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6 15:22:01

석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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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조 초대 황제
고조 명황제 | 高祖 明皇帝
출생 274년
서진 상당군 무양현
(現 산시성 창즈시 우샹현)
사망 333년 8월 17일 (향년 59세)
후조 광평군 양국현
(現 허베이성 싱타이시)
능묘 고평릉(高平陵)
재위기간 조왕(趙王)
319년 ~ 330년 3월
초대 천왕
330년 3월 ~ 330년 10월
초대 황제
330년 10월 ~ 333년 8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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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1a6d2><colcolor=#ece5b6> 성씨 석(石)
배(㔨) → 륵(勒)
부모 부왕 세종
모후 왕씨
배우자 유씨, 정씨
자녀 4남 (양자 1남)
아명 복륵(匐勒)
세룡(世龍)
작호 조왕(趙王)
묘호 고조(高祖)
시호 명황제(明皇帝)
연호 태화(太和, 328년 ~ 330년)
건평(建平, 330년 ~ 33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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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출생과 성장2.2. 전공과 출세2.3. 후조를 세우다2.4. 전조를 멸하다
3. 평가4. 인물됨과 일화
4.1. 석륵의 비평4.2. 역사적 식견
5. 창작물에서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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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5호 16국시대 후조(後趙)의 창건자. 상당군의 갈족(羯族) 출신으로 소부락의 수령 석주갈주(石周曷硃)[1]의 아들이다. 원래 전조(前趙)의 장수로 활약하다가, 독립하여 후조를 건국했다. 는 세룡(世龍). 원래 이름은 배(㔨). 아명은 복륵(匐勒)이었다. 묘호는 고조(高祖)였고, 시호는 명제(明帝)이다.

2. 생애

2.1. 출생과 성장

서진 태안 연간(302~303)에 기근이 들어 부족이 뿔뿔이 흩어졌는데 석륵도 떠돌아 다니다가 서진(西晉) 병주 자사 동영공 사마등에게 사로잡혀 산동 지역에 노예로 팔렸다. 그러나 인근에서 목장을 경영하던 급상과 친해져 그의 도움으로 노예에서 해방되었고 급상의 목장에서 고용되어 일을 돕게 되었다. 팔왕의 난 말기에 성도왕 사마영이 폐출되자, 석륵은 목장주인 급상과 함께 공사번의 난에 가담해 기주 일대를 약탈했는데, 이때 급상이 석륵에게 성과 이름을 지어주었다.

2.2. 전공과 출세

공사번이 백마진에서 황하를 건너다가 연주자사 구희에게 대패하여 그 무리가 흩어졌다. 석륵은 급상을 따라 다시 목장으로 돌아갔고, 얼마 뒤 급상이 대장군을 자칭하며 난을 일으키자 그의 선봉이 되어 여러 지역을 휩쓸고 다녔다. 하지만 얼마 안가 구희와 동해왕 사마월의 반격으로 급상의 무리도 대패하여 흩어졌고, 석륵은 급상과 헤어져 307년에 한(漢)[2]의 태조 광문제 유연에게 항복했다. 유연의 휘하에서 여러 전공을 세운 석륵은 독자적인 병력을 이끄는 군단의 수장으로 출세했으며 유연이 붕어한 후 제3대 열종 소무제 유총의 휘하에서도 활약했다. 석륵은 하북 및 하남 지역을 휩쓸고 다녔으며, 310년에는 한수를 건너 장강 유역까지 진격했다.

311년, 서진의 수도 낙양 공략에 참가하여 도망치던 태위 왕연의 무리 100,000명을 사로잡거나 죽였다. 원래 왕연은 동해왕 사마월이 분사하자 대권을 이어받은 자로 죽은 동해왕의 장례를 지낸다는 핑계로 동해로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낙양에 있었던 사마월의 아들 등 황족, 대신, 부호, 백성, 낙양의 정병(...)[3] 등 10만여 명이 따라붙는 바람에 사마월의 관을 앞에 세우고 동해로 갔다.

이를 알게 된 석륵은 경무장한 기병을 이끌고 사마월의 관을 호송하던 이 무리들을 추격하여 고현 영평성에서 따라잡아 군사들을 죽이고 기병들로 하여금 활을 쏘게 하니 사마월의 아들을 포함해서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영평 전투) 다만 왕연, 양양왕 사마범, 임성왕 사마제, 무릉왕 사마담, 서하왕 사마희, 양회왕 사마희[4], 제왕 사마초, 이부상서 유망, 정위 제갈전, 예주자사 유교, 태부장사 유애 등 사마씨 황족과 관료 48명은 생포했다. 석륵은 장막에 이들을 앉혀놓고 다음과 같이 논죄했다.
석륵: "그대들 나라(서진)가 이렇게 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오?"
왕연: " 황족들의 내분 때문입니다. 다만 저한테는 책임이 없습니다. 저는 원래 젊어서 관직을 가질 생각이 없었고, 세상 일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내친 김에 장군께서 존호를 칭하시면 제가 호응하겠습니다."[5]
석륵: "그대는 젊어서 조정에 들어가 그 이름이 사해를 덮을 정도였고[6] 지금도 중요한 관직을 맡고 있는데 어찌하여 관직을 가질 생각이 없다고 말하는가? 천하를 망친 것이 그대가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석륵은 왕연을 끌어내게 했고, 이에 나머지 사람들은 두려워서 스스로 자신의 죄를 시인했다. 다만 양양왕 사마범은 겉모습과 정신이 엄숙하고 태연했으며 그들을 돌아보고 꾸짖었다. 이에 감탄한 석륵은 이들을 살려서 인재로 쓰려고 했지만 부장이었던 공장의 반대로 밤중에 사람을 시켜 흙담장을 무너뜨려서 48명을 모두 압사시켰다. 사마제는 죽기 전에 동해왕 사마월의 관을 열어 시체를 불태우며 말했다.
사마제: "천하를 망친 사람은 이 사람이다. 그래서 내가 천하 사람들을 위해 보복하니 그 뼈를 불에 태워 천지에 알린다."
다만 사마월의 왕비였던 배씨는 어딘가로 달아나다가 사로잡혀 노비로 팔렸는데 탈출하여 장강을 건넜다. 그녀는 낭야왕 사마예[7]를 만나 건업을 지키도록 권했으며 사마예도 그녀에게 은덕을 베풀었다. 결국 사마예는 자신의 3남 사마충을 동해왕 사마월의 양자로 삼아 동해왕으로 봉하고, 대를 잇도록 했다.

이후 석륵은 유요, 왕미, 호연안 등과 함께 결국 낙양을 함락시키고 회제 사마치를 사로잡았다. 낙양 함락 이후에도 황하 이남에서 약탈전을 지속했으며 석륵을 죽인 후 군대를 탈취하려고 모의하던 한족 장수 왕미를 역관광하여 죽이고, 오히려 그의 군대를 흡수했다.

본래 한족 출신이었던 왕미는 출세하여 천하를 얻기 위해 남흉노의 유씨가 세운 호한 밑에서 싸웠던 것이고, 그 때문에 낙양이 사통팔달이며 역대 왕조들의 유서 깊은 고도인 것을 들어 낙양에 수도를 정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유요는 이를 깡그리 무시하고 낙양에 불을 질러 잿더미로 만들었으며, 왕미는 흉노놈은 어쩔 수 없다며 욕을 했다.

왕미는 석륵을 죽이고, 그 세력을 흡수하여 천하를 도모할 계략을 세웠지만, 바보가 아니었던 석륵이 화친을 가장하여 접근한 후 오히려 왕미를 참했던 것이다.

석륵은 글씨를 읽을 줄 모르는 문맹이었지만 식견은 뛰어났고 휘하에 인재를 모으는 것을 좋아했다.

309년에 하북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뛰어난 선비들을 모아 군자영(君子營)이라는 부대를 만들기도 했다. 이때 등용한 장빈(張賓)은 석륵의 1등 참모로 활약했다.

312년, 석륵은 수춘을 공격하려 했으나 장마로 인해 위기에 빠졌다. 이때 장빈은 석륵에게 약탈전을 그만두고 기주 지역에 거점을 만들 것을 건의했다. 석륵은 이를 따라 양국을 수도로 하여 하북 일대에 반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316년, 석륵은 자신의 세력권 안으로 쳐들어온 병주의 유곤을 격파하고, 병주 북부 일대를 차지했다.

2.3. 후조를 세우다

318년에 호한의 황제 유총이 붕어한 후, 외척 근준의 반란이 일어나 효은제 유찬과 유씨 황족이 대거 학살되고, 병주 중남부 일대를 반란군이 점거했다. 석륵은 장안에서 황제에 즉위한 태조 광문제 유연의 조카 유요의 명령을 받고 조공(趙公)에 임명되어 근준의 반란군을 진압했다. 석륵의 군대에 패배한 반란군이 유요에게 항복하자 석륵은 분노하여 수도 평양을 공격하여 불태웠다. 이후 유요와 화친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으나 유요는 사신을 죽여버렸으며 석륵은 유요와 결별하여 독자적인 세력이 되었다.
319년 11월, 석륵은 조나라를 건국한 후 스스로 조왕(趙王)에 즉위했다. 장안의 유요도 국호를 조(趙)로 바꾸었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유요의 조나라를 전조, 석륵의 조나라를 후조라고 하여 구분한다. 건국 이후 석륵은 주변 지역을 평정하는 데 주력하여 청주와 연주 등을 점령했다.

322년, 재상 우후(右侯) 장빈이 병사했다.
324년부터 전조와 후조는 본격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했다.

325년, 병주가 전조에게 항복했으며 동진(東晉)의 사주도 유요에게 투항하여 낙양을 지키는 후조의 석생(石生)이 포위되었다. 석륵은 6촌 동생인 석호를 구원군으로 보내어 전조군을 격파하고 오히려 역포위했다. 전조의 유요는 장안에서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여 석호를 격파했으나, 군중에서 이유없이 일어난 혼란으로 패주했다. 이로 인해 병주와 사주 일대를 후조가 모두 장악했으며, 화북의 동진 세력도 크게 위축되어 후조는 회수 이북을 모두 지배하게 되었다.

2.4. 전조를 멸하다

328년, 석호는 병주 지역에 남아 있었던 전조의 거점을 공격했다. 유요는 10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반격에 나섰으며 석호는 크게 패배하여 낙양 일대를 유요가 포위했다. 낙양 포위전은 3개월 동안 계속되었으며 석륵은 구원군을 이끌고 낙양의 유요를 공격했다. 유요는 반격에 대한 대비를 게을리하여 석륵의 구원군이 근접하는 것을 허용했으며 이로 인해 포위를 풀고 낙양 북서쪽 금용성에 포진했다. 12월 5일, 석륵은 유요의 군대를 공격했으며 유요가 술에 취한 채로 지휘했기 때문에 석륵은 크게 승리하고 달아나던 유요는 말에서 떨어져 포로로 잡혔다.(금용 전투) 석륵은 유요를 잡아 수도 양국으로 압송한 다음 유요의 아들 유희에게 항복을 권하게 했지만 거절당하자 유요를 처형했으며 329년에는 유희가 반격을 개시했지만 승리했고, 반격하여 상규로 도망쳐 있었던 유희 등 전조의 잔당을 토벌하고 전조를 완전히 멸망시켰다.

330년 2월에 석륵은 천왕(天王)에 즉위했으며, 뒤이어 9월에는 황제에 즉위했다.

333년, 석륵이 병으로 몸져 눕자, 당시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석호가 황궁을 장악하고 전횡을 부렸다. 석륵은 병석에 누운 상태에서 석호를 수도에서 내보내려는 조치를 취하려 했으나 이미 황궁을 석호가 강력하게 장악한 상태에서 석륵의 명령은 먹히지 않았고, 석륵은 자신의 이런 명령이 먹히지 않는 상황이면 그렇게 한 자를 제거해야 한다는 마지막 총기를 보여주었으나 이미 그의 시대는 끝나 있었고, 해당 조치는 너무 늦어 있었다.

7월에 석륵이 붕어하자 석호는 석륵의 시신을 산기슭에 몰래 파묻어 아무도 무덤을 찾을 수 없도록 했다. 이전에 석륵은 모후인 왕씨를 산계곡에 몰래 묻은 다음 유목민의 장례인 ' 비장'으로 치렀으며, 석호는 평야에 가짜 고평릉을 만들어서 석륵의 능 도굴을 막으려는 노력을 했다.

석륵의 뒤는 차남이자 태자 석홍이 이었으나 곧 석호에게 찬탈당하고 살해되었다. 석륵이 살아 있을 때 일부 신하들은 석호를 처리하도록 했지만 석륵은 망설이면서 미루다가 끝내 처리하지 못했다. 영명한 군주였던 석륵이 말년에 한 실수 때문에 그 아들 석홍은 폐위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았으며, 그 뒤 석륵의 자손들은 제 명에 살지 못하거나 멀쩡한 사람이 없었다.

3. 평가

노예로부터 몸을 일으켜 나라의 기틀을 잘 세워놓고 갔지만 후계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뒤를 이은 아들이 살해되고 폭군 석호가 다 망쳐놓아 진순신 등에게 꽤 비판받았다. 석륵의 정책을 유지했다면 5호 16국시대가 일찍 종결됐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석륵의 문치권장정책 자체는 일리가 있었으나 그것만으로는 호한융합이 어렵다는 걸 후대의 북위가 실증했으므로, 정말 그렇게 일찍 끝났을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석호에게 군사적인 재능은 있었어도 피지배계층을 기분 내키는 대로 수탈하고, 국가를 장기적으로 이끌어나가는 비전은 없어 바로 그 다음 대에서 후조가 끝장나게 한 걸 보면, 적어도 후조가 그렇게까지 허망하게 멸망하진 않았을 거란 가정은 개연성이 높은 게 사실이다. 마지막 저지른 실수가 아깝긴 하지만 본인도 죽기 전에 그 실수를 깨닫고 나름 고치려 한 걸 보면 5호16국시대 초반기의 영웅이자 명군으로 평가하기에 모자람이 없다고 할 수 있겠다.

4. 인물됨과 일화

4.1. 석륵의 비평

고구려의 사신 우문옥고를 대접하는 자리에서 신하인 서광과의 대화때 서광이 석륵에게
"폐하께서는 한고제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의 삼왕을 능가하니 가히 그 덕이 헌원에 버금가시옵니다!"
라고 칭송하자...
"짐이 만일 한고제와 같은 큰 인물을 만난다면 즉시 고개를 숙이고 절한 뒤 북면하여 신하의 자리에 서서 한신이나 팽월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오. 만약 광무제와 같은 인물과 한시대에서 만난다면 중원에서 함께 말을 달리며 천하를 한번 겨루어 볼 것이오. 하지만 그 중원의 사슴이 누구의 손에 들어갈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오. 대장부가 일을 꾸미는 데 있어서는 마음이 호탕해서 일월과 같아야 하오. 짐은 조맹덕 부자 사마중달 처럼 고아나 과부[8]를 속이며[9] 간교한 술책으로 천하를 빼앗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서진 치하에서 노예로 고달픈 인생을 보냈고, 서진이 병폐로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며, 스스로 서진의 판도를 무너뜨린 영웅 대열에 속한 자로서 내린 날카로운 당대의 평가이다. 석륵은 인간성과 도량을 종합해서 패자로서의 능력과 자세까지 평가한 것이며, 때문에 최소한 석륵 자신이 조조나 사마의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음엔 부정의 여지가 없다. 석륵은 이 일화에서 분명 한고조를 선두에, 스스로와 동급이라 인정하는 광무제는 다음에, 조조나 사마의는 좋지 못한 부분만 부각시켜 그 다음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것을 보건대 석륵이 그 능력까지 포함해 평가했음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10]

여기에 난데없이 석륵의 발언을 민족주의적 사고를 투입해서 석륵이 마치 탄압받은 갈족 민족의 관점에서 조조나 사마의 등을 낮추어 평가했다는 해석이 있는데, 그렇게 따지면 석륵은 위대한 한족 영웅들인 한고조 유방과 광무제 유수도 폄하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여기서 석륵이 그렇게 하고 있는가? 또한 이걸 갈등 해소와 정치적 책략으로는 보기도 어려운데, 이런 인물평을 하게 되면 당연히 영웅으로서의 석륵은 과연 조조나 사마의 등보다 우월한가라는 평가의 문제가 따라오기 때문이다. 그런 고민은 다름아닌 석륵이 먼저 제시했다. 석륵이 스스로에게 실질에서 비롯되는 큰 자신감이 있었다고 보면 간단하다.

4.2. 역사적 식견

문맹이었지만 학자들이 역사책을 읽어주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특히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는 이야기는 거의 매일 들었다고.

이에 관한 일화로는 역이기가 6국을 부활시키자고 유방에게 간언하는 대목을 들을 때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 석륵이 이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라며
"이렇게 하면 고조는 반드시 진다. 그런데 어떻게 한 고조가 이겼을까?"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뒤, 장량이 간언해서 철회하는 장면을 듣고
"한고제에게는 장량이 있어서 막을 수 있었구나."
라고 말했다고. 배운 것은 없지만 식견은 상당했던 모습을 읽을 수 있는 장면이다. 석륵은 당대의 혼란을 정리할 수 있는 방법으로 명분과 덕을 내세운 한고조 유방의 통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진심으로 존경했다.[11]

5. 창작물에서

전설 판타지(…)이자 명목상 《 삼국지연의》의 후속작인 《 후삼국지》에서 후반부 주인공으로 나온다.

조운의 후손이라는 설정으로 '조륵'이었다가 나중에 자기 성을 석씨로 고쳐서 '석륵'이 된다. 왜 석씨가 되는고 하니 조운의 후손들이 서진군을 피해 도망가다가 산적을 만나 싸우는 도중에 산적이 노자가 들어있는 보따리를 들고 튀었는데 아기인 조륵이 거기 있었던 것... 나중에 조씨 집안의 집사인 급상이 도적들을 뒤쫓아가서 잡기는 했는데[12] 이미 일행들을 놓쳐버리고 만 것. 미아 조륵이 막장 캐삭빵 사치 대결로 유명한 당대의 거부 석숭의 형뻘[13] 되는 사람의 양자가 되어 석륵이 되었다는 석륵을 능욕하는 설정이다. 이 석숭이 작중에서든, 실제로든 8왕의 난의 주역 중 하나인 조왕 사마륜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에 양아버지 동생의 원수를 갚고자 서진과 대립하고... 아무튼 그렇게 해서 소열제 유비의 후손이며 촉한 멸망시 자결한 북지왕 유심의 아들로 설정된 유요[14]와 대결을 한다는 스토리이다. 물론 결과는 역사상대로 석륵이 유요를 제끼고 승리한다.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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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명황후 · 효정황후
14권 「신원·평문제제자손전(神元平文諸帝子孫傳)」
탁발흘라 , 탁발제, · 탁발영문 · 탁발육 · 탁발인 · 탁발수낙 · 탁발퇴 · 탁발소연 · 탁발욱 · 탁발목진 · 탁발육수 · 탁발비간 · 탁발여 · 탁발고
탁발돈 · 탁발석 · 탁발위 · 탁발대두 · 탁발제 · 탁발처진 · 탁발니
15권 「소성자손전(昭成子孫傳)」 16권 「도무7왕전(道武七王傳)」
탁발식군 · 탁발한 · 탁발준(遵) · 탁발건(虔) · 탁발순 · 탁발의열
탁발굴돌
탁발소 · 탁발희 · 탁발요 · 탁발수 · 탁발처문 · 탁발연 · 탁발려(黎)
17권 「명원6왕전(明元六王傳)」 18권 「태무5왕전(太武五王傳)」
탁발비 · 탁발미 · 탁발범 · 탁발건(健) · 탁발숭 · 탁발준(俊) 탁발복라 · 탁발한 · 탁발담 · 탁발건(建) · 탁발여(余)
19권 「경목12왕전(敬穆十二王傳)」
탁발신성 · 탁발자추 · 탁발소신성 · 탁발천사 · 탁발만수 · 탁발낙후 · 탁발운 · 탁발정 · 탁발장수 · 탁발태락 · 탁발호아 · 탁발휴
20권 「문성5왕전(文成五王傳)」 21권 「헌문6왕전(獻文六王傳)」
탁발장락 · 탁발략(略) · 탁발간(簡) · 탁발약(若) · 탁발맹 원희 · 원간(幹) · 원우 · 원옹 · 원상 · 원협
22권 「효문5왕전(孝文五王傳)」 23권 「위조등전(衛操等傳)」 24권 「연봉등전(燕鳳等傳)」
원순 · 원유 · 원역 · 원회 · 원열 위조 · 막함 · 유고인 연봉 · 허겸 · 장곤 · 최현백 · 등연
25권 「장손숭등전(長孫嵩等傳)」 26권 「장손비등전(長孫肥等傳)」 27권 「목숭전(穆崇傳)」
장손숭 · 장손도생 장손비 · 울고진 목숭
28권 「화발등전(和跋等傳)」 29권 「해근등전(奚斤等傳)」
화발 · 해목 · 막제 · 유업연 · 하적간 · 이율 · 유결 · 고필 · 장려 해근 · 숙손건
30권 「왕건등전(王建等傳)」
왕건 · 안동 · 누복련 · 구퇴 · 아청 · 유니 · 해권 · 차이락 · 숙석 · 내대천 · 주기 · 두대전 · 주관 · 염대비 · 울발 · 육진 · 여락발
31권 「우율제전(于栗磾傳)」 32권 「고호등전(高湖等傳)」
우율제 고호 · 최영 · 봉의
33권 「송은등전(宋隱等傳)」
송은 · 왕헌 · 굴준 · 장포 · 곡혼 · 공손표 · 장제 · 이선 · 가이 · 설제
34권 「왕낙아등전(王洛兒等傳)」 35권 「최호전(崔浩傳)」 36권 「이순전(李順傳)」
왕낙아 · 거로두 · 노노원 · 진건 · 만안국 최호 이순
37권 「사마휴지등전(司馬休之等傳)」 38권 「조옹등전(刁雍等傳)」 39권 「이보전(李寶傳)」
사마휴지 · 사마초지 · 사마경지 · 사마숙번
사마천조
조옹(刁雍) · 왕혜룡 · 한연지 · 원식 이보
40권 「육사전(陸俟傳)」 41권 「원하전(源賀傳)」 42권 「설변등전(薛辯等傳)」
육사 원하 설변 · 구찬 · 역범 · 한수 · 요훤
43권 「엄릉등전(嚴棱等傳)」 44권 「나결등전(羅結等傳)」
엄릉 · 모수지 · 당화 · 유휴빈 · 방법수 나결 · 이발 · 을괴 · 화기노 · 순퇴 · 설야저 · 우문복 · 비우 · 맹위
45권 「위랑등전(韋閬等傳)」 46권 「두근등전(竇瑾等傳)」 47권 「노현전(盧玄傳)」
위랑 · 두전 · 배준 · 신소선 · 유숭 두근 · 허언 · 이흔 노현
48권 「고윤전(高允傳)」 49권 「이령등전(李靈等傳)」 50권 「울원등전(尉元等傳)」
고윤 이령 · 최감 울원 · 모용백요
51권 「한무등전(韓茂等傳)」
한무 · 피표자 · 봉칙문 · 여나한 · 공백공
52권 「조일등전(趙逸等傳)」
조일 · 호방회 · 호수 · 송요 · 장담 · 종흠 · 단승근 · 감인 · 유병 · 조유 · 색창 · 음중달
53권 「이효백등전(李孝伯等傳)」 54권 「유아등전(游雅等傳)」 55권 「유명근등전(游明根等傳)」
이효백 · 이형 유아 · 고려 유명근 · 유방
56권 「정희등전(鄭羲等傳)」 57권 「고우등전(高祐等傳)」 58권 「양파전(楊播傳)」
정희 · 최변 고우 · 최정 양파
59권 「유창등전(劉昶等傳)」 60권 「한기린등전(韓麒麟等傳)」 61권 「설안도등전(薛安都等傳)」
유창 · 소보인 · 소정표 한기린 · 정준 설안도 · 필중경 · 심문수 · 장당 · 전익종 · 맹표
62권 「이표등전(李彪等傳)」 63권 「왕숙등전(王肅等傳)」 64권 「곽조등전(郭祚等傳)」
이표 · 고도열 왕숙 · 송변 곽조 · 장이
65권 「형만등전(邢巒等傳)」 66권 「이숭등전(李崇等傳)」 67권 「최광전(崔光傳)」
형만 · 이평 이숭 · 최량 최광
68권 「견침등전(甄琛等傳)」 69권 「최휴등전(崔休等傳)」 70권 「유조등전(劉藻等傳)」
견침 · 고총 최휴 · 배정준 · 원번 유조 · 부영 · 부수안 · 이신
71권 「배숙업등전(裴叔業等傳)」 72권 「양니등전(陽尼等傳)」
배숙업 · 하후도천 · 이원호 · 석법우 · 왕세필 · 강열지 · 순우탄 · 이묘 양니 · 가사백 · 이숙호 · 노시경 · 방량 · 조세표 · 반영기 · 주원욱
73권 「해강생등전(奚康生等傳)」 74권 「이주영전(爾朱榮傳)」 75권 「이주조등전(爾朱兆等傳)」
해강생 · 양대안 · 최연백 이주영 이주조 · 이주언백 · 이주도율 · 이주천광
76권 「노동등전(盧同等傳)」 77권 「송번등전(宋翻等傳)」 78권 「손소등전(孫紹等傳)」
노동 · 장열 송번 · 신웅 · 양심 · 양기 · 고숭 손소(孫紹) · 장보혜
79권 「성엄등전(成淹等傳)」 80권 「주서등전(朱瑞等傳)」
성엄 · 범소 · 유도부 · 유도빈 · 동소 · 풍원흥 · 녹여 · 장습 주서 · 질열연경 · 곡사춘 · 가현도 · 번자곡 · 하발승 · 후막진열 · 후연
81권 「기준등전(綦儁等傳)」 82권 「이염지등전(李琰之等傳)」
기준 · 산위 · 유인지 · 우문충지 이염지 · 조영 · 상경
83권 「외척전(外戚傳)」
하눌 · 유나신 · 요황미 · 두초 · 하미 · 여비 · 고조 · 우경 · 호국진 · 이연실
84권 「유림전(儒林傳)」
양월 · 노추 · 장위 · 양조 · 평항 · 진기 · 상상 · 유헌지 · 장오귀 · 유란 · 손혜울 · 서준명 · 동징 · 조충 · 노경유 · 이동궤 · 이흥업
85권 「문원전(文苑傳)」
원요 · 배경헌 · 노관 · 봉숙 · 형장 · 배백무 · 형흔 · 온자승
86권 「효감전(孝感傳)」
조염 · 장손려 · 걸복보 · 손익덕 · 동락생 · 양인 · 염원명 · 오실달 · 왕속생 · 이현달 · 장승 · 창발 · 왕숭 · 곽문공
87권 「절의전(節義傳)」
우십문 · 단진 · 석문덕 · 급고 · 왕현위 · 누제 · 유갈후 · 주장생 · 우제 · 마룡팔 · 문문애 · 조청 · 유후인 · 석조흥 · 소홍철 · 왕영세 · 호소호 · 손도등 · 이궤 · 장안조 · 왕려
88권 「양리전(良吏傳)」
장순 · 녹생 · 장응 · 송세경 · 노옹 · 염경윤 · 명량 · 두찬 · 배타 · 두원 · 양돈 · 소숙
89권 「혹리전(酷吏傳)」
우락후 · 호이 · 이홍지 · 고준 · 장사제 · 양지 · 최섬 · 역도원 · 곡해
90권 「일사전(逸士傳)」
휴과 · 풍량 · 이밀 · 정수
91권 「예술전(藝術傳)」
조숭 · 장연 · 은소 · 왕조 · 경현 · 유영조 · 강식 · 주담 · 이숙 · 서건 · 왕현 · 최욱 · 장소유
92권 「열녀전(列女傳)」
임성국태비
93권 「은행전(恩倖傳)」
왕예 · 왕증흥 · 구맹 · 조수 · 여호 · 조옹(趙邕) · 후강 · 정엄 · 서흘
94권 「엄관전(閹官傳)」
종애 · 구락제 · 단패 · 왕거 · 조묵 · 손소(孫小) · 장종지 · 극붕 · 장우 · 포억 · 왕우 · 부승조 · 왕질 · 이견 · 진송 · 백정 · 유등 · 가찬 · 양범
성궤 · 왕온 · 맹란 · 평계 · 봉진 · 유사일
95권 「유총등전(劉聰等傳)」
유총 · 석륵 · 유하 · 모용외 · 부건 · 요장 · 여광
96권 「사마예등전(司馬叡等傳)」 97권 「환현등전(桓玄等傳)」 98권 「소도성등전(蕭道成等傳)」
사마예 · 이웅 환현 · 풍발 · 유유 소도성 · 소연
99권 「장실등전(張實等傳)」
장실 · 걸복국인 · 독발오고 · 이고 · 저거몽손
100권 「고구려등전(高句麗等傳)」
고구려 · 백제 · 물길 · 실위 · 두막루 · 지두우 · 고막해 · 거란 · 오락후
101권 「저등전(氐等傳)」
저족 · 토욕혼 · 탕창강 · 고창 · 등지 · 만족 · 요족
102권 「서역전(西域傳)」
선선 · 차말 · 우전 · 백정 · 차사국 · 언기 · 쿠처 · 소륵 · 속특 · 파사 · 남천축 · 읍달
103권 「연연등전(蠕蠕等傳)」
연연 · 우문막괴 · 단질육권 · 고차
104권 「자서전(自序傳)」
위수
※ 105권 ~ 114권은 志에 해당. 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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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래는 성씨가 없었지만 아들이 석씨가 된 후, 석씨로 정해졌다. 그는 석륵이 황제가 된 후 세종 원황제로 추존되었다. [2] 훗날의 전조(前趙). [3] 실제로 이 병력이 낙양에서 빠지는 바람에 훗날 낙양이 함락되는 원인이 되었다. [4] 서하왕 사마희와는 동명이인이다. [5] 즉, 석륵에게 황제가 될 것을 권하고, 자신이 밀어줄 테니 살려달라고 하는 것이다. [6] 왕연은 당시 죽림칠현의 뒤를 이은 청담 세계의 영수였다. [7] 동진을 건국한 중종 원황제로 사마의의 6남 사마주의 장손이었다. [8] 고아는 헌제 과부는 후한의 태후 [9] 원문은 欺자를 썼는데, 이는 '속이다'는 뜻도 있지만 '업신여기다'는 뜻도 있으며, 후자로 해석해도 뜻이 통한다. [10] 역량이나 업적에 대해선 이견이 있을 수밖에 없고, 석륵 자신도 이 자리에선 그렇게 얘기했으나 내심 그러한 반론을 신경써서 훗날, 천하를 끝내 모두 제패하진 못한 스스로가 조조에게 비교당할 수 있는 사실에 대해 걱정했던 게 이를 입증한다. [11] 당장 여러 부족이나 군벌 집단들의 연합체였던 전조가 어떤 식으로 개판이 되었는지 뻔히 본 석륵의 입장에서는, 저게 먼 과거의 일이거나 생판 남의 일이 아니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 산하에 유요니 왕미니 조억이니 석륵이니 하는 군벌들이 반독립적인 세력들이 되어버리면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 뻔히 본 산 증인이자 당사자였으니... 전조 뿐 아니라 서진에서 팔왕의 난 돌아가는 꼴도 딱 저러다 멸망한 케이스였다. [12] 설정상 급상은 엄청나게 발이 빠르고 도끼를 잘 쓰는 캐릭터이다. 이 소설에서 급상은 말을 안 타고 싸우는데도 기병들만큼 빠르다. [13] 작중의 이름은 '석현'으로 나온다. 급상이 석현의 목장에 취직이 되어서 일을 하는데, 애가 없던 늙은이인 석현이 어느 날 대단한 꿈을 꾸고 나서 꿈에 나온 장소에 갔더니 급상 옆에서 놀고 있던 석륵이 있었고, 그 석륵을 양자로 삼았다는 식... 석륵과 급상이 목장에서 만난 사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판타지치고는 쓸데없는 곳에서 정사에 나오는 사실이 갑툭튀하는 셈이다... [14] 물론 전조 황제 유요는 유비와 관련이 없으며 유선의 아들 유요는 유심의 아들이 아니다. 애초에 유심의 처자는 유심이 자결하기 전에 모두 유심이 죽였다.