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2 20:18:11

석호(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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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1a6d2><colcolor=#ece5b6>
후조 제3대 황제
태조 무황제 | 太祖 武皇帝
출생 295년
서진 상당군 무양현
(현 산시성 창즈시 우샹현)
사망 349년 5월 26일 (향년 54세)
후조 위군 업성 황궁
(현 허베이성 한단시 린장현)
능묘 현원릉(顯原陵)
재위기간 제3대 천왕
334년 ~ 349년 1월
제3대 황제
349년 1월 ~ 349년 5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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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1a6d2><colcolor=#ece5b6> 성씨 석(石)
호(虎)
부모 부황 태종
모후 장씨
배우자 부인 6명
자녀 13남 (양자 1남)
계룡(季龍)
작호 중산공(中山公) → 중산왕(中山王)
묘호 태조(太祖)
시호 무황제(武皇帝)
연호 건무(建武, 335년 ~ 348년)
태녕(太寧, 34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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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잔혹한 맹장2.2. 후조의 국권을 장악하다2.3. 공포정치와 폭정2.4. 말년
3. 사후4. 평가5. 오해: 식인황제?6. 자녀7. 기타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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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호십육국시대 후조(後趙)의 제3대 황제.

2. 생애

석호는 석륵의 6촌 형제로 아버지는 석구멱(石寇覓)[1]이었다. 석구멱이 일찍 죽자, 석륵의 아버지 석주갈주(石周曷硃)가 석호를 아들로 삼았는데, 그래서 석호와 석륵을 형제로 적기도 한다. 태안(太安) 연간(302~303)에 기근이 들어 갈족이 뿔뿔이 흩어졌을 때 석륵과 헤어져 석륵의 모친 왕씨와 함께 살았다.

311년, 병주 유곤이 석륵의 모친과 석호를 찾아 석륵에게 송환하면서 서진(西晉)으로 망명할 것을 제안했으나, 석륵은 석호와 모친을 거두고 망명 제의는 거절했다.

2.1. 잔혹한 맹장

석호는 천성이 잔인하고 무도하여 석륵의 군중에서도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이에 석륵은 석호를 죽이려고 했으나, 모친 왕씨가 반대하여 그만두었다. 석호가 장성하면서 군사적 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에 석륵은 석호를 장군으로 삼고 총애했다. 석호는 석륵의 휘하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319년에 석륵이 후조를 건국하자 중산공(中山公)에 올랐고 최일선에서 활약했다.

325년에 전조(前趙)의 군대가 낙양을 포위하자 이를 구원하러 출진하여 크게 승리했으며, 328년에는 전조의 병주 거점을 공략했다.

329년에 전조의 남양왕 유윤 장안을 공격하자, 진, 옹주의 여러 군에서 거병하여 유윤에게 호응했지만, 기병 20,000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의거(義渠)에서 전조군을 대파하고 5,000여 명을 죽였다. 그리고 내친 김에 도망치는 유윤을 추격해 수많은 전조군을 또 학살하고, 상규(上邽)까지 함락시켜 전조의 태자 유희와 유윤 등 고관대작들을 사로잡아 처형함으로써 전조를 멸망시켰다.

330년에 석륵이 황제에 즉위하자 중산왕(中山王)에 책봉받았으며, 후조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되었기 때문에 석륵과 신하들이 경계했지만 석륵은 끝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2.2. 후조의 국권을 장악하다

333년에 고조 명황제 석륵이 병에 걸려 몸져 눕자 석호는 궁궐을 장악하고 석륵의 병상을 통제하여 국권을 장악했다. 7월에 석륵이 붕어하자, 석호는 석륵의 차남 석홍을 옹립하여 꼭두각시 황제로 만들고, 실권은 자신이 장악했다. 그리고 명제 석륵에게 자신을 제거할 것을 건의했던 우광록대부 정하(程遐)와 중서령 서광 등은 물론, 이에 불안감을 느껴 동진에 투항하려던 봉거도위 석총, 초군태수 팽표(彭彪) 등 석륵의 옛 대신들을 붙잡아 대거 숙청하였고, 자신의 아들들을 왕에 책봉하여 권력을 공고히 다졌다. 석호의 전횡에 반발하여 명제 석륵의 양아들 팽성왕 석감, 조카 석생, 태후 유씨 등이 반란을 도모했으나, 모두 한 달도 못 버틴 채 석호에게 허무하게 진압당해 석감과 유태후는 수도 양국에서 처형되고, 석생은 도망치다가 부하의 배신으로 목숨을 잃었다.

334년, 겁이 난 황제 석홍은 석호에게 선위할 뜻을 비추었고 처음에는 거절했던 석호는 다시 중신들이 권하자 석홍을 폐위하며 자신은 섭정의 지위에서 다스릴 것을 천명했다.(연희정변) '거섭조천왕'(居攝趙天王)에 올라 후조를 통치하게 된 석호는 양국 업성에 궁궐을 세우고 황하에 다리를 놓는 등 무리한 토목공사를 일으켜 후조의 국력을 소모시켰으며 사치와 향락을 일삼고 잔혹한 행동을 자행했다. 그러면서도 석호는 명제 석륵의 치세때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불교를 깊게 믿어 널리 포교했다. 하지만 폐위된 석홍을 죽임으로써 고조 명제 석륵의 자손들은 모두 죽어 없어졌다.

335년에는 수도를 으로 옮겼고, 337년에는 섭정을 그만두며 천왕(天王)에 즉위했다. 석호는 주변의 여러 국가들을 상대로 무리한 원정을 실시하여 영토를 늘리기도 했으나 국력을 크게 소모시켰다.

338년에 선비족 단부를 공격하여 멸망시켰으며 곧바로 모용부 전연(前燕)을 공격했으나 패배했다.

339년에는 동진(東晉)을 공격하여 수춘을 비롯하여 장강 이북을 대부분 점령했다.

340년에 다시 전연을 공격하려고 징병과 물자 징발을 가혹하게 실시하여 백성들이 많이 피폐해졌다. 그러나 이렇게 준비한 전연 정벌은 흐지부지하게 끝났다. 342년에는 동진을 공격하려고 다시 가혹한 징병과 징발을 실시했으나 징조가 나쁘다고 하여 그만두었다.

346년부터 서쪽의 전량(前凉)을 공격하여 일부 영토를 점령했으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져들었다.

2.3. 공포정치와 폭정

석호는 궁궐 건축을 위해 폭풍우와 태풍이 부는 날에도 공사를 강행시켰고, 후궁을 모집한다면서 서진의 세조 무제 사마염에 버금가는 혼인 금지령을 내려 백성들의 들을 뺏어갔으며 동진을 정벌한다면서 한 가구당 수레 하나와 소 한 마리를 공출했다. 또 석호는 도굴광이었는데 옛날 무덤들을 도굴해서 자신의 재산을 불렸다. 다만 진시황릉은 워낙 커서 구리 기둥 몇 개만 뽑아왔고, 전국시대 조간자의 무덤은 물에 잠겨 있었는데 특수 시설 때문에 아무리 물을 빼도 계속 잠겨서 포기했다.

또한 사람을 풀어놓은채 칼을 들고 때려잡는 놀이는 일상다반사였는데, 기록에 의하면 사람 죽이는 게 정말 재밌었던 모양이다. 어지간한 일들은 황태자인 석수에게 맡기면서도 사형 판결 및 집행만은 자신이 손수 관장했다. 물론 처형 자체는 어디까지나 공식적이었기에 생각보다 잔혹함은 덜했고 그나마도 시범 케이스로 처리해 횟수는 생각보다 적었지만, 어쨌든 이러한 공포정치 때문에 당시 분위기에 절망하여 자살하는 신하들이 많았다고 한다.

한편 석호의 아들들이 벌인 후계자 분쟁으로 여러 차례 잔혹한 숙청이 벌어졌다. 337년에는 태자 석수(石邃)가 석호를 죽이고 황제에 등극하고자 반란을 일으키려 하여 석수와 그의 자손 수십 명을 잔혹하게 살해했다.[2]

348년에는 태자 석선(石宣)이 석호가 총애하는 아들이었던 석도(石韜)를 살해했는데, 이에 석호가 크게 분노하여 석선과 그의 자손 수십 명을 살해하고, 동궁 수비군 100,000명을 서쪽의 양주(凉州)로 유배시켰다.

이 과정에서 석호가 총애하던 손자가 참혹하게 처형되는, 어처구니없는 모순이 발생했다. 당시 석호가 대노해서 석선 일족의 처형을 진두지휘하던 중, 처형을 기다리는 이들 중에 자신이 평소 귀여워하던 손자가 보였고, 그제야 그 손자가 석선의 아들임을 뒤늦게 생각해냈다.

석호는 황급히 손자의 처형을 멈추려고 했으나, 이번엔 평소에 저지른 공포정치가 발목을 잡았다. 석호의 잔인함을 두려워한 신하들은 처형을 중지했다가 또 나중에 빌미를 잡힐까 두려워하여 석호의 명령을 씹고 그대로 그 손자까지 처형했다. 이때 잔인하게 갈아서 죽여버렸다.

이에 충격을 받은 석호는 병에 걸려 쇠약해졌고,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양주로 유배된 동궁 수비군, 즉 고력[3]을 중심으로 뭉친 100,000명이 반란을 일으켜 관중을 장악했다.(고력의 난) 반란군은 크게 위세를 떨쳐 한때 업까지 육박했으나, 강족의 장군 요익중(姚弋仲)[4]이 이를 진압했다. 그러나 이 반란군의 기세에 위축된 석호는 더욱 쇠약해졌다. 석세(石世)가 태자로 책봉되었고, 석호는 후계자를 위해 여러 아들들을 요충지의 종실왕으로 삼으며 요직에 임명했다.

2.4. 말년

349년 정월에 폐제 석홍을 죽인 334년부터 15년 동안 칭했던 천왕을 황제로 바꾸었다. 그러나 얼마 후 병으로 몸져 누웠으며 이때를 틈타 태자 석세의 일파인 장시(張豺) 등이 요직에 있는 석호의 자식들을 숙청하여 석세 독재 체제를 구축하려고 했다.

349년 4월에 석호가 붕어했다. 후사는 태자 석세가 이었다.

3. 사후

석호의 공포정치라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체제를 지키던 후조는 구심점이던 석호가 세상을 떠나자 얼마 못 가 홀라당 망해버렸다. 사실은 그의 아들들이 연달아 계승했지만 서로 죽이다가, 석호의 양손이자, 한족 출신 장수 염량의 아들이었던 염민이 자신이 옹립했던 마지막 석씨 황제였던 석감을 찬탈하고 위나라를 세웠다. 이 염위는 곧 선비 모용부 전연에게 멸망했다.

1년도 안 되어 석세-석준-석감-석지 이렇게 석호의 아들 4명이 줄줄이 황제를 했지만 모두 제 명을 살지 못했으며, 거기다가 석호의 자손들은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자멸했고 남은 자손들은 염민이 모두 몰살시켰다. 이는 나라를 말아먹은 석호의 잘못이자 포악한 정치를 한 업보였다. 염민은 석감의 치세때 수도 업성에서 갈족 소탕전에 나서 석호의 남은 자손들과 갈족 200,000여 명을 학살했는데, 이때 눈이 들어가고 코가 높아서 갈족이 아닌데도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이 있었다[5]. 그동안 석호의 공포정치 때문에 분노한 사람들은 갈족을 몰살시켰으나, 염민의 이민족 학살 정책은 반발을 일으키면서 결국 그는 불과 3년 만에 염위와 같이 종말을 맞고 말았다.

4. 평가

고조 명황제 석륵이 천신만고 끝에 일으켜 화북을 통일시킨 후조 제국을 정당한 후계자인 석홍한테서 찬탈하고 정벌과 노역과 숙청으로 나라를 피폐하게 만들어 끝내 단명왕조로 망치게 만든 대표적인 폭군이다.

다만 강족의 수장 요익중이나 저족의 수장 포홍(蒲洪)[6]의 <열전>을 보면 <석계룡 재기>에 나오는 막 나가는 폭군의 이미지와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요익중을 중용하면서 그가 간하는 이야기들을 나름 잘 들어주거나 포홍이 보통 인물이 아니라 화근이 될거니 제거해야 한다는 염민의 참소를 무시하면서 더 중용하거나 하는 일화들을 보면 석호라는 인물을 좀 달리 볼 여지가 있을지도.... 요익중은 아예 석호가 찬탈했을 때 대놓고 쌍욕을 하면서 반대했지만 그 요익중을 더 중용했고, 나중에는 아예 야자를 까면서까지 석호에게 뭐라고 해도 석호가 찍소리를 못하고 다 들어줄 정도였다. 이게 요익중이나 포홍같은 강자들에게는 한없이 약하고 만만한 애들에게만 공포정치를 했다고 볼 여지도 있겠는데, 둘 다 석호 사후에도 나름의 충성은 다 했다는 것이 의외로 흥미로운 점이다.... 염민이 찬탈한 후에 요익중은 대놓고 석씨의 편을 들어서 염민과 싸웠고[7], 훗날 죽으면서도 후손들에게 석씨에게 큰 은혜를 입었음을 이야기하는 걸 보면 충성심은 진짜였던 모양이다. 포홍은 석호 사후 염민의 참소로 도독직을 떼이면서 후조를 배신하기는 했지만 석호 생전에는 역시 충성을 다 한 편이었다. 석호가 대부족을 이끌고 있는 저 두 사람을 두려워하여 눈치를 보고 대접해준 면이 있기도 하겠지만 두 사람이 석호에게 한 일을 보면 그들의 마음을 제대로 얻기는 한 모양이라서 석호가 잘 한 점이 없지는 않은지라 마냥 박하게 평가할 필요는 없다.

5. 오해: 식인황제?

석호의 잔혹함에 대한 이야기 중 《 고우영 십팔사략》에서 미녀 궁녀가 있으면 아름답다며 목을 잘라 얼굴은 영구 보존하고, 몸은 잘 요리해서 먹어치웠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잘못하면 석호에게 먹히겠다고 두려워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한데, 이건 석호가 아니라 그의 장남 석수(石邃)의 행각으로, 오히려 이 녀석이 사이코패스 식인종이며, 뒷날 반역을 일으키려하다가 식솔 수백 명과 함께 처형당했다. 그런데 그 반역의 원인이 아버지한테 별 이유없이 두들겨 맞아서였다(...).

6. 자녀

  • 폐제 석세(石世): 재위 33일 만에 형 석준이 폐위한 후 살해.
  • 폐제 석준(石遵): 재위 183일 만에 동생 석감과 장군 석민에 의해 폐위당한 후 살해.
  • 폐제 석감(石鑑): 재위 103일 만에 석호의 양자 석민이 폐위한 후 살해
  • 말제 석지(石祗): 염민에게 격파당한 부하 유현이 배신하고 살해.
  • 폐태자 석수(石邃): 석호의 장남. 동해태비 정앵도 소생. 모반을 이유로 석호가 폐위한 후 살해.
  • 폐태자 석선(石宣): 석호의 차남. 폐서인 두주 소생. 동생 석도를 죽였다가 석호가 폐위한 후 살해.
  • 진공(秦公) 석도(石韜): 석호의 아들. 형 석선이 살해.
  • 패왕(沛王) 석충(石沖): 석준의 찬탈 소식 듣고 반란했다가 석민에게 패배한 후 사사.
  • 연왕(燕王) 석빈(石斌): 창녀 제씨 소생. 석세 대신 태자가 될 뻔하여 장시와 유 황후가 살해.
  • 양왕(梁王) 석정(石挺): 석생의 반란을 진압하다가 동관에서 전사.
  • 낙평왕(樂平王) 석포(石苞): 석민 제거에 실패한 형 석감이 죄를 뒤집어씌우고 살해.
  • 여음왕(汝陰王) 석곤(石琨): 유현의 난을 피해 동진으로 도망쳤으나 투항 거부당한후 건강(建康) 저자에서 공개처형.
  • 낙안왕(樂安王) 석병(石炳): 유현이 난을 일으켜 말제 석지와 함께 살해.

7. 기타

당나라때 편찬된 《 진서》(晉書)에서는 석호의 이름이 당나라 고조 이연의 부친이었던 이호(李虎)와 같았기 때문에 피휘를 위해 석호의 자로 표기했다. 따라서 《진서》에서의 석호의 전기는 <석계룡 재기>이다.[8]

8. 둘러보기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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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의 사마사 · 사마소(昭) 사마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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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800080><tablebgcolor=#8000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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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래는 성씨가 없었지만 일족이 석씨가 된 후, 석씨로 정해졌으며 석호가 황제에 올라 태종 효황제(太宗 孝皇帝)로 추존했다. [2] 석수는 아들이고, 그 자손들은 석호의 손자들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에게 도전했다는 이유로 아들과 손자들, 며느리 등 그 일가를 아주 잔인하게 죽였는데 나중에 똑같이 반란을 일으킨 석선도 도르레에 매달아 엄청난 고통을 준 다음 불태워 죽였다. [3] 고력(高力)은 태자 석선이 힘센 자들을 선발해 동궁 호위로 삼은 정예부대이다. [4] 나중에 후진(後秦)을 세운 태조 무소제 요장의 아버지로, 꽤나 대담하고 한 성깔했다. 한창 잔인함을 과시하던 시절의 석호에게도 면전에서 막말을 했고, 나이 먹어서는 아예 석호를 "너" 라고 불렀다. [5] 갈족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갈족은 코카소이드계 종족이었다. [6] 훗날 부(苻)씨로 성을 바꾸었다. 전진을 세운 고조 경명제 부건의 아버지였다. [7] 석지와 염민이 싸울 때 아들 요양을 보내며 염민을 꼭 잡아서 끌고오라고 했는데 염민이 패퇴하여 도망가버리자 아들에게 빠따질(...)을 했을 정도였다. [8] 전조의 초대 황제 유연도 당고조 이연의 이름과 같아서《진서》에는 자를 대신 써서 '유원해'라고 표기되었다. 따라서 <유원해 재기>이다. 《진서》는 하내 사마씨의 서진 동진을 정통으로 보고 두 진나라만 <본기>로, 나머지는 황제국이라도 제후국으로 보고 <재기>라고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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