이라 완전히 무의미하진 않았지만, 이미 백제 중심부가 무너진 뒤에야 뒷북을 친 셈이다. [56] 신라 서해안과 신라 남해안 사이에 백제가 있기 때문에 함대 간 신속한 연계가 힘들기 때문. [57] 삼국유사의 12만 2711명에 이 6,500여명을 더하면 대략 반올림하여 여러 사서에 기록된 13만이 된다. [58] 이 두 사람은 무열왕, 김유신과 함께 서라벌을 출발했는데 황산벌 전투에는 등장하지 않으므로, 당군과 함께 금강 하구로 진입한 것으로 여겨진다. [59] 권근이 계백의 이 행동을 비난했고, 안정복은 권근이 또 병법을 모른다면서 역으로 비난했다. [60] 이문기, 『사비시대의 백제의 군사조직과 그 운용』 [61] 소정방은 나름 기선제압을 해보겠다고 강하게 나섰지만, 신라 측이 저렇게 강하게 나오니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나당동맹의 주목표는 어디까지나 고구려임을 생각해야 한다. 특히 당나라 입장에서 백제는 그 주 목표를 이루기 위해 먼저 치워둬야 할 걸림돌 개념이었다. 기껏 13만 대군을 고대시대에는 적잖은 리스크를 안아야하는 원양항해까지 해가며 신라에 투자했는데, 상대가 고작 약속날짜 하루이틀 못 지켰다고 동맹 자체가 틀어져버리면 그야말로 엄청난 손해다. 당 단독으로는 고구려를 정복하는데 엄청난 피해가 있다는걸 여수전쟁과 여당전쟁으로 알고 있었을테니 신라와 선이 끊기면 한반도에서 새 파트너를 찾아야하는데, 남은건 백제 뿐이고 자신을 멸망시키려고 했던 당의 손을 백제가 잡을리 만무하므로 고구려 원정은 기약이 없어진다. [62] 당장 과거 고조선 멸망전만 봐도 장군 순채와 양복이 서로 사사로운 일로 다투어 고조선 정벌이 틀어지고 한무제의 위신에 손상이 가자 한무제가 분노하여 둘다에게 벌을 내린바가 있다. 소정방은 고구려 멸망에 진심인 황제의 명을 받고 온 만큼 자존심 챙기는 것 못지 않게 목적 달성도 반드시 해야하는 입장이었다. [63] 실제로 나중에 흑치상지가 백제부흥군을 모으자 백제 멸망 후 2달밖에 안 지난 660년 9월 시점에 금방 3만명이 모인다. 새로 징병한 병력이라기엔 너무 텀이 짧으므로 이 3만은 기존에 편성돼 있던 군사들일 가능성이 높다. [64] 노중국, 『백제 멸망 후 부흥군의 부흥전쟁연구』 [65] 부여나 공주 교외에 있는 천장 모서리에 있는 큰 구멍이 난 석실 봉토분들은 상당수 이때 도굴된 것으로 여겨진다. 단, 모든 백제 고분이 멸망 직후 나당연합군에게 도굴된 것은 아니고 도굴은 백제 정부의 관리가 사라진 이 때부터 통일신라, 고려, 조선, 일제강점기, 현대까지 꾸준히 이루어졌다. [66] 1993년 부여의 능산리 고분군에 인접한 백제의 옛 절터에서 발견되어 수습된 금동용봉향로 또한 이때 승려가 침략군의 약탈을 피하기 위해 임시 방편으로 파묻어둔 것이 기적적으로 보존되었다고 한다. [67] 노략질을 떠나서 신라, 당나라 합쳐 20만에 가까운 부대가 한군데에서 어슬렁거리는 것만 해도 주변 지역에는 엄청난 피해다. [68] 이현숙,『7세기 통일전쟁과 전염병』,『역사와 현실』47,2003. [69] 이 과정속에 무열왕은 항복한 백제 귀족들을 등용해서 썼다. [70] 부여풍장(扶餘豊璋)이라고도 한다. [71] 양사선의 묘지명을 확인해보면 루방도행군 역시 고구려군과의 전투에서 도행군이 와해될만큼의 대패를 당한 것을 유추해볼 수 있다. [72] 누방도행군이 전쟁을 치루는데, 큰 봉황새가 이지러지기 시작하여 하늘을 날던 날개가 떨어져 드리우고, 큰 고기가 길을 잃고 헤메어 큰 파도에 비늘이 떨어지는 등의 사건이 벌어져서 58세의 나이인 661년 10월 16일에 양사선이 군대에서 죽어서 묻혔다. [73] 고구려. [74] 노중국, 『백제 멸망 후 부흥군의 부흥전쟁연구』 [75] 다름 아닌 일본인인 이케우치 히로시(池內 宏)의 주장이다. 그는 어디까지나 이것을 왜국의 백제 부흥군 지원에 관한 내용으로 보았다. [76] 노태돈의 말로는 전자로 보는 편이 합리적이라고 한다. [77]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복신이 무왕의 조카가 아니라면 더더욱 의미가 있을 것이다. [78] 이름은 누락됐다. 풀네임은 사이노무라지 아지마사(狹井連 檳榔). [79] 풀네임은 에치노하타노미야츠코 타쿠츠(朴市秦造 田来津). [80] 주류성과 같다. [81] 노중국, 『백제 멸망 후 부흥군의 부흥전쟁연구』. [82] 이름은 누락됐다. [83] 백제 왕자였던 그 사람 맞다. 자세한 상황은 아래에서 기술. [84] 부여군에 유인원기공비가 남아있는데, 이게 유인궤기공비가 아닌 이유는 그 때문이다. [85] 이 당시 전황에 대해서는 한참 뒤에 671년, 신라와 당나라가 신경전을 벌일 무렵 설인귀의 편지에 문무왕이 대답한 내용에 실려있다. 백강전투가 일어나던 660년 무렵의 기록을 삼국사기에서 찾는다면 관련 내용이 보이지 않아 의아할 수가 있다. [86] 400여척은 구당서의 기록. 앞의 주석에 있는 문무왕의 말에서는 이때 왜 함선이 1000여척이라고 하였는데 아무래도 문무왕이 과장하였는 듯 하다. [87] 변인석, 『백강구 전쟁과 백제·왜 관계』pp.171-75,1994 [88] 조몬 시대는 가장 오래 잡아도 기원전 3세기 쯤에 끝난다. 당대 중국은 전국시대도 이미 끝났고 진나라의 지배와 초한전쟁을 겪고 있었으니 그때부터도 이미 대규모 전쟁에는 이골이 날 대로 난 상태. 현재 일본인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 야요이인은 그때 즈음에서야 일본 열도에 진입하기 시작해 야요이 시대를 열었다. 한반도 또한 일본 열도보다는 아니었지만 한참 뒤쳐져 있기는 마찬가지라 기원전 2세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194년에야 철기 문명을 기반으로 한 위만조선이 들어서게 된다. [89] 전장군은 카미츠케노노키미 와카코(上毛野君 稚子), 중장군은 코세노카무사키노오미 오사(巨勢神前臣 譯語), 후장군은 아베노히케타노오미 히라부(阿倍引田臣 比邏夫)였다. [90] 일본 쪽에서 임진왜란을 언급할때, 정작 전쟁터이자 그 역할도 적지 않았던 조선을 배제하고, 마치 일본과 명나라와의 양자 대결처럼 보려는 시각을 생각해보자. [91] 애시당초 중세 중국 세력의 끝을 모르는 미칠듯한 서방 진출이 이슬람 세력에 의해서 저지되어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받는 탈라스 전투 마저도 막상 그 당시 당나라 입장에선 별 비중도 없었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지휘관인 고선지는 처벌도 안 받았다. 하물며 이 보다 더 적은 규모의 군대가 동원된 백강 전투가 당나라 입장에서 지나치게 큰 의미가 있진 않을 것이다. [92] 김문영 참수 소동, 웅진도독부 설치, 웅령 회맹, 취리산 회맹 등. [93] 여담이지만 옛 백제는 이 난공불락에 가까운 지역은 아예 건드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왕건의 고려는 어설프게 건드려보다가 크게 쓴 맛을 보고만다. 왕건의 고려마저도 이 지역은 끝내 자력으로 뚫어내진 못했다. [94] 다만 668년 시점까지 그동안 보여왔던 신라의 국력을 감안하면 20만 병력이라는 숫자는 과장인 것으로 보인다. 얼마 없는 기록들에서 나오는 660년 황산벌 전투의 50,000명의 전투서열을 보면 고구려와의 접경지역을 제외한 거의 신라 전국토에서 전력으로 모은 병력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95] 하지만 이 시기쯤 되면 신라에서 김유신의 이름이 너무나 거대해진 탓에, 이때 떠나는 신라 장수들은 아픈 김유신 보고 제발 같이 가자고 부탁할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이 내용은 삼국사기에서 김유신 후손이 남긴 행장에서 가져온 열전에 있는 내용이라 신뢰하지 않는 시각도 있지만, 말년의 김유신이 신라를 대표하는 명장이자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영웅 중 한 명으로 알려진 것은 김유신을 딱히 띄울 필요가 없는 중국, 일본 측 기록에서도 나타나는 내용이라 그런 해프닝이 일어날만한 개연성은 있다. [96] 삼국사기에선 북을 치며 불을 질렀다는 식으로 짦게 기술되나 19세기 초에 작성된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구한말에 쓰여진 황현 매천야록에선 이세적이 평양성 함락 후 고구려의 문물이 중국에 뒤지지 않는 것을 시기하여 고구려의 모든 책을 모은 후 후환을 없앤다고 모두 불태워 버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97] 앗시리아로 인해 지금의 서이란 일대로 분산배치된 이스라엘 10부족은 정체성을 완전히 잃고 말았으나, 신바빌로니아가 집단 이주시킨 유대인들은 정체성을 보존했던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보면 된다. [98] 다만 강성해졌다는 흑수부도 대추장이 없고 16개 부족으로 나뉘어 자치를 영위하였다. [99] 왜 조정은 김동암에게 비단, 풀솜, 가죽 등을 듬뿍 주는등 상당한 환대를 보였다. [100] 당장 삼국을 통일한 신라조차도 고구려와 백제의 민족의식을 완전히 통합하는데 실패하여 수백년 뒤 후삼국시대로 분열되는 계기가 되었다. [101] 고구려, 발해, 요나라, 금나라, 후금,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본 제국 관동군 중국 공산당 홍군이 있다. 마지막은 현재까지도 중국을 지배하는 중이다. [102] 특히 초반에는 수나라가 너무 비중이 높고 김갑수의 카리스마가 압도해서 사실상 수나라가 주 배경인 드라마였고 그 이후의 당나라 얘기도 역시 재미있었다. 오죽하면 국뽕 잔뜩 섞인 고구려 이야기가 가장 노잼이였던 희한한 고구려 드라마로 중국 쪽 스토리만 보면 명작으로 느껴질 정도다. 그냥 한국에서 큰 돈 들여서 중국 사극 하나 찍어준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