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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353b4><colcolor=#fff> 영국 하노버 왕조 제6대 국왕
빅토리아 Victor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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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19년 5월 24일 | ||
영국 잉글랜드 런던 켄싱턴 궁전 | |||
사망 | 1901년 1월 22일 (향년 81세) | ||
영국 잉글랜드 와이트 섬 오스본 하우스 | |||
묘소 | 영국 잉글랜드 버크셔주 윈저 프로그모어 영묘 | ||
재위기간 |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여왕 | ||
1837년 6월 20일 ~ 1901년 1월 22일 | |||
캐나다 자치령 여왕 | |||
1867년 7월 1일 ~ 1901년 1월 22일 | |||
인도 여제 | |||
1876년 5월 1일 ~ 1901년 1월 22일 | |||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여왕 | |||
1901년 1월 1일 ~ 1901년 1월 22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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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353b4><colcolor=#fff> 가문 | 하노버 가문 | |
이름 |
알렉산드리나 빅토리아 Alexandrina Victoria |
||
아버지 |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 | ||
어머니 |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 공녀 | ||
배우자 |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앨버트 공자 (1840년 결혼 / 1861년 사망) |
||
자녀 | 빅토리아, 에드워드 7세, 앨리스, 앨프리드, 헬레나, 루이즈, 아서, 레오폴드, 베아트리스 | ||
종교 |
성공회 (
잉글랜드 국교회) 장로회 ( 스코틀랜드 국민교회)[1] |
||
신체 | 152cm[2][3], O형( Rh-)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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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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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여왕이자 인도 제국의 여제이며 하노버 왕조의 마지막 군주.대영제국의 최전성기[4]를 상징하고 동시에 당시 극에 달해 있던 서양의 제국주의를 대표하는 군주이기도 하다.[5]
이전에는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한 군주"이자 "세계에서도 가장 오래 재위한 여왕"이라는 기록을 갖고 있었다. 이후 2015년 9월 9일 오후 5시 30분부로 현손인 엘리자베스 2세가 기록을 경신하면서 이 기록이 깨지고 두 번째로 밀려났다.
영국과는 달리 하노버 왕국에는 살리카법이 적용되어 여성 군주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빅토리아의 즉위와 함께 조지 1세부터 윌리엄 4세까지 지속된 영국과 하노버 왕국의 동군연합이 종료되었다. 참고로 윌리엄 4세 사후의 하노버 군주 자리는 윌리엄 4세의 동생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가 계승했다.
영국 왕 중에서 드물게도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없다.[6][7] 그렇기에 빅토리아라는 이름을 왕호로 사용하는 영국 여왕이 앞으로 등장하기 전까지는 1세로 불리지 않는다.
2. 칭호
- 켄트의 알렉산드리나 빅토리아 공녀 전하 Her Royal Highness Princess Alexandrina Victoria of Kent (1819년 5월 24일 ~ 1837년 6월 20일)
- 여왕 폐하 Her Majesty The Queen (1837년 6월 20일 ~ 1901년 1월 22일)
처음 즉위할 때는 영국의 국왕이었고 유럽의 여러 지위들과 나중에 인도 제국의 황제 자리까지 겸임한 결과 공식 칭호가 다음과 같이 늘어났다.
'Her Majesty Victoria, by the Grace of God, of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Queen, Defender of the Faith, Princess of Hanover and Duchess of Brunswick and Lunenburg, Princess of Saxe-Coburg and Gotha and Duchess in Saxony, Empress of India, Sovereign of the Royal Family Order of King George IV, Sovereign of the Most Noble Order of the Garter, Sovereign of the Most Ancient and Most Noble Order of the Thistle, Sovereign of the Most Illustrious Order of Saint Patrick, Sovereign of the Most Honourable Order of the Bath, Sovereign of the Most Distinguished Order of Saint Michael and Saint George, Sovereign of the Order of British India, Sovereign of the Indian Order of Merit, Sovereign of the Most Exalted Order of the Star of India, Sovereign of the Royal Order of Victoria and Albert , Sovereign of the Most Eminent Order of the Indian Empire, Sovereign of the Imperial Order of the Crown of India, Sovereign of the Distinguished Service Order, Sovereign of the Royal Victorian Order'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의 여왕, 신앙의 수호자, 하노버의 공주이자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여공작[8],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자비이자 작센의 왕자비[9], 인도의 여제, 조지 4세 왕립 기사단장, 가터 기사단장, 씨슬 기사단장, 성 패트릭 기사단장, 바스 기사단장, 세인트마이클앤드세인트조지 기사단장, 영국령 인도 기사단장, 인도 메리트 기사단장, 인도성(星) 기사단장, 로열 빅토리아·앨버트 기사단장, 인도 제국 기사단장, 인도 왕좌 기사단장, 무공 기사단장, 빅토리아 왕립 기사단장이신 빅토리아 여왕 폐하'
이렇게 굉장히 길고 장황한 칭호 때문에 국가 간의 공식적인 조약에서도 "Her Majesty Victoria, by the Grace of God, of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Queen, Defender of the Faith"까지만 쓰고 그 뒤는 "etc.,etc.,etc.,(기타 등등,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으로
생략해서 표기하는 경우가 많았다.'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의 여왕, 신앙의 수호자, 하노버의 공주이자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여공작[8],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자비이자 작센의 왕자비[9], 인도의 여제, 조지 4세 왕립 기사단장, 가터 기사단장, 씨슬 기사단장, 성 패트릭 기사단장, 바스 기사단장, 세인트마이클앤드세인트조지 기사단장, 영국령 인도 기사단장, 인도 메리트 기사단장, 인도성(星) 기사단장, 로열 빅토리아·앨버트 기사단장, 인도 제국 기사단장, 인도 왕좌 기사단장, 무공 기사단장, 빅토리아 왕립 기사단장이신 빅토리아 여왕 폐하'
3. 생애
3.1. 즉위 배경
빅토리아는 조지 3세의 4남인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의 딸로,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왕위에 오르기 힘든 입장이었으나 다음과 같은 상황이 발생해 즉위가 가능했다.빅토리아의 할아버지 조지 3세는 9남 6녀를 두었는데, 당시 왕태자였던 장남 조지 4세의 외동딸이자 후계자인 샬럿 공주가 아이를 낳다가 요절했다. 게다가 당시 조지 4세의 결혼 생활은 이미 파탄 나 있었기 때문에 조지 4세의 직계로는 다시 후계자를 보는 것이 불가능했다. 상황이 이리 되자 조지 3세의 아들들 중 2남 요크와 올버니의 공작 프레더릭, 3남 클래런스 공작 윌리엄, 4남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5남 컴벌랜드 공작 어니스트, 6남 서식스 공작 어거스터스[10], 7남 케임브리지 공작 아돌푸스 이 5명의 아들에게 장차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를 낳을 의무가 주어지게 되었다.[11] 3남 윌리엄은 자식이 모두 11명이나 있었으나 적자였던 자녀들은 모두 어린 나이에 사망했고, 서자[12]만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4남 에드워드가 1819년에 외동딸 빅토리아를 얻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빅토리아가 태어난 지 1년 만인 1820년에 사망했다.
이후 왕위는 3남인 윌리엄 4세가 물려받았으며, 빅토리아는 차기 왕위 계승 1순위가 되었다.
3.1.1.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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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빅토리아 여왕. | 어머니 켄트 공작부인 빅토리아와 함께.[13] |
조지 3세의 4남인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와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의 딸 빅토리아 공녀 사이에서 1819년 5월 24일에 늦둥이로 태어났다. 즉위 배경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막 태어났을 무렵엔 조지 3세의 살아있는 유일한 손녀로서 언젠가는 왕위를 계승할 추정상속인으로 여겨졌다. 아버지 켄트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가 죽은 뒤 잠시 추정상속인이 될 가능성이 낮아졌지만 윌리엄 4세가 아델라이드 왕비 사이에서 1819년에 낳은 첫딸 샬럿, 1819년에 사산된 아이 1명, 1820년생 셋째 엘리자베스, 1822년 넷째로 사산된 쌍둥이 왕자가 차례로 요절하면서 다시 추정상속인으로 지위가 부상한다.
본래 독일 출신인 데다 남편마저 잃은 뒤 궁정에서 경원시당하며 영국에 정을 붙이지 못하고 친정에 돌아가고자 했던 여왕의 어머니 켄트 공작부인은 장차 딸이 즉위하면 섭정이 될 야심을 품고 비서인 존 콘로이와 함께 어린 빅토리아를 옥죄기 시작했다. 이게 어느 정도였느냐면 콘로이의 딸 빅투아르 콘로이를 빅토리아의 소꿉친구로 붙여주고,[14] 혹시라도 미끄러져 넘어지기라도 해서 죽으면 절대로 안 된다는 이유로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도 빅토리아 혼자서는 못 하게 할 정도였다. 딸의 교육에도 많은 신경을 써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음악, 역사, 미술 등의 다양한 분야를 두루 섭렵시켰음은 물론이다. 또한 자신들 이외의 다른 영국 왕족들이 빅토리아와 친하게 지내는 걸 막으려고 윌리엄 4세와 아델라이드 왕비가 빅토리아와 만나는 것도 방해했다.
비록 딸이 아닌 조카였지만 빅토리아를 진심으로 아끼고 좋아했던 아델라이드 왕비는 그녀와 만나기 어렵게 되자 매우 슬퍼했고 윌리엄 4세는 켄트 공작부인과 콘로이가 그들의 야심을 이루기 위해 어린 조카딸을 괴롭힌다고 생각해 저 둘을 혐오했다. 공적으로도 문제가 되는게, 장차 왕위를 계승하려면 후계자 수업을 위해서라도 빅토리아와 직접 만나야 할 일이 많은데도 저런다는 건 군주로서의 권위를 침해하는 셈이었다.
결국 윌리엄 4세는 1836년 자신의 생일 만찬 때, 켄트 공작부인의 면전에 대놓고 '짐은 빅토리아가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서 그대가 섭정이 되는 꼴은 결코 보지 않게 할 것'이라 일갈했다. 발언 전문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이 짐을 최소한 9개월은 더 살게 해줄 거라 믿소...내 그렇게 되면 지금 내 옆자리의, 저 악마 같은 조언자에게 둘러싸여 상황도 제대로 제어 못해서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짓이나 하는 내 무능한 제수씨가 내 조카의 왕위를 가지고 노는 일 없이, 잠정 왕위 계승자인 저기 앉아있는 젊은 아가씨에게 왕위를 넘겨주게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오.'
'I trust to God that my life may be spared for nine months longer ... I should then have the satisfaction of leaving the exercise of the Royal authority to the personal authority of that young lady, heiress presumptive to the Crown, and not in the hands of a person now near me, who is surrounded by evil advisers and is herself incompetent to act with propriety in the situation in which she would be placed.'
당시 빅토리아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한 채 눈물만 흘렸고,
켄트 공작부인은 당연히
붉으락푸르락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빅토리아가 18번째 생일을 맞아 성인이 되고 나서 26일 후에 윌리엄 4세가 세상을 떠난 것.'I trust to God that my life may be spared for nine months longer ... I should then have the satisfaction of leaving the exercise of the Royal authority to the personal authority of that young lady, heiress presumptive to the Crown, and not in the hands of a person now near me, who is surrounded by evil advisers and is herself incompetent to act with propriety in the situation in which she would be placed.'
빅토리아는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를 극성스런 어머니와 그 비서의 등쌀에 시달려 제대로 된 친구 하나 사귀지 못 한 채 억눌려서 자랐다. 어린 빅토리아가 의지했던 유일한 인물은 가정교사 루이즈 레첸 여남작이었는데, 그녀는 콘로이와 켄트 공작부인의 섭정 요구를 거절하기도 했다. 여남작은 빅토리아가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것을 우려해 (특히 켄트 공작부인과 콘로이 경에게) 강하고 타협하지 않는 여성이 되도록 가르쳤다. 이런 유년기를 보낸 빅토리아는 자기 주장이 매우 확고한 고집스런 성격으로 자랐다. 이런 성격은 죽을 때까지 고쳐지지 않았고 여왕과의 금슬이 좋았던 남편 앨버트 공마저 그녀의 성격을 바꾸지는 못 했다. 그저 비위를 맞춰가며 달랬을 뿐. 당대에도 앨버트 공이 보살급 멘탈이라 저 성격 받아주고 산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있었다고 한다.
빅토리아의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준 루이즈 레첸 여남작(Baroness Louise Lehzen)은 빅토리아의 즉위 후에도 여왕의 개인 비서와 조언자로 일하다가 앨버트 공과 빅토리아의 결혼 이후 첫 아이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공주가 태어난 1840년 겨울에 앨버트 공과의 갈등 끝에 은퇴해서 고향 하노버로 돌아갔다. 레첸 여남작은 1870년 사망할 때까지 빅토리아와 평생 편지를 교환하며 친분을 유지했다.
3.1.2. 여왕 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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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즉위 소식을 듣는 빅토리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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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여왕의 대관식 | 빅토리아 여왕의 대관식 초상화, 조지 헤이터 경, 1840년 |
1837년 6월 20일, 큰아버지 윌리엄 4세가 재위 7년 만에 71세를 일기로 사망하자 빅토리아는 여왕으로 즉위했다. 만 18세 성인이 되어 즉위했기에 섭정을 둘 필요가 없었던 여왕은 자신을 달달 볶았던 어머니와 콘로이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어머니와 내연관계에 있다는 추문까지 나돌 정도로 가까웠던 콘로이는 연금을 주고 퇴직이라는 명분으로 내쫓아버렸고, 켄트 공작부인은 거처를 외딴 곳으로 정해 버킹엄 궁전에서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했다.[15]
첫 아이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공주가 태어난 후에야 남편인 앨버트 공의 노력과 자신도 어머니가 되고 나서 사이가 많이 나아졌고, 켄트 공작부인은 빅토리아의 궁정에서 환영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녀는 손주들을 아주 예뻐했다고 한다. 그러나 완전히 화해한 건 아니어서 켄트 공작부인이 1861년 3월 16일 사망하자 그녀가 썼던 일기와 자신의 어릴 적 물건들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것을 발견한 여왕은 어머니와 평생 사이 좋게 지내지 못한 것을 몹시 후회했다고 한다.
3.2. 치세
빅토리아는 이른바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전성기의 영국을 통치한 여왕이었다. 이 시기 영국은 자본주의 선진국이 되는 동시에 2대 정당제 의회정치가 전개되었고 그 동향이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본인이 여성이었음에도 정작 여성 참정권 보장에는 반대했지만 64년간의 긴 치세를 통해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따라 오늘날의 영국 군주제를 확립했다.그러나 대영제국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빅토리아 여왕 치세도 말기로 가면서 독일, 미국 등의 후발주자에게 산업적으로 밀리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경제가(특히 농촌 경제가) 어려워지자 노동자와 농민들의 불만( 보호무역론)이 상당해졌다. 군사적으로도 보어 전쟁 등에서 체면을 구기는 등 점점 쇠퇴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를 흔히 빅토리아 여왕의 갱년기라 부른다. 보통 "현대(모던) 영국"은 불경기의 원인을 조사하기 위한 왕립상공회의소가 설립되고 선거권을 확대, 평등화하는 개혁법, 의석재분배법이 통과된 1885년을 기준으로 하는데, 이때가 바로 그 쇠퇴가 시작된 시기였다.[16]
3.2.1. 치세 전기
젊은 시절.
여왕이 즉위한 19세기 중반은 외국과의 전쟁으로 인한 불황과 맞물려 노동자들이 과격한 러다이트 운동에서 상대적으로 온건한 차티스트 운동을 통해 참정권 보장을 주장하는 등 대내외적으로 시급히 처리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있었다. 이 때문에 여왕은 즉위하자마자 매일 1시간씩 30대 총리 윌리엄 램[17][18]을 접견해 여러 현안을 논의하면서 군주로서의 자질을 키워나갔다.
치세 초기의 여왕의 정치적 성향은 자유주의에 쏠려있어 휘그당을 옹호하고, 토리당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1839년 2차례에 걸쳐 여왕을 모시는 시녀들이 정치적 성향을 문제 삼아 궁정에서 쫓겨나는가 하면, 시녀 교체를 주장한 토리당의 로버트 필 31대 총리 예정자의 의견을 여왕이 거부하면서, 로버트 필이 총리를 거부하고 내각이 다시 휘그당으로 교체되는 등, 젊은 여왕의 등장에 환호했던 영국 국민들은 궁정에서 들려오는 파벌 싸움에 실망해 인기가 떨어지기도 했다.
이는 휘그당에 우호적인 시녀들에 둘러싸인 여왕의 영향력을 국정에서 차단하기 위해 그녀가 정치적으로 부족하다는 토리당의 선전이 먹혀들어간 것으로, 유달리 30대 총리이자 멜버른 자작 윌리엄 램 경과 친밀했던 처녀 여왕은 Mrs.Melbourne(멜버른 부인)이라는 비꼼을 당하기도 했다.
한편 미혼인 상태에서 즉위한 여왕의 남편 자리를 놓고 여러 나라의 왕족들이 나섰다. 원래 여왕은 독일 출신인 어머니에 대한 반감 때문에 독일인과 결혼할 생각이 없었지만 영국에 온 외 사촌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자 앨버트에게 반해서 결국 1840년 2월 10일, 앨버트와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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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의 결혼식 |
지식과 교양이 풍부했던 앨버트 공은 여왕의 남편이라는 위치 때문에 공직도 작위도 받지 못 하고 아내를 보필하는 조력자 역할에만 충실해야 해서 결혼 초기에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빅토리아 여왕의 임신 이후 거동의 제약이 생기고 점차 남편에게 깊이 의지하면서[19] 앨버트 공의 역할이 커졌고, 그는 고집세고 외골수였던 아내의 곁에 머무르며 여왕의 부군으로서 여러 가지 업무를 훌륭하게 처리했다. 19세기 중반의 시대적 변혁에 따라 당대의 민중이 요구한 노예 제도 폐지나 교육 제도 개혁에 힘썼으며 왕실 가족과 재산의 관리도 담당했고, 1851년의 제1회 국제박람회의 개최도 그가 추진한 행사였다. 이런 앨버트 공이 있었기에 여왕은 양당제 의회에서 정치적 균형감각을 유지하며 입헌군주제를 공고하게 다질 수 있었다.
3.2.2. 과부 여왕
앨버트 공의 초상화와 함께한 여왕. 차녀 앨리스 공주, 4녀 루이즈 공주와 함께.
1861년 12월 14일 여왕의 부군 앨버트 공이 4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남편이 병상에 누워 죽어가는 동안에도 금방 훌훌 털고 일어날 거라며 애써 현실을 외면하던 여왕은 남편의 죽음으로 받은 충격이 너무나 큰 나머지 앨버트 공의 사후 모든 국정에서 손을 떼고 아직 결혼하지 않은 어린 자녀들과 함께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감춘 채 윈저 성에 은거해버렸다.
정신병을 앓았던 조지 3세는 웨일스 공 조지를 섭정으로 임명한 후 공무에서 물러났지만, 섭정도 두지 않은 채 갑작스럽게 은거해버린 여왕의 무책임한 행동[20]에 내각과 의회는 매우 당황했다. 명목상 군주이긴 해도 국가 대사를 처결할 때는 여왕의 의견을 묻지 않을 수 없었기에 총리는 하는 수 없이 런던에서 멀리 떨어진 여왕의 처소로 매번 찾아가기를 반복했다. 처음에는 빅토리아를 동정하던 국민들도 여왕의 부재가 길어지자 일각에서는 거액의 생활비를 지급받고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면서 국정에는 소홀한 여왕의 행태에 염증을 느껴 '윈저의 과부는 물러가라'며 퇴위를 주장하는 등 불만의 여론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여왕은 떠밀리듯이 공무에 복귀했으나 앨버트 공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언제나 검은 상복만 입고 지내는 등 우울한 감정을 숨기려 하지 않았고, 상복을 입을 때 머리에 얹는 베일을 착용하기 불편하다며 제국왕관(Imperial State Crown)[21]을 쓰는 것도 거부했다. 그러자 이러한 모습이 국가의 위신과 왕실의 체면에 손상이 갈 거라고 판단한 영국 정부는, 여왕을 위해 특별히 제국 왕관의 축소판을 제작하기에 이른다.
은으로 골조를 만들고 다채로운 보석이 사용되지 않아 겉보기에는
3.2.3. 인도 여제
디즈레일리가 인도 제국의 왕관을 여왕에게 바치는 것을 풍자한 주간지 '펀치(Punch)'의 만평(1876년, 존 테니얼(John Tenniel)[22]).[23]
여왕과 인도인 시종 두 사람[24]
1857년 세포이 항쟁을 진압한 영국은 그동안 인도를 간접통치하는 수단으로 활용한 동인도 회사를 해체하고 인도 제국을 통해 본격적인 직접 통치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무굴 제국 최후의 황제였던 바하두르 샤 2세가 폐위되었으며, 그나마 꼭두각시로나마 형체를 유지하고 있던 무굴 제국은 330여 년만에 그대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편 여왕은 인도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태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은 걸 안타깝게 여기면서도 군주로서의 책무를 다시금 절감했다는 감상을 일기에 적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74년 총선거를 통해 다시 집권한 벤저민 디즈레일리 총리는 여왕의 공식 칭호에 인도 여제(Empress of India)의 칭호를 덧붙이는 것을 골자로 한 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이것은 기존 무굴 황제 대신에 영국의 왕이 인도의 황제로서 인도 각지의 제후들 위에 군림하는 형태로 변경한 것이다.
영국은 식민지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영국화해 영국민으로서의 권리를 부여하는 데에 인색했던 대신 영국의 지배에 저항하지만 않으면 되도록 기존 사회체제에 손을 대지 않는 방식을 취했다. 그래서 영국은 식민화 과정에서 현지의 토착 지배자들과 타협해 영국의 왕이 그들 위에 존재하는 더 높은 군주라는 관계를 정립한 일이 여럿 있었다. 예를 들어 피지에서는 (여)왕에 대응되는 현지어 표현을 '대추장'이라고 번역했다. 말 그대로 피지 각지의 추장들 위에 군림하는 더 큰 추장이라는 의미. 영국의 왕에게 황제라는 칭호를 부여해 통치한 곳은 인도가 유일했지만.[25]
디즈레일리가 굳이 빅토리아 여왕에게 인도 황제 칭호를 부여한 동기 중에는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26]가 프로이센 왕자에게 시집간 점을 감안한 것도 있었다. 빅토리아 공주는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왕태자[27]한테 시집을 갔는데, 이후 1871년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해 독일 제국을 만들었다. 그러자 영국 국내에서는 "프리드리히가 즉위하면 빅토리아 공주는 Empress[28]가 되는데 어머니는 Queen이어서 칭호가 서로 역전된다"는 불만이 돌았다고 한다. 영국인들 스스로 대영제국[29]이라고 할 정도로 세계 최강국인데 신생 독일 제국보다 못날 것도 없다는 자존심도 있었을 것이고. 근데 그렇다고 그 동안 익숙하게 잘 써온 연합왕국(United Kingdom)이란 국호를 갑자기 무슨무슨 제국으로 고치고 여왕의 칭호를 여제로 바꾸는 것은 여러모로 번거로운 일이었다.
그런데 마침 영국이 인도를 완전히 장악[30]함에 따라 디즈레일리가 묘수를 낸 것이다. 영국 여왕을 인도 여제로 군림하게 함에 따라 인도의 기존 지배 질서 위에 영국이 지배력을 행사하게 만들면서 칭호 문제로 촉발된 영국인들의 자존심 문제를 적당히 해결한 것. 영국 국내에서는 이게 뭐하는 짓이냐(…)는 비아냥이 없지는 않았지만[31] 디즈레일리의 제안은 관철되었다. 따라서 1877년 1월 1일부터 빅토리아 여왕은 '영국의 여왕이자 인도의 여제이신 빅토리아 폐하'로 불리게 되었으며 109캐럿짜리 인도산 다이아몬드 코이누르를 제국 왕관에 박아넣었다. 빅토리아 이후로 영국의 국왕들은 1948년까지 인도 황제의 칭호를 같이 썼다.
3.2.4. 말년
노년의 여왕.
1878년 12월 14일 차녀 앨리스 공주가 디프테리아에 걸려 병사했고 60세가 된 다음 해에 첫 증손녀인 작센마이닝겐의 페오도라 공녀[32]가 태어남에 따라 증조할머니가 되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남편과 자식을 앞세우는 비극을 겪은 여왕은 가장 아끼던 막내딸 베아트리스 공주에게 한층 더 매달렸다. 베아트리스 공주가 바텐베르크의 하인리히와 사랑에 빠졌을 때도 딸과 사위가 결혼 후에도 영국에서 거주하며 자기 곁에서 지내는 걸 조건으로 결혼을 허락할 정도로 여왕은 젊었을 적의 완고했던 성격이 노년에 접어들어 더욱 강해졌다.
이런 여왕의 고집스럽고 독단적인 성격은 외교와 군사 문제에서 강경한 대응을 통해 영국의 위신을 세우려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1877년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을 공격해 산스테파노 조약을 체결하고 불가리아를 할양받자 이에 반대해 다른 나라들을 끌어들여 1878년 베를린 조약을 통해 산 스테파노 조약을 폐기하고 러시아 몫으로 돌아갈 영토를 크게 줄여버렸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뿐이었고, 뒤이어 각종 악재가 여왕과 정부를 곤경에 빠뜨렸다.
1881년과 1885년에는 각각 남아프리카와 수단에서 영국군이 패퇴했고, 1882년 영국의 식민통치에 반발한 아일랜드에서 총독이 비밀결사에 암살당했고, 1870년대와 80년대 아일랜드 독립운동가들은 아일랜드 자치동맹, 아일랜드 토지동맹을 거쳐 아일랜드 민족동맹을 만들고 아일랜드 자치당은 50여 명을 영국 의회에 진출시켰다. 아일랜드 자치당은 캐스팅보더 역할을 하며 몸값을 높여 영국 자유당의 글래드스턴을 도와 아일랜드 토지법과 아일랜드 자치법을 통과시켰다.
이런 조짐은 대영제국의 최전성기가 끝나고 내리막으로 접어든 신호탄이었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여왕은 개인적인 비극이나 대내외적으로 산적한 문제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왕위를 지키며 1887년에 즉위 50주년을 축하하는 골든 주빌리를, 1897년에는 즉위 60주년을 축하하는 다이아몬드 주빌리를 성대하게 거행했다. 당시까지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한 할아버지 조지 3세의 재위 기간을 뛰어넘은 빅토리아는 생전에 이미 대영제국의 구심점으로서 국민들이 우러러보는 빛나는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국의 팽창주의는 도리어 이 내리막 시기에 더 극대화된다.
3.2.5.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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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여왕의 장례 행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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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크셔 주에 위치한 프로그모어 영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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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모어 영묘 내부에 있는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의 석관. 석관의 덮개는 생전 두 사람의 모습을 본떠 조각했다. |
그럼에도 빅토리아는 군대 사열식, 가든 파티 등 여왕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했으나 1900년에 복벽 탈장과 자궁 탈출증을 겪고 나서는 쇠약해졌다.
결국 1901년 1월 22일 오후 6시 30분 사망 시점을 기준으로 영국 역사상 가장 긴 64년 동안 재위[34]한 빅토리아 여왕은 81세를 일기로 와이트 섬의 오스본 하우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윈저 대공원(Windsor Great Park)의 프로그모어 영묘(Frogmore Mausoleum)로 운구된 여왕의 유해는 40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 옆에 안장되었다.[35]
이에 따라 영국의 하노버 왕조는 빅토리아 여왕의 대에 이르러 끝났고, 장남 에드워드 7세가 왕위에 오른 이후, 영국의 왕조는 부군 앨버트 공의 가문인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로 교체되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도중에 독일색을 없애기 위해 명칭을 윈저 왕조로 고쳤다.
4. 장수
4.1. 재위 50주년, 골든 주빌리
1887년 6월 20일, 여왕은 남편 앨버트 공이 묻혔던 프로그모어의 나무 아래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 것으로 즉위 50주년(골든 주빌리)의 일정을 시작했다. 이후 기차를 타고 윈저 성에서 패딩턴, 다시 런던으로 갔으며 이날 저녁 버킹엄 궁전에서는 왕실 가족과 50개국의 군주를 비롯해 해외의 영국 식민지를 통치하는 고위 관료들이 참석한 호화로운 연회가 열렸다.6월 21일, 덮개가 열린 사륜마차를 탄 여왕은 인도 기병대의 호위를 받으며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행차한 뒤 버킹엄 궁전으로 돌아왔다. 버킹엄 궁전 앞에 운집한 군중들은 궁전 발코니에서 모습을 드러낸 여왕을 향해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이날 저녁 연회에 참석한 여왕은 각국 외교관들과 인도의 라자들을 접견했고,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불꽃놀이를 구경했다.
골든 주빌리 행사 때 여왕은 인도인 시종 두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시중들도록 했고, 그 두 사람 중 하나인 압둘 카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승진해 여왕에게 우르두어를 가르치고 집사 역할을 수행하기에 이른다.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당대의 관점에서는 매우 파격적인 일이라 여왕의 주변에서는 카림을 악의적으로 비방했지만 여왕은 들은 척도 않고 그를 가까이에 두었다.
4.2. 재위 60주년, 다이아몬드 주빌리
1896년 9월 23일부로 당시까지 영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집권한 할아버지 조지 3세의 재위기간을 경신했다. 식민지 장관 조지프 체임벌린은 다음 해인 1897년 즉위 60주년(다이아몬드 주빌리) 행사 때 이를 함께 기념해 대영제국과 여왕을 더욱 빛나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따라 1897년에 거행된 다이아몬드 주빌리 행사에서는 영국 식민지 자치령의 모든 총리와 총독 들이 초대받았고, 거창한 행렬에는 영국 전역의 군대들도 참여했다.
1897년 6월 20일, 이날은 일요일이었기에 여왕은 윈저 성 내의 성 조지 예배당에서 기도를 했다.
6월 21일에는 외국 사절들을 접견하기 위해 런던으로 돌아왔다.
공식 행사일인 6월 22일, 여왕의 행렬은 세인트 폴 대성당 야외에서 거행된 기념식에 이어 런던 남부와 국회의사당을 지나 버킹엄 궁전으로 돌아왔는데, 무개마차에 탑승한 노구의 여왕을 향해 수많은 인파가 축하와 환호를 아낌없이 보냈다. 이날 저녁 여왕은 '내가 거리를 지날 때마다 본,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열정과 환희로 가득한 모습에 진심으로 놀랍고 감동받았다'고 일기에 적었다. 버킹엄 궁전에서 열린 공식 만찬과 더불어 여왕의 며느리 알렉산드라 왕태자비는 런던의 빈민 40만 명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행사를 베풀었다.
영국 역사상 처음 거행된 다이아몬드 주빌리는 여왕과 대영제국 모두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야외에서 거행된 기념식은 78세의 고령인 여왕에게는 무리여서 그로 인해 류마티스성 관절염이 악화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빅토리아 여왕 이후 2번째 다이아몬드 주빌리가 거행된 것은 115년 뒤인 2012년, 여왕의 현손녀인 엘리자베스 2세 때였다.
당시 조선에서도 이 기념식에 사절을 파견했는데, 그 주인공은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6개국 겸임공사였던 민영환이었다. 그는 1897년 3월 24일 4명의 수행원과 함께 서울을 출발해 나가사키, 상하이, 마카오, 싱가포르를 거쳐 인도양을 지나 수에즈 운하를 통과해 지중해에 도달했다. 여기서 다르다넬스 해협을 지나 흑해로 들어가 오데사에 상륙한 다음 기차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해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국서를 바치고 열흘 동안 체류하다가 6월 1일에 런던으로 출발했다. 민영환 일행이 런던에 도착한 것은 6월 5일이었으며 6월 22일에 거행된 기념식에 참석하고 7월 17일에 귀국길에 올랐는데, 민영환은 이때의 노정을 <사구속초(使歐續草)>라는 여행기로 남겼다.
6월 26일에는 영국 해군의 대함대(Grand Fleet)가 관함식을 개최했다. 이때 선박 엔진의 역사를 바꾼 아주 유명한 난입 사고가 있었다. 증기 터빈 문서 참고.
5. 가족 관계
자세한 내용은 빅토리아 여왕/가족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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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여왕의 가족, 프란츠 하버 빈터할터, 1846년 (왼쪽부터) 차남 알프레드[36], 장남 에드워드, 빅토리아 여왕, 앨버트 공, 차녀 앨리스, 3녀 헬레나, 장녀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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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 그리고 아홉 자녀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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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가 한 사진에 찍힌 모습. 빅토리아 여왕, 에드워드 7세[37], 에드워드 8세[38], 조지 5세[39] |
5.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빅토리아 여왕 (Victoria) |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 (Prince Edward, Duke of Kent and Strathearn) |
조지 3세 (George I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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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일스 공 프레더릭 (Frederick Lewis, Prince of Wales)[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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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아우구스타 공녀 (Princess Augusta of Saxe-Gotha-Altenbu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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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샤를로테 (Princess Charlotte of Mecklenburg-Strelitz)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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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클렌부르크 공작 카를 루트비히 프리드리히 (Duke Charles Louis Frederick of Mecklenbu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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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힐드부르크하우젠의 공녀 엘리자베트 알베르티네 (Princess Elisabeth Albertine of Saxe-Hildburghaus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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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 공녀 (Princess Victoria of Saxe-Coburg and Saalfel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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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프란츠 프리드리히 (Francis Frederick, Duke of Saxe-Coburg and Saalfel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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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Ernest Frederick, Duke of Saxe-Coburg and Saalfel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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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조피 공녀 (Princess Sophia of Brunswick-Wolfenbütte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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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스에보스도르프의 여백작 아우구스테 카롤리나 (Countess Augusta Carolina of Reuss-Ebersdor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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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스에보스도르프 백작 하인리히 24세 (Henry XXIV, Count Reuss-Ebersdor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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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바흐쇤베르크의 카롤리나 여백작 (Countess Carolina of Erbach-Schönberg) |
5.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녀 |
독일 제국의 황후 빅토리아 (Victoria, German Empress) |
1840년 11월 21일 | 1901년 8월 5일 |
프리드리히 3세 슬하 4남 4녀[41] |
1남 |
에드워드 7세 (Edward VII) |
1841년 11월 9일 | 1910년 5월 9일 |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42] 슬하 3남 3녀[43] |
2녀 |
헤센 대공비 알리체 (Alice, Grand Duchess of Hesse and by Rhine) |
1843년 4월 25일 | 1878년 12월 14일 |
헤센 대공 루트비히 4세 슬하 2남 5녀[44] |
2남 |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알프레트 (Alfred, Duke of Saxe-Coburg and Gotha) |
1844년 8월 6일 | 1900년 7월 30일 |
러시아의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45] 슬하 1남 4녀[46] |
3녀 |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크리스티안 공자비 헬레나 (Helena, Princess Christian of Schleswig-Holstein) |
1846년 5월 25일 | 1923년 6월 9일 |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크리스티안 공자 슬하 3남 2녀[47] |
4녀 |
아가일 공작부인 루이즈 공주 (Princess Louise, Duchess of Argyll) |
1848년 3월 18일 | 1939년 12월 3일 | 제9대 아가일 공작 존 캠벨 |
3남 |
코넛과 스트래선 공작 아서 왕자 (Prince Arthur, Duke of Connaught and Strathearn) |
1850년 5월 1일 | 1942년 1월 16일 |
프로이센의 루이제 마르가레테 공주 슬하 1남 2녀[48] |
4남 |
올버니 공작 레오폴드 왕자 (Prince Leopold, Duke of Albany) |
1853년 4월 7일 | 1884년 3월 28일 |
발데크피르몬트의 헬레네 공녀 슬하 1남 1녀[49] |
5녀 |
바텐베르크의 하인리히 공자비 베아트리스 (Beatrice, Princess Henry of Battenberg) |
1857년 4월 14일 | 1944년 10월 26일 |
바텐베르크의 하인리히 공자 슬하 3남 1녀[50] |
앨버트 공과의 사이에서 4남 5녀를 낳았다.[51] 그 자녀들이 당대 유럽 왕가들과 혼인을 맺어서[52] 유럽의 많은 왕실[53]이 빅토리아 여왕의 피를 잇게 되었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유럽의 할머니. 자녀가 9명, 손주는 42명이고 증손주는 85명에 달하니 결코 빈말이 아니다.(…) 현재 영국[54] 왕실을 비롯하여 노르웨이[55], 스웨덴[56], 덴마크[57], 스페인[58] 국왕이 모두 그녀의 후손들이다.
5.3. 남편과의 순애보
남편 앨버트 공과의 사랑이 널리 알려져 있다. 빅토리아가 발랄한 성격이었던 반면 앨버트는 과묵한 편으로 성격 차이가 컸지만 둘 사이의 유대감은 어느 누구보다도 강했다고 한다. 둘 사이의 금슬은 무척 각별해 20년 간의 결혼 생활 동안 무려 9명의 자녀를 낳았다. 결혼 기간의 반은 임신 기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빅토리아는 앨버트 공의 머리카락이 담긴 장신구를 달고 다녔는데 이게 유행이 되어 죽은 자를 기리기 위해 머리카락을 담은 장신구를 다는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앨버트 공이 장티푸스로 죽은 뒤[59] 빅토리아 자신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40년 동안 남편을 기리는 의미로 매일 고인의 옷을 펼쳐놓고 언제나 검은 옷만을 입었다. 이 때문에 검은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 하얀 레이스를 얹은 모습이 빅토리아 여왕의 특징처럼 굳어진다.
뿐만 아니라 여왕은 윈저 성에서 앨버트 공이 임종을 맞은 침실을 그대로 보존했으며 잠자리에 들 때도 앨버트 공이 생전에 입던 옷 등 유품을 곁에 놓았다고 한다.
남편 앨버트 공의 죽음이 빅토리아 여왕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는 두 사람이 결혼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 1세[60]에게 쓴 편지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저의 행복은 끝났습니다. 제게 이 세상은 없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앨버트 공은 빅토리아 여왕을 번쩍 들어서 집무실에서 침실로, 침실에서 집무실로 데려다 주었다는데 아무리 앨버트 공이 건장한 남자였다고 해도 이건 분명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앨버트 공 사후 존 브라운이라는 하인이 이 역할을 대신했는데,
존 브라운이 앨버트 공의 외모를 닮기도 해서 잠깐 동안 스캔들이 퍼지기도 했다.[61]두 사람 사이의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어느 날 둘이 부부싸움을 하고는 앨버트 공이 너무 화가 나 방에 틀어박혔다. 빅토리아 여왕이 화해할 목적으로 노크를 하자 앨버트 공이 누구냐고 물었고, 빅토리아 여왕이 '영국의 여왕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두번째로 노크를 하고 '빅토리아 입니다'라고 대답해도 앨버트 공은 문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세번째로 여왕이 노크를 하고 '당신의 아내예요'라고 대답하자 기쁘게 문을 열었다고 한다. 카푸친 교회 문서와 오토 폰 합스부르크 문서에도 나와 있는 합스부르크 가문 장례식이 연상되기도 하는 부분.
6. 평가
영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산업, 군사 등 다방면에서 엄청난 변혁이 있었던 여왕의 64년 치세는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로 불린다. 이 시대는 고전적이면서 보수적인 도덕주의, 엄숙주의와 더불어 허영과 위선 같은 상반된 면모가 병존하던 때로 기억된다.이전 국왕들과는 달리 사생활에서 매우 엄격한 도덕 주의를 추구한 여왕의 영향으로, 귀족 부인이 누군가와 스캔들이 있다는 소문이 나면 그 여성은 살롱에 출입할 수 없었고 남성 귀족들은 자신의 정부를 가정부라 속였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만 그런 거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할 거 다 하면서(...)도 그걸 드러내지 않고 더욱 은밀하게 숨긴, 속되게 표현하면 위선의 시대였다.
즉, 귀국에서 가져간 부는 모두
중국인의 정당한 몫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무슨 권리로 중국인을 해치는 약을 사용하는 것입니까?
그들이 고의로 우리에게 해를 입힌 것이 아닐지언정, 탐욕스럽게 이득을 갈구하는 그들은 타인을 해친다 하여도 상관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질문을 허락하신다면 묻겠습니다.
폐하의 양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임칙서가 빅토리아 여왕에게 보내는 편지의 일부.[62]
그런데 그들은 무슨 권리로 중국인을 해치는 약을 사용하는 것입니까?
그들이 고의로 우리에게 해를 입힌 것이 아닐지언정, 탐욕스럽게 이득을 갈구하는 그들은 타인을 해친다 하여도 상관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질문을 허락하신다면 묻겠습니다.
폐하의 양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임칙서가 빅토리아 여왕에게 보내는 편지의 일부.[62]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은 국제적으로 최전성기를 누렸으나 그것은 다시 말해 아시아, 아프리카 등 제3세계의 수억 명의 사람들이 영국에 의해 고통받았음을 의미한다.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한 수많은 국가들의 국민들은 나라를 잃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
또한 산업 혁명의 여파로 극심한 가난과 고된 노동 속에서 고통받던 노동자들이 뭉친 차티스트 운동의 전성기도 빅토리아 시대였다. 이들은 노동자들의 참정권, 선거권을 요구했으나 군홧발에 짓밟혔다. 그래도 노동자들의 요구를 계속 무시할 수는 없었고 결국 노동자들도 선거권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는 남성에 한해서였고 여성이 선거권을 가지게 되는 건 제1차 세계 대전 이후로 가야 한다. 빅토리아 여왕은 여왕으로서 권력을 휘두르는 여성임에도 정작 여성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다.[63]
산업 및 기술 또한 이 시대에 발전했지만, 이후 영국 자동차 산업이 몰락하는 계기가 되는 적기조례가 제정되기도 하였다.
7. 여담
7.1. 혈우병
역사적으로 유명한 혈우병 보인자다. 이로 인해 유럽 왕실이나 귀족 가문들이 골치를 앓았고 심하면 가문이 단절되기도 했다. 이 중에는 후일 국제 정세적으로 영국의 적국이 되는 나라들도 있었기에 우스갯소리로 '혈우병으로 적 왕가의 씨를 말린 영국의 진정한 최종 병기'라고 불리기도 한다.가장 유명한 곳이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 니콜라이 2세와 결혼한 헤센의 알릭스 공녀는 빅토리아의 외손녀로서 혈우병 유전자를 물려받았고, 다섯 자녀들 중 유일한 아들로서 황태자였던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가 혈우병을 갖고 태어나고 만다. 이 때문에 황태자의 혈우병을 치료한답시고 그리고리 라스푸틴이 등용되어 득세하고, 결국 제국이 혁명으로 멸망하며 황실 직계인 니콜라이 2세 부부와 자녀들 그리고 러시아 황족들 상당수가 총살당하는 어마어마한 나비효과가 일어났다. 한 마디로 빅토리아 여왕의 유전자 때문에 러시아 제국이 멸망한 셈.[64] 그나마 로마노프 왕조는 당대 끝판왕 수준의 아들부자여서 직계는 끊겼어도 후손 자체가 아예 단절되지는 않았지만. 공교롭게도 이 시기 러시아 제국과 대영제국은 유라시아 패권을 두고 서로 다투던 사이라, 라이벌 국가의 황실을 여왕께서 혈우병으로 때려잡은 셈이 되었다.[65]
스페인 왕실인 보르본 왕조도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이자 혈우병 보인자인 빅토리아 유지니 왕비가 알폰소 13세와 결혼하면서 혈우병이 퍼졌다. 그래서 알폰소 13세는 스페인 왕실에 혈우병을 퍼뜨렸다며, 아내인 빅토리아 유지니는 물론 빅토리아 여왕까지 깠다. 웃긴 건 정작 빅토리아 유지니 왕비는 결혼 전부터 알폰소에게 자신이 혈우병 보인자일 수도 있다는 것을 여러 번 밝혔고, 알폰소의 가족들부터 빅토리아 유지니의 가족들까지 결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라며 말렸지만 알폰소 13세 본인이 밀어붙여서 결혼한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도 로마노프 왕조 직계나 테크 가문과 달리 알폰소와 빅토리아 유지니의 차남 세고비아 공작 인판테 하이메와 사남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이 아들을 낳아서 왕조가 단절되지는 않았다.[66]
둘째 손자인 조지 5세의 처가, 즉 사돈 되는 테크의 메리 집안 역시 여왕께서 혈우병 유전으로 본의 아니게 남계 후손 단절에 한 몫을 했다. 어찌 된 거냐 하면 빅토리아 여왕의 친손녀이자 혈우병 보인자였던 올버니의 앨리스 공녀가 테크의 메리의 막내 남동생인 알렉산더 케임브리지와 결혼했기 때문. 둘 사이에는 2남 1녀가 태어났으나 장남 루퍼트는 혈우병 탓에 1928년 교통사고로 인한 뇌출혈로 요절했고 차남도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죽어 알렉산더와 앨리스의 남계 혈통은 끊겼다. 하필이면 알렉산더의 형들도 아들들을 일찍 잃거나 아예 자식이 없었는데,[67] 알렉산더마저 혈우병의 영향으로 아들을 모두 일찍 잃는 바람에 결국 테크 가문의 남계 후손이 아예 끊기고 만다.
고등학교 생물 교과서에서 유전병 관련해서 자주 언급된다. 여왕의 부모와 남편 모두 혈우병 보인자가 아니어서 여왕의 어머니 켄트 공작부인이 불륜을 저지른 게 아니냐는 의혹도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돌연변이로 보고 있다.[68] 여왕의 자식들 중 차녀 앨리스와 4남 레오폴드, 5녀 베아트리스가 혈우병을 물려받았다.
바텐베르크의 빅토리아 유지니 공녀의 4남 곤살로 왕자(1914 ~ 1934) 이후로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들 중 혈우병 환자는 현재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다만 아주 미미한 확률로 차후에도 빅토리아 여왕의 여계 후손이 아들을 낳는다면 혈우병 환자가 다시 나타날 수도 있다.
7.2. 외모지상주의
외모지상주의자로 유명하다.[69] 남편 앨버트 공의 외모에 반해 사랑에 빠진 것은 유명하고 미인으로 유명한 증손녀인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70]를 우리 예쁜 앨리스라고 부르며 매우 아꼈다고 한다. 앨리스는 여왕의 손자인 조지 5세의 결혼식 때 신부 들러리를 섰는데 여왕이 직접 들러리로 앨리스를 지목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 일기장에 여왕은 앨리스가 아주 예뻤다고 적어놓았다.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를 남편 엘버트 공 다음으로 매력적인 남자라고 평한 바 있다.
1839년 봄에는 러시아의 체사레비치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를 만나서 함께 춤을 춘 적도 있었다.[71] 빅토리아 여왕은 자신의 일기에 '알렉산드르는 굉장히 매력적인 남자였으며, 그와 함께 한 시간이 매우 즐거웠다.'고 서술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깊은 호감을 느꼈지만 국가적으로 볼 때 두 사람의 결혼은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72] 설령 이루어지더라도 대영제국과 러시아 제국은 서로 세계의 패권을 두고 싸우는 사이였으며, 이는 양국에게 매우 부담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감정을 정리했다.[73]
7.3. 친조부모보다 가까운 외할머니
특이하게도 당대 공주들은 타국의 왕실로 시집가면 친정과 연락을 주고받기는 하지만, 친정에까지 자주 방문하지 않으며 자녀들도 친정으로 잘 데리고 가지 않는다. 그러나 빅토리아 여왕은 본인이 군주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시집간 딸들과 편지를 굉장히 많이 주고 받았으며, 여왕의 딸들 역시 본인의 자녀들을 데리고 영국에 방문하면서 빅토리아 여왕과 자주 만나고 교류했다. 그래서 빅토리아의 외손주들이 친조부모보다 외할머니 빅토리아와 더 가까웠다. 특히 외손녀들이 그런 경향이 강했다.장녀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의 자녀들은 나이별로 두 그룹으로 나뉘었는데 첫째 빌헬름 2세, 둘째 샤를로테, 셋째 하인리히는 어머니 빅토리아가 양육을 잘 못해서 이를 보다 못한 친조부모인 빌헬름 1세와 아우구스타 황후가 데려다가 직접 양육했다. 그래서 세 자녀는 친조부모와 가까웠고 친조부모도 빌헬름, 샤를로테, 하인리히만 예뻐했다. 반면 나중에 태어난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의 자녀들인 빅토리아, 조피, 마르가레테는 친조부모가 찬밥 취급했고 이 세 딸들은 반대로 어머니 빅토리아와 외할머니 빅토리아 여왕과 더 가까웠다.
차녀 헤센의 대공비 앨리스는 독일로 시집간 뒤에도 생활 방식과 자식들의 교육 방법을 영국식으로 고수했기 때문에, 앨리스의 딸들인 빅토리아, 엘리자베트, 이레네, 알릭스는 어릴 때부터 외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과 외가인 영국 왕실과 긴밀하게 지냈다. 특히 최초로 영국에서 태어난 손녀이자 이름부터가 외할머니에게서 따온 앨리스의 장녀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가 여왕의 총애를 많이 받았다. 이후 어머니 앨리스를 디프테리아로 안타깝게 잃은 빅토리아 공녀에게 여왕이 지속적으로 편지를 보내며 조언하고 위로해주면서 더욱 친밀해졌고, 여왕과의 관계는 조손보다는 모녀 관계에 가까워서 빅토리아 공녀는 자신이 정서적으로는 영국인이라고 느끼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는 어머니 사후 외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은 앨리스의 다른 딸들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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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유지니와 빅토리아 여왕 |
7.4. 기타
- "We are not amused(짐은 즐겁지 않느니라)"[74]라는 말을 자주 했다는 설이 유명한데 그 진위는 불확실하다. 영국 드라마 닥터후에서 빅토리아 여왕을 직접 만난 로즈 타일러가 계속 이 말을 유도하려는 장면이 나온다.
- 어머니였던 켄트 공작부인 빅토리아에게 모유수유를 받았다. 당시 상류층이 유모를 고용하던 관습을 생각하면, 매우 혁신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여왕은 모유 수유에 부정적이었으며 딸들이 아기들에게 모유를 주자 딸들이 젖소가 되었다고 한탄했다.
- 후손들이 태어나면 자신의 이름인 빅토리아와 남편의 이름인 앨버트로 이름 지을 것을 강요했다고 한다. 차녀 앨리스 공주의 장녀인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를 아꼈던 이유 중 하나가 자신의 이름을 딴 빅토리아로 이름이 지어졌기 때문이었다. 또한 둘째 증손자 조지 6세가 태어났을 때에는 앨버트 공의 기일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부모인 조지 5세와 테크의 메리가 아이 이름을 앨버트라고 짓자 그제서야 반색을 하고 예뻐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후손들의 이름에 앨버트나 빅토리아가 들어가는 것에 대해 집착했다. 장손 클래런스와 애번데일 공작 앨버트 빅터 왕자의 이름은 아예 앨버트와 빅토리아의 이름 조합으로 본인이 지었다.
- 1832년부터 죽기 열흘 전까지 일기를 빼놓지 않고 썼는데 2번에 걸쳐 이를 출판하기도 했다. 지근거리에서 비서 역할을 하던 막내딸 베아트리스 공주는 여왕 사망 이후 일기의 내용을 편집하면서 어머니의 체통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사적인 부분은 따로 골라내 남김 없이 불태워버렸다. 그럼에도 현존하는 일기의 양은 꽤 많은 편. 2012년 5월 24일, 영국 왕실이 여왕 탄생 193주년을 맞아 여왕이 생전에 쓴 개인 일기 전량에 대한 인터넷 열람 서비스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빅토리아 여왕 일대기 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한국어 번역본
- 총을 구입한 적이 있다. 1838년에 제임스 퍼디 & 손즈의 권총 한 쌍을 구매했다는 기록이 있다.
-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어 1838년에 토머스 에드워드 존스라는 14세 소년이 버킹엄 궁전에 몰래 들어와 여왕의 편지나 팬티 등을 훔쳐 자신의 바지주머니에 넣어서 빠져나가다 들키는 소란이 있기도 했으나, 놀랍게도 무죄를 선고받았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이 소년은 1840년에도 두 차례나 왕궁에 침입했다. 심지어 첫 침입에서는 들키지도 않고 빠져나가는 데 성공했으나, 둘째 침입에서 여왕의 탈의실 소파 밑에 숨어있다가 여왕의 유모 레첸 여남작에게 들켜서 체포되었다. 이번에는 소년의 아버지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처벌을 받긴 했으나, 놀랍게도 그 내용은 고작 소년원 3개월. 이후에도 정신을 못 차린 이 소년은 소년원에서 출소한 지 2주도 안 되어 1841년에 왕족 주거지에 또 침입했다가 징역 3개월의 처분을 받고 복역한다. 하지만 이후에도 출입금지 상태가 된 버킹엄 궁전에서 배회하다가 해군에 강제 입대되어 복역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노년에는 호주로 건너가 퍼스의 포고자(Town Crier)로 일했다고 한다.
- 1840년 6월 10일 앨버트 공과 함께 모친을 보러 마차에 타고 있던 중[75], 에드워드 옥스퍼드라는 18세 청년에게 암살을 당할 뻔한 적이 있다. 총 두 발을 쐈는데 빗나가거나, 한 발은 본인 주장에 따르면 불발되었다고 한다. 옥스퍼드는 이후 오스트레일리아로 유배되어 1900년에 사망했다.
- 어렸을 때 중병을 앓다가 낫게 해준 의사가 내린 건강 지침을 평생 동안 철칙으로 삼았는데 그건 바로 춥게 지낼 것. 따뜻함은 사람을 나태하게 만들지만 추위는 정신을 맑게 하고 긴장감을 유지시켜 사람을 최적의 상태로 만든다는 조언을 충실히 지켰는데, 문제는 겨울에도 창문을 활짝 열어놓는 건 다반사였고 비바람이 불 때 산책하길 좋아한 것이다. 물론 여왕 본인은 80살 넘게 건강했지만 여왕을 모시는 주변 사람들은.... 특히 언제나 여왕 곁에서 지내며 시중을 들던 막내딸 베아트리스 공주는 30대에 류마티스 관절염에 걸려 따뜻한 지방으로 요양을 갔는데, 그녀 없이는 못 산다던 여왕은 따뜻한 곳에 같이 가는 게 싫어서 어쩔 수 없이 베아트리스 공주의 요양을 허락했다.
- 대영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어간 군주라서 그런지 영연방의 도시들 중 상당수가 여왕의 이름을 따서 빅토리아라 명명했다.
- 역대 영국 군주 중 최초로 공식 사진이 남은 인물이기도 한데, 실제로 그녀가 찍은 최초의 사진은 1844년~ 1845년 무렵에 장녀 빅토리아와 같이 찍은 사진이다. 빅토리아 여왕 최초의 사진 다만 그녀는 1842년에 첫 사진을 찍은 프랑스의 루이필리프 1세는 커녕 1843년에 첫 사진을 찍은 미국의 존 퀸시 애덤스[77]보다도 첫 사진을 늦게 남겼다.
- 열강이 청나라를 갈라먹기 위해 서로 이전투구를 벌이는 풍자화에서 청나라를 갈라먹으려고 독일의 빌헬름 2세,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와 서로 대립하는 모습으로 나오기도 했다. 저 두 황제는 모두 빅토리아의 손주뻘이기도 한데, 빌헬름 2세는 빅토리아의 장녀이자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의 장남이기에 외손자이다. 또 니콜라이 2세는 빅토리아의 차녀 영국의 앨리스 공주의 4녀인 헤센의 알릭스 공녀의 남편이라 외손녀사위인 데다, 어머니 덴마크의 다우마 공주가 빅토리아의 맏며느리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의 동생이라[78] 외가 쪽으로는 사돈 집안이기도 했다.[79] 그러니까 이 그림은 할머니와 외손자와 외손녀사위가 서로 청나라를 두고 싸우는 꼴. 다만 청나라 땅이 너무 큰 데다 유럽에서 저 멀리 떨어져 있었던 탓에 열강들 입장에서는 아쉽게도(청나라 입장에서는 그나마 다행히도) 폴란드처럼 갈라먹지는 못했다.[80]
- 현손녀 엘리자베스 2세의 손녀 요크의 베아트리스 공녀가 빅토리아 여왕의 젊은 시절 모습과 닮았다.
8. 대중매체
빅토리아 시대가 영국이 세계를 주름잡던 시절을 상징하다 보니 '산업화가 왕성하게 일어나 사회가 급속하게 발전하고, 제국주의적 팽창이 미화되고, 상류층과 하류층의 격차가 뚜렷하고, 사회 분위기가 어딘가 어두우면서 엄숙한데 여왕이 다스리는 시대'라는 서브컬처 내의 묘사가 있으면 십중팔구는 빅토리아 시대를 모델로 삼았을 가능성이 높다. 고전적한 가구 및 벽지와 함께하는 마차와 증기 기관은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상징이자 아이덴티티.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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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스 브라운》 (1997):
주디 덴치
앨버트 공 사망 후 우울에 빠졌던 빅토리아가 시종 존 브라운과의 교감을 통해 우울에서 벗어난다는 내용.
* 《 80일간의 세계일주》(2004): 캐시 베이츠
성룡의 괴작 80일간의 세계일주에서 타이타닉, 미저리로 유명한 캐시 베이츠가 분했다.
}}} ||* 《 80일간의 세계일주》(2004): 캐시 베이츠
성룡의 괴작 80일간의 세계일주에서 타이타닉, 미저리로 유명한 캐시 베이츠가 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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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빅토리아》 (2009):
에밀리 블런트
남편인
앨버트 공과의 사랑과 결혼을 중심으로 그의 즉위 전 ~ 신혼 초의 삶을 영화화했다. 호화스런 의상과 배경이 아름다운 영화이다. 고증은 상당히 잘 되어있는데 일부 세부묘사와 엔딩이 실제와 좀 다르다. 영화에서 앨버트 공이 빅토리아 여왕과 마차를 타고 가는 과정에서 앨버트 공이 괴한의 총에 맞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 앨버트 공은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 《 빅토리아 & 압둘》 (2017): 주디 덴치
}}} ||* 《 빅토리아 & 압둘》 (2017): 주디 덴치
여왕과 인도인 시종 간의 인간적 교감을 다룬 내용이다. 시종인 압둘로 인해 왕태자와 공주들과 친척들 그리고 정부인사들과 하인 하녀들이 두 사람의 친근함을 당연히 못마땅해 한다. 그럼에도 인도식으로 저택을 꾸미고 지방 별장으로 데려가는 등의 행보를 보이자 여왕에게 대놓고 압둘의 민족과 출신을 내세워서 내치려고 하는 등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오며 이런 일이 지속되자 잠시 멀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다시 친하게 지내게 되고, 이후에도 주변 사람들이 계속 방해하다가
아들이 엄마 계속 이러시면 정신 문제로 삼을 수 있다는 무례한 말투로 말하는데, 여왕도 자신의 위치를 말하고 너도 확실히 치워버릴 수 있다 라고 말하자 아들이 어머니의 기세에 눌리는 등 확실하게 화를 내면서 기싸움을 하는 등 날카로운 모습도 보인다. 20년 전 미세스 브라운에서 빅토리아 여왕을 맡은 주디 덴치의 또 다른 빅토리아 여왕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 《 위대한 쇼맨》 (2017): 게일 랜킨
바넘 일행이 버킹엄 궁전을 방문하였을 때 잠깐 출연한다.
* 《 위대한 쇼맨》 (2017): 게일 랜킨
바넘 일행이 버킹엄 궁전을 방문하였을 때 잠깐 출연한다.
드라마
-
《
빅토리아》 (2016 ~ 2019):
제나 콜먼
여왕의 즉위 직전부터 시작하여 즉위 초를 다루고 있다. 참고로 제나 콜먼은 닥터후에서 클라라 오스왈드 역을 맡은 적 있는 배우인데, 아래 문단에서 나오는 닥터후와 빅토리아의 연관을 생각하면 재미 있는 우연이다.[81] -
《
닥터후》 (2005): 폴린 콜린스[82]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영국의
SF
드라마(
영드)
닥터후의
뉴 시즌 2 에피소드 2 <Tooth & Claw>에 등장한다. 여행을 하던 도중
닥터와
로즈 타일러를 만나 철로가 막히는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근처의 토치우드 저택에서 묵게 되고, 그 날 밤 거기에
늑대인간들이 나타나 위기에 빠지지만
10대 닥터와 로즈로 인해 그 사태를 겨우 피한다. 하지만 목숨이 위급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사건을 해결하려는 두 사람이 마치 이 사태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면서 두 사람을 쫓아내고는 외계의 위협으로부터
대영제국의 안녕을 지키기 위해
토치우드 연구소를 설립한다. 이때 몸에 상처를 입는데, 이것이 늑대인간에게 물린 것인지 그냥 어딘가에 긁힌 것인지 애매하게 떡밥을 남긴다. 닥터는 '빅토리아의
혈우병이 너무 갑작스럽게 생긴 걸 보면 그녀의 가족과 후손들에게 발병한 혈우병도 사실 빅토리아가 그들을 물어서 늑대인간으로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한다. 그런데 위에서도 말했지만, 빅토리아는 영국에서 나름대로 위인 대접을 받는 왕인데 이 드라마는 영국 드라마다.[83]
만화
-
《
흑집사》
자세한 내용은 빅토리아 여왕(흑집사) 문서 참고하십시오. -
《
레이디 디텍티브》
시대적 배경이 빅토리아 시대인덕에 본작에서도 직접 등장한다. 여기서는 남주인공인 에드윈의 인생 멘토로 활약한다. 본인보다 높은 신분의 아내였던 빅토리아 여왕을 내조했던 남편 앨버트 공과 비슷한 처지인 에드윈에게 인생선배로써 조언해주는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이렇게 에드윈을 각별히 여기는 이유는 남편 앨버트 공의 유일한 절친의 양자가 바로 에드윈이였기 때문. 게다가 에드윈은 과거 앨버트 공의 후원도 받으면서 자랐기에, 그에게서 사랑했던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인간적 면모도 보여준다. 또한 앨버트 공과 비슷한 처지 때문에 불안에 떨던 에드윈에게 약혼자 리지가 얼마나 에드윈을 의지하고있는지를 상기시켜주는 등, 그의 멘토를 자처하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게임
-
《
랑펠로》
시간을 아주 끌면 1830~40년경에 영국에서 예비사관으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AABBBBBC 로 후반기 사관들 중 가장 좋으며 게임 전체를 통틀어서도 최상위권 사관이다. 다만 빅토리아가 사관할 즈음에는 장군이 너무 부족하여 통일하고도 공백지때문에 관리가 골치아픈 시기라서 이 시기까지 게임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
《
어쌔신 크리드: 신디케이트》
제이콥 프라이가 트레일러에서 자본가들이 빅토리아 여왕의 재산보다 더 많은 돈을 숨겨두었다고 까기도 했다. 에덴의 조각 수의를 노린 템플기사단 그랜드마스터 크로포드 스타릭에게 암살당할 뻔했지만, 암살단 프라이 남매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다. -
《
Victoria 시리즈》
제국주의가 만연했던 1836년부터 1936년까지의 시대를 나타내는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이 게임의 이름이 이 항목의 인물을 담고 있다. -
《
시드 마이어의 문명》
4, 6에 등장. 영국 문명 지도자로 등장한다. -
《
도미네이션즈》
빅토리아 여왕의 브로치가 유물로 등장한다. -
《
메이지 디 어센션》
오더 오브 리즌의 수장이자, 오더 오브 리즌을 현대의 테크노크라시로 재구성한 위대한 테크노크라트로 묘사된다. 부군인 앨버트 공 또한 오드 오브 리즌의 2인자이자 위대한 테크노크라트였고 빅토리아와 뜻을 같이했다. 이후 앨버트 공이 요절하자 테크노크라시를 부군의 유산으로 받아들이고 테크노크라시의 사상적 방향과 초창기 정책을 계속 조율했다. -
《
Fallen London》
앨버트 공을 되살리기 위해 런던을 심연의 존재에게 바쳐 런던이 심연으로 떨어지게 한 장본인이다. 그래서 게임 내 현재에서는 배신자 여제(Traitor Empress)라 불린다. 이후 Sunless Sea에서 심연에 박혀있었던 런던은 빅토리아 여왕의 지도하에 떠올려져 Sunless Skies 시점에서는 천상의 도시가 된다. -
《
대역전재판 시리즈》
직접 등장은 없지만 작중 배경이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시기이므로 간접적으로 언급된다. 법정 개정 시 '여왕 폐하의 이름 아래 개정한다'고 선언을 외치거나 극비 재판이 여왕의 입회 아래 이루어졌다고 나오는 식. 마지막 최종장에서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간접적으로 작품 전개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2편 영문판에는 Vicky란 단어가 대놓고 나온다. 외국 스트리머 실시간 채팅을 보면 이 단어가 나올 때 빵 터지면서 모두들 Vicky를 연호한다.
소설
-
《
셜록 홈즈 시리즈》
셜록 홈즈의 유명한 습관 중 하나는 벽에 총을 쏴 V.R(Victoria Regina)글자를 새기는 것이다. 셜록 홈즈가 빅토리아 시대에 전성기를 보낸데다[84] 형 마이크로프트는 정부에서 일하다보니 셜록 홈즈 2차 창작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
《
죽은 자의 제국》
빅토리아 여왕의 치세가 시대적 배경이다. 여기서는 시체를 되살려내 살아있는 인간 대신 노동자나 군인으로 이용함으로써 사회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애니메이션에서는 부각되지 않았지만 소설에서는 시체를 죽은 자로 소생시킬 때 남성만을 사용한다. 여성을 이용한 죽은 자가 금기시된 이유는 대영제국의 최고권력자가 바로 빅토리아 여왕, 즉, 여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존 H. 왓슨이 봄베이에서 여성인 죽은 자를 보고 크게 놀라기도 한다. -
《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
주인공의 대단한 행동들로 인하여 역사의 흐름을 완전히 변했으며 그 결과로 살아생전에 세계대전을 보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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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1353b4,#1353b4>역임 지위 | <colbgcolor=#fff,#1f2023> 영국 여왕( 인도 제국 여제 · 캐나다 여왕 · 호주 여왕) · 영국 왕실 수장 | |
생애 | 생애 | ||
재위 시기 | 빅토리아 시대( 연표) | ||
가족 관계 |
가족 관계 아버지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 · 어머니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 공녀 · 배우자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자 앨버트 · 장녀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 장남 에드워드 7세 · 차녀 영국의 앨리스 공주 · 차남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알프레트 · 3녀 영국의 헬레나 공주 · 4녀 영국의 루이즈 공주 · 3남 코넛과 스트래선 공작 아서 왕자 · 4남 올버니 공작 레오폴드 왕자 · 5녀 영국의 베아트리스 공주 |
||
기타 | 대영제국 · 하노버 왕조 · 빅토리아 섬 · 빅토리아주 · 퀸즐랜드 · 빅토리아 폭포 · 빅토리아 호 · 빅토리아 수련 · 빅토리아 공원 · 런던 빅토리아 역 · 빅토리아 선 · 빅토리아 & 압둘 · 빅토리아(드라마) · 코이누르 · 빅토리아 · 빅토리아시티 |
[1]
영국 국왕은 잉글랜드에서는 성공회 신자로,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회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며,
빅토리아 여왕 시대부터 왕족이
밸모럴 성에 거주할 때는
크래디 커크에서 예배하는 전통이 시작되었다.
#
[2]
당대 영국 여자 평균키보다 작았다. 그래서인지 자녀들도 키가 좀 작은 편이다. 반대로 남편 앨버트는 키가 180cm의 장신이다.
[3]
빅토리아 여왕의 특징을 묘사하면 키가 작고 뚱뚱하다.라는 평가는 꼭 들어간다. 실제로 빅토리아 여왕은 기름진 음식을 굉장히 좋아하고 운동을 싫어해서 하지 않은터라 50대에 들어서는 비만이 심해졌다. 50대 시절의 사진을 보면 청년 시절과 달리 비만이 심해졌음을 잘 알수 있다.
[4]
대영제국을 선두로 하여 여러 유럽 국가들의
제국주의와
기술발전이 절정에 달했던 이 시절을 아예 영국에서는
빅토리아 시대라 일컫기도 한다.
[5]
존재 자체가
대영제국의 상징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카이저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유사한 점이 많다.
[6]
노르만공 윌리엄의 이후로
스티븐,
존,
필립,
앤, 빅토리아가 동명이인이 없는 이름에 해당된다. 이 중 존은 평가가 매우 안 좋은 왕이라서 앞으로도 영국 역사상 같은 이름을 가진 왕이 다시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
[7]
엘리자베스 2세가 태어났을 때
조지 6세가 아이의 이름을 증조모의 이름인 빅토리아와 아내의 이름인 엘리자베스 중에서 무엇으로 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엘리자베스로 지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만약 빅토리아라고 이름을 지었으면, 빅토리아 2세가 되었을 수도 있다.
[8]
상기 두 개는
하노버 왕국의 공주이자 왕족으로서 받은 것이다.
[9]
상기 두 개는
작센코부르크고타의 통치가문 일족인
앨버트 공의 부인으로서 받은 것이다.
[10]
1794년에 태어난 아들, 1801년에 태어난 딸이 있었으나 모두 서자였다.
[11]
이 중 2남 프레더릭 왕자는 자식 없이 큰형보다 먼저 사망하면서 제외되었다.
[12]
이 서자의 후손 중 1명이
데이비드 캐머런이다.
[13]
어린 빅토리아의 손에 들린 그림은 1820년 1월 23일에 작고한 부친
에드워드 왕자의 초상화이다.
[14]
빅투아르 콘로이에 대해 알려진 바는 많이 없다. 빅투아르는 나름대로 빅토리아 여왕에게 상냥하게 대했으나, 빅토리아 여왕은 신분도 낮고 무엇보다 존 콘로이의 딸인 그녀를 싫어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콘로이는 자기 딸을 엄연한 왕녀였던 빅토리아 여왕과 동급이라고 생각하는 오만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 실제로 여왕의 놀이친구였다는 점이 프리미엄으로 작용해 준남작과 혼인할수 있었다고 한다.
[15]
콘로이를 지나치게 믿고 의존했던 공작부인은 후에 콘로이가 횡령을 저지른 사실 등을 뒤늦게 알자 잘못을 깨닫고 딸에게 용서를 구하기도 했다.
[16]
Henry Pelling의 1969년 저작《현대 영국사(Modern Britain) 1885-1955》
[17]
제2대 멜버른 자작으로, 27대·30대
영국 총리를 역임했다.
[18]
당시 59세
[19]
여왕이 앨버트 공 사후, 장녀
빅토리아 공주에게 보낸 편지에 "앨버트에게 모든 것을 의존했다. 그가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고, 사진이나 서류도 정리하지 않았고, 그가 동의하지 않으면 드레스를 입지도, 보닛을 쓰지도 않았다."고 적었다.
[20]
다 같은 궁궐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버킹엄 궁전은 국왕의 공식 거주지이자 업무 공간이고,
윈저 성은 왕실의 비공식 거주지이다.
[21]
맨 위의 대관식 초상화에서 쓰고 있는 것.
[22]
당대의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로, 아주 다양한 그림을 그렸는데 이 그림 이외에도 나무위키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만평으로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 항목에 실려 있는 비스마르크 퇴임 만평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테니얼이 아주 유명한 이유는
따로
있으니...
[23]
만평의 캡션에 "헌 왕관을 새 왕관으로 바꿔 드립니다!"(New crowns for old ones!)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쓰여 있기야 그렇지만 실제로는 바꾼 게 아니라 새로운 관을 추가한 것임에 유의.
[24]
아래 미디어 매체에 나온 것처럼
2017년에 영화화되기도 했다.
[25]
이렇게 유럽 국왕에게 비유럽 지역
식민지의 전통적인 황제 칭호를 부여해 격을 높이는 똥폼 방식은 나중에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가 따라했다. 무솔리니 시기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 제국을 침공했을 때 무솔리니가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에게 에티오피아 황제의 칭호를 바친 것. 하지만 국제사회가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지배를 인정하지 않아 대부분의 국가들은 그 황제 칭호를 인정해주진 않았다(…).
[26]
어머니와 이름이 같은
동명이인이다.
[27]
훗날의
프리드리히 3세
[28]
알다시피 영어에서 (그리고 대부분의 유럽어에서) 남성 군주의 배우자와 여성 군주의 칭호 형태는 동일하다. 즉, 여제와 황후의 표현이 동일한 것. 물론 굳이 구분을 하자면 Empress Consort라고 배우자임을 나타내주면 구분을 할 수 있긴 하다.
[29]
연합왕국(United Kingdom)은 본토에 한정해 쓰는 표현이다. 제국주의 시대에 영국 본토뿐만 아니라 본토 외 속령까지 아울러 부르던 명칭이 바로 대영제국(British Empire)이다. 한국에선 양자를 많이 혼동하지만 실제론 구별해야 하는 표현이다.
[30]
포르투갈령이었던
고아(Goa), 프랑스령이었던
퐁디셰리처럼 예외가 있긴 했다.
[31]
위 풍자화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32]
빅토리아 황후의 장녀
작센마이닝겐 공작부인 샤를로테의 외동딸이다.
[33]
여왕은 조명이 어둡기 때문이란 핑계를 대며 시력 저하를 인정하지 않았다.
[34]
이 기록은 훗날
엘리자베스 2세가 깼다.
[35]
현재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의 묘소는 보수공사로 인해 방문이 불가하다.
[36]
당시 배변의 편의를 위해 남자아이에게 드레스를 입히는 문화가 있어 치마를 입고있다.
[37]
오른쪽 인물.
[38]
빅토리아 여왕이 안고 있다.
[39]
왼쪽 인물.
[40]
조지 2세의 장남이다.
[41]
빌헬름 2세,
작센마이닝겐 공작부인 샤를로테,
하인리히 왕자,
샤움부르크리페의 아돌프 공자비 빅토리아,
그리스의 왕비 소피아,
헤센의 방백비 마르가레테 등
[42]
크리스티안 9세의 장녀이다.
[43]
클래런스와 애번데일 공작 앨버트 빅터 왕자,
조지 5세,
파이프 공작부인 루이즈 공주,
노르웨이의 메우드 왕비 등
[44]
밀포드 헤이븐 후작부인 빅토리아 마운트배튼,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표도로브나 대공비,
프로이센의 하인리히 왕자비 이레네,
헤센 대공 에른스트 루트비히,
러시아의 황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등
[45]
알렉산드르 2세의 차녀이다.
[46]
루마니아의 왕비 마리아,
러시아의 빅토리야 표도로브나 대공비,
갈리에라 공작부인 베아트리스 공주 등
[47]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 알베르트 등
[48]
스웨덴의 왕태자비 마르가레타 등
[49]
애슬론 백작부인 앨리스 공주,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카를 에두아르트.
[50]
스페인의 왕비 빅토리아 에우헤니아 등
[51]
빅토리아 여왕은 아이를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남편인 앨버트 공이 자식을 많이 갖기를 원했고, 남편이 원하는 거면 뭐든지 다 들어주고 싶은 빅토리아가 적극적으로 호응 해주면서 이렇게 많은 아이들을 낳게 된 것. 심지어 계속된 임신&출산 스트레스로 여왕의 과격한 성격이 갈수록 심해지자 주치의들이 더 이상 아이를 갖지 않기를 권유했지만 빅토리아 부부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52]
여왕은 딸들을 외국 왕실로 시집보내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장녀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와 차녀
앨리스는 남편
앨버트 공의 의사가 워낙 강해서(앨버트 공은 평생 동안 고향 땅
독일을 사랑하고 그리워했으며 독일의 통합을 꿈꾸었다.) 설득당했다고 한다. 3녀 이후로는 사위들에게 영국에서 평생 살 것을 조건으로 결혼을 허락했다. 근데 장녀 빅토리아와 차녀 앨리스가 정말 많은 자식을 낳은 데다 그 자식들이 또 다른 왕실과 통혼을 하면서 빅토리아 여왕의 혈통은 전 유럽의 왕실로 퍼져나갔다.
[53]
군소 공국을 제외하고 왕실만으로 따져도
독일,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러시아,
루마니아,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스페인에 이른다.
[54]
장남
에드워드 7세의 차남
조지 5세의 손녀의
엘리자베스 2세의 장남, 또는 차녀
앨리스 공주의 외손녀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의 아들
필립 공의 장남이
찰스 3세.
[55]
장남
에드워드 7세의 3녀
모드 공주의 손자가
하랄 5세.
[56]
3남 아서 왕자의 장녀
마거릿 공주의 손자, 또는 4남 레오폴드 왕자의 장남
카를 에두아르트의 외손자가
칼 16세 구스타프
[57]
3남 아서 왕자의 장녀
마거릿 공주의 증손이
프레데리크 10세
[58]
5녀 베아트리스 공주의 장녀 바텐베르크의 빅토리아 유지니의 증손, 또는 장녀
빅토리아의 3녀
조피의 증손, 또는 장녀
빅토리아의 장남
빌헬름 2세의 외손녀
프리데리케의 외손자가
펠리페 6세
[59]
아들
에드워드 7세 때문에 공이 42세의 나이로 일찍 죽었다는 설도 있다. 나이 20살이 되도록 주색잡기에 빠져 살던 큰아들 에드워드가 여왕과 다툰 후 가출하듯 별장으로 떠나고 앨버트 공이 아들을 훈계하기 위해 무리하게 따라나섰다가 비를 맞아
폐렴에 걸려 죽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여왕은 큰아들 에드워드를 죽는 순간까지 용서하지 않았다고 한다.
[60]
빅토리아에겐 외가 쪽으로, 앨버트 공에겐 친가 쪽으로 숙부가 되는 인물. 빅토리아의 사촌언니가 되는
조지 4세의 딸
샬럿 공주의 남편이기도 하다.
[61]
실제로 빅토리아 여왕의 관 안에 존 브라운의 사진을 넣었고, 그녀의 손에 브라운 어머니의 반지를 끼웠다고 한다. 그가 죽었을 때는 앨버트 공을 잃었을 때만큼 고통스럽다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62]
이 편지는 1840년 1월에
영국에 도착했으나,
영국 정부는 이 편지를 정식 외교문서로 인정하지 않았다.
[63]
재밌게도 훗날 철의 여인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마거릿 대처 역시 영국 역사상 첫 여성 총리였으며 엘리자베스 2세를 존경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 정치참여에 비판적이었다고 전해진다.
[64]
사실 이 무렵 러시아 제국은 라스푸틴이 득세하지 않았어도 언젠가는 무슨 일이 터졌을 만큼 속으로 곪아가던 상태라, 엄밀히 따지면 빅토리아에게서 유전된 혈우병은 러시아 제국 멸망의 '원인'이라기보다는 '방아쇠'라 할 만하다.
[65]
다만
러시아 황실 자체는
영국 왕실과 친척관계라,
러시아 혁명 때 로마노프 일가의 구출을 미적거려 결과적으로 그들이 몰살당하는 것을 막지 못한 걸
조지 5세는 두고두고 후회했으며, 이 때문에 나중에 그리스에서 쿠데타가 일어날 때 재빠르게 왕족들을 구출한다. 이 중에는 후일
영국의 국서가 되는 왕자님도 있었다.
[66]
빅토리아 유지니의 증손자가 현 스페인 국왕인
펠리페 6세다. 다만 펠리페 6세는 딸만 두 명인지라 남계후손이 이어지는 건 차남 하이메의 후손이다.
[67]
알렉산더의 큰형은 2남 2녀를 두었으나 장남은 외동딸만 둔 채 사망하고 차남은 전사했으며, 작은형은 아예 자녀도 없이 사망했다. 다만 형들은 혈우병과는 상관이 없었지만.
[68]
학설에 따르면 아버지의 나이가 많을 때 태어난 딸에게는 돌연변이로
혈우병 인자가 생길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한다. 빅토리아 여왕은 아버지가 50대일 때 태어난
늦둥이다. 영화나 게임의 영향 때문에 돌연변이라면 몸에 눈이 여러 개 달려 있거나 괴물같은 힘, 이상한 초능력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지만 일반적으로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기면 그냥 그 유전자가 생산하는 단백질이 기능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즉 혈우병 인자가 생긴다는 게 없는 인자가 생겨나는 게 아니고, 혈액응고 관련 단백질을 생산하는 유전자 중 하나에 돌연변이가 생겨 기능을 잃은 것. 나이가 많아질수록 유전체를 복제하는 과정에서 제대로 복제되지 않고 돌연변이가 생길 확률이 높아진다. 일례로
다운증후군의 경우 산모의 나이가 40대 이상의 노산일 경우 발병률이 급격히 치솟는다. 일각에서는
근친혼 때문에 혈우병이 발생한 것이 아니냐고 얘기하는 경우도 있으나, 그 이유는 아니다. 근친혼은 돌연변이의 위험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희귀 열성 인자의 발현 가능성을 높인다. 앨버트 공이 빅토리아 여왕의 외사촌이라 그런 오해가 생긴 것으로 추정되나, 혈우병 유전자는 빅토리아 여왕이 가지고 있었고 앨버트 공은 혈우병이 없었기 때문에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이 사촌관계인 사실은 혈우병과는 무관하다.
[69]
사실 이런 성격은 그 당시 여성, 그것도 군주에게는 매우 특이한 케이스였다. 왜냐하면 그 당시 왕족, 귀족들은 배우자의 외모와는 전혀 상관 없이 혼인을 맺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
[70]
외손녀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차녀
앨리스 공주의 장녀)의 장녀이자
엘리자베스 2세의 남편
필립 공의 어머니이다.
[71]
두 사람은 7촌이다.
[72]
알렉산드르의 아버지
니콜라이 1세는 "황후감이 필요하지 여왕의 남편이 될 필요는 없다."며 반대했다.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던 니콜라이의 입장에서 영국이 계속 시비걸고 방해했기 때문에 당연히 영국을 싫어했다.
[73]
이렇게 썸을 탔던 두 사람은 나중에 2대에 걸쳐서 사돈이 된다. 알렉산드르 2세의 딸
마리야와 빅토리아 여왕의 차남
알프레드 왕자가 결혼했고, 알렉산드르의 친손자
니콜라이 2세와 빅토리아의 외손녀
헤센의 알릭스 공녀가 결혼했고, 알렉산드르의 친손자인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과 빅토리아의 친손녀
작센코부르크고타의 빅토리아 멜리타 공녀가 결혼했다.
[74]
번역이 틀린 게 아니라 유럽에서 군주과
교황은 자신을 복수형으로 지칭한다. 이를 장엄복수형이라고 하며 유럽권에서 일반적이다. 고대 히브리어에서도
야훼를 언급할 때 신의 존함을 사용하는 것을 신성모독이라 여긴 나머지, 가장 드높여부르는 대명사로 우회해서 언급하고자 장엄복수형을 사용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75]
이때는
첫딸을 임신중이었다.
[76]
사실 오르톨랑 요리법은 현대식
푸아그라도 따위로 만드는 수준으로 극악무도하기로 악명이 높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77]
물론 사진을 찍었을 당시에는 전직 대통령 시점이었다. 참고로 애덤스가 대통령으로 집권하던 시기는 사진의 태동기 시절이라 인물 촬영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78]
즉 빅토리아의 장남 에드워드 7세가 니콜라이 2세의 이모부이다.
[79]
또한 니콜라이 2세는 빌헬름 2세와는 서로 7촌 지간이기도 하며 사적으로는 매우 가까웠던 사이이기도 하다.
[80]
후대에 대놓고
중국에 대한 합병을 목표로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도 같은 이유로 가장 승승장구할 때조차 중국의 동부 해안 지대만 간신히 차지했다.
[81]
여담으로 닥터후에서
11대 닥터 역으로 제나 콜먼과 호흡을 맞춘
맷 스미스는 다른 드라마에서
빅토리아의 현손녀의 남편이자 역시 빅토리아의 후손이기도 한
필립 마운트배튼 역을 맡았다는 것도 흥미로운 점이다.
[82]
해당 에피소드에서 빅토리아 여왕 역을 맡은
배우 폴린 콜린스(Pauline Collins)는 닥터후 올드 시즌에서 아역으로 등장한 경력이 있다고 한다.
기네스북에 등재된 최장기 방영 드라마의 위엄. 이후
뉴 시즌 10 에피소드 9 <화성의 여제(The Empress of Mars)>에서
화성에 간 영국군이 챙겨간
초상화로 등장하는데, 이 초상화 역시 폴린 콜린스를 모델로 했다.
[83]
한국으로 치면 대충 '정조대왕이 사실 도깨비였다' 같은 내용이라는 얘기다. 왕실과 역사적 인물 놀려먹기에 대한 거부감이 아시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면모를 잘 보여주는 부분.
[84]
빅토리아 여왕에게 사건 해결의 답례품을 받은 듯한 서술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