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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제5대 황제
네로 Ner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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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 Nero Claudius Caesar Drusus Germanic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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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37년 12월 15일 | ||
로마 제국 안티움 | |||
사망 | 68년 6월 9일 (향년 30세) | ||
로마 제국 로마 시외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
54년
10월 13일 ~
68년
6월 9일 (13년 24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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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 휘 |
Lucius Domitius Ahenobarbus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본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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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ro Claudius Caesar Drusus Germanicus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입양 후 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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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ro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즉위 후 추가 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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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클라우디아 옥타비아 (53년 결혼 / 62년 사망) | ||
포파이아 사비나 (62년 결혼 / 65년 사망) | |||
스타틸리아 메살리나 (66년 결혼) | |||
스포루스 (67년 결혼) | |||
피타고라스 (자유민) (64년 결혼) | |||
가족 |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父) 소 아그리피나(母) 클라우디아 아우구스타(子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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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자 | 클라우디우스 1세 | ||
후임자 | 갈바 | ||
왕조 |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 ||
종교 | 로마 다신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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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제5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시작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이다. 본명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Lucius Domitius Ahenobarbus). 매장지는 본가인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집안의 공동묘지[1]이다. 외종조부 클라우디우스의 둘째 사위가 된 뒤 양자로 입적되면서 오늘날 익히 알려진 풀네임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Nero Claudius Caesar Drusus Germanicus)로 개명했다. 하지만 이 당시 클라우디우스와 황실 어른들은 아헤노바르부스라고 불렀고, 후계자가 되지 않았으며 본인 역시 제위에 욕심을 내지 않았다. 그러다가 서기 54년 클라우디우스가 급사하자 어머니 아그리피나, 세네카와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 주도의 친위 쿠데타로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의 직계 후손[2]이자 클라우디우스의 외동아들 브리타니쿠스를 제치고 황제로 즉위했다.2. 상세
즉위 당시와 처음 5년간의 기간은 황금기라고 불린 만큼 평도 좋았고 활달하고 발랄한 성격, 총명함과 유머 감각으로 등장 당시부터 황제 개인의 인기가 상당했다. 이때 스승 세네카[3]를 중용해[4] 초기에는 선정을 베풀고 코르불로를 기용하여 파르티아 전선을 안정시켰다. 하지만 그는 즉위 초부터 자신의 가족과 친척들을 여럿 죽이고 방탕한 생활로 인해 상류층들에게 미움을 받았으며, 로마인들이 중요히 여긴 가족에 대한 사랑과 헌신, 도덕성, 청렴함과 고결한 미덕 등과 워낙 상반된 행동을 대놓고 벌인 탓에 막장성과 정신병자 수준의 광기를 동시에 갖춘 인물로 낙인찍혔다. 따라서 사후 로마 제국의 폭군 콤모두스, 광기의 대명사 엘라가발루스와 비교해 보면 비교적 업적이 있음에도, 의도적인 기독교도 탄압과 어머니, 아내를 포함한 일가 직계 친족 살해, 선황이자 양부 클라우디우스 능욕, 심각한 사치와 난잡한 사생활 등의 종합적인 단점으로 오늘날까지도 동서고금 막론하고 폭군의 대표 주자로 꼽히고 있다.이러한 네로에 대한 평가는 그가 십 년 넘게 제위를 지킨 기간 동안의 객관적인 행적상 재평가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일부 업적이 주목을 받으며 재평가를 받은 까닭에 오늘날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따라서 그를 평가하는 의견 중에서는 “제정신 아닌 짓들을 많이 저지르기는 했으나 네로 본인은 크게 잔인하지도, 정국에 아예 관심이 없지도 않았다. 단지 정치적으로 무능하고 예술가적 기질이 너무 강한 데다[5] 몇 가지 심각한 실책을 저지르면서 반란으로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스스로 자살하는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고 보는 의견도 있고, “ 콤모두스, 포카스 등과 동일선상에 놓일 폭군은 아니더라도, 네로는 폭군이며 부적격자였다. 그가 저지른 실책은 칼리굴라보다 더 심각했다.[6] 네로의 치세는 로마 제국에 분명히 악영향을 줬다. 그래서 그가 실각한 뒤, 내전에 접어들었다. 다행히 그 실책들은 베스파시아누스와 그 아들들에 의해 정리됐다.”는 주장도 있다.
즉, 오늘날 네로는 과거처럼 무조건 폭군이라고 비난만 받고 있지는 않고, 본인이 한 일에 비해 후대에 지나치게 과장된 악명을 남겼다며 동정을 받기도 한다.[7] 하지만 네로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하는 측조차 "네로는 명군이었으나 억울하게 쫒겨나서 죽었다."[8]고는 말하지 않는다. 가장 우호적인 의견조차 " 황제가 아니라 순전히 돈 많은 황족으로서 예술가나 전차 경기 선수로 살았으면 탄핵당해 비명횡사하지도 않고, 원하던 대로 로마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천수를 누리며 살 수 있었을 텐데 참 안타깝다." 정도에 불과하다. 즉, 네로는 악인은 아니었을지언정 분명히 거대한 제국 로마의 통치자 노릇을 하기에는 여러모로 부적합한 인물로서, 그로 말미암아 폭군이자 암군일 수밖에 없었다.
3. 생애
자세한 내용은 네로/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4. 평가
“(
콤모두스는)
도미티아누스보다 더 야만적이고,
네로보다 더 악랄했다.”
원로원, 192년 12월 31일 콤모두스가 암살당한 소식을 들은 뒤 기록 말살형 통과 전 네로를 언급하며[9]
원로원, 192년 12월 31일 콤모두스가 암살당한 소식을 들은 뒤 기록 말살형 통과 전 네로를 언급하며[9]
“사실 네로가 남은 시간 동안 얼마나 추악하게 살았는지, 그가 제국의 지배자라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고, 이러한 부류의 존재를 기록한다는 것 자체가 역겹고 수치스럽다.”
섹스투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한때 재평가받기도 했다고 해도, 네로라는 황제는 이전의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후대의
도미티아누스,
카라칼라,
갈리에누스로 대표되는 다섯 황제들과 달리 여전히
폭군,
암군의 면모를 모두 갖춘 이로 재재평가되고 있다. 현대 이전까지 네로와 비슷한 수준의 폭군으로 소문난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도미티아누스, 카라칼라, 갈리에누스는 원로원에게 그 평가가 최악이지만, 이들은 그 방식의 문제일 뿐 네로, 콤모두스와 달리 로마인들이 말하는 일하는 황제라는 덕목에서 기준점을 충족한 황제들이었다.[10][11] 따라서 이들의 악행은 로마인들에게 "냉혈한 같다", "과격하고 변덕스럽다", "잔혹하다", "거만하고 자기중심적이다"라고 욕을 먹었어도, 일반 서민들에게는 네로처럼 비난받진 않았다. 따라서 근대 이래로 이들 5명의 악행은 후대 그들을 폄하하려는 정적들의 주장 속에 과대 포장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이들의 실제 치세는 교차 검증 등을 통해, 동서고금의 황제들이 취한 권력 강화이거나 암살 시도 등으로 급속히 냉각된 정국 속에서 황제가 기소를 벌여 반격한 등의 분명한 여지가 컸다고 평가받는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이들은 제국에게 네로와 같은 폐해를 끼치지 않았고, 이들의 조치가 로마 제국에게 진일보한 결과로 이어진 까닭에 재평가 과정에서 오명까지 씻게 됐다. 물론, 티베리우스의 고발인, 근위대 활용은 그 흐름이 전혀 다른 부분이나 네로는 분명 문제가 많은 황제였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하여 정통주의자, 현대 이후 재평가주의자 모두에게, 네로는 흥미로운 폭군으로 자리매김했다.섹스투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네로는 후대 로마인들에게 현군과 폭군의 양면성을 가진 티베리우스, 정적에게 지나치게 냉혹했던 칼리굴라와 도미티아누스, 추악함이 없지만 지극히 무책임했던 미치광이로 공인된 콤모두스, 지나치게 운이 없고 급진적이었던 갈리에누스, 폭군이나 제국에 해를 끼치지 않은 카라칼라와 비교된 황제다. 이때 네로는 이들과 달리 악랄함을 넘어 저질적이고 추악한 황제로 불릴 정도로 제정 지지자, 원로원 중심론자 모두에게 나쁜 황제의 전형으로 불렸다. 이는 당대 네로와 도미티아누스를 합친 것 같다고 욕먹은 콤모두스조차 듣지 못한 악평이다.
네로가 이렇게 평가받은 이유는, 그가 로마인 기준으로의 독재 요소가 현대인들의 생각을 뛰어넘을 정도가 많았고, 책임감에 있어 늘 떠넘기거나 타인에게 의존한 경향이 강했다. 특히, 한 개인으로서 네로는 로마 남녀 모두가 최악으로 여긴 비겁한 태도가 심각해, 사후 최악 중 최악으로 평가됐다. 따라서 현대 로마사 관점처럼 제정의 시작을 평하고 프린키파투스의 본질을 꿰뚫어 날카롭게 지적한 디오 카시우스는 이런 네로를 자신이 경험한 콤모두스보다 추악하고 그 행태가 최악이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그는 네로를 콤모두스, 카라칼라보다 최악이고, 그 지위에 어울리지 않은 위인이라면서, 실제 행적이 추악하고 비겁하며 매우 무책임하다고 평했다. 또 디오는 콤모두스는 주변 사람들에게 암살 위협을 받고, 그 트라우마가 심각해짐에도 방치됐으며, 암살 직전까지도 천성이 나쁘지 않아, 최소한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다고 평했다. 그래서 여러 학자들은 디오가 살던 시대에 이미 최악 중 최악으로 공인된 엘라가발루스가 받은 평가가 네로와 같았다는 것에 흥미를 보인다. 그렇지만 네로는 그와 판박이였다고 공인된 엘라가발루스와 비교해, 분명 일하는 황제라는 덕목 측면에서는 훨씬 훌륭했고, 엘라가발루스처럼 자고 일어났다가 기분이 나쁘다며 장군, 원로원 의원들에게 자살을 강요한다거나, 이들을 성희롱하는 최악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네로는 분명 황제로서는 낙제점을 받았고, 리더십 측면과 도덕적 측면 모두에서 아우구스투스 가문으로 불린 황실의 덕목[12]을 모두 어긴 황제였다. 또한 네로는 이 황실의 덕목을 자기 입맛에 따라 바꾸려고 하고, 본인의 친할아버지, 아버지를 우상화하면서 아예 아우구스투스가 만들고 원로원이 공인한 아우구스투스 가문의 뿌리까지 바꾸는 시도까지 했다. 그래서 그에게 처음 반기를 든 율리우스 빈덱스, 네로를 연이어 탄핵한 로마군, 프라이토리아니, 원로원에게 3중 탄핵이라는 진기록 속에서 몰락할 때, 재기의 희망을 잃어버린다. 이때 이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한 것은, 네로가 "국고를 파탄 내고, 어머니와 아내, 선황의 아들을 살해하고, 국가의 법과 로마 시민권에서 보장한 타인의 권리까지 불법, 위법을 동원해 그 미덕까지 박살 낸 극악무도한 사람"이었다는 판결이었다. 이는 네로처럼 그 평가가 최악인 데다, 수에토니우스와 세네카 덕분에 인간 말종으로 이미지가 단단히 박힌 칼리굴라, 원로원에게 똑같이 기록 말살형 판결을 받으며 사후에도 폭군의 양대 산맥으로 비난받은 도미티아누스와 분명한 차이라고 할 수 있고, 암군은 아니었지만 폭군은 분명했던 카라칼라와 네로의 결정적 차이점이었다.
따라서 네로라는 황제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콤모두스와 동급으로 평가되는 폭군이자, 자신의 취미[13]에 국고를 탕진한 암군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그나마 굳이 차이를 두자면 초기에는 선정을 했고 외교적인 성과가 있었다는 점이지만 콤모두스도 국가 경제를 거의 파탄 지경으로 몰아넣던 전쟁을 아무 생각 없이 끝내긴 했어도 일단 끝낸 공이 있다는 점에서 크게 낫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래도 굳이 인간적인 면모를 논하면 콤모두스는 별 이유 없이 친누나에게 암살 시도를 당한 뒤 심각한 과대망상과 정신분열증, 강박증 문제를 가졌던 사람이기에, 디오 카시우스의 증언처럼, "그 자질과 천성이 착하고 훌륭했음에도 한 인간으로서는 끔찍한 일을 겪고 난 뒤, 삶 전체가 불행하고 안타깝게 뒤틀려 폐인으로 전락한 폭군", "주변에서 잘 도와줬다면 비극은 없었을 암군"이라는 평도 함께 받았다. 반면 네로는 후대 사가들과 콤모두스 시대를 경험한 원로원에서 지적했듯이 천성부터 악랄한 폭군 내지 구제 불능의 비양심적인 암군으로 평가받았다. 다시 말하면, 불행한 가정사로 폭군이 된 케이스가 아니었음에도 일찍부터 소시오패스, 사이코패스적 면모를 재위 기간 내내 일관되게 보여준 사람이었다. 다만, 황제로서의 직업의식은 확실히 네로가 더 괜찮았고 재위 기간 동안의 업적도 있다고 평가받았다. 왜냐하면 콤모두스는 첫 2년여를 제외하곤 완전히 맛이 간 나머지 정사를 포기한 채 놀고먹은 데다, 말년에는 극도의 정신 분열과 과대망상으로 일상까지 통제 불능 상태였던 황제였고 말년에 잠시 친정을 하면서도 그 업무를 방치하고 무책임했기 때문이다.
네로는 모든 인간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하지 말아야 할 악행[14]을 실제로 벌였고, 현대인들의 관점이 아닌 로마인들에게만 금기시된 행동을 한 사람이었다. 이는 이전 로마사에 등장한 최고 지도자 중 소문이 아닌 진짜 행동으로 모든 악행을 저지른 경우였고, 당대 로마에서 가장 모범을 보여야 할 프린켑스[15]가 직접 행한 범죄 행위였다. 더욱이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프린키파투스 체제 아래에서 네로 이전까지 원로원과 사이가 험악했던 두 황제[16]와 달리 황제 본인이 만들었던 법이나 제위 등극 이전부터 만들어진 법까지 현직 임페라토르이자 프린켑스가 편법, 불법 행위를 하면서, 티겔리누스를 앞세워 원로원 인사들과 방계 황족들에게 죄를 덮어씌우고 재판에서 증거 조작을 넘어 무죄 확정 피고까지 유배를 보내고 비열하게 암살했으니 당연히 로마인들에게 "폭군", "독재자", "비양심적인 미치광이" 등으로 평이 나빴다. 그래서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 디오 카시우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등 오늘날 남아있는 모든 로마사 기록에서 드러나듯 네로는 당대, 후대 로마인들에게 한결같이 추악함, 악랄함, 잔인함, 패륜 등 온갖 말의 대명사 격으로 평가받았다. 이는 그토록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좋아하지 않은 타키투스 같은 인사들이 아니더라도 로마인들에게 “이전에 문제 많다고 한 이들보다 더 악랄하다”고 욕먹은 이유였다.
또 타키투스가 말했듯이 네로는 정치적 위기 속에서 당시 “군중들이 미워하고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한 기독교도들에게 지극히 의도적이고 비열한 술책으로 죄를 덮어씌운 일을 벌인 탓에 더 큰 비난을 받았다. 이것은 애초에 자기 잘못에 대한 책임만 지는 게 당연한 로마법을 대놓고 황제가 무시한 행태로서, 그리고 이런 그의 행동은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가 공인되고 국교가 된 이후 더 부각되면서, 자신이 하지 않은 일도 하게 된 일이 되는 일을 겪어야 했고 결과는 로마 역사상 가장 추악한 폭군 중 한 명으로 평가받게 됐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네로는 동서양 역사상 희대의 폭군으로 까이고 있으며, 폭군 대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실제 네로는 폭군이자 암군이었기에 이런 평가는 틀리지 않다. 하지만 후대에 등장하는 콤모두스, 포카스와 같은 폭군과 동급으로 묶일 황제는 아니다고 평가받고 있기도 하다. 네로를 옹호하는 (혹은 재평가해 주는) 쪽의 평가에 따르면, 네로는 성격 자체도 변덕이 심하고 즉흥적인 성격이었고, 제대로 된 제왕 교육도 받지 못한 상태였으며 지나치게 사치스러웠다고 해도 로마 제정 시대 때 황제의 사치와 연회는 분명 빵과 서커스 일환이었기 때문에 반박될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한다. 또한 주변에서 그를 제대로 통제해 줄 측근들도 부족한 데다, 그나마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은 인사들도 세네카처럼 아전인수로 사리사욕을 챙기면서 네로의 행동을 방조한 인사들이 대부분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 역시 네로가 온전히 악행을 모두 뒤집어쓸 수 없다고 말한다. 또 수도 로마의 관리에도 재능이 없었기에 제국의 통치자로서는 분명 부적격한 사람이었다는 주장이다. 오히려 그는 노래 부르며 사람들에게 환호받는 음유 시인의 인생을 걷는 것, 오늘날로 치면 정치인이나 기업 경영인보다는 연예인이나 아이돌에 더 어울리는 남자였는데, 본인 스스로도 황제 자리에 오르고 싶지 않았다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심정을 털어놓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동급으로 취급받는 콤모두스와 달리 네로는 재미있는 이벤트를 자주 만들어냈고 황제로서 선정을 펼치려고 노력했으며, 개인으로서는 호감 가는 젊은이였기 때문에 생각 이상으로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좋긴 했다. 또 비참하게 몰락했어도, 상류층 중 극히 일부 인사도 간혹 “저 나쁜 놈”이라고 까기보다는 비텔리우스처럼 대놓고 “쾌활하고 마음씨 좋은 분이다. 난 그를 존경한다”라고 말한 다음, 대대적으로 네로의 옛 치적을 복구해 주는 경우도 있었다[17][18]. 따라서 네로는 최후가 매우 비참했던 데다 네로 사후 내전기를 거치며 자격 미달인 후대 황제들. 특히 비텔리우스의 행태에 질린 근위대와 시민들이 네로 탄핵을 후회했다고 한다. 덕분에 네로의 무덤에는 꽃이 끊이질 않았다고. 대부분은 네로의 유모 아크테가 바친 것이지만, 의외로 일반 시민들이 바친 것들도 꽤 있었다고 한다.
현대까지 그를 옹호하는 쪽에서는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어머니 아그리피나, 처남 브리타니쿠스를 살해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19]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설령 정치적 이유였다고 해도 근본적인 이유는 왕권 강화 같은 이유에서 벌어진 사건이 아니라 개인의 충동적 성향에서 나온 탓에 옹호 측에서도 완벽하게 네로를 감싸진 않는다. 또 그는 포파이아와 혼인하기 위해 원래 부인이었던 옥타비아마저 간통죄로 몰아서 추방시킨 뒤 살해한 부분과 포파이아와 혼인하여 슬하에 딸 하나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던 포파이아를 발로 차서 죽여버리는 등 이후에도 이해하지 못할 근친 살해 행각을 이어나갔고, 외삼촌 칼리굴라와 달리 진짜 근친상간을 시도했다가 보복 차원에서 이모이자 누나인 처형을 반역 혐의로 처형시키는 등의 악행을 이어나가 이 부분에서 정치적 이유라는 측면의 옹호 여론조차 얻지 못하고 있다. 아울러 당시 얼마 남지 않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가까운 친인척들과 코르불로에게 억울하게 유죄를 뒤집어씌운 뒤 그 일가를 살해한 부분도 마찬가지인데, 네로는 그때마다 로마법상의 절차를 온전히 지키기보다는 연좌제 도입, 의도적인 미행 등 잔혹하고 비열한 방법을 사용해 로마인들에게 미덕 그 자체까지 없앤 사람의 대명사가 되게 됐다.
하지만 네로가 의도적으로 로마에 불을 질러 대화재를 초래하고 불타는 로마를 바라보면서 리라를 켜고 시를 읊었다는 소문은 말 그대로 루머일 뿐,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은 사실이기에 이런 종류의 비난은 억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화재가 난 터에 본인만을 위한 사치스러운 궁전 지으려고 하는 등 비극적인 사고로 재산과 목숨을 잃은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사고를 이용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소문이 부추겨진 것이므로 사실이 아닌 것이지 네로 본인이 억울함을 주장할 수는 없었다.
그가 화재로 집을 잃은 사람들의 피난처로 자신 소유의 정원을 개방해 캠프를 짓고, 모든 속주에 명령해 구호 물자를 로마로 보내게 하고, 불에 잘 타는 소재로 집을 짓지 못하도록 법령까지 짓은 것은 좋았다고 해도, 하필 화재로 소실된 자리에 황금 저택을 짓겠다고 했으니 가뜩이나 민감해져 있는 감정에 "저 자식 일부러 불 지른 거 아냐?"라는 가짜 뉴스가 나돌 수밖에 없다. 여기에 "로마가 아름답지 못하다"며 다 때려 부수고 새로 건축해야겠다고 떠들고 다녔던 이전의 온갖 헛소리까지 들춰지면서 로마 대화재의 범인으로 지목되지 않은 게 이상한 수준이었다. 여기에 더해 굳이 무고한 크리스천들에게 누명을 씌워서 학살한 행동은 이 당시 기독교를 안 좋게 보던 로마인들에게도 “기독교도들이 좀 괴짜긴 해도 불을 질렀을 리는 없는데 왜 누명을 씌우지?”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당대 로마인들의 생각이 전 유럽이 기독교화되고 난 뒤에 ‘최초로 기독교를 박해한 황제’라는 타이틀과 공인된 폭군이라는 평가와 결합되면서 4세기 이후에는 아예 죽일 놈으로 평판이 더욱 나빠진다. 오늘날까지도 유럽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로마 역사상 크리스트교를 크게 박해한 황제'로서 완전히 인식이 박혀 있다.
따라서 재평가론자들이 현대의 관점에서 "콤모두스처럼 완전히 일을 내팽개치진 않았고, 재위 초반엔 꽤 잘하지 않았냐"고 평가해 주고는 있지만 이런 성과를 인정하더라도 네로는 동시대 로마인들이나 1세기 이상의 후대 로마인들에게도 욕을 먹었고 제정 시대 로마인들을 기준으로도 공화주의자, 황제파 가릴 거 없이 모두에게 분명 "폭군, 암군, 독재자" 취급을 받았으며, 그가 했다는 선행 역시 로마인들의 기준으론 가이우스(칼리굴라)와 도미티아누스, 카라칼라, 갈리에누스로 대표되는 네 명과 달리 그 결이 다른 실정에 불과했다.
먼저 "네로가 주연을 열면서 평민과 귀족을 차별 없이 두지 않고 베푼 덕에 원로원에게 미움을 받았다는 점에서 억울한 점이 많았다"는 주장은 일정 부분 맞을 수 있다. 공화정 시대 루쿨루스를 비롯해 카이사르, 제정 시대의 아우구스투스, 도미티아누스 등도 연회를 통해 주최자의 자비로움과 모든 참석자의 일체감을 사용했고, 로마에서 황제나 부유한 귀족, 기사 계급들이 여는 주연은 참석자 모두 계급에 상관없이 똑같은 음식을 대접받고 즐겼기 때문이다. 허나 재평가론자들의 주장에 대해 로마사 연구자들은, 네로가 욕먹은 것은 평민과 귀족을 차별 없이 두지 않고 동등하게 연회를 베풀어주고 귀족들을 웃음거리로 만든 이유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도리어 로마인들에게 네로가 욕먹은 이유는 황제라는 작자가 미식가들이나 벌일 법한 일을 취미 생활의 일환으로 자주 베풀면서도 주연 빈도가 지나칠 정도로 많았기 때문이다. 황제가 베푸는 빵과 서커스는 기본적으로 황제 개인 금고와 황제 국고에서 지출되는데, 네로는 이를 넘어서는 비용을 들여 주연을 베풀었다. 이는 백여 년 뒤 하드리아누스 시대 때 서민들이 한목소리로 "네로와 똑같네'라고 공개적으로 황제를 비난하면서 "네로처럼 아예 노래도 불러주고 춤도 추면서 24시간 내내 먹을 것 좀 주든지"라고 조롱한 것을 생각해 보면, 네로의 행동은 선정이라고 재평가해 주더라도 빵과 서커스를 제공받았던 서민들에게도 분명 대책 없는 빵과 서커스의 표본이 네로였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네로가 돈을 많이 쓰면서 국고를 구멍내긴 했지만, 이는 아우구스투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의 정책을 계승했기 때문에 가혹한 비판이다는 주장이다. 네로 시대 때 로마시는 네로의 관심 속에 수많은 목욕탕, 체육 시설, 식료품 판매 시장, 곡물 창고 등이 개보수되고 신설됐고, 로마 황제들의 미덕은 황제의 이름으로 지어진 공공 건축물과 인프라의 제공도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재평가론자들의 주장처럼 네로의 끝없는 공공 건축물과 서민 유흥 시설 건축은 그가 폭군으로 비난받기에 무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네로는 로마 대화재 이후, 쓸데없는 실언을 하면서 황금 궁전 같은 대규모 프로젝트로 의심을 샀고, 그의 건축 정책들은 제정 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일관된 주장처럼 소위 "이것저것 벌여놓은 일이 많고 판이 컸다". 따라서 네로가 좋은 의도로 공공 건축물을 짓고 황금 궁전을 건설해 로마에 활력을 불어넣겠다고 계획했다고 해도, 이를 지켜본 로마인들은 당연히 "개인 사치를 위한 취미 생활"로 생각한 것은 당연했다. 당장 네로의 실정을 정리한 플라비우스 왕조의 베스파시아누스가 만든 공공 건축물이 콜로세움이었고, 로마인들이 신분을 막론하고 네로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네로의 계획들을 다 뜯어고쳤는지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학계의 재평가론자들 역시 인정하듯, 네로는 상술한 것처럼 로마인들의 기준으로도 독재자였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황제의 스승 프론토가 충고했듯 로마인과 로마 제국, 원로원에서 황제에게 요구하는 최대 덕목은 일하는 황제라는 부분에서 낙제점을 일찌감치 받은 함량 미달자였다. 조금 강하게 말하면 "비참하게 몰락할 법한 사람"으로 티베리우스, 칼리굴라조차 순한 맛에 불과하도록 인식될 악행을 저지르면서 국고를 탕진하고 공연과 연회로 놀고먹는 폭군이자 암군이었다.
기원전 31년부터 로마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실질적 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는 두 차례의 조정 헌법 조치 등을 통해, 기형적 형태의 삼두정체나 기원전 2세기 이후의 공화정 구조와는 다른 프린키파투스(원수정)를 만들어냈다. 이때 아우구스투스의 프린키파투스 체제는 외형상 공화정 체제이면서, "황제와 원로원" 간의 양두 정치 모습을 보였다. 물론 그 본질은 "황제>>>원로원" 구조였고, 아우구스투스의 협력 요청은 늘 형식적이었지만 그가 40여 년의 세월을 거쳐 완성한 원수정은 원로원이나 대다수 로마인들에게 형식상이나마 공화정체의 유지였다. 그래서 서양의 로마사 학자들은 아우구스투스 이후부터 디오클레티아누스 이전까지의 로마 원수정(프린키파투스)을 원로원의 재가를 받는 선거에 의한 입헌 군주정 모습을 띤 로마식 국제라고 설명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로마 제정 시대, 특히 프린키파투스로 불리는 원수정체는 전제 군주정(도미나투스)으로 점점 그 형태가 변화가는 과정 속에서도 반드시 지켜야 될 기본 원리가 존재했다. 그것은 바로 황제의 권한은 원로원의 협력과 그들과의 투표를 통해 결정된 시스템으로 돌아갔다는 원리였다. 이는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들지 않은, 프린키파투스에서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가 완성한 공화정 속의 원수정체 안에서 황제가 반드시 지켜야 될 기본이었다. 실제 초기 프린키파투스 체제는 아우구스투스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가의 후계자들에게 그 방식상의 문제일 뿐, 황제로 불린 프린켑스는 본인 스스로 자신이 제정하지 않은 법들에 제한받은 부분까지 네로를 제외하곤 형식상 존중했다. 이는 후대에 이르러 폭군이냐 암군이냐로 논쟁 중 2000년대 이후 재평가 중인 가이우스(칼리굴라)[20] 역시 마찬가지였고[21], 지나칠 정도로 냉혹했던 티베리우스조차 인내심을 잃은 말년까지 고소, 고발 등에서 늘 로마법을 지켜줬다. 심지어 두 황제는 세야누스의 음모나 갈리아 원정 직전 터진 현직 집정관 두 명의 칼리굴라 암살 미수 계획 사건에서도 네로와 달리 증거가 나온 다음 반역법에 따라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즉, 원로원에게 네로 시대 이전까지 미움을 받은 율리우스가의 두 황제들은 재위 기간 내내 원로원에게 '냉혹하고 변덕스럽다'고 평가받았음에도, 또 실제 암살 음모가 발생해 그 당사자들을 처벌할 때도 네로와 달리 로마법상 주권자로 명시된 원로원을 형식적으로나마 존중해 줬다. 그런데 네로는 엿가락처럼 늘리고 줄일 수 있는 반역법까지 악용을 넘어, "의심"만으로 악랄하게 활용했다. 이는 피소 사건에서도 그랬고, 피소 사건 이전인 사촌 형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 등을 제거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네로는 티겔리누스 등을 이용해 원로원을 협박해 표를 얻거나 증거 없이 재판장에서 완전히 무죄로 결론 난 정적을 유배 보내는 등의 아우구스투스가 제시한 원수정체의 기본 원리까지 무시한 부분도 많았다. 따라서 원로원이나 상식 있는 로마인들의 기준에서 네로는 "황제라는 사람이 대놓고 불법 행동을 저질렀다"고 비난받았다. 그리고 사후에는 악랄함의 대명사가 된 이유가 됐다. 즉, 외삼촌 칼리굴라이나 먼 친척 증조할아버지뻘인 티베리우스 황제 이상으로 악랄하게 근위대를 활용해 허수아비나 다름없던 원로원의 형식적 영역까지 침범한 케이스가 네로였던 것이다. 따라서 콤모두스가 나타나기 전까지 네로는 도미티아누스와 세트로 묶여 원로원에게 "악랄한 황제들보다 더 독재자"라고 비난받았는데, 여기에서도 네로는 도미티아누스와 달리 더 문제가 많았다고 욕을 먹었다.
네로는 도미티아누스와 달리 살아있던 시절 이미 원로원에게 국가의 적으로 선포되고, 빈덱스의 반란을 시작으로 로마군에게까지 불신임을 받아 로마 제국의 두 주권 행사자로 명시된 두 집단 모두에게 탄핵된 황제였다. 이때 빈덱스나 원로원 모두가 지적했듯, 네로의 탄핵과 몰락은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프린키파투스 체제 아래에서 그 속사정까지 완전히 무시한 결과로 언급돼 "군대의 불신임➔속주 총독들의 불신임➔원로원의 불신임➔프라이토리아니의 불신임"으로 이어지는 로마 황제 최초의 폭군 공인 과정으로 이어졌다. 이는 똑같이 기록 말살형에 처해진 도미티아누스와 차이가 있는 부분이고, 전지적 원로원 입장에서 나쁜 황제들로 평가받는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카라칼라 등의 황제와도 그 결이 전혀 다르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원로원에게 기록 말살형에 처해졌다고 해도, 네로처럼 군대, 속주 총독들에게까지 "당신은 폭군이고 따를 수 없는 함량 미달자입니다"라고 찍힌 황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네로와 달리 군대와 로마 시민권자인 민중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군대와 프라이토리아니는 후임자인 네르바를 강금하는 등 항의까지 하면서 그를 지지했다. 즉, 네로와 달리 도미티아누스는 원로원과 사이가 냉랭하고 험악한 데다 변덕스러운 면도 있던 티베리우스, 칼리굴라와 비슷한 황제이면서도 원로원과의 관계 외에는 두 황제와 달리 그 평가가 좋았던 황제였다. 그럼에도 그가 원로원에게 기록 말살형에 처해지면서 폭군이 된 이유는 원로원 의원들을 기소한 다음 고문까지 동원해 숙청했고, 본인 스스로 대놓고 원로원을 무시한 점이 결과로 이어진 게 컸다.
굳이 크리스트교 때문이 아니더라도 수에토니우스[22]나 디오 카시우스[23] 등의 역사가들에게도 많이 까였다. 먼저 그는 여러모로 ‘당대 로마인’답지 않았다. 네로는 공화정, 원수정 초기 로마인 중 누구보다 열렬히 그리스 문화를 사랑했고, 그 성향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일부 헬레니즘 군주들의 퇴폐적 모습을 보였다.
여기에 더해 행실 역시 상당히 문제가 많아서 즉위 초부터 로마인들에게 욕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밤마다 길거리를 배회하면서 친구들과 술집을 찾았고, 퇴폐적 군주들처럼 다른 귀족이나 황족 여성들, 자유민 미소년들을 상대로 농담조로 희롱하는 것을 거리낌 없이 해댔다. 여기에 더해 네로는 성년식 이후에도 여러모로 로마인들과 달랐는데, 제국의 황제임에도 수염을 깎지 않은 채[24] 구레나룻부터 턱수염을 길게 길렀다. 이는 같은 황실 내 남성 황족 중 몇 명[25]이 비슷하게 수염을 길렀기 때문에 개인 성향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 문화 애호가였던 네로의 평소 성향, 행동은 다른 황족들과 달리 지극히 그리스 애호가적이고 개성도 강해 세간의 평가가 안 좋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다 그는 이전 티베리우스, 칼리굴라처럼 ‘소문’이 실제한 악행으로 왜곡되어 비난받는 게 아니라 실제 행동이 문제였다. 바로 당대 로마에서 나쁘게 평가하던[26] 동성애적인 행사를 공개적으로 하는 등 "문란"했고, 사치 역시 심각할 정도로 심했기 때문인데 이는 순전히 개인의 쾌락을 위한 무분별한 사치인 데다 그 때문에 재정이 진짜로 파탄 나서[27] 빵과 서커스라는 실드조차 로마인들에게 받지 못했다. 또 그는 정치를 완전히 손 떼지 않았음에도 노래나 시, 연극 등에 지나치게 열중하는 모습을 보였고, 지나치게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했다. 아울러 본인 스스로의 행실이나 언사도 지극히 즉흥적이고 감성적이었고, 여성 편력 역시 문란해 이 부분에서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정치 스타일도 점차 변했는데, 처음에는 나름 신중했던 성격은 가면 갈수록 광포해졌으며 5년간의 선정 이후에는 앞서 언급하였듯이 재위 후반기로 갈수록 무절제한 사치 행각이 날로 극심해졌다. 이러한 자신의 사치를 감당하기 위해서 네로는 로마의 다른 속주를 세금으로 쥐어짰다. 네로의 선물 비용은 20억 세스테르티우스로 로마의 연간 군사비의 몇 배에 해당하는 액수였다고. 당시 로마에는 소득세가 없어[28] 고스란히 속주세로 메워야 했고 그만큼 속주는 막대한 세금을 내야 했으며, 심지어 부자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고 재산을 갈취하거나 속주의 유력자들의 재산을 강탈하는 일도 발생하여 속주와 원로원, 상류층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60년의 속주 브리타니아에서의 켈트족 부디카 여왕의 거병이나 66~70년에 속주 유다이아에서 대대적인 민란이 일어난 원인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는 네로 사후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과 무질서를 잉태하여 로마 제국을 한동안 내전에 시달리도록 하였다.
네로가 탄압하고 숙청한 것은 주로 귀족과 상류층 그리고 (당시 로마에서는 별로 인식이 좋지 않던) 기독교인들이었기 때문에[29] 의외로 그의 수탈 범위 내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었던 로마 민중들의 네로에 대한 악감정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게다가 네로는 노예가 법정에서 주인에게 항의할 수 있게 해주는 법을 시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잘 이용했다면 속주와 원로원의 반역을 어느 정도 잠재울 수 있는 기회도 있었겠지만, 네로는 이를 살릴만한 정치적 역량은 없었다. 애당초 그에게 그만한 정치적인 감각이 있었다면 그토록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리도 만무했겠지만. 후대에는 네로에 대한 평가가 더욱 나빠졌는데, 예컨대 네로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제위에 오른 베스파시아누스가 민심을 사로잡기 위해 황금 궁전과 인공 호수를 없애버리고 그 자리에 콜로세움[30]을 세운 것이 그 예이다. 굳이 지반이 불안정한 호수를 메꿔가면서까지 네로 황제의 흔적을 없애려고 한 것을 보면 굉장한 집념이 느껴질 정도.
내치적인 평가와는 별개로 외치적으로는 괜찮은 평가를 받는다. 부디카의 반란은 주둔한 로마군이 부디카의 딸들을 강간하는 등 네로가 통제 불가능한 사태로 인해 촉발된 점이 참착되어야 하며[31] 유대의 반란은 헤롯 왕조의 몰락으로 인해 촉발된 사태이다. 유대 자체도 훗날 현제 하드리아누스마저도 골치 아프게 할 정도로 반로마적인 분위기가 팽배했으며 이 두 반란 진압에도 유능한 사령관[32]을 투입시키는 등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하여 피해를 최소화했다. 네로의 최대 업적인 파르티아 사태 역시 코르불로를 배치하고 흔쾌히 아르메니아 왕에 티리다테스를 앉히는 등 외교적으로 뛰어난 감각을 보였다.
5. 기타
- 다른 씨족 가문들과 다르게, 타 씨족 태생의 양자를 들여 입양하지 않았던 클라우디우스 가문에서 최초로 입양한 남성이 네로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입양 전 네로의 프라이노멘이 클라우디우스 가문 내에서 흑역사 취급되어 철저히 금지된 프라이노멘 ' 루키우스'였고, 네로 본가에서 가장 자랑스러워하면서 독점적으로 사용한 프라이노멘이 루키우스였다.[33]
- 원수정하의 제정 로마 시대동안 제위에 오른 황제 중, 엘라가발루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가장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오른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 야사 같은 이야기들에 따르면 네로가 태어난 그날, 네로의 친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친구, 친인척들에게 축하를 받는 자리에서 갓 태어난 아들을 인지해 주면서 “나와 아그리피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라면, 가증스럽고 혐오스러운 놈이 될 수밖에 없을걸?! 얘는 국가적 위험이 될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따라서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는 자기 아들이 맞다고 인지를 한 뒤, 평소처럼 행동한 남편을 대신해 아이 이름을 짓기 위해 고민하다가, 오빠 칼리굴라에게 사람을 보내 자기 아들에게 마땅한 이름을 지어달라고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이는 그녀가 오빠에게 자기 아들을 황족으로 인정해 달라는 요구였는데, 당시 칼리굴라는 삼촌 클라우디우스와 황궁 안에서 국가 사무를 논의하고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아그리피나의 시종이 이를 전하자, 어이없다는 듯이 웃고 힐끗 숙부를 쳐다본 뒤 "클라우디우스라고 짓는 게 어떠냐?"라고 농담하곤 알아서 하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는 자신의 숙부 클라우디우스가 아그리피나와 그 남편 그나이우스에게도 웃음거리 내지 조롱거리로 인식된 것을, 칼리굴라가 정곡을 찌른 뼈 있는 농담이었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가 맞다면 결과적으로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입양을 통해 진짜 클라우디우스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 수에토니우스가 기록한 전설에 따르면 네로가 어린 시절 암살 시도가 있었는데 이때 암살자들이 뱀 허물을 보고 뱀으로 착각해서 목숨을 건졌고[34] 어머니 아그리피나는 이 뱀 허물을 황금 팔찌로 만들어 네로가 착용하고 다니도록 시켰는데 훗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팔찌를 버렸으며 얼마 뒤에 몰락했다고 한다.[35]
- 친할아버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를 무척 자랑스러워했고 스스로 자신을 할아버지 못지 않은 천재적인 예술가이자 운동선수로 자처했다. 하지만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재능은 제국 동방에서 선보인 천부적인 외교적 감각 외에는 없다시피 했고 스스로는 예술에 탐닉했지만 능력은 함량 미달이었다는게 중론이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공화정 시절부터 내려온 유서 깊은 명문가 자제임에도 오늘날 프로스포츠 선수에 해당한 전차기수로 활동했다. 그는 비슷한 배경을 둔 부유한 자제들과 달리 운동 능력이 탁월하다고 인정받았고 전차기수로 활동한 20대 초반까지 슈퍼스타로 제국 전역에서 위상이 대단했다. 따라서 그는 짧은 선수 생활에도 리그에서 헌신적인 주장이자 리더로 팬들 사랑을 독차지했고 수많은 트로피를 들어올리면서 엄청난 상금을 쓸어담았다.[36] 그는 원로원 의원이 된 직후 전차기수에서 은퇴한 다음 무언극 배우 활동을 하면서 가수로도 활동했는데 열정적이고 천재적인 예술 감각으로 인기를 누렸다.[37] 동시에 그는 이렇게 예술적 재능을 쏟아내면서도 장군으로 세운 업적과 보여준 능력 모두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게르마니아 전쟁 당시에는 대 드루수스, 티베리우스 다음의 야전군 총사령관으로 있으면서 1년 동안 세운 군공은 아우구스투스의 두 양자인 이들 형제 못지 않다고 평가받았고 그가 세운 방벽과 순찰도로는 토이토부르크 전투 직후 로마가 게르마니아 점령 부분을 전부 상실하지 않는 과정에서 버팀목이 되어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에게 극찬을 받았다. 외교관으로 선보인 동방 외교에서는 파르티아, 아르메니아 사이에서 감각적인 판단으로 위기 상황마다 소방수로 등판해 문제를 해결해냈다. 따라서 네로는 첫 아내와 입양형제이자 처남, 어머니를 죽인 직후 자신의 본가를 강조하고자 입상을 세울 때 아버지 전신상 건립에 앞서 할아버지의 전신상을 우선적으로 세워달라고 원로원에 요청했다. 그렇지만 네로는 할아버지와 달랐는데 그는 전차기수로 활동하면서 뛰어난 운동 능력은 커녕 전차 운전 실력이 형편없고 전술 활용은 기대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연기 실력은 형편없었고 자기는 노래를 잘 불렀다 생각했지만 심각한 음치여서 노래를 어떻게든 잘 부르기 위해 목에 안 좋다는 음식도 가려 먹고[38] 복근도 단련하는 등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결과가 영 시원찮자 박수 부대를 조직해 거금을 쥐어주며 공연마다 따라다니며 억지 호응을 유도해 바람을 잡았고 공연장 문을 잠가 청중으로 하여금 자신의 노래를 듣게 하는 등 행패를 부렸다. 한편 베스파시아누스는 젊었을 적 네로의 시를 듣다가 조는 바람에 네로의 노여움을 산 적이 있다. 다행히 그 자리에 있던 네로의 총신 페트로니우스의 비호로 유배되는 선에서 끝났다.
- 네로의 아내인 포파이아 사비나는 목욕을 위해 당나귀를 500마리나 길렀으며 본인의 피부 관리를 위해서 아침과 저녁에 당나귀 젖으로 목욕했다고 한다. 이를 위해서 500명의 노예를 두었고 여행을 떠날 때도 이들을 데리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있다.
- 향수, 향신료, 장미에 대한 사랑이 대단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그리스 문화 애호가였던 네로는 유명한 향수 매니아였고, 그리스에서 로마로 넘어와 인기를 끌던 장미 역시 광적으로 좋아했다. 그래서 장미로 만든 향수로 분수를 만들어 배치했으며, 향수 바른 새를 집 안에 날아다니게 했다고 한다. 또한 자신이 개최한 연회에서도 사람이 장미에 깔려 질식사할 정도로 장미와 향수를 사랑했다. 이런 까닭에 그는 아내 포파이아 사비나와 함께 사용하는 방에 장미 꽃잎을 가득 채워 지냈고, 늘 장미 꽃잎을 채운 욕조에서 목욕을 즐겼다고 한다. 아울러 네로는 값비싸기로 유명한 향수와 향신료들을 거침없이 소비했다고 하는데, 아라비아에서 생산되는 향수 10년 치를 아내 포파이아의 장례식에서 한 번에 사용했고 시나몬을 한 도시에서 1년 소비할 양만큼 하루에 태웠다.
- 네로는 암살당하지 않기 위해 살아있는 동안 계속 독약을 마시며 내성을 길렀다고 한다. 네로는 채찍형으로 죽을 거라는 말을 들은 이후,[39] 덜 고통스러운 죽음을 위해 자살을 시도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택한 방법이 독물 자살(...). 허나 독 내성 때문에 죽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여러 번의 시도 후 원하던 대로의 죽음을 맞게 된다.
- 공교롭게도 칼리굴라와 같은 안티움[40] 태생이다. 안치오는 폭군들만 나온 땅이라 네로 사후엔 잊혔다가 1944년에 와서야 안치오 상륙 작전으로 다시 역사에 나타나는데, 이때도 결과는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것과 별개로, 네로의 악명이 워낙 높아, 안치오에는 현대 이탈리아의 한 예술가가 만든 청동 전신상이 세워져 있다.
- 고향 안티움 사랑이 대단해, 즉위한 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태어난 고급 빌라를 별궁으로 바꿨다가, 로마 대화재 이후 이를 철거하고 호화로운 빌라로 바꿔, 웅장하게 꾸미고 본래 가문인 아헤노바르부스 가의 우상화를 홍보했다. 로마 근교의 오늘날 라치오현 수비아코에도 인공폭포와 다리 3개가 있는 인공호수를 설치하고, 산책로와 극장까지 넣은 테마공원형 개인 별궁을 지었다. 이와 함께 그리스 올림피아에도 후대에 '네로의 빌라'라고 불린 별궁을 지었다. 이중 올림피아에 있는 네로의 빌라는 "NER. AVG."라는 서명이 적힌 납 수도관이 발굴되어, 빌라 유적에서 발굴된 호화로운 유물이 네로의 것임이 확인됐다.
- 2019년에 네로 황제의 지하 궁궐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2023년 네로의 개인 극장이 발굴되었다. #
- 네로(Nero)라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있다. 기능은 CD 롬이나 DVD 롬을 굽는 것. 영어로 "롬을 굽는 것"을 “burning ROM”(롬을 태운다)이라 하기 때문에, "로마에 불을 질렀다."는 네로의 이름이 붙여진 것. 문서에도 나와있듯 이는 누명이지만, 네로하면 유명한 사건인 만큼 네이밍 센스 좋은 프로그램의 대표적인 사례로도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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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년 실각 당시, 말 그대로
기록 말살형 조치와 국가의 적으로 규정된 만큼 당해부터 말 그대로 없는 사람 취급을 받았고,
콤모두스 기록 말살형 만장일치 당시에는 악랄함의 표본, 인간 말종의 교과서 등으로 가루 빻이듯 씹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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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파시아누스가 제정한 69년 제위 계승법이 새겨진 카파톨리누스 신전 내 동판에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고, 동판 법령에 명문으로 아에 자신과 두 아들이 갖는 로마 프린켑스의 정통성을 "클라우디우스와 그 아들 브리타니쿠스에서 이어받았다"고 말하며, 네로를 반(半)찬탈자 내지 비정통성 프린켑스로 규정했다. 이는 기록 말살형의 결과일 수도 있는데, 70년 로마 입성 후 황제의 첫 국정 연설을 보면 그냥 황제로 취급조차 안 했던 것에 더 가까웠다. 따라서 황제와 원로원에게 네로는 다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황제들이 언급되는 가운데, 공식적인 기념식이 없었던 칼리굴라보다 더 나쁜 놈으로 규정되어 언급조차 되지 못했다.
- 기록 말살형을 당한 황제들의 조각은 파괴되거나, 코 부분만 일부로 파괴해 버렸는데, 네로의 경우에는 아예 사람, 가축들 발에 밞히도록 해버렸다. 따라서 소아시아에서 발굴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위한 황제 숭배 제단의 경우, 완전 군장 차림의 10대 네로가 어머니와 함께 있는 부조는 다른 황제들과 달리 따로 떼어져 로마 가도 발굴 중 그 재료로 사용된 흔적이 발굴되었다.
- 티투스 황제는 천성적으로 정이 많고 따뜻한 성품을 지녔던 것으로 유명한데, 즉위 전과 즉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브리타니쿠스를 그리워했던 것으로도 로마인에게 유명했다. 따라서 그가 소년 시절 사망한 친구의 실제 크기 조각상을 만들도록 지시까지 내렸을 당시, 로마인들에게 이런 명령은 놀라운 이야기가 아니었다고 한다. 반면 티투스는 죽을 때까지 네로라는 인간 자체를 기억에서 잊으려고 했고, 네로를 진심으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티투스가 브리타니쿠스와 유아기 때부터 황궁에서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교육받던 불알친구였던 것도 있고, 네로가 브리타니쿠스를 독살할 때 티투스도 죽을 뻔했던 아픔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었다고 전해진다. 브리타니쿠스가 저녁 식사 중 독살될 당시, 티투스는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고 한다. 다행히 티투스는 많은 음식을 먹지 않았던 탓에 기절해 의식을 잃었는데, 바닥에 쓰러진 채로 죽어가는 친구를 지켜봤다. 그때 네로는 죽어가던 브리타니쿠스와 의식을 잃어가던 티투스를 가리켜 "간질을 앓고 있어서 그런 거다. 놀라지 마라."고 둘러댔다고. 따라서 성인이 된 이후 티투스는 이 기억을 인생 최악으로 생각해 성인이 된 이후에도 종종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 사후에 네로를 사칭하여 반란을 꾀한 인물들이 동방에서 여럿 등장했다. 자세한 내용은 테렌티우스 막시무스 문서 참조.
- 같은 폭군인 조선의 연산군과 공통 분모가 꽤 있다. 모계 컴플렉스가 강하게 의심되는 성향, 즉위 초반부에는 기대에 맞게 나름대로 좋은 통치자의 모습을 보여준 점, 군주보다는 예술가의 성향이 더 강하게 나타난 부분, 각종 패륜과 폭정을 저지르다가 결국 반란으로 쫒겨난 부분이 그것. 하지만 네로와는 달리 연산군은 예술 능력 자체도 나름대로 뛰어났고, 가족들에게는 끝까지 진심으로 좋은 인물이었다.
- 수에토니우스의 묘사에 따르면 네로는 중간 정도의 키에 몸에 얼룩이 있었고, 밝은 금발에 곱슬머리가 층을 이뤘다고 한다. 그리고 몸에는 고약한 냄새가 났고[41], 온갖 방탕과 향략에 빠졌음에도 재위 14년간 세 번밖에 아프지 않을 정도로 건강한 체질이었다. 또 그에 따르면 네로의 목소리는 약하면서도 허스키했다고 하는데,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네로의 목소리는 작고 불분명해 확실히 매력은 떨어졌다고 한다.
- 네로는 수염을 즉위 초부터 구레나룻부터 턱수염까지 길게 길렀는데 본가 분파 성씨처럼 금빛 수염이었다고 한다. 다만 아헤노바르부스라는 코그노멘의 뜻이 붉은 수염 내지 구릿빛 수염을 뜻했기 때문에, 이런 묘사대로 생각해 보면 아마도 붉은 수염보다는 브론즈 톤의 수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그는 그리스 문화 애호가답게 머리 스타일 역시 그리스나 헬레니즘 군주들처럼 곱슬머리를 층을 이뤄 정돈한 스타일부터 다양한 머리 스타일을 유지해 로마인들의 전통적 머리 스타일과 많이 달랐다. 따라서 네로의 초상화들은 오늘날에도 초기 원수정 황제나 황족들의 초상화와 확연히 구분할 수 있다고 평가받는다.
- 사생활적으로 살펴보면 여성 편력이 상당히 심했고, 그리스 문화가 로마인들에게 경멸받은 가장 큰 이유인 미소년에 대한 동성애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네로는 클라우디아 옥타비아와 결혼한 상태에서도 오토의 아내였던 포파이아 사비나와 잠자리를 거리낌 없이 가졌다고 하며, 유부녀와 여성 황족들에게 희롱조 농담을 하거나 음탕한 행동을 했다. 아울러 미소년 피타고라스, 스포루스를 동성 애인으로 뒀는데, 스포루스의 경우에는 본인이 황제임에도 국법을 어기고 아예 거세시켰다. 또 네로는 거세된 그를 남편 역으로 하고 피타고라스를 아내 역으로 한 뒤 ‘결혼’시켰으며 본인 역시 동성 애인들과 ‘성적 방종’을 벌였다. 특히 그는 거세된 스포루스와 관계를 주로 맺었는데, 그가 이 미소년을 사랑한 이유는 전 황후 포파이아 사비나와 무척 닮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42]
- 네로는 전문적으로 자신의 취향을 관리하고 사치품을 조달하는 관직을 만들어 운영했고, 사치 역시 심했다. 또 리라를 비롯해 각종 악기 연주를 위한 스승을 둔 뒤 예술 활동을 장려하고 기량 발전에 노력했고 공연 때마다 지나치게 비싼 의상을 입고 근위대가 밤낮으로 자신의 컨디션과 리라 상태를 관리케 했다. 따라서 이는 황제와 왕실의 기반인 전통 귀족들이 그를 경멸하고 안 좋게 인식한 가장 큰 이유가 됐다.
- 그리스인과 아카이아 속주, 마케도니아 속주 일대에게는 다양한 혜택을 주고, 오래된 폴리스에게는 자치권과 자유를 폭넓게 특권으로 부여해, 이곳에서는 선정을 베푼 황제로 사랑받았다. 따라서 코린토스 지협에서는 운하를 뚫은 바위면에 네로를 새겨 넣고, 동상이나 석상을 많이 만들어 모셨다.
- 그리스인에게 받은 사랑과 별개로, 로마와 이탈리아 안에서는 미움의 대상이 됐다. 특히, 네로의 모든 사치 자금을 제공하고, 툭하면 온갖 이유로 삥을 뜯긴 부자, 원로원 의원, 상인들에게 차라리 냉혹한 티베리우스, 칼리굴라가 나았다는 말을 했고, 네로가 올림피아에 머물 때 모든 연회 비용을 부담한 그리스 귀족들은 치를 떨었다.
6. 대중매체
- 할리우드에서는 전통적으로 악역 담당이다.
- 셴키에비치가 쓴 소설 쿠오 바디스를 원작으로 한 1955년 영화에서는 명배우 피터 유스티노프가 네로를 연기했다. 자신의 눈물을 호리병에 모으고 돼지 멱 따는 소리로 노래를 불러재끼는 등 네로의 똘기를 신기에 가깝게 묘사한 게 일품. 야사대로 로마에 불을 지른후 시내를 내려다보며 시를 읊는 장면이나, 이후 군중들이 몰려오자 주변 사람들에게 열심히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은 명장면이다. 이때 페트로니우스가 군중들이 정의를 원한다 하자 "정의를 원하는 이는 없어. 복수를 원하지."라 말대꾸하다 기독교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자는 발상을 떠올린다. 질려버린 네로의 측근 페트로니우스는 자살하기 전에 편지에다 대고 네로에게 "차라리 사람을 죽일지언정 네놈의 시를 듣는 고통을 안기지는 마라"고 욕을 퍼붓고, 페트로니우스의 편지를 본 네로는 거품 물고 기독교인 학살에 나선다. 이후 폐위당하고 갈바가 황제에 즉위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동일하다.
- 게임 Ryse: Son of Rome에서는 네로가 죽지 않고 늙고 연로할 때까지 통치하고 있었다는 설정으로 등장한다. 게임상 설정으로는 네로가 두 명의 아들을 얻었는데 그들의 이름이 ' 콤모두스'와 '바실리우스'다(...). 콤모두스는 네로처럼 로마사에서 못난 황제로 악평이 높다. 네로는 파르티아와의 외교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한편 대화재 진압과 전후 복구 사업을 몸소 지휘하는 등 그나마 실드를 쳐줄 수 있는 구석이 군데군데 있지만 이쪽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바실리우스[43]는 원래 왕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로 동로마 제국에서 황제를 부르는 칭호가 되었다.
-
닥터후
1대 닥터가 네로를 만났을 때 지도를 불태웠다. 네로는 이걸 보고 영감을 얻어 로마 전체를 태웠다.
이때 자신이 로마 대화재의 원인이 되었다는 걸 알자 엄청 좋아하는 1대 닥터의 표정이 압권. 그래 놓고는 뉴 시즌 4 에피소드 2에서는 10대 닥터가 로마 대화재는 자기랑 상관이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다만 실제로 재생성되면 그전 닥터는 자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 유희왕의 검투수 몬스터인 검투수 네로키우스의 이름의 모티브가 되었다.
- 1980년대 말 인기를 끌었던 코미디 프로그램인《 쇼 비디오 쟈키》의 코너 중 <네로 25시>라는 그 당시의 한국의 정치와 사회를 풍자하는 코너가 있었다. 최양락이 진 주인공 네로 황제 역을 맡았으며, 프로그램 내에서도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는 간판 코너였다. 이 코너가 큰 인기를 끈 덕에 국내에서 네로 황제의 인지도가 상당히 늘어난 건 덤이다.
[1]
도미티이 아헤노바르비 마우솔레움
[2]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와, 네로 탄핵 당시 원로원과 군대에서 일관되게 정의한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직계는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 대드루수스, 게르마나쿠스와 클라우디우스, 브리타니쿠스’였다. 이때 가이우스 카이사르,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소드루수스,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등 아우구스투스 집안 남성들이 언급되지 않은 것은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가계를 기준으로 언급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3]
세네카가 유능한 사람인 건 사실이지만 네로를 통제할 수 없는 군주로 만드는 데 책임이 있다고 평가를 받고 있다. 네로의 스승인 세네카는 소아그리피나파와 힘겨루기를 하는 동안 10대 사춘기였던 네로에게 프린켑스로서 네로가 돋보여야 된다고 조언하는 과정에서 취미 활동인 전차 경기 몰두와 음악 활동을 장려하고 헬레니즘 군주와 같은 행동도 하도록 조언해 결과적으로 네로를 통제하기 힘든 황제로 만들고 말았다.
[4]
네로와 달리 이전 황제들인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는 세네카를 신뢰할 수 없는 자로 여겨 그를 견제했고, 죽이거나 완전히 추방시킬 생각도 했다. 실제로 세네카는 로마로 복귀한 이후, 신임 근위대장이 된 부루스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친구가 되었고, 서서히 힘을 키워나가면서 어린 네로의 스승이 되기에 이르렀다.
[5]
어디까지나 '기질'이 강했을 뿐, '재능'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간혹
아돌프 히틀러와 비교되기도 한다.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재능이 없었던 네로와 달리 히틀러는 당시 워낙 뛰어난 예술적 소양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을 뿐이지 히틀러 본인 역시 나름대로 예술로 먹고살 만한 재능은 있었다.
[6]
참고로 칼리굴라에 대해 현대 역사가들은 고대 역사가들의 혹평은 당대 역사가들이었던 원로원 의원들이 황권을 강화하려한 칼리굴라를 싫어하여 상당히 깎아내렸다고 재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7]
특히 로마 대화재의 배후에 네로가 있었다는 루머는 거의 중상모략이다.
[8]
참고로 이렇게 될 뻔한 명군으로는
하드리아누스가 있다.
[9]
네로와 도미티아누스가 얼마나 전통적으로 '폭군'으로 여겨졌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참고로 도미티아누스는 자신에 반대하는 원로원 의원들을 강하게 탄압했을 뿐, 내정 부문에 있어서는 현재 역사가들은 타키투스만큼 나쁘게 평가하지 않으며 오히려 유능했다고 간주한다. 하지만 네로는 통치 방식이 도미티아누스의 야만성을 넘어서 악랄하고 방치 수준의 국정 운영으로 제국 역사상 최악의 지도자로 여겨졌다는 뜻.
[10]
티베리우스는 '얘 대타로 세운다!'라고 아우구스투스가 유언장에 써놓는 바람에 권력 기반이 약했고, 그가 델라토르,
프라이토리아니를 활용해 정적 제거를 한 까닭은 즉위 직후부터 터진 리보 형제의 암살 시도 등으로 하게 된 조치가 그 시작이었다. 티베리우스의 치세 후기 역시 세아누스라는 로마 최고의 간신에 의해 가문이 결딴날 뻔하자 복수심에 의해 숙청을 많이 한 쪽에 가까우며, 마크로를 통한 치세 말의 공포 정치 역시 원로원에서 후계 구도를 위협하고 벌인 계속된 음모에 대한 맞대응이 거진이었다. 그렇지만 이보다 중요한 것은 티베리우스가 황제로서 해야 할 일은 제대로 처리한 것을 넘어, 역대 로마 황제 중 업무적 측면에서는 선황 아우구스투스보다 훨씬 더 뛰어났다는 점이다. 칼리굴라는 치세가 너무 짧았고,
세네카,
수에토니우스,
디오 카시우스의 주장에 따라 과장되고 꾸며낸 중상모략으로 이미지가 대단히 나쁘다. 그렇지만 그는 원로원 입장에서 그를 평하고, 중상모략으로 알려진 나쁜 이미지와 달리, 놀라울 정도로 멀쩡하고 황제로서 해야 할 역할을 충실히 하고, 행정적 능력과 정치적 안목 역시 이미지와 달리 나쁘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나칠 정도로 냉혹하고 숙청에 거리낌이 없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그가 냉혹하게 죽였던 사람들은 대부분 그에게 직접적으로 위협이 되는 정적, 암살 시도를 벌였던 원로원 의원들이라 권력 강화 작업을 위한 숙청에 가까웠고, 일반 시민들은 손대지 않아,
칼리굴라 암살 사건 당시 서민들이 무리를 지어 원로원 의원들을 때려 죽이는 일까지 벌어졌다.
[11]
로마인이 말하는 "일하는 황제"란 일 처리를 잘하는 황제가 아니라, 진짜 업무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는 황제를 말했다. 이는 공화정 시대부터 내려온 로마인 남녀노소의 건전한 상식으로
모스 마이오룸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런 까닭에 성실히 업무를 수행했고, 능력이 좋았던 네로의 친할아버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취미로 건전하게 무언극 배우, 전차 기수로 활동하면서 뛰어난 배우이자 운동선수로 사랑을 받았음에도, 이런 예술적 재능 발휘와 괴짜 기질 때문에, 동료 원로원 의원들에게 죽을 때까지 욕을 먹었다.
하드리아누스가 현군임에도 로마인들에게 비난받은 이유 역시 비슷했다. 하드리아누스는 예술가적 기질이 뛰어나고 아내를 데리고 제국 순행으로 여행을 많이 한 덕에 "가만히 앉아서 일 좀 해라"고 면전에서 대놓고 욕을 먹었고, 국가 축제 기간 중에는 "이렇게 먹을 것을 주지 말고, 아예 네로처럼 노래도 불러주고, 함께 여행 갈 기회라도 줘라"고 조롱까지 받았다. 따라서 하드리아누스는 경기장 관람객들이 이렇게 욕을 퍼붓는 가운데, 머리끝까지 화가 났음에도 자신이 일하는 황제로서 덕목에 어울리지 못했다며, 묵묵히 욕만 먹었다.
[12]
아우구스투스가 외손자이자 양자이며 후계자인
가이우스 카이사르 요절 후, 만들어낸 '아우구스투스 가문'을 원로원에게 공인받으며 부여받은 황제와 황실의 의무 조항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 양자 티베리우스, 기원전 9년 요절했지만 두 혈육의 아버지로 정통성이 되어야 할 양자 대드루수스, 손자 게르마니쿠스와 소드루수스를 묶어 아우구스투스 가문이라고 했는데, 이들은 공공 도덕을 준수하고, 맡겨진 책무에 성실하게 임해야 했다.
[13]
네로는 각종 자기 취향의 건축, 콤모두스는 검투사질
[14]
존속 살해, 근친상간, 무분별한 사치, 폭력, 폭언, 살인 교사 등
[15]
제1 시민. 아우구스투스는 로마군이 최고 사령관에게 불리던 임페라토르를 사용할 경우 종신 독재관에 취임함으로써 왕정을 꾀했다며 살해당한 자신의 양아버지 카이사르처럼 원로원에 만연한 공화주의자들을 자극할 것을 우려하여 프린켑스라는 칭호를 사실상 황제의 칭호로 사용하였다.
[16]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17]
문제는 이렇게 말한 대표적인 상류층이 하필 로마 원수정 사상 최악의 무존재 황제라고 까인 비텔리우스였다는 것이다. 네로의 옛 친구 오토는 갈바가 행정 공백 등도 무시하고 네로 지우기를 나선 탓에, 이를 막고자 네로의 옛 관료들을 복귀시킨 다음 일 처리를 하게 했지만 비텔리우스는 아예 선을 넘어버린 셈. 따라서 타키투스와 수에토니우스 등 동시대 그를 체험한 사람들이 대놓고 “존재 자체가 무의미한 인간”, “비슷한 부류라서 생각하는 것도 우리와 다르다” 등으로 비텔리우스를 씹어댄 것이 아니다.
[18]
대부분의 로마 황제들은 원수정 시대 당시 보통 즉위 후, 원로원에서 교과서라고 칭송해 준 아우구스투스, 클라우디우스, 트라야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존경한다, 배우겠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이들 황제 외에도 행정성과 같은 부분은 티베리우스나 하드리아누스의 치적을 많이 참조하는 모습도 보였다고 한다.
[19]
후대의
콘스탄티누스 대제 역시 자신의 아내 파우스타와 장남 크리스푸스를 살해한 혐의가 있다.
[20]
과거에는 칼리굴라로 통칭화하여 불렀지만, 21세기 이후부터는 당대 로마인과 관보 및 당사자, 원로원의 표기 등을 존중해 황제의 이름인 가이우스로 부르거나, 논문 발표 등에서도 가이우스로 기재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21]
네로와 달리 칼리굴라는 재위 기간 중 병사들에게 불신임을 받지 않았고, 원로원조차 암살 직전과 직후 불신임을 행사하지 않았다. 물론 원로원은 가이우스의 암살 사건 직후 공화정 움직임을 가져가긴 했다. 그러나 원로원 내부는 극소수를 제외한 대다수의 원로원 의원들이 "어차피 아우구스투스의 카이사르 가문이 프린켑스를 맡고 있고, 공화정 체제가 존속 중인데 왜 공화정 선언을 다시 하느냐"고 지적하며 가이우스 칼리굴라의 암살건을 공화정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봤다고 한다. 따라서 거의 동시대의 요세푸스나 후세대의 디오 역시 극단적으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와 카이사르를 혐오한 수에토니우스와 달리, 정상적이라면 칼리굴라가 암살되지 않을 돌발 상황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22]
다만 이 사람은 원래 네로뿐 아니라 다른 황제에 대해서도 평가가 박하고 티베리우스의 경우처럼 어떤 때는 아예 있지도 않은 루머까지 사실인 것처럼 자신의 저서에 수록했다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23]
이 사람은 네로가 죽고 백 년쯤 뒤에 태어났다.
[24]
로마 황제들이 본격적으로 수염을 풍성하게 기른 것은 하드리아누스 황제 이후부터였다. 하드리아누스도 굉장한 헬레니즘 문화 옹호가였지만 적어도 공무를 방기하지는 않았다.
[25]
가이우스 카이사르, 네로 카이사르
[26]
그나마 남자 역할을 맡으면 평판 하락이 덜하긴 했다지만, 그래도 대놓고 하면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동성애 성향이 의심되는 황제나 고위 공직자들조차 공식 석상에서는 전혀 티를 내지 않다가 죽고 나서 여기저기서 증언 나온 걸로 유추하고 있을 정도다.
[27]
칼리굴라와 이 점에서 전혀 다르다. 칼리굴라가 대중에게 닥치고 볼거리를 제공했다고 욕을 먹지만 그는 최소한 할아버지 티베리우스가 남겨놓은 흑자 내에서만 돈을 썼으며, 또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28]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고 소득세 개념의 세금이 존재하기는 했으나 그리 큰 액수도 아니었고(세율 1%) 군 장병들의 급여용으로 책정된 목적세였기에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게다가 이걸로도 모자라서 속주세 등 기타 직접세조차도 군인들 봉급에 들어갈 지경이었다.
[29]
이전 문단에는 상류층이 믿는다라고 적혀있는데, 수많은 논문과 미디어에 나오는 내용들, 그리고 각종 증거들을 보면 네로 시기뿐만이 아니라 5현제 시대까지도 하층민들이 주로 믿었다라고 기록된 것이 많다. 만일 이 시기부터 상류층이 기독교를 믿었다면,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 이전부터 이미 주류가 되었을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으로 공인할 때도 기독교는 완전 비주류였음을 감안하면 더더욱 신빙성 없는 이야기.
[30]
플라비우스 원형 경기장으로도 불리며 베스파시아누스의 장남이자 후대 황제가 되는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그곳에서 약탈해 온 보물들로 지었다고 한다.
[31]
더군다나 이때는 아직 네로가 세네카의 그늘에 있던 시기였다.
[32]
이 사람은 예전에 네로가 시를 읽는데 졸았다는 이유로 공직에서 쫓겨나서 그리스에서 벌을 치고 있었다.
[33]
클라우디우스 씨족 전체에서
루키우스를 전체 지파에서 철저히 금기시하고, 결국 일족 전체 회의를 거쳐 만장일치로 금지한 이유는, 일족 전체의 가훈을 어기고 공공예절을 무시한 사람과 노상강도, 살인 혐의, 절도로 문제를 일으킨 각각의 사람 전부 루키우스 클라우디우스라는 이름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중 일족의 종가였고, 파트리키 신분의 루키우스 클라우디우스들의 경우에는 전부 노상강도, 살인, 절도, 협박, 불효로 재판에서 유죄를 받고 처벌받아, 공화정 당시의 경우, 클라우디우스 가문 전체에서 루키우스 이름을 쓰는 사람까지 입양하지 못하게 이를 철저히 단속하거나, 어느 경우에는 외손주들의 이름에도 루키우스를 사용하지 못하게끔 했다.
[34]
로마 시대부터 이탈리아인들은 뱀을 흉조라 생각해 전쟁 전날 뱀을 보면 전쟁에서 패할 것이라 믿었다고 한다.
2002년 월드컵
한국전 전날에도 하필 이탈리아 선수단 숙소에 뱀이 나타나 다음 날 경기장에 임할 때 반쯤 멘탈이 나간 상태로 임했다고.
[35]
출처:수에토니우스, 12명의 카이사르, 네로 편 6장
[36]
이런 배경 때문에 아헤노바르부스는
마르쿠스 롤리우스처럼 가렴주구 행동을 하지 않고 비리없이도 엄청난 재산을 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재산 축적 과정은 이를 아니꼽게 본 동료 또래 원로원 의원들에게 질투를 유발해 죽을 때까지 중상모략에 평생 시달렸다.
[37]
이 과정에서 괴짜 소리를 듣고 정적들에게 모함을 받아 당시 황제로 아내의 외삼촌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눈치껏 적당히 해라"고 잔소리를 들었고 배우 활동 중에는 기사 계급 출신 유부녀 배우와 한 무대에 올라 잠시 입방아에 오르기는 했다. 그렇지만 그는 네로와 달리 자기 관리가 철저했고 부도덕한 행동은 전부 내전 당시의 아버지 행적과 망나니였던 두 아들 때문에 비난받았다.
[38]
1달에 1번은 반드시 부추와 올리브 오일을 먹거나 공연 날짜가 잡히면 빵같이 목에 안 좋다고 여기는 음식은 먹지 않고 부추만 입에 달고 살았다.
[39]
이때 쓰는 채찍은 말채찍 같은 것이 아니라 날카로운 납 조각들이 주렁주렁 달린 것으로 살점을 거의 파내다시피 뜯어버리는 무시무시한 무기다.
[40]
이탈리아어로 안치오
[41]
현대로 비유하자면
씹덕
냄새와 같은 개념으로 볼 수 있다. 마침 네로도
그리스
덕질에 빠져사는 희랍덕이기도 했다.
[42]
스포루스는 네로가 죽고 난 이후
사비누스와
오토를 거쳐
비텔리우스에게 인도되었으며, 콜로세움에서
납치혼과
강간을 당하는
페르세포네를 재현하라고 강요받자 자살했다.
[43]
라틴어식 발음으로, 그리스어식으로는 '바실레이오스'.
[44]
아이러니하게도, Fate 시리즈가 대인기를 끌면서 구글에 '네로 클라우디우스'를 검색했는데 실존 인물이 아니라 가상 인물인 이쪽 관련 결과와 이미지가 더 많이, 더 먼저 나오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심한 경우, Fate 시리즈를 먼저 접한 몇몇 사람들은 네로가 실제로 남자였다는 사실에 놀라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