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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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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명칭
영어 <colcolor=black> the Reformation
독일어 Reformation
라틴어 Reformatio
한자

1. 개요2. 배경
2.1. 사회적 요인: 후기 중세 교회의 자화상2.2. 인물적 요인: 마르틴 루터2.3. 종교 개혁의 시발점2.4. 가톨릭 개혁을 위한 다양한 움직임들2.5. 공의회우위설의 영향2.6. 타락의 범위에 대한 논쟁
3. 전개: 종교 개혁의 계파 정리
3.1. 마르틴 루터 95개조 반박문3.2. 신성 로마 제국의 혼란3.3. 스위스의 개혁가들3.4. 중간 체크: 개신교는 얼마나 퍼졌는가?3.5. 분열된 신성 로마 제국3.6. 가톨릭의 대항종교개혁3.7. 번외: 오스만 제국3.8. 번외: 정교회
4. 종교 개혁이 남긴 것들
4.1. 개신교의 출현4.2. 근대의 개막4.3. 이단심문 마녀사냥
5. 대중매체6. 관련 문서7. 둘러보기8.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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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통상적으로, 1517년 마르틴 루터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시작된 기독교 내부의 대규모 개혁 운동을 일컫는 말이다. 이 사건은 단순히 기독교의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에 거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평가되며, (세부적으로는 시선 차가 있지만) 이 시기를 기준으로 중세 근대를 구분한다. 종교 개혁의 결과로 가톨릭에서 분리된 교회들을 통틀어 개신교라고 부른다.

대중적으로는 위와 같이 널리 통용되고 있지만, 사실 마르틴 루터 이전에도 개신교라고 할 수 있는 종파는 여럿 등장했었다. 그리고 가톨릭도 개혁 시도를 했다.[1] 그렇기에 마르틴 루터 개인의 공헌이 매우 큰 사건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루터 한 사람에 의해서만 촉발된 사건이라고는 할 수 없다. 당대의 사회적, 종교적 모순 등의 여러 요소가 결합되어 그로 인해 일어난 사건이라고 보는 쪽이 정확하다.

종교 개혁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유럽사에서 워낙 큰 사건이었기에 ' the Reformation'으로 표기하며, 고유명사로 쓰인다.[2] 다른 종교의 개혁에 대해서는 정관사 the가 빠지고 소문자만으로 'reformation'라고 표기되었는데 현대에 와서 이 단어가 기독교, 유럽 중심적이란 비판이 일어나자 일부에선 'Protestant Reformation'이라는 대체 용어를 쓰려는 추세다. 그러나 기존 용어가 상당히 오랜 시간에 결쳐 관습적으로 쓰여 왔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폐기하지는 못하고 있으며, 둘을 병용하고 있다.[3]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종교'개혁'이 아닌 종교'분열'이 전체적인 맥락에 맞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번역 용어들도 대부분 개화기 일본 학자들이 한번 번역해 놓은 것을 한국, 중국 등 한자권 사회에서 별다른 논의 없이 가져다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사실상 이런 논의 자체는 의미가 거의 없다.

2. 배경

종교 개혁은 특정한 개인이나 계기가 그 원인이라고 보기 어렵고, 다양하고 복잡한 요인들이 맞물려서 일어난 결과이다. 가령 인쇄술이 없었더라면 마르틴 루터의 저작이 독일어권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경우 우리가 아는 종교 개혁은 독일 지역 수도자들 사이의 논쟁으로 그쳤을 가능성도 있다. 기술적인 요인 뿐 아니라 각종 사회적인 문제들이 얽혀있기에 종교개혁의 배경을 한 마디로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표면적으로는 면죄부, 성유물 판매 등 가톨릭교회의 부패상에 대해 마르틴 루터가 비판한 것이 종교개혁의 시발점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에는 문제가 많다. 우리의 눈에는 면죄부나 성유물 판매가 심각한 부패로 보이지만, 그 정도 부패는 이전 시대의 부패에 비하면 훨씬 나아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부패에 대한 비판이 곧장 교리의 개혁으로 연결되는 것도 아니다. 성직자들의 부패가 문제라면 부패한 성직자들의 행위를 비판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마르틴 루터는 부패의 원인을 신학에서 찾았다. 루터에게 있어 교회의 부패는 잘못된 신학의 여러 결과 중 하나일 뿐이다. 종교개혁이 단순한 교회 정화운동을 넘어 사상사적 중요성을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루터 개인의 업적 뿐 아니라 시대적 배경 역시 종교 개혁의 발생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교회 개혁에 대한 요구는 루터 이전에도 있었고 심지어 이후에도 있었다. 종교 개혁 직전 시대에는 아비뇽 유수로 촉발된 서방교회 대분열이 있었다. 95개조 반박문이 등장하기 100여 년 전인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로 분열은 마감했지만 교황청은 잃어버린 권력을 회복하기 위해 다양한 조치를 취했고 이에 대한 반발로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아울러 분열의 통합 과정에서 교황수위권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오갔으며, 이는 종교 개혁가들이 교회의 전통이 갖는 신앙적 권위를 부정하는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당대 사회도 종교 개혁가들이 주창한 새로운 사상이 퍼지는 데 적합한 환경을 제공하였다. 자유도시 코뮌들은 권력의 중앙집권화에 맞서 지방의 권한을 지키기 위한 새로운 이념이 필요했다. 기본적으로 중세 이래로 도시 자치의 중심은 원래 주교였고, 주교는 사실 상의 도시 영주 내지 시장과도 같은 존재였다. 도시별로 선출된 주교는 도시민들의 자치를 상징하는 존재였다. 때문에 도시민들은 자신들의 자치를 지키기 위해서 교황의 간섭이 강할 때는 황제와 결탁하기도 했고, 반대로 황제의 간섭이 강할 때는 교황과 결탁하는 등 복잡한 상호작용을 보였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서 알프스 이북 지역은 황제-교황의 권력 다툼이 황제의 승리로 기울어져 교권 대비 황권이 일방적으로 강화되었고, 주교들은 황제의 봉신으로써 황제 권력을 견제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때문에 독일의 도시들은 교황도 아닌 황제도 아닌 새로운 이념적 구심점이 필요해졌고, 이 상황에서 일어난 종교 쇄신 운동은 그들의 요구에 부합했다. 이러한 지방의 군주들은 종교 개혁 운동이 살아남는 정치적 안전장치를 제공하였다.

종교 개혁의 원인에 대한 이해는 수백 년간 많은 논쟁의 대상이었으며, 가톨릭 개신교의 대립으로 인해 많은 오해와 대립이 생기기도 했다. 이 때문에 지나치게 단순화된 관점이나, 오류가 포함된 관점, 불공정하게 해석한 관점이 널리 퍼져있기에 오해를 피하는 것 역시 이해의 중요한 과정 중 하나이다. 자세한 이해를 위해서는 아래의 세부사항들 및 쟁점을 참고하는 것이 좋다.

2.1. 사회적 요인: 후기 중세 교회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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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요인으로는, 후기 중세인들이 자신들의 교회에 가지고 있던 자화상, 즉 '개혁을 해야 한다'는 인식에 있었다.

다만 이를 "종교 개혁은 가톨릭의 부패가 그 정도를 더하며 심해지다가 극에 달했을 때 그 반작용으로 실행된 것"이라 생각해선 안된다. '이전시대보다 더 부패한 교회'는 당대인들이 느낀 주관적 자화상이며, 객관적 부패상은 그 이전 시대보다 오히려 나았다. 경건한 중세 전성기 때보다 종교개혁 시기의 교회가 더 타락했다는 생각은 상황을 거꾸로 이해한 것이다.
독신제의 준수는 이 성직자 프롤레타리아의 대부분에게 문제 밖의 일이었음이 확실하다. 독신제가 실제로 어느 정도나 준수되었는지는 확실히 말하기가 어렵다. 나라마다 사정이 매우 달랐다. 15세기 독일( 쾰른 또는 콘스탄츠)의 시찰 보고서들에 의하면 교구 사제의 ⅓이 내연관계를 맺고 있었다. 정확한 통계는 나와 있지 않지만 그 정도만 해도 비교적 양호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이 문제에서 그리고 민중들의 종교생활에서는 더더욱, 중세 말과 종교 개혁 직전의 상황이 이른바 건전한 중세 전성기 때보다 나빴다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된다. 사실은 그 반대였다. 1500년 전후의 시기는 특히 독일에서 그 이전 어느 시대보다 '경건'했고 신앙이 뜨거웠다. 그러나 바로 그런 시기에 이상과 현실 사이, 종교적 이상과 당시의 사회 현실을 반영한 교회구조 사이의 괴리는 더욱 터무니없게 느껴졌다. 그러므로 당시 개혁에의 외침은 전반적인 쇠락의 증거가 아니라 종교적 활력의 증거였다.
클라우스 샤츠, 《보편공의회사》(이종한 옮김), 분도출판사 2005, 213쪽, 강조는 인용자가 하였다.
샤츠의 결론은 단순히 독신제의 준수만을 근거로 나온 것이 아니라 당시 교회의 부패가 나아지는 다양한 증거를 열거한 끝에 나온 결론이다. 교회에서 부패한 모습을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객관적 의미에서 옛날보다 더 타락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소 경박한 비유를 들자면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라는 말이 진심을 담고 있더라도 '아름다운 과거'를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니듯이 말이다.[4] 물론 현대인의 기준에서는 이 시대의 생활상에 여러모로 불만이 많겠지만. 그러니 교회의 부패상이 종교개혁의 여러 계기 중 하나라고 할지라도 교회의 부패가 극에 달해 그 반작용으로 종교 개혁이 이루어졌다고 이해하기는 어렵다.

유사하게 성공회 신부인 앨리스터 맥그래스 역시도 후기 중세 교회가 이전시대보다 '더' 타락했다는 관점을 거부하며, 실상은 반대였다고 명시한다.
종교 개혁의 배경을 다루는 오래된 연구들은 중세 후기시대를 종교 쇠퇴기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었다. 부분적으로 이것은 교회를 비판적으로 보았던 15세기 문헌들에 관한 그 연구결과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던 일을 반영한다. 최근 연구는 보다 믿을 만한 기준들을 사용하여 정확히 그 반대가 참이라는 사실을 제시한다. 1450년과 1520년 사이에 독일의 종교적 경건이 크게 성장한 것을 보여준다. 이 사실은 각별히 베른트 뮐러(Berndt Moeller)의 ‘1500년대 독일의 경건(Piety in Germany around 1500)’이란 제목의 논문에서 명백히 밝혀졌다. ... 이렇게 고조된 종교에 대한 대중적 관심은 제도교회가 책임의식을 잃어가고 있다는 생각에서 그에 대한 비판여론을 이끌어냈다. 따라서 오래된 연구들에서 신앙 쇠퇴의 증거로 인정되었던 이러한 비판은 실제로 신앙의 성장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앨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 최재건 번역, 《종교개혁사상》Reformation Thought: An Introduction(31999), CLC, 2006, p.60

당대 가톨릭의 부패상에 대한 반론으로 Eamon Duffy는 저서 The stripping of the altars: traditional religion in England, 1400~1580( 예일 대학교 출판부)에서 중세 후기 가톨릭이 '타락하지도 부패하지도 않았음(neither decadent nor decayed)'을 보였으며[5] Peter Marshall은 16세기 초 독일의 종교적 상황을 "모든 증거는 16세기 초에 독일이 경건한 정통 가톨릭 사회였음을 가리킨다"[6]고 서술했다.

요점은 '루터의 종교 개혁은 교회의 타락을 정화하기 위해 일어났다!'라고 하는 단순한 이해를 배격하는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Marshall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거대하고 다층적인 과정들을 단순화(simple explanations for large and multi-layered processes)하는 것을 불신하고, 학생이 과거에 생각하던 것보다 복잡하다고 말하면(when students report back to me that some aspect of the past turns out to be more complicated than they had previously thought) 기쁨을 느끼는(…) 역사학자이다. 교수님 취향이? 종교개혁의 원인에 대한 분석이 지극히 복잡하다는 것을 감안할 때 적절한 자세라고 할 수 있겠다.

이와 유사하게 개신교계에서도 중세 가톨릭 교회가 도덕적으로 더 타락하였는지 그렇지 않은지의 여부를 종교 개혁의 주 원인으로 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은총론, 의인론에서 있었던 루터의 신학적 이의제기에 의의를 둔다. 루터의 개혁이 기존의 가톨릭 교리를 부정한 '개신교의 출현'이라면, 교황 중심의 수도원운동이든 반교황적 공의회주의이든 가톨릭 내부의 개혁 운동은 교회의 전통 안에서 이루어졌기에 학자들이 가톨릭의 개혁운동을 루터의 1517년 사건과 명백하게 다르게 취급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루터의 종교 개혁 원인을 다룰 때에는 인문주의, 스콜라 철학, 당시의 문화·정치·사회상 등을 복합적으로 다루는 경향이 있다.[7]

2.2. 인물적 요인: 마르틴 루터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대 역사학에서는 종교 개혁이 특정한 사건이나 인물로 인해서 갑작스럽게 생긴 일이라기보다는 시대적 상황에서 여러가지 요소가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그것들이 눈덩이처럼 굴러 일어난 일이라고 보고 있다. 마르틴 루터 때문에 종교 개혁이 일어났다고 말하기 어렵고, 루터가 없었더라도 종교 개혁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종교 개혁을 가능하게 했던 요소는 상당히 많고 루터도 그 중 하나이다'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흔히 종교 개혁의 시작을 마르틴 루터가 1517년에 면죄부 판매에 반대해서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을 때로 보는 게 일반인들의 시각이지만 학자들은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 그에 맞선 가톨릭교회의 대항종교개혁 모두 시대적 산물이고 내적인 변혁이라는 견해가 보통이다.[8] 다만 개신교계에서는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한 1517년 10월 31일종교 개혁 기념일[9]으로 삼고 있다.

다시 말해 지나치게 인물사적인 관점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19세기 토머스 칼라일 마르틴 루터가 없었더라면 하는 if 떡밥으로 루터가 없었으면 프로테스탄트도 없고, 독일의 분열도 없고, 프랑스 혁명도 없고, 미국의 독립도 없었다는 식의 책을 써서 유명해지긴 했지만, 근대 사학의 입장에서 이러한 영웅주의 사관은 거의 인정받지 못하는 추세였다.

이러한 경향은 19세기부터 두드러졌는데, 종교개혁을 다룬책에 마르틴 루터 울리히 츠빙글리 같은 인물에 대한 연구 자체가 빠져버리고 대략적인 서술만이 남은 경우도 남아서 1970년대부터는 인물사 경시에 대한 반성이 이뤄져서 시대적 사건과 함께 균형적으로 연구하는 추세다. 다시말해, 오늘날 학자들은 종교개혁을 루터와 츠빙글리와 가톨릭 쇄신가 등 개인들에 맞추는 영웅주의적 사관을 배격함과 동시에, 종교개혁이 시대적 요구 때문에 루터 등의 개인적 역할 없이도 반드시 촉발될 수 있다는 사관도 배격한다. 이는 다른 역사학 분야에서도 유사하다.

가톨릭 교회사학자나 개신교 학자나 인물사적 사건으로 보지 않는다. 종교개혁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던 고대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와 종교 개혁 바로 이전시기 '후기 스콜라 철학'에 대한 연구가 많이 진행 중이다. 종교 개혁 시기 수백 년 전 중세 가톨릭교회 자체는 물론이고 유럽 각지에서 개혁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루터도 이전의 개혁적 분위기나 사상가들에게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종교개혁을 일으킬수 있었다는 것. 위와 같은 배경들이 없었다면 루터의 사상이 탄생하기 어려웠을 수 있다. 스콜라 철학은 특히나 이런 부분에서 관대하였다. 예시로, 어떤 신학자가 A를 주장하여도, 그것을 '믿는다'고 동일시하지 않았기에 여러 주장을 통해 더 많은 연구 성과를 이룰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종교 개혁 이후엔 이러한 사류는 사라지고, 양측에서 맹렬한 추궁과 이단 심문이 수많은 학자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다만 루터의 종교 개혁은 다른 종교 개혁과 차이는 있다. 루터 이전에는 가톨릭 내부의 개혁이었던 반면, 루터의 종교 개혁은 가톨릭과 결별하면서도 동시에 양지에서 21세기까지 막힘 없이 그 계보가 이어졌기 때문이다.[10] 비록 이것을 당대 개혁가들이 원하던 결과였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11] 아무튼간에 중세와는 판이하게 다른 종교적 환경이 촉발되는 데 루터의 비중이 컸음은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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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종교 개혁 과정에서 시대적 배경의 역할이 큰 것은 사실이나, 루터 개인의 역할이 작은 것도 아니다. 본 문서에도 시대배경을 강조하는 서술이 많다. 그러나 시대배경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전의 종교 개혁사가 지나치게 루터의 개인적 노력을 위주로 서술된 것에 대한 반작용에 가깝다. 지나치게 시대배경을 강조하여 종교개혁을 서술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반작용 역시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과 그 이전의 교회 쇄신운동은 큰 차이가 있다. 루터가 르네상스와 인문주의 학문적 기반의 교리와 개혁이라면, 공의회 주의 수도원 운동과 가톨릭 개혁운동은 내부에서 개혁을 기반으로 한다. 이 때문에 1517년에 일어난 95개조 반박문의 게시로 촉발된 종교개혁의 한 흐름을 역사학계에서는 이전의 혹은 이후의 다른 개혁 노력과 다르게 취급하는 것이다. 이처럼 루터의 종교개혁을 다른 종교개혁과 차별화 하는 것은 역사학계의 통설이다. 루터가 부패를 쇄신하는 작업만 한 것이 아니라 교리를 비판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예수회 등 루터 이후 가톨릭의 개혁노력도 있지만 교회 개혁을 위한 그런 내부적인 노력을 새로운 사상으로 분류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루터의 독특한 지위를 이해할 수 있다.

거칠게 말해 부패한 성직자들을 비판하는 데 성직자를 때리는 것이 아니라 교리를 때렸다는 점에서 루터의 특징이 있는 것이다.

루터는 단순히 부패한 성직자들에 대한 자정을 촉구하지 않았다. 루터는 중세신학이 교회를 잘못 이끌고 있다라고 주장하였다. 루터의 관점에서 면죄부나 다른 도덕적 타락은 잘못된 신학이 낳은 부작용에 불과하다.

역사적 배경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루터의 역할이 무시된다는 문제의식 하에서 종교 개혁사와 마르틴 루터 연구의 권위자인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과거의 연구가 지나치게 사회 구조적 분석에만 치중했음을 비판하고 최근 연구를 소개하며[12] 기존 주장 즉 종교개혁이 복합적인 외부 요인으로만 발생한것이 아니라 마르틴 루터 개인의 역할 또한 비중상 높이 평가 받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If the origins of the Reformation in Germany are interwoven with its distinctive cultural dynamics at that time, this does not mean that this increased appreciation of the importance of social history denies a pivotal role to individuals, either as causes or catalysts of events.
(옮긴이 주(의역): 비록 독일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의 근원들이 당대 독일의 특징적인 문화적 상호작용의 결과라 할지라도 역사적 배경이 갖는 증가된 중요성이 종교 개혁 과정에서 개인들의 결정적인 역할과 개인들이 사건들의 원인을 제공하거나 기폭제가 되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Christianity's Dangerous Idea, The Protestant Revolution--A History from the Sixteenth Century to the Twenty-First p.34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에 대하여)

2.3. 종교 개혁의 시발점

사실 언제부터 종교개혁의 시작으로 봐야되는지는 논란이 있긴 하다. 중세 가톨릭 성직자의 모습이 오늘날에 비해 상당히 부패하여 있던 것은 크게 이견이 없고[13], 성직매매, 수도원(수녀원)의 타락, 교회의 세속권력, 가톨릭교회가 사회 현실과 타협한 여러 풍습등의 문제는 이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온 문제점이기 때문에 15~16세기의 개혁가들이 처음으로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부패상을 가톨릭 신자들이 손놓고 바라본 것은 아니다. 중세 이전부터 교회 구성원들이 부패와 매너리즘에 빠질 때마다 그런 현상을 타파하기 위해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수도원 운동이 개혁의 모습으로 볼 수 있고, 심지어 루터교회가 출현하던 시기에도 수도회들의 쇄신 운동은 단절되지 않았다. 오늘날 가톨릭에서 존경 받는 쇄신운동가이자 성인들인 아빌라의 데레사, 십자가의 요한(성 후안 데 라 크루즈)은 이 시기 스페인에서 배출한 개혁가들이다. 데레사와 요한은 가르멜 수도회를 개혁했다.

물론 중세 후기로 가게 되면 개혁을 위해 나타난 수도원마저도 조직화되어 가면서 부패의 늪으로 빠지기도 하는 등 상황은 굉장히 복잡하다. 거기에 가톨릭 교회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교황 교황청도 100여 년간 아비뇽 유수 서방교회 대분열을 겪으며 교황의 권위가 추락하면서 점점 힘을 잃어갔다.
우선 아주 기본적인 질문부터 해보자. 실제로 '종교개혁' 따위가 있었는가? 이 표현이 가리키는 사태가 일어나고 오랜 시간이 지나기 전까지, 오늘날 우리가 공통으로 받아들이는 의미로 '종교개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독교 내부의 '개혁' 요청은 이 종교 자체만큼이나 오래된 것이고, 매 시대마다 기독교를 시급히 개혁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중략) 루터 이전에 숱한 개혁 시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루터와 연관된 종교개혁에 정관사를 붙이고 'r'을 대문자로 바꾸어 'the Reformation'이라고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중략)
그렇게 쓰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밝히는 강력한 논증들이 있다. 단수(單數) 종교개혁(옮긴이 주: 가톨릭을 개혁하려는 시도가 단 한 번 있었다는 관점)에 관한 옛 교과서들은 으레 1517년에 루터가 항의한 시점부터 이야기를 시작했고, 1546년에 루터가 사망하고 길어야 10년 남짓 지난 시점에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 종교개혁은 근본적으로 독일의 사건으로 보였고(잉글랜드 같은 다른 곳에서도 중요한 반향이 일어나긴 했지만), 서사 형태가 깔끔한 운동이었다. 다시 말해 이런저런 이유로 루터가 로마 교회와 결별하고 뒤이어 독일 가톨릭교도 황제의 뜻에 대항해 프로테스탄트 국교회들이 설립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종교개혁은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이었고, 정치적 사건이었으며, (종교개혁 이전 가톨릭교회의 무질서한 상태를 감안하면) 예측 가능했다. (중략)
이제 이런 단수 종교개혁의 연대기도 지리도 더는 설득력 있게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종교개혁이 '불가피했다'는 가정은 중세 후기 가톨릭교의 유연성과 정신적 활력을 강조하는 새로운 연구를 고려하면 적어도 논박이 가능해 보인다. 가장 중요한 점은, 한때 16세기 종교개혁의 시작이자 끝으로 보였던 것 ―독일에서 전개된 루터의 운동―이 실은 훨씬 더 큰 전체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는 주장을 이제 학계에서 두루 받아들인다는 것이다.(중략)
그 이전까지 종교개혁에 관해 쓴 이들은 (그리고 오늘날에도 놀랄 정도로 많은 이들은) 테베라 강의[14] 이런 견해를 생략하든지 아니면 책 뒤쪽의 부수적인 장에 우겨넣었다. 그러나 점차 '가톨릭 종교개혁' 또는 '가톨릭 쇄신'이라 알려진 것은 단순히 적에 직면하여 방어시설을 보강한 대응책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넓은 운동이었다. 신교 반란에 앞서 가톨릭교 내부에 이미 개혁을 지향하는 새로운 정신적 동향들이 있었다. 그중 일부는 신교 반란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다른 일부는 그러지 않았다.
「The Reformation」, Peter Marshall[15]

2.4. 가톨릭 개혁을 위한 다양한 움직임들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 서방교회 대분열은 끝났지만, 교황청은 잃었던 세속 권력을 회복하고 교황령의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이탈리아 반도의 세속 영토 다툼에 빠져들어 이탈리아 전쟁에 휘말렸다. 그리고 주교 대주교는 대체로 왕족이나 귀족들이 독점했고, 추기경들은 대체로 이탈리아 명문가에서 선발되었고 교황 선출도 그리했는데, 오랜 세월 동안 교회 체계가 경직되면서 교회 조직이 관료화되자 경직성이 더해져 갔다.

이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것이 크게 3가지 흐름인데, 첫번째는 신비주의 운동이라고 볼수 있다. 중세 3대 신비주의자로 불리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요한 타울러 등은 영성을 갖춘 신비주의자들로, 이들은 당시 가톨릭 교회의 부패상을 직접적으로 비난한 것은 아니었지만 개혁적인 성향을 띠고 있었다.

2번째는 데보티오 모데르나라 불리는 일종의 신자 경건운동으로[16] 수도원적인 경건을 일반 사람들에게 널리 퍼뜨렸다. 이는 마르틴 루터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3번째는 존 위클리프, 얀 후스,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발도파 에라스뮈스 등의 사상적·윤리적 개혁가, 개혁 공동체들이었다.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는 과감하게 성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가톨릭 교회의 부패상을 비판했다. 사보나롤라의 경우는 피렌체에서 활동하면서 메디치 가문을 몰아내고 피렌체의 개혁을 이끌다가 화형당한 바 있다. 발도파는 청빈을 강조하여 당시 비대해진 가톨릭 교회의 사치와 부의 축적을 비판했다. 다만 이들이 번역이 금지되었던 라틴어 성경을 번역했다는 오해가 있는데, 번역한 것은 사실이지만 라틴어 성경의 번역은 그 이전에도 행해지던 일이며 금지된 것도 아니다. 단지 인쇄술의 발달로 후대에 갈수록 번역이 활발해진 것이다.

2.5. 공의회우위설의 영향

또 한편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중세의 '공의회우위설'(공의회가 교황 위에 있다는 교설)이다.[17] 이는 교황직의 분열 때문에 더욱 발전하게 되었는데, 교황 위에 있는 공의회 외에는 분열을 해결할 길이 없다는 생각과 연결되어있다.

실제로 공의회우위설은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교황의 단일성 회복에 영향을 끼쳤다.
이 거룩한 콘스탄츠 시노드는 보편적인 공의회를 구성하고 있다. 분열의 종식과 하느님 교회의 일치 및 머리와 지체에서의 개혁 그리고 전능하신 하느님 찬미를 위해 성령 안에서 적법하게 소집된 이 시노드는 하느님 교회의 일치와 개혁을 더 용이하고 확실하고 훌륭하고 자유로이 성취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규정·정의·결의·선언하는 바이다:
1) 이 시노드는 성령 안에서 적법하게 소집되었고, 보편적인 공의회를 구성하며, 가톨릭 교회를 대표하며, 자신의 권한을 직접 그리스도에게서 받았다. 누구나, 어떠한 신분과 지위를 지녔든, 또 비록 교황이라 할지라도, 신앙과 현재의 분열의 근절 그리고 하느님 교회의 머리와 지체에서의 개혁과 관계하는 사안들에서 이 시노드에 복종할 의무가 있다.
2) 누구나, 어떠한 신분과 지위와 품위를 지녔든, 또 비록 교황이라 할지라도, 이 거룩한 시노드와 향후 위에서 언급한 전제들 아래 적법하게 소집되는 모든 공의회의 명령·결정·규정·지시 들에 순종하기를 고집 세게 거부하는 자는, 만일 그가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을 것이며, 필요할 경우에는 다른 조처들도 사용될 것이다.
콘스탄츠 공의회 1415년 4월 6일자 교령 「헥 상타」[18]
교황을 포함한 모든 사람은 신앙, 교회일치, 머리와 지체에서의 개혁에 관한 문제에 관해 공의회에 순명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비록 이 교령은 비상조치이기는 했으나 아무튼간에 교황이라는 우두머리의 단일성을 회복시키는데 성공했다. 「헥 상타」에 대해서는 크게 공의회가 교황의 우위라는 해석, 이단적이라는 해석, 분열이라는 상황에서 한시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해석이 있다.
분열의 과정 그리고 특히 교령 「헥 상타」에 대한 해석은 "로마" 노선과 "갈리아" 노선 사이에서 수백 년간 불화의 원인이자 논쟁의 핵심이었다. 갈리아주의자들은 「헥 상타」를 구속력있는 문헌으로 여겼고 그 안에 교황에 대한 공의회의 원칙적 우위가 명시되어 있다고 보았으며, 그 우위를 분열이라는 특수 긴급 상황에 한정시키는 것을 반대했다. 반면 엄격한 교황주의자들은 그레고리오 12세까지 포함한 로마계 교황들만이 정통적이며 그레고리오 12세의 사임과 1415년 7월 4일 그에 의한 공의회의 정식적인 새로운 소집이 비로소 콘스탄츠 공의회에 적법성을 부여했고 그로써 "공의회 방안"을 통한 분열의 종식을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에서 출발했다. 이들에 의하면 「헥 상타」는 이미 형식상으로도 무효이며 사실 일종의 이단적 조처이니, 왜냐하면 분열이라는 긴급 상황에서도 공의회가 적법한 교황보다 상위에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밖에 물론 온건한 교황주의적 입장도 있었다. 이것은 달리는 분열을 제거할 방법이 없는 특수 상항에서는 공의회가 "교황들" 위에 있다는 데서 출발했다. 이 입장은 그러므로 피사 공의회를 부분적으로 인정했고, 1409년부터는 그레고리오 12세가 아니라 알렉산데르 5세 요한 23세[19]를 적법한 교황으로 간주했던바, 사실 그리스도교계 대부분이 이들을 교황으로 인정했고 또한 1414년 오직 리미니를 중심으로 한 지역만이 참 교회라는 그레고리우스 측의 주장은 뭐라 해도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비쳐갔다. 금세기에 들어설 때까지 로마 교황의 공식 명단은 성 바울로 성당 벽에 그려져 있는 교황 초상화들에서 분명히 드러나듯 이런 관점에 부합한다. 이렇게 「헥 상타」는 분열시의 상황예속적 긴급조치로 인정되었으나, 그 상황을 넘어서까지 공의회의 우위를 통용시키는 것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클라우스 샤츠, 《보편공의회사》, 이종한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05), 182쪽

현대의 주된 학설은 위 조치를 교회의 극단적인 비상상황에서 적용 가능한 것으로 간주한다.[20]

이처럼 교회의 위기에 따른 교황권의 위기 및 이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가톨릭교회의 노력 역시 일종의 내부적인 개혁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위기의 과정에서 일어난 논쟁은 교황권의 본질적 권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기반이 되었고 이러한 의문은 종교 개혁자들의 사상에도 반영되어 있다.

2.6. 타락의 범위에 대한 논쟁

교회의 타락상과 종교개혁 사이의 연관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교회 구성원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타락했는가?'라는 질문에는 의외로 각 개혁운동들 사이에서, 가톨릭 개혁가와 개신교 개혁가 사이의 논쟁이든 개신교 개혁가 사이의 논쟁이든, 합의된 의견은 없다. 이를테면 재세례파들은 유아세례가 성경에 직접 언급되지 않은 내용을 집어넣은 타락이라 주장했지만 루터와 칼뱅의 관점에서는 전혀 타락이 아니다. 또한 침례회 신자들이 보기에는 교회의 권위있는 교의라는 개념 자체가 타락이겠지만, 역시 루터의 관점에서는 교회의 권위 그 자체가 (가톨릭의 해석보다는 소극적으로 해석되지만) 근본적으로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도 '무엇이 타락인가'는 합의가 안되어있고 개혁의 방향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이 있다. 이를테면 성 도미니코 데 구스만은 베네딕토회로 대표되는 중세 수도원들이 민중의 삶과는 지나치게 격리되어 있다고 느끼고는, 도시에서 소규모 공동체 위주로 민중의 삶에 적극적으로 끼어드는 도미니코회를 설립했다. 반면 아빌라의 데레사 수도자들이 세속의 신자들과 너무 심하게 어울려 산다고 느끼고는, 봉쇄수도원이 개혁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즉 가톨릭 내부의 수도원 개혁운동들 사이에서도 '문제의식'과 '해결'이 다른 방법으로 나타난 것이다. 특히 1571년 10월 6일에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가 엔카르나시온에서 겪었던 일은 가톨릭 내부에서도 '타락'과 '개혁'에 대한 해석이 근본적으로 달랐음을 보여준다. 교황 성 비오 5세가 특파한 순찰사 베드로 페르난데스는 데레사를 엔카르나시온의 가르멜 수녀원의 원장으로 임명했는데, 이날 새 원장 데레사에게 수녀들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수녀들은 "어용 원장 물러가라", "선거권 박탈이다"라며 아우성을 쳤다. 수녀들이 보기에는 자치권에 대한 교황청의 간섭이야말로 충격과 공포의 타락이었던 것이다. 반면 데레사는 각 지역의 수도원이 중앙(교황청)과는 격리되어 지역 인사들과 온갖 연줄로 얽혀있는 것이야말로 타락이라고 여겼다.

특히 '무엇이 타락인가'라는 논쟁이 가톨릭 개혁운동들 내부 혹은 개신교 개혁운동들 내부를 넘어, 가톨릭 개혁운동과 개신교 개혁운동 사이의 논쟁이 될 경우는 문제가 더더욱 꼬인다. 단적인 예로 대사( 면벌부) 논쟁을 살펴보자. 개신교 개혁가들은 성경에 직접 언급되어있지 않은 대사라는 개념이야말로 타락의 증표라고 여겼으나, 가톨릭 개혁가들은 대사라는 개념 자체는 타락이 아니되 신앙의 공로로 받아야 할 대사를 '상품'으로 전락시켜버린 성직자들의 행태를 타락으로 여겼다.[21] 또한 중세 가톨릭교회 특유의 활발한 자선 문화는 가톨릭 개혁가들이 생각하기에는 아름다운 사회였으나, 개신교 개혁가들은 구원을 돈 주고 산다고 여기며 타락의 증표로 생각하였다. 또한 후에 소개할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과로 가톨릭교회가 각 지역의 성직자들을 효율적인 신학교 체계로 교육하려고 한 것 역시도, 시선에 따라서는 타락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바로 네덜란드 지역의 개신교 개혁가들이 그러하였는데, 이들은 신학교야말로 지역 교회에 대한 과도한 간섭이자 폭정이라 여겼다.[22] 교황청에서 성직자의 독신의무를 통해 사제들이 결혼을 하지 못하도록 한 것만 하더라도, 오늘날의 가톨릭 신자들이 보기에는 개혁이지만, 오늘날의 개신교 신자들이 보기에는 성경에 직접 언급되지 않은 것을 교황이 밀어붙인 타락이라고 여긴다. 또한 중세 교회의 초대형 떡밥이던 서임권 논쟁에서도 타락에 대한 관점은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이 논쟁의 중요한 결론 중 하나인 보름스(Worms) 정교조약(1122년)과 제1차 라테란 공의회(1123년)를 살펴보자면, 황제나 봉건영주는 서임식에서 반지와 지팡이 대신에 홀(笏)을 통해 세속재산을 하사하도록 하여 주교직에 내리는 교권과 속권을 구분하였다. 다시 말해, 후대로 갈수록 성직자의 속권은 세속 통치자들에게로 돌아가고 교권은 더 엄밀하게 정의되어가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가톨릭 신자들이 생각하기에는 역사적인 진보이지만, 개신교 개혁가들이 생각하기에는 세속권력과의 결탁으로 보였던 것이다.

3. 전개: 종교 개혁의 계파 정리

학자들은 대체로 종교 개혁을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다음 기술된 분류 가운데 첫 3가지( 루터교회, 칼뱅교회, 잉글랜드 국교회)는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으나, 그 외(과격혁명론자, 재세례파, 반삼위일체파, 가톨릭)는 거의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개신교, 종교개혁 진영
  • 루터주의: 마르틴 루터 필리프 멜란히톤의 주도로 시작된 종교개혁. 북독일, 북유럽과 일부 동유럽, 잉글랜드 등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다.
    • 북독일과 북유럽의 루터주의( 마르틴 루터, 필리프 멜란히톤, 유스투스 요나스, 우르바누스 레기우스, 요하네스 부겐하임[23], 게오르크 슈팔라틴, 한스 타우센[24], 제블 페데르손[25], 올로프 페르손[26], 라르스 안데르손[27], 라르스 페르손[28], 미카엘 아그리콜라[29]
    • 잉글랜드의 루터주의(로버트 반스, 토마스 빌니, 윌리엄 틴데일[30], 휴 라티머, 존 프리스, 조지 조예, 토마스 아서 등)
    • 이탈리아의 루터주의(피에트로 파올로 베르겔리오, 아오니오 팔레리오, 바르톨로메오 폰지오[31], 발도 루페티노, 발다사레 알티리 등)
    • 헝가리- 크로아티아 왕국 슬로베니아의 루터주의(마르쿠스 펨플링거[32], 미하엘 라다신[33], 야노스 실베스터[34], 프리모시 트루바르[35] 등)
    • 독일의 인문주의적 루터주의(울리히 폰 후텐, 헤르만 폰 뎀 부셰): 이들은 가톨릭 인문주의자들과 가까워 루터파와 가톨릭 인문주의의 가교 역할을 했다.
    • 독일의 루터주의적 신비주의(야코프 뵈메 등)
    • 독일의 루터 경건주의(요한 아른트): 요한 아른트는 17세기 이후 대륙의 루터 경건주의 운동의 선구자이다.
    • 독일의 급진적 루터주의(마르틴 셀라리우스, 한스 뎅크): 루터의 동료 출신으로 점차 성향이 급진화되어 신비주의, 반삼위일체에 가까운 교리로 기울었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사상은 후일 반삼위일체, 유니테리언 운동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 평가받는다.
  • 개혁주의: 울리히 츠빙글리, 장 칼뱅 등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스위스 뿐 아니라 프랑스, 폴란드-리투아니아, 아일랜드를 제외한 브리튼 제도 등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주었다.
    • 스위스와 남독일의 개혁주의( 울리히 츠빙글리, 하인리히 불링거, 마르틴 부처, 요하네스 외콜람파디우스[36], 콘라드 쾨르스너[37], 장 칼뱅, 마리 당티에르 등)
    • 프랑스의 위그노(기욤 파렐, 피에르 로베르 올리베탕[38], 테오도르 베자[39]등)
    • 웨일스와 스코틀랜드의 개혁주의(리처드 데이비스[40], 존 펜리[41], 존 녹스[42], 패트릭 해밀턴[43], 조지 위샤트[44], 앤드류 멜빌[45], 조지 뷰캐넌[46] 등)
    • 스페인의 인문주의적 개혁주의(후안 길, 후안 페레스 데 피네다, 프란시스코 데 엔지나스[47], 훌리안 에르난데스, 로드리고 데 발레르, 후안네스 레잘라가[48] 등): 이들은 에라스무스의 인문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개혁주의에 들어가기는 하지만 탄압의 영향으로 칼뱅의 사상을 모두가 따르지는 않았다.
    •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개혁주의(미코와이 라지비우[49], 얀 와스키[50], 얀 니에모예프스키[51] 등)
  • 잉글랜드의 성공회 개혁(니콜라스 리들리, 토마스 크랜머, 마르틴 부처[52] 등): 흔히 헨리 8세만을 연상하나, 매우 다양한 신학자들이 참여했으며, 마무리가 된 건 이후 에드워드 6세, 메리 1세, 엘리자베스 1세 대에 이르기까지 꽤 나중 일이다.
  • 급진적 종교개혁파( 토마스 뮌처, 안드레아스 칼슈타드[53], 라이덴의 얀, 한스 뎅크 등)
    • 재세례파 운동[54](후터파, 스위스 형제단, 남독일 영성주의, 보헤미아 형제단, 메노나이트 등)
    • 츠비카우의 예언자(니콜라우스 스토르흐, 토머스 드레쉘, 마르쿠스 슈튀브너 등): 작센 선제후국 츠비카우에서 종말론, 유아 침례 반대, 성경이 아닌 성령의 직접적 계시의 권위 등을 주장한 급진적 종교개혁가 집단
    • 이탈리아 반삼위일체파(미카엘 세르베투스[55], 렐리오 소치니[56], 파우스토 소치니, 조르지오 비안드라타, 베르나르디노 오치노, 프란체스코 스탄카로, 조반니 발렌티노 젠틸레, 피에트로 베르미글리[57] 등): 이들은 예수가 도덕적으로 우수했기 때문에 신적 능력을 받았다고 보았다.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일위일체론을 주장했다. 후에 유니테리언으로 이어졌다.
    • 폴란드의 반삼위일체파(파우스토 소치니, 마르친 체코비치, 브셰지니의 그제고시 파베우, 슈몬 부드니[58] 등): 이들은 모두 폴란드 형제단이라는 단체에 소속되었던 이들로, 소치니주의자들 뿐 아니라 부활한 아리우스주의자들이나 슈몬 부드니처럼 아예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급진파, 평화주의적 에보니파 등 다양한 파벌로 이루어져 있었다가, 이후로는 소치니주의로 대부분 동화되어 파벌 정리가 이루어진다.
    •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유니테리언(페렌츠 다비드[59], 조르지오 비안드라타[60] 등): 최초의 유니테리언 교회 설립자들로, 폴란드 반삼위일체 운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 독일 인문주의적 신비주의 운동(카스파르 슈벤크펠트[61], 제바스티안 프랑크 등): 중세 독일의 신비주의 운동에 인문주의를 결합해 급진적인 신비주의적 종교개혁을 시도했다.

가톨릭 진영
개신교 입장에서 종교개혁을 설명할 때 누구든 독일(루터 파)과 스위스(칼뱅 파)에 대해서는 꼭 언급하지만, 잉글랜드(국교회)의 종교개혁은 여러 관점을 가진 다양한 신학자들이 참여되었고 가톨릭의 입장까지 배려(?)된 면이 있어, 간략하게 언급하거나 아예 언급하지 않기도 한다. 과격혁명론자와 재세례파는 같이 묶이는 경우도 있다. 반삼위일체파나 가톨릭의 개혁은 개신교 입장에서의 종교개혁과는 관련이 없으니 언급하지 않는다.

3.1. 마르틴 루터 95개조 반박문

이런 상황 속에서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바로 마르틴 루터였다.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소속이었던 루터는 스승인 요한 스타우피츠의 권유를 받아들여 중세 가톨릭의 스콜라 철학 최신 분야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신약성서 자체로 돌아가 연구를 시작하기에 이른다. 이때 루터는 사도 바오로의 발언으로부터 이신칭의, 즉 하나님을 믿음으로서 의롭게 된다는 사상의 실마리를 발견하고 정립하기 시작했다.

이미 루터가 이런 결론에 도달한 지 오래된 가운데 1517년,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난다. 신성 로마 제국 선제후 중 하나인 마인츠 선제후이자 마그데부르크 대주교 겸 할버슈타트 주교인 알브레히트가 면벌부를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알브레히트가 면벌부 판매에 나선 이유는 마인츠 대주교직에 오르려고 빚을 내서 샀기 때문이었다. 구체적으로 알브레히트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아힘 1세의 동생[105]인데 교회법을 위반하여 20세 이전에 주교 서품을 받았고, 이후 겸직을 금지하는 교회법을 어기고 할버슈타트와 마그데부르크 대주교구를 패키지처럼 돈으로 사모았는데, 마침 신성 로마 제국 최선임 선제후 직위인 마인츠 대주교 자리가 매물(?)로 나오자 다소 무리를 하여 빚을 내서 선도 구매해버렸다. 이 과정에서 교황청에서 파견한 도미니코회 수도자인 요한 테첼[106]을 브로커로 고용하여 당시 독일서 가장 큰 사채업자(?) 푸거 가문의 야코프 푸거에게 2만 1천 두카트의 빚을 졌고[107] 8년간 면벌부 판매수입을 보장받았으며 판매수입의 절반과 초입세[108]를 교황 레오 10세에게 바치기로 합의했다.

사실 성직 매매 문제를 파고들자면, 16세기 초에만 있는 게 아니었고 그냥 이전부터 자주 있던 일이라 딱히 고대의 교회보다 이 시절이 더 심했다고 보긴 어렵다. 오히려 1215년에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무려 공의회 차원에서 다루는 등 중세의 교회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해결하려고 노력한 편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유야 어찌되었든 이 문제는 루터의 시대인 16세기에도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 중요하다.[109] 그리고 독일에서 그간 교회의 경제적 수탈로 인하여 반로마 감정이 폭발하자 전유럽에 순식간에 파급력이 미치게 된다.

독일 작센 선제후국의 마르틴 루터는 이신칭의의 결론에 도달하였고, 그런 그가 보기엔 면벌부에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이에 루터는 면벌부에 대한 학문적 토론의 차원에서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성 교회 대문에 "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다. 이때 루터가 하필 교회 대문에 내건 이유로 '루터가 가톨릭 교회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위해 대문에다가 박아놨다'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으나, 실제로는 종교적인 의미는 없고, 단순히 교회 대문이 일종의 ' 게시판' 역할을 했기 때문에 대문에 내걸었을 뿐이다.

당시 종교개혁의 파급력을 최대한 작게 해석하는 입장의 가톨릭 교회사가들은 루터가 비텐베르크성 교회 대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인 게 아니라 교구 주교들에게 면벌부에 대한 토론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루터가 직접 쓴 건 사실이고 이전부터 동료 신학교수나 학생들에게 공개적으로 비판하였으며, 브란덴부르크와 마그데부르크 주교 등에게 항의편지를 보내고도 답변이 없자 직접 내건 걸로 본다. 이러한 주장은 1960년대 가톨릭 교회사가가 주장한 것인데 1540년대 필리프 멜란히톤의 루터파 신학자의 서술에 의문을 제기했을 뿐이지 개신교나 일반역사가들은 그냥 뭐 어쩌라는 반응(날짜는 별 중요치 않다)이다. 어쨌든 95개조 반박문은 루터의 작품이며 공론화 되었을 때 마르틴 루터가 자신의 저작임을 부인하지도 않았고, 루터의 신학적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으며, 이 주장이 가톨릭 내부적으로 대단한 센세이션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사실 루터는 이 시점에서 가톨릭교회와 완전히 등지려는 생각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대사제도의 남용과 면벌부의 효력에 대해서 "교회가 그럴 권한이 있는가?"라는 본질적인 의문제기였다. 루터는 교황청이 면벌부의 원리로 내세운 수많은 성인들의 공덕이 쌓여서 그것으로 죄인들의 죄를 사면해줄 수 있고, 그 공덕의 관리는 교황이 담당하며 이 공덕을 면벌부로 판매한다는 이론을 반박했던 것이다.

애초에 면벌부에 대한 논쟁은 루터가 혼자 말하던 것도 아니고, 루터가 속한 아우구스티노회 도미니코회에서 이미 신학적 논쟁의 대상이었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작센의 수도 비텐베르크의 성 근처에 자리한 교회의 문에 반박 조항들을 길게 열거한 문서―95개 논제―를 붙였다. 장차 역사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킬 순간,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태어나고 중세가 급사한 날이었다. 그렇지만 실상은 생각보다 무미건조했다. 일부 학자들은 95개의 논제를 붙였다는 것마저 부인해왔다. 반박문을 게시한 것은 진실일 가능성이 커 보이지만, 경천동지할 행위는 결코 아니었다. 당시 루터는 얼마 전에 설립된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였고, 신학부 내에서 학구적 논쟁을 시작하는 관례적인 방법은 사전에 논제를 게시하는 것이었다. 접근하기 편한 위치에 있었던 까닭에 성채 교회(Castle Church)의 문은 비텐베르크 대학의 게시판 역할을 했으며, 루터의 행위는 오늘날 대학에서 강의 목록을 공지하는 행위보다 별반 극적일 것이 없었다. 95개 논제 자체는 딱히 혁명적이지 않았다. 교황의 권위를 부인하거나 새로운 교회 창설을 요청하지 않았고, 신학에서 그리 대수롭지 않은 모호한 문제를 제기했다. 1517년에는 교회를 개혁하려는 청사진도, 예측 가능한 결과도 없었다. (중략) 면죄부를 둘러싸고 도미니코회 아우구스티노회가 반목하기도 했다. 교황 레오 10세는 두 수도회가 논쟁한다는 소식을 처음 듣고는 대수롭지 않은 "수사들 간의 다툼"으로 치부했다.
Peter Marshall, 「종교개혁」

이러한 과정 속에서 면벌부를 둘러싼 신학적 논쟁이 가열되었고, 내부자로서 교회의 비리와 부패를 비판하던 루터는 점점 교황청과 대립을 하게 된다. 당시 교계에서는 루터의 주장을 억누르려는 입장이었고, 루터는 자신의 소신을 굽힐 마음이 없었다. 교황청에서는 처음에는 루터의 사상을 신학적인 차원에서 공개적으로 반박하고자 1518년에 팔츠 선제후국의 수도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린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모임에서 그의 사상을 공개적으로 발언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도리어 이는 루터의 사상을 널리 퍼트리는 데에 일조하였고, 교황청은 이제 루터를 막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3.2. 신성 로마 제국의 혼란

결국 1520년에 루터는 가톨릭 교회로부터 파문당했다. 다음해 신성 로마 제국 제국의회는 루터를 불러 신앙 검증을 요구했다. 그곳에서도 루터는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의회는 루터를 제국 밖으로 쫓아내도록 결의한다. 이는 당시의 황제였던 카를 5세가 가톨릭을 수호하는 입장에 있었던 것과 관련이 깊다.

비록 카를 5세의 시대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권위가 교황의 권위를 초월한 지 오래였지만, 가톨릭의 수호자라는 명목상의 정통성은 당시의 시점에서도 유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110] 이후 루터는 암살자를 염려한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에게 중도에 납치당하고, 아이제나흐 근처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성경을 독일어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는 프리드리히 3세가 루터의 신학을 별로 이해하지는 못했지만[111] 루터를 보호해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신성 로마 제국에서 황제 바로 다음 가는 서열인 선제후가 루터를 보호한다는 것은 제국의 분열을 일으킬 수 있는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반로마 감정과 민족 감정에 따라 루터를 열렬히 지지한 독일 민중들의 열망과는 달리, 정치적으로 황제와 교황을 나란히 적으로 돌릴 만한 독일 제후들은 거의 없었고 1526년 슈파이어 제국회의까지조차 300여 개 영방군주와 60여 개 제국도시 중에 루터의 입장에 따라 새로운 신앙을 믿는다고 고백한 건 고작 6개 제후와 14개 제국도시 뿐이었다. 그나마도 선제후 7명 중에서는 작센 선제후 달랑 한 명이었다.[112]

그러나 루터파에게 행운이라면 당시의 카를 5세는 몸이 10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빴다는 것(…). 이 즈음 스페인에서 코무네로스 반란이 일어나서[113] 반란 진압에 정신이 없었고, 하필이면 이 무렵부터 이탈리아 반도를 둘러싸고 프랑스와 본격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524년에 제국 전역에서 중세 봉건 질서에 반발하는 농민 반란이 일어난다. 이는 후에 ' 독일 농민전쟁'이라고 불릴 정도로 규모가 거대하여 독일 중·남부 전역을 휩쓸었다. 카를 5세는 복잡한 종교 개혁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이탈리아 반도를 장악해 보편 제국을 부활시키는데 골몰해 1521년에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령인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넘겨주고 사실상 독일 문제를 전담하게 했다. 짬처리

단, 루터는 여기에서 농민들이 아닌 기존 질서를 지지하였고[114] 이는 후에 루터가 농민들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잃고 훗날 좌파들에게 까이는 계기 중 하나가 된다.[115] 1522년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귀환하여 이러한 민중 운동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한다. 이는 기존 가톨릭 질서에 정치적으로 루터를 지도자감으로 본 농민들에겐 실망으로 다가왔다.[116] 결국 지금까지 거의 루터 본인의 힘만으로 진행되던 개혁은 이 시점부터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얽히기 시작했다.

결국 독일 농민전쟁 후에 독일어권에서 정치적 문제는 루터의 손을 넘어갔고 스위스에서 울리히 츠빙글리 노선의 원동력을 이어받았다.

3.3. 스위스의 개혁가들

루터가 열심히 활동하던 무렵, 스위스는 당대 최고의 병사들인 스위스 용병들의 나라였다.[117] 이들은 여러 곳에서 용병으로 근무하면서 수입을 냈고, 이는 스위스 지역의 경제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정도였다. 한편, 당시의 스위스는 아직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한 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랑스 사이의 주도권 다툼에 계속 희생되고 있었고, 스위스의 자주적인 독립을 원하는 목소리는 갈수록 커져만 갔다.[118]

이러한 시대에 취리히에는 울리히 츠빙글리라는 또 다른 개혁가가 있었다. 사순절에 소시지를 먹은 사람에 대한 처벌과 관련된 논란인 소시지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그도 동시대의 루터처럼 면벌부와 가톨릭의 부패를 비판하였으며, 성경에 종교의 근본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단, 루터와 그의 차이점이 있다면 그는 실제로 그가 머물던 취리히를 본인의 손으로 개혁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취리히는 그의 손에 의해 성공적으로 탈바꿈하였다.

이후, 츠빙글리는 이러한 개혁을 스위스의 다른 곳에도 전파시키려 노력했으나, 가톨릭 도시들, 그리고 신학적인 해석에 차이를 보이던 루터회를 믿는 도시들과 반목했다. 이러한 대립은 결국 내전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결국 스위스에서의 영향력을 잃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한 카를 5세는 스위스의 가톨릭파를 도와 진압군을 보냈고, 이 과정에서 츠빙글리는 전사했다. 자세한 전개 과정은 울리히 츠빙글리 항목을 참조할 것. 그리고 이러한 내전은 스위스 용병이 몰락하는 데에 일조했다.

한편, 제네바에는 종교적 탄압을 피해 프랑스에서 망명 온 루터와 츠빙글리보다 한 세대 아래의 법학자가 있었다. 그가 바로 종교개혁의 2번째 불씨를 당긴 장 칼뱅이었다. 그의 사상[119]은 신학 외적인 부분에서는 철저히 보수적이던 루터회보다도 진보적이었고, 그 덕에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들이 주로 채택한 루터교회[120]와 달리 일반 민중들이나 상공업자들에게 그 사상이 널리 퍼져나갔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루터보다 능력 있는 개혁가여서 츠빙글리처럼 제네바를 자신의 손으로 탈바꿈시켰으며[121] 법학과 고전 문학을 전공한 그의 경력을 바탕으로 '기독교 강요'라는 자신의 사상을 정리한 책을 펴냈고, 대중들을 대상으로 한 연설에도 능력이 있었다.

이외에도 스위스 제네바에는 기욤 파렐, 마리 당티에르 등 다수의 종교개 혁가들이 몰려 들었는데, 이러한 이유로 칼뱅의 교리는 안 퍼지려야 안 퍼질 수가 없었고, 1530년대에 이르면 칼뱅의 교리를 신봉하는 세력도 상당히 커지게 되어 단순한 탄압만으로는 이들을 누를 수 없게 되었다. 본래 제네바를 통제하던 사보이아 공국 이탈리아 전쟁 중 프랑스 침공을 받아 사실상 붕괴되어 제네바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면서 칼뱅교회는 급속도로 세력을 늘려나갔고 루터회와는 달리 독일을 넘어서 프랑스와 잉글랜드 왕국, 스코틀랜드 왕국까지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의 위그노와 잉글랜드 청교도의 출발점이 바로 칼뱅이며, 1534년에는 잉글랜드의 헨리 8세가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 치하에서 독립시켜 영국 국교회로 국가교회화했고[122] 그리고 결국 칼뱅파는 1550년대 무렵에 스위스 전역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3.4. 중간 체크: 개신교는 얼마나 퍼졌는가?

1560년 무렵 신교는 사실상 저지할 수 없는 불가항력처럼 보였다. 원호를 그리는 북부 왕국들 ─ 스웨덴, 덴마크, 스코틀랜드, 잉글랜드─이 모두 신교로 넘어갔고, 한때 신실했던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가톨릭 도시들에서 이단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었다. 동유럽 도처에서 가톨릭교는 소수파 종교가 되어가고 있었고, 합스부르크 군주정은 자기 뒤뜰에서마저 가톨릭 신앙을 지킬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오스트리아 귀족층 대부분이 16세기 3분기에 신교도가 되었다. 독일은 인구의 약 80퍼센트가 신교로 개종한 재해 구역으로, 중요한 가톨릭 국가들 가운데 변하지 않은 곳은 바이에른 공국[123] 하나뿐이었다. 가톨릭교의 지중해 심장부─포르투갈, 에스파냐, 이탈리아─에서만 심지에 불이 옮겨붙기 직전에 당국이 가까스로 신교의 불길을 잡을 수 있었다.
Peter Marshall, 「종교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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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중반~17세기 초 개신교의 교세가 절정에 이른 시점의 지도

이 무렵 가톨릭의 교세는 궁지에 몰렸다. 폴란드 왕국과의 오랜 전쟁으로 지친 독일 기사단국은 가톨릭에 대한 회의가 늘어남과 동시에 기사단장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가 루터교회로 개종하여 프로이센 공국으로 변신했으며, 가톨릭의 보호자로 여겨지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홈그라운드인 오스트리아 대공국은 귀족 대부분이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독일은 전체가 개신교로 개종할 기세였고, 잉글랜드는 적극적으로 95개조 반박문에 대한 반박문을 작성하여( 토마스 모어의 대필이긴 하였지만) 교황에게 '신앙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받던 헨리 8세마저 성공회를 세워 이탈하였으며, 스코틀랜드는 프랑스와 동맹하며 가톨릭을 지지함으로서 잉글랜드를 견제하는 노선을 채택했지만, 제임스 6세의 잉글랜드 왕위 계승 이후 이탈했다. 덴마크와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 역시도 루터를 지지하며 가톨릭의 교세에서 이탈했다. 이 시점에서만 보자면 개신교가 이베리아 반도 이탈리아 반도만 예외로 할 시 유럽 대부분에 퍼지는 것은 시간 문제처럼 보였다.

3.5. 분열된 신성 로마 제국

사태가 이쯤 되자 카를 5세는 대립을 중재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황제 본인도 훗날 교황 하드리아노 6세가 되는 교회 개혁파 아드리안 신부가 가정교사였기 때문에 가톨릭 교회가 이대론 안된다는 생각으로 교황청에 공의회를 강요했으나 교황청은 황제 위주의 공의회를 미적거렸고 이런저런 이유가 겹쳐 빡친 황제가 로마로 군대를 보내자 그제서야 로마 약탈로 참교육을 받고나서 공의회를 시작했는데, 20여년 간 교회 개혁 문제엔 거의 비협조적으로 진행하여 본인 생전에 끝을 못 봤다.

당시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는 아직은 루터파 제후는 몇 없고 작센 선제후 헤센 방백 정도를 빼면 거의 이름 없는 인물인데다가 세력도 미약했는데 1526년 기준 당시엔 5개 제후 14개 제국도시들이 루터의 주장에 지지했다.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교회령만 1/3~1/4정도에 합스부르크 가문 세력 하나만으로도 신교도를 바르기에는 충분했다.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토 오스트리아 대공국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었기 때문에 페르디난트 1세는 루터와 그 추종자들 추방령을 당분간 유임하고 간을 보다가 1529년 황제의 명의로 다시 제국 추방령을 때렸으나 루터파 제후들은 약속 번복과 제국법위반을 들어 1531년 아예 슈말칼덴 동맹을 결성하여 황제에 대항했다. 이 무렵의 카를 5세는 이탈리아 전쟁에 정신이 팔려 독일왕으로 선출시킨 페르디난트 1세에게 독일 국정을 위임했는데 신성 로마 제국 제위만 차지하고 독일 종교 문제에 문외한이었던 형보다 독일 사정에 훨씬 해박했던 페르디난트는 상황을 비관적으로 보기도 했고 헝가리 왕국을 둘러싼 오스만 제국과의 분쟁에서 독일 제후들의 지원을 얻고자 신교도에게 유화적인 태도를 취했다. 결국 1547년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 잉글랜드의 헨리 8세, 그리고 마르틴 루터가 연달아 세상을 떠났고, 오스만 투르크와 잠시 평화협정이 맺어지자 황제 카를 5세는 생애 최대의 유감이었던 독일 내 종교 일원화를 추진한다. 공의회는 20년 넘게 배가 산으로 갈 지경으로 거의 노답 상태였고 앞서 황제 위주의 공의회 추진에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도 반발이 컸고 프랑스에서는 교황청에 자금을 끊어버렸다.

어쨌건 사코 디 로마로 교황이 거의 포로로 잡히자 열리기는 했는데 교황청의 체면을 고려하여 교황령도 합스부르크령도 아닌 트리엔트에서 열렸으나, 그곳은 오스트리아 대공국 티롤 후백국 코앞이었다. 이런 공의회를 신교도들은 거부했고 교황청에서는 돌림병 핑계를 대면서 거의 비협조적이었다.( 카를 5세가 루터파 주장을 받아들여 사제독신 제도 폐지, 평신도 양형 영성체를 요구했기 때문에 충공깽이었다.) 정작 공의회는 카를 5세가 죽고 나자 활기를(?) 띄고 처음 의제였던 교회 개혁은 번복되고 기존교리 재확인으로 끝났다.

기다리다 지친 카를 5세는 스스로 공의회 노릇을 하며 독일 전체에 루터파 의견을 약간 받아들인 자신이 직접 수정한 교리를 강요하고 반대자는 제국추방령을 때리고 신교도 제후들은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때리면서 내전이 발생했다.(자세한건 카를 5세, 마르틴 루터 참조) 결국 황제의 구상은 실패했고 자신이 임명한 작센 선제후 모리츠의 기습으로 쫓겨난 황제는 모든 것에 염증을 느끼고 스페인으로 도망간 뒤 제위를 동생에게 물려주었다.

종교 문제에 있어서 형보다 훨씬 너그러웠던 페르디난트 1세는 파사우 합의(1552), 아우크스부르크 화의(1555)를 통해 형의 명의로 루터파를 공인했고, 루터교회를 믿는 지역은 가톨릭교회를 용인하는 조건으로 종교의 자유를 누렸다.[124] 하지만 이 화의에는 2가지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다. 하나는 신앙을 결정하는 주체가 일반 민중이 아닌 그 지역을 다스리는 제후라는 것("Cuius regio, eius religio") 이었다. 1547년 슈말칼덴 전쟁시 대부분의 제후가 신교도였다는 건 사실무근이다.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와 헤센 방백 필리프 1세는 나란히 황제군에 체포되어 제국 추방령을 맞았고[125] 나머지 10여개의 소제후 및 제국도시들도 굴복했다. 훗날 대표적인 신교도 제후로 성장하여 프로이센 왕국이 되고 독일 통일을 달성하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루터파가 정식으로 공인되고 나서야 요아힘 2세가 종교 개혁에 나섰고[126], 제후들도 팔츠 선제후국 루트비히 5세 프리드리히 2세, 바덴-두를라흐 변경백국의 카를 2세, 뷔르템베르크 공국의 울리히 1세처럼 개인적 신앙은 신교도에 호의적인 사람도 있었지만 황제 카를 5세와 교황청을 두려워해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전까지 공식적으로 자신의 영지에 종교 개혁을 도입하는 제후는 많지 않았다.[127] 따라서 제후의 신앙과 다른 견해를 가진 자는 재산을 팔고 이전해야 했다. 그리고 부르주아들이 시민자치 정치를 벌이는 제국도시들[128]는 이 조치에서 예외라 개신교 우세지역의 가톨릭 신자나 반대의 경우는 도시에서 자신의 신앙대로 예배를 했다간 위협을 받았다.

다른 하나는 이 화의가 루터파와 가톨릭만의 화의였으므로 이미 상당한 세력을 이루고 성장하고 있던 칼뱅파에 대한 논의가 아예 없었다는 것이다. 합의 이후 팔츠 선제후국은 가톨릭에서 루터파[129], 루터파에서 다시 칼뱅파[130]로 개종했는데 이 조치가 유효한 것인지.. 또한 합의전에는 개신교세가 미약하였다가 16세기 후반 바이에른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이 개신교로 넘어간 상황에서 쾰른 선제후국[131]이나 뮌스터 주교구 등 지역주민 다수가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전향한 지역의 처리는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극심한 반발이 터져 나왔다.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더 이상 신성 로마 제국은 하나의 제국으로 묶일 수 없게 되었으며, 황제의 권위는 추락하기 시작하고 제후 각각의 힘이 점차 강해지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강해진 제후들은 신나게 자기들끼리 계속 치고받게 되었고, 이는 결국 1618년에 30년 전쟁으로 대폭발하게 된다.

30년 전쟁이 끝난 뒤에야 유럽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전쟁을 마무리짓는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서 비로소 개인의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었고, 칼뱅파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이는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썼던 시기에서 100년이 더 지난 뒤였다.

3.6. 가톨릭의 대항종교개혁

이 시점에서[132] 60년 후로 넘어가면 상황이 사뭇 달라 보일 것이다. 프랑스에서 위그노들은 패배하여 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네덜란드 남부는 구교에 의해 수복되어 재차 가톨릭화되었다. 독일 남부 대부분은 가톨릭의 수중에 있었고, 활기찬 가톨릭 부흥이 오스트리아, 헝가리, 폴란드를 휩쓸고 있었다. 신교는 막다른 골목에 몰렸고, 그것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 냉소적인 답변으로 제시할 후보가 있긴 하다. 바로 군사력이다. (중략) 그러나 무력이 전부였던 것은 결코 아니다. 가톨릭교는 자체 종교개혁을 추진하는 가운데 유서 깊은 위력에 의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것의 충격에 자신을 노출하기도 하면서 스스로를 뜯어고쳤다. 그 과정은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중략) 트리엔트 공의회의 제1차 회기(1545~1547)에는 주로 가톨릭의 견해와 신교의 견해를 분명하게 구별하는 식으로 가톨릭 교리(예컨대 성서와 전승의 상보적 위상에 관한 교리)의 정의를 공식화했다. 제2기(1551~1552)와 제3기(1562~1563)에는 제도를 개혁하는 문제와 씨름하여, 주교들에게 한가한 귀족이나 정부 관료처럼 유유자적 돌아다니지 말고 신자들의 목자로서 각자의 교구에 상주하라고 명령하는 교령을 도출했다. 가장 중요한 개혁은 모든 교구에 성직자 양성―중세에는 명백히 마구잡이 과정이었다―을 위한 신학교를 설립하라는 교령이었을 것이다. 규율에 충실을 기하는 교육받은 사제를 길러내려는 열망은 가톨릭 개혁의 주춧돌이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가톨릭 교도로 존재하는 새로운 방식을 개시했다. 라틴어화된 형용사 '트리엔트식(Tridentine)'은 그 방식을 나타낸다. 공의회가 마무리될 무렵, 아직 갈 길이 멀기는 했지만 가톨릭 개혁은 부인할 수 없는 성과를 거둔 터였다. 우선 논란이 분분한 거의 모든 쟁점에 관한 가톨릭 교리를 명료하게 밝힘으로써 단일한 로마의 정치적 가톨릭교회―종교개혁 이전 유럽에서 공존했던 더 엉성한 표현인 '가톨릭교들(Catholicisms)'을 대체했다―의 통일된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평신도를 위한 표준화된 교리문답서(종교 교육서)를 공인했고, 미사 집전의 균일한 순서를 정했다 ― 트리엔트식 전례는 지금도 가톨릭 전통주의자들의 사랑을 받는다. 공의회는 '악폐'를 척결하고자 사제와 주교가 교회의 사목에 정력을 쏟게 했다. 그리고 15세기 공의회들과는 반대로 교황직의 권한을 약화하지 않고 오히려 강화했다. 연이은 교황들은 트리엔트 공의회의 진행을 면밀히 감시했고, 비오 4세(1559~1565)는 교령을 승인하면서 그것을 해석할 권한을 자신에게 남겨두었다. 트리엔트 이후 교황의 권위는 제도적으로만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강화되었다. 보르자 가문의 불명예스러운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예증하는 르네상스기 로마의 퇴폐적인 분위기로 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16세기 후반 비오 5세(1566~1572), 그레고리오 13세(1572~1585), 식스토 5세(1585~1590) 같은 후계자들은 높은 수준의 금욕생활로 교황직의 명예를 회복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중략)

트리엔트식 성성들 중 하나는 (1622년 설립된) 포교(Propaganda fide) 성성이었다. 여기에 쓰인 프로파간다(Propaganda)가 현대에 정치적 기만과 조작을 뜻하는 용어로 쓰였다는 사실은 어원에 때때로 문화적 편견이 파고든다는 것을 보여 준다. 포교 성성은 로마 교회가 더이상 유럽에만 국한된 교회가 아님을 깨달은 교황청이 뒤늦게 공인한 기구였다. 포르투갈 무역상들과 에스파냐 정복자들에 뒤이어(때로는 그들에 앞서) 가톨릭교는 세계 종교, 남극 대륙과 아직 유럽인이 발견하기 전이었던 오스트레일리아를 뺀 모든 대륙에 신봉자를 둔, 진정으로 지구를 아우르는 최초의 신앙이 되었다.
Peter Marshall,「종교개혁」
한편 가톨릭은 개신교에 맞서려고 쇄신운동을 시작했다. '가톨릭의 종교개혁' 또는 '대항종교개혁'이라고도 한다. 영어로는 counter-reformation 이라고 표현하는데, 개혁에 대항한다는 뜻이다. 한국에서는 과거 그 의미를 적절하게 표현하는 번역이 없어 반종교개혁, 반동종교개혁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나 원래 의미를 온전히 전달하지 못하고 가톨릭을 폄하하는 번역이라는 주장으로 인해 위의 용어로 대체되어가고 있다.

이냐시오 데 로욜라, 그가 설립한 예수회의 등장, 그리고 트리엔트 공의회 등으로 대표된다.

가톨릭교회의 주요 교리와 윤리를 간단하고 명료하게 담고 있는 교리문답서가 발간되었고, 성직자 수도자가 사용할 새로운 성무일도서가 개정되었으며, 세계 모든 서방 가톨릭교회가 로마 전례로 통일하여 사용하게 될 개정판 미사경본이 간행되어 트리엔트 미사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불가타 라틴어 성경의 개정판이 발간되었으며, 지역교회의 주교들은 임지에 상주하는 의무를 다하면서 주일과 축일에는 강론을 하고 본당을 방문하는 사목활동에 충실하였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사제양성을 위하여 모든 교구에 신학교를 세우라고 선언했는데, 중세기에는 사제 교육이 현대인들에게 마구잡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였지만, 신학교는 이런 현상을 해결해줬으며 주교들은 신학교육과 영성지도를 받은 사제 지망자를 전보다 더욱 엄격하게 심사하여 사제로 서품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서 기존에는 기사와 귀족들에 가까웠던 봉건적 성직자들이, 장교와 관료들에 가까운 근대적 성직자들로 변화하게 되었으며, 전체 가톨릭교회가 체계화되고 일원화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다만 신학교 시스템에는 기존 지역사회의 기득권층이 교황청의 과도한 폭정이라며 아우성을 치기도 하였다.

또한 가톨릭 종교개혁의 일환에 따라 이냐시오 데 로욜라 이냐시오 영성 영신수련을 기반으로 도입된 새로운 영성운동은 바로크 예술과 결합되어 가톨릭교회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가톨릭 내에서 이들의 개혁이란 그저 단순한 대항 수준이 아니라, 중세 내내 되풀이된 쇄신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3.7. 번외: 오스만 제국

대체로 개신교 신자들도 무슬림을 가톨릭에 대항하는 동맹군으로 환영하지 않았다. 실제로 1571년 가톨릭의 신성동맹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을 무찌르자 개신교 신자들도 기뻐했다.

대체로 오스만은 제국 내의 개신교 신자들에게 개종을 강요하지 않았고, 서유럽의 분열상을 흥미진진하게 관람했다. 대체로 무슬림들은 그리스도교 안에서는 개신교 신자들의 논리에 더 공감을 했는데, 이는 성상과 성화 등 이미지에 대한 공경을 우상숭배로 보는 이슬람은 개신교 쪽과 논리가 더 유사했기 때문이다.

국가적으로는 이 시기의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기는 하였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합스부르크 왕조를 타도한다는 공통의 정치적 목적이 있어 맺은 동맹이었다. 당장 프랑스 30년 전쟁 중 오스만이 직접적으로 참전하는 것을 바라진 않았고[133], 일정 수준의 견제만을 바라는 정도였다.

오스만 제국은 이 역할에는 프랑스가 원하는 대로 행동해주어서 독일 개신교 신자들에게 대응하려던 카를 5세의 주의를 돌려놓고, 펠리페 2세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반란에 주력하지 못하게 했다. 물론 오스만도 아무 이득 없이 맺은 동맹은 아니어서, 이 동맹을 통해 오스만은 발칸 반도 오스만 헝가리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굳게 다질 수 있었다.

서유럽에서 루터파-칼뱅주의자-가톨릭 신자들에게 다굴을 당하던 재세례파는 다름아닌 오스만 제국에서 그 어떤 유럽 국가에서도 누리지 못하는 안전을 보장받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제국 내의 그리스도교 지역에서 복수의 종파가 공존하게 되었다.

3.8. 번외: 정교회

로마 가톨릭에 반기를 든 루터교회 신학자들은 16세기 중반 독일 튀빙겐 대학교의 야콥 안드레아와 그리스 고전 철학자인 말틴 크라우스가 세계 총대주교 예레미아스 2세에게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하여 보낸 것을 시작으로 동방 정교회와의 대화를 시도했다.

총대주교에게 보내진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에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천주교보다 훨씬 더 보수적으로 완고하게 전통을 지키는 정교회 특성상 루터 교도들의 신앙이 대단히 이단적이리고 여겨졌던 듯 하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에 대한 정교회의 답신은 지극히 의례적인 수준이었고 로마 가톨릭 교황보다 유화적으로 쓰인 것일 뿐 내용 자체는 동일했다.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으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받아주겠다는 것이었다.
... 신앙을 확립하신 우리 교부들께서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을 금하셨기에, 신앙을 수정하는 유일한 길은 거룩한 공의회를 좇아 사도들의 결정을 지키며 모든 것에서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 1576, 세계총대주교 예레미아스 曰

이에 루터교 신학자들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에 자세한 주석을 붙여 재차 예레미아스에게 보낸다.
예레미아스는 두 번째 편지에서 보다 굳건한 정교 신앙의 정당성을 역설하면서 교회의 전통을 더 따를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거룩한 제6차 세계 공의회에 따르면 성서는 교부들의 해석에 따라 이해되어야 하며 궤변에 의해 과도하게 해석하려는 우리들이 해석하는 바를 따라서는 아니됩니다...
수많은 합리화로서가 아니고 신실한 마음으로 교회의 전통을 받아들입시다... 교부들의 전통으로부터 비난받은 새로운 신앙을 익히지 맙시다. 거룩한 사도가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당신들이 우리에게 보낸 첫 번째 및 두 번째 편지에서 언급된 성서에 대한 구절들을 면밀히 연구해보니 우리는 당신들이 당신들의 새로운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그것들을 잘못 해석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다시 한 번 부탁하는 것이니 교부들이 해석해 온 바, 일곱개의 세계 공의회 및 지역 주교 회의에서 추인한 해석들을 따라 성서를 해석하시길 바랍니다. 일전에 이미 말씀 드렸지만 교부들이 이미 설정하셨던 영원무궁한 테두리를 들어올리거나 삭제하는 것은 불필요하므로, 우리는 제6차 세계 공의회의 초반부에 언급된 명제를 어기지 않을 것이며 그러니 그에 따른 징벌을 받으려 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므로 혹여 위배된 것이 있다면, 당신들은 신중한 사람들이니 지금부터라도 당장 고쳐나가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당신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칭찬받을 것이며, 사람들에게서도, 그리고 우리 정교회에게서도 칭찬받을것입니다.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인간의 몫이지만, 그 잘못을 바로 잡는 것은 여러분을 구원으로이끄는 역사입니다. 이 말을 잘 생각해 주시길 바라며 하느님의 은혜와 자비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 1579, 세계총대주교 예레미아스 曰

루터교 신학자들은 보다 완고해 보였던 세계총대주교의 두 번째 답신에 더욱 실망했지만 희망을 버리지는 않았다. 이들은 더욱 유화적인 문체를 써서 루터교 신학에 대해 설명하는 문서를 담아 편지를 보냈다.
특히 이 편지에서는 필리오케 의인 교리, 그리고 자유의지 성만찬에 관한 상세한 의견이 담겨 있었다.

이에 정교회의 답신은 변하지 않았다.
현명한 독일인들이여, 당신들이 보낸 책을 받아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지난 편지들에 대해 우리가 보낸 답신에 대해 충분히 만족하지 못했던 이유와 근거들을 재차 상세히 적어주셨습니다. 당신들이 말하길 당신들의 사고는 성서 뿐 아니라 나중에 옳고 낫다고 여겨진 교부들의 가르침에서도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리고나서 당신들은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삼위일체론을 꺼내놓고는 성령이 성부 뿐 아니라 성자에게서도 발출한다는 주장을 강하게 옹호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표현만 다를 뿐 다른 그리스 교부들 역시 성령이 성자로부터 발출했다는 것에 동의했다고 보고 있었는데 그 저작들은 아타나시오스(Ἀθανάσιος), 키릴로스(Κύριλλος), 에피파니오스(Ἐπιφάνιος), 바실레이오스(Βασίλειος), 나지안조스(Ναζιανζός)의 그레고리오스(Γρηγόριος)의 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저희 생각에는 당신들이 성령이 성부로부터만 발출했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성서와 교부들의 명백한 문구들을 제대로 이해하길 포기하고 이를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거나 교부들도 그렇게 다른 방식으로 생각했을 거라고 여기는 것인데 결국 당신들의 목적에 맞게끔 이를 변개(變改)했다고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 문제에 관해서는 당신들에게 답변을 주지도 않았고 그저 조용히 있었던 것일 뿐입니다. 당신들은 성서와 성인들의 해석을 당신들 입맛대로 단순하게 바꿔버렸습니다. 파울로스는 우리에게 질책하기를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고 하였습니다
(중략) 그러나 당신들은 심각하게 성서의 가르침을 당신들 목적대로 바꾸고 왜곡했음에도 몇 개의 성사(聖事)에만 만족할 뿐 다른 것들은 성사가 아닌 성서에서 명시하지 않는 교회 전통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성 요안네스 크리소스토모스(Ἰωάννης ὁ Χρυσόστομος)가 받아들였던 견진성사 마저도 반대하더군요... 그러고서도 신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중략) 참된 신학자들의 해석을 저버리고 당신의 것이 더 좋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성화상과 성물들에 대해 가증스럽다고 여기는 것은 우리가 역사와 전통을 통해 파악하건대 바로 유대인들로부터 온 것입니다. 루터교의 분열은 곧 경건을 가장하여 세계 각 곳으로 흩어진 유대인들로 인한 것입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그들은 뿌리를 취한 채 악을 향해서는 열려 있어서 매일매일 갈수록 더 악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유대인들과 완전히 상통하지 않는 대신 교회의 성사들을 온전히 흔들리지 않고 지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전하는 거룩한 사도들의 계승자들로부터 나온 가르침을 가까이 따를 뿐입니다. 그들의 해석은 그 모든 금은보화보다 값집니다. 물론 모든 성인들이 우리의 구원자 혹은 구속자가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한 분만을 우리의 구원자요 구속자로 세우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죄인이고 죄악중에 거하기 때문에 하느님을 향하여 거룩하고 만족스런 방식으로 삶의 여정을 마친 중보자로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여 주시는 성인들을 모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을 좇는다고 해서 우리가 죄를 짓는 것도 아닙니다. 성화상과 성물을 숭배하는 것은 신앙을 향해 달려나가는 자들에게 종종 수많은 치유를 불러일으키며, 우리에게 비범한 은혜를 선사하며, 또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밝히 깨우칩니다. 또한 성서 말씀에 따라서도 하나 더 고백하니 우리는 수도원의 삶을 존중합니다. 만일 진정 하늘 나라를 위해 온전히 예비하는 길을 선택했다면, 모든 세상 짐 버려둔 그들이 다시 그 뜻을 돌이키지 않기를 늘 바랄 뿐입니다. (중략)
따라서 당신들이 우리를 더 슬프지 않게 했으면 좋겠으니 교부들을 이렇게 다른 방법으로 다룰 작정이어든 똑같은 주제에 대해서 다시 편지를 쓰지 말아주십시오. 당신들은 그들을 말로는 존경하고 높인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우리의 무기가 된 거룩하고 신성한 교부들의 논의가 적절치 못한다고 생각했으므로 이에 저희는 이 글을 통해 당신들을 반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런 일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십시오. 당신들은 당신들의 길을 가시고, 교의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쓰지 마십시오. 만일 편지를 보내시려거든 오직 우의의 목적을 가지고만 쓰시길 바랍니다.
- 1581, 세계총대주교 예레미아스 曰

동방 정교회의 개신교에 대한 태도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대표적으로, 동방 정교회의 키릴로스 루카리스 총대주교가 17세기 초에 칼뱅주의 신학을 받아들여 논란을 일으켰으나, 결국 그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사례가 있다.

4. 종교 개혁이 남긴 것들

종교 개혁이라는 큰 폭풍이 지나간 100년 사이에 유럽은 그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바뀌어 있었다.

우선 개혁이 시작되었던 신성 로마 제국은 폭풍이 지나간 뒤 후대의 볼테르의 말마따나 더 이상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고, 제국도 아니게 되었다는 시각이 있다. 교황의 속권과 황제의 힘이 세트로 약해지면서 교황이 주는 황제의 권위라는 것 자체가 무색하게 되었고, 제국을 구성하던 제후들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 종교의 자치권을 얻은 것을 시작으로 점차 거의 완전한 자치권을 얻어 더 이상 하나의 제국이 아닌 일종의 느슨한 연방과 비슷한 형태가 되었다.

여기에 30년 전쟁의 폭풍이 지나가면서 독일 인구의 상당수가 죽었고, 결국 독일은 이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134] 프로이센 왕국으로 격상되어 부상할 때까지 유럽의 무대에 등장하지 못하게 되고, 제국을 다스리던 합스부르크 왕조 신성 로마 제국 통치를 사실상 포기하고 제국의 테두리 밖으로의(주로 동쪽) 영토확장을 가속화하면서 ' 합스부르크 제국'로서의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프로이센 왕국이 등장할 수 있던 배경이 신성 로마 제국의 몰락에 있었다는 것.

최근 학계는 위와 같은 해석 역시도 지나친 단순화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오토 1세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은 어차피 늘 합의의 정치를 기본 전제로 깔고 운영된 제국이었으며, 연방적 성격이었다.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의 전개는 근본적으로 이 합의체 제국으로의 복귀였다. 실제로도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이 주도한 대튀르크 전쟁을 보면, 제국을 구성하는 영방 제후들의 합의가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황제가 얼마든지 기존의 권위로 그리스도교 제국 연합군을 이끌 수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다른 유럽 국가들의 팽창에 위협을 느낀 제국 내 소국들은 변함없이 황제를 자신들의 보호자로 인정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신성 로마 제국 관련 권위자로 널리 인정받는 피터 윌슨 교수의 The Holy Roman Empire (2016) 참고) 실제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는 이 기본 틀을 흔들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7년전쟁 당시 프로이센은 제국의 성직 제후령을 세속화하여 제국 교회 체제를 근본적으로 무너뜨리려 했으나, 이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Mark Danley and Patrick Speelman (eds)., The Seven Years' War, Leiden, 2012). 따라서 정치적 측면에서 황권이 유명무실해졌다면 모를까 제국 교회 체제가 나폴레옹 전쟁으로 완전히 무너지기 이전까지는 신성 로마 제국이 더이상 '신성하지 않았다'고 단언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또한 종교 개혁은 근대 독일어를 만들었다. 이에는 마르틴 루터의 공헌이 컸는데, 루터 본인이 번역한 성경은[135] 독일 전역에 퍼지면서 그 자체로 근대 독일어의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와 달리 르네상스 시대에 처음 등장한 인쇄술에 힘입어 막대한 파급력을 갖고 있었고, 결과적으로 루터라는 한 사람에 의해 근대 독일어가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되었다.

개신교 개혁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것은 독일 지역이었지만, 다른 나라에도 개신교 개혁은 큰 영향을 미쳤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잉글랜드는 칼뱅파의 교리를 일부 빌려 성공회를 만들어 독립하였고[136], 프랑스도 위그노가 중요한 사회 세력으로 떠올라 위그노 전쟁이라는 홍역을 앓게 되고, 결과적으로 발루아 왕조가 몰락하고 부르봉 왕조가 등장하게 되는 기원이 되었다.

다만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직접적으로는 큰 30년 전쟁에 휘말리지 않았기에 잉글랜드는 엘리자베스 1세 치세에서 중흥을 맞았고, 프랑스는 한 세대 일찍 국내의 갈등을 봉합한 뒤, 30년 전쟁을 정치적으로 잘 이용한 루이 13세 리슐리외를 통해 절대왕정을 완성하고 한동안 유럽의 최강국으로 자리매김한다.

4.1. 개신교의 출현

파일:종교개혁의 영향.png
마르틴 루터 신학은 바울로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재발견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근대적이라기 보단 중세적이고 중세적이라기 보단 고대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어디까지나 가톨릭 교회를 박차고 나가서 새로운 교회를 설립한다는 주장이 아니라 진정한 초기 그리스도교회를 회복한다는 모토였기 때문이다.

루터의 개혁 운동은 덴마크와 스웨덴, 독일에 큰 영향을 끼쳤으나, 다른 유럽 지역에서는 상술한 가톨릭의 대항종교개혁 때문에 그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미약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울리히 츠빙글리와 그를 이은 칼뱅의 신학 역시 루터와 차별된 독자적인 종교 개혁을 시도했고 세계주의적인 시도를 했다. 당대에서는 북유럽, 네덜란드, 영국, 스위스 정도에 머물렀다. 물론 그 이후에도 꾸준히 영향권을 넓혀갔기에 지금 한국에도 개신교가 존재하고 있다. 16세기 중후반 한때 가톨릭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정도였지만 가톨릭은 대항했고, 17세기 종교전쟁을 겪으면서 강제력이 따르긴 했지만 유럽의 개신교도는 전체 인구의 20%선에 그치게 되었기에 결론적으로는 유럽 내에서 개신교의 영향력이 가장 큰 곳이 영국(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북독일, 스위스, 네덜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를 비롯한 게르만 및 북유럽 문화권 정도로 한정되었다. 이후 유럽에서의 종교적 갈등은 마무리되고 19세기 말까지 유럽(및 북아메리카[137]) 외의 선교는 예수회를 비롯한 가톨릭교회에서 주도하게 된다.

그러나 개신교의 출현을 통해 유럽의 서방교회의 영향권에 속하는 각 나라에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립이 일어나게 되고, 이는 멀게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건국으로 이어진다. 또 20세기부터 개신교에서도 해외 선교에 힘쓰기 시작하면서 개신교의 영향권과 영향력도 상당히 강해지고 넓어졌고, 20세기 중반에 가톨릭에서 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서 그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해외 선교에 힘을 빼기 시작하면서 오늘날 개신교는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해외 선교에 열성적인 교파가 되었다. 그렇기에 20세기 후반 이후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아시아 등 비유럽권에서 영향력이 계속해서 강해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세계 초강대국인 영국(성공회)과 미국(청교도)이 개신교의 신앙 정체성을 가진 나라이기 때문에 국제사회에 끼치는 막강한 영향력은 가톨릭의 바티칸을 훨씬 압도하는 것도 한 몫 한다. 북한 등의 공산권, 타 종교가 국교화된 지역, 이란등 이슬람권처럼 기독교가 제한된 곳에서는 지하교회 형태로 성장하고 있다.[138]

4.2. 근대의 개막

가톨릭이든 개신교이든 개혁자들은 개개인의 신앙을 넘어서, 공동체 전체를 개혁하기를 원했다. 그들이 지향한 것은 더욱 균일한 사회, 더욱 경건한 국가였다. 그러나 이 목표와 달리 유럽의 복수 종파들이라는 결과를 산출한 아이러니를 낳았다.

극단적인 예외들을 제외하면, 개혁자들은 국가의 권력을 열렬히 옹호하여 국가 자체를 복음화하려고 했으나, 국가의 권위에 도전할 온갖 논리를 산출했다. 개혁자들은 사회를 신성화하려 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전의 유럽인이라면 상상하는 것조차 거북해할 정도의 세속화된 유럽을 산출했다. 개혁자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근대라는 사생아가 태어난 것이다.

종교개혁은 잉글랜드 국왕의 지배를 받는 가톨릭 신자, 프랑스 국왕의 지배를 받는 개신교 신자 등 사회에 용인되지 않는, 그렇다고 해서 무슬림이나 유대인과는 달리 이방인은 아닌, 수많은 소수자들을 낳았다. 이러한 소수자들의 탄생은, 속권에 대한 복종의 한계를 전례없이 이론화시켰고, 소수 집단의 저항에 관한 세련된 논리들이 발견되기에 이른다. 가톨릭, 루터회, 칼뱅주의, 재세례파를 막론하고 말이다.

왜냐하면 본래 중세에 군주의 속권이란 '그리스도인의 보호자'라는 명목에서 옹호된 것으로, 군주의 속권은 하느님으로부터 보장된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이것이 바로 왕권신수설이다. 그런데 잉글랜드의 가톨릭 신자 등에게는 국왕이 '그리스도인의 보호자'일 수 없다.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의 보호자'가 아닌 필부(匹夫) 헨리, 동네 아낙 엘리자베스 등이 왕을 참칭하는 것일 뿐이며, 이들은 국왕이 아니라 참주일 뿐이다. 이를 참주 살해론(폭군 살해론)이라고 한다. 물론 비슷한 개념은 중세에도 있었다. 교황이 군주를 파문하여 권위에 타격을 준 개념은, 참주 살해론과 연결될 구석이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기 이후로는, 이전 시대와는 비교도 될 수 없는 세련된 논리들이 등장하여 군주들의 권위를 박살내기 시작한다.

루터와 칼뱅은 속권을 부정하는 인물들은 결코 아니었으나, 가톨릭 군주에 대한 불복종을 권유하였다. 잉글랜드인 로버트 퍼슨스(Robert Persons) 등 예수회 신학자들은 참주 살해를 정당화하였고, 이러한 논리에서 1534년에 아일랜드에서는 킬데어 백작의 주도로 헨리 8세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또한 잉글랜드의 개신교 신자들 사이에서도 이런 개념은 퍼져갔다. 잉글랜드 국왕은 잉글랜드 국교회(성공회)의 보호자이면서도, 동시에 스코틀랜드 국교회의[139] 보호자라는 2개의 자리를 겸직했는데 이는 "잉글랜드의 개신교는 어떠한 개신교여야 하는가?"라는 개신교 내부의 투쟁인 영국 내전을 부른다.

또한 종교 개혁을 통해 비로소 유럽 역사에서 교권과 속권이 본격적으로 구분되기 시작했다는 점이 중요하다.[140] 비록 종교개혁 이전에도 교회의 권위는 추락하고 있었고 사코 디 로마와 같은 막장 사태까지 일어나는 상황이었지만, 그 사건을 직접 일으킨 카를 5세조차도 권위를 위해 교황이 내려준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가 필요했다. 하지만 종교개혁을 통해 등장한 프로테스탄트는 이러한 권위에서 자유로웠고, 제국의 제후들은 이를 잘 이용하였다. 결과적으로 종교개혁의 폭풍이 지나간 뒤에는 교황의 속권은 호소력을 점차 잃어갔다. 다만 권위를 뺏기지 않고자 시작되었던 예수회로부터 시작된 가톨릭 내부의 자정 노력은 아이러니하게도 교회가 정치에서 멀어진 덕에 오히려 가속되어 이후 그럭저럭 성과를 거두게 된다. 또한 교황의 속권은 15세기 이후 낮아졌지만, 반대로 교황의 교권은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더욱 엄밀하게 정의되고 옹호되어 훨씬 강화되었다. 종교개혁 이후로 추기경들은 교황과 반목하는 귀족적 성격이 사라져갔고 교황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관료적 성격을 띠어 갔다.

다소 논쟁적인 주제로는, 개신교와 근대 자본주의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 특히 칼뱅주의자와 청교도의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을 고무했다는 영향력 있는 이론을 내놓은 바가 있지만, 근래 역사가들은 대체로 이 테제에 설득력이 없다고 보면서 거리를 두고 있다.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의 경제적 번영은 이 이론을 뒷받침하는 근거처럼 보일 수 있지만, 스코틀랜드의 경제가 낙후되었던 사실이나 벨기에, 이탈리아 지역 등의 반대 사례들 때문에, 종교적 차이보다는 지정학적 차이가 자본주의적 번영에 대한 훨씬 강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141] 비슷한 이야기로는 개신교가 가톨릭보다 과학에 호의적이였다는 설이 있는데, 명확하게 규명하기는 어렵다. 가톨릭이든 개신교이든 과학에 대한 적대자와 기여자가 혼합되어있었으며[142] 이미 중세때도 실험하고 추론하는 활기찬 전통들이 있었다.

근대 자본주의와 개신교의 관계에 대하여, Davide Cantoni는 AD 1300~1900년 동안 독일 내부의 272개 도시들을 비교한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Many theories, most famously Max Weber’s essay on the “Protestant ethic,” have hypothesized that Protestantism should have favored economic development. With their considerable religious heterogeneity and stability of denominational affiliations until the 19th century, the German Lands of the Holy Roman Empire present an ideal testing ground for this hypothesis. Using population figures in a dataset comprising 272 cities in the years 1300–1900, I find no effects of Protestantism on economic growth. The finding is robust to the inclusion of a variety of controls, and does not appear to depend on data selection or small sample size. In addition, Protestantism has no effect when interacted with other likely determinants of economic development.
Overall, these results show that Protestant (Lutheran and Calvinist) and Catholic cities followed very similar growth trajectories in the period 1300–1900. These findings are robust, hold in a series of subsets of the data, and are unlikely to be due to selection into the dataset, or small sample size.
-Davide Cantoni, 〈The Economic Effects of the Protestant Reformation: Testing the Weber Hypothesis in the German Lands〉

또한 비슷한 주제에 대하여 19세기 유럽 국가들을 비교한 연구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We investigate the thesis widely credited to Max Weber that Protestantism contributed to the rise of industrial capitalism by estimating the associations between the percentage of Protestants and the development of industrial capitalism in European countries in the mid- to late nineteenth century. Development is measured using five sets of variables, including measures of wealth and savings, the founding date of the principal stock exchange, extension of the railroads network, distribution of the male labor force in agriculture and in industry, and infant mortality. On the basis of this evidence, there is little empirical support for what we call the "Common Interpretation" of Weber's The Protestant Ethic, namely the idea that the strength of Protestantism in a country was associated with the early development of industrial capitalism.
우리는 개신교가 산업 자본주의의 성장에 기여했다는 막스 베버에게 크게 빚지고 있는 논지를 조사했다. 프로테스탄트 비율과 19세기 중후반 유럽 국가의 산업 자본주의 발달을 비교하면서. 발달은 5개의 변수를 이용하여 측정되었다. 이 변수는 부와 저축, 주요 주식 거래의 설립 데이터, 철도 네트워크의 확장, 농업과 산업에서의 남성 노동력 분포, 유아 사망률을 포함한다. 이 증거를 기반으로 할때,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대한 "공통 해석"(곧 국가에서의 개신교 세력이 산업 자본주의의 초기 발달과 관련되었다는 아이디어)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에 대한 실증적 증거는 거의 없다.
-Jacques Delacroix and François Nielsen, 〈The Beloved Myth: Protestantism and the Rise of Industrial Capitalism in Nineteenth-Century Europe〉

한편 가톨릭의 쇄신 운동은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해 포교 성성을 출범시키고 남극을 제외한 지구의 구석구석까지 선교사를 보낸다.[143] 이를 통해 가톨릭은 서유럽의 지역적 종교를 넘어, 오대양 육대주를 아우르는 초거대 종교로 성장한다.

이 과정에서 근대로 진입하는 중요한 발견이 있었는데, 이는 예수회 중국 선교를 하면서 일어났다. 동아시아는 고도의 문화를 갖춘 지역이였고, 따라서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문화가 유럽인들보다 뒤떨어진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때문에 마테오 리치를 비롯한 예수회원들은 중국인들이 유럽의 문화까지 받아들일 필요는 없으며, 다만 그리스도교 신앙만 받아들이면 된다고 호소했다. 그래야 중국인의 중화사상 자존심을 넘어서서 신앙이 퍼질 수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예수회원들은 중국인들에게 접근하기 위해서 중국인 고관처럼 차려입었으며, 그리스도교는 생소한 외래 종교가 아니라 유교적 논리의 완성이라고 주장하였고, 때문에 유교식 제사가 '미신적 요소가 없다'며 허용할 수 있었다. 심지어 예수회원들은 중국어로 교회의 전례를 행할 수 있도록 교황청에 요청하여, 1615년에 바오로 5세로부터 성경의 중국어 번역 및 중국인 사제들의 중국어 미사를 허용받았다.[144] 유럽인들이 모두 라틴어 미사를 참례하고 있던 시절에 말이다(!) 사실 안 그랬으면 동방에 가톨릭 전파 자체가 불가능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러한 적응주의적 선교는 다른 지역에도 적용되었는데, 예수회원들은 인도에서는 브라만처럼 입고 먹었고, 인도인 출신 개종자들을 위해 시체 태운 재를 뿌린 강물에서 목욕하는 '사회적' 관습 등을 허용하였다.

이러한 예수회의 선교 노선은 가톨릭 내부에서도 많은 반대에 부딪혔으나(특히 도미니코회 프란치스코회의 비판이 격렬했다) 이는 선교에 효과적인 방법임이 역사적으로 점점 증명되어갔다. 조선에서 선교사가 들어오지 않고 청나라로 간 유학자들로부터 자연적인 신앙이 꽃필 수 있었던 요인도 예수회사 만든 여러 서적에서 기원했으며, 교황청으로 온 선교사 요청과 조선교구 수립 요청은 이들의 노력이 옳았다는 가장 큰 증거였다.

문제는 유럽이다. 이방인들이 유럽의 문화가 아니라 그리스도교만 받아들일 수 있다면, 똑같은 원리로 유럽에서도 문화와 종교의 분리가 가능하지 않을까?
전교의 목표를 위해 낯선 사회의 관습과 의례를 존중한 태도가 유럽 지식인들 사이에서 문화적 종교적 상대주의를 촉진하고 결국 기독교 자체가 그 상대주의의 제약을 받게 되는, 예상치 못한 장기적 결과를 가져온 것인지도 모른다.
「종교개혁」, Peter Marshall
그야말로 역설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역사가 진행될수록 예수회뿐만이 아니라 유럽인 전체에서도, 어느샌가 "유럽의 문화와 그리스도교는 분리될 수 있다"라는 생각이 암묵적으로 혹은 명시적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렇듯 종교개혁의 시기에 각 종파들은 각각의 방법으로 근대라고 하는 반항적인 사생아를 낳기 시작했다.
"대관절 종교개혁이 우리를 위해 무얼 했는가?"라는 수사적 의문을 제기하는 회의론자는 종교개혁의 기념비적인 성취 ─근대 자본주의, 정치적 자유 개념, 과학의 발전, 마술과 미신의 쇠퇴─를 열거하는 장황한 답변을 들을 공산이 크다. 이 모든 성취는 오래전부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낳은 조숙하고 다루기 힘든 자식으로 여겨졌다. 그렇지만 실상은 그리 명확하지 않으며, 종교개혁이 근대성의 어머니 역할을 했다는 생각은 혈통과 양육에 관한 골치 아픈 물음을 불러일으킨다. 종교 운동으로서 종교개혁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문제들이 아니라 해묵은 문제들과 씨름했으며, 루터는 만약 근대가 그를 상대로 친자 확인 소송을 제기한다면 격렬히 부인할 것이다.
「종교개혁」, Peter Marshall
현대 자유민주주의 헌법 내 종교의 자유, 양심의 자유 원칙도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유혈분쟁이 빚어낸 역사적 부산물이라 할 수 있다.

4.3. 이단심문 마녀사냥

한편 종교개혁 시기에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로, 마녀사냥과 종교재판의 이야기가 있다. 스페인에서는 유대인 출신의, 혹은 무슬림 출신의 개종자에 대한 과도한 의심으로 종교재판이 폭주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스페인식 종교재판은 교회와 국가의 제대로 된 통제를 받게 되면서 1530년대 이후 급격히 희생자가 줄어들게 된다. 그리고 비극적이게도, 가톨릭권과 개신교권은 모두, 서로의 신심의 상대방보다 경건함을 증명하기 위해 마녀사냥이라는 명목으로 생사람들을 잡게 된다. 다만 마녀사냥에 상대방 종파를 고발했다는 통념은 사실은 아니다.
마녀를 가장 맹렬하게 박해한 1570~1630년은 신교 국가들과 가톨릭 국가들이 교파화되고 이데올로기 전쟁이 가장 격렬하게 벌어진 기간이기도 했다. (중략) 가톨릭교도들과 신교도들 중에 어느 쪽이 박해에 더 열을 올렸느냐는 것은 이견이 분분한 문제다. 박해자들 중에서도 최악은 대게 독일의 작은 영역을 통치한 가톨릭 주교들이었다. 일례로 뷔르츠부르크의 주교 율리우스 에히터 폰 메스펠브루니(Julius Echter von Mespelbrünn)은 가톨릭 개혁의 강경파로서 1616~1617년에 마녀를 300명 넘게 화형시켰다. 그러나 가톨릭 남유럽은 처형률이 가장 낮은 축에 들었고, 에스파냐 종교재판소는[145] 로마 종교재판소와 마찬가지로 마녀들이 저지른다는 소행에 회의적이었다. 칼뱅의 제네바에서는 화형당한 마녀가 거의 없었고, 신교권 네덜란드와 칼뱅파 팔츠에서는 사실상 마녀 재판이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를 비롯한 다른 칼뱅파 지역들은 1660년대까지 계속하여 마녀를 가장 혹독하게 박해했다. 17세기 중반부터 전반적으로 마녀 재판이 줄어들었지만, 잉글랜드 이스트앵글리아에서 내전 막바지에, 루터파 스웨덴에서 1668~1647년에, 그리고 유명한 사례로서 미국으로 건너가 메사추세츠 주 세일럼에 정착한 청교도 공동체에서 1692년에 추악한 마녀재판이 발생했다. 마녀재판을 종식하는 데는 다수 요인들이 함께 작용했다. 다양한 법률 체계들이 도입된 더욱 엄격한 증거 기준, 고문 제한, 과학적 회의주의, 비열한 마을 주민이 광분해서 제기하는 고발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꺼리는 엘리트주의적 태도 등이 그런 요인들이었다. 그러나 더 넓게 보면 이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들은 종교 전쟁의 종결과, 다원주의를 향해 절뚝거리며 나아간 발걸음이었다. 우럽 사회들이 실제 "타자들"을 마지못해 받아들이고 통합함에 따라 상상 속 타자들은 더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 이것은 종교개혁이 엄밀하게 균일한 기독교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데 실패하고 다른 무언가를 우연히 낳아주는 데 성공했음을 말해주는 또다른 증거다.
「종교개혁」, Peter Marshall

가톨릭교와 신교는 과격한 종교적 수사법을 곧잘 구사하면서도 좀처럼 서로를 마녀술 혐의로 고발하지 않았다. 마녀들의 주된 죄목과 종교개혁의 주요 논쟁 사이에 직접적 연관성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예전부터 마을 주민들은 반사회적인 늙은 여자들이 주술을 걸고 고약한 저주를 내린다고 항상 의심했지만, 공식 박해에 시동을 건 동력은 마녀들이 악마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악마의 명령에 따라 기독교 사회와 전쟁을 벌이는 대규모 배교자 군단이라는 의심을 굳혀간 신학자들의 확신이었다.
「종교개혁」, Peter Marshall

Both Catholics and reformers tended to hunt witches, as they hunted Anabaptists, to demonstrate their doctrinal purity and fervour. With the exception of Zwingli, the German reformers accepted the mythology of witchcraft. Luther thought that witches should be burnt for making a pact with the Devil even if they harmed no one, and he had four of them roasted at Wittenburg. The Protestants relied on Exodus 22:18: Thou shalt not suffer a witch to live.' As Calvin said: 'The Bible teaches us that there are witches and that they must be slain ... this law of God is a universal law.' The Calvinists, in fact, were much fiercer against witches than the Lutherans. On the whole, Anglican Protestants were not keen witch-hunters, and during the whole period 1542-1736 many fewer than 1,000 were executed (by hanging) in England, against 4,400 in Calvinist Scotland during the ninety years beginning in 1590. The worst year in England was 1645, when the Calvinist Presbyterians were in power. Where English Calvinists could, they propagated witch-hunting. Bishop Jewel, who had lived in exile in Geneva, brought the craze with him on his return in 1559; and in the 1590s, the Calvinist William Perkins lectured on the subject at Emmanuel College, Cambridge, a Puritan institution where some of the Founding Fathers of New England were educated. Wherever Calvinism became strong, witches were systematically hunted. Equally, on the other side of the religious barriers, it was the followers of Loyola, the puritanical Catholic, who now popularized the witch-hunt.

재세례파를 사냥한 것 처럼, 가톨릭 교도들과 개혁자들 모두는 자신들의 교리적 순수성과 열정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마녀사냥에 열을 올렸다. 츠빙글리를 제외한 거의 모든 독일의 종교개혁자들은 마법의 신화를 받아들였다. 루터는 마녀들이 그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다 하더라도 마귀와 협정을 맺은 존재들이기에 화형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실제로 4명의 마녀를 비텐부르크에서 화형에 처했다. 프로테스탄트들은 "마녀를 살려두어선 안 된다"라는 출애굽기 22장 18절에 의존했다. 칼뱅은 "성경은 마녀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들을 없애야 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 하느님의 이 법은 보편적 법이다"라고 말했기에, 칼뱅주의자는 사실 루터파보다 마녀들을 훨씬 혹독하게 다뤘다. 이에 비해 잉글랜드 국교회는 마녀사냥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1542~1736년 동안 잉글랜드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된 사람들은 1천 명 미만이었지만 칼뱅파가 지배했던 스코틀랜드에서는 1590년부터 90년 동안 4,400명이나 처형당했다. 잉글랜드에서도 칼뱅주의자들은 가는 곳마다 마녀사냥을 선전했다. 잉글랜드에서 최악의 해는 칼뱅파 장로회가 지배한 1645년이다. 잉글랜드 칼뱅주의자들은 그들의 능력이 되는 곳에서는, 마녀사냥을 선전했다. 제네바에서 유배 중이었던 Jewel 감독은[146] 1559년에 돌아오면서 그 대유행(the craze, 마녀사냥)을 가져왔다. 그리고 1590년대에, 뉴 잉글랜드의 아버지들이(Founding Fathers) 교육 받은 퓨리턴 기관인, 케임브리지 대학의 임마누엘 칼리지에서 칼뱅주의자 William Perkins가 그 주제를 강의했다. 칼뱅주의자들이 힘을 얻는 곳 어디에서든, 마녀들은 체계적으로 사냥당했다. 마찬가지로, 신앙적 장벽의 다른 곳에서, 퓨리턴적 성격이 있는 예수회원들이 마녀사냥을 대중화시켰다.
A History Of Christianity」, Paul Johnson[147]

5. 대중매체

  • 늑대와 양피지가 다루는 스토리의 큰 줄기가 바로 종교개혁이다.
  • 고성소의 슈베스터 후반부에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립이 묘사되며 마지막화에서 파사우 조약이 언급된다.
  • 크루세이더 킹즈 3에서 충분한 신앙과 헌신 레벨을 획득한 군주, 즉 대중에게 충분히 경건한 사람으로 간주되는 군주는 기존의 가톨릭을 개혁해 말 그대로 개신교를 만들 수 있다. 기존의 전통 신앙을 개혁해 다른 종교로 만들 수도 있다.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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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외부 링크


[1] 때문에 오늘날 종교 개혁이라는 말은 대개 개신교의 등장과 팽창을 위시한 개혁을 의미하나, 넓게 보면 가톨릭의 개혁까지 포함한다. 본 문서에도 가톨릭 중심으로 개혁이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널리 퍼진 것이 아니며, 일반적으로 '종교 개혁'이라고 하면 개신교가 가톨릭(천주교)에서 갈라져 나간 그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 맞다. [2] 이는 유럽 내 다른 언어들도 마찬가지였다.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도 예외는 아니며, 이를 la Reforma로 표기했다. [3] 한국어로 굳이 번역하면 가톨릭을 포함하는 의미로 쓸 경우엔 '기독교 개혁', 개신교의 출현만을 의미한다면 '프로테스탄트 개혁' 정도로 번역해야겠지만, 그러면 또 번역상의 난제가 생기는 탓에(예를 들어 '개신교 개혁'이라고 하면 한자어 특성상 겹말처럼 보일 수 있다. 개신교라는 명칭은 한자로 '개혁된 새 교회'라는 뜻이기 때문) 오래 쓰인 종교 개혁이란 번역을 사용하고 있다. [4] 사실 가톨릭에서도 개신교에서도, '요즘 교인들은 신앙이 없다'는 식의 아우성은 21세기 현재도 넘쳐난다. 아무리 그것이 진심을 담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객관적인 비교인지는 별개의 이야기이다. [5] Traditional religion had about it no particular marks of exhaustion or decay, and indeed in a whole host of ways, from the multiplication of vernacular religious books to adaptations within the national and regional cult of the saints, was showing itself well able to meet new needs and new conditions(전통적 믿음은 쇠퇴했다거나 부패했다는 흔적은 없으며, 정녕 모든 경로에서, 토착어 신심 서적들의 증가에서부터 국가적, 지역적 성인 공경에 이르기까지, 전통적 믿음은 새로운 수요들과 상태들을 충족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6] 《종교개혁》(이재만 옮김) [7] 개신교 측에서 정리한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려면 이곳을 참조하자. [8] 카를 마르크스의 경우 " 자본주의가 종교개혁을 탄생시켰다"고 평가했고, 반대로 막스 베버는 "종교 개혁으로 인해 생긴 신교도 지역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했다"고 주장했는데 두 상반된 주장처럼 간단하게 원인과 결과를 찾지 않는다. 각각 현대에 보기엔 무리한 근거들이 많기 때문. 오늘날에는 자본주의와 개신교의 연관성에 관한 시선에 역사학자들이 회의를 보내고 있다. 자세한 건 막스 베버 항목 참조. [9] 따라서 개신교에서는 10월 마지막 일요일(주일)을 종교 개혁 기념주일로 삼는다. 물론 가톨릭은 그리스도교 일치 기도 주간은 10월 마지막 일요일이 아닌 사도 바오로 축일에 맞춰서 1월 후반으로 삼는다. [10] 그 이전까지 발도파 알프스 산속에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밑 각주에서 반복하지만 얀 후스 존 위클리프의 말로는 별로 좋지 않았다. [11] 루터 측의 멜란히톤과 가톨릭 측의 가예티노 등 화합을 원하던 온건파는 분명히 있었다.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 멜란히톤은 "적어도 두 논점(평신도의 성혈 배령과 사제의 결혼)만 가톨릭이 양보한다면 재일치의 길에는 아무런 방해가 없을 것"이라고 언명했고, 가예티노 추기경은 "공의회에서 결정해야 한다"고 단서를 달기는 했으나 원칙적으로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 두 논점이 신앙과는 관련이 없고 다만 규율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천천이 곱씹어보면, 양측이 그야말로 어떻게든 재일치하겠다는 의지로 활활 불타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루터의 반대("나는 교리의 일치에 관한 토의에 대해서는 도무지 좋아하지 않습니다"August Franzen, 《Kleine Kirchengeschichte》)와 가톨릭의 30년 넘은 느릿느릿한 대응(1563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야 평신도의 성혈 배령을 다룸)으로 재일치가 실패했다. [12] Susan C. Karant-Nunn( 애리조나 대학교), The Reformation of Ritual: An Interpretation of Early Modern Germany , Christianity, and Society in the Modern World (London: Routledge, 1997); Steven E. Ozment( 하버드 대학교), Flesh and Spirit: Private Life in Early Modern Germany (London: Penguin, 2002). [13] 단 '오늘날'이 아니라, 후기 중세 기준의 '과거'와 비교할 때 후기 중세 교회가 '더' 타락했단 사관은 학자들이 거리를 둔다. [14] 이탈리아 중부를 흐르는 강으로 가톨릭을 가리킨다. [15] 영국 워릭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근대 초기 영국과 유럽의 종교사 및 문화사를 주로 연구한다. [16] 네덜란드 즈볼러(Zwolle) 근처에 위치한 빈데스헤임(Windesheim)을 거점으로 하여 토마스 아 켐피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준주성범(De imitatione Christi, 그리스도를 본받아)이라는 책을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수도원이 있던 자리는 종교개혁 이후 대부분의 건물이 철거되었으나, 일부는 남아서 네덜란드 개혁교회 건물로 활용되고 있다. [17] 다만 공의회우위설은 통일되고 동질적인 체계를 형성하고 있지는 않았다. 가령 첫번째로, 공의회와 교황의 관계를 대학과 총장의 관계처럼 보는 '대학 모델'(혹은 '조합 모델')이 있었다. 이에 의하면 총장은 개개인의 구성원 위에 있으나 대학 위에 있는 것은 아니듯이 교황과 공의회의 관계도 그러하다. 2번째는 Pierre d'Ailly 추기경의 시선인데, 교황은 본디 "충만한 권력"을 보유하며 이것은 공의회가 박탈도 제한도 하지 못한다. 그러나 긴급한 경우에 공의회가 통제 심급을 구성하여 교황에 대해 일종의 재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Jean Gerson 추기경의 공의회우위설이 있다. [18] '클라우스 샤츠, 《보편공의회사》, 분도 2005, 175쪽'으로부터 발췌. [19]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연 요한 23세가 아니고, 대립교황 [20] 여담으로 이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얀 후스 재판이 발생했고 이는 보헤미아 왕관령을 혼란으로 몰아넣은 후스 전쟁을 야기했다. [21] 때문에 대사(면벌부) 자체는 엄연히 현대의 가톨릭에도 사라지지 않은 개념이다. [22] 이게 왜 중앙의 권력 강화인지 이해가 안 간다면, 한국사에서 고려 광종 과거 제도를 도입하여 호족을 견제한 것을 생각해보자. 신학교 시스템의 의의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설명하겠다. [23] 루터의 동료 출신으로 프로이센 공국 신성 로마 제국 포메른 공국, 덴마크,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페로 제도의 루터교화에 큰 역할을 했다 [24] 덴마크 최초의 루터교 종교개혁가이자 '덴마크의 루터'로 불렸던 신학자. [25] 노르웨이 최초의 루터교회 주교이자 종교개혁가 [26] 스웨덴의 종교 개혁가. 페데르 갈레와의 논쟁으로 유명하다. [27] 스웨덴의 종교 개혁가, 수상으로 임명되어 스웨덴의 종교개혁을 이끌었으며 구스타브 바사 성경을 펴냈다. [28] 스웨덴의 종교 개혁가. 형 올로프 페르손과 함께 스웨덴 종교 개혁을 이끌었으며 첫 루터교회 웁살라 대주교. [29] 핀란드의 종교 개혁가. 페르손 형제를 도와 핀란드에서 종교 개혁을 이끌었으며 핀란드어 성경을 펴냈다. [30] 에라스무스 성경을 이용해 최초로 영어로 성경을 번역한 것으로 유명하다 [31] 루터의 서적을 최초로 이탈리아어로 번역한 사람 [32] 루터주의자로, 독일과 헝가리에서 활동했고 초기 헝가리 프로테스탄트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33] 크로아티아 출신 목사, 종교개혁가로 초기 크로아티아 개신교 전도사 중 가장 유명했다 [34] 크라쿠프 대학을 졸업한 헝가리의 작가이자 프로테스탄트로, 신약성경을 최초로 헝가리어로 번역했다 [35] 슬로베니아의 최초 (루터파) 종교개혁가이자 최초로 성경을 슬로베니아어로 번역한 인물 [36] 바젤의 종교개혁가. 칼뱅주의자였으며 바젤과 남독일에서 주로 활동했다 [37] 바젤 출신의 종교개혁가로 프란치스코회의 교세가 강한 튀빙겐 등 독일 남서부에서 활동했다 [38] 칼뱅의 사촌으로 정확히는 발도파 신자이다. 칼뱅의 도움을 받아 성경을 프랑스어로 번역했다. [39] 프랑스의 칼뱅주의 종교개혁가. 호아나 3세, 앙리 4세 나바라 왕국 왕실을 칼뱅주의로 개종시켰으며, 이후 스위스의 제네바 공화국으로 이주했다 [40] 웨일스에 칼뱅주의를 전파한 종교개혁가 [41] 웨일스 분리주의를 주장한 반체제 종교개혁가 [42]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완성한 신학자이나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에도 큰 영향을 줌. [43] 스코틀랜드 최초의 종교개혁가로, 헨리 8세에게 화형당했다 [44] 츠빙글리의 영향을 받은 스코틀랜드 초기 종교개혁가. 최초의 순교자 중 한명이다. [45]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이자 작가로, 스코틀랜드 대학들에 프로테스탄트를 전파하고 대학 교육을 개혁한 사람이다. [46] 스코틀랜드의 역사학자이자 인문주의자로, 16세기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상가이기도 하다 [47] 신약성서를 스페인어로 번역한 사람. 카를 5세의 탄압에 의해 완성하지는 못했다. [48] 성경을 바스크어로 번역해 바스크어 표준화를 시도한 사람 [49]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대귀족으로 정치가이자 종교 개혁가 [50] 폴란드의 칼뱅주의 종교 개혁가 [51] 폴란드의 귀족이자 칼뱅주의 종교 개혁가 [52] 종교개혁자 칼뱅의 선배이자 스승으로, 에드워드 6세 시기 케임브리지 대학교 흠정교수로 초청되어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에 깊이 관여했다. [53] 비텐베르크의 급진적 종교개혁가 [54] 과격혁명론자들도 모두 재세례를 주장했으나 모든 재세례파가 과격혁명론자는 아니었다. [55] 아라곤 왕국 출신의 의사이자 신학자. 삼위일체설을 부인했고 소치니에게 영향을 주었다 [56] 이탈리아의 종교개혁가로 세르베투스에게 영향을 받아 삼위일체 부인, 요한복음 1장 1절의 로고스(말씀)에 의한 창조가 창세기의 창조와는 다른 새창조라는 이론 등을 주장했다. 조카 파우스토 소치니에게 계승되어 폴란드 개혁교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원죄 부인 교리 등은 조카인 파우스토가 발전시킨 것이다. [57] 박해를 피해 스위스로 이주해 전도하다고 순교했다 [58] 폴란드 출신의 급진적 종교개혁가로, 벨라루스어의 아버지 중 한사람이다 [59] 트란실바니아 유니테리언 교회의 창립자. 본래 칼뱅주의자였다. [60] 이탈리아를 떠나 트란실바니아로 이주해 반삼위일체 운동을 펼쳤다 [61] 슐레지엔에서 최초로 종교 개혁을 일으킨 사람으로, 당시 인기가 많아 슈벤크펠트 교회를 창립했다. [62] 콘스탄츠의 주교로 초기에는 츠빙글리 등 종교개혁가들에게 동조했지만 얼마 안가 반대로 선회한 교구 개혁을 이끈 주교 [63] 바젤의 주교로, 교구 개혁을 시도했으나 실패한다 [64] 에라스무스의 추종자 출신으로 가톨릭의 개혁을 이끈 주교. 개신교와의 타협을 주장했으나 실패했다 [65] 에라스무스의 개혁안을 지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후 교구 개혁을 이끌었다. 그러나 로마와의 갈등이 격화되자 로마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파문을 선고받았고 직위에서 파면당해 결국 카를 5세의 압력으로 퇴위했다. [66] 밀라노 대주교로서 대항종교개혁을 이끈 사람. [67] 평신도 출신으로 오라토리오회를 설립해 개혁을 이끌었다. [68] 카푸친 교회를 세운 곳이다. [69] 필리포 네리와 함께 오라토리오회의 확장을 이끌었다 [70] 예수의 테레사와 같이 가르멜회 개혁에 나선 가톨릭 사제 [71] 가르멜회의 가톨릭 개혁을 이끌었다. [72] 프랑스 혁명기 푀양파와는 다르다. 프랑스에서 설립된 시토회(Cistercians) 개혁을 이끈 수도회이다. [73] 쾰른에서 수녀 교육을 위해 성 우르술라의 이름을 따 설립된 개혁 수도회 [74] 스웨덴의 바드스테나 수도원 최후의 수녀 중 한명으로, 스웨덴 요한 3세의 대항종교개혁 동안 스웨덴의 가톨릭 수도원 개혁에 참여했다. [75] 폴란드 출신의 주교로 가톨릭 대항종교개혁을 이끈 인물, 폴란드에 여러개의 가톨릭 교구를 설립해 폴란드의 재가톨릭화를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76] 네덜란드 출신의 예수회 대항종교개혁가로, 오스트리아의 재가톨릭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77] 예수회 출신 가톨릭 대항종교개혁가로, 갈릴레이의 지동설을 재판에 회부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지동설을 수용하지 않은 이유는 명목상으로는 성서에 합치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증거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고. 가톨릭을 변호하기 위해 《이 시대의 이단들에 대한 기독교 신앙논쟁 강의》(Disputationes de controversiis christianae fidei)라는 작품을 써 독일과 잉글랜드의 프로테스탄트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78] 헝가리의 예수회 주교로서, 헝가리의 대항종교개혁을 이끌어 헝가리의 재가톨릭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79] 예수회 수도사로 사보이아에서 대항종교개혁을 이끌었으며 리옹으로 건너가 에드몽 오제르와 함께 프랑스의 반 위그노 개혁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이후 교황의 명으로 프로테스탄트화된 포메라이나, 스웨덴에 방문해 스웨덴에서 대항종교개혁을 이끌던 요한 3세에게 도움을 주었고, 폴란드에 방문해 폴란드-리투아니아 도시 곳곳에 예수회 학교를 설립하는 등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대항종교개혁도 지원했다. 러시아도 방문했으며, 생전에사전학자로도 유명했다. [80] 프랑스의 예수회 수도사로 앙리 3세의 전담 사제였으며 위그노들과의 '정의로운 전쟁'을 주장해 프랑스 대항종교개혁과 위그노 전쟁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81] 덴마크-노르웨이의 예수회 사제로 스웨덴의 대항종교개혁을 이끌던 요한 3세를 지원했다 [82] 루터와 교리 논쟁을 벌인 것으로 유명한 가톨릭 신학자 [83] 켄터베리 대주교로서 헨리 8세의 종교개혁에 반발해 처형된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 이전에 루터의 주장을 비판하며 가톨릭을 옹호해 이름이 나 있었다. 에라스무스가 칭찬한 사람 중 하나. [84] 유토피아의 작가로 유명한 그 사람. 대항종교개혁자로서 잉글랜드의 프로테스탄트들과 논쟁을 벌이거나 직접 대항종교개혁을 이끌었으며, 헨리 8세의 종교개혁에 반대했다가 처형. [85] 폴란드의 성직자이자 외교관, 역사가로 가톨릭 교회를 옹호하며 16세기 후반 폴란드의 대항종교개혁을 이끌었다. [86] 폴란드의 대주교로, 예수회를 폴란드에 초청하고 대폴란드 지역에 가톨릭 종교 건물들을 건설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16세기 후반 폴란드의 대항종교개혁을 지원했다. [87] 예수회 신도이자 극작가로, 가톨릭을 옹호하는 폴란드의 대항종교개혁을 이끌었으며, 한편으로는 폴란드 문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88] 폴란드의 에수회 신도이자 작가로, 불가타 성경을 폴란드어로 번역했다. [89] 프랑스 출신의 가톨릭 사제로 프랑스 인문주의 운동과도 연관이 있으며 교구 개혁운동, 수도원 개혁운동 등을 주도했다 [90] 프랑스 출신의 인문주의자, 종교개혁가로 브리소네의 스승이었으며 사상적으로 개신교 종교개혁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으나 죽는 날까지 가톨릭 교회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91] 플랑드르 출신의 가톨릭 인문주의자 [92] 에타플스의 제자로 라틴어 대신 지역 토착어로 설교하는 등의 개혁운동을 펼쳐 가톨릭과 개신교 양쪽에서 비난받은 가톨릭 인문주의자 [93] 프랑스의 가톨릭 인문주의자로, 히브리어를 연구했다 [94] 프랑스의 가톨릭 인문주의자이자 프랑스 왕실 도서관의 관리인이기도 하다 [95] 최후의 가톨릭 캔터베리 대주교 [96] 잉글랜드의 가톨릭 인문주의자 [97] 로렌 출신의 독일 가톨릭 인문주의자. 성직자들의 부패를 비판하고 가톨릭 교육 개혁을 주장했으며 루터에 대한 파문 철회를 주장했다. [98] 독일의 가톨릭 인문주의자로, 인본주의적 사상으로 인해 가톨릭 진영에서도 비판을 받았다. [99] 독일의 가톨릭 인문주의자로, 처음에는 종교개혁에 동조했으나 이후 돌아서 루터를 격렬하게 비판했다. 요한 에크와 함께 루터 최고의 논적. [100] 대항종교개혁이 아닌 이유는 이들이 체계적인 가톨릭 개혁을 통해 종교개혁에 대항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01] 덴마크의 가톨릭 인문주의자로 처음엔 루터파에 동조했으나 이후 가톨릭으로 선회했다. 그러나 만년에 나라가 빠르게 프로테스탄트화 되는 것을 보며 사실상 중립에 가까운 위치로 온건화되었다 [102] 가톨릭 인문주의자 출신의 노르웨이 최후의 가톨릭 대주교. 덴마크의 노르웨이 루터교화에 저항했으나 실패하고 추방당했다. [103] 아이슬란드의 가톨릭 주교로 덴마크의 아이슬란드 루터교화에 저항했으나 실패하고 크리스티안 3세에 의해 처형당했다 [104] 스웨덴의 가톨릭 신부이자 대항종교개혁가 [105] 1525년 같은 호엔촐레른 가문 튜튼 기사단장이자 초대 프로이센 공국 공작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가 개종해서 같이 개종했다는 잘못된 썰이 있다. 프로이센과 브란덴부르크가 같은 호엔촐레른 가문에서 통치했던 것은 맞으나, 이 시기엔 프로이센 공국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은 사촌으로 아주 가까운 친척이었지 동군연합이 아니었다. 1618년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의 사망으로 프로이센 공국의 호엔촐레른안스바흐 가문 대가 끊어지자 가장 가까운 친척이자 맏사위였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지기스문트가 물려받으면서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동군연합이 성립되었다. 호엔촐레른 가문 본가가 개종한 것은 알브레히트의 형인 요아힘 1세가 사망하고 다음 대 선제후인 요아힘 2세 시절이다. 요아힘 1세는 '개종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으나 평소 숙부인 알브레히트를 싫어하고 안스바흐 분가 친척들에게 영향을 받았던 요아힘 2세는 부친의 유언을 쌩까고 개종해버렸다. 한편 마인츠 대주교 알브레히트는 1518년에 추기경에 오르고 1540년대 자신의 영지 할레안데어잘레가 개신교 지역으로 넘어가자 야코프 푸거에게 빚진 돈을 개종한 교회에다 넘겨버렸다. [106] 무늬만 수도자 인스브루크에서 간음등 수치스러운 범죄로 막시밀리안 1세에게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교회빽으로 석방된 전적도 있었다. [107] 4만 8천이라는 설도 있다. [108] 십자군 시기 전쟁비용을 대기 위해 성직 제후들에게 부과된 세금으로, 교구 내 첫해 수입을 몽땅 바쳐야한다. 십자군전쟁이 없어진 이후에도 관습적 세금으로 고착화되었다. [109] 오늘날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기는 하지만, 교황청의 결정에 의해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오늘날 가톨릭 교회의 이미지는 트리엔트 공의회 등을 거치며 정착해나간 것이다. [110] 1415년 독일왕 지기스문트의 신변보장 약속을 받은 얀 후스는 화형에 처해졌지만, 카를 5세는 마르틴 루터가 입장을 철회하지 않았어도 신변보장을 했다곤 하는데 조금 사실과 다르다. 제국 공민권을 박탈하는 제국 추방령을 내렸기에 누구든지 루터를 죽여도 죄를 묻지 않는다고 선언했고, 실제로 루터를 작센에 돌려보내자 암살자들이 뒤따랐다. [111] 프리드리히 3세는 루터가 비텐베르크 신학대에서 새로운 신학 이론을 펴고 작센에서 지지받자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내버려뒀다. 후계자인 동생 요한과 조카 요한 프리드리히 1세가 열렬한 루터 지지자였다. [112] 마인츠, 쾰른, 트리어는 성속 제후로 가톨릭 대주교였으며 보헤미아 국왕 페르디난트 1세는 카를 5세의 친동생이었다. 팔츠 선제후국은 막강한 정치적 위세와 라인강 무역에서 오는 막대한 금전적 수익과는 별개로 영토는 작았고 그마저도 여기저기 월경지 형태로 흩어져 있어서 군사력은 약했다. 훗날 독일을 통일하는 프로이센 왕국의 전신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호엔촐레른 가문이 무려 합스부르크 가문의 초대 독일왕 루돌프 1세의 선출부터 합스부르크 가문과 협력했기 때문에 황제에게 저항할 의사가 없었다. 프리드리히 대왕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변종이다 [113] 카를 5세는 통합 스페인의 초대 국왕이기도 하다. 스페인 국왕으로서는 카를로스 1세이다. [114] 사실 과격 혁명세력은 루터에 영감을 받아 루터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으나 루터는 거부했다. 이들의 주장 중 농노제·사유재산·화폐 폐지 및 토지 분배 까지는 현대 좌파들에게 고개를 끄덕이게 할 만하지만, 성령체험 강조로 성령을 받은 자가 못 받은 자보다 우월하다는 새로운 계급을 만들어냈고, 성령 체험을 받은 새로운 상위 계층 주도의 새로운 신정정치 체제를 열며 구약성경을 근거로 일부다처제를 옹호하며 여자가 모자라기에 소녀부터 노파까지 결혼을 거부한 미혼 여성은 사형…지배계급은 재산 몰수가 정도가 아니라 가라지나 풀무·잡초 등의 비유를 들어 적극적으로 쳐죽여야 될 대상으로 정당화했다. 또한 독일 군주들에게 자신을 지원해서 적그리스도 교황 목을 따러 가겠다고 선포하는 등 이념 면에서부터 사이비 종교 냄새가 폴폴 나며, 농민보다는 몰락기사·용병·광부 유랑민들이 수적으로 우세했다. 그리고 현대 연구에선 독일 농민 전쟁이 특수한 예가 아니라 흑사병 이래 약 200년 동안 서유럽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농민의 난의 연속으로 보고 있다. 물론 농민 전쟁은 아주 광범위하게 일어난 사건인 만큼 주장도 상이하게 달랐으며 특히 이미 전부터 농민들의 혁명으로써 공화국을 세웠던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디트마르셴은 저런 주장을 하지 않았으며 토마스 뮌처 또한 지배계급을 무작정 죽이기 전에 먼저 그들을 설득시키고 그럼에도 듣지 않을 시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농민 전쟁이 북독일 홀슈타인부터 스위스를 넘어 오스트리아까지 이어지던 광범위한 사건이라서 일어나는 일이다. [115] 그런데 루터에 대한 근대 역사가들의 평가는 대체로 호의적이다. 민족주의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좌파 성향의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무신론자였던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프리드리히 니체조차 공적을 인정하고 있고, 동독 시절 사회주의 세력도 토마스 뮌처를 가장 높이 치지만 그가 나올 수 있던 원동력은 루터가 필수적이었다고 여겼다. [116] 루터는 항상 본인을 신학자로 생각했으며, 신학 외의 사회적 문제들에 대하여는 철저하게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마르틴 루터 항목을 참고할 것. [117] 다만 이 무렵부터 총기가 본격적으로 전쟁에 등장하여 전쟁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중이었기 때문에 절정기는 이미 지나간 때였다. 실제로 이들은 당시 시점에서 얼마 못 가 몰락하고 최강의 병사라는 타이틀은 스페인 테르시오가 이어았다. [118] 결국 스위스는 종교개혁의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는 30년 전쟁이 끝난 뒤 독립을 이루었다. [119] 자세한 내용은 장 칼뱅을 참조할 것. [120] 이는 신학적으로 가톨릭에서 벗어나 황권과 멀어지는 대신, 민중 반란과 같은 사회적 문제에서는 보수적이여야 하는 그들의 입장과 루터교회가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121] 다만 극도로 금욕적인 칼뱅의 교리 때문에 이는 반발도 심했으며, 실제로 칼뱅은 이 과정에서 제네바에서 잠시 추방당하기도 했다. [122] 이는 북유럽의 루터파 지역도 마찬가지이다. 덴마크, 스웨덴에서 국가교회화하자 지배하에 있던 핀란드,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페로 제도 등도 루터파를 받아들인 국가교회로 전환했다. 현대 성공회의 경우 개신교 계열로 분류된다. 그러나 헨리 8세 시기에는 개신교 성향이 오히려 탄압받았고 본격적으로 개신교화된 건 에드워드 6세 엘리자베스 1세 시기 칼뱅주의를 받아들이고 나서이다. 그리고 개혁교회이면서 동시에 보편교회를 지향하는 모호한 정체성 때문에 18세기까지도 혼란이 제법 있었다. [123] 바이에른도 당시 공작 빌헬름 4세는 개신교에 호의를 보였으나 카를 5세가 트리어나 쾰른 중 하나는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에서 배출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회유하여 결국 가톨릭으로 남았다. 하지만 이미 종이호랑이였던 황제의 명령은 성직 선제후국에도 먹히지 않았고, 결국 쾰른 전쟁이라는 실력 행사 끝에 16세기 후반부터 약 150여년 동안 쾰른 선제후를 숙질 계승으로 준세습화하였다. [124] 다만 어디까지나 신성 로마 제국 영방국가 제후들이 루터교회를 믿을 권리를 인정한 것이지 페르디난트 1세 본인은 형과 마찬가지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에서 대항종교개혁을 시행해 서서히 재가톨릭화를 진행했다. [125] 다만 요한 프리드리히 1세는 6촌이자 카를 5세 편을 들었던 모리츠와 작센 선제후-작센 공작위를 맞바꾸는 것을 조건으로 목숨은 부지했고, 필리프 1세도 모리츠가 카를 5세를 배신하고 인스브루크에서 기습해 황제를 독일에서 꽁무니빼게 만든 덕분에 풀려날 수 있었다. [126] 지금이야 독일사에서 호엔촐레른 가문이 합스부르크 가문과 라이벌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호엔촐레른 가문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초대 독일왕 루돌프 1세가 선출될 때 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을 지지했고, 선제후가 된 이후에는 북독일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입장을 대표하는 충견(...)이었다. [127] 다만 황제의 영향력이 닿지 않던 브라운슈바이크, 안할트, 메클렌부르크, 포메른, 함부르크, 브레멘, 뤼베크 등 북독일 제후나 도시들은 1530년대를 전후하여 거의 대부분 루터교회로 개종했고 자발적으로 종교 개혁을 시행했다. [128] 뉘른베르크, 레겐스부르크, 슈트라스부르크 제국도시는 명목은 황제 직할지였으나 실상은 황제의 명은 씨알도 안먹혔고 재산과 학식 등 소양을 갖춘 시민 중심 참사회가 통치했다. [129] 프리드리히 2세, 오토 하인리히, 루트비히 6세. [130] 프리드리히 3세, 프리드리히 4세. [131] 당시 쾰른 선제후였던 헤르만 5세 폰 비트는 종교 개혁을 지지하다 교황 바오로 3세 파문 카를 5세의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퇴위했다. [132] 발췌자 주석: 위에서 인용한 1560년에서 [133] 30년 전쟁 후기로 가면 종교보다는 국가 단위의 패권 싸움이 주가 되지만, 그래도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결이라는 큰 틀은 남아 있었다. 오스만의 참전은 이슬람교 세력이 참전한다는 점에서 이 틀을 근본부터 흔들 수 있었다. [134] 본토 브란덴부르크는 30년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으나 월경지였던 프로이센 공국은 멀쩡해서 재기할 수 있었다. [135] 이 과정에서 루터는 상당수의 단어를 자신이 직접 만들어냈다. [136] 다만 이 과정에서 여전히 청교도들은 탄압받았고, 그러다 일부 청교도들이 1620년대에 신대륙으로 넘어가게 된다. 미국의 초기 영국 식민지 개척은 이 청교도들이 주도하게 된다. [137] 물론 가톨릭에서도 선교사를 파송하는 등 북아메리카 지역에서의 선교를 신경쓰긴 했지만, 이 곳(미국과 캐나다)은 개신교 신자의 숫자가 가톨릭 신자의 숫자를 압도한다. [138] 지하교회는 가톨릭도 있다. 대표적으로 중국. 중국은 체류 중인 기독교인들의 종교 활동은 보장하나, 정작 본토인들의 종교 활동은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의 가톨릭은 바티칸과 단절된 상태다. 그래서 둘의 사이가 매우 나쁘다. [139] 영국 내전 이전을 기준으로 설명하자면 시스템적으로는 잉글랜드처럼 하이브리드하였지만 청교도적 성향이 더 강했다. 때문에 스코틀랜드 국교회 신자들은 잉글랜드 국교회를 교황 없는 가톨릭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는 영국 내전의 불씨 중 하나가 된다. [140] 다만 없던 개념은 아니고, 중세 동안 교황과 군주가 서품 논쟁을 겪으면서 느슨하게나마 '교권과 속권의 분리'라는 개념이 자리잡았다. 이것이 본격적으로 발달한 게 종교개혁 시기이고, 강경하게 분리하려던 시도 중 하나가 프랑스 혁명이라 할 수 있다. [141] 예를 들어 벨기에의 부유함은 그 지역이 가톨릭 신앙을 믿어서라기보다는 원래부터 좋은 입지조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고, 네덜란드 공화국의 부유함 역시도 개신교 신앙보다는 좋은 입지조건 때문이며, 북이탈리아는 중세에도 21세기에도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 중 하나이다. [142] 예를 들어 지동설의 경우 갈릴레이는 가톨릭 신자였으며, 가톨릭 수도회인 예수회가 갈릴레이를 지지했으며, 갈릴레이의 유죄 판결도 가톨릭 신자들에게서 나왔다. 또한 개신교 신자들도 여호수아기에서 기브온 위에 '멈추어 있는' 해를 언급한다는 이유로 지동설에 반대했으며, 그 개신교 내에서도 아이작 뉴턴이 나왔다. 즉 양쪽 모두 성향에 따른 신자 개개인의 차이는 있었지만, 가톨릭 전체와 개신교 전체로 볼 때 한쪽이 과학에 더 호의적이였다고 딱 잘라말하기엔 무리가 있다. [143] 알려지지 않은 사례지만, 복자 빈첸시오 권을 통해 조선에도 선교하려고 했었다. 복자 빈첸시오 권은 조선인 출신의 예수회 수도자로, 고니시 가문( 고니시 유키나가의 가문)의 후원으로 교육을 받은 사람인데, 중국을 통해 조선에 진입하려 하였다. 그러나 명청교체기의 혼란기라서 중국을 통한 조선진입 계획이 막히고, 복자 빈첸시오 권이 일본에서 순교하여 이 시도는 실패한다. [144] 예수회 역사」 후안 카트레트. [145] 사실 스페인의 경우는 정말로 억울한 경우인데, 스페인은 마녀사냥도 적었을 뿐더러, 이단심문 역시도 알려진 것보다는 덜 광폭했다. Helen Rawlings의 통계(저서인 The Spanish Inquisition에서 인용)에 의하면 사형이 집행된 희생자 숫자는 최대한도로 올려잡아서 1480년부터 1530년까지 약 2,000명이며 이마저도 1540년대부터는 콘베르소에 대한 의심이 줄어들고, 재판에 체계가 잡혀가면서 1700년까지 에스파냐 이단심문의 모든 관할권을 합쳐 총 826명만이 처형되었다. 롤링스의 통계를 토대로 최대한도로 잡는다면 1480년부터 1700년까지 연간 12.9명이, 가장 참혹했던 1480년부터 1530년까지 연간 40명이 처형된 것인데, 이는 끔찍한 희생이기는 하지만 동시대 유럽의 타국가들보다 더 광신적인 신앙이라 말하기엔 힘든 숫자이다. 물론 이단심문 자체는 에스파냐가 가장 적극적으로 한 것도 사실이지만, 에스파냐는 마녀사냥으로부터는 안전지대였고, 종교적 박해의 막장성은 이단심문보다는 마녀사냥쪽이 훨씬 심했다. 스페인보다 훨씬 인구수가 적었던 스코틀랜드의 마녀사냥 희생자 숫자가 1590년부터 1680년까지 4,400명이였던 것과 비교한다면, 그리고 독일 가톨릭 신자들이 저지른 마녀사냥의 희생자 숫자와 비교한다면, 에스파냐가 유럽에서 가장 광신적인 지역이였다는 해석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 다시말해 에스파냐의 이단심문이 유럽에서 가장 광신적이였을지 몰라도, 에스파냐의 교회는 남독일과 스코틀랜드의 교회보다는 덜 광신적이였다. 또한 유대인 역사학자 Henry Kamen의 저서 The Spanish Inquisition에 의하면 스페인 이단심문에서는 100명이 사형선고를 받았을 경우 한두명만 사형이 집행되었고 나머지는 인형을 처형했는데, 이것이 사형 집행자 숫자가 터무니없이 오해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특히 스페인 이단심문에서 40만이 처형되었다는 황당한 정보도 많이 돌아다니므로 주의. John Vidmar의 저서 「십자군과 이단심문 Q&A 101」에 의하면 17세기 스페인 톨레도 법정의 경우 151건의 마녀재판을 다루었는데, 이는 연간 약 1.5건이다. 또한 이들 전체가 처형된 것도 아니다.(이 문서에 자주 인용된 Peter Marshall에 의하면 15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까지 유럽 전체에서 약 10만명이 고발당해 4만명이 사망) 뿐만 아니라 인용된 헨리 카멘의 연구에 따르면 수감 상태에서 죄수에 대한 처우나 사법 과정의 잔혹성 또한 종교 재판소의 여건이 평균적으로 일반적인 그냥 지방 감옥보다 훨씬 인도적인 편이었다. [146] 개신교 인물이므로 주교가 아닌 감독으로 번역했다. [147] 국내에 번역본이 있는데, 위의 원문에서 "The worst year in England was 1645, when the Calvinist Presbyterians were in power"에 해당하는 부분이 역본에 없고 "Equally, on the other side of the religious barriers, it was the followers of Loyola, the puritanical Catholic, who now popularized the witch-hunt"에 해당하는 부분이 "어느 누구보다 마녀사냥을 대중화한 장본인은 예수회 회원들이었다"로 적혀있고 , "Wherever Calvinism became strong, witches were systematically hunted" 등의 문장에 해당하는 부분도 실려있지 않다. 일단은 링크한 쪽이 인용한 판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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