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2 19:18:45

니콜라이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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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 제14대 황제
니콜라이 2세
Никола́й II
파일:Николай II.jpg
출생 1868년 5월 18일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차르스코예 셀로 알렉산드르 궁전
사망 1918년 7월 17일 (향년 50세)
러시아 SR[1] 페름현 예카테린부르크구 예카테린부르크 이파티예프 하우스[2]
(現 러시아 우랄 연방관구 스베르들롭스크주 예카테린부르크 피의 교회)
묘소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
재위기간 전러시아의 황제[3]
1894년 11월 1일 ~ 1917년 3월 19일
서명
파일:니콜라이 2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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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d30><colcolor=#000> 가문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가문
이름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Рома́нов)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
어머니 덴마크의 다우마 공주
형제자매 첫째 남동생 알렉산드르[4], 둘째 남동생 게오르기, 첫째 여동생 크세니야, 셋째 남동생 미하일, 막내 여동생 올가[5]
배우자 헤센의 알릭스 공녀 ( 1894년 결혼)
자녀 장녀 올가, 차녀 타티야나, 3녀 마리야, 4녀 아나스타시야, 장남 알렉세이
종교 러시아 정교회 }}}}}}}}}
파일:니콜라이 2세의 초상화.jpg
공식 초상화

1. 개요2. 생애
2.1. 오쓰 사건2.2. 통치
2.2.1. 순탄하지 않은 즉위식2.2.2. 전제군주정 고수자2.2.3. 외교정책 및 러일전쟁2.2.4. 1905년 혁명2.2.5. 두마와 총리 제도 설치2.2.6. 현대적인 사회보험 및 노동법 도입2.2.7. 제1차 세계 대전 참전2.2.8. 퇴위, 유배, 망명시도2.2.9. 일가의 최후
2.3. 사후
3. 재위 기간 러시아의 경제 상황4. 평가
4.1. 인간적인 면4.2. 긍정적 평가
4.2.1. 전제군주정을 고수한 이유4.2.2. 과장된 일화들
4.3. 부정적 평가
4.3.1. 위기에 맞지 않는 지도자4.3.2. 능력과 인간성이 별개인 사람
5. 가족관계
5.1. 형제자매5.2. 황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5.3. 자녀
6. 여담
6.1. 돌연변이6.2. 닮은꼴6.3. 음모론
7. 대중매체에서8.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러시아 제국 황제. 알렉산드르 3세 덴마크의 다우마 공주의 맏이이다. 알렉산드르 2세의 장손이자 첫 손주이며,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황태자의 장조카이다. 표트르 1세의 7대손이기도 하다.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러시아 역사상 마지막 군주가 되었고, 그것도 모자라 황후와 자녀들과 총살당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러시아 정교회에서는 수난자 성 니콜라이(Святой страстотерпец Николай)로 시성된 인물이며, 축일은 7월 17일이다.

2. 생애

컬러로 복원된 생전 니콜라이 2세의 영상

1868년 당시 알렉산드르 2세 황태자(Его Императорское Высочество Государь Наследник Цесаревич и Великий Князь, '후계 황태자 및 대공 전하')였던 알렉산드르 3세 덴마크의 다우마 공주 맏이이자 적장자로 태어났다. 니콜라이 2세의 이름인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한 큰아버지인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황태자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가 붙여줬다.

2.1. 오쓰 사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오쓰 사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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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황태자 시절인 1891년 니콜라이는 일본 제국을 방문했다. 그런데 시가현 오쓰시를 경유하던 중, 황태자의 내일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경관인 쓰다 산조(津田三蔵)가 도로에서 갑자기 칼을 빼 들고 그를 습격하는 테러가 발생했다. 그는 이 사건으로 오른쪽 머리에 부상을 입었지만 회복했고, 외교 관계 악화를 의식한 일본 측의 발빠른 대응으로 별 문제 없이 무마됐다. 쓰다는 테러 당시에는 외빈을 습격하고 일본을 위험에 처하게 한 것으로 여겨져 전국민으로부터 규탄받았으나, 러일전쟁을 전후해 일본 내 대러감정이 악화되자 오히려 애국자로 평가[6]받기도 했다.[7]

2.2. 통치

2.2.1. 순탄하지 않은 즉위식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호딘카의 비극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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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nicholas ii coronation.jpg
르프티주르날(Le Petit Journal)》지에 실린 니콜라이 2세의 초상화

1894년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제위에 올랐다. 알렉산드르 3세는 49세였고 평소 강건한 신체를 자랑했으나, 1888년 기차 사고의 후유증으로 생긴 허리 통증을 계속 무시해서 병을 키운 것이 화근이 되었다. 문제는 알렉산드르 3세가 자신의 건강을 과신한 나머지 아들이 30세가 되면 후계 교육을 시켜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그 전인 니콜라이 2세가 26세 때 사망하는 바람에[출처][9]니콜라이 2세는 차기 황제로서의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채 즉위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러시아 제국 정부는 니콜라이 2세의 즉위를 축하하면서 1896년 5월 30일 러시아인들에게 기념품과 선물을 나눠 주는 행사를 계획했다. 선물은 소시지, 케이크, 사탕 땅콩, 머그잔이 든 자루 40만 개였고, 그 외에도 맥주 3만 통과 벌꿀술 1만 통을 준비했다. 그런데 선물을 받으러 온 사람들이 무려 1백만 명이 넘었던 것. 아침에 행사를 시작하자마자 행사장은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는 ' 호딘카의 비극'으로 불리는데 이때 1,389명이 압사하고 1,300여 명이 다치는 다중밀집 인파사고가 발생하게 된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2천 명의 경찰이 배치되어 있었지만 백만 인파를 통제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즉위 첫날부터 이렇게 안 좋은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에, 이를 왕조에 드리운 불길한 징조로 보는 이들이 많았다.

2.2.2. 전제군주정 고수자

한편 알렉산드르 3세가 사망하자 러시아의 자유주의자들은 희망을 품었다. 보수적인 황제 알렉산드르 3세의 사망과 젊은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즉위는 1856년 보수적인 니콜라이 1세가 사망하고 개혁적이고 젊은 알렉산드르 2세가 즉위해 러시아 제국 전체를 뒤흔든 대개혁을 시작했던 기억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사교계와 지식인들 사이에서 젊은 황제가 개혁파라더라는 근거 없는 소문이 퍼져나갔고 이에 영향을 받은 젬스트보의 자유주의자들과 개혁의 필요성을 공감한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황제에게 입헌과 개혁에 대한 청원서를 올릴 것을 계획했다.

트베리, 체르니고프를 위시한 9개 주 젬스트보가 청원서를 작성해 황제에게 바쳤다. 이 청원서는 보수파(차르주의자)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아주 온건한 논조를 띠었으며 자유주의자들의 요구 사항 중 최소한의 내용만 담은 것이었다. 그들은 젊은 황제가 인민의 간곡한 청을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했으며 이를 통해 러시아에서 점진적인 개혁이 이뤄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황제는 즉위한 이후, 공식석상에서 이렇게 답했다.
"짐은 국가의 통치에 젬스트보의 대표들을 참여시켜 달라는 '허황된 꿈'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젬스트보 회의에서 자신들의 망상을 이야기한 것을 알고 있다. 인민의 복지를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는 짐은 안식에 드신 부황께서 그랬던 것처럼 전제군주정의 기초를 확고히 하고 흔들림 없이 수호할 것임을 모두에게 선언하노라."

황제는 젬스트보 자유주의자들의 요청을 허황된 꿈으로 일축하며 전제정의 수호를 외쳤다. 이에 강경 보수파는 환호했지만 자유주의자들과 개혁주의적 보수파들은 황제가 부친 알렉산드르 3세와 다름없음을 깨닫고 크게 실망했다. 물론 이는 예정된 결말이었다. 니콜라이 2세는 부친을 가르쳤던 차리즘 성향의 가정교사 콘스탄틴 포베도노스체프(Константин Победоносцев)에게서 교육 받고 그의 사상에 물든 사람이었다. 니콜라이는 러시아 정교회와 차리즘을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이었고 주변의 황족들은 젬스트보 의원들이 입헌과 개혁을 요청하는 것을 불온하게 보았다. 따라서 9개 주 젬스트보의 청원서 운동은 지나치게 순진했으며 지나치게 무계획적이었다.

황제는 '젬스트보의 반란'을 진압했으니 더이상 개혁 이야기가 나오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그의 선언은 실수였다. 황제가 젬스트보의 요청을 '허황된 꿈'으로 치부한지 이틀 뒤인 1895년 1월 19일에 익명으로 쓰인 편지가 공개되었다. 편지는 황제의 선언이 자유주의자들의 희망을 박살내고 러시아 사회의 발전을 저해했다고 평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글쓴이는 편지의 마지막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당신이 먼저 싸움을 시작했고, 싸움은 스스로를 기다리게 하지 않습니다."

황제는 자신의 가장 큰 우군이 될 수 있는 지방 의회의 자유주의 세력을 적으로 돌렸다. 초기 청원서 운동을 시작한 젬스트보 의원들은 러시아 제국의 체제 자체를 변화시킬 생각은 없었으며 대신 러시아 전제정을 인정하고 체제 내부의 변화를 추구했다. 그들은 러시아가 비밀 경찰이 활동하고 관료들이 모든 권력을 갖는 관료제 국가에서 개인의 자유가 인정받고 관료들의 전횡이 없는 법치국가로 변화하기를 바랐다.

실제로 젬스트보에는 군주의 권한을 강력히 제한하는 서유럽식 입헌제를 원한 이들도 상당수 존재했지만, 이들도 급진적 개혁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젬스트보 자유주의 세력의 거물인 드미트리 시포프(Дмитрий Шипов)와 그의 의견에 동의하는 여러 의원들, 청원 운동에 참여한 보수주의자들은 러시아에서 서유럽식 입헌과 자유주의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며 황제와 인민 사이에 원활한 의사소통이 이뤄지고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 지켜지며 마지막으로 젬스키 나찰니크를 비롯한 관료들의 전횡이 사라진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2.2.3. 외교정책 및 러일전쟁

니콜라이 2세의 외교정책은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를 그대로 따라갔다. 원래 나폴레옹 전쟁 이래 러시아는 프로이센 왕국과 우호적이었으나, 독일 통일 이후 현상유지를 선호한 독일 제국 초대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 팽창주의를 추구하는 빌헬름 2세에 의해 실각하면서 파탄난다. 비스마르크의 후임인 레오 폰 카프리비는 러시아와의 동맹을 파기했다. 러시아는 세력균형을 위해 독일과 앙숙이었던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이후 영국도 참가시켜 3국 협상이 이루어진다.

독일 제국의 팽창주의를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프랑스 동맹을 강화하고, 현상유지의 평화를 추구한다는 입장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리하여 본인 주도로 헤이그 평화 회의를 개최하였고, 이것은 1899년과 1907년 두 번 열렸다. 이런 종류의 국제회의로는 최초로 열린 것이다. 하지만 성과는 없었다.[10]

이렇게 현상유지를 선호했으면서도, 그와는 모순적으로 아버지가 지지한 범슬라브주의를 마찬가지로 지지하여 발칸반도의 슬라브족 민족들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벗어나는 것을 지원하고, 이곳의 슬라브족 국가인 세르비아 왕국의 후견인 역할을 했다. 이런 모순적 외교 정책은 이후 1차대전의 직접적 원인이 된다. 즉, 황태자 암살 책임이 있는 세르비아 왕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정벌하려고 하자, 러시아는 세르비아를 보호하기 위해 총동원령을 발동했고, 이것이 독일의 대러시아 선전포고를 불러와 세계대전이 터진 것이다.

러시아는 유럽에서는 현상유지를 선호했지만 극동에서는 팽창주의를 추구했다. 러시아는 계속 빈사상태였던 청나라 영토를 먹어들어갔다. 그리하여 만주에는 러시아 주도로 철도가 건설되었으며, 이미 1895년 삼국간섭으로 러시아가 관심있는 요동반도 일본 제국이 먹으려는 것을 좌절시킨 바 있었다. 니콜라이 본인 이야기로는 조선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으나, 일본이 조선을 점령하는 것은 용인할 수 없다고 언명하기도 했다. 이런 갈등 탓에 일본과 전쟁이 일어났다.[11]

러시아 제국군 일본군은 만주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반복했으나 아래의 국내 문제로 인해 전쟁은 러시아에 불리하게 마무리되었고, 발트 함대 대한해협에서 전멸하자 미국의 중재로 맺은 포츠머스 조약으로 러시아는 한반도와 남만주에서 손을 떼었다.

2.2.4. 1905년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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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생각하던 이상적인 황제의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놓친 사건. 이 사건을 기점으로 니콜라이 2세의 평판은 러시아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이는 지금도 반공주의자들도 옹호하지 않는 최악의 실책이었다.

1904년 발생한 러일전쟁으로 민생이 악화된 가운데, 1905년 1월 22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춥고 배고픈 민중들은 황제의 초상화를 앞세우고 황궁으로 와 엎드려 빵과 자비를 구했다. 이들을 이끈 게오르기 가폰 신부는 사실 오흐라나 프락치로, 노동자들이 너무 과격해지지 않도록 미리 심어둔 사람이었다.[12] 가폰은 미리 차르 측에 "노동자들을 가만 두면 폭동이 일어날 테니, 차르가 황궁 앞에 온 노동자들에게 자비를 보여주는 쇼를 연출하여 분노를 달래면 노동자들도 진정될 것이다"라고 전달할 정도였다. 가폰 신부는 자신이 짠 이런 시나리오를 차르 측이 따를 줄 알고, 황궁 앞까지 행진하는 시위대를 조직한 것이다. 이들은 8시간 노동제과 공정한 임금, 노동조건 개선, 노동자 참정권을 요구했다. 그래서 이 시위의 요구가 너무 온건하다는 이유로 볼셰비키, 멘셰비키, 사회혁명당은 이 시위에 불참했다.

하지만 이런 온건한 요구와 평화적 시위에도 불구하고 황궁 수비대가 시위대에 발포하고 카자크 기병대가 돌진하여 수백 명~천 명의 사망자가 났다.[13] 비무장 군중에게 발포하여 수백명이 사망한 이 사건은 명백히 차르의 책임이었으며, 니콜라이는 여러 나라에서 학살자로 규탄받았다. 이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러시아 인민들에게 로마노프 왕가는 "자비로운 어버이 차르"가 아니라 "인민의 억압자"임을 각인시켰으며, 이를 기점으로 제정 폐지를 주장하는 급진파 정치세력들이 우후죽순처럼 성장하게 된다.

이때 국제적으로 평판이 너무 나빠져서 훗날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자 해외로 망명하고자 하는 니콜라이 2세 일가를 받아주는 나라가 없을 정도였으며[14] 상술했듯 훗날 반공주의자들도 비판할 만큼 최악의 실책이자 악행이었다. 이는 니콜라이 2세를 처형한 소련이 붕괴된 21세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후 러시아 제국 전역에서 봉기가 발생하며, 이런 일련의 봉기를 러시아 1905년 혁명이라고 한다. 이 와중에 폴란드 핀란드 등 과거 러시아 제국에 합병된 지역에서는 독립 운동 세력이 성장하게 된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전제정을 고집하던 니콜라이 2세는 1905년 8월 연설을 통해 헌법의 제정과 의회( 두마)의 설치를 선언한다. 하지만 제국 전역의 봉기는 1907년까지 계속되며, 봉기와 진압의 와중에 러시아는 수만 명이 사망하는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2.2.5. 두마와 총리 제도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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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일요일 사건 후, 내무부 장관 알렉산드르 불리긴(Александр Булыгин)은 차르가 입헌군주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제정이 위험하다고 상신했고 재위기간 내내 일절 양보하지 않았던 니콜라이 2세도 결국 의회 격이었던 두마의 설치를 받아들였다. 이 두마를 불리긴이 제창해 설립했다고 해서 불리긴 두마라고 부른다.

여러 단명총리가 나오는 가운데 1906년부터 1911년까지 총리를 맡은 표트르 스톨리핀은 토지제도를 근대적으로 바꾸려는 토지개혁을 밀어붙이는 동시에, 혁명운동에는 혹독한 탄압[15]을 하면서 재정을 건전화하여 어느 정도 정국을 안정시켰다.

2.2.6. 현대적인 사회보험 및 노동법 도입

20세기 초의 러시아 제국 노동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보장제도였다. 사실 기업이나 노동자 단체 단위에서 정부기관에 청원을 넣어 승인을 받는 식으로 이전에도 있었다. 예를 들어 1882년 하리코프에서 열린 제7차 러시아 남부 광업인 총회(Съезд горнопромышленников Юга России)에서는 광부보조기금의 창설을 승인했고 1883년 8차 총회에서 농업부와 국유부에 정식으로 청원하여 1884년 형성되었다. 1884년에서 1907년까지 이들은 총 47만 루블 가량을 지불했다.

1880년대부터 국가보험에 창설을 논의하기 위한 특별위원회가 창설되었지만 지지부진했고 1893년대 초에 재무장관 비테에 의해 몇 가지 초안이 국가 소비에트에 제출되었으나 통과되지 못했다. 이것은 자본가들의 강력한 반발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노동자 사회보장제도가 확립되었다는 것이 큰 반향으로 다가왔고 1896년 8월 4일에서 17일까지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열린 3차 전러시아 무역 및 산업 총회에서 다시 문제의 쟁점으로 돌아왔다. 경제와 산업 전반에 대해서 150여개의 보고서가 발표되었는데 그 중 거의 절반이 노동자들의 사고 및 질병에 대한 보험, 의료 서비스, 근무 시간, 아동 및 여성노동 등을 다루었고 논의 결과 정부가 제국 내의 모든 노동자들에게 적용시킬 수 있는 체계적인 형태의 국가보험을 개발하고 감독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결의안이 발표되었다. 게다가 1901년과 1902년 각각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일종의 합법노조였던 주바톱시나(Зубатовщина)가 창설되었고 노조를 단위로 한 정부 지원은 노동자들의 삶의 수준을 극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1902년 '사고로 인해 일할 능력을 상실한 노동자에 대한 기업가의 보상 법안' 이 국가 소비에트에 제출되어 통과되었고 1903년 6월 2일 니콜라이 2세의 승인을 받아 1904년 1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노동자 본인이나 가족이 법정에서 노동자의 사망이나 부상 책임을 기업가에게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면 혹은 기업가가 자신이나 회사 측이 노동자의 사망이나 부상에 책임이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면 피해자나 그 가족에게 일정 금액을 지불해야 했다. 예를 들어 금액은 노동자가 사망하거나 완전히 노동능력을 상실한 경우 임금의 2/3을 본인이나 가족이 죽을 때까지 지급해야 했다. 그러나 이것은 산업 노동자들에게만 적용되었다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1905년 1월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정부는 주바톱시나의 사실상의 실패와 혁명적 선전이 노동자들 사이에 침투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내각회의에서는 비스마르크 법을 그 모델로 삼았다. 이 법안들은 원래 2차 두마에서 고려될 거라 여겼지만 2차 두마가 해산되는 바람에 3차 두마까지 기다려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국가보험법은 1912년 1월 하원을 통과했고 5월 상원을 통과했으며 황제의 승인을 받았다. 법은 1912년 6월 23일부터 시행되었다.

2.2.7.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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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000010710.jpg
작전 지도를 보는 니콜라이 2세[16]

니콜라이 2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견제하고자 남슬라브 국가인 세르비아 왕국과 대세르비아주의 단체인 검은 손을 암묵적으로 지지하였고 사라예보 사건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사라예보 사건의 배후인 세르비아 왕국을 공격하자 니콜라이 2세는 슬라브 형제국인 세르비아 왕국을 지원하고자 러시아 제국에 총동원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동맹 독일 제국을 자극했고, 결과적으로 독일은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사라예보 사건은 세계대전으로 확산된다. 다만 니콜라이 2세는 사촌지간인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와 계속 전보를 주고받으며 전쟁만은 끝까지 막아보려 했지만, 양국의 군부는 전쟁을 원하고 있었고, 니콜라이나 빌헬름의 의지에 상관없이 전쟁은 발발했다.

전쟁 초기에는 슬라브 민족주의와 전쟁에 대한 낭만주의, 애국심 폭주 등 러시아 국민들도 전쟁을 지지하였으나 러시아 제국군은 오랜 기간의 쇠퇴로 인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유럽의 환자 오스만 제국군과 여러가지 문제점으로 허우대만 멀쩡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과의 전투에서만 선전했을 뿐, 세계 최고 수준의 정예군이었던 독일 제국군 상대로는 브루실로프 공세 이전까지는 지지부진했다. 덤으로 전쟁으로 인해 전쟁 전만 해도 나름대로 먹고 살 만 했던 러시아 국민들의 생활 수준은 나락으로 떨어졌으며, 특히 독일계 러시아인들은 민족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눈칫밥을 먹어야 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장기화되자 당시 알렉산드르 트레포프(Александр Трепов) 총리는 독일과 단독강화를 모색했다. 그러나 대독강경파인 알렉산드르 프로토포포프(Александр Протопопов) 내무부 장관은 이를 반대했다. 니콜라이 2세는 독일과의 단독강화로 기울었으나, 이는 반정부 성향의 자유주의적 야당에게 정부를 공격할 수 있는 좋은 명분이 되었고, 러시아의 전선 이탈을 우려한 영국 프랑스가 이들을 지원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혁명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2.2.8. 퇴위, 유배, 망명시도

민심이 악화되면서 페트로그라드 시민과 노동자들은 니콜라이 2세의 퇴위를 요구하는 파업에 나섰고, 페트로그라드는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이때 젊은 두마 의원인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수도의 군중을 선동하여 내각의 장관들을 모두 체포하고 주요 기관을 점거하도록 하여 혁명의 지도자로 급격히 떠오른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노프 왕가의 중신들조차 결국 더이상 군주정이 존속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군부 대표인 니콜라이 루츠키 총참모장과 두마 의원 바실리 슐긴이 니콜라이 2세의 퇴진을 요구했다. 결국 니콜라이 2세는 전시에 내분이 일어나면 안 된다는 이유로 1917년 3월 15일 퇴위에 동의했다. 이를 2월 혁명이라고 한다.[17] 결과적으로 케렌스키를 수반으로 하는 러시아 연방 임시정부가 수립된다.

니콜라이 2세는 퇴위에 동의하긴 했지만, 두 번이나 군주정을 연장하려 시도했다. 첫 번째 방안은 자신은 퇴위하되 제위를 외아들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에게 넘기고 막냇동생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을 섭정으로 지정해 제정을 연장하려 하였으나, 퇴위를 강권한 신하들이 그것만으로는 민중의 분노를 잠재우는데 부족하다고 상신하자 다시 아들 알렉세이 대신 막냇동생 미하일 대공에게 제위를 넘겨 어떻게든 로마노프 왕조의 명맥을 연장하려 했다. 하지만 황실에 대해 악화될 대로 악화된 여론은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는 것 정도로 돌아올 리가 없었고, 더해서 '어차피 로마노프 일가는 다 똑같은 놈들이다.'라는 여론이 대세였다. 결국 미하일 대공마저 민의에 반한 제위 계승을 거부하고 군주정 폐지 요구를 수락하면서 로마노프 왕조는 그 막을 내렸다.[18]

케렌스키가 수반으로 있는 임시정부는 황제를 보호한다고 약속했고, 니콜라이는 가족과 함께 우랄 산맥 근처의 가족과 함께 토볼스크에 연금되었다. 이런 유배는 사실 황제 일가를 보호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도시 지역에서는 분노한 민중들이 황제 처단을 요구하며 언제든지 다시 봉기할 수 있었기 때문에, 대중의 눈을 피해 황제를 오지로 옮긴 것이다.

임시정부는 니콜라이 2세를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의 외가인 영국으로 망명시키려고 했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총리가 이끄는 영국 정부도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19]

그러나 당시 영국 왕실 비서실장이었던 스탬퍼덤 남작 아서 빅(Arthur Bigge, 1st Baron Stamfordham)이 니콜라이 2세 일가의 망명 수락에 제동을 걸었다. 이유는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독일 제국에 대한 영국 국민들의 감정이 굉장히 나빠지면서 영국 왕실에 대한 반감도 함께 커졌기 때문이었다. 하노버 왕조 이래 영국 왕실은 독일계로 특히 왕실의 배우자들은 대체로 독일 또는 북유럽 출신이었다.[20] 당시 왕가의 성도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 앨버트 공( 독일인)의 성씨인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영어식 표기 색스코버그고타(Saxe-Coburg and Gotha)를 썼고[21], 왕가 인사들은 영어뿐만 아니라 독일어에도 익숙했다. 조지 5세의 왕비였던 테크의 메리도 영국에서 태어났으나 부모는 독일인이었고, 자신도 독일어를 모어로 쓰던[22] 사람이었다.

스탬퍼덤 남작은 광범위한 정보 수집 끝에 "전쟁의 시발점[23]이 된 러시아 황제 일가를 데려오는 것은 영국에서도 군주제 폐지 운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며 강력히 반대했고, 니콜라이 2세의 이종사촌 형이자 사적으로 친밀했던 조지 5세 역시 스탬퍼덤 남작의 손을 들어주면서 결국 망명 허가는 취소되었다.[24]

그리고 망명이 성사될 수 없었던 다른 이유는 그 니콜라이 2세 본인부터가 망명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니콜라이 2세는 자기 가족을 러시아의 어느 시골에서 가난한 농민으로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사실상 그쯤되면 본인의 의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임시정부 수반인 케렌스키는 사형제까지 폐지하며 니콜라이 2세를 보호하려고 했으나[25], 이는 오히려 민심의 악화만 불렀다. 게다가 야심차게 추진한 독일군에 대한 케렌스키 공세가 실패하여 수도가 함락되기 직전의 위기까지 접어들면서 국정 장악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볼셰비키 당은 임시정부가 힘을 잃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들은 케렌스키 정부를 10월 25일(그레고리력 11월 7일) 무혈로 전복하고 정권을 잡았는데 이를 10월 혁명이라고 한다.

2.2.9. 일가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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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전역에서 공산주의 정권에 반대하는 반혁명군이 봉기하고( 러시아 내전), 독일 등 동맹국 뿐만 아니라 영국, 미국 등 협상국까지 러시아에 군대를 파견해 내전에 개입하자, 볼셰비키는 황제 일가가 반혁명군이나 외국군에게 구출될 것을 우려해 여기저기로 옮긴다.

1918년 5월 최후로 도착한 곳이 예카테린부르크의 이파티예프 하우스였다. 이때 체코슬로바키아 군단[26]이 예카테린부르크를 위협하자, 현지의 볼셰비키 조직은 황제 일가를 처형하기로 결정하였다.

수도 모스크바의 중앙 정부는 니콜라이를 재판에 회부하려고 했으나, 당시 러시아 전역이 내전 중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모스크바로 소환할 수도 없었다.[27] 레프 트로츠키를 비롯한 당시 볼셰비키 혁명가들은 황제 가족, 적어도 암군으로 국민들의 분노가 집중되어 있던 니콜라이 2세를 언젠가 인민의 적으로 규정하여 사형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고 이런 의도를 굳이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본래 볼셰비키는 황제를 처형하더라도 제대로 재판을 한 뒤 처형시키려 했지만[28][29], 당시 내전에서 볼셰비키는 반혁명군에 연전연패하며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고, 사실 지방조직을 관리할 만한 행정력도 거의 없었다. 그리하여 이런 처형 명령이 모스크바에 있던 볼셰비키 지도부의 결정인지, 혹은 예카테린부르크 조직의 내의 결정인지도 아직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30]

그러나 볼셰비키 당에서는 "황제 일가가 반혁명세력에 구출되는 상황이 온다면, 그 일가 전부를 제거하여 반혁명 세력의 구심점이 되는 것을 차단하고, 로마노프 왕정복고는 절대 없다는 것을 전 인민에 확실히 각인시킨다"는 점은 공감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황제와 황후만이 아니라 그 자녀들까지 학살한 것은 인도적으로 문제될 법 했지만, 황제 본인뿐만 아니라 황녀 한 명이라도 반혁명세력에게 구출된다면, 여제(차리나)의 사례처럼 반혁명세력의 구심점이 될 것은 확실하고, 러시아 내전에서는 공산군 및 반혁명군들은 상호 학살이 빈번하게 일어났기[31] 때문에 소련이 붕괴되기 전까지는 크게 문제되지는 않았다. 즉, 모스크바 중앙정부가 아니라 예카테린부르크 지역 소비에트가 자체 판단으로 일가 전체에 대한 사형 결정을 했더라도, 모스크바 쪽에서 묵인 혹은 사후 추인해 줬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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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 직후 찍은 처형 장소

1918년 7월 16일 새벽 2시, 볼셰비키의 보안 조직인 체카 요원들은 취침 중인 이들을 깨우며 "곧 이동할 테니 모두 행장을 갖추고 지하실로 내려오라"라고 통보했다. 가족과 시종들이 지하실로 모두 내려오고, 체카 요원들은 니콜라이 2세가 몸이 불편한 부인과 아들을 위해 요청한 의자를 가져다 주었으며 알렉산드라와 알렉세이는 의자에 앉았다. 그 직후 체카 책임자인 야코프 유롭스키(Яков Юровский)와 그의 부하들은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 씨. 반혁명 세력이 당신들을 구출하려다가 실패했소. 그리고 우랄 노동자 소비에트는 당신 일가에게 사형을 선고했소."라고 통보하고는 바로 총을 꺼내들어 난사했다. 니콜라이 2세가 마지막에 남긴 유언은 "뭐라고 했나? 잘 들리지 않는데…"였다.[32][33] 이 말이 끝나자마자 머리에 총을 맞고 즉사했다고 한다. 이때 차르와 함께 황후, 황녀들, 황태자, 주치의 예브게니 봇킨(Евгений Боткин)[34], 황후의 시녀 안나 데미도바(Анна Демидова), 요리사 이반 하리토노프(Иван Харитонов), 하인 알렉세이 트루프(Алексей Трупп)[35], 등 다른 하인들도 모두 처형되었다.

당시 별별 이야기들이 많았다.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와 공주들은 총에 맞아도 한동안 안 죽었다거나, 보석과 장신구들을 몸에 숨겨서 총알이 튕겨졌기 때문에 한동안 살아 있어서 개머리판과 삽자루로 머리를 때려 확실히 죽였다는 등(또는 머리를 쏴서 확인사살)의 이야기가 소문으로 퍼졌다. 당시 몇몇 처형인들은 "황제 일가는 전 재산을 압류당한 상황이라 몸에 걸친 비싼 보석은 전혀 없었기에, 헛소문이다."라고 일축했으나, 처형 후 시신을 살펴본 유롭스키는 공주들의 코르셋에 대량의 보석이 꿰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나중에 찾아낸 보석 전부를 모스크바 크렘린궁 관리자에게 전달했다.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처형 가담자로 1952년 사망한 표트르 예르마코프(Пётр Ермаков)는 죽기 직전 "시체를 묻기 위해 군홧발로 걷어차 시체를 굴리자, 아직까지 숨이 붙어 있던 공주 1명이 비명을 질렀고, 그러자 병사들이 개머리판으로 때려 죽였다."라는 증언을 하기도 했다. 그 다음에 시체들의 옷을 모두 벗긴 후 기름을 붓고 불태워 대충 파묻었다고 한다. 그리고 1개월 전에는 니콜라이 2세로부터 양위 받을 수도 있었던 동생 미하일 대공마저 영국인 비서와 함께 처형당했다.[36]

처형 후 볼셰비키 측은 황제를 백군과 내통한 반혁명죄로 처형했다고 공표하였으나 황제의 가족들까지 함께 처형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았다. 처형 직후에는 황제의 가족들은 안전한 곳에 보내졌다고 발표했으며, 이후에도 멘셰비키가 황제 일가를 죽였다는 되도 않은 거짓말을 하거나 진상을 밝히라는 요구에 그냥 모르쇠로 일관할 정도였다. 이처럼 볼셰비키 측이 황제 일가를 죽여놓고 오리발을 내민 건 무엇보다 재판도 없이 차르를 처형하고 그 일가까지 모조리 죽인 건 볼셰비키 기준으로 봐도 비합법적인 학살 행위였기 때문이다.[37]

니콜라이 일가가 학살당한 후 일주일 만에 예카테린부르크는 백군에게 함락되었고, 이곳을 접수한 러시아국 수반 알렉산드르 콜차크 제독은 이들이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그 진상을 규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내전의 혼란의 와중에서 제대로 규명될 리 없었고, 콜차크군도 몇 달 후 이곳을 붉은 군대에 내주고 동쪽으로 도망가야 했다.[38]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처형을 지시한 한 사람은 아직도 명확하지 않다. 먼저 강경파였던 트로츠키가 의심 받았으나 회고록에서 오히려 레닌이 명령했다는 정황을 남겼다. 트로츠키는 회고록에서 예카테린부르크가 체코 군단(반혁명군)에게 함락된 이후에, 레닌에게 황제 일가의 상황을 물었고, 레닌은 "황제 일가는 끝났다네. 모두 다."라고 짧게 대답했다는 이야기를 남겼다. 이 때문에 일부 반공주의자들은 레닌이 황제 처형 명령을 내렸다고 주장한다. 또한 황제 일가를 다른 국가들과의 협상 카드로 이용하려 했다가 백군의 위협으로 상황이 급박해지자 처형에 동의했다는 설도 있다.

레닌 외에도 가장 가능성 높은 건 당시 예카테린부르크를 관할하던 우랄 소비에트에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전국소비에트집행위원회 의장이었던 야코프 스베르들로프가 있다. 하지만 스베르들로프가 1919년 스페인 독감으로 병사해버려서 진실은 오리무중으로 넘어갔다.

다만 당시 볼셰비키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리고 있었기 때문에, 어쨌든 백군에게 구출되게 놔두느니 차라리 황제 일가를 없애는 데에는 공감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무고한 가족까지 학살한 것은 나중에 매우 비난받을 수 있는 일이지만, 어차피 반혁명 세력이 승기를 잡고 혁명이 실패한다면 자기들도 다 몰살당할 처지였기 때문에 혁명세력에게는 죽거나 죽이거나 둘중의 하나밖에 선택지가 없었다.[39]

어쨌든 볼셰비키의 의도는 맞아 떨어져서, 구심점이 사라진 반혁명군은 본인이 주도권을 잡으려던 여러 군벌들의 내분 때문에 1918년을 하반기를 기점으로 급격히 세력을 상실하며 붉은 군대는 1919년부터는 공세로 전환하여 1920년에는 러시아 영내에서 대부분의 반혁명세력을 토벌하고 심지어 러시아 제국 붕괴 후 독립을 선포했던 옛 러시아 제국 영토까지 진주하여 이들을 연방에 가입시켜 1922년 소련을 건국한다.

1993년 러시아 연방의 공식 조사로는 레닌이나 트로츠키, 그리고 또 한명의 유력한 후보자인 스베들로프의 공식 명령은 없었다고 결론내렸다. 이때는 옐친 집권기라서 소련을 흑역사로 간주하고 악마화하던 시절이다. 어떻게든 소련 지도부를 악마화하려던 입장에서도 레닌이나 트로츠키의 명령은 못 찾아냈다고 할 수 있다. 굳이 문서화할 수도 없을 만큼 급박한 상황이었기도 하고, 볼셰비키 입장에서도 가족까지 처형한다는 것은 훗날 크게 욕먹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문서화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실행자들 일부는 이오시프 스탈린에 의해 숙청되었다.[40] 이것은 대숙청 시절 트로츠키파로 간주한 자들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실행범들이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책임자인 유롭스키는 딸이 수용소로 끌려갔지만 본인이 숙청당하지는 않았고, 1938년 60세를 일기로 죽었다. 유롭스키는 로마노프 일가를 처형한 후에도 공산당원으로서 활동하였고 처형을 맡은 것을 자랑스러워하며 니콜라이 2세를 쏜 것을 자신이라 이야기한 적도 있다.[41]

그러나 본인 아들의 이야기로는 한편으로는 자신이 로마노프 일가를 처형한 것을 평생 후회했고, 죄책감에 시달렸다는 증언 또한 남아있다. 유롭스키는 황제 일가를 처형하기 2주 전부터 황제 일가와 같이 지냈는데, 니콜라이 2세를 평범한 신사 같은 모습이었다고 회고하는 등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를 제외한 황제 일가를 좋은 이미지로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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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살당한 후 그냥 암매장됐던 유해는 나중에 발견되긴 하였으나 황제 일가의 유해인지는 1998년까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DNA 검사를 통해 신원 확인이 가능해지자 1998년 검사를 실시하여 황제 일가가 정당한 재판을 받아 처형된 것이 아니라 사실상 살해당한 수준의 불법 처형을 당한 것이 확인되었고, 사후 80년만인 1998년 7월 17일 선대 황제들이 안장된 상트페테르부르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의 성당에 일가족 모두가 안장되었으며 이들과 운명을 같이한 하인 4명도 안장되었다. 옐친의 추모사 장면. 2015년 9월 23일, 러시아 정교회의 요청을 받은 러시아 연방수사위원회가 2007년에 발견된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유전자 감식을 실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

2.3. 사후


1981년 해외 러시아 정교회에서 니콜라이 2세와 그의 가족들을 '황실 순교자(Царственные мученики)'로서 시성하였고, 그럼에도 러시아 본토 내에서는 한동안 러시아 제국을 몰락시킨 암군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소련 붕괴 이후 동정 여론이 일었고 2000년에 러시아 정교회는 니콜라이 2세와 그의 가족들을 '황실 수난자(Царственные страстотерпцы)'로 인정하여 성인으로 시성했다. 축일은 7월 17일로 지정되었다.[42]

2008년 10월 1일에는 러시아 대법원이 "황제와 그 가족이 부당한 정치 탄압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판결을 내려 정치적으로도 복권되었다. 그의 치세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정식 재판 없이 살해에 가까운 불법적 처형과 연좌제에 의한 가족처형은 법적으로든 인도적으로든 무리수였다는 것을 러시아 연방 법원이 인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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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콘으로 그려진 황제 일가

3. 재위 기간 러시아의 경제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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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평가

4.1. 인간적인 면

사적으로는 신실한 정교회 신도이자 당대 러시아 고위층을 중심으로 사용되었던 프랑스어 등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것은 물론 # 발레 애호가에 문학가 중에서는 니콜라이 고골을 높이 평가했으며 말할 때는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작품 속 내용을 곧잘 인용하는 등 교양적인 면을 갖추고 있었고 유쾌하고 쾌활하여 많은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사교적이고 예의 바른 인물이었다. 실제로 공적인 면과 별개로 사석에서 니콜라이 2세와 대화한 사람치고 그를 나쁘게 평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했고 심지어 1896년 조선을 대표하여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던 민영환이 직접 니콜라이 2세를 예방하고 남긴 기록에도 니콜라이 2세는 '매우 예의 바르고 절도 있는 인물'이라며 호의적으로 평가할 정도였다. 당시 개화기였다고 하나 아직 동서양의 교류가 많지 않은 시기였던 때 그런 낯선 문화에서 온 이방인의 시선으로 보기에도 '호감'을 표할 정도로 교양과 대화 스킬이 좋은 인물이었다.

또한 개인적인 성품도 좋아서 아내와 금슬이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대부분의 유럽 왕실들은 정략결혼을 했고 각국의 왕과 왕비는 상당수 쇼윈도 부부였으나, 황제 부부는 서로 바람도 피우지 않고[43] 자녀도 다섯 명이나 낳을 정도로 금슬이 좋았다. 신하들을 예의 바르게 대했고, 살아남은 시종들의 회고도 긍정적인 것이 많다.

이런 성향을 그대로 반영하듯 니콜라이 2세는 사진 찍는 것을 굉장히 즐겨 자신의 활동을 사진으로 많이 남겼다. 실제로 남아 있는 사진을 보면 러시아 제국의 황제에 걸맞은 위엄 넘치는 사진보다는 신하들과 물놀이 하는 사진이나 거울 셀카, 벽난로 위에서 포즈잡고 찍기, 배에서 철봉 운동하기, 인간 탑 쌓기, 아나스타시야 공주에게 담배불 피워주기, 점프해서 정지 모션으로 포즈 취하기 등, 마치 SNS에서나 볼 법한 일상적이면서 장난스러운 사진들이 많았다. # #

4.2. 긍정적 평가

차르는 퇴장하고 그와 그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고통과 죽음에 내던져진다. 차르의 노력은 축소되고 행동은 정죄받으며 기억은 폄하된다. 그러나 멈춰서서 다른 적합한 사람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누가 혹은 무엇이 러시아를 지도할 수 있는가? 재능 있고 용맹한 사람들, 야심차고 자신감 있는 사람들, 대담하고 지도적인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러시아의 운명과 명예에 대한 몇 가지 간단한 질문에도 대답할 수 없었다.
윈스턴 처칠, 세계의 위기 中[44][45]
러시아 황제가 다양한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 떠돕니다.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러시아 황제 자신이 스스로의 아이디어를 실행합니다. 그는 불변성과 큰 힘으로 그것들을 보호합니다. 그는 분별있고 신중하기 만들어진 계획들을 가지고 있으며, 결실을 맺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때때로 무언가를 잊은 듯 보이지만, 그는 모든 것을 기억합니다.
에밀 루베 프랑스 대통령[46]

니콜라이 2세 통치기의 러시아 제국 당대에서부터 평가가 갈리는 인물이었고 공산주의 혁명 후 초중기 소련 학자들로부터 폄하되고 상대적으로 소수의 비주류 학자들 이외에는 부정적 평가가 대다수였다. 이러한 공산주의 학자들과 가장 큰 영향을 주고 받은 것은 반공주의적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가 중세 러시아 전제정까지 기원한다고 여겼고 때문에 '러시아의 후진성'이라는 명제에는 공산주의자와 반공주의자 양측이 동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1970년대부터 농민과 노동자를 비롯한 전반적인 생활수준의 하락, 빈곤설을 포함하여 혁명 이전 러시아사에 대한 전통주의적 사관[47]이 주류에서 밀려나고 수정주의적 사관이 형성되었으며 냉전 종식 후 러시아 문서보관고가 개방, 러시아사에 대한 정치적, 이념적 해석이 줄어들고 객관적 사료에 기반한 실증적 해석이 주류를 이루면서 재평가받고 있다.

무엇보다 프랑스 혁명사도 거의 유사한 재평가가 있지만 농노 해방과 대개혁, 산업 혁명, 스톨리핀 개혁 등의 격변기를 거치면서 농민, 노동자 중에서도 부르주아 엘리트층이 되기도 했고 반대로 지주귀족 및 부르주아 엘리트들도 농민, 노동자로 몰락하기도 했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적 계급 분류에 따른 '프롤레타리아 혁명' 혹은 빈곤한 피착취계층의 저항이 아니라 오히려 근대화에 따른 부작용, 기득권층 간의 이해관계에 따른 분열과 충돌로 인해 혁명이 발생했다는 재평가가 일어났다. 이 표면적인 노동자, 농민 봉기와 유혈사태라는 것들도 이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당대인들도 어느 정도는 인정한 내용이다.

물론 단순히 명군/암군/폭군 프레임으로 정의내리는 것 자체를 학술적인 결론이 아니고 지양되어야 하지만 긍정적인 평가에서는 끝까지 가면 아예 명군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성인으로 시성된게 그냥 불쌍해서 그런건 아니다.

반대로 부정적인 평가에서 제정 러시아 말기의 경제 상황의 악화, 전반적인 생활수준이 하락했다는 설을 미는 학자들도 그것이 니콜라이 2세의 무능에 있었던게 아니고 오히려 황제는 위기를 간파하고 나름대로 해결책을 강구했었다, 나름대로의 무능이나 실책은 있었어도 최소한 나라를 망친 암군은 아니라 유능했지만 실패한 지도자였다는 식으로 복잡하고 입체적으로 평을 내린다.

엄밀히 말하자면 니콜라이 2세의 통치를 종식시킨 것은 제1차 세계 대전이었다. 전 세계를 휩쓴 대전쟁으로, 애시당초 한 개인의 능력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차르는 러시아 혁명을 예측하고 전쟁을 피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음은 물론, 귀족과 상류층의 집합체인 두마가 국정 운영과 전쟁 수행에 어떤 걸림돌로 작용할지까지 예측할 정도로 나름대로의 혜안을 갖추고 있었다. 그가 군주로서 결과론적인 책임은 있을지언정 나라를 망칠 정도로 무능했다는 평가는 원천적으로 나오기 힘든 것은 이러한 이유에 기반한다.

의외로 상기 내용들의 거의 대부분은 재평가는 아니다. 세부사항이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제정과 소련 시대에도 러시아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꾸준히 존재했고, 학술적으로 단순 암군설을 지양되었지만 한국에서는 혁명 전 러시아사에 대한 대중적 인식과 관심이 없다시피해서 모를 뿐이다. 심지어는 당시의 주요 혁명가, 반체제인사들도 바로 윗 문단과 거의 유사한 평가를 내린 바 있다. 레프 트로츠키는 차르 정부의 관료들이 매우 유능했으며 혁명에 대해서는 혁명가들보다 더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능력이 어떻든 막을 수 있는게 아니었다는 식의 평을 내리긴 했다. 소련 학자들도 이들의 지적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았다.

4.2.1. 전제군주정을 고수한 이유

황제 폐하, 모든 러시아 땅에서 선출된 사람들의 총회를 소집하여 전체 국가의 공통된 요구 사항을 논의하고 폐하의 과제를 완료하십시오. 이것을 위하여 당신의 충성스러운 귀족 계급에게 그들 중 최고의 사람들을 선출하라고 명령하십시오. 귀족계급은 항상 러시아 왕좌의 확고한 기둥이었습니다.
1865년 1월 모스크바 귀족원이 알렉산드르 2세에게 보낸 청원서[48]
니콜라이 1세에서부터 거의 모든 러시아 황제들에게서 나오는 내러티브인 '반동보수적인 황제들이 자유주의자들을 탄압했다'는 건 현대적인 의미에서 독재정권이 민주투사들을 탄압한 것이 아니었다.[49] 전제군주정은 봉건귀족의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이며, 당시 자유주의의 주류는 귀족이었다. 이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세계 공통이다. 의회와 헌법으로 왕권을 제한하여 당대 가장 자유주의적이었다는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결국 귀족정이었고, 영국 입헌군주정의 시초를 놓은 대헌장은 결국 봉건귀족들이 왕을 협박한 결과물에 가까웠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 그 시대에 자유를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것은 가진 게 많은 귀족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러시아 자유주의는 폴란드-리투아니아식 '황금의 자유'로부터 시작한 게 맞았고 이 원 목적은 차르권력을 제한하고 농노제를 확립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참고.

수세기에 걸쳐서 귀족들이 의회와 헌법을 창설해서 황제의 권력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는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위해서였으니, 그 황제 본인은 물론이거와 차르 체제의 반대자들이나 심지어 그 자유주의자들조차 '자유주의'에 대해 반대하고 차라리 황제를 지지하는 것. 당장 국가주의자인 세르게이 비테와 자유주의자인 파벨 밀류코프 등 니콜라이 2세와 근본적인 정치적, 이념적 노선의 차이가 있었던 이들도 차라리 자유주의보단 차리즘이 낫다고 지적할 정도였다.[50]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결국에는 황제권과 귀족권의 파워게임에 가까웠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체제가 폴란드에선 대홍수 폴란드 분할, 자국 내에선 혼란 시대 푸가초프의 난같은 재앙을 불러일으켰는지 경험한 당대인들 입장에서는 최소한 귀족정보다는 전제정이 낫다는 건 오히려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즉 니콜라이 2세가 소위 '젬스트보의 반란'을 무시하고 전제정을 고수한 이유는 전제군주로서 귀족계급에게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미였고 아무리 부정적인 평가를 내려도 최소한 '아버지가 물려준 전제군주제를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한 가지 생각'이 틀린 건 아니었던 것이다.[51]
여론은 1차 두마의 활동이 "헌법"과 "전제정의 잔재" 사이의 투쟁이었다는 점이 명백하다고 생각했다. 이 정의가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헌법"은 정부에 의해 "전제정의 잔재"는 두마에 의해 옹호되었다는 수정이 필요하다. 이것은 "역설"처럼 보이지만 그 시대의 핵심이었다.

물론 1905년 이전까지 당시 정부에서는 헌법을 위해 투쟁했던 이가 없었다. 장관들은 전제정에 의해 양육된 계급에서 독점적이었고 그들 중 누구도 헌법을 꿈꾸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차 두마 기간 동안 정부가 헌법을 "위반"했다는 행위가 단 하나도 지적되지 않았다. 정부의 많은 조치에 동의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헌법적"이었다. 이것이 교양있는 이들의 규율의 결과인지 아니만 단순한 가식이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헌법은 항상 정부의 편이었고, 정부는 헌법에 대한 헌신적인 태도로 두마와 구별되었다. 관료제는 새로운 질서에 적응하고 '의회적' 장관들을 발탁함으로써 러시아인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

1차 국가 두마의 회원들에 대해서는 다른 말을 해야 한다. 그들은 오랫동안 헌법을 위한 싸움꾼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의회 기술'에 정통하며 자신들을 '천부적인 의회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두마에서의 활동은 헌법의 전면적인 부정이었다.
1906년 혁명의 공격은 격퇴되었다. 헌법이 발표되었으며 선거가 열렸고 두마가 출범했다. 군주는 입헌군주가 되었으며 자신의 역할을 충성스럽게 수행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의원들을 "최고의 사람들"로서 환영하고 새로운 기본법을 "확고히 보호"하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모든 사람들이 주목했던 자신의 역사적 칭호인 "전제군주"에 대한 언급을 자제했다. 그리고 이러한 "선금" 바로 후에 자신의 권력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의회가 자신이 부여한 헌법을 얼마나 경시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국가를 이끌고 있는지 보았을 때, 아마도 1917년에 서명한 "퇴위서"에 대한 것과 같은 후회의 감정을 경험했을 것이다.
바실리 마클라코프, 2차 국가두마[52]
게다가 한때 입헌민주당 소속 의원으로서 '전제정 타도'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던 마클라코프도 지적했듯이 헌법과 의회는 기득권층이 차르권력을 약화시킴으로서 자신들의 권력을 확립하려는 도구로써 이용되었다 애시당초 지주귀족이거나 농노제 폐지로 몰락한 옛 지주귀족이 대다수인 자유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민주적인 기관과 제도는 그들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보장하기 위한 수단이었지 목적이 아니었다.

의회 내의 자유주의 세력이 정치공작뿐만 아니라 혁명조직들을 지원한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53] 게다가 필요에 따라 상호 협력할 최소한의 의지나 노력은 있었던 입헌민주당 등을 제외하더라도 아예 대놓고 혁명 테러를 위해 국가두마에 진출한 사회혁명당 등의 극좌 테러집단까지 존재하는 판에 니콜라이 2세가 전제권력을 완전히 포기하고 의회를 억제할 수단을 버리는 것은 그냥 국가적 자살행위였다. 때문에 결국 의회의 폭주를 억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왕권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판단 자체는 옳았다. 물론 니콜라이 2세가 정말 현대적인 민주의식을 가진 건 아니었지만 권력 보신에만 급급한 군주였다는 것도 잘못된 편견이다.

이는 19세기 전반의 러시아 차리즘, 프랑스 보나파르티즘, 프로이센 절대주의 등[54]의 소위 '반동보수적' 근왕주의 이념을 이해해야 한다. 이들이 중세적이고 '후진적인' 군주정 체제와 왕권신수설 이념을 고수하면서 반대파들을 탄압했다는게 대중적인 인식이지만, 당대 근왕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에도 나름대로의 근거는 있었다. 법적 자유는 특정 사회계급이나 집단이 나라에 대한 통치권을 배타적으로 보유하지 않거나 보편적인 이익 추구가 가능할 때, 혹은 보편적인 경제적 자유가 전제되었을 때만 가능하다. 러시아의 농노제는 황제가 귀족들에게 패배하여 전제정이 붕괴된 결과물이었고 귀족을 견제할 수 있는 사회적 계급이나 집단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헌법이나 의회야말로 '후진적이고' 억압적인 체제 자체였다. 때문에 차르주의자들은 강력한 전제권력으로 기득권층을 견제하고 '인위적으로' 시민 및 중간층을 양성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러시아 전제정은 시대가 변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소멸할 것이지만 만일 외부의 압력으로 강제적으로 붕괴된다면 재앙적인 결과를 맞이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결과적으로 두마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 제국군 패전과 러시아 혁명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으니[55], 니콜라이 2세의 견해는 옳았던 셈이다. 케렌스키를 포함한 자유주의자들도 자신들이 정권을 잡자 러시아의 토지개혁과 전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폭압적으로 사회질서를 유지하려다가 농민과 노동자들의 지지를 잃게 되고 그 결과 실제로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 많은 자유주의자 러시아인 이민자들은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후회의 감정을 기록으로 남겼다.

4.2.2. 과장된 일화들

즉위식 때 많은 사람들이 깔려 죽었는데 제대로 대처도 안 했다던가, 피의 일요일에 평화로운 시위대를 이유 없이 무차별 학살했다던가, 라스푸틴의 꼭두각시 노릇을 했다는 이야기들은 세간에 다소 과장된 경향이 있다. 제정 붕괴 이후 임시정부 조사위원회나 소련 학계에서도 거짓으로 판명했으나, 이쪽과 정보 공유가 적었던 다른 나라에서 부풀려져 정설처럼 굳어졌다.

대표적인 것으로 라스푸틴이 있다. 그러나 라스푸틴은 황후의 여러 '친구' 중 한 명일 뿐이었음에도[56] 당시의 혁명세력이나 반정부 야당들은 라스푸틴이 황제와 황후를 통해서 제국의 통치를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음모론을 만들어 선동의 도구로서 사용하였다. 즉 그런 음모론과 선동이 나온 시점에서 라스푸틴을 손절하고 적극적으로 반론하지 않은 황제와 황후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꼭두각시나 라스푸틴이 실세 수준은 아니었다는 것. 실제로 저 음모론에서도 라스푸틴이 어떻게 영향력을 발휘해서, 어떤 정책을 결정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라스푸틴의 충고라는 게 얼마나 실현되었는지 사실 관계를 확인해보면 명확해진다. 1915년 4월 6일 라스푸틴은 황제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갈리치아로 가면 안 된다고 충고했다. 그러나 황제는 갔다. 1915년 6월 17일 라스푸틴은 황제가 두마를 소집하면 안 된다고 충고했으나 황제는 총리의 반대를 거부하면서까지 두마를 소집했다. 11월 15일 라스푸틴은 리가 근처에서 공세를 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일어나지 않았다. 1915년 11월 15일, 29일 라스푸틴은 두마를 소집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두마 소집은 연기되었다. 정리하자면 라스푸틴의 충고가 실제로 이루어진 사례는 그리 많지 않으며, 이루어진 것은 누구도 예상할 수 있는 당연한 일이거나 다른 합당한 이유가 있는 우연의 일치였을 뿐이다.

게다가 당대 주변인들의 회고록에서도 분명히 나온다. 스톨리핀이 니콜라이 2세에게 라스푸틴을 내칠 것을 충고했을 때, 니콜라이 2세는 "표트르 아르카디예비치, 나는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만 황후가 히스테리를 부리는 것보다 열 명의 라스푸틴이 있는게 낫습니다"라고 대답했다.[57] 즉 황후는 황태자의 병을 라스푸틴이 호전시킬 수 있었다고 믿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정치적 영향력은 고사하고, 그냥 니콜라이 2세 본인에게는 당시 시점에서는 황후가 아니면 그냥 관심 밖의 인물이었다는 것.

애시당초 당대 반정부 인사들, 혁명가들, 독일의 공통적인 선전이 '어둠의 세력(Тёмная сила)'이 러시아 제국을 배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었고, 라스푸틴은 물론이고 독일계인 황후와 총리 시튜르메르가 독일 정부와 내통하고 있다는 둥의 음모론은 모두 이것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만약 지난 3년 동안 권력의 행보를 기억하신다면 여러분들은 여기서 어둠의 세력에 대해 얼마나 많이 언급되었는지 기억하길 것입니다. 이 대화들은 어리고 순진한 공상가들과 정치적 모험가들의 동맹을 만들었고 라스푸틴은 죽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러시아의 시대에 도달했나요? 무엇이 밝혀졌습니까?
러시아에 라스푸틴 전제정이 사라졌습니까? 아닙니다. 라스푸틴 전제정은 온전히 남아있습니다. 새로운 끝없는 라스푸틴들이 계속해서 등장할 것입니다. 라스푸틴은 프로토포포프로, 프로토포포프는 리티흐로 바뀔 뿐입니다.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1917년 2월 15일 국가두마 발언 中

게다가 바로 그 라스푸틴 국정농단 설을 퍼뜨리던 주역 중 하나인 케렌스키부터가 라스푸틴이 죽자마자 제2, 제3의 라스푸틴이 등장할 것이라고 태세전환을 함으로서 결국 라스푸틴 개인은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을 사실상 인정했다. 무엇보다 제정 붕괴 이후 '전직 장관, 최고운영자 및 전쟁부와 해군부의 기타 고위 인사들의 불법 행위를 조사하기 위한 특별 조사 위원회(Чрезвычайная следственная комиссия для расследования противозаконных по должности действий бывших министров, главноуправляющих и прочих высших должностных лиц как гражданского, так военного и морского ведомств)'가 창설되었으며, 당연히 전술한 황후나 총리의 독일 내통, 라스푸틴의 국정농단이 주요 조사 주제 중 하나였으나 결국 '니콜라이 2세와 그의 아내'에게서 어떠한 '범죄적 요소(Состав преступления)'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결론내렸다. 즉 임시정부가 공식적으로 라스푸틴 건을 입증할 증거는 없다고 이미 백년 전에 결론 내린 사안이다. 케렌스키는 주러 영국 대사 뷰캐넌에게 니콜라이 2세와 그 아내에 대해 자신들이 제기한 의혹들이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고 밝혔으나, 훗날 뷰캐넌은 회고록에 라스푸틴 이야기를 그냥 그대로 실어버렸다.[58]

따라서 라스푸틴 건은 귀족들, 반정부 인사들, 혁명가들, 독일 선전에 의해 황제 일가를 공격하기 위한 의도로 만들어진 입증불가능한 음모론이나 유명인사들에게 따라다니는 스캔들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보안국장을 지냈던 알렉세이 바실리예프(Алексей Тихонович Васильев)는 사적으로도 공적으로도 라스푸틴과 알고 있었으며 비밀리에 라스푸틴을 감시하는 것이 임무였다. 그는 라스푸틴 음모론을 프랑스 혁명을 불러일으켰다는 저주받은 다이아몬드에 비유하면서 이러한 설을 부정했다.
라스푸틴은 정치적 무대의 일선에 오른 적이 없으며 러시아의 왕좌와 제국의 기초를 흔들려는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밀려났다. 그 본인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비록 자신의 죽음이 러시아를 멸망으로 이끌것이라 말했지만 자신이 악한 음모자들의 손 안에 있는 꼭두각시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혁명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라스푸틴을 허수아비로 만들고자 하였다. 때문에 그들은 시베리아 사내를 통해서만 높은 지위와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는 우스꽝스러운 소문을 퍼뜨렸다.
알렉세이 바실리예프[59]
애시당초 전통적으로 러시아 제국은 내부적 정쟁이 치열한 국가로서 그 니콜라이 2세조차 귀족들에게 견제당하는 처지였고[60],1905년에는 두마로 인해 외견적 입헌군주정[61]으로 전환된 러시아 제국을 공식 섭정도 아니고, 황족도 아니고, 정부 고위직도 아니고 그 러시아 정교회에서조차 자리가 없던 라스푸틴이 니콜라이 2세를 완벽하게 조종한다 할지라도 국정을 좌지우지하기란 불가능하다.

4.3. 부정적 평가

그 정권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물려준 절대 군주제를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는 군주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으며 자기 직책에 필요한 지능, 에너지 그리고 훈련이 부족했던 그는 개인적인 호사에만 탐닉했고, 변덕이 심하고 고집이 센, 머리가 텅 빈 독재자의 전형이었다. ...(중략)... 새로 등극한 차르는 어느덧 마흔여섯이 되었지만 그동안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었으며 그의 침착한 인상은 사실 냉담함이었는데, 속이 깊지 못해 무관심이 있는 그대로 얼굴에 드러났던 것일 뿐이었다."
- 바바라 터크만, <8월의 포성>
정치적인 이유나 다른 이유로 니콜라이가 "피의 니콜라이"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가장 흔히, 그는 천박하고, 약하며, 멍청하다고 묘사된다. 부패하고 무너진 체계의 마지막 날 동안에도 힘없이 지배하고만 있는 일차원적인 인물이다. 이것은 확실히 마지막 차르의 일반적인 이미지이다. 역사학자들은 니콜라이가 개인적 매력, 온화함, 가족에 대한 사랑, 깊은 종교적 믿음, 강한 러시아 애국심의 역사적 증거인 "좋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들은 개인적 요인이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중요한 것은 니콜라이가 나쁜 차르였다는 것. 본질적으로 니콜라이 2세의 비극은 그가 역사에서 잘못된 장소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로버트 K. 마시 (미국 역사학자)

4.3.1. 위기에 맞지 않는 지도자

평범한 일반인이었으면 화목한 가정의 행복한 아버지, 사람 좋은 신사 정도로 편안한 인생을 살다가 죽을 사람이었고, 더 나아가 입헌군주제 국가의 군주[62]였다면 어느 정도는 나은 평가를 받았을 수도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니콜라이 2세의 지위는 전제군주제의 정점인 러시아 제국의 황제로 앞장서서 황실과 나라 전체를 이끌어 가야만 하는 자리였고, 당시의 시대조차 내부로는 그동안 썩혀 온 여러 문제가 곪을 대로 곪아 러시아 전체가 불안정한 상황이었으며 외부로는 공산주의 사상의 영향과 제1차 세계 대전이 벌어진 격동의 시대였다.

설상가상으로 소탈하고 선량한 성격에 가정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고수한 본인의 장점이 오히려 러시아에서는 역효과를 냈다. 당시 러시아 궁정은 황제 일가가 사교계에 자주 다니거나 공식 석상에서 위엄을 보이는 것을 통해, 황실의 신성성을 민중들에게 각인시키는 동시에 귀족들의 지지와 인기를 얻는 것이 필요했다. 황제 부부에게 시대상 당연하게 요구되는 의무였다. 그러나 니콜라이 2세와 알릭스 부부는 이를 거부했다. 소시민 성향이라 굳이 자신들의 사생활을 드러내거나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외아들 알렉세이 황태자가 혈우병 환자로 태어나자 이를 숨기고 아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공식 행사가 아니면 절대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니콜라이는 즉위 전부터 처형당하기 2주 전인 1918년 6월 30일까지 노트 52권 분량의 방대한 일기를 남겼는데, 일기 내용을 보면 압사사고가 난 즉위식이나 피의 일요일 사건, 러일전쟁 등 여러 중대사건은 마치 대수롭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식의 서술로 일관한 반면, 자기 가족들이나 친척들의 시시콜콜한 일상사는 상세하고 다정다감하게 기술했다. 즉 니콜라이는 백성이나 제국의 안위에 큰 관심이 없었으며 오직 본인과 측근의 일상사만 중요하게 여긴, 왕의 그릇은커녕 평범한 가족의 가장에 그쳤어야 할 자였다. 이런 사람에게 전제왕권은 너무 버거웠고, 그 결과 300년 사직의 로마노프 왕조가 몰락하고 본인은 물론 그가 그렇게 소중히 여긴 가족 역시 불행한 결말을 맞아야만 했다.

4.3.2. 능력과 인간성이 별개인 사람

물론 니콜라이 2세에게 닥친 시대적 상황이 그에게 지나치게 가혹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대 무고한 인물은 아니었으며 개인으로서는 좋은 사람이었을지 몰라도 한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로서는 최악인 인물이었다.

전술했듯이 러시아는 내우외환으로 위태로운 상황이었으나 니콜라이 2세는 국가의 안위보단 가족들과의 안락하고 평화로운 나날에 집중했으며 그의 최대 실책인 피의 일요일도 이런 연유로 발생하였다. 특히 일개 수도사의 신분으로 황후의 총애를 이용해 국정 농단을 일으켜 안 그래도 위태로운 러시아의 현실을 뒤흔들고 각종 추문을 일으켜 황실의 권위를 추락시키는 그리고리 라스푸틴에 대해서도 단지 '아내와 아이들이 그를 믿고 따른다'는 것과 무엇보다 '사랑하는 아내 알렉산드라를 힘들게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의 만행을 방관하고 그를 내치라는 주변의 조언에 귀를 닫았다.[63]

그나마 아버지로서는 좋았다고 보기에도 곤란한 것이 그는 자식들을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고 제 나잇값조차 못하는 철부지로 키워놓았다. '문란하고 화려한 러시아 사교계에 딸들을 물들게 하기 싫다'는 아내의 요구에 따라 전술했듯이 공식 행사를 제외하고는 자식들을 가정에 가두는 과보호를 했는데 이렇게 지나치게 가족끼리만 뭉쳐 지낸 탓에, 황녀들은 성년이 다 되어가 사교계에서 여러 또래 귀족들과 만나 친분을 쌓아야 할 나이가 된 뒤에도 어린아이처럼 철없이 놀고 자신들의 공식 칭호조차 낯설어하는 지경이 되었다. 이를 보다 못한 할머니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태후가 나서서 사교계 데뷔 나이가 찬 올가와 타티야나를 가면 무도회에 억지로 등 떠밀어 보내기까지 했다. 그러나 가면무도회에서 신분을 감춘 자매는 아는 사람도 소개해 줄 사람도 없어서 또래 귀족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마침 조카손녀의 결혼식 참석 때문에 러시아에 있던 황녀들의 고모할머니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부인 마리야는 이렇게 외톨이가 된 황녀들과 부모인 황제와 황후도 그런 아이들을 이런 행사가 피곤하다는 기색으로 어색하게 구경만 하는 모양자발적 아싸을 보고 충격을 받아서 이건 황후가 딸들을 너무 싸고 돌아 키운 탓이라고 비판하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또한 니콜라이 2세 부부는 딸들도 자신들처럼 연애결혼으로 혼인하길 바란다는 이유로 공주들의 정략 결혼에도 적극적이지 않았고 공주들은 결혼 적령기가 되어서도 좀처럼 시집을 가지도 않고 부모 품에 남아 응석만 부리고 있었다. 이로 인해 귀족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같은 황족들 사이에서도 자기들끼리만 모여 놀고,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니콜라이 2세와 알릭스 부부에 대한 평이 정말 안 좋았다. 더구나 피의 일요일 사건을 계기로 백성들은 차르는 어버이가 아닌 폭군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고 니콜라이 2세, 더 나아가 러시아 황실에 등을 돌려 결국 러시아 혁명을 일으켜 로마노프 왕조를 끌어 내게 된다.

이런 그의 무능한 면모는 5촌 조카인 조지 6세와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조지 6세 역시 니콜라이 2세와 마찬가지로 내성적이기는 하나 다정한 성격에, 아내와 연애결혼으로 혼인하고 딸들을 사랑하는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그러다가 형 에드워드 8세의 무책임한 퇴위로 준비 하나 되지 않던 상황에서 억지로 왕위를 이어받아야 했지만 조지 6세는 즉위 직후 제2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고 나치 독일의 침략으로 고립되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영국에 남아 국정을 이끌고 폭격으로 엉망이 된 런던을 시찰하여 국민들을 독려하는 등 왕으로서의 책임을 다했다.

게다가 자녀들에게의 교육에서도 온실 속 화초처럼 키워버린 니콜라이와 다르게 조지 6세는 아이들을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올바른 어른으로 키우고자 했다. 그 결과 니콜라이 2세의 자녀들은 공식 호칭조차 낯설어할 정도로 철부지가 된 반면 조지 6세의 장녀인 엘리자베스 2세는 부모님을 도와 여러 활동을 하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직접 군입대도 하는 등 책임감 있는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64][65]

이후 조지 6세 부부의 책임감 있는 모습은 영국 국민들에게 구심점이 되어 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이끌고 전후에도 국민들이 왕실을 신뢰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영국 왕실은 조지 6세의 딸을 이어 외손자인 찰스 3세가 즉위하고, 후손들도 번창하고 있다. 반면 니콜라이 2세는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국민들의 신뢰를 잃어버려 로마노프 왕조의 명맥을 끊고 본인은 물론 아무 잘못도 없는 자녀들도 그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참혹하게 총살당하고 시신도 유기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만다.

5.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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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콜라이 2세 일가 컬러 복원 사진.

황태자 시절, 헤센 대공국 루트비히 4세(헤센)의 4녀인 알릭스와 열렬한 연애 끝에 결혼했다. 알릭스의 어머니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 앨리스 공주다.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의 장남이 독일 제국 빌헬름 2세이니 알릭스와 빌헬름 2세는 서로 이종사촌이다.[66] 또한 빌헬름 2세의 여동생이자 알릭스의 이종사촌인 프로이센의 조피 공주는 니콜라이 2세의 외사촌 콘스탄티노스 1세의 왕비이기도 하다.[67]

알릭스의 둘째 언니 헤센의 엘리자베트 공녀가 먼저 러시아 제국으로 시집왔다. 상대는 알렉산드르 3세의 남동생, 즉 니콜라이 2세(당시 황태자)의 작은아버지인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이었다. 16살의 니콜라이 황태자와 12살의 알릭스는 이 결혼식에서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고, 10년 후 결혼했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연애결혼이었다. 이 결혼을 위해 알릭스는 이름도 러시아식인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로 바꾸고 러시아어 공부에 매진했으며, 종교도 루터교회에서 러시아 정교회 개종했을 정도로 많은 노력을 했다.

당시 문란하기로 유명했던 로마노프 가문의 풍속과 달리,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는 한눈 팔지 않고 서로에게만 충실하여 6년간 딸을 4명이나 낳을 정도로 부부 사이가 좋았다.

다만 총각 시절에 연애를 했던 적은 있다. 상대는 폴란드인 발레리나 마틸다 크셰신스카(Matylda Krzesińska, 1872–1971)인데, 황립 극단의 프리마 발레리나로서 대단히 야심찬 여자이기도 했다. 니콜라이는 숫기 없는 성격에 종교적이라 이성에 별 관심이 없어서, 이를 걱정한 가족들이 모의해 소개해준 여자가 크셰신스카였다. 물론 결혼 전제가 아니라서 진심으로 발전하지 않게 관리 감독까지 받았다. 극장의 스타 발레리나들과 황실 남자들의 스폰서 관계는 꽤 흔한 일이라, 궁정에서도 그 정도 관리는 전문 영역(?)에 속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니콜라이가 알릭스에게 반하게 되면서 관계를 정리했지만, 마틸다는 이에 굴하지 않고 황제의 사촌들과 여러 다리 걸치는 염문설을 뿌렸고 이들을 호구삼아 실컷 부리고 사치하다가 그 중 한 명인 안드레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Великий князь Андрей Владимирович, 1879–1956)과의 사이에서 아들 블라디미르 크라신스키(Владимир Красинский, 1902–1974)를 낳았다. 마틸다는 결국 러시아 혁명 이후인 1921년 안드레이 대공과 결혼하여, 비록 이름뿐이나마 황실의 일원이 되었다. 당연히 부를 누리진 못했으나 대공과 금슬도 좋았으며, 1925년 가톨릭에서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하고 프랑스 파리에서 무용수로 활동했다. 64살인 1936년까지도 무용수로 활동할 정도였다. 1971년 12월에 99살로 세상을 떠나 천수를 누렸으며 2년 반 뒤에 죽은 아들, 남편과 같이 프랑스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 신자들의 묘지에 묻혔다.

5.1. 형제자매

5.2. 황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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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
알렉산드라 황후는 독일 헤센 대공국의 대공 루트비히 4세 영국 앨리스 공주[70]의 2남 5녀 중 4녀였다. 본명은 알릭스였고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는 러시아식 이름. 알릭스는 6살의 어린 나이에 어머니 앨리스가 디프테리아로 병사하자 큰 충격을 받았고, 이를 안타까워한 외할머니 빅토리아 여왕과 편지를 자주 주고받고 가깝게 지내면서 외가인 영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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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라에게 키스하는 니콜라이 2세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연애결혼에 남편의 다정한 성품 덕분에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행복했지만, 부부 사이를 제외하고는 러시아 황실에는 논란이 많았다. 내성적인 알렉산드라는 러시아 궁정에 결코 익숙해질 수 없었고, 대중에 노출되기를 꺼리며 평생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시어머니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태후는 바라던 며느리 후보가 따로 있었던 데다 이런 태도 때문에 더욱 못마땅해해서 고부갈등도 있었다. 어둡고 침울한 태도나 서투른 방식, 거기다 딸만 넷을 낳고 아들 출산 압력까지 받으면서 마음고생이 많았다.

시집오기 전후까지 알렉산드라는 러시아도 외가 영국처럼 아들이 없으면 장녀가 제위를 물려받으면 되는 줄 알았고, 아들을 낳으라는 압박을 받고서야 남자만 제위를 이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알고 지내다 연애한 기간이 10년에 언니가 러시아 대공비, 결혼 전까지 개종 문제로 치열하게 갈등하다가 러시아 사제한테 수업까지 받았는데, 그 기간 동안 이런 지극히 기본적인 사항을 몰랐거나 알려준 자들도 없었다는 얘기다. 아마 그녀를 향한 평가가 당시 러시아의 최악이다보니 그런 소문이 퍼진 걸로 추측된다. 또한 외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물려받은 혈우병 인자 때문에 어렵게 얻은 막내인 외아들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가 혈우병 환자로 태어나게 된다.

5.3.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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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노프 황가의 남매들. 왼쪽부터 셋째 마리야, 둘째 타티야나, 넷째 아나스타시야, 첫째 올가, 막내 알렉세이.

5남매 모두 수려한 미남미녀로 유명했는데, 특히나 차녀 타티야나가 조각같은 미인으로 유명해서 혼담이 자주 오갔다.

그러나 당대로서는 특이하게 4명의 황녀 모두 성인이 되도록 결혼하지 않았는데, 러시아의 황녀이자 혼인 적령기인 올가와 타티야나에게는 혼담이 오기는 했지만 당시 올가는 병약한 알렉세이 황태자를 제치고 황위계승자 후보로 올라갔을 뿐만 아니라 아예 본인이 러시아를 떠나고 싶지 않다며 혼담을 스스로 내쳤고, 타티야나는 혼담이 오가던 중 제1차 세계 대전 탓에 모든 혼담이 중단되고 웬만한 남성 귀족들이 죄다 전쟁에 나가 죽어버린 탓이 크다. 3녀 마리야 여대공과 4녀 아나스타시야 여대공은 한 술 더 떠서, 갓 성인이 되었을 때 러시아 혁명이 터져버렸다.

사실 니콜라이 2세 부부는 자녀들이 자신들처럼 연애결혼을 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정략결혼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때문에 자식들이 전부 결혼도 못한 채 총살당하면서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의 직계 자손은 모두 끊겼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보면 잘못된 결정이었다.

동아시아 및 영미권에서는 뛰어난 미모와 비극적인 인생 덕에 팬픽이나 팬아트까지 있을 정도로 나름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데 반해, 정작 모국인 러시아에서의 인지도는 거의 없다. 일례로 영어, 한국어 위키백과에서는 OTMA 항목이 버젓이 존재하는데 러시아어 위키백과에서는 니콜라이 2세의 하위 항목으로 리다이렉트되며, OTMA 관련 정보나 이미지를 러시아어로 검색해서 찾으면 나오는 게 얼마 없고, 영어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한국어로 된 정보가 러시아어로 된 정보보다 훨씬 많다. 어느 미국인 전기 작가는 러시아 박물관에서 황제 일가에 대한 설명을 보다가 옆에서 러시아인들이 "이 사람들 뭐하는 사람들인지 알아?" 물어보거나, 러시아를 다스리던 황제 가족에 대해 본인보다도 현지인들이 이들을 아예 모른다는 사실에 충격받았다고 한다.
자녀 이름 출생 사망
1녀 올가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Великая княжна Ольга Николаевна)
1895년 11월 15일 1918년 7월 17일
2녀 타티야나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Великая княжна Татьяна Николаевна)
1897년 6월 10일 1918년 7월 17일
3녀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Великая княжна Мария Николаевна)
1899년 6월 26일 1918년 7월 17일
4녀 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Великой княжной Анастасией Николаевной)
1901년 6월 18일 1918년 7월 17일
1남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
(Цесаревич Алексей Николаевич)
1904년 8월 12일 1918년 7월 17일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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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2세 제프리 다머
  • 같은 망국의 군주라는 점에 있어서 일가와 함께 대한제국 고종, 순종과 비교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 이들의 삶에는 망국의 군주라는 점 외에는 큰 차이가 있었는데, 고종은 합병 전부터 의병장들을 지원하고 김구의 사형을 막으며 제국익문사를 창설해 친일파에게 밀정을 붙이고 각종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대한의군과 독립의군부를 창설하는 등 항일 투쟁을 벌였다. 이는 고종이 승하할 때 까지 지속되었는데 1919년 고종은 이회영과 접촉해 7번째 망명 시도를 하였다. 순조롭게 진행되어 황제가 움직이기만 하면 되었지만 일제의 독살로 실패한다. 이후 독살에 분노한 백성들이 31운동을 일으키는 등 끝까지 일제에 저항했으며, 순종의 경우 일본 제국 천황보다는 낮지만 다른 화족들보다는 높은 이왕으로 예우받으며 여생을 보냈다. 승하 직전에는 합병의 무효와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유조를 남긴다. 심지어는 메이지 덴노의 배려로 군함을 타고 유럽 여행을 간 적도 있다. 대신 순종은 어린 나이에 독약으로 살인미수를 당해서 치아를 모두 잃고 20대부터 틀니로 살았기에[71], 니콜라이처럼 살해당하지는 않았지만, 21세기처럼 임플란트 수술이나 고도의 영양학에 의해 체계적으로 설계된 유동식이 있던 시대도 아니니 생존 기간 내내 식이에 문제가 있어 건강이 전반적으로 항상 좋지 않은 편이어서 일본 정부의 관리를 받았지만 삶의 질은 나빴다.[72] 그렇다고 일제가 제대로 관리해준 것도 아니었다. 병져누워있던 순종을 강제로 서북순행 시킨 것이 대표적이다.
  • 니콜라이 2세는 대한제국의 고종을 황제로 인정한 군주였다. 고종은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나서 니콜라이 2세의 황제 인정 통보를 기다렸고 거절 당할까 봐 노심초사했으며 니콜라이 2세에게 (황제) 인정을 하지 않더라도 곧바로 거부하지 말고 현재의 호칭(대군주)으로 대해주기를 바란다고 요청했다. 고종의 노력이 먹혔는지 니콜라이 2세는 1897년 12월 20일에 서양 열강 중 제일 먼저 고종에게 전문을 보내 칭제건원을 인정하고 축하했다. 이에 고종은 기뻐했으며 아관파천 때도 러시아 공사관에 자신의 목숨을 의탁할 정도로 친러정책을 펼쳤다.[73][74]

    그리고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 제국의 공사였던 베베르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만 의화단 운동 때 대한제국에 출병을 권유하는 등 정치적 도움뿐만 아니라 총과 같은 물자적 지원을 제법 해줬으며, 이런 말도 했었다고 한다.

    "짐은 우리가 조선을 차지하는 걸 원하지는 않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 차지하도록 놔둘 생각도 없소. 그건 전쟁의 원인이 될 것이오."



    1901년 니콜라이 2세가 프로이센 하인리히 폰 프로이센[75]에게 한 말(Christopher Clark, The Sleepwalkers: How Europe Went to War in 1914, p. 176)
  • 한편, 을미사변 아관파천으로 불안해하고 있던 고종도 러시아의 군사 지원을 받기 위해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때 민영환을 필두로 윤치호 등을 포함한 사절단을 보내 여러 선물을 주었다. 개중에는 화려한 장농이나 백동향로, 오원 장승업의 그림이 있다. #[76] 민영환은 이 경험을 <해천추범>이란 여행기로 저술하였는데, 이는 한국 최초의 세계일주 기록이다. 단 민영환은 갓을 벗지 않을 것을 고집하는 바람에 대관식이 열리는 성당에 들어가진 못하고 밖에서 참관하였다고 한다.
  • 혁명으로 인해서 목숨까지 잃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점에서 프랑스 부르봉 왕조 루이 16세와도 비교된다. 실제로 두 사람은 인간적인 면모는 굉장히 좋았지만 군주로서는 완전히 낙제점에 가까웠다는 점, 권좌에 끌어내려지기 전 까진 국가가 어려운 형편임에도 국민들에게 존경을 받았지만 혁명 도중 진행된 양민학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배신자 소리를 듣고 끝내 최후를 맏이한 점, 아내와 자식들까지 혁명에 휘말려 그 끝이 좋지 못했다는 점 등 여러 면에서 비교된다. 또 왕비가 독일어권 출신 외국인이었고 외국으로 망명을 시도했다 실패했다는 점도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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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2세 일가의 가족 사진 프린세스 메이커 5의 오프닝에 나온 가족 사진
프린세스 메이커 5 오프닝 영상에 나오는 가족 사진은 니콜라이 2세의 가족 사진을 패러디했으며, 혁명이 일어나 왕가가 몰살당하고 프린세스 후보인 딸이 게임상의 인간계로 피신했다는 설정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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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콜라이 2세와 가족들이 있는 은화와 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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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초상화가 들어가 있는 IWC 회중시계
  • 니콜라이 2세와 그의 가족들, 라스푸틴, 그리고 러시아 제국 말기의 모습을 더 알아보고 싶다면 넷플릭스에서 ' 마지막 차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추천한다. 위에 서술된 내용들을 드라마 형식으로 만들어서 진부하지 않아 쉽게 접근할수있다.
  • 증조할아버지이자 같은 제호를 쓰는 니콜라이 1세와는 달리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팬이었으며, 딸들의 이름도 예브게니 오네긴의 등장인물에서 따왔다. 니콜라이 1세는 문학에는 관심이 없었음에도 반골적인 푸시킨을 매우 싫어하여 푸시킨의 글만큼은 꼬투리를 잡기 위해 정독했다고 한다.
  • 니콜라이 2세의 가족사진이 컴퓨터 작업으로 색깔이 입혀졌다. #(러시아어)

6.1. 돌연변이

증조할아버지인 니콜라이 1세부터 본인까지 4대 중에서 니콜라이 2세만 유독 앞에 선대 황제 3명과 다른 점이 몇 가지 있었는데,
  • 키가 선대 황제들보다 작다. 로마노프 가문이 미남미녀에 장신이 많았고, 증조부인 니콜라이 1세의 키가 189cm, 조부인 알렉산드르 2세의 키가 186cm, 아버지인 알렉산드르 3세의 키가 190cm인 데 반해 니콜라이 2세 본인은 170cm로 선대 황제들보다 많이 작다. 170cm면 당시 러시아인 남성의 평균 키이긴 하지만 장신들이 많은 로마노프 가문 중에서는 이례적으로 키가 매우 작은 편이다. 심지어 자녀들 중 차녀인 타티야나가 175cm로 니콜라이 2세보다 크며, 삼녀인 마리야가 본인과 같은 170cm다. 그리고 막내인 알렉세이 황태자의 키가 168cm로 니콜라이 2세의 키와 2cm 차이인데, 알렉세이 황태자가 총살 당시 13살밖에 안 된 것을 감안했을 때, 만약 사춘기가 지나 성년이 되었다면 확실히 장신이 되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 딸이 아들보다 많다. 니콜라이 2세가 딸부잣집에 유일한 아들이 혈우병 환자여서 아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리고리 라스푸틴을 등용한 사실이 러시아 제국의 멸망 원인이 됨에 따라 묻히는 진실인데 로마노프 왕조는 전통적으로 아들부잣집이 훨씬 더 많았다. 니콜라이 1세가 4남 4녀, 알렉산드르 2세가 6남 2녀(귀천상혼 자녀까지 합하면 8남 4녀), 알렉산드르 2세의 남동생들인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이 4남 2녀,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이 2남,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이 6남 1녀를 두었다. 알렉산드르 2세의 차남 알렉산드르 3세가 4남 2녀, 그 밑에 동생인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이 4남 1녀를 두었고, 당숙인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77]이 6남 3녀,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78]이 6남 1녀를 두었다.[79] 하지만 니콜라이 2세만 거꾸로 1남 4녀를 두었는데 하필 그 유일한 아들이 혈우병 환자였고 이는 황후가 라스푸틴을 총애하는 결과로 돌아왔다.

6.2. 닮은꼴

관계를 모르는 사람 눈에는 3살 터울의 이종사촌 형인 영국 조지 5세 쌍둥이로 착각할 정도로 닮았다. 실제로 당대에도 니콜라이 2세와 조지 5세를 착각하는 일이 꽤나 잦았다고 한다. 예로 조지 5세의 결혼식에 참석한 니콜라이 2세는 결혼식 전날, 그를 조지 5세로 착각한 듯한 누군가에게 '내일 아침 본인 결혼식까지 지각하지 말라'는 충고를 받았고, 피로연에서도 자신을 조지 5세로 착각한 사람들에게 축하받느라 고생했다. 러시아 혁명 이후 친정 덴마크로 망명한 니콜라이 2세의 어머니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태후가 영국을 방문했을 때, 이질(姨姪)인 조지 5세를 보고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고 착각한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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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쪽이 니콜라이 2세 조지 5세인지 찾아보자.[정답]

사촌이라도 이렇게까지 닮은 이유는 일단 조지 5세의 어머니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와 니콜라이 2세의 어머니 덴마크의 다우마 공주는 친자매이고, 이 자매부터 서로 쌍둥이처럼 닮았고 각자의 아들 니콜라이와 조지도 어머니를 빼닮은 덕에 서로 비슷한 외모를 지녔기 때문이다. 다만 알렉산드라는 이목구비가 부리부리하고 큼직해서 전체적으로 강한 인상이고 다우마는 이목구비와 체구가 아담하고 작아서 청순가련한 인상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자식들인 조지 5세와 니콜라이 2세를 비교해 봐도 알렉산드라의 아들 조지는 눈이 부리부리하고, 다우마의 아들 니콜라이는 조지에 비해 유순한 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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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이 영국의 왕비가 되는 알렉산드라
왼쪽이 러시아 제국의 황후가 되는 다우마

다만 외모만 비슷하고 실제 성격은 매우 달랐다. 조지 5세는 군인처럼 엄격하고 괄괄한 성품인데 반해 니콜라이는 비교적 다정다감한 성격이었다. 가정 분위기도 마찬가지여서 조지 5세는 자녀들, 특히 장남 에드워드 8세와의 관계가 개판이었지만 니콜라이는 자식들에겐 매우 인자한 아버지였다. 또한 군주로서는 능력은 정반대이며 니콜라이가 러시아를 말아먹고 본인도 가족들과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은 반면, 조지 5세는 대내외적인 상황이 위태로운 영국을 잘 이끌어가며 천수를 누렸고 그의 증손자는 현재도 영국의 국왕으로 재위 중이다

그 외에 덴마크 크리스티안 10세[81], 노르웨이 호콘 7세[82], 그리스 콘스탄티노스 1세와도 외사촌간이다.[83] 크리스티안 10세와는 좀 닮은 편이지만 호콘 7세나 콘스탄티노스 1세와는 그다지 닮지 않았다.

6.3. 음모론

황실 일부 인사들이 생존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84], 그 중 유명한 케이스가 아나스타시야 공주(사진 맨 오른쪽). 아나스타시야 공주는 꽤 오랫동안 사살 직전 도망가서 유럽 어딘가에 살아남았다는 음모론의 주인공이었던 것으로 유명하다.(영화도 있고, 심지어 애니메이션도 있다.)

게다가 혈우병으로 항상 오늘내일 하던 황태자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사진 중간, 세일러복을 입은 소년) 또한 적군의 총격을 피해 1977년까지 생존해 있다는 음모론이 있는 등, 아무래도 마지막 황가라는 비극적인 운명 때문인 듯하다.

명탐정 코난 극장판 세기말의 마술사에서도 3녀 마리야 공주가 생존하여 일본으로 도망쳤다는 설정이 깔려 있다. 이 극장판이 개봉된 1999년만 해도 마리야 공주의 유해가 발견되지 않아 작내에서 '아나스타시야 공주보다 마리야 공주 생존설이 더 말이 된다'는 발언이 있었다.

니콜라이 2세의 어머니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태후는 아들 일가가 처형당했다는 사실을 평생 믿으려 하지 않았다. 마리야 황태후는 아들, 며느리, 손녀들, 손자가 생존하여 어딘가에 숨어 있으리라 믿었다고 한다. 이후 아나스타시야인 척 하는 사기꾼 안나 앤더슨이 접근했으나, 표도로브나는 애니메이션과는 달리 앤더슨을 만나지 않고 손녀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1989년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유해가 발견되었으나 마리야 공주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의 유해는 발견되지 않아 음모론을 뒷받침했는데, 결국 2007년 마리야와 알렉세이의 것으로 보이는 유해가 발견되고 DNA 검사까지 끝나면서 이 음모론은 근거를 잃게 되었다.[85]

이때 DNA 검사를 위해 샘플로 제출된 DNA는 다름아닌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인 에든버러 공 필립 마운트배튼의 것이었다. 꽤 화제를 모았는데, 이는 그가 당시 생존해 있는 사람 중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와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기 때문. 알렉산드라 황후의 첫째 언니 밀포드 헤이븐 후작부인이 필립 공의 외할머니인데, 자매지간인 두 사람이 모두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이므로 모계 유전으로 전달되는 미토콘드리아의 특성상 알렉산드라 황후 본인 및 자녀인 올가·타티아나·마리야·아나스타시야·알렉세이와 밀포드 헤이븐 후작부인의 외손자인 필립 공의 미토콘드리아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촌수로 따지면 필립은 알렉산드라의 이종조카손자에 해당한다.[86]

니콜라이 2세의 미토콘드리아 DNA 검사에는 이종사촌 프린세스 로열 루이즈의 외손자 제3대 파이프 공작 제임스 카네기와 조카 이리나 알렉산드로브나 로마노바의 외손녀 크세니야 니콜라예브나 스피리 여백작의 DNA 샘플이 사용됐다.

7. 대중매체에서

원 역사의 최후가 워낙 인상적인 탓인지 대체역사물에서도 그다지 좋은 결말로 끝나지는 않는다. 제위는 잃더라도 목숨만 건진 시나리오면 그나마 다행일 정도. 한국 입장에서는 그다지 악감정을 가질만한 인물이 아님에도 취급이 안습인 건 마찬가지. 그래도 원 역사의 니콜라이를 너무 심하게 악의적으로 왜곡시킨 대통령 각하 만세[87]를 제외하면 아예 대놓고 민중 학살에 박차를 가한 폭군으로 나오지는 않으며 제위를 유지한 작품도 은근 많다. 거기다 일가족이 몰살된 원 역사의 시나리오 그대로 가지만 않는다면 제위를 잃더라도 제정 복고까지 다시 노릴 수 있는 상황으로 연출되는 경우가 더 많다. 원 역사의 스토리를 그대로 따라가는 작품이든 대체역사물이든 대체로는 중요한 순간에 판단을 잘못해서 상황이 나빠지는 인물이지만 그래도 인품 자체는 선량하고 좀 나쁘게 쳐도 평범한 정도로 나온다.
  • 조선왕자가 미국갔다 안 돌아옴에서는 자녀들을 의왕 이강에게 무사히 탈출시키기 위해 자신은 망명을 포기하고 상트페테로그라드에 남는 선택을 한다. 니콜라이 2세를 진심으로 사랑한 황후도 마지막 순간에 러시아에 남았고, 결국 부부는 원 역사대로 적백내전 중에 소비에트에 의해 총살당한다. 이강은 후견인으로서 다섯 남매의 대부가 되어 첫째 올가부터 차례로 시집보내며, 특히 둘째 타티아나는 영국의 에드워드 황태자(원 역사의 에드워드 8세)에게 시집간다. 막내 알렉세이는 이강을 아버지처럼 따르지만, 이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직 미성년(만 14세)인 채 신생 아무르 공화국의 수반으로서 소비에트 공화국을 향한 복수심을 불태운다.[88]
  • 동방의 라스푸틴에서는 명실공히 작중 최대 수혜자. 주인공에게 요구하는 게 워낙 많아서 별명이 니진구가 되기는 했지만, 그걸 또 주인공이 꾸역꾸역 해주는 바람에 승승장구하게 된다. 스페인 독감에 걸려서 생사의 기로를 오가는 바람에 요양하러 갔다가 아예 섭정인 장녀 올가에게 양위해버린다. 이후 농사 여러 번 말아먹어가며 유유자적하게 살다가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전과 손자손녀들까지 보고 사망한다.
  •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이선의 친구이자 20세기의 만력제로 등장한다. 주인공의 조언으로 원래 역사보다 러시아 제국을 비교적 더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그리고리 라스푸틴에게 조종당하지도 않았지만, 주인공에게 품은 질투심과 본인의 태생적 무능함은 차마 극복하기 어려웠는지 원 역사만큼 처참하지는 않지만 어쨋든 결국엔 제국을 말아먹고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다. 본인과 부인은 원 역사와 비슷한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나마 자녀들을 주인공에게 보내서 일가족 몰살은 피했다. 거기다 피의 일요일이나 라스푸틴 등용 같은 치명적인 실책은 일어나지 않아서 제위를 잃고 목숨을 잃더라도 망명에 성공한 OTMA와 알렉세이를 중심으로 소련에 대한 복수와 제정복고 시도의 여지를 남겼다.
  • 마지막 차르에서는 니콜라이의 즉위부터 혁명까지의 시간 동안 니콜라이와 알렉산드라가 저질렀던 실책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 더 크라운에서는 소련 붕괴 이후 영국과 러시아가 수교를 하는 과정에서, 엘리자베스 2세[89]와 부군 필립 마운트배튼[90] 모두에게 친척인 니콜라이 2세의 처형에 얽힌 전후 사정과 유골 발굴이 한 에피소드를 통째로 할애해서 깊이 있게 다뤄진다. 엘리자베스 2세는 니콜라이 2세를 비롯한 친척들의 처형 및 망명에 따른 외로움에 시달리는 필립에게 일종의 뿌리 찾기를 겸해서 외교 관계를 회복하는 선물로 비명에 간 친척들에 대한 현장 조사와 유골 발굴을 러시아 정부에 요구하고, 니콜라이 2세가 처형당한 바로 그 현장인 '이파티예프 하우스'가 위치한 스베르들롭스크 지역구의 관료였던 보리스 옐친을 당혹케 한다. 술꾼인 옐친은 러시아어로 시종일관 상스러운 욕설을 퍼부으면서도 결국 발굴 조사에 협력하고, 엘리자베스 2세는 이 과정에서 자신의 할아버지 조지 5세가 이들을 구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외교적 문제가 염려되자 죽도록 방치했다는 영국의 흑역사를 알게 되어 충격을 받는다. 특히 이 상황의 비극성을 강조하기 위해 니콜라이 2세 일가가 볼셰비키들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하는 끔찍한 장면이 잘 고증되어 묘사된다.
  • 대체역사소설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원 역사보다도 훨씬 더 막장암군으로서 러일전쟁이 일찍 종전되어서 온존한 발트함대 함포사격으로 원 역사보다 잔인한 피의 일요일 사건을 일으켜 쫒겨난다. 그러나 독일의 도움으로 왕위에 복귀하려다가 대전쟁이 터지고 러시아의 위협이 사라진 독일군이 서부전선에 더욱 집중하면서 협상국이 파리를 상실, 발악으로 협상국이 독가스를 먼저 사용하나 그 결과 미국이 협상국에 대한 지지를 거두면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동맹국이 승리하는 나비효과를 불러온다.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신용이 소멸하다시피 해서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가 차르로 즉위하지만 그 대가로 우크라이나와 핀란드 등의 상당한 영토를 독일에 할양하여 러시아 국민들이 분노하고, 이후 스페인 독감에 걸려 일가족이 앓아눕고 알렉세이는 혈우병으로 인해 썩은 피를 토하다 죽으면서 뒤를 이을 황족이 없어진 탓에 혁명이 일어나면서 소련이 탄생한다. 애초에 이 작품에서는 전세계 거의 모든 나라가 공화국이 되고 군주들 절대다수가 인품과 상관없이 전부 끔살당하여 대체역사물 중에서도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설정이 많기에 입헌군주제 지지 독자들의 증오심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으로서 모든 군주들의 인품이나 행적 등이 심하게 왜곡된 작품이므로 니콜라이만 유독 도드라진 것은 아니다.
  • 1967년에 집필된 로버트 K. 마시의 동명소설을 기반으로 한 1971년 작품의 역사영화인 니콜라스와 알렉산드라에서는 마이클 제이스톤이 니콜라이 2세 역을 맡았다. 미국에서 제작된 프랭클린 J. 샤프너 감독의 이 영화는 무려 3시간 3분의 런닝타임을 가지고 있다.

  • 화약고 제국의 천재 대공에선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겠다고 친정했다가 전선을 돌파하고 쾌속진격한 오헝 기갑군에 의해 생포되었고 카를에게 항복 선언을 하였다. 이후 강경하게 복구 작업에 몰두하며, 이를 거역하는 시위대를 진압하라고 직접 명령하여 총격과 포격까지 가해지는 참사를 일으킨다. 결국 혁명이 일어나자 가족을 오헝으로 대피시키고 자신은 우크라이나 근처 러시아 제국 영토에 남아 백군을 이끌고 적군에 맞선다. 이후 백군이 전쟁에서 패배하자 빈으로 넘어와 가족과 행복한 생활을 보내다가 소련이 망할 때 왕위에 오를 조카와 함께 모스크바로 와서 빨갱이 멸망과 로마노프왕조의 재건을 지켜본다. 이 작품에선 본인의 손으로 제국을 멸망시켰지만, 원 역사와 달리본인 포함 가족들도 죽지않아 말년은 행복하게 보냈고 추후 왕조복구까지 본 수혜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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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는 소련 성립 이전이었으며, 소비에트 러시아가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국호를 바꾸기도 전이었다. [2] 우랄 혁명 분관과 반종교 혁명 박물관으로 사용되다가 1946년 교육센터로 용도가 변경, 후에 니콜라이 2세 탄생 110주년, 처형 60주년이던 1978년에 다가올 외신의 관심을 우려한 유리 안드로포프의 의견으로 1977년 9월 철거됐다. [3] 핀란드 대공 겸임. [4] 11개월 나이로 요절했다. [5] 캐나다로 귀화했다. [6] 물론 당사자 쓰다 산조는 이미 죽은 지 한참 뒤였기에 혜택은 없었다. 쓰다는 사건 이후 일본 사법부의 특혜를 받아 사형을 면하고 무기징역 판결을 받았지만, 판결이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옥중에서 폐렴에 걸렸고 몇 달 뒤에 옥중에서 죽었으니, 즉 사건 당 해에 바로 죽었기 때문이다. [7] 반대로 쓰다를 제압하는 데 도움을 준 인력거꾼 무카이하타와 기타가이치는 사건 직후에는 영웅 대우를 받았으나 러일전쟁 이후로는 비국민 취급으로 처지가 반전되었다. [출처] :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 1차 세계대전> [9] 왕세자에 대한 체계적이고 방대한 제왕 교육 시스템이 갖춰 있던 조선이야 말할 것 없고 동시대 유럽 왕정국가들도 후계자들의 교육에는 10대부터 신경쓴 것, 특히 러시아 제국의 상태가 그렇게 여유를 둘 상황이 아닌 걸 감안하면 알렉산드르 3세의 아들에 대한 후계 교육은 늦었다를 넘어 너무 안일했다. 어떻게 보면 알렉산드르 3세가 아들의 비극적인 운명에 일조했다고 볼 수 있다. [10] 이후 국제연맹 LON도 마찬가지이다. LON은 League Of Nations의 줄임말이다. [11] 니콜라이 본인은 저렇게 말했지만 행적들을 본다면 그는 조선을 많이 도와준 편이다. [12] 다만 이후 밝혀진 바에 의하면 가폰이 오흐라나에 협조한 증거는 전혀 없었다고 한다. 오흐라나가 관리하던 요원의 목록과 카드 파일에 등재되지 않았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 경찰의 특별 비밀 기록 보관소에도 가폰의 비밀 활동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당시 비밀경찰로 활동했던 요원들의 증언으로는 가폰이 오흐라나에게 노동자 단체를 유지하는 데 후원금을 받았지만 요원이 아닌 설립자이자 선동가로서 협력하도록 초청만 받은 인물이라는 증언도 있었다. [13] 사실 경찰들은 오히려 시위대에 가담하고 있었고, 황궁 수비대 역시도 궁전 외곽의 수비대는 시위가 평화적임을 보고는 시위대를 그냥 통과시켰다. [14] 얼마나 안 좋았느냐면 제1차 세계 대전의 책임이 있는 독일 카이저인 빌헬름 2세도 1차 대전 패전 이후 네덜란드로 망명할 수 있었고, 양차 대전 이후 왕정이 폐지된 대부분의 나라들의 군주는 재산은 모조리 몰수되었을지언정 대부분 무사히 망명할 수 있었으나 니콜라이 2세는 받아주는 나라가 없었다. [15] 수천 명의 혁명운동가들이 테러 혐의로 교수형에 처해졌고, 수만 명의 혁명가들이 시베리아 유배형을 가게 되었다. [16] 니콜라이 2세는 실제로 1차 대전에서 모든 국정권을 알렉산드라 황후에게 일임하고 본인은 군사 사령본부에서 1917년 퇴위할때까지 군사를 지휘하였다. 그러나 군사학 지식이 전무하였던 니콜라이 2세는 없는 것만 못하였고 오히려 홀로 있게 된 황후가 그리고리 라스푸틴에게 의존하여 민심이 더욱 나빠지는데 영향을 주었다. [17] 당시 러시아의 구력( 율리우스력) 기준. 그레고리력으로는 3월. [18] 미하일 대공은 군주정이 붕괴된 후 여러 경로로 망명이 가능했지만, 이를 한사코 거부하다가 군주정 부활을 두려워한 볼셰비키에게 암살당한다. [19] 당시 스페인의 왕이었던 알폰소 13세가 자신이 러시아 황제 일가의 망명을 받아주겠다고 타진해 왔지만 영국은 중립국은 빠지라며 제동을 걸었다. [20] 이는 다른 유럽 왕가들은 대체로 가톨릭계라서 개신교에 속하는 성공회( 잉글랜드 국교회)와 견원지간이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7세의 아내 알렉산드라 왕비와 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남편 필립 마운트배튼도 원래 성은 독일계인 글뤽스부르크이며, 이 왕가는 독일에서 발원해서 덴마크 북유럽 여러 곳을 다스렸다. [21] 이후 영국 왕실은 독일어식 성을 버리고 윈저를 공식 가문명으로 삼는다. [22] 넷플릭스 드라마 더 크라운을 보면 묘사된다. [23] 독일 제국과 동맹을 맺고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세르비아 왕국에 선전포고를 했는데, 러시아 제국이 후견국인 세르비아를 지원하기 위해 총동원령을 발동하자 이를 자국에 대한 선전포고로 간주한 독일 제국이 러시아 및 러시아의 동맹국인 영국- 프랑스에 모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24] 훗날 공개된 왕실 문서로 내각에서 내린 결정이 아닌 조지 5세 본인의 결정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사실 조지 5세도 잘못하면 자신의 왕위까지 위협받을 수 있던 상황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는데, 특히 영국 왕실은 입헌군주제이기 때문에 여론에 상당히 민감하다. 결국 러시아 황제 일가는 총살당하는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나중에 이 소식을 들은 조지 5세는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고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고 한다. 그래도 설마 황제 일가를 몰살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 때문에 조지 5세는 자신의 이모이자 니콜라이 2세의 어머니인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태후와 이종사촌 여동생들인 크세니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올가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을 포함한 그나마 볼셰비키의 추적이 덜한 여성 황족들 상당수를 망명시켰으며, 결국 남성 황족들은 자력으로 도망쳐야 했다. 또한 훗날 그리스 왕국의 콘스탄티노스 1세가 폐위되자 조지 5세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녀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 일가를 영국 군함에 승선시켜 탈출시키는데 성공했다. 이때 탈출한 앨리스의 아들 필립 공은 조지 5세의 손녀인 엘리자베스 2세의 남편이 되고, 필립 공도 소련에 가고 싶느냐는 질문에 이 사건을 언급하며 ‘가고야 싶지. 그 새끼들이 내 가족의 절반을 죽였어도 말이오.’고 답했다. 물론 황실 일가의 처형을 지시한 걸로 추정되는 자들은 인터뷰 시점에서 이미 병사했거나 날조된 혐의로 숙청당한 뒤였다. [25] 오히려 니콜라이 2세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사형제를 폐지한다면 군법이 느슨해져 전선이 붕괴된다며 사형제 폐지에 반대했다. [26]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소속이었던 체코인 슬로바키아인 포로들을 러시아 제국군이 무장시켜 오헝 제국에 대한 독립군으로 조직했는데, 혁명 후에 이들은 러시아 전역을 떠돌면서 주로 볼셰비키와 싸웠다. 여담이지만 이들은 결국 1920년 볼셰비키와 협상하여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해로로 유럽으로 되돌아 가는데 이때 무기를 독립군에 팔고 떠났고, 이 무기로 독립군은 봉오동 전투 등의 독립투쟁을 전개하게 된다. [27] 모스크바-예카테린부르크는 직선거리만 3000km 가까이 된다. [28] 일설에 따르면 레프 트로츠키가 재판에서 검사 역할을 맡을 예정이었다고 한다. [29] 볼셰비키 내에서는 민심을 반영해 니콜라이를 정식으로 재판정에 세우자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일가를 초법적으로 몰살한다는 것은 원래 계획에 없었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황제 일가를 범죄적이고 비인도적으로 학살하는 것보다는 니콜라이가 초라하게 피고석에 등장하고, 트로츠키의 화려한 언변으로 피고를 압도하는 모습을 연출해 차르의 무능과 뻔뻔함을 만천하에 보여주는 것이 정치적으로는 훨씬 효과가 있었겠지만, 당시는 반혁명군에게 크게 밀리고 있었기 때문에 볼셰비키가 그런 쇼도 할 수 없을 만큼 상황이 급박했다. [30] 1918년은 볼셰비키가 반혁명군에 연전연패하며 위기에 몰렸을 때였다. 이전까지의 볼셰비키 병력(적위대)은 오합지졸의 자원병이었고, 붉은 군대는 트로츠키가 국방장관을 맡은 1919년에야 제대로 조직되기 시작한다. [31] 게다가 이후 러시아 역사에서는 홀로도모르, 대숙청, 독소전쟁에서 이보다 훨씬 더 심한 학살극은 여러 번 벌어졌다. [32] 유롭스키가 타고 온 자동차 엔진 소리가 커서 잘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꺼낸 질문이었다. [33] 다른 의견: 빅토르 세르주가 "그럼, 우리가 다른 곳으로 이동되는 게 아니란 말이지?"라고 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34] 예브게니 봇킨의 아들인 글레프 봇킨은 훗날 가짜 아나스타시야로 악명을 떨치는 안나 앤더슨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 겸 후원자가 된다. [35] 트루프는 라트비아 출신의 가톨릭 신자로 본명은 라트비아어식인 알로이스 라우리스 트룹스(Aloizs Lauris Trūps)이다. 같이 처형된 세 사람은 황제 일가와 함께 러시아 정교회의 성인이 되었으나 트루프는 종파가 달라서 러시아 정교회에 의해 시성되지 못했다. [36] 이 두 사람의 시신은 지금까지도 발견되지 못하고 있다. [37] 무능한 통치로 국민들을 도탄에 빠뜨린 니콜라이 2세 본인에 대해서는 처형해도 된다는 여론도 있었으나 가족들에 대한 처형은 동정론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볼셰비키 내에서도 합의되지 않은 사실이었다. 게다가 합리적으로 생각해도 황제 일가를 죽이는 게 아니라 추방하거나 어디 연금해두는 게 더 나았다. 당시 황태자 알렉세이는 혈우병이 도져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오늘내일 하는 상황에다 딸들은 건강하지만 계승권이 없고 망명하더라도 서방에서는 그냥 자국 국민으로 받아줄 뿐 왕족 대우를 하지 않겠다고 이미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살려두어도 정치적으로 위협이 되지 못했다. 만약 황제 일가를 전부 처형하기로 합의가 이뤄졌다면, 굳이 공표하지 않고 숨기거나 백군이 망한 뒤에도 입다물고 있을 이유가 없다. 아나스타시야나 알렉세이의 생존 루머도 소련 정부가 황제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의 생사에 대해서 입을 다물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38] 1년 7개월 후 콜차크도 볼셰비키에게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39] 1815년 프랑스 왕정복고가 잠시 성공한 후 공화파나 나폴레옹파들은 상당수 백색 테러의 보복대상이 되었다. [40] 스탈린이 서기장이 된 후 그때까지 살아있던 노모는 아들에게 설마 네가 차르 일가를 죽였나고 다그쳐 물었고 스탈린은 정색하면서 자신이 죽인 것이 아니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이외에 스탈린은 로마노프 일가 처형을 담당한 볼셰비키들이 회고록 출판을 요청하자 "로마노프 것들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하지 말라"고 이를 엄금하였다. [41] 그러나 나중에 관계자들의 증언으로 니콜라이 2세를 쏜 것은 유롭스키가 아니라 함께 처형을 집행했던 미하일 메드베데프(Михаил Медведев)로 밝혀졌다. [42] 해외 러시아 정교회 신도의 블로그. 해외 러시아 정교회는 2007년 러시아 모스크바 총대주교청과 일치된 교회이나,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산하 대한 정교회, 정교회 한국대교구와는 별개 조직이다. 2018년 정교회 분열로 러시아 정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정교회의 성사 교류가 끊어졌고, 한국정교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휘하로 유지되고 있다. [43] 황후와 라스푸틴이 간통을 한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가능성은 희박하다. [44] Winston Churchil, The World Crisis (1916-1918) Part I (London: Thornton Butterworth, 1927), 225. [45] 이 글과 달리 처칠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46] Neue Freie Presse 1910년 신년호 [47] 사실 이건 20세기 초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만든 이론에 기반했다. 당시의 시대적 한계를 제외하더라도 일단 이데올로기적 이유로 만들어진 사관인지라 객관적인 평가는 아니다. 현재 제정 말기의 러시아 하층민들의 평균적인 생활 수준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조선 말기 농민의 생활수준조차도 학자들 사이에 일치되는 견해가 없고 정치적 이유로 왜곡되는데 그보다 몇 배나 큰 러시아에 전반적인 민생 수준에 대한 명확한 증거와 일치된 다수설이 있다면 더 이상한 일이다. [48] 재인용 : Чернуха В. Г., Внутренняя политика царизма с середины 50-х годов до начала 80-х годов XIX в. ( Ленинград: Наука, 1978), 45. [49] 오히려 현대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이 그 말에 더 들어맞는다. [50] 자유주의자인 파벨 밀류코프는 이들을 '귀족적 자유주의(Дворянский либерализм)'라 칭하고 스스로의 자유주의와 구분했다. 또한 자유주의의 발전에 귀족들의 공로도 물론 있지만 결국 귀족들은 황제의 전제권력에 의해 패배해야만 하는 존재라고 지적했다. 다만 밀류코프의 학자 및 사상가로서의 견해는 정치인으로서의 실제 행보와 항상 일치하는 건 아니었고, 훗날 입헌민주당의 지도자가 된 후에는 황제권을 제한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았다. 이는 학자, 사상가로써의 견해와 정치인으로써의 행동이 일치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밀류코프는 사상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을 깠지만 정치인으로써 이들의 지지를 받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51] 다만 거시적으로는 전제정을 유지하는 것은 불리한 면도 있다. 전제정도 결국 서유럽에 비해서 후진 체제인 것은 맞으므로. 사실 이 부분은 선대들의 잘못도 있다. 당장에 서유럽이 농노제를 없애던 시기에 동유럽은 농노제를 강화하고 있었으니... 결국 선대에서 발전하지 못하다 보니 이 때에 와서는 고수가 대안이 된 것이다. 당장에 폴란드 역시도 근본적으로는 절대왕정으로 가지 못하는 구조속에 있었다. 귀족을 억누르려면 귀족에 맞먹을만한 실력있는 집단이 있어야 했지만 그게 없었던게 문제. 서유럽에서는 시민계급이 성장해 왕권과 결탁해 절대왕정을 형성했고 나중이 머리 굵어진 시민계급이 귀족과 왕까지 엎어버리거나(프랑스) 아니면 왕을 압박해 하나하나 권력을 가져갔다.(영국) [52] Маклаков В. А., Вторая государственная дума. Воспоминания современника (Париж: Ymca Press, 1940), 9-10. [53] 피의 일요일 사건을 포함하여 어떠한 정치적 개혁을 요구하는 대중운동에는 대개 자유주의적 귀족 세력과의 커넥션이 있었다. 아예 총리였던 표트르 스톨리핀 입헌민주당에 좌익 혁명세력과의 커넥션을 끊으라고 직접적으로 촉구할 정도였다. [54] 실제로 이 셋은 영향을 주고 받았다. [55] 국가두마의 정치 전략이 예산안이나 법안 심사에 무조건적으로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정부 기능을 마비시키고 버티면서 공개적으로 라스푸틴 음모론 등을 퍼뜨리거나 은밀하게 혁명세력을 지원하면서 정부 및 차르에게 자신들에게 유리한 개혁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하다 못해 총리와 장관들이 국가두마의 정치공격에 시달리는 통에 국가 운영과 군대 유지에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전선 사령관 알렉세이 브루실로프가 지적할 정도였다. [56] 소위 '라스푸틴 파벌'이라고 알려졌던 프로토포포프도 훗날 임시정부의 조사위원회에서 비슷하게 "라스푸틴은 그냥 황후의 친한 지인 중 한 명이었고 여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충고와 덕담을 주고받는 사이였을 뿐이다."고 증언했다. [57] М. П. фон Бок, Воспоминания о моем отце П. А. Столыпине ( Москва: Современник, 1992), 209. 표트르 스톨리핀의 친딸이 남긴 회고록이다. [58] 다만 케렌스키도 훗날 회고록에서 다시 라스푸틴 음모론을 언급하다가 또 부정하는 등 오락가락했다. 그러나 결국 니콜라이 2세가 무능했을지언정 러시아를 위해 희생했다는건 부정할 수 없다는 평가를 내렸다. 이런 일관성 없는 평가는 비슷한 위치인 파벨 밀류코프 알렉산드르 구츠코프에게서도 나오는 편인데 애시당초 그들의 니콜라이 2세에 대한 평가에는 정치 논리가 들어갔기 때문이다. 무엇이 그들의 진심에 가까운지는 본인들만 알 것이다. [59] Суриса Л. М. (ред), Политический сыск, борьба с террором. Будни охранного отделения (Directmedia, 2016), 578. [60] 당시 러시아 제국의 자유주의자들 상당수가 귀족들이었다. 애시당초 전제정이라는 게 봉건귀족들을 용납하지 않는 체제이다 보니, 황제의 권력을 제한하려는 귀족들과 치열한 정쟁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바로 그 세르게이 비테 파벨 밀류코프조차 귀족들이 의회와 헌법으로 황제의 권력을 제한하려 한다고 비판하며 차라리 전제정을 고수하는 니콜라이 2세가 낫다고 평했을 정도다. [61] 차르에게 의회해산권이 있었으나, 두마에서는 법안 거부권이 있었다. 즉 사실상 둘이 완전히 협력하거나, 둘 중 하나가 사라지는게 아닌 이상 정상적인 입법활동이 진행될 수가 없었다. [62]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러시아 역사 전문가인 올랜도 파이지스(Orlando Figes) 교수는 "니콜라이 2세가 러시아 제국의 황제가 아니라 동시대 대영제국의 국왕이었다면 모두의 사랑을 받는 모범적인 군주로 역사에 남았을 것이다."라고 했다. [63] 다만 이에 관해서는 논쟁할 여지가 있다. 아래의 과장된 일화들 문단 참조. [64] 더구나 부모님 같은 연애 결혼을 꿈꿔 정략결혼을 거부하다가 때를 놓쳐 버리고 결국 비명횡사한 니콜라이 2세의 딸들과 달리 엘리자베스 2세는 자신이 선택한 남편과 연애 결혼을 하고, 증손주까지 볼 정도로 남편과 오랫동안 해로하는 등 어느 정도 행복한 삶을 보냈다. [65] 물론 차녀인 마거릿 공주는 스캔들을 자주 일으키는 철부지 공주님스러운 면이 있긴 했다. 그러나 그건 마거릿이 왕위 계승 순위에서 언니보다 밀리는 입장이라 굳이 그렇게까지 엄격하게 자랄 필요는 없던 점이 크다. 그리고 그런 마거릿도 군주로서의 의무를 짊어져야 했던 언니에게는 친분을 유지하면서도 예의를 차리는 등 왕족으로서의 선은 평생 지켰다. [66] 참고로 알릭스의 할아버지 카를 공자는 니콜라이 2세의 할머니 헤센의 마리 공녀의 오빠라서 알릭스와 니콜라이 2세는 6촌간이데, 재미있게도 알릭스의 사촌오빠인 빌헬름 2세의 황후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역시 빌헬름 2세와 6촌간이다.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황후의 외할머니 페오도라가 빅토리아 여왕의 이부언니다. 물론 알릭스와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역시 6촌간.) 한편 니콜라이 2세와 빌헬름 2세는 프로이센 왕실 기준으로 7촌, 러시아 황실 기준으로 8촌간이다. [67] 니콜라이 2세의 또 다른 외사촌인 호콘 7세 역시 알릭스의 사촌인(외삼촌 에드워드 7세의 딸) 웨일스의 모드 공녀와 결혼했다. [68] 요절 [69] 당숙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과 결혼해 자녀 7명을 두었다. 이들 중에 큰딸 이리나( 1895년 ~ 1970년)는 펠릭스 유수포프( 1887년 ~ 1967년)의 아내가 되었다. [70] 빅토리아 여왕 앨버트 공의 차녀. [71] 산성 물질을 커피로 위장하여 먹였기에 치아 뿐만 아니라 잇몸과 치조골까지 녹아 치아가 다 빠진 것이다. [72] 니콜라이 2세가 사형만 안 당했어도 순종보다 오래 살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순종은 50대 초반에 병들어 죽었다. [73] 출처:러시아의 동아시아 정책, 159~160p. A.말로제모프, 석화정 번역, 지식산업사 출판 [74] 사실 이건 어쩔 수 없는 것이 당장 조선을 둘러싼 외국 열강들 중에서 일본을 적극적으로 견제하려던 나라는 러시아밖에 없었다. 영국과 미국은 일본의 동맹국이었고 러시아를 제외한 다른 유럽 대륙 열강은 조선에 관심이 없었다. 청나라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배한 이후 조선에서 손을 뗐다. 만약 고종이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려는 정책을 펴지 않았다면 조선은 1910년이 아니라 청일전쟁이 끝난 1895년에 이미 일본한테 망했을 것이다. [75] 빌헬름 2세의 동생으로 해군 원수. 1899년 방한하기도 했었다. [76] 단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에서 조선이 보낼 수 있는 선물이 이것밖에 되지 않는다며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다. [77]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의 차남. [78]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의 사남. [79] 러시아 혁명으로 많은 황족들이 총살당했지만 자손들이 워낙 많아서 현재도 로마노프 가문의 후손들이 많이 있다. 단, 귀천상혼 문제와 준 살리카법 문제로 실질적인 계승권이 있는 후손은 그렇게 많지 않다. [정답] 세 사진 모두 왼쪽이 니콜라이 2세다. 엄청 닮았지만 그나마 눈매에서 좀 차이가 있는데, 조지 5세의 눈이 좀 더 부리부리하다. 그리고 키가 니콜라이 2세가 더 크다. 니콜라이 2세가 170cm, 조지 5세가 168cm. [81] 외삼촌 프레데리크 8세의 아들. [82] 외삼촌 프레데리크 8세의 아들로 크리스티안 10세의 동생이기도 하다. [83] 콘스탄티노스 1세의 경우는 사촌인 동시에 육촌인데 모후 마리야 표도로브나 쪽으로 하면 사촌, 부황 알렉산드르 3세 쪽으로 하면 육촌이 된다. 콘스탄티노스 1세의 부왕인 요르요스 1세가 마리야와 남매지간이고, 콘스탄티노스의 모후 올가 왕비가 알렉산드르 3세와 친사촌간이기 때문이다. [84] 역사소설가 로버트 매시에 의하면, 황제 자신이 백발 노인으로 런던 거리를 지나가는 걸 봤다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85] 한 때 말이 많았지만 관련이 전혀 없었던 마리야 공주와 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과 달리,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와 가장 유력했던 사람으로 바실리 필라토프가 있다. 이 사람은 확실히 알렉세이는 아니었지만, 현재 상황에서도 최소한 니콜라이 2세의 친족, 즉 황가의 일족인 것까지는 유전자적으로도 확실하다. 그래서 "미하일 대공 혹은 니콜라이의 혼외자녀다, 대충 바깥에서 사는 사촌 정도로 지냈다, 러시아 혁명과 소련의 광풍 속에서 평범한 사람인 척 지내다가 소련이 무너질 때가 되어 사실을 밝혔으나 늙어서 기억이 오락가락하는 동안 자신을 알렉세이라 주장했다"는 설이 난무했으나, 바실리는 얼마 못 가 고인이 되었고 그의 가족은 이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아 논의가 자연스럽게 흐지부지 묻혔다. [86] 또한 필립은 니콜라이 2세와도 친척이다. 할아버지 요르요스 1세 쪽으로 하면 5촌, 할머니 올가 왕비 쪽으로 하면 7촌. 니콜라이 2세의 모후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후가 요르요스 1세와 남매이고 부황 알렉산드르 3세가 올가 왕비와 친사촌이기 때문. 덧붙여, 부계로만 따질 경우에는 공통조상인 프레데리크 1세 기준으로, 니콜라이 2세가 12대손, 필립이 13대손이 되어 25촌 조카뻘이다. [87] 이 작품은 아예 입헌군주파 독자들은 물론 입헌군주제 지지자 전체를 적으로 돌릴 만한 작품이라고 볼 정도로 모든 군주국들의 군주들이 심하게 악의적으로 왜곡되었고 전부 다 왕위/제위를 잃고 끔살당한다는 점은 감안해야 하며 오히려 작가가 밝힌 본래 의도를 생각하면 모든 군주들을 학살한 주인공 조지원을 옹호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잘못된 영웅상이라며 강하게 비판하는 쪽에 가깝고 작품 자체의 분위기도 조지원의 타락을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어서 입헌군주파 독자들도 기획의도를 알면 나쁘지 않게 볼 수는 있는 작품이다. [88] 잘 알려져있다시피 알렉세이 황태자는 혈우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이강은 만에 하나 로마노프의 대가 끊길 것을 우려하였다. 이강이 세운 힐 제약이 혈우병 치료제를 개발하기 위해 작중에서 애쓴다. [89] 엘리자베스 2세에게 니콜라이 2세는 할아버지의 이종사촌이다. [90] 필립에게 니콜라이 2세는 이모부할아버지인데다 고모할머니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