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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노프 왕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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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1세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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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d30><colcolor=#0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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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96년 7월 6일 | ||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현 가치나시 가치나 궁전 (現 러시아 북서 연방관구 레닌그라드주 가치나시 가치나 궁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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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55년 3월 2일 (향년 58세) | ||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 | |||
묘소 |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 | ||
재위기간 | 전러시아의 황제[1] | ||
1825년 12월 1일[2] ~ 1855년 3월 2일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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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d30><colcolor=#000> 가문 |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가문 | |
이름 |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로마노프 (Никола́й Па́влович Рома́но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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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파벨 1세 | ||
어머니 |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 | ||
형제자매 | 알렉산드르 1세, 콘스탄틴, 알렉산드라, 옐레나, 마리야, 예카테리나, 올가, 안나, 미하일 | ||
배우자 | 프로이센의 샤를로테 (1817년 결혼) | ||
자녀 | 알렉산드르 2세, 마리야, 올가, 알렉산드라, 콘스탄틴, 니콜라이, 미하일 | ||
종교 | 러시아 정교회 | ||
신체 | 189cm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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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제국의 11대 황제.궁정 쿠데타 시대를 종식시키고 러시아 제국을 "유럽의 헌병" 역할에 충실하게 한 황제로 사실상 오늘날 로마노프 왕조의 중시조다.
2. 생애
니콜라이 1세의 초상화들.
2.1. 어린시절
1796년 7월 6일 러시아 제국의 가치나 가치나 궁전에서 파벨 1세와 마리아 표도로브나의 4남 6녀 중 3남으로 태어났으며,[3] 알렉산드르 1세의 둘째 남동생이다. 전임 차르인 큰형 알렉산드르 1세와의 나이차는 무려 19살[4], 둘째형 콘스탄틴과도 17살이나 나며 둘 다 니콜라이에겐 삼촌뻘이었다. 둘째형 콘스탄틴과의 사이에서 누나가 6명이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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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1808년) |
친할아버지 표트르 3세와 아버지 파벨 1세는 추남인데다 키도 작았었다. 그러다가 파벨 1세가 장신에 미녀인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와 결혼하면서 둘 사이에 태어난 자녀들이 어머니의 외모를 물려받아서 미남미녀에 장신들이였다. 다만 어머니 조피 도로테아의 뛰어난 외모를 물려받은 자녀가 있는가 하면 추남 파벨 1세의 외모를 물려받은 자녀도 있어서 좀 갈렸다. 그 중 니콜라이 1세는 전자였다.
태어나고 얼마 안 가 전 유럽은 나폴레옹 전쟁을 겪었고 니콜라이 1세 역시 이를 겪게 된다. 다행이 큰 형 알렉산드르 1세가 황제로 있는 러시아를 비롯한 대프랑스동맹이 승리했다.
2.2.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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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의 샤를로테와의 결혼식을 묘사한 그림. |
이후 즉위하기 전인 대공 시절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장녀 프로이센의 샤를로테와 결혼했다. 러시아와 프로이센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더욱 친밀한 관계가 되면서 정치적 동맹을 위한 혼담이 오갔다. 이에 1814년에 알렉산드르 1세의 늦둥이 남동생들이었던 니콜라이와 미하일 대공이 프로이센으로 왔다. 프로이센 왕족과의 러시아 황족과의 혼담이 정해지면서 니콜라이 대공은 다시 프로이센으로 왔지만 이 두 번째 프로이센 방문에서 니콜라이 대공과 샤를로테 공주는 서로 사랑에 빠졌다.
1816년에 니콜라이 대공과 샤를로테 공주의 약혼이 발표되었다. 이듬해인 1817년에 샤를로테는 작은 오빠 빌헬름 왕자와 함께 러시아로 향했다. 1817년 7월 러시아에 도착한 샤를로테 공주는 정교회로 개종하고, 러시아식 이름인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로 개명했다. 이후 1817년 7월 13일[5]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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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1세 부부와 자녀들. |
아내 샤를로테와의 금슬은 매우 좋았으며 슬하 4남 4녀를 두었다.
2.3. 재위 초반
자세한 내용은 데카브리스트의 난 문서 참고하십시오.니콜라이 1세는 태어날 때부터 확고한 러시아의 황위계승자는 아니었다. 파벨 1세의 장남인데다 니콜라이보다 자그만치 19살이나 많은 큰 형 알렉산드르 1세가 건재한데다 둘째 형인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도 있었다. 파벨 1세의 사후 형들을 아버지처럼 모시고 의지하며 자란 데다 어리고 경험도 부족한 삼남 니콜라이가 황제가 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알렉산드르 1세가 딸만 낳으면서 후계자 문제가 부상하기 시작한다.[6] 이로 인해 다음 계승자는 둘째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으로 정해졌다. 콘스탄틴 대공은 일찍이 알렉산드르 1세를 견제한 아버지 파벨 1세에게 체사레비치(황태자를 의미하는 러시아어 단어) 지위를 받았기에, 그가 알렉산드르 1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는 것이 당연해보였다.
하지만 콘스탄틴 대공이 아내[7]와 이혼하고, 폴란드 귀족과 귀천상혼으로 재혼하면서 계승권이 박탈되자 후계 구도가 혼란스러워진다. 이미 알렉산드르 1세는 1820년에 공표만 안 했지 귀천상혼에서 태어난 후손들의 계승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법령을 정해 두었다. 콘스탄틴 본인도 별로 제위에 미련이 없어서 계승권을 포기하고 동생 니콜라이에게 양보한다. 그렇게 니콜라이가 형 알렉산드르 1세의 후계자가 된다. 데카브리스트들은 이 공백과 혼란기 때 봉기했는게 이게 바로 데카브리스트의 난이다.
문제는 정작 니콜라이는 이런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알렉산드르 1세가 1825년 겨울에 급사하고 신하들은 공식적 황태제인 콘스탄틴을 옹립했지만, 콘스탄틴 대공은 이를 거부했고 다음 순위인 니콜라이도 형을 뛰어넘어 즉위할 수 없다는 의사를 보였다. 이래서 3주동안 콘스탄틴 대공이 폴란드 총독으로 있던 바르샤바와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왔다갔다 하는 빵셔틀이 펼쳐진다. 콘스탄틴 대공이 막내 동생 미하일 대공을 자신의 대리인으로 수도에 파견하여, 니콜라이를 설득하면서 결국 니콜라이가 새 황제가 된다. 콘스탄틴 대공은 애초에 계승 의지도 없었고 데카브리스트의 제의도 처음부터 거부해서 처벌을 받지 않고 폴란드 총독 직을 계속 수행하다가 사망했다.
유럽의 기존 질서 유지에 철저한 역할을 담당해서 신성동맹을 유지시켰고 '유럽의 헌병'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1830년 프랑스에서 7월 혁명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폴란드에서도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했다. 1848년 2월 혁명이 일어나자 프랑스와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1849년 헝가리에서 합스부르크 왕조에 대항해 반란이 일어나자 합스부르크 왕가를 도와 이를 진압했었다.
이렇게 재위 기간 동안 '유럽의 헌병'으로서 유럽의 기존 질서 유지를 주장하며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탄압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선 것과 달리 아이러니하게도 재위 초에 일어난 그리스 독립 전쟁 때에는 그리스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 오스만 제국에 맞서 독립을 쟁취하려는 그리스 독립군을 도와 영국, 프랑스와 연합군을 결성하여 나바리노 해전에서 오스만 - 이집트 연합군을 격파하였고 이어 단독으로 오스만과 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둬 오스만이 그리스의 독립을 인정하게 만들면서 그리스가 오스만에게 독립을 쟁취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2.4. 과학과 예술의 황금기
알렉산드르 1세 시절 1802년 창설된 교육부(Министерство народного просвещения)는 군마다 기초학교(Училища), 시마다 김나지움(Гимназия), 학군(Учёбный огруг)마다 대학(Университете)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했고 이것은 니콜라이 1세의 시기에까지 이어진다. 키예프 , 모스크바, 빌뉴스 , 상트페테르부르크, 카잔, 하리코프, 데르페트 , 사라토프의 7개 대학교, 중등교육과 초등교육을 담당하는 수백개의 리케이온(Ликей)와 우칠리셰(Училище)가 이 두 황제들의 통치기에 세워졌다. 게다가 모스크바, 니즈니 노브고르트, 상트페테르부르크, 사라토프, 이르쿠츠크, 카잔, 아스트라한 등을 비롯한 주요도시들에서 여성학교가 설립되었으며 공용 도서관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대학은 큰 자율성을 부여받았고 정부의 교육기관에 대한 사소한 통제 시도 정도는 차단하거나 맞서 싸울 수 있었다. 1835년 채택된 교육 헌장은 교수의 물질적 지위를 크게 향상시켰고 이것은 점진적으로 중등, 초등 교육 기관의 교사에게도 확대되었다. 종합대학 말고도 기술대학, 예술대학, 건축대학, 농업대학, 수의과대학 등 전문단과대학들이 들어섰다.상트페테르부르크 과학 아카데미가 황제에게 청원한 결과 1839년 풀리코보 관측대(Пулковская обсерватория)가 세워졌다. 이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굴절 망원경을 포함한 최신설비들을 가지고 있었고 이후 수백개의 행성과 별을 포함하는 천체 목록과 천구좌표계를 작성하여 항해술과 천문학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니콜라이 로바쳅스키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하위분야인 쌍곡 기하학을 발견하였다. 니콜라이 지닌(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Зинин)이 여러 유기 화합물을 합성해내는데 성공하였고 이는 제약, 폭발물 개발 등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카잔 화학 학교를 설립하여 후학을 기르는데 힘썼다. 여기에 러시아 5인조 중 한 명이 되는 작곡가, 화학자 양쪽으로 유명한 알렉산드르 보로딘, 농화학자이자 사상가로도 이름을 날리는 알렉산드르 엔겔가르트(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Энгельгардт), 물리화학의 성립자 중 한명인 니콜라이 베케토프(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Бекетов), 화학 구조 이론을 제시한 알렉산드르 부트레로프(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Бутлеров)가 있었다. 이들은 후에 현대 화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드미트리 멘델레예프의 선구자가 되었다.
예술 및 문학 문야에서 니콜라이 1세 시기의 러시아 문학은 도스토옙스키의 존재만으로도 가치가 있었다. 알렉산드르 푸쉬킨과 니콜라이 고골이 개척한 현대 문학은 이반 투르게네프와 미하일 레르몬토프 등이 뒤를 이었고 음악에서는 미하일 글린카가 러시아 고전 음악의 길을 열었고 이는 후대에 활동할 표트르 차이콥스키와 '러시아 5인조'들이 이어받는다.
결과적으로 니콜라이 1세의 시대의 러시아는 문학, 음학, 미술 등의 예술 분야에서는 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애국주의, 민족주의 등 수많은 예술 사조들이 부흥했으며 화학, 물리학, 공학, 천문학, 생물학 등의 여러 과학 분야에서 인류사에 길이 남을 업적들을 남겼다.
2.5. 사회 개혁 및 농노제 폐지 시작
명확하고 긍정적인 법률 도입, 기관의 간소화된 법적절차를 도입, 성직자의 교육수준의 향상, 신용대출로서 파산한 귀족에 대한 지원, 확고한 법령으로 무역과 산업의 부활, 각 상태에 따라 청소년 교육의 지도, 농민의 상황 개선, 수치스러운 인신매매의 근절, 함대의 재건, 정직한 사람들이 항해 가능케 하기, 한 마디로 모든 무질서와 악용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니콜라이 1세가 데카브리스트의 주장을 조사하고 정리하라는 명령과 함께 내린 교서.
이전까지 러시아 제국 황제들은 귀족 쿠데타로 등극하거나 폐위되던 반 귀족정 국가였는데, 니콜라이 1세는 강력한 전제권력을 구축하여 귀족정을 폐지하고 국가 정상화와 각종 개혁들을 시작하였다.니콜라이 1세가 데카브리스트의 주장을 조사하고 정리하라는 명령과 함께 내린 교서.
법적인 측면에서 가장 기념할 만한 것은 성문법의 최신화였다. 당시 러시아 제국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던 최상위 성문법은 1649년에 제정된 소보르노예 울로제니예(Соборное уложение)였다. 물론 이것은 표트르 1세나 예카테리나 2세 등에 의해 대대적으로 편집되긴 했으나 현실적으로 법을 적용시키는 것은 무리였고 실제로도 엄격하게 적용되지 않았다. 이를 위해 데카브리스트들이 새로운 공화국 대통령의 후보자로 거론했던 스페란스키는 황제원 제2국(Второе отделение)의 총책임자가 되었다. 그의 주도로 수년의 작업 끝에 '러시아 제국 국가 기본법(Свод основных государственных законов Российской империи)'이 완성되었고 이로서 제국 모든 법과 제도의 체계화, 성문법이 완료되었다. 스페란스키는 황제에게 새로운 조항들을 계속해서 추가해야한다고 간언했지만 황제는 그 일은 자신의 후계자에게 넘겨주겠다고 거절했다.
교육 시스템이 보편화되고 사회가 개편됨에 따라 출신성분에 관계없이 고위귀족이 아니더라도 고등교육을 받고 사회에서 높은 자리를 요구하는 이들이 증가했다. 이러한 현상은 잡계급(Разночинцы)이라 불리는 새로운 사회계층의 출현을 야기하였다. 표트르 1세부터 시작된 관료계급과 귀족계급의 경쟁은 니콜라이 1세에 시대에 와서 뚜렷해졌고 관료계급이 귀족계급의 영역을 점차 침범해 나갔다. 1845년 선언문 에 따르면 육군은 8급, 관료는 5급부터 세습귀족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하여 새롭게 부상한 관료 및 신흥귀족들은 고위귀족들을 억제하기 위해 전제정의 강화를 지지했다.
경제 분야에서도 정상화가 진행되었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국가 재정이 망가진 상태였고 국가 내에서는 금화, 은화, 동화, 지폐, 서유럽에서 주조되는 탈러(Thaler)가 사용되고 있었는데 이러한 화폐와 현물 간에 정립된 가치 관계가 없이 임의로 교환되었다. 1830년에 지폐 아시그나치야의 가치가 급락하자 재무장관이었던 예고르 칸크린은 은 루블을 기준으로 삼아 아시그나치야의 가치를 보강하고자 하였고 통화개혁이 실시되었으며 1 은 루블 당 50 코페이카 아시그나치야의 관계를 설정했다. 이것을 일종의 복본위제였고 후에 크림전쟁으로 국가 예산이 망가지기 전까지 안정적인 화폐 유통을 제공했다.
또한 농노제의 실질적인 폐지가 이때 시작된다. 니콜라이 1세는 개인적으로도 러시아 농노제를 '노예제(Рабство)'라 부르며 수치스러워했다[8] 때문에 귀족들의 농노에 대한 지배력을 점차 박탈해나갔고 실제로 니콜라이 1세 통치기에 농노에 대한 권력 남용으로 처벌받은 지주귀족들이 급증하게 된다. 그 뿐만 아니라 각종 위원회들을 창설해 유럽 러시아 전역에서 농촌사회의 통계 자료를 수집한다. 이는 훗날 알렉산드르 2세의 농노 해방령의 기반이 된다.
2.6. 크림 전쟁
하지만 유럽의 헌병이라 불리던 그의 외교정책은 1853년 발발한 크림 전쟁으로 인해 무너지게 되었다. 비록 크림 전쟁은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간의 전쟁이었으나 영국과 프랑스가 군대를 파병하여 오스만 제국을 원조했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도 외교적으로 압박을 가해왔던 것이다. 즉, 러시아의 지나친 영토 확장이 오히려 주변 유럽 국가들에게 부담이 되어서 도리어 러시아가 유럽에서 고립당하게 된 것이다.2.7.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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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1세의 죽음. |
결국 크림 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에게 참패를 당하기 시작하자 군사적, 정치적 타격을 입은 채 실의에 빠져 살았다. 그러다 1855년 측근들의 만류도 무시하고 차가운 빗속에서[9] 크림 전선으로 나가는 군대를 사열하다가 폐렴으로 쓰러진 뒤 1주일 후에 생을 마감했다. 전쟁이 끝난 건 1856년이었는데 일부에서는 크림 전쟁의 계속된 패전에 절망하여 굴욕적인 전쟁 종전 협정에 서명하는 꼴을 보이기 싫어 음독자살을 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3. 평가
3.1. 자유주의적 관점에서의 평가
러시아의 자유주의적 발전에서 니콜라이 1세 시대에 어떤 평가를 내려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의심할 여지 없이 어렵다. 표현의 자유는 제한되었고, 검열은 모든 분야에서 엄격했으며, 1848년 이후 이러한 모든 제한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궁극적으로 러시아에서 자유주의 질서의 출현으로 이어졌던 것들과 예카테리나 2세와 알렉산드르 1세 치하에서 성취한 많은 부분들이 니콜라이 1세 시대에서 유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강화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의 자유주의적 개혁에 필요한 전제조건이 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는 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는 힘들다.
러시아 자유주의의 역사(1762—1914) / 빅토르 레온토비치[10][11]
크림 전쟁의 패배, 자유주의를 억압하는 반동정치를 펼쳤다는 부정적 평가[12]와 귀족정을 종결시키고 국가를 정상화했으며 농노제 완화와 폐지를 비롯한 각종 사회, 정치, 군사 개혁을 수행하고 문화적, 학문적 부흥기를 이루어냈다는 긍정적 평가가 양립한다.러시아 자유주의의 역사(1762—1914) / 빅토르 레온토비치[10][11]
그러나 상세히 살펴보면 둘은 같은 내용이다. 니콜라이 1세 이전까지 러시아 제국은 귀족들이 쿠데타로 황제를 옹립하고 폐위하고 암살하는 시대였을 뿐만 아니라 귀족 평의회에서 차르의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유주의적' 체제였다. 이런 상황에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여 반대파를 찍어누르는 것 외엔 처음부터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니콜라이 1세는 귀족들의 부의 원천이 되는 농노제를 억제함으로서 귀족정을 타파하고 전제군주정을 수립하고자 했기에 귀족들은 '자유를 억압하는 반동정치'에 저항할 수 밖에 없었다. 데카브리스트의 난 문서에서도 나오지만 그 시대의 대다수 자유주의자들의 목적은 보편적 자유가 아니라 특정 계층 및 집단만의 자유였다. 오히려 정반대로 니콜라이 1세가 자신이 진압한 데카브리스트들의 사상을 따로 연구하라는 부서를 만들어 그들의 주장을 검토할만큼 유연한 면모를 보여줬을 정도다.[13]
니콜라이 1세가 탄압한 대부분의 이들, 특히 '자유주의자'들은 전형적인 봉건귀족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고[14], 구분하는 이들도 이용당하거나 이용하거나 협력하는 등 어떤 식으로든 연관된 처지였다. 때문에 분명 많은 실책을 저질렀지만 그와 별개로 '반동정치'라는 비판적 관점은 당대 귀족 출신 지식인들의 편향된 주장에 근거한다. 그러나 반대로 보자면 니콜라이 1세는 농민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서는 귀족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는 강력한 전제권력이 필요하다는 인식 아래서 이전까지 러시아의 지배계급인 귀족에게 도전함으로서 소수 특권계층만의 전유물이 아닌 신분을 막론한 전사회적인 자유를 확립하고자 하였고 실제로 그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니콜라이 1세가 더 현대적이고 진보적인 자유주의자였다는 평가가 있다.
즉 사실상 니콜라이 2세까지의 거의 모든 러시아 차르들 항목에도 똑같이 반복되는 "반동보수적인 차르들이 자유주의를 탄압했다"는 식의 내러티브는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독재정권이 민주투사들을 탄압한게 아니라 황제권과 귀족권의 파워게임에 가까웠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아이러니하게도 러시아 차르들의 '반동적인' 행적이 최소한 자유주의적 측면에서는 옳았던 것. 단지 그 당시의 자유주의가 오늘날의 자유주의와 달랐을 뿐이다.[15]
때문에 당대에도 평가가 엇갈렸는데 알렉산드르 푸시킨, 니콜라이 카람진[16],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등 니콜라이 1세 통치기에 주로 활동한 당대 사상가들은 니콜라이 1세를 비판하면서도 존경하거나, 노선은 달라도 비범한 인물임은 인정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고, 정작 알퐁스 드 라마르틴,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같은 외국 지도자들이 고평가했다.
여러모로 한국사의 정조와 비슷한 포지션이다.[17]
4. 미남 황제
앞서 서술한 것처럼 장신의 미녀였던 어머니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를 닮아 미남으로 유명했으며 키도 189cm에 달하는 장신이었다. 상단의 초상화나 어린 시절 때 그린 초상화만 봐도 그 미모를 알 수 있다. 니콜라이 1세의 어머니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는 뛰어난 외모에 키까지 훤칠했던 미녀로 유명했고 로마노프 왕조에게 "키 크고 잘생긴 뷔르템베르크의 외모"를 물려준 인물이였다. 엄밀히 말하면 파블로비치/파블로브나 세대의 경우 어머니 조피 도로테아의 뛰어난 외모를 물려받은 자녀가 있는가 하면, 추남 파벨 1세의 외모를 물려받은 자녀도 있어서 좀 갈렸지만 아들 니콜라이 1세는 어머니의 외모를 물려받은 케이스였다. 게다가 그 니콜라이 1세 역시 뛰어난 미녀인 프로이센의 샤를로테[18]와 결혼하면서, 두 사람의 자녀들과 후손들부터는 진짜로 장신에 미남미녀들이 많게 된다.
데카브리스트의 난을 다루는 영화 구제동맹(Союз Спасения, 2019)에서도 191cm에 달하는 장신 배우 이반 콜레스니코프(Иван Колесников)가 맡아서 그 큰 키가 작중에서 돋보인다.
5. 니콜라이 2세와의 공통점
증손자 니콜라이 2세와 묘하게 공통점이 많다.- 알다시피 즉위명이 니콜라이라는 것.
- 딸들의 이름 중 '올가'와 '마리야'가 있다는 것.[19]
- 또한 그들의 어머니의 이름이 '마리야 표도로브나'인 것.
- 재위 말기에 큰 전쟁으로 정치적 입지가 극도로 좁혀졌던 것.
- 니콜라이 1세의 재위 말기에는 크림 전쟁으로 국력이 많이 약해졌다.
- 니콜라이 2세의 재위 말기에는 암살사건이 순식간에 전세계급으로 번진 전쟁으로 개혁정책이 파멸되면서 러시아 혁명으로 폐위되었고, 이듬해 총살당했다.
다만 니콜라이 1세는 병사하고 사후에도 왕조가 이어졌지만 니콜라이 2세는 혁명 후 아예 가족들과 함께 총살당하고 왕조가 멸망했다.
6. 가족관계
아내인 프로이센의 샤를로테와는[20] 금슬이 좋아서 슬하 4남 4녀를 두었으며, (귀천상혼 자녀, 사생아까지 합쳐서) 총 47명의 손자녀가 있다. 그 중 적친손자인 대공만 18명으로 로마노프 왕조는 이때부터 엄청나게 번성한다. 로마노프 왕조의 실질적인 중시조이며[21], 현재 로마노프 가문의 구성원들은 모두 니콜라이 1세의 자손들이다.
6.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니콜라이 1세 (Nicolas I) |
파벨 1세 (Paul I) |
표트르 3세 (Peter I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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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카를 프리드리히 (Karl Friedrich, Duke of Holstein Gothor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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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의 안나 페트로브나 황태녀[22] (Tsesarevna Anna Petrovn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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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카테리나 2세 (Catherine 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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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할트-체르프스트 공작 크리스티안 (Christian August, Prince of Anhalt-Zerbs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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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슈타인-고토르프의 요한나 엘리자베트 공녀 (Princess Joanna Elisabeth of Holstein-Gottor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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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 (Princess Sophie Dorothea of Württembe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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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르템베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2세 오이겐 (Frederick II Eugene, Duke of Württembe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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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르템베르크 공작 카를 알렉산더 (Charles Alexander, Duke of Württembe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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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른운트탁시스의 마리 아우구스테 공녀 (Princess Marie Auguste of Thurn and Taxi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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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덴부르크슈베트의 프리데리케 공녀 (Princess Friederike of Brandenburg-Schwed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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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덴부르크슈베트 변경백 프리드리히 빌헬름 (Friedrich Wilhelm,Margrave of Brandenburg-Schwed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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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의 조피 도로테아 공주[23] (Princess Sophie Dorothea of Prussia) |
6.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남 |
알렉산드르 2세 (Alexander II) |
1818년 4월 18일 | 1881년 3월 13일 |
헤센의 마리 공녀 슬하 6남 2녀[24] |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25] 슬하 2남 2녀 |
||||
1녀 |
로이히텐베르크 공작부인 마리야 (Maria, Duchess of Leuchtenberg) |
1819년 8월 18일 | 1876년 2월 21일 |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막시밀리안[26] 슬하 4남 3녀 |
스트로가노프 백작 그리고리 슬하 1남 1녀 |
||||
2녀 |
뷔르템베르크의 왕비 올가 (Olga, Queen of Württemberg) |
1822년 9월 11일 | 1892년 10월 30일 | 카를 1세 |
3녀 |
알렉산드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Alexandra) |
1825년 6월 25일 | 1844년 8월 10일 | 헤센카셀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
2남 |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 (Grand Duke Konstantin) |
1827년 9월 21일 | 1892년 1월 25일 |
작센알텐부르크의 알렉산드라 슬하 4남 2녀[27] |
3남 |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 (Grand Duke Nicholas) |
1831년 8월 8일 | 1891년 4월 25일 |
올덴부르크의 알렉산드라 슬하 2남 |
4남 |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 (Grand Duke Michael) |
1832년 10월 25일 | 1909년 12월 18일 |
바덴의 체칠리에 슬하 6남 1녀[28] |
7. 여담
- 니콜라이 1세는 데카브리스트의 난의 주모자인 콘드라티 릴레예프(Кондратий Рылеев, 1795–1826)를 체포해 사형을 언도했는데, 놀랍게도 처형 당일 교수대의 밧줄이 끊어지면서 릴레예프는 살아남았다. 당시에는 그런 일이 벌어지면 하늘의 뜻이나 신의 은총이라 생각해 사면해주곤 해서 당연히 니콜라이 1세도 사면해주려고 했는데, 릴레예프는 오히려 일어서면서 "이 정권은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밧줄도 못 만든단 말입니다!"라는 패기로 화를 자초했다.[29] 이를 듣고 분노한 니콜라이 1세는 쓰고 있던 사면장을 찢어버린 후 다시 사형을 집행하라고 지시했고, 결국 두번째 교수형에서는 성심성의껏 멀쩡한 밧줄을 써서 릴레예프는 무사히 처형당했다는 일화가 있다.[30] 릴레예프와 반대로 살아남은 사람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이다. 다만 후자는 애초에 진짜로 처형을 집행할 의도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훗날 작품 속 등장인물을 통해 이때 사신과의 하이파이브를 눈앞에 두고 느꼈던 자신의 감정을 묘사했다.
- 캅카스 전쟁에서 체첸인 여성 지휘관이었던 타이마스하 게힌스카야(Таймасха Гехинская)를[31] 포로로 잡아 대면했을 때 "그대를 풀어줄 테니 군을 물러달라" 청하자 "차르 네가 바로 전쟁 자체다." 라는 패기 넘치는 대답을 듣고 풀어주었다.
|
니콜라이 1세와 알렉산드르 푸시킨 |
- 당대의 인기 작가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안티팬이었다. 보수 반동 니콜라이는 반골 푸시킨을 도끼눈 뜨고 감시해 꼬투리 잡기 바빴고, 성격상 절대 지지 않는 푸시킨도 행동으로 황제를 열 받게 만들어서 멕이거나 편지로 신나게 까드렸다고. 푸시킨의 죽음은 그의 영향력을 경계한 니콜라이 1세와 귀족들의 부추김이 있었다는 의혹이 무성했다. 결과적으론 푸시킨의 아내 나탈리야 푸시키나(혼전 성은 곤차로바)가 독박 쓰고[32] 러시아 전 국민의 안티로 군림해 그 쌍욕을 다 먹었다. 그래서 좀 미안했는지 니콜라이 1세는 푸시킨의 유가족에게 연금을 지급하고 성격 좋은 새 남편도 골라주는 등, 나탈리야가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잘 살도록 배려해주었다. 웃픈 건 이런 선심이 오히려 니콜라이답지 않았는지 나탈리야는 황제와도 그렇고 그런 루머가 나서 미친 듯이 욕 먹었다는 슬픈 이야기.[33] 아이러니하게도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1837년에 사망하고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후인 1855년에 니콜라이 1세 역시 사망한 이후, 니콜라이 1세의 친손자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대공[34]과 푸시킨의 외손녀 메렌베르크의 조피 여백작[35]이 결혼하면서 두 사람은 사후에나마 사돈으로 엮이게 되었다.[36]
-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극도로 억압한 특징 때문에, 당대 서구권 문인들의 평은 그리 좋지 않았다. 미국의 문호 허먼 멜빌은 니콜라이의 후반 치세였던 1851년에 발표한 모비 딕 33장의 부분에서 에이허브 선장의 폭군적 기질을 드러내다가 그 폭군의 예시로 니콜라이 1세를 들었고, 저능한 얼뜨기로서 황제 자리를 물려받았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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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알렉산드르 황태자와 보그단 빌레발레와 함께 |
- 1854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보그단 빌레발데의 스튜디오를 장남 알렉산드르 황태자와 함께 방문했다.
- 둘째 누나 옐레나와 셋째 누나 마리야, 막내 누나 안나 왕비처럼 그의 후손들이 현재까지 유럽의 군주로 이어지고 있는데, 영국의 찰스 3세와 덴마크의 마르그레테 2세, 스페인의 펠리페 6세가 있다.[37]
- 니콜라이 1세가 1842년에 황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의 주치의가 황후의 건강이 좋지 않고 심장 마비가 반복되고 있으니, 성관계를 맺지 말라는 진단을 내리기 전까지 정부를 두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있지만 이는 사실과는 다르다. 1842년 이전부터 바르바라 넬리도바 말고도 니콜라이 1세의 사생아를 낳은 정부는 2명 더 있었으며 총 3명의 정부와의 사이에서 사생아 3명을 두었다. 사생아를 낳은 정부만 이렇고, 그 외 다른 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맺었다. 니콜라이 1세의 아들들도 이런 아버지의 여성편력을 물려받았는지 막내아들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을 제외한 3명의 아들들 모두 본부인을 내버려두고 다른 여자와 혼외정사를 가지며 사생아를 낳았다.[38]
- 사진이 재위 기간 당시에 개발되었는데도 실제로 사진을 찍은 적이 없다. 참고로 사진이 개발된 이후 국가원수 중에서 최초로 사진을 찍은 사람은 프랑스의 루이필리프 1세(1842년 촬영)였고, 미국의 존 퀸시 애덤스(1843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1844년), 독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1847년)가 그 뒤를 따랐다. 반대로 아내 프로이센의 샤를로테는 최초로 사진을 찍은 러시아의 국가원수 배우자가 되었다. 이후 사진을 최초로 찍은 러시아의 국가원수는 장남 알렉산드르 2세다.
- 러시아 정치 수반에게 이어지는 탈모- 풍성 교대법칙이 바로 이 사람부터 시작된다. 니콜라이 1세: 탈모 - 알렉산드르 2세: 풍성[39] - 알렉산드르 3세: 탈모 - 니콜라이 2세: 풍성 - 블라디미르 레닌: 탈모 - 이오시프 스탈린: 풍성 - 니키타 흐루쇼프: 탈모 -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풍성 - 유리 안드로포프: 탈모 - 콘스탄틴 체르넨코: 풍성 - 미하일 고르바초프: 탈모 - 보리스 옐친: 풍성 - 블라디미르 푸틴: 탈모. 니콜라이 1세의 즉위가 1825년 12월이니 2025년 12월까지 블라디미르 푸틴이 정권을 잡고 있다면 이 법칙은 무려 200년에 걸쳐 13명에 이르는 인물 모두가 벗어나지 못한 무서운 법칙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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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폴란드 차르, 핀란드 대공 겸임.
[2]
알렉산드르 1세의 사망일부터
콘스탄틴이 25일간 먼저 재위했기 때문에 니콜라이 1세의 통치 시작일은 사실상 12월 26일이지만, 자신은 재위 시작일을
알렉산드르 1세의 사망일로 소급하였다.
[3]
태어난 해에 할머니
예카테리나 2세가 사망했으며 예카테리나 2세가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본 손자였다.
[4]
심지어 알렉산드르 1세와 모후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후의 나이차이는 18살로, 알렉산드르 1세는 어머니보다 남동생 니콜라이 1세와의 나이차이가 더 많다. 또한 니콜라이 1세 밑으로도 21살이나 어린 막내 남동생(미하일 파블로비치 대공)이 한 명 더 있다.
[5]
샤를로테의 생일이기도 했다.
[6]
러시아 제국은 파벨 1세 시절 가급적 남성의 황위 계승만 인정하는
준살리카법을 제정했다. 준살리카법 하에서 알렉산드르 1세의 딸이 왕위를 이어받으려면 로마노프 왕조의 남성 계승자가 아예 없어야 하는데, 콘스탄틴 대공과 니콜라이 1세, 미하일 대공이 멀쩡히 존재했기 때문에 그건 불가능했다. 그마저도 두 딸도 모두 요절했기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7]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율리아네 공녀. 러시아식 이름은 안나 표도로브나이며
앨버트 공의 고모다. 한편 율리아네의 언니인 안토니에테는 콘스탄틴과 니콜라이 1세의 막내 외삼촌인 알렉산더 프리드리히 공작의 아내이기도 하다. 참고로 율리아네와 콘스탄틴의 결혼에 이어 앨버트 공의 다른 고모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 공녀가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
조지 3세의 4남)와 결혼하여 낳은 외동딸
빅토리아 여왕이 영국 왕위를 계승하고, 숙부
레오폴드도
조지 4세의 외동딸
샬럿 공주와 결혼하고 훗날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 1세로 즉위하면서 그들의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은 유럽 최고의 명문가로 부상해
앨버트 공과
빅토리아 여왕의 결혼으로
영국 왕실에 입성한다.
[8]
사실 이건 거의 모든 러시아 황제들 공통이었다. 애민정신이 아니더라도 귀족이 농노를 마음대로 다루면 그만큼 귀족들의 권력이 강력해지고 전제정이 붕괴될 위험이 커지니 싫어할 수 밖에 없는 것.
[9]
단순히 비만 온 게 아니라 이때의 날씨가 영하 23도로 강추위가 불어닥친 겨울에 니콜라이 1세는 그 혹한에서 외투도 입지 않고 사열한 것이다. 이 때문에 황태자와 측근들이 경악을 하고 당시 황제의 주치의 만트는 자살행위라며 극구 만류했을 정도. 게다가 니콜라이 1세는 폐렴에 걸렸을 때, 주치의인 만트의 치료조차 거부하며 죽기를 원했다.
[10]
В. В Леонтович, История либерализма в России (1762—1914) (
Париж: Ymca Press, 1980), 136.
[11]
독일로 이민간 러시아인 학자로서 원서는 1957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출판된 'Geschichte des Liberalismus in Russland'이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기획한 '최신 러시아사 연구(Исследования новейшей русской истории)' 시리즈의 하나로서 러시아어로 번역되었다. 때문에 러시아어판에는 솔제니친의 서평이 추가되어 있다.
[12]
나무위키 관련 문서의 전반은 이쪽을 서술하고 있다.
[13]
사실 데카브리스트의 일부 주동자들도 반란이 진압당하고 체포된 후, 니콜라이 1세에게 여러 조언을 남긴 뒤 나라를 잘 다스리라거나 행운을 빈다는 식으로 체념 혹은 순응했다. 비슷한 케이스가 실제로 데카브리스트 집단에 속해 있었고 반란 이후에도 니콜라이 1세와 서로 묘한
애증관계를 가졌던
알렉산드르 푸시킨.
[14]
이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세계 공통이다. 의회와 헌법으로 왕권을 제한하여 당대 가장 자유주의적이었다는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결국 귀족정이었고, 영국 입헌군주정의 시초를 놓은 대헌장은 결국 봉건귀족들이 왕 협박한 결과물에 가깝다는걸 생각해보자. 결국 자유주의든 민주주의든 현대의 기준을 적용시키는건 잘못되었던 것이다.
[15]
참고로
니콜라이 2세가 비난을 받는 이유도 나라를 제대로 통치를 하지 못해서였지 전제군주정을 유지해서가 아니다.
[16]
카람진의 경우는 니콜라이 1세 통치 이념의 기반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17]
니콜라이 1세와 마찬가지로 정조도 붕당정치로 정쟁이 끊이지 않던 상황에 강력한 전제권력을 구축하여, 여러 급진적 개혁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반대파들을 극심하게 탄압했고 성리학적 정통성에 집착하고 사상통제와 검열을 시행한 '반동적인' 면모가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18]
샤를로테의 어머니로 니콜라이 1세의 장모인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도 뛰어난 외모로 전 유럽에 명성이 자자했다.
[19]
그래서 이들은 미들네임으로 '니콜라이의 딸'이란 뜻의 '니콜라예브나'가 있다(
올가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참고로 니콜라이 1세의 미들네임은
파블로비치, 니콜라이 2세의 미들네임은
알렉산드로비치이다.
[20]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장녀.
[21]
엄밀히 말하면
표트르 1세의 외손자로 왕위를 계승해서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왕조'를 개창한
표트르 3세가 공식적으로는 중시조지만, 표트르 3세의 외아들인 파벨 1세의 아들들 중에서 유일하게 적자를 낳았고 니콜라이 1세의 아들들이 모두 엄청난 아들부자였기 때문에 실질적인 중시조는 니콜라이 1세다.
[22]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 1세의 장녀.
[23]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차녀이자
조지 1세의 외손녀.
[24]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황태자,
알렉산드르 3세,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부인 마리야 등
[25]
귀천상혼.
[26]
사별.
외젠 드 보아르네의 차남이자,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요세피나 왕비의 남동생이다.
[27]
그리스의 올가 왕비,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 등.
[28]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대공비 아나스타샤,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 등.
[29]
사실 당시 러시아에서 마지막으로 교수형을 집행한 게 거의 50년이 다 되어갔으니 교수형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30]
이 일화가 어찌나 임팩트가 강했는지 해당 국가인 러시아는 물론 서양권에서조차 말조심 안하면 화를 입는다는 사례로 릴레예프를 들며 반면교사로 삼았다.
[31]
우락부락한 남자들로 구성된
수피계 뮤리트(мюрид) 부대의 대장을 맡은 여성이니 이 쪽도 만만찮은 여걸이었다.
[32]
푸시킨이 나탈리야와 근위대 장교 조르주 당테스의 추문에 떠밀려 당테스와 결투하다 죽은 것도 한 몫했다.
[33]
다만 나탈리야 곤차로바는 사람들의 평이 한결같이 "천사같은 얼굴, 몸매 짱, 뇌 없음." 이라고 말할 정도로 평소 처신이 백치미 수준으로 어설프기는 했다. 그래서 푸시킨의 딸 중 하나인 나탈리야 푸시키나는 룩셈부르크 귀족 메렌부르크 가문과 결혼하고, 그 손녀들이 왕가의 후손들과 결혼할 정도로 나름 잘 살았지만, 새 남편 란스코이에게서 난 딸 셋은 사람들의 욕에 하도 시달려 셋 모두 머나먼 시골이나 외국으로 가서 살다 잊혀졌다.
[34]
막내아들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의 차남.
[35]
푸시킨의 딸 나탈리야 푸시키나가 나사우의 니콜라스 공(
룩셈부르크 대공 아돌프의 동생)과
귀천상혼으로 결혼하면서 낳은 딸이다. 때문에 미하일과 조피의 결혼도
귀천상혼이었고 두 사람의 차녀가
조지 마운트배튼의 아내 나데이나 미하일로브나 데 토르비다.
[36]
반면에 증손자
니콜라이 2세는 푸시킨의 열렬한 팬이었는데
장녀와
차녀의 이름도 푸시킨의 작품인 예브게니 오네긴에 나오는 올가와 타티아나 자매에서 따와 지을 정도였다.
[37]
찰스 3세와 펠리페 6세는 니콜라이 1세의 차남
콘스탄틴의 장녀
올가의 후손들이고, 마르그레테 2세는 니콜라이 1세의 막내 아들인
미하일의 고명딸
아나스타샤의 후손이다.
[38]
장남
알렉산드르 2세는 자기 딸보다 어린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와 사생아를 낳으며 말년에 귀천상혼으로 재혼까지 했고, 차남
콘스탄틴은 발레리나 출신의 정부와 새살림을 차리기 위해 도주하면서 가정을 파탄냈고, 삼남
니콜라이도 발레리나 출신의 정부와 대놓고 동거하며 사생아까지 낳다가 그 정부가 먼저 죽자 미쳐버렸다. 유일하게 사남이자 막내아들
미하일만이 사생아는 커녕 바람도 피지 않으며 아내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다.
[39]
알렉산드르 2세는 M자 탈모가 아닌 지 의문이 들 수도 있는데 이 사람은 아주 어릴 때의 초상화를 봐도 M자 머리가 워낙 뚜렸해서 탈모가 아닌 게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