뷔르템베르크 왕국의 국왕에 대한 내용은 빌헬름 1세(뷔르템베르크)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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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97년 3월 22일 | ||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 | |||
사망 | 1888년 3월 9일 (향년 90세)[1] | ||
독일국 베를린 | |||
재위기간 | 프로이센 국왕 | ||
1861년 1월 2일 ~ 1888년 3월 9일 | |||
북독일 연방 의장 | |||
1867년 7월 1일 ~ 1871년 1월 18일 | |||
독일 황제 | |||
1871년 1월 18일 ~ 1888년 3월 9일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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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0DE34><colcolor=#323231> 가문 | 호엔촐레른 가문 | |
이름 |
빌헬름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Wilhelm Friedrich Ludwi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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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어머니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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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 |
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첫째 여동생 여동생
샤를로테, 둘째 여동생 프리데리케, 첫째 남동생 카를, 알렉산드리네, 둘째 남동생 페르디난트, 막내 여동생 루이제, 막내 여동생 알브레히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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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아우구스타 (1829년 결혼) | ||
자녀 | 장남 프리드리히 3세, 장녀 루이제 | ||
종교 | 루터교회 (프로이센 교회 연합)[2] | ||
신체 | 180cm[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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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어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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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로이센 왕국 제7대 국왕이자 독일 제국의 초대 황제.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철혈정책을 바탕으로 강력한 프로이센 왕국군을 조직했고 또 다른 독일 통일 후보인 오스트리아 제국을 격파해 독일 통일을 주도하였다. 이후 스페인 국왕의 즉위를 둘러싼[4] 프랑스 제2제국의 나폴레옹 3세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해 알자스-로렌 지방을 흡수하고 마침내 1871년 독일의 황제국을 창시함과 동시에 초대 황제로 즉위했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로이센 국왕, 독일 황제를 역임한 호엔촐레른 가문 군주 중에서 최고령으로 즉위한 군주고 더 나아가 독일 역사상 최고령 군주이다.[5] 다만 빌헬름 1세는 왕태제였다가 즉위했다. 왕태자를 거쳐서 즉위한 황제로는 아들인 프리드리히 3세가 최고령이다.
2. 생애
2.1. 즉위 전
1810년. 왕자 시기.
어린시절에 어머니 루이제 왕비, 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오른쪽)와 함께 산책하는 빌헬름 1세.
1797년 3월 22일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루이제 왕비 사이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왕국의 전통에 따라 어린 나이부터 프로이센군의 장교로 복무하며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하여 대육군과 맞서 싸웠고, 이후 평생을 군인으로 보내다가 2살 위의 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아들이 없어서 후계자가 되었다.
1848년 3월 혁명 때는 강경 진압을(대포로 진압을 명령) 주장해서 '총알 왕자(또는 포도탄 왕자)'라는 별명을 얻었고 혁명군의 살해 위협에 영국으로 망명하기도 하는데 이 당시 역시 강경 진압을 부르짖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눈여겨보았다. 당시 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즉위 전 자유주의 성향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고, 군주주의자와 반동 복고 세력의 바람과 따로 놀았는데 혁명이 터지자 진압에 주저하고, 혁명군에 사로잡혀 굴복하게 되자 융커들을 비롯한 보수 반동 세력의[6] 많은 인사들이 겁많고 나약한 국왕에 실망하고 왕태제 빌헬름 왕자에 주목했다.
결국 혁명이 나가리되자 다시 프로이센으로 돌아왔왔는데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혁명 이후 외교적으로 오스트리아의 독일권 내 주도권 주장에 굴복하는 등 실망스런 통치 기간을 보냈고 결국 60세가 되는 해(1857년)에 정신병이 발작해서 통치가 사실상 불가능해지자 빌헬름 왕자는 형을 대신해서 섭정을 하게 되었다. 이후 1861년 왕위에 올랐다.
2.2. 즉위 후
즉위 전인 섭정 시절부터 평소의 지론대로 군대를 강화하려고 했고, 1859년에 폰 론을 장관으로 임명하여 국방 개혁안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예비역 지휘를 현역 장교에게 맡기는 개혁안과 징병제 기간을 2년에서 3년으로 늘리는 예산 문제로 하원과 충돌하자[7] 퇴위를 불사하며 평소 눈여겨 본 비스마르크를 총리로 전격 기용하였다. 당시 프로이센의 정치 체제를 보면 "의회는 그저 세금을 내는 부르주아들의 푸념이나 들어주는 역할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국왕이 의회 하원과 충돌하니 "아랫것들에게 굴복하느니 차라리 국왕 노릇 관두겠다."고 투정을 부린 것이다. 이렇게 임명된 비스마르크는 유명한 철과 피 연설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의회의 예산권을 대놓고 침해하고 군대 예산을 늘렸는데, 이것이 가능한 건 역시나 총리는 오로지 국왕에게만 책임을 지지 의회 따위와 수직관계가 아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외 군주제 전통에 길들여진 의회에서 더이상 강한 충돌을 원치 않아서이기도 했다.[8]어쨌건 국내외의 반발을 무시하며 강력한 육군을 만들었다. 다만 대외 정책에선 빌헬름 1세와 다른 구상을 하는데 1862년 덴마크 위기 때는 독일 연방 의회에서 민족주의를 자극해서 덴마크를 털었는데, 이는 민족주의란 아랫 것들의 상스러운 불순사상이라 생각하는 빌헬름 1세의 지론과[9] 다른 것이었다. 빌헬름은 18세기 태생으로 나폴레옹 전쟁을 겪으며 성장한 데다가, 평생 군인으로 살았기 때문에 아랫것들이 입헌이고 자유고 민족주의고 뭐고 걍 정치 사상 자체를 가지는 것을 금기시했다. '왕권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이 통치자에 수여한 것이요( 왕권신수설) 왕은 하느님에게 수여받은 왕권으로 통치하고 신민은 복종해야 한다' 같은 게 그의 지론이었다.
1866년 오스트리아와 독일 내 주도권을 놓고 갈등이 빚어지자, 프로이센 왕은 어디까지나 오스트리아 황제의 선봉장 역할이나 해야 된다는 지론[10] 덕에 비스마르크가 너무 막 나가는 걸 자제시켰으나, 역시 또 현실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을 격파하고나자 생각이 바뀌었는지 빈까지를 공격하고, 최소 보헤미아 왕국을 포함한 영토 할양을 꼭 받아내야 하며 또한 이겼으니 승자의 권리로서 빈에서 개선 행진을 벌여야 한다는 생각이었지만 비스마르크가 결사반대하자 뜻을 꺾는다. 그 결과 북독일 연방을 조직하였으며, 이 정도로 충분하다 생각했는데...
빌헬름 1세는 제위나 독일 통일에는 아무 흥미가 없었고, 오로지 프로이센의 전통[12]과 프로이센군에만 관심있었다. 오스트리아와의 관계도 독일 내 복수 주도권 정도면 충분하다고 만족했지 오스트리아를 아예 배제하려는 것은 그의 구상과 거리가 멀었다. 오랜 숙적이던 프랑스를 꺾은 건 그도 원하던 바였으나, 황제 칭호는 전혀 원하지 않았다. 비스마르크의 설득이 잘 먹히지도 않아서 비스마르크가 뒷공작으로 독일 제후 중 빌헬름 1세의 사위 바덴 대공 프리드리히[13]가 직접 빌헬름에게 황제 자리에 올라달라고 요청한 데다가 20여개 연방 군주들이 직접 와 있었기 때문에, 내키지 않았지만 황제 추대에 화답한 것. 사실 황제 자리도 '독일국의 황제(Kaiser von Deutschland)'[14]라면 받아들이겠다고 했지만, 그런 식이면 구성 제후국들의 군주들이 얄짤없이 신하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수용하지 않을 거라는 비스마르크의 설득 때문에 독일인 황제(Deutscher Kaiser)가 수여된 것이다.[15]
한국어로는 ①Kaiser der Deutschen[16], ②Kaiser von Deutschland[17], ③Deutscher Kaiser[18] 모두 '독일 황제'로 해석할 수 있지만 차이가 있다. 당시 자유주의 입헌주의자들은 사회계약론에 바탕한 국민 주권을 기반으로 군주제라도 아래에서 추대된 권력이라고 주장했는데 이 의미는 군주주의자들에게 "권력이 아래에서 나왔다면, 아랫 것들이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 하는 거냐?"는 굉장히 불순한 사상으로 여겨졌다. 나폴레옹(Empereur des Français)과 루이필리프(roi des Français)의 칭호가 그 부류인데 '프랑스인의 황제/왕'이란 것에는 왕권신수설을 부정하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②의 칭호는 기존 봉건제의 왕국이나 제국은 신이 통치권을 수여했다는 종교적인 정통성까지 있기 때문에 어느 제후나 인민 따위에게 묻지 않고 신성불가침한 통치권력이 수여받았다는 의미라서 역시 독일 군주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즉 ①은 독일'인'의 황제, ②는 독일국의 황제, 그리고 ③은 그냥 독일인 황제를 의미하는데, ①의 경우는 왕권신수설을 부정하는 감히 까마득한 아랫것들에게 수여받았다는 전제가 있으니 왕정주의자들에겐 입헌세력의 불순한 발상이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위에 나온 나폴레옹의 황제 칭호도 그렇고, 더욱이 전 유럽 왕실에게 왕따당한 루이 필리프의 '시민의 왕' 같은 천박한 칭호였다. 1848년 혁명 당시 독일 혁명을 주도한 혁명파에서 빌헬름 1세의 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게 바쳤다가 거절당한 제위도 ①이었으니 당연히 형보다 더 보수 왕정주의자인 빌헬름 1세에겐 무엄한 칭호일 뿐이었다. ②는 독일 군주들이 프로이센과 명목상 동등한 제후국왕들이 빌헬름의 신하가 되는 것이라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그래서 대안이라고 추대된 ③의 칭호는 그냥 (독일인) 황제인데 독일 군주 중에 대표격으로 추대 되었다는 정도이자 독일인 중 황제라는 별 다른 의미 없는 칭호 였다.
그래서 빌헬름 1세는 취임식 아침까지 비스마르크에게 "독일인 황제"(Deutscher Kaiser) 자리는 외국 군주가 오면 의전상 각국 왕실 근위 연대 소속으로 수여하는 '명예 대령'직에 불과하며 자신의 관심사는 프로이센 왕국, 프로이센 군대뿐이며 칭제 선언으로 프로이센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며 매우 아쉬워했다고 한다.
독일 황제관을 쓴 빌헬름 1세.
빌헬름 1세(왼쪽)와 오토 폰 비스마르크(오른쪽).[19]
이처럼 비스마르크와 항상 뜻이 일치한 것은 아니며 갈등도 있었지만, 빌헬름 1세는 자신보다 그가 나라에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하에게 맡기는 인내심을 보여줘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몇몇 경우는 빌헬름 1세의 의견이 더 옳았던 것으로 훗날 판명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프랑스를 고립시키기 위해 사이가 안 좋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제국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동유럽 외교 정책에서 두 사람은 크게 대립하였는데, 이 외교 정책은 "비스마르크이기에 할 수 있었다."고 평가받는다. 이는 곧 "비스마르크가 없으면 유지될 수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비스마르크가 없으면 유지될 수 없다."는 비판은 곧 비스마르크에 대한 극도의 상찬이기도 하다.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에 끼인 양면전선 독일의 전략적 상황은 비스마르크 뿐만 아니라 그냥 독일 자체의 지정학적 문제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문제다. 이 사이에서 줄타기를 성공적으로 해낸 정치인이 비스마르크 말고 누가 있는지 떠올려보면 딱히 떠오르지가 않는다. 유럽은 좀 잘나간다 싶으면 단체로 몰매맞는 대륙이다. 후대의 빌헬름 2세와 아돌프 히틀러는 말할 것도 없고, 그 프리드리히 대왕마저도 힘 좀 쓰려고 하다가 양쪽에서 공격받고 파멸에 이를 뻔한 걸 생각하면, 독일에서 명멸했던 수많은 정치 / 군사 정치인들 가운데 오스트리아를 패서 주도권을 뺏고, 프랑스를 쳐서 파리에서 행진을 하고, 독일 통일까지 이루는걸 단 한 세대 만에 이루었음에도 적절히 주변국의 어그로를 관리하면서 최대한의 이익을 보장받는 선에서 확장을 멈추면서 독일의 외교적 정세를 파국에 이르게하지 않는다는 건 비스마르크가 해내기 이전까지는 상상하기도 힘든 업적이었고, 동시에 그 이후로도 누구도 이루지 못했다. 다시 말해 비스마르크가 없었다면 처음부터 안 될 일을 "비스마르크의 초월적인 대전략적 혜안과 외교적 감각덕에 살아있을 때 동안만 유지했다."라는 말과 같다는 뜻이다.
[20]
자세히 설명하자면 지금은 상상하지 힘들지만 본래 독일과 러시아는 굉장한 우호 관계였었다. 프로이센을 구원해준 독빠 황제로 유명한 표트르 3세부터 시작해 나폴레옹 전쟁에서도 둘은 연합군이었으며 황실끼리도 관계가 굉장히 깊었다.[21] 당장 러시아 역사상 손꼽히는 군주인 예카테리나 2세도 안할트 아스카니아 가문[22]출신으로 프로이센 왕국의 슈테틴 태생인 데다가 프로이센에서 시집온 여인이었다.
그러던 와중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을 격파하고 발칸반도로 세력을 넓히게 되는데 이에 오스트리아와 영국이 반발하여 갈등을 빚게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비스마르크가 스스로 중재자를 자처하며 베를린 회의가 열렸다. 이 베를린 회의에서 러시아는 당연히 독일이 러시아편을 들어줄 것이라 잔뜩 기대를 했으나 기대와 달리 독일은 앞서 언급한 대로 중재자라는 애매한 위치를 고수했고 이는 러시아에게 있어서 곧 배신이라 여겨졌다. 러시아 황실은 엄청나게 분노해 독일을 격렬하게 비난하는 편지까지 보내며 지금까지의 우호적인 대독일 외교관계를 상당부분 수정하여 재정립 하는 수순까지 이르렀으며 비스마르크는 이에 대비해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을 추진하게 된다.
그래도 비스마르크가 직접 활동하던 시기에는 분노한 러시아를 살살 달래가며 최소한 적대관계로 돌아서는 것을 막을 수 있었지만 이미 위에서 언급 되었듯 이는 시스템이 아니라 비스마르크 개인의 능력에 의존한 것이었고 비스마르크 사후에 작동할 시스템이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본인이 사라져도 후대까지 잘 작동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바로 재상으로서의 임무인 만큼 이 점에서 비스마르크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결국 이후 손자 빌헬름 2세가 즉위하고 비스마르크를 내쳤는데, 이때부터 독일과 러시아는 오랜 우호관계가 파탄나고 본격적인 적대관계로 돌변하여 마침내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진다.
게다가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와는 달리 오스트리아를 제 앞가림도 못하는 과대 평가된 나라[23]라고 지적하며 과연 러시아 대신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는 게 옳은 선택인가 의문을 표시했고 이 점에서는 빌헬름 1세가 옳았음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입증되었다.[24] 참고로 빌헬름 1세는 공적 관계에서 신뢰한 것과는 별도로 개인적으로는 비스마르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비스마르크 같은 재상 아래에서 황제 노릇 하기 참 힘들다.(Es ist nicht leicht, unter einem solchen Kanzler Kaiser zu sein)"는 그의 명언(?)은 지금도 회자될 정도다.[25]
2.3. 사망
후임은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아들 프리드리히 3세였으나 98일 만에 후두암으로 죽고[26], 혈기왕성한 29살의 장손 빌헬름 2세가 뒤를 잇는다.
3. 가족관계
자세한 내용은 호엔촐레른 가문 문서 참고하십시오.3.1.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남 |
프리드리히 3세 (Kaiser Friedrich III.) |
1831년 10월 18일 | 1888년 6월 15일 |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슬하 4남 4녀[27] |
1녀 |
바덴의 대공비 루이제 (Großherzogin Luise von Baden) |
1838년 12월 3일 | 1923년 4월 23일 |
바덴 대공국 대공 프리드리히 1세 슬하 2남 1녀[28] |
4. 대중매체에서
독일의 다큐멘터리 영화 Die Reichsgründung에서 비스마르크와 함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공교롭게도 배우가 다운폴에서 헬무트 바이틀링 역으로 유명한지라, 독일국을 건국한 이가 처절한 몰골로 멸망을 선언하는 매우 씁쓸한 배우 개그가 성립되어 버렸다.5. 여담
- 자유주의자, 아나키스트들에게 암살 위협을 여러번 받기도 했다. 1878년에는 2번이나 암살 시도를 당했으며 특히 6월 2일 카를 노빌링의 암살 기도로 인해 크게 다치기도 했다. 다행히 조카처럼 암살당하지는 않았다.
- 프리메이슨의 회원이였다.
- 33세 때 14살 연하인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아우구스타[29]와 결혼해 1남 1녀를 두었다.[30] 결혼이 늦은 건 자신의 육촌인 폴란드 귀족 출신 엘리자 라자비우과 결혼하고 싶어했는데 신분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반대하여 무산되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폴란드는 망해서 나라가 없어졌기는 한데 프로이센은 다름 아닌 그 분할의 당사자이자 그 분할된 영토를 차지한 수혜자인데...[31]
- 첫째 여동생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와는 사이가 꽤 좋았는지 편지를 자주 주고받았다고 한다. 그중에는 아내 아우구스타에 대한 불평을 적은 편지도 있다고 한다.(...)
- 손주들 중에서 장손 빌헬름 2세, 둘째 샤를로테, 셋째 하인리히 왕자는 예뻐했지만 뒤에 태어난 세 손녀들[32]은 찬밥 취급했다. 이 손녀들은 어머니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외가인 영국 왕실과 더 가까웠다.
- 장손 빌헬름 2세가 아들만 줄줄이 낳아서[33] 빌헬름 2세의 4남인 아우구스트 빌헬름 폰 프로이센이 태어나는 것까지 보았다. 5남인 오스카 폰 프로이센은 1888년생이지만 빌헬름 1세와 프리드리히 3세 사후에 태어났다. 아우구스타 황후는 오스카가 태어나는 것까지 보고 갔으며, 빌헬름 2세의 6남인 요아힘 폰 프로이센과 막내인 빅토리아 루이제는 빌헬름 1세, 프리드리히 3세, 아우구스타 사후에 태어났다.
* 빌헬름 2세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독일 통일을 빌헬름 1세의 업적이라며 전국 각지에 동상을 세우고
대제(大帝, Der Große) 칭호로 높혔으나,
독일인들은 다
누구의 공적인지 잘 알고 있어서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여담으로 오늘날 독일에서 프로이센 군주 중에 Der Große(大) 칭호를 사회 전체적으로 인정받은 사람은[34] 대
선제후(大選帝侯[35])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프리드리히 대왕뿐이다. 물론
독일 통일과
독일 제국 건국의 상징적 존재 중 하나로서 칭송받는
군주인 것도 맞는다.
- 비슷한 시기에 건국된 일본 제국과 비교하면 빌헬름 1세는 메이지 덴노처럼 상징적인 군주,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오쿠보 도시미치나 이토 히로부미처럼 통일 및 근대화의 주역이라고 볼 수 있다.
- 현재 호엔촐레른 가문의 직계인 빌헬름 1세의 자손들은 빌헬름 2세의 자손들로만 이어진다. 빌헬름 1세는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고, 아들 프리드리히 3세는 슬하에 4남 4녀를 두었지만 차남 하인리히 폰 프로이센 왕자의 가계는 손자대에서 끊어졌고, 삼남 지기스문트와 사남 발데마르는 요절했다.[36] 반면 장손인 빌헬름 1세는 슬하에 6남 1녀를 두었고, 장증손인 빌헬름 폰 프로이센 황태자 슬하에 4남 2녀, 다음 후계자인 루이스 페르디난트가 4남 3녀를 두었고, 현재 당주인 게오르크가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직계인 당주들이 다른 왕가의 당주들이나 현 왕가의 왕자들보다 아들을 더 많이 두었다.
-
무려 90살까지 장수했다. 형제자매 중에서 가장 장수했으며[37] 이는 서구의 남성 군주 가운데 전근대의 공국, 대공국, 자치령 등 군소국 군주를 제외하고는 가장 오래 산 것이었으며[38] 근대 이후 남성 군주 가운데서는 세계에서 가장 장수했다가 2011년
룩셈부르크의
장 대공(1921~2019)에 의해 기록이 깨졌다. 또한 즉위 당시 63살이라는 고령의 나이로 즉위했는데도 재위기간은 상당히 긴 편이다. 1861년 63살의 나이로 프로이센 국왕으로 즉위해서 1871년 독일 황제로 즉위했을 때는 10년이 지난 73살의 나이였으며, 독일 황제로 즉위하고도 17년이나 더 재위해서 무려 90살까지 장수한 것이다. 의학기술의 발달로 수명이 매우 연장된 현대에도 이렇게 90살까지 살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단히 장수한 셈이다.
- 4대가 한 사진에 담겨있는 모습. 빌헬름 1세가 안고 있는 갓난아기가 독일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빌헬름 폰 프로이센으로 빌헬름 1세의 첫 증손자다. 참고로 저렇게 4대가 나란히 찍은 사진은 사돈인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도 비슷하게 찍었다.
- 여담으로 빌헬름 1세부터 현 당주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왕자까지 호엔촐레른 가문의 당주들은 번갈아면서 장수, 단명했다. 빌헬름 1세(본인)는 90세까지 장수, 아들 프리드리히 3세는 57세에 후두암으로 사망, 손자 빌헬름 2세는 82세까지 장수, 증손자 빌헬름 폰 프로이센 독일 황태자는 69세에 심장마비로 사망, 현손자 루이 페르디난트 폰 프로이센 왕자는 86세까지 장수, 6대손 루이 페르디난트 주니어는 군 훈련 도중 사고로 33세에 요절, 7대손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는 현재 당주 현재 나이 47세.
[1]
역대 독일 황제 중 가장 장수하였다. 독일뿐만이 아니라 유럽사를 통틀어 가장 장수한 군주 중 하나였다. 현재는
엘리자베스 2세가 기록을 경신하였다. 다만 왕위에 오를 당시 63세라는 고령으로 즉위했기 때문에(독일 황제로서는 73세.) 사돈
빅토리아 여왕이나
루이 14세,
강희제보다도 더 오래 살았음에도 그들에 비해 훨씬 적은 기간 동안 재위했다.
[2]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법령에 따라
루터파와
칼뱅파가 혼합된 종교로, 루터파에 가까운
개신교의 일종이다.
[3]
장남,
증손자와 같은 키이다.
[4]
스페인은 그간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에서 갈라져나온
보르본 왕조(시조
펠리페 5세가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둘째 손자.)였는데, 공위기를 거친 후 프로이센 왕실인
호엔촐레른 가문의 슈바벤계를 왕으로 세우려 하였다.
[5]
프랑크 왕국,
동프랑크,
독일 왕국,
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
바이에른 이하 소국들은 제외.
[6]
이 당시 보수세력은 경제적 자유주의(Laissez-faire)와 오히려 반대 입장이다 토지 귀족들은 고관세 국가 개입주의다. 당시 이들에게 입헌 국민주권 민족주의 자유주의 등은 불순 사상이었다.
[7]
사실 징병 기간도 문제지만
예비군 지휘를 현역 장교에게 맡기는 문제가 더 컸다. 예비군들에게 반동 정치 성향을 강요할 우려가 있다하여서... 군 병력 증강은 오래부터 제기된 문제로 인구가 1815년보다 많이 늘어서 편제를 늘려야 된다는 데는 부르주아들도 공감은 하고 있었다.
[8]
하지만 비스마르크의 이런 독단성은 이후 반대파와 대중들 사이에서 그의 인기를 떨어뜨리는 데 한몫 했다.
[9]
빌헬름 1세가 특이한 게 아니라 이 시기 대부분의 군주들은 민족주의자들과 상극이었다. 그나마
입헌군주제를 받아들였던
이탈리아 왕국의 초대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도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프랑스에
사보이아와
니차를 할양한 것 때문에 민족주의자들과 갈등이 있었다.
[10]
지금은
독일사에서
호엔촐레른 가문과
합스부르크 가문이 라이벌로 보이지 모를지만 호엔촐레른 가문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초대
독일왕
루돌프 1세의 선출 때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의 충실한 앞잡이 역할을 자처했다.
종교 개혁 시기에도
카를 5세의 눈치를 보느라
요아힘 2세 헥토어는 개인적으로
루터교회로 개종했음에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전체에 종교 개혁을 시행하기를 주저하다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루터교회가 정식으로 공인되고 나서 종교 개혁을 시행했을 정도였다.
[11]
빌헬름 1세는 전쟁에 나가기 전에 샤를로텐부르크 궁전 영묘당에 묻힌
어머니의 석관 옆에 무릎을 꿇으며 결의를 다졌다.
[12]
여기서 말하는 프로이센의 전통은
독일 기사단국-
프로이센 공국이 아니라
호엔촐레른 가문과 왕실이 대대로 물려받아온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으로부터 이어지는 전통을 말한다. 빌헬름 1세는
북독일 연방과
독일 제국의 국기로 검정, 하양, 빨강의 삼색기를 택했는데 검정과 하양은 프로이센의 전통적인 색깔이면서도 호엔촐레른 가문의 상징색이었고, 하양과 빨강은 브란덴부르크의 상징색이었기 때문이다.
[13]
1848년 혁명 당시 대공이었던 아버지 레오폴트가 프로이센에 도움을 요청해 빌헬름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6개월 동안 바덴에 주둔한 적이 있는데, 이때 빌헬름과 인연을 트게 되었다. 그 후 1856년 빌헬름의 딸인
루이제 공주와 결혼했다.
[14]
Deutschland는 독일 민족의 땅(또는 국가), 즉 당시
북독일 연방에 속한 많은 나라를 모두 포괄한 개념이다.
[15]
독일인 황제 자리는 프로이센 국왕이 세습하지만, 프로이센과 다른 제국 구성 국가들의 법률적 위치는 제국 내에서 동일했다. 황제, 황후, 황태자, 황태자비는 있지만 나머지 프로이센 왕실 구성원은 프로이센 왕자/왕녀(Prinz(essin) von Preußen)라는 작위를 받았지 독일 황자/황녀(Prinz(essin) von Deutsches)는 아니었다.
[16]
영어로 해석할 시 Emperor of the Germans
[17]
영어로 해석할 시 Emperor of the Germany
[18]
영어로 해석할 시 German Emperor
[19]
참고로 비스마르크의 키는 193cm로 엄청난
거구였다. 빌헬름 1세 역시 키 180cm로 장신에 속한다. 단지 비스마르크가 너무 커서 작아 보일 뿐이다.
[20]
좌측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1세, 독일 제국의 빌헬름 1세, 러시아 제국의
알렉산드르 2세.
[21]
빌헬름 1세의 여동생인
샤를로테가
니콜라이 1세의
황후이다.
[22]
아스카니아 가문은 프로이센 왕국의 근본인
브란덴부르크를 개척한 가문이다. 브란덴부르크가
선제후로 공인되기 전 브란덴부르크 가계의 대가 끊겼고, 작센에서도 선제후로 공인받은 지 3대 5명 만에 대가 끊겨서
작센 선제후도
지기스문트가
베틴 가문에게 넘겨주는 바람에 안할트 하나만 남았다.
[23]
19세기 후반 이후 민족주의 광풍이 불면서 오스트리아는 이미 여러 차례 해체 위기를 겪었다.
[24]
그러나 '평화'라는 목적으로 보면 비스마르크가 틀린 결정을 했다고 보긴 어렵다. 당시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역설적이게도 빌헬름 1세 말대로 제 앞가림을 하기도 바쁘기 때문에 호전적이기는커녕, 군사를 동원하지 않고 외교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급급했지만 러시아 제국은 군사력과 외교를 제외한 내치에서는 오스트리아보다 훨씬 악화되어있던 상황에서도 계속 전쟁이나 무력 충돌을 일삼아서 국력을 스스로 깎아먹었다. 따라서 독일제국 입장에서는 러시아와 동맹까지 맺느라 영국과 충돌하는 거까지 각오할 바에는 중립이 나았는데 이 중립을 지키는 가교 역할을 하기에 적합한 인접 국가는 오스트리아 정도였고 아무리 과대평가 되었다지만 당시에는 분명 무시못할 국가도 아니었기 때문에 국경을 많이 맞닿고 역사적 공통점도 많은 오스트리아와 나쁘게 지내는 게 더 문제였다. 북유럽도 있지만 덴마크는 오스트리아보다도 약소국이었으며 노르웨이까지 지배하던 스웨덴은 과거
포메른을 노렸던데다 국력이 더 강했던 시절에도 러시아에게 털렸던 선례로 인해 그닥 믿음직한 동맹국은 아니었다. 따라서 인접국 중에서는 프랑스와는 철천지원수가 이미 된 상태이고 러시아와는 동맹을 하면 평화가 깨질 위험이 커지므로 동맹국 자체로는 이해관계가 부딪치지 않고 평화를 깨뜨릴 염려가 없는 오스트리아가 최선이었다. 당장 사라예보 사건만 해도 1914년에 벌어질 정도로 엄청난 우연의 우연이 누적되어 일어난거라 비스마르크 이상의 수준인 사람이라도
사라예보 사건이 벌어질지 + 그것이 세계대전으로까지 이어질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민족주의가 발흥되었다지만 그 과정에서 하필 오스만 제국령이었다가 오스트리아에 합병된 보스니아에서, 하필 민족주의에 대한 방도책을 가지고 있던 온건파 황위 후계자가, 하필 독립국인 세르비아계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당해서 전쟁이 벌어지리란 건 현대 기준으로도 우연이 많이 생기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당시에도 전쟁을 예상했던 사람은 많았지만 완전한 강대국이자 열강이었던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사이에서 시작하는 걸 예상하지, 강대국 중 약체에 속했던 오스트리아와 발칸 반도의 독립국 사이에서 시작하고 확장되는 걸 예상하기는 못했다.
[25]
실제로도 비스마르크는 워낙 독단적인 성향이 강해서 빌헬름 1세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26]
아버지가 워낙 오래 살아서 그렇지, 사망 당시 56살이었으니 요절은 아니며 손자들까지 보고 갔다.
[27]
빌헬름 2세,
작센마이닝겐 공작 부인 샤를로테,
하인리히 왕자,
샤움부르크리페의 아돌프 공자비 빅토리아,
그리스의 소피아 왕비,
헤센 방백비 마르가레테 등.
[28]
바덴 대공국 대공 프리드리히 2세,
스웨덴의 빅토리아 왕비 등
[29]
파벨 1세의 외손녀(파벨 1세의 3녀
마리야 파블로브나 여대공의 딸)이기도 하다.
[30]
역대 프로이센 국왕 중에서 (첫) 배우자와의 나이 차이가 가장 많다. 초대 국왕 프리드리히 1세는 마지막 부인과 28살 차이였지만 이건 3번째 결혼이라...참고로 아들
프리드리히 3세와
빅토리아 황후는 10살 차이였고, 손자
빌헬름 2세와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황후는 1살(
연상연하 커플) 차이.
[31]
물론 실질적인 이유는 아무리 엘리자가 귀족이라도 엘리자의 가문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왕족(통치 가문)이 아니라 평범한 귀족이었기 때문이다. 독일계,
러시아계의
귀천상혼은 통치 가문 - 일반 귀족 - 평민으로 급이 나뉘어있다. 아무리
망국이거나 다소 불편한 관계에 있는 집안이어도 좀 신분이 더 높은 귀족이거나 왕족이었다면 당대 기준으로도 혼사를 받아줬을 것이다.
[32]
빅토리아,
조피,
마르가레테
[33]
슬하 6남 1녀
[34]
즉,
한국의
광개토대왕과
세종대왕처럼.
[35]
대선-제후가 아니라 대-선제후(=
황제를 선출하는
제후)로 끊어야 하므로
選
帝
侯라고 표기한다.
[36]
그 외 첫째 손녀인 샤를로테의 외동딸도 자녀가 없어서 단절, 둘째 손녀 빅토리아는 자녀 없이 사망했다.
[37]
빌헬름 1세가 서거한 이후에도 살아있는 형제자매는 셋째 여동생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비 알렉산드리네(향년 89세)가 유일했으며, 나이로 보면 빌헬름 1세가 더 오래살았다.
[38]
필리프 에른스트(1663년 ~ 1759년)라는 신성 로마 제국의 '호엔로헤발덴부르크실링스퓌르스트' 제후가 96세까지 산 경우가 유일한 예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