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22:27:41

압뒬하미트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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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 등 이 4명만 정통 칼리파로 인정받으나 하산도 잠깐동안 칼리파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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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 제34대 파디샤
압뒬하미트 2세
عبد الحميد ثانی[1]‎ | II. Abdülhamit
파일:Portrait_of_Abdul_Hamid_II_of_the_Ottoman_Empire.jpg
출생 1842년 9월 21일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톱카프 궁전
사망 1918년 2월 10일 (향년 75세)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베일레르베이 궁전
묘소 이스탄불 마흐무트 2세 영묘
재위기간 오스만 파디샤[2]
1876년 8월 31일 ~ 1909년 5월 27일
서명 파일:압뒬하미트 2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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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70125><colcolor=#fff> 아버지 압뒬메지트 1세
어머니 티리뮈즈간 카든에펜디 (출신: 샵수그인[3])
배우자 냐지케댜 카든에펜디 (출신: 압하지야)
베드리펠렉 카든에펜디 (출신: 아디게야)
비댜르 카든에펜디 (출신: 카바르다인)
자녀 메흐메트 셀림[4]과 메흐메트 압뒬카디르[5]와 메흐메트 부르하네딘[6]을 포함한 8남 13녀
종교 이슬람 (수니파) }}}}}}}}}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재위
2.2.1. 재위 초기: 관용과 자유주의의 황제2.2.2. 크레타 상실과 함께 시작된 독재2.2.3. 붉은 술탄2.2.4. 학살자 술탄
2.3. 퇴위2.4. 퇴위 이후의 삶
3. 비판4. 재평가5. 여담6. 관련 매체7. 어록

[clearfix]

1. 개요

"이 망할 녀석(압뒬하미트 2세를 지칭)은 바란다면 갑자기 무엇이든 할 수 있어. 조국을 행복하게 할 수도 있고, 주변의 적들도 흩어놓을 수 있지. 조국과 나를 포함한 국민 모두를 행복하게 할 수 있어. 그런데 이 새끼는 몇 년간 피를 처먹는게 익숙해졌어. 그리고 제 버릇을 고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수록 그 놈이 대단한 놈으로 보이더군. 그래서 나는 그 놈이 사라져 버리는 게 가장 완벽한 방법이라고 생각해."
이스마일 엔베르[7]
"100그램의 지혜 가운데 90그램은 압뒬하미트에게, 5그램은 내게, 나머지 5그램은 다른 정치가들에게 있다네."
오토 폰 비스마르크[8]

오스만 제국의 제34대 술탄이자 28대 파디샤이자 113대 이슬람 칼리파.

오스만 제국 최후의 중흥자 및 몰락의 자초자. 오스만 제국 역사상 제대로 통치를 행사한 사실상 마지막 황제이기도 하다.[9] 재위 초기에는 자유주의적 정치를 펼치며 오스만 제국의 근대화와 복지에 힘썼으나 크레타 전쟁 이후 흑화하여 모든 정치세력을 억압한 폭군으로 돌변하기도 했다. 결국 청년 튀르크당의 쿠데타로 입헌군주제를 강제 선언하고 퇴위당한다.

2. 생애

파일:압뒬하미트 2세.jpg
1868년의 모습. 익히 알려진 이 사진과 프로필 사진(1867)은 모두 황자 때의 모습이고 술탄 이후로는 턱수염까지 기른 모습이 많다.[10]
파일:압뒬하미트2세1899.png
1899년에 그려진 초상화.
파일:압뒬하미트2세1909.jpg
1909년 퇴위 당시 사진.

2.1. 유년기

압뒬메지트 1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친모인 티리뮈즈간 술탄(Tirimüjgan Sultan)이 압뒬하미트가 10세 되던 해 죽자, 아버지의 후궁이었지만 자식이 없던 페레스튀 카든에펜디(Perestü Kadın Efendi)의 품에서 자랐다. 페레스튀 카든에펜디는 압뒬하미트를 친자식처럼 키웠으며, 아버지인 압뒬메지트가 1861년에 사망하자 제위를 이어받은 압뒬하미트의 삼촌인 압뒬아지즈는 형의 자식인 압뒬하미트와 다른 황자들을 자기자식처럼 키웠다. 황제 압뒬아지즈가 1867년에 유럽을 순방할 때 압뒬하미트 또한 함께 했으며, 압뒬아지즈는 조카들에게 서구식 교육과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탄지마트 이후 입헌군주제 체제로 전환한 오스만 제국에서 압뒬하미트는 서방에 대해서는 중립정책을, 동방에 대해서는 이슬람주의적인 정책을 실행했는데, 이 또한 삼촌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압뒬아지즈가 퇴위당한 뒤 6일만에 의문사하고 1876년 5월 30일 형인 무라트 5세가 삼촌 압뒬아지즈의 제위를 이어받았으나 중증 정신질환자였던 그가 93일 만에 폐위되면서 다음 후계자로써 황제로 즉위하게 되었다.

2.2. 재위

2.2.1. 재위 초기: 관용과 자유주의의 황제

압뒬하미트 2세가 즉위할 당시 오스만 제국은 혼란 그 자체였다. 삼촌인 압뒬아지즈가 퇴위당하고 6일만에 의문사하고, 큰형인 무라트가 즉위했으나 3개월만에 정신병을 이유로 퇴위당했다.[11] 그리고 그가 즉위하자마자 1877-1878년 사이에 러시아 제국과의 전쟁(제1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제2차 동방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은 패배했고, 불가리아가 여전히 명목상 오스만 제국을 종주국으로 하기는 했으나 사실상 독립하게 되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잃고, 영국이 중재의 대가로 키프로스를 가져가 버렸다. 동부전선에서도 러시아에 의해 카르스와 아르다한을 잃어버렸다.[12] 전쟁과 선대의 황제들이 벌여놓은 각종 사업으로 인한 재정위기로 오스만 제국은 파산을 선언해야 했으며, 또한 새로 독립한 기독교 국가들의 무슬림 박해를 피해 코스탄티니예로 몰려든 100만여명의 난민들로 인해 코스탄티니예의 치안도 불안해졌다.

압뒬하미트 2세는 이러한 개막장 속에서 즉위했고, 이미 불치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던 제국을 통치해야 했다.

파일:시르케시 오스만 3.jpg
유럽 방면 오스만 철도의 시작인 시르케지 역(Sirkeci Garı). 1888-90년에 세워진 역사는 오스만 바로크 양식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즉위 초기 압뒬하미트 2세는 자유주의적인 정책으로 민중의 환영을 받았다. 총리대신인 미드하트 파샤(Midhat Paşa)의 주도로 이루어진 1876년 입헌혁명을 통해 자유선거가 이루어져 제국 의회의 의원들이 선출되었고, 이전 같았으면 대역죄로 다스렸을 황제를 비난하거나 중상하는 행위에도 관용을 베풀었다. 압뒬하미트 2세의 재위 초기 오스만 제국은 영국, 프랑스의 도움으로 공장을 늘리고 철도를 확충해 나갔다.[13] 코스탄티니예에 처음으로 철도가 들어왔으며, 베를린에서 바그다드까지, 그리고 코스탄티니예에서 메카까지 철도가 놓인 것도 그의 치세의 일이다. 군제의 근대화 또한 압뒬하미트 2세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그의 치세에 들어 오스만 제국은 잠수함, 철갑함, 기관총 같은 신무기들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여성에 대한 정책도 근대화되어 과거 집안에서 조신하게 처신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던 여성들에게 신식 학교에서의 교육이 이루어졌다.[14] 압뒬하미트 본인도 프랑스어에 능했으며[15], 수학에 재능을 보였다. 1884년에는 처음으로 제국의 국장을 제정했다.

하지만 입헌혁명을 통한 자유주의 바람은 제국에게 양날의 검으로 다가왔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상황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았다. 여러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제국이었으며, 황제는 무슬림이었지만 제국 내에는 이슬람 이외에도 여러 종교가 공존하고 있었다[16]. 무엇보다도 민족주의 운동의 영향으로 각 민족들이 독립을 꿈꾸던 상황 또한 비슷했다. 빈 체제 시기 메테르니히는 제국의 분열을 막기 위해 공포정치로 일관했지만, 입헌혁명 이후의 오스만 제국은 스스로 그 안전망을 풀어버린 상황이었다. 근대교육을 받은 아랍인 장교들은 오스만 제국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처럼 아랍인의 국가를 포함한 체제로 만들고자 했고, 알바니아인,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들은 독립을 이루기 위해 지하조직활동을 하고 있었다. 한편 튀르크 민족주의자들 또한 서구에 휘어잡힌 오스만 제국의 현실을 비판하며, 자주적인 민족국가를 세울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2.2.2. 크레타 상실과 함께 시작된 독재

결국 미드하트 파샤가 주도한 입헌혁명 체제는 1년만인 1877년에 러시아와의 전쟁을 이유로 폐지되었고, 압뒬하미트 2세는 전제군주제를 부활시켰다. 하지만 전제군주제 체제로 복귀한 이후에도 압뒬하미트 2세의 정책은 여전히 자유주의적이었다. 탄지마트 이후 발달하기 시작한 자유언론은 미드하트 헌법의 폐지 이후에도 유지되었으며, 정권에 대한 비판도 자유롭게 허용되었다. 하지만 그의 자유주의적이고 개방적인 성향은 1897년 그리스-오스만 전쟁으로 인해 바뀌게 되었다.

그리스 본토는 1833년에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떨어져 나갔지만 북부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서트라키아 지방) 크레타를 비롯한 에게해 도서지방은 압뒬하미트 2세 시기까지만 해도 오스만 제국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1895년 크레타의 그리스인들이 반 오스만 봉기를 일으키자, 그리스는 이들을 지원했고 결국 오스만 제국과 전쟁이 벌어졌다.

전쟁 자체는 그리스가 패배했으나, 오스만 제국은 서구열강의 개입으로 크레타를 '크레타 자치국'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시켜야 했다. 문제는 이 전쟁의 원인은 그리스였고[17], 그리스가 오스만 제국에 보상금도 지불했지만 정작 전쟁에서 이긴 오스만 제국이 자국의 속령인 크레타를 떼어줘야 하는 상황에 튀르크인들이 매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독립한 크레타 자치국은 명목상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지만, 국가원수가 그리스 국왕 요르요스 1세의 차남 요르요스 왕자이고, 총리는 에노시스 운동의 거두인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였으니 사실상 크레타는 그리스의 영토가 된 셈이었다. 오스만 제국 언론들은 연신 황제의 졸속외교를 비난했으며, 코스탄티니예에서는 시위가 이어졌다.

압뒬하미트 2세의 재위기간동안 상실한 영토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압뒬하미트 2세의 재위기간 동안 오스만 제국은 약 160만 제곱킬로미터의 영토를 상실했으며, 특히 유럽 내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은 후대의 메흐메트 5세 시기에 독립하게 될 알바니아와 나중에 발칸 전쟁으로 그리스,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불가리아가 갈라먹을 영토, 오늘날에도 튀르키예령으로 남은 동트라키아 일대를 제외하면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모든 세력이 크레타 상실 이후 오스만 제국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민족주의자들은 독립국가를 주장했고, 제국에 충성하는 신민들조차도 열강에 좌지우지되는 현실을 비난했다. 개혁성향의 학생운동으로 시작된 청년 튀르크당(Jön Türkler)의 전신인 통일과 진보 위원회(İttihat ve Terakki Cemiyeti)도 1889년 비밀결사로 수립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2.2.3. 붉은 술탄

압뒬하미트 2세의 초기 자유주의 및 입헌주의 정책은 결과적으로 서구열강의 개입을 막아내지 못했고, 안으로는 제국에 반기를 드는 세력들을 자유롭게 풀어준 결과를 초래했다. 압뒬하미트 2세는 근대화를 위해 처음에는 서구 열강의 힘을 빌렸다. 하지만 프랑스 튀니지를 병합하고, 영국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중재하는 대가로 키프로스를 뜯어가더니, 나중에는 사실상 명목상 오스만 제국령이긴 했지만 이집트를 보호국화 하는 등 유럽 세력이 직접 오스만 제국과 맞닿는 결과를 초래했다. 오스만 제국과 독일 제국의 관계는 동지중해에까지 파고든 영국과 발칸 반도에 영향력을 확보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기존의 우방국이었던 프랑스와 영국을 버리고 독일로 갈아타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독일도 순전히 선의로써 오스만 제국을 돕진 않았다. 오스만 제국의 군제개혁, 철도 부설에 있어서도 독일이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당시 형성된 군부 내 친독파들은 이후 제1차 세계 대전때 오스만 제국이 동맹국으로 참전하는데 영향을 끼쳤다.

한편, 압뒬하미트 2세는 자꾸만 기어오르는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당근과 채찍을 병행했다. 줬다 뺏기 제국에 반대하고 제국의 분열을 초래하는 민족주의, 자유주의 사상, 그리고 산업화와 더불어 오스만 제국에서도 영향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한 사회주의를 탄압하는 한편, 이슬람 제국 칼리파로써의 권위를 이용해 전 세계 무슬림들로부터 그 권위를 인정받기 위한 활동을 병행했다. 압뒬하미트 2세 시기에 오스만 제국 바깥에 거주하는 무슬림 공동체에 대한 금전적, 사상적 지원이 이루어졌으며 심지어 중국 위구르족을 포함해 조선 일본에도 밀사가 파견되었다. 베이징에 세워진 이슬람 학교도 압뒬하미트 2세의 지원 아래 설립되었으며, 특히 1900년에 착공하여 1908년에 완성된 다마스쿠스와 성지 메카를 잇는 철도 프로젝트인 히자즈 철도(Hicaz Demiryolu)는 전세계 무슬림들의 모금으로 이루어진 압뒬하미트 2세 시기 범이슬람주의를 대표하는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19]

압뒬하미트 2세는 암살에 대한 두려움( 삼촌의 의문사도 그렇고 실제로 암살 시도가 있었다.)으로 재위기간 내내 이을드즈 궁전에 칩거하면서도 국가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비밀경찰과 사진사들을 활용해 제국 내의 모든 정보들을 수집하고, 정적들을 숙청하는데 이용했다[20]. 삼촌과 형의 원수 미드하트 파샤도 결국 숙청되어 유배갔다가 감옥에서 암살 당했다. '붉은 술탄' 이란 압뒬하미트 2세의 별칭은 그가 열렬한 혁명전사라서가 아니라 반대파들을 극심히 탄압해 피칠갑을 했다는 의미로 붙은 별명이었다. 붉은 병영

2.2.4. 학살자 술탄

재위 중 압뒬하미트 2세는 반대파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했다. 압뒬하미트의 희생양 중에는 아르메니아인도 있었는데 무고한 아르메니아인 수십만을 학살하거나 강제 개종시켰다.

2.3. 퇴위

압뒬하미트 2세의 전제정치는 그나마 성공이라도 거뒀으면 다행인데, 처음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범이슬람주의는 이미 민족주의가 정착한 시대에 씨알도 안 먹히는 주장이었고, 여러 종교가 공존하고 있다는 제국의 실정과도 맞지 않았다. 더군다나 압뒬하미트 2세는 범이슬람주의를 위해 오스만 제국의 공용어를 튀르키예어가 아닌 아랍어로 지정하려 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기존에는 튀르키예어로 작성되던 칙명이나 정부문서들을 아랍어를 병기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튀르크 민족주의자들을 자극했다.

압뒬하미트 2세의 산업화와 대 서방정책 또한, 열강의 경제적 이권에 휘둘릴 뿐 자체적인 산업화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튀르키예 공화국 수립 이후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평가했듯 '황제의 투으라(서명)가 아닌 독일, 프랑스, 영국의 회사 이름을 단 기차가 제국의 영토를 달리는 모습'은 제국의 위대한 진보는커녕 서구열강에 뒤처진 제국의 모습만을 보이며 패배감을 심어주고 있었다. 더이상 제국은 '숭고한 국가(Devlet-i âliyye)'가 아닌, 저무는 태양에 불과했다.

결국 1908년 7월 3일, 지금의 테살로니키인 셀랴니크(Selânik)에서 아흐메트 니야지(Ahmet Niyazi, 1873-1913) 소령을 중심으로 한 제3군단 청년장교들이 주동한 쿠데타로 압뒬하미트 2세는 미드하트 헌법과 입헌군주제의 부활을 강제로 선언했고, 이듬해 청년 튀르크당 반대파의 쿠데타가 실패하여 강제로 퇴위했다. 제위는 이복동생 메흐메트 레사트가 메흐메트 5세 이어받았다. 삼촌, , 본인까지 3연속으로 퇴위당했다. 늘그막에 모든 것을 부정당하고 굴욕적 퇴위

2.4. 퇴위 이후의 삶

퇴위 이후 압뒬하미트 2세는 셀랴니크에 위치한 별궁에서 칩거 처럼 감금당하며 지내다 1912년 발발한 발칸 전쟁으로 셀랴니크가 그리스로 넘어가자 코스탄티니예로 돌아왔으며, 베일레르베이 궁전에서 조용히 목공예와 자서전 집필에 몰두하다가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동생보다 먼저 사망했다.

1차대전에 대해서 어떤 의견을 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은데, 본인을 강제로 입헌군주제 선언을 하게 하고 퇴위시킨 원수 청년 튀르크당 전쟁에서 삽질하는 꼴을 퇴위 후에 계속 봤고 오스만 제국의 국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었으니 참전에 부정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아래의 어록에도 나오듯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간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고, 제국의 위신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정황 정도는 확인된다.

3. 비판

우선 압뒬하미트 2세를 변호하자면, 그가 파디샤(황제)로 즉위한 시대의 오스만 제국은 이미 서구화 개혁을 마치고 근대화 되었지만 그 근대화로 인해 막대한 지출이 발생하고 오스만 제국은 외국으로부터 빌린 부채의 이자를 상환하느라 급급한 시절이었다. 당장 그의 아버지인 압뒬메지트 1세가 지어놓은 돌마바흐체 궁전 때문에 오스만 제국은 이미 파산을 선언한 경험이 있었다. 압뒬하미트 2세는 경제적 자립을 위해 자국 산업을 육성하려 했지만, 그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돈도 결국 유럽 열강들에게서 꾸어야 했으며, 이는 오스만 제국이 산업화되면 될수록 오히려 빚의 수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상황으로 만들어 버렸다.

군사적으로 압뒬하미트 2세는 당장 직면한 적인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상대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최신식 무기를 도입했지만 이는 대한제국의 군대와 형식상으로는 비슷한 상황을 만들어 버렸다.[21] 일단 돈이 엄청 깨지는 것도 그렇고, 여기에 보태서 여기저기서 좋다는 무기는 죄다 사 오는 바람에 무기마다 탄 규격이 맞질 않아 보급이 어려웠으며, 그 최신식 무기를 대량으로 구매하기라도 하면 좋은데, 당시 빚에 허덕이는 오스만 제국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많이도 구입할 수 없었다. 가령 유럽 국가 기준으로도 상당히 최신무기인 잠수함은 달랑 두척만 운영하고 있었다. 이 잠수함은 오스만 제국에 비하면 여전히 약소국인 그리스를 상대로 할 때에는 여러모로 활약을 했지만, 단 두척의 잠수함으로 전쟁을 뒤집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압뒬하미트 2세의 반민족주의 정책은 내부적으로도 민족주의의 유입으로 인해 분열직전에 다다른 제국을 통합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성과라도 있으면 좋은데, 이에 대해 내놓은 정책인 범이슬람주의는 그가 퇴위하던 1908년 당시까지만 해도 알바니아와 서아르메니아, 북부 이라크, 소 레바논, 푼토스를 비롯하여 기독교계 인구가 많던 지역이 상당수 남아있던 상태였었고, 또 의회의 절반이 비무슬림인 판국에 비무슬림은 아예 배제하고 무슬림만 데리고 간다는 소리나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그 믿던 무슬림들도 넓게 보면 아랍인과 튀르크인으로 나뉘어 서로 으르렁거리던 판국이었고, 제국에서 그나마 쪽수가 있는 아랍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제국 공용어를 아랍어로 하려는 정책은 튀르크인마저 반기를 들게 만들어 버렸다. 물론 정책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니었기 때문에 정책 자체는 그 이후에도 계속 추진됐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제국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제국의 신민으로써 민족, 종교와 상관없이 모두가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이상은 결국 튀르키예 공화국의 수립 이후에나 가능해졌고, 이를 위해서도 상당한 피를 보아야 했다.

4. 재평가

"우리는 압뒬하미트 2세를 (쿠데타로부터) 지키지 못했어.
우리는 멘데레스 총리를 (쿠데타로부터) 지키지 못했어.
그래서 우리는 (이슬람주의를 용인하는) 에르도안을 죽을 때까지 지킬 거야."
알파고 시나씨가 답한 ' 튀르키예의 이슬람주의 보수 유권자들이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을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이유'

청년 튀르크당 출신의 인물들이 주축이 된 공화국 수립 이후 압뒬하미트 2세는 반동개혁과 수구적인 정책으로 오스만 제국을 말아먹은 원흉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집권 이후, 튀르키예어 대신 아랍어를 쓰는 보수 이슬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이슬람의 중흥, 서구화와 전통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려 노력한 지도자로 재평가되고 있다. 실제로 압뒬하미트 2세때 펼친 광범위한 제국주의 정책으로, 튀르키예에서 한참 떨어진 필리핀 민다나오 섬에도 그를 추종하는 무슬림 집단이 아직 남아있을 정도. 그래서 현재 튀르키예 보수 이슬람주의자들에게 아드난 멘데레스 총리와 함께 튀르키예의 이슬람을 상징하는 인물이자, 튀르키예가 중동에서 패권을 휘두르던 마지막 시대인 오스만 제국 최후의 술탄으로 현재 여전히 탄압받는다고 믿는 보수 이슬람주의자들에게 자신들의 이슬람주의를 자극시킬 중요한 지도자로 계속 재평가받고 있는 것이다.[22]

마치 대한민국에서 흥선대원군을 재평가하는 것과 맥락이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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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들의 취미 항목을 보면 의외로 오스만 제국의 황제들이 군주답지 않은 취미를 많이 갖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압뒬하미트 2세의 취미 또한 독특했다. 특히 목공과 승마, 수영에 뛰어났는데, 자기가 직접 쓸 가구까지 손수 디자인하고 제작해서 쓸 정도이다. 그가 말년에 거주한 베일레이베이 궁전에는 압뒬하미트 2세가 생전에 사용하던 비밀번호 장치가 되어있는 책상이 보존되어 있는데, 자개를 붙이는 솜씨부터 디테일한 장식까지 모두 손수 그가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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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이슬람주의를 강조한 칼리파였지만, 서구 오페라를 광적으로 사랑하며 오페라를 감상하며 위스키 브랜디를 즐기기도 했다. 당시 유럽인들도 그렇지만, 무슬림들의 관점에서도 술은 오직 포도주만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위스키나 브랜디 같은 증류주는 쿠란에서 금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음껏 마셨다. 오늘날 관점에서는 심히 이해되지 않지만(...). 사진 속의 극장은 압뒬하미트 2세가 이을드즈 궁전 내에 세운 전용극장으로 황실 가족들과 신하들을 초대해 연극과 오페라를 관람하던 곳이다. 감상만 한 게 아니라 오페라 작품들을 직접 오스만 터키어로 번역하기도 하고, 작품을 직접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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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거주하던 이을드즈 궁전에서 사용할 도자기를 직접 만들기 위해 공방도 세웠다. 프랑스 세브르 양식의 디자인과 화사한 색감이 특징으로 오늘날에는 튀르키예 국회 소유의 국영공방이다. 주로 국빈방문시 선물로 증정하기 위한 고급 자기들을 만들었으나, 현재는 일반에도 판매되고 있다.

탐정소설에 탐닉했으며, 특히 셜록 홈즈 시리즈의 애독자였다. 역사상 가장 지위가 높은 셜로키언 중 하나로, 신간이 나오자마자 영국에 사람을 보내 책을 사와서 신하들에게 튀르키예어로 번역시켜 읽게 하기도 했으며 영어도 연습할 겸 책을 직접 번역하기도 했다. 저자 코난 도일에게 편지를 보내 치하하기도 했고, 오스만 제국의 훈장인 메지디예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팬들 사이에서는 셜록 홈즈가 1920년대 이스탄불에서 활동했다는 2차 설정이[23] 거의 공식인 것처럼 떠돌기도 하는데, 이에 대한 팬서비스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압뒬하미트 2세의 영향으로 오스만 제국에서 탐정소설들이 크게 유행했다.

야을르 귀레시(Yağlı güreş, 기름바른 씨름)라는 전통 레슬링을 즐기기도 했다. 뛰어난 선수들을 불러모아 황궁에서 경기를 자주 열었고, 그 중에서도 더욱 돋보이는 선수는 수도 이스탄불에 머물게 하며 재정적으로 후원했다. 자기 자신도 어느 정도 실력이 있어, 직접 대련을 하며 실력 평가를 했다고도 한다.

여러모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의 정책들과 유사한 점이 많이 보인다. 범이슬람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대외정책도 그렇고, 대 서방정책도 유사하고, 군비 증강이나 개혁, 빚잔치(...)도 비슷하다. 에르도안 술탄 남은건 강제 퇴위?

6. 관련 매체

근대 오스만 제국 시대를 소재로 한 사극이나 영화에서는 높은 확률로 이 황제의 재위기를 배경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으로 치면 헌종이나 철종보다 고종이 훨씬 많이 나오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재위 기간도 길고 인생도 파란만장해서

튀르키예 방송국 TRT는 압뒬하미트 2세 재위기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 드라마 필린타(Filinta)와 압뒬하미트 2세가 주연인 사극 드라마 파이타흐트: 압뒬하미트(Payitaht: Abdülhamid)( 영어자막판)를 2014년부터 2021년까지 연이어 방영했다. 압뒬하미트 2세에 대한 미화나 고증문제때문에 튀르키예내에서도 논란이 일었지만, 인기는 있어서 해외 각국에 많이 수출된 작품이었다.

7. 어록

압뒬하미트의 어록을 보면 굉장히 복잡다양한 성격의 인물임을 느낄 수 있다.
Otuz üç sene millet ve devletim için, memleketimin selâmeti için çalıştım. Elimden geldiği kadar hizmet ettim. Hâkimim Allah ve beni muhâkeme edecek de Rasûlullah’tır. Bu memleketi nasıl buldumsa öylece teslim ediyorum. Hiç kimseye bir karış toprak vermedim. Hizmetimi ancak Cenab-ı Hakk’ın takdirine bırakıyorum Ne çare ki düşmanlarım, bütün hizmetime kara bir çarşaf çekmek istediler ve muvaffak da oldular.

33년동안 짐은 짐의 신민과 국가를 위하여, 나라의 행복을 위하여 일하였다. 짐은 가능한 최대한의 봉사를 해왔다. 짐의 심판자는 오직 알라이며, 짐을 이끄는 자는 하나님의 예언자로다. 이 나라가 어떤 상태이든 짐은 그대로 넘기겠다. 짐은 누구에게도 땅을 넘긴적이 없도다. 짐의 헌신은 오직 정의의 하느님에게 맡긴다. 하지만 짐의 적들은 짐의 모든 헌신에 대해 새까만 차도르를 두르고자 하였고 또한 성공하였도다. (퇴위 당시의 선언중)
Biz İstanbul'u Rumlardan zapt ettik. Fetih günü onlar matem tutmak isterler. Biz tezahürde bulunursak onların hissiyatını rencide ederiz. Benim zamanımda bir kere İstanbul'un fethi günü merasim yapmak istediler. Ben bu hissiyat noktasını nazara alarak müsaade etmedim. Bunlar hikmet-i hükümettir. Çünkü hükümet tebaasının hepsinin hissiyatını da rencide etmemeğe çalışmalıdır.

우리는 이스탄불을 룸인들로부터 빼앗았네. 어떤 이들은 정복의 날에 그들이 비탄에 빠지길 바라는데 그것은 우리가 룸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일세. 어떤 이들은 나의 통치시기에 이스탄불 정복일 기념식을 거행하길 원했네마는 나는 그러한 감정을 고려하여 허락하지 않았네. 이것이 바로 통치의 지혜일세. 왜냐하면 통치자는 모든 이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도록 노력해야만 하기 때문이지. (퇴위 후 측근과의 대화에서)
Doğrusunu isterseniz ben Türk'üm ama Türkçe havalardan ziyade alafranga havalar, operalar hoşuma gider. Çünkü Türkçe minördür. İnsana uyku getirir. Hem de bizim Türkçe dediğimiz makamlar Türkçe değildir. Yunan'dan, Acem'den alınmıştır.

내게 솔직히 말하길 원한다면 말하지. 나는 튀르크인이지만 튀르키예 노래보단 서양 노래들이, 오페라들이 더 마음에 든다네. 왜냐하면 튀르키예어는 어린아이에 불과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잠이 들게 만들기 때문이지. 또한 우리가 튀르키예 음악이라고 말하는 것들도 사실은 튀르키예어가 아니야. 그리스인들로부터 페르시아인들로부터 가져온거지.
Ben Bizans İmparatoru Konstantin'den daha az haysiyetli değilim. Biraderim hazretlerine (V. Mehmet Reşat) bağlılığımı arz ediniz. İstanbul'dan çıkmam! Kendisinin de çıkmamasını atalarımızın şerefi adına istirham ederim!
(Çanakkale Savaşı sırasında her ihtimale karşı saltanatı Eskişehir'e taşımaya hazırlanan ve Abdülhamid'i İstanbul'da bırakmayıp yanında götürmek isteyen Sultan V. Mehmet Reşat'a, Başmabeyinci Tevfik Paşa aracılığıyla gönderdiği cevap.)

나는 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노스보다 위엄이 없지 않네. 내 동생인 폐하께( 메흐메트 5세) 충성을 다하게. 나는 이스탄불에서 나가지 않을걸세! 폐하께도 우리 조상들의 명예를 위해 나가지 말라고 하게나! ( 갈리폴리 전투당시 에스키셰히르로 몽진하려 준비하던 메흐메트 5세가 압뒬하미트에게도 피난을 권하자 수석 치안판사 테브픽 파샤를 통해 전달한 답신 중에서)
Göreceksiniz yüzbaşım! İttihatçılar, İstanbul üzerine yürüyüşlerinden cesaret alarak bu devleti birtakım kötü serüvenlere sürükleyecekler, belki de Turancılık gayretiyle veya İslamcılık siyasetiyle korkarım ki hem Çarlık Rusya’sı, hem de Büyük Britanya İmparatorluğu ile aynı zamanda savaşa sokacaklardır.

그대는 볼 것이요 대위! 연합주의자들은 이스탄불을 행진함으로써 용기를 얻어 이 나라를 몇몇 나쁜 모험들로 이끌어 버릴 것이오. 아마도 투란주의적 노력이거나 이슬람주의자들의 정치행보로써 말이지. 두려운 것은 러시아 제국과 대영제국 모두와 동시에 싸움에 돌입할 수 있다는 것이오. (퇴위후 측근과의 대화 중)
Millet birbirini kırıp geçireceğine bırakın beni öldürsün.
국민들이 서로서로를 죽이게 하지 말고 차라리 나를 죽게 하시오. (퇴위후 발생한 복고주의자 반란 당시 발언)
Savaş yalnız sınırlarda olmaz. Savaş bir milletin topyekün ateşe girmesidir. Eğer bu bütünlük sağlanmamışsa zafer tesadüfi, yenilgi kaderdir.

전쟁이란 오직 국경지역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오. 전쟁이란 한 국민의 전부가 포화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오. 만약 이 총체를 이루어내지 못한다면 승리는 우연이 될 것이고, 패배는 필연이 될 것이오.
Benim prensibim budur. Ben terakki taraftarıyım. Avrupa'da ne icat olunursa memleketimizde yapılmalıdır.

짐의 원칙은 이것이오. 짐은 개혁을 지지하는 쪽이오. 유럽에서 무엇이 발명되든 우리 나라에서도 만들어져야만 하오.



[1] Abd'ül hamid-i sânî [2] 수니파의 칼리파 겸직. [3] 체르케스의 일파. [4] 뒨다르 알리 오스만 하룬 오스만의 할아버지 [5] 메흐메트 오르한의 아버지 [6] 에르투으룰 오스만의 아버지 [7] 실제로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쿠데타를 일으켜 입헌군주제 선언을 하게 만들고 퇴위시켰다. 강제로 버릇을 고치게 했다 [8] 겉으로 보면 칭찬하는 말로 보이지만 비꼬는 말이다. 그만큼 음흉한 인물이라는 의미. 근데 그럼 자기도 상당히 음흉한거 아닌가? [9] 실제로 압뒬하미드 시기를 다룬 터키 드라마 "파이타트: 압뒬하미드(Payitaht: Abdülhamid)의 영어 제목이 The Last Emeror. 즉 마지막 황제다. 이후에 즉위한 메흐메트 5세 레샤트 청년 튀르크당에 의해 옹립되었고, 제위기간 내내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였으며, 마지막 황제인 메흐메트 6세 바히데틴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협상국에게 휘둘려 제대로 된 목소리조차 내지 못했다.물론 압뒬하미트 2세가 폐위되면서 입헌군주제로 전환돼서 그렇지 않았더라도 권력을 휘두를 수는 없었다(...) [10] 수염 빼면 야구선수 이용찬과 닮았다. [11] 이러한 사건들 때문에 압뒬하미트 2세가 대인기피 증세를 보이게 되었다고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다. 압뒬하미트 2세가 즉위하고 나서 아버지가 지은 돌마바흐체 궁전을 버리고 훨씬 협소한 궁전인 이을드즈 궁전으로 이궁한 것도 암살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12] 이 지역은 이후 바투미를 제외하면 튀르키예 공화국 시기에 돌려받았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소련은 두 지역을 다시 차지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 거기다 말이 두 지역만 다시 뱉어내라는 것이었지 실제 소련의 계획안은 튀르키예에게서 엄청난 크기의 영토를 뜯어가려는 안이었다. [13] 당시에 놓인 철도들 중 대부분은 복선화 혹은 전철화만 하고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14] 다만 당시 유럽도 마찬가지였지만 남학교와 여학교로 분리되어 있었고, 여학교에서 강의하는 남교사는 커튼으로 가려 여학생들을 못보는 상태로 강의를 하거나, 여학생들이 얼굴을 가려 남교사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아야 했다. [15] 탄지마트 이후 오스만 제국에서도 상류층 사이에 프랑스어가 공식언어처럼 쓰였으며, 황실 또한 마찬가지였다. 압뒬하미트의 프랑스어 실력은 이를 감안해야 한다. [16] 황제 자신이 튀르크계 혈통이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제국 창건 초창기 때를 제외하면 역대 황제의 모후는 오늘날의 튀르키예 이외의 유럽 국가에서 잡아온 노예 출신들이 많았기 때문. [17] 그리스 입장에서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닌데 애초에 오스만이 먼저 크레타의 자치를 규정한 할레파 협약을 파기해서 분노한 크레타의 그리스인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었다. [18] 1897년 크레타 전쟁 당시 테살리아를 일시적으로 점령했으나 열강의 압력으로 도로 뱉어내야 했다. [19] 압뒬하미드 시기에 쓰인 국가 "하미디예 행진곡" 의 첫 소절이 이 철도 얘기다. 다만 철도는 정작 10년도 채 쓰지 못한 채 1차 세계대전 발발로 노선의 상당 부분이 파손되어 운행이 중단되었고, 아랍 국가들의 독립 이후 각국의 철도체계에 편입되어 산산조각이 났다. 오늘날에는 일부 구간만이 수리되어 쓰이고 있고, 다른 일부 구간은 관광지가 되기도 했다. [20] 사진의 경우 황궁에 앉아서도 제국 이곳저곳을 살펴보기 위한 용도였지만, 일종의 예술작품으로도 여겼는지 개인적으로 컬렉션을 만들기도 하고 외국 군주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21] 물론 직접 비교는 어려운 것이, 대한제국은 이미 일본 제국이 맘만 먹으면 식민화할 수 있을 정도로 무너진 상태였던 반면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유럽 열강과 일대일로 맞붙기엔 부족하지만 최소한 1차대전에 당당히 동맹국의 일원으로 참전할 만큼 '준' 강대국으로는 인정받고 있었으며, 독일이 참호전에 빠져 외부 지원을 할 여력이 없어지고 오스트리아가 삽질을 하는 사이에도 일단 자기 전선은 지키다가 전쟁 끝나기 직전에 그것도 무조건 항복이 아닌 휴전을 하였다. 대한제국과의 비교는 일단 전체적인 구도상 그랬다는 것이다. [22] 2017년부터 2021년까지 압뒬하미트를 다룬 드라마 "파이타흐트: 압뒬하미트" 가 방영되고 에르도안을 비롯한 튀르키예 정부의 호평을 받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23] 아서 코난 도일의 공식 설정은 서식스 지역으로 은퇴한 부분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