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戚夫人(? ~ 기원전 194년)[1]
전한 고제 유방(前漢高帝劉邦)의 후궁. 조왕 유여의(劉如意)의 친모. '부인'은 당시 전한의 후궁 품계로, 이름이 기록되어있지 않아 척희(戚姬)나 척씨(戚氏)라고도 불린다.
고제의 후궁들 중 특히 많은 사랑을 받은 걸로 유명한 여인이다. 하지만 친아들을 황태자로 만들기 위해 고제의 정실부인이자 정치적 숙적이였던 여후와 노골적으로 대립했다가, 고제의 사후 여씨의 보복으로 중국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비참한 극형을 받은 것으로 더욱 유명하다.
2. 생애
척부인과 관련된 기록은 사마천의 《 사기》 - 여태후본기 제9권( 전문 링크)과 반고의 《 한서》- 외척전 67상 고황후 여치( 전문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2.1. 후궁 시절
고제가 한왕일 때 정도에서 만났다고 하며, 그대로 고제의 첩이 되었다. 고제는 원정을 갈 때마다 늘 척부인과 동행했고 이외에도 척부인과 같이 노래를 짓거나 춤을 추면서 어울렸다는 기록이 많은 걸 보면 고제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2] 이후 고제가 전한의 황제가 되자 척부인도 후궁이 되었으며, 기원전 207년에 아들 유여의를 낳게 된다. 고제는 유여의를 볼때마다 ‘이 아이는 나를 닮았다‘며 좋아했다고 한다.2.1.1. 여후에 대한 하극상
기원전 197년 척부인은 자신의 아들 유여의를 황태자로 만들기 위해 고제에게 매일 밤마다 울면서 애원하는 등, 갖은 수를 썼다. 당시 황실에는 고제의 정실인 황후 여씨( 여후) 소생의 적장자 유영이 있었는데, 본래 양갓집 규수였던 여후는 어린나이에 건달두목이던 고제와 혼인해 온갖 고생을 하며 남편과 그 가솔들을 내조한 조강지처였다. 그러나 팽성대전 때 여후와 그녀 소생의 아들딸[3]까지 내버리고 도망가 척부인과 살림을 꾸렸을 정도로 아내에게 별다른 애정이 없었던 고제는 유영을 폐하고 유여의를 황태자로 삼으려고 한다.당연하겠지만 나이 어린 후궁의 베겟머리 송사로 멀쩡한 적자를 놔두고 정통성도 없는 서자를 황태자로 삼겠다는 고제의 주장에 신하들은 난리가 났다. 고제가 태자 교체에 대한 견해를 묻자 유학자 숙손통은 진나라의 여희와 호해의 선례를 들며 차라리 본인을 죽이라고 했고, 주창은 유여의를 태자로 삼는다면 군신 관계를 끊겠다며 고제와의 절연 선언을 했다.[4] 당시 대전 밖에서 이 대화를 듣고있던 여후는 나중에 주창에게 무릎까지 꿇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고 하니 그녀의 마음고생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렇듯 태자 교체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무산됐으며, 고제는 한탄하고 척부인도 슬퍼했다고 한다. 이때 그가 부른 노래가 <홍곡가(鴻鵠歌)>로, 태자 유영이 장성하여 이를 막을 수 없다는 뜻을 봉황에 비유하며 부른 내용이다. 한편 남편에게 헌신한 젊은 시절을 보상받기는커녕 일개 후궁과 그 소생에게 뒷전으로 밀려나 심기가 불편했던 여후는 기어이 아들의 태자 자리까지 탐내며 자신의 권위에 멋모르고 도전한 척부인에게 무서운 복수심을 키워간다.
2.2. 비극의 시작
기원전 195년에 고제가 승하하자 장안은 여후의 천하가 되어버렸는데, 이것이 고제 외엔 별다른 보호막이 없던 척부인과 유여의 모자에게 비극의 시작이었다.아들은 왕인데 어미는 죄인이라네!
하루종일 쌀을 찧으면, 죽는 것과 다를 바 없구나!
서로 삼천리나 떨어져있는데 누가 소식을 전할 수 있을까.
子爲王,母爲虜!
終日舂,薄暮常與死相伍!
相離三千里,誰當使告汝!
(하략)
영항가(永巷歌)의 앞 부분. 한서(漢書) 97상 외척전 67상에서 발췌.
고제가 죽고
여후의 아들인
혜제가 즉위했다. 원래대로라면 조왕에 책봉된 유여의를 따라 조나라에 가야 했을 척부인은 여후의 명으로
태형을 받고 머리를 깎인 채 죄를 지은
궁녀들이 가는 영항(永巷)에 감금되어 쌀을 찧는 형벌을 받게 된다.[5] 그러자 척부인은 상기된 <영항가(永巷歌)>를 지어 노래하며, 마치 자신의 아들 유여의가 왕으로 있는 조나라에게 전해달라는 듯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이것으로 화가 머리 끝까지 폭발한 여후는 "네 년이 네 아들에게 기대어 살아남으려고 했구나"라고 말하며 척부인만큼은 절대 곱게 죽이지 않기로 결심한다.하루종일 쌀을 찧으면, 죽는 것과 다를 바 없구나!
서로 삼천리나 떨어져있는데 누가 소식을 전할 수 있을까.
子爲王,母爲虜!
終日舂,薄暮常與死相伍!
相離三千里,誰當使告汝!
(하략)
영항가(永巷歌)의 앞 부분. 한서(漢書) 97상 외척전 67상에서 발췌.
우선 여후는 척부인의 마지막 희망이자 비빌 언덕인 조왕 유여의를 죽이기 위해, 그에게 "장안으로 오라"는 송환 명령을 계속해서 내렸다. 하지만 고제의 명으로 유여의를 보필하던 주창이 병을 핑계로 소환을 거부하자, 여후는 주창부터 소환해 질책한 뒤,[6] 유여의의 보호기반을 없애고 다시 명령을 내려 기어코 유여의를 장안으로 송환하는데 성공한다. 친모의 음모를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던 혜제는 동생이 독살당하는 것만은 막기 위해 매일같이 유여의의 곁에 붙어다니며 그를 보호하려 노력했지만, 기원전 195년 12월 혜제가 잠시 사냥을 하러 간 사이 여후는 유여의를 독살하는데 성공한다. 이때 유여의의 나이는 고작 12살이었다.
유여의가 어려서 일찍 일어나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으며, 혜제가 유여의를 보호한 기간도 1달이 채 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태후본기 및 일부 기록에는 유여의의 사망일자를 기원전 194년 12월로 기록했는데 이 당시에는 진나라의 전욱력을 사용하여 정월이 10월이었으므로, 지금으로 따지면 193년 12월에 죽은 셈이다.
2.3. 최후
이후 여후는 마지막 남은 보호막마저 사라진 척부인에게, 이제까지 내린 형벌들조차 매우 온건하고 과분하게 보일 정도로 유례없는 극형을 내린다.太后遂斷戚夫人手足,
태후가 마침내 척부인의 손과 발을 자르고,
去眼,煇耳,飲瘖藥,使居廁中,
눈을 뽑고, 귀를 태우고, 벙어리가 되는 약을 먹이고, 돼지우리에 기거하게 하니
命曰人彘。
이를 사람돼지라 불렀다.
먼저 척부인의 손발(또는 팔다리)을 자르고, 눈알을 파내(또는 불로 지져) 장님으로 만들고, 귀에 유황을 부어(혹은 연기를 쬐어) 고막을 태워 귀머거리로 만들고, 혀를 자르고, 벙어리가 되는 독약을 강제로 먹여 돼지우리[7]에서 살게 하며
돼지와 같이
인분을 먹으며 살게 만들었다.태후가 마침내 척부인의 손과 발을 자르고,
去眼,煇耳,飲瘖藥,使居廁中,
눈을 뽑고, 귀를 태우고, 벙어리가 되는 약을 먹이고, 돼지우리에 기거하게 하니
命曰人彘。
이를 사람돼지라 불렀다.
사람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처참한 꼴이 된 척부인은 이윽고 사람돼지, 즉 인체( 人 彘)라 불리게 되었다. 돼지 돈( 豚)이나 돼지 저( 豬)가 아니라 돼지 체(彘)라니 생소할 수 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이후 중국인들이 돼지 체 자를 꺼려 사어화되어가서 그렇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니 그 잔인함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능하다.
당시에는 돼지를 표기한 한자로 돼지 체(彘)를 사용한 비율이 지금보다는 높았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이 인체사건으로 인해 돼지 체(彘)보다는 돼지 돈(豚)이나 돼지 저(豬)의 비율이 늘어나, 오늘날 돼지 체(彘)는 옥편 귀퉁이에서나 볼 수 있는 벽자가 되었다.[8]
게다가 한술 더 떠, 여후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본인의 아들 혜제에게 척부인을 보여주었다. 척부인은 도저히 인간의 형태가 아니었기에 혜제는 처음에는 누구인지 몰랐지만, 곧 자신의 서모임을 알게 되자 큰 충격에 빠져 혼절했다. 이후 혜제는 멘붕이 와 여후의 아들로서 정무를 보고 싶지 않다며 주색잡기에 빠지게 된다.
그 뒤 척부인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형벌의 내용 및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당연히 얼마 살지 못하고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형벌 집행 시점으로부터 겨우 며칠 정도밖에 살지 못했을 것이다. 해당 기사에 따르면 인간돼지가 되어도 얼마 동안은 살 수 있다고 분석해 당시 환경 등을 고려, 척부인은 인간돼지가 되고 난 뒤 3~4일 후 죽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3. 평가
古代妇女对于命运走向不能自主把握,只能依附男性从而不可避免地卷入宫廷斗争中。戚夫人政治上的单纯与天真,是使其在复杂的宫廷斗争中惨败从而导致其悲剧命运的直接原因。
고대의 여자들은 운명이 흘러가는 방향을 자주적으로 파악할 수 없었기에 남자에게 의존해야 했고, 그리하여 궁중의 투쟁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척부인의 정치적인 단순함과 순진함은, 복잡했던 궁중 투쟁에서 참패하여 비극적인 운명을 초래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중국의 기자 레이위칭(雷雨晴)이 작성한 「한초 척부인 천론 (汉初戚夫人浅论)」[9]의 서론의 일부. 2013년 작성, 중학생 신문지에 투고.
고대의 여자들은 운명이 흘러가는 방향을 자주적으로 파악할 수 없었기에 남자에게 의존해야 했고, 그리하여 궁중의 투쟁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척부인의 정치적인 단순함과 순진함은, 복잡했던 궁중 투쟁에서 참패하여 비극적인 운명을 초래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중국의 기자 레이위칭(雷雨晴)이 작성한 「한초 척부인 천론 (汉初戚夫人浅论)」[9]의 서론의 일부. 2013년 작성, 중학생 신문지에 투고.
중국사는 물론 세계사 전체를 통틀어도 찾기 힘들 정도로 매우 끔찍한 죽음을 맞이한 여인이기에 과거와 현세에도 많은 동정을 받았으며 여후의 악행과 실책들, 잔혹성을 비판할 때 항상 빠지지 않는 인물로 유명하다. 다만 인간돼지형이 워낙 엽기적으로 잔악해서 묻힌 것이지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척부인 스스로도 유방에게만 의존한 채 상황을 보지 않고 정치적 약점을 늘리는 실책을 저질렀고 일개 측실이 정실의 권위을 훼손하는 하극상을 일으켜 여후의 원한을 사 제 명을 재촉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실책이었다.
3.1. 비판론
(중략)
其三为戚夫人和赵王如意本身的弱势。如意不过十岁左右的孺子小儿,“ 群臣心皆不附赵王”乃是必然。戚夫人虽然是汉初杰出的艺术家,但对政治却一无所知,不懂笼络朝臣,更无强大的家世背景。一对弱小的母子面对这样一群野心勃勃的开国将相,刘邦也不免忧虑“如百岁后,谁肯北面事戚姬子乎?”
셋째는 척부인과 조왕 여의 그 자체의 약세이다. 여의는 불과 10세 남짓한 어린아이였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마음으로는 전부 조왕을 따르지 않았다"( 자치통감에서 사용한 표현)는 것은 필연이었다. 척부인은 한나라 초기의 뛰어난 예술가였지만 정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고, 조정 신하들을 회유할 줄도 몰랐으며, 막강한 가문의 배경도 없었다. 작고 약한 두 모자(母子)가 야심이 넘치는 개국공신 장상(將相)들을 상대해야 하는 이 상황에, 유방 역시 근심을 떨치지 못하며 "만약 내가 죽고 나면[10], 누가 척희의 아들을 신하로서 섬기려고 하겠느냐?" 라고 걱정했다.
(중략)
吕后与戚夫人,可谓当时两位杰出的女性,一位是谋略胆识兼备的女政治家,一位是才艺冠绝的艺术家。但两人在政治场上相逢,结局的胜负就具有某种必然性。吕后富于谋略,图长思远。而戚夫人作为“事艺型”的人才,只是单纯凭借刘邦对自己的宠爱和以眼泪唤起的同情以达成自己的目标,与吕后的纵横捭阖比起来,戚夫人不论在政治头脑或是人脉背景上都相形见绌。
여후와 척부인은 그 당시에 뛰어난 능력을 가졌던 여성들이라 할 수 있다. 한 사람은 지략과 책모, 대담함과 식견을 겸비한 여성 정치가였고, 한 사람은 재능과 기예가 매우 뛰어난 예술가였다. 그러나 두 사람이 정치판에서 만난다면, 그 결말의 승패에는 필연적인 점이 있게 된다. 여후는 모략이 풍부하여 멀리 보고 생각하지만, 척부인은 "예술가형"의 인재로서 단순히 자기에 대한 유방의 총애에 기대고 눈물로 동정을 일으켜서 자기의 목표를 달성했을 뿐, 여후가 정치적 이합집산을 주도하는 정치 공작을 행했던 것과 비교하면 척부인은 정치적인 사고력이나 인맥의 배경이나 모두 그에 비해 부족했다.
중국의 기자 레이위칭(雷雨晴)이 작성한 「한초 척부인 천론 (汉初戚夫人浅论)」의 일부 발췌. 2013년 작성
과거 기록에도 여후의 잔혹함과 악행을 비판하고 척부인의 비참한 최후를 동정할지언정, 그녀가 생전에 저지른 행동을 옹호하는 평가는 현재까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척부인의 행동을 비판하는 평가도 없었다. 인간돼지형이 너무 끔찍하고 여후가 저지른 폭정의 스케일이 커서 척부인의 개인적 실책들이 묻힐 정도로 동정론이 막강했고, 그나마 있는 척부인에 대한 평가 또한 척부인 자체를 중심으로 보기보다 여후의 부정적 평가를 위한 들러리격으로 취급돼서였다. 그러나 후술할듯이 정실과 측실관의 상하관계는 엄격히 구분되어야하며, 함부로 첩만
편애해서는 안 된다는 예시로 인용되었다는 일화만 봐도 반인륜적인 잔인한 형벌과 이에 따른 여후의 투기와 원한을 문제삼았지 척부인에 대한 여후의 처벌 그 자체는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其三为戚夫人和赵王如意本身的弱势。如意不过十岁左右的孺子小儿,“ 群臣心皆不附赵王”乃是必然。戚夫人虽然是汉初杰出的艺术家,但对政治却一无所知,不懂笼络朝臣,更无强大的家世背景。一对弱小的母子面对这样一群野心勃勃的开国将相,刘邦也不免忧虑“如百岁后,谁肯北面事戚姬子乎?”
셋째는 척부인과 조왕 여의 그 자체의 약세이다. 여의는 불과 10세 남짓한 어린아이였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마음으로는 전부 조왕을 따르지 않았다"( 자치통감에서 사용한 표현)는 것은 필연이었다. 척부인은 한나라 초기의 뛰어난 예술가였지만 정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고, 조정 신하들을 회유할 줄도 몰랐으며, 막강한 가문의 배경도 없었다. 작고 약한 두 모자(母子)가 야심이 넘치는 개국공신 장상(將相)들을 상대해야 하는 이 상황에, 유방 역시 근심을 떨치지 못하며 "만약 내가 죽고 나면[10], 누가 척희의 아들을 신하로서 섬기려고 하겠느냐?" 라고 걱정했다.
(중략)
吕后与戚夫人,可谓当时两位杰出的女性,一位是谋略胆识兼备的女政治家,一位是才艺冠绝的艺术家。但两人在政治场上相逢,结局的胜负就具有某种必然性。吕后富于谋略,图长思远。而戚夫人作为“事艺型”的人才,只是单纯凭借刘邦对自己的宠爱和以眼泪唤起的同情以达成自己的目标,与吕后的纵横捭阖比起来,戚夫人不论在政治头脑或是人脉背景上都相形见绌。
여후와 척부인은 그 당시에 뛰어난 능력을 가졌던 여성들이라 할 수 있다. 한 사람은 지략과 책모, 대담함과 식견을 겸비한 여성 정치가였고, 한 사람은 재능과 기예가 매우 뛰어난 예술가였다. 그러나 두 사람이 정치판에서 만난다면, 그 결말의 승패에는 필연적인 점이 있게 된다. 여후는 모략이 풍부하여 멀리 보고 생각하지만, 척부인은 "예술가형"의 인재로서 단순히 자기에 대한 유방의 총애에 기대고 눈물로 동정을 일으켜서 자기의 목표를 달성했을 뿐, 여후가 정치적 이합집산을 주도하는 정치 공작을 행했던 것과 비교하면 척부인은 정치적인 사고력이나 인맥의 배경이나 모두 그에 비해 부족했다.
중국의 기자 레이위칭(雷雨晴)이 작성한 「한초 척부인 천론 (汉初戚夫人浅论)」의 일부 발췌. 2013년 작성
먼저 척부인은 유방의 후궁들 중 엄청난 총애를 받았다는 것을 빼면 친정이 명문가는커녕 정치적 배경도 없었고, 아버지가 벼슬을 얻었다는 것을 빼면 일가친척에 대한 기록이 없다. 더군다나 그 벼슬이라는 것도 딸이 후궁이 되어 하사받았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11] 사실상 출신도 한미하고 가무에만 능한 후궁에 불과했다. 그런 척부인이 유방의 적장자라는 엄청난 정통성을 자랑했던 유영의 폐위에 찬성하며 여후와 대립각을 세웠다는 것은, 황제의 총애에만 의지하던 일개 후궁이 지방호족+개국공신인 명문가 출신에 내조 기간도 길었던 황후와 그 황후 소생의 맏아들이 지닌 후계자 자리까지 넘보는 하극상을 일으킨 것이다.
대중들의 편견과 오해와 다르게 처첩제도가 있던 현실은 측실도 정실보다 신분이 낮았기에 측실이 정실에게 하극상을 일으키는 행위는 금지사항이었으며 가장도 자신이 아끼는 측실만을 편애해 정실을 존중하지 않는 행위는 문제시되었다. 처첩제도 국가의 정실의 의무는 내명부를 수호 및 관리하는 것. 그 중에서 측실 관리도 포함되어있었다. 따라서 정실은 문제 행위를 해 내명부의 풍기를 문란케한 측실에게 벌을 내려 내명부를 관리할 권리가 있었고 만일 측실이 큰 잘못을 저질렀다면 측실에게 벌을 준 정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측실이 비난을 받았다. 따라서 유방과 척부인의 행동은 당대에도 문제시될 여후에게 큰 무례를 저지른 문제 행위에 속했다.
상술했듯 여후는 원래 지방호족의 딸로 세상물정 모르고 살다 가난한 동네 건달이던 고제의 관상을 눈여겨본 아버지 여공에 의해 그와 혼인했으며, 어려운 형편 속에서 고제가 사고를 치고 도망다닐 때마다 대신 형벌을 받고 옥살이까지 하는 등 죽도록 고생하며 남편과 그 가솔들을 내조했다. 고제의 신하들이 태자 교체론에 강하게 반대한 것도 이 시절의 여후를 봐왔던 것이 어느정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심지어 초한전쟁 시절 시아버지와 함께 항우의 포로가 되었던 여후는 4년 동안 초나라 군영에 인질로 잡혀있으면서 온갖 굴욕과 멸시를 당했는데, 이 당시 척부인을 만난 고제는 그녀와의 사랑놀음에 푹 빠져있었을 때였다. 시아버지와 자식들 그리고 가솔들을 이끌고 천하를 방랑하며 피난다닌 시절을 생각하면 고제의 천하통일 후 구출된 여후가 척부인을 처음 마주했을때 남편에게 느낀 배신감은 엄청났을 것이다. 그렇게 본인을 희생한 뒤 이제 막 황후로서의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하는데, 자신의 아들을 폐하고 척부인이 낳은 아들을 황태자로 올리겠다는 고제의 의도를 접한다. 참고로 봉건시대에 후계싸움에서 탈락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에, 출신도 불분명한 어린 후궁이 ‘너희 모자를 죽이겠다’라고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여후는 척부인의 하극상에 뼈에 사무칠 정도의 증오를 쌓아가고도 남았을 것이다.
게다가 척부인은 정치적 지략과 감각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제군주정에서 후계자 선정 문제는 국정과 연관된 심각한 문제였기에, 그 후계자의 정통성과 지지세력 같은 배경은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척부인은 후궁 신분으로 황위 투쟁에 뛰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신하들이나 다른 권세있는 귀족들을 아군으로 포섭해서 정치적 기반을 다지기는커녕,[12] 유방에게 매달리며 감정에 호소하는 얄팍한 수만 써대면서[13] 기록에까지 버젓이 남을 정도로 아들을 황태자로 만들기 위해 노골적으로 행동했다. 이렇게 무분별하게 정치적 약점을 만들고 세력을 키울 생각조차 안 했으니 신하들마저 척부인에게 반감을 가졌고, 유방의 사후에 척부인과 유여의 모자가 위기에 처하자 혜제가 된 유영을 제외하면 아무도 그들을 도와주지 않았다. 여후가 후일 여씨 일족 우대를 통한 사실상 나라 친탈을 하려는 만행을 저질러 비판을 받았다지만, 최소 본인의 정치력과 처세술은 좋았기에 항우처럼 반대파나 마음에 안든다고 무분별하게 죽여대서 약점을 늘리는 어리석은 성향은 절대로 아니었다. 이렇게 정치적 식견이 상당했던 여후가 반인륜적이고 황실과 자신의 평가에도 악영향이 갈 법한 도넘은 형벌을 척부인에게 내리려고 하자, 과거 태자 교체 건을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신하들조차 여후를 말렸다는 기록이 없는 것만 봐도, 당시 척부인의 처형을 막아줄 세력이 전무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설령 중국은 고대나 중근세에도 조선과 다르게 적서차별은 덜해 후궁도 자신의 친자가 후계자가 되어 황위를 이어받는다면 현제의 생모로서 황태후가 될 수 있었다지만, 적자가 없다는 전제하에만 가능했지 적장자가 있다면 반드시 후계자로 선정하는 것은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동일했다.[14] 후세에 세워진 청나라는 유목민족인 만주족이 세운 나라라 능력을 중시했다보니 중국사를 통틀어 적서 차별이 거의 없었지만 어디까지나 매우 덜했다는 것이지 대놓고 서자를 우선시했다는건 아니었다. 적자가 정통성에서 유리하다는 인식은 변함이 없어 적자가 있으면 후계자로 먼저 선정하고, 서자 출신 황제들은 자신의 생모를 황후로 추존해 정통성을 확보하는 것에 많은 신경을 썼다. 이렇게 전한 이전이나 이후에 세워진 나라들도 적장자 우선이라는 계승법을 1순위로 중요시했는데, 유방은 개인적인 사심과 여후 견제랍시라고 멀쩡히 살아있는 적자를 폐하고 총애하는 후궁의 서자를 후계자로 삼으려고 했다. 유방의 이런 행동은 자칫하면 전한이 정통성과 계승 문제로 통일 진나라처럼 얼마 못가 멸망하거나, 척부인과 유여의 모자도 정치적 암투에 휘말려 다른 방향으로 죽을 수 있었던 매우 위험하고 잘못된 생각이었다.
전한이 세워지는데 영향을 미친 통일 진나라가 중국 전체를 통일한 지 얼마 안돼 멸망한 것은 단순히 호해(이세황제)의 폭정 때문이 아니라 호해의 정통성이 너무 떨어져서 신하들의 지지와 민심을 잃어버린 것도 한 몫했다. 진시황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적장자이자 자질이 뛰어나 세간의 평판이 매우 좋았던 황태자 부소를 자결시키고 다음 차남도 아니고 무려 18남이자 서자인 호해를 황태자로 내세웠는데[15] 덕분에 정통성이 바닥이였던 호해는 자신의 손윗, 손아래 남자 형제들만 아닌 황위 계승권이 없는 여자 형제들까지 잔인하게 몰살해가며 황위에 올라야 했다. 그래서 재위 초기부터 평판이 좋지 못했고, 후일 알다시피 폭정으로 "근본도 없는 가짜 황제[16]가 폭정까지 한다." 라는 명분을 제공해 통일 진나라를 3대만에 멸망시켰다. 이런 선례때문에 초한전쟁이 일어났고 전한을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신하들은 진헌공의 첩인 여희의 만행을 예시로 들며 황태자 교체를 극렬히 반대할 수 밖에 없었다. 설사 적서구별을 안하고 태어난 순서를 따진다해도, 유여의는 태자가 될 가능성이 매우 없었다. 유여의는 유방의 자식들 중 3남에 속했는데 서자들로만 한정짓자면 유여의는 당시 10살 채도 안된 차남으로 첫째인 유비[17]에게 우선순위가 한참 밀렸다.
결국 척부인이 황위 계승에 뛰어들게 된 1차적 원인은 유방의 잘못된 판단에 의한 실책이라는 타의가 컸고 정치에 무지했다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한들 후궁 신분으로 서자에 불과한 자기 아들을 태자로 만들어달라며, 신하들의 반발을 살만큼 무리한 욕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은 황후의 권위를 훼손하고 당대 계승법을 어겨 율법과 국정을 농락한 몰상식적인 행위로 사회적인 질타를 받고 명백하게 처벌받을 사안이 맞았다. 반인륜적인 처형을 당하고 여후가 이후에도 제 평가를 깎아먹는 만행을 저질러준 덕에 동정을 압도적으로 받은 것이지, 여후가 현명하게 대처했다면 척부인은 황제의 총애를 이용해 국정과 내명부를 농락한 오만방자한 후궁이자 요부로 기록되어 둘의 평가는 뒤집어졌을 것이다.[18]
가끔가다 척부인에 대한 어긋난 변호론으로 여후를 두려워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생존 목적으로 황권에 뛰어들었다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여후의 잔학무도함에만 집중한 나머지 앞뒤를 잘라먹은 모순인데 여후는 자신의 적(개인적 원한 상대, 정적들)에게만 잔혹성을 드러냈지 적이 아닌, 아군이거나 최소 중립인 사람에게는 잔혹하게 대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19] 때문에 황후 시절에도 한신과 팽월 등 토사구팽 라인의 공신들을 제외한 아녀자와 노약자에겐 잔혹성을 드러낸 적이 없었는데, 기록에 의해 정치적 감각과 지식이 없었다는 것이 유력한 척부인이 여후의 본성을 파악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되려 척부인이 여후의 본성을 파악하고 두려워했거나 황실 내에서의 생존 목적이였다면 황명을 어기는 짓이라한들 유방에게 버림받거나 죽을 각오를 해서라도 태자 교체에 적극적으로 반대해서 황권 투쟁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표현하거나[20] 유방과 함께 철저히 정치적 공작을 짜서 여후를 폐위시킨 후 본인이 황후가 되는 것이 더 합당했을 것이다.[21]
진짜 유여의를 황제로 만드는게 목적이였으면 결과론적으로 차라리 여후 치세까지 숨죽이고 있었던게 나을 뻔했다. 처신만 제대로 했어도 여후 축출 이후에는 유여의도 유항과 함께 황제 후보로 고려되었을 것이며, 유여의가 연장자였던 것을 고려하면 더 유리했을 것이다.
3.2. 동정론
여후가 척부인을 학대하고 살해한 것은 매우 비인도적인 처사이므로 우리는 마땅히 질책해야 한다. 여후의 이런 행보는 그녀 자신을 중국사 치욕의 기둥에 영원히 못을 박았다.
왕리췬(王立群), 중국의 역사학자. 허난 대학교의 예술사 교수.
척부인은 당시 상황들을 고려하면 정치적 야심이 있었다기보다 정치에 무지한 후궁이 타의에 의해 황권 투쟁에 휘말렸고 자신의 능력 범위 내에서 행동한 것에 가까웠다. 때문에 어리석었고 개인적인 처신을 잘못했다해도 끔찍하게 살해당할 정도의 중죄나 큰 잘못이었다고 볼 수 없었다.왕리췬(王立群), 중국의 역사학자. 허난 대학교의 예술사 교수.
인권 개념이 미미했던 과거에도 능지형과 거열형 같이 신체를 훼손하거나 죄인의 시체를 이용한 요리(젓갈)같은 잔혹한 형벌은 역모죄를 계획한 대역죄인에게만 가했었고, 경고 목적으로 대중들에게 공포심을 주기 위해 시행된 것이다. 이런 잔혹한 형벌들을 단순히 분풀이 용도로 남용하거나 특히 남녀노소 안가리고 학살하는 것은 고대에서도 비난받는 행위였다. 당장 항우만 해도 학살과 팽형을 남발해 민심이 떠나 그가 몰락하게 된 원인이 되었고 후세 조조가 서주 대학살로 끝까지 비판받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척부인은 여희와 조비연, 만귀비 같은 역사 속 악녀들처럼 악랄하게 권력을 탐해 황족을 모독하고, 황제인 유방의 총애만 믿은 채 여후의 권위를 무시했다고 보기 힘들었다. 황태자 교체가 실패한 이후 유방과 같이 슬퍼했다는 것만 빼면 그외의 잡음을 일으켰다는 기록은 없는 걸 볼 때, 척부인은 신하들의 대대적인 반대 이후 유여의의 황태자 옹립을 바로 포기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또한 혜제가 이복동생이기 이전에 경쟁자가 될 뻔했던 유여의를 직접 도와주려고 한 것만 봐도, 척부인은 지속적으로 황태자 자리를 탐내지 않았고 여후 모자에게 해코지도 가하지 않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정말 척부인이 자의적으로 황권 투쟁에 뛰어들어 아들의 황태자 옹립을 추진하고, 더 나아가 여후와 혜제에게 해코지를 했다면 바로 국정을 농간한 역도로 몰려 처형당했을 것이다. 황태자 교체 실패 이후 신하들도 척부인의 행동에 반감을 가지면서 그녀는 제대로 된 지지세력도 존재하지 않았기에, 여후의 입지와 지위에 있어 위협조차 되지 못했고 사형을 당할 중죄와 위치를 가졌다고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여후는 복수심 때문에 세력도 명분도 없는 척부인 모자에 대한 원한을 거두지 않고, 지나친 보복을 가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만일 정치적 목적의 숙청과 자신의 자리를 넘본 방자한 첩에 대한 처벌 목적이었다면 폐위와 유배로 충분했고, 정 죽여야했다면 참수나 독살, 교수형같이 법도에 적힌 처형법이나 육체를 보존할 수 있는 온건한 처형법으로 처형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여후는 제후국의 왕으로 봉해진 선황의 아들을 정식 절차를 통한 폐위와 처벌이 아닌 암살이라는 불법적인 방식으로 죽여버렸고, 마찬가지로 선황의 후궁으로 황족이었던 여자에게 산 채로 잔혹한 신체훼손을 가하고 동물 취급을 하며 오물투성이에 버려 죽어가게 만든데다 그걸 자신의 아들에게 보여주었다. 이건 아무리 봐도 정적 처리 및 법도에 따른 정당한 처벌로 볼 수 없는, 그저 개인적인 앙심에 의해 저지른 잔학무도한 사적제재에 불과하며[22] 더 나아가 황제인 혜제를 모욕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정작 여후는 유방의 생전에 그를 대신해 한신을 포함한 공신들을 처리할 때[23], 머리를 쓰며 정당하게 죽일 명분을 만들어내는 식으로 냉철하게 행동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지나친 원한에 사무친 것이 그녀의 실책으로 옹호받을 수 있는 선을 넘어버려 현세에도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원칙적으로 유방에게 책임이 있다. 유방이 유여의를 황태자로 삼으려고 한 것은 총애하는 여인의 소생이라는 개인적인 사심도 있지만, 척부인과 유여의 모자를 이용해 여후와 외척인 여씨 일족을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도 컸을 것이다. 적통을 떠나 여후의 아들인 유영을 배제한다면, 여후와 여씨 일족의 권세도 약해질 거라고 판단했던 것. 실제로 여후도 토사구팽 때 유방을 부추켜 팽월을 잔인하게 처리하고 이 영향으로 노관과 영포가 반란을 일으키는 결과를 낳아 유방과 갈등을 겪었고, 외척 세력에게 휘둘려서 국정이 망가진 사례는 무수히 많았기 때문에 외척의 발호를 견제하는 것도 마땅히 군주가 해야 할 과제였다. 문제는 다른 좋거나 타당한 방법들도 있었는데 하필이면 정통성이 떨어지는 첩의 아들에 당시 10살도 안된 어린 유여의를 황태자로 삼으려는 실책을 벌였고, 이는 정통성 문제로 수많은 신하들의 반대와 여후의 증오만 낳는 결과를 낳았으며 그렇게 사랑했던 척부인과 유여의 모두를 암투에 끌어들여 사지에 밀어넣은 꼴이 되었다. 황태자 교체에 실패한 이후 유방도 자신이 죽으면 척부인과 유여의 모자가 여후에게 보복받을 것이 너무나 자명했기 때문에 슬퍼했다고는 하지만, 유여의를 보호해줄 신하는 주창 밖에 없었고 여후에게 대항할 수 있는 인재 확보나 보호 기반을 제대로 만들지 않은 것은 최악의 실책이라 볼 수 있었다. 만약 정말로 유방이 유여의를 황제로 삼겠다고 제대로 마음을 먹었다면, 최대한 유여의를 보호할 세력을 만들면서 동시에 여후와 유영의 측근들에게는 누명을 씌우든 어떻게 해서든 제거해야 했다. 이렇게 하지 못 했던 것은 정실 부인인 여후와 그 소생을 황태자에서 끌어내릴 명분이 없다는 것을 유방 본인도 알고 있었고, 이 때문에 신하들의 동의를 얻기 쉽지 않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황태자 교체를 위한 제대로 된 준비도 없고 명분도 없는 상황에서 척부인에게 헛바람을 불어넣어 모자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만든 것은 전적으로 유방의 책임이 크다.[24]
당대는 신분제와 더불어 남존여비도 당연시되었기 때문에 여자들은 개개인의 성격을 떠나, 남자에게 의존하거나 순종해야 했으며 권력을 쥐게 된 케이스도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닌 배경을 통해 얻은 것이 많았다. 여후도 정치적 식견까지 좋은 야심가로 당시에 드문 여인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런 여후조차 남편이자 황제인 유방의 권위 앞에서는 꼼짝 못하는 신세였다. 여후가 본격적으로 권력의 정점에 선 것은 고후기라 불리는 여후의 손자 대인 전후소제 섭정 시기인데, 두 황제가 어렸고 유방의 정실이자 유영의 모후, 두 황제의 조모라는 배경을 가졌기에 권력을 쥘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시대상 속에서 황태자 교체 사건도 황족들 중에서는 을에 속한 후궁, 그것도 민가 출신의 한미한 신분인데다 가무가 특기일 뿐이였던 척부인이 주도했다기에는 무리가 많다. 척부인이 진짜 주체였다면 유방은 여색에 미쳐 공사도 분간하지 못하는 무능한 암군으로 낙인찍혔을 것이고, 척부인은 황제의 총애만 믿고 친아들을 황태자로 삼아 정실의 자리를 탐낸 역도로 몰려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아있는 기록과 당시 법과 제도, 사회적 인식, 척부인의 입지를 고려하면 척부인이 스스로 유방에게 간청했다기보다, 유방이 먼저 유여의를 태자로 삼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하자 척부인도 맞장구를 치고 어떻게든 성공시키기 위해 호소한 것에 가까웠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한마디로 척부인은 정치력이 전무해 유방에게 거절 의사를 표현할 입지는커녕, 성격도 되지 못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달리 없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어쩌면 척부인이 정말 순진무구해서 황태자 교체로 인해 일어날 정치적 파장과 그 자리에 따라오는 책임도 모르고, 자기 아들을 황태자로 삼아준다는 말에 그저 좋다고만 생각하며 멋모르고 암투에 뛰어든 것에 가까울 수도 있다.
척부인과 여후 사이의 개인사를 다 제외하고 봐도, 당시 정세 속에서 척부인과 유여의 모자는 운이 매우 없었다. 일단 조나라가 수도 장안과 가까운 위치에 있었고[25], 유방 사후 척부인의 유일한 보호막이 되어줄 혜제는 즉위 당시에 고작 16살밖에 되지 않았다. 때문에 혜제는 경험이 부족해 재위 초창기부터 여후가 수렴청정을 했고, 척부인의 아들 유여의도 11~12살 정도로 터무니없이 어렸다. 거기에 믿을만한 인재도 주창 한 명밖에 없었던데다, 조나라를 지킬 군사들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방 사후 척부인 모자가 빨리 죽게 된 배경은 여후가 두 사람을 우선순위로 두고, 손쉽게 잡을 수 있을 정도로 터무니없이 약한 기반과 압도적으로 불리한 환경의 비중도 컸다. 이후 척부인이 태형을 받고 영항(永巷)에 감금되어 쌀을 찧는 형벌을 받을 때 그에 순응하고 조용히 형벌을 받았다면 그토록 비참한 최후는 피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척부인은 곧바로 <영항가(永巷歌)>를 지어 노래하며, 자신은 억울하고 여후는 지나치다며 권력을 휘어잡은 여후를 비판하기까지 했다. 여러모로 눈치가 없었던 것. 여후가 어린 유여의를 황도로 소환한 것도 <영항가> 이후인 것을 생각해보면, 아들의 죽음을 불러온게 척부인 본인이라 봐도 이상하지 않다.
반면 박희 모자와 유비가 여후의 숙청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고제의 총애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여후가 질투할 이유가 없던 것도 있지만, 인품이 좋았고 조용한 성격이라 유유자적 사는 박희를 정적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이 크다. 척부인의 비참한 최후 때문에 간과하기 쉽지만, 여후는 정적 외의 사람들에게까지 잔혹한 성격은 아니었다. 또한 둘이 부임한 대나라와 제나라의 위치가 장안이랑 멀리 떨어져, 소식을 전하는데 지장이 있다보니 여후 몰래 군사력을 키우는데 좋은 환경이었던 것도 있었다. 특히 유비는 자신 휘하 땅을 이복 여동생인 노원공주에게 바칠 정도로 군사력은 수도 쪽 세력보다 우위였다.
차라리 한고제 유방이 직접 척부인을 폐서인 등의 처분으로 쫓아내 버렸다면, '이미 선제께서 조치하신 일이다' 정도로 넘어갈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추정도 있다. 그러나 이건 이것대로 쉽지 않은 이야기인게 우선 죄도 없는 황제의 첩을 쫓아낼 명분이 없다. 이는 혜제를 폐세자하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척부인과 유여의를 쫒아내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과거 자신을 잘 모시지 못했다는 등의 핑계를 지어낸다면 쫓아낼 수야 있겠지만 역사를 보면 선황이 용서한 신하를 후대 황제가 목을 날려버린 일도 비일비재했는지라, 훗날 그 부분을 꼬투리잡혀 선황에게 불충한 짓을 한 자로 몰아서 처형해버릴 수도 있고 여후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3.3. 결론
비판론은 척부인 개인의 우둔함에서 비롯된 실책들과 황태자 교체가 실패하고 숙청될 수 밖에 없었던 현실 문제, 동정론은 척부인이 어쩔 수 없이 지닌 한계와 운이 없었던 당시 정세와 환경 문제에 맞추어져있으나, 둘 다 공통적으로 다루는 부분은 척부인은 처신을 잘못하여 실책에 비해 지나치게 잔혹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것, 유방과 여후의 정치적인 대립에 휘말린 피해자에 가깝다는 점이다.[26]그러나 여후가 척부인 모자를 제1의 숙청 대상으로 여길 정도로 강한 원한을 품었고 정치에 무지한 척부인이 황권 투쟁에 휘말려 죽게 된 핵심적인 원인은 공사를 분간하지 못한 척부인 모자에 대한 잘못된 애정과 여후와 외척을 견제한답시고, 정통성이 매우 떨어지는 서자를 황태자로 교체한다는 최악의 수를 두고 태자 교체 시도 실패 후 두 모자의 제대로 된 보호 기반도 만들지 않은 유방의 그릇된 판단이었다. 설령 정말 황태자 교체에 성공해서 유여의가 황위를 이어받았다한들, 이미 여희와 해재, 호해라는 사례가 있기에 척부인 모자가 안좋은 결말을 맞이하는 건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그만큼 유여의와 척부인의 정통성과 권력 기반은 터무니없이 약했고, 척부인의 미약한 정치적 감각을 보면, 얼마 못가 백성들의 반발과 신하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폐위당하는 걸 넘어서 처형당할 수도 있었다. 때문에 여후 견제 목적이였다면 차라리 유방 본인이 살아생전 여후의 측근들(심이기, 번쾌)과 여씨 일족들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키는게 더 현실적이었을 것이다.[27]
즉, 처음부터 유방이 척부인 모자를 정치 암투에 끌어들이지 않는 것이 제일 이상적인 방법이었지만, 여후의 성격이나 당시의 정세를 근거로 척부인 모자도 혜제기를 외부에서 넘길 수 있을 정도로 세력 기반이 탄탄했거나 운이 따라주었다면,[28] 박희 모자나 유비처럼 살아남았을 가능성도 있었으니[29] 이런 부분에선 결국 유방의 원죄와 책임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4. 기타
- 뒷간에서 죽었다는 최후로 인해 중국에는 척부인을 화장실의 수호신(원문은 厕神)으로 모시는 민간 신앙이 있다고 알려져있다.
- 미모도 뛰어났지만 각종 가무에 능했고 특히 조나라의 대표 문화인 "소매를 치켜들고 허리를 꺾는 춤(翹袖折腰之舞)"을 잘 추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취미가 맞았고 당시 심신이 지쳤던 유방이 척부인을 유달리 총애한 것이라고 한다.
- 야사에는 여후의 잔인함을 부각시키기 위해 인간돼지로 만들 때 척부인의 음부를 짓이겼다니, 집행하기 전 남자 죄수들이 갇힌 감옥에 내던져 능욕당하게 했다니, 유여의의 시체를 척부인에게 보여준 뒤 인간돼지로 만들었다는 일화가 있지만 인간돼지 사건을 제외하면 어디까지나 야사니 걸러보도록 하자.[30]
- 사람돼지 일화는 척부인이 유명해서 그렇지 후일 당나라의 왕황후와 소숙비도 측천무후에게 숙청당할 때 인간돼지형을 받고 죽었다는 야사가 존재한다. 다만 이쪽은 사지만 잘리고 죽은 뒤 술이 담겨진 항아리에 담겨지는걸로 끝났던지라 완전히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처지가 된 최후를 맞이한 척부인과는 비교가 안 된다.
- 전한 문제-경제 시절의 정치가인 원앙은 척부인의 사례를 들어서 문제를 비판한 적이 있다. 문제가 총애하는 후궁인 신부인(愼夫人)과 함께 상림원(上林苑)에 행차해서 정해진 자리에 앉으려고 할 때, 원앙은 일부러 신부인의 좌석을 효문황후의 것보다 뒤로 끌어내어 신부인을 황후보다 낮게 대우했다. 당연히 신부인과 문제는 크게 화를 내고 그대로 궁으로 돌아갔다. 원앙은 이에 대해 "첩과 정부인은 같은 격에 둘 수는 없습니다. 첩을 그렇게 총애하신다면 후하게 선물을 내리십시오. 폐하께서는 사람돼지 이야기를 듣지 못하셨습니까?"라고 말했다. 즉 함부로 첩을 황후와 똑같이 대했다간 애꿎은 첩만 피를 보고 나중에는 척부인 꼴이 날 수 있다고 경고한 것. 이에 정신이 번쩍 든 문제는[31] 이 원앙의 말을 신부인에게 전해 줬고, 신부인도 이 이야기를 듣고 생각을 바꿔서 원앙에게 감사를 표하며 황금 50근을 선물로 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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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의 제1계비
인목왕후와 흥미로운 유사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 둘다 자신의 권력 기반과 배경이 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친아들을 왕위에 올리려고 무리하게 시도하다가 정적[32]에게 원한을 사 아들이 살해당하고[33], 본인들도 비극을 맞이하여[34] 세간의 동정을 받고, 정적들은 이런 지나친 보복 때문에 후대에도 비판을 받았다는 점, 그러나 단순히 동정의 대상으로 보기에는 본인들에게도 무모한 권력욕 및 잘못된 처신, 처세술의 부족과 같은 큰 실책이 있었음을 함께 지적받는다는 점 역시 유사하다. 심지어 이들이 보인 무모한 권력욕의 배후에는 군주인 남편(교체될 세자의 아버지, 즉 한고제 유방과 조선 선조)의 정국 장악력 확보 시도가 있었다는 점이나, 처음에는 정말 세자 교체가 가능하리라 착각한 것인지 들떠서 선을 넘는 행보를 보였지만 현실권력의 문제로 그것이 불가능함을 알게 된 이후에는 더이상 직접적인 저항은 하지 않았고 (또는 애초부터 할 수도 없었고) 순순히 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음에도 가혹한 보복을 당했기에 이것이 지나친 일로 여겨져 본인이 받는 동정과 정적이 받는 비판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많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인목왕후와 척부인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었는데, 인목황후는 선조의 정비인데 비해 척부인은 어디까지나 일개 후궁의 신분이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유방 사후 여후에게 끔찍하게 살해당하는 최후를 피할 수 없던 척부인에 비해 인목왕후는 그저 폐서인 및 감금되는 것에 그쳤고, 상대적으로 가벼운 이런 조치마저도 폐모살제라 하여 광해군의 정당성에 심각한 타격을 주어 인조반정의 중요한 명분 중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광해군이 폐위된 후 인목왕후는 소성대비로 복권되어 막강한 권위를 가지게 되었고, 사실 인조 즉위 후 그녀의 행적을 보면 여전히 부족한 정치적 통찰력으로 여러 실책을 거듭 저지른 탓에 그에 대한 평가는 현대까지도 여전히 좋지 않지만 어쨌건 그녀가 주는 정통성에 의존해야 했던 인조로써는 참고 저자세를 취할 수 밖에 없었던 것. 말하자면 왕조국가에서 정식 왕비(황후)가 가지는 권위란 이정도로 강력한 것이니, 그 권위를 가지지 못한 후궁으로써 황후+적장자의 생모+즉위(개국) 이전부터 유방을 내조해온 조강지처+자기 자신의 상당한 정치적 기량+나름 명문가에 속하는 출신 가문이라는 끝판왕급으로 강력한 권위를 가지고 있던 여후의 비위를 조금이라도 거스를 생각을 했던 척부인이 얼마나 무모했는가, 또는 얼마나 세상물정을 몰랐는가를 보여주는 근거로써는 아주 유용할 것이다.
- 또 다른 조선시대의 사례를 보면, 건국 초기, 개국군주의 배우자(왕비)로써 왕을 설득하여 자신의 친자를 후계자로 책봉하도록 밀어붙였다는 점, 그리고 이로 인해 정적인 다른 왕자들의 역습을 받아 자식이 살해당하고, 본인까지 사후 모욕을 당했다는 점에서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사례와 비교해 보는 것도 가능하다. 다만 신덕왕후 강씨는 당시 고려의 유력자들의 편법적 중혼 관습, 즉 향처와 경처를 따로 두는 관습에 따라 중앙의 유력 귀족 집안 출신으로 이성계와 결혼하여 정치적 파트너 역할을 해 온 인물이었고, 또 이성계와 먼저 결혼한 향처였던 훗날의 신의왕후 한씨가 조선 건국 이전에 사망한 덕도 보아 조선 건국 이후 한씨를 '절비'라는 애매한 지위로 밀어내고 유일한 왕비, 즉 조선 최초의 왕비 지위에 오르는데 성공한 인물이었다. 즉 일반적인 결혼의 논리(특히 처첩제의 논리)에서는 먼저 결혼한 부인에게 우선권을 주는 것이 당연시되지만 '개국군주의 특수성'을 보면 즉위 이전에 여러 부인이 있었던 경우, 남편이 즉위하고 정식으로 왕비의 지위에 세워진 이가 가장 정통이 아니냐고 말할 여지가 생긴다는 것. 이 논리에 더해 정도전등 신권정치를 지향하는 신진사대부 세력과도 손을 잡고 결국 이방석을 조선 최초의 세자 자리에 책봉하는 데까지 성공하였으니, 정치력 대결의 차원에서는 사실상 신덕왕후 강씨가 일단 완승을 거뒀던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닌 셈이다. 하지만 정치적 차원에서의 이 승리는 신덕왕후 사후 이방원등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에 의해 군사적 차원에서 이뤄진 반격으로 무너졌고, 군사적 승리로 집권한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 이방과→ 이방원)이 이후 생모 한씨를 정식으로 왕비(신의왕후)로 추존하고 신덕왕후의 위패를 종묘에서 치우고 능을 이전하여 공식적인 지위는 바꾸지 않되 사실상 후궁에 준하는 처우로 대하게 하는 등 강씨가 거뒀던 승리의 결과를 무위로 돌림으로써 자신들의 정통성과 권위를 강화하고 정적에게 보복하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결국 이 두 사례는 거의 유사점을 찾기 어렵다. 주요 인물간 구도를 비교하자면 <여후-척부인/유영-유여의>:<신의왕후-신덕왕후/이방원-이방석>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인데, 이렇게 두고 비교해보면 각 인물들의 입장이나 특징, 행적등이 무엇 하나 유사하다고 말하기 어려움을 쉽게 알 수 있는 것. 게다가 주된 갈등 전개 역시 '자신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무지함과 무모한 권력욕'과 '그에 대한 과도하게 잔인한 보복'이 주된 논란거리인 척부인 사건에 비해 왕자의 난으로 끝난 조선 초기 왕위 계승 분쟁은 상당히 팽팽한 권력 다툼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당장 막내를 무리하게 태자로 내세운 것이 신덕왕후측의 중요한 패착, 즉 정치적 무리수로 평가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세자 책봉까지 얻어내는데 성공했으니 척부인 사건이나 자주 그 비교대상으로 제시되는 인목왕후-영창대군 사건등에 비하면 이것만으로도 이미 이방원 등 신의왕후계에게 상당히 유효한 공세를 가하는데는 성공했던 것이다. 심지어 신덕왕후의 이름 죽음이라는 악재만 없었다면 좀 더 팽팽한 대결이 이어졌을 가능성도 없지 않은 것. 말하자면 개국 직후 창업군주의 자식대에서 벌어진 계승권 다툼이라는 상황의 큰 틀은 유사 사례로 꼽을 수 있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은 별 공통점이 없다. 굳이 공통점을 찾아보자면 강력한 권위를 가진 개국군주가 개인적인 감정, 또는 정국 장악력 강화를 목적으로 이미 장성한 큰 아들이 아닌 어린 아들을 후계자로 삼으려고 시도한 사례라는 점이나 군주와 친밀한 관계인 왕비, 또는 후궁은 계승구도를 비롯한 정치적 국면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써 비교대상으로 삼을 수는 있을 것이다. 어쨌건 이 사례와 비교해보더라도 척부인은 참 무모했다.
- 중국 여성 아나운서 장웨이제 실종 사건을 현대판 척부인 사건으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다. 장웨이제는 중국 공산당 고위 간부였던 보시라이의 내연녀였으나 임신 8개월째에 갑자기 실종되어 영영 나타나지 않았는데, 얼마 후 인체의 신비전에 임신 8개월 임산부의 시신이 표본으로 전시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표본이 납치 살해된 장웨이제의 시신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일단 인체의 신비전에 시신을 공급하는 다롄시 인체 표본 공장의 총 책임자가 구카이라이였으며 이미 남편의 내연녀였던 장웨이제에게 분노하여 방송에서 퇴출시킬 정도로 원한관계도 충분했다. 임신 8개월 임산부가 홀연히 사라지더니 그 구카이라이와 연계된 전시회에서 임산부와 태아가 나타나니 음모론은 증폭됐다. 특히 태아를 확인한 의사의 소견으로는 태아가 8개월이 맞다니 음모론을 막을 수 없었다. 만약 음모론이 맞다면 본부인이 남편의 첩을 끔찍한 '인간돼지'로 만든 사건과 비견될 정도로 '현대판 돼지인간' 사건이니 워낙 충격적이고 자극적인 사건인지라 관련 드립까지 탄생했다. 인체의 신비전 측에서는 실종된 장웨이제가 '현대판 척부인'이 아니라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에 인체의 신비전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도 늘어났다. 이 음모론을 종식시키는 방법은 인체의 신비전 CEO 군터 폰 하겐스가 시신의 출처를 정확히 공개하거나, 최소한 중국인이 아니라는 것만 확인해줬어도 끝나는 문제였으나 그는 '중국인이 맞지만 지인에게 받았고 자세히 밝힐 수 없다'고 하여 음모론에 불을 질렀다. 중국인 시신을 넘길 만한 지인이라면 시신 공장의 총 책임자인 구카이라이가 유력한 지인 아니겠냐는 것이다. 시신의 국적과 태아 8개월까지 일치하고, 전시회에 시신을 넘긴 공장의 총 책임자가 실종된 8개월 임산부와 원한 관계였으니 마치 '인간돼지' 사건의 척부인처럼 단순히 죽인 걸로도 성이 안차서 시신을 모형으로 만들어 박제시킨 것이 아니냐는 음모론이 퍼지게 되었다. 더군다나 구카이라이는 자신의 내연남조차 이용가치가 떨어지니 냉정히 살해할 정도로 사이코패스 적인 면모도 있었기에 남편의 내연녀에 대한 질투로 능히 저런 짓을 하고도 남을 인물이란 점이 음모론의 개연성을 더 높였다.
5. 창작물에서
유방 사후 척부인의 말로를 다룬 매체에서는 인간돼지 일화가 너무 잔인해서인지 매체에 따라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검열되거나 순화시키는 방식으로 묘사되고 있다. 요코야마 미츠테루가 그린 만화 사기에서는 그림으로는 실루엣의 형태로, 나래이션으로 상태를 서술하는 식으로 묘사되었다. 고우영 십팔사략 5권 초한지전 편에서 인간돼지 일화에 대해 그려진 챕터가 있는데 그림체 특성상 간략하게 묘사되었으나 잔혹한 부분은 여전하다. 일부 연극이나 드라마에서는 척부인이 항아리에 담긴 형태로도 표현하는데 이는 측천무후의 일화를 참고해서 고어적인 부분은 검열하는 식으로 연출한 것.삼국지를 모티브로 한 화본[35] 삼국지평화에는 팽월의 환생인 유비의 아내 감부인으로 환생하며, 아들 유여의는 유선으로 환생해 전생과 달리 행복하게 살게 됐다는 설정이다. 남편 유방은 헌제로, 숙적 여후는 폐후 복씨로 환생해서 조조(한신의 환생)에게 괴롭힘 당하거나 죽는데, 당시 민중들에게도 척부인에 대한 동정론이 매우 우세했음을 알 수 있는 흔적이다. [36]
영걸전 시리즈의 삼국지조조전 Online에서는 유방전 스토리에서 등장한다.
유방이 수수대전으로 항우에게 패해 달아나는 와중에 팽성의 농가에 들르자 척희는 유방과 만나는데, 아버지와 함께 유방에게 대접을 한다. 며칠 후에 유방으로부터 "훗날 나를 찾아오면 오늘의 신세를 갚겠다"는 약속을 받는데, 유방이 항우와 형양에서 한 차례 싸운 직후에 유방을 찾아와 유방의 아이를 잉태했다는 것을 알린다.
라디오 드라마 와이파이 초한지에서 등장한다. 첫 등장과 황실 암투에서의 성우가 다르다. 팽성대전에서 유방이 패배한 이후 첫 만남에서는 성우 서다혜가 담당하고, 이때 유방은 사탄의 인형 드립을 친다. (척희>처키) 해하 전투 이후 입궁한 뒤에서는 이지선으로 바뀌고, 사기, 원전 초한지의 기록을 따라 아들을 황제로 만들어달라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토사구팽 중심으로 스토리가 진행되면서 유방이 사망한 시점에서 이야기를 끝냈기 때문에, 유방 사후의 인간돼지 사건 등의 일이 묘사되지 않는다.
중국 드라마 대풍가(大風歌)는 전한 초창기 시기[37]를 다룬 만큼 당연히 등장. 유방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어 언제나 유방의 곁에 붙어다니는 형태로 등장한다. 성격은 착하지만 우유부단하고 그리 현명하지 못해 아들 유여의와 유방에게 끌려다니고 있다. 드라마의 설정이지만 자신들의 자식들을 다룰 때 여후와 박희, 척부인의 차이가 드러나는 묘사가 있다. 박희는 유항이 불만을 내뱉으면 적당히 타이르면서 유항의 나이에 맞게 세상사에 대해 알려주고, 여후는 유영이 약한 모습을 보이면 밀어붙이다가 자기 말을 듣는다 싶으면 잘해주지만, 척부인은 유여의가 철없이 굴면 그저 말리기만 할 뿐, 박희처럼 가르쳐주지도, 여후처럼 강하게 압박하지도 못하고 있다. 드라마의 분량이 짧아서인지, 극중 척부인의 성격이 우유부단하게 설정돼서인지 척부인이 중심이 되어야 할 태자 교체 사건때는 비중이 있기는커녕 갖은 수를 썼다는 묘사는 나오지 않았다. 유방 사후에 그녀를 미워한 여후에 의해 영항에 끌려간 뒤에는 등장이 없다 11화에 재등장. 고된 형벌로 폐인이 되었다. 여후가 척부인을 증오하는 이유는 단순히 연정 문제가 아니라 후궁 주제에 국모 자리를 넘본 정치적 문제라고 말하자[38] 이미 정신이 피폐해진 척부인은 자포자기한 채 "나는 유방의 사랑을 얻었고 그저 유방의 뜻을 지지한 것에 불과하다"고 도발을 가하고 <영항가>를 부르다 여후의 명에 의해 혀가 잘리고 머리를 통째로 뽑히는 형벌을 받게 된다. 12화는 유여의의 독살과 인간돼지 고사를 다룬 만큼 척부인이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파트. 여후는 척부인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혜제를 독살하려다 유여의가 대신 짐주를 마시고 독살당했다는 역모 누명을 씌워 인간돼지형을 내려버린다. 아들을 잃고 혀도 잘려 항변도 못한 척부인은 처참한 꼴이 된 채 절망에 빠져 실성한 채 웃다 울고, 조정 대신들도 척부인이 누명을 썼고 과한 형벌이라 생각해 율법을 근거로 그녀의 처형을 막으려고 했으나 여후의 권위 앞에 아무도 항변을 못한 채 척부인은 끌려가 역사대로 살해되고 만다. 척부인이 인간돼지가 된 부분은 혜제의 회상으로 흑백 처리가 된 채 아주 짧게 흘러가는 식으로 묘사되었다.
중국 드라마 초한전기에서는 탕옌(汤嬿)이 연기했다. 미인에 유방의 총애를 독차지했다는 것은 원전과 동일하지만, 척부인이 등장하는 초한기를 다룬 매체 중 척부인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한 매체인데, 유방이 부상을 입고 군영에서 쓰러지자 유방 사후 후계 문제에만 집착한다던지 유방의 쾌유를 비는 제사를 대놓고 지내 적들에게 알리는 식으로 여러가지 실책을 저질러 내부에 혼란을 야기하는 어그로를 끌었다. 이외 원래 여치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했지만 고모의 충동질에 말려들어 여치와 대립하는 등, 후일 황태자 교체 문제로 여후와 대립한다는 암시를 뿌리기도 했다.
미인심계에는 여후와 박희와 다르게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작중 인물들의 입으로 종종 언급되고 있는데, 척희와 척부인을 혼용하고 있다. 19화에서는 섭신아(신부인)역을 맡은 왕려곤이 척부인의 원혼으로 등장해 말년의 여후를 혼절시켰다.[39] 박태후는 병으로 사망할 때 갈등을 겪었던 며느리 두의방( 효문황후)에게 심정을 표현하는데, 여후와 자신은 권력을 얻었지만 남자(유방)의 사랑을 얻지 못했고 척부인은 유방의 사랑을 받았지만 권력이 없어 여후의 손에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다는 식으로 언급했다. 그래도 사랑을 받았다는 것 때문에 척희를 부러워했다고.
옹정황제의 여인에서는 견환이 부찰 의흔을 겁줄 때 척부인의 인간돼지 일화를 읊어주면서 부찰 의흔의 멘탈을 산산조각냈다. 그리고 얼마 후, 부찰 의흔은 폐인이 되어 자기 처소에 연금된 뒤 치료 받는 신세가 된다.[40]
춘향전에서 고문으로 피폐해진 춘향이 꾸는 꿈에서 왕소군 등 중국 역사 속 유명 여인들과 함께 춘향을 만난다. 다른 여성들은 멀쩡하게 등장하는데 본인은 끔찍하게 죽은 것 때문에 바람과 목소리로만 등장. 자신의 죽음을 춘향에게 한탄한다.
지옥홍보팀 악대리에서도 악대리가 척부인 일화를 언급하는데, 죄인을 전문적으로 고문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고 고문 도구를 연구도 하는 악마조차 척부인 일화를 듣고 "너무 끔찍하다"며 크게 충격을 받으며 "인간은 정말 창의적인데 왜 나는 그런 생각을 못하냐"며 울기까지 한다.
[1]
출생 년도는 불명.
중국어 위키백과에는 기원전 224년으로 적혔지만 현재는 삭제되었다. 유여의가 기원전 207년생인지라 정확히는 아니어도 대충 기원전 224년 전후로 추측할 수 있다.
[2]
왈가왈부는 있지만 척부인과 정사를 나누다
주창에게 걸렸다는 기록도 있었다. 말이 좋아 걸린 거지 그냥 대낮에 들키든 말든 대놓고 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주창이 그 꼴을 보고 눈을 돌리자 장난기가 동한 유방이 주창을 놀리려고, 등 뒤에서
슬리퍼 홀드를 걸고 "내가 누구같은 임금이냐!"라고 묻자 "주군은
걸
주같은 폭군입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3]
유영과 노원공주
[4]
평소 화가 나면 말을 더듬는 버릇이 있던 주창은 저 대화에서 말을 두번이나 더듬었다.
[5]
반면 같은 유방의 후궁인
박희(박부인, 효문태후 박씨)는 아들
유항이 대왕으로 부임한 대나라로 멀쩡히 갔다. 이는 박희가 유방의 총애를 받지 못해 권력의 중심이 되지 않았고, 이 결과로 후계자 싸움에 뛰어들지 않아 여후가 그녀를 숙청할 이유를 못느꼈기 때문이다.
[6]
앞서 목숨걸고 태자를 폐위하면 군신 관계를 끊겠다며 태자 유영을 보호한 공 덕분에 질책 이상의 해코지는 당하지 않았다.
[7]
전한 시대에는 돼지우리를 뒷간(화장실)처럼 사용했었다.
[8]
참고로
돼지 돈(豚)은 원래 새끼 돼지만, 돼지 저(豬)는 암퇘지만을 뜻했으나 오늘날에는 돼지를 가리키는 단어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9]
원문 출처는
해당 링크, 전문도 전부 서술되어있다. 저자가 기자에 중학생 신문지에 투고된 칼럼인 만큼 역사학자가 집필한 논문보다 가치는 떨어지는 편이나, 단순한 흥미성 가십거리로 썼기보다 교육 목적에 맞추어져 역사 기록과 자료들을 참고해 척부인이 어떤 인물인지, 당시 전한의 사회상과 제도, 황태자 교체에 실패한 이유를 설명, 척부인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간단히 서술했기에 참고 목적 하에 읽을 가치는 있다.
[10]
百歲之後 : 글자 그대로는 "백 년 뒤", 죽음을 돌려 말하는 표현이다.
[11]
사실 아버지 건도 불명확해서 실질적으로는 가족 관련 기록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12]
유방의 계획이 실패한 이유는 유영이 처음부터 막강한 정통성 덕분에 신하들의 지지를 받은 것도 있었지만, 여후 역시 자신의 현 직위와 아들의 정통성만 믿고 가만히 있지 않았기 때문도 있다.
장량의 조언을 바탕으로 상산사호(商山四皓)를 초청해서 여론을 장악, 신하들의 반대 의견에 힘을 실어줘 폐제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의 근거를 제대로 얻은 것. 그 결과 유방도 황태자로서 유영의 기반이 탄탄하다는 걸 인정함과 동시에 자신의 고집으로 황태자를 바꾼다면, 아예
황실에는 다시 계승권 문제로 핏바람이 불고 더 나아가 국가기반도 망가질 거라는 현실을 직시하고 포기한 것이다.
[13]
전제군주정 국가의 후계자 선정에서 이렇게 군주에게 감정적으로 호소해 봤자, 그 결과 후계자를 바꾼다는 명령이 떨어지기라도 한 게 아니라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헛수고를 한 거나 마찬가지다.
[14]
태자밀건법을 시행한 청나라나 아들들을 골고루 챙겨주었던 몽골 제국과 티무르 제국, 형제들끼리 내전을 벌여 나머지 후계자를 모조리 제거하고 남은 승리자가 술탄에 오르던 오스만 제국 같은 예외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적자우선이었다. 이마저도 청의 태자밀건법은 제정되고 얼마 안 가 사문화되어 실제로는 적장자가 우선되었으며, 몽골 제국은 원나라 때부터 적장자 우선 원칙이 도입된 상태였고 티무르 제국은 아들들을 골고루 챙겨 준 결과 오래 가지 못하고 분열되었다. 오스만에서도
아메드 1세 이후로는 황족 남성 가운데 최연장자가 우선적으로 제위를 받는 것으로 바뀐다.
[15]
사마천은 희대의 간신
조고가 호해를 등극시키기 위해 황명을 날조해 부소를 죽였다는 설을 내세웠지만 이도 확실한 증거는 없다. 시황제와 부소는 서로 심한 갈등이 있었고, 부소를 변방으로 원정보냈다는 사료가 있어 부소는 자결한 것이 아니라 전쟁 중 사망했고 시황제는 호해를 후계자로 발표하고 죽었다는 해석도 있긴 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시황제가 정말 정신이 나가 호해를 지목한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사마천이 조고가 호해를 이용하기 위해 황명을 날조해서라도 부소를 제거했다고 해석해야 앞뒤가 맞을 정도로 시황제의 행동이 막장이었다는 것이다.
[16]
단 이 가짜 황제는 호해의 정통성이 많이 떨어진다는 비유적 의미로 쓴 것이지 호해가 진짜 황족이 아니라는 의미로 서술된 것이 아니다. 그만큼 호해의 세간의 평판이 매우 안 좋았다는 의미로, 안 그래도 정통성이 없는 황자가 국정을 잘 살펴도 좋아질까 말까 한 와중에 폭정까지 저질러대니 난이 일어나고 빠르게 분열된 것이다. 비록 황제를 자처하지 않았지만 통일 진나라의 마지막 황제라 할 수 있는
진왕 자영은 출신은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호해의 숙청에서 피할 수 있는 계승권과 한참 먼 방계 황족이었기에 호해 사후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었다.
[17]
유방의 아들들 한해 생몰년도를 서술하자면 장남 유비(생몰년도 불명, 기원전 221년 ~ 213년 사이로 추정, 조씨(曹氏) 소생), 차남 유영(기원전 211년, 여후 소생), 3남 유여의(기원전 207년, 척부인 소생), 4남
유항(기원전 202년, 박희 소생), 5남 유장(기원전 199년, 조희(趙姬) 소생)으로 유우, 유회, 유건은 순서대로 6, 7, 8남으로 생몰년도 불명. 유비는 유방이 백수건달짓을 하던 시절 내연 관계였던 조씨 소생이였기에 순서와 관계없이 서자가 되었고, 유영은 정실 여후 소생이였기에 자연스레 유영이 적장자가 된 것이다.
[18]
심지어 비판론과 동정론을 보듯이 실책에 비해 지나치게 잔혹했던 최후와는 별개로, 저 '황제의 총애를 이용해 함부로 황위 계승에 끼어든 후궁'이라는 평가는 유효하다는게 중론.
[19]
다만 여후가 척부인을 아군이거나 중립인 상대로 여기는 것은 태생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앞서 기술되어 있지만 여후가 항우의 포로로 잡혀 4년을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상태로 고생했던 것과 달리, 척부인은 어느 정도 세력을 구축한 유방 옆에서 총애를 한껏 받았다. 여후 입장에선 척부인의 존재 자체가 역린이나 다름없다. 심지어 초한전쟁 이후에도 유방은 노골적으로 척부인을 더 총애하였다.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은 여후와 척부인 사이의 갈등이 훨씬 더 많으리라는 짐작도 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척부인 개인이 아무리 여후와 관계를 개선하려고 해봐야 과연 여후가 얼마나 척부인을 호의적으로 바라봤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아예 고황후 박씨처럼 황제의 눈밖으로 벗어난 후궁이면 모를까, 황제가 대놓고 척부인만을 총애하여 여후의 분노와 질투를 유발했기에 척부인 개인의 손을 떠난 문제다.
[20]
한 술 더 떠서 여후의 심복이 되려고 노력하는게 더 현실적인 방법이였다. 여후는 제도혜왕
유비와의 일화에서도 볼수 있듯이 인과관계에 매우 단순한 인물이었다. 물론 척부인이 여후와 가까워지고 싶어한다고 여후가 이를 받아줄 것이라 보기는 어렵지만.
[21]
사실 이것도 현실성이 매우 낮은 방법이다. 여후는 상술했듯이 조강지처에다가 한나라 개국에 공로가 큰 사람인데 이런 부인을 팽하고 아무것도 없는 여자를 황후에 봉한다? 당장은 성공할 수 있어도 유여의가
이세황제 꼴 안 난다는 보장이 없다. 고제 사후에는 여씨가 날뛰자 바로 몰살해버린
진평 같은 무서운 모사꾼,
왕릉 같은 철저한 원칙주의자 등이 버티고 있는데 그것보다 정통성이 현저히 약한 척부인 따위가 후환 없이 설친다는거는 가능성이 매우 낮다. 그냥 딱 잘라서 자기 주제를 몰라도 너무 모른거다.
[22]
조선의
광해군이
인목왕후와
영창대군의 폐모살제로 비판받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들을 참조. 다만, 전한과 조선은 거의 1500년을 넘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기원전 국가체제에서는 지도자 개인이 명분없는 잔혹한 사적제재를 해도 후탈이 적은 경우가 많았던 반면, 조선은 법과 유교 원칙에 근거하여 통치를 했기 때문에 원칙을 어긴 국왕은 극심한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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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한신도 최후로 동정을 받고 있지만 이쪽도 생전에는 자신의 활약으로 교만해 처세술과 정치적 식견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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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론 유여의의 세력이 약한 것이 한나라 입장에선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후계자를 제대로 정하지 않고 둘 사이에서 어설프게 저울질 하다가 지도자의 사망 이후 내란으로 엉망이 된 국가의 사례는 수두룩하게 많다. 조용하게 제거되고 후탈도 별로 없었던 유여의의 사례가 오히려 특이한 편이다. 반대로 말하면 이렇게 아무 세력과 힘이 없던 인물을 유방이 차기 황제 후보라고 들이밀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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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지리적 위치 때문에 숙청하기 쉽다보니 조나라는 제 명을 살거나, 멀쩡히 재위를 마친 제후왕이 적은 것으로 유명했다. 유여의만 아니라 전임인
장오는 재상 관고가 계획한 반란 계획때문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퇴위했고 유여의의 후임이자 이복형제인 유우는 여후를 비방했다 감금되어 아사, 여후의 조카인 여록도 여씨 일족 숙청에 연루되어 참수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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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척부인은 여후가 권력을 잡자마자 인간돼지가 되는 형벌을 받았던 게 아니다. 태형을 받고 감금되어 쌀을 찧는 형벌이 시작이었다. 척부인이 그런 형벌을 받자마자 <영항가>를 지어 노래하며 권력을 잡은 여후를 비판하고 도발한 걸 생각해보면 눈치가 없었던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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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유방은 죽기 전 번쾌를 숙청하려 했으나, 그 전에 본인이 먼저 죽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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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게 말하면 자신의 처지를 알고 나섰지만 안좋게 말하면 강약약강식 태도를 가진 여후의 성향을 보아, 혜제가 처음부터 친정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거나 발언권이 셌다면 황명으로 척부인과 유여의를 보호할 수도 있었다. 혜제가 부모에 비해 유순했다고 하지만 칩거 상태에서도 정무를 보거나 유비를 보호하고, 심이기를 직접 죽이려고 나섰다는 등의 관련 기록들을 보면 의외로 황제로서 책임감과 강단력은 꽤 있었다. 그런데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지 못해 척부인과 유여의는 혜제기 초창기에 죽어버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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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 부분은 회의적인 것이, 유여의를 제외하고도 유우, 유회 등 많은 유방의 자식들이 여후의 핍박으로 자살하거나 아사하는 등 사망하여 문제 시기가 되면 유방의 아들은 황제인 문제와 막내인 유장 딱 두명만 남았을 정도였다. 박희의 경우는 유방에게 별로 총애받지 못한것이 오히려 행운으로 작용하여 여후가 건드리지 않은 것이다. 척부인이 설사 조심하였다고 한들 유방의 총애를 받을수록 여후에겐 위협적으로 보였을테니 유여의 모자는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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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시당초 유여의는 척부인보다 나중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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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입장에서는 남의 일이나 먼 옛날 일도 아닌게 문제는 한고제 유방의 아들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척부인이 죽을 때 문제는 11살이었다. 원앙 말대로 사람돼지 이야기를 단순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이야기로서 들은 사람이라는 것. 그나마 본인과 본인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별 총애를 얻지 못해서 무사할 수 있었지 척부인 못지않은 총애를 받았다면 역시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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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부인 - 여후, 인목왕후 -
광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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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부인의 아들 유여의는 유방 사후 여후에 의해 독살, 인목왕후의 아들
영창대군은 역모에 휘말려 폐서인이 되고 유배지에서 의문사. 거기에 둘다 어린 나이(유여의 - 12세, 영창대군 - 8세)에 죽었다는 유사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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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목왕후는 광해군의 보복으로 왕대비 자리에서 폐위되어 딸
정명공주와 함께 서궁에 유폐, 척부인이 여후의 보복으로 받은 형벌은
더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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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판소리와 비슷한 만담극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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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역사의 준엄한 평가대로라면 척부인이나 한신의 잘못된 처세도 지적받을 점이 있지만, 삼국지평화는 역사서가 아닌 엄연한 민담으로, 심지어
삼국지연의처럼 얼핏 보면 역사책처럼 헷갈릴수도 있게 쓰여진 역사소설조차 아니고 첫머리부터
환생과 같은 판타지틱한 요소가 대놓고 등장하는데다 이야기의 구조 자체도 모든 등장인물들의 복수와 인과응보의 짝이 딱딱 맞아떨어질만큼 작위적으로 짜여져 있다. 연의의 경우는 '팔문금쇄진'이나 '제갈량의 동남풍'같은 기담적 요소가 진짜인 줄 알고 나름의 과학적 설명을 가져다붙여보려고 시도하는 독자가 가끔 나오기는 하지만 평화에 나오는 '환생'이나 '목이 잘렸다가 부활하는 신선같은 존재들'은 그런 수준조차 넘어 어느 모로 보건 역사적이거나 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니, 아마 현대인 독자는커녕 강사들에게 평화를 듣던 당대의 청자들도 그것이 진짜 역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원나라 시대의 중국인 대중들에게 <척부인을 불쌍하고 안타깝게 여기는 동정론>이나 <유방을 교할하고 배은망덕한 인물로 여기고, 팽월, 영포[41], 한신등을 유방에게 토사구팽당한 피해자로 여기는 정서>가 널리 퍼져있었기에 강사(이야기꾼)들이 그런 대중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삼국지평화》가 형성되었다는 것. 이는 문학과 문학사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이지 삼국지평화의 스토리 자체가 역사에 부합하냐 하지 않으냐를 두고 시비하는 것은
임진록의 역사 고증을 따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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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기, 혜제기, 고후기, 문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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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그랬지 이전부터 척부인을 요부라고 비난했고 자신이 유방을 위해 온갖 더러운 일을 하거나 유방의 입맛에 맞는 계획을 세워도 유방은 여후를 위하기커녕 척부인만을 우선시하는 모습을 보이자 분에 찬 모습을 보이는 등 여자로서 질투하는 모습도 많이 보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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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여후가 개의 유령(야사에 따라서는 유여의의 원혼이 구현화된)에게 물리고 혼절한 뒤 쇠약해져 사망했다는 야사를 인용해 드라마에서 각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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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서 냉궁에 유폐된 여빈과는 달리 자기 처소에서 살기는 했다. 다만 그 뒤로도 딱히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결국 제정신이 되지는 못한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