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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계 러시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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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
2.1. 지리적 근접성2.2. 독일인의 러시아 이주
3. 목록
3.1. 볼가 독일인3.2. 흑해 독일인3.3. 발트 독일인3.4. 캅카스 독일인3.5. 중앙아시아 독일인3.6. 유대계 독일인3.7. 기타 사례
4. 현황5. 인물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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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혈통의 러시아인들을 일컫는다. 비슬라브계 소수민족 러시아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민족 집단이다.

2. 배경

2.1. 지리적 근접성

현재 독일 서유럽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러시아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지만 과거에는 독일인 상인 네트워크가 중유럽에서 동유럽 전역에 걸쳐 있었다. 아슈케나지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이디시어가 괜히 독일어 계통 언어인 것이 아니다. 독일의 전신인 프로이센 왕국 동유럽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동쪽에 치우쳐 있었는데 프로이센 왕국의 전신 중 하나[1]였던 프로이센 공국의 수도였던 쾨니히스베르크가 오늘날 러시아의 칼리닌그라드다. 오늘날 발트 3국과 서부 러시아는 13세기부터 튜튼 기사단 가톨릭을 전파하기 위해 쳐들어와 찝적거리던 곳이었고 독일인 상인들의 이주도 활발했던 지역이었다. 알렉산드르 넵스키에게 튜튼 기사단이 패한 후 독일 세력의 동진은 저지되었지만 탈린 등 이 지역 도시들이 한자동맹에 가입할 정도로 독일 문화의 영향력이 강했으며 이후 프로이센 러시아 폴란드를 사이좋게 나누어 가지고 19세기 중반까지 러시아는 프로이센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런 구도는 20세기 중반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남았다. 다시 말해 1945년 이전에는 독일과 러시아/소련은 국경을 맞대고 있었는데 종전 후 독일이 동부 영토를 상실하면서 양국의 물리적 거리가 멀어지게 된 것이다. 정확히는 1918-39년 사이에는 중간에 발트 3국이 있었으나 이들은 독일에 편향되어 있었던 나라들이다.

2.2. 독일인의 러시아 이주

이들 외에도 많은 독일계 귀족들이 러시아로 건너와 러시아의 귀족이 되기도 했다. 이런 현상은 러시아 이외에 다른 유럽 국가에서도 있었던 일이며 독일계 귀족 외에도 스웨덴계, 네덜란드계 귀족이나 스코틀랜드계 귀족도 있었다.[2] 러시아 제국 시절 많은 독일인이 러시아에서 출세하여 고관대작이 되었다.

이렇게 귀족이 된 독일인들 말고도 러시아로 이주한 상인이나 농민들의 수도 많았다. 근세부터 근대까지 독일의 혼란이나 소수종파 탄압/인구과밀을 피해 러시아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역시 독일인이었던 예카테리나 2세 등은 종교의 자유 병역면제 등을 조건으로 걸며 독일인의 러시아 이주를 정책적으로 장려하여 이주해 온 독일인들도 많았다. 러시아 제국이 대북방전쟁에서 라트비아 에스토니아를 병합하고 이후 폴란드 분할로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현지의 많은 독일인 상인 공동체를 흡수할 수 있었다.

근세 이래로 러시아 황후나 황족의 배우자는 대개 독일계 국가의 왕공가에서 배출되었기 때문에[3] 러시아 황족과 결혼하면서 러시아로 이주한 독일 왕공족 여성들도 여럿 있었다.

러시아 혁명 당시 반혁명 세력은 시온 의정서 따위의 문서를 위조하여 혁명 세력의 배후에 세계를 지배하려는 유대인들이 있다는 반유대주의 음모론을 신봉했는데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자 이들은 망명하여 이러한 반유대주의 음모론을 전파했고 이들 중에는 독일계 러시아인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발트 독일인 출신이자 나치의 사상가이자 히틀러에게 반유대주의를 전수한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다.

3. 목록

3.1. 볼가 독일인

18세기 초 카스피해 북부 볼가강 하류 지역을 방문한 영국인 기록자는 당시 러시아 제국의 신민이자 몽골계 유목민인 칼미크인들이 "농사를 지어야 하는 땅에 유목을 해서 생산성이 낮다."면서 해당 지역의 광활한 땅은 “잉글랜드에서는 엄청난 가치가 있을 테지만, 여기서는 버려져 경작되지 않는다.”는 기록을 남겼다. 해당 기록에 대한 보고가 예카테리나 2세의 귀에 들어가자 예카테리나 2세는 러시아 영내의 칼미크인들에게 과도한 군역을 부과해서 유목을 방해한 후 칼미크인들의 땅에 조금씩 코사크들을 침투시켜 농사를 짓게 했다. 코사크들에 뒤이어 독일계 이주민들이 따라와서 과거 칼미크인들의 영토에서 마을을 건설하고 농사를 짓게 되었다.

1762년 예카테리나 2세는 유럽으로부터 대규모 이민을 받아들였는데 광활한 자국의 인구밀도도 높히고 가장 주요하게는 중/서유럽보다 현저히 떨어지는 농업 생산력을 제고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 때 가장 많이 이주한 사람들이 프로이센 왕국을 비롯한 독일 지역의 빈농들이었다. 이때 이주 장려 정책에 의해 이민 온 독일인들은 볼가강 유역(現 볼고그라드 인근)에 많이 정착했는데 이들을 '볼가 독일인( 독일어: Wolgadeutsche, 러시아어: Поволжские немцы)'이라고 부른다. 서유럽의 빈농들이 신대륙으로 많이 가던 시절 독일인 농민들은 미지의 신대륙 서부개척보다는 거리적으로 인접한 러시아 제국의 비옥한 평원지대로 이주를 택했다. 18세기 내내 꾸준히 이민이 이루어져 1897년 기준으로 볼가강 하류 지역에 살던 독일인의 수는 179만 명에 달했다. 이민을 장려하기 위해 예카테리나 2세는 칙령을 통해서 그들에게 여러가지 파격적인 특혜를 줬는데 독일인들의 언어, 문화, 자치공동체를 보존과 더불어 종교의 자유징집(병역) 면제(이민 1세대는 물론 그 후손들까지)를 이주 혜택으로 내걸었다.

파일:German Mennonite Family in south Russia region.jpg
  • 러시아 남부의 재세례파 독일인 가정. 초창기 이주민은 소수에 불과했지만 출산율이 높은 편이라 인구가 금세 증가했다고 한다.

이주민들의 고향과 종교는 다양했는데 독일 남부 바이에른 출신들은 가톨릭, 그 외 다른 지방 출신들은 루터파 개신교를 믿거나 메노파(Mennoniten)라고 불리는 재세례파의 일파도 많았다. 메노파는 비폭력 평화주의(징집거부 포함)이 중요한 교리 중 하나다. 이들의 고향 프로이센에서는 메노파 신도들에게 명목상 징집 면제를 해 주는 대신 높은 세금을 때림과 동시에 군복무를 이행하지 않은 사람이 새로 토지를 구입하는 것을 불허했기 때문에 많은 메노파 신도들이 빈곤에 시달리게 되었고 그 결과 러시아로 이주를 행했다.

러시아로의 대이주 이후 자신들의 공동체를 이루고 한동안 잘 살던 이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러시아의 정책이 점점 자신들에 대한 특권을 줄여나가는 것에 직면하게 돠었는데 그 중 가장 문제가 된 것이 바로 징집 면제 특권의 폐지다. 이로 인해 볼가 독일인들은 엄청난 종교적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당시 러시아 제국에서는 장교나 기병으로 근무하는 게 아닌 이상 기한 없이 말단 보병으로 복무해야 했다.[4] 이들은 운이 나쁘면 말 그대로 늙어 죽을 때까지 말단 사병으로 복무할 가능성도 있었으며 물론 병영에 재세례파를 위한 교회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5] 즉, 이들에게 병역의무를 지우는 건 징병당한 사람에게 가족과의 생이별과 배교를 동시에 강요하는 셈이었고 아무도 징병되지 않으려고 했으니 정부와 큰 마찰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많은 볼가 독일인들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무렵 다시 러시아를 떠나게 되었다.

그들이 다시 떠나기로 한 곳은 다름아닌 신대륙이다.[6] 이주민들은 러시아에서 떠나게 된 주된 이유 중의 하나가 종교 문제였기 때문에 새로운 이주 대상국을 택하는 것도 주로 종교에 따라 이루어졌다. 남부 독일 바이에른 출신의 가톨릭 이민자들은 주로 아르헨티나 브라질로 갔다.[7]

루터파나 메노파 등 개신교 계통 이민자들은 북미로 떠났다. 북미로 간 이민자들은 자신들이 아는 한지/건조형 농업에 맞는 미국 대평원 북부쪽에 정착하게 되는데, 제일 많이 간 곳이 노스다코타, 사우스다코타이고 그 다음이 네브래스카 캔자스 등이며 미네소타 미시간 등에도 많이 정착했다. 캐나다로 이민간 사람들은 앨버타주, 매니토바주, 서스캐처원 등에 정착했다. 미국으로 이주한 볼가 독일인들은 독일계 미국인으로 보기도 하지만 러시아계 미국인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미국으로 이주해서도 대다수는 '볼가 독일인'이라는 정체성을 지키며 살았다.[8] 북미로 이주한 볼가 독일인 중 메노파들은 또 다시 징집문제로 시련을 겪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징집 거부로 감옥에 가는 경우도 많았다. 후술한 것처럼 국외가 아니라 알타이 지방 등으로 재정착한 재세례파 신자들도 있다.[9]

한편 겨우 정착한 러시아에서 다시 떠나기가 뭐한 사람들은 볼가강 유역에 그대로 남았는데 곧이어 러시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다. 신생 소비에트 정부는 독일계 이민자들이 사는 곳에 볼가 독일인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워주고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부여해 주기도 했는데 국가 무신론을 표방한 소련의 정책으로 인해 기독교 성직자들은 시베리아 수용소로 보내지는 등의 고난을 겪기도 했다고 한다. 1921~22년 소련에 대기근이 닥쳐 식량이 부족하자 볼가강 유역의 타타르스탄부터 먼저 식량 공급을 끊는 바람에 많은 볼가 독일인들과 볼가 타타르인들 사이에서 수십만명 이상의 아사자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다가 1941년 히틀러 불가침 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공하면서 독소전쟁이 발발했고 볼가 독일인들에게 시련이 닥쳐왔다. 프리모리예 지방에 있던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했듯이 이들도 똑같이 스탈린의 지시에 의해서 대대로 살던 고향에서 쫓겨나 시베리아 중앙아시아 노동 수용소로 이주당했다. 러시아 본토 내의 볼가 독일인들이 적대국인 나치 독일에 이로운 일을 할 우려가 있는 잠재적인 부역자로 몰렸다.[10] 스탈린의 볼가 독일인 탄압은 종전 시기까지 이어졌고 이들의 원주거지에 조성된 공동묘지의 묘비도 다 부숴서 도로포장용 돌로 쓰는 등의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스탈린 사후인 1965년에야 볼가 독일인에 대한 강제이주 정책이 공식적으로 철회됐지만 이들은 대부분 원래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물론 1941년까지 존재했던 그들의 자치 공화국의 부활도 불허되었다. 이 때 고향에 못 돌아간 많은 볼가 독일인들이 시베리아나 중앙아시아에 그대로 정착해서 살게 되었는데 이들의 후손은 현재에도 많이 남아 있다. 러시아에 약 60만명의 볼가 독일인이 있으며 카자흐스탄에도 약 17만명 정도의 볼가 독일인이 살고 있다.[11]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에도 그들의 후손이 남아있다.

타국 땅에서 서러움을 당하던 이들 중 상당수는 1980년대 독일 정부에게 귀국권을 요구해서 많은 수가 독일로 이주했다. 초기에는 독일 정부도 적극적으로 이들의 이주를 지원하기도 했는데 이들이 이주한 지 너무 오랜 기간이 지나서인지 독일어를 못하는 경우가 많고 문화도 달라서 독일에서 사회 문제가 발생하자 독일 정부는 1990년대부터는 이들의 귀국을 까다롭게 했다. 대신 독일 정부는 여전히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의 독일인들을 많이 지원한다.

시베리아 인근 볼가 독일인들의 자치체로는 알타이 지방 독일인 민족구역 옴스크 주의 아좁스크 독일인 민족구역이 있다. 다만 이들은 군(郡)급 행정구역이라 과거의 자치공화국보다는 격이 떨어진다.

한편으로 러시아에서 일부 지자체(타타르스탄 공화국) 차원에서 멕시코 매노나이트들에게 토지를 내줘가머 이주시키기도 하는데 러시아라는 나라 자체가 인구 감소와 지방과소화를 한국보다 일찍 겪은 나라인 만큼 출산율이 높은 매노나이트는 있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3.2. 흑해 독일인

파일:Hutterite_migrations_in_Europe.png

파일:Mennonitesinukraine.jpg
  • 우크라이나에 잔존한 재세례파 독일계 가정

흑해 우크라이나 지역에 독일인들이 정착한 역사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는 농노들이 상공업으로 부를 축적해서 귀족들의 권위를 위협하는 것을 예방하고자 상공업을 유대인과 독일인, 아르메니아인 등에게 맡기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흐멜니츠키 봉기 폴란드 분할을 거치면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제국의 영토가 되었는데 러시아 제국은 강력한 반유대주의 정책을 펼치고 대신 독일인 상인들의 권익을 더 챙겨주는 편이었다.

독일인 예카테리나 2세의 이주정책으로 유입된 독일인들은 볼가 강 유역 뿐아니라 오늘날의 우크라이나를 포함 흑해 각지에 대거 정착했는데 이곳에 정착한 독일인을 흑해 독일인이라고 부른다. 유대인들의 입지가 약해진 대신 독일인 상인들이 대거 유입되었는데 농민 인구 유입도 적지 않았다. 트란실바니아 왈라키아 일대에서 탄압받던 독일계 재세례파(후터파) 신도들은 주로 농민이었다. 위에 설명된 볼가 독일인과 마찬가지로 후터파는 병역거부 교리가 있었고 예카테리나 2세가 이민장려를 위해 내린 칙령으로 종교의 자유징집면제 특권을 조건을 제시했기 때문에 많은 후터파 신도들이 러시아로 이민을 결심했다.

이들과는 별개로 크림반도 일대에는 고트족[12]의 후손들이 19세기까지 잔존해 있었다. 테오도로 공국 항목 참조. 우크라이나와 조지아에는 아직도 우룸인(Urums)이라는 흑해 그리스-고트 혼혈인들의 후손이 남아 있다.

3.3. 발트 독일인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지역에 살던 독일인이다. 12세기부터 발트 지역을 정복하기 시작한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 소속 군인들과 그들을 따라 정착한 독일인 상인들, 그리고 그들에 동화된 발트계 민족의 후손들이다. 중세 발트해 연안에 정착한 독일인은 주로 가족을 동반하지 않은 군인이나 상인으로, 발트 현지인 여성과 결혼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중세부터 근세까지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에서는 발트 현지인들은 농노로, 독일인들은 지주와 상인, 군인이나 성직자 등으로 계급이 고착된 상태였고 발트 현지인들은 계급이 상승하기 위해서는 독일어를 배우고 출신 배경을 숨기면서 완전히 독일인에 동화될 것이 요구되었다.

발트 독일인은 중세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현지 민중의 대다수를 차지한 원주민( 라트비아인, 에스토니아인)들을 농노로 삼고 그들 위에 귀족으로서 군림했기 때문에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스웨덴 발트 지역을 차지하였을 때도 특권층으로서 많은 혜택을 누렸고 해당 지역이 러시아 제국 영토가 된 후에도 러시아 제정에 충성했으나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에 민족주의가 부흥한 것을 계기로 입지가 악화되기 시작했다.[13] 물론 이들의 입지가 하루아침에 약화될 리는 없고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는 도회지에서 독일인의 입지가 상당히 견고한 편이었기 때문에 유대인 인구 정착이 소규모처럼 이루어진 편이었다.[14] 참고로 아관파천의 핵심 인물인 주한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가 라트비아 출신 발트 독일인이었다.

스탈린 집권 시기에 단체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했다가 스탈린이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당시 히틀러와 빅딜을 보면서 대부분 독일로 송환되었다. 나치 독일 폴란드를 점령한 후 현지 폴란드인들을 추방한 지역에 이들을 집중적으로 재정착시켰다. 독소전쟁이 터지고 독일군이 동진하면서 다시 발트해 연안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했으나 결국 독일은 망했어요. 대부분은 걸어서 독일로 탈출했고, 폴란드 점령지에 남아 있던 이들은 복수심에 불탄 소련군들로부터 매우 잔혹한 방식으로 학살당했다. 독일 땅으로 피난한 이들도 나치 패망 이후 독일의 동부 영토 상당 부분이 폴란드 영토가 되면서 재추방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발트 독일인들은 프로이센 독일인들과 함께 실향민으로서 긴 세월 동안 문화가 상당히 이질적으로 변한 전후 독일 본토에서 뿌리 박고 다시 정착하는데 많은 고생을 했다.[15]

3.4. 캅카스 독일인

파일:Caucasus.png 캅카스의 민족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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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캅카스 지방으로 진출하고 아제르바이잔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독일인들도 따라 들어왔고 조지아에도 정착했다. 2차 대전 이후 볼가 독일인과 함께 중앙아시아나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되었고 남은 이들도 소련 붕괴 이후 독일 등으로 이주하면서 현재는 캅카스 독일인 공동체는 거의 남아 있지 않고 독일풍 건물만이 그 시대를 증언해 주고 있다. 오늘날 캅카스의 구 캅카스 독일인 거주지에는 캅카스 독일인보다 볼가 독일인 혈통 이주민들이 더 많다.

대표적인 인물로 리하르트 조르게가 있다.

3.5. 중앙아시아 독일인

스탈린 시기 대숙청과 강제이주의 영향으로 독일계 러시아인(특히 볼가 독일인) 상당수가 오늘날에 카자흐스탄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던 역사가 있다. 당시 강제 이주 여부는 성씨와 외모 등을 보고 결정했기 때문에 상당히 자의적이고 부당한 결정도 여럿 있었다.
여기에 또 우크라이나와 북부 카프카스 지방에서 볼가강 연안으로 이주해 와서 살던 독일계 시민들과 그 밖의 소련 각지에 산재해 있던 독일계 시민들의 흐름이 합류했다. 독일인 혈통이라는 특징과 표정이 드러나기만 하면, 내전의 영웅이건 고참 당원이건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추방되었다.[원주]
독일계 시민의 추방은 본질적으로 쿨라크 계급의 숙청과 같은 것이었다. 다만 그 방법이 좀 더 온화할 뿐이었다. 그들은 더 많은 물건을 휴대할 수 있었고 유형지도 아주 불모의 땅은 아니었다. 쿨라크 숙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독일계 시민의 숙청에도 아무런 법적 근거는 없었다. 형벌은 형벌이고, 유형은 유형일 뿐이었다. 형법 따위와는 상관없이 몇십만 명이라도 한꺼번에 유형에 처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것은 최고 권위자의 개인적인 명령이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제1부 제2장[17]
니키타 흐루쇼프 시절에는 독일인 인구 상당수가 흐루쇼프의 삽질 처녀지 개간 운동에 투입[18]된 적도 있다. 카자흐로 유배된 독일인들은 1970년대 들어 자치공화국을 부활시켜 달라고 모스크바로 상경해 청원하기도 해서 1979년 소련 공산당에서는 카자흐 SSR에 독일계 자치주를 세우는 안을 심각하게 검토했으나 카자흐인의 폭동이 일어나 백지화된 적도 있었다.

카자흐스탄 내 러시아인 인구와 마찬가지로 카자흐스탄 내 독일인 인구도 주로 카자흐스탄 북부에 집중되어 있다. 이들은 2차대전 이후에는 독일어 사용 및 교육이 금지되어 사실상 러시아어만 사용했는데 이 때문에 소련 붕괴 후 독일계 러시아인 후손 중 독일로 재이주한 사람들은 대부분 독일어를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오늘날 독일 인구 중 카자흐스탄 출신들은 카자흐인보다는 이쪽이 훨씬 많다.[19] 볼가 독일인들은 가톨릭 및 개신교의 여러 교파를 믿었지만 카자흐스탄에 강제 이주된 독일인들은 소련 시절 국가 무신론 정책 + 반독 감정의 여파로 오늘날에는 상당수가 무종교/무신론자이며 일부는 러시아인들과 통혼하는 과정에서 정교회로 개종했다고 한다.

상술한대로 한 때 95만여 명에 달했던 카자흐스탄의 독일인들은 1999년부로 35만여 명, 2020년 부로는 17만여 명 대로 계속 감소하고 있다. 오늘날 카자흐스탄 전체 인구의 약 1% 정도에 해당하는 수치다. 195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카자흐스탄 지역 전체 인구의 6~7%를 구성하던 것에 비하면 인구 비율이 많이 감소했다고 하겠다. 그나마 카자흐스탄이 중앙아시아에서 나름 세속화가 잘 이루어지고 언론 자유도 있고 경제적으로 윤택한 편이니까 아직 일정 규모 이상의 인구가 남아 있는 거고 소련에서 독립한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들에서는 경제상황/자유도 등이 카자흐스탄만 못한 관계로 독일이나 러시아 등으로 진작 빠져나간 상태라고 한다. 키르기스스탄 독일인은 주요 정착지인 베르그탈(Bergtal, 혹은 Rotfront), 칸트(Kant)[20], 토크모크(Tokmok)를 중심으로 소련 말기에는 10만여명에 달했으나 2009년 기준으로 9천여명으로 줄었다.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에는 소련 말기 3~4만명 안팎이었다가 2010년경 수백명 정도 남았고 투르크메니스탄에는 소련 말기 4천여명 수준이었다가 2010년경 2800명 수준으로 줄었다.[21]

3.6. 유대계 독일인

러시아로 이주한 독일인들 중에는 아슈케나즈 유대인들도 있었는데 독일계 러시아인이면서 동시에 유대계 러시아인인 복잡한 혈통으로, 블라디미르 레닌의 어머니도 유대계 독일인 가계이며 정확히는 독일인과 스웨덴인의 혼혈이다.

3.7. 기타 사례

독일인은 러시아 각지로 이주한 만큼 위의 집단 외에도 다른 독일계 러시아인 집단이 더 있지만 이들의 정확한 인구에 대한 데이터가 부족하다.
  • 베사라비아 독일인: 몰도바의 독일계 주민들. 러시아 제국 시절이나 소련 시절에 이들 중 일부가 러시아로 이주해 오기도 했다. 前 독일 대통령 호르스트 쾰러의 부모가 베사라비아 독일인이었다.[22]
  • 동독계 러시아인: 냉전 시절 동독에서 소련으로 이주한 이들 및 그 후손들. 명목상 동독이 소련의 우방국이었기 때문에 대체로 생계형 이민이 많았으며 동독에 주둔하던 소련군 남성이 동독 현지인 여성과 결혼하여 이후 아내를 데리고 소련으로 돌아간 경우도 있었다.
  • 서독계 러시아인: 냉전 시절 서독에서 소련으로 탈주한 이들 및 그 후손들. 대체로 공산주의 성향 서독 주민들이 망명 이민을 온 경우가 많았다.
  • 라틴아메리카 독일인계 러시아인: 라틴아메리카의 독일계 주민들이 다시 러시아로 이주한 케이스. 주로 냉전 시절에 미국의 패권주의나 자국의 반공주의에 대한 반감 때문에 소련으로 이주해온 케이스가 많다. 공산권 쿠바의 독일계 주민들은 쿠바 혁명 이전에는 공산주의 탄압을 피해(특히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권 시절), 쿠바 혁명 이후에는 생계형 목적으로 소련으로 이주한 경우가 많다.

4. 현황

소련 말기인 1989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독일계 소련인은 203만 9천 명이었고 러시아어를 제1언어로 구사하는 자는 50.8%, 제2언어로 구사하는 자는 45.0%로 합쳐서 95.8%가 러시아어를 할 줄 알았는데 이는 소련 내 비러시아계 민족 중에서 유대계 소련인에 이어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2002년 기준으로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독일계 러시아인의 수는 60만 명[23], 2020년부로 카자흐스탄에는 17만 명이며 우즈베키스탄 등지에도 독일인들이 그 지역의 소수민족으로 살고 있다. 카자흐스탄에서는 1989년에는 95만여 명의 독일계가 거주하였으나 소련 붕괴 이후 이들이 대거 독일로 이주하여 2009년 이후에는 17만여 명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카자흐스탄 출신 독일인들은 오늘날 독일의 주요 이민자 집단 중 하나를 구성한다. 소련 붕괴 이후 볼가 강 연안에 독일인 자치 공화국을 다시 세우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러시아의 반독 감정으로 무산되는 등 반독 감정 때문에 고생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2010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안드레 가임은 독일계라는 이유로 소련 시절 대학 진학을 거부당한 적이 있다고 한다. 모국인 독일이 잘 사는 나라다 보니 독일이 지원을 많이 해 주는 편이다.

사실 독소전쟁 이전인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 러시아인들은 독일인에게 묘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편견이 집약된 것이 독일계 러시아인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소설 스페이드의 여왕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지하 생활자의 수기다. 부정적인 편견 외에도 기계처럼 정확하다는 식의 이미지도 존재했다.

독일과 거리가 먼 시베리아나 북극과 가까운 지역에 독일인 공동체가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독일어의 H는 러시아어에서는 Г[24]로 표기하기 때문에 하인리히, 헤르만 등 H로 시작하는 독일어식 이름들은 겐리흐(Генрих, 또는 게인리흐·Гейнрих), 게르만(Герман)으로 부른다. 빌헬름은 '빌겔름(Вильгельм)'으로 부른다.

5. 인물

★ 표시는 유대계 독일인 혈통을 의미한다.
◇ 표시는 러시아 제국·소련·러시아 국적이 아닌 인물을 의미한다. 도중에 국적을 바꾼 경우는 최종 국적 기준.

6. 관련 문서



[1] 다른 하나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엄밀히 말하면 브란덴부르크가 본체고 프로이센은 덤이었다. [2] 러시아 작가인 미하일 레르몬토프의 부계도 스코틀랜드계다. [3] 파벨 1세부터 니콜라이 2세까지 여섯 황제의 황후들은 덴마크인 1명을 제외하면 모두 독일인이다. [4] 일단 규정 상으로는 25년이었다. 북한도 25년 동안 사람을 가두어 두지는 않는다 사실상 자기 나라 안에 가두어 놓기는 한다만 다만 '규정 상'이라는 말에서 보이듯 이 기한이 지켜지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그 때나 지금이나 러시아 군대라는 곳이 인명경시 사상이 강하다 보니 살아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었다. 러시아 제국 시절 징병제란 추첨을 통해 여러 집 중 한 집의 입영 대상자가 입대하는 식이었기 때문에 재수 없게 당첨되면 일단 해당 집에서는 장례식부터 치를 정도였다. [5] 물론 이는 다른 개신교 교파나 가톨릭을 믿는 볼가 독일인 농민들에게도 마찬가지… [6] 개신교도들의 대다수는 미국으로 가 독일계 미국인이 되었다. [7] 독일계 브라질인, 독일계 아르헨티나인 문서 참조. [8] 다만 루터파를 믿는 볼가 독일인들은 훗날 다른 독일계나 스웨덴 등 북구계 이민자 혹은 핀란드계 이민자 등과 통혼하여 정체성이 희석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9] 참조 [10] 히틀러는 그들이 독일어를 할줄모르고 독일 문화를 따르지 않더라도 독일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들의 인종이 독일인이기 때문이다. [11] 소련 붕괴 이전에는 90만여 명에 달했다. [12] 이들은 동게르만계 민족이므로 서게르만족인 독일인과는 당연히 별개의 민족이다. 고트족을 독일인의 직계 조상으로 여기는 건 북게르만족인 덴마크인, 노르웨이인, 스웨덴인, 아이슬란드인을 독일계로 여기는 것과 다름없다. [13] 자세한 내용은 에스토니아/역사 라트비아/역사 문서 참조. [14] 러시아 혁명 당시 라트비아 소총 연대가 볼셰비키에 적극 가담했던 이유 중 하나로 발트 독일인들에 대한 라트비아인들의 증오심을 꼽는 경우도 있다. 반면 리투아니아는 프로이센의 지배를 받던 현재의 클라이페다 일대 소 리투아니아(Mažoji Lietuva) 지역을 제외하면 독일인 인구가 적은 편이었고 대신 유대인 인구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15] 알려진 예로는 독일 축구선수였던 올리버 칸의 할아버지가 발트 독일인이고 할머니가 라트비아인이다. [원주] 독일계 혈통인지는 성을 보고 판별했다. 설계 기사 바실리 오코로코프(Василий Окороков)는 자기 성이 설계도에 서명하기 어울리지 않다는 생각에서 아직 개명이 용이하던 1930년대에 로베르트 시테케르(Роберт Штеккер, Robert Schtecker)로 바꾸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인가. 그는 서명을 멋지게 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로 연구했다. 그런데 지금 자기의 혈통을 증명할 길이 없어 독일인으로 잡혀 들어왔다. "이건 너의 본명이지? 파시스트 첩보대한테서 어떤 임무를 받아 왔나?" 탐보프 사람 카베르즈네프(Каверзнев, 모사꾼이라는 뜻)는 자기 성이 남에게 좋지 못한 인상을 준다고 해서 이미 1918년에 콜베(Колбе, Kolbe)로 개명했었다. 그에게 오코로코프와 동일한 운명이 닥친 것은 언제였을까? [17] 솔제니친의 기록에 따르면 독일계 러시아인들은 상당히 근면하였으며 이들의 정착지 역시 비교적 풍족한 편이었다고 한다. [18] 중국의 대약진 운동처럼 대기근을 유발한 것은 아니었으나 대신 상당수의 목초지를 급속도로 사막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19] 종종 독일의 극우파들이 카자흐스탄 독일인 이민 인구수까지 중동 출신 이민자로 카운트하여 무슬림 이민자들이 독일을 잡아먹는다 같은 프로파간다 등에 악용하기도 한다. [20] 임마누엘 칸트와는 관계없고, 키르기스어로 설탕을 뜻한다. [21] 참조: 러시아어 위키백과의 투르크메니스탄 인구통계 관련 문서 [22] 다만 본인은 나치와 소련의 인구교환으로 부모가 정착한 폴란드 총독부령 하이덴슈타인(폴란드 스키에르비조프)에서 출생했다. [23] 최대치로 잡으면 150만 명 정도까지 늘어난다. [24] 역사적으로 Г는 /ɦ/ 또는 /ɣ/ 정도의 음으로 발음했고 현재도 같은 계열의 우크라이나어, 벨라루스어 등은 그렇게 읽고 쓴다. [25] 출생지는 탈린 인근의 나이사르(Naissaar) 섬이다. 다만 러시아 쪽에서는 활동하지 않았고 미트바이다(Mittweida)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독일로 이주한 후에는 독일에서 생활하면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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