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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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의 차밭에서 일하는 흑해 그리스인 여성과 아이들이다. 1905–1915년 사이에 촬영된 사진을 컬러로 복각한 사진이다. |
- 그리스어: Πόντιοι(Póndii), Ελληνοπόντιοι(Ellinopóndii)
- 튀르키예어: Pontus Rumları
- 조지아어: პონტოელი ბერძნები(P’ont’oeli Berdznebi)
- 영어: Pontic Greeks
흑해 그리스인은 아나톨리아 동북부와 캅카스 서부 지역에 거주하던 그리스인들을 의미한다. 대다수 언어권에서는 '폰토스 그리스인'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고대 흑해 남안의 헬레니즘 왕국이었던 폰토스 왕국에서 따온 이름이다. 오늘날에는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 및 소련 건국 초창기의 혼란을 피해 대부분이 그리스 본토로 이주한 상황이다.
2. 역사
1차대전 후 제안된 폰토스 공화국 (갈색)
기원전 700년경부터 서기 1923년까지 상당수의 그리스인들이 흑해 일대에 거주했으며 오늘날에도 일정 수의 흑해 그리스인들이 조지아 서부 흑해 해안지역 등에 잔존하며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스인들의 흑해 진출은 기원전 8세기부터 시작됐을 정도로 유서 깊다. 밀레투스에서 출발한 그리스인 개척자들이 흑해에 식민도시를 건설한 것을 시작으로, 고대 초르노젬(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일대) 지역의 밀을 수입하고 대신 그리스에서 생산되던 포도주와 올리브유를 수출하던 고대 그리스인들은 크림 반도 일대의 보스포루스 왕국 등을 건설하였으나, 흑해 일대에 고트족, 아랍인, 튀르크 등이 주도권을 차지하면서 비주류 민족으로 밀려났다. 로마 제국의 기독교 개종 이후 흑해 일대의 그리스인들도 그리스 정교회를 정체성으로 삼으면서,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흑해의 무슬림들과는 다른 종교적 소수자로서의 흑해 그리스인의 정체성이 완성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15세기 오스만 제국이 아나톨리아 동북부 지방을 병합하면서 흑해 그리스인 대다수가 오스만 제국의 신민이 되었다. 이들 중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오스만인과 동화된 이들도 적지 않았으나 그리스 정교회를 비롯한 그리스인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한 경우도 많았다. 다만 아나톨리아 서부 도시지역의 부유했던 그리스인들과 다르게 흑해 그리스인들은 주로 광업에 종사하긴 했지만 비교적 덜 부유한 편이었고,[1] 오스만인과 언어적으로 완전히 동화된 경우가 더 많았다. 일부는 스타브리오테스(σταυριώτες) 또는 크립토흐리스티아니(κρυπτοχριστιανοί)라 하여 표면상으로만 이슬람으로 개종한 경우도 있었는데, 19세기 들어 다시 기독교도로 환원하였다. 근대 러시아 제국이 캅카스 서부 지역으로 확장을 계속하자 체르케스인 등이 오스만 제국으로 탈주하는 것과 반대로 흑해 그리스인 상당수가 러시아 제국 영토로 자진해서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 상당수는 러시아 남부 지역이나 조지아 일대에 정착했다.
제정 러시아의
에까쩨리나 여제 통치기에 러시아 군대는 흑해연안까지 진출하여
오데사를 건설하고, 이곳에 그리스인들의 정착을 적극 권장하였으며, 이외에도 많은 그리스인들이 에까쩨리나 여제 통치기에 러시아 남부에 정착하였다. 이러한 역사를 거쳐 제정러시아에는 50만명이 넘는 그리스인들이 정착하였고, 이 가운데 현재의 러시아연방 지역에는 대략 15만-20만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었다. 아울러 현재의
독립국가연합지역에 그리스인 공동체는 18세기부터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는데, 흑해와
아조프해 연안지역을 중심으로 초기 정착이 시작되어 크림반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후 19세기초에 당시에는 오스만투르크의 지배하에 있었던 오늘날의 아르메니아와 그루지아에 거주하고 있는 그리스인들의 조상들이 카프카즈 지역으로 이주하였고, 이후에는 오늘날 그루지아의 아드자리아와
아브하지야 지역으로까지 이주가 확대되었는데, 노동 이민자들이 대부분이었다.
KCI 등재논문 :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유럽계 소수민족 집단의 형성과 변화(폴란드인, 그리스인)
KCI 등재논문 :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유럽계 소수민족 집단의 형성과 변화(폴란드인, 그리스인)
3. 규모
흑해 그리스인의 인구 규모에 대한 정확한 추산은 불가능하지만 20세기 초 대략 수십만여 명의 흑해 그리스인들이 튀르키예에서 그리스로 이주한 것만은 분명하다. 1928년 통계에 의하면 이주 과정에서 사망하지 않고 그리스에 정착한 흑해 그리스인 난민 인구는 24만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정확한 추산이 불가능한 이유는 민족주의의 부흥 이전에는 오스만 제국 내 그리스인 중에서 이슬람을 믿는 인구를 그리스인으로 분류해야 하는지 튀르키예인으로 분류해야 하는지 분명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르메니아 대학살 과정에서 카르스 등 지역에서 그리스인들에 대한 학살도 일어났기 때문이다.오늘날에는 흑해 그리스인들이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지대에서 그리스로 이주해온 혹은 그리스 본토의 주민들과 서로 이질감 없이 통혼한 상황이라 조상 중 한 쪽이 흑해 그리스인인 경우를 포함하면 그리스 인구 중 200~250만여 명 정도가 흑해 그리스인이라 볼 수도 있다.
소련에 남은 그리스인은 1926년 조사에서 21만 3,765명이었고 1939년 조사에서는 28만 6,444명으로 증가했다. 그중 흑해 그리스인은 절반이 넘었는데[2] 1942년과 1944년, 1949년 총 3번에 걸쳐 7~8만여명이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등으로 강제추방을 당했다.[3] 1980~90년대 사이 그리스 정부는 이들과 접촉하여 소련에서 그리스로 이주하도록 지원하였으며 소련 해체 전후로 러시아나 우크라이나 등지에 잔류하는 그리스계 인구에게 굳이 그리스로 이민 온 경우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리스 국적을 발급해주기도 하였다. #. 2002년 기준 러시아에는 97,827명의 그리스인들이 거주하는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카자흐스탄에는 2010년 기준으로 1만 2천여 명 정도의 흑해 그리스인 인구가 거주하고 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우즈베키스탄에도 1만여 명 정도의 흑해 그리스인 인구가 거주했으나 소련 붕괴 이후 대부분 다른 나라로 이주한 상황이다. 우크라이나에는 9만여 명 정도의 그리스계 우룸인 후손들이 거주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우룸인들은 주로 도네츠크주를 중심으로 거주하며 우크라이나 지역이 워낙 혼혈이 흔했던 관계로 특별한 그리스인 정체성을 가진 경우는 드문 편이라 한다.
흑해 동부의 조지아에는 2002년 기준 흑해 그리스인들이 1만5천여 명 정도 남아있으며, 조지아의 그리스인들은 흑해 그리스인 중에서도 다른 그리스인들과 문화 차이가 크다고 한다.
4. 여담
소련의 문학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중앙아시아로 이주된 흑해 그리스인들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인 서술을 남겼다.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이 과거에 거주하던 쿠반 땅에 대한 향수를 강하게 느끼고 살지만, 상당히 근면하여 부를 많이 쌓았다는 기록을 남겼다. 특히 카자흐스탄에서 생산되는 야채들 중 가장 품질이 좋은 야채는 그리스인들이 재배한 거였다고 한다.튀르키예에 거주하는 흑해 그리스인들은 소수지만 자신들의 언어를 보존하고 있다. 튀르키예어로는 폰토스 룸어(Pontus Rumcası)라고 부르며, 자신들은 폰토스어(Ποντιακά) 또는 로마어(Ρωμαίικα)라고 부른다. 다만 중세시대 해당 지역의 토착 방언을 기반으로 하고, 튀르키예어·라즈어 등의 어휘를 차용해 현대 그리스어 화자들은 거의 이해가 불가능할만큼 이질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