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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96년 8월 2일 | ||
오스만 제국
에디르네 에디르네 궁전 (現 튀르키예 마르마라주 에디르네도 에디르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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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754년 12월 13일 (향년 58세) | ||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톱카프 궁전 (現 튀르키예 마르마라주 이스탄불도 이스탄불 광역시) |
|||
묘소 | 이스탄불 발리데 하티제 투르한 술탄 영묘 | ||
재위기간 | 오스만 파디샤[2] | ||
1730년 11월 25일 ~ 1754년 12월 13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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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70125><colcolor=#fff> 아버지 | 무스타파 2세 | |
어머니 | 살리하 술탄 (출신: 세르비아) | ||
형제자매 | 셰자데 메흐메트, 셰자데 셀림, 셰자데 무라트, 셰자데 아흐메트, 오스만 3세, 셰자데 하산, 셰자데 휘세인, 셰자데 아흐메트, 아티케 술탄, 아이셰 술탄, 에미네 술탄, 사피예 술탄, 루키예 술탄, 하티제 술탄, 파트마 술탄, 에스마 술탄, 루키예 술탄, 윔뮈귈쉼 술탄, 제이넵 술탄, 에메툴라 술탄, 아이셰 술탄 | ||
배우자 | 알리제이납 카든 (출신: 불명) | ||
루샤흐 카든 (출신: 불명) | |||
페히메 카든 (출신: 불명) | |||
부슬라트 카든 (출신: 불명) | |||
하템 카든 (출신: 불명) | |||
베르디나즈 카든 (출신: 불명) | |||
라미 카든 (출신: 불명) | |||
하비베 카든 (출신: 불명) | |||
자녀 | 없음 | ||
종교 | 이슬람 (수니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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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만 제국의 24대 술탄이자 18대 파디샤.
예니체리 쿠데타 세력을 진압하고 제국을 안정시켰으며, 러시아,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치러 승패를 거듭했으나 외교적인 노력으로 도나우 방어선 회복 및 몰다비아 공국과 크림 칸국에 대한 종주권 회복이라는 성과를 얻어내었다.
나디르 샤로 대표되는 페르시아와는 여러번 충돌하였는데, 역시 승패를 반복한 끝에 캅카스를 상실하였지만 이라크를 지켜내었다. 다만 마흐무트 1세 본인은 와지르들에게 정무를 맡기고 문화 생활에 치중하였고 누루오스마니예 모스크로 대표되는 여러 건축물을 세웠다.
1750년 코스탄티니예 대화재 시에 적극적으로 복구에 임한 점은 개인적인 업적으로 평가된다. 그의 치세에 오스만 제국은 여러 행운이 따르며 1700년을 전후로 한 혼란을 극복하고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2. 생애
마흐무트 1세의 초상화.
2.1. 즉위 전
마흐무트는 1696년 8월 2일 에디르네 궁전에서 무스타파 2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살리하 발리데 술탄이었다. 마흐무트 1세는 오스만 3세의 이복 형제였다. 그는 혹이 있는 등이 생겼다.그의 아버지 무스타파 2세는 주로 에디르네에서 살았다. 마흐무드는 에디르네에서 그의 어린 시절을 보냈다. 1702년 5월 18일에 그는 에디르네에서 그의 교육을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가 왕위에서 스스로를 폐위했을 때 그는 이스탄불로 데려와졌고 그가 그의 인생의 27년을 보낸 카페에 갇혔다.
체스를 계속하고, 시를 짓고, 음악을 다루는 등의 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이 시기에 그가 어떠한 문화를 습득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 이외에도, 특히 카페스의 삶에 위험이 있었다.
2.2. 즉위와 숙청
그러던 1730년 쿠데타로 숙부 아흐메트 3세가 폐위된 후 예니체리 군부에 의해 추대되었다. 군부는 코스탄티니예에 계엄을 선포하고 튤립 시대의 기득권 2천여명을 체포, 일부를 처형하거나 추방하였다. 그 주동자인 파트로나 할릴은 디완을 종용해 자신에게 자금을 대준 그리스인 도축업자 야나키를 몰다비아 호스포다르로 임명하려 하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 이에 같은 예니체리 내부에서도 질투가 일었고, 마흐무트는 크림 칸국과 불만을 품은 장교들과 함께 1년간 때를 기다렸다. 1731년 11월 24일, 디완에서 러시아 제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주장한 할릴은 코스탄티니예의 명에 따라 교살되었다. 그리스인 야나키를 포함한 7천에 달하는 그의 일당들이 처형되며 약 1년간 제국을 주도했던 쿠데타 세력이 일소되었다.2.3. 페르시아 전선
1728년 서부 이란을 얻었던 오스만 제국은 1730년 나디르 샤의 반격으로 이를 상실하였다. 다만 1731년 나디르 샤에 경쟁심을 느낀 타마스프 2세의 아르메니아 침공 및 예레반 포위는 하키모글루 칸의 반격으로 분쇄되었다. 후자의 지휘 하에 오스만 군대는 타마스프 2세의 퇴로를 끊었고, 타브리즈로 후퇴하는 사파비 군대는 예니체리의 활약 하에 격파되었다. 타브리즈, 하마단, 케르만샤는 재차 오스만령이 되었고 타마스프 2세는 이들을 돌려받는 대가로 오스만 조의 캅카스 장악을 인정하는 조약에 서명하였다. (1732년) 실책을 바탕으로 타마스프 2세를 폐위하고 전권을 얻은 나디르 샤는 기존의 캅카스 방면 대신 이라크를 새로운 전장으로 선택하였다. 기존 도로 대신 험로를 택한 나디르 샤는 야습을 통해 조하브를 점령하고 목적지인 바그다드로 향하였다.2.3.1. 나디르 샤의 이라크 침공
나디르샤의 초상화 / 키르쿠크 전투, 유일하게 자신을 패배시켰던 토팔 오스만 파샤의 시신을 애석히 바라보는 나디르 샤 |
7천의 병력으로 키르쿠크를 포위하게 한 나디르 샤는 본대를 이끌고 바드다드로 진군, 부근에서 오스만 제국군을 격파하고 도시를 포위하였다. (1733년 2월) 다만 수비를 맡은 아흐마드 파샤는 토팔 파샤 휘하의 8만 원군이 당도할 때까지 버텨내었고, 후자는 나디르 샤를 끌어내어 7월 19일 사마라 전투에서 격전 끝에 승리를 거두었다.[3] 이에 호응한 아흐마드 파샤 역시 수비대와 출병해 포위를 이어가던 페르시아 군을 격파하였다. 사마라 전투는 회전에 있어 나디르 샤의 유일한 패배였고, 절치부심한 그는 군대를 재건하여 재차 이라크로 진군하였다. 이번에는 토팔 오스만 파샤를 끌어낸 나디르 샤는 키르쿠크 전투에서 오스만 군을 매복해 격파, 토팔 오스만 파샤를 전사시키며 복수에 성공하였다. 다만 오스만 측에겐 다행히도 남부 이란의 반란으로 나디르 샤는 바그다드 공격을 포기하고 회군하였다.
2.3.2. 나디르 샤의 캅카스 침공
1735년 예게바르드 전투, 이로써 캅카스는 향후 한세기간 이란의 영토로 남는다.
1734년 캅카스 전선으로 돌아온 나디르 샤는 8월 옛 시르반샤 조의 수도 샤마키를 함락하고 간자를 포위하였다. 오스만-크림 칸국의 구원 시도는 실패한 것을 넘어 나디르 샤에 의해 추격 섬멸당하여 붕괴하였다. 다만 페르시아군의 제한된 화력은 요새화된 간자를 함락시키기에 역부족이었고, 땅굴 작전 역시 실패하였다. 그후 오스만 조정은 쾨프륄뤼 파샤 휘하 5만 기병과 3만 예니체리로 구성된 대규모 원군이 파견하였는데, 나디르 샤는 이들을 예게바르드 전투에서 대파하였다. (1735년 6월 19일) 쾨프륄라 파샤 등 4만여의 전사자를 남긴채 오스만 군대는 철수하였고, 1736년 러시아와 전쟁에 돌입한 오스만 조정은 그해 9월 코스탄티니예 조약으로 서부 조지아를 제외한 캅카스 전역을 할양하였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나디르 샤는 사파비 조를 멸하고 직접 샤한샤에 올라 아프샤르 왕조를 개창하기에 이른다.
2.4. 러시아의 크림 반도 침공
오스트리아에 이어 간자 조약으로 과거 영토를 반환,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은 러시아 제국은 크림 칸국의 우크라이나 습격을 빌미 삼아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 하였다. 1736년 5월 20일 러시아 제국군이 크림 칸국을 침공, 6월 17일 수도 바흐치사라이를 점령하였다. 칸 페테흐 비레이는 해상으로 도주하였고, 이틀 후 오스만 수비대가 주둔했던 아조프 역시 점령되었다. 그후 질병[4]의 창궐로 잠시 전선이 고착화되었다가 1737년 7월 러시아군은 외지[5] 요새를 함락하고 오스만 수비대 2만 중 1만 7천을 학살하였다. 그무렵 러시아의 동맹 오스트리아 역시 전쟁에 가담하며 러시아-튀르크 전쟁은 국제전으로 번졌다.2.4.1. 발칸 전선의 성공
발칸 전선에서 오스만군은 1737년 8월 4일 바냐루카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오스트리아군의 보스니아 공격은 현지 무슬림 여성들까지 가세한 주민들의 완강한 저항에 가로막혔다.[6] 협상의 결렬 후 1739년 러시아군이 스타부차니에서 오스만군을 격파하고 몰다비아 공국으로 진격, 8월 19일 호틴에 이어 수도 이아시를 점령하였다. 그럼에도 오스트리아군의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고 1739년 7월[7] 그로카 전투에서 오스만군은 재차 승리를 거두었다. 그후 1739년 7월 18일, 그랜드 와지르 이바즈 메흐메트 파샤는 10만 대군과 함께 벨그라드를 포위하였다. 수비를 맡은 합스부르크령 세르비아 왕국의 섭정 게오르크 올리비어는 51일간의 공성전 후 협상을 청하였고, 그 결과 9월 18일에 체결된 벨그라드 조약에서 오스만 제국은 벨그라드 뿐만 아니라 도나우 강 이남의 영토를 전부 수복하여 국경을 1717년 이전으로 원상복구할 수 있었다.
2.4.2. 외교적 결실 : 최소한의 손실
한편 오스만 제국의 프로이센, 스웨덴, 폴란드-리투아니아와의 동맹 및 오스트리아의 압박으로 러시아 제국 역시 승전에도 불구하고 협상에 나섰다. 질병으로 인한 병력 손실과 (1736년에만 3만을 잃음) 스웨덴과의 임박한 전쟁 등의 요인이 더해진 결과였다. 1739년 9월 29일 체결된 니시 조약에서 러시아는 몰다비아 공국, 크림 칸국에서 철수하는 대가로 아조프 점유를 완전 승인받았다. 연승의 대가라기에는 작아 보일 수도 있었으나, 아조프는 러시아에 있어 지중해로 이어지는 첫 부동항이었고 그곳에선 곧 향후 오스만 제국의 근심거리가 될 전설적인 흑해 함대 건조가 시작되었다. 어쨋든 당시 오스만 제국에게 있어 아조프 할양은 직면한 상황에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결과였고 외교적 승리였다.2.5. 페르시아 전선
이로써 10년 가까이 전쟁을 치른 오스만 제국은 회복된 영토와 함께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1741년에는 아프샤르 왕조의 사절 하즈 한이 3천의 인원과 코스탄티니예에 당도, 여러 직물과 무기와 함께 10마리의 코끼리를 선물하였다. 이는 당대의 큰 구경거리였고 코끼리를 놀라게 하지 않기 위해 큰 장막이 세워졌다. 다만 이러한 우호 관계는 오래가지 못하였고 1743년 2월 재차 전운이 일자 오스만 조정은 키오스 섬에 인질로 있던 사파비 왕공 샤 사피를 이란의 샤한샤로 옹립할 생각으로 군대를 주어 전선으로 보냈다.그후 나디르 샤는 바그다드 할양을 요구하며 20만 대군과 함께 이라크를 침공하였다. 키르쿠크, 아르빌을 점령한 그는 9월 14일 모술을 포위하였다. 다만 40일간의 공성전에도 파샤 핫즈 후세인 알 잘릴리가 버텨내고 이란에서 반란이 터지자 나디르 샤는 포위를 풀고 회군하였다. 1744년 조지아에서 친오스만, 친아프샤르 왕공끼리 분쟁이 일자 나디르 샤는 카르스를 포위하였다. 이후 다게스탄의 반란을 진압하러 회군한 그는 재차 서진하여 1745년 8월 15일 카르스 전투에서 오스만 군을 격파하였다. 다만 지친 나디르 샤는 협상에 나섰고, 1746년 9월 현상유지의 코스탄티니예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후 오스만 조정은 이란에 사절을 파견했는데, 도착하기 전인 1747년 그는 암살당하였다.
2.5.1. 팔레스타인의 자치화
1730년대 오스만 제국이 이란과 발칸 전선에 집중하는 틈에 갈릴리 지방의 호족 자히르 알 우마르는 팔레스타인 북부 내륙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이를 고깝게 여긴 마흐무트는 잠깐의 평화를 틈타 자히르 세력의 소탕을 명하였고, 1742년 9월 다마스쿠스 총독 술레이만 파샤 알 아즘이 그의 거점인 티베리아스를 포위하였다. 그러나 83일의 공성전은 주력인 핫즈 순례단이 떠나며 와해되었고, 자히르는 거점들을 요새화하였다. 1743년 자히르는 시돈 총독 이브라힘 파샤 알 아즘에게 아크레의 수조권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였다. 그리고 같은해 7월 술레이만 파샤는 트리폴리와 예루살렘 등의 병력을 모아 재차 갈릴리로 진군, 티베리아스와 데이르 한나를 봉쇄하여 자히르를 말려죽이려 하였다.그러나 술레이만 파샤는 이듬달 급사하였고, 지휘 체계의 혼란을 틈타 반격에 나선 자히르는 토벌군을 격파하고 그 진영을 점령하였다. 세력을 키운 자히르는 1746년 7월 아크레를 무력으로 점령하기에 이른다. 그후에도 여전히 갈릴리에 머물던 자히르는 1750년 아크레를 요새화하고 근거지로 삼았다. 이후 몰타 기사단의 해적질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팔레스타인 해안을 장악한 자히르는 1775년 토벌당할 때까지 사실상 독립 군주로 군림하였고, 그의 맘루크 후계자들도 오스만 조의 수복 시도를 물리치며 1832년 메흐메드 알리에게 점령당할 때까지 자치를 이어갔다. 그러한 82년의 세월동안 아크레는 사실상 팔레스타인 국의 수도로써 번영하게 된다.
2.6. 코스탄티니예 대화재
내정에 있어 특별한 일이 없던 마흐무트 1세의 치세에 주목할 만한 사건은 치세 후반부에 일어난 대화재였다. 1750년 1월 아야즈마 문에서 시작된 화재는 베파에 이르기까지 많은 상점과 가옥들을 태우며 19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이에 마흐무트는 그랜드 와지르를 교체하였지만 3월 31일 재차 화재가 발생해 비트파잔, 아바즐라르, 요르간즐라르, 야을르크즐라르, 하팔라르 일대가 전소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에 마흐무트는 국고를 열어 재건에 열을 기울였다.2.7. 건축
누루오스마니예 모스크. 오스만 바로크 양식의 대표작이다. 독특한 무카르나스 |
대튀르크 전쟁 등을 겪은 후 18세기 들어 정체되었던 건축 활동 역시 마흐무트의 치세에 재개되었다. 1740년 자알로을루 목욕탕 (예니 하맘)이 세워졌고 그 주변에 역시 분수들이 건립되었다. 그외에 마흐무트는 하기아 소피아에 4천권의 장서를 지닌 도서관을 건립하였고, 종종 방문하여 쿠란 해설을 들었다. 가장 중요한 건축 사업은 1749년 시작된 대사원 건립이었다. 하기아 소피아, 쉴레마니예 모스크, 파티흐 모스크에 이어 코스탄티니예에서 4번째로 큰 돔을 지닌 대규모 건축물이었다. 다만 마흐무트는 그의 완공을 보지 못한채 1754년 병사하였고, 후계자인 동생 오스만 3세 때에 완공되어 그의 이름이 대신 붙여졌다.
2.8. 사망
누공과 혹독한 겨울 동안 그의 건강은 나날이 악화되었다. 1754년 12월 13일 금요일에 그는 금요일 기도에 참석하러 갔다. 기도에 참석한 후, 그는 궁전으로 돌아갔지만, 같은 날 말에 쓰러져 사망했고, 튀르키예 이스탄불의 에미뇌뉘에 있는 그의 증조할머니 투르한 술탄 묘소에 묻혔다.3. 여담
- 어릴 때부터 곱사등이였다. 이 때문에 콤플렉스가 심하여 초상화를 자세히 보면 옷과 망토로 이를 가리고 다녔다는 것을 알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