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2.
아시아
2.1.
한국2.2.
중국
3.
유럽2.2.1.
상나라2.2.2.
주나라2.2.3.
춘추전국시대2.2.4.
진나라2.2.5.
한나라2.2.6.
삼국2.2.7.
서진2.2.8.
남북조시대2.2.9.
수나라2.2.10.
당나라2.2.11.
오대십국시대2.2.12.
송나라2.2.13.
금나라2.2.14.
명나라2.2.15.
청나라
2.3.
일본2.4.
몽골2.5.
우즈베키스탄2.6.
티베트2.7.
브루나이3.1.
네덜란드3.2.
덴마크3.3.
독일3.4.
스웨덴3.5.
벨기에3.6.
영국3.7.
오스트리아3.8.
프랑스3.9. 스페인3.10. 포르투갈3.11.
이탈리아3.12.
그리스3.13.
러시아3.14.
불가리아3.15. 헝가리3.16. 보헤미아3.17.
로마3.18.
튀르키예
4.
중동1. 개요
뭔가 색다른 취미를 가진 군주들의 취미 일람. 다만 이는 정말 색다른 것일 수도 있고 왕답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2. 아시아
2.1. 한국
2.1.1. 고구려
- 주몽
- 활쏘기: 《삼국사기》에서 전하는 고구려 건국설화에 따르면 주몽은 이미 어렸을 적부터 직접 활을 만들거나 겨누어 쏠 수 있을 정도로 활쏘기를 즐겼다. 이름인 '주몽'도 부여말로 '활을 잘쏘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 유리왕
- 활쏘기: 아버지인 주몽을 닮아서 활쏘기를 좋아했다. 다만 궁술이 아버지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는지 어릴 적에 참새를 쏘려다가 물을 길어 가던 부인의 항아리를 맞춰서 깨뜨리는 사고를 치기도 했다.
- 시 짓기: 현재 전해지는 유일한 고구려 가요 < 황조가>를 지었다.
- 사냥: 너무 사냥을 좋아해 개국공신인 협보에게 비판을 받았다.
- 모본왕
- 인간방석: 앉을 때는 방석으로, 누울 때는 베개로 썼으며 움직이면 죽여버렸다. 결국 저러다 자기가 깔고앉으려던 두로에게 살해당했다.
- 차대왕
- 사냥: 사냥을 그만 하라는 조언을 들을 정도로 사냥을 좋아했다.
- 광개토대왕
- 불교: 호전적인 정복군주로 유명하지만 한편으로는 불교를 신봉하여 평양에 9개의 사찰을 건설하는 등 종교적인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삼국유사에서는 국경을 순행하던 중 요동에 7층 목탑을 지었다는 고구려의 성왕이 등장하는데, 그 정체를 광개토대왕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2.1.2. 백제
- 아신왕
- 매사냥: 매를 이용한 사냥과 말타기를 즐겼다고 한다.[1]
- 개로왕
- 법왕
- 불교: 불교에 극단적으로 심취하여 그물과 사냥도구를 태워버리고 민간에서 기르는 매를 풀어줄 것을 명하기도 했다.
- 무왕
- 음주: 말년에는 노쇠한 탓인지 신라와의 전투에서 패하는 와중에도 자신은 궁에서 술과 뱃놀이를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 의자왕
- 음주: 아버지인 무왕과 마찬가지로 말년에는 노쇠한 탓인지 음주를 몹시 즐겼는데, 측근이었던 좌평 성충이 간언을 하자 이에 분노하여 그를 옥에 가둬 죽게 만들 정도로 판단력이 흐려졌다.
- 여색: 그 악명높은 삼천궁녀 설화는 후대에 지어진 것이나 여색을 매우 밝혔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당장 슬하에 41명에 달하는 아들들이 있었으며, 일본 및 중국 측의 기록에서 공통적으로 그가 여인에게 빠져 정사를 망쳤다는 서술이 보인다.
2.1.3. 신라
- 진흥왕
- 불교: 말년에는 불교에 매우 심취해서 스스로 삭발하고 승려의 행색을 갖출 정도였다.
- 진평왕
- 사냥: 사냥을 너무 좋아해서 신하 김후직이 줄기차게 이 점을 간언했다. 이후 김후직이 유언을 남겨 일부러 왕이 사냥을 다니러 가는 길목에 자신의 무덤을 만들자 그제서야 사냥을 그만두었다.
- 무열왕
- 혜공왕
- 여장: 본래 여자로 태어나야 할 것을 하늘에 빌어서 억지로 남자로 태어나게 한 탓에 행동거지는 물론 옷차림이 여자같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 흥덕왕
- 노래: 당나라에서 얻어 온 앵무새 한쌍 가운데 암컷이 먼저 죽고 수컷이 이를 그리워하다가 죽는 것을 보고는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 경문왕
- 뱀 키우기: 기이하게도 잠자리에 뱀들과 함 자는 것을 좋아했다.
- 진성여왕
2.1.4. 고려
- 태조
- 여색: 29명이나 되는 아내를 거느린 것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대체로 이를 호족들과의 정략결혼으로 보고 있지만, 별다른 영향력없는 가문의 여식들을 건드리고는 방치하는 등 정치적 목적보다는 단순히 성욕 충족을 목적으로 한 경우도 있었던 듯 하다.
- 목종
- 궁술, 기마술: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유약한 이미지와는 달리 목종은 활쏘기와 말타기를 즐기는 등 무예에 관심이 깊었다.
- 남색: 왕후나 후궁과 사이에서 후사를 보지 못했고 아름다운 외모의 남성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목종의 동성연인이었던 유행간은 별다른 재주없이 목종의 총애 만으로도 고위직에 올라 강조의 정변으로 살해당하기 전까지 정사를 농단했다.
- 현종
- 서예, 글쓰기
- 의종
- 수박: 의종은 평소에 무신들로 하여금 수박 경기를 시켜서 이를 관람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의민은 천민 출신임에도 뛰어난 수박실력으로 의종의 총애를 받았다. 또한 무신정변의 발단이 된 사건 중 하나인 한뢰의 이소응 하극상도 의종이 관람하던 수박경기 도중 일어났다.
- 격구: 마상에서 즐기는 격렬한 공놀이. 젊은 시절의 의종은 격구에 지나치게 심취하여 거의 중독자 수준이었다.
- 주색잡기: 의종은 재위 말년에 이르기까지 명승지를 유람하며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 도가 지나쳐서 그를 호종하던 무인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이는 결국 무신정변의 한 원인이 되었다.
- 명종
- 충렬왕
- 충선왕
- 독서: 충선왕은 독서를 매우 즐기는 호학의 군주였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원 인종에게 학문을 가르쳤고, 원나라 대도에 만권당을 세워 학자들을 초빙하는 등 학문연구에 힘썼다. 이제현을 비롯한 고려 후기의 이름높은 유학자들 중 만권당을 거쳐간 사람도 많았다.
- 여색: 충선왕은 여성편력이 화려했다. 특히 잘 알려진 것으로는 원나라 공주 출신의 정비인 계국대장공주보다도 고려 출신의 조비를 총애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 일이 화근이 되어 충선왕이 폐위당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 남색: 충선왕은 동성연애도 즐겼다. 그의 동성애인이었던 원충은 충선왕에게 큰 총애를 받았음에도 늘 신중히 행동하여 후세에 좋은 평가를 받았다.
- 충혜왕
- 공민왕
- 그림 그리기: 공민왕은 그림 그리는 것을 매우 좋아했으며 그 실력도 수준급이었다. 공민왕이 직접 그렸던 그림들은 오늘날까지 일부가 전해져 그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천산대렵도》와 《염제신초상》 등이 대표적이다.
- 남색, 관음증: 모두 아내 노국대장공주 사후 이후에 벌어진 일이었는데, 노국공주와는 생전에 금슬이 좋아서 주색과 향락에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공민왕이 남색과 관음증을 즐긴 일을 후대의 조작으로 보는 견해도 유력하다.
- 우왕
- 민가에서 사냥하기, 엽색, 각종 난행.
2.1.5. 조선 ~ 대한제국
- 태조
- 국궁 : 활쏘기를 매우 즐겼을 뿐 아니라 실력도 뛰어나서 가히 신궁의 경지에 이른 것으로 유명하다.
- 사냥
- 격구: 주로 귀의군 왕우, 찬성사 유만수와 격구를 즐겼다.
- 꽃구경: 왕위에 오른 후에는 화원에 행차해서 꽃을 구경하는 것을 유독 즐겼다. 큰 돈을 들여 화원의 전각인 팔각전을 수리했다.[3]
- 정종
- 격구
- 여행: 태종과 같이 여행을 자주 갔다.
- 사냥
- 태종
- 사냥
- 여행: 퇴위 후 형 정종과 같이 전국 곳곳을 여행 갔다.
- 세종대왕
- 독서: 세종은 일생동안 공부와 독서에 미쳐 살았는데, 특히 자치통감을 즐겨 읽어서 몸소 주석서까지 만들 정도였으며 고려사 편찬 작업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 언어학: 단순한 취미 정도가 아니라, 그 자신이 당대 최고의 언어학자로 꼽혔다. 세종대왕 본인이 직접 한글을 창제한 것으로 언어학자로서의 불멸의 업적을 남겼지만, 그 이외에도 역시 같은 언어학자였던 총신인 신숙주를 명나라로 파견보내어 당시의 중국어의 음운을 조사하고는, 그 결과를 토대로 한국 한자음을 수정한 동국정운이라는 표기법을 고안하기도 했다[4].
- 작곡
- 타구: 격구와 비슷한 채를 사용하지만 말을 타고 하는 격렬한 방식이 아니라 어르신들이 즐겨하는 게이트볼 비슷한 형식이었다고 한다. 사실 세종은 어릴 때부터 운동을 싫어했고 고기를 좋아하다 보니 덩치가 크고 살이 쪄서 과격하게 움직이는 격구는 무리였다.
- 문종
- 군사 연구: 문종이라는 시호에 맞지 않게 무기 및 전술 개량에 많이 공헌했다. 아예 직접 무기를 설계했을 정도.
- 공부
- 국궁
- 서예
- 천문 관측: 문종의 기상 예측은 매우 정확해서 세종이 문종에게 그날의 일기를 자주 물었다고 한다. 그 때문일까? 문종은 나중에 직접 측우기를 설계했다.
- 세조
- 성종
- 매사냥
- 시: 신하들이 지나치게 난리를 쳐서 시를 쓰진 못하고 읽기만 했다.
- 애완동물: 낙타를 들여다 키웠다는 기록도 있고, 연산군이 손을 핥았다며 자신이 키우던 사슴을 걷어차자 크게 역정을 냈다.
- 연산군
- 사냥: 역대 조선의 임금들 중에서도 제일가는 사냥 매니아였다. 사냥을 즐기기 위해 민가와 전답을 밀어 버릴 정도였는데, 그 부작용 때문에 연산군 폐위 이후에 즉위한 조선의 왕들은 사냥을 나갈 때 마다 신하들의 눈치를 보아야 했다.[5]
- 주색
- 춤: 그 솜씨가 매우 뛰어나서 연산군이 처용무를 추며 노래를 부르자 이를 지켜보던 흥청 기녀들이 눈물을 참지 못해 궁궐이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 시: 문학적인 소양이 뛰어나서 시 짓기를 즐겼으며 덕분에 짧은 생애에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 미식 : 실록에 따르면 연산군은 온갖 희귀하고 귀한 음식들을 즐겨 먹었다. 그 중에서도 유독 과일을 좋아했다. 중국에 다녀오는 사신들에게 여지와 용안 등의 열대과일과 중국수박 따위를 얻어오게 할 것을 명했으며, 제주도에는 이미 수확철이 지났음에도 귤과 유감을 바치라고 요구했다. 쟁반에 얼음과 함께 담긴 수정포도(청포도)를 먹은 후 그 맛을 칭송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그 외에 고기는 주로 사슴의 꼬리와 혀를 즐겨먹어서 전국팔도에 명하여 달마다 이를 진상하게 하였다.
- 명종
- 내시 괴롭히기
- 선조
- 서예: 당대 최고의 명필 중 하나로 인정받아서 임진왜란 때 지원 온 명나라 장수들도 선조의 글씨를 탐냈을 정도였다. 본인도 자기 서예솜씨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또한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와 딸 정명공주도 서예에 뛰어났다.
- 광해군
- 궁궐 짓기: 서울의 5대 궁궐 중 3개인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이 광해군의 명으로 지어졌고 지금은 없어진 인경궁도 지었다.
- 미식 : 음식에 까다로웠으며, 특히 잡채를 즐겨 먹었다. 이충은 잡채 만드는 솜씨가 뛰어나 광해군의 총애를 얻어 호조판서의 자리까지 올랐다.[6]
- 효종
- 무예: 왕위에 오른 후에도 무예 연마를 즐겼는데, 첱퇴와 언월도 등의 무거운 병기도 자유자재로 다룰 정도로 힘이 장사였다. 그 탓에 어깨가 너무 넓어진 탓인지 즉위하면서 미리 만들어놓은 관이 맞지 않아서 널빤지를 덧대 넓혀야 했다.
- 현종
- 온천욕: 사실 현종의 온천욕은 취미라기보다는 고질적인 피부병 때문이었다. 현종은 온천행을 다니면서 군사들을 훈련시켰다고 한다.
- 숙종
- 영조
- 독서: 대체로 공부벌레가 되기를 강요받은 조선의 왕들 중에서도 손에 꼽힐만한 학식을 자랑했다. 나이가 들어서는 연륜에 방대한 지식까지 더해져서 말싸움으로는 당할 이가 없어졌다.
- 경연: 조선시대의 왕들은 나이가 들어서는 경연을 슬슬 피하기 시작했으나, 영조는 늙어서도 오히려 경연 자리에서 자신의 지식을 뽐내며 경연관들을 가르치는 것을 즐겼다.
- 소설: 영조는 꼬장꼬장한 이미지와는 반대로 소설 읽는 것을 즐겼는데, 영조는 민간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부터 이미 소설을 탐독했던 것 같다. 영조의 회고에 따르면, 어릴 적에 삼국연의를 읽던 중 관우가 맥성에서 사망하는 대목에 이르자 한 부녀자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 외에도 신하들과 문답을 나눌 때에도 서한연의, 동한연의, 삼국연의 등의 소설의 내용을 언급하기도 했고, 신하들에게 병에 걸렸을 때에는 가만히 누워서 잠만 자기 보다는 차라리 소설이라도 읽는 것이 유익하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7]
- 정조
- 독서
- 경연: 할아버지 영조보다 한 술 더 떴는데, 경연관 뿐만 아니라 조정 대신들까지 끌고와서 직접 강의를 했다.
- 그림
- 음주: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비롯한 정신적 스트레스에 평생을 짓눌려 산 후유증이었는지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희대의 술꾼이었다. 그 자신도 술을 매우 많이 마셨지만, 연회에 참석한 신하들에게도 습관적인 술 강요를 일삼았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하기를, 정조가 거대한 필통에 술을 따라 건네주는 바람에 속으로 나는 죽었다고 복창을 했다고 한다.
- 흡연: 담배가 스트레스를 치유하는 명약이라 믿고 본인도 심한 골초인데다 신하와 백성들에게 흡연을 크게 장려했다.
- 무예: 활 실력은 태조 이성계 이래로 조선의 역대 임금들 중에서도 손꼽힐만한 명사수였고, 협도 등의 크고 아름다운 무기를 잘 다뤘다고 한다.
- 헌종
- 고종
- 커피 음용: 김홍륙 독다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커피 맛의 미묘한 변화까지 인지할 정도.
- 국궁: 황학정을 건립하였다.
- 당구: 선교사에게 배워 즐겨 쳤다고 한다.
- 얼리 어답터: 구한말의 근대화 열풍을 감안하더라도 동양권 군주들 중에서 서양 문물을 상당히 빨리 즐겼다.[8] 대한제국의 재정 문제로 비판받긴 하지만.
- 사진 촬영: 역대 한국 군주 중 최초로 사진을 찍었으며 동시대 신하들은 사진 찍는 걸 악귀가 씌인다고 극혐했지만 그는 사진을 촬영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음에도 개의치 않고 사진 찍는 것을 즐겼다.
- 순종
2.2. 중국
2.2.1. 상나라
2.2.2. 주나라
2.2.3. 춘추전국시대
- 제 환공
- 미식: 측근인 역아의 요리솜씨에 푹 빠져 미식을 즐겼다. 하루는 역아가 바친 요리를 야식으로 먹다가 밤을 지세우는 바람에 다음날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다.
- 초 장왕
- 주색잡기: 초 장왕은 처음 왕위에 오른 후 3년 동안 파티에 빠져 살았으나 이는 사실 충신과 간신을 헤아리기 위한 술책이었고, 친정을 시작하자 초나라의 대표적인 명군으로 부상했다. 여기서 불비불명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했다.[9]
- 위 의공
- 학 사육: 거대한 새장을 만들어 학들을 모아서 길렀는데 여기에 너무도 열중한 나머지 학들에게 녹봉과 벼슬까지 내리는 행태를 보여 국인들의 반감을 샀다. 적족이 침략했을 당시에는 병사들조차 "녹봉과 벼슬이 있는 학들에게 싸우게 하라"고 할 정도로 민심을 잃었다.
- 제 위왕
- 현악기 연주: 슬(瑟)이라는 현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즐겼다.
- 수수께끼: 순우곤과 더불어 수수께끼 놀이로 국정을 의논한 일화가 유명한데, 초 장왕의 일화와 매우 유사하다.
- 주색잡기: 술을 지나치게 좋아했다가 순우곤의 말장난에 휘말려 참교육당한 일화가 전해진다.
- 진 무왕
- 힘겨루기: 진 무왕은 힘이 무척 강한 탓에 평소에 장사들을 좋아하여 그들과 자주 어울렸다. 그러다 하루는 총애하던 장사 맹열과 함께 청동솥인 구정을 들어올리는 내기를 하다가 정강이에 큰 부상을 입어 곧 죽고 말았다.
- 조 무령왕
- 전투 지휘: 조 무령왕은 전국시대의 군주들 중에서도 드물게도 몸소 전장에 나가서 군대를 지휘하는 것을 즐겼으며 실제로 북방의 이민족들을 복속시키는 등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말년에는 외정에 집중하기 위해 스스로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기까지 했다.[10]
- 조 혜문왕
2.2.4. 진나라
- 진 시황제
- 업무: 날마다 읽어야 할 죽간 문서의 양을 저울로 달아 정해두고 밤낮없이 업무를 보는 등 일 중독에 가까운 행태를 보였다. 그날에 정해진 양의 업무를 끝내기 전에는 쉬지도 않았다고 한다.
- 방술: 불로장생에 대한 집착 때문에 방술에 심취하여 많은 방술사들을 고용했다. 방술사 서복이 불로초를 구해오겠다며 시황제를 물먹인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유명한 일화이다. 당시 방술사들이 진시황의 영생을 위해 처방했던 것이 바로 수은을 구워 만든 단약이었는데, 이것이 도리어 시황제의 수명을 단축시켰던 것으로 생각된다.
- 진 이세황제
- 주색잡기: 일 중독자 수준이었던 아버지 시황제와는 달리 주색잡기와 오락을 광적으로 즐겼다.
2.2.5. 한나라
- 한 고제
- 음주: 건달처럼 보냈던 젊은 시절에는 음주를 즐기다 못해 외상술도 잔뜩 먹었다. 황제가 된 후에도 옛 공신들과 술을 마시는 것을 좋아했는데, 황제와 공신들이 모두 건달패 출신들이다보니 한 공신은 만취한 나머지 유방 앞에서 궁궐 기둥을 칼로 내려치기까지 했다.
- 여색: 본래 군벌 시절부터 여색을 즐기기로 이름 높았다.[12] 말년에는 정실인 여후 대신 척부인을 지나치게 총애하여 주창이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떡을 치다가 걸려서 망신을 당하기도 했고 심지어 제위도 척부인 소생의 유여의에게 물려줄 생각까지 했다.
- 남색: 말년에는 여색 뿐 아니라 남색도 즐겨서 적이라는 이름의 소년을 총애했다.
- 노래: 영포의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오던 중 패현에 이르러 고향 사람들과 연회를 즐겼는데, 이때 몸소 축을 연주하며 노래를 지어 불렀다. 당시 그가 불렀던 노래의 가사가 "대풍가"라는 제목으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 한 혜제
- 음주: 본래는 술을 즐기는 성격이 아니었던 것을 보이나, 어머니인 여태후가 척부인에게 저지른 만행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술독에 빠져 살았다.
- 남색: 굉이라는 이름의 소년을 총애하였는데, 그는 혜제가 요절한 후 그 무덤을 지키는 직책까지 맡았다. 이처럼 혜제가 미소년들을 좋아했기 때문에 주변에서 그를 모시던 낭과 시중들은 깃털로 장식한 모자를 쓰고 얼굴에 분칠을 하며 소년처럼 보이려고 기를 썼다고 한다.
- 한 문제
- 남색: 등통이라는 뱃사공 출신 사내를 총애하여 그에게 화폐 주조권을 줄 정도였다.
- 한 경제
- 쌍륙: 태자 시절에 쌍륙 놀이를 지나치게 좋아한 나머지 함께 게임을 즐기던 종친인 오왕 유비의 아들에게 보드판을 집어 던져 살해하는 대형사고를 쳤다. 이것이 훗날 오초칠국의 난의 한 원인이 되고 만다.
- 한 무제
- 유교: 유학공부에 매우 심취하여 황로학을 신봉하던 할머니 두태후와 큰 갈등을 빚었다. 친정을 하게 된 후에는 유학자들을 대거 등용했다.
- 여색: 화려한 여성편력으로 유명하다. 특히 위자부는 미모로 총애를 받아 천한 출신임에도 황후의 자리까지 올랐으며, 환갑을 넘긴 말년에도 구익부인 조씨를 총애하여 슬하에 어린 아들 여불릉을 두었다. 다만 무제와 로맨스를 즐기던 여인들은 대체로 말년이 좋지 않았다.
- 음악: 평소에 음악과 노래를 감상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덕분에 음악가 이연년이 무제에게 큰 총애를 받았다.
- 한 원제
- 유교: 유학공부에 지나치게 심취해서 현실감각이 떨어졌다는 평을 들었다. 그 아버지인 한 선제조차 이를 걱정하여 그를 폐태자할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 한 성제
- 여색: 조비연와 그 여동생인 조합덕을 매우 총애하였는데, 그 도가 지나쳐서 몸이 축나는 바람에 나이 마흔이 되기도 전에 사실상 병신이 되어 코와 입이 비뚤어졌고 결국 침실에서 복상사에 가까운 최후를 맞았다.
- 한 애제
- 남색: 미청년 동현을 동성연인으로 삼아 몹시 총애했다. 나중에는 술김에 동현에게 제위를 물려주겠다는 망언까지 했다.
- 광무제
- 도참: 도참사상에 지나치게 심취하여 이를 따르지 않는 관료들과 유학자들을 탄압하기도 했다.
- 후한 영제
2.2.6. 삼국
- 조조
- 독서: 학식이 풍부하여 유교 경전에 밝았다. 병법서 또한 즐겨 읽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 손자병법》을 매우 좋아하여 직접 주석을 달아 《손자약해》를 저술하기까지 했다.[14]
- 문학: 아들인 조비 · 조식과 더불어 삼부자가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기에 이른바 삼조라고 불린다. 조조가 지은 시 가운데 《 단가행》이 특히 그의 대표적인 명작으로 손꼽힌다.
- 서예
- 음주
- 방술
- 여색: 첩을 매우 많이 두었으며 특히 유부녀를 밝히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 조비
- 탄기
- 시 짓기
- 문학 평론
- 미식
- 조예
- 궁궐 짓기
- 손권
- 독서: 무장 가문의 후예일 뿐 아니라 그 자신의 무용도 뛰어났지만 공부도 좋아했다. 스스로 어릴적부터 독서를 많이 해서 읽어보지 않은 것은 《주역》뿐이었고, 군주가 된 후에도 사서와 병서들도 읽어 지식인임을 자부할 정도였다. 자신이 독서를 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배움을 중히 여기지 않았던 여몽과 장흠을 불러 공부를 중요시한 공자, 광무제, 조조를 예시로 들며 공부를 촉구했을 정도였다.
- 무예: 손견과 손책의 핏줄 답게 일신의 무용이 매우 뛰어났다. 합비 공방전 당시 장료는 항복한 오나라 장수에게 "자줏빛 수염을 지닌 장수가 잘 싸우던데 그가 누구인가?"라 묻자, 그 장수가 바로 손권이라고 답했다는 일화도 있다.
- 사냥: 특히 호랑이를 잡는 것을 즐겼다. 직접 말을 타고 호랑이에게 돌진하여 활을 쏘기도 했고, 쌍극을 던져 달려드는 호랑이를 잡기도 했으며, 심지어 호랑이를 잡을 수 있도록 덮개가 없는 사냥용 수레를 따로 고안하기도 했다.
- 음주: 삼국지 최고의 주당. 술을 매우 좋아했을 뿐 아니라 주사가 매우 심했으며 남에게 술을 강요하는 습관도 있었다. 손권 자신도 이를 염려해서 자신이 술에 취했을 때는 누군가를 죽이라고 명령해도 절대 따르면 안 된다고 일러두었을 정도. 실제로 장소는 고령의 나이임에도 손권의 강요 때문에 억지로 술을 마셔야 했고, 우번 또한 만취한 손권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죽을 뻔 했다.
- 손호
- 주색잡기: 할아버지도 술 좋아했지만 손호는 더 심했는지 손호에게 손권 좀 본받으라는 상소가 올라왔다.
- 유비
- 사냥
- 노래
- 의복: 젊어서부터 아름다운 의복을 좋아했다고 한다.
- 독서: 사서와 유교경전 뿐 아니라 병법서와 법가서에도 큰 관심을 지녔다. 죽기 직전에 유조를 남겨 유선에게 독서를 권하였는데 여기서 유비가 평소 즐겨 읽었던 것으로 보이는 책들을 살펴볼 수 있다.
2.2.7. 서진
2.2.8. 남북조시대
2.2.8.1. 북조
- 석륵
- 역사 공부: 비록 본인은 글을 읽지 못했으나, 학자들이 역사서를 읽어주는 것을 듣는 것을 몹시 좋아했다고 한다.
- 석호
- 사격 : 어릴적부터 새총을 매우 잘 쏘았는데 여기에 너무 심취해서 진중에서 마구 새총을 난사하고 다녀 석륵에게 꾸지람을 들었다. 장성하고 나서는 활솜씨가 매우 빼어났는데, 제위에 오르고 나이도 장년에 이르자 몸이 매우 비대해졌음에도 그 자리에서 사방으로 활을 쏘아 모두 명중시킬 졍도였다.
- 주색
- 여색: 오호십육국시대의 막장군주들 중에서도 여색을 밝히기로는 제일이었던 사람으로, 민간인들 중에서도 수천에서 1만 정도에 이르는 미녀들을 징발하여 궁녀로 들였을 정도였다.
- 부생
- 주색
- 살인
- 부견
- 공부
- 유람
- 사냥: 한때는 며칠을 사냥터에서 보낼 정도로 사냥을 광적으로 좋아했으나 훗날 아랫사람들의 권유로 사냥을 완전히 끊어버렸다.
- 여색, 남색: 전연을 멸망시킨 후 전연의 황족이었던 미소년 모용충과 그 누나인 미소녀 청하공주를 총애하여 후궁에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 탁발규
- 마약: 마약의 일종인 한식산을 즐겼고, 덕분에 말년에는 건강과 정신이 완전히 망가졌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한식산은 심신을 안정시켜주는 보약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심지어 당시는 한식산의 전성기인 위진남북조 시대라 한식산 문제는 북조보다 남조에서 더 심했다.
2.2.8.2. 남조
- 전폐제
- 독서: 폭군이지만 어릴때부터 독서를 좋아해 아는게 많고 글도 잘 썼다.
- 도굴: 자기 아버지 능을 파헤치려다 그만두고 계모의 능에서 부장품을 챙겼다.
- 강간
- 근친상간: 친누나 산음공주와 근친상간을 했다는 썰은 널리 알려져 있으며, 고모부를 죽이고 고모를 겁탈했다.
- 근친능욕: 황제의 권위를 빌려 숙부들을 능욕하길 좋아했다. 어느 정도냐면 맘에 안 드는 숙부들을 잡아와서 발가벗기고 가두고 곤장때리고 여물을 먹게 하는 등 온갖 능욕을 가했다. 그 절정은 자기 첩들 중 하나가 임신하자 기뻐하며 기념으로 숙부들 중 가장 맘에 안들던 유욱을 잡아먹으려다가 다른 숙부인 유휴인이 말려서 나중에 잡아먹기로 보류했다.[15]
- 후폐제
- 공예: 어려서부터 모자나 의복 만들기를 잘 했으며, 직접 연장을 만들고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 토막 살인: 문제는 그 연장으로 사람을 토막내 죽이는 것을 즐겼다.
- 양 무제
- 불교: 남조의 군주들 가운데 최고의 명군으로 손꼽히지만, 불교에 지나치게 심취한 탓에 말년에 나라를 망쳤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2.2.9. 수나라
- 수양제
- 주색
- 유람
- 독서: 의외의 사실이지만 전용 독서실까지 마련할 정도로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2.2.10. 당나라
- 당현종
- 격구
- 음악
- 시 짓기
2.2.11. 오대십국시대
- 후당
- 이존욱
- 연극배우 코스프레: 연극배우 놀이를 너무 좋아해 스스로 '이천하' 라는 예명까지 만들어가며 놀았다. 문제는 당시 연극배우가 천하게 여겨지는 직종인데다 적당히도 아니고 나랏일을 제쳐두다시피하며 놀았다.
- 남당
- 이욱
- 시를 비롯한 문학: 아래의 송휘종과 마찬가지로 예술을 즐겼다. 그리고 나라를 망친 것도 같다. 다만 이욱은 송휘종과는 달리 자기 예술을 위해 나라를 거덜낸게 아니라 그냥 나랏일만 못한 것으로 때문에 그가 죽자 옛 백성들이 슬퍼했다고 하니 송휘종보단 나았다.
2.2.12. 송나라
- 송태조
- 무술
- 축국: 축국은 현대 축구와는 다른 스포츠다.
- 송태종
- 송휘종
- 서예, 그림 그리기, 기암괴석 수집 등: 덕분에 나라를 아주 작살내었다. 그래서 왕들의 취미의 안 좋은 예시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황제로서가 아닌 예술가로서는 실력이 굉장히 출중한 편이었다.
2.2.13. 금나라
2.2.14. 명나라
이 분야의 끝판왕. 특히 명 4대 암군의 취미는 취미를 넘어 나라를 망하는데 큰 일조를 했다. 명 4대 암군 참조.- 선종 선덕제
- 사냥: 이 취미 때문에 피해를 입은 건 다름아닌 조선. 매를 비롯한 각종 동물들을 하도 조공으로 요구했기 때문이라고.
- 두부: 두부를 엄청 좋아했다. 특히 조선식 두부에 크게 꽂혀 세종대왕에 조공으로 두부를 주문하기도 했다.
- 그림 그리기
- 귀뚜라미 싸움: 귀뚜라미 싸움 붙이기는 전통적으로 지배층이나 서민층을 막론하고 중국인들의 놀이 중 하나였다.
- 무종 정덕제
- 양성애
- 아바타 놀이: 개중에는 정덕제 본인이 주수 장군을 자처하여 본인에게 대장군직과 여러 작위를 하사하는 원맨쇼를 벌인 것도 있다.
- 불꽃놀이: 하도 즐기는 나머지 실수로 궁궐의 집무실을 태워먹은 적이 있었는데, 정덕제가 한 말이 걸작이다. "멋진 불꽃이었다."
- 세종 가정제
- 호색
- 연단술
- 신종 만력제
- 무덤 건축
- 주색
- 궁녀와 환관 학대하기
- 희종 천계제
- 목공예: 목수로서의 솜씨가 아주 뛰어났다. 문제는 그가 황제로서는 제대로 일을 안 했음에도 목수로서의 자질만 뛰어났다는 것이다.
2.2.15. 청나라
- 성조 강희제
- 세종 옹정제
- 고종 건륭제
- 시 쓰기: 시 쓰기 자체를 즐기긴 했지만 정작 작품성은 형편없다고 한다.
- 고서화 수집
- 신하의 집에 대뜸 쳐들어가서 신하의 식구들이 깜짝 놀라서 난리치는 거 구경하기
2.3. 일본[16]
2.3.1. 헤이안 시대
2.3.2. 가마쿠라 시대
2.3.3. 무로마치 시대
- 아시카가 요시마사
- 건축
- 다도
- 정원 조경
- 아시카가 요시테루
- 궁도
- 다도
- 극한의 검술: 다른 쇼군들과 비교해도 특이할 정도. "검호 쇼군"이란 별칭을 지닐 정도다.
일본판 송 휘종이다. 정치적으론 무능했지만 예술적으로 뛰어났던 쇼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2.3.4. 센고쿠 시대
- 고나라 덴노
- 쇼기(?): 확실히 쇼기가 취미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쇼기의 룰을 바꾸어 현대 쇼기의 룰을 완성시킨 인물이다.
2.3.5.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2.3.6. 에도 시대
- 도쿠가와 츠나요시
- 애완동물 사육: 특히 개.
- 도쿠가와 이에모치
- 단 간식들
- 도쿠가와 요시노부
- 산책, 사냥, 자전거 타기, 사진찍기
- 고메이 덴노
- 서양 시계 등 서양식 물품: 그는 생전 서양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끝까지 같고 있었으나 서양 시계처럼 실생활적으로 편리한 서양 물품 정도는 즐겼다.
2.3.7. 근현대
- 메이지 덴노
- 미식: 젊은 시절엔 채식만 했다가 중년기 들어 실생활에서까지 서양 문물을 본격적으로 받으면서 육류 위주의 식생활을 하였다. 화과자와 양과자 등의 군것질도 즐겼다.
- 쇼와 덴노
- 생물학: 2차 대전 이후에 실권을 완전히 잃고 상징적 존재가 된 후에는 생물학 연구에 몰두했다.
- TV 시청: 패전 이후 상징적인 존재로 전락한 후에는 TV 시청을 즐겼다. TV를 어떤 채널을 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TV 채널을 여러 개 보고 있으나 자신을 어떤 채널을 보는지 얘기하면 방송사들의 경쟁이 심해질 것 같아 얘기하지 않겠다."는 농담은 덤.
2.4. 몽골
2.4.1. 몽골 제국
- 쿠툴라 칸[18]
- 대식: 하루에 양 한마리를 먹었다고 한다.
- 음주
- 칭기즈 칸
- 사냥: 스스로도 사냥은 어린 시절부터 해온 일이라 칸이 되어서도 끊을 수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결국 노년에 사냥을 하던 중 갑자기 튀어나온 야생마 때문에 말이 놀라는 바람에 낙마하여 큰 부상을 입었고 이것이 그의 명을 재촉했다. 궁핍했던 어린 시절에 사냥은 단순한 취미가 아닌 생존투쟁의 일환이었지만, 그것이 몸에 배어버린 듯 하다.
- 오고타이 칸
- 음주: 중세 몽골인들에게 음주는 매우 흔한 취미였다.[19] 그러나 오고타이 칸은 술을 광적으로 좋아했던 몽골인들의 눈으로 보기에도 심각한 알코올 중독자였다. 그의 형인 차가타이는 동생에게 술을 줄이라며 은으로 만든 잔으로 술을 하루에 한 잔만 마실 것을 요구했는데, 오고타이는 그 술잔을 망치로 넓게 펴서 양을 늘릴 정도로 술을 퍼 마셨다. 그의 사인은 지나친 음주로 인한 술병으로 여겨진다.[20]
- 뭉케 칸
- 외국어 공부: 어머니인 소르칵타니의 교육열 덕분에 일찍이 페르시아어를 포함한 다양한 외국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 다만 중국어와 한문에는 능숙하지 못했던 듯 싶다. 이는 그의 동생인 쿠빌라이 칸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 쿠빌라이 칸
2.5. 우즈베키스탄
2.5.1. 티무르 제국
2.6. 티베트
2.7. 브루나이
3. 유럽
3.1. 네덜란드
- 빌럼알렉산더르
- 여객기 조종: 2017년 5월 17일에 네덜란드 일간 텔레그라프(Telegraaf)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21년간 왕실업무와는 별도로 한 달에 두 번 부기장으로 KLM 소속 여객기를 몰았다고 밝혔다. KLM 부기장으로 일하며 자신의 신원을 최대한 노출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한다.[23] 원래는 KLM의 자회사인 시티호퍼에서 포거70을 운항했으나 퇴역하며 B737로 면장을 변경했다.
- 셀카 촬영: 워낙에 소탈한 성품이라서, 혼자서 카페에서 커피를 사서 마시거나 산책을 하는 취미가 있는데, 이때 마주치는 사람들과 함께 스마트폰으로 셀카를 찍는 취미가 있다.[24]
3.2. 덴마크
- 프레데리크 7세
- 음주
- 여행: 자국의 이곳저곳을 여행하는 것을 즐겼다.
- 프레데리크 9세
- 문신: 해군으로 복무하던 시절에 몸에 문신을 새겼는데, 마음에 들었는지 가슴팍 외에도 팔뚝을 비롯한 몸 이곳저곳에 문신을 남겼다. 대부분 동양적인 용의 모습을 새긴 것이 특징이었다.
- 레고 조립: 레고의 나라 덴마크의 왕 아니랄까봐 레고 장난감을 조립하는 것을 즐겼는데, 그의 생일에 레고 측에서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움직이는 레고 기차 제품을 진상하자, 이에 무척이나 희희낙락했다는 기록이 있다.
- 프레데리크 10세
- 스포츠: 그 중에서도 마라톤과 철인3종경기를 가장 즐긴다고 한다. 왕세자 시절부터 2018년부터 매년 6월 코펜하겐에서 열리는 로열 런(Royal Run) 마라톤 대회를 직접 주관하고 있으며,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는 조정 경기에 국가대표로 출전했을 정도다.
3.3. 독일
3.3.1. 신성 로마 제국
- 페르디난트 3세
- 작곡
- 레오폴트 1세
- 작곡
- 요제프 1세
- 작곡
- 프란츠 1세
- 여색: 데릴사위 주제에 수많은 여성들과 바람을 피웠다. 자존심 센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륜을 그냥 놔 두었다.
- 자연과학과 문학: 쇤부른 내의 동물원과 식물원 조성은 그의 뜻이었다.
- 음악 감상
- 요제프 2세
- 음악 : 음악을 몹시 좋아해서 오페라를 자주 감상했으며, 직접 악기를 연주하거나 작곡을 하기도 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에게 몸소 독일어로 된 오페라의 제작을 주문했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후궁으로부터의 도피》였다.[25]
3.3.2. 프로이센 왕국
- 프리드리히 1세
- 예술
- 문학
- 작품 수집
-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 술, 담배
- 군대 사열: 그는 군대를 매우 좋아했다. 자기 병사들을 내 새끼라 부르며 좋아했을 정도. 문제는 그렇게나 사랑하는 병사들이라서 손수 잡아팼다.
- 산책: 이유가 간단한데 짠돌이였던 그에게 산책은 돈 안 드는 취미였기 때문. 다만 시민들은 왕의 산책을 싫어했는데 게으름을 싫어한 그는 길을 걷다가 조금이라도 놀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것 같은 사람을 보면 잡아팼다. 사정은 전혀 봐주지 않아서 우체국장은 격무로 인해 잠깐 졸았다가 걸려서 근위병에게 두들겨 맞았다. 특히 성인 남자가 대상일 경우 패고 나서 군입대 할래 일 할래? 라고 물어봤다고(...)
- 가혹행위(?): 나름 명군이었음에도[26] 그의 가족조차 그를 싫어하게 만든 원인. 성격부터가 교양과 거리가 멀어 이사람 저사람 잘 때리는 사람인데다 군대식으로 통치해서 사람들을 거칠게 단련시키는 것을 좋아했다. 게다가 맞으면 맞을수록 강해진다는 괴상한 믿음을 가져서 후계자인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유없이 때렸다. 다른 가족들이라고 전혀 다르지 않아서 딸 빌헬미나는 타국 대사들이 보는 앞에서 죽도록 얻어맞았고 그나마도 사람들이 구해줘서 살 수 있었는데 정작 빌헬미너 본인은 저런 인간의 자식으로 사느니 죽는게 나은데 왜 구해준거냐고 화를 냈고 하는 짓이 이 따위다 보니 모두들 이해하며 동정했을 지경이었다. 가족에게도 이 따위니 가족들의 증오를 받아서 그가 죽자 가족들은 모두 기뻐했고 특히 빌헬미나는 아얘 연회까지 열었다(...) 장례식 역시도 프리드리히 대왕 빼고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는데 심지어 그도 후계자니까 어쩔 수 없이 참석한 것이었다(...)
- 프리드리히 대왕
- 글쓰기 : 어릴 적부터 문학을 탐독했던 만큼 글쓰기를 좋아했고 볼테르 등의 지식인들과 서신을 교류하는 일도 즐겨했다. 자신의 정치사상을 담은 논문을 집필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계몽주의에 입각하여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적 사상을 비판한 《반마키아벨리론》이 대표작이다. 다만 어릴적부터 프랑스어를 즐겨했기 때문에 글도 대부분 프랑스어로 쓴 반면에 정작 독일어 글쓰기에는 서툴렀다.
- 플루트 연주 : 프리드리히 2세에게 있어 플루트 연주는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삶의 일부였다. 프리드리히가 왕위에 오른 이래로 새벽같이 기상하자마자 가장 먼저 하던 일이 바로 플루트 연습이었으며, 연습을 마친 후에야 아침 식사를 먹었다. 저녘 식사를 먹은 후에도 플루트를 연주했는데 이때는 주변 사람들을 불러 연주를 들려주는 등 일종의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심지어 전쟁터에 나가 있을 때에도 시간적인 여유만 있다면 저녘마다 막사에서 플루트를 연주했다. 이런 프리드리히의 플루트 사랑은 그가 노환으로 치아가 대부분 빠질때까지 계속되었다.
- 커피 : 커피를 매우 좋아해서 하루종일 계속해서 들이마셨다. 아침 식사 중에도 커피는 반드시 마셨고, 오전업무 중에도 7~8잔은 마셨다. 오후에도 한 포트 이상의 커피를 마셨다. 당시 프리드리히가 마신 커피는 샴페인으로 끓이고 겨자를 넣어 맛을 낸 것이라 오늘날의 커피와는 맛이 꽤 달랐다.
- 빌헬름 1세
- 군사훈련: 즉위 전 왕자~왕세제 시절 오랫동안 군 장교였던지라 휴가까지 반납하고 군사훈련을 즐겼다. 외아들 프리드리히 3세가 어린 시절 그에게 군대식 경례와 보고를 따라하는 시늉을 하자 엄청 기뻐했을 정도.
- 프리드리히 3세
- 흡연: 문제는 너무 애연가라서 결국 재위 98일만에 흡연으로 인한 후두암으로 56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 빌헬름 2세
- 벌목과 장작 패기: 젊은 시절부터 왕실 사유지에서 매일 나무베는 게 하루일과였다. 그래서 다른 나라 왕실에서는 사냥을 목적으로 동물 관리가 우선이었던 반면, 빌헬름 2세의 사유지를 관리하는 직원들은 베기 적당하면서 손맛 좋은 나무를 구하는 게 일이었다[27]. 이런 취미로 인해 아직 독일 제국의 황제이던 시절에도 국민들에게 열렬한 환호를 받았는데[28], 1918년에 독일이 패망하여 네덜란드로 망명한 뒤에는 그야말로 벌목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수준이 되어서, 수행원들과 네덜란드 현지 공무원들이 '저러다 과로로 쓰러질지도 모른다.'고 걱정할 정도였다. 당시 네덜란드의 여왕인 빌헬미나 여왕이 빌헬름 2세의 망명을 수락하는 대신, 정치 활동을 일절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걸었고, 대부분의 재산이 온전히 남아있어서 따로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평생 약 4만 그루를 벌목한 것으로 추정되며, 망명 후 여생을 보낸 도른 하우스 인근에는 벌목 흔적이 몇 군데 관광지로 남아있다. #
- 목공예: 상술한 벌목 취미와 관련된 취미인데, 하루종일 신나게 베어온 나무들로 각종 공예품을 만들어서 주변인들에게 선물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 흡연, 독서, BDSM
3.3.3. 바이에른 왕국
- 루트비히 2세
- 음악 감상: 바그너 애호가.
- 성 짓기: 링크된 노이슈반슈타인 성 이외에도 몇 개의 성을 추가로 건설할 계획을 세운 바 있다. 하지만 루트비히 2세의 치세는 이미 성이 아무런 군사적 가치도 없어져버린 19세기 말엽이였으며, 따라서 그의 이런 취미는 나라 재정만 까먹는 돈지랄에 불과했다. 결국 국왕의 돈낭비에 단단히 빡친 바이에른의 의회와 귀족들은 루트비히 2세를 폐위하고 정신병원에 처넣어버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처럼 루트비히 2세가 돈을 미친 듯이 퍼부어가며 지은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오늘날에는 매년 130만 명이 찾는 바이에른의 관광 명소가 되어 지역경제에 짭짤한 수익을 가져다주고 있다.
3.4. 스웨덴
- 크리스티나 여왕
- 남장: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요구로 남장을 하고 살았는데 그 영향으로 평생 동안 남성복을 즐겨 입었다.
- 공부: 저명한 학자들과 예술가들을 초빙하여 그들의 강연을 듣는 것을 즐겼다. 이때 억지로 데카르트를 불러와 혹사시키는 바람에 그의 수명을 단축시키기도 했다.
- 프레드리크 1세
- 사자 덕후: 좋아하던 사자의 모양을 딴 가죽인형을 주문했다가 실망해서 버리지도 못하고 비싼 가죽값이 아까워 방치해버린 일화는 유명하다.
- 구스타프 5세
- 테니스: 테니스 선수로 유명했다.
3.5. 벨기에
- 레오폴드 2세
- 초콜릿 사랑: 벨기에가 초콜릿 강국으로 발전한 것도 그의 공로가 상당하다. 문제는 그가 수많은 콩고인들을 착취해서 이뤄낸 것이라는 점이다.
- 건설: 벨기에의 수많은 건축물들의 건설을 계획하였다.
- 알베르 1세
- 등산: 등산을 하다 떨어져 사망했다.
3.6. 영국
- 리처드 1세
- 사냥
- 여색: 당시 "왕의 침실에 악마가 깃들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병적인 수준의 색정광으로 악명이 자자했다. 여자 없이는 하루도 살지 못할 정도였다는 말을 들을 만큼 씨를 뿌려댔지만 정작 서자 한 사람을 제외하면 자식을 보지 못했다.
- 문학: 직접 시를 짓고 작곡을 할 정도로 예술과 문학에 대한 소양이 뛰어났다. 이 점에 있어서는 음유시인 같은 면모도 있었다.
- 싸움: 당대 최고의 전사이자 명장으로 이름을 날린 것과는 별개로 싸움 그 자체를 좋아했다. 왕족의 신분을 숨긴 채로 농부들과 싸우다가 칼이 부러지는 바람에 도망치는 등의 낭패를 당하기도 했다. 그에 걸맞게 다양한 무기 사용법을 섭렵해서 검 외에도 전투도끼를 즐겨 썼고 쇠뇌를 발사하는 솜씨도 뛰어났다.[31]
- 유머: 평소에 농담을 즐기는 유머러스한 성격으로 주변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 사치: 예술적 심미안이 높은 까닭이었는지 사치품과 화려한 옷으로 잔뜩 치장하는 것을 즐겼다.
- 에드워드 2세
- 스포츠: 유약한 이미지와는 달리 아버지를 빼닮아서 당당한 체격에 승마와 수영을 즐겼고 실력도 뛰어났다. 다만 당시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매사냥은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 예술: 시와 연극을 좋아했다.
- 노동: 노동자들을 비롯한 하층민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으며 도랑 파기와 지붕 잇기 등을 즐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 헨리 7세
- 절약: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지만 절약 자체를 즐겼다.
- 조지 5세
- 우표 수집: 왕세자 시절에 보좌관이 아침에 출근해서 농담 삼아 "전하, 제가 오늘 신문을 보니까 어떤 바보멍청이가 우표 한장에 수백 파운드나 되는 돈을 썼다는 기사가 다 실렸더군요."라고 말을 건네자, "내가 바로 그 바보멍청이일세."라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조지 5세의 우표 컬렉션은 현재까지 영국 왕실에 전해져오고 있다.
- 에드워드 8세
- 여색: 왕세자 시절 바람둥이로 유명했다.
- 패션 덕후: 현대 양복 스타일 변화에 상당한 기여를 한 인물이다. 그의 패션 스타일은 국적과 인종을 가리지 않아서 아메리카 원주민 전통 복장과 일본 전통의상도 무리없이 소화했다.
- 조지 6세
- 흡연: 2차대전으로 급박한 국내 상황에 대한 스트레스로 흡연을 즐겨서 환갑도 못 넘기고 56세에 폐암으로 사망했다.
- 엘리자베스 2세
- 사진 촬영: 가족들을 포함해서 주변 사람들이나 동물 등 피사체를 가리지 않고 사진 찍는 행위 그 자체를 즐긴다고 한다. 다만 엘리자베스 2세가 촬영한 사진은 대부분은 혼자서만 간직할 뿐 언론에 공개한 적은 없다. 엘리자베스가 촬영한 필립, 찰스, 마거릿에 대한 사진과 영상이 일부는 인터넷에 돌아다니고 있다.
3.7. 오스트리아
- 프란츠 1세
- 작곡
- 페르디난트 1세
- 살구 페스트리: 문제는 그가 수확철이 아닐 때도 살구 페스트리를 요구해 하인들의 고충이 심했다고 한다.
3.8. 프랑스
- 루이 6세
- 대식 : 음식을 많이 먹는 것을 즐겨서 나이를 먹을수록 살이 쪘고 결국 이질로 사망했다. 젊은 시절에는 용감하여 전사왕이라 불렸지만 말년에는 비만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 필리프 2세
- 여색 : 라이벌이었던 리처드 1세 만큼은 아니었지만 생전에 여색을 밝히기로 유명했다. 생전에 많은 여인들과 염문을 뿌렸고, 특히 세 번째 왕비인 아녜스를 두고 "왕국의 절반을 잃을지언정 아녜스를 잃을 수 없다"라는 말을 남길 정도였다.
- 루이 9세
- 종교 : 기독교 신앙이 매우 독실한 것으로 유명하여 국왕으로서는 드물게도 사후에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신앙심 뿐 아니라 국왕으로서의 능력도 뛰어나 성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에 걸맞게 십자군에도 대단한 열정을 쏟아 제7차 십자군 전쟁과 제8차 십자군 전쟁을 모두 주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튀니지에서 병사했다.
- 프랑수아 1세
- 레슬링 : 그 자신이 2m에 육박하는 거구의 장신인데다가 힘도 장사였고 어릴적부터 브르타뉴의 레슬링 선수들로부터 단련을 받았기에 상당한 실력자였다. 마찬가지로 큰 체구에 스포츠맨이었던 잉글랜드의 헨리 8세와 레슬링 시합을 벌였을 때는 순식간에 완승을 거두었다.
- 예술 : 굉장한 예술 애호가로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물을 프랑스에 도입하여 프랑스 문화의 수준을 크게 끌어 올렸다. 특히 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존경하여 그를 프랑스로 초빙하였으며 그가 편안하게 말년을 보낼 수 있도록 저택을 마련해주기까지 했다.
- 앙리 2세
- 마상창시합 : 스포츠와 마상창시합을 즐겨했기에 "기사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러나 이것이 화근이 되어 직접 마상창시합을 즐기던 중 눈에 랜스 파편이 박히는 사고를 당해 죽고 말았다.
- 앙리 4세
- 여색 : 이른바 "오입쟁이(Le vert galant)"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여색을 밝힌 희대의 호색한이었다. 일생동안 사귄 정부만 50명에 달할 정도였다. 말년에는 사랑했던 14세 소녀 샤를로트 드 몽모랑시를 자신의 봉신이자 당질인 콩데 대공 앙리 2세와 위장결혼시킨 후 그녀를 차지하려는 음모를 꾸몄지만, 콩데 대공 앙리가 샤를로트를 데리고 그대로 네덜란드로 도주하는 사건이 일어나 큰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때문에 성직자들은 앙리 4세를 싫어했지만, 당시 프랑스의 대중들은 도리어 국왕의 호색한 기질을 호탕하다고 생각하며 좋아했다고 한다.[36]
- 루이 14세
- 발레 : 어린 시절에 발레를 굉장히 즐겼으며 그 실력도 대단해서 사람들 앞에서 직접 발레 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30세에 접어들 무렵 몸이 예전의 날렵함을 잃은 데다가 자기 별명이 발레왕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직접 춤을 추는 것을 그만두었다. 루이 14세가 발레에 몰두한 것은 모후인 안 도트리슈와 재상 마자랭에게 눌려 국정을 돌볼 권한을 갖지 못한 허수아비 신세에서 오는 울분을 풀기 위한 것이었다고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37] 실제로 루이 14세가 태양신의 복장을 갖추고 발레를 하자 주변 사람들이 그 화려함에 압도되었다는 일화도 이를 방증한다.
- 음악 : 음악 감상도 매우 즐겼는데, 이 때문에 궁정 음악가 장바티스트 륄리를 매우 총애했다. 륄리는 루이 14세를 위해 작곡을 했을 뿐 아니라 무용가로서 루이 14세의 발레 공연을 연출하고 안무를 짜는 일도 도맡았다.
- 사냥 : 늙어서 말을 탈 수 없게 되자 마차를 타고 사슴을 쫓아다녔다.
- 먹방 : 루이 14세는 평소에도 엄청난 대식가이기도 했지만, 특히 일요일마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만찬을 즐기는 모습을 공개한 것으로 유명하다. 프랑스 백성들은 복장만 잘 갖추면 신분과 상관없이 얼마든지 궁전에 와서 루이 14세의 화려한 공개 먹방 쇼를 감상할 수 있었다. 이때 국왕의 삶은 달걀 먹는 모습이 굉장히 우아하다고 소문이 나자 일부러 계란을 여러 개 까먹고는 했다고[38].
- 고양이 죽이기 : 고양이를 굉장히 싫어했는지 전국의 고양이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궁전 내부에 있는 화로에 고양이들을 마구 집어던져 불태워 죽이는 것을 즐겼다. 그러나 대신들이 이딴 미친 짓거리는 그만하라며 강력하게 압박을 가한 탓에 나중에는 죄책감을 가지고 그만 두었다고. 반대로 개는 굉장히 좋아해서 본인이 애완견들을 많이 키우고 댕겼다.[39]
- 루이 15세
- 여색: 애첩들과의 스캔들로 유명하다.
- 커피: 하인들을 배려해서 하인들이 깨기 전에 손수 커피를 타 마셨다.
- 루이 16세
- 자물쇠와 태엽시계 제작 : 왕에게는 영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취미지만,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자물쇠와 태엽시계는 최고 기술력의 상징이었다. 이는 그만큼 루이 16세가 기계와 과학기술에 큰 관심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허나 이런 취미는 앙리 4세의 호색을 긍정적으로 보는 여론도 있듯이 남자답지 못한 취미로 여겨져 평소의 낮은 리더쉽과 더불어 리더쉽을 더 깎아먹는 원인이 되었다.
- 과학기술: 단두대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그 칼날을 반월형에서 비스듬한 모양으로 개량하여 깔끔하고 고통없는 즉결처형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정작 본인이 단두대로 들어갈 지는 몰랐겠지만.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체스 : 일생동안 체스를 매우 즐겼다. 공격에만 치중하는 스타일을 고집하느라 실력은 아마추어 급에 머물렀지만,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말년을 보낼 때에도 소일거리로 홀로 체스 공부를 했을 만큼 체스 그 자체를 즐겼다.
- 문학 : 괴테의 소설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매우 좋아하여 전쟁터에서도 가지고 다니며 틈틈이 읽었다. 소설을 워낙 좋아하다 보니 직접 《클리송과 외제니》라는 제목의 연애소설을 쓰기도 했다.
- 수학, 과학 : 높은 수준의 수학 실력을 요구하는 포병장교 출신 답게 수학과 과학에 관심이 깊었고 그 자신도 전문적인 수준의 지식을 지니고 있어 이 방면에 조예가 깊었다. 과학자들과 수학자들을 모아 학술지를 만들거나 직접 그들의 저서에 주석을 달 정도였다.
- 루이 18세
- 대식: 원래부터 대식가였지만 망명생활에 대한 스트레스로 대식을 더 즐겨 비만이 되었다.
3.9. 스페인
3.10. 포르투갈
3.11. 이탈리아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 동전 수집
3.12. 그리스
3.12.1. 헬레니즘 제국
- 필리포스 2세
- 음주 : 연회에서 만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곤 했다. 연회장에서 아들인 알렉산드로스와 언쟁을 벌일 때에도 술에 너무 취한 탓인지 넘어지고 말았는데, 이에 아들이 자신을 조롱하자 격노하여 그를 잠시동안 국외로 추방시키기도 했다.
- 남색 : 당시의 그리스인들이 흔히 그랬듯이 양성애를 즐겼으며 남자 애인을 따로 두었다. 특히 파우사니아스를 총애했으나 후에 그와 사이가 멀어졌고, 결국 앙심을 품은 파우사니아스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 알렉산드로스 대왕
- 독서: 어릴적부터 호메로스의 《 일리아스》를 좋아하여 머리맡에 두고 자거나 전쟁터에서도 지니고 다녔다. 따로 기록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키루스 2세를 매우 존경한 것으로 보아 크세노폰의 《 키루스의 교육》도 읽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 음주: 즉위 초에는 상당히 금욕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나이가 들수록 과로로 피폐해진 심신을 달래고 싶었는지 점차 술을 탐닉하는 모습을 보였다. 만취한 상태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용사이자 친우였던 클레이토스와 언쟁을 벌이다가 격분하여 그를 살해하는 사고를 치기도 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열병으로 쓰러져 요절하기 직전까지도 과음을 즐겼다.
- 양성애: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마냥 성생활이 방탕하지는 않았다. 페르시아 원정 중에는 고관들이 자신에게 잘 보이려고 미소년들을 바치자 자신을 뭘로 보는 거냐고 노발대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그리스 사람들이 그랬던 것 처럼 동성 애인들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절친이었던 헤파이스티온과 페르시아 출신의 환관 바고아스 등은 알렉산드로스의 동성 애인으로 추측된다.[40]
3.12.2. 근현대
- 콘스탄티노스 2세
- 스포츠: 1960 로마 올림픽 요트 종목 금메달리스트.
3.13. 러시아
- 이반 4세
- 독서: 미치광이 폭군으로 유명한 인물이지만, 총명한 두뇌를 타고난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글을 일찍 깨우쳤고 책을 읽는 것 또한 무척 좋아했다. 다량의 독서로부터 얻은 방대한 지식과 영감은 이반 4세의 국정운영에 큰 영향을 끼쳤다. 책을 수집하는 것도 무척 좋아해서 이반 4세의 도서관에는 온갖 고서가 가득했다. 또한 인쇄소를 건설하여 책과 문자의 보급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
- 표트르 1세
- 음주: 지독한 술꾼이라 죽기 직전에 요로결석으로 오줌을 누지 못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술을 퍼마셨다.
- 병정놀이: 서구의 군사기술에 관심이 깊었기에 어릴적부터 또래의 친구들을 모아 편을 나누고 모의전투를 하는 병정놀이를 즐겼다. 그러나 병사들의 총기에 실탄을 장전하고 전술훈련을 하는 바람에 첫 전투에서 20여 명이 살상되기도 했다. 이렇게 공을 들여 키운 부대가 훗날 러시아 최초의 근대식 부대인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의 시초가 되었다.
- 표트르 3세
- 장난감 기차: 장난감 기차를 매우 좋아했다.
- 병정놀이 및 군 사열: 외할아버지 표트르 1세 못지않게 매우 좋아했다. 이는 친프로이센 성향 때문에 프로이센식 군 사열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 예카테리나 2세
- 펜팔 : 생전에 몽테스키외와 볼테르 등의 계몽주의 지식인들과 서신을 주고 받는 것을 굉장히 즐겼다.
- 독서: 독일에서 러시아로 시집온 탓에 러시아의 언어와 문화를 익히기 위해 많은 공부를 했고, 즉위 이후에도 계몽주의 서적을 즐겨 읽었다.
- 예술품 수집
- 남색: 몇 년 주기로 애인을 갈아 치울 정도로 잘생긴 남자들을 좋아했다. 60세를 넘긴 고령의 나이에도 많은 정부를 두었다.
- 파벨 1세
- 군대 사열 : 병사들에게 프로이센풍 제복을 입히고 행진시킨 후 이를 관람하는 것을 즐겼다.[41]
- 알렉산드르 1세
- 니콜라이 1세
- 독서: 특히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안티팬으로 유명했다.
- 공연 관람
- 알렉산드르 2세
- 사냥: 소수의 수행원들만을 거느리고 숲 속에 들어가 조용히 캠핑을 하며 사냥 여행 하는 것을 즐겼다. 그러나 말년에 그를 향한 암살 시도가 늘어나면서 안전을 위해 결국 사냥을 줄여야만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살당했다.
- 알렉산드르 3세
- 장난: 소박한 성격의 소유자로 여염집 아버지들처럼 어린 자식들과 장난치며 노는 것을 좋아했다. 아이들을 몰래 뒤에서 밀어서 물에 빠뜨리기도 하고, 반대로 자신이 아이들이 양동이로 퍼온 물을 뒤집어 쓰기도 했다.
- 니콜라이 2세
- 사진: 평소에 자신의 일상을 사진으로 찍는 것을 즐겼다. 생전에 촬영된 사진을 보면 차르로서의 위엄은 온데 간데 없이 신하나 가족, 친척들과 어울려서 재미있는 포즈나 익살스런 표정을 취하는 등 21세기 현대인들이 SNS에 올릴 법한 모습을 볼 수 있다.
3.14. 불가리아
- 페르디난트 1세
- 동성 애인과의 남색: 그는 양성애자로 유명했다.
3.15. 헝가리
- 페르디난트 3세
- 작곡
- 레오폴트 1세
- 작곡
- 요제프 1세
- 작곡
- 요제프 2세
- 음악 : 음악을 몹시 좋아해서 오페라를 자주 감상했으며, 직접 악기를 연주하거나 작곡을 하기도 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에게 몸소 독일어로 된 오페라의 제작을 주문했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후궁으로부터의 도피》였다.[43]
- 프란츠 2세
- 작곡
- 페르디난트 1세
- 살구 페스트리: 문제는 그가 수확철이 아닐 때도 살구 페스트리를 요구해 하인들의 고충이 심했다고 한다.
3.16. 보헤미아
- 페르디난트 3세
- 작곡
- 레오폴트 1세
- 작곡
- 요제프 1세
- 작곡
- 요제프 2세
- 음악 : 음악을 몹시 좋아해서 오페라를 자주 감상했으며, 직접 악기를 연주하거나 작곡을 하기도 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에게 몸소 독일어로 된 오페라의 제작을 주문했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후궁으로부터의 도피》였다.[44]
- 프란츠 2세
- 작곡
- 페르디난트 1세
- 살구 페스트리: 문제는 그가 수확철이 아닐 때도 살구 페스트리를 요구해 하인들의 고충이 심했다고 한다.
3.17. 로마
3.17.1. 로마 제국
- 율리우스 카이사르[45]
- 불륜: 유부녀를 탐하는 성벽으로 악명이 높았다. 때문에 개선문을 지날 때 그의 병사들이 장난삼아 "시민들이여, 마누라를 감추어라!"라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 저술: 카이사르는 명장이었을 뿐 아니라 당대의 문장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그가 저술한 《 갈리아 전기》와 《 내전기》 등은 지금도 라틴어 고전의 명작으로 손꼽힌다.
- 티베리우스
- 칼리굴라
- 근친상간: 칼리굴라는 여동생들과 근친상간을 했다는 스캔들이 있었으나 역사적으로 이를 증명할만한 확실한 근거는 없다. 이는 칼리굴라가 즉위한 후 원로원에게 자신의 세 여동생에게 충성서약을 할 것을 강요한 일화에서 비롯된 루머로 생각된다. 다만 칼리굴라가 둘째 여동생인 드루실라를 각별히 사랑했던 것 만큼은 분명하다. 드루실라는 사후에 칼리굴라에 의해 신격화되어 디바 드루실라의 칭호를 받았다.
- 클라우디우스
- 역사 연구: 어렸을적부터 역사학을 좋아했고, 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의 도움으로 당대의 석학이었던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게 역사학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덕분에 제위에 오르기 전에 이미 역사학의 권위자가 되어 에트루리아사 등을 비롯한 여러 역사책을 저술했다.
- 네로
- 그리스 문화 애호: 스포츠, 작가 및 작곡 및 가창 등을 즐겼는데, 가창 실력은 형편없었다고 한다.
- 여색 : 호색한으로 여자를 수차례 갈아 치웠다. 황후인 옥타비아, 포파이아 등은 결국 모두 네로의 변덕으로 인해 죽임을 당했고, 마지막으로 메살리나와 결혼했다.
- 남색 : 그리스 문화를 애호했던 만큼 미소년들을 총애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인 스포루스는 거세를 당한 후 네로와 결혼까지 했다.
- 비텔리우스
- 폭식 : 별명이 로마의 돼지였다. 좋은 집안 출신에 맞지 않게 방종한 성격이라 로마로 귀환한 후에 한 일은 고급 요리를 먹는 것이었다.
- 도미티아누스
- 심심하면 파리 같은 곤충을 잡아오게 해서 철필로 찔러 죽이는게 취미였다고 한다.
- 트라야누스
- 젊은 남성들과 함께 음주: 동성애는 아니라고 한다.
- 하드리아누스
- 사자 사냥
- 전차경주
- 그리스 문화 애호
- 안토니누스 피우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콤모두스
- 검투사: 학문을 사랑했던 아버지 아우렐리우스와는 달리 스포츠와 검투를 광적으로 즐겼다. 비록 폭군에 암군이었으나 천부적인 완력과 무술실력의 소유자였기에 검투사로서의 실력 만큼은 당대에도 일류급으로 인정받았다.
- 엘라가발루스
- 여장: 남성성을 중요시했던 고대 로마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에 파격적이고 용납될 수 없는 취미였다. 후에 엘라가발루스는 자신을 여성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에게는 로마 제국의 절반을 떼어주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 남색: 당대에도 남색을 즐기는 로마인들은 여럿 있었으나, 대부분 그리스 문화의 영향으로 자신보다 연하의 미소년과 사귀는 경우가 절대 다수였다. 그러나 엘라가발루스는 단순히 동성애를 즐기는 차원을 넘어서 그 자신이 바텀 역할을 했기 때문에 로마인들의 혐오를 받았다.
- 호노리우스
- 닭 사육 : 알라리크에게 로마가 대약탈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가 키우던 닭 '로마'가 죽은 줄 알았다가 로마 '시'가 털렸다고 하자 안도했다는 황당한 일화가 있다.
- 테오도시우스 2세
- 그림 그리기
- 필사본 제작
-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 성가 작곡·작사
- 교리 논쟁
3.17.2. 바티칸( 교황)
- 보니파시오 8세
- 미식 : 당시로서는 매우 사치스러운 음식이었던 파스타를 매우 좋아했으며,[46] 파스타 요리 가운데 그의 이름을 딴 것도 있다.
- 비오 2세
- 문학 : 대학생 시절에 인문주의에 심취하여 문학을 익혔다. 교황이 되기 전에도 직접 소설과 희극을 집필했으며, 그 문학적 재능 덕분에 고위층들의 비서와 시인으로 일하기도 했다. 교황이 된 후에도 글쓰기를 즐겼는데, 특히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를 설득하기 위해 몸소 서신을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 알렉산데르 6세
- 여색 : 세속 교황의 대명사답게 사생활이 문란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성욕도 상당했지만 정력도 뛰어났는지 여러 여인들 사이에서 6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을 두었다.[47]
- 율리오 2세
- 미술 : 브라만테,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의 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하고 예술품 수집에 공을 들여 바티칸 미술관을 세운 일화로 유명하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에 성 베드로 성당이 지어졌으며 미켈란젤로에게 천지창조의 제작을 의뢰하였다.
- 전쟁 : 굉장한 전쟁광으로서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몸소 갑옷을 입고 전쟁터에 나서기도 했다. 이 때문 "전사 교황"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 레오 10세
- 사치 : 당대 최고의 명문가였던 메디치 가문 출신이라 금전 감각이 없었다. 당대에 '레오 10세는 3명의 수입분을 혼자 처먹었다. 율리오 2세까지 축적된 재산, 레오 10세 본인의 것, 그리고 다음 교황 것까지 3인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여기에 미식가 기질도 있었고 한 번 사냥이라도 나가면 300명을 대동하고 가서 상이 부러질 정도로 호화로운 연회를 열었다. 결국 그 엄청난 지출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면벌부까지 팔기 시작했고, 이는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었다.
- 자선 : 엄청난 사치와 씀씀이 못지 않게 자선에도 열정적이었다. 자신의 대관식 당시에는 구경꾼들에게도 금화를 퍼주었고, 순례자들에게는 은화를 나눠주었다.
- 동물애호 : 동물을 매우 좋아해서 바티칸 내부에 동물원을 지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포르투갈로부터 선물받은 흰 코끼리를 매우 좋아해서 한니발에서 따온 한노라고 이름을 붙이고 함께 로마 시내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 그레고리오 16세
- 예술품 수집: 예술품을 수집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으며 미술관도 많이 지었다.
- 비오 9세
- 사진: 역대 교황 가운데 최초로 사진을 찍은 인물이며, 그에 걸맞게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는 것 자체를 즐겼다.
- 비오 11세
- 등산 : 교황으로 추대되기 전에는 등산을 광적으로 즐겼다. 30여년 동안에 몬테로사산, 마테호른산, 몽블란산, 프레솔라나산 등 이탈리아에서 험준하기로 이름 높은 여러 산의 정상에 올랐다.
- 비오 12세
- 애완용 새 키우기
- 요한 바오로 2세
- 스키: 스키 타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노환으로 쓰러져서 운동을 못하게 되기 전에는 파파라치들에게 스키타는 모습이 자주 찍히곤 했다. 심지어 교황으로 즉위한지 얼마 안 됐을 시절에는 스키가 타고 싶어서 변장을 하고서 친구들과 몰래 스위스 여행을 갔다가, 그곳의 스키장에서 한 소녀가 자신을 알아본 통에 친구들이 그를 황급히 숨기느라고 진땀을 뺐다는 일화도 있다.
- 베네딕토 16세
- 피아노: 독주회도 가능한 실력. 그의 형이자 마찬가지로 성직자였던 게오르크 라칭거(1924 ~ 2020) 몬시뇰도 교회음악가였다.
- 고양이 사육
- 축구: 하필 후임자도 만만치않은 축빠라서, 2014 브라질 월드컵 당시에는 두 교황들의 모국인 아르헨티나와 독일이 맞붙은 결승전 당시에 한국의 네티즌들 사이에서 이런 짤방이 돌기도 했다(...).
- 프란치스코
3.18. 튀르키예
3.18.1. 오스만 제국
전 세계 역대 군주들 중에서 취미가 가장 화려하기로 유명하다.- 메흐메트 1세
- 사냥[49]
- 씨름
- 메흐메트 2세
- 활쏘기
- 원예: 제3대 킨로스 남작 존 패트릭 더글라스 밸푸어(John Patrick Douglas Balfour, 3rd Baron Kinross) 경의 The Ottoman Centuries: The Rise and Fall of the Turkish Empire 출처. 여담이지만 자신이 정성들여 기른 오이가 사라지자 격노해 정원사를 처형했는데, 정원사의 뱃속에서 문제의 그 오이가 발견됐다는 이야기가 있다. 오이가 아니라 수박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 시 짓기: 시인으로서는 아브니(Avni)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뜻은 '돕는 자'. 검색해보면 그가 남긴 시를 찾아볼 수 있다.
- 남색: 그리스나 서유럽 쪽 기록에 따르면.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재상 루카스 노타라스의 아들도 눈에 들었는데, 하렘으로 끌려가는 것을 거부하여 죽임을 당했다고도 한다. 다만 현대 터키 역사학계의 거두인 할릴 이날즉은 동시대 오스만 측 기록 어디를 봐도 황제가 동성애를 즐겼다는 기록은 없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 바예지트 2세
- 활쏘기, 활 만들기
- 셀림 1세
- 보석 세공
- 쉴레이만 대제
- 시 짓기
- 보석 세공
- 신발 만들기
- 셀림 2세
- 음주: 음주가 뭐가 특별한가 싶겠지만, 셀림은 무슬림이다. 당연히 금주가 원칙.[50] 뿐만 아니라 셀림이 사망한 이유도 술 때문인데, 술에 취한 채 목욕탕에 들어갔다가 발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사망했다.
- 공예: 금과 보석으로 초승달 모양의 책갈피를 만들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했다.
- 무라트 3세
- 시계 조립
- 그림 그리기
- 메흐메트 3세
- 숟가락 만들기
- 페르시아어로 시 짓기: 당대엔 특별한 취미는 아니었다. 수준이야 개인별로 천차만별이겠지만, 셀림 1세나 메흐메트 2세 등도 페르시아어로 시를 지은 것이 남아있다.
- 아흐메트 1세
- 숟가락 만들기: 그의 아버지도 취미가 숟가락 만들기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숟가락을 대모갑(바다거북 등껍질)이나 상아로 만들었는데 상아조각도 잘 했다고 한다.
- 오스만 2세
- 말 안장 만들기
- 무라트 4세
- 코스프레: 투르크인의 전통 전사 복장을 유독 즐겨 입었고, 대다수의 초상화도 전사 차림의 그를 그린 것들이다.
- 포도주 마시고 시 짓기: 앞 각주에 쓰여 있듯이 무슬림에게 포도주는 원칙상 금지이며, 더 문제는 무라드 자신이 제국의 기강을 잡기 위해 술, 커피, 담배를 엄격히 금지했던 것. 이래 놓고 했다는 말이 걸작인데, "포도주가 참으로 악마라, 신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짐이 모조리 마셔 버리겠노라."
- 이브라힘
- 거북 등껍질 조각
- 메흐메트 4세
- 사냥: 오죽했으면 사냥꾼(Avcı)이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였다. 실제로도 정치는 재상 이하 관료들에게 맡겨 놓고, 자신은 옛 수도 가운데 하나인 에디르네의 별궁에 주로 머무르며 사냥에 탐닉했다. 문제는 당시 제국의 상황이 이런 일이 허용될 정도의 태평성대였냐 하면 전혀 그렇지 못했다는 것.[51]
- 아흐메트 3세
- 마흐무트 1세
- 도장파기와 보석 세공
- 무스타파 3세
- 동전 만들기
- 셀림 3세
- 압뒬아지즈
- 압뒬하미트 2세
- 서예
- 승마
- 수영
- 도자기 공예: 대인기피증 때문에 복잡한 돌마바흐체 궁전을 떠나 이을드즈 궁전(Yıldız Sarayı)에 기거했는데, 손님들에게 선물할 도자기를 손수 만들기 위해 공방을 차렸고, 솜씨가 수준급이었다. 참고로 현재도 궁전에 공방이 남아있으며 국영회사로 전환해 영업중이다.
- 목공예: 평범한 시민도 아니고 한 제국의 황제인 자기 자신이 사용했던 최고급 가구들을 몸소 제작할 정도였다고 한다. 또 이 사람은 1909년에 폐위당해 1918년에 죽었는데, 말년에 했던 일이 회상록 저술과 목공예였다고 한다.
- 탐정소설 읽기: 탐정소설 전체를 좋아했던 황제로 그가 재위하던 시기에 셜록 홈즈 시리즈가 계속 발간되고 있었다. 신간이 나오자마자 오스만어로 번역하는 것을 기다리지 못해서 직접 사람을 보내 영국에서 책을 사와(...) 읽을 정도로 애독가였다. 코난 도일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칭찬하기도 했고, 메지디예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황제가 셜록 홈즈의 팬이 되면서, 오스만 제국에서도 셜록 홈즈가 대히트쳤다. 압뒬하미트 2세는 직접 영어 원서를 오스만어로 번역하게 시키는 한편, 본인도 영어 연습을 위해 습작삼아 번역을 하기도 했다. 셜록 홈즈가 1920년대 터키에서 활동했다는 설은 당시 셜록 홈즈 시리즈가 대히트쳤던 것을 반영한 코난 도일의 팬서비스일 가능성도 있다.
- 오페라 감상: 서유럽에서 극단을 초청해 감상하기를 즐겼을 뿐 아니라 오페라 작품들을 오스만 터키어로 번역하기도 하고, 아예 직접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 스포츠: 얄르 귀레시(Yağlı güreş)라는 전통 레슬링을 좋아해 황궁에서 경기도 자주 열고 그 중에서도 뛰어난 선수는 이스탄불에 머물게 하며 후원했다. 자기 자신도 어느 정도 실력이 있어, 직접 대련을 하며 실력 평가를 했다고도 한다.
- 그림 그리기
- 압뒬메지트 2세
- 그림 그리기: 1924년, 공화국 정부에 의해 칼리파에서 퇴위된 이후로는 아예 직업 화가가 되었는데, 주로 오리엔탈리즘 화풍의 그림을 그렸다.
4. 중동
4.1. 이집트
4.1.1. 고대 4왕조
4.2. 이슬람 제국
4.2.1. 압바스 왕조
- 알 마문
- 과학 연구 후원
4.3. 이집트 왕국
4.3.1. 무함마드 알리 왕조
4.4. 이란
-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 자동차 수집: 이란 혁명으로 급하게 망명을 떠났는지라 차 대부분을 빼돌리지 못해서 해당 차들은 몰수되어 이란 국영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1]
고대 한국에서는 매사냥이 상당히 유행했다. 《일본서기》에서도 왜국에 처음으로 매사냥하는 법을 전파한 백제의 왕족인 주군의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사실 매사냥은 한국 뿐만 아니라 매가 서식하는 곳이라면 거의 다 고위층들의 취미로 각광받아왔다. 대륙으로만 따져도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 남극과 호주를 제외하면 그 흔적이 항상 존재했다. 한반도에서도 비단 앞서 언급된 고대시대 뿐만 아니라 이후로도 계속 전통이 이어져서 가까이에는 조선시대에 응방을 운영한 기록이 있으며, 현대에도 사냥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고 전통과 문화 보존이 목적으로 여전히 계승되고 있다.
[2]
물론 한 사람이 음식을 이렇게 많이 먹기는 힘들기 때문에 무열왕의 치세가 그만큼 풍요로웠음을 암시하기 위한 기록일 가능성이 크다.
[3]
다만 한양천도 후에는 화원에 간 기록이 없다.
[4]
훈민정음의 그 유명한 첫 구절인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에서의 '듕귁'이 바로
동국정운식 표기법이다.
[5]
즉위 후 제일 먼저 죽인 생물이 선왕 성종이 키우던 사슴이었다.
[6]
조선시대의 잡채는 다양한 종류의 채소와 고기를 정갈한 모양으로 다듬고 채썬 후 삶거나 볶아서 만든 고급 요리였다. 이충은 직접 땅을 파서 온실을 만들어 한겨울에도 신선한 채소를 재배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그가 만든 잡채 맛의 비결이었다고 한다.
[7]
도리어 개혁군주로 손꼽히는 영조의 손자 정조야말로 성리학 원리주의와 복고주의를 신봉하여 문체반정을 통해 옛날의 글쓰기 방식과 다른 소설류 등을 탄압하였다.
[8]
당장 일본만 해도 자동차를 탄 최초의 군주는
다이쇼 덴노이다.
[9]
먼 훗날의
제위왕도 비슷한 일화가 있다.
[10]
그 자신부터가 호복기사 개혁을 추진할 정도로 군사적 안목이 출중했다.
[11]
이에 분노한 혜문앙의 측근
인상여가 그 자리에서 소양왕을 협박하여 분부를 연주할 것을 요구하여 복수한 일화도 유명하다.
[12]
진나라의 수도 함양을 점령했을 당시에도
범증이
항우에게 "유방처럼 여색을 즐기는 놈이 관중에 들어가서도 여자를 밝히지 않으니 이는 분명 야심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할 정도였다.
[13]
영제가 특히 돈에 대한 집착이 심했던 것은 어린 시절에 무늬만 황족일 뿐 매우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제가 후사를 남기지 못한 상태에서 요절하는 바람에 5촌 조카뻘인 영제가 즉위하게 된 것이다.
[14]
조조의 손자병법 주석본은 이른바 《위무주손자》라고도 불리는데, 현대인들이 읽고 있는 손자병법의 기본 판본이기도 하다.
[15]
다행히 유욱은 죽임당하지 않고 살아남았는데 전폐제의 막장행각이 너무 심하다 보니 즉위한 지 1년밖에 안 되어 유욱보다 먼저 죽임당했기 때문.
[16]
일본의 사실상 군주였던 쇼군, 관백, 태합도 포함. 허나
쇼군들도
무사이기 때문에 검술과 도검 수집 등의 취미는 대부분 있었으므로 본 항목에서는 생략.
[17]
그것도 있지만 당시
사무라이들은 체면 상의 이유로 자기보다 낮은 신분의 사람들과 시비가 붙으면, 결투를 벌여서 시비털은 상대를 베는
기리스테고멘을 해야했다. 당연히 그런 귀찮은 일을 만들기 싫어했던 부하들은 덴뿌라를 사러가는 것에 대해 난색을 표한 바 있었다. 결국 해결책이라고 내놓은 게 인적이 드문 오밤중에 복면을 쓰고 변장해서 덴뿌라를 사가는 것이었다.
[18]
몽골 제국 이전 인물이지만 카마그 몽골과 몽골 제국은 주류민족은 같으니 서술
[19]
칭기즈 칸 조차도 술을 적게 먹는 사람은 봤어도 아예 먹지 않는 사람은 본 적이 없으며, 그런 사람이 있다면 크게 중용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20]
오고타이의 동생인 톨루이도 형 못잖은 주당으로 그 역시 알콜 중독으로 사망했다.
[21]
고려가 투항했을 당시에 당 태종도 꺾지 못했던 고려가 항복했다며 기뻐했고, 훗날 손자인 충선왕이 한 고조와 당 태종을 존경한다는 말을 듣자 그들과 자신을 비교하면 어떻냐는 질문을 하기도 했다.
[22]
사실
불교의
승려들도
삼정육이라 하여, 직접 죽이거나 죽어가는 것을 목격한
고기만 아니라면, 폭식이나 과식을 하지않는 이상에야 얼마든지 육식을 해도 상관없다. 실제로
달라이 라마 14세도
폴 매카트니의 조언을 듣고
채식주의를 시도해보긴 했는데, 금방 건강에 이상이 생겨서 때려치운 바 있다.
[23]
차트를 달리는 남자 '재벌들의 괴짜 취미'에서 4위에 랭크됐다.
[24]
그 이외에도 취미랄 건 아니지만, 왕의 날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DJ들의 공연이 있자, 행사에 참여한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서 춤을 춘 적도 있다. 원래
네덜란드가 왕실 관련 행사에 DJ를 부를 정도로 문화적으로 개방된 면이 있지만,
빌럼알렉산더르는 이런 문화를 감안해도 대단히 소탈하고 파격적인 면모가 많다.
[25]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오페라는 이탈리아어로 제작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는데, 요제프 2세는 이탈리아어를 알지 못하는 서민층들도 알아듣고 즐길 수 있도록 독일어 오페라를 주문한 것이다.
[26]
주변국에게 비웃음을 살 정도로 지독하게 절약했고 그걸로 마련한 돈을 군대에 투자해 부국강병의 기초를 다졌다. 특히 게으른걸 싫어할 정도로 본인은 성실했다.
[27]
주로
소나무나
참나무를 선호했다고 한다.
[28]
나무 베는 게 그리 사치스러운 취미도 아닐 뿐더러, 큼지막한
도끼를 들고 아름드리 나무들을 거뜬히 베어내는 모습을 보고, 국민들이
상남자라고 좋아했기 때문이다.
[29]
스웨덴의 한자 음차가 서전이다. 서전의 "서"에서 봉황의 "봉"자를 합쳐서 서봉총이다.
[30]
물론, 당대의 소문이 그랬을 뿐이고, 실제의
마상창시합은 현대
영국 사회의
축구정도의 위상을 가진 당대 최고의 인기
스포츠라서,
청년왕 헨리의 사후에도 영국은 물론이요
유럽 전역에서 잘만 흥행했다. 이 때문에 아예 현대로 치면 프로 스포츠 구단인 마상창시합 전용
기사단까지 대거 생겨났던 바 있다. 요즘도 일부
입헌군주제 국가에서 왕실이 최애 축구단의 스폰서를 자처하는 것처럼, 각국의 군주들이 이런 기사단을 후원하는 일이 많아서, 사실 청년왕 헨리가 딱히 유별난 건 아니었다.
[31]
아크레 공성전 당시에는 열병에 시달리던 중에도 침대에 누운 상태에서 쇠뇌를 발사해 성벽 위에 있던 살라딘의 병사를 명중시키기도 했다.
[32]
4번째 부인인
클레베의 앤과 결혼하자마자 사이가 틀어진 이유가 이것이다. 원래는 미인으로 소문난 여인이라 하여 결혼을 했더니, 상상했던 것보다 못난이라서 1차로 실망했다고 한다. 그래도 그런대로 매력점은 있으리라고 생각해서 일단은 같이 살기로 했으나, 알고보니 할 줄 아는 게 뜨개질밖에 없었을 만큼 클레베의 앤이 일자무식이라서(클레베 공국은 딸들에게 신부수업 이외의 교육을 거의 안 시킬 정도로 대단히 보수적이었다고 한다) 2차로 멘붕했던 것이다. 그래서 단단히 빡친 나머지, 이 결혼을 알선한
토머스 크롬웰의
목을 날려버리고 이혼해버렸다.
[33]
정작 상술한 그의 어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은 지독한 혐연가였다.
[34]
당대 영국 평균수명보다 조금 더 적었을 뿐이고 어머니가 워낙 장수해서 재위기간이 9년밖에 안 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상대적으로 아까운 죽음인 것은 사실이다.
[35]
중세시대의 테니스는 라켓 없이 손으로 공을 쳐서 주고 받는 핸드볼과 비슷한 스포츠였다. 테니스용 라켓이 만들어진 것은 16세기 이후의 일이다.
[36]
프랑스인들의 이런 면모는 현대의 유명인들에게도 플러스 요인을 만들어주거나 적어도 비난받지는 않는 역할을 하고 있다. 가령,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외간 여자와 간통한 사실이 들통났을때에도 그저 당시에 대통령 신분으로 외국산 오토바이를 탔다는 사실만 구설수 거리로 취급되었고, 20세기를 풍미한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는 아예 호색한 기질 때문에 그의
극좌 성향과 엮여서 멋있는 상남자로 불리면서 당대의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꼽혔다.
[37]
루이 14세가
발레 공연을 할 때
그리스 신화의
태양신인
아폴론으로 분장하고 나타났는데, 그의 대표적인 별명인 '태양왕'이 여기서 유래했을 정도로 왕권 강화와 왕실 권위 신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루이 14세의 발레리노 시절을 다룬 2001년작
프랑스 영화인
왕의 춤에서는 그가 아폴론 분장을 한 채로 화려한 불꽃 쇼를 선보이며 등장해 아름다운 춤사위를 보이는데, 모후인
안 도트리슈가 이를 보고 "내 아들!"이라 외치며 감격해하자 옆에 있던 재상
리슐리외가 "이젠 마마의 아드님이 아닙니다. 이 나라의 왕이십니다."라고 말을 덧붙이고, 그 와중에 왕의 최대 정적들이 그에게 직접 왕관을 바치는 역할을 맡는 굴욕을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38]
사실
부르봉 왕조의 역대 왕들이
식신들이 많은 편이어서
루이 16세만 해도 처형 당일날 대량의
닭고기와
커틀릿, 삶은
계란을 먹어치우고는
단두대로 걸어올랐다고 하지만, 이런 먹보 기질을 왕권 강화를 위한 쇼맨십으로 이용한 군주는
루이 14세가 유일했다. 사실 그는 오늘날의
블라디미르 푸틴 못지않게 쇼맨십을 중시했던지라, 현대의 주류
역사학계로부터는 잦은 전쟁과 사치로 민생을 악화시킨
암군으로 평가받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에는 국민들에게 멋진 모습으로 각인되어서
성군으로 대접받은 바 있다.
[39]
이 점은
아돌프 히틀러와 비슷하다. 그래도 히틀러는 근대 시대 이후 본인이 세계 최초로 동물보호법을 창시한 사람답게 비록 고양이를 싫어했어도 루이 14세처럼 고양이들을 불태워 죽이거나 하진 않았다.
[40]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대놓고 알렉산드로스가 헤파이스티온의 허벅지에 지배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바고아스는 본래 페르시아의 대왕 다리우스 3세의 캐터마이트였던 이력이 있으며 게드로시안 사막을 횡단하던 중 춤 경연대회에서 바고아스가 우승하자 알렉산드로스가 그에게 키스를 해주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41]
아버지
표트르 3세의 프로이센 사랑이 영향을 준 듯 하다. 실제로 파벨 1세는 아버지 표트르 3세를 불과 8세에 잃어서 그렇게 기억이 많지는 않았지만 아버지 사후 즉위한 어머니
예카테리나 2세에 대한 증오로 아버지를 그리워했다.
[42]
문제는 그가 후사를 남겨야 하는 황제인데도 이랬다는 것. 그의 딸 2명은 모두 어린 시절 요절했고 그 이상의 자녀는 없었기에 그의 사후 황위는 동생인
니콜라이 1세에게 넘어갔다.
[43]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오페라는 이탈리아어로 제작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는데, 요제프 2세는 이탈리아어를 알지 못하는 서민층들도 알아듣고 즐길 수 있도록 독일어 오페라를 주문한 것이다.
[44]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오페라는 이탈리아어로 제작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는데, 요제프 2세는 이탈리아어를 알지 못하는 서민층들도 알아듣고 즐길 수 있도록 독일어 오페라를 주문한 것이다.
[45]
엄밀히 말하자면 이 사람은 생전에 제위에 오르지는 못했다.
[46]
재료 중 하나로 송로버섯이 들어갈 정도였다.
[47]
다만 르네상스 시대에는 가톨릭 성직자들이 대체로 타락하여 교리를 어기고 아이를 가진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 공식적으로는 이 사생아들을 "조카"라고 소개했으며 중세 시대에는 교황이 대놓고 자식을 낳고도 눈치도 안 보던 시절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것일지도.
[48]
사제 서품을 받기 전인 어린시절에는 축구선수를 장래희망으로 삼았을 정도였다.
[49]
말타고 멧돼지를 쫓다가 낙마를 하면서 죽었다는 설도 있다.
[50]
정확히는
포도주가 악마의 것으로 지정되어 금지되었고 일부 허용되는 술도 있었는데, 셀림이 즐겼던 건 포도주다.
레판토 해전으로 이어지는 키프로스 침공도 이 섬이 질 좋은 포도주 산지라는 이유였다고도 전해질 정도.
[51]
그나마 1656년부터 2차 빈 공방전 이전까지 대재상을 역임한 3명의 쾨프륄뤼 가문 출신들이 유능한 덕분에 제국의 사건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황제자릴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3번째 쾨프륄뤼 가문 출신인 카라 무스타파 파사를 본인이 처형한 이후 헝가리를 내주는 참사를 내며 황제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